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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119)
2000 (84)
1999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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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50)
1996 (48)
1995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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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27)
199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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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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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28)
1983 (12)
1982 (13)
1981 (16)
1980 (14)
1979 (9)
1978 (10)
1977 (9)
1976 (10)
1975 (6)
1974 (7)
1973 (6)
5,100원
본고의 목적은 일본의 문화정책을 고찰하여 새로운 문화정책의 방향을 제시하는데 있다. 연구방법은 정책대상으로서의 문화개념을 새롭게 정의하고, 현재 일본의 문화정책체계의 특징을 검토하여 문화정책을 유형화한 다음에, 동경도 에도가와구를 통해서 일본의 문화정책의 한계와 특징을 제시하고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정책대상으로서의 문화는 기존의 문화개념을 포함하는 한편 인간의 문화환경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일본의 문화정책체계는 문화정책의 방향, 문화정책조직, 문화관계법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문화교육정책, 문화생활정책, 문화교류정책, 문화특수정책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동경도 에도가와구를 통해 본 일본의 문화정책은 주민의 문화활동에 대한 참여장려, 행재정적 지원, 문화공동체의 강화, 전통문화재의 보호, 문화의 교류를 강조하는 문화의 국제화 등의 특징이 있다. 그러나 문화정책에 대한 문화향유자의 정책참여에 대한 제한, 지역문화관계법의 자율성의 제한, 문화를 주민의 통제수단으로서의 활용 등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문화정책은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방향에서 재고되어야 한다. 첫째는 행정 중심적인 문화정책에서 생활문화론에 기초한 생활자 중심적인 문화정책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둘째는 국제적 문화정책의 확대가 필요하다. 셋째는 대중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21세기는 문화공유시대이다. 따라서 문화정책은 민족적·정서적 경계를 초월해서 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하고 지역화가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어 지역에 의한 문화정책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5,500원
본 연구는 초기 도쿠가와(德川) 시대에 있어서의 大刀·大腋指 규제의 실태를 도쿠가와 정권의 마땅한 질서의 형성이라는 시점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서 초기 도쿠가와 정권의 정치와 일본 근세사회 성립기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하는 데 있다. 도쿠가와 정권 성립기 질서를 문제로 삼을 때, 刀劍의 규제는, 도검이 지배신분인 무사의 신분적 표식이었던 만큼, 일본 근세사회 신분질서 문제와도 관련되는 테마일 것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었을 때, 大刀·大腋指의 규제가 언제, 어떻게 시행되었는지를 검토한 다음에 그것은 어떠한 역사적 현실에 대응하여 시행되었는가를 幕藩制 국가 의 확립과정에 입각하여 추구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는 근세사회 형성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조명한 것이다. 본고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大刀·大腋指는「가부키(歌舞伎)者」들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막번권력은「가부키者」와 가부키 풍속을 단속할 때에는 大刀·大腋指의 금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막부와「가부키者」는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막부가 충효를 축으로 하는 상하 질서를 구상하고 있었던데 반하여「가부키者」는 하극상의 논리라고 할 수 있는 수평적 연대를 중시했기 때문이다.「가부키者」와 가부키 풍속은 막부에 의하여 철저하게 탄압되었다. 그 결과 그것들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그 종언을 고하게 된다.
5,100원
본고의 목적은 일본제국주의의 전개의 실제를 구명(究明)하는 분석의 틀로서 정치이론의 유용성을 제기하는 데에 있다. 이를 위해서 우선 제국주의 일반에 관한 정치이론을 검토했다. 다음에 이것을 토대로 하여 종래의 일본제국주의에 관한 이론을 재검토했다. 마지막으로 실제로 전개된 일본제국주의의 실태를 분석할 수 있는 이론적 틀로서의 정치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종래의 제국주의에 관한 연구는 제국주의의 경제이론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는데,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매우 유효한 분석의 틀로서 소위 제국주의의 정치이론을 선구적으로 제시한 것은 죤 겔러허(J. Gallagher)와 로널드 로빈손(R. Robinson)이다. 그들은 제국주의의 기존의 이론이 식민지화를 수반한 공식제국의 연구에만 경사되어 있어 선진자본주의국가의 일정단계에서 제국주의의 생성원인을 이끌어내려고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연구대상에 식민지화되지 않은 자유무역에 의한 비공식제국도 포함시킬 것, 제국주의의 출현 및 전개를 현지의 저항과 협력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파악할 것을 제창했다. 이러한 제국주의 일반에 관한 연구에서의 문제점은 기존의 일본제국주의의 연구에 있어서도 거의 똑같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들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제국주의의 정치이론을 일본제국주의의 연구에도 적극적으로 수용·적용해 나갈 것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부터 제국주의의 정치이론을 가지고 실제로 일본제국주의에 관한 연구가 행해질 때 새롭게 축적될 것으로 기대되는 연구성과는 다음과 같다. ①공식제국과 비공식제국의 개념을 가지고 총괄적으로 일본제국주의를 취급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가 전개된 전 지역과 전 기간의 실태를 유기적으로 파악하고 이에 기초해서 일본제국주의의 연구방법론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②일본제국주의가 세력을 팽창한 현지에서의 정치과정을 분석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전개를 보다 동태적으로 파악하고 일본제국주의가 지배를 지속할 때 실제로 직면하고 있었던 문제점과 모순점을 보다 객관적으로 추출할 수 있을 것이다. ③다른 제국주의와의 비교를 통해서 일본제국주의가 가진 보편성과 특수성을 함께 발견해 근대제국주의로서의 일본제국주의의 역사적 성격을 올바로 자리매길 수 있을 것이다.
6,000원
본고는 일본의 불평등조약 개정 100주년을 맞이하여, 일본 개국기의 개국파와 양이파의 대립의 결과 중, 명치유신 이후 근대일본의 진로방향을 결징지었던 연속적인 요소를 규명하고, 더불어 攘夷를 외치던 세력이 明治 신정부를 수립함과 동시에 별안간 돌변하여 開國和親을 표방할 수 있었던 이유를 파악하고자 했다. 이런 문제에 대해, 많은 연구축적에도 불구하고 기존 연구에서는 납득될 만큼 명쾌히 설명되고 있지 못하다. 본고는 먼저 전형적인 開國通商論과 급진적 攘夷論을 살펴보았다. 이들 모두 일본이「淸國의 覆轍」이나 영국의 식민지 인도와 같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강렬한 구국의식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급진적 양이론에서는 일본의 독립과 서양「문명」의 섭취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본 반면, 전형적 개국론에서는 양립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이 전형적인 양이론과 개국론 사이에 다양한 양이론과 개국론이 병존하고 있었는데, 본고는 개국론과 양이론의 대립적 측면보다는 공통적인 측면에 주목했다. 공통점은 첫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개국론과 양이론 모두 서양「문명」의 우월한 측면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개국론과 양이론의 공동의 궁극 목표는 조약개정과 해외웅비에 있다는 점이었다. 明治維新의 3걸 중 한사람인 大久保利通의 대외관을 통해서도 위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대외관의 변화과정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첫째 攘夷 단계에서 大久保의 양이 내용은 條約改正과 서양인 배척이었는데, 脫攘夷 단계에 이르러서도 조약개정의 논리가 서양에 대한 대항논리로써 연속하게 된다는 것. 둘째, 탈양이 단계에서「文明開化」를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도 서양의「長技」와 정치·사회제도에 대한 이해가 이미 양이 단계에서 존재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 셋째, 굴종적이라 할만큼 서양 열강과의 관계개선에 대한 강한 필요성이 개국화친을 표방하게 만들었던 것, 이 세 가지 점이다. 본고는 양이 단계에서 개국화친으로 전환된 과정을 볼 때 연속적 측면이 강했다는 점과,「디플로마시」적 양이로부터 개국화친으로의 전환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강조했고, 이 점 다른 연구와는 다른 지적이다. 그러나 大久保와 같은 변화도 양이론자들에 있어서 후퇴로 보여졌다. 이것을 타개하기 위해서 개국론과 양이론의 궁극의 목표 즉 條約改正 및「國威發揚·海外雄飛」가 강조되어 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정당화되었을 때 양이파에서 개국화친파로의 전환이 커다란 반발 없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5,400원
교육칙어는 근대일본 공교육의 성격을 규정하는 지침으로서, 취학이 의무였던 소학교의 교육활동이나 아동의 학생활동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메이지 초기부터 서구의 개인주의·자유주의 풍조가 지식계급의 사상·학문에 침투된 것은, 당시 정치집단에게는 대단히 우려되는 현상이었다. 이 위험사상의 침투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안전판이 바로 교육칙어였다. 근대일본의 교육계는 교육칙어에 의해 국가주의·군국주의의 성격으로 물들어 갔다. 교육칙어 체제하에서는 안녕질서를 해치지 않고 신민으로서의 의무에 반하지 않는 범위에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다고 했지만, 그들의 종교인 국가신도는 오히려 교육칙어와 뗄 수 없는 유착관계를 보였다. 이같이 교육칙어가 국가신도와의 결탁을 통해 덕육의 확립을 도모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교육칙어의 성격을 유교사상의 구현으로만 인식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근대일본의 국민교육에 대한 여망은 교육칙어를 통해 실현될 수 있었고, 수신을 중시하는 교육칙어는 학교가 교육을 독점하는 확실한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이로 인해 학교는 지육·덕육·체육을 모두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본교육에서는 지육은 학교에서, 그리고 덕육과 체육은 가정이나 사회에서라는 구분은 당초부터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 이와 같이 교육칙어는 일본국민의 정신세계를 조종하는 주술로서, 그리고 근대교육의 특수성을 낳는 원천으로서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4,600원
이 논문은 근대 히로사마현 에다지마쵸 어민의 조선해 출어와 이주어업의 역사적 사실을 당시의 에다지마어업조합의 관련 1차자료를 중심으로 밝혀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에다지마어업조합의 자료는 근대 한일어업관계의 자료조사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1차자료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다지마어업조합(1902년 설립)에는 <에다지마단체어업조합>(1908년 설립)이라는 조선해 출어를 하나의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 병치되어 있었다. 縛網과 온망 어업자의 공동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단체로, 도미와 멸치 어업자가 하나의 단체를 만들어 조선출어를 시도하고자 하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에다지마쵸 어민의 조선해 출어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1911, 12년의「조선해출어자 인원 및 종류조사」라는 문건이 유일하며, 당시 온망어업자가 200여명이나 출어하고 있었다. 에다지마쵸 어민의 조선해 출어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서, 1912년의「총대회회의록」과 1914년의「조선통어조합에다지마조합원명」등의 문건이 있다. 이 외에 조선해 출어를 장려하는 내용의 문건들이 많이 있으나, 1913년에 아키군에서 만든「조선해출어장려규정」이 주목된다. 에다지마쵸 어민의 조선내 이주어업에 대하여 이주자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1913년의「제9호안」이 유일한 문건이다. 조선이주를 사유로 15명을 조합명부에서 제명한다는 내용이다. 에다지마 어민의 조선이주를 추정할 수 있게 하는 자료로서 1919년의「이주장려건 시달」과「이주장려규정」을 들 수 있다. 조선수산조합과 히로시마현 수산조합에서 조선에「廣島村」을 건설하여 가옥과 토지를 무상으로 빌려주고 막대한 이주장려금까지 교부하여 이주어업을 장려하려는 것으로, 이주계획도 수립하고 있다.
4,300원
表象(representation)은 어떠한 문화가 자기의 입장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쓰이는 이미지이며 하나의 문화가 자기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기 위한 행위이다. 그것들은 상당 부분 문화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表象文化라는 것이다. 에도시대에 있어서도 그 표상들은 매우 개별적이며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이유와 함께 문화에 의해서 구축된다. 따라서 무사의 표상, 초닌(町人)의 표상, 그 어떠한 표상이든 그것은 문화행위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다. 추신구라(假名手本忠臣藏)는 그에 앞서서 나온 아코사무라이(赤穗浪人)의 복수담 이야기에 근거하여 새로운 해석과 취향을 고안, 당시 에도문화를 꽃피웠다. 에도시대의 서민들은 복수사건에 자신들의 감정을 이입하고 마음도 기댈수 있는 고전적 권위를 무의식적으로 늘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회의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서 발언한다는 것이 점점 구차해지고 또한 그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던 에도 서민들의 정신이기도 했을 것이다. 추신구라의 변형이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는 것도 그러한 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본고의 연구대상인「忠臣藏物」의 게사쿠(戱作) 또한 그러하다. 에도게사쿠(江戶戱作) 중에서도 특히 기○시(黃表紙)는 추신구라를 글쓰기를 새롭게 지각하도록 반재현성을 겨냥했다. 기○시의 문학사적 의의는 여러 측면에서 논의가 가능하다. 대화성, 자기반영성, 비평성, 문학사적 발전의 동인, 관계로서의 텍스트성, 독자중심의 수용적 특성, 유희성, 예술성 등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본고의 중심 텍스트인「忠臣藏卽席料理」에서는 패러디가 지닌 반재현주의와 창조성에 대한 회의라는 관점에서 가장 본질적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기사회생의 추신구라로서 자리잡아 온 권위는 그렇게 쉽사리 무너질 정도로 나약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당시 문명비평의 입장에 서있기도 했던 게사쿠 작가(戱作者)들은 그 거대한 작품을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질 안 했다. 그들은 하나의 유희감각이기도 한 게사쿠 정신으로써 추신구라에 대한 기존의 인식 덩어리를 산산히 부숴 버렸다. 이처럼 기○시는 선행 텍스트를 빌어 표상의 한계와 선행 텍스트에 깃든 권위를 되돌아보게 하는 자기반성적 형식인 것이다. 현실과 유리된 언어적 유희나 빗대기, 현실 문맥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기대지평의 전환(본고의 경우,「추신구라의 새로운 지평」), 기존 작품에 대한 파괴 등의 제반 양상은, 문학이 현실을 반영해 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게사쿠 작가의 작업에서 흔히 보이는 특성들이다. 이런 특성들을 통해 게사쿠 작가는 문학이라는 허구의 공간 속에서 자유를 경험하고 새로운 창작에 활력을 부여해 다이내믹한 表象空間을 구축한 것이다.
일본적 대인관계를 규제하는 문화적 규준 (規準) - '하지(恥)'와 '쓰미(罪)'의 문화유형론의 비판적 분석 -
한국일본학회 일본학보 제43권 1999.12 pp.593-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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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을 뛰어넘는 지구촌시대에 있어서 인류의 공통과제는, 이문화 이해에 대한 적극적 태도의 양성과 세계적 시야와 전망을 가진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첫째 자문화와 여러 이문화의 특성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상호이해를 위한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고, 둘째 새로운 문화와의 접촉에서 경험하는 문화충격을 극복하기 위한 이문화에 대한 적응력을 기르는 것이고, 셋째 학교나 직장에서 교육을 통해 실제적 이문화간 대인관계나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을 양성하는 것이다. 특히, 유학생이나 해외주재원, 국내의 다국적 기업관계자 등에 요구되는 대인관계와 교섭, 문제해결의 능력을 양성하는 일은 시급한 일이다. 일본인의 하지나 `세켄테이(世間體)` 의식에 뒷받침된 사고와 행위, 특히 대인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하는 문제에 관한 연구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일본인의 사고와 행위, 특히 대인관계의 배후에 내재된 하지와 쓰미라는 문화적 규준에 대해, 몇 가지 관점에서 기존의 논의들을 분석적으고 검토해본 결과, 다음과 같은 특징과 한계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첫째, 서양의 쓰미의식에 기초한 하지의 문화유형론적 대비틀로는 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일본의 하지의 개념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행위기준의 외재성과 내재성에 따른 하지와 쓰미의 구별은 서양의 종교적 윤리관에 근거한 것으로서, 세속적인 윤리규범인 하지를 동일선상에서 대칭적으로 비교한 방법상의 오류를 범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서양의 쓰미와 일본의 바츠(罰)라는 동계변이를 크로스 체크함으로써(이 점에 대해서는 서양의 `하지의식`도 포함), 이질대비의 함정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딕트가 규명한 `하지(사쿠다의 公恥)`는 일본인의 특이한 대인관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에 여전히 유효한 개념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민속용어(folk term)로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세켄테이`의 개념과 그것에 규제되는 대인관계의 일반적 성격에 관한 논의가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하지와 쓰미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가 거의 모두 사회심리학이나 지식사회학적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실제 일본인들의 생활장면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평가되고 있는가에 대한 현장론적 접근과 분석이 요구된다. 이러한 접근은 기존 논의들의 타당성을 검증하고, 보다 엄밀한 가설을 세우는 데에 효과적으로 활용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상에 대한 체면의식이라면 한국사회도 일본사회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 글에서 밝혀진 하지와 쓰미에 관한 문화유형론의 특징과 한계들이, 사회구조상 여러 가지로 유사한 점이 많은 한국과의 동계변이의 크로스 체크(비교연구)에 유용한 참고자료로 활용되기를 기대해 본다.
일본문학사 재편성의 제의 - 스즈키 사다미(鈴木貞美) 저 (著) 『일본의 「문학(文學)」 개념 (槪念) 』 (998, 작품사(作品社)) 을 중심으로 -
한국일본학회 일본학보 제43권 1999.12 pp.609-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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