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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 대한 물음은 신(존재)의 정당성과 관련하여 변신론의 형태를 띠며 중세기에 중점적으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근대철학 이후에는 오히려 악의 적극성이 부각되면서 악은 현실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이러한 관점은 쇼펜하우어 철학에서 정점을 이룬다. 본 논문의 목적은 바로 악을 실재하는 현실로 간주하게 되는 도정을 살펴보는데 있다. 주지하듯이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라이프니츠에서 악은 어떤 적극성을 띤 것이 아니라 존재의 결핍이다. 악의 존재는 논리적으로 하등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악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사물이 가져야할 규정을 결하고 있어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우리의 부적절한 고찰방식이 그렇게 표상한다는 것이다. 종래의 전통적인 악의 설명방식 대신에 칸트와 셸링은 악의 적극적 현존에서 출발한다. 칸트가 보기에 라이프니츠는 단지 무모순적 사고 가능성으로부터 존재의 원리를 이끌어 내는 오류를 범하였다. 칸트는 왼손과 오른손이 개념적으로 동일하다고하더라도 이것들을 실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악을 선의 결핍으로 간주하여(라이프니츠) 악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단순히 논리적으로 제거할 수 없다. 칸트에서 악은 선에 실질적으로 대립하는, 도덕법칙 위에 자기애를 두는 것에서 결과한다. 셸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악의 가능성을 존재론적 차원에 정위시킨다. 즉 악이 인간에서 발생하는 것은 선과 악의 존재론적 근원형상인 빛과 어둠이 비로소 인간에서 분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빛과 어둠의 분리 가능성은 이미 신에 의해서 인간에게 부여되었다고 본다. 즉 인간도 자연물과 마찬가지로 어두운 원리를 태생적으로 지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에서 악은 불가피하다. 선과 악은 실체적인 대립개념이 아니라 변증법적 대립개념이다. 칸트 및 셸링에 의한 악의 적극적 개념은 쇼펜하우어에 이르러 정점에 도달한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세부적으로 라이프니츠 철학의 역전이며 동시에 칸트 및 셸링의 악의 개념의 극단화이다. 이 세계는 가능한 한 최선의 세계가 아니라 최악의 세계이다. 악은 선의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선은 악의 부재일 뿐이다.
Die Frage nach dem Bösen war im Mittelalter das Hauptproblem, das in Bezug auf die Theodizee in der Philosophie und Theologie heftig diskutiert worden ist. Augustinus und Thomas von Aquinas waren Vertreter der Theodizee. Aber nach der neuzeitlichen Philosophie wurde erst die Posivität des Bösen ins Auge gefasst und das Böse ist als die existierende Realität anerkannt. Das Böese ist also nicht Mangel des Guten, sondern vielmehr bloß die scheinbare Abwesenheit des Guten. Die Umkehrung der klassischen Deutung des Bösen wurde am Ende der neuzeitlichen Philosophiegeschichte von Schopenhauer vorgenommen. In der schlechtesten aller möglichen Welten ist das Gute nichts anders als eine Absenz des Bösen. Aber davor gab es am frühesten Phase die Philosophen, die behauptet, es gebe in Wahrheit kein Böses und die Rede von Böse beruhe auf einer irrigen Betrachtungsweise der Dinge. Die Vertreter dieser Ansicht, die die Negationstheorie genannt ist, sind Leibniz und Spinoza. Nun aber wurde das Böse von Kant und Schelling als eine eigene Realität verstanden. Im Gegensatz zu Leibniz versteht Kant das Böse nicht als Negation, sondern als eine dem Guten entgegengesetzen Realität des Willens. Die Bedeutung des Bösen Kants wurde von Schelling noch aktualliziert aufgenommen und radikalisiert. Das Böse beruht nach Schelling auf einer sich durch den Freiheitsmissbruch des Menschen ereigneten Umkehrung der Prinzipien.
Vita Activa와 Vita contemplativa : 삶의 유형에 대한 개념사적 논의
대동철학회 대동철학 제56집 2011.09 pp.2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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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삶의 방식 내지 유형에 대한 논의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미 B.C. 4~5세기경 고대 희랍에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βίος θεωρητικóς 와 βίος πρακτικóς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이 주제에 대한 연구는 시작되었다. 이들은 이 개념 외에 그것들과 유사한 θεωρία와 βίος πολιτικός 등과 함께 인간의 유형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논의하였다. 이 두 용어는 후기 고대로 넘어오면서 로마문화권 속에서 라틴어 vita activa와 vita contemplativa로 번역되었고, 우선은 키케로나 세네카 등에 의해 로마의 지성인들의 삶에 대한 반성으로 심도있게 다루어지다가 이후 철학계를 넘어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사상가들에게서 신앙적 삶의 방식을 두고 광범위하게 다루어졌다. 그 후 르네상스와 근세의 논의를 거쳐 20세기 정치사상가 Hannah Arendt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논의의 역사를 보여준다. 전통적으로 vita activa는 정치가들이나 정치에 참여하는 학자들의 삶과 사회적 봉사를 주요과제로 하는 수도자들이나 종교인들의 삶을 지칭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vita contemplativa는 진리탐구에 매진하는 학자들의 사변적 삶과 사막이나 수도원 등에서 은거하면서 금욕과 명상 등 수행적 삶을 사는 은수자 내지는 수도자의 삶을 의미했다. 이 개념논의의 초기부터 고대 희랍철학자들은 물론 동서방의 기독교사상가들까지 정치계에 강하게 연루되어 있던 키케로 같은 일부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vita contemplativa를 vita activa보다 나은 삶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했던지 아니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보이듯이 이 두 가지 삶을 종합한 vita mixta를 이상적으로 삶으로 제시하였음을 볼 수 있다. 반면 현대에 이르러 이 주제에 대해 심도있게 연구한 한나 아렌트는 vita activa를 노동, 생산, 행위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면서 그것을 근본적이고도 필수적인 인간의 조건(conditio humana)라고 간주하였다. 이 두 가지 삶의 유형은 오늘날도 인간의 삶에 적용되는데, 특히 교수들과 같은 학자들의 삶과 종교인들의 삶에 적용된다. 우선 종교인들의 경우 중세처럼 여전히 은둔이나 도피가운데 명상과 기도에 주력하는 수행자들이나 좁은 의미에서의 종교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고 자기 사역에 충실하는 종교인들은 vita contemplativa에, 반면 봉사와 구제같은 사회사업에 주력하는 이들을 vita activa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학문의 전당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학의 교수들이나 학자들에게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오로지 상아탑에서 진리탐구나 학문연구에 중점을 두는 vita contemplativa 형의 학인들이 있는 반면에, 제도권정치나 행정기관에 참여하거나 아니면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교수들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도 대학교수나 학자들의 과제와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견해차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진리탐구자체가 사명이고, 후자는 진리의 실천이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개념으로부터 우리는 인간 삶의 다양한 패러다임을 도출해 낼 수 있다: vita voluptatis 또는 vita cupiditatis(욕망중심의 삶 내지 쾌락주의적 삶)의 유형, vita contemplativa(순수한 학문연구의 삶과 종교적 수행의 삶)의 유형, vita activa(사회실천적 또는 정치지향적 삶)의 유형, vita mixta(이론과 실천, 관조와 참여가 조화를 이룬 삶)의 유형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마지막 유형은 양쪽 각기의 비중에 따라 관상중심적, 활동중심적, 그리고 균형적인 형태가 있을 것이다.
Academic discussion on ways of human life has quite a long history, as βίος θεωρητικóς and βίος πρακτικóς already had been used in the hellenic philosophical texts in B.C. 4-5 centuries. Platon and Aristotle were the first scholars who engaged in research on it with those concepts and other as βίος πολιτικός and θεωρία. The greek terminology had been translated into Latin as Vita activa and Vita contemplativa which have been used from Cicero and Seneca through medieval christian thinkers Augustine and Thomas Aquinas to Hannah Arendt at the present time. Vita activa indicates mostly the lifestyle by which politician or scholar participate in political realm directly or by which priest or pastor take social works as his main task. In contrast to it, Vita contemplativa points originally to the speculative life of philosopher in ancient greek context as well as to the ascetical life of anchoret in christian background. From the history of the concepts, we find that ancient greek philosophers as well as western and eastern church fathers mostly considered Vita contemplativa better than or superior to Vita activa on the one hand, some thinkers suggested vita mixta, a third lifestyle, as the best one, trying to combine both on the other hand. Meanwhile, Hannah Arendt stressed on Vita activa as a basic and necessary conditio humana; according to her, human life is basically a Vita activa which consists of work, labour, and action. We can propose various paradigms of human life, above all of professors or scholars and clergy, from traditional discussion on Vita activa and Vita contemplativa: vita voluptatis or vita cupiditatis, vita contempaltiva, Vita activa, Vita contemplativa containing action, Vita activa containing contemplation, vita mixta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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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시대에 시공간 거리의 폐기로 인해서 로컬주민들은 로컬리티에 그들의 정체성을 부여할 수 없다. 오히려 로컬리티와 로컬주민들은 국가와 자본에 의해서 주변화되고, 타자화된다. 세계화시대에 국가의 지지를 받는 자본은 로컬리티를 상품화하고, 로컬주민들을 개인화한다. 이것에 대항해서 로컬주민들은 로컬리티의 타자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대안으로서 로컬공동체의 형성을 시도한다. 로컬공동체는 공동선에 대한 숙고, 공동체에 참여와 자치, 그리고 이것을 위한 시민적 덕목을 형성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이것은 개인과 (로컬)공동체의 동반적 변화를 위한 역사에 적극적인 참여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순환이다. 이 순환은 주민들의 참여와 자치로서 로컬공동체와 보편적 인권으로서 지구공동체를 연결시키고, 그리고 현재와 여기의 공동체와 과거와 저기의 공동체를 이어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순환은 로컬주민들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로컬공동체의 목적을 위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할 것이다.
Zur Zeit der Globalisierung können die Local-Bewohner wegen der Vernichtung der Zeitdistanz und Raumdistanz der Locality(Örtlichkeit) ihre Identität nicht zuteilen. Im Gegenteil werden die Locality und die Local-Bewohner von dem Kapital und Staat zur Otherization und Marginalisierung umgewandelt. Zur Zeit der Globalisierung verwandelt das von Staat unterstützte Kapital die Locality in die Kommodifizierung und die Local-Bewohner in die Individualisierung. Dagegen versuchen die Local-Bewohner die Bildung der Local-Gemeinschaft als die Alternaive, um die Otherization der Locality zu überwinden. Die Local-Gemeinschaft enthält die Erwägung über das allgemeine Gut, die Beteiligung und die Selbstregierung an der Gemeinschaft, und den Prozeß, für sie die bürgerliche Tugend zu bilden. Dies ist der weiterführende Kreislauf, für die begleitete Änderung des Individuums und der (Local-)Gemeinschaft an die aktive Beteiligung der Geschichte anzuschließen. Der Kreislauf können die globale Gemeinschaft als das allgemeine Menschenrecht an die Local-Gemeinschaft als die Beteiligung und die Selbstregierung, und die vergangene jene Gemeinschaft an die jetztige diese Gemeinschaft anschließen. In diesem Sinne wird der Kreislauf mitten unter den zusammenlebenden Menschen für den Zweck der Local-Gemeinschaft sein, wo die Local-Bewohner auch immer sein mö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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