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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00원
주역은 본래 卜筮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의문을 결단할 수 있도록 吉凶悔吝 등의 점을 결정짓는 ‘斷占之辭’를 붙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지사’에는 인간의 지혜와 교훈의 의미가 들어있지 않는 것이 없다. 즉 주역의 ‘단점지사’는 의문을 결단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지만, 그 속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지혜가 투영된 것이어서, 그 어디에도 가르침의 뜻이 담겨있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 논문은 朱熹의 解易 관점에 기초하여 주역의 “吉凶悔吝”에 담긴 人道的 敎訓이 무엇인지를 고찰한 것이다.주역에서는 괘효사의 ‘단점지사’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길을 가도록 안내한다. 履卦 九二효사의 “호랑이 꼬리를 밟았으나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니 마침내 길하다.”라는 말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조심하고 경계하며 노력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며, 履卦 六三효사의 “애꾸눈이 능히 보며, 절뚝발이가 능히 걸음이라. 호랑이 꼬리를 밟아 무니 흉하다.”라는 말은 눈과 발이 온전하지 못한데도 무리하게 걷고자 하여 호랑이 꼬리를 밟는 잘못을 범함으로써 흉하게 되었음을 설명하는 말이다. 또한 乾卦 上九효사의 “지나치게 높이 올라간 龍이니 후회함이 있다.”라는 말은 지나치게 높이 올라가 떨어질 위험에 처하여 후회하게 되었음을 설명하는 것이며, 家人卦 九三효사의 “부인과 자식이 희희낙락하면 마침내 부끄럽게 된다.”라는 말은 삼가 조심하며 경계하지 않으면 좋은 상황도 어려운 국면으로 전환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그러기에 ‘힘들고 고생스럽더라도 올바름을 지키면 마침내 허물이 없게 됨’을 누누이 강조한다. 이처럼 주역의 괘효사에는 우환의식이 충만하여 무슨 일을 하든지 진지하고 경건하게, 그리고 근신하며 조심할 것을 항상 주문한다. 이러한 주역의 가르침은 주역이 형성되기 이전에 절대적 존재자의 힘에 의탁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龜卜의 “괴신의 꾀함(鬼謀)”에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당면과제를 해결하려는 “인간의 꾀함(人謀)”에로 진일보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占卜의 일대 발전이었다.
『周易』 原來是用來占卜的書, 因此也可以稱之爲是判斷吉凶悔吝等疑難問題的“斷占之辭”. 在這樣的“斷占之辭”中, 人類的智慧和敎訓可以說是无所不包, 也就是說, 雖然 『周易』 是用來判斷吉凶悔吝等疑難問題的, 但在經歷了漫長歲月, 凝聚了無數人的經驗和智慧以後, 處處都充滿了對人類的敎海. 本文以朱熹解易的理論爲基礎, 着重考察『周易』 “吉·凶·悔·吝”中所蘊含的有關人道的敎訓. 通過『周易』 卦爻辭中的“斷占之辭”, 可以使我們走上正確的道路. 比如履卦九二爻辭“履虎尾, 愬愬, 終吉”, 意思是說面對不利狀況, 只要小心謹愼, 幷且努力, 就能得到好的結果. 履卦六三爻辭“眇能視, 跛能履, 履虎尾, 咥人, 凶”說的是眼和脚不健全, 不按常理行走, 踩上老虎尾巴, 將被虎吃, 因而是極爲凶險. 另外乾卦上九爻辭“亢龍有悔”解說如果過分地攀登高處, 會有跌落下來的危險, 最終令人後悔, 而家人卦九三爻辭“婦子嘻嘻, 終吝”是說明居家處事, 如果不小心謹愼, 好事也會變成壞事. 在這里『周易』 强調了雖然有艱辛困難, 但只要堅持正道, 就能逢凶化吉. 類似這樣的卦爻辭充滿了憂患意識, 它要求人們在處事不順時要做到誠實恭敬, 謹愼小心. 『周易』 中這樣的敎海表明, 在 『周易』形成以前, 人們依賴絶對者(神)的力量, 借助“龜卜”一類的“鬼謀”來解決疑難問題, 進一步發展爲以“人謀”來解難析疑, 這是占卜的一大發展.
6,400원
이제마는 유학사상에 근거하여 사상의학 이론을 전개하지만 몸은 종래와 다른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한다. 본고의 목적은 동무의 몸 이해를 전통적인 유학적 관점과 대비하여 몸 이해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밝히려는 데 있다. 이를 위해 필자는 동무의 몸 이해를 맹자로부터 이어지는 유학적 관점과 비교하여 검토했다. 유학에서는 도덕성은 천리나 상제의 명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이를 따르는 것이 도덕이라고 인식하였다. 도덕성은 이처럼 초월적이기 때문에 도덕 행위는 마음의 사유 기능에 의해 이루어지며, 몸은 상대적으로 이를 방해하는 요소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동무는 도덕성의 근원인 성ㆍ명을 몸에 주어진 혜각과 자업의 능력으로 이해하여 도덕 행위는 몸 기능에 의해 실현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몸 이해는 지금까지 도덕 행위와 무관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몸을 새롭게 탐색하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또한 그의 몸 이해는 자신의 의료 경험을 통해 검증된 주장이라는 점에서 인간을 의학적 지식과 함께 종합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단서를 제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李濟馬雖然基于儒學思想展開了四象醫學理論, 但他對身體的理解有着與以前的觀點不同的理解. 這一篇論文的目的, 是通過東武對身體的理解和傳統的儒學的觀點之比較, 說明他們之間對身體的理解之差別. 爲了這一目的, 筆者比較·檢討了東武的身體的理解與自孟子以後傳下來的儒學的觀點. 儒學認爲道德性是由天理或上帝之命的, 因此隨之亦是道德的. 這樣, 因爲道德性是超越的, 所以道德的行爲是以心的思惟功能而成立的, 而相對而說, 認爲身體對實現道德性存在着妨害的要素. 但是東武把道德性的根源—性·命認爲存在于身體的知慧和資業的能力, 而且認爲道德行爲是通過身體的功能實現的. 東武的這一觀點, 對以前認爲道德行爲和身體無關的觀念, 提供了新的觀點. 不僅如此, 因爲他對身體的理解是已經過了醫學的經驗之檢討的, 所以可以評價如下, 提供了醫學的知識和綜合的解釋的可能.
7,500원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가치인 열반(nibbna)은 흔히 탐진치 지멸, 무집착, 혹은 무갈애의 상태로 설명되는데, 이는 선실천의 결과이다. 초기불교 이래 모든 불교가 예외 없이 일관되게 선의 실천을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선의 실천과 함께 똑같이 강조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선은 물론 악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선의 실천과 선악으로부터의 자유가 똑같이 강조되는 것이다. 이는 불교가 ‘선악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고서는 진정한 선의 실천은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이 논문은 불교에 있어서 ‘선악으로부터의 자유’의 의미를 구명한다. 논문은 선악으로부터 자유의 요청근거로서 선악공성, 그리고 선악에 의한 속박모습에 대해서 성찰한 후, ‘선악으로부터 자유’의 의미를 구명한다. 선악으로부터의 자유의 의미를 다음의 세 가지로 밝힌다. 첫째, 현재의 선악개념에 속박되지 않고 선뿐만 아니라 악에도 자유롭게 출입한다. 둘째, 악이 발생하는 곳(惡處)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거나 의도적으로 악에 동참함으로써 악에서도 선을 실천한다. 선악이분법을 벗어나서 악처나 악을 선실현의 방편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셋째, 선을 실천하고 악을 떠나면서도 ‘선악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다.’ 이 세 가지 의미 중에서 셋째의 ‘선악에 대한 무집착’은 다른 두 가지를 포괄한다. 그리고 선악에 대한 무집착은 ‘선악에 더렵혀지지 않는다’, ‘선악에 대해 애증심을 갖지 않는다’, ‘선에서 선을 떠나고 악에서 악을 떠난다’라는 표현으로 예시된다.
The Buddhist ultimate goal, nibbāna, is commonly explained in terms of ceasing three defilements, non-attachment, and non-craving which are the result of practising good(kusala). This is because every Buddhism since early Buddhism consistently emphasizes on practicing good. On the other hand, Buddhism equally emphasizes on freedom from good as well as evil. Buddhism equally emphasizes both the idea of practicing good, and the idea of freedom from good and evil. For Buddhism thinks that true good cannot be realized without being freed from good and evil. This paper reveals the meaning of good and evil in Buddhism. It begins with examining emptiness of good and evil as the ground required for freedom of good and evil, and human life bound by good and evil. It reveals three meanings of freedom from good and evil. First, one freely comes in and out not only good but also evil. Second, one practices good by intentionally choosing evil places or by intentionally participating in evil. This is utilizing evil places and evils as skillful means without falling into the bi-furcation of good and evil. Thirdly, leaving evil and practicing good, one does not attach to good and evil. The third meaning, non-attachment to good and evil, includes the other two meanings. And the idea of non-attachment to good and evil is found in the expressions such as “One is not defiled by good and evil,” “One does not have the mind of love and hatred towards good and evil," and “One leaves good in good and evil in evil."
6,700원
6,000원
헤겔은 유아론적 사유를 통해 형성된 근대적 주체의 절대성과 이러한 주체에 선험적으로 내재해 있는 이성의 원리에 근거한 “현대를 문제시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즉 그는 ‘절대적 주체성의 원리’ 속에 표현된 ‘현대성’의 이념을 자신의 철학의 중심내용으로 받아들이지만, 동시에 현대적 주체성의 원리에 내재한 파괴성과 폭력성의 위험을 감지한다. 따라서 ‘현대성’은 헤겔에게 있어서 새로운 사회의 원리이면서, 또한 보존과 극복이라는 의미에서 지양(Aufhebung)되어야 하는 이념이다. 현대성에 대한 헤겔의 이러한 비판적 거리두기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중의 하나인 정신현상학에서 체계적으로 표현된다.본 논문의 주된 목적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나타난 ‘현대성’ 비판을 재구성하고 이러한 비판의 현대적 의미를 찾아보는데 있다. 특히 본 논문은 자기 동일성에 근거한 현대적 주체에 대한 헤겔의 비판을 추적함으로써, 헤겔이 실천철학적 이념으로 제시하고자 했던 타자에 대한 인정에 토대를 둔 ‘동일성’의 개념을 명확히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통해 필자는 헤겔의 철학적 사유 속에서 ‘차이’에 대한 억압적 요소만을 간취해냄으로써 헤겔 철학의 종언을 선언하는 탈 현대론적 사유의 한계를 드러내고, 동시에 헤겔 연구에서 도외시되었었던 ‘타자’와 ‘차이’의 문제에 대한 헤겔의 논의들을 정신현상학을 중심으로 재조명하고자 한다.
Hegel ist wohl “der erste Philosoph, der die Moderne problematisiert hat”, welche auf die vom solipsistischen Denken herrührende Absolutheit des modernen Subjekts und das diesem Subjekt (transzendental?) immanente Vernunftprinzip gegründet ist. Hegel hat nämlich die Gefahr der dem Prinzip der modernen Subjektivität innewohnende Destruktivität und Gewaltsamkeit gewittert, während er zugleich die Idee der ‘Moderne’, welche sich im ‘Prinzip der absoluten Subjektivität’ ausdrückt, als ein zentrales Moment seiner Philosophie thematisiert hat. Die ‘Modernität’ stellt für Hegel ein neues Prinzip der Gesellschaft, und zugleich eine Idee dar, welche im Sinne des Aufbewahrens und der Überwindung aufgehoben werden soll. Die kritische Distanz zur Modernität bei Hegel manifestiert sich systematisch in der “Phänomenologie des Geistes” als einem seiner wichtigsten Werke. Die vorliegende Arbeit will hauptsächlich die in der “Phänomenologie” sich manifestierende ‘Kritik der Moderne’ rekapitulieren und aufgrund dessen der aktuellen Bedeutung dieser Kritik nachgehen. Dadurch will die Arbeit die Argumentation von Hegel in bezug auf das Problem des Anderen und der Differenz, welche bislang in der Hegel-Forschung relativ vernachlässigt ist, wieder beleuchten und ein Stück weiter thematisch machen.
5,700원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이 이론 윤리학으로서 성립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편적인 윤리적 원칙에 대한 체계를 갖추어야 할 것이며, 윤리의 가장 기본 성격인 ‘의무’에 대해서도 다루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사회적 선과 개별적 선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전통적 의미의 보편 윤리라는 관념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적 체계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 바로 이러한 면이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이론 윤리학의 체계를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한 논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화이트헤드는 윤리적 가치 관념이 ‘과정과 실재'라는 창조적 진보의 과정에서 판단 내려져야 한다고 해명한다. 더구나 의무라는 관념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입장, 다시 말해 “무조건적으로 반드시 그러그러해야 함”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의무라는 개념을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하면서, 의무를 하나의 미학적 느낌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또한 사회적 선과 개별적 선으로 구분하는 것은 그가 계속해서 반대해왔던 ‘실체와 속성'이라는 이분법적 오류에 속한다고 말한다. 대신 그는 가치들의 투쟁이 아닌 가치들의 협력에 의해 그러한 충돌을 해결하고자 한다. 그래서 더 이상 투쟁이 아닌 가치들의 협력으로 해결하는 하나의 방식이 바로, ‘질서'와 ‘사랑'의 관념인 것이다.
Whitehead is claiming that the process which lies at the heart of the universe involves an alternation between Beauty and Discord. All actual entities aim at some form of Beauty, and most socially ordered groups of actual entities(persons, social groups, civilizations) try to sustain and preserve the forms of Beauty which they find valuable. But Whitehead holds that no form of Beauty can be preserved forever; hence Discord is needed to point the way toward new forms of Beauty which can elicit new freshness and zest. In a sense, this is a tragic view of reality; all those things we deem most valuable are doomed to perish in the ongoing rush of process. But there is also an optimistic side; the Divine Eros is constantly beckoning the world toward new adventures, towards new ideals of Beauty which have not yet been actualized. And the tragedy of existence is at least mitigated by Whitehead's insistence that The Unity of Adventure will preserve the accomplish- ments of all finite actual entities forevermore.
6,000원
이 글은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 이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다. 비판적 고찰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하이데거의 죽음 이해 자체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은 대신 죽음의 본질, 죽음의 사유가능성, 죽음의 시간성, 죽음의 가능성의 불가능성의 문제 등 하이데거의 죽음 이해의 핵심 내용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했다. 일차적으로 논의의 사적 배경을 살핀다는 차원에서 플라톤 이래로 죽음에 대한 이해의 핵심문제였던 ‘죽음의 형이상학’을 하이데거가 거부하고 존재 일반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지평인 죽음의 존재론을 제시하지만, 그것은 결국 타자의 죽음을 허락할 수 있다는 레비나스의 통찰을 필자는 수긍하게 되었다. 그 다음 근대적 죽음 이해의 특징인 자연적 죽음은 죽음의 의미물음을 묻지 못한다는 하이데거의 통찰 앞에서 그 한계성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오늘날 회자되고 있는 생물학적인 죽음의 문제의 심각성을 감안할 때, 우리가 자연적 죽음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논의해야 한다. 또한 하이데거가 죽음의 본질을 ‘나의’ 고유한 죽음에 기초해서 세워 나가지만, 필자는 레비나스를 통해 ‘타자’의 죽음을 배제하고 지배하는 나의 죽음의 우위성의 위험성을 목도하게 되었다. 란트베르크의 지적에 따르면, 계산적 사유 방식이 아닌 본질적 사유 속에서 도출되는 하이데거의 죽음 자체에 대한 지식은 ‘알 수 있는 알지 못함’(wissendes Nichtwissen)이지만, 필자는 쟝켈레비치를 따라 ‘죽을 수 있는 살아있는 자’가 ‘죽음을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2인칭의 죽음을 통해 제시할 수 있다고 본다. 하이데거가 죽음을 시간을 통해 규정함으로써 ‘죽음이 시간의 종말의 사건이다’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알게 되었지만, 그러나 필자는 죽음이 시간의 종말로 끝나지 않고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는 시간인 공적인 시간이 있음을 리꾀르를 통해 알게 되었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라 말한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죽음을 불가능성의 가능성이 아니라 나의 죽음의 현실성에서 이해함으로써 하이데거의 죽음 이해와 대립한다. 끝으로 필자는 마르쿠제를 통해 하이데거가 체계화한 죽음의 존재론화에서 벗어나서 죽음의 사회화로 눈을 돌릴 필요성을 고찰했다. 그 이유는 죽음의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죽음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을 더 절실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Diese Arbeit versucht, das Problem des Todes bei Martin Heidegger zu untersuchen. Es geht um das Verständnis des Todes Heideggers in bezug auf die Metaphysik des Todes, den natürlichen Tod, das Wesen des Todes, die Zeit des Todes, den Tod als die Möglichkeit und die Soziologie des Todes. Worum geht es bei der Metaphysik des Todes für Heidegger, da wir sie bei ihm nicht finden können. Heidegger stellt das Wesen des Todes als eigentlichen Tod dar. Warum aber hat er das Problem des uneigentlichen Todes nicht behandelt? Wie sind wir vom Tod zu reden, wenn auch wir kein Wissen um den Tod haben und den Tod nicht erfahren. Vladimir Jankélévitch wies auf die Möglichkeit des Sprechens vom Tod in der Unmöglichkeit des Sprechen vom Tod hin. Heidegger bestimmt den Tod durch die Zeit dafür, die eigentliche Zeit durch den Tod zu verstehen. Dagegen versteht Lévinas die Zeit durch den Tod, weil er den Tod nicht als Freiheit, sondern als Schmerz und Zerstörung erlebt. Und dagegen setzt sich Ricoeur mit dem Problem der offiziellen Zeit gegen die private Zeit des Todes auseinander. Was bedeutet der Tod als eigentlichste Möglichkeit des Daseins? Sartre interpretiert den Tod nicht als die Möglichkeit der Unmöglichkeit, sondern als die Faktizität meines Todes. Am Ende diskutiert diese Arbeit das Thema der Sozialisierung des Todes gegen die Ontologisierung des Todes.
6,300원
이 글은 하이데거의 존재사유에서 ‘형이상학의 종말’이 무엇이고, 이 형이상학이 종말에 이르렀다고 하면 사유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다루고 있다. ‘형이상학의 종말’은 형이상학이 가장 극단적인 가능성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 즉 철학사 또는 형이상학사가 가장 극단적인 가능성에로 모아진 것을 의미하는데, 이 ‘형이상학의 종말’에서 ‘종말’은 ‘완성’으로서 ‘장소’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형이상학의 종말은 ‘의지에의 의지’에 의해 나타난 ‘정돈’과 ‘기술’을 통해, 그리고 철학이 ‘학문’이 되면서 그 학문이 ‘기술화’ 되었을 때 이루어진다. 이때 형이상학의 종말의 장소는 바로 지금의 현 시대가 된다. 왜냐하면 지금의 이 시대엔 ‘정돈’, ‘기술’, 그리고 학문의 ‘기술화’를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 자체로 고유하게 있지 못하면서 단지 ‘부품’ 내지는 ‘정보’로만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우리에겐 새로운 사유와 그 사유의 과제가 요청될 수 있을 것인데, 여기에서 사유의 과제는 철학이 시작될 때 이미 나타난 존재의 진리인 ‘알레테이아’, 즉 ‘비은폐성’이며, 이것에 응답하는 사유가 바로 새로운 사유인 ‘본래적 사유’, 즉 ‘존재의 사유’다. 그런데 이렇게 존재의 진리인 비은폐성(알레테이아)에 응답하는 사유인 ‘존재의 사유’는 인간 현존재의 근본태도인 ‘초연한 내맡김’, 즉 표상적 사유의 근본 특징인 ‘욕구’로부터 벗어나 ‘사물’에로 자신을 내맡기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러한 사유는 전통형이상학적 사유방식인 ‘표상적 사유’와는 완전히 다른 사유다. 왜냐하면 표상적 사유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앞에 세워 장악하려는 사유로서 형이상학의 종말을 이끈 사유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존재의 사유’는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사유로서 존재의 진리의 열린 장(환히 트인 터)인 그 곳으로 진입하여 존재의 소리 없는 목소리를 들음으로써 존재자를 그 자신으로 있게 하는 사유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이 종말을 고한 이 시대에 우리에게 요청되는 사유는 당연히 존재의 사유가 되는 것이다. 이것뿐만 아니라 이 사유를 통해 전통형이상학이 주장해 온 ‘일치설’, ‘확실성’이라는 진리관도 보증 받을 수 있게 있게 된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의 종말과 사유의 과제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그가 표명해 온 전통형이상학의 해체와 그 극복을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In dieser Arbeit handelt es sich um das Ende der Metaphysik und das Problem des Denkens im Seinsdenken M. Heideggers. Das Ende der Metaphysik ist der Ort, dasjenige, worin sich das Ganze ihrer Geschichte in seine äußerste Möglichkeit versammelt. Das Ende der Metaphysik zeigt sich als der Triumph der steuerbaren Einrichtung einer ‘wissenschaftlich-technischen' Welt und der dieser Welt gemäßeren Gesellschaftordnung. Die Metaphysik endet im gegenwärtigen Zeitalter. Denn es ist das Zeitalter, das das Seiende ist nur Bestand und Imformation. Welche Aufgabe bleibt dem Denken am Ende der Metaphysik noch vorbehalten? Der Aufgabe des Denkens ist Ἀλήθεια, die Unverborgenheit, die ist eine Wahrheit des Seins. Aber sie bleibt in der Philosophie ungedacht, wenngleich im Beginn der Philosophie von der Unverborgeneit gesprochen wird. Und dann was ist das Denken über die Unverborgenheit? Es ist ein Denken des Seins. Dieses Denken ist das Entsprechen, das spricht, insofern es auf den Zuspruch des Seins achtet. Also das Denken ist ein Entsprechen zum Sein des Seienden. Daher das entsprechende Denken, d.h. das Denken des Seins ist nicht mehr Philosophie, weil es ursprünglicher denkt als die Metaphysik. Nötig ist in der Zeitalter : weniger Philosophie, aber mehr Achtsamkeit des Denkens, d.h. das denken über die Unverborgenheit.
5,700원
이 글은 바슐라르의 존재론을 통해 하이데거 존재론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해 보고자 한 것이다. 특히 하이데거 존재론에서 기분의 문제를 바슐라르 철학에서 몽상의 문제와 비교함으로써 그 독자적인 내용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즉 일종의 정서개념인 몽상과 기분이 두 철학자에서 어떻게 상이한 존재론으로 자리매김 되는가 하는 과정을 고찰하고, 그를 통해 하이데거에 있어 기분의 존재론이 갖는 해석학적 의미와 바슐라르에 있어 몽상의 존재론이 갖는 문학적 의미를 그들의 철학적 지평에서 드러내어 밝히고자 한다.먼저 바슐라르는 몽상의 개념을 가지고 문학비평을 통한 자신의 문학철학을 제시한다. 이러한 문학철학은 프루스트 비평의 전통을 계승하여 작품의 내적 자아를 몽상을 통해 찾고자 한다. 즉 몽상을 통해 물, 불, 흙, 공기의 고대 4원소가 갖는 물질의 연금술적 이미지를 분석하고, 그로써 작품의 내적 자아가 드러내는 무의식적 원형상을 발견한다. 이러한 몽상을 바슐라르는 ‘물질적 상상력’이라고 명명하고, 그것을 단순한 형태적 상상력을 넘어서 인간 정신의 최초의 기능이라고 평가한다. 특히 물질적 상상력은 영혼의 울림을 통해 존재의 전환에 관계하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 정신의 최초의 현실로서 하나의 독자적 존재론이라는 것이다.이에 비해 하이데거는 기분의 문제를 가지고 현존재의 분석론을 통한 자신의 존재철학을 서술해 나간다. 이러한 존재기분의 철학은 인간의 내적 감정이나 외적 대상이 아니라, 인간존재의 존재방식으로서 현존재의 기분을 존재론적으로 처해있는 피투성 속에서 이해하고 말하는 존재개시의 철학이다. 이러한 존재개시의 철학인 인간 현존재의 존재론적 기분은 불안과 권태와 같은 근본기분에서 존재 자체를 실존론적으로 드러내어 준다. 즉 불안과 권태는 현존재의 존재지평인 시간을 통해 존재 자체를 실존론적으로 개시하는 근본기분을 말한다. 이로써 하이데거에서 기분은 인간 현존재의 실존을 통해 존재론적으로 제시되는 실존론적존재론적 개념이다.바슐라르의 ‘몽상’과 하이데거의 ‘기분’에 대한 이러한 고찰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양자가 일종의 정서개념을 가지고 공히 존재론을 표방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보다 엄격하게는 바슐라르의 존재론이 시적 몽상을 통해 인간의 심적 존재 이미지, 즉 ‘인간’의 상(像)에 귀착하였다면,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현존재의 기분을 통해 인간존재의 의미, 즉 ‘존재’를 드러내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바슐라르가 몽상의 형이상학을 통해 인간존재의 시적 발견을 기도하였다면, 하이데거의 기분은 존재 자체의 형이상학을 통해서 인간 현존재의 의미를 해석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전자가 시문학을 통하여 인간을 이미지로 서술하여 냄으로써 몽상의 존재론을 설정하였다면, 후자는 철학을 통하여 인간을 존재의미로 해석하여 냄으로써 기분의 존재론을 이끌어 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기분론은 바슐라르의 몽상론에 비해 존재사유에서는 철학적 근원성을 갖지만, 그 현실성과 문학성에서는 한계를 갖는다고 판단된다.
This paper pursues a new hermeneutical meaning about Heidegger through study of Bachelard. In the process, this paper analyzes the concept of Bachelard's Reverie and that of Heidegger's Stimmung. According to Bachelard, Reverie is not the function of human being, but the imaginative power about Être. This Reverie as ‘l'imagination matérielle’ suggests us a universal ontology, namely the ontology of reverie. Here Reverie is a kind of fundamental thinking embedded in conversion of Being(un virement d'Être), so in Reverie we can find out image of Being and parole about Being. Bachelard's attempt to prove cosmic drama of human being through Reverie shows aesthetic world view of Being in which image comes to prior to thinking. Whereas Bachelard's ontology of reverie is aesthetic, Heidegger's ontology of Stimmung is more serious and profound due to Heidegger's effort to seek for the Origin of Sein. In this thought of Sein, Stimmung is a ground way of Sein as Dasein, and Grundstimmung as fear and languor discloses time-horizon of Being. The idea of ontological Stimmung develops in terms of Grundstimmung and Seinsgeschick in later Heidegger, in which Stimmung as Grundstimmung is to follow the call of Sein in another beginning. To conclude, the ontology of Stimmung in Heidegger shows a philosophical world view of Being with Seinsdenken.
6,100원
본 논문의 주된 목적은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로티의 해석을 검토함으로써 로티가 철학적 상대주의자라고 비판받는 원인을 분석하고, 이러한 상대주의적 난점을 체험주의적 관점에서 해소하려는 것이다. 로티는 철학이 치유적 활동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과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삶의 형식’에 담긴 경험의 추상적 층위에 대한 해석을 수용한다. 그러나 경험의 물리적 층위에 대한 고려는 간과하고 있다. 이러한 로티의 경험에 대한 해석은 자신의 ‘언어 우연성’ 논제를 전개시키기 위해서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언어 우연성’에 관한 로티의 주장은 언어 사용의 제약 지점을 설정하지 않기 때문에 철학적 상대주의라는 비판을 불러오고 있다. 로티가 철학적 상대주의자라는 비판은 경험의 물리적 층위를 포함하고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온전히 수용한다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해명은 경험이 물리적이고 추상적인 층위를 동시에 포괄한다는 체험주의적 시각을 통해서 가능하다.
The main purpose of this paper is to analyze the reason why Rorty is considered as a philosophical relativist by scrutinizing his interpretation on Wittgenstein. The paper also aims to dissolve the relativistic problem of Rorty’s point of view from the different standpoint, what is called, experientialism. Rorty accepts Wittgenstein's point of view that philosophy is a therapeutical function and admits the abstract facet of experience embedded in the later Wittgenstein's concept, ‘form of life'. However, Rorty seems to overlook the physical aspect of experience. His interpretation on experience is inevitable since he made an effort to expand contingency of language. His theory of linguistic contingency does not offer any constraints on language use. This is the point where Rorty's view has been criticized for being relativistic. The criticism that Rorty's claim is relativistic would be dissolved if he accepted Wittgenstein's view on experience thoroughly, in which both physical and abstract aspects of experience are embedded. The dissolution of relativism can be achieved through the experiential point of view in which experience includes physical and abstract facets together.
5,800원
본 논문의 주된 목적은 본성상 매우 다른 층위의 도덕을 금지의 도덕과 권고의 도덕으로 구분하려는 것이다. 금지의 도덕은 전형적으로 “~하지 않아야(해야) 한다”라는 형태를 띤다. 따라서 금지의 도덕은 ‘규범적 강제성’을 수반하는 반면, 권고의 도덕은 더 나은 인간의 삶을 위한 다양한 이상들을 제시한다. 전통적인 규범윤리학은 대부분 이 구분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으며, 오늘날 그것을 넘어서려는 다양한 형태의 윤리학적 논의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필자는 ‘도덕적인 것’을 규정하는 핵심적 특성이 ‘규범적 강제성’이라는 사실을 축으로 금지의 도덕과 권고의 도덕의 본성적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다양한 사회적문화적 변이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인에 대한 해악’이라는 밀의 자유주의 원리가 규범적 강제성을 규정하는 실험적 원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금지의 도덕과 권고의 도덕 구분은 먼저 이 두 가지 도덕을 포괄하는 보편적 도덕 원리를 추구하는 절대주의적 도덕 이론의 난점의 소재를 드러내 줄 것이며, 나아가 윤리학의 핵심적 관심사가 금지의 도덕의 영역을 설정하는 문제라는 점을 보여 줄 것이다. 이것은 ‘좋은 것의 윤리학’으로부터 ‘나쁜 것의 윤리학’에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The main purpose of this paper is to draw a distinction between two different types of morality: “Compulsory morality” imposes normative coercion, while “Advisory morality" offering various human values and ideals. This distinction has long been neglected or overlooked by the tradition of normative ethics, whose main aim is to find a universal principle of morality. By distinguishing between compulsory and advisory moralities, we may see that the key subject of ethics should be to define the sphere of compulsory morality. And I suggest the liberalist principle of ‘harm to others’ a la J. S. Mill as the most plausible candidate to do the job. Once the sphere of Compulsory morality is set up, matters beyond that sphere may rightly be considered as offering private values or virtues, in the sense that they lack the ground for ‘normative coercion’. This will show us that the deepest mistake of the mainstream absolutist moral theories is their exclusive pursuit after the ultimate sources of ‘the good’. Instead, this urges that our central concern of ethical inquiry be on the matter of drawing the boundary of the sphere of Compulsory morality. I would like to name this new inquiry “the ethics of the b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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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주된 목적은 신실용주의와 체험주의의 철학적 전개에 있어서 은유의 중요성을 밝히고 두 은유론의 근본적인 차이를 지적하려는 것이다. 객관주의적인 전통철학에서 은유는 일탈적 언어로 간주되었으므로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 최근의 언어철학적 입장인 신실용주의와 체험주의는 철학적 물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은유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그들에 따르면 그 의문의 원인은 철학적 물음 속에 이미 철학적 가정이 전제되어 있으며 그 철학적 가정은 은유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데 있다. 신실용주의는 도구적 언어관을 통해 은유가 작동하는 방식을 해명하여 그것이 우연적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절대적 진리의 위상을 거부한다. 체험주의는 인지과학적 성과들을 수용하여 새로운 은유론을 형성하고, 사유가 은유적으로 확장하는 방식에 대한 해명을 통해 전통적인 은유론이 그릇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 결과 신실용주의와 체험주의는 객관주의적 전통의 철학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은유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철학 개념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신실용주의는 철학에 있어서 참신한 은유의 창조를 지향하는 ‘문예비평으로서의 철학’을 주장한다. 그리고 체험주의는 은유적 사유가 철학적 통찰력을 가능하게 하고 또한 철학이 취할 수 있는 형태를 제약하는 주요 도구라는 것을 강조하며 ‘경험적으로 책임 있는 철학’을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은유는 더 이상 철학의 주변적인 관심사가 아니며 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신실용주의와 체험주의에서 전개된 은유론의 차이는 철학관의 차이를 불러오는데, 그 핵심은 은유의 보편적 지반을 설정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 차이는 절대적 진리를 거부하는 철학적 상황에서 우리가 어떠한 은유론을 선택해야 하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The main purpose of this paper is to show the major significance of metaphor in the philosophical development of Neo-pragmatism and experientialism, and to point out some fundamental difference between their views of metaphor. In the traditional objectivist view, metaphor has been just a peripheral issue because it was regarded as a deviant linguistic device which carries ornamental effects. However, in recent philosophical discussions, Neo-pragmatism and experientialism rightly have claimed that philosophical theories are metaphorical in their nature. This has led both of them to deny the traditional objectivist view that there can be an absolute truth in philosophy. Nevertheless, their alternative conceptions of philosophy, i.e., Rorty's conception of philosophy as “literary criticism” and the experientialist conception of “empirically responsible philosophy" lead to quite different consequences. Rorty explains metaphor as nothing but a contingent play of language, thus giving rise to a worry about nihilism. But the experientialist account of metaphor, by identifying the physical basis as a common ground for various metaphorical extensions, seems fairly to avoid the worry about nihilistic slide. This offers a significant clue to the question which philosophical theories to choose as working metaphors.
5,500원
구성적 경험론자들(van Fraassen, 1989; Ladyman et al., 1997)은 나쁜 부지로부터의 논증(argument from a bad lot)과 무차이로부터의 논증(argument from indifference)을 전개하여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리(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를 비판한다. 우리는 이 논문에서 그들의 두 논증이 훌륭하다고 가정하고, 설명에 대한 맥락론과 구성적 경험론과 같은 van Fraassen의 철학이론들에 미치는 논리적 재난을 드러내고자 한다. 우리가 보기에, van Fraassen(1980)은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리를 이용하여 맥락론을 정당화하고 있다. 따라서 과학이론이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리의 산물이라는 이유로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면 van Fraassen의 맥락론도 마찬가지로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그리고 구성적 경험론자의 위 두 논증은 아직 우리가 생각해내지 못한 경쟁이론들과 싸워보라고 실재론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실재론자들이 이런 이론들과 싸워야한다면, 구성적 경험론자들은 우리가 아직 관찰하지 못한 변칙사례들(anomalies)과 싸워야한다고 우리는 주장하겠다. 따라서 실재론이 문제 있는 입장이라면 구성적 경험론도 마찬가지로 문제 있는 입장이다. 마지막으로, 위 논의로부터 과학적 추론과 철학적 추론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중요한 철학적 교훈을 이끌어내겠다.
Constructive empiricists (van Fraassen, 1989; Ladyman et al., 1997) run the argument from a bad lot and the argument from indifference against 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 (IBE). In this paper, we assume that the two arguments are good, and explore disastrous consequences they have on van Fraassen's positive philosophical theories, such as the contextual theory of explanation and constructive empiricism. We show that van Fraassen (1980) uses IBE to establish the contextual theory of explanation. So if a scientific theory goes down, being the product of IBE, so does the contextual theory. The two arguments can be summed up as a request for realists to fight hitherto unconceived rival scientific theories. We argue that if realists have to fight such theories, constructive empiricists would have to fight hitherto unobserved anomalies. So if realism is a problematic position, so is constructive empiricism. Finally, from the above discussion, we draw an important philosophical lesson that there is no difference in structures between scientific reasoning and philosophical 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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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의 비대칭성이 반드시 역행인과의 개념적 불가능성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인과의 비대칭성은 A가 B의 원인이라면 동시에 B가 A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며, 이로부터 현재나 미래의 사건이나 사실이 과거의 사건이나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뉴컴의 문제와 확장된 뉴컴의 문제를 면밀하게 검토함으로써 역행인과의 논리적 가능성을 보일 수 있다. 즉 원인과 결과의 관계인 두 사건은 시간적으로 언제나 원인이 결과보다 앞서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예측가능성에서 비롯된다. 나아가 양자역학의 세계처럼 결정론적이지 않은 세계에서도 휠러의 뒤늦은 선택 실험을 통해 미래의 선택이 과거에 영향을 준다고 말할 수 있는 개념적 가능성을 볼 수 있다.
The causal asymmetry does not necessarily imply the conceptual impossibility of the backward causation. I discussed from Newcomb's problem that the future event can bring about the past event. Following Schmidt's extended Newcomb's problem, I consider the world divided into two parts, composed of the gigantion and tinion respectively, and I discussed that the predictability of the classical world gives the logical possibility of the backward causation. This is also the case for the quantum world in which the world is not deterministic. To show the presumability of the backward causation for the quantum world, I examined Wheeler's delayed choice experiment with four specific settings. The consideration of Newcomb's problem and Wheeler's delayed choice experiment shows that Black's bilking argument can be avoided and the backward causation is not logically prohib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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