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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연구 [The Study of the Eastern Classic]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동양고전학회 [The Society of the Eastern Classic]
  • pISSN
    1226-7910
  • 간기
    계간
  • 수록기간
    1993 ~ 2026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유교학
  • 십진분류
    KDC 910 DDC 950
제25집 (13건)
No

[文學]

1

6,100원

초록 1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는 정학유(丁學游, 1786~1855)가 지은 장편 가사작품이다. 이 작품은 서두가(序頭歌)에서 시작하여 한 해를 1월부터 12월까지로 나눈 월령 형식에, 농가에서 매월 행하는 행사와 풍속, 범절(凡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본고의 목적은 당대 사회적 배경과 작가 주변의 상황 및 작가의 학술적 태도를 고찰하여 정학유가 <농가월령가>를 창작하게 된 배경을 확인하고, 그가 월령 형식을 통해 표출하고자 했던 의식의 일면을 확인하는 데 있다. <농가월령가>는 풍속과 농사가 월령 형식으로 결합된 가사작품이며, 이는 풍속과 농사의 측면에서 조선후기에 활발하게 편찬된 세시기(歲時記) 및 사찬(私撰) 농서(農書)와 연관성이 있는 작품이다.또한 부친인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평소 실증과 고증에 기반한 학술활동과 실천을 중요시했는데, 그 자식들에 대한 학문적 영향력에 의해서 아들인 정학유가 <농가월령가>를 창작하였다고 보았다.한편, 시명다식(詩名多識)은 정학유가 20세 되던 해인 1805년에 완성한 4권 2책의 필사본이다. 그 내용은 시경(詩經)에 등장하는 생물의 이름을 고증하여 해설한 것인데, 시경 각 장의 편명을 적고, 등장하는 생물을 8개 분야로 나누어 역대 제가(諸家)의 설명과 자신의 견해를 붙였다. 이러한 작가의 고증적 학문 태도는 다대(多大)한 물명(物名)이 등장하는 <농가월령가>를 통해 발현되었기 때문에 학문적 지식을 실생활의 경험과 접목시켜 실천코자 했던 작가 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Nonggaworllyongga> is a long work ‘Kasa(歌辭)’ of Jung, hak-you(丁學游, 1786~1855). This work is begin ‘the song of beginning(序頭歌)’ and progress from January to December in a form of ‘Worl-lyong(月令)’. It has an event, customs, manners of a farm village. A purpose of this thesis are consider the social background and circumstances of a writer and scientific attitude of writer to the present age. So confirm that creative background of <Nonggaworllyongga> and the conscious side of Jung, hak-you. <Nonggaworllyongga> is a work that form of ‘Worl-lyong’ to unite with customs and farming. This work is related to an almanac and farming books of the latter period to ‘Chosun(朝鮮)’ Dynasty. Also his father Jung, yak-yong(丁若鏞, 1762~1836) is attach great importance to scientific research and practice that stand on the basis of an actual proof and investigation. So Jung, hak-you create the <Nonggaworllyongga> be due to his father’s scientific influence. And Simyungdasik(詩名多識) is a book of Jung, hak-you. He writed in twenty years old(1805). That is a book copied by hand and a four chapter in two volume. the contents are investigate and explain to name of a living thing in Si-kyung(詩經). It divide a living thing into eight. And explain of various schools that write down chapter's name and living thing's name in Si-kyung. It is influenced by a bibliographical study of Chinese classics. The writer’s scientific attitude is revealed to <Nonggaworllyongga>. So we can confirm to writer’s consciousness that act up to his principles scientific knowledge with experience of real life.

2

松江 詩世界의 背景硏究 - 松江의 現實志向 詩를 중심으로 -

權赫明

동양고전학회 동양고전연구 제25집 2006.12 pp.3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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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0원

3

목은 이색의 누정기 기사(紀事)의 기술 방식

윤상림

동양고전학회 동양고전연구 제25집 2006.12 pp.6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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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00원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의 누정기(樓亭記) 기사(紀事)는 누정의 외관이나 주위 경관 및 공사의 과정을 묘사보다는 주로 서술에 의존하여 기술하고 있다. 누정 주위의 경관이나 누정의 외관 및 공사 과정을 감각에 호소하는 묘사보다 사실이나 지식 전달을 위주로 하는 관념적인 서술에 의존하여 기술하는 것이다. 이는 고려 후기 성리학 수용 이후 자신의 정치적 입지 확보를 위해 철학적 정치적 논리를 치밀하게 전개하기 시작하여 의론이 더욱 강화되는데, 이때 기사를 의론의 전제로 삼기 때문이다.상세한 기술에 바탕한 장황한 나열은 강조하려는 부분에서 나타난다. 상세하고 장황한 기술은 글에 힘을 실어 ‘바람이 가고 물이 흐르는 것 같아서 조금도 막힘이 없었고’ ‘그 넓고도 도도한 흐름은 마치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듯하였다’는 평가를 받았고, ‘침착하여 여유가 있고 혼후하여 한량이 없는’ ‘웅혼’한 미감을 창출한다. 그런데 이러한 장황함과는 대조적으로 건물 주위의 경관건물의 외관건물의 연원 흥발의 역사공사의 전말청탁의 경위 등을 간략하게 서술하거나 생략하기도 한다. 이는 작품의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의도적으로 고안된 것이다.

Because the argument is solidified more by beginning to unfold the philosophical and political logic elaborately in order to secure his political location since the accommodation of Sung Confucianism of the post-Koryo dynasty, so he depends the Nujeong's surroundings spectacle that is premised on the argument or Nujeong's external appearance and the construction process to the description putting first the transmission of fact than the delineation appealing by sense. And the long-winded explanation based in detailed description gives aid to the prose writings through the effect that awakens the aesthetic emotion so that it may support the estimation of ' There was not blocked in the least because it seemed the wind to go and the water to flow ' and ' Its wide and haughty flowing seemed to flow the river water to the sea'. But in contrast with this, the contents that were regarded to be unnecessary were described curtly or omitted.

[哲學]

4

6,600원

전통 중국을 대표하는 道家와 儒家는 司馬遷이 이미 “세상에서 老子를 배우는 사람은 儒學을 배척하고, 儒學 역시 老子를 배척한다. 道가 같이 않으면 함께 할 수 없다.”라고 지적했듯이 道를 달리하는 상호 대립된 두 체계로 인식되어 왔다. 儒家는 道家를 虛無寂滅之道라고 비판했고, 道家 역시 儒家를 인위적인 개념체계로 인간을 구속하는 저급한 체계라고 비난하고 조롱했었다. 그러나 1993년 곽점촌 초묘에서 발굴된 <죽간본> 老子가 해독됨으로써 도가와 유가의 관계에 대한 기존 해석을 근본적으로 재고할 계기가 마련되었다. 현재의 道家와 儒家의 상호 비판은 오해와 이데올로기적 투쟁에서 비롯되었다는 판단하면서 본고는 우선 현행 <통행본> 老子에서 儒家의 덕목들에 대한 비판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점을 고찰하였다. <통행본>에 따르면 노자는 上德은 無形의 도를 그대도 자연스럽게 따름으로써 체득되는 것인데 비해, 유가의 仁義禮智와 같은 덕목들은 有形의 어떤 무엇을 덕으로 표상하여 固意로 혹은 외적 강제에 의해 억지로 실행하려고 비판한다. 그러나 통행본 노자에서 유가의 仁, 義, 禮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공자, 맹자 등이 주장한 仁, 義, 禮가 인간에게 본래 주어진 덕을 자발적이며, 무조건적으로 실현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잘못된 비판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현행 통행본에서 보이는 유가의 仁, 義, 禮 등과 같은 개념들에 대한 비판은 후대에 개념어를 바꾸거나 어구를 덧붙임으로써 의미가 변형된 것이라는 점을 증시할 것이다. 그래서 개작이전의 <죽간본>에서는 유가적 주요 개념어 즉 仁과 義에 대한 비판이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따라서 본래의 노자는 유가에 대한 대립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노자의 無爲之治는 그 근본 입장에서 볼 때 유가의 仁政(德治)과 전혀 상반되지 않고, 오히려 상호 부합한다는 것을 증시할 것이다. 흔히들 도가는 道 => 天地 => 萬物로 내려오는 형식을, 반면에 儒家는 天地에서 萬物로 내려오는 우주발생론적 체계를 취하고 있다고 간주되어 왔다. 그리고 도가는 無爲와 無爲政治를 주장하고, 仁을 최상의 덕목으로 하면서, 仁政(德治)을 주장한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도가와 유가는 이렇게 명백히 상호 대비되는 체계를 지닌 것으로 보이지만, 문자상의 차이를 捨象하고 그 내적 구조에서 고찰한다면 변별되지 않는다는 점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二十世紀末以來 在考古學的成果上, 準備再考慮 對說‘老子’人物和旣存通行本 老子(道德經). 這是帛書本老子(甲乙本)和郭店楚墓竹簡本老子. 于先 甲本(紀元前 二十七年 以前 戰國時代 末期) 和 乙本( 漢高祖 死亡的 紀元前 一九五年 以前 漢代初期) 構成了帛書本, 帛書本確認了几個重要內容 隻是, 跟孔子 同時代的原本老子的斷片郭店楚墓竹簡本老子發見的是, 對人物‘老子’和冊老子, 提示很多再考慮的可能性. 在竹簡本上, 我們可能確認 對于 1)內在 通行本老子的形而上學的萌芽, 2)沒有, 對別的學派, 特別對儒家的對決意識, 所以 3)現在 有反儒家的批判意識的現通行本 是, 在百家爭鳴的戰國時代時候, 加上寫, 還是 轉換主要槪念語. 我們知道 由于, 在竹簡本老子上, 單一著者‘老子’和‘孔子’是同時代人物, 因此 有可能性, 司馬遷, 在史記記錄內容中, 孔子問問題對‘禮’的老聃就是原本老子的著者. 原本老子被一個筆寫者 ‐ 在戰國時代中期以前 跟別的學派 有對立意識 ‐ 寫了加筆, 添削和變形主要槪念語. 所以出現了現通行本的內容一樣和分量也一樣的老子

5

張介賓 醫學의 儒學的 성격

성호준

동양고전학회 동양고전연구 제25집 2006.12 pp.11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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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0원

본 논문은 明代 醫家 景岳 張介賓의 유학적 성격에 대한 내용이다. 景岳은 儒醫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계승한 인물로 유학 특히 성리학적 입장에서 의학관을 세우고 의학이론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醫家이다. 儒醫라 한다면 儒家의 학설로 의학의 지도이념으로 삼고 의학이론과 기술에 정통한 의사라 할 수 있다. 儒醫는 宋代를 지나 金元代 및 明代에 본격적으로 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儒醫라는 명칭은 儒醫들의 의학적 목적이 다름 아니라 仁과 孝에 둔 것에서 연유하였고, 景岳도 致中和의 원리로 의학의 이상과 유학의 이상을 회통하고자 한 儒醫전통의 계승자라 할 수 있다. 그리고 景岳의 의학관을 유학적 시각으로 해석하는데, 그 근원에는 致中和와 中和位育이라는 유학의 이상이 자리하고 있고, 一氣와 도덕적 생명론을 바탕으로 天人相應이 또 다른 배경이다. 경악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적극적으로 설명하는데 易과 陰陽을 활용하였다. 이러한 景岳의 儒醫적 성향은 陰陽論을 통하여 적절하게 의학적으로 전개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扶陽抑陰의 논의를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신체와 사회 그리고 자연을 一氣를 바탕으로 유기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였고, 이를 유학 특히 성리학의 입장에서 해석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景岳 張介賓의 유학적 성격’은 중국의학의 인문학적 성격을 통하여 景岳을 비롯한 儒醫가 추구하고자 하였던 인간과 자연 그리고 사회의 도덕주체의 확립에 대한 의학적 전개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This paper discusses Confucian character of Zhang Jie-bin (張介賓). He was a medical scientist and actively inherited the tradition of Rui-Yi (儒醫, Confucian medicine). He established the view of medicine in the position of new-Confucian and developed the medical theory. Rui-Yi (儒醫) can be called as a well informed doctor specialized in medical theory and technologies with his own ideology based on Confucian. It is general that Rui-Yi (儒醫) had appeared in the times of Jin-Yuan Dynasty (金元代) and Ming-Dynasty (明代) after Song-Dynasty (宋代). We can assume that medical purpose of Rui-Yi (儒醫) had driven by none other than Ren (仁) and Xiao (孝). Zhang Jie-bin (張介賓) was also a successor of Rui-Yi (儒醫) tradition aimed at inheriting the ideology of medicine and Confucian. And an original source of the view of medicine of Zhang Jie-bin (張介賓) stemmed from the ideology called Zhezhonghe (致中和). The other sources are Yi-Chi (一氣) and Tian-reaxiangyin (天人相應) which was based on ethical life. To back up and explain the opinions positively, I-ching (易) and Yin-Yang (陰陽) are used. Zhang Jie-bin (張介賓)'s character based on Rui-Yi (儒醫) has been developed medically through Yin-Yang (陰陽) appropriately. Body, society and nature are systematically analyzed based on the theory of Fuyangyiyin (扶陽抑陰) and Yi-Chi (一氣) and the effort to understand them for the perspective of new-Confucian is outstanding.

6

한국 페미니즘학계의 유교 인식

안외순

동양고전학회 동양고전연구 제25집 2006.12 pp.134-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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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0원

이 논문은 기존 페미니즘 연구성과에 나타난 유교에 대한 인식 태도를 평가하고, 필자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목적이다. 먼저 기존 페미니즘 연구성과들에 나타난 유교에 대한 인식에 대한 평가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여 검토하였다. 첫째, 기본적으로 유교를 여성억압적이라고 간주, 페미니즘은 유교와 단절해야 한다는 시각이다(단절론). 둘째, ‘철학적 유교’가 지니는 보편적 가치 강조 차원에서 그 공유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현재 여성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는 역효과만 초래한다고 간주, 유교이론이나 개념을 해체시키고 재구성하는 것이 낫다는 시각이다(해체론). 셋째, 유교는 동서고금을 초월한 보편적 가치를 함의하고 있는 만큼 여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이러한 보편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며, 또 할 수 있다는 시각이다(조화론). 단절론은 대체로 사회문화론적 시각에서 과거 경험의 투영이 현재 순기능 가능성보다 역기능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 기각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해체론은 철학적, 원리적 차원에서 기존의 유가이론이 지닌 한계들을 검토하고 이를 해체시켜 새로운 이론을 모색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조화론은 설사 과거에 유가이론이 반페미니즘적 입장을 취했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관점에서 그것을 본질론으로 접근하여 친페미니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현실의 페미니즘적 이상을 실현하는데 유용하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검토 위에 필자는 이 세 입장 모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전략적 차원에서라도 조화론을 취하는 것이 유용하다는 주장을 전개하였다. 그것은 고전적 사유나 시원적 사유는 언제 어디서나 강력한 전통의 정당성을 발휘하는 동시에 시공을 초월한 개방적 해석의 가능성을 풍부하게 내포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현실에서 유교전통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반페미니즘적 행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유교 속에서 친페미니즘적 요소 혹은 가치들의 보편적 적용 가능성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즉 유가 전통의 이름으로 악습을 되풀이하거나 고수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유가적 원리는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야 한다. 요컨대 전략차원에서라도 현대 유교는 지속적인 재해석 작업을 통하여 ‘전통적 정당성’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반페미니즘적 논리를 기각시키고 대신 페미니즘적 이상을 실현하는 데 봉사할 수 있는 것이다.

This dissertation has an aim for reconsidering Korean feminists and the perceptions of Confucianism from the viewpoint of modern gender politics. It can be classified into three large groups. First, it is that the central spirit of Confucianism is contrary to the present feminism or the need of gender politics as well as such spirit can supply ideological power to solve the present sexual discrimination. Second, it is that a feminism has to dissolve Confucianism in spite of it's universal validity. Third, it is that the feministic need has to be justifiable under analyzing a theory about supporting people and the other theory about educating people in Virtue Politics of Confucianism.

[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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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民意 收斂에 관한 연구

이대희

동양고전학회 동양고전연구 제25집 2006.12 pp.16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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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00원

조선 시대 민의 수렴 장치로서 어사, 상소, 상언과 격쟁에 대해 살펴 보았다. 어사는 국왕에 의해 임명되어 임시적으로 특정 분야의 민의 파악에 활용되었다. 국민들에 의한 제도적 민의 표출 방법 중 상소는 포괄적 언로 개방 원칙에 따라 자격 제한 없이 언제, 어느 때라도 가능하였다. 또 평민들이 억울한 내용을 호소할 수 있는 장치로 두 가지가 있었는데 상언은 문자로, 격쟁은 징이나 북을 쳐서 민의를 표출하였다. 이런 제도들은 당시에도 중요한 민의 수렴 장치였지만, 현대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런 제도들은 어느 시대의 국정 운영에서나 매우 의미 있는 민의 수렴 장치로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민의 수렴을 하고자 하는 기본 정신을 계승하는 일이다. 민본 정치를 내세웠던 우리 조상들의 고귀한 국정 운영 원칙을 잘 살려 행정에 반영하는 것이다. 민의 수렴의 수월성이 증대했고, 수렴되는 민의의 양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지만, 항상 민의를 토대로 하고 이를 행정에 반영하려고 노력하는 정신은 크게 배울 점이다. 둘째, 여론 표출의 방법이 다양해지고 빈도도 크게 증가했다고 하지만 조선 시대의 상소처럼 활성화되어 있지는 못한 것 같다. 국민 대표 기관인 국회에서 다양한 민의가 대변되고 있지만, 여기서는 국민들의 민의가 자칫 黨利黨略에 의한 것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높다. 셋째, 국정 담당자들에 의해 조작된 여론에 대해서는 엄정한 대처 방법이 살아 있어야 한다. 誣告나 謀陷에 대해서는 사법부인 법원의 판결에 의해 처벌을 받지만, 잘못된 정보나 오도된 여론에 대해서는 방지 장치가 없다. 행정 담당자가 자기와 같은 의견만 듣고, 다른 의견에 대해서는 쉽게 폄하하는 수가 많은데 이에 대한 대처 방법이 필요하다.

This article analysed about 'eo-sa', 'sang so', 'sang eon' and 'geok jaeng' as the methods of the opinnion collection of the people in late Joseon dynasty. Eo-sa, king's special inspector, worked temporally for collecting people's opinnion. Sang-so was the method people could send their opinnion and message freely anytime and any where. But it could be used by literated people. Sang-eon and geok-jaeng were the methods people who felt chagrin sent their message directly to the king and executives. These methods gave us much important administrative meannings. Firstly, we have to succeed the spirit of the people oriented governing. Secondly, sang so was a good method any other than modern style opinnion representation methods.

8

일제 강점기 전기통신의 이용과 사회상의 변화

羅愛子

동양고전학회 동양고전연구 제25집 2006.12 pp.20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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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00원

9

일제시기 백화점과 일상소비문화

손정숙

동양고전학회 동양고전연구 제25집 2006.12 pp.237-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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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0원

[文化]

10

주자가례의 수용과 17세기 혼례의 양상 - 친영례를 중심으로

김경미

동양고전학회 동양고전연구 제25집 2006.12 pp.26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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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0원

이 글은 주자가례식 혼례가 정착되는 과정을 17세기 양반 가문에서의 혼례의 양상을 친영의 실행 여부를 통해 고찰한 것이다. 이를 위해 17세기 예론가의 예학서, 문인의 문집에 실린 혼례 관련 자료와 개인의 일생을 정리한 행장, 제문, 묘지명 및 당시의 일상생활을 반영하고 있는 17세기 서사문학 작품을 자료로 활용하였다. 지금까지의 연구가 주로 실록을 중심으로 하면서 일부 문집 자료를 활용해서 국가의 정책과 관련하여 전반적인 흐름을 보여주었다면, 이 연구는 보다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각 가문에서 실제로 행해진 혼례의 실상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서사문학 작품에 재현된 혼례의 양상까지 고려함으로써 주자가례식 혼례에 대한 당대인의 의식을 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중국식 혼례 모델로서 수용한 친영이 각 가문이 처한 형편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운용되었는가를 확인하는 동시에 흔히 17세기에도 여전히 친영은 불안정한 형태로 정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사대부 가문의 혼례에 친영이 온전히 실행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17세기 이후 전반적으로 친영제도가 확산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으며, 이는 여성의 종속화를 가져왔다. 즉 결혼한 여자는 확실하게 시집에 속하는 존재가 됨으로써 친정(親庭)에서의 지위가 약화된 것이다. 17세기를 대표하는 소설인 <사씨남정기>를 비롯하여 <소현성록> 등에 재현된 혼례의 양상은 이러한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주자가례식 혼례가 은폐한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었다.

This paper tried to examine the process of the settlement of Chinyoung by Jujagarai which is new marriage model in the 17th century, focusing on how Chinyoung practiced in the families of Yangban at that time. The materials which I relied on in this paper are the books of yehak which were written by the theorists of ye, the writings on marriage included in the collected works of the 17th century, haenjangs which were kind of biographies of Yangban, jemun, eptaphs inscribed on tombs, and narratives of the 17th century which reflect the everyday life of those days. While earlier studies have tended to focus on the sillok(實錄) and other collections and have tried to show the general policies on the national basis, this study attempted to present the real aspects of marriages practiced in the families of Yangban, analysing documents and materials which show concrete and everyday life of those days. In addition, this study tried to examine the aspects of marriages represented in the narratives in order to see how people of those days thought of Chinyoung by Jujagarai. From this study, I found that Chinyoung as the new marriage model was variously accepted among people according to the structures of their houses and their economic conditions, and that Chinyoung was not fully established in the 17th century. But in general, Chinyoung came to spread in the 17th century and resulted in the subordination of women to the house of their husbands. Married women were seen to absolutely belong to the house of their husbands, losing their positions in the house of their fathers. The aspects of marriages represented in the novels such as Sa Si Nam Jung Ki and So Hyun Sung Rok not only reflect these changes but also express the problem of sexuality which was suppressed by Jujagar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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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恩誦堂集』 출판 경위- 『海隣尺素』記事를 중심으로 -

鄭後洙

동양고전학회 동양고전연구 제25집 2006.12 pp.293-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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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0원

본고는 조선 후기 譯官 李尙迪의 문집인 은송당집의 구체적인 발간 모습을 자료 해석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제까지 밝혀진 사실을 토대로 은송당집(본집) 발간 경위를 다시 한 번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모든 출판 실무는 저자가 직접 관여하였다. 종이의 선택, 글자 모양이나 크기 선택, 書套 제작 여부의 결정, 校正 등등에 걸쳐 관여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물론 이 은송당집 출판 과정이 다른 조선인의 문집 출판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지는 속단할 수 없다. 둘째, 출판 기간은 40일-50일이 소요되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모든 출판 실무에 저자가 직접 관여하였으니, 그 기간은 당연히 저자가 북경에 머무는 시일을 초과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북경 사신 일행이 북경에 머무는 기간은 대략 40일 -50일 정도였으므로 출판에 소요되는 기간도 대략 이 정도였을 것이다. 물론 원고를 미리 보내고 나서 구체적인 실무를 볼 수도 있다는 가정도 있기는 하다. 이상적은 역관의 신분으로 12차례나 북경에 갔었지만 매번 북경에 머문 시일은 1회에 50일을 넘지 않았다. 모든 일은 이 기간 안에 해결해야만 했다. 문집 출판도 50일 이내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셋째, 출판 경비는 저자가 부담하였다. 譯官 李尙迪에게는 北京 내에 친구가 대단히 많았다. 그의 은송당집에 실린 <懷人詩>에만도 100여 명의 친우들이 등장인물로 소개되었을 정도였다. 그에게 편지를 보내온 인물만도 남아있는 것이 58명이나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경제적 도움은 없는 듯하다. 순전히 저자의 자담인 것으로 짐작된다.이제까지 추적해 본 은송당집의 구체적인 출판 경위가 과연 여타 문집 발간의 모든 경우에도 해당할 지는 미지수이지만 일단의 실마리는 제공하고 있다고 하겠다.

本稿爲糾明朝鮮後期譯官李尙迪(1803-1865)的文集≪恩誦堂集≫在北京刊行的具體的情況, 焦點在于資料解釋. 本硏究的底本資料是<海隣尺素>, 該書內容是一些中國知人們寄給李尙迪的信, 共收錄275封信, 是最可靠的資料. 這里說的具體的出版情況略述如下: ≪恩誦堂集≫是什麽時候發刊? 發刊的主管實務者是誰? 發刊的經費多少? 經費是誰來負擔? 怎樣的紙,誰來調達? 板刻地, 板刻者, 文集的 <序文>揷入過程, 發刊的全過程需要多長時日, 發行量, 文集的初刷以後, 再發行了沒有後刷和補刻等等. 現在考證了≪恩誦堂集≫ 發刊的情況, 略述如下: 第一, 所要出版實務, 著者親自來關與. 比如紙的選擇, 文字的樣子及大小選擇, 書套製作與否的決定, 校正 等等. 勿論, 這≪恩誦堂集≫的出版過程, 其他朝鮮人的文集出版過程和不一樣, 所以不能對比. 第二, 出版期間需要40日-50日. 上述所有的出版實務, 雖然著者親自來關與, 但是不能超過著者在北京留宿時日. 一般的話, 去北京的朝鮮使臣一行, 在北京留宿的期間是大略40日 -50日, 所以, 出版的時間也其期間內要處理. 當然, 假定預先送給原稿, 以後處理具體的實務, 但是這樣的可能性不大. 李尙迪, 譯官的身分來, 12次去北京, 每次留宿北京的時日, 不超過50日. 所有的事, 這期間內要處理. 因此, 文集的出版也一定要50日以內處理. 第三, 出版經費也著者親自來負擔. 譯官李尙迪在北京內知人很多. 他的≪恩誦堂集≫收錄了 <懷人詩>中, 紹介100餘名的親友. 寄給信的人也58名. 雖然知人多, 但是沒收他門的經濟的幇助. 料估 著者的自擔. 本論文的核心是朝鮮人在中國刊行文集的情況, 探索其具體的出版經緯. 上述探索的≪恩誦堂集≫的具體的出版經緯, 其他文集發刊的事情和不一樣, 難能可貴, 可見一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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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영릉신도비명의 체재에 관한 연구

홍현보

동양고전학회 동양고전연구 제25집 2006.12 pp.32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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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전하는 영릉신도비명의 원문들은 그 본래의 글과 체제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지금 남아있는 태종 신도비명(탁본)를 본보기로 삼아 원형을 유추코자 한다. 첫째, 세종 신도비의 제목은, 시호, 국호, 묘호, 존호를 이어 붙여 유추할 수 있다. 둘째, 태종 헌릉신도비명의 형식을 보면, 전체 36행이고 3자 내어쓴 곳부터 한 행은 115자로서, 내어쓰기 체재는 3자, 2자, 1자 등 3종류로 모두 15번 내어 썼다. 이 15회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의도적으로 끊어서 내어쓴 것이고, 하나는 행 끝부분에서 띄어써야 할 글자가 나오면 어쩔 수 없이 내어쓴 것이다. 의도적인 내어쓰기는 7번이었고, 어쩔 수 없이 내어쓴 것은, 정안군(1자 내어쓰기), 전하(2자 내어쓰기), 천자(3자 내어쓰기), 불상(1자 내어쓰기), 존호(2자 내어쓰기), 전하(2자 내어쓰기), 황증조(1자 내어쓰기), 아버지(1자 내어쓰기) 등 8가지로서 이들 앞 문장은 빈 공간이 없다. 셋째, 띄어쓰기 형식이다. 태종 헌릉신도비명(탁본)을 보면, 하늘(天)과 황제(皇帝, 帝), 황제로 해석되는 단어(睿恩)는 3자 띄어쓰기를 하였고, 2자 띄어쓰기한 단어는, 우리 임금, 왕비, 종묘 사직, 이씨, 유훈과 황제의 고명, 석(錫), 사(賜), 서울(명) 등이었으며, 1자 띄어쓰기한 단어도 정리하였다. 넷째, 비명의 지은이를 어떻게 적었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비명 글이 ‘겸성균대사성신정인지’이므로, 이를 토대로 당시 정인지의 직함을 합치어 유추해 본다. 그리고, 안평대군의 직함은 따로 적지 않고 ‘안평대군신용봉 교서’로만 적었을 것으로 본다. 다섯째, 세종 신도비는 지장통기에 ‘문종 원년(신미) 7월’이라 하였으니, 신도비에는 ‘景泰二年七月 日立石’라 하여 마지막 문장으로 기록하였으리라 유추해 본다. 여섯째, 행과 글자의 수이다. 지금 신도비에 남아 있는 글씨를 참조하여 태종 헌릉신도비명의 체제에 따라 정리하여 재구성하여 본다.

The remaining texts are not the same as the original inscription in its format. So, I'd like to infer the original format from the king Taejong's sindobimoung(an inscription on a tomb-stone). First, headline. It is likely that the headline consisted of 'siho(諡號), kugho(國號), myoho(廟號) and jonho(尊號)' in order. Second, system of the inscription. Taejong's sindobimoung consists of 36 lines, each of them has 115 characters. There are three types of outdentation and 15 times in all. Third, spacing words. There are three types in separating words. Fourth, format of writing the author. Fifth, date of erecting Sejong's sindobi(a tomb-stone). The date was on July first year of king munjong reign. '景泰二年七月 日立石' Sixth, numbers of line and character. The number of all the sindobimoung(an inscription on a tomb-stone) is presumed 4,985.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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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學會 彙報 외

동양고전학회 동양고전연구 제25집 2006.12 pp.351-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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