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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한철학 [PAN-KOREAN PHILOSOPHY]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범한철학회 [Bumhan philosophical society]
  • pISSN
    1225-1410
  • eISSN
    2713-9344
  • 간기
    계간
  • 수록기간
    1987 ~ 2025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철학
  • 십진분류
    KDC 105 DDC 105
제51집 (17건)
No
1

曙宇 全秉薰의 철학방법 고찰

김학권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1집 2008.12 p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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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0원

曙宇 全秉薰(1857~1927)은 서구문명이 세차게 밀려들어 우리 전통사회의 전반을 뿌리부터 뒤흔들었던 격동의 개화기를 살다간 조선말기의 학자였다. 그는 조선왕조가 종말을 고하는 참상을 목도하고 관직을 사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중국 망명 후 처음에는 도교의 수련에 정진하다가 중국의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서양철학에 접하게 되었고, 서구문명의 발달 원인이 경험과 실천을 중시하는 그들의 철학정신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만민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새로운 철학의 탄생이 필요함을 자각하고, 도교를 중심으로 유가사상과 불교사상, 그리고 서양의 철학사상을 調劑하여 자신의 ‘精神哲學’을 건립하였다. 그럼 전병훈은 어떠한 방법으로 자신의 ‘정신철학’을 건립하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는 古人들의 사상을 근본사상으로 제시하고, 그 위에 자신의 새로운 견해를 덧붙이는 溫故維新의 철학방법을 사용하였다. 둘째, 그는 도교사상을 중심으로 유가사상과 불교사상, 그리고 서양철학을 융합하는 圓融會通의 철학방법을 구사하였다. 셋째, 개인적 이상인격으로서의 眞人과 至德을 펼쳐 세상을 구제하려는 聖人을 함께 지향하는 內聖外王의 철학방법을 견지하였다. 넷째, 『天符經』을 첫 머리에 수록하여 ‘정신철학’의 精華로 제시함으로써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고, 우리의 도덕․정치철학을 새로운 ‘정신철학’으로 발전시켜 나가려는 민족주의적 철학방법을 지향하였다.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볼 때 전병훈의 서양철학에 대한 이해는 자신의 철학을 정립하면서 원용한 철학방법의 한계로 말미암아 서양문명의 발달을 가져다 준 원동력이 되었던 서양 근대의 합리주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고, 우리의 입장에서 서양철학을 해석하고 변용하여 수용함으로써 결국 東道西器論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되었다. 이점이 바로 전병훈 철학의 한계였다.

全秉薰(1857~1927)是生活在朝鲜末期的一位学者。当时,西方文明大量涌入,传统社会基础受到强烈冲击。在朝鲜王朝灭亡后,金秉薰流亡至中国。为了建立自由和平的世界,他以道教为中心,结合儒教、佛教以及西方哲学思想,创立了新的“精神哲学”。本文主要考察了全秉薰是以何种学识理论建立“精神哲学”的。概括来说,可以归纳为以下四点来进行说明: 第一,采用“温故维新”的哲学方法。在古人思想的基础上,增加了自身新的见解。 第二,运用“圆融会通”的哲学方法。以道教思想为中心,综合了儒家思想、佛教思想以及西方哲学思想。 第三,始终坚持儒家传统“内圣外王”的哲学方法。充分展现了自身“真人”和“至德”的理想人格魅力,决心和圣人一起来拯救世界。 第四,始终不渝地采用“民族主义的”哲学方法。将“天符经”收录于首页,并将其作为“精神哲学”的精华,大力宣传“民族自信心”,将我国的道德、政治哲学发展成为一门新的“精神哲学”。

2

이이(李珥)의 ‘기묘함[妙]’에 대하여

이향준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1집 2008.12 pp.2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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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0원

이 글은 이이(李珥)의 이기론을 형성했던 고유한 사고 양식이 포함하는 기묘함의 내용과 성격이 무엇인지를 논증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첫째, ‘리는 무위’라는 진술과 ‘리는 주재’라는 진술을 둘러싼 혼란스러운 해석들은 리에 대한 명제적 진술과 은유적 진술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둘째, 이를 통해 이이의 이기론은 명제적 진술로서의 ‘무위’와 은유적 진술로서의 ‘주재’라는 주장을 양립시키려는 이중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철학적 사유의 필요성으로부터 출발했고, 이러한 사유는 필연적으로 은유적일 수밖에 없는 이론적 구조를 파생시키게 되었음을 드러내려고 한다. 셋째, 이 과정에서 나타난 이이의 은유적 사유가 갖는 특징은 서로 이질적인 두 가지 개념 영역을 선택해서, 그것을 해체, 부분적 선택, 그리고 재구조화하는 독특한 사유의 양식에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자 한다. 넷째, 이상의 논의를 근거로 할 때 이이의 이통기국은 ‘이일분수’라는 이론적 해석과 ‘기일분수’라는 이론적 해석을 동시에 가능하게 만드는 이중성을 갖고 있음을 밝힐 것이다. 이이 이기론이 한편으로는 명료하면서도 모호하고, 진부하면서도 독창적인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은유적 사유가 갖는 기묘함으로부터 연유한다. 결국 이이 이기론은 이기지묘(理氣之妙)라는 낱말 때문이 아니라, 이기론적 구도를 형성하고 조직하는 바로 그 사유 양식 자체 속에 기묘함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這一篇論文論證了, 形成李珥的理氣論之特有的思惟模式所包括的“奇妙”的要素, 就是由于他的隱喩的思惟形式所內在的思惟框架. 爲了論證這一目的, 筆者考察了幾個側面, 其具體的內容如下: 第一, 對圍繞“理是無爲”和“理是主宰”的解釋所發生的混亂, 筆者論證了這一混亂就是由于對“理”的兩種解釋: 因爲他們沒有區分對“理”的解釋存在着“命題的解釋”和“隱喩的解釋”. 第二, 筆者認爲李珥的理氣論, 是由于爲“命題的解釋”和“隱喩的解釋”中的“主宰”這一槪念的調和, 對隱喩的思惟所必要的內在的要求. 第三, 因爲這一內在的要求, 李珥的隱喩的思惟選擇了相互異質的兩個槪念領域, 通過解體, 部分改造以及再構造化, 他的理論體制具有了特有的思惟框架. 第四, 因爲他的理論體制具有這樣的思惟框架, 他的“理通氣局”的理論體制, 不僅在“理一分殊”的觀點, 而且在“氣一分殊”的觀點, 都存在着可以解釋的兩種可能. 李珥的理氣論所一邊是明白的又一邊是模糊的, 一邊是陳腐的又一邊是獨創的, 發生這樣的情況所根本的原因, 就是由于隱喩的思惟之“奇妙”的要素. 綜合而言之, 這一問題包含了如下的內容: 李珥的理氣論不是因爲“理氣之妙”這樣的槪念, 而是由于他的思惟框架內在的形式所造成的隱喩的思惟之“奇妙”的要素.

3

壺山 朴文鎬의 明德과 至善에 대한 고찰

이점수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1집 2008.12 pp.5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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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0원

壺山 朴文鎬(1846~1918)는 조선 후기 성리학자로서, 그가 살았던 조선말부터 개항초기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격변기였다. 당시 조선의 지성인들은 근대화지상주의자, 위정척사파, 민중적 근대화론자 등으로 나뉘어 시대의 흐름에 대처하고 있었다. 유교주의자들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溫故的 사상으로 전통 유학을 계승하려는 정통 성리학자들과 知新으로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이려는 실학자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호산이 살았던 시기는 이미 주자학적 세계관이 쇠퇴하고 실사구시의 유학, 서학, 기독교적 세계관이 부상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정통 유학은 구학문으로 치부되기에 이르렀다. 조선 유학의 명맥이 끊어져 가는 상황에서, 호산은 경학을 평생 자신의 삶으로 생각하고 조선 유학을 집대성하고자 노력했다. 그렇다고 해서 구한말의 성리학자들을 시대정신에 뒤떨어진 인물로 폄하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오히려 이들의 사유는 무주체적 근대화, 물신주의화로 요약되는 식민지적 근대성에 대한 비판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또한 호산에 대한 연구는 조선 중기 성리학자와 후기 실학자 중심의 논의에 치우친 한국 유학의 연구 풍토에 대한 반성․보완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明德’과 ‘至善’의 개념은 『大學』의 세 강령의 일부로서, 유교적 인간관과 공동체 윤리의 핵심을 담고 있다. 따라서 ‘平天下’ 혹은 ‘大同社會 건설’을 위해 유학자들이 이에 대한 논의를 정치하게 다듬는 데 힘쓴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호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호산은 明德을 개인윤리의 관점으로 파악한다. 그는 성선설의 전통을 이어받아 인간 본성이 선하다고 전제한다. 다만 불변하는 본성인 性(理)을 감싸고 있는 가변적 본성인 心(氣)이 외물에 의해 흔들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어떤 이는 성인이 되기도 하고 혹은 범인이 되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심성을 理氣論的 관점에서 설명하면서, 北溪陳氏의 설을 비판하는가 하면, 선유인 율곡과 우암의 학설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는 우인이라도 본성대로 心을 연마하면 현인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가르친다. 호산은 至善을 관계성의 윤리, 사회 윤리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다. 개인윤리가 승화되어야 할 궁극적 지향점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모름지기 인간은 ‘明明德’의 경지에 이르러 仁義禮智인 四端이 氣質之性에 의해 흐려지지 않게 해야 하고, 하늘의 이치에 부합하는 ‘지선’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 윤리로서의 중용의 경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실현되는 공동체적 최고선을 뜻한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호산은 관계성을 뜻하는 덕목인 信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교사상은 공동체적 가치관을 담고 있는 데 비해, 서구 개인주의 사상은 공동체의 가치에 짓눌린 개인․자아의 가치를 회복시킨 데 그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개개인이 ‘명덕’을 밝게 해서 개인과 공동체가 ‘지선’의 덕, 중용의 경지, 평천하의 세계에 이르고자 가르쳤던 유교적 가르침은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변증법적 통일을 지향하고 있다. 이는 전환시대에 호산이 탐구했던 사유의 핵심이었다.

Hosan Park Mun—Ho (1846—1918) lived during the times ranging from the end of Chosun Kingdom to the beginning of the opening of ports, a period of severe social upheaval without precedent in the Korean history. It was the end of the Chosun Kingdom when the Classic Chinese was treated as an old—fashioned science as toadism was fading out while new sciences were being introduced from the West, instead. It may be thus true to say that those who had studied the authentic teachings of Confucianism for their whole life became virtually extinct around this age. Since the introduction of Confucian scriptures into Korea, studies on Chinese classics and metaphysic of Confucianism were conducted actively. Although lots of attention was paid to the authentic teachings and scholars of Confucianism at least upto the middle of the Chosun Kingdom, studies on scholars during the end of Chosun Kingdom didn't seem to have been briskly performed. This is why the present paper is motivated to deal with Hosan Park Mun—Ho, a scholar of Chinese classics and metaphysic of Confucianism who lived from the end of Chosun Kingdom upto the beginning of opening of Korean ports. He viewed the fair conduct of virtue (明德) from his personal ethical angle. It is mental disposition (心性). Mentality (心) may be divided into sacred and vulgar one whereas, however, there is no difference of wisdom and foolishness in disposition (性). As the fair conduct of virtue is pure by nature, man and material inherit and posses the same nature from heaven. Despite the division of the fair conduct of virtue into mentality and disposition, it shall be defined as a concept of disposition. The reason why it was mentioned that mentality may be divided into sacred and vulgar is because mentality may have bright as well as dark aspects in it. As mentality and disposition are items of virtue that can be cultivated by an individual, they are regarded here as a process leading to the extreme good (至善) by means of cultivating the Four Virtues (仁義禮智 or kindheartedness, righteousness, politeness, and wisdom that have been taught by Confucianism to be the basic virtues for man to foster). Hosan understood the extreme good as a concept of trust (信), which might be related to sociality from socio—ethical viewpoint. It could also be interpreted as existing in trustworthiness in the form of interdependence and coexistence among people. Although no reference to the extreme good is found in the text in the Chapter 3, Section 5, it can be said to be included in it if examined as to the context of the former as well as the latter segments. Furthermore, it is said that to stay in knowledge (知止) is a condition precedent to reaching the extreme goo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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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子의 心性論 硏究

연재흠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1집 2008.12 pp.77-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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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00원

孟子는 孔子의 ‘爲仁由己’의 정신을 계승하여, 도덕실천의 가능근거를 인간의 내면에서 확립하고자 하였다. 맹자는 告子가 말한 ‘生之謂性’의 인성론에 반대하고, 仁義禮智의 도덕원리가 인간에게 선천적, 보편적으로 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인간과 기타 존재의 차이점을 價値의 차원에서 규명한 것이다. 맹자는 인간의 固有한 善性의 존재를 不忍人之心, 四端之心을 통해 설명한다. 四端之心의 발휘를 통해 인간은 자산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本性의 구체적인 의미를 자각할 수 있다. 이것은 本心의 反省과 自覺을 통해 인의예지로 대표되는 도덕원리를 스스로 파악하여 확립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사고와 행위를 스스로 조절해 나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이 선천적, 보편적으로 善한 本性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固有한 本心이 있음을 의미하며, 本心의 활동은 곧 本性의 실현을 뜻한다. 따라서 맹자에게 있어 本心과 本性은 그 실질적인 의미에 있어 일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맹자는 도덕실천의 원동력인 本心, 四端之心의 확충과 배양을 중시한다. 本心의 작용이 상실되지 않도록 보존해야 할 뿐만 아니라 본심의 역량이 강화될 수 있도록 수양해야 한다. 儒家는 맹자의 性善說을 통해 도덕실천의 가능근거를 인간의 내면에서 확립할 수 있게 되었고, 인간의 道德的 自律性과 主體性을 강조하는 맹자의 철학은 후일 陸象山․王陽明이 건립한 心學의 기초가 되었다.

就先秦儒學的發展階段而看, 孔子創立了以‘仁’爲代表的思想體系, 而到孟子和荀子時期漸次深化而擴大其理論的內涵和領域. 不過, 孔子未嘗明確地指明踐仁的內在而普遍的根據是什麽. 所以孔子之後, 圍繞著道德實踐的可能根據或成聖成賢的內在根據發生孟子和荀子之間的理論分岐, 由此促進儒家進行對於人間的心性的深入硏究. 孟子反對告子所謂‘生之謂性’的觀點主要理由就是用來像‘生之謂性’那樣的說法決不能顯示出人類和動物之間價値上的差別性. 在孟子那裏, ‘本性’是人之爲人的根本理由. 從存在的方面來看, 無論男女老少, 或善人惡人, 所有人類都先天地固有著本性. 從價値的方面來看, 本性旣是道德實踐的可能根據, 又是人生之眞正價値所在. 在孟子看來, 仁義禮智並不是從外面注入的, 而是人類固有的本性. 這就意味仁義禮智作爲代表而包含所有道德原理, 已經爲人所固有, 所以能够說人類之本性是善的. 至於人心之問題, 到孟子, ‘心’範疇才正式被引入中國傳統哲學之中心. 在孟子之思想體系中, ‘四端之心’, ‘本心’, ‘良知’等諸槪念占有著樞紐性的地位. 孟子把‘心’闡明爲能眞實而具體地呈現人類之本性的道德心. 這就是說, 人類之本性以潛在狀態內在於主體, 因此必定通過本心之自覺和反思, 才會呈現於日常生活裏. 依孟子之思路來看, 人類能够通過盡量發揮本心之功能而體會到本性在於自己裏面. 這就是說 , 實踐道德的可能根據從天轉移到人類的內部. 由此看出, 在孟子哲學裏, 人類能够由本心的自覺和反思而確立自律的道德原則, 而且自主而自發地實踐具體的道德規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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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절의 선천역학에 대한 청대 역학자들의 비판 고찰

김진근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1집 2008.12 pp.10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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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0원

이 논문은 소강절의 선천역학을 비판하는 청대 역학자들의 견해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소강절의 선천역학이나 이에 대해 비판하였던 청대역학이나 모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조(思潮)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이 논문에서는 후자가 전자를 비판하는 관점을 잡아 논의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청대학자들과 관련하여서는 주백곤의 견해를 원용하여 소강절의 선천역학을 비판하였던 청대역학자들로 한정하였다. 논의의 순서로는 먼저 가일배법과 「선천도」를 소강절 역학의 정수(精粹)로 규정하고, 그 소강절 선천역학의 유래와 관련한 비판, 가일배법에 대한 비판, 「선천도」에 대한 비판을 차례로 고찰하였다. 그래서 청대 역학자들이 소강절의 「선천도」가 도교의 양생술에서 유래하였다고 함을 거론하였다. 따라서 ‘먼저 사람이 된 뒤 사회 활동을 하라’는 유가의 종지(宗旨)와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여 그들은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함에 대해 살펴보았다. 가일배법에 대한 청대 역학자들의 비판은 ‘20→21→22→23→24→25→26’와 같이 ‘2n’으로 표기할 수 있는 과정이 객관 세계나 『주역』 경전문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황종희․종염 형제, 모기령, 호위 등의 가일배법 비판론을 고찰하여 보았다. 「선천도」에 대한 비판과 관련해서는 먼저 왕선산의 비판 종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황종희, 호위, 황종염, 혜동 등의 비판을 고찰하여 보았다.

這編文章是考察對邵雍先天易學的淸代易學者們的批判. 邵雍先天易學和對它批判的淸代易學都是作爲一個時代思潮的性格, 但是這編文章是把握後者批判前者的觀點來展開的. 而且關於淸代學者們, 採取朱伯崑的見解來局限於批判邵雍先天易學的淸代易學者們. 首先了解加一倍法與先天圖是邵雍易學的精粹了之後, 進而一箇一箇考察了關聯於先天易學的來源的批判․加一倍法的批判․先天圖的批判. 我討論了關於淸代易學者們以爲先天圖來源於道敎的養生術. 所以我認爲邵雍先天易學不是符合於‘修己․治人’的儒家宗旨來, 考察了淸代易學者們的對先天易學之太嚴格的批判態度. 我們可以了解對加一倍法的淸代易學者們的批判是 ‘20→21→22→23→24→25→26’的 ‘2n’之過程不合適與客觀世界和 『周易』 經傳文. 在這樣了解之下, 我考察了黃宗羲․宗炎兄弟, 毛奇齡, 胡渭等的加一倍法批判論. 關聯於對先天圖的批判, 我首先考察了王船山的批判宗旨, 然後考察了黃宗羲, 胡渭, 黃宗炎, 惠棟等的批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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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우란의 중서문화관에 대한 일고찰

이승모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1집 2008.12 pp.14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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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00원

이 글은 풍우란 문화철학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서문화관을 중심으로 고찰할 것이다. 풍우란은 1920년대부터 1990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수많은 철학서를 출판하고 문장을 발표하였으며, 독특한 “신이학(新理學)”체계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그가 일생동안 철학사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는 단지 철학사를 탐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자신이 부딪히고 있었던 “현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풍우란이 부딪히고 있었던 시대는 중서문화 문제를 둘러싼 지식인들의 갈등이 극에 달하던 시대였으며, 중서문화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인해 중서문화 논쟁이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풍우란은 이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철학자로써 그가 일생동안 학술활동을 통해 토론하고자 했던 문제는 바로 “철학사가 중심이 되는 중서문화의 문제”였으며, 그의 일생 사명은 철학적 논증을 통해 중서문화의 대립과 충돌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중국문화의 합리적인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그가 현대 철학사에서 심오하고 웅장한 철학적 성과물을 내놓았지만 그 근저에는 중서문화 문제라는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철학적 사고과정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서문화관은 풍우란 문화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으며, 풍우란 문화철학 사상을 이해하는데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견해에 의거해서 이 글에서는 풍우란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해결하려고 했던 중서문화문제를 중심으로 첫째, 중서문화에 대한 그의 시각이 어떻게 변화하였고, 둘째, 이러한 변화 속에서 그는 중서문화의 대립과 충돌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였으며, 셋째, 그가 제시하고 있는 중국문화의 새로운 발전방향은 어떤 것인가를 고찰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문화관이 가지는 한계 및 의의를 고찰할 것이다. 이러한 방면에 대한 고찰은 직접적으로는 풍우란 문화철학사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는 중국 근현대 지식인들의 문화의식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本论文主要研究馮友蘭的中西文化观。馮友蘭是从1920年开始到1990年,出版了许多哲学书,发表了许多文章,并形成了独特的“新理學”体系。但是他终生精心于哲学史的理由并不只是为了探讨哲学史,而是为了解决他所处的“时代困境”。 馮友蘭所处的时代是围绕着中西文化问题而知识分子之间的纠葛达到高潮的时代,由于对中西文化的见解不同激烈地展开了中西文化论战。馮友蘭是作为生活在这一时期的哲学者他通过学术活动终生要讨论的问题是“以哲学为中心的中西文化问题”,他的一生使命就是通过哲学的论证解决中西文化的对立和冲突问题,进而摸索中国文化的新出路。他虽然在现代哲学史上建筑了伟大的象牙塔, 但是其中心有着所谓中西文化问题的这一基本问题,哲学的思考过程就是解决这一问题的过程。因此,可以说中西文化观是馮友蘭文化观的核心,为了理解馮友蘭的文化哲学思想不可忽视的极为重要部分。 笔者就基于这样的见解,在本论文先设定以下几个研究方向,主要以馮友蘭的中西文化观为中心进行讨论:第一,馮友蘭在探讨中西文化的过程中如何变化对中西文化的见解,第二,在这一变化过程中他如何解决中西文化的对立和冲突问题,第三,他所提出的中国文化的新出路是什么,最后讨论他的文化观所具有的意义和限界。这一方面的考察是在直接的意义上能够帮助我们理解馮友蘭的文化哲学思想,在间接的意义上有助于理解今现代中国知识分子的文化意识。

7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론 후서』에 나타난 지식(epistēmē)의 문제

노희천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1집 2008.12 pp.171-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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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0원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론 후서』에서 지식과 관련하여, 제1원리들의 지식인 nous가 ‘학적 연역이 불가능한 지식’과 구별된다는 입장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입장이 있다. 전자의 입장은 느슨한 의미의 지식을 학적 이해와 ‘학적 연역이 불가능한 지식’으로 분류하고, 이 느슨한 지식에 nous를 대립시킴으로써, nous가 ‘학적 연역이 불가능한 지식’과 구별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후자의 입장은 학적 이해와 nous가 대립되며 nous가 ‘학적 연역이 불가능한 지식’이라고 주장한다. 논자는 후자의 입장을 지지하며 그 근거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분석론 후서』 A2장, A3장, 그리고 B19장의 문제 구절들을 검토해보면, 학적 이해와 이것의 제1원리가 대립되며, 따라서 제1원리의 지식과 학적 이해가 대립된다. 둘째, 학적 이해의 제1원리는 보편적・직접적인 전제들이며, 이 전제들은 학적 연역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러한 제1원리는 학적 연역이 불가능하다. 셋째, 학적 연역이 불가능한 제1원리의 지식이 nous이며, 이 nous는 제1원리 즉 보편에 대한 ‘학적 연역이 불가능한 지식’을 파악하고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nous와 ‘학적 연역이 불가능한 지식’이 구별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I think it does not seem that Aristotle intends any distinction between nous and indemonstrable knowledge. In order to show this, I consider the passages in problem. In A2 and A3, the first priciples of demonstration are the immediated premisses and these must be indemonstrable. Aristotle holds that not all knowledge is demonstrative; the knowledge of immediated is not by demonstration. He also asserts that there is not only scientific understanding but also some principle of scientific understanding by which we get to know the definitions. It is impossible to reach scientific understanding through demonstration unless one apprehends the immediate first principles. It is plain that we must get to know the primitive premisses by induction; for this is the way in which perception instills universals. By the term nous, in B19 of Posterior Analytics, Aristotle showed the state of having grasped indemonstrable knowledge of the universal. This nous, therefore, must mean the actuality of nous. There can be no scientific understanding of the first principles. It must be nous that apprehends the first principles. By nous Aristotle means the first principles of scientific understanding. Indemonstrable knowledge is the apprehension of an immediated premiss. The first principles are immediate premisses. It does not seem that Aristotle distinguishes between nous, by which he says he means the principle of scientific understanding, and indemonstrable knowledge.

8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나타난 명예심과 불명예심 개념 분석

김요한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1집 2008.12 pp.19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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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명예는 자아 관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감정이고 타인들과의 접촉에 의해서 영향을 받거나 생겨난다. 따라서 가치와 사회 형식이 바뀔지라도 명예의 본질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 자신 대 타인이라는 구도는 변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고대 그리스의 자아 개념이 명예개념을 통해서 형성되었으며 자아의 감정은 명예의 담지자로서 자아와 이와 연관된 타인들의 위상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그러나 명예 개념은 개인적 명성(kleos, eukleia), 즉 자신의 위상 또는 업적들에 관한 타인들에 예상된 비준이라는 개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명예는 자기 자신의 명예뿐만 아니라 오히려 타인들의 명예들도 아울러 고려해야 한다. 지나친 자기과시는 타인들의 명예를 침해하게 되며 그럼으로써 자신의 명예도 실추하게 된다. 이런 명예의 상대적 효과 때문에 명예는 단지 자기 자신의 명성만을 고려하기 보다는 명성이 추구되는 과정 속에 드러나는 타인과의 관계와 연관된 적절함(예, 절제, 고귀함, 추함)이라는 개념과 상호 관련되어있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 연구자가 밝히고자 하는 바는 자기 자신의 명예 관념 속에는 타인들의 의견들로부터 독립된 내재화된 자아상(internalized self—image)과 명예욕구가 담겨져 있다는 점이다. 개인의 명예는 근본적으로 그 개인의 내적 자아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 단계에서 자신의 눈에 비친 자아상을 제외하고 어떤 외적 평판에 연연하지 않는다. 따라서 명예 규약은 자신이 탁월성을 실제로 소유하려는 개인적인 결심을 요구하는 것이지 자신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남들에게 과시해야 한다는 점을 함의하지 않는다. 이런 방식으로 연구자는 명예 개념이 개인의 내재화된 표준들을 형성하는 장치가 될 수 있음을 살펴볼 것이다. 명예와 연관된 가치들에 대한 논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속에 많이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논문은 명예가 일종의 양심이란 형태에 근거한 내적 제제가 될 수 있음을 살펴볼 것이다. 우선 연구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속에 나타난 명예/불명예의 본성과 특별히 영혼론에서 그것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도덕적인 탁월성과 연관될 수 있으며 또한 어떻게 외적 내적 제재로서 양심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To attain the goal of complete excellence may be rare or impossible achievement, but it is an ideal which Aristotle is able to construct on the basis of the categories of evaluation which he found in ordinary moral discourse, and it is an ideal in whose construction he is remarkably successful in combining a system based on a natural teleology of man with an account which saves most of the phenomena of common belief. We should thus see in his overall approach to aidōs, and to what maybe made of aidōs in the good man, a recognition of the central thesis of this work, that aidōs is not solely dependent of the judgements of others, that it can spring from a form of conscience based on internalized moral standards, and that it can express a concern for the intrinsic character of one's actions. In this matter, Aristotle is in agreement with Plato. Plato seems the most optimistic that such a concern may be possible for a wide cross—section of society, but since the conclusions of all must be drawn from their understanding and observation of the motivation of their fellow Greeks, their ethical theories, though different, converge in offering evidence to contradict the generalizations of the shame—culture theor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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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은 영혼의 불멸을 부인하였는가?

이태하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1집 2008.12 pp.219-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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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은 비물질적이기에 단순하며 불가분적이며 불멸한다고 말한 플라톤 이래 영혼의 불멸성 문제는 영혼의 비물질성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따라서 영혼의 비물질성을 부인함으로써 영혼의 불멸성을 부인했다고 비난을 받은 흄은 한 서간에서 자신은 그 어떤 곳에서도 결코 영혼의 비물질성을 부인하지 않았으며 자신은 단지 우리가 실체에 대해 명료한 관념을 가질 수 없기에 이 문제가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임을 지적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가스킨, 얀들, 페넬름과 같은 흄 연구자들은 이 주장이 자신의 입장을 의도적으로 감춘 순수하지 못한 진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같은 해석은 흄의 철학적 입장과 개인적 신념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수용되기 어렵다. 본 논문은 흄의 이 진술은 그의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일관되며 진실할 뿐 아니라 영혼의 불멸에 대한 흄의 불신은 영혼의 불멸에 대한 종교인들의 믿음과 마찬가지로 그의 개인적인 믿음일 뿐임을 보여주는데 목적이 있다.

Since Plato, saying that “the soul is immaterial and, therefore, simple, indivisible, and incorruptible,” it had been widely held that the question of the immortality of the soul was itself intimately connected with that of the immateriality of the soul. Thus, Hume, who was charged with denying the immortality of soul by denying the immateriality of the soul, in a letter claimed that he did not anywhere deny the immortality of the soul and only said that the question did not admit of any distinct meaning, because we had no distinct idea of substance. With regard to this statement, Hume scholars, Gaskin, Yandell and Penelhum, assert that it is not a bald one. But their expositions cannot be accepted, because they do not distinguish Hume's philosophical view from his personal and non—philosophical belief. This paper is an attempt to show not only that Hume's statement is consistent and true when viewed in his philosophical position, but also that his disbelief of the immortality of the soul is nothing but a personal beli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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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은 이해 또는 다른 이해? - 하나의 해석학을 위하여 -

김창래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1집 2008.12 pp.239-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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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철학의 전통 내부에서 두 개의 해석학, 즉 일면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로 대표되는 전통적 해석학과 타면 하이데거와 가다머로 대표되는 철학적 해석학의 대립을 논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람들은 전자의 해석학이 이해의 객관성을 추구하며 따라서 타당한 이해를 위한 규준 마련에 매진하고, 후자의 해석학은 이해의 역사성을 승인하며 따라서 이해라는 현상의 존재론적 기술에 주력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철학적 해석학은 전통적 해석학이 객관성의 신화에 매몰되었다고 비판하고, 전통적 해석학은 철학적 해석학이 이해의 기준을 부식시키고 해석학적 허무주의에 빠진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이른바 나은 이해와 다른 이해가 이 두 해석학적 전통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얼굴로 간주되어 왔다. 왜냐하면 나은 이해가 우선은 저자를 꼭 같이 잘 이해하기이고 그런 한에서 이해의 완전한 객관성을 전제하며, 다른 이해는 해석의 무한 자유와 폭력을 허용하며 따라서 주관적, 자의적 해석의 결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본고는 이상의 통념이 두 해석학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 것임을 증시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전통적 해석학도 인간의 역사성과 이에 따른 이해의 한계를 인정하며 따라서 실증적 사실 인식으로서의 객관적 이해의 가능성을 주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철학적 해석학 역시 인간의 역사성에 부합하는 이해의 기준을 추구하고 있고 그런 한에서 결코 해석학적 허무주의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나은 이해와 다른 이해의 대립도 하나의 가상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나은 이해는 다름을 통해서만 나음을 얻을 수 있고, 다른 이해 역사 그저 다르기만 한 이해는 아니고 역시 하나의 나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본고는 나은 이해와 다른 이해가 결코 다른 것이 아님을, 그리고 전통적 해석학과 철학적 해석학이 다른 두 해석학이 아님을 논증하고자 한다. 최종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나은 이해는 다른 이해로서만 가능하고, 다른 이해는 나은 이해여야만 한다. 그리고 서로 대립한다는 전통적 해석학과 철학적 해석학은 철학으로서의 해석학의 하나의 발전 과정의 두 단계로 간주되어야 한다.

Es ist heutzutage eine allgemein anerkannte Idee, innerhalb der Philosophie zwei hermeneutische Traditionen voneinander zu unterscheiden. Man pflegt zu sagen, die von Schleiermacher und Dilthey vertretene, traditionelle Hermeneutik und die von Heidegger und Gadamer vertretene, philosophische Hermeneutik einander entgegengesetzt seien. Man glaubt, die erstere ist durch die Suche nach der Objektivität des Verstehens und daher durch die Bemühung um die hermeneutischen Kanonen für das richtige Verstehen zu charakterisieren und die letztere durch die Anerkennung der Geschichtlichkeit des Verstehens und daher durch die ontologische Beschäftigung mit dem Phänomen des Verstehens selbst. Dementsprechend ist die philosophische Hermeneutik gegenüber der traditionellen besonders darin kritisch, dass diese an der naiven Illusion der Objektivität festhält, und macht auch diese ihrerseits gegenüber jener Vorwurf des Verlustes vom Verstehenskriterium und damit eines hermeneutischen Nihilismus. Hierzu ist noch zu erwähnen, dass das sog. Besserverstehen für das symbolische Gesicht der traditionellen Hermeneutik und das Andersverstehen ebenso für das von der traditionellen gehalten wird. Denn man glaubt, dass das Besserverstehen zuerst ein Genau—so—gutes—Verstehen ist und insofern eine vollständige Objektivität des Verstehens voraussetzt und das Andersverstehen eine uneingeschränkte Freiheit und sogar Gewaltsamkeit erlaubt und insofern eine Folge von der subjektiven, willkürlichen Interpretation sei. Die vorliegende Arbeit versteht sich als Gegenargument gegenüber dieser gemeinen Auffassung. Aufzuzeigen ist einerseits, dass die traditionelle Hermeneutik auch die grundsätzliche Geschichtlichkeit des Menschen und die daraus resultierende Grenze des Verstehens anerkennt und daher nie ans objektive Verstehens als ein positives Wissen glaubt, und andererseits, dass der philosophischen auch ein der menschlichen Geschichtlichkeit entsprechendes Verstehenskriterium zur Verfügung steht und sie insofern nie in den hermeneutischen Nihilismus zurückfällt. Ebenso ist der Gegensatz von Besser— und Andersverstehen nur ein Schein, denn ein besseres verstehen kann nur dank einer Andersheit zustande kommen und kein Andersverstehen ist ein lediglich anderes, sondern sucht immer, ein besseres zu werden. Aus all dem ergibt sich, dass das Besser— und Andersverstehen in der Tat ein und dasselbe sind und somit die traditionelle und die philosophische Hermeneutik ebenfalls ein und dieselbe. Zum Abschluss wird sich meine These bestätigen, die lautet: Das Besserverstehen ist nur als ein Andersverstehen möglich, das seinerseits wiederum ein Besserverstehen zu sein hat; die traditionelle und die hermeneutische Hermeneutik, zwischen denen ein scheinbarer Gegensatz bestünde, sind daher nur für zwei Stadien des Entwicklungsgangs der einen Hermeneutik zu hal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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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머의 해석학에서 ‘이해함’(Verstehen)은 우리 존재에 대한 규정이며, 그에 따라 이해함에의 ‘참여’와 그에 대한 ‘경험’은 우리에게서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보편성 주장 안에는 이해함에 대한 참여와 관찰이 동시에 발생할 수 없음이 전제되어 있는데, 그에 대해서는 그의 “놀이”(Spiel) 개념으로부터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다. 반면에 이해함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시도하는 하버마스는 참여와 관찰의 동시발생이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확신하고 있다. 그는 로렌쩌의 ‘장면적 이해’에서 분석가가 환자의 증세를 관찰하는 동시에 그 증세와 동일한 상황에 참여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음을 보게 된다. 즉 분석의 과정에서 이따금 환자는 자신의 증세적 상황을 분석가에게 그대로 반복하게 되는데, 그때 분석가는 분석가로서 환자의 증세를 관찰하면서 환자의 증세의 대상으로서 그 증세에 직접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이 가다머—하버마스 논쟁에 적용될 경우, 가다머가 주장하는 해석학의 보편성은 불가피하게 제한될 수 밖에 없으며, 가다머가 만약 이전과 같은 의미의 보편성을 주장하려 한다면, 그는 반드시 로렌쩌의 장면적 이해를 넘어설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In der Hermeneutik Gadamers ist das Verstehen nichts anderes als die Bestimmung unseres Seins, und man kann also daraus folgern, dass die Teilnahme am Verstehen und die Erfahrung darüber für uns universal ist. In dieser Universaltät ist vorausgesetzt, dass die Teilnahme und die Beobachtung sich nicht gleichzeitig ereignen können, und diesen Inhalt erklärt Gadamer ausführlich mit dem Begriff “Spiel”. Im Gegensatz dazu ist Habermas, der der Verstehenbegriff Gadamers kritisch reflektieren wollte, fest davon überzeugt, dass die Teilnahme und die Beobachtung sich gleichzeitig ereignen können. Und im szenischen Verstehen Lorenzers bemerkt er, dass der Fall passieren kann, in dem der Analytiker das Symptom seines Patienten beobachtet und gleichzeitig an der Situation teilnimmt, die mit der symptomatische Situation identisch ist. Im Verlauf der Analyse wiederholt der Patient seinem Analytiker ab und zu sein Symptom, und der Analytiker wird als Gegenstand des Symptoms seines Patienten an der Situation dieses Symptoms teilnehmen, wärend er als Analytiker das Symptom seines Patienten analysiert. Infolgedessen, wenn man diesen Inhalt auf die Gadamer—Habermas Debatte anwenden könnte, wäre es unvermeidlich, die Universalität der Hermeneutik Gadamers teilweise begrenzt zu werden. Deswegen, wenn Gadamer immer weiter diese Universalität behaupten wollte, müsste er unbedingt das szenische Verstehen Lorenzers überschreiten könn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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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이기주의 연구

최용철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1집 2008.12 pp.309-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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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윤리적 이기주의에 관한 연구로서, 크게 다섯 문제를 다룬다. 첫째, 이기주의에 대한 오해이다. 이 부분은 지금까지 이기주의가 크게 왜곡돼 왔음을 밝힌다. 둘째, 왜 윤리적 이기주의이어야 하는가이다. 윤리적 이기주의를 외면해 왔던 까닭은, 특정 종교에 물든 이타주의가 희생과 봉사를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셋째, 심리적 이기주의와 윤리적 이기주의가 구별될 수 있는가이다. 심리적 이기주의가 윤리적 이기주의의 성립에 필요조건으로서, 실제로 이 두 가지는 구별되지 않는다. 넷째, 과연 윤리적 이기주의가 협동을 배제하는가이다. 윤리적 이기주의는 배타적으로 이익을 추구하기는커녕 상호 호혜를 이끌어내는 협동의 전략을 구사한다. 다섯째, 윤리적 이기주의는 규칙 이기주의의 발판이다. 인간의 삶은 규칙을 준수하는 제도적 삶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본성상 규칙을 지키는 성향이 없다. 따라서 규칙의 준수는 자기 이익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며, 윤리적 이기주의는 이러한 관점을 정당화한다.

This study have five arguments concerning ethical egoism. The first aims to solve problems of misunderstood egoism, empathizing that egoism has been distorted. The second discusses the reason why should be ethical egoist. There are no reasons why mankind have to be enslaved by any altruism which demands self sacrifices. I have my right to live my own life. The third asks whether it is possible to distinguished between ethical egoism and psychological egoism. There is no specific reasons to attribute two theories to each peculiar sphere. The fourth is a respond to critics who have questioned about cooperations of ethical egoists. The answer is that ethical egoists accept reciprocal beneficient cooperations, instead of exclusive self—interests. The five is a conclusion that ethical egoism supports rule egoism. Because of lacking a human nature of unconditional benevolence, observing rules can be achieved by getting self—interest. Concludingly, just only ethical egoism can justify my institutional life of observing ru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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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상대주의의 반실재주의

김희빈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1집 2008.12 pp.333-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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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주의는 외부 세계 속에 무엇이 존재하는가와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관한 존재론적 이론이다. 실재주의는 상식과 과학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물리적인 것 대부분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그런 것들이 우리의 정신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견해이다. 존재하는 것들은 그것들의 존재나 본성을 우리의 정신이나 이론에 의존하지 않는다. 언어상대주의에 따르면 무엇이 존재하는가는 이론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언어틀 또는 이론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 달라진다. 존재는 언어 또는 이론에 상대적(의존적)이다. 언어상대주의자들은 언어에 관한 이론으로부터 존재론의 입장을 추리하려 했다. 따라서 언어상대주의는 반실재주의이다. 더미트의 의미론적 반실재주의 논증은 실재주의의 존재론적 논제와 언어 이해에 관한 의미론적 논제를 동일시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퍼트남의 형이상학적 반실재주의는 인과적 언급이론이라는 의미론에 대한 거부로부터 시작된다. 쿤, 파이어아벤드와 같은 급진주의자들의 주장은 불가통약성이라는 의미론적 주장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들의 견해는 인식론과 의미론을 출발점으로 삼는데서 나온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상식 물리적 대상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존재론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Realism is that tokens of most current common—sense and scientific, physical types objectively exist independently of the mental(theory, language). Linguistic relativism forms anti—Realism. According to this doctrine, nothing exists absolutely. All talk of existence and reference is relative to theory. Ontology proper is abandoned. Dumment's argument against Realism rests on the theory that linguistic competence consist in knowledge of truth conditions. Putnam's solution to the problem of reference is to give up the idea that reference is to a mind—independent world. Kuhn and Feyerabend focus almost entirely on epistemic and semantic issue. They start from incommensurability. This linguistic relativism's Ontology rests on epistemology or seman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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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의 새로운 정의

최훈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1집 2008.12 pp.359-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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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시와 피노치아로는 오류의 정의가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하고 그것을 근거로 오류에 관한 이론이 불가능하거나 오류라는 것이 아예 없다고 비판한다. 이 논문에서는 이 비판을 살펴보고 그에 대한 대답을 하려고 한다. 곧 오류의 정의에 관한 그들의 문제 제기는 그릇된 부분이 있으며 설령 옳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원하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음을 보이려고 한다. 그리고 오류에 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겠다. 나는 올바른 논증의 기준을 어긴 것을 오류로 정의하는데, 이때 경미하게 잘못된 논증부터 심각하게 잘못된 논증까지 다양한 오류의 정도를 인정하며, 논증도 논증 활동의 의미로 사용한다. 그리고 올바른 논증의 조건에 대해서는 중립적이다. 마지막으로 이 정의를 토대로 여영서 교수의 오류의 정의를 검토하겠다.

Massey and Finocchiaro contend that the theory of fallacy is impossible or there are no fallacies because we cannot find satisfiable definition of fallacies. After examining their criticism, this paper responds to them by saying that even if their remarks on textbooks are plausible, their conclusion doesn’t follow. Then I present new theory of fallacy, which says that (i) a fallacy is defined as an argument violating the standards of good arguments, (ii) there are various kinds of fallacies from trivial ones to fatal ones, (iii) it takes neutral attitude on which theory is acceptable about good arguments, and (iv) an argument is extended to include argumentation. Finally, this paper examines the definition of fallacy provided by Professor Y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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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적성시험(LEET)과 의사소통적 교양 교육 모델

문성훈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1집 2008.12 pp.40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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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적성시험(LEET) 도입 이후 각 대학마다 이를 대비하기 위한 방안을 두고 논의가 한창이다. 본 논문에서는 법학적성시험이 하버마스가 개념화한 의사소통행위능력을 핵심 평가 대상으로 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 사회 변화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능력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밝힌다. 따라서 단지 법학적성시험 대비만이 아니라, 우리사회가 필요로 하는 건전한 시민 양성을 위해서도 의사소통행위능력을 계발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이에 본 논문은 의사소통적 교양교육모델과 이와 연계된 법학적성계발트랙화를 그 방안으로 제시한다.

After the introduction of Legal Education Eligibility Test is it matter to the most of the university, which a education system is good for the preparation of the Test. In this article I try to bring it light that the LEET makes the communicative competence the major object of the evaluation and the new ability needed in Korea today is the communicative competence. In conclusion I propose the Development—Track of the Legal Eligibility which is based on the communicative model of the liberal arts. It is needed not only for LEET, but also for the cultivation of the sound popu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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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지도능력 함양의 실제와 전망

박선양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1집 2008.12 pp.42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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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교육은 원래 논술의 의미인 인간과 삶의 전 영역을 포괄하여 주체성을 인식하고 실천적 삶으로 이끄는 역할을 지향해야 하지만 현행 중등교육현장의 논술교육은 대학입시와 직결되어 있다. 대학 입시로서 논술은 통합교과논술로 문제의식 측면과 창의력, 통합교과 측면을 강조한다. 구체적 시험형태로는 제시문들을 주고 각 제시문을 활용하여 논제에서 묻는 바에 대해 답하는 형식이다. 제시문의 형태나 영역은 인간 삶의 모습만큼 아주 다양하다. 이러한 제시문을 독해하여 논제에서 묻는 것에 적용하는 능력은 여러 능력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학교 교과교육으로는 어렵다고 본다. 범교과는 탈교과가 아니라 다양한 교과영역의 원리를 바탕으로 인간과 사회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 대답은 독창적이어야 하며 이를 내세우는 데에는 논증력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새로운 차원의 논술지도능력이 요구된다. 그 장기적 방안으로 대학의 정규 교과과정을 통해 새로운 논술교사를 양성하는 것을 들 수 있다. 교사로서 필요한 능력은 가르치는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과 학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능력이다. 전자는 어느 정도 교육과정에서 닦을 수 있지만 후자는 직접 경험 없이 기르기 힘들다. 논자는 특히 강의기술 측면을 고려한 교육 시스템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위한 교육시스템 구축의 행보에 나선 군산대 철학과 교과과정 사례연구를 통하여 논술교사 능력의 의의와 한계를 살펴보려 한다. 그 전제조건은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논술교육의 현실에 비춰 이미 대학이 논술환경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이상 논술교사 양성의 적극적 역할 역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Nowadays, one must have a critical and creative thinking ability in order to find one's way into global society, which can be cultivated in part by logical writing. In this connection, Seoul National University defines the features of its logical writing test of entrance examination as the aspect of an awareness of issues including problem discovering and solving, the aspect of logical, creative, and synthetical thinking, and the aspect of the curricula including writing and integrating subject. In this respect, specialized teachers are needed in order to educate students on logical writing. First of all, they should establish sound views of history and world, and read a society with the problem consciousness. Therefore, the instructors who train the logical writing teachers must research newly and get fresh training themselves. In this essay, I will look into the course and the contents of the logical writing teachers proceeding in the department of philosophy of Kunsan Nation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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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993년 뉴질랜드 출신 여성감독, 제인 캠피온이 연출한 영화 <피아노>에 나타난 페미니즘 표출방식을 두 남성주인공인 스튜어트와 베인즈의 대립과정을 통해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여성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그 동안 전 세계 영화산업의 트렌드를 좌지우지하던 할리우드식 관점을 최대한 배제하고자 노력했다. 그녀는 여성의 정체성을 가부장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감성적이고 여성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피아노>를 연출했다. 그로 인해 이 작품은 아름다운 음악과 이국적인 영상미로 관객들의 호응을 얻어 상업적인 성공뿐만 아니라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시도한 작품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93년 칸느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Palme d'or을 수상하는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가부장적 사회관이 만연하던 영국의 빅토리아 왕조시대의 식민지 중 한 곳인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한다. 연출자는 사회적 억압과 체제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 에이다의 여성으로서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남자주인공들의 대립되는 모습을 통해 가부장제 사회를 비판하고 기존의 할리우드영화에서 그려왔던 남성적 관점의 여성이 아닌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새로운 페미니즘을 담아냈다.

This study is aimed at understanding the expression method of feminism through the conflict course between Stewart and Baines in <The Piano>, directed by the female director of New Zealand, Jane Campion in 1993. In this film, the director wanted to exclude the Hollywood perspective that dominated the trend of worldwide film industry in the process of depicting women. She did not describe the identity of the woman in the patriarchal gaze. Instead, she was directing <The Piano> based on the feminine gaze in emotional perspective and the third world perspective. For this reason, this film achieved commercial success not only in getting a great response of the audience by beautiful music and exotic visual beauty, but also in taking women's identity into consideration. It also accounted for the glory that won the Palme d'Or in Cannes Film Festival in 1993. The background of this film is New Zealand. It was one of the British colonies in Victorian era and the typical patriarchal society. Jane Campion did not succumb to the social oppression and the regime, but focused on the growth as a female hero Aida who has striven to regain her identity and criticized the patriarchal society through the conflict of male heroes. Finally she described in this film a new feminist perspective rather than that of masculine-focused Hollyw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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