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9)
2024 (23)
2023 (24)
2022 (33)
2021 (37)
2020 (29)
2019 (30)
2018 (34)
2017 (44)
2016 (50)
2015 (54)
2014 (59)
2013 (49)
2012 (44)
2011 (56)
2010 (60)
2009 (62)
2008 (55)
2007 (51)
2006 (46)
2005 (48)
2004 (48)
2003 (54)
2002 (33)
2001 (39)
2000 (32)
1999 (35)
1998 (43)
1997 (29)
1996 (30)
1995 (28)
1994 (17)
1993 (18)
1992 (13)
1991 (10)
1990 (10)
1989 (11)
1988 (15)
1987 (22)
7,000원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윤리적 물음이 제기되며, 이에 따라 구체적인 도덕문제를 철학적으로 해명하여 그 해결책을 탐구하는 응용윤리학이 태동되었다. 그 결과 생명윤리, 정보윤리, 환경윤리 등이 철학의 주제로 부각되고 있으나, 응용윤리학 자체에 대한 철학적 반성은 전무한 실정이다. 이 논문은 응용윤리학 자체를 비판적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 그 목표 및 다루는 주제가 무엇인지 해명하고 있다. 응용윤리학은 “도덕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물음을 주제로 삼아, 구체적인 문제 해결을 그 목표로 한다. 응용윤리학은 개별 사례가 아니라 유적인 형태의 도덕문제를 주로 다룬다. 특히 이 논문은 응용윤리학 방법론을 주제적으로 다루고 있다. 응용윤리학 태동기에는 도덕이론 내지 원리에서 도덕문제에로 나아가는 하향적 접근법(연역주의)과 거꾸로 도덕문제에서 도덕원리에로 나아가는 상향적 접근법(귀납주의)이 응용윤리학의 주된 방법이었다. 하지만 전자의 방법은 도덕문제가 발생하는 맥락의 복잡성을 다루지 못하고, 후자의 방법은 윤리학에서 이론 내지 원칙이 차지하는 역할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이론적 난점을 지닌다. 그래서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면서, 이 두 방법의 장점을 살리면서 응용윤리학이 갖는 학제적 성격에 맞는 정합주의 방법론이 제창되었다. 존 롤즈가 채택하고 있는 반성적 평형의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존 롤즈의 이 방법은 숙고된 도덕판단, 배경이론, 도덕이론 3자가 하나의 평형상태를 이루는 방법을 말한다. 이 방법에 따를 경우, 응용윤리학은 윤리이론의 단순한 응용이 아니라, 윤리학을 새롭게 정초지우려는 새로운 윤리학이 된다. 즉, 윤리학은 과학모델과 유사하게 새로운 위기 사례의 발생으로 더불어 새로운 이론을 제창하지 않을 수 없다.
5,800원
이 논문은 정보윤리학에 대한 서양 철학적 접근의 실태를 객관적비판적으로 파악하고, 국내에서의 정보윤리학 연구 활성화를 위한 시사점을 모색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를 위해 이 논문에서는 서양 철학에서의 정보윤리학의 발전 과정과 연구 주제를 기술하고, 주요 특징을 살펴보았다. 정보 사회에서의 윤리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정보윤리학에 대한 서양 철학적 접근은 정보 사회 속에서 우리가 윤리적 주체로서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데 도움을 주는 원리나 덕의 목록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끝으로, 이 논문에서는 우리 나라에서의 정보윤리학 연구 활성화를 위한 주요 과제들을 제시하였다.
7,300원
생태계 파괴와 이로 인한 인류의 생존 위기는 환경윤리학의 정립과 더불어 동양의 전통사상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켜 주고, 나아가 동양철학을 통해 생태계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는 연구로 이어지고 있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생태계 위기와 관련한 동양의 전통사상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동양철학 속에서 환경윤리학을 정립하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들을 고찰한다. 아울러 이러한 연구 성과들의 의의와 문제점을 진단한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동양철학 가운데 유가철학을 중심으로 유가철학의 환경윤리학으로의 정립 가능성을 모색하고, 환경윤리에 대한 동양철학의 접근에 대한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 논의한다. 유가철학은 첫째, 자연을 파괴할 수 없는 윤리적 당위성(生生不息의 유기체적 자연관), 둘째, 자연을 보살피고 양육해야 하는 인간의 천부적 사명(天地萬物의 중추적 인간관), 셋째, 생태학적 감수성과 親民을 통한 생명 본질 구현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동양철학은 한편으로는 이러한 특성들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 환경철학을 비롯한 제반 현대 학문들과의 만남과 공조를 지속함으로써만이 전지구적 생태계 위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으로 자리 매김 할 수 있다.
8,800원
자연법과 실정법의 오래된 대립은 철학이 존재해 온 이래로 지금까지 계속해서 논증의 대상이 되어 왔다. 자연법의 법규범정당화 요구는 정당화가 문맥으로부터 고립되는 것을 피해야만 하는 문제가 있다. 실정법은 법근거의 타당성을 집행하기 위해서 규범에 기초지워져야만 하는 부담을 지니고 있다. 법의 규범요구와 법의 안전성에 대한 요구는 분리될 수 없기에 이 둘은 매개되어야만 한다. 헤겔은 이것을 자기구체화해가나는 것으로서 법인륜성의 실현으로 본다. 따라서 헤겔은 자연법의 역사적 추상성을 극복함에 의해 자연법 자체를 역사화할 수가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법의 질서연관을 규범의 자기실현으로 본다. 따라서 자연법을 객관정신 내지 인륜적 삶으로 변형하는 헤겔은 이 둘을 대립으로 방치하지 않고 통일된 것으로 연결할 수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법이 공공선의 실현에 이바지하는 것으로서 법규범을 사실화할 것을 요구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둘은 시대적인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일치한다. 차이가 있다면 헤겔은 자연법을 객관정신의 보다 넓은 틀 안에서 지양하는 반면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연법의 인간 실정법의 규범적 ! 토대로서 작용한다는 데 있다. 자연적인 인륜성을 주체의 양심과 권리에 의해 매개된 것으로 보는 점에서 헤겔은 자유와 인륜적 삶을 자유로서 완성한다. 헤겔은 인륜적 자유를 바로 이런 점에서 추상법과 도덕성의 매개된 통일로 본다. 자연법의 정당화는 바로 타자 안에서 자기로 머무르는 것 즉 제도 안에서의 자유의 실현이 된다. 바로 이런 실현이 자연법이 역사화하는 것으로서 정당화되게 된다. 다만 토마스는 헤겔의 목적론적 지양과정을 목적론을 가능하게 하는 원인으로 제시하는 점에서 방향만 다를 뿐이다.
4,500원
신이 전능, 전지, 전선하다면 악은 무엇이고 또 어디로부터 오게되는가? 이 물음에 있어서 전통적인 어거스틴형 변신론에 있어서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악은 존재가 아니며 존재의 결핍이며, 한계이고 부족이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 악은 우주적인 조화의 조건이다. 말하자면 어거스틴은 결핍(privative)의 개념과 심미적(aesthetic) 개념을 제시함으로서 악의 물음에 답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변신론은 루터와 칼빈에 의해서 계승되며, 그리고 라이프니츠에 와서 어거스틴형의 변신론은 그 황금기를 이룬다. 라이프니츠에게서는 어떤 가능한 세계이든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피조물의 제한성’은 불가피하다. 완전하고 제한이 없는 세계가 있다면 그것은 피조물이 아니라 신 자체에 있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본성상 불완전성을 내포한다. 이 피조물의 ‘원초적 제한성’이 형이상학적 악을 구성하고, 이 형이상학적 악이 죄와 고통의 원인이 된다. 그런데 물리적 악과 도덕적 악은 선의 실현에 이바지한다. 결국 악은 최선의 가능세계를 이루기 위한 필연적인 도구이기 때문에 이 세계는 최선이라는 낙관주의에 도달함으로서 어거스틴의 변신론은 라이프니츠에 와서 그 절정에 도달한다.이와 같은 어거스틴형의 변신론에 있어서의 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악은 전능, 전지, 전선한 신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결단코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악은 신이 절대적으로 금지하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 어거스틴형의 변신론에서는 신은 절대적으로 금지하는 그것을 허용하는 것이고, 그러면서도 그 악은 신의 목적을 거슬리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악의 신적 허용은 신이 악을 배제하기보다는 악은 궁극적으로 선한 목적에 기여하기 때문에 신은 절대적으로 금지하는 그 무엇을 허용하는 이율배반에 빠지게 된다. 둘째로 어거스틴형 변신론의 원리는 악에 대한 영원한 형벌의 개념을 남겨 둠으로서 다음과 같은 난관에 빠진다. 즉 악에 대한 영원한 형벌의 개념은 모든 악이 다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님을 함축하고 있다. 말하자면 악에 대한 영원한 형벌의 개념 속에는 신은 오히려 악을 남겨두기 위해서 어떤 악을 허용하기를 좋아했다는 것을 내포하는 결과가 된다. 그리하여 영원한 형벌의 개념은 악이 궁극적으로 선한 목적에 기여하기 때문에 신에 의해서 허락되었다는 원리를 손상시킨다. 이러한 난점들은 결국 변신론의 문제는 인간의 이해력을 제한하는 신적 지혜의 무한한 높이와 깊이의 세밀한 내용을 추구하는 것이 금지되는 신적 영역의 신비로서 남겨둘 수밖에 없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A Critique on the Augustinian TheodicyIn-Sung ParkIf the sole ultimate power is unambiguously good, what is evil and whence does it come? In answer to this question, Augustine develops two interlocking lines of thought, presenting the privative and aesthetic conception of evil. Both of these main Augustinian themes reappear in the thought of Thomas Aquinas. Lutherand Calvin in the sixteenth century, followed Augustine in his doctrine that all the evils flow ultimately from the culpable fall of man. Leibniz, in his Theodicee(1710), employed the two Augustinian themes, in the course of his argument that this is the best of all possible worlds, a notion pointedly satilized in Voltaires Candide. It is the best, not because it contains no evil, but because any other possible universe would contain more evil. The eternal possibilities of existence are individually present to the Divine Mind which, like an infallible calculating machine, surveys all possible combination and selects the best, to which it then gives existence.In the classical Augustinian scheme, God allows what he absolutely forbids, hence evil exists and continues to thwart Gods purposes. Such mysterious divine permission of evil is explained thus, God judged it better to allow evil to exist and bring greater good out of evil than to exclude evil from creation absolutely. In short, evil is "allowed" to exist because it will ultimately a good purpose. This Augustnian thesis is the basic axiom of Christian theodicy. But this idea is compromised by other features of the classical scheme. The idea of an eternal punishment of evil implies that not all evil is transformed into good. God prefers to allow some evil to remain evil. Hence the concept of eternal punishment compromised the priciple that evil is permitted because it serves an ultimate good purpose.
6,700원
이 논문은 선진 유가 철학에서 제시하고 있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내용을 그 존재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주역을 중심으로 고찰하기 위하여 쓰여졌다. 주역에서는 인간의 본래성을 성명지리로 규정하고 그 내용을 인예의지의 사덕으로 밝히고 있다.성명지리의 존재 근거는 천도인 역수원리로 그것의 표상 체계는 간지 도수와 하도와 낙서이다. 간지 도수와 도서를 통하여 표상된 역수원리를 천명한 경전은 정역이다. 정역에서 천명된 역수원리의 내용은 사역 변화 원리로 그 내용은 천도인 사상 원리가 인간 본래성으로 주체화하여 인예의지의 사덕으로 변화하는 천지의 도의 인간 주체화 원리이다.사덕은 천도의 사상인 원형이정이 주체화한 것이다. 원형이정은 원역, 윤역, 윤역, 정역의 사역을 상징적으로 표상한 개념으로 원이 인으로, 형이 예로, 이가 의로, 정이 지로 주체화한 것이다. 인과 지는 과거적 본성이며, 예의는 미래적 이상으로 그것을 성명지리라고 한다.성명지리의 성은 천부적 성품을 가리키며, 명은 역사적 사명을 가리킨다. 성과 명은 체용의 관계로 인과 예, 지와 의는 체용의 관계이다. 인지의 성은 인격적 세계인 인간의 심성 내면과 사물의 세계를 합덕시키는 원리이다. 인성이 체가 된 예를 통하여 군자의 심성 내면을 다스리고, 지성이 체가 된 의를 통하여 사물의 세계를 다스린다.성명지리를 자각하고 실천하는 존재는 인격적 존재인 인간이다. 성명지리와 그 존재 근거인 역수원리를 자각하여 천명한 존재는 성인이며, 성인이 천명한 성명지리를 자각하여 실천하는 존재는 군자이다. 따라서 자신의 본성과 사명을 자각하여 실천한 이상적 인격체는 성인과 군자이다.
5,800원
이 글의 목적은 칸트의 목적론적 자연이해가 어떠한 것이기에 목적론을 끌어들이고 있는 생태중심주의자들이 오히려 칸트의 자연목적론을 비판하고 있는가를 구명하고, 칸트의 목적론적 자연이해를 친환경주의적으로도 해석할 여지는 없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칸트에 있어 자연목적론은 유기체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의 의미만이 아니라 자연의 최고의 근거를 숙고하기 위한 형이상학적 의의를 함께 지니고 있다. 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목적론이 기계론을 보충하는 보완의 사고장치가 아니라 기계론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 형이상학적 장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칸트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목적-수단의 관계로 이해하고 있고 자연의 최종목적을 인간의 숙련성의 문화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칸트의 인간중심주의적인 목적론이 환경적대적이라는 생태중심주의자들의 비판은 어느 정도 근거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칸트는 욕구의 폭주로부터 의지의 해방을 통해 도덕성을 준비하는 훈육의 문화를 논하고 있고, 도덕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이 세계창조의 궁극목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칸트의 체계에서 궁극목적이 모든 자연의 조건적인 목적들을 종속시키며 목적론적 체계로서의 세계 전체를 사고하는 데 필연적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칸트는 자연 이용이나 인간의 목적실현이 도덕적 원리에 비추어 정당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칸트의 인간중심주의적 목적론이 환경적대적인가 환경친화적인가는 칸트가 제시하는 도덕원리가 환경친화적으로 해석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
Teleological nature understanding by I. KantByong-Kie ParkThe aim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essence of teleological nature understanding by Kant, and it is to examine the reason why the ecologists who introduce the teleology rather criticize nature teleology by Kant, and it is to investigate whether there is room for interpreting the teleological nature understanding by Kant eco-friendly, or not. The ecologists' criticism, the Kant's teleology with anthropocentrism is against the environment, may have a basis in a degree on the point that Kant makes understand the relations with human and nature as the ones of ends and means and looks for the ultimate object for the nature in the culture of human skillfulness. But Kant discusses the culture of discipline that prepares for morality through the liberation of will from the congestion of desire, and he emphasizes that the human, as a moral being, is ultimate object for creating the world. In the Kant's system, it is considered as the ultimate object subordinates the conditional object of all the nature and it is essential to think the whole world as a teleological system. After all, it seems that Kant strongly suggests that using the nature or realizing the object by the human should be righteous thing in view of the moral principle. Accordingly, it depends on that the moral principle that Kant suggests can be interpreted as eco-friendly thing whether Kant's teleology with anthropocentrism is against the environment or is with the environment.
6,100원
플로티노스는 시간의 선천적인 모델 즉 영원으로부터 출발하여 시간의 형이상학적 기초를 제시한다. 따라서 시간이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서는 영원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영원은 “동일성 속에 머무르는 삶”이다. 그런데 우리는 영원으로서의 삶과 영원한 형상들의 삶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구별할 수 있다. 전자는 일자로부터 유출한, 그리고 일자에로 향하는 시각에 의해서 형상들이 되는 무한정한 삶이고, 후자는 정신과 정신적인 것의 현실태로서 한정된 삶이다. 플로티노스에 있어서 영원은 현실태로 인도되는 정신적인 질료의 능동적인 가능태로서 무한정한 삶이다. 이러한 영원으로부터의 시간의 탄생은 영혼과 관계된다. 플로티노스에게서 영혼은 이중적인 운동을 가진다. 그 하나는 영혼이 자기의 원천 즉 정신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높은 곳에로의 운동은 마치 정신이 자기의 기원에로 향함으로써 자신을 구성하는 것처럼 영혼 자신을 구성하게 한다. 영혼은 또한 “앞과는 다른 반대방향”의 한 운동을 할 수 있다. 이 운동은 낮은 곳에로 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혼의 추락이 바로 시간과 관계한다.시간은 영혼의 삶에 의해서 구성된다. 시간은 정신의 단일화된 삶에 대한 계승적인 분산과 분할인 운동으로 정신의 관상을 표현하는 영혼에 의해서 생산된다. 단일화된 삶을 순간으로 분할한 것이 시간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 국면에서 다른 국면에로의 발전적인 운동 속에 있는 영혼의 삶으로서 시간을 정의할 수 있다. “시간은 한 삶의 상태에서 다른 삶의 상태로 이어지는 운동 속에 있는 영혼의 삶이다.” 이러한 시간은 영원의 이미지이다. 플로티노스가 말하고자한 이미지는 신적인 장인의 창조물이 아니다. 이미지의 존재는 모델과의 관계성속에 있다. 이 이미지는 그 자체의 힘에 의해서 존재론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이미지가 그 자체로 존재론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 해도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엔네아데스 제Ⅲ 권 7의 11장의 마지막에서의 영원과 시간사이의 대조는 닮아감 그것이 문제이다. 영혼은 자신을 시간화하면서 시간적이지 않는 정신과 자신을 유사하게 한다. 그것은 신을 닮고 비논증적인 완전한 지혜를 모방한다. 따라서 시간은 자신의 연속성 때문에 “동시적으로 전체”인 영원과 닮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나타난 행복의 자족성 개념과 외부적 선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29집 2003.06 pp.231-251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5,700원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를 원한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이 행복을 목적으로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행복은 인간의 행동을 주된 대상으로 삼는 윤리학의 제일 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행복은 인간의 모든 행위들의 목적을 수렴한다는 의미에서 가장 자족적이며 궁극적이다. 어떤 결여도 없으며 그 자체로 추구할만한 가치를 갖는다. 더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에르곤이 무엇인지 규명하면서 행복이란 ‘탁월함에 따르는 영혼의 적극적 활동’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외부적 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외부적 선에는 명예나 물질이나 좋은 출생, 좋은 외모와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그러나 행복을 자족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 동시에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외부적 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서로 모순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 외부적 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며 인간의 본성이나 에르곤을 사회 속에서만 충분하게 실현할 수 있다는 실천적이고 실제적인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더구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외부적 선이 행복하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지만, 외부적 선이 곧 행복의 본질은 아니다. 그리고 비록 행복이 아무리 자족적인 특징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관계없이 고립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행복이 자족성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외부적 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서로 모순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어 보인다. 오히려 행복해지기 위해 외부적 선이 중요한 조건이라는 것을 인정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주의 윤리학은 우리의 실제적인 도덕적 삶에 근거한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양상을 갖는다고 이해한다.
Self-Sufficiency of Eudaimonia and External goodin Aristotle's Nichomachean EthicsHyun-Kyung KimAll man want to be happy. Our all action aims at happiness. In this meaning, happiness is first priciple in ethics. And happiness is most self-sufficient and ultimate in a sense that it includes the all purpose of human action. Aristotle defines happiness as soul's positive activity according to excellence in investigating what is human ergon (function). It means that Happiness is related to the soul, it's essential element is free from material conditions. But Aristotle also insists that external good is required to be happy. External good includes a money, fame, good birth, etc. In this point, We are faced to Aristotle's inconsistent assertion that Happiness is self-sufficient and external good is needed to be happy simultaneously. But his assertion is not in a inconsistency. First, his assertion on extenal good means that human is social being and can realise their ergon only in a society. Second, although he regards external good as a ingredient of happiness, not as a essential element. Because if happiness is gained by external good or fortune entirely, it is possible to be happy through another people's endeavor. Third, Aristotle do not look self-sufficiency as isolation. In this meaning, the assetion that external good is needed to be happy can compatible with the assertion that happiness is self-sufficient. Aristotle's ethics that allows the role and meaning of external good for happy life has a practical aspect based on our real moral life.
6,100원
우리는 대체로 양심을 사람의 본래 착한 마음, 우리 안에 있는 어떤 능력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올바르게 행위하도록 하는 그 무엇, 우리의 행위에 대한 평가의 잣대 등등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양심을 ‘인간 영혼의 능력’, ‘인격적인 행위’ 등으로 간주하거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성, 의지, 감정 또는 그것들의 혼합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양심해석은 이러한 양심 이해 내지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양심 이해와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는 일상성에 푹 빠져있는 ‘세인-자기’가, 즉 일상적인 현존재가 자신의 본래적인 ‘자기’를 발견하기 위한 일환으로 ‘양심의 소리’ 내지는 ‘양심의 부름’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즉 하이데거가 말하는 양심은 현존재의 존재론적인 자기 부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이데거의 양심해석은 실존론적인 구조 내지는 지평에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행하는 현존재의 존재방식인 실존해명은 실존론적인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데, 양심은 인간의 존재방식인 실존 중에서 ‘본래적인 실존’의 현상적인 증거로 제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이러한 양심은 일상성 속에서 ‘세인’의 세계에 ‘빠져 있는’ 현존재를 본래적인 자기가 되도록 부르는 것이다.그러나 양심의 부름을 통해 열어 밝혀지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현존재의 ‘탓이 있음’이다. 그런데 이러한 탓이 있음을 통해 현존재는 양심을 가지기를 원하게 되고 본래적인 자기에게로 결단하게 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이러한 양심해석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양심이해의 기초가 된다. 왜냐하면 본질적인 탓이 있음은 근원적으로 도덕적인 선과 악, 즉 도덕성 일반과 이것이 취할 수 있는 형식들에 대한 실존론적 가능조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도덕성은 이미 근원적인 탓이 있음을 자체 내에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존재론이 윤리학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우선 하이데거의 실존론적인 양심해석을 살펴보고, 그런 다음 하이데거의 양심해석이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양심 이해의 기초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Die Interpretation des Gewissens M. HeideggersDong-Kyu MunDie Interpretation des Gewissens Heideggers ist der existenziale Ruf, d. i. der Anruf des Man-sebst in seiem Selbst. So das Gewissen ruft das Selbst des Daseins auf aus der Verlorenheit in das Man. Aber die Interpretation des Gewissens Heideggers ist die Grundlegung der Moralitt.Das Gewissen ist der Ruf. Aber ruft wer? Das Dasein ruft im Gewissen sich selbst. So das Dasein ist der Rufer und der Angerufene zumal. Daher der Ruf kommt aus mir und doch ber mich. Aber was erschließt sich im Ruf des Gewissens? Das heißt, was der Ruf des Gewissens zu verstehen gibt? Das im Gewissen Gerufene ist das Schuldigsein. Aber das Gewissen offenbart sich als Ruf der Sorge : Der Rufer ist das Dasein, sich ngstigend in der Geworfenheit um sein Seinsknnen. Der Angerufene ist das Dasein, aufgerufen zu seinem eigensten Seinsknnen. Und aufgerufen ist das Dasein durch den Anruf aus dem Verfallen in das Man. Der Ruf des Gewissens, das heißt dieses selbst, hat seine ontologische Mglichkeit darin, daß das Dasein im Grunde seines Seins Sorge ist. Aber die Interpretation dieses existenziale Gewissens, d. i. die Ontologie ist die Grundlegung der Ethik. Denn dieses wesenhafte Schuldigsein ist die existenziale Bedingung der Mglichkeit fr das moralische Gute und Bse, das heißt fr die Mglichkeit berhaupt und deren faktisch mgliche Ausformungen.
6,300원
이 시대의 최대 화두가 된 전쟁에 대한 칸트의 논의를 통하여, 비록 시대적 상황은 다를지라도 칸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우리는 칸트의 텍스트를 통하여 일관된 전쟁에 대한 관점을 취하기가 어려움을 느낀다. 법철학이나 도덕철학적 영역에서는 전쟁에 대해 강한 거부의 입장을 보이고, 역사철학이나 문화적 관점에서는 긍정적 측면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이는 그의 철학사상에서 ‘전쟁’ 개념에 대한 논의가 발전사적으로 달라지고 있음을 간과할 때 부딪치는 문제다. 전쟁에 대한 논의는 거의 그의 만년에 등장한 철학적 개념이며, 당시의 프로이센의 현실과 유럽의 정치사적 배경 속에서 고민한 문제의식이었다.칸트가 견지한 전쟁에 대한 상이한 관점은 전쟁에 대한 정당성 내지는 합법성의 문제와 전쟁의 목적에 대한 문제로 압축될 수 있다. 전자의 논의는 도덕철학과 법철학의 영역이며, 후자는 역사철학의 영역과 관계된다. 전쟁에 대한 이러한 상이한 관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의가 지니는 생명력은 칸트가 제시한 ‘공통감’의 개념이다. 공통감은 아렌트의 견해처럼, 공적 공간이 가능하도록 하는 근거일 뿐만 아니라 공적 가치와 사적 가치가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주요개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패권주의를 꿈꾸는 강대국들의 전쟁은 칸트의 공통감 개념에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할 수 있다. 칸트의 전쟁론이 지니는 시대적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가 주장한 반성적 판단력과 공통감이 작용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과제다.
6,600원
본고는 헤겔의 우연성 개념을 라이프니츠 철학과의 비교를 통해서 밝히려고 했다. 우연성 개념이 사유될 수 있는 양상 개념들간의 상호관계가 주요한 고찰대상이다. 헤겔은 논리학에서 우연 개념을 현실성과 가능성 개념의 관계를 통해 논의하고 있는데, 무모순으로서 가능성을 상정한 라이프니츠와는 달리 가능성을 형식적 개념 자체의 모순으로 파악하고 있다. 무모순으로서 가능성을 상정할 경우, 가능성과 현실성의 관계는 라이프니츠에게서는 공가능성으로서 고찰된다. 이러한 가능성의 실현과 실존을 해명하는 데 있어서 라이프니츠는 현실 세계의 현존 양상을 설명하는 원리인 “예정조화설”을 도입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신의 최선의 선택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이는 우연적 진리에 있어서 충족이유율과의 관계를 사유하는 데 있어서 일정한 한계를 갖는다. 즉 원리와 원리들간에 발생하는 충돌이 문제로 남는다. 이러한 충돌은 또한 우연성의 성격을 고찰하는데 있어서, 한편으로는 결정론적인 해석의 여지를, 다른 한편으로는 양립론으로서의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게 하는 요인이 된다. 헤겔에 있어서 우연성은 범주와 범주, 혹은 개념과 개념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과 관련이 있다.본고는 가능성과 현실성간에는 상호 불안정한 동요가 발생하며, 이것이 결정적으로 가능성과 현실성의 의미를 고정시키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두 범주들이 서로가 맺는 이러한 관계를 지칭하는 개념이 바로 우연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필연성이란 이러한 생성의 절대적인 동요 혹은 돌변의 관계를 고정시키는, 즉 의미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논리학에서 우연성과 절대적 필연성은 동일한 사태의 두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실존하는 현실을 가능성과의 관련에서 고찰할 때 불가피하게 부딪히는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헤겔에 있어서 필연성은 당연히 우연을 배제하거나 결정론적인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우연을 배제할 경우 생기는 딜레마에 관해서 비판적인 서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양상범주로서의 필연성은 한편으로는 절대적 의미에서의 “개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헤겔의 체계와 관련해서도 우연성이 지니는 의미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0개의 논문이 장바구니에 담겼습니다.
선택하신 파일을 압축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