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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00원
지금의 이 시대는 모든 것을 처분 가능한 대상으로 여기는 기술이 지배하는 시대,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신의 본질을 잃고 단지 부품으로만 있는 시대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표상적 사유 내지는 계산적인 사유 방식 때문에, 그것도 표상적 사유의 근본 특징인 의욕 내지는 욕구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왜냐하면 이 표상적 사유의 본질은 표상하는 주체가 표상되는 객체 또는 대상의 세계를 근거 짓기 위해 스스로 기투하는 자발적인 행위 또는 대상의 세계를 장악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신의 비밀스러움과 고유함을 상실한 채 단지 주문 요청되는 위기의 시대인 것이다.그렇다면 이러한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존재의 진리를 사유하는 것, 음미하는 사유, 즉 ‘숙고적인 사유’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유를 통해 우리는 이 위기의 시대에 어떠한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가? 그것은 ‘초연한 내맡김’이다. 이때 초연한 내맡김은 존재 진리의 열린 장, 즉 ‘만남의 장’과의 적합한 관계를 말한다. 그런데 존재하는 모든 것이 부품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이 초연한 내맡김은 ‘사물들에로의 초연한 내맡김’이다. 이때 이 사물들에로의 초연한 내맡김은 우리를 황폐화하는 기술적인 대상들에 대해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취하는 태도로서 기술 세계에 은폐된 의미에 대해 눈과 귀를 여는 태도를 말한다. 말하자면 기술세계에 은폐된 존재의 진리, 즉 ‘비밀’에 대해 열려 있는 태도를 말한다. 그래서 ‘사물들에로의 초연한 내맡김’은 ‘비밀에 대해 열려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연한 내맡김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새로운 삶의 터전과 토대이다. 왜냐하면 초연한 내맡김은 표상적 사유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 존재진리의 열린 장, 즉 만남의 장에 진입하여 참답게 머물러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사유의 전환 내지는 우리의 태도의 변화이다. 그렇다면 숙고적 사유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이데거의 초연한 내맡김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사유의 전환 내지는 태도의 변화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이 현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5,500원
근대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비판은 이성 중심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며 이성적 주체를 부정한다. 문제는 이와 함께 실천적 주체도 부정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주체를 재구성하려는 대표적 사상가로 논자는 하버마스와 키에르케고어를 내세웠다. 물론 하버마스는 근대를 미완의 프로젝트로 보아 합리주의적 전통 아래서 주체를 재구성하며, 키에르케고어는 신 앞에서의 실존이라는 비합리주의적 맥락에서 재구성한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논자는 이런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양자가 보완되어야 할 필요성을 갖는다고 본다. 키에르케고어의 철저한 자기의 선택은 하버마스의 상호주관적 패러다임 안에서의 일상의 구체적 실천으로 보완되어야 하며 이러한 의사소통 공동체는 더 철저하고 투명한 자기선택을 한 사람들로 구성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주체의 수평성과 수직성의 조화는 근대적 주체가 부정되는 현실에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5,800원
오늘날 사람들은 '타율적 노동'과 '자율적 소비'가 순환하는 일상의 구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타율적 노동'의 현실이 '자율적 소비'의 가상에 의해 상쇄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자신이 자기 욕망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소비자의 배후에는 그의 욕망을 통제하고 길들이는 상업적 메커니즘이 있다. 이처럼 소비가 욕망의 상업적 통제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집단적 행동에 불과하다면, 소비를 통해 실현되는 선택의 자유가 타율적 노동의 긍정적 반대급부라는 믿음도 의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은 선택의 자유란 엄밀히 말해서 '행동주의적 자유'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사실상 노동과 소비 양면에서 타율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일상화된 타율의 이면에는 노동생산성과 판매고의 무한한 성장을 꾀하는 경제적 합리성의 효율 논리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만약 경제성장의 신화가 합리적 근거를 결여한 맹목적 선입견이라면, 자율의 침해를 통해서 관철되어 온 경제적 합리성의 운동논리도 정당화될 수 없다.
6,100원
미결정(underdetermination) 현상은 현대 과학철학의 실재론-반실재론 논쟁에서 널리 토론되고 있다. 간단히 말해, 이론 T1은 다른 이론 T2와 경쟁할 때 미결정되었다고 말한다. T1과 T2는 경험적으로는 동등하지만(empirically equivalent) 서로 양립 불가능하다. 미결정 현상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과학철학 문헌을 살펴보면, 도구론자(instrumentalist), 논리실증주의자(logical positivist), 생산적 경험주의자(constructive empiricist), 과학적 실재론자(scientific realist), 전체론자(holist), 이론-적재론자(theory-ladenist), 반분리론자(antidivisionist), 반증주의자(falsificationist), 무정부주의자(anarchist)는 미결정 현상을 놓고 판이하게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나는 위 철학자들이 취한 입장을 각각 요약 정리하고 간략히 논평할 것이다. 그리고 미결정현상을 영원한(permanent) 미결정, 일시적(transient) 미결정, 온건한(moderate) 미결정, 근본적(radical) 미결정, 실제적(actual) 미결정, 가능적(possible) 미결정, 정상적(regular) 미결정, 비정상적(bizarre) 미결정 현상으로 각각 분류하고 각각의 미결정 현상에 대해 간략히 논평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로 다른 종류의 미결정 현상은 서로 다른 종류의 반응이 요구되므로 우리가 일반적인 수준에서 미결정 현상에 철학적인 입장을 취하기 전에 서로 다른 종류의 미결정 현상을 구별해야 한다고 결론 내리겠다.
Many Kinds of UnderdeterminationSeung-Bae ParkThe main aim of this paper is not to rigorously defend a thesis on a narrow topic but to summarize the research results of a fairly broad topic. The problem I discuss is underdetermination, one of the most widely discussed topic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A theory, T1, is underdetermined, roughly, when it competes with another theory, T2. T1 and T2 are (more or less) empirically equivalent but logically incompatible. What attitude should we take toward underdetermination? Different answers are actually given in the literature and can be given from philosophers of different schools of thought: instrumentalists, logical positivists, constructive empiricists, scientific realists, holists, theory-ladenists, antidivisionists, falsificationists and anarchists. I will summarize each of the positions, and then present different kinds of underde-terminations: permanent underdetermination, transient underdetermination, moderate underdetermination, radical underdetermination, actual underdetermination,possible underdetermination, regular underdetermination and bizarre underdetermination. I will argue that before we react to underdetermination in general we should set the different kinds of underdeterminations apart from each other because they require different responses.
6,400원
장자 제물론편은 장자 인식론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인간의 인위적 가치판단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사실판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아울러 수양론과 인식론의 명확한 구분보다는 不二의 관계 하에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시비판단의 절대성보다는 시비 초탈의 상대적 세계에 관점이 주로 맞추어져 있다. 미학적 인식론에 이어 불가지론 역시 장자 인식론의 주요 골격으로 나타나 있다. 궁극적으로 장자는 지식과 언어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하여 眞知와 언어 초탈의 관점에 있다. 이러한 장자의 인식론은 주로 동양 사상에서 인식과 수양의 미분, 즉 수양론에 초점이 맞추어진 관계 때문일지 모른다. 어쨌든 장자의 인식론은 서구 인식론 일변도를 지양, 인간의 행동과 실천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지하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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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민주주의와 개방사회의 고질적인 흑백사고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나 합리적 토론에 의해 정치적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다음 세대를 민주적 삶의 방식에 입문시키기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이 글은 우선 민주주의를 하나의 정치 제도로서 확립하기 위한 제도적 요건과 실질적 요건에 대해 알아본다. 그런 다음에 생활의 민주화를 위해 국민이 어떤 습관에 익숙해야 되는지를 살펴보고, 민주적 생활 습관의 바탕을 이루는 민주주의의 도덕성에 대해 논의한다.
6,400원
철학자들은 상호 대화를 권하기는 하지만 상호 대화가 가장 어려운 집단 중에 속한다. 본고는 알튀세르 사상과 영미철학 지식론 사이에 대화를 시도한 것이다.알튀세르는 토픽 지식론을 남겼다. 토픽 지식론은 '지식의 대상⊇토픽'이다. 알튀세르의 토픽 지식론은 토픽론과 지식에 관한 다섯 가지 테제를 결합해야 해명된다. 토픽은 이론과 이데올로기로 구성되어 있다. 지식에 대한 다섯 가지 테제를 등장순서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즉 1) '이론은 지식의 대상에 내재하는 이론 내재적인 기준에 의해 이론이다.' 2) '이론은 이론임이 보증될 수 없다.' 3) '과학(=이론)은 주체없는 과정이다.' 4) '이데올로기는 밖을 모른다.' 5) '이론이 이론과 이데올로기를 나누는 판별기준이다.' 토픽 지식론은 '지식의 대상⊃토픽'과 '지식의 대상=토픽'으로 해석된다.영미철학은 전통적인 규범적 지식론과 비규범적인 자연주의적 지식론으로 양분되어 있다. 토픽 지식론은 일반적으로 영미철학의 자연주의적 지식론과 통한다. 토픽 지식론은 자연주의적 지식론을 비판적`혁명적 사회 과학에 적용한 시도로 파악할 수도 있다. 토픽 지식론을 특히 '지식의 대상 = 토픽'으로만 해석할 때에 영미철학의 규범적 지식론 같은 지식 일반으로의 성격이 강화된다.
Althursser's Topic Knowledge Theory― Dialogue with Analysis Philosophy ―Seung-Ho YangPhilosophers have exhorted other people to communicate with each other but they don't want to do so. This paper is to try communication between Althusser's idea and the Anglo-American philosophy. Althusser left the Topic knowledge theory. It is 'the object of knowledge ⊇ Topic'. Althusser's knowledge theory can be explained only when five theses on knowledge are united with the Topic theory. His Topic theory consists of theory and ideology. Althusser's five theses are as follows; 1) True is a standard of judging true or false(=veritas norma suj, & falsi). 2) True cannot be guaranteed in any forms. 3) Science is only a science based on its own criterion. 4) Science(= Theory) is a process without a Subject. 5) One of the effects of ideology is the practical denegation of the ideological character of ideology by ideology( Ideology has no outside). The Topic knowledge theory can be interpreted in the above two ways : 'the object of knowledge⊃Topic' and 'the object of knowledge〓Topic'. The theory of knowledge in Anglo-American philosophy is divided into the traditional normative theory and the nonnormative naturalistic theory. The Topic knowledge theory, generally, has mutual understanding with nonnormative naturalistic theory. The Topic theory is thought to apply naturalistic theory to critical, revolutionary social science.
5,400원
논자는 마르크스 철학의 미개척 분야 가운데 데 하나인 미학을 루카치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하여 현대 자본주의 논자는 본 논문을 통하여 마르크스 철학의 미개척 분야 가운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화의 상품화와 문명의 충돌 원인을 밝히고 새로운 21세기 시대의 문화를 세우는데 기여하고자 한다.루카치의 미학은 초기와 후기로 크게 나누어진다. 그런데 초기의 대표 저서는 『영혼과 형식』, 『소설이론』이며, 후기의 대표 저서는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시기의 대표 저서들은 차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즉 루카치는 초기에서 후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적 태도와 연구영역을 확장시키면서도 유지하고 있는 주제가 바로 윤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논자는 이 윤리성에 입각하여 루카치의 미학과 정치학의 변증법적 관계를 탐색했다.루카치의 미학관에 따르면 예술의 형식은 현실의 고난을 잠시 피할 수 있는 도피처는 될 수 있지만 안식처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서 개별성과 보편성이 변증법적으로 지양된 예술의 특수성은 중심의 윤리를 가지고 있는 불후의 명작과 예술가가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루카치의 미학관을 연구해 보았다.
6,300원
이 논문의 목적은 현재 윤리적 쟁점이 되고 있는 인간배아복제의 논쟁점과 관련하여 미래의 책임윤리를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해 살펴보는데 있다. 먼저 배아는 어느 시점부터 인간이라 할 수 있는 가의 논점이 생명윤리 논쟁의 출발점이다. 그 시발점은 인간배아의 도덕적 지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인간배아의 도덕적 지위에 관해서는 전문가들에 따라 각기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즉 완전한 인간, 단순한 세포 덩어리, 잠재적 인간이 그것이다. 향후 인간배아 복제로 인해 인간복제가 곧 현실화된다면, 인간에게 긍정적인 측면보다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이런 점에서 생명공학시대의 인간행위는 그 행위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는 과제를 더욱 떠맡게 되었다. 여기서 인간배아복제가 사회적 문제로 야기될 때, 그 책임은 그 행위의 결과를 단지 개별적인 개인의 책임으로 한정하여 묻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책임을 수반해야 한다는 측면을 강조하여 사회전반의 총체적인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 따라서 책임의 궁극적인 원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좋은 삶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는 그 행위를 수행하는 개인에 의해서 최대의 행복을 산출하는 경우가 아니라 그 행위에 의해 영향을 받은 당사자들에게 최대의 행복을 산출하는 경우가 옳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5,200원
인심유학사상의 근원은 주나라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주대의 문화를 계승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로 일관하였다. 이 글은 유학사상 형성의 연원이라 할 수 있는 주대의 사상과 관련하여 요·순·우·탕·문·무·주공으로부터 공자·맹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자신의 의지보다는 하늘의 의지를 어떻게 인간의 의지로 발현시킬 것인가에 뜻을 두었는데, 이러한 하늘의 의지인 상제 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이 상제의 의지는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주대의 상제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의 조상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 하는 그 근원으로부터 상제의 의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점이 문제되어질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가장 먼저 문제되는 것은, 상제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형성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생겨나면서부터 상제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태어나게되는 것인가 하는 것인데 이는 주나라의 성립과 국가의 통치 이념과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둘 째는 유가사상에서 말하는 조상숭배의식은 상제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생민 주체로서의 상제는 인간과 어떻게 연관되어지는 것이며 그러한 의식은 조묘(祖廟)의 조상 신과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주의 시조인 후직은 하늘과 강원으로부터 태어나 유태에 실가를 이루고 인사( 祀)를 통하여 상제와 인간이 만나게 되며 인사의 의식은 예의 근원이 되게 된다. 상제는 생민의 주체로서 조상과 일치하므로 조상에 바치는 제사는 곧 상제를 섬기는 제사로, 종묘의식은 배천의식과 일치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의 문제를 발견 할 수 있다. 첫째, 인간은 상제의 의지로서 탄생되는 존재라는 것이며, 둘째, 이러한 인연으로 인간은 상제의 의지를 받들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는 주나라의 사상은 존조의 정신을 떠나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살펴본다면 상제는 인간에게 무엇을 부여하였는가. 인간에게 부여된 상제의 명은 어떻게 발현될 수 있는가. 그러한 명은 주나라를 건국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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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연구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희랍 철학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몇몇 기독교인들의 시도가 영지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또 다른 연구가들은 영지가 초기 기독교가 형성되기 이전부터 존재했었다고 주장한다. 후자의 주장이 옳다면 영지가 기독교 신조의 철학적 해석을 통해서 도출되었다는 생각은 오류이다.이 글에서 영지와 철학의 발생학적 연결고리를 증명하려는 이단 연구가 히폴뤼토스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연구자는 영지가 철학으로부터 파생된 잘못된 기독교 철학의 아류로 보고 있는 히폴뤼토스의 논증은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일면 영지주의자들의 사상과 희랍철학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유사한 점들이 발견된다고 할지라도 희랍철학이 영지의 발생에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 영지는 희랍철학과 기독교와 무관하게 발생되었다. 연구자는 이 작업을 위해서 먼저 히폴뤼토스가 『논박』에서 제시하고 있는 중요한 초기 영지사상가들의 이론과 희랍철학의 연관성을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철학이론이 원전에 나타난 문맥상의 의미와는 다르게 해석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서 영지가 철학을 기반으로 해서 발생했다는 그의 주장의 부당성을 보여줄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그의 시도가 복음의 순수성과 연관해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볼 것이다.
환경윤리학의 비교철학적 근거 - 인간의 본질로서 존엄과 환경정의(正義) -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27집 2002.12 pp.29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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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영지주의 이후로 제기된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극복하고자 한다. 오늘날 환경윤리학자 들은 데카르트 철학에서 연유한 정신활동과 연장(延長)된 자연의 이분(二分)을 생태적 위기의 이념적 배경으로 지적한다. 불교의 종교철학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개념적 구분자체를 근원적 무지로 본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연스런 삶은 인간으로 하여금 정토(淨土)에 이르게 한다. 우리자신이 자연의 일부로서 타인과 자연을 속일 수 있는 것은 단지 자신의 본성을 속일 때에만 가능하다. 모든 존재자는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는 미묘한 상관관계에서만 생성되고 지속하고 소멸되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지내는 방법으로는 자연의 기(氣)를 따르는 길이 아세아 권에서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인간이 모든 체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이해의 한계를 넘게 된다는 지적이 있다. 키에르케고아에 의하면 인간은 스스로 평정과 평안에 이를 수 없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선택은 자기독립이 아니라 불안의 표현이다. 그는 인간의 윤리성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독립적 윤리의 가능성을 비판했다. 키에르케고아에 의하면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타나베의 자기부정이나 자기확신에 근거한 진보신앙이 아니라 신과의 실존적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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