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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한철학 [PAN-KOREAN PHILOSOPHY]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범한철학회 [Bumhan philosophical society]
  • pISSN
    1225-1410
  • eISSN
    2713-9344
  • 간기
    계간
  • 수록기간
    1987 ~ 2025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철학
  • 십진분류
    KDC 105 DDC 105
제55집 (18건)
No
1

이제마 사상설의 경험적 구조

최대우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5집 2009.12 p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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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마의 사상의학은 유학과 한의학에 그 이론적 근거를 두면서도 이들의 논의 방식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이론체계를 이루고 있다. 이 논문의 목적은 사상의학 이론체계가 경험적 관점에서 형성되었다는 가정 하에 이를 검증하고, 그 의도가 무엇인지를 밝히는데 있다. 이를 위해 필자는 음양오행과 사상 개념을 비교 검토한 다음, 사상의 구조와 몸 기능의 작용 측면을 한의학의 형이상학적 관점과 대비되는 관점에서 검토했다. 한의학은 자연현상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고 이를 음양오행의 상생 상극 개념으로 해명하려고 했다. 반면 이제마는 인간을 자연과의 유기적 관계에서 이해하면서도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해명을 벗어나 사상구조 속에 존재하는 경험적 존재임을 검증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적 관점에서 인간의 존재 구조와 도덕 문제를 재구성한 다음 질병 치료의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이제마의 이러한 해명은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전통과 한의학 이론과의 단절을, 그리고 연구와 진료 방법에 있어서는 사변적 방식을 탈피하여 실증적 탐구로 전환을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제마 사상설의 경험적 구조는 인간의 존재 구조에 대한 새로운 해명이며, 그것은 인간의 질병을 탐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雖然李濟馬的四象醫學, 是基于儒學與韓醫學的理論, 但是他的討論方式, 却存在着獨特的理論體系. 這一篇文章的目的, 首先是在李濟馬的四象醫學的理論體系當中, 檢討了其形成過程就在于經驗的觀點, 而且表出了其意圖. 爲了這一目標, 筆者首先比較、檢討了陰陽五行與思想槪念, 然後從韓醫學之形上學的觀點來, 再比較、檢討了思想的構造和身體功能之作用的側面. 筆者認爲, 在韓醫學當中, 它所關注的就是自然現象對人體的影向, 而且對此, 以陰陽五行之相生相剋槪念來解釋. 與此相反, 李濟馬認爲, 人間與自然是有機的關係, 不僅如此, 他的方法也不是從性理學之形上學的解釋, 而是從四象醫學當中之存在的經驗來檢討的. 然後, 從經驗的觀點, 再構成了存在構造與道德問題, 而且探索了治療治病救人之新的方法. 李濟馬的這樣的方法, 宣布了脫離性理學之形上學的傳統與韓醫學的理論, 而且在硏究與診斷方法上, 脫離了以前那樣的思辨的方式, 而轉向了實證的探究. 從這一內涵來看, 我們可以這樣評價: 李濟馬之四象醫學的經驗的構造是對人的存在構造新的解釋, 而且它是對人的治病救人提供了新的paradigm.

2

한원진의 나흠순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 비판과 그 배경

이상곤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5집 2009.12 pp.2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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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0원

이 논문은 18세기 조선후기, 기호유학(畿湖儒學) 가운데서도 노론학통을 계승하여 호학(湖學)의 일인자가 된 남당 한원진의 이기설(理氣說)에 주목하고, 그의 의해 명대(明代) 중엽의 유학자인 정암 나흠순의 이기일물적(理氣一物的) 인식체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비판되고 있는지와 함께 그러한 비판의 배경에 대해 살핀 글이다. 나흠순은 『곤지기(困知記)』에서 이기일물에 입각하여 정주(程朱)의 이기설을 이해함에 있어 특히 기에서 독립된 리의 존재성을 인정하고, 그리하여 리와 기를 두 실재[二物]로 인식하는 사유체계를 비판하였다. 나흠순의 이러한 이기일물적인 사유체계에 대한 한원진의 비판의 방식은 간명한 인식체계 아래 이루어졌다. 그것은 본원과 유행의 관점에 따라 리와 기는 둘이면서도 하나요, 하나이면서도 둘이기 때문에 그 관계성이 불리이면서 부잡, 선후의 있고 없음, 같고 다름으로 규정된다는 것이다. 나흠순이 비판의 예봉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이기일물설이 불리의 한 쪽에 치중하여 이기의 관계성을 평면적으로만 파악해냈기 때문이다. 한원진은 리를 주로 하는 학문을 정학(正學)으로, 그리고 기를 주로 하는 학문을 이단(異端)으로 단정한다. 이러한 판별기준으로 본다면, ‘기의 리’로서 이기일물설을 주장하는 나흠순의 학문은 리를 기에 종속시키는 인식체계이므로 비록 노불이나 육왕학과 같은 극단적인 이단으로 단정할 수는 없으나, 그에 버금가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원진은 이단을 곧 ‘분별력의 상실[無分]’로 간주하고, 자신의 시대를 인수무분(人獸無分)‧유석무분(儒釋無分)‧화이무분(華夷無分)으로 인식해냈다. 분별력이 상실된 현실에 직면하여 한원진이 택한 유일한 처방책이 바로 정학인 주자학 수호였다. 양란 이후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중화 질서 붕괴에 따른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선이 순정한 주자학의 나라로 거듭나서 중화의 참된 계승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철저한 이단 비판을 통해 정학을 구축하는 것을 자신의 평생의 사명으로 여겼던 것이다. 요컨대 한원진의 가장 큰 관심사는 정학을 받들고 이단을 내치는 데 있었으며[扶正學, 闢異端], 이를 평생의 정론(定論)으로 여겨 실천에 옮겼다. 나흠순의 이기일물설에 대한 비판의 이면에는 이러한 시대적 사명이 담겨 있다.

本論文硏究18世紀朝鮮後期在畿湖儒學派當中繼承中老論學派成爲湖學第一人的南塘韓元震的理氣說, 還硏究他怎麽批評明朝中期的儒學家整菴羅欽順的理氣一物的認識體系和該批評的背景是什麽. 羅欽順堅持理氣一物說, 在『困知記』討論程朱之理氣說時, 他肯定理獨立於氣而存在, 從而批評了 理氣二物說的思惟體系. 韓元震批評羅欽順理氣一物的思惟體系是在簡明的認識體系下進行的. 那就是在分爲本源和流行的觀點, 卽理和氣是二而一, 一而二. 因此兩者的關係是不離不雜, 只有先後之別. 羅欽順之所以不能避免被批評, 是因爲他的理氣一物說只側重不離的一面, 就認爲理氣是平面性的關係. 韓元震把以理爲主的學問看做正學, 把以氣爲主的學問看做異端. 以這種標準看, 主張理氣一物說的羅欽順的學說認爲理從屬於氣, 因此雖然不是像老佛或陸王學的極端的異端, 但也算是接近於它的學說. 韓元震把異端看做無分, 認爲自己的時代是人獸無分‧儒釋無分‧華夷無分的時代. 面對無分的現實, 韓元震選擇的唯一方法就是衛護正學卽朱子學. 他認爲兩亂以後, 爲了安定民心、克服中華秩序的崩潰所導致的混亂, 朝鮮應當作爲朱子學的國家, 繼承中華文化, 還把澈底地批評異端、衛護正學作爲自己終生的使命. 總之韓元震最大的關心在於扶正學闢異端, 而且還把它做實踐. 羅欽順批評理氣一物說, 裡面有這樣的時代的使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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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소통의식에 관한 소고

박해장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5집 2009.12 pp.5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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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공자의 소통의식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체계와 체계 밖을 구분하되 체계의 영역을 유가의 정서에 맞게 ‘공적 의지의 영역’, 체계 밖의 영역을 ‘사적 정감의 영역’이라고 명명하고, 공자의 소통의식을 이 두 영역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공자의 소통의식이 공적 의지의 영역에서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은 인습・손익과 정명이다. 그리고 사적 정감의 영역에서 소통의식을 잘 엿볼 수 있는 부분은 은둔과 광자・견자다. 따라서 공적 의지의 영역에서는 인습・손익과 정명을 중심으로, 사적 정감의 영역에서는 은둔과 광자・견자를 중심으로 공자의 소통의식을 살펴본다. 이 고찰을 통해 다음의 네 가지가 밝혀질 것이다. 첫째, 공자는 인습・손익을 사회변혁의 방법으로 보는 역사주의적 소통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유가는 정의로운 사회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 정명이라고 보았다. 셋째, 유가의 은둔은 사실 미래를 위한 수양 과정이다. 넷째, 공적 의지의 영역에 머물고 있는 광자・견자는 유가입장에서 보면 체계 속에 은둔자다. 공자의 소통의식 탐구는 원시 유가철학에서 현재성을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공자가 살던 시대나 지금이나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바뀌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므로 공자의 소통의식 규명은 다양한 가치가 혼재하는 오늘날 우리에게 더 나은 지평을 제공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

本論文的目的在於探究孔子的疏通意識. 筆者把孔子的疏通意識分爲兩個方面,而進行了研究,既是管公的意志方面叫做體系內的領域,管私的情感領方面叫做體外的領域. 我們在公的意志方面上最明顯地看到孔子的疏通意識,其部分爲因襲、損益、正名,在私的情感領方面上最明顯地看到孔子的疏通意識,其部分爲狂者、狷者. 因此,在公的意志方面上, 以因襲、損益、正名爲主, 進行考察孔子的疏通意識,而在私的情感方面上,以隱遁與狂者狷者爲主,進行考察孔子的疏通意識. 通過這考察,我們可以看到如下的四個事實. 第一, 孔子具有歷史主義的疏通意識,他把因襲、損益看成一種重社會變革的動因. 第二, 正名是一條走向正義社會的關門. 第三, 儒家的隱遁是一種准備未來的修養課程. 第四, 狂者狷者是在公的意志領域裏活著的人物,站在儒家立場看他們的話,他們的隱遁是一種現實的隱遁. 爲了在原始的儒家哲學方面找到現實性,對孔子的疏通意識進行研究. 目前人間的基本問題呢,跟孔子時代一樣,沒有什麼大的變化. 因此這些究明孔子所想的疏通意識,在多種價值混在的現代社會,會給我們提供一些大開眼界的機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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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敦頤 哲學에 있어 마음의 의미

연재흠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5집 2009.12 pp.83-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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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周敦頤 철학에 있어 마음(心)의 개념을 중심으로 그 의미와 기타 개념들과의 관계를 살펴보는데 있다. 주돈이 철학에 있어 天・太極・誠・中 등은 본체를 의미하며, 神은 만물을 생성하는 본체의 작용를 가리킨다. 아울러 神은 만물에 내재하여 만물이 일으키는 운동과 변화의 원동력이 된다. 이처럼『通書』를 중심으로 이해할 때, 주돈이의 철학에는 『中庸』에서 언급한 誠과 『易傳』의 神 개념이 결합된 誠體神用의 사유체계가 내재해 있다. 한편 인간의 인식방면에 있어 神은 외부 사물과 感應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생성되는 善惡의 幾微를 파악할 수 있는 주체이다. 주돈이에게 있어 神은 마음이 지닌 작용으로 귀속된다. 주돈이는 마음이 지닌 앎(知)과 생각(思)의 작용을 중시하였으며, 앎과 생각은 주로 도덕의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 주돈이는 養心을 통해 誠을 자신의 내면에 확립하여 靜虛動直하고 無思而無不通한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養心의 수양은 자신의 사욕을 제거해 나가는 無欲을 중심으로 한다, 수양을 통해 마음은 明・通・公・溥의 작용을 발휘할 수 있다. 주돈이가 이러한 수양을 통해 확립하고자 했던 誠心과 純心은 맹자가 말한 本心・良心의 의미와 相通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주돈이의 마음에 관한 이론은 先秦儒學의 기본 정신을 계승하여 宋明理學에서 전개된 心論의 단초를 여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這篇論文的主要目的在於探究在周敦頤思想中心所具有的哲學的意義. 作爲宋明理學的開創者, 周敦頤通過『太極圖』和『太極圖說』以及『通書』等主要著作而提供了後來成爲宋明理學重要主題的思想端緖. 在周敦頤哲學體系中, 雖然他沒有明確地闡明, 但他所說的天・太極・誠・中等都帶有本體的含意. 而且, 神是指這些本體所起的作用. 就本體的觀點來看, 神意味對萬物的生成功能. 就萬物之觀點而看, 神表示萬物所起的運動變化的推動力. 從人類的認識方面來說, 神是感受外部事物和其刺激而産生反應的主體. 從道德實踐方面而言, 神能夠把握由於與外物接觸而産生的幾, 卽分別善惡的微妙的契機. 周敦頤所謂神是屬於心的槪念, 他把心的具體作用表現爲神. 周敦頤認爲心具有明・通・公・溥的功能. 這裏所謂明是指明察; 通是指思通; 公是指公正; 溥是指擴充而無限地展開的意思. 而且, 爲了發揮心所具的這種功能, 一定需要無欲的修養工夫. 在周敦頤那裏, 所謂無欲不是要否定和消滅生而具有的自然的本能, 而是調控內心的欲望而消解私欲的擴張. 進而, 無欲又意味在自己的意識中不斷地除去妄念和虛僞而獲得內心之安靜和平穩. 周敦頤主張通過無欲的修養而可以達到‘靜虛動直’・‘無思而無不通’的境地. 而且, 在周敦頤那裏, 無欲和誠心 ・ 純心有相當密切關係. 周敦頤認爲誠心 ・ 純心能夠調控自己的行爲, 而且誠心 ・ 純心之培養意味以養心爲主要內容. 在周敦頤哲學體系中, 他所謂心具有與孟子所提的本心 ・ 良心相通的意義. 關於心, 周敦頤繼承先秦儒學的基本精神, 而提供了以後對於宋明理學所展開的心論的思想基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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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0원

『철학에 관하여』가 자율적인 운동, 즉 자가 운동의 측면에서 별들의 운동을 설명할 때, 그것은 플라톤의 이론을 따르고 있지만 초월적인 부동의 원동자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VIII과 『형이상학』L에만 발견되는 독특한 것이다. 이 발전을 이해하기 위해서 『자연학』II와 VIII을 살펴보면 II에 나온 모든 대상들은 자신 안에 운동의 근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자동자로 기술된다. 그러나 VIII에서 자동자는 운동시키는 것과 운동을 겪는 것으로 구분됨으로서 부동의 원동자 개념을 도출하고 있다. 또한 영원한 연속적인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초월적인 부동의 원동자 개념이 제시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우주 운동의 궁극적인 원리로서 초월적인 부동의 원동자 개념에 도달하게 된다. 그 후 『형이상학』L에서 그는 이를 신과 동일시하게 된다. 그러나 『철학에 관하여』에서는 여전히 자동자 개념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초월적인 부동의 원동자 개념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개념으로 별-신들의 원리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아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에 관하여』에서 『자연학』에서 도출했던 결론을 끌어낼 수 없으며 부동의 원동자를 『형이상학』L의 초월적 신으로도 간주할 수 없다. 부동의 원동자 개념은 아직 『철학에 관하여』에서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최고신의 개념에 관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운동의 근원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우주의 질서에 대한 물음과 선한 질서에 대한 물음이 이 개념의 형성에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이 『철학에 관하여』에서는 질서의 현상과 선한 질서의 현상이 매우 강조되고 있다. 별들의 자발적인 운동은 우주 운동의 원천이라는 역할을 맡고 있다. 별들은 그 자신들을 연합시키는 어떤 공통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제일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 제일원리가 바로 별-신들을 지배하는 최고신이다. 이 신은 별-신들을 조율함으로써 개별적인 별-신이 자신의 방식대로 운행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별-신들은 전체 선을 위해서 질서정연하고 조화로운 방식으로 동일하게 운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God in the De Philosophia has not to be conceived as the transcendent unmoved mover of Book 10 of the Metaphysics. It is possible to clarify the concept of this supreme God. The fragments give the impression that not the problem of the source of motion, but rather the problems of cosmic order and of the good order, are the important considerations in the formation of this concept. It is probably not due to chance that just these fragments in which stress is laid on the phenomena of order and of the good order are preserved. The role of the source of the cosmic motion is taken in the fragments by the voluntary motion of the stars. But if every star moves itself simply by virtue of its own will, it is unexplainable why there should not be akosmia in the supramundane region. But in fact the world is a universe and not a chaos, hence the motion of the stars must be ordered. whether ordered by the stars themselves or by some outside cause, they have something common that unites them, and that is the first principle. This first principle is the supreme God, who rules over the star-gods. He keeps them together so that non goes its own way, and they move uniformly in orderly and harmonious fashion for the good of the w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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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otinos에게 있어서 행복의 개념 -Enn.Ⅰ 4(46)의 논고를 중심으로-

김태규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5집 2009.12 pp.135-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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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00원

플로티노스는 행복을 정의하기 위해서 일상적인 행복의 정의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특별히 행복을 ‘잘 삶’ 또는 ‘목적’ 이라고 보는 등식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만약 행복이 ‘잘 삶’과 ‘목적’ 이라고 한다면, 행복은 더 이상 인간의 고유한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살아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행복은 ‘잘 삶’이나 ‘목적’이 아니라 삶 안에 있다. 그리고 그의 삶의 개념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 동음이의적인 개념으로 파악된다. 그것은 상호적이지 않는 의존성을 가진 동음이의적인 실재들의 연속이다. 그런데 이 연속에서 존재론적으로 첫 번째 오는 삶이 바로 지성의 삶이다. 플로티노스는 이러한 지성의 완전한 삶을 행복으로 본다. 그렇다면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 플로티노스에 의하면 현자가 되는 것이 행복하게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현자’는 지성의 참된 삶을 영위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자신의 육체와 타인과 함께 감각적인 세계에 접촉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플로티노스의 윤리적인 논의가 몇몇 신비가들이나 소수 엘리트들에게나 해당될 뿐, 일반인들과는 무관하다는 비판을 벗어날 수 있게 한다.

Plotin cherche à donner une définition du bonheur dans le traité1,4. Dans ce but, il s’appuie pour commencer sur des définitions courantes, examinant notamment l’équation de base qui assimile le bonheur au vivre-bien et la fin. Si le bonheur est vivre-bien ou fin, il n’est pas considéré comme propre aux hommes, parce qu’il y a de risque que tous êtres vivants sont inclus dans la définition du bonheur. Selon Plotin, le bonheur n’est ni le vivre-bien, ni la fin, mais, il réside dans le concept de vie. La notion de vie est concue comme un concept homonyme désignant des sens multiples. En effet, l’homonymie consiste en une série de réalité qui dérivent d’un premier principe. Et la vie qui est ontologiquement première constitue l’élément central du bonheur. Donc, puisque la première vie est la vie parfaite et la vie de l’intellect, le bonheur est la vie parfaite de l’intellect. Qui est l’homme heureux ? Plotin a désigné le fait d’être spoudaios comme condition nécessaire et suffisante pour parvenir au bonheur. Il est parvenu à monter avec son âme vers l’intelligible ; il est un homme dont les principes reposent entièrement dans le monde intelligible et qui dirige son regard vers le bien. Mais, il maintient, aussi longtemps qu’il le faut, un lien avec son corps et l’autrui. Le spoudaios porte souci à son propre corps, ainsi qu’au devenir d’autrui. Ces deux aspects montrent bien que le sage de Plotin ne cesse de prêter attention au monde sensible. Cela met en évidence que l’éthique de Plotin intègre les dimensions du sensible et de l’intelligible. Par conséquent, les critiques émises à propos son manque d’intérêt pour l’homme ordinaire sont désamorcées par l’attitude du spouda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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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0원

『에티카』의 3부 말미에 스피노자는 부록처럼 <정서들의 정의>를 덧붙인다. 총 48개의 정서들에 대한 정의가 순차적으로 나열되는데, 정의들 사이에 삽입한 해명들 속에서 스피노자는 다름 아닌 정념의 체계(system of passions)를 구성하는 데 사용되었던 기존의 질서들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다. 이 질서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선험적 이해로부터 도출되는 것으로, 정신과 육체의 실체적 분리, 이성과 의지의 구분, 자유의지의 실재 등등의 철학적 테제들이 그것들의 근거가 된다. 정념들의 질서를 새로이 제시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전통적 이해들을 해체시키는 작업이기도 한 것이다. 특히, 스피노자는 심신이원론과 그것의 변형적 형태인 이성-의지의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했는데, 정념의 체계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는 모(母)정서와 파생적 정서를 어떻게 구분하는가하는 문제로 나타난다.

La troisième partie de l’Ethique comprend, comme appendice, les <Définitions des affects>. Spinoza expose ici 48 noms d’affect avec les explications critiques concernant l’ordre des affects. Ces explications nous permettent d’avancer que l’enjeu de cette appendice ne consiste pas seulement à redéfinir la nature des affects, mais surtout à mettre en cause les critères tels que les volontaristes les engagent pour construire de façon intelligible le système de passions ; ils sacrifient la réalité du désir humain à l’intelligibilité de leur système de passions, en ce que ce système relève d’une décision axiomatique, conforme à leur thèse préalble sur la nature humaine, à savoir la distinction réelle entre l’âme et le corps, le dualisme entre la raison et la volonté, la du libre arbitre, etc. A ce propos, la tentative spinoziste de “reproduire avec ordre les definitions des affects” conduit à la déconstruction des idées générales de l’homme, lesquelles fonctionnent dans la philosophie traiditionnelle comme modèle de la nature humaine. Spécialement, Spinoza s’oppose à la tradition stoïco-cartésienne dont la thèse sur la distinction entre la raison et la volonté rend impossible le désir humain en tant qu’essence même de l’homme : Cupiditas est ipsa hpmonis essentia. Le rapport dynamique entre les passions-mères et les passions dérivées lui fournit l’occasion de réexaminer l’unité de la vie huma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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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0원

본 연구자는 칸트의 실천 철학을 이해와 해석의 바탕으로 삼아 글쓴이가 한국어로 번역하여 출간한 『칸트의 교육학 강의』를 철학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여 주석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본 연구자의 철학적 해석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주석 작업은, 칸트가 교육에 관하여 사유한 바의 내용을 드러내 밝힐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개념적으로 명확하게 기술하는 일을 수행한다. 본 연구자의 철학적 주석은, 칸트가 주제 삼는 교육이나 실천 철학에 관한 내용을 칸트 철학 밖의 관점에 따라서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가 구축한 실천 철학의 기초 위에서 그가 기술하고 있는 교육에 관한 주제들의 내적 의미를 드러내 밝히는 내재적 해석의 방법으로 진행한다. 본 연구의 제목에 담겨 있는 현상학적 자기 해석이란, 첫째로 해석의 원리를 고려할 때,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적・해석학적 시각과 방법을 가리키며, 둘째로 해석의 실행을 고려할 때, 본 연구자가 철저한 반성적 태도 속에서 그리고 칸트 철학과 그의 실천 철학의 관점에 서서 『칸트의 교육학 강의』를 하나의 텍스트로 보고 텍스트 안의 주제적 사태들을 그 자체들로부터 드러내 밝히며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을 지칭한다. 아래 논문은, 본 연구자가 앞으로 12부 이상의 연구 논문을 작성함으로써 연속적으로 수행할 철학적 주석 작업의 여덟 번째 연구 논문이다.

Dieser Aufsatz ist achter Teil von einer Gesamtstudie, die anhand des von mir uebersetzten Kants Vorlesungstextes ueber Paedagogik und aufgrund der Kants praktischen Philosophie das, was Kant ueber Paedagogik nachdenkt und sagt, phaenomenologisch-interpretierend aufzuzeigen und begrifflich zu bestimmen versucht. Diese vorgenommene Studie bezweckt keine kritische Auseinandersetzung mit den Themenbereichen der Paedagogik und praktischen Philosophie Kants, sondern gibt eine analytische, immanent aufschliessende, inneren Bezuege freilegende Interpretation, und daher laesst sich als eine phaenomenologische Selbstinterpretation charakterisieren. In der Studie wird es beabsichtigt, im Ausgang von dem Vorlesungstext ueber Paedagogik und den verschiedenen Werken Kants einen philosophischen Kommentar zu ueber Paedagogik zu verfassen. “Philosophisch” und “Phaenomenologisch” im Titel setzen “Philologisch” voraus, aber sie sind zu verstehen im Unterschied zu “Philologisch” und deuten hin auf meine phaenomenologische Sichtweise und Auslegungsweise von dem Standpunkt der Praktischen Philosophie Kants aus. In diesem Kommentar stehen der Vorlesungstext ueber Paedagogik im Vordergrund und die verschiedenen Werke Kants im Hintergrund. Aber die Leser koennten den Vorlesungstext ueber Paedagogik in den Hintergrund und die herangezogenen Werke Kants in den Vordergrund treten las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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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에서 경험가능성과 상상력의 작용

김영례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5집 2009.12 pp.229-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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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초월철학은 한마디로 대상에 대한 인식 가능성의 주체적 조건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인식주체가 대상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는가를 규명하는 일이 중요한 문제로 남는다. 칸트는 서로 다른 인식의 두 형식, 즉 직관과 사유가 초월적 상상력의 매개를 통해 실제적인 통합을 이룬다고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수용성과 자발성의 결합이 칸트철학의 본질적인 전제이면서도 이 양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존슨은 칸트가 감성과 지성의 구분 속에서 상상력이 어디쯤 자리 잡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매우 불분명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들의 지적대로라면 인식주체의 입장에서 대상성립의 가능성을 탐지하는 칸트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상상력의 능력은 경험의 과정이 시작되면 작용으로, 운동으로, 행위로 변한다. 작용이라는 행위적 측면에서 상상력을 보면, 이러한 견해들에 대한 오해가 풀릴 수 있다. 상상력의 활동은 정지화면과 연속화면의 관계와 같아서 칸트를 ‘균형 있게’ 해석하려면 이 이중성을 동시에 고려하여야 한다.

Bei transzendentaler Philosophie Kants handelt es sich um eine Untersuchung subjektiver Bedingung von Erkenntnismöglichkeit des Gegenstandes. Hierbei bleibt noch ein wichtiges Problem, wie das erkennende Subjekt notwendig mit Objekt zu tun hat. Bei Kant ist reale Einheit von Subjekt und Objekt insofern möglich, als zwei unterschiedliche Erkenntnisformen, d.i. Anschauung und Denken, mit transzendentale Einbildungskraft vermittelt sind. Damit lautet heideggersche Kritik an Kant, dass kantischer Versuch das Verhältnis von Rezeptivität und Spontaneität nicht erklären kann, obwohl kantische Philosophie sich wesentlich auf die Verbindung von beiden richtet. Nach Johnson vertritt Kant eine unklare Meinung dazu, wo sich Einbildungskraft zu befinden ist, insbersondere im Unterschied von Sinnlichkeit und Verstand. Beiden Kritiken zufolge scheint kantischer Versuch, angesichts des Subjekts eine Konstituionsmöglichkeit des Objekts zu untersuchen, erfolglos zu sein. Hingegen verwandelt sich Vermögen der Einbildungskraft im Erfahrungsvorgang in Funktion, Bewegung und Handlung. Durch Ausdeuten von Einbildungskraft als Funktion, funktioniert die Einbildungskraft im Verhältnis von unbeweglicher Szene und einanderfolgender Szene. Diese Ambivalenz muss berücksichtigt werden, wenn wir kantische Einbildungskraft recht zu kritisieren versuc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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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험적 지식과 필연성에 관하여

김학택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5집 2009.12 pp.255-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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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선험적 지식은 경험의 도움 없이 혹은 경험에 독립해서 참임을 확증할 수 있는 지식으로서 경험에 의해 참임을 확증할 수 있는 경험적 지식과 구분된다. 칸트는 이러한 선험적 지식에 필연성과 보편성을 부여함으로써 선험적 지식의 전통적 의미를 구체화한다. 특히 칸트는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선험적 종합판단의 필연성은 분석판단이 가지는 논리적 형식적 필연성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특유한 구조에서, 즉 우리 주관에서 비롯되는 실질적, 내용적 필연성이다. 또한 그것의 필연성은 우리가 임의적으로 변경할 수 없는 마음의 강제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루이스는 선험성을 우리가 자유롭게 받아들인 태도이며, 우리의 경향이나 욕구에 적합하다면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질지도 모르는 마음 그 자체의 약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선험적 지식은 우리의 경향과 욕구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실용적이며, 우리의 경향과 욕구에 적절하지 못할 경우에, 혹은 경험의 확장에 의해서 변경 가능하다는 것이므로 필연성도 가지지 않는다. 콰인의 인식론적 전체론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명제는 수정 가능성을 가진다. 분석명제나 논리적 원리조차 수정으로부터 면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필연성을 가지지 않는다. 콰인에 있어서 모든 명제는 경험의 영향을 받고 그에 따라 수정 가능성을 가지므로 전통적인 의미의 선험적 지식은 부정된다. 이처럼 선험적 지식의 필연성은 인식체계, 인식구조에 대한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칸트가 선험적 종합판단에 부여한 필연성도 인식체계에 따른 필연성일 뿐이다. 그래서 선험적 지식의 개념이 필연성과 관련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포기해야 하며, 서로 연관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칸트가 시도한 것처럼 정당한 근거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선험적 지식에 대한 보다 완화된 규정이 요구된다. 우리는 이러한 규정을 햄린과 모저의 정의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모저의 최소한의 선험적 지식 개념은 수정 불가능성, 오류 가능성, 자명성, 필연성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실용주의적 관점과 콰인의 인식론적 전체론뿐 아니라 진리정합설 그리고 크립키의 예들에서 선험적 지식은 부정되지 않는다.

Kant specified the traditional concept on a priori knowledge by giving it to necessity and university. In particular, he showed the possibility of synthetic a priori knowledge. It's necessity is not the logical, formal necessity of analytic judgements but the material necessity in any compulsion of the mind. According to Kant, a priori form in mind brings to be necessary into them. such form in mind is compulsive. What is a priori is necessary because it compels the mind' acceptance. Lewis explained the a priori that it represents an attitude in some sense freely taken, stipulation of mind itself, and a stipulation which might be made in some other way if it suited our bent or need. According to Lewis, the a priori is independent of experience not because it prescribes a form which the data of sense must fit, or anticipates some pre-established harmony of experience with the mind, but precisely because it prescribes nothing to experience. It concerns the uncompelled initiative of mind or our categorical ways of acting. Therefore, none of a priori knowledges is beyond the possibility of alteration and does not have a necessity. Quine argued that there can be no such thing as a priori knowledge in his epistemic holism. all knowledge is to some degree empirical. Since no sentence is immune to revision, there is no necessary truth either. Consequently, we must give up the conception that a priori knowledge must be necessary. it is not certain that a priori knowledge must be necessary. To be necessary, it is required other source. Thus we must have a loosed concept or definition of a priori knowledge without necessity. We can find it in Hamlyn and Moser' definition. In particular, Moser' concept of minimal a priori knowledge does not requires necessary belief, irrevisable belief, self-evidence belief, or innate concep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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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의 현상학-키르케고르의 실존의 삼 단계에 관한 소고

임규정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5집 2009.12 pp.28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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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는 자신의 저작이 “시적”이며 자신은 “시인”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마도 시인과 목사 사이의 긴장이 키르케고르로 하여금 시인의 역할과 과제에 종사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는 자신의 실존철학적 예술관에 입각해서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시”와 “시적인 것”을 정치하게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통찰과 이해는 전달의 방법에 대한 그의 이론의 기초로 작용하게 된다. 논자는 본고를 통해 키르케고르가 이해하는 “시인”과 “시”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예비 작업을 진행하고자 한다. 특히 키르케고르의 사상의 특성,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철학적 인간학, 실존의 단계, 현실성의 개념, 그리고 가능성의 성격 등을 고찰하여 가능성의 현상학으로서의 키르케고르 철학에 대한 예비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Kierkegaard argued that his authorship was "poetic" and he was "a poet". Maybe The tension between a poet and a pastor made Kierkegaard give himself to study the role and the task of a poet. And he thus studied elaborately "poetry" and "poetic" comprehensively based on his existential view of art. As a result, these insights and understanding of his came to work as the ground of his methodology of communication. In this treatise, I worked out a preliminary study for understanding Kierkegaard's character of "poet" and "poetry". Especially, I aimed to examine the peculiarity of Kierkegaard's thoughts, to put it concretely, his philosophical anthropology, stages of existence, the concept of actuality, and the character of imagination as possibility, and next, work out the preliminary study on Kierkegaard's existential philosophy as phenomenology of possi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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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윌리엄 제임스 비판에 대한 재해석

김이균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5집 2009.12 pp.327-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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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이 윌리엄 제임스를 그의 사상뿐 아니라 인격적인 측면에서 높이 평가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제임스를 강한 비판의 대상으로 자주 언급한다. 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진심으로 경애하는 제임스를 비판했고, 이런 대조적인 그의 태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표면적으로 드러난 제임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은 과연 두 철학자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평가하는데 타당하거나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이 연구 목표는 ‘의식’이라는 주제에 한정해서 이 질문들에 답하는 것이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 제임스를 명시적으로 언급한 텍스트들이 두 철학자 사이의 관계를 정확히 설정하기 위한 공정한 지표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필자는 제임스가 의식에 관해 집필한 초기 저작들, 특별히 비트겐슈타인이 읽은 것으로 알려진 『심리학의 원리』의 제 9장 ‘사고의 흐름’(the Stream of Thought)을 중심으로 텍스트를 분석하여 주제에 관한 제임스의 주요 사상을 파악하고 두 철학자 사이의 비교 점을 찾아낸 뒤, 제임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을 보다 정확하게 평가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얻은 결실을 통해 필자는 ‘의식’과 관련하여 제임스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중요하고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과, 이와는 대조적으로 보이는 제임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은 제임스의 주요 주장을 비트겐슈타인이 부주의하게 읽어낸 결과임을 입증할 것이다.

Wittgenstein’s high regard for William James has been reported by some writers and by Wittgenstein himself, not only for his thoughts, but also for his human character. However Wittgenstein’s explicit remarks about James and these remarks are mostly the object of strong criticism. Why does Wittgenstein criticize James, whom he really admires, and how can we explain the contrasting reports about Wittgenstein’s attitude towards James? Is Wittgenstein’s explicit criticism of James really plausible or sufficient to evaluate the real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philosophers? This work aims to answer these questions, exclusively focusing on consciousness. The comparisons between the two philosophers will not merely focus on where Wittgenstein explicitly mentions James because these explicit citations are not necessarily fair indicators or, at least, could be insufficient to establish the real relationship between Wittgenstein and James. Instead, James’ important texts on consciousness in his early period, especially the chapter ‘Stream of Thought’ in the Principles of Psychology which Wittgenstein read, are examined in order to elucidate James’ relevant ideas regarding the topic and to identify some comparable points between the two philosophers and finally, to correctly evaluate Wittgenstein’s explicit remarks (mostly criticisms) of James. Using the fruits of this process I will show that James has a significant and positive influence on Wittgenstein regarding consciousness and also that the main point of Wittgenstein’s criticism stems from his inattentive reading of James’ basic conten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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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슨의 은유 이론

노양진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5집 2009.12 pp.357-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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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0원

이 논문의 주된 목적은 데이빗슨의 은유 이론에 대한 검토를 통해 그가 유지하는 ‘문자적 의미’ 개념이 객관주의적 요청에 근거한 그릇된 개념이라는 것을 밝히려는 것이다. 필자는 기호적 경험에 관한 체험주의적 해명을 따라 데이빗슨의 은유 이론의 난점을 드러내고, 그의 문자적 의미 개념이 경험주의적 독단의 산물이라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체험주의적 해명에 따르면 언어는 그 자체로 기호체계이며, 따라서 모든 언어적 의미는 기호적으로 구성된다. 기호적 의미는 이미 주어져 있는 경험 내용을 언어적 기표에 은유적으로 사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이러한 사상은 본성적으로 파편적이다. 사상의 본성적 파편성 때문에 한 기호의 확정적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데이빗슨은 은유적 의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은유는 다만 은유적 ‘사용’을 통해 특정한 화용론적 기능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데이비슨은 문자적 의미만이 유일한 언어적 의미라고 주장한다. 데이빗슨의 문자적 의미 개념은 진리 조건적 의미 이론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은 다시 모종의 언어/경험 대응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데이빗슨은 언어와 경험의 대응이라는 개념을 통해 객관적 의미의 근거를 유지하려고 한다. 필자는 언어/경험 대응을 ‘경험주의의 네 번째 독단’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그것은 아마도 경험주의의 마지막 독단이 될 것이다. 언어/경험 대응 독단은 데이빗슨 자신의 의이 미론의 정합성에 난점을 불러올 뿐만 아니라 의미에 대한 새로운 경험적 해명의 가능성을 가로막는다.

The main purpose of this paper is by examining Davidson's theory of metaphor to show that his notion of "literal meaning" is a theoretical illusion postulated by his objectivist committment. This analysis is based on the experientialist account of the nature of "symbolic experience," according to which language itself is a system of signs, and thus its meaning is symbolic by nature. Symbolic meaning is structured by means of "symbolic mapping" of a given piece of experience onto a signifier. Then the signifier is understood "in terms of" the mapped experiential content. Davidson firmly denies that there is anything like metaphorical meaning, and claims that metaphors may only have various "pragmatic effects". His insistence that meaning be nothing but literal meaning expresses his firm conviction that meaning proper should have an objective basis. I argue that such a belief is rooted in the empiricist dogma of "language/experience correspondence", which I would call "the fourth dogma of empiricism". This dogma does not only undermine the coherence of Davidson's theory of meaning, but keeps his insights from working out into a more appropriate account of the nature and structure of mea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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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lmin의 논증의 옹호와 교육적 적용에 대한 탐색

오준영, 김유신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5집 2009.12 pp.379-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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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00원

이 연구의 목적은 전통적인 고전 논리학의 하나인 연역 논증과 귀납 논증을 비판하고, 그들을 포괄할 수 있는 현대 논리학의 하나인 비형식 논증인 Toulmin의 논증 모형을 옹호하고, 그러한 비형식 논증의 교육적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Toulmin의 논증 모형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은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논증의 타당성과 건전성을 확보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Toulmin의 논증모형의 문제점을 점검하고 개선점을 제안하였다. 끝으로 Toulmin의 논증에 대한 교육적 적용필요성, 하나의 일반적인 사용 전략과 구성주의적 철학적 위치를 탐색하였다.

The objective of this study is to criticize the deductive argument and inductive argument of a kind of classical logic, and advocate the Toulmin's argument model, the informal logic among a contemporary logic. In this article, We emphasized that Toulmin's argument model was justified by their validity and soundness on account of the interactions of elements of argument, and investigated with the educational aplication of education, the strategies of application's goals, and the status of constructivism philosophy based on Toulmin's argument mo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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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과 그림의 존재론

원승룡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5집 2009.12 pp.427-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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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0원

이 글은 근본적으로 “그림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대해 답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이는 상(이미지), 또는 그림의 존재를 존재 그 자체로, 즉 표현되는 한에서의 존재로 고찰하는 ‘존재론적’ 관점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상의 심리학이나 사회학적 관점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예술과 비예술을 구별하는 기준의 문제는 그림의 본성을 논하는 일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본다. 우리는 상의 일종으로서의 그림이 기호나 상징과 부수적인 기능을 넘어 자신의 고유한 표현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모든 그림은 어떤 점에서 이미 ‘예술적’이다. 모든 그림은 창작적인 만듦인 한 예술의 일종이며. 사물을 단순히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둘러싼 힘들을 표출하려는 시도이다. 다만 보여 지고 보는 대상으로서의 그림은 우리 주위 세계의 재발견이라는 과업을 수행할 때 가장 예술적인, 그림의 존재의미를 완성하는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This paper is an attempt to answer the question "What is picture?" This attempt is distanced from a psychological or sociological view of image in that it puts a priority on the ontological aspect, which inquire into a picture in itself, i.e., being as expressed. Again, it has little to do with the problem of drawing an art/non-art distinction. I argue that a picture as an image itself bears it own faculty of self-expression beyond the collateral functions as signs or symbols. In some sense, all the pictures are 'artistic' in themselves. As far as they are of "creative making," they are a sort of art, and they do not just transmit the things as they are, but are attempts of expressing the forces encompassing the being. A picture, as an object to be seen, when carrying out the task of re-discovering the surrounding world, becomes the most artistic one, that completes its ontological mea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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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문화적 질서 : ‘시뮬라시옹의 질서’에 대한 일 고찰

문동규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5집 2009.12 pp.451-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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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0원

이 글은 보드리야르의 현대 사회 분석과 그 분석을 통해 나타난 ‘새로운 문화적 질서’를 살펴본 후, 그 질서에 대해 비판적으로 음미하고 있는 글이다. 말하자면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시뮬라시옹의 질서’를 살펴보면서 그 질서를 간략하게 꼬집어보고 있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현대사회는 시뮬라시옹을 통해 나타난 진짜(실재)보다 더 진짜 같은 ‘시뮬라크르’가 판을 치고 있는 세상이다. 그런데 보드리야르의 이러한 이야기는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주목했던 상품의 교환 ・ 물신화 ・ 대중문화의 부정성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론’ 내지는 새로운 문화적 질서가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매체를 통해 나타난 진짜 같은 가짜가 우리의 삶 속에서 진짜보다 더 진짜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음료수의 광고에 의해 음료수 자체를 마시기보다는 차라리 그 이미지를 마시고 있고, 도처에서 이미지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실재하는 사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라는 새로운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보드리야르의 분석은 현대 사회에 대한 모든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보드리야르가 이야기 하듯이 매체 기술에 의해 나타난 진짜 같은 가짜에 현혹당하고만 있지 않고, 이 세상이 이미지라는 시뮬라크르로만 가득 차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에서 진짜 사물이 사라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다양한 존재자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고유하게 한껏 뽐내면서 놀고 있기 때문이다.

This paper has examined ‘a new cultural order’ that presented by Baudrillard's contemporary social analysis, and then has criticized the new cultural order. According to Baudrillard, ‘Simulacre’ that appears through ‘Simulation’ is more real than reality in contemporary society. Baudrillard's story seems to show ‘a new ontology’ or ‘a new cultural order’. Because of a fake as real consider as a real reality in our lives. In other words, we drink the image rather than to drink a product itself. So the real thing is not exist but is a new image in this time. However, Baudrillard's analysis does not show all aspects of modern society. Because of the world is not filled with the image of Simulacre. In fact, the real things can not disappear in this world. Because of many of the real things is playing to showing their own unique looks in thi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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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0원

본 연구는 데카르트의 『정념론』을 중심으로 욕망(désir/desire)개념을 분석하고, 그 이론적・실천적 함의를 검토하고자 한다. 데카르트는 욕망을 관찰 가능한 생리적인 혹은 기계적인 운동의 결과물로 파악한다. 데카르트에게는 윤리학이 없다는 일반적인 이해와 달리 『정념론』은 윤리학적 기획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여기서 영혼의 힘, 즉 자신의 의지를 통해 단호히 결단할 수 있는 능력을 누구나 갖고 있음을 자각시킬 수 있는 근거들을 제시하려고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우연적이고, 수동적이기에 인간의 이성과 자유에 위배된다고 생각하였던 정념은 기존의 부정적 관점을 넘어서 자기보존이라는 일반적 원리로 승격된다. 반면 실천철학적인 차원에서 데카르트는 기존의 종교적 질서와 스토아주의적 윤리관을 답습하면서 근대적 사유체계와 기존의 윤리학적 질서가 충돌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의 욕망관은 인간 본성에 대한 자연과학적 태도가 기존의 전통적 윤리관과 결합될 때 어떠한 한계를 가질 수 있는지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This treatise is to show Which the concept of desire of Descartes has theoretical and practical meaning concerning with his The Passion of the Soul. Descartes understands that desire is a physiological or mechanical process and its products. People says that Descartes does not have ethics. But His The Passion of the Soul can be called the result of ethical project. He tries to present the foundation that every people can make their mind to do with their will. Usually passion is understood to be accidental and be not consistent with reason and freedom. So passion is regarded as to be overcome. But Descartes appreciates that passion has the universal principle of self-preservation. Nevertheless his ethical position seems to follows the religious doctrine of the middle ages and the traditional ethics of Stoa. From this cause his philosophy is said to includes the conflict between modern thought and traditional value. Especially His view of Desire intensively reveals that natural scientific attitude to desire has a philosophical problem linked with traditional eth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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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마스의 의미론과 크라우스의 구조주의 미술사 지평

최병길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55집 2009.12 pp.53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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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우스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해석이 모더니즘 미술의 해석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린버그의 형식주의 모더니즘에 반발했던 그녀는 1960-70년대 미술작품을 구조주의의 특성을 활용하여 해석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역사주의에 대한 거부였으며, 미술작품을 하나의 이미지로 간주하는 경향이었다. 그녀의 방안 중 하나가 그레마스의 의미론으로서, 특히 이항대립, 대당사각형 등의 도해를 자신의 논지전개 방편으로 도입한 것이다. 그 결과 그녀는 미술작품의 시간적 발전을 공간적 구조로 전환할 수 있었다. 미술사의 전개란 화술의 전개로서 그것은 비역사성을 수반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항대립이나 대당사각형 속의 대립적인 용어들이 상호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그레마스의 도해로써 과거와 현재의 미술사를 동일한 시・공간상에서 고찰하는 새로운 시각의 미술사이다. 크라우스는 단토와는 달리 미술사가 포스트모더니즘 시기에 이르러서도 끝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그것은 그레마스 도해를 통하여 모든 시기의 미술작품을 동일 선상에서 고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도해 속에서의 변화된 개념들은 화술적 관계로서만 존재할 뿐, 역사성을 개입시킬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전통적인 미술사에서 행했던 설명적 기법이 거부된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예술가의 개인적 창작의욕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것에 의지해서는 미술사의 발전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서는 이렇듯이 예술가의 개별적, 연대기적 분석을 지양하고 비역사적, 구조적 분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것이 바로 크라우스가 구조주의 분석을 옹호하면서 그 방법론의 하나로 그레마스의 도해를 차용한 이유이다.

Krauss argued that the interpretation of postmodernism art must be different from that of modernism art. Rejecting the formal modernism by Greenberg, she attempted to interpret the artworks around 1960-70s, using the characteristics of structuralism. It was a rejection against historicism, which was a trend to regard artwork as an image. One of her alternatives was Greimas's semantics, and she especially introduced the diagrams such as binary opposition, square of opposition, etc. as a method developing her argument. As a result, she could shift the temporal development of artwork to the spatial structure. The development of art history implies that of narrative, which accompanies with ahistoric property. It is art history with new vision, namely, to examine art history of the past and the present on the same basis of time and space with Greimas's diagram in which the confronting terms in binary opposition or square of opposition have meaning only within mutual relationship. On the contrary to Danto, Krauss asserted that art history did not end even in the era of postmodernism. It implies to be possible to examine the artworks of all periods on the same horizon through Greimas's diagram. Thus the transformed concepts in that diagram only exist as the relationship of narratives, and it needs not to introduce historicity into them. It rejected against the explanatory technique executed by traditional art history. Therefore she did not pay concern on the artist's individual will to create. If relying upon it, there would be no explanation of the development in art history. Likewise she judged that we have to sublate the individual, genealogical analysis of an artist, and have to go ahead to the ahistoric and structural analysis. It is the very reason why Krauss supported the analysis of structuralism, and borrowed Greimas's diagram as one of its methodolog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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