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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家는 그 어느 학파보다도 이상적인 인간을 양성하기 위해서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며, 나아가 인간은 어떻게 판단, 처신, 행동하여야 이상적인 인간이 되는지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이 문제에 관건이 되는 것이 바로 仁개념이다. 즉 유가는 인간의 본성은 仁이며, 따라서 仁의 체득과 실천이 당위적인 인간의 존재근거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공자 이전에 仁은 다양한 개별적인 덕목들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공자는 仁을 보편적 덕이자 모든 덕목들의 종합적인 완성으로 제시하였다. 나아가 그는 仁의 실천방법으로 주로 소극적으로 진술하였지만, 忠恕, 즉 자기정립과 타자정립을 통한 仁을 실천을 강조하였으며, 仁은 우리 마음과 사랑이라고 하는 감정관 연관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맹자의 목적은 공자학설의 정초였다. 그래서 그는 “孺子入井“의 비유를 통해 인간에 순선한 감정인 “惻隱之心“이 무조건적이며 자발적으로 피어난다는 사실을 통해 仁이 인간 본성임을 증명하였다. 나아가 맹자 이후 분분한 논의만 있어 仁에 대한 명확한 名義가 정립되지 않았을 대 주자는 易經과 程子의 논의를 기초로 하여, 仁이 天地之心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마음의 덕이자 사랑의 이치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요컨대 본 본문에서 필자는 유가의 仁개념은 공자에 의해 보편적 덕으로 정립되었며, 맹자에 의해 四端에 기초를 두고 인간의 본성으로 확인되었으며, 아나가 이 仁은 주자에 의해 형이상학적으로 정초되어 유가 仁개념은 완성되었다고 하는 점을 밝혔다. 나아가 공자는 仁의 실천에 주안점을 두었으며, 맹자는 四端이라고 하는 심리적 사실에 초점을 두고 인간본성으로서 仁의 존재를 증명하였으며, 주자는 형이상학적 궁극존재인 천지의 마음에서 유래한 마음의 덕으로서 仁의 존재에 초점을 두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감정을 피어나게 하는 근거로 정립하였다고 하는 점을 밝혔다.
仁是在儒家最高中的槪念. 儒家歷史上, 要是孔子最初定立了 仁是普遍存在的德, 就孟子證明了對人間本性比如說 “孺子入井 但是, 至于仁的由來, 他不是說精確地表明, 而是給暗示. 因爲 朱子以前漢唐儒學者, 活用孔孟的仁, 盡管應該都得說形而上學的定立和具體定義, 還是只不過有見解紛呈, 所以 朱子寫作〔仁說〕, 這分明了對'仁'槪念. 首先朱子規定把仁讓萬物生成的天地之心 人心取得懷"心之德”, 所以這由來說明了. 以后正在參照〔周易〕和程子的觀點表明, 朱子在固有體用論 主張仁的心德是愛之理. 如此 朱子主張 仁是出來 ‘天地之心’ 的 ‘心的德’ 又 ‘人德理’ 然后他批判 ‘仁是萬物一體的境地’ 和 ‘知學就是仁’ 的立場. 這理由因爲前者缺少方法論,后者混淆作爲全德仁和仁的智. 現在講〔仁說〕內容以后我們照看了對人間心的本性是仁朱子什證明了. 雖然對沒有聲音和行踪形而上學的人間本性不知道明白了 但在純粹心作用, 卽事實上有自己無條件心復燃“惻隱之心”的,在這里,人心本性是仁可以知道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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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사칠 논변의 배경으로서 기묘사화는 사칠 논변에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사칠 논변의 결과를 기호 영남 학으로 정의한 것은 올바른가 하는 것을 검토한 것이다. 정 지운의 천명도는 어떤 과정에 의하여 작성되었으며, 그로부터 사칠 논변이 일어나기까지는 어떤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는가. 그리고 나아가 그 결과를 기호 영남 학의 학문적 대립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에 대한 검토라 할 수 있다. 기묘사화의 여파로 인하여 천명도가 작성되었고, 또한 성리학의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 황과 함께 사칠 논변을 통하여 성리학을 발전시킨 기 대승 또한 기묘 사림의 의리정신을 계승 한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사칠 논변의 배경과 그 원인으로서 기묘사화의 영향이 지대하였던 것임이 확인되었다.또한 논변은 학문적 대결과 갈등이 아니라 순수한 연구였으며 사림의 영수로서 기묘 사림 의식을 계승한 도학사상의 성리학적 발전을 이룬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이러한 점에서 사칠 논변의 결과를 기호 영남 학의 대립으로 이해하고, 당파와 결부시켰던 학문적인 규정은 이제 당연히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 본 논문의 중요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이 논문의 주제인 사칠 논변의 배경과 전개로 본 조선조 도통을 확인한 결과는, 그 배경으로서의 기묘사화와, 전개로서의 천명도 작성으로부터 20년 가까운 연구 과정이 있었고, 결과로서 기묘 사림의 도학정신이 성리학적 연구로 전개된 것이며, 대립과 갈등이 아니었다는 당연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What influence did the Ki-myo purgation, which caused the circumstances of the Sa-chil argument, give to the Sa-chil argument? How did the argument have resulted in for the times from the publication of Chun-myung map by Jeon ji-woon to the occurrence of the Sa-chil argument? and were there faults or not in the definition which the Ki-ho scholars and Young-nam scholars resulted in standing face to face through the argument?; These questions are described and analyzed in this paper.It is certain that the Sa-chil argument's background and reason was largely caused by the influence of the Ki-myo purgation. The Ki-myo purgation resulted in the publication of Chun-myung map and also come to get the research about Metaphysics. Ki dae-seung who developed Metaphysics through the Sa-chil argument with a great scholar, Lee hwang also succeeded in the truth and right spirits of Ki-myo scholars.As a result, the Sa-chil argument was not collisions or complications but the research of Metaphysics, resulted in very important consequ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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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주된 목적은 포스트모더니즘이 표방하는 다원주의가 제기하는 허무주의적 우려라는 문제의 본성을 드러내고, 그 제약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제안하려는 것이다. 로티의 ‘우연성’ 개념과 리오타르의 ‘디퍼런드’ 개념은 공통적으로 극단적인 공약 불가능성을 수반하는 다원적 변이를 옹호하고 있으며, 그것은 불가피하게 허무주의에의 우려를 불러온다. 이 제약의 문제는 이들의 급진적이면서도 낙관적인 다원주의에 가려져 있지만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제약되지 않은 다원적 분기는 결국 상호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로티와 리오타르는 자신들이 그러한 허무주의적 견해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고 반복적으로 주장하지만 그러한 주장만으로 그 분기가 어디에서 제약되는지에 관한 입증 책임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로티와 리오타르는 공통적으로 신체적 층위의 경험에서 드러내는 안정된 수준의 공공성을 간과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의 핵심적 실마리를 놓치고 있다.
This paper aims to show that the postmodern form of pluralism raises a nihilistic threat, and to offer the necessity and possibility of the constraint of it. Rorty's "contingency", as well as Lyotard's "differend" speak for the irreducibility of pluralistic variations along with a radical incommensurability, and thus bring forth a fear of a nihilistic down slide. Veiled by their radical and playful rhetoric, this threat is nothing but a trivial problem. An unconstrained difference may allow a nihilism that denies communication itself. Although Rorty and Lyotard repeatedly claim that they do not seek for such a form of pluralism, that does not get them away from the burden of proof. Purposedly or not, Rorty and Lyotard ignore the stable degree of commonality observed at the physical level of human experience, and, as a result, miss a critical clue to explaining the problem away.
6,400원
이 글은 매킨타이어의 덕윤리를 간호윤리의 영역에 응용해 보면서, 간호의 도덕적 실천을 위해서 갖추어야 할 덕으로서의 보살핌의 태도에 대해 탐구해 보고자 한 것이다. 매킨타이어는 공동체 내에서의 특정한 실천의 탁월성과 인간의 총체적 삶의 목적 그리고 도덕적 전통이라는 맥락 속에서 덕의 본질과 그 역할을 통합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매킨타이어의 덕에 대한 설명방식은 간호실천의 도덕적 성격을 탐구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로서 설득력을 지닌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간호에서의 덕은 바로 전문적인 실천과 개인의 삶의 목적을 분리시키지 않으며 사회적 제도와 역사적 전통으로부터 고립되지 않는 공동체의 도덕적 삶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탁월한 간호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내재적인 선은 실천적 지식으로서의 기술적 숙련성 뿐만이 아니라, 덕으로서 보살핌의 태도이다. 보살핌의 태도란 개인의 총체적인 삶의 질서 속에서 개인의 취약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공감의 과정을 통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에 응답하는 태도이다. 이것은 간호실천의 탁월성을 성취하기 위해 습득되어야 할 자질이며, 동시에 그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가라는 인격의 정체성을 구성해주며, 더 나아가 간호의 도덕적 전통에 대한 적절한 감각을 내포한다. 오늘날 시장경제의 논리에 따라 이윤추구를 위한 효율적인 경영전략이 앞서가고 있는 의료현장에서 덕 윤리는 인간의 ‘좋은 삶’을 위해 공동체 속에서 보살핌을 실천하는 간호의 도덕적 전통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것이다.
In this paper, I aim to inquiry caring attitude for the nursing practice from the aspect of the Maclntyre's virtue ethics. According to Maclntyre,s ethics, the virtue are to be understood as those dispositions which enable us to achieve the goods internal to practice, and to understand what the good life for man is. The virtues find their point not only in sustaining the form of an individual life as whole life, but also in sustaining moral traditions which provide both practice and individual lives with their necessary historical context. This Maclntyre,s arguments can be considered as the proper theoretical basis for the understanding of the moral character of nursing practice. The reason is that the virtue of nurse contribute to the achievement of nursing practice and to understand the narrative unity of the individual life as the good life, and are consistent with the moral traditions of nursing practice.For the nursing practice is required caring attitude as virtue as well as the internal goods, which are practical knowledge as technical skills and interpretive skills of the patient. Caring attitude as the virtue means that nurse appreciate the plight of the patient in the narrative unity of his life, through sympathic awareness of his suffering respond to his need. From this aspect of the virtue ethics, caring attitude make nurse achieve the internal goods to the nursing practice, contribute to understand the personal identity of the nurse, und sustain the sense of the moral tradition of nursing.
4,800원
주자는 貞을 주역의 핵심이며, 점치는 자의 태도이며, 변화의 근거이며, 길흉을 판단하는 기준이며, 知와 관련된 것으로 파악한다. 이를 맥락적으로 요약해 보면 첫째, 정이천이 貞 해석을 하면서 정의 의미가 변형되는 난점을 해결한다. 주자는 우선적으로 주역을 점치는 책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바르더라도 위태로울 수 있고,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했다. 둘째, 주자는 실제로 세상에 正이 무슨 일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의미에서, 주역에서 “貞은 일의 근간이다”는 말을 긍정한다. 여기서 貞의 위상은 모든 일을 주관하는 道이다. 세째, 주자는 貞 속에서 智를 받아들인다. 사계절의 논리로는 ‘貞이란 일의 줄기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을 새롭게 漢대에 해석한 ‘貞은 知다’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知를 知慧 혹은 貯藏으로 파악한다. 네째, 주자는 ‘貞은 正이다’라고 한정하여 말한 정이천의 이론에 반대한다. 즉 그는 ‘貞은 正而固’라고 반드시 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正은 是是非非를 바르게 아는 것일 뿐만아니라 바름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을 포함해야 그 의미가 완성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섯째, 정이 현실 정치에 적용될 때, 사심 없이 공평한 마음[貞]을 유지하며, 현명한 사람을 구분할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재상의 도에 비유된다.
朱子周易的核心是貞, 這是打占者的態度, 變化的根據, 判斷吉凶的標準, 認爲和知有關. 這一問題可以要約如下. 第一, 程伊川在解釋貞時, 解決了貞的意味的難点. 朱子首先把周易認爲打占的書, 所以雖然正而爲危難, 而且招來不好的結果. 第二, 朱子認爲“正”能주到什, 因此肯定“貞者事之幹”. 在這兒, 貞的位置是能管理道. 第三. 朱子在貞接受智. 在春夏秋冬的論理上, 肯定“貞者事之幹”說, 這是接受漢代“貞是知”的槪念. 而且, 他認爲“知”是“知慧”或者“貯藏”. 第四, 朱子反對程伊川的“貞是正”的理論. 換言之, 他認爲該解釋爲“貞是正而固”. 因爲, “正”不盡是知道“是是非非”, 而且包括一直維持正的狀態, 才能完成其意味. 第五, 宰相之道, 是在登用官吏時, 該沒有私心而維持公平之心(貞), 有區分賢明與否的慧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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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데이빗 흄(David Hume)이 근대 자연과학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탐구하는 데에 있다. 그 수평적인 관련을 보면, 흄은 근대 자연 과학의 방법과 성과들에 자극되고 고무되어 이러한 방법을 인문·사회 과학의 주제들에 확대 적용하려 시도한 초창기의 인문사회학자로 이해된다. 수직적 관련에서 보면, 흄은 과학적 지식의 인식론적 기초와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 이렇듯 17,18세기 자연 과학이 흄의 철학에 종적·횡적으로 미친 영향을 재확인하고 재인식하는 일이 이 논문의 일차적인 목적이다. 이러한 탐구를 위해 논자는, 먼저 흄 철학의 과제와 방법에 미친 뉴튼 과학의 영향을 살펴본다. 첫째로 논자는 뉴튼의 실험 철학의 출현 배경과 그 내용을 살펴보며, 나아가서 뉴튼이 가설을 거부하는 입장의 배경과 그 진의를 검토한다. 둘째로 논자는 흄의 <논고> 서론에서 보이는 철학의 과제와 방법에서 관찰되는 뉴튼 과학의 영향을 검토한다. 다음으로 논자는 근대의 새로운 과학적 지식의 기초가 되는 근본 신념들의 정당화 문제에 대한 흄의 견해를 그가 <논고>에서 다룬 주제들의 순서대로 살펴볼 것이다. 인과성, 물리적 대상의 존재, 자기 동일적 자아의 문제가 그것이다.나아가서 이러한 탐구를 통해 흄 철학의 성격을, 특히 흄의 자연주의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이 논문의 또다른 목적이기도 하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plore the relation between David Hume and Modern natural Science. Considering the aspects of their horizontal relation, Hume can be understood as an early humanitist who made an attempt to apply the methods of Modern Science extensively to the topics of humanities as he was stimulated and encouraged by the achievement of Modern Science.In their vertical relation's aspect, Hume can be said to be closely related to epistemological foundation of scientific knowledge. In this respect, one of the prime aims of this parer is to reconfirm and recognize horizontal and vertical influences of natural science during 17th and 18th centuries on Hume philosophy. For this purpose, the writer investigates the effect of Newton science on the tasks and methods of Hume philosophy. First of all, the background of the emergence of Newton's experimental philosophy and its content will be explored. Furthermore the context in which Newton denies Hypothesis and its real meaning will be examined. Secondly, the influence of Newton science that is evident on the philosophical tasks and methods shown in the Introduction of Hume's Treatise will be addressed. Next to this, the writer will take a careful look at Hume's views on the problem of justification of basic beliefs that provide the foundation of new scientific knowledge as the same order as the topics appear in the Treatise.Another aim of this parer is to have a clear understanding of the nature of Hume philosophy and furthermore, Hume's naturalism through this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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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증을 일상의 언어 행위 맥락에서 분리하고 않고 그 안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의 역사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비교적 최근에 일상의 논증과 그 평가에 관한 활발한 논의가 다시 벌어지고 있다. 비형식 논리학자들의 시도는 이를 보여주는 좋은 실예이다. 그런데, 이 논리학자들의 논증 개념이나 논증 평가 개념은 기존의 논리학과 다른 것 같다. 여기서는 대표적인 비형식 논리학자인 존슨, 고비어, 월튼 등의 생각을 중심으로 비형식 논리학의 논증과 논증 평가 개념에 관해 살펴보고, 나아가, 이들 각각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비형식 논리학의 본성과 한계에 관한 이해를 얻고자 한다.
What is the informal logic? What kind of “informality” it has? We can see the characteristic features of informal logic by considering the concept of argument and its evaluation. Although their diversity, some leading informal logicians, for example, Ralph Jonson, Douglas Walton, and Trudy Govier have a common position against deductivism in which deduction is only proper logic. We will start a disscussion about informal logic with anti-deductivism of these logicians. After this, the concept of argument, validity, soundness in informal logic will be examined in brief. I hope the nature and the limit of informal logic will be shed light through this exploratory work.
6,300원
이 글은 하이데거의 존재사유를 통해 정보 기술이 판을 치고 있는 이 시대를 사색해보는 글이다. 우리가 알듯이 이 시대는 정보 시대라고 불리고, 이 정보 시대는 정보 기술에 의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정보 기술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정보로 탈은폐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정보 기술에 대해 낭만적으로 바라보면서 그 정보 기술이 우리의 삶을 살찌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정보 기술이 현대 기술의 소산물이라면, 우리는 정보 기술을 그렇게 낭만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 왜냐하면 기술의 본질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기술이 위험한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탈은폐해서 그것들을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존재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성마저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 기술의 위험성을 그 본질에서 살펴보고, 그 위험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위험성을 정확하게 지적하면서 그 위험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우리는 하이데거의 존재사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은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를 통해 정보 기술이 판을 치고 있는 이 현 시대의 위험을 숙고하고 그 위험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그것은 바로 ‘숙고적 사유’와 ‘초연한 내맡김’의 길이다. 이때 숙고적 사유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정보로 탈은폐시켜 이용하게 하는 전통 형이상학적 사유인 표상적 사유를 벗어나 존재진리를 사유하는 것, 즉 음미하는 사유이다. 그리고 초연한 내맡김은 정보 기술의 기술적 대상들에 대해 ‘예’ ‘아니오’라는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취하는 태도로서 기술 세계에 은폐된 의미에 대해 눈과 귀를 여는 태도를 말한다.
Diese Zeitalter heißt die Zeitalter der Information, die sich aus der Technik der Information zeigt. Die Technik der Information ist das Produkt der modernen Technik. Die moderne Technik ist gefährlich. Denn das Wesen der modernen Technik, d.h. Ge-stell, das verstellt das Scheinen und Walten der Wahrheit, ist die Gefahr. Die moderne Technik ist ein Entbergen. Das Entbergen, das die moderne Technik durchherrscht, entfaltet sich nun aber nicht in ein Her-vor-bringen im Sinne der ποίησις. Das in der moderne Technik waltende Entbergen ist ein Herausfordern, das an die Natur das Ansinnen stellt, Energie zu liefern. Gilt dies aber von der Zeitalter der Technik der Information? Ja. Denn die Technik der Information ist eine Entbergen, das herausfordert das, was ist. Die Arbeit der Informationstechnik das Wirkliche als Information entbirgt. Die Weise, wie alles anwest, was vom herausfordernde Enbergen betroffen wird, ist eine Information. Daher alles das, was ist, verliert sich ihr Wesen. Sodann, was bedarft uns im jetzige Zeitalter? Es ist das besinnliche Denken und die Gelassenheit. Das besinnliche Denken ist das Denken von der Wahrheit des Seins, d.h. das Nachdenken. Die Gelassenheit ist die Haltung des gleichzeitigen Ja und Nein zur technischen Welt und die Haltung, kraft deren wir uns für den in der technischen Welt verborgenen Sinn offen halten.
고유명사의 의미론적 기능에 관한 연구 : 고대와 비잔틴 중세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34집 2004.09 pp.203-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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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는 이 글에서 고유명사의 의미론적 기능에 관한 고대와 비잔틴 중세에 제기된 물음들을 부분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고유명사들의 독특한 특징은 그것들의 외연이 원래부터 하나의 개별적 대상으로 결정되어 있다. 고유명사들은 어떤 한정된 것, 즉 유일무이한 대상은 지시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이론에 따르면 고유명사들은 내포적 내용 즉 기술적 내용을 결핍하고 있고 다만 순수한 지시어의 역할만을 수행한다. 즉 그것은 완전히 결정된 유일 무이한 외연만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고전적인 이론은 ‘페가수스’나 ‘키마이라’와 같은 상상적인 실체를 지시하는 고유명사들과 ‘알데바란(Aldebaran)은 황소자리중의 1등성(a-Tauri)이다’ 또는 ‘클라크 켄트는 슈퍼맨이다’와 같은 개별사물의 정체성에 관한 진술들을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연구자는 이 물음이 관한 다양한 접근방식들이 고대와 비잔틴 중세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역사적인 순서에 따라 이 논문에서 고찰하고 있다. 또한 중요한 접근 방식이 비잔틴 중세에서 이루어졌음을 바실의 주장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명칭들은 실체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특성을 묘사하는 고유속성들을 나타낸다. 그는 고유명사들이 어떤 지시 틀과 전방조응의 법칙들에 근거해서 결정되는 의미를 구성하는 일련의 특징짓기 그룹들의 대표자들로서 특수한 형태의 대명사들로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문론적 요소들이나 스토아학파의 존재론적 요소들에 의존하지 않고 고유명사들의 용도를 순수하게 의미론적인 기존들에 의해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바실의 주장에 따르면 고유명사가 실존하지 않는 어떤 것을 지시하는 경우도 이 이론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음으로 고전적 물음에 관한 한가지 해결점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Proper names are generally viewed as the semantically simples and most transparent of terms, being the singular designator, which is to say, the expressions for referring to unique objects, to individuals. Though seductive in its simplicity, this classical theory came up almost immediately against some severe difficulties, mainly with regard to the content of proper names which denote imaginary(non-existent) entities or in explaining the information content of statements of individual identity. And how could we maintain the role of proper names as rigid designators, in other words, how could we justify our conviction that we continue to refer through them always to the selfsame object, in spite of any transformations these object may have undergone in respect of their descriptive elements? And how can we explain our incapacity to provide any usable definitions for them?It is not my intention to review in this article the various solutions which have been proposed in recent times to these problems. I do however believe that these two theoretical poles, the designative and the descriptive, provide us with a useful frame of reference for understanding the corresponding positions adopted by those who dealt with this issue in antiqu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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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철학의 궁극적 대상은 절대자 혹은 진리다. 그리고 진리, 참된 것이란, 부분적인 것이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요, 구체적인 것이다. 대상을 추상적, 부분적으로 고립시켜서 고찰하는 사유방식을 헤겔은 반성 (Reflexion)이라고 부르고, 대상을 전체적이고 구체적으로 고찰하는 사유방식을 사변 (Spekulation)이라고 부른다. 변증법적인 사유방식은 반성적 사유 (지성)로부터 시작하여 매개과정을 통하여 사변적 사유 (이성)에로 고양된다. 절대자가 파악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변적 사유를 통해서라고 헤겔은 말한다. 그러나 사변적 사유를 통해 드러나는 대상을 구성하는 각 요소들 간의 관계는 모순관계가 아니라, 단지 어떤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다르다’는 관계 혹은 부정태의 관계일 뿐이다. 본 논문은 우리의 두 가지 사유방식인 반성과 사변이 과연 무엇이고, 이에 대한 헤겔의 이해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고찰한다.
The ultimate object of Hegel’s philosophy is the Absolute or truth. The true or truth is not partial or abstract, but the whole and concrete (“Das Wahre ist das Ganze.”) It is called Reflexion to apprehend a object in isolation abstractly, partially. And it is called Speculation, by which a object is concretely and totally apprehended. Dialectical method of thinking is proceeded from the reflectional thinking (Verstand), through mediation, and elevated to the speculative thinking (Vernunft). Hegel insists that only through such a speculative thinking the Absolute can be grasped. Speculative thinking is of course necessary in order to grasp a object, not partially but totally. This way of thinking is namely not to take the position of ‘Entweder~Oder’, but to take the perspective of ‘Sowohl~als auch’. However, we must not confuse the relation between the element in this ‘Sowohl~als auch’ with a relation of contradiction. They are never in a contradictional relation, but simly in a relation of negation. Contradiction or Antinomy never occurs in a thing or between things, besides in beliefs or clai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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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현재 중국의 공식 통치이념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방의 현재시점에서의 이론 구조에 대한 재구성과 그 함의에 대한 고찰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재해석과 재구성은 재구조화 내지는 체계화의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한 정치 구호성 성격이 강한 “주제들”의 제시 및 이론 전 단계의 추세화의 반영이라는 성격이 주된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철학의 일반적인 범주인 인식론, 본체론 및 가치론의 틀에 넣어 분석을 가한다.첫째, 인식론 범주는 인식의 주체를 생산력 위주로 재 개념화하는 것과 인식 주체의 기본요소인 개인을 확산한 인류 사회 전체가 주체적인 인간 전체의 구성체라는 것을 인식의 본질로 파악하며 이러한 맥락에서의 인식론적 세계관의 확립에 관한 것이다.둘째, 본체론 범주는 본체론 패러다임(範式)에 대한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과 사유방식의 전환이 동시에 진행되는 측면이 부각된다. 그러나 범식과 사유방식은 본체론 혹은 실체론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형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에 이르지 못하는 한계를 노정한다는 의미와 다름 아니다.셋째, 가치론 범주는 마르크스 철학이 전통적으로 지향해 온 사회변혁의 평등 정의 구현의 “가치” 중심에서 可變的인 의미를 내포한 “개혁”과 “발전”이라는 구체적인 그러나 극히 “다 개념 혹은 무 개념적인” 의미로의 중심 개념의 “공동화”현상을 야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론으로 중국 현대 마르크시즘의 변용의 추세에 대해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로 “공산당의 독재”란 결국 가치론 등에서 언급된 관방의 “열린”, “미래의”, “개방적인” 가치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둘째로 인식론 등에서의 주체적인 “인간”에 대한 언급에 대해서이다. “인간”과 그의 전체 “인간다운 환경” 조성에의 이론적인 방향은 사실 독재 정치체제 내에서의 “인간적 대우”와 “가치” 및 “그의 가능성의 최고조의 발휘”라는 인센티브 부여와 인간 본연의 “휴머니즘”적 가치와는 본질적인 천양지차의 구별이 되는 것이다. 셋째로 “개혁”과 “발전”의 시대적인 의미의 부여라는 의미를 감안하고서라도 “발전”의 가치가 정당하게 전 사회에 고루 은총으로 작용하려면 그것의 원시마르크시즘의 “정의” 개념에 부합한 의미를 지녀야 한다.
本论文主要探讨当代中国马克思主义新的趋势。这主要通过马克思主义的再解释或再构成提出其含义。首先对马克思主义的新时期的形式进行分析。当代的主流意识形态尚未成为完全的结构性体系。因此,其雏形的政治口号及哲学的一般范畴-认识论,本体论及价值论是分析的基本架构。 第一,认识论范畴里主要讨论认识主体的再认识。其扩散就是人类社会主体性人的构成体。 第二,本体论范畴主要讨论对范式进行认识性的概念的转换。但这并不意味着实体论根本性"形态"的变换。 第三,价值论主要探讨从主张社会变革的原始马克思主义的理想到富有加变形意思的"发展"概念的转换。 在结论,可提出如下三点:第一,"共产党的专政"与"未来","开放"等的表面性概念并不一致。 第二,所谓"人"的价值问题。在独裁政权之下的"人"的价值与一般的"人本主义"完全两个不同的概念。 第三,"发展"与原始马克思主义的"社会正义"的概念并不符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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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가 살았던 시대는 춘추전국시대로서 제자백가의 백가쟁명이 난무하던 때였다. 따라서 각종 학파의 주의주장이 팽배하였고, 그로 인해 제학파의 이론과 지식 등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여기에 도가로서 노자는 그 나름의 지식론을 설파하게 된다. 다른 어느 때보다 주의주장이 난무했던 당시였기에 노자의 지식론 연구는 그 의미가 크다.아울러 노자가 강조하는 바, 道의 세계에 진입하는데 지식은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도 궁금한 일이다. 도와 지식의 상관관계가 이와 관련된다. 나아가 지식을 축적하는데 도구로 사용되는 언어의 이해도 요구된다고 본다. 지식과 언어의 관계 파악도 필요하다고 본다.이에 중국 고대의 도가사상을 통해서 지식의 의미는 무엇이며,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도 필요하다. 즉 노자 지식의 의미를 어떻게 보았고, 지식에 대한 전반적 관점은 어떻게 정립될 수 있는가가 본 연구의 주 관심사항이다. 노자의 지식관을 정립하는데 있어 흐름을 같이하는 장자의 관점도 여기에서 덧붙여지고 있다.나아가 노자의 지식관 저변에 흐르고 있는 원리이자 그 의의가 무엇인가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노자의 지식에 대한 이해 속에는 공통된 원리가 있을 법한 일인데, 이는 노자 지식관의 의의로서 조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공통된 의의이자 원리는 노자 사상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궁극적으로 노자는 이러한 제반 지식론을 인성의 수양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것은 ‘自然’이라는 이상적 이념이 자리하고 있다. 도가에서 추구한 소국과민의 이상세계에 걸맞게도 노자는 인성을 무위자연의 세계에 초점을 맞춘 상태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요컨대 이 무위자연은 결국 노자의 지식 회의론으로 이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아무튼 노자의 제반 지식관 연구를 통해서 미래 지식세계에의 연결은 차기 연구의 과제로 남겨둔다.
It is the 21st century which has a character just like the knowledge and the information. That is what it is in the van of the new era with some radical changes. The knowledge and the information let the science & the civilization go further for the human being. In the civilization, there has been changing a historical bridge between the ancient and the current.Through reviving the old and learn the new, the old philosophy & Religion are sure to support an idea and virtue to a new world of the knowledge. It will be desirable that the ancient spirit applies to the current civilization for the right way by overcoming an abuse of the artificial knowledge. It is enough to become the principle of reviving the old and learn the new in studying the knowledge-view of Laotzu, so it contributes to minimizing the abuses of knowledge and information. It will give the chance of developing the character of people and their civilization, in sharing the sense of such an old philosophier as Laotzu, by which we can learn the using way of the mind in practising the knowledge. So, we will follow the nature of the knowledge without artificial discriminating the reality. It is the Tao which we are sure to be awakened after all. After all, by studying the view point of knowledge urged by Laotzu, we can find out what is desirable between the positive view and negative one about the knowledge. The Sage who are awakende the Tao will lead human being to the right way of using the great knowledge(大知) by way of following the pure Nature without an artifical w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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