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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왕충(王充)의 철학 가운데 自然無爲說과 마음(心)의 의미 및 관계를 탐구하는데 있다. 왕충은 氣를 통해 만물의 생성을 설명하며, 자연무위는 氣를 베푸는 天의 운행규율을 상징한다. 어떤 의지나 목적을 지니지 않은 天道의 자연무위를 통해, 왕충은 당시의 天人相感・故生說 등 비이성적 사고를 비판하였다. 왕충에 따르면, 자연무위한 天道의 운행을 통해 인간은 형체와 더불어 命과 性을 부여받는다. 命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변화시킬 수 없는 부분으로, 개인의 壽命・富貴・貧賤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왕충은 命과 관련된 영역에 있어 天道의 특징과 마찬가지로, 自然無爲・恬澹無欲함을 통해 욕망을 조절하고 운명에 순응하는 ‘소극적 有爲’를 주장한다. 반면 왕충은 품수 받은 氣의 厚薄・多少 등에 따라 人性을 上中下로 구분하고 동시에 인성의 변화 가능성을 강조하였다. 왕충은 인간의 의지・노력을 통해 人性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天道를 보조하여 사회를 유지・발전시키려는 인간의 ‘적극적 有爲’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울러 이러한 ‘적극적 有爲’는 왕충의 마음(心)에 관한 이해에 기초한다. 왕충은 心辯과 心意 등 마음이 지닌 理性的 판단・사고의 기능과 작용을 중시・강조하였다. 왕충에게 있어 天道와 人道의 合一 내지 自然無爲(眞)와 인위적 노력(僞)의 일치, 人性의 변화 등은 이와 같은 마음의 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這篇論文的目的在於考察在王充的哲學中‘天道的自然無爲說’和‘心’的意義, 以及它們之間的相互關係。王充用‘氣’來說明宇宙萬物的生成, 而且他所謂‘自然無爲’象徵著施散氣的天的運行規律。王充通過沒有任何意志和目的的天道的自然無爲, 而批評了在當時流行的天人相感說、故生說等等所謂非理性的思考。依照王充的思想, 經過自然無爲的天道的運行, 人們都稟受到其形體和性、命。其中, 所謂命是不能以人們的努力來變化的部分, 而且命與個人的壽命、富貴、貧賤等等有密切關係。在與命有關的領域裏, 王充主張通過自然無爲、恬澹無欲的生活而節制欲望和順應命運的‘消極的有爲’。如此不同, 在人性方面, 依據稟受到的氣的厚薄、多少, 王充把人性區分爲上、中、下的三個層次。同時, 王充極力强調能夠變化人性的可能性。所以王充又主張可以通過人們的意志、努力而變化人性。這是與人們要輔助天道而維持社會的‘積極的有爲’有密不可分的關係。進而, 在這裏所謂‘積極的有爲’就基礎爲王充關於人們的‘心’的看法。王充非常重視‘心’具有的所謂‘心辯’、‘心意’等理性的思考功能。在王充的哲學中, 可以說所謂天道和人道的合一、自然無爲(眞)和人們的努力(僞)的一致、人性的變化等等, 都一定是經過如此‘心’所具的功能而成就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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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동양의 방중서를 단순한 성애의 기술을 담고 있는 문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素女經』 등의 방중서를 『카마수트라』와 비교하면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카마수트라』와 달리 『素女經』에는 여성을 욕정의 대상으로 치부하는 논의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런 차이는 방중이 일종의 양생술이라는 점에서 발생한다. 특히 마왕퇴 발굴문헌인 ‘합음양’과 ‘천하지도담’ 등의 문헌에 집중하면, 여성의 반응에 관한 언급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에 놀라게 된다. 왜 이런 내용의 비중이 높은 것일까?情은 동양사유전통에서 외부의 자극에 대한 반응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정이 발로하는 구도를 여성의 반응을 읽어내는 구도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정은 실은 마음속의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마음속의 마음 즉, 精神(마음속의 마음이라고 했지만, 결코 심리적 영역에 제한되지만은 않는다.)이 처음에 울려나오는 것을 意라 하고 그런 마음의 지향성이 굳어진 것을 志라고 한다. 그런데 의지는 마음을 곧장 제어한다기 보다는 氣를 통해 간접적으로 제어한다. 여성의 반응도 이런 구도를 따라 드러난다. 그런데 이렇게 드러나는 반응은 분명하게 표현되는 말이 아니라, 말의 뉘앙스에 가깝다. 그것은 분명하게 표현되지 않지만 말보다 선명하고 더 깊은 곳에 있는 내밀한 비밀을 전해준다. 떨리는 목소리로 ‘괜찮아’라고 말할 때, 진실을 전하는 것은 무엇인가? 특이하게도 동양인들은 이처럼 말 자체가 아니라 말의 뉘앙스에 집중해왔고, 그것은 동양문화의 한 특성을 이룬다. ‘단단해진 유두, 얇아진 혀’는 그런 뉘앙스에 들어있는 진실을 전한다. 이런 반응의 배후에는 감응론이라는 동양의 특수한 논리가 있다. 감응론은 사시의 변화에 철저하게 순응코자 했던 이들의 논리이다. 그런데 이상적인 감응론은 물그림자처럼 메아리처럼 조금의 차이도 허용하지 않는 완전한 조화를 추구한다. 이런 조화는 자신을 완전히 비운상태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자신을 비우지 않으면 반응은 편중될 수 있고, 그것은 사태를 완전히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반응을 철저하게 적어가는 이야기의 배후에는 바로 이런 논리가 전제되어 있다.
Why are there so many references about women's response of pleasure in the literature of ancient chinese sexual arts(房中術)? this point is remarkable when we compare these literatures, He Yin Ying(合陰陽), Tian Xia Zhi Dao Tan(天下至道談), with Kama Sutra. I think resonance(感應), the logic behind qing(情) to be the reason of this interesting appearance. Generally, 情 is accepted just as the response exposure of Xing(性), personality concentrated on morality. But 情 was the word encompassing every responses such as poet's inspiration, desire for eating something when hungry etc. in th old chinese literature. If broadening the meaning of 情 like this, the response of women in intercourse is counted as 情. 情 like Wu Zheng(五徵) described as woman's response written in 合陰陽, 天下至道談, which is the response of is the expression of mind in mind(心中之心) is delivered by qi(氣). So 情 can be called to be gise(氣色), gixiang(氣象) and finally 氣. 氣 is not so much as something clearly expressed as nuance. this well explains why the response of woman in intercourse is called zheng(徵, symbol). Sure, woman's response like sweat on the nose in intercourse is response. But At the same time it is the stimulation causing the act of man. man's response is directed by 志. In the context of self-cultivating, mind must follow 志. If not, mind doesn't evenly spread and leans to one side. and this bias-desire is the main culprit of mind bias-causes the decline of mental capacity and health. So the response must follow the direction of will(志). in the old chinese literature, stimulation and response is explained by the logic of resonance(感應). then 情 must be apprehended by the theory of resonance(感應論). according to the theory of resonance(感應論), the response must be passive. sometimes this is figuratively expressed as echo following shouting. if so, we can propose that the theory of resonance is the reason for the excessive interest in woman's response shown in the sexual art literature.
성리학적 초월의 탄생 -그림자 개념(shadow concept)에 대한 한 논평-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63집 2011.12 pp.6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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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이 글은 초월적 개념이 어떤 인지적 사고의 과정을 거쳐 발생했는지를 그림자 개념과 개념 혼성 이론을 배경으로 해명하려고 한다. 둘째, 이러한 해명을 배경으로 주희가 수정한 「태극도설」의 첫 구절 및 그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성리학적인 초월 개념을 확립하려는 이론적 시도로 이해될 수 있는지를 밝히려고 한다. 리를 비롯한 모든 초월적 개념들의 초월성은 어떤 초월적 경험을 경유한 개념화가 아니다. 그들은 경험적 개념으로부터 몇 가지 인지적 과정을 거쳐서 나타난다. 첫째,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경험적 개념을 낳는다. 둘째, 경험적 개념의 전체 내용을 「그릇」 도식을 통해 은유적으로 이해할 때, 필연적으로 경험 세계 너머라는 구분이 발생하고, 그 너머에서는 일종의 내용이 텅 빈 개념, 즉 그림자 개념이 나타난다. 셋째, 경험적인 내용을 갖는 경험적 개념과 비경험적인 텅 빈 내용만을 갖는 그림자 개념은 개념 혼성 과정을 통해 ‘비경험적이면서 내용을 갖는 개념’, 즉 초월적 개념을 낳는다. 이런 개념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진술 양식은 ‘∼A이면서 A이다’라는 형태다. 주희가 수정한 ‘무극이태극’이란 구절과 그 해석인 ‘무형이유리’라는 진술은 이러한 유형의 사고가 성리학적 특수성을 배경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태극도설」의 첫 구절에 대한 주희의 이론적 요구는 한결 같은 방향성, 즉 성리학적 초월 개념의 탄생을 가리키고 있다.
這一篇文章的目標有二: 第一, 筆者以‘影子概念’和混成理论, 说明了超越的槪念是通过哪样的认知的思考过程发生的. 第二, 在这样的背景下, 考察了朱熹所修改的≪太极图说≫第一句及其解释,是为了确保超越概念而提出的理论工作. 一切超越的概念包括理的超越性, 并不是经过某种超越经验而后概念化的. 它们是从经验的概念当中通过认知的过程出现的. 第一, 我们对世界的经验导出了经验的概念. 第二, 如果我们对经验概念的全内容以‘器具’的隱喩形式来理解的话, 必須發生超越經驗的区分, 而且在超越經驗的地区里, 出現一種沒有內容的空虛槪念, 卽影子槪念. 第三, 有经验内容的经验概念和只有非经验的空虚概念, 是通过概念混成过程产生出‘有非经验内容的概念’, 即超越概念. 表现这样概念的典型的陈述形式, 是‘是~A又是A’. 朱熹所修改的‘无极而太极’及其解释‘无形而有理’这样的陈述, 就是在性理学的特殊性为背景下提出来的. 这样看来,朱熹对≪太极图说≫第一句的理论上的要求,就是一向的方向, 既指向着产生性理学的超越概念.
맹목적 욕망과 자기인식의 결여 : 부끄러움[恥]에 대한 철학적 인간학의 성찰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제63집 2011.12 pp.9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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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close 오늘날 우리의 일상에 미만한 후안무치한 행태들이 욕망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논하고자 한다. ‘맹목성’과 ‘자기인식의 결여’로 요약할 수 있는 욕망의 작동방식은 타자와의 소통을 어렵게 하는 자기애적 병리현상을 낳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런 문제들을 후안무치하다고 비난하는 까닭은 단지 소통의 부재만이 아니라 후안무치함이 타자에 대한 적극적이며 적대적인 ‘태도’의 문제라는 데서 기인한다. 우선 각각의 행위자는 자기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서 욕망의 힘을 긍정적 방향으로 전환시킬 수 있어야 한다. 더불어 실감 있는 타자의 존재를 긍정하고 소통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써 슬로터다이트가 제안한 또 다른 종류의 ‘뻔뻔함’에 주목하고자 한다.
I will discuss on how desire makes relations to an attitude of shamelessness that has been prevailed today. A mechanism of desire produces narcissistic phenomena making difficulities to communicate with others. Nevertheless, the reason one blames for the attitude of shamelessness is because it implies not only a lack of communication but also a hostile attitude toward others. Thus, each agent should be able to convert power of desire to more positive vector via cultivation of self-reflection, which leads us to realize that human beings are incomplete. In order to find possibility to communicate with others as well as to admit them positively, I will pay attention to the word of impudence Sloterdijk propo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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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체는 한정된 時空 속에서 생명활동을 전개하다가 生을 마감하게 된다. 생명을 가진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도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숙명으로, 이미 우리의 삶속에 내재되어 있는 가장 큰 고통이다. 어둠이 짙을수록 별빛이 더욱 찬란하듯이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죽음이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기에 우리의 삶은 더욱 고귀하고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일정 기간 生을 영위하다가 반드시 죽어야 하는 유한 생명이기에 우리의 삶은 그만큼 더욱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다. 天地의 영원성은 하나의 지속적인 변화의 과정일 뿐이므로 사람의 길(人道) 또한 변화의 과정 속에 가로놓여 있는 것으로서 天地의 변화를 따라 天地의 大化流行에 합류하게 될 뿐이다. 人生의 가치와 意義 역시 이러한 지속적인 변화의 과정 중에 실현되는 것이므로, 人道의 추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 속에서 日新又日新하는 주체적 修養을 통해 개체생명의 유한성을 우주의 무한성에 融合시킴으로써 人道와 天道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통합작용상의 修行인 것이다. 삶은 객관적 사유대상으로서의 존재와는 다른 창조적 생성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죽음은 삶에 주어진 내재적 한계로서 어떤 종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속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순간순간은 과거와 미래가 맞닿아 있는 삶의 총체인 것이다. 儒家의 행복한 삶도 실존적 순간순간의 일상적 삶을 天賦的 德性을 통해 天道에 따라 營爲하도록 함으로써 天人合德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사람의 길(人道)은 결국 天人合德의 이상적 삶의 목표에 이르는 길이자 행복한 삶을 이루는 하나의 路程인 것이다.
所有生命體都是在既定的时空之内开展自己的生命之旅,由此而结束自己的一生。对于拥有生命的人类来讲,死亡是一个無法规避的宿命之一,也已经潜置於人生,成为人类最大的苦痛。正如黑暗可令星光愈加明亮,死亡——这一無法规避的宿命横断在人类面前,也更令人生更显高贵,愈加散发出美丽之光。我们大家都是在谋求一段人生之後,终将走向死亡,这是一个有限的生命,由此,我们的人生才愈发显得美丽而高贵。天地恒远,也仅仅是一個持续变化的过程,人道也仅仅是横陈於该变化过程,而有始無终,进而合流於天地之大化流行。人道谋求的是通过在变化無穷的宇宙中进行日新又日新的主體修养,从而将有限的個體生命融合至無限的宇宙之中,从而使人道與天道合一,这是一种相互融合的修行行为。生與客观思维对象的存在一起在另外的创造生命过程中形成;死是给予生的一個内在界限,不在於某一终点,而是内在於每一瞬间。因此,瞬间连接过去和将来,是生的集合。儒家的幸福人生即是通过天赋德性根据天道谋求实际存在的每一個瞬间的日常人生,从而达到天人合德之境。人所应该经历之人道即是达到天人合德这一理想人生目标之路,也是实现幸福人生的路程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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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즉 1920년대부터 서양철학이 대거 유입 수용되기 시작한다. 물론 일본을 통해서이다. 경성제대 예과가 1924년, 본과가 1926년 설립되며 철학과도 이때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등장한다. 경성제대 철학과를 중심으로 서양철학 제1세대들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도 1920년대 말부터이다. 박치우는 박종홍과 함께 철학과 제5회로 서양철학을 전공한다. 일제시기, 그리고 해방공간에서 박치우는 비단 철학계뿐만 아니라 문학계에서도 폭넓은 문필활동을 통해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1946년 3월 25일 창간된 『현대일보』에 뛰어들어 ‘편집 겸 발행인’으로, 또는 ‘주필’로 열정적인 문필활동을 펼치며, 『현대일보』가 무기정간에 처해진 9월 6일까지 그의 문필활동은 절정을 이룬다. 또한 이해 여름 그의 저서 『사상과 현실』을 출간하기 위해 원고도 정리하게 되며, 그리하여 11월 20일에 그 초판이 출간되기에 이른다. 이 논문은 『현대일보』를 중심으로 박치우가 펼치게 된 그의 철학사상적인 시대의식을 고찰하고자 한다.
Am philosophischen Fachbereich der Imperium-Universität Kyung- Sung hat Herr Chi-U Pak als einer unserer im eigentlichen Sinne ersten Philosopher die europäische Philosophie, besonders die deutsche Philosophie in der japani-schen Kolonialperiode studiert. In der Hyun-Dae Tageszeitung hat er die vielen aktuellen Themen veröffentlicht, auf die sein philosophischer Gedanke unmittelbar sich beziehen könnte. Der vorliegende Arbeit behandelt also solche Probleme, wie Herr Pak in der Hyun-Dae Tageszeitung seinen idealistischen Gedanke entwickelt und was er dann kraftvoll behauptet. Bis dort geht es nur darum, in diesem Arbeit einen Versuch zu machen. Er möchte durch die dialektische Einheit der Theorie und Praxis seine Philosophie in der Hyun-Dae Tageszeitung realisieren. Aber es ist im Zweifel darüber, ob er als der Journalist in der Befreiung Koreas von der japanischen Herrschaft seinen philosophischen Gedanke verwirklic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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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30년대를 중심으로 니체가 한국에 소개되고 수용되는 과정을 논의하고자 한다. 1920년대는 김기전, 박달성, 김억, 이돈화, 이대위 등에 의해 입문적 소개가 나오지만 이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고뇌를 담고 있는 사회철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대해 1930년대는 박종홍의 사회철학, 안호상의 투쟁철학, 전원배의 문화철학 등 세계정세와 독일에서의 해석에 영향을 받은 비판적 논의가 있었으며, 동시에 문학에서 김오성의 네오휴머니즘과 같은 새로운 이념이 니체의 영향을 받으며 나왔고, 또한 니체사상의 영향을 받으며 서정주, 유치환, 오장환, 함형수, 윤곤강 등 생명파가 형성되는 결실을 맺게 되었다. 니체는 이후 지속적으로 순수문학논쟁과 전후(戰後)문학의 형성에도 기여했으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철학과 문학, 그리고 예술 등 다양한 영역에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Dieser Aufsatz zielt darauf ab, herauszuarbeiten, wie Nietzsches Gedanke um 1930er in Korea eingeführt und diskutiert ist. Um 1920er beschäftigte sich die Intellektuellen wie Kijeon Kim, Dalseoung Park, Uk Kim, Donhwa Lee, Daewi Lee mit Nietzsches Gedanken, dessen Inhalt als eine Sozialphilosophie bezeichnet werden kann. Um 1930er sind auf der einen Seite einige philosophischen Tendenzen wie die Sozialphilosophie Jonghong Parks, der Gedanke des Kampfes bei Hosang An und die Kulturphilosophie Wonbae Jeons mit der Auslegung über den Gedanken Nietzsches einhergegangen. Sie standen unter dem Einfluß der philosophischen Diskussionen von damaligem Deutschland. Auf der anderen Seite wurde in der Literatur die neue Idee wie Neo-Humanismus Osung Kims und die poetische Gruppe des Lebens unter dem Einfluss von Nietzsche gebildet. Seitdem trägt Nietzsches Gedanke zur Bildung der 'reinen literarischen Debatte' und der 'koreanischen Literatur der Nachkriegszeit' bei und übt bis jetzt einen tiefen Einfluss auf die Philosophie, Literatur und Kunst in Korea a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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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명제론』 1장에서 의식내용들이 현실존재의 유사물이라고 주장한다. 이 의식내용들이 무엇인지와 관련하여 기존 연구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개념이 현실 존재와 유사한(즉 일치하는) 의식내용인지가 쟁점이다. 전통적인 연구가들은 감각표상, 심상뿐만 아니라 개념도 현실존재와 일치하는 의식내용이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한편 크레쯔만 등은 문제의 문단에서 의식내용이 애매하며 감각표상과 심상만이 현실 존재와 일치하는 의식내용이고 개념은 현실 존재와 일치하는 의식내용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에 논자가 생각하기엔, 감각표상과 심상뿐만 아니라 개념과 판단도 현실 존재와 일치하는 의식내용에 포함된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임이 분명하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감각작용은 감각대상(즉 개별 속성과 개체)에 영향 받아 감각적 형상을 수용하여 감각기관이 그 대상과 같아지는 작용이며, 감각은 이 수용된 감각적 형상을 파악함으로써 감각표상을 형성한다. 따라서 감각표상이 그 대상인 개별존재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사고 작용은 사고대상, 즉 형상을 수용・파악하여 개념을 형성하는 것이고, 이때 수용된 형상은 외부 개체에 내재하는 형상과 같은 것이고, 이 형상은 보편이다. 따라서 개념은 보편존재와 일치하는 의식내용이라고 하겠다. 셋째, 판단(즉 감각표상, 심상, 개념의 다양한 결합)은 개별존재들과 보편존재들의 다양한 결합인 사태와의 일치여부에 따라 참 또는 거짓이 된다. 판단이 거짓일 수도 있지만 참된 판단은 사태나 사실과 일치한다.
Aristotle says in his De Interpretatione that affections of soul are likeness of actual things and these matters have been discussed in the work on the soul.The question is whether noēmata are included in affections that are likeness of actual things or not. In my understanding Aristotle thinks that not only aisthēmata or phantasmata but also noēmata or dianoiai are included in those affections. The grounds for my understanding are as follows: (1) According to Aristotle, sensation consists in being affected by object of sense, sense is that which is receptive of the form of sensible objects without the matter. During the process of being acted upon the sentient subject(i.e. the individual) is unlike, but at the end of the process it has become like that object, and shares its quality. Sensation can discern sensible objects, and so percept(aisthēma) can be produced in the soul. Thus percepts has become like the individuals. (2) Thought(nous) must be same as the object of thought, because thought must be receptive of the object of thought, i.e. form or essence. This is the universal. The soul knows noēma with nous. Thus noēma is held to be same as the universal. (3) He who thinks that what is divided is divided, or that what is united is united, is right; while he whose thought is contrary to the real condition of the objects is in error. If a thought that divides or unites percepts, images, or noēmata corresponds to the state of things or facts, the thought is true. Thus the true thoughts are held to be like the state of things or fa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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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로마 제정기에 동물의 언어 능력을 옹호하기 위해 제출된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데 있다. 스토아학파에 맞서 동물들도 의미 있는 분절어를 사용하며, 그런 점에서 인간과 동물의 로고스 능력에 아무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와 포르피리오스가 내세웠던 논변들이 논의의 주된 대상이다. 이 글에서는 이 두 철학자가 도입한 논변과 사례들을 소개하면서 그 정당성을 검토하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이들의 여러 논변은 동물의 발화 현상에 대한 흥미로운 관찰들에 바탕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동물의 발화를 인간의 언어에 동화시키기에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들의 주장에 놓인 가장 큰 공백은, 섹스투스와 포르피리오스 모두 자신들의 테제들을 정당화하는 데 필요한 어떤 체계적인 심리학도 전개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Dieser Aufsatz zielt darauf ab, die Behauptungen kritisch zu betrachten, die man in der römischen Kaiserzeit für die tierische Sprachfähigkeit aufgestellt hat. Im Mittelpunkt der Diskussion stehen besonders die Argumente, die Sextus Empiricus und Porphyrios gegen die Stoa vorgebracht haben, um ihre Meinung zu untermauern, nämlich dass auch die Tiere über artikulierte Lautäußerungen verfügten und damit in ihrer Sprachfähigkeit von den Menschen keinen wesentlichen Unterschied aufwiesen. In diesem Aufsatz soll versucht werden, die von den beiden Philosophen vorgetragenen Argumente und Beispiele nachzuzeichnen und ihre Geltung zu prüfen. Diese Untersuchung soll ergeben, dass sich ihre Argumente zwar auf viele interessante Beobachtungen über die tierischen Lautäußerungen berufen, aber nicht ausreichen, um diese an die menschliche Sprache anzugleichen. Die größte Lücke in ihren Behauptungen liegt nach der Meinung des Verfassers darin, dass sowohl Sextus als auch Porphyrios keine systematische Psychologie entwickelt haben, die ihre Thesen fundieren kön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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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에서 지금까지의 심신 문제를 거시적으로 진단하고 그것이 난제에 빠진 핵심적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제시하려고 한다. 첫째, 지금까지의 심신 이론들이 이제는 더 이상 데카르트의 실체 2원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만 그의 배타적인 심신 개념을 아직도 전통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틀 안에서 문제를 보고 있기 때문에 심신 문제가 그 자체로 해결 불가능하다. 따라서 심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데카르트식 심신관에 대한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 그의 실체 2원론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의 틀 자체에 대해서도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둘째, 거의 모든 심신 이론들은 속성을 중심으로 논의하고 있는데, 속성에 관한 논의가 사실은 대체로 속성에 관한 서술(descriptions)을 논하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예전의 많은 논문에서 대부분의 심신 이론에는 보편자로서의 속성 실재론이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지금까지의 심신 이론들이 속성과 속성의 서술을 혼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속성에 관해 논할 때 형이상학적 존재범주로서의 속성에 관해 논하는 것으로 많은 철학자들이 여기고 있지만 사실 속성의 서술에 관한 언어 차원의 논의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언어적으로 서술된 속성(사실상 술어에 불과한)을 그 자체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속성 실재론을 옹호하게 되며, 이렇게 언어 차원의 논의에 불과한 것을 존재 차원의 형이상학적 논의로 혼동하는 데에서 심신 문제의 아포리아가 발생한다.
In this paper, I will diagnose the mind-body problem so far from a macro perspective, and suggest two important reasons which have made the issue an aporia. First, most mind-body theories so far which have not accepted Cartesian substance dualism any longer, however, have deeply committed to Cartesian conceptual scheme as the tradition and intuition of the mind-body problem. I think the mind-body problem is unsolvable in itself on the ground of Cartesian conceptual scheme in which mind and body are coexclusive. I think, therefore, we need reflect Cartesian conceptual scheme in which mind and body are coexclusive. Only refuting Cartesian substance dualism is not enough, and we should reconsider Cartesian framework on which is still an important basis of the mind-body problem so far. Second, although it is said that most recent mind-body theories deal with properties, they actually deal with not properties but only property descriptions. In my previous articles, I have asserted in most mind-body theories there is a hidden but unjustified assumption, that is, realism about properties as universals. Paraphrasing my point, most mind-body theories so far have confused properties with property descriptions. So property is a core item which most mind-body theories deal with. But they would actually deal with property descriptions, or, at best, properties identified by language, namely, predicates. And furthermore they regard properties described by predicates as real, so they unconsciously property realism. But property realism then makes a mistake a linguistic work like conceptual analysis with an ontological work. Then mind-body problem will be an aporia, because the concepts of mind and body are contrary to each other.
6,900원
이 글은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에 대한 여러 이론 중 이 오류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접근법을 찾으려고 한다. 먼저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의 정의와 종류를 검토한다. 그 다음에 논리적 접근, 객관적 인식론적 접근, 주관적 인식론적 접근, 화용론적 접근을 검토해 보고, 그 중 객관적 인식론적 접근이 이 오류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The aim of this paper is to search the most plausible explanation of begging the question among various approaches to it. First, I examine how to define it and how many forms of it there are. After investigating logical approach, objective epistemic approach, subjective epistemic approach, and pragmatic approach, I conclude that objective epistemic approach can explain begging the question better than any other approaches.
7,300원
이 논문은 콜버그가 어떻게 윤리상대주의를 비판하고 도덕판단 단계론을 보편적 윤리학으로 확립하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콜버그는 문화적으로 보편적인 도덕판단 단계의 계열이 가치교육에서 교화주의 대 상대주의 사이의 딜레마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문화적으로 보편적인 도덕발달 단계들과 거기에서 체화되는 정의 개념을 바탕으로 가치 상대성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콜버그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관점에서 덕 주머니론에 대한 자신의 반대 입장을 체계화한다. 그는 덕의 본질에 대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진술을 바탕으로 도덕교육과 도덕학습의 적절한 방법을 찾고자 하였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덕을 다수가 아닌 하나로 보았으며, 덕을 문화와 상관없이 동일한 이상적인 형식, 즉 정의라고 규정하였다. 칸트, 피아제, 롤즈, 그리고 콜버그에서 도덕 기준은 내적 의무에 대한 판명한 개념인 규정성, 모든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판단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보편화 가능성, 무도덕적 숙고에 대한 도덕적 숙고의 우선성을 포함한다. 콜버그에서 도덕원리는 보편적인 선택의 형식이고, 모든 사람들이 모든 상황에서 언제나 채택하기를 원하는 선택 규칙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것은 평형화된 역할채택의 기본적 진술인 가역성과 보편화 가능성의 일치를 뜻한다. 롤즈의 ‘숙고된 판단’이나 ‘반성적 평형’ 개념은 콜버그에서 최고의 도덕단계에 해당한다. 콜버그와 롤즈의 이론은 동일한 뿌리에서 나왔는데, 도덕철학에서 칸트의 형식주의와 심리학에서 피아제의 형식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콜버그의 도덕판단 단계에서 마지막 6 단계는 칸트적인 특성을 가졌으며, 의무 개념에 대한 도덕판단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그것들은 바로 인간 존중과 정의의 원리로 규정된다(형식주의). 우리는 도덕철학과 도덕심리학을 종합하고 형식윤리학과 덕윤리학을 통합한 콜버그의 도덕발달론에서 도덕판단의 자율적 기준을 발견할 수 있다.
This work is intended to view, how Kohlberg criticise ethical relativism and establish the theory of moral judgement stages as universal ethics. Kohlberg tries to clarify how the culturally universal sequences of stages of moral judgement helps resolve the dilemma of relativity versus indoctrination in values education. He wants also to resolve the problem of relativity of values by his conception of culturally universal stages of moral development and the idea of justice that the stages embody. Kohlberg tries to systematize his objection to the bag of virtues with a Socratic-Platonic view. He will find the appropriate methods of moral teaching and learning in the Socratic-Platonic statement on the nature of virtue. For Socrates and Plato virtue is one, not many, and it is always the same ideal form regardless of culture; the name of this ideal form is justice. The criteria of morality for Kant, Piaget, Rawls, and Kohlberg include prescriptivity (a distinct concept of an internal duty), universalizability (a sense that judgements should be those all people can act on), and primacy (of moral over nonmoral considerations). The moral principle means for Kohlberg a mode of choosing that is universal, a rule of choosing that we want all people to adopt always in all situations. In other words it means also the equation of “universalizability” with “reversibility,” which is the fundamental statement of equilibrated role taking. Rawls’s notion of “considered judgement” or “reflective equilibrium” corresponds to judgements at Kohlbergian highest moral stage. Kohlberg’s Theory and Rawls’s grew out of the same roots; Kant’s formal theory in moral philosophy and Piaget’s formal theory in psychology. The last stage, Stage 6 in Kohlberg’s moral judgement stages has a Kantian ring, centering moral judgement on concept of obligation as these are defined by principles of respect for persons and of justice (formalist). We can find the autonomous criteria of the moral judgement in Kohlberg’s moral development theory as a synthesis of moral philosophy and moral psychology, as a unification of formal ethics and virtue ethics.
5,200원
이글은 해석학적 이해를 도덕적 현상으로서 보는 가다머의 실천적 해석학의 입장이 연구 인터뷰실행과정의 철학적 기초가 될 수 있음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인터뷰는 역사적으로 실천적 삶의 지혜를 추구하며 자기 발견에 이르는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적 대화법에 기초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증법적 대화과정을 통해 공통의 주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이르는 과정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철학의 핵심개념인 프로네시스가 작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화로서의 인터뷰란 연구주제와 목적에 따라 연구 참여자들의 좋은 삶을 궁극적으로 고려하면서 행위에 대한 숙고적 사려가 교환하는 과정이며, 이를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앎과 더불어 사회적 선을 향한 연대성이 구축되어가기 때문이다. 인터뷰 실행자의 해석학적 능력이란 사회적 실천 이성이 지닌 덕의 능력이며, 대화 참여자들 사이의 관계는 바로 친구 간에 형성되는 필리아(philia), 즉좋 은 삶을 바라면서 함께 하는 삶 속에서 사회적 연대성이 형성되는 관계인 것이다. 따라서 인터뷰란 단순히 연구자의 연구목적을 위한 자료수집 방법이나 지식의 출처일 뿐 아니라, 그것 자체가 도덕적 현상으로서 사회적 선을 향해 연대성을 구축하는 실천적 해석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Gadamer hat in seiner praktischen Hermeneutik das Verstehen selbst als ein moralisches phaenomen in dem Ich-Du-Verhaeltnis angesehen, das sich durch das dialektische Gespraech vollzieht. Die vorliegende Arbeit zielt darauf ab, dass Gadamers praktische Hermeneutik die philosophische Grundlagedes Inter-views als Dialog geben kann, das fuer den Zweck des Verstehens als Wahrheitserfahrung im Bezug auf die bestimmten Sachverhalte gefuehrt werden kann. Das Interview basiert geschichtlich auf das Socratess dialektische Gespraech, das nach der praktischen Weisheit sucht und zur Selbsterkenntnis bringen laesst. Weitergehend spielt dabei Phronesis als die Tugend der praktischen Vernunft wichtige Rolle, die sich in der konkreten Situation ihre Anwendung als das praktische Volllzug findet. Denn Inter-view verfaehrt als hermeneutisches Gespraech durch den Austausch der Besinnung zwischen den Sprechenden in Bezug auf das gute Leben, daraus ergeben sich Selbsterkenntnisse und soziale Solidaritaet. In dieser praktischen Hinsicht kann das Inter-view nicht nur als method der Data-Kollektion und die Quelle des Wissens, sondern auch als moralische Phaenomen, Praxis des Phronesis betrachtet werden, die eine Solidaritaet in die Richtung auf das soziale Gute vermehren und bewahren koennen.
5,500원
본 논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과 호네트의 인정이론에 근거하여 행복이 왜 삶의 최종 목적이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무엇이고, 또한 이러한 논의를 통해 어떻게 현실 사회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지를 논의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호네트는 공통적으로 행복을 주체적 입장에서 접근하면서 이를 생존이 아니라 성공적 자아실현이라는 맥락에 위치시킨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가능하게 하는 인격적 조건에만 주목하고 있으며, 호네트 행복의 심리적, 사회적 조건에 주목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행복의 조건을 충분히 밝히기 위해서는 양자의 결합이 필요하며, 이를 토대로 현실적 삶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확보할 수 있다.
In this article is it the matter, why the final aim of the life is the happiness, which conditions make the happiness possible, and how man criticizes the society and makes an alternative. Aristoteles and Honneth approach the theme in common with the perspective, in which the human being makes the life happy of himself, and locates the happiness in the context not of self-preservation, but of successful self-realization. But Aristoteles takes note of only personal condition of happiness, while Honneth concentrates his own attention on the psychological and the social condition.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mediate the both. This mediation makes it possible, to criticize the real life and to make an alternative.
6,700원
이 글은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의 에로티시즘에 대한 성찰을 ‘언어’라는 관점에서 다시 살펴보기 위해 씌어졌다. 그는 에로티시즘이 언어(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언어, 언어 일반)와 대립한다고 보았고, 그에 따라 에로티시즘을 통한 위반과 사회의 금기를 대립시켰다. 그러한 바타유의 생각에는 ‘언어는 살해한다’는 헤겔-코제브의 테제가 놓여 있다. 그러나 에로티시즘이 설사 사회적 제도와 금기와 일반적 언어에 대립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몸과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다면, 또 다른 언어와, 일종의 몸의 언어와 결부되지 않는가? 이 물음에 따라 여기서 우리는 일반적이고 사회적인 언어와는 다른 종류의 언어에 대해 생각해보았고, 그에 따라 바타유가 말하는 에로티시즘을 다른 관점에서 보완하고 교정하고자 했다.
À partir de la question du langage cet article est écrit pour que nous puissions repenser à la réflexion de Georges Bataille sur l'érotisme. Il dit que l'érotisme est réfractaire au langage(langage dont la société use, le langage en tant que tel), et il oppose la transgression de l'érotisme à l'interdit tenu dans la société. Admettons que l'opposition du langage(ou de l'interdit) et de l'érotisme. Mais si celui-ci est nécessairement dans le rapport avec le corps, est-il aussi dans un autre langage, avec une sorte de langage du corps? Par le biais de cette question, nous avons réfléchit sur un autre langage différent du langage de la société pour mettre en question l'érotisme don't parle Batai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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