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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철학 [Journal of the Daedong(Graet Unity) Philosophical Assocition]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대동철학회 [The Daedong Philosophical Association]
  • pISSN
    1229-0750
  • 간기
    계간
  • 수록기간
    1998 ~ 2025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철학
  • 십진분류
    KDC 105 DDC 105
제24집(특별호) (25건)
No
1

6,300원

하버마스의 담화윤리는 소통 행위 이론의 핵심인 화용론의 구성에 심각하게 의존하고 있고, 담화윤리가 다른 윤리 이론과 차별화 되는 것은 거기에 전제된 언어 개념의 독특성에 따른 것이다. 하버마스는 담화윤리를 통하여 정의와 연대성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으려 한다. 정의와 연대성은 각각 칸트의 옳음(the right) 중심의 윤리적 사고와 좋은(the good) 중심의 윤리적 사고가 중심적으로 추구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버마스의 설명 과정은 불완전하다. 하버마스가 설명하는 양자의 관계는 연대성이란 정의의 이면이라는 주장으로, 이는 연대성이 진정한 연대성이 되기 위해서는 항상 정의에 의해 수반되는 한에서 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차이를 인식하고 서로 다른 개인과 서로 다른 문화간에 대화와 연대성을 가능케 하는 원리로서는 적절히 기능할 수 없는 약점이 있다. 이것이 하버마스의 담화윤리의 한계가 그것이다.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 단순한 시대적 유행이라서가 아니라, 개인과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 본질적으로 다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대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차이에 민감한 대화의 원리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우리는 담화윤리에서 적극적인 도움을 기대하기 보다 한나 아렌트나 찰스 테일러에게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2

켄 윌버의 철학에서 과학과 종교의 통합

박정호

대동철학회 대동철학 제24집(특별호) 2004.02 p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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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0원

근대 이래 과학은 사실과 진리의 영역을, 종교는 가치와 의미의 영역을 담당하며 갈등과 분열을 일으켜왔다. 과학기술 문명은 가치와 의미를 상실하고 있고 종교는 전근대적인 신화적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근대 과학과 전근대 종교의 통합은 현대인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급선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켄 윌버의 과학과 종교의 통합 모델을 재구성해보고 그 규범적 함의를 밝히려는 것이다. 윌버의 통합 방식은 ‘온상한, 온수준 접근법’이다. 전근대의 종교적 세계관의 핵심은 ‘존재의 대사슬’이고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의 핵심은 예술(나)/도덕(우리)/과학(그것 및 그것들)의 문화적 가치권의 분화이다. 윌버는 나/우리/그것/그것들의 네 상한을 두고, 각 상한에는 발달의 선에 따른 수준의 차이를 둠으로써 존재의 대사슬과 문화적 가치권의 분화를 통합해낸다. 윌버에 따르면 과학의 핵심은 직접적인 경험적 증거에 대한 요구에 있는데, 직접적 경험에는 감각적 경험뿐만 아니라 이지적 경험과 영적 경험도 있다. 따라서 감각적 경험을 다루는 좁은 과학뿐만 아니라 이지적 경험과 영적 경험을 다루는 넓은 과학도 있다. 종교 역시 신화적·독단적 믿음에 집착하여 자아를 강화하는 좁은 종교와 직접적인 영적 경험을 통해 자아를 초월케 하는 깊은 종교가 있다. 깊은 종교는 영적 경험의 과학이 된다. 나아가서 윌버는 (신비적 경험과 같은) 깊은 영적 경험조차도 물질적 뇌에 상관물을 갖고 있고, 이 상관물은 (명상가가 뇌전도에 연결되듯이) 좁은 과학으로 면밀히 탐구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깊은 종교와 좁은 과학을 통합한다. 현대인이 참 과학과 참 영성의 통합을 통해 전근대와 근대를 넘어 진화하는 데서 윌버의 통합 모델은 중요한 사상적 지침이 될 수 있다.

According to Ken Wilber, there are two major meanings of "science" and three levels of "science." "Narrow science" refers to a science that accepts as real nothing but sensorimotor occasions, or, secondarily, attempts to tie its rational and theoretic analysis to nothing but sensorimotor occasions. For the narrow sciences, "empiricism" likewise means "experiences originating in the five senses or their extensions". The "broad sciences" or "deep sciences" often deal with realities that can only be seen with the "inward eye". For all of the broad or deep sciences, an occasion is empirically real if it can be directly experienced by individuals in a peer group competent in the means of accessing the occasion. Broad sciences can investigate the objects or the phenomena or the experiences that present themselves to any subject or consciousness, whether the objects or experiences are sensory, mental, or spiritual. Wilber asserts that both of those two major forms of science (narrow and deep) share at least three common features ― namely, they both operate by injunction/exemplar, experience/evidence, and confirmation/rejection ― the "three strands" of all good science. That is, all "good science," whether narrow or deep, attempts to follow these three strands (which is what grounds their truth claims and makes them "scientific"). These three strands explicitly incorporate the valid aspects of the theory of science advanced by Kuhn (the necessity of exemplars/injunctions/paradigms), empiricism (the necessity of experiential grounding), and Popper (the importance of potential refutation). Wilber further claims that these three strands are generally followed by sensory science, mental science, and spiritual science. And using the quadrants, we can correlate the findings of broad science (e.g., meditative experiences) with the findings of narrow science (e.g., brainwave patterns during meditation registered by an EEG machine). Wilber's "all-quadrant, all-level" approach therefore allows us to do something that neither premodern spiritual traditions nor modern science can do on their own: namely, track all four dimensions of an actual occasion (intentional, behavioral, social, and cultural) and therefore offer a more integral approach to science, consciousness, and spiritu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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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철학의 가능성― 칸트 역사철학에 대한 비판적 고찰

서유석

대동철학회 대동철학 제24집(특별호) 2004.02 pp.2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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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0원

이 글은 칸트의 역사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역사철학의 가능성을 찾아보는 시도이다. 그 동안 역사철학의 사망 선고와 함께 헤겔, 마르크스의 거대담론으로서의 역사철학은 물론이고 그 한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칸트의 역사철학에 대해서도 대부분 부정적인 평가 일색이었다. 하지만 1996년 발표된 클라인겔트(Pauline Kleingeld)의 글(“코페르니쿠스적 전회와 거대 서술 사이 : 칸트 역사철학의 의의” Zwischen kopernikanischer Wende und grosser Erzaehlung : Die Relevanz von Kants Geschichtsphilosophie)은 역사철학의 한 가능성을 다름아닌 칸트에게서 찾는다. 논의의 초점은 역사연구와 역사서술에 불가피하게 요청되는 규제적 이념으로서의 역사이성이다. 진리주장이 아닌 규제적 이념으로서의 역사이성은 매우 유용할 뿐 아니라 동시에 거대담론의 과다함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본고는 먼저 역사철학 일반이 처해 있는 상황과 역사철학 위기에 대해 살펴보고, 이어서 칸트의 역사철학에 대한 클라인겔트의 흥미롭고 독특한 해석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후 이런 해석의 문제점은 없는지, 그리고 의의는 무엇인지를 검토해보겠다.

Wenn man davon ausgeht, dass Hegels Werk weithin als paradigmatisch fuer die Geschichtsphilosophie per se gilt und dass der Anspruch auf Wahrheit und Wissen, den er erhob, heute so nicht mehr moeglich ist, ist die Disziplin als ganze aeusserst fragwuerdig geworden. Pauline Kleingeld unternimmt den Versuch, zu einem anderen Verstaendnis von Geschichtsphilosophie zu gelangen, und dazu geht sie in die Zeit vor Hegel zurueck. Ausgehend von Immanuel Kants Geschichtsphilosophie, insbesondere von seinen Gedanken ueber den Gebrauch regulativer Ideen in der Historiographie, plaediert sie fuer eine vorsichtig-bejahende Antwort auf die Frage, ob heute Geschichtsphilosophie noch moeglich 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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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미학의 정치철학적 함의― 아렌트적 해석을 중심으로

김상현

대동철학회 대동철학 제24집(특별호) 2004.02 pp.6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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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0원

베버에 의하면, 칸트는 세 비판서를 통해 과학(이론철학), 도덕(실천철학), 예술(미학)이라는 세 영역이 완전히 다른 원리에 기초하는 자율적 영역임을 천명하였고, 이러한 칸트의 철학은 근대성이 어떤 의미에서 우리 삶을 파편화시켰는가를 드러내는 철학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칸트의 미학에서 실천철학의 함축을 읽어내고,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독특한 정치철학을 펼친다. 칸트 미학에 등장하는 무관심성, 취미, 천재 등의 개념과 그 개념의 특징들은 모두 정치적 이해관계, 정치대중, 정치지도자의 알레고리로 번안된다. 이러한 번안을 통해 재구성되는 칸트 미학, 즉 아렌트의 정치철학은 정치의 심미화라는 때로 부정적 뉘앙스를 갖는 용어로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가 궁극적으로 내세우고자 하는 입장은 공통감에 기초한 다원주의가 아닌가 한다. 공통감에 기초한 다원주의를 통해 그녀가 해결하고자 하는 바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루돌프 아이히만이 보여준 바와 같이 사고력의 결여로 인한 홀로코스트 재현을 방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원주의의 실현으로 전체주의적인 폭력을 근원적으로 배제하자는 것이다. 이 논문은 이러한 아렌트가 칸트에 어떻게 의존하고 있는가를 밝힘으로써 칸트 미학의 정치철학적 함의를 숙고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On M. Weber, Kant elucidates that science(theoretical philosophy), ethic(practical philosophy) and art(aesthetics) are the autonomic regions based on the perfectly different principles. So, M. Weber appreciates that Kant reveals at the philosophical aspect on what meaning the modernity have made our life fragmentize. On the contrary Hannah Arendt extracts practical philosophical implications from the kant's aesthetics and then evolves her own unique political philosophy on the basis of them. The conceptions and the characters of them such as uninterest, taste, genius etc dealt with Kant' aesthetics are interpreted to political interest-relations, people who are concerned with politic and political leader. Kant' aesthetics reconstructed with this interpretation, i.e., Arendt's political philosophy is often aprreciated negatively because she alters the aesthetics to politics. But the ultimate thesis insisted by her is pluralism based on the common sense and this is the main topic of political philosophy. She thinks that she can solve at least two problems, if we considerate the politcal philosophy or political problems on the horizon of aesthetical thought, especially Kant' aesthetics. First, she expects that the aesthetical thought can give the base of prevention against such like the Holocaust. Second, she recognizes the abuse of totalitarianism very well and she thinks that the only pluralism based on the aesthetical thought can eliminate the abuse. This essay purposes the consideration of Arendt's political philosophy through the clarification how Arendt depends on Kant' aesthe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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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의 전회? ― 우발성과 이미지, 그리고 타자

문성원

대동철학회 대동철학 제24집(특별호) 2004.02 pp.8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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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0원

이 글은 오늘날 사회철학에서 유물론이 어떤 의의를 가지고 있는지를 살핀다. 역사 유물론의 '거대 서사'가 의심스러운 것이 된 이후, 유물론은 주어진 사태에 대한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자세를 요구하는 유물론적 태도를 중심으로 이해되고 있다. 물질을 우리 의식 밖에 있으며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요소를 지닌 것이라고 본다면, 물질의 우선성을 내세우는 유물론은 이 물질적 질서를 받아들이려는 개방적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개방성에는 맑스주의가 설정했던 역사 진보의 법칙들의 자의적인 면을 인정하는 것이 포함된다. 알튀세르는 이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우발성의 유물론'을 제시한다. 역사에 정해진 목적은 없으며, 우연적 만남과 불확실성이 존재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 유물론은 오늘날의 변화된 현실에 대응하여 그 대상 영역을 넓혀가야 할 필요에 직면하고 있다. 중요한 삶의 환경으로 부각된 이미지와 정보, 특히 가상 현실의 문제도 그런 대상이다. 유물론적 견지에서는 조작 가능성을 넘어서는 실재를 물질로 놓고, 이미지나 의미의 차원에서조차 이 물질적 요소를 문제삼을 수 있다. 이것의 주된 사회철학적 함축은 조작 위주의 근대적 세계상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 극복의 여지를 시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타자에 대한 관심과 연결된다. 유물론은 의식 밖의 물질에 우선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타자 지향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자와의 관계를 자아의 성립 조건으로 보는 사유, 특히 레비나스의 철학은 유물론적 태도와 부합하는 면이 있다.

What is the meaning of materialism in the social philosophy today? Above all it could be found in the openness toward a new situation which is not explicated by Historical Materialism any more. If a materialist accepts the matter exterior and prior to our consciousness, he should be open to the external circumstances. This attitude of materialism implies the recognition of defects of 'grand narrative' that Marxist view of history had held. As a materialist philosopher, Louis Althusser criticised the teleology of Historical Materialism and substituted 'the materialism of contingency' for it. According to him, there is no ends in history and we should accept the 'clinamen' of the real world. At the other hand, today's materialism confronts the challenges of images and virtuality whose importance is growing more and more. We could say about the 'materialism of images' in which the matter or material reality is regarded as the element independent of all manipulation even in the image. And there are certain materialist concerns for 'the other' who cannot be captured by manipulation in the world of 'the same'. Materialism is oriented to the other in that it assumes the priority of the matter as the other. This paper suggests that the concepts of the other, especially that of Emmanuel Lévinas, could help materialism find a new form after the decline of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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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과 공동체적 자아― 김용택의 시 ‘같이’ 읽기

박연규

대동철학회 대동철학 제24집(특별호) 2004.02 pp.10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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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0원

이 글에서는 ‘공동체적 자아’가 갖는 의미를 아나키즘적인 관점에서 살펴본 뒤 김용택의 시를 통해 그러한 자아의 미학적 성격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리하여 공동체성이 어떻게 하나의 아나키즘미학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지를 보면서 그것이 시 비평의 한 방법론으로서도 훌륭히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다음과 같은 순서를 밟으면서 이러한 작업이 설득력이 가질 수 있도록 한다. 첫째, 크로포트킨의 공동체이론으로부터 공동체적 자아 개념을 도출하되, 공동체적 자아를 개인주의적이고 관념적인 자아와 대중화된 자아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자아로 정위하고자 한다. 즉, 공동체적 자아를 이기적이거나 지나치게 몰개성적이게 되기 쉬운 현대사회에서 건전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 진정한 자아로 본다. 둘째, 공동체적 자아가 개인적이고 관념적인 자아, 그리고 대중화 또는 사회화된 자아와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윤리성을 회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유의 건전한 지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확인한다. 셋째, 이러한 자유의 진정성과 그에 따라나오는 삶의 미학을 예증하는 사례를 김용택의 시를 통해 살펴본다. 그리하여 김용택의 시에서 논자가 구성해본 공동체적 자아가 하나의 시적 아름다움을 얻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검증한다. 결론적으로 공동체적 자아에 대한 아나키즘적인 이해, 그리고 시비평의 한 방식으로서 공동체성 등이 자유의 실천적 또는 미학적 운용에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본다.

In this a sort challenging article, I elaborate the concept of 'community self' in relation to the anarchistic approach to the poems of Kim Yongtak. And I attempt to confirm the possibility of anarchistic aesthetics in which I find the concept of community self being used as a method of the poetic criticism. In order to do it, I take some steps as follows. First, I analyze the concept of the community self that has been extracted and elaborated from the consideration of Kropotkin's theory of community. Then considering the concept as a well formed term I want to solve the morbid problems of both the 'individual or idealistic self, i.e., the Cartesian self and the popularized or just humble social self. The community self must be put in a proper status against the above different selves. Second, since the community self can keep its distance from the ideal self and popularized self as well, we might overcome their 'bad ethics' by which a true self comes out and it naturally gets fitting enjoyment of freedom for us. Third, if we employ the community self to analyze poems of Kim Yongtak, we could get an evident result from which the anarchistic criticism maches his poetic contents and forms. Although it is not always successful to interpret the poems by the anarchistic approach, the way of using the concept of community self, in this article, will give an effective case and further at least offer a standard which poem is better to show the anarchistic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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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고등학교 철학 교육의 현황을 파악하고 그 문제점을 극복할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인문 교육이 갖는 필요성과 의의를 확인하는 맥락에서 접근하여, 인문 교육으로서의 철학 교육이 갖는 의미를 고등학교 교육의 목표와 관련지어 해명하였다. 이때 특히 비판적 사고 교육으로서의 철학 교육이 중요하게 부각됨을 밝혔다. 다음으로 고등학교 철학 교육의 현황을 파악한 결과, 철학이 고등학교에서 제대로 교과목화 되어 있지 않아 선택의 빈도수가 극히 낮은 것이 큰 문제로 파악되었으며, 더구나 교사 임용에서도 철학 교사의 임용이 제도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기에 철학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철학 관련 내용을 가르치는 다른 과목의 교사 양성 과정은 철학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인력을 기르기에는 부적절하고 불충분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런 판단에 기반 하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색의 방향을 제안하였다. 근본적으로는 현재의 기형적 교육 과정을 개편하여 문학․역사․철학 관련 과목을 하나로 묶은 ‘인문 교과 과정’을 신설하거나, 철학이 포함된 다양한 통합 교과 과목을 신설할 필요하며, 나아가 철학 및 철학 관련 과목의 교사 양성 과정을 개편하고 다양화시키며, 대중적 연구물 확산을 위한 지원과 노력을 통해 교육의 인프라를 확보할 필요가 있음을 제시하였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valuate the current situation in the education of philosophy in high schools, and, based on this evaluation, to propose the way for encouraging the education of philosophy. First, I examine the significance and the importance of the education of philosophy in high schools. And then, I illuminate that there is no enough education of philosophy in high schools. On the evaluation of the current situation, I propose, as the long-term policy, the unification of literature, history, and philosophy as one independent subject, and, as the short-term polices, a new system for training and re-training teac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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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칸트 도식론의 역사적 원천과 의미를 해명하고, 독일관념론의 핵심 사상에 미친 중요성을 부각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고전적 독일철학의 주요한 모티브와 방법적 모색이 이미 칸트의 철학 속에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그 중에서도 이원적 요소들의 대립을 매개하는 상상력의 종합활동에 기초한 칸트의 도식론은 피히테, 셸링,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관념론의 핵심적인 주제로서 수용되며 철학적 내용과 함축에서 뿐만 아니라 변증법적 방법론의 전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피히테, 셸링, 헤겔은 도식론을 통해 칸트가 인간적 인식의 변증법적 성격을 드러내 주고 있음을 간취했다. 인간적인 인식은 도식작용 속에서 서로 대립적인 요소들을 관통하여 일치되게 하는 과정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우리는 도식론의 문제의식과 더불어 이후 독일관념론에 의한 칸트 초월철학의 적극적인 해석과 수용의 계기를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주관의 ‘활동성’, 상상력의 ‘종합’, 대립항의 ‘매개’, 이 원적인 요소의 ‘근원적 동일성’ 같은 변증법적 사유의 모티브들이 인간적 인식의 과정을 해명하 는 데 도입되고 있다는 점이다. 칸트는 생산적 상상력의 문제와 결부된 “매개”의 메카니즘을 통해 새로운 철학적 전망을 열어 보인다. 상상력의 종합에 기초한 칸트의 도식론은 피히테의 초기 변증법적 방법의 모색, 셸링의 동일철학, 헤겔의 정신철학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고, 독일관념론의 전개에 있어 핵심적인 모티브를 마련해 주고 있다.

Die Absicht der vorliegenden Untersuchung ist es, den Ursprung des transzendentalen Schematismus Kants in ihrem geschichtlichen Zusammenhang darzustellen, seine Deutung im einzelnen zu analysierenseine und die wirkungsgeschichtliche Bedeutung für die dialektischen Denkenform des deutschen Idealismus herauszustellen. In der Kants Transzendendentalphilosophie, alle Anschaungen, als sinnliche, beruhen auf die Affektionen, und reine Anschauungen wie Raum und Zeit beruhen auf die Selbstaffektion. Deshalb haben Raum und Zeit als reine Anschauungen die transzendentale Idealität. Im anderen Seite haben Raum und Zeit auch die empirische Realität, sofern sie die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der Dinge für uns fungieren. Dabei zeigt es sich, daβ Kategorien als reine Verstandesbegriffe insofern die objektive Realität haben, als das Mannigfaltige der reinen Anschauung a priori damit als ein Gegenstand bestimmt wird. Dadurch daß die Kategorien nicht als bloβe Denkformen des Verstandes, sondern vermittelst der transzendentalen Synthesis der produktiven Einbildunskraft als Formen der synthetische Einheit der mannigfaltigen Erscheinungen fungieren, haben sie reale Bedeutung und die gültige Anwendung für die Erscheinungen überhaupt. Daher macht die transzendentale Einheit der Apperzeption vermittelst der reinen Synthesis der Einbildungskraft, d. I. vermöge dem transzendentalen Schematismus die Gegenständigkeit des Gegenstandes überhaupt als die regelmäßigen Verknüpfung der Erscheinungen a priori möglich. “Die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der Erfahrung überhaupt sind zugleich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der Gegenstände der Erfahrung.”(A158/B197) Kant hat den dialektischen Charakter der menschlichen Erkenntnis festgehalten; die Erkenntnis wird in der Prozeß darstellt, in dem sich die gegensätzlichen Elemente durchdringen und zur Einheit werden. Diese Funktion der transzendentalen Einbildungskraft strukturiert die Weiterführung der transzendentalphilosophischen Denkweise. Im transzendentalen Schematismus begegnen uns wichtige Elememte dialektisches Verfahren, die neue Wege für Philosophie weisen. Der sinnlich-intellektuelle und zeitlich formierte Doppelcharakter der Einbildungskraft wird zum entscheidenden Motiv für die dialektische Denkform des deutschen Idealis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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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군사를, 경제를 지배하는 것도 모자라 최근 헐리우드나 동경에서는 이제 모든 인간의 정신과 영혼까지 지배하려는, 악신들의 발광과도 같은, 과학-제일주의, 기계-전체주의, 전자·정보-제국주의를 조장하는 SF들을 양산시키고 있다. 테크놀로지와 자본이 결탁된 기계적 상상력의 결과물이란 어쩌면 몰역사적, 탈지구적인, 비인간적인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몰역사적, 탈지구적, 비인간적인 곳에서 그들은 그러니까 그들의 과학-문화 상품을 마음껏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기술의 가면을 쓴 기계적 상상력의 종착지, 그곳에서 우리는 자연을, 인간을 발견할 수 없다. 자연과 인간을 철저히 배재시켜야만 성립가능한 것이 바로 기계적 상상력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정보 점유에 의한 세계의 일방적 통제나 지배 뿐이다. 이런 까닭에 만일 우리가 가상·환상적 SF의 세계의 향유에만 유행따라 몰두하는데 그친다면, 이는 결국 테크놀로지와 자본의 지배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데 일조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하여, 우리는 이 연구를 통해 <제2의 르네상스>(《매트릭스 II》의 애니메이션 중 하나)에서 묘사되고 있는 현대의 가장 일그러진 단면 중의 하나인 인간 정체성의 문제를 화두로 삼아 현대의 비트적 기계-결정론을 반성해보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바로 이 기계-결정론이 기계-인간론을 유포시키고, 기계-인간론이 <제2의 르네상스>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기계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하게 만든다고 보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인간 존재란 좌대뇌만을 사용하는 사유하는 기계가 아니다. 더더욱 복제될 수 있는 동물이나 대량 생산될 수 있는 사물과도 다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생각은 물론 삶의 방식이나 양태까지도 속속들이 간섭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현대의 과학, 기계, 기술, 정보라는 마법으로부터 풀려나야 할 필요가 있다.

L'homme étant de plus un être libre que les scientistes contemporains pensent, qui a toujours conscience de son monde et de son univers, est lui-même un chef-d'oeuvre son existence. Mais dans les usages mêmes du vocabulaire des Lettres et des Sciences humaines d'aujourd'hui, le terme d'<homme> renvoie, sans raisons suffisamment acceptables, à un homme-machine qui "parle", "pense" comme homme. C'est peut-être la puissance de la science "impure" et la complicité technique cinématogaphique avec des capitaux, que justifient, animent cette tendance incontrôlable(disons, inhumaine, non-historique, non-éthique). Le succès croissant de la SF(science-fiction) ne serait pas sans rapport avec celle-ci. Sourtout, sous couvert du mot “irréel”( "virtuel", "fantastique"), le style "fantastique" assez dis-topique et machinal(à notre avis) est fréquent malgré tout dans tous les domaines de la vie et surtout dans le domaine de la penée qui repose ses territoires sur une opposition réel-irréel(purement virtuel), mais non sur une opposition réel-idéal(utopique sans doute). Le public fou de ce genre suit cependant avec enthousiasme s'élargit, devient de plus en plus populaire et ce au moment où les grands bouleversements sociaux se produisent. Il ne convient pas donc de ne pas distinguer le réel de l'irréel. Il faut également différencier l'homme en tant qu'homme de l'homme-machine en tant que machine surveillé par la machine plus puissante. C'est parce qu'en aucun cas l'homme n'est pas machine que l'animation The Second Renaissance le montre, entre d'autres. C'est là ce que nous cherchons dans cette étude, tournant le dos à l'inventon mortelle pour l'homme, à l'inventon totalitaire pour la sociét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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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에서 자유의 사회철학적 문제

백종현

대동철학회 대동철학 제24집(특별호) 2004.02 pp.213-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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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형이상학에서 '자유의 문제'는 인간성과 도덕 법칙 사이의 문제다. 여기서 자유(自由)란 '스스로 비롯함'을 뜻하고, 중심 문제는 어떻게 인간은 자연적 경향성에서 벗어나 이성의 자율 체계인 도덕 법칙에 스스로 따르는 행위를 할 수 있는가 이다. 반면에 사회철학에서 자유(libertas, libert )란 소극적으로는 '어떤 속박으로부터 풀려나 있음'을, 적극적으로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의 일신과 부속물을 자기 뜻대로 쓸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 중심 문제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사이에서 생기는 충돌 완화와 화해 방안의 모색이다. 사회 안에서 개인은 단지 자연의 법칙 아래에뿐만 아니라, '사회의 법칙' 내지 규범 아래에 놓이는데, 이때 개인이 자연의 상태에서 누리던 '자유의 권리'에 변동이 생기면, 그것이 바로 '자유 문제'의 발단이 되는 것이다. 이런 자유의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도 19세기 후반부터는 생겨났다. 이 논고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의 '사회'와 '자유' 개념의 형성과정을 살피면서, 현재에도 현안으로 되어 있는 사회철학적으로 주요한 '자유의 문제', 곧 결사와 재산의 자유 문제를 검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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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00원

이 글은 인문학 분야의 다양한 문화분석 및 문화연구의 방법론들 가운데, 특별히 철학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신칸트학파의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나아가 이러한 문화분석 방법론의 현실적 의의를 밝혀내는데 목적이 있다. 필자가 여기에서 두 입장을 상호 분석하여 비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언뜻보면, 두 입장은 만날 수 없고 융합될 수 없는 이질적인 논의 영역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렇지만 문화분석에 대한 두 진영의 논의에서, 그러니까 사회과학과 인문과학간의, 혹은 사회철학과 문화철학간의, 아니면 문화비평과 문화철학간의 논의에서 사실은 상대방의 논의를 인정하고, 또한 동시에 그것을 자신들의 논의의 전제로 삼을 때에만, 각 진영은 자신들의 고유한 입장을 보다 설득력 있게 주장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필자는 판단하고 있다.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신칸트학파의 문화분석의 방법론을 상호 비교 고찰하여 그 의미를 되새겨보고, 그것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다.

This study aims to reveal the method of the analysis of culture between the School of Frankfurt and Neokantianism, especially focused on the viewpoint of the philosophy of culture and the criticism of culture. In terms of the School of Frankfurt, we will deal the viewpoint of Horkheimer, Adorno, Marcuse, and Benjamin. And relating to Neokantianism, we will discuss the viewpoint of Kant, Herder, and especially Cassirer. We know that the School of Frankfurt is interested in the criticism of ideology of mass culture, while the Neokantianism is interested in the origin, process, and future of culture. In this study, we will clarify a common feature and difference, and significance in terms of the analysis of culture, especially, relating to correlation with the philosophy of culture and the criticism of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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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극적 영화와 타자의 문제

이병창

대동철학회 대동철학 제24집(특별호) 2004.02 pp.295-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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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우리나라의 마당극에서 보는 것과 같은 관객과 배우의 교감이 영화에서도 가능한가를 묻는다. 이 물음은 카메라를 관객이 동일시함으로써 관객의 자아가 작가에 의해 구성된다는 보드리나 메츠의 주장에 대한 비판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서 이 논문은 우선 나와 타자 사이의 상호주관성이 가능한가 하는 철학적 문제로부터 시작한다. 현상학적 인식론에 기반을 둔 사르트르는 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지만, 동일한 현상학적 지반에 서지만 신체적 지각론을 제시하는 퐁티는 오히려 이에 대해 긍정적이다. 이 긍정에 대한 퐁티의 근거는 역사적 삶 속에 형성되는 신체들 사이의 호응이라 할 수 있다. 퐁티가 제시한 이런 가능성을 영화에 적용하자면, 우선 물질적 장치로서 카메라가 인간의 시선과 같은 지향적 의식성을 지닌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논문은 솝착의 이론에 따라 이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에 서서, 이어서 그렇다면 카메라와 관객의 두 시선이 어떻게 융합가능한가를 묻는다. 이 논문은 이런 융합의 가능성을 솝착의 이론에 따라 보여주려 했다. 이런 가능성은 결국 관객과 인물 사이의 마당극적 교감을 인정하게 할 것이다. 이런 분석을 통해 이 논문은 카메라와 관객의 두 시선의 융합을 통해 영화적 지각에서 현실감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파악한다. 이때 연관된 개념이 곧 퐁티의 지각 세계의 깊이 개념이다.

In this paper, I will question the possibility of sympathy between the character and spectator in a film as be shown in the korean yard theater. This question takes some critical consciousness to such theories of J L Baudry and C Metz as the passive constitution of spectator's self by the film maker through the identification of the film camera by spectator. To resolve this question I will proceed from the question of inter-subjectivity between I and the other in philosophy. Base on the phenomenological epistemology Sartre have denied this possibility, but though on the same tradition M Ponty confirms to this question. His ground for this confirmation can be said to be the correspondence between two bodies which has been constituted in the historical lives. If we apply this possibility to films, we must understand the premiss that an material apparatus like film camera can have any intentional consciousness like human eyes. Through the theories of V Sobchak I will show camera's intentional consciousness and the possibilitiy of correspondence between camera and spectator . And then we can feel justified to affirm the sympathy of the yard theater between character and spectator in a film . As conclusion I will say the feelings of reality in film scenes will be possible by the correspondence of two addresses of spectaor and camera following the concept of the depth of the perceptional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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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시의 시민사회론 재조명

이성백

대동철학회 대동철학 제24집(특별호) 2004.02 pp.319-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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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세기 후반 서구 사상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독창적인 맑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시민사회론을 특히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적 지배방식의 관점에서 고찰한다. 그람시 사상의 독창성은 그가 기존의 맑스주의의 이론적 틀을 넘어서서 맑스주의의 정치이론을 발전시킬 새로운 지평을 열은 데에 있다. 그람시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정치적 지배 방식을 탐구하여 물리적 강제력의 집행기구인 국가와 지배계급의 지적·도덕적 지도력인 헤게모니의 이중적 지배 방식을 제기하였다. 그람시에게 있어서 시민사회는 국가의 강제력이 작용하지 않고, 시민들 사이에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자율적이고 중립적인 영역이다. 이러한 자율적이고 중립적인 공간인 시민사회 안에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위시하여 여러 계급들 간에 이데올로기 경쟁이 이루어진다. 이 이데올로기 경쟁 속에서 지배계급은 "지적·도덕적 지도력", 즉 "헤게모니"를 행사하여 피지배계급들로부터 동의를 얻어낸다.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지배 방식에 대한 새로운 차원이 부각된다. 그런데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에는 몇가지 고찰되지 못한 점이 있다. 이데올로기와 경제적 조건과의 관계가 고려되지 않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체제 포섭에 있어서의 주관적인 조건, 즉 노동자들의 의식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 현대 시민사회의 구성적 본질은 이것이 근본적으로 경제사회라는 점에 있다. 이 점에서 그람시가 이데올로기적 영역을 시민사회로 지칭한 것은 적절하지 못한 개념 사용이다.그람시가 헤게모니적 지배의 문제를 분석했던 때로부터 오늘날 헤게모니적 지배는 그때보다 더욱 고도화되고 복합적인 형태로 발전하여왔다. 그람시 연구는, 그가 집요하게 추적한 현대사회에서의 지배에 대한 연구는 그의 담론 영역을 넘어 21세기 전지구적 자본주의적 현실에 맞는 지배 메카니즘에 대한 연구로 나아가야 한다.

Es handelt sich in dieser Arbeit darum, Antonio Gramsci's Theorie der Zivilgesellschaft aus dem Perspektiv der politischen Herschaftsweise der modernen kapitalistischen Gesellschaft zu betrachten. Die Originalität Gramsci's Denkens liegt darin, daß es das neues Horizont geöffnet hat, den marxistischen Theoriebereich zur marxistischen politischen Theorie zu erweiteren. Gramsci forschte die politische Herrschaftsweise der modernen kapitalistischen Gesellschaft, und stellte sie als dopplte Herrschaftsweise des Staates und der Hegemonie, der intellektuellen und moralischen Führungskraft der herrschenden Klasse dar. Durch die Theorie der Hegemonie wurde die neue Dimension der politischen Herschaftsweise der modernen kapitalistischen Gesellschaft entdeckt. In der Theorie der Hegemonie wurden einige Probleme nicht betrachtet. Das Verhältnis der Ideologie und der ökonomischen Bedingung wurde nicht betrachtet. Die subjektive Bedingung in der Subsumtion der Arbeiterklasse in das Herrschaftssystem, nämlich das Bewußtsein der Arbeiter wurde nicht analysiert. Das konstitutive Wesen der modernen Zivillgesellschaft liegt darin, daß diese eine ökonomische Gesellschaft ist. In dieser Hinsicht ist es keine passende Begriffsanwendung, daß Gramsci den ideologischen Bereich als Zivilgesellschaft bezeichnete Seitdem Gramsci das Problem der Hegemonie analysierte hat, haben sich die Formen der hegemonischen Herrschft höher und komplexer entwickelt. Die Erforschung der politischen Herrschaft in der modernen Gesellschaft, die von Gramscí́ angefangen wurde, muß weiter entsprechend der gesellschaftlichen Realität des globalen Kapitalismsus entwicke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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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소외론

이운형

대동철학회 대동철학 제24집(특별호) 2004.02 pp.339-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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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헤겔과 포이에르바하의 소외개념이 마르크스에게서는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살펴보면서, 마르크스의 소외론에 나타난 논리적인 문제점들을 검토해 본 것이다. 사회철학적인 면에서 그의 소외론, 특히 전기 마르크스의 소외론은 휴머니즘의 측면이 강한 탓에 아직도 충분히 가치있는 이론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논리적인 문제점이 있음을 규명해보고자 하였다. 그의 소외론은 실제의 역사적인 상황을 통해서 ‘실증성’을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과학적 이론이 되기 위해 갖추고 있어야 할 ‘합리적 정합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마르크스 소외의 논리적인 문제점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 마르크스가 주장한 소외의 원인은 소외발생의 필요조건 일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소외 라는 결과가 생겼을 때, 주어진 조건은 사유재산, 분업 등이었다.”는 것은 단순히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지, 사유재산, 분업 등이 주어지면 언제나 소외가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가 소외의 필요조건만을 제시하고서 사회를 변혁시켜야 한다는 필연성을 주장한 것은 성급한 주장이며, ‘과학적 예측’과 ‘예언’을 혼동한 것이라 하겠다. 둘째, 마르크스 소외론의 궁극목적은 노동자의 해방, 나아가 인간의 해방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억압을 수반하게 되는 ‘해방의 역설’(paradox of emancipation)이 발생한다. 이는 쾌락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쾌락을 인생의 궁극목적으로 삼아 의식적으로 추구하다 보면 많은 고통을 수반하게 되어 오히려 일체의 쾌락을 포기할 때 참다운 쾌락을 얻게 된다는 비난과 같은 성격의 것이다. 셋째, 마르크스는 관심(interest)과 논리적 당위성(logical oughtness)을 혼동하였다. ‘해방의 관심’이 해방을 해야하는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지도 않으며, ‘소외의 관심’이 소외를 극복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마르크스는 존재(is)와 당위(ought)를 엄밀히 구별하지 않은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의 소외론은 소외된 인간과 소외되지 않은 인간, 강제와 자율, 노동자와 자본가 등 초지일관 양분된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한 양분법에 의해서 그는 하나로 통합된 사회를 구현할 것을 제안하였다 물론 이 주장 . 속에는 조화된 인간의 구현이라는 긍정적인 요소도 깔려 있다. 그러나 하나로 단일화된 사회, 일원화된 사회로의 주장은 다원성의 파괴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이다. 인간의 다양성이 인정되어야 하듯 다원화된 사회의 모습은 그대로 인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소외는 다원적 사회의 구성원들이 다양한 ‘삶의 형태’ 속에서 얻은 윤리관에 의해 극복되어 나아가는 것이지 일원화된 사회에서는 결코 극복될 수 없다. 오히려 일원적 사회에서는 소외가 극복되기는커녕 대상화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으므로 통제된 사회가 지속될 뿐이다. 마르크스는 사회 구성원의 다원성을 무시한 채 소외의 다의적 개념을 고의로 양분시킨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the fallacy of over simplification)를 범한 것이다.

I, in this article, study how and why Marx changes the concept of alienation that was elaborated by Hegel and Feuerbach, and examine the problem of the logical inconsistence in Marxian modification of it, although his concept of alienation is nowadays meaningful in terms of humanistic aspect in the context of social philosophy. While the factual significance of his concept of alienation has been deserved to be in question through the historical situation, it still lacks the 'rational consistence' in order to fit a scientific theory. Thus I present its logical problem as follows. First, the cause of Marx's alienation itself cannot be a sufficient condition but a necessary condition. When he says that the given condition of the alienated result produces the systems of private property and labor division, he only means it for the possibility of alienation but not for its necessity. That just giving a minimum condition of alienation he argues the necessity of social reform then seems a sort rash claim. I guess he confused the scientific prediction with prophecy. Second, the real aim of Marx's doctrine of alienation is for the liberation of human beings, so it is accompanied with restraint, which is originated from the 'paradox of emancipation.' It is like that attaining our pleasure we are accompanied with suffering. At this point we prefer to give up any kinds of pleasure, and in result we achieve the real pleasure. Third, Marx confused 'interest' with logical 'oughtness.' In other words, the interest of liberation does not mean the logical oughtness of liberation, while the interest of alienation does not want the oughtness of the overcoming of alienation. He infringed the so called naturalistic fallacy of 'is' and 'ought.' Lastly, Marx's doctrine of alienation is based upon dualism in which the concepts of alienated and unalienated people, workers and capitalists, and 'their' freedom and suppression are always divided. Presupposing this dualistic way of thoughts, he ironically proposes a united society. Of course in this way we see his wish of a harmonized realization of human society. But a unified or centralized, if not harmonized in a positive way, society is in a sense accompanied with a negative meaning. It is because only a pluralistic society is able to secure different wants of various persons. The real overcoming of alienation is gained by diverse forms of life. Marx disregarded the diversity of society and committed 'the fallacy of over simplification' just dividing the society in dualistic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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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이식 : 윤리적 원칙의 적용

정세일, 이을상

대동철학회 대동철학 제24집(특별호) 2004.02 pp.363-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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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장기이식은 보편적인 치료수단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장기이식의 보편화는 기술적 가능성의 문제와는 다른 차원의 새로운 윤리적 문제를 야기한다. 이 글은 이런 문제상황에서 어떤 윤리적 원칙을 적용시킬 것인가를 논구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신체를 대상으로 하는 의료행위에서 자명한 하나의 윤리적 원칙으로서 제시되어 온 것에는 "전체성의 원리"와 "이중결과의 원리"가 있다. 이 두 원리는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그리스도교 윤리신학의 주요원리로서 논쟁되어 왔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장기이식이 가능해짐으로써 또한 장기이식의 도덕적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토대로서 활용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장기이식은 기증자와 수혜자, 의사 3자간의 문제이고, 3자간에는 반드시 자율적인 의사소통과 자발적인 "동의"가 필요하다. 그것은 당사자의 권리를 존중해 주기 위함이다. 동의와 관련하여 두 개의 문제상황이 설정되는데, 곧 "충분한 설명에 근거한 동의"와 "추정동의"가 그것이다. 앞의 문제상황과 관련해서는 동의의 필요충분조건을 논의하였고, 뒤의 문제상황과 관련해서는 추정동의를 받아들이기 위한 윤리적 원칙들을 논의하였다.이상의 논의에서 장기이식이 정당화될 수 있는 도덕적 토대를 논증하였고, 장기이식의 윤리적 정당화는 거꾸로 근대과학기술에 대한 오해와 인습적 편견을 시정하고 "윤리적 지평"을 확대하는데도 기여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Organ transplantation has been already used to be an available therapeutic means. But in spite of it's usefulness, it also brings about some problems that we should answer: First, an extracting an organ from one's body gives rise to a directly his/her dying, or at least the probability of dying. Second living needs are often confronted with dead interests in the grafting situation. Such problems are answered by an ethical argument. “The principle of totality” and “the principle of double effect” have been regarded to be the principle that can justify an experiment to make body a medical object. I have discussed that these principles can be also applied the ethical criteria of an organ transplantation to be allowed or not. Another principle that can be applied in the situation of organ transplantation is “consent”, which is the legal criteria to be able to transplant organs. In the legal viewpoint, two kinds of consent, namely informed consent and presumed consent are problematic. I have discussed that the necessary-sufficient condition of being allowed the consent in reference to informed consent and the ethical principle that can justify the proxy agents in reference to presumed consent. An ethical justification of organ transplantation requires also the development of the modern medical science and the honest understanding of it, the overthrow of the intolerant convention and the revolution of the ethical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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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시민사회와 초국적사회운동: 한국의 국제연대와 관련하여

임현진, 공석기

대동철학회 대동철학 제24집(특별호) 2004.02 pp.39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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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의 도덕 인식론― 이성과 감정의 도덕적 역할과 관계

전영갑

대동철학회 대동철학 제24집(특별호) 2004.02 pp.41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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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의 원리와 도덕적 판단의 근거를 확립하는 것은 실천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이 짊어진 가장 본질적인 과제 중의 하나이다. 선􍿞악과 같은 도덕적 구별이나 도덕적 판단의 원천이 이성에 있다는 합리주의적 전통이 지배적인 도덕철학의 역사에서, 흄은 선􍿞악과 같은 가치를 파악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근대의 가치인식론 또는 도덕적 인식론의 영역에 정서주의의 한 범례를 제공하고 있다. 흄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에는 이성과 대비되는 감정 또는 정서의 능력이 있어서, 오히려 이성을 제치고 가치파악과 도덕적 인식의 가장 근원적인 원리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 위에서, 본 논문의 목적은 감정과 이성의 역할과 관계에 관한 흄의 정서주의적 기초 논변을 고찰하고, 그럼으로써 흄 도덕 인식론의 기본구조와 특징 및 실천적 의미를 밝히는데 있다. 흄이 드러내고자 한 도덕 인식론적 논지를, 우리는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논의하고 있으며, 그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도덕적 구별은 이성으로부터 유래할 수 없고, 감정 즉 도덕적 정서에서 유래하는 것이며, 둘째, 감정 자체의 무표상적 성질이 근원적인 지각을 구성하는 인상에 다름 아니며, 반영 인상으로서의 감정과 차분한 감정이 실질적으로 도덕적 지각 즉 도덕 인식에 관여하고 있으며, 셋째, 이성이 정념의 노예라고 선언함으로써 이성주의를 전복하는 정서주의를 전개하면서도, 도덕적 지각과 구별 및 행위의 영역에서 감정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이성은 보조자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This Thesis aims to illuminate and analyze the basic arguments of Hume's moral epistemology in terms of sentimentalism. Hume's contribution to moral philosophy consists in a series of reflections on the epistemic source of moral judgements and in the characterization of the practice of morality, particularly of kind of reasons that support moral judgements. In this respect, Hume's central question is this: is morality a matter of reason, or is it a matter of sentiment? According to Hume, our moral distinctions and convictions, for the most part or in essential ways, derive from our passions rather than our reason. This is the basic thesis of his moral epistemology. Hume argues that morality is based on passion and sentiment, not on the discovery of facts through the use of experience and reason. Hume as a moral sense theorist influenced by Hutcheson criticized ethical rationalism, which claimed that virtue and vice could be ascertained by reason alone and ascribed the major role in moral judgement to the intellect. Criticizing ethical rationalism, Hume takes moral judgements to be passions, species of pleasure or pain caused by exposure to or contemplation of character traits. Sentiments or passions correspond to judgements of virtue and vice respectively. All exciting reasons or motives for action, are seen as grounded in passions, which supply the ultimate end of action. Reason's function is restricted to providing information on the means to satisfy these ends. Reason can only justify an act in the sense of recognizing it as being a viable means to an end which is determined by the passions. So Hume claims that reason is the slave of the passions. The conclusion that Hume himself draws from his arguments is that moral distinctions are not based on the exercise of reason but rather are the result of our inner sentiments. Hume, therefore, claims that moral distinctions cannot be derived from reason and morality is more properly felt than judg'd of. Hume's moral epistemology could be characterized as a form of subjectiv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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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스트}편의 세 가정과 변증법

최화

대동철학회 대동철학 제24집(특별호) 2004.02 pp.439-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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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소피스트편 251a-254b에는 사물들의 관계에 관한 세 가정에 이어 변증법에 대한 매우 신비적인 묘사가 나온다. 첫 번째 가정에서는 마치 사물들의 관계를 보장해 주는 것이 언어의 가능성처럼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나, 사실은 그 이전에 완전한 존재와 무가 포기되었다는 것이 진정한 이유이다. 두 번째 가정에서는 운동과 정지가 전혀 관계를 맺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절대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본성상 서로 배척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결국 사물들 중 어떤 것은 서로 섞이고 어떤 것은 섞이지 않는다는 세 번째 가정이 채택되는데, 곧 이어지는 변증법에 대한 일반적 묘사는 우선 각 개별 형상들이 아니라, 그 형상들을 서로 관계 맺고 분리하게 해주는 원리인 아페이론과 페라스를 암시하고 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변증법에 대한 묘사는 개별자로부터 하나의 형상을 파악하고 그 형상에서 더 높은 형상으로 올라가는 “여럿은 하나”라는 과정과, 하나의 형상에서 그 아래의 형상으로, 그리고 거기서 다시 최하위의 형상으로 내려가는 “하나는 여럿”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철학자는 특히 형상들 사이의 관계와 나눔의 원리와 더불어, 최고의 형상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은 결국 정신의 높이의 문제이며, 그것을 획득했을 때 그 이면인 분석력 또한 높아진다. 또한 여기서 논의된 일과 다의 관계를 모르면 철학의 본령을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Dans le Sophiste 251a-254b de Platon se trouvent les “trois hypothèses” sur la relation des choses et une bien mystérieuse description de la dialectique. Dans la première hypothèse, ce n'est pas la possibilité du langage, mais l'abandon antérieur de l'être absolu et du néant absolu, qui assure la relation entre les choses, bien que la discussion apparente n'en a pas l'air. Dans la deuxième, la coupure de la relation entre le mouvement et le repos n'est pas absolue, mais ils s'excluent seulement par leur nature, c'est-à-dire qu'ils ne sont que contraires, pas contradictoires. Enfin, on accepte la troisième qui dit que les uns se mélangent et que les autres, non. Tout de suite après vient la description générale de la dialectique qui ne signifie pas la simple relation entre les Idées, mais qui fait allusion au apeiron et au peras qui sont les principes du mélange et de la séparation entre elles. La description suivante decrit, d'un côté, la pente ascendante de “ta polla hen” qui saisit une Idée une à partir des choses particulières et qui, de là, monte sur des Idées supérieures, et, de l'autre, la pente descendante de “to hen polla” qui, à partir d'une Idée, descend sur des Idées inférieures et qui va jusqu'aux dernières Idées. Le philosophe doit saisir les principes du mélange et de la séparation en même temps que les relations entre les genres suprêmes. Il s'agit justement de la hauteur de l'esprit et de la puissance de l'analyse qui est son en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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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상사와 동학사상의 재음미

안현수

대동철학회 대동철학 제24집(특별호) 2004.02 pp.467-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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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상사는 역사적 한국 땅에서 존재해 온 다수 한국 사람들의 생활에 의미 있게 영향을 주었거나 그 생활의 영향을 받아 형성, 변모, 발전한 것으로 기록, 유물, 유적 등으로 통해 밝혀졌거나 밝혀질 가능성이 있는 사고, 의식의 내용으로서 인간 생활이나 사회 현상에 대한 나름대로의 체계를 이룬 견해, 관점, 태도의 흐름을 의미한다 하겠다. 이 논문은 한국사상 내지 사상사를 개략적으로 밝히면서 한국사상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동학사상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특히 무위(無爲)의 천인합일사상, 민(民)본위의 시민사회관에 주목하여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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栗谷의 善惡觀에 관한 연구

金起賢

대동철학회 대동철학 제24집(특별호) 2004.02 pp.495-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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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이후로 동아시아 정신문화를 主導해 왔던 성리학은 北宋의 理學家들에 의해 定礎되고 南宋의 朱子에 이르러 하나의 新儒學으로서의 규모를 갖춘 체계로 정립된다. 그러나 주자의 성리학은 세부의 철학 문제들에 있어 ‘未備’․‘未完’, 또는 해석이 分岐할 수 있는 ‘曖昧한 부분’을 內包하고 있었고, 이것들은 조선조의 16세기 주요 성리학자들에 의해 깊이 論究되어 代案이 제시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두 성리학 체계가 退溪 性理學과 栗谷 性理學이다. 이 논문은 善惡觀에 있어 율곡 성리학이 주자 성리학과도 다르고 퇴계 성리학과도 다른, 율곡 성리학만이 갖는 독자적인 입장을 규명한 시도이다. 율곡은 사단과 칠정에 대하여 氣發理乘‘一途說’을 主唱하였고, 인심과 도심에 대하여 人心道心‘終始說’을 공표하였다. 또한 情과 意를 특히 善惡과 관련하여 별개의 두 부류로 논급하는 情意二歧說을 비판하여 이것들이 별개의 두 부류가 아님을 力說하였다. 이 세 가지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율곡이 나름의 일관된 선악관을 유지했음을 확인해 보고, 그 관점이 根源的으로는 理氣 개념을 嚴格하게 적용하는 율곡 特有의 理氣論에 기초하고 있음을 究明한다. 선악관의 특색으로 말할 때 율곡 성리학의 선악관이 갖는 특색으로 이 논문은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율곡 성리학에서는 도덕(善)의 범위를 인간의 도덕 행위에만 한정하지 않고, 희로애락 등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행위, 더 나아가 우주의 모든 운행에까지 확대시킨다. 우주의 모든 운행이 善惡과 直結되는 것이다. 둘째, 모든 선을 예외 없이 모두 同等하게 性理가 발현된 것으로 간주한다. 율곡 성리학에서는 이 세계에 純善의 특수 집합이 따로 존재한다거나 또는 다같이 仁義禮智의 性理와 관련된 善일지라도 質的으로 또는 價値上으로 差異가 인정되는 일 등이 허용될 수 없다. 사단-칠정이 되었든, 인심-도심이 되었든, 율곡 성리학에서는 氣의 發․運行에 理가 타기만 한다면(氣發而理乘之) 예외 없이 모두 同等하게 善이다. 필자는 율곡 성리학의 이러한 선악관을 汎道德主義 선악관으로 규정한다.

本文論述韓國朝鮮朝性理學者李栗谷特有的善惡觀. 李栗谷的主要見解, 皆見於對某些說法的論辯批評中, 筆者選擇其中三個論題來加以分析: 一是四端七情論, 二是人心道心論, 三是對於所謂情意二歧說的批評. 李栗谷關於心性情意等之種種看法皆以理氣槪念之嚴格適用爲基礎, 這便是李栗谷哲學理論的特性, 他特有的善惡觀亦是基於此而成立的. 關於四端七情的討論, 是韓國的理學最重要的論爭, 由於李退溪和奇高峯的論爭首開其端, 朝鮮朝三白年之韓國名儒, 幾無不論及此問題, 李栗谷對四端七情的說法, 大抵是針對李退溪而發的. 李退溪認爲, 四端之情和七情是不同類的, 四端是‘理發而氣隨之’, 而七情則是‘氣發而理乘之’, 此稱爲理氣互發說或理氣分屬說. 李栗谷不同意李退溪的理氣互發之說, 而提出主張無論任何情皆無非氣發而理乘之的‘氣發理乘一途說’. 道心和人心的問題, 是宋代以來朱子學派理學家所常論的主題. 李栗谷提出所謂人心道心終始說, 按照他的說法, 始以道心而終以人心, 是可能的, 始以人心而終以道心, 亦是可能的, 所以道心和人心相爲終始. 依筆者之見, 此卽意謂着道心和人心並不是情, 而是情以前之來源而已, 因爲情則是已定爲善或惡的. 就善惡問題而言, 李栗谷的這種說法卻是針對所謂道心純是善的而人心則是兼善惡的之說法而發的. 依據同樣的思想及善惡觀念, 栗谷對於元代性理學者胡炳文以來一些朝鮮朝性理學者所支持的情意二歧說之說法加以批評了. 支持情意二歧說的人認爲, 情純是善, 意則兼善惡. 李栗谷對這種說法批評得嚴重, 而强調情並不純是善的. 無論任何情任何意, 天下並沒有純善的事物! 李栗谷之這些批評及甚精的辨論, 皆以他的理氣形上學爲基礎. 栗谷反對李退溪理氣互發之義, 只承認‘氣發而理乘之’, 他始終一貫維持, 氣依理而發者卽爲善, 不然者卽爲惡之看法. 此原則可以槪括李栗谷之善惡觀的大意. 這便在理學上意味着兩種意思: 一是天下根本沒有純是善的事物, 二是在道德善的範疇裏不容許任何差別或差等, 例如‘理發而氣隨之’的善與‘氣發而理乘之’的善之間的差等. 這種善惡觀念便是李栗谷性理學獨特的, 筆者稱之汎道德主義善惡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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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0원

중국 현대의 이데올로기의 현주소를 이해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 미학의 기원을 중심으로 하는 접근 방법을 통한 이해를 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이것을 전통 중국의 미학이론과 근대 미학이론, 그리고 공산주의적 미학이론의 세 가지 갈래로 나누어 고찰해 보았다. 고전 중국미학의 이론은 선진, 위진 남북조에서 명대, 그리고 청말 이전의 세 단계로 나누어 각각의 시기의 미학의 특징과 개념 및 범주관계를 살펴보았다. 선진시기의 미학이론은 유가와 도가로 대표되는데 중국 미학의 인식론적 근거를 확립한 것으로 파악된다. 위진 남북조의 미학이론은 사상의 해방과 더불어 심미의 각도에서 최대한 다른 가치를 배격하고 개성과 정조를 중시하는 방향을 보였다. 이러한 전통미학은 청 초의 왕부지와 엽 섭 등에 의해 체계화 되었는데 “정”과 “景”의 내재적 통일 및 직접심미감흥의 실현 등에서 나타난다. 양계초와 왕국유의 근대미학이론은 서양의 침략과 영향을 받아 고유와 외래의 접합의 시도 측면에서 행해졌다. 이것이 모택동 등의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 전파되면서 자생한 미학의 이론가들의 이론이 등장하여 오늘날 중국 미학의 뿌리가 되었다. 모택동의 미학은 한마디로 효용론, 도구론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철저하게 중국의 공산화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복무하는 성격을 지녔다. 결론적으로 보아 중국의 현재의 미학은 전통적인 요소와 근대적인 요소, 그리고 마르크시즘적 기원을 동시에 그 역사로 공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대상황과의 상호관계의 맥락에 있어서 영향을 주로 받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의 원인으로 다음 세 가지를 든다. 첫째, 중국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독재를 위한 목적지향적인 한계성, 둘째, 현재 중국 이데올로기의 탈 마르크스 화와 민족주의, 애국주의 경향으로의 경도로 나타나는 통치이념의 공동화, 셋째, 미학의 속성에 의거하여 볼 때 중국의 사상적 특성에서 유가적 미학의 특성의 생활화 경향과 노장 현학 계열의 자연주의 탐미주의 경향이 서로 혼재되어 개념의 혼용이 노정되며 정확한 개념 범주의 획정 및 이론의 체계화 등의 경시 경향이 두드러진다.

中國的美學思想作爲理解中國社會的基本原理极爲重要的途徑之一。美學思想的起源是美學理論的根据。着眼這一点我將美學的起源因素分爲古代傳統,近代及馬克思主義的三方面的起源因素。古代傳統因素是以儒家和道家爲主流,作爲整个中國美學思想的認識論根据。近代美學思想以梁啓超和王國維爲中心思想家。他們將西方理論介紹給中國,也帶有時代影響因素。毛澤東作爲馬克思主義中國化美學思想的代表,表現出美學爲政治服務的槪念。在結論,雖然共産注意意識形態爲主流美學思想,但是由于当代中國理論界的敎條主義式意識形態的嫌弃傾向及意識形態內容的空洞化傾向等趨勢,傳統美學理論逐漸代替意識形態范疇而作爲主流思想。同時也出現极端性民族主義和霸權主義的傾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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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의 學習觀 ― 전통적 해석을 중심으로

이재권

대동철학회 대동철학 제24집(특별호) 2004.02 pp.545-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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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춘추시대에 중국 고대 문명을 한 차원 끌어올린 위대한 인물이다. 그가 비록 정치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인격·학문·교육적으로는 크게 성공하여 중국 역사상 스승·학자·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周代에는 국가에서 실시하는 공교육만 존재했지만, 춘추시대가 되면서 사회구조상의 다양한 변화로 말미암아 사교육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공자는 사교육에서 최초로 크게 성공한 인물이다. 물론 그 자신도 성장 과정에서 공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자학·자습을 통하여 당시에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문화·교양·지식을 습득했다. 그는 교사가 되어 제자들의 교육에 전념하는 한편 육경을 찬술하는 등 학문 탐구에도 매진하여 양쪽 모두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뒷날 많은 학자들이 그의 학문관·교육관·학습관 등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은 이론 의존적이다. 따라서 어떤 관점·시각을 갖고 접근하느냐에 따라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공자의 경우에도 그렇다. 정통유학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전통적인 해석적 입장과 분석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새로운 해석적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이해와 설명이 도출된다. 본고는 전통적 해석의 입장에서 공자의 학습관을 중심으로 그와 밀접히 관련된 학문관·교육관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내용은 『논어』를 주요 텍스트로 삼아 분석하였다. 전통적 입장에서는 학문·교육·학습 등이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관계로 본다. 이 점이 이 논문과는 별도의 논문에서 다룰 새로운 해석의 입장과 다르다. 새로운 해석적 방법에서는 이 용어의 의미를 명확히 구별한다. 그 차이점과 차이의 원인 등에 대해서는 차후의 논문에서 밝혀 보도록 하겠다. 『논어』에서는 學·習·問·敎·誨 등의 글자들이 단독으로 한 단어의 역할을 하고 있다. 뒷날의 고전들에서는 글자가 합쳐져 學習·學問·敎育 등의 단어가 만들어지고 사용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한 글자 단어가 빈번히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현대에 들어와서 서양 학문이 들어오고, 서양 학문의 용어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대체로 두 글자 단어들이 채택됨으로써 오늘날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그것들을 사용하고 있다. 본고는 내용 뿐만 아니라 이 용어들의 개념 자체도 중요하게 다루었다.

Confucius is believed to be the best scholar and teacher in the Chinese history. He has studied and mastered classical books and ancient Chinese cultures. And what is brilliant in his real life is I think his teaching them to his students and developing them in his books. After him, many scholars have tried to understand and interpret his real meaning of knowledge, teaching and learning especially when they read his famous book, Lunyu. Their results were greatly different from their point of view especially to the three word, knowledge, teaching and learning. Some tried to understand them equal and closely related in their meaning and implications, and others tried to understand them totally different. The main point of this article is that the three key words, knowledge, teaching and learning are very important in the understanding of Lunyu and Confucius. And their meaning and implications are almost equal and closely related. The three words are only for the describing different aspects of education. Their name is different but their reference presumably seems to be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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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좌망'론

이종성

대동철학회 대동철학 제24집(특별호) 2004.02 pp.573-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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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0원

우리는 대부분 장자의 공부론에 있어서 그의 ‘좌망’론에 관하여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좌망’의 개념이 노장적 세계관, 특히 장자적 세계관의 한 특색을 발휘하고 있는 용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상 장자의 ‘좌망’은 장자 이후 형성되는 도교적 세계관에도 긴밀하게 연계되어 전승됨으로써 도가 철학과 도교가 상호 연관되는 중요한 계보로서의 지위를 담당하기도 한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하여 장자적 사유의 맥락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좌망’의 철학적 의미를 다만 장자의 취지를 좇아 현대적 시각에서 풀어보고자 하는 목표에만 충실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우선 무엇보다도 장자에 표명된 ‘좌망’의 논의 자료와 그 문맥을 구체적으로 검토해보고, ‘좌망’이란 도대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에 관하여 알아보았다. 장자는 ‘좌망’의 논의 위에서 ‘인의예악’과 같은 도덕 규범을 비롯한 감관적 지식 내지는 이성적 사려의 측면을 모두 부정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좌망’의 의미가 단선적인 의미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연한 세계로의 복귀의 방법인 동시에 그 복귀가 이루어진 경지이기도 하다는 측면에서 ‘좌망’이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논의는 부정과 긍정의 논의를 동시에 수용하고자 하는 도가적 논의의 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좌망’의 복귀 방법을 통한 부정의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자연한 상태의 긍정적 세계는 더욱 더 여실하게 드러난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좌망’ 속의 잊음보다는 도리어 ‘전도된 잊음’의 양태가 더 강하게 존립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좌망’ 속의 잊음과 ‘전도된 잊음’의 상반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좌망’과 ‘전도된 잊음’을 상대적으로 대비해 봄으로써 ‘좌망’의 의미에 관하여 보다 분명하게 천착해보고 양자의 접점에 ‘덕’의 존재가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덕’을 잃었을 때 우리는 ‘전도된 잊음’ 속에 앉아 있게 되지만, ‘덕’의 공능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좌망’을 통한 자연의 세계에 근원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논의를 중심으로 이 글은 장자의 ‘좌망’론에 함의된 철학적 의의를 우리들 일상의 생활 세계에서 찾아 봄으로써, 장자적 삶의 이상이 현실을 벗어나 초월적인 막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논구해보았다. 그리고 이로부터 장자의 ‘좌망’론은 현실적 생활 세계의 일상 위에서 그 일상성에 예속되지 않는 삶의 이상을 구현해내고자 제안되었다는 결론을 자연스럽게 도출할 수 있었다.

人們論庄子的工夫論時一般注視他的‘坐忘’論。因爲‘坐忘’范疇是老庄的世界觀,特別是發揮庄子世界觀特色的用語。事實上庄子的‘坐忘’不僅同庄子以后形成的道敎的世界觀緊密聯系幷傳承,而且在道敎哲學和道敎的相互聯系上占重要系譜地位。筆者通過本論文只是把庄子思維体系中的‘坐忘’的哲學涵義從現代人的角度出發按庄子的旨意進行解析爲目的。本論文首先具体檢討了庄子一書中表明的‘坐忘’的論議資料和其文脉。幷考察了‘坐忘’的涵義。在‘坐忘’的論議上可以發現庄子完全否定与‘仁義礼樂’相同的包括道德規范的感覺知識乃至理性思維的側面。‘坐忘’的涵義不只是單方面,它不僅是回歸自然的世界的方法,而且是實現回歸的境地。這一点上‘坐忘’具有双層性。此种論議是要同時受用否定和肯定論議的道家論議的類型。隨之可知通過‘坐忘’的回歸方法的否定的强度越强,自然狀態的肯定世界就更加如實地顯現。但是在現實上与‘坐忘’中的忘相比‘顚倒的忘(誠忘)’其形態更加深厚。對此考慮到‘坐忘’中的忘和‘顚倒的忘(誠忘)’具有相反性。從而相對的對比觀察‘坐忘’和‘‘顚倒的忘(誠忘)’,更加分明透徹‘坐忘’涵義幷确認了兩者的連接處有‘德’的存在。喪失‘德’時我們就坐在‘顚倒的忘(誠忘)’中,但同‘德’的功能共存時我們通過‘坐忘’可以同自然的世界成爲根源的一体。因此‘仁義礼樂’或感覺知識乃至理性思維方面是被定義爲忘的對象,但是‘德’我們不能忘。通過以上論議筆者在現實世界中尋找庄子‘坐忘’論中含蓄的哲學意義,探究到了庄子的生活理想不是超越現實的絶路。從此可以認識到庄子的‘坐忘’論体現了在現實的日常生活世界上,不当現實性奴隶的生活理想。理想的生活世界离不開現實的世界,但是爲眞理而活的人應可以超脫一切對象和世上事。這就是庄子所主張的活在日常不應被日常性誘惑或沉淪的生之理想方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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