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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학보 [The Korean Journal of Japanology]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국일본학회 [Korea Association Of Japanology]
  • pISSN
    1225-1453
  • 간기
    계간
  • 수록기간
    1973 ~ 2026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일본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913 DDC 952
제40권 (20건)
No
1

世界が観る啄木ㆍ賢治

遊座昭吾

한국일본학회 일본학보 제40권 1998.05 p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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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원

2

萬葉集 第1, 2番歌의 枕詞와 歌詞의 新釋

金公七

한국일본학회 일본학보 제40권 1998.05 pp.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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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0원

日本の万葉集は周知の通り約4,500余首にのばる歌詞を收錄した尨大な歌集である. その中で卷1はその首卷を成しているだけ万葉集を代表する卷といえる. その中での第1, 第2番歌になるとなお一層の事である. 王の御製歌として傳われている1, 2番歌の中で2番歌はそれなりに國の頒歌的性格を帶びいると言をるが, 1番歌は從來の解釋通りだと田舍娘子に對する求婚歌としか止まらないので首歌としての品格が足りないような感じがする. そこで, 從來の解釋とは全く變わった角度から新しくその本義に接近してみる事にした. 先に1番歌の中の枕詞の解讀を試み筆者の韓國語的接近方式に依る解讀が成立するのかを確かめた上にこの方式を歌詞全體に適用してみたところ前半部まではうまく解け, しかもその內容が韓國の三國遺事駕洛國記に載せてある駕洛國建國說話の中での四句體の迎神歌の內容とほぼ同じである事がわかった. 後半部は日本語そのままの歌詞であったが, その中味は降神の應答歌なので, 前半部とよく相侯って迎神·現神の的開闢をよく表わしている. 1番歌に引き續いて2番歌もその中の二つの枕詞の解讀を通じて古代の日本の國に對する頌歌である事が確認できたわけである. 韓國の龜何歌には1番歌の後半部のような應答部分が無いので, 1番歌は龜何歌自體から由來したと見るよりも原初的の傳承歌がら由來したと見るのが正しいかも知れない. この後半部の後に國の頌歌が引き續いているのを見ると, 傳承歌を收めた或る歌集, 例えば三代目のようなのを參照したかも知れない.

3

江戶期日本における韓語

閔丙燦

한국일본학회 일본학보 제40권 1998.05 pp.2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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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00원

1607년부터 시작된 조선통신사의 왕래는 1811년까지 이어지면서 한일 양국간의 교류의 역사상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행사로서 자리매김 되어있다. 본 연구는 그에 파생되었다 생각되는 <한어자료>를 한국어 기재의 이유에 따라 <학습서><비학습서><자음연구서>의 세 가지로 분류하여, 그에 속하는 자료들을 들어 한국어 기재의 수법과 한국어 기재자의 한국어 이해에 대하여 고찰을 시도한 것이다. 먼서 한국어 기재의 수법에 대하여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어의 기재는 대부분 한글을 假名로 표기하여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각 부류마다 한국어를 假名로 표기한 이유는 서로 다르다. <학습서>의 경우에는 그것을 통해 한국어를 학습하기 위한 것이고, 그에 비해 <비학습서>의 경우는 한국어를 假名로 표기해서 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목적을 달성하는 결과가 된다. 한편 <자음연구서>의 경우에는 그러한 假名에 의한 표기를 출발점으로 해서 한국어, 그 중에서도 조선 한자음을 자음연구에 이용하고 있다. 다음으로 한국어 기재사의 한국어 이해에 대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雨森芳洲는 한국어와 일본어를 비교·대조하는 방법을 통해 한국어를 이해하고 있다. 다만 그가 목적한 바가 한국어의 학습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을 통해 얻은 한국어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언어연구를 수행한 일은 없다. 이와 비교해 보면 <비학습서>의 저자들은 다만 외국어의 하나로서 한국어를 소개하는 정도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이들에게서 한국어를 이해하려 했다는 흔적을 찾기 어렵다. 이와같은 흐름 속에서 江戶후기 자음연구에 있어서의 한국어의 이용을 조명해 보면, 그것을 芳洲의 연장선 상에서 취급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일본에 있어서의 한국어 이해가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

「しずかに」と「ゆるりと」の意味用法について

朴才煥

한국일본학회 일본학보 제40권 1998.05 pp.4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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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0원

고대 일본어에서 주로 움직임에 관련된 의미로서 사용되던「しずかに」가 현대어에 있어서는 "소리"에 관련된 의미로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고대어에 있어서도 소리에 관련된 의미로서의 사용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고 움직임이 없거나 느린 경우 소리를 동반하지 않으므로 파생적인 의미로서의 사용이 증가하였으며 18C 중반 무렵에 이르러서는「천천히」등 느린 움직임을 나타내는 의미로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捷解新語』(원간본, 개수본, 중간본)의 대조예에서 알 수 있듯이 18C중반 이후「천천히」의 의미로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ゆるりと」「ゆっくり」등의 다른 말들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5

松ケ岡文庫藏『無門關抄』의 異體字에 대하여

李健相

한국일본학회 일본학보 제40권 1998.05 pp.5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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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0원

本考は松ケ岡文庫藏『無門關抄』(以下, 本書)に見える漢字の異體字についての小考である. 日本語學界の今までの抄物の硏究吏をみると一他分野に比べ歷史は淺いものの一語法·語彙·音韻などがその主流として行なわれている. それは今までの學界の硏究の主流とほぼ同じ傾向でもある. 本考では, いわゆる文字, なかでも正字(ここでは「康熙字典體」を基準にする)に對する異體字というものの實態調査という立場から硏究を進めることにする. 表意文字の漢字はその使い手によって文字の自由な變形が可能である. つまり表現意圖·效率性·便利性などによって變った漢字體が使われることがありうるのである. 實際に抄物はその內容によって中國の原文と關聯する原漢文, それの說明文的な抄文, それから抄文の一部ともいえる頭註と割註に分けることができる. したがった, 各各はその性格により變った字體が使われる可能性がある. 結果的に本書には26,861字の漢字が延べ字數として現われた. つまり原漢文に3,932字(14.6%), 抄文に22,639字(84.3%), 頭註と割註に290字(1.1%)それぞれ現われた. 抄文に漢字數が多いのは原漢文に對する說明文であるからであろう. なお, 26,861字の延べ字數のうち52.8%の14,180字がその異體字として現われた. また, そのl4,180字は原漢文に1,104字(7.8%), 抄文に12,905字(91.0%), それから頭註と割註に171字(1.2%)それぞれ現われた. つまり, 異體字のほどんどが抄文に集中しているのである. これは原漢文を傳える筆寫者の書寫意識と關係があるだろう. それから各部分の正字に對する異體字の比率は原漢文に28.1%(1,104/3,932), 抄文に57.0%(12,905/22,639), 頭註と割註に59.0%(171/290)である. つまり比率でみると頭註と割註に異體字が多く使われたのである. これはに頭註と割註がほかと比べて相對的に文字が小さいことと關係があるだろう. なお, ほかにも中國の原典との關係, 板本の影響, それから當時の宗敎關係者の筆寫意識を含んだ本書の筆寫者の書寫意識なども考えなければならないだろう. しかし, 本考では異體字が多く現われはじめた傾の文獻, しかも異體字の寶庫と言われる抄物, なかでももっともよく讀まれた『無門關抄』の字體を調査したというところにその意味があると思う. ある程度の決まった正字とその意識が當時あったかもしれないが, 實際に異體字が多く使われたことから, 當時の人の字體に對する實際の意識をうかがい知ることができると思う. また, 今と違って一つの漢字に多くの字體が使われたことから當時の字體に對する意識もうかがい知ることができると思う.

6

狀態の表現における「スル」と「シテイルの」意味について

牟世鍾

한국일본학회 일본학보 제40권 1998.05 pp.6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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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원

상태표현으로밖에 사용되지 않는 동사가 현재를 나타내는 형식은,くある·いる·できる)와 같이「スル」만으로 충분해 보이는데, 실제에 있어서는「シテイル」만이 사용되는 경우도,「スル」와「シテイル」가 사용되는 경우도,「スル」「シタ」「シテイル」가 모두 사용되는 경우 등, 그 표현방법이 일정하지 않다. 본 논문에서는 현재상태에「シテイル」만이 사용되는 표현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현재의 표현에「シテイル」만이 사용되는 이유를 밝히기 위하여, 우선 상태를 나타내는 형식에 대해서, 나아가 상태를 나타내는 형식「スル」와「シテイル」의 관계를 분석하였다. 「シテイル」가 나타내는 상태는 동작이나 변화의 결과로부터 파악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러한 상태는 하나의 의미로서 개념화되어, 그 상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관계없이 사용되게 되는 것이다. 단순상태를 나타내는「シテイル」를 별도로 취급할 필요가 없는 이유와,「シテイル」만이 사용되게 되는 표현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런 관점에서 분석해 볼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특히, 형식동사의 경우는「スル」와「ッテイル」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어 함께 고찰할 필요가 있으나, $lt;優れる·ありふれる·似る$gt; $lt;知る·住む$gt; $lt;形式動詞:色をする·形をする$gt;등이$lt;優れている·ありふれている·似ている$gt; $lt;知っいる·住んでいる$gt; $lt;色をしている·形をしている$gt;와 같이, 현재의 상태표현에「シテイル」의 형태로만 사용되는 것은, 이런 동사들의 표현에 있어서 동작이나 변화를 나타내는 상황이 설정되지 않고, 결과로서 나타나는 상황만이 표현으로서 사용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7

類似を表す表現 - 文法的な現象を中心に -

柳椿姬

한국일본학회 일본학보 제40권 1998.05 pp.7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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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0원

주체가 어떤 대상과 또하나의 다른 대상이 어떠한 점에서 유사하다고 판단, 양자를 유사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표현을「類似를 나타내는 表現(類似表現)」이라 하면, 일본어의 고전어에는 동사「似る」「通ふ」「似通ふ」「おぼゆ」등이 있다. 이들 동사의 문법적인 현상을 통시적인 측면에서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은 점이 지적된다. 1.「類似를 나타내는 表現」은, 동일한 アスぺクト(aspect)를 실현하는 그룹이며,「類似」라고 하는 동일한 어휘적의미를 나타내는 그룹이다. 2. 조동사와의 관계에서는「類似를 나타내는 表現」은 アスぺクト(aspect)를 나타내는 조동사「タリ」「リ」가 承接하던가 그것에 준하는 표현이라는 특징이 있다. 특히 『萬葉集』에서는「似る」가 형용사적인 용법으로 사용되어「タリ」「リ」가 承接하지 않는다. 이것은「似る」의 용법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3. 격조사와의 관계에 있어서「類似를 나타내는 表現」은 격조사「ニ」를 취하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おぼゆ」의 경우에는 격조사「ト」를 취하는 경우도 있는데, 격조사「ニ」를 취할 때는 대상 그 자체의 유사를 나타내고 있지만,「ト」를 취할때는 대상의 양태나 상황의 유사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격조사의 용법은 江戶時代의「似る」가 격조사「ト」를 취하는 경우에도 나타나기 때문에 소론에서는「おぼゆ」의 용법이「似る」로 흡수된 것으로 해석한다. 4. 수식성분과의 관계에서는「類似를 나타내는 表現」은 정도를 나타내는 성분에 의해 수식되는 특징이 있다. 정도를 나타내는 성분은 단지 대상의 유사의 강약을 나타내는 경우와 주체의 강한주관을 나타낸 경우가 있다. 이것은 동사의 기본적 의미에 의한 것으로 類似를 나타내는 表現안에서 각 동사의 위치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 5. 類似를 나타내는 表現안에서의「似る」「通ふ」「似通ふ」「おぼゆ」의 위치는「似る」「似通ふ」가 구체적인 대상의 유사를 나타내는 표현에,「通ふ」「おぼゆ」가 경우에 따라 막연한 유사를 나타내는 표현에 이용되고 있다. 또,「似る」「似通ふ」는 유사대상의 유사의 정도를 나타내는 표현에,「通ふ」「おぼゆ」는 주체의 감정의 정도를 나타내는 표현에도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類似表現中「似る」「似通ふ」는 같은 레벨에 위치한다면,「通ふ」「似る」와「おぼゆ」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며,「おぼゆ」는「似る」와는 떨어진「通ふ」와는 떨어진 겹치는 면을 가진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8

한ㆍ일 양언어에 있어서의 배우자 호칭에 관한 연구

李庸悳

한국일본학회 일본학보 제40권 1998.05 pp.93-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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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0원

この論文は韓國語と日本語の配偶者間の呼稱に關して調査したものである. すなわち, 家庭のなかで夫は妻を何と呼ぶが. また, 妻は夫を何と呼んでいるのかについて調査したものである. それによると, 兩國語の呼稱は代名詞をはじめ應答詞, 固有名詞, 親族名稱などが使われていてその種類は多樣である. 年齡によって, 性別によって, 役割によって使いかたが異なる傾向がある. 韓國語の場合は, 夫婦が共通じ使える同じ呼稱がある. 日本語の場合は, 決った呼稱はないが, 互いに相對の名前で呼びあうことができるから, 共通の呼稱と言えば, 名前をあげることができる. 韓國語の場合は, 自分の子供の名前を利用した呼稱が多いが, 日本語の場合はそうでもない. おじいさん, おばあさん世代の夫婦は, 兩國語ともにおじいさん, おばあさんという世代槪念の言葉を呼稱として使う特徵がある. 使い方を見ると, 兩國ともに夫婦が互いに平等な立場にたって呼びあっていない. それは兩國ともに儒敎的な影響を受けた國であるからであろう. しかし呼稱問題に限って言えば, 日本が韓國より保守的, 權威主義的であるといえる. 夫婦の間の呼稱の變化要因として指摘できることは家族のなかで新しい構成員の登場をあげることができる. 子洪が生まれたり, 嫁をむかえた場合, そのことによって呼稱がかわっていく. $lt;表$gt;からも分かるように, 夫婦の間の呼稱は子供が生まれてくると變っていく特徵がある. また年を取ると變っていく傾向がある. これは呼稱が役割によって, 時代によって變っていくことを意味する. このように役割によって變っていくということは, 結局, 組織社會のなかで互いの役割が重要であることを意味する. 言いかえば, 自分と相對との呼稱の言語的な把握は役割によって結められる$lt;投割(role)依存的$gt;呼稱體系をもっているといえる. 兩國語の呼稱の特徵は家庭のなかで最年少子である子供の立場にたっての自己同化が行われるということでおる. このような特徵は職場などの外部社會でも, そのまま反映される.

9

宇治若郎子宮所歌一首 - 柿本人麻呂挽歌一考察 -

高龍煥

한국일본학회 일본학보 제40권 1998.05 pp.107-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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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九의 挽歌의 冒頭에 위치한 가장 짧은 詩語로 構成되어져있는「宇治若郎子(1795)」의 노래는 이상하리만큼 제목인 題詞와 詩句의 內容이 일치하지 않는다하여 잘모르겠다. 라든지 또는 作家의 動機를 확실히 把握할 수 없다고 하는 등 疑問点을 提起하여 왔다. 이에 本稿에서는 이 詩歌가 가지고 있는 文藝史的 意義와 文化史的 價値를 충분히 考慮하여 作家論的인 深層을 解剖하기 위하여 우선, 各句마다 새로운 解釋을 試圖하며,「日本書記」를 비롯한 當代의 歷史的 地政學的 資料를 바탕으로 이 노래가 가지고 있는 文學史的 意味를 考察하였다. 그리하여,「今木」의 文化史的 背景을 통하여 볼 때에 佛敎文化의 傳來와 軌跡을 같이하고 있다고 하는 点을 浦捉할 수 있었다. 또한, 人麻呂 內部의 深層과 關聯된 神話意識 내지는 同族인 大豪族으로서의 宇治若郎子의 노래가 須馬神(スメ神)으로서 發顯되어져 있다고하는 點을 看破하였다. 아울러,「유대목」이란 通說에 의한「松木(소나무)」가 아니라 文化史的 背景을 통하여 볼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槻木(둥근느티나무)」임에 틀림이없고 神聖한 祖神을 祭祀지내는 곳으로서 聖地를 나타내고 있음을 理解할 수 있었다. 즉, 이와 같은 多岐에 걸친 要素들을 새롭게 內包整頓하여 이 作品의 解釋을 再考해보니 [古人은 宇治若郞子를 나타내고, 今木의 봉우리에서 무성히 서있는 (느티나무)는 유가 애타게(그립게)기다리고 있듯이 卽位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그 槻木(느티나무; 擬人化)는 고인을 보았던 것일까, 또다른 해석으로서 $lt;槻木을 古人이 보았던 것이었을까$gt;]라고 하는 두가지의 解釋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볼 때, 결국 이 노래가 가지는 要義는 神威로 茂盛한 槻樹(느티나무) 아래서 國望을 하며 天下를 다스리실 것을 渴望하고 있었던 王子였는데, 어떠한 緣由인지 그 뜻을 實現시키지 못하고 非命에 간 토도의 傳說을 素材로 하여 人麻呂의 血族이며 同時에 皇太神化한 宇治若郞子를 鎭魂하며 慰靈하는 노래인 것이라고 推論하고자 한다.

10

家持反歌の位相 人麻呂反歌との比較を通じて -

朴一昊

한국일본학회 일본학보 제40권 1998.05 pp.12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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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0원

人麻呂 反歌와 家持 反歌는 종래 상반되는 평가를 받아 왔다. 즉, 人麻呂 반가는 반가를 내용 및 형식면에서 變容 發展시켜 노래의 한 樣式으로 定立시킨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반면, 家持 반가는 그 人麻呂 반가를 계승 발전시키지 못하고 결국 반가의 쇠퇴를 초래한 凡作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본 논문은 人麻呂 반가와 家持 반가에 대한 종래의 평가에 의문을 제기하여 萬葉 반가사상에 있어서의 家持 반가의 문학적 역할을 재평가하고자 한 것이다. 궁정가인으서 공적인 성격의 장가(「晴」の歌)를 주로 제작한 人麻呂에 있어서, 반가는 청중의 감동을 고조시키기 위한, 장가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전개되어 가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사적인 심정을 토로하는 장가(「褻」の歌)를 주로 제작한 家持는, 反歌를 장가의 서정(사적 심정)을 요약하여 작품 전체를 끝맺음하는 것으로 의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그와 같은 양가인의 반가에 대한 의식은「퇴고」라는 문학적 조작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또한 반가에 대한 시대적 필요성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반가의 문예양식으로서의 완성기인 人麻呂시대는 萬葉初期의 단순히 장가의 말미를 되풀이하는 반복적인 반가로부터 하나의 문예양식으로서 확립될 필요가 있었으므로, 의식적으로 장가로부터 벗어나서 전개 발전되는 반가의 제작이 요청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반가의 황혼기인 家持 시대는 오히려 장가의 세계에 종속되어 장가의 내용을 충실하게 요약하여 끝맺음하는 반가 본래의 성격으로 회기되는 반가의 제작이 요청되고 있었던 것이다. 즉 그러한 人麻呂 反歌의 전개적 성격과 家持 反歌의 요약적 성격은 문예적 우열관계에 있다기 보다는 장가의 성격 변천에 의한 것이며, 결국 그것은 長反歌의 最盛期와 終焉期라는 시대적 배경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11

『平家物語』における極樂浄土の意味 - 浄土教思想との関連を中心に -

金任仲

한국일본학회 일본학보 제40권 1998.05 pp.133-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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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0원

本 論文에서는 平家物語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淨土敎思想이, 作品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요소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極樂淨土」의 意味와 관련지어서 考察하였다. 淨土敎는 일찍이 奈良時代부터 행하여져 왔지만, 平安末期 法然上人이 나타나 일반 민중들 사이에 널리 보급시킨 佛敎思想이다. 平安時代의 여러 文學作品속에서 묘사된 極樂淨土의 의미는, 現世의 화려함, 장엄함을 나타내기 위한「極樂」의 뜻으로 來世에 있어서도 現世의 延長으서 極樂에 往生하고 싶다는 現世 卽 極樂이라는 一元論的인 세계였음을 엿 볼 수가 있다. 그러나 平家末期에 접어들자, 保元의 亂에 의해 武士의 시대가 열리고 平治의 亂을 통해 권력을 잡은 平家가 그 專制的인 强權이 더해짐에 따라 源三位賴政의 擧兵을 導火線으로 反 平家의 기운이 확산되어간다.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민중들은 他律的이고, 偶發的인 뜻밖의 죽음에 직면하여 오직 기대할 수 있는 곳은 四方淨土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즉, 淨土를 希求한다는 것은 지금 살고있는 이 땅을 穢土로서 부정한다는 厭離穢土, 欣求淨土 二元論的인 思考가 이 시대에 명확하게 나타난 것이다. 法然은 그 穢土를 壓離하여 四方淨土에 往生하기 위해서는 阿彌陀佛의 本願에 의지하여 念願할 수 밖에 없다고 說敎하였다. 그는 古代 佛敎가 極樂往生을 위하여 요구되는 宗敎的·學問的인 모든 것을 일체 否定하였다. 阿彌陀佛의 本願은 功德을 많이 쌓아 來世에 極樂往生을 비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 시달리는 일반 대다수의 민중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 한 것이다. 이러한 淨土敎思想이 당시의 自力念佛에 의해서 極樂往生한다는 觀念에서 平家物語에 묘사된 他力念佛의할 厭離穢土·欣求淨土의 관념이 생겨났다고 보아진다.

12

『拾遺和歌集』의 屏風歌의 一考察 - 歌枕를 中心으로 -

許命福

한국일본학회 일본학보 제40권 1998.05 pp.145-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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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稿では『古今和歌集』の後をついで『拾遺和歌集』の中に入っている屛風歌を中心に詠まれた背景とその和歌の性格, そして屛風歌の中に詠みこまれた歌枕の役割などを八代集を通して調べてみて, また歌枕と景物との相關關係などを考察した. 『古今和歌集』は屛風歌を屛風歌であるがために特別視したようで, 大部分が部立上「賀歌」に配列されているが,『拾遺和歌集』は四季歌の多くの部分が屛風歌であって, 屛風歌が四季歌を形成していく最初の類型を見せている.『拾遺和歌集』の屛風歌は大きく月次屛風歌と四季屛風歌に分けることができるが, 月次屛風歌は內裏屛風歌が相當部分を占めていて, その內容をみると內親王の裳着屛風歌やまた大和繪の各月の畵題(照射:5月, 納凉$lt;下蔭$gt;:6月, はらふること:6월불など)を中心に詠まれている. また四季屛風歌は四十歲·五十歲…などの誕生日をお祝いするための歌がほとんどで, 松や竹杖などを詠んで長壽を祝福したり, 數えきれないほどたくさんの春を迎えるということで長久と長壽を表われたりしている. 大部分か鶴·若菜·常綠の松どのめでたい景物を詠みこんで祝賀の意味を表わしている. また屛風歌の中に人っている18種の歌枕は景物と合せて長壽を祝福したり長久を析願してめでたい意味をあらわしてその歌の意味を强めた. このような歌枕と景物は掛詞や緣語などの表現技法によって相互連關して詠まれていた.

13

4,600원

作者は道長の稀有な榮華を, 幸運あるいは强運によって現實になり得たものとして把握している. 彼の類稀な幸運として基本的なものは.「攝政關治」という外戚政治であった. 國家が, 天皇を中心とした單一的な權勢組織としてあったなら, 世襲制である天皇家に生まれないかぎり, 道長の權勢は望むべくもなかった. また, 作者は道長公のお予樣がたは, 男女あわせもうして十二人, それが一人も欠けずそっくりいらしゃるのは別の理由があるからではなく, ひとえに入道殿のご幸運のかぎりなくていらしゃるからであろうと記述すると共に, 道長が榮華の足場を作る畵期的な事件として長德の變を記述することにより, 道長の榮華が彼自身に有利に作用した周邊環境による生れつきの運のためであったと考えていたことが窺える. しかし實際道長はこうした榮華を得るために二人の源氏の妻をはじめ娘たちを政治的手段に利用する等機會や打算で動く政治的性格の持ち主であった. また道長が最終の勝利者として權勢の座につくためには, 甥であり最大の政敵であった伊周との對決を避け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 しかし作者は, 伊周と道長との權力爭いの科程には全く觸れず伊周を愚かで輕率な人として描寫することにより道長の幸運の必然性を强調している. ここで幸運とは, 肯定的な意味としての道長讚美ではなく, 道長が成し遂げた榮華が自分の努カと資質によるものではない回りの人物に助けられた, 單純に運の良い人であったという道長の榮華に對する批判的な態度が間接的に內包されている表現であると思う. したがって, 道長の榮華を單なる幸運にとらえようとした作者の立場を隱密に示唆した實際の人物, 道長に對する否定的な視覺を表してしる表現であるといえる. すなわち, 道長の榮華に對する必然の强調は, 彼の榮華を單純な幸運としてとらえようとした作者の意圖であり, これは打算的且つ政治的性格の强い實際の人物, 道長に對する懷疑がもたらした道長への否定と考えられる. そのような懷疑が實際道長への否定につながり, 切實な要求として作者が理想的に考える架空人物でない架空人物としての道長を描こうとしたのである.

14

夏目漱石의 二重的 意識構造

柳相熙

한국일본학회 일본학보 제40권 1998.05 pp.175-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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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史の歪曲は卽ち, 文學史の歪曲を意味するものでもある. それ故, 日本人によって評價された日本文學をそのまま受け入れた場合, 誤謬を犯しやすい. 特に, 日本の近代文學はその危險性が高いため, 愼重な檢討が必要である. このような觀點から, 日本近代文學史上の最高峰とされている夏日漱石を客觀的に檢證してみることにする. 漱石の門下生達は, 彼を道德的な人格者として聖人化したが, その影響は今日にまでおよび, 大部分の日本人は彼を偉大な人格者として認識している. このような認識を土台に漱石やその作品に接するため, 硏究者達の評價も偏向しがちである. 故に, 漱石やその作品に對する從來の評價を再考する必要がある. 漱石の實生活はもちろん, 彼の作品においても, 被害妄想, 追跡妄想, 嫉妬妄想などの事例が多い. これは彼の奇遇な成長環境によってもたらされたパラノイア(偏執狂)症狀のためである. 彼のパラノイア的な性格は, 過度の優越感と劣等感をあわせもっており, 道德的でありながら逃避的な二重の意識構造を作り上げた. 漱石の二重性は時代意識にも現れており, 時代に追從しようとする性向と離脫しようとする性向を持っている. 卽ち, 天皇制帝國主義を熱烈に支持しながらも一方ではそのような制度的秩序から拔け出そうとした. 前者の代表的な例は`明成皇后殺害事件`を`尤もありがたき`こととして稱えるほどに帝國主義狂信者の一面を見せたことであり, 後者の代表的な例は`兵役忌避`の目的で北海道に`僞裝移籍`した行爲である. 1909年の`滿韓旅行`以前の漱石の作品では日本社會の不條理に對して批判しているばかりか, 日本帝國主義の無謀な膨脹政策を憂慮し, 社會主義にも同情的である. しかし`滿韓旅行`以後の漱石の作品には政府や社會に對する批判はもとより文明批判さえもほとんど見らねない. それ, は彼が`滿韓旅行`を契機に天皇制帝國主義の成功を確信するに至って民族的自負心が强まり, 西洋に對する劣等感が解消されたからである. 個人の自由について格別な情熱を持っていた漱石は生涯權力と金力をひどく嫌っていた. 權力や金力は個人の自由を侵害する屬性を特っているからである. しかし, 彼は家族や下女を自分の隷屬物とみなし, 家父長としての權力を思うがままに行使することによって彼らの自由を侵害するという矛盾を見せた. 漱石が東西の豊富な識見と文才を兼備した作家であることは間違いない. しかし, 晩年にいたっては人間解放のために努力することはおろか, 日本帝國主義が何を犧牲にし, いかなる落とし穴にはまっていっているかさえ認識できない近視眼的で非情な人物で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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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に至る狂気と絶望 - 芥川龍之介の「齒車」を中心に -

曺紗玉

한국일본학회 일본학보 제40권 1998.05 pp.189-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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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는 1927년,「遺書」라고 할 수 있는 몇개의 作品을 남기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그 두번째 遣作인「톱니바퀴(齒車)를 고찰함으로써,「神」과「復讐의 神」, 구원의 가능성, 兩極性 詩人들의 불행한 생애 등에 대한 문제가 내포되어 있음을 살펴보았다. 특히 아쿠타가와의 내면에 존재하였던 兩極性은 마지막 絶筆이 된「서방의 사람(西方の人)」「속서방의 사람(續西方の人)에 이르러서는「영원히 초월하고자 하는 것」과「영원히 지키고자 하는 것」으로 발전하여 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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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코오보오(安部公房)의 「璧」에 나타난 二重像에 관한 考察

金蘭玲

한국일본학회 일본학보 제40권 1998.05 pp.20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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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部公房の「壁」に表われた二重像について壁とぼくとを中心に考察してみた. ぼくの二重像の實體は名刺と名前を失ったぼくであり, 壁の二重像は物質としての壁と生活としての壁である. 名前を失った事件は, 結局何ものからも呼ばれない存在, つまり日常の存在の虛像を脫皮する行爲であるといえる. したがって, 二重像の登場は存在の本質への還元のための出發點になるのである. 二重像という非現實あるいは非實在物の登場を通じて逆說的に現實のばくのイメ-ジを追求する假說であるといえる. つまり二重像はぼくの本質の變形である. 作品の結末部にみられる變形が本質の統一體だといえば, 二重像はすでに變形の原形質を成したといえる. 本質への還元をもとめて自己外化の過程をへる二重像は正から自發的に發現される反り構圖で對立する. 南極と北極との關係のように對立關係を形成するが, 地球がまるくなり, そのあげく對立する極はどんどん一点に凝縮し, 極が消滅するように, まるで円の形象をなして本質への還元的な關係になるといえる. 二重像が$lt;自已外化$gt;の假說であるという点を考慮する場合, このような對立と還元との關係は必然的にすでに內包されていたことがわかる. 要するに, 二重像はぼくが現實の中で日常性, 記號, 證明などによって定意された虛像を脫して, 本質を外に引きだす役割をはたしているというところに意義があるといえる. そして, 本質の統一體である變形の原形として, また自己外化の假說して日常的な存注の現實に`亡靈(非實在物)`のようにあらわれ, 自己をうつしだすものといえる. この二重像によってぼくの日常性には有罪が宣告され, 生活の果である壁にぶつかったが, 虛像であるぼくをうつしだし, 本質への變形を成し遂げることによって逆說的に二重像は眞の自己さがしの出發点になったと見られる. 以上, 小說「壁」は二重像の自己外化の週程を通じて, 日常の抽象的な關係から虛像を脫し, 本質の自己をもとめようとする超現實主義的な方法の自己さがしの文學である. 名前を失い, 名刺のために存在勸を剝奪され, 結局は壁に變形する一連の過程が一面では名刺という物質による人間疏外の構圖であるという否定的なイメ-シとして把握されることもある. しかし, 本橋では逆說的にその過程が疎外を克服し, 自分自身の本質をさがしてさまよう文學として把握した. つまり, ぼくの本質を二重像という形像を通じて自分自身と事物について懷疑し, 正·反の形で對立し, 日常で疏外の場になった壁の像を凝視して疏外を克服し, 壁に變形して還元をなしとげる過程を描いている. 自分自身の日常的な姿に變形を試みることによって, 存在に對する認識に變革をおこない, さらに, 自己の本質を明きらかにしていく作品であるといえる. したがって,「壁」は變形の原形であるといえる二重像を通じて自分自身の本質の認識に對する問題を提起する文學であるといえよ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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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明開化期의 天皇像과 民衆

朴晋雨

한국일본학회 일본학보 제40권 1998.05 pp.217-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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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日本における國民國家の形成は, 近代天皇像を求心点として國民統合を强化していく過程でもあった. 近代天皇像は, 國民國家の形成過程で登場した國民統合のイデオロギ-であり, その內實は創られた`傳統`と`文明化`の課題を一體化した形で粉飾されたものであった. こうした近代天皇像は國家的な祝日行事や巡幸などの創出された`公式文化`を通じて民衆の日常生活のなかに根を下ろし, 自發的な活力を收斂していくものであった. しかし, その具體的な實像をみると, 民衆は近代天皇像を中心とする明治政府の開化政策に理解し難い葛藤と抵抗をみせており, かえって自らの傳統的な民俗慣行に基づいてこそ自發的な活力を表出していた. ここに, 近代國民國家の形成という課題のもとで民俗的な慣行や傳統を蒙昧なものとして抑壓しなければ近代化を推進することがてきないけれども, 一方では民俗的なものを抑壓すれば國民統合に應じうる國民的な活力を喪失してしまうとかう明治政府のジレソマがあった. したがって明治政府は傳統的な民俗慣行のなかで天皇にたいする尊崇心をよびおこせる要素にたいしてはこれを徹底的に禁壓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そのかわりに, 民衆が自ら能動的に天皇像を形成しうる要素にたいしてはこれを徹底的に禁壓し, 規制することになる. その結果, 近代日本における民衆の大大的な天皇崇拜は, 國家的な秩序の中心としての天皇像と民衆の民俗的な天皇信仰の要素が混在する形で形成されるようになった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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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초기 한국인의 일본유학 - 1881년부터 1884년까지를 중심으로 -

朴己煥

한국일본학회 일본학보 제40권 1998.05 pp.233-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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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年(明治9)日本の武力によって門戶の開かれた韓國は, 5年後の1881年(明治14)西洋支明こと近代の攝取のため, 日本へ近代最初の留學生を派遺した. それ以來日本留學は現在に至るまで續いているが, 舊韓末つまり開港から1910年(明治43)の韓國倂合までの日本留學は, 次の三つの時期に分けることができる1881年~1884年, 1895年~1903年, 1904年~1910年がその三つの時期で, 本稿ではこの三つの時期のうち, 韓國初の海外留學たる1881年から1884年までの日本留學について考察してみた. 主に金玉均らの開化派によって推進された1880年代前半の日本留學は, 近代化のための人才養成と開化勢力の擴充がその目的であった. この日本への留學生派遺は, 朝鮮側の開化意志に基づいていることは言うまでもないが, 日本との共同作品といえるほど, 日本と深く關わっていた. 派遺に至るまでには政府側の花房義質, 日本での受け入れは民間側の福澤論吉がそれぞれ中心的な役割を果たしていたのである. 100人(本橋では名前の確認できる67人を扱った)とも言われるこの時期の留學生は全員官費留學生であったが, 派遺主體によって學資金の出所が違っていた. つまり政府派遺の一部の留學生は政府から直接學資金が支給されていたが, 留學生の大部分を占める開化派派遺の留學生は金玉均·朴泳孝らによって留學經費が調達されていたのである. 留學生の多くは慶應義塾で日本語を習得した後, 他の機關に移り自分の專門分野の勉强を續けた. 留學生の學習分野は主に軍事·技術·諸制度に偏っており, 留學期間も1, 2年と比較的短かった. 留學がこのように短期間で終わらさるを得なかったのは, 財政の欠乏が主な原因であり, 從って充實した留學になれなかったのである. 留學生の身分は殆どが鄕班·中人·常民で保守的な支配階層は日本留學にあまり關心を示さなかった. これは留學生の派遣主體である開化派の政治的基盤が, 大變弱かったことによるといえよう. 旣存の體制の下では出世の可能性の薄かったこれら日本留學生の將來は, 開化派の運命と深く關わっていたのであり, 勢い留學生らは學生の身分であるにも拘わらず, 政治的性向を强く帶びていたのである. 留學生らの政治的性向は, 歸國後彼らが開化黨のク-デタ-(甲申政變)に參加していることからも確認できる. 韓國の海外留學史上, 初の本格的な留學といえる1880年代前半の日本留學は, 無能な執權層とそれに付けこむ日淸の外國勢力, またそれらの外國勢力に便乘する親淸保守派と親日開化派との對立などが原因で所期の成果をあげ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早申政變の失敗で完全に淸の影響下に置かれるようになった朝鮮は, それから10年間, つまり日淸戰爭の勝利で日本が朝鮮での影響力を取り戾すまでに, 留學生の派遣を中止するように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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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인의 조선 인식 - 左田白茅를 중심으로 -

沈箕載

한국일본학회 일본학보 제40권 1998.05 pp.25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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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來, 近代日本人の朝鮮認識を究明しようとする場合, とくに明治初年においては, 明治政府の指導者にあたる木戶孝允とか西鄕隆盛らを中心にして論じられてきた. しかし, 各人各樣の民衆とか少なくとも政府の下級レべルの官僚たちの朝鮮認識については, 史料の制約もあって十分な硏究が行なわれてこなかったのは否めない. そこで本稿では, 旣存の硏究とは別なる觀点から, 外務省の下級役人として最初に朝鮮へ派遣された佐田白茅という人物を例に擧ザ, 幕末期からの彼の政治的軌跡をたどりつつ, 明治初年の對朝外交政策および征韓論形成における役割を考察してみた. その結果, 尊王攘夷派志士として, 幕末期から歪曲された朝鮮認識(外壓への對應策として, 應神天皇以來の朝貢國=朝鮮へ進出すべきだという)を有していた佐田は, 維新後にも對馬藩による對朝交涉(國交再調整作業)が暗礁に乘り上げるなかで, 外務省による對朝鮮外交·貿易一元化の一環としてまず朝鮮實情把握の任務を帶びて朝鮮に行ってきたりして, たとえ現實政治の壁に行き詰まり明治三年, 持論(卽時武力「皇使」派遣論)の政策化には至らなかったけど, 明治三年から明治九年までの對朝鮮外交を規定しうる政策の樹立(「對鮮政策三箇條」)および朝野の征韓論形成に一定の影響を及ぼしていたという結論を得ることができ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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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론」에 나타난 조선관의 고찰 - 동화와 우열을 중심으로 -

장용걸

한국일본학회 일본학보 제40권 1998.05 pp.265-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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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論文は日本の近代國家を創造してゆく麗史的狀況のなかで日本が朝鮮を如何に認識し,日本と朝鮮を如何に區別するかについて「征韓論」を中心としてトドロフの他者論に基づぃて分析する.從來の「征韓論」に關する硏究はおもに政治史的側面から勸力對立と朝鮮侵略として分析してきた.しかし,近代國家の創造という文脈のなかで衡突する新たな「朝鮮」という新たな他者との出合いを見のがしているといえるだろう.つまり,「近代國家創造」のなかでの「他者觀」は「征韓論」を考えるとき見のがすことができず,兩者は個別的な意味を持つよりは相互關係を持つときこそ「征韓論」の意味がさらに明確され,日本の近代初期における朝鮮觀を理解することができる. これについて次のよらに三つに區分して理解することができる.ひとつは歷史の同質性によって同化主義に導びかれ,崩壞されてゆく傳續の表象になり,もうひとつは異質性に基づいて開國,開化,文明化させなければならない時代おくれの文明の表象になる.そして朝鮮は國家の力の源泉として認識がれ,自然,資源,開拓地,無人島等人間の意味が存在しない單に征服すべき表象である.そしてこれは領土的な境界を破壞することを意味する.これらは個別的ではなく,天皇という日本の近代國家の象徵のなかで相互力動的に統合され,朝鮮は征伐および指導すべき國家という兩義的な意味を持つように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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