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9)
2025 (64)
2024 (69)
2023 (44)
2022 (70)
2021 (59)
2020 (57)
2019 (65)
2018 (61)
2017 (69)
2016 (64)
2015 (73)
2014 (117)
2013 (84)
2012 (96)
2011 (82)
2010 (95)
2009 (89)
2008 (123)
2007 (107)
2006 (115)
2005 (136)
2004 (178)
2003 (136)
2002 (136)
2001 (119)
2000 (84)
1999 (64)
1998 (49)
1997 (50)
1996 (48)
1995 (33)
1994 (41)
1993 (33)
1992 (34)
1991 (27)
1990 (25)
1989 (26)
1988 (26)
1987 (24)
1986 (23)
1985 (23)
1984 (28)
1983 (12)
1982 (13)
1981 (16)
1980 (14)
1979 (9)
1978 (10)
1977 (9)
1976 (10)
1975 (6)
1974 (7)
1973 (6)
4,800원
본고는 아쿠타가와의「じゆりあの·吉助」(1919.9.『新小說』)에 그려진 기독교의 특이성과 그 의미를 분석하고 순교의 성격을 고찰함으로써, 아루타가와가 비정통적 기독교 신앙과 순교를 신성한 감동 가운데에 구현함으로써 주장하고자 했던 독자적인 주제를 확인해 보고자 한 것이다. 주인공 키치스케의 신앙의 특성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하나는, 그의 신앙에 나타난 신은 절대적이고 포괄적인 진리나 선의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순수한 영혼을 지닌 자를 사랑하며 그러한 자의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의 용기와 회망이 되어 주는 존재로 머문다는 것이다. 그와 관련된 또 하나의 특성은 신앙의 중심이 되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닌 인간의 자아의 욕구라는 점이다. 따라서 아쿠타가와는 키치스케의 기독교 신앙을 통하여 개인의 자아와 본연의 인간성을 긍정하는 인간 중심의 기독교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 기반이 되는 것은 근대적 자아의 사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사실은, 키치스케의 순교가 스스로의 사랑의 성취에 대한 희망과 그 사랑을 승인한 신에 대한 감사 가운데에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또 그러한 순교가 제공하는 감동이 자아 실현의 열정이 갖는 순수한 아름다움에서 비룻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그렇다고 해서 아쿠타가와가 정통 기독교를 경멸하기 위하여 본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본 작품에서는 아루타가와가 예수의 인간애의 가르침을 기독교 정신의 정수로 받아 들이고 있었으며, 하기에 키치스케가 목숨을 바쳐 실현하길 원했던 지순한 사랑을 승인하는 본 작품의 기독교를 정작 예수의 뜻에 어긋나지는 않는 것으로서 주장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아쿠타가와가 그렇듯 인간애를 기독교 정신의 핵심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신의 뜻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아쿠타가와가 인간애 이외의 여타의 기독교 교리는 온전히 무시한 신앙을 창출한 이유는, 여타의 교리는 두려움과 의무감에서 비롯되는 순종은 강요하여 인간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임을, 키치스케의 순교 장면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작품은, 본연의 인간성을 잃지 않은 자의 자아 실현의 열정이 갖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주제로 하고 있다고 결론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무엇보다, 아쿠타가와가 인간애의 가르침을 기독교 정신의 정수로 파악하고, 또 신의 뜻으로서 수용하고 있었음은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특기할만한 작품이라 하겠다.
4,300원
韓·日兩國神話에는 많은種類의 鳥類들이 登場하여 各其 神話의 主人公 구실을 다 하고 있다. 이 새(鳥類)들은 神話속에서 人間과 同化될뿐 아니라, 人間과 더불어 살고, 사람과 어울려 얘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人間에게 親熟한 神話속의 鳥類들은어떠한 役割을 하고 있으며, 어떠한 象徵的 意味를 주고 있는가, 그리고 古代人들이 가지는 鳥類崇拜에 대한 思想的 背景은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본 論文의 趣旨이다. 그 結果, 神話속의 鳥類는 첫째 $lt;太陽의 精靈$gt;, 둘째 $lt;天上界의 使者$gt;의 役割을 하고 있다는 結論을 내릴 수 있다. $lt;太陽의 精靈$gt;--古代人들은 일찍이 鳥類를 太陽의 精靈으로서 日神이나 太陽과 同一한槪念으로 崇拜했고 太陽과 鳥類가 相互比喩흑은 象徵되었다. 그 例로서 日中에는 $lt;三足鳥, 陽鳥, 金島$gt;가 있다는 오랜 傳承과, 동북아시아 各國에서 전해지고 있는 風俗,古墳壁畵의 그림 등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그리고 까마귀(烏)가 떨어뜨린 알, 또는 배를 먹고 낳은 아이, 卵生으로 태어난 建國祖와 英雄들은 太陽의 精靈에 의해 태어난 太陽의 子孫들인 셈이다. $lt;天上界의 使者$gt;一-또한 鳥類에 대하여 새(鳥類)는 그 飛翔하는 屬性으로 天上界와 地上界를 오가는 심부름꾼(使者)이 되거나 天上으로 가는 死後靈魂의 運送者로 認識되었다. 그 例는 河白의 딸 柳花의 殺靈使者인 비둘기(鳩)를 들어 볼 수 있고, 天上界의派遺者로 나키메(鳴女)의 꿩(雉)을 들 수 있다. 그 외에 $lt;金閼智$gt;傳承의 白鷄, $lt;神武天皇$gt;傳承의 $lt;頭八咫烏. 金치$gt;등 많은 예가 있다. 이처럼 古代人들은 鳥類를 太陽의精靈으로서, 天使者로서 神聖視하고 崇拜하였다. 특히 까마귀(烏)와 닭(鷄)은 靈通力과 呪力을 지닌 靈鳥로 認識되었고, 그의 이상한 行動이나 變態로부터 여러가지 暗示나 象徵性을 發見하여 미래를 豫見할 수 있다.
6,700원
일본은 1880년대 중반이후 국가주의 교육의 일환으로 독일교육학의 이념적 지향에 주목하고, 이에 대한 실천과제로서 헤르바르트의 교육학설을 수용하였다. 헤르바르트의 5도념과 품성 도야에 관한 주장은 영·미사상에 만족할 수 없었던 당시 일본인들에게는 큰 매력을 지닌 것이었다. 헤르바르트의 교육학적 견해는 19C말과 20C초에 일본교육계를 풍미했지만, 그의 사상에 대한 지나친 편향은 모든 교과를 5단교수법으로 단순화시켜 이해하는 화석화·형식화의 양상을 드러냈다. 이처럼 헤르바르트의 교육학설은 근대 일본의 국가주의 교육에 활용되는 일본적 변용의 과정을 거치면서 윤리적 폭군제(ethical tyranny)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어느 교과보다도 교수법의 빈곤 상태를 면치 못했던 수신 교과에서 헤르바르트의 교수법이 적극 활용되면서 일본적 격의와 왜곡은 크게 드러났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헤르바르트의 5도념을 유교의 5륜과 5상에 무리하게 연관짓는 기현상을 들 수 있다. 유교적 도덕을 근대적으로 분장하고 절대주의 국가에 부합되는 윤리를 부여하고자 한 당시 일본인들은 결과적으로 품성 도야를 목적으로 하는 헤르바르트의 교육학설을 그들의 윤리적 폭정에 악용하였다. 이 일본적 편향의 구조를 분석·이해함으로써 헤르바르트의 수용 및 해석 과정에 반영된 근대 일본교육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4,800원
本稿は,福麻呂の長反歌の構造を宮廷歌的な性格を中心に分析することによって,福麻呂反歌の特性を檢討したものである.福麻呂の反歌意識について考え, それが同時代の家持の反歌とどのようにかかわっているかを考察したのである. 万葉第四期を代表する長歌歌人福麻呂と家持は長歌に付される反歌を,長歌の內容を要約しまとめるものとして認識していたと考えられる. ただし,二人の反歌における相違は抒情性の問題と深くかかわっている. すなわち,宮廷歌人福麻呂は公的な場で要求された歌を主に制作し,實態的で現實的な現象を理性によって歌う. そのように對象との間に一定の距離を置いて客觀的に敍述するため,福麻呂の長歌は感情の盛り上がりが少なく抒情性に乏しい.つまり,福麻呂の長歌は敍事性の强いものと言えをが, それに付される反歌にも獨特な方法が認められる. 長歌(反歌二首構成の例)が敍事性が强い場合は,第一反歌が長歌の內容を敍事的に歌い, 第二反歌が抒情性を補って長反歌全體を締めくくるかたちで歌われる.それに對して長歌が抒情性を持ち完結される場合は,反歌二首はともに長歌の內容を敍事的にまとめている. このような長歌と反歌との相關關係は敍事性の强い長歌を制作した福麻呂に見られる特徵と言える. つまり,福麻呂の反歌は長歌の敍事性を際立たせるものであり, その基本的な姿勢は長歌をまとめるところにあった. それに對して, 長歌をより自由に自分の心情の吐露の手段として制作した家持においては,反歌はより充實に長歌をまとめるものとして用いられるようになる. 家持は多く指摘されているように, 長歌に私的な感情を盛り입むなと傳統的な長歌の制約を克服しより自由な長歌を制作しようと試みた歌人で, それはほぼ同時代の長歌歌人福麻呂との比較によっても明らかである. 福麻呂は宮延歌人として敍事性の强い宮延歌を主に制作したのに對して. 家持は多樣な題材をもとに敍事性と抒情性の調和を考えた上で長歌を作ったのである.そのような長歌に付される反歌をも, 敍事性と抒情性の調和を考慮しまとめるものとしたのである.
4,900원
1932年に傀섭滿州國を建國した日本は,滿州國支配のために三種の支配理念を用いた.先ず,滿州國建國以前から在滿日本人の防御論理であった「民族協和」理念を,日本は滿州の各民族統合のために利用した.滿州において樂土建設を訴える「民族協和」理念には,「皇道主義」の本質である血統原理が無いように見えるのだが, 「民族協和」理念とは日本民族を中核に据えて,各「民族の自治は否定」し「日本の肇國の理想」を理想とし, 日本を「母國」とする各民族の協和を意味していた,日本の「肇國の精神」とは,「神をがらの道」であり,「神ながらの道」とは神武天皇神話から來る「八紘一宇」と言う言葉で言い表されていた. つまり日本を中心に置いた「民族協和」理念とは,「八紘一宇」に至るもう-つの理念であり, それは又言葉を變えた「皇道主義」に他ならないのであった. 第二に,日本の歷史學者たちは「日滿同族論」を唱え,滿州の地にあった高句麗や渤海が日本に朝貢した「史實」や日本民族と滿州民族の血統的同一性を主張し,日本の滿州支配を正當化して行った. この「日滿同族論」は,滿州と韓國の歷史敎科書の中に記述されるに至った.第三に,日本は滿州國の建國理念であった「王道主義」を批判し,「皇道主義」に轉換せしめ,國神として天照大神を祭祀させるに至った. 「王道主義」は易姓革命を正當化するために日本の國體に對する脅威となると考えた日本は, 天皇と人民が血統的に同一であると言う「皇道主義」の優秀性を訴え始めた. 卽ち, 「皇道主義」では,天皇と人民は血統的に繫がった,眞をる親子關係であるために革命などは起こりうるはずが無いと主張したのであった. 以上のように滿州國における三種の支配理念は, それぞれの役割を果たしつつ,血統原理を中心に据えた「皇道主義」に受斂し,滿州國の各民族を日本に同化して行く目的性を持っていたと言えるであろう.
4,900원
「명심보감」은 중국 명대(洪武26, 1393년)에 성립된 한문서의 하나로서, 중국을 비롯하여 조선·일본·베트남·스페인·프랑스·독일 등 세계 각국에 전파되어 다수의 사람들에게 읽혀졌다. 그 중에서도, 중국·조선· 일본의 東아시아 3국의「명심보감」은 각각 독자적인 수용방법을 취하면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명심보감」의 수용양상에 있어서 중국·조선에서는 주로 판본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전파되었다. 물론 일본에서도 1631년 이후 약 80년간에 걸쳐서 화각본(和刻本)이 거듭해서 간행·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 「명심보감」은 중국·조선과 같이 판본에 의한 직접적인 영향보다는「명심보감」의 條文을 인용한 관련 서적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일본 근세 전기에서 후기까지의「명심보감」의 내용을 인용한 여러 종류의 문예서적(①藤原惺○ ②林羅山 ③野間三竹 ④前田綱紀 ⑤小瀨甫庵 ⑥淺井了意 ⑦貝原益軒 ⑧작자미상의「似我蜂物語」⑨宮川道達 ⑩太田全齊⑪太田南畝 ⑫山東京傳 등의 지식인의 저작)이 출판·보급되어 위정자 및 지식인에게 널리 읽혀졌다. 이것은「명심보감」의 수용에 있어서 중국·조선의 직접적인 영향과는 다른 간접적인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다양한 일본「명심보감』관련 서적 중에서 貝原 益軒(가이바라 에키켄)의 저작에 주목 하였다. 益軒의 2백 수십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 가운데「大和俗訓」.「和俗童子訓」등의 교훈서는 널리 읽혀져, 많은 독자층들을 계몽·교화하였다. 또한 益軒은 사후에도 오랫동안 지식인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끼친 사상가다. 그러므로 益軒의 권선사상을 규명하는 것은 당시 문예계의 실상을 이해하는데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선행연구에서는 益軒의 권선사상과「명심보감」과의 관계를 지적한 논문은 없고, 단지 유학사·교육사·과학사·경제사·지리학사·여성사 등의 硏究가 이루어졌다. 益軒에 대한 평가 또한 평등주의자·합리 실증주의자·체제 이데올로기의 긍정자 등의 견해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견해는 益軒 저작의 계몽서 전체를 통한 것이라기보다는 서적의 일부 내용의 특징을 들어 규정지었다고 생각된다. 본고에서는 益軒의 권선사상을 종래의 연구의 틀에서 벗어나「명심보감」과 益軒의 교훈서(「大和俗訓」.「初學訓」·「樂訓」.「和俗童子訓」등)의 내용을 면밀히 분석하여 益軒의 권선사상(특히 天의 觀念에 主目해서)의 특징을 명확히 하였다. 또 考祭가운데 益軒과 같이「명심보감」의 사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小瀨甫庵·淺井了意의 권선사상과의 類似·相異点도 비교 검토하였다.
4,500원
獅子舞の獅子に,五色でできているのがある.靑黃赤白黑,あるいはそれに近い色で,とても美しい.そのうえ,それぞれの色が意味を持っている. この論文では, その五色獅子の源流をたどってみた. まず韓國では,海西地方の鳳山假面舞·康翎假面舞·殷栗假面舞,嶺南地方の水營野遊·統營五廣大など,廣い地域の假面劇に獅子舞が登場する. しかしこれらは, あくまでも假面劇のなかの1つの場に過ぎない.獅子舞が劇全體の主眼をなしているのは,東北地方の北靑獅子戱だけで,この北靑獅子は五色の毛で飾られている.五色獅子が韓國の最も傳統的な獅子舞であると言えよう. それに比べ,日本では,1998年現在,8000にもおよぶ獅子舞が上演されているが,五色獅子と認められるものは沖繩縣に限られている.浦添市の勢理客と仲西,そして具志堅市·宜野灣市などの獅子舞がそである. しかし,日本でも五色獅子の歷史は古い.まず藤原道憲(?∼1159)の描いた「信西古樂圖」の二人立獅子の場合,揷入文から五色獅子であったことが分かる. そして,「法隆寺伽藍緣起幷流記資材帳」には『師子貳頭 五色毛在袴四腰」と記錄されている. 五色の毛は拔けたものの,それと覺しき獅子頭が今に傳わる.そのうえ,伎樂の獅子も五色獅子で, 1980年に復元された東大寺の伎樂では,色も鮮やかな五色獅子が舞臺にあがった. ところで,伎樂は,「書紀」(612年)によれば,百濟の味摩子が吳に學んで日本に傳えた樂である.したがって,當然ながら韓半島の,たとえば新羅の催致遠(857∼?)の「鄕樂雜詠5首」のなかの「산예(獅子)」や, 伽倻の于勒の「12曲」(552年以前)のなかの「師子伎」も,伎樂の五色獅子であったと推測される. 中國で五色獅子か流行ったのは,唐の時代である.李白(701∼762)は「上雲樂」で「五色師子 九苞鳳皇 구노호계견 嗚舞飛帝鄕」と詠み,帝鄕,すなわち都の長安で五色獅子舞が盛んであったことを記している.そして,「舊唐書卷29」の記錄「太平樂,亦謂之五方師子舞」は,五色獅子舞が,宮中の正式樂にまで指定されていたことを物語ってくれる. では,なぜ五色なのか.それは,中國古來の五行思想と關連している.インドにしか棲息しない獅子が中國に入ってきたのは,西域との交流が頻繁になった漢の武帝(BC.140∼87)以來のことである.その後,中國における獅子は,獅子舞へと變貌する過程のなかで,木火水金土が循環するという五行思想と結合し,五行の色の五色獅子として生まれ變わったと思われる. 一方,ネパ一ルの假面劇マハ一カ一リ一·ピャクン(Mahakali Pyakhan)の獅子も,五色獅子である.タルチョ(祈◎旗)で象徵されるチべソト佛敎での五色の意味は,地水火風空の天地自然の運用をあらわすもので,中國のそれに似ている.しかし,この劇の五色は,血·怒り(赤),力(黑),精液(白),神神の寬容(黃·綠)をあらわしており,中國のそれとはだいぶ違う.おそらく,劇の內容が當地の傳說に基づいたものであるからであろう.
4,500원
최근의 여성사 연구에 대한 관심과 발전으로 역사에서의 여성의 역할이 강조됨에 고대사 부문에서도 後宮과 女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으나 아직도 이에 관한 연구는 부족한 편이고 연구의 소지도 많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야마토(大和)조정의 통일과정에서 지방호족이 貢上한 采女제도의 역사적 기원과 그 의미를 살펴보고 아울러 율령에 나타난 女官으로서의 采女의 규정을 통하여 율령관료체제하의 그 역할과 위치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즉 우네메(采女)제의 역사적 전개를 통하여 大和조정에 의한 고대일본의 통일과정과 율령제국가 형성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가 있을 것이다. 采女制의 기원은 大和조정의 정치적 성장으로 지방호족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즉 호족들에 대한 강압적인 통치는 반란을 야기하고 이는 大和조정이 중앙집권력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어 그들에 대한 보다 강력한 지배의 방식으로 그들의 자매나 딸을 바쳐 지배종속을 약속케한 인질 정책의 일환으로 만들게 되었다. 采女는 왕에게 직접 예속되어 일상생활에 대한 近侍외에도 다양한 역할을 하였으며 때로는 왕과의 관계에서 자식을 낳아 왕실의 구성원이 되고 大和조정과 지방호족간의 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大和조정의 통일후에는 畿內출신과 이외 지역 출신간의 차별이 심해지고 율령체제하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농후해졌다. 이에 율령관료제하의 後宮제도가 법제화되면서 천황의 배우자는 황족 및 畿內 유력씨족의 女로 한정한다는 법령이 정해지고 지방출신의 采女는 더 이상 왕과의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後宮 소속의 잡역을 담당하는 관료조직 최말단의 존재로 그 지위와 역할이 바뀌게 되었다. 郡별로 징발되어 천황의 식사준비와 이에 관련된 시중을 드는 최하급의 役人이 된 것이다. 그러나 聖武천황기 이후에는 近侍에 따른 은총으로 采女와 그 일족에 대한 敍位·賜姓등이 행해지고 采女 출신으로 고위 女官이 되기도 하여 一族의 관위획득과 家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이미 지역에서 정치, 경제적인 성장을 이룩한 지방호족세력들이 중앙정계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중앙귀족층과의 갈등으로 정계가 불안해지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大和조정에 대해 충성과 복속의 의미로 采女를 貢上하고 지배를 받게 된 지방의 호족세력들은 그들의 정치 경제적 성장과 율령제의 동요로 인한 天平期의 변화를 기점으로 중앙귀족과 조정에 대해 과거 在地首長으로서의 자기의 정체성을 다소 회복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4,800원
この硏究は,超長壽國日本を素材に,社會政策の主要對象が勞動者から高齡者に移りつつある現象を分析することによって高齡者社會政策の槪念を新たに規定し,今後の社會政策の方向性を提示することを課題としている.硏究方法はまず,社會政策の理論を踏まえたうえで,戰後日本の社會政策の質的轉換を史的展開の視点から分析し,その中に高齡者の位置づけを試みた.次に,高齡化對策の構築においては,勞動力再生産のための「總資本」論から,社會保障をも含む「總合社會政策論」への進展を再考し,社會政策の領域を勞動政策だけではなく,社會保障にまで擴張した視点に基づいて,高齡者の所得保障を雇用と年金を中心に構築しようとした. 日本の社會政策は何らかの批判が生じたにも關わらず社會政策を勞動政策に收斂させた大河內(故大河內一男敎授)理論として發展してきたが,高度成長期以後,高齡化問題が浮かび上がり,總合社會政策論の登場とともにその對象は幅廣くなった.特に高齡化の急進展,勞動者の意識變化,雇用構造の變化などのよって,日本の社會政策は急激に變容しているが,それに應じた新しいシステムの構築が求められている.現在,日本の高齡社會對策の기본적수조は,高齡社會基本法(1995年法律第129號)に基づぃているが,その中心は,自立と連帶に基のく高齡者の雇用確保と年金制度の安定的な維持であるといえる. まず,高齡者の雇用確保は第8次にわたる雇用對策基本計畵の結果,勞動者が高齡期までその能力を有效に發揮できるような雇用·就業環境の整備が行われ,高齡者雇用は擴大傾向を見せている.今後は,人生80年時代にふさわしい「現役高齡者就勞シナリオ」への取り組みが必要であり,いままでの日本的雇用システムからの發想の轉換とともに政府·企業·勞動者の取り組みが積極的に行われば高齡者雇用は擴大するであろう.次に,高齡期の生活基盤になっている公的金制鹿は.社會保障の重要を注として.社會の安定を維持する役割を擔っている.しかし近年,公的年金をめぐる環境は高齡化の進行により,長期的に安定した制度に再構築していくことが求められている.高齡者の生活保障の觀点からすると,年金制度の在り方は,問題点を改善し,長期的に安定した制度として維持すべきであろう.また,年金制度は,高齡者の雇用狀況と各企業における雇用制度·賃金制度の在り方との連動ナる仕組みが求められており,高齡者の所得源として相互に不可分であるから,こうした各側面を總合的に檢討する視点が是非とも必要である. 本論文では,高齡者をめぐる環境變化を社會政策の新しい課題として指摘し,高齡者の所得保障を構築するためには,高齡者雇用を軸とし,年金を連動した所得保障システム構築を社會政策の觀点から提示した.これら高齡者所得保障システムの構築は,今後日本と同樣に高齡化を迎えることになる韓國に示唆する点が多いと筆者は考えている.
5,200원
1655년(孝宗 6), 德川幕府는 4대 將軍 家綱의 襲職을 視賀하는 통신사를 요청하였다. 조선은 淸나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이에 응하였으나, 막부는 통신사를 초청하여 日光 東照宮에 致祭를 올리도록 하며, 將軍家의 권위 高揚와 지배력 강화에 이용하였다. 조선은 일본과 평온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왜란으로 인한 舊怨과 중화문명의 계승자라는 자부심으로, 일본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從事官 南龍翼은, 일본을 中華를 어지럽힌 오랑캐에 비유하며, 일본을 기미(羈미)하는 國策을 중국의 오랑캐 敎化정책에 비유하였다. 통신사가 위험한 뱃길을 왕래하는 것은 臥薪嘗膽하는 것이지, 舊怨을 잊고 일본과 和親하기 위한 使臣이 아니라고 다짐하였다. 그리과 對馬烏를, 일본에 빌붙어 조선을 괴롭히는 곤란한 바다 괴물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국제정세가 변하여, 일본을 보는 시각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는 일본의 繁盛함을 보고 겉으로는 유교적인 시각으로 夷狄視하였으나, 현실과 내면의 갈등을 완곡하게 詩로 읊으며, 일본을 복잡한 감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일본의 자연과 경제력을 긍정적으로 인식한 것은 사행의 성과였다. 그간의 교류로 日本見聞이 축적되어, 使行錄 중에서는 가장 자세한 일본연구인「聞見別綠」을 편찬하였으나,「聞見別緣」도 先行의 일본연구와「海東諸國記」의 모델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전전 일본공산주의운동의 굴절과정 - 대량전향 전사(前史)로서의 32 년 테제 시기 -
한국일본학회 일본학보 제44권 2000.06 pp.627-643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5,100원
32년 테제에 의한 운동을 대부분의 학자들은 `일본공산당을 자멸시킨 운동` 이며, `반전에너지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대중과 유리된 운동` 등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공산당의 문제점을 지적한 점에서는 정확한 지적임에 틀림없지만 32년테제에 의한 일본공산당의 반전운동이 유리될 수 밖에 없었던 요인, 일본공산당의 실태와 일본사회의 특수성을 간과했다는 점에서 표면적인 해석이라 생각한다. 당시 일본사회는 몰아적 국수주의가 가세되면서 파시즘에 대한 정당화가 사회 전반에서 이루어졌고, 파시즘에 대한 열광으로 경도되는 국면이었다. 이런 일본사회로부터 공산당은 코민테른이란 집단안에서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화인할 수 있었고, 반천황제에 의한 반전운동도 이런 맥락에서 32년테제를 맹목적으로 수용하여 일본의 현실에서 관철시키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일본공산당의 반천황운동은 코민테른이란 외부로부터 이식된 운동이란 측면이 강하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5,200원
1998년 9월 25일 `일한어업협정` 이 체결되었다. 물론 1994년 국제해양법협약의 발효에 의해서 국제해양질서가 200해리 배타적경제수역 설정이 기정사실화 되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한일 양국은 다같이 배타적경제수역(EEZ) 설정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이 한국의 고유영토 독도에 대한 영유권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한, EEZ설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일본은 협상에서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도전적이고 일방적으로 직선기선을 선포하고 한국어선을 나포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EEZ설정이 의도대로 되지 않자, 그 대안으로 중간수역을 설정하여 독도를 여기에 포함하는 어업협정 체결을 제안했다. 한국정부는 도전적인 일본의 요구에 견디지 못하여 대부분 수락하고 말았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일본이 당초 의도했던 것은 동해의 주권을 분할하기 위한 `EEZ` 설정에 있었다는 것이다. 어업협정의 결과에서도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본은 단순히 어업협정 체결을 빌미로 한국의 동해해양주권 및 영토권을 훼손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0개의 논문이 장바구니에 담겼습니다.
선택하신 파일을 압축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