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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고대학 [DONG ASIA KODAEHAK ; The East Asian Ancient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동아시아고대학회 [The Association Of East Asian Ancient Studies]
  • pISSN
    1229-8298
  • 간기
    계간
  • 수록기간
    2000 ~ 2026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기타인문학
  • 십진분류
    KDC 910 DDC 950
제15집 (32건)
No
1

開會辭

강재철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15집 2007.06 pp.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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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일본은 한반도 및 중국 그리고 또한 남방의 여러 섬들과의 교류에 의해 이들 나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고대국가의 발전의 기틀을 삼았다. 이러한 것이 집약된 체제가 이른바 律令制社会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사회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이 바로 큐슈이다. 그러나 이렇듯 활발한 외래문화 수용의 창구였던 이곳도 9세기 말 이른바 견당사(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것)폐지로 인해 대륙과의 공식적인 교통이 끊어지면서 시들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오랜 동안 세월을 지내며 나름대로의 길을 터 문화 교류가 이어졌으니, 이는 보이지 않는 민간레벨의 교류가 활발했다는 의미이다. 중세 일본인의 고려 조선에 대한 인식은 무관심과 공포심으로 인한 무지와 독선적 이해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중세기에 이르러 남해(南海), 류우큐(오끼나와)를 비롯한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16세기에 큐슈를 둘러싼 국제환경의 변화는 나가사키라고 하는 새로운 창을 통해 큐슈를 또한 번 새롭게 탈바꿈을 시켰다. 그것은 바로 네덜란드 및 중국과의 무역이 행해 진 것인데, 이러한 것을 통해 새로운 외래문화가 유입이 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의 유입과 함께, 동아시아에 있어 구주사회의 특이한 존재로서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한 華橋사회가 형성되고 이들이 끼친 영향이 구주 여기저기에 그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되풀이하지만 중세 큐슈지방의 문화교류는 주로 물자교환의 형식으로 이뤄졌다. 당시 조선 측 입장에서는 왜구의 출몰로 피해가 심하긴 했지만 일본과의 관계도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통신사, 회찰사 명목 등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주지하다시피 그들은 대부분이 유능한 지식층으로서 대마를 통해 하카다(후쿠오카)로 상륙, 키타큐슈, 세토나이를 통해 에도까지 왕래하며 수준 높은 문화의 흔적을 남겼던 것이다. 또한 큐슈의 여러 다이묘(大名)들에 의해 수용된 그리스도교는 큐슈인에게 또 다른 외래문화의 충격으로서 영향을 주었는데 이러한 상황을 두려워한 막부는 결국 탄압을 하기 시작, 1639년 행해진 포르트갈 선박의 내항금지는 약 100년간의 활동을 금지시키는 결과가 되었으며 결국 그리스도교의 종말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나중에 일본의 근대화에 큰 기여를 했음은 물론이다.

Ancient Japan paved the way for the development as an ancient country by accepting foreign culture positively through the cultural exchange with Korea, China and many southern islands. This is what we called the constitutional society. It is Kyushyu that was the region which played an important role in establishing this society. However, the region which took in foreign cultures vigorously began to decline, because the official traffic with a continent was interrupted due to the abolition of dispatching envoys to Tang China late in the ninth century. Nevertheless, the cultural exchange continued for a long time and it means nongovernmental cultural exchange was open. Japanese recognition of Chosun was close to ignorance and selfrighteous understanding resulted from indifference and fear. However, the circumstances began to undergo a change by the expansion of territoriy to various areas such as the southern sea and Okinawa in the Middle Ages. In particular, the change of the international situation surrounding Kyushu in the sixteenth transformed Kyushu through Nagasaki. It is the new foreign culture that trade with China and the Netherlands brought through Nagasaki. With the inflow of the new culture, China town, a special exaneaence in Kyushyu, was formed, centering around Nagasaki and it influenced places in Kyushyu. Repeatedly speaking, the cultural exchange in Middle Age of Kyushyu was the barter system. At that time, Chosun felt the need for improving the relationship with Japan regardless of its frequent invasion. That is why Chosun Tongshinsa (조선통신사)and Hoichalsa(회찰사) were sent to Japan. Most of them who belonged to the intellectual class left high standard cultural traces while going through Hakada (Fukuoka), Tusima, Kita Kyushyu, Seto Inland Sea and Edo(Tokyo). In addition, the Christianity accepted by Daimyos(delegates) of Kyushyu had a impact on people in Kyushyu. The shogunate government began a suppression because of fear of the situation. The prohibition of a visit of a Portuguese fleet to Japan from 1639 had continued for about 100 years. As a result, Christianity came to the end. However the fatal series of event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Japanese modernization l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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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슈 북부 후쿠오카시의 노케에는 인연을 끊어주는 지장이 있다. 이는 어떤 여성이 시집을 가던 도중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한 나머지 신이 되어 자신과 같은 불행한 여성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자살해 버린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위해 사당을 짓고 오늘날까지 악연을 끊어주는 신앙으로서 전해진다는 유래를 가지고 있다. 주로 여기에서는 불륜을 포함한 남녀의 악연이 가장 많고, 그 뒤를 이어 질병, 음주, 금연 등의 건강문제, 그리고 채무, 가난등과 인연을 끊고 싶다는 경제적인 문제가 많았다. 그 밖에도 상대를 저주한다든가, 나쁜 버릇 또는 마음과 결별하려는 기원도 약간 있었다. 그리고 이 신앙은 관장하는 신이 원귀적인 성격을 가지고, 또 그것을 지탱하는 계층이 거의 여성이다. 또 오늘날에는 그 목적도 다양해지고, 기원의 방법에 있어서도 일정한 형식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특징으로서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은 결코 후쿠오카에만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이것은 일본 전역에서 보이며 역사적으로는 쿄토를 포함한 관서지역이 비교적 오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신사와 사원이 거의 관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에도시대의 불교사찰은 남편에게 학대받는 여성을 보호하기위해 법적으로 이혼할 수 있도록 협력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따라서 후쿠오카의 절연신앙은 일본전통의 민간신앙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과 대만, 그리고 중국 등 다른 나라에서는 인연을 맺어주는 민간신앙은 얼마든지 볼 수 있자만 일본처럼 인연을 끊어주는 절연신앙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따라서 절연신앙은 동아시아에 있어서 일본인만이 가지는 독특한 신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九州北部の福岡市の野芥には緣を切る地藏信仰がある􀫡これはある女性が嫁に行く途中􀫠旦那が死んだという話しを聞き, これに失望して死んで神になり􀫠自分のような不幸な夫婦の緣が出ないようにしたいと願を立て自殺してしまう􀫡これに地域民たちは彼女のために祠堂を立て, 今日まで惡い緣を切る信仰として伝わているという由來を持っている. 主にここでは不倫を含めた男女の惡緣が一番多く, それについで疾病,飮酒, 禁煙などの健康問題, それから債金と貧乏と縁を切りたいという經濟的な問題が多かった􀫡その他にも相對を呪うとか, 悪い癖と心と訣別したい祈願も若干あった􀫡それからこの信仰は􀫠管掌する神が􀫠寃鬼的な性格を持ち􀫠またそれを支える階層が殆んど女性であり􀫠現在は目的が多樣化されており􀫠祈願の方法においても決まった形式がない特徵を持っている. こうした信仰は決して福岡にしかないと言えない􀫡これは日本全域に見られるし􀫠歷史的には京都を含めた關西地域が比較的に長い歷史性を持っている􀫡そして宗敎的には神社と寺院が殆んど關與している􀫡そのなかでも江戸時代の佛敎寺刹は􀫠旦那に虐待される女性を保護するために法的に離婚できるように協力する役割もを果した􀫡従って福岡の絶緣信仰は日本傳統の民間信仰と軌を同じくしていると見られる. 韓國と臺灣, そして中國など ほかの国に緣を結ぶ民間信仰は􀫠いくらでも見つけられる􀫡しかし日本のように切緣信仰はなかなか見られない􀫡まさにこれは東アジアにおける日本人しか持たない獨特の信仰 だと言えざるを得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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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일본 규슈 해안도서의 역사문화와 동아시아라는 범주에서 규슈 해안도서의 언어를 음절구조를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아울러 일반적으로 개음절구조로 알려진 일본어에서 특이하게 폐음절구조로 나타나는 이 지역의 방언을 주변의 폐음절구조 언어인 한국어 및 중국어와 비교분석함으로써 음절구조변화의 프로세스를 규명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기에 이르렀다. 첫째, 폐음절구조의 성립은 협모음이 음절말에 위치하는 음운구조와 음성학적으로 협모음이 갖는 유체역학적인 성질과 관련이 깊으며, 각 언어에 있어서 음운체계의 정합성(整合性)에 맞추어 체계적인 변화가 이루어진다. 둘째, 폐음절구조의 성립과 음운구조와의 관계를 유형화하면 1) 전적으로 음운구조에 의해 폐음절화가 성립함, 2) 음운구조와 아울러 악센트구조에 의해 폐음절화가 성립함, 3) 음운구조가 악센트구조에 영향을 주어 폐음절화를 유발함,과 같이 3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셋째, 폐음절구조의 성립과 악센트구조와의 관계는 언어에 따라 필연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양자가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으며, 양자의 성립과정의 전후관계를 규명할 수 있게 되었다. 넷째, 이러한 음절구조의 변화는 음절(syllable)을 리듬의 단위로 하는 이른바 음절언어에서 주로 발생하며, 박(拍)을 단위로 하는 언어에서는 발생하기 어렵다.

本研究は日本の九州海岸島嶼の歴史文化と東アジアというカテゴリーの中で􀫠九州海岸島嶼の言語を音節構造を中心に考察したものである􀫡それから􀫠一般的に開音節構造として知られる日本語において珍しく閉音節構造を持つ􀫠この地域の方言を周辺の閉音節構造言語である韓国語および中国語と比較分析することによって􀫠音節構造の変化のプロセスを明らかにすることを目的にしている􀫡研究の結果􀫠次のようなことが明らかになった. 第一􀫠閉音節構造の成立は狭母音が音節末に位置するフォネーム構造と音声学的に狭母音が持つ流体力学的な性質と深く関わっており􀫠各言語におけるフォネーム体系の整合性に合わせて体系的な変化が起 こる. 第二􀫠閉音節構造の成立とフォネーム構造との関係を類型化すると􀫠1) もっぱらフォネーム構造によって閉音節化が成立する􀫠2) フォネーム構造と共にアクセント構造によって閉音節化が成立する􀫠3) フォネーム構造がアクセント構造に影響を与えて閉音節化を導き出す􀫠などのように3つのパターンに分けられる. 第三􀫠閉音節構造の成立とアクセント構造との関連は言語によって必然的な場合とそうでない場合とがあるのだが􀫠少なくとも両者が相互補完的な関係にあり􀫠両者の成立過程の前後関係を明らかに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 第四􀫠こうした音節構造の変化は音節(syllable)をリズムの単位とする􀫠いわゆるシラビーム言語で見られ􀫠モーラ(拍)を単位とする言語では起こりにく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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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九州) 해안도서(海岸島嶼)와 한국 설화의 전파

김화경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15집 2007.06 pp.11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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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한국의 신화가 일본의 규슈(九州) 지역으로 전파된 과정을 밝히기 위하여 마련되었다. 그래서 신화에 나타나는 현상을 중심으로 하여, 규슈 지역에 신라로부터 먼저 건너가서 살고 있던 집단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였다. 이런 추정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찌쿠센 풍토기(筑前風土記)􋺸에 나오는 아메노히보코(天日槍)의 후손에 관한 설화와, 􋺷부젠 풍토기(豊前風土記)􋺸에 나오는 다가와군(田川郡)의 가와라정(香春町)에 좌정한 신에 얽힌 설화를 제시하였다. 전자는 아메노히보코의 자손들이 왔다고 한 오리산을 경상북도 청도군의 오례산이라고 한 조 희승의 연구를 참조한 것이었다. 그리고 후자는 가와라 신사(香春神社)의 연기(緣起)를 기록한 자료와 가와라에 거주하는 신씨(秦氏) 씨족이 신라 계통의 도래인이라는 시마무라 하쓰요시(嶋村初吉)의 연구를 받아들여서, 이들 집단이 신라 경역(境域)에서 건너갔을 것으로 보았다. 또 이런 추정의 타당성을 보완하기 위해서 다가와군에서 발견된 신라 계통의 옛 기와들이 있다는 것도 밝혔다. 그런데 그 뒤에 들어와서 이렇게 신라로부터 건너가서 규슈 지역에 먼저 살고 있던 집단을 정복하고 국가의 형태를 만든 집단은 가야에서 건너간 집단이라는 사실을 구명하였다. 이러한 상정을 한 이유는 􋺷고사기(古事記)􋺸에 전해지는 일본의 천손 강림 신화(天孫降臨神話)에 니니기노미코토(邇邇藝命)의 강탄(降誕) 장소가 쿠시후루노타케(久士布流多氣)로, “이곳은 가라쿠니(韓國)를 바라보고 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쿠시후루노타케가 가락국(駕洛國)의 건국주인 수로왕(首露王)이 강탄한 구지봉(龜旨峯)과 관계를 가졌다는 선행 연구들의 도움을 받아, 이 집단이 가락국에서 건너갔다는 결론을 추출하였다.

This article is to make it clear that Korean myth came across to Kyushu region. It is estimated that a group of people crossed over from Silla lived Kyushu region, focusing on the phenomenon appeared in the Myth. To support the assumption, the posterity of Amenohiboko(天日槍) in Tzikusen Hudogi(筑前風土記) and the sitting god in Kawaracho (香春町), Takawagun(田川郡) are presented. The former is referred to Cho Hee-seung's theory that Orisan from which the posterity of Amenohiboko came is Oresan in Chungdo Gyongsangbukdo. The latter, accepting the study of Simamura Hatzyoshi(嶋村初吉) that materials written relation to Gawara Shrine(香春神社) and the Shin clan(秦氏) lived in Gawara were descended from Silla lineage, the group was assumed to cross over from Silla boundry. To make up for the validity, it also made clear that there are ancient tiles of Silla lineage found in Takawagun. It examined the fact that those who later came to the region conquered the former occupants who were from Sillar to Kyushu and found the state. The reason to bring up such result is that “the place looks at Garakuni(韓國)” written in Kojigi(古事記) as the descending place Niniginomigoto(邇邇藝命), the heavenly son of Japanese Myth. It was concluded that the group was from Garaguk, with referring to the prior study of Kusihurunotake(久士希流多氣) that the place related to King Suro, the founding father of Garakguk(駕洛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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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줄다리기의 승부방식, 놀이시기의 세시적 의미, 줄에 대한 인식, 마을 신앙적 의미를 통해 한국과 큐슈의 문화적 상호 관련성을 규명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다. 줄다리기는 쌀 재배 문화권에서 볏짚을 이용하는 놀이로, 한국 일본에서 공통으로 나타난다. 한반도는 중부 이남, 일본은 큐슈와 오키나와가 중심이다. 대체로 쌍줄이 많이 나타나고, 줄을 신성하게 여긴다. 그리고 음과 양의 조화를 통해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성행위로 인식한다. 따라서 마을 간의 대립에서는 이긴 편에 풍요가 온다고 여기며, 남녀 간 대립에서는 생산의 주체인 여성의 승리로 이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이에 비해 차이점도 드러난다. 한국에서는 외줄이 병행되는데, 이것은 당산나무와 입석에 감는 마을제의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줄에 대한 인식을 보면, 한국은 대체로 용으로 인식하며, 일본에서는 신의 신체(神體)인 뱀으로 인식하여, 재생을 통한 풍요 기원에 초점을 맞춘다. 줄다리기에 따르는 놀이로 일본은 씨름이 나타나지만, 한국은 풍물을 중심으로 달집태우기를 통한 불의 정화 놀이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놀이 시기는 한국이 1월 15일 달맞이와 함께 풍요 기원을 위한 신년제(新年祭)의 형태라면, 일본은 여름의 수확제로서, 팔월 보름이나 6∼7월에 수확과 기우를 기원하는 의식의 성격을 지닌다. 줄다리기를 통해 보면, 일본 큐슈 지역은 중국 양자강 이남과 한국 남부의 도작문화의 영향을 동시에 받았다고 보나, 특히 한국과의 관련성이 두드러진다고 볼 수 있다.

A “tug of war" is a kind of game in Korea and Japan which uses ropes made of rice straw. Rice straw is used since these countries are both areas which cultivate rice. This game is played in the southern and the middle parts of Korea and in Kyusyu and in the Okinawa areas of Japan. People usually regard a rope as a holy thing and also the game as an incantatory sexual activity during which the participants pray for abundance through the balance of Yin and Yang. These games in Korea and Japan have in common that they think the village which wins in a competition of village against village will have an abundant crop during the year. Furthermore, when men and women play together, the villagers intentionally let the women win, for they feel this will lead to an abundant crop. On the other hand, the games in Japan and Korea also have an important difference. Both countries use a double rope. However, in Korea the players sometimes make use of a single rope, for they believe it characterizes the sacrificial rite of the god Dangsan, represented by an idol which is made of wood. This symbolic rope is recognized as a dragon in Korea, while it is seen as a snake, which represents the body of another god, in Japan. Wrestling usually follows tugs of war in Japan, while the playing of folk music with folk instruments follows in Korea, as well as, in some areas, a representation of setting fire to a “moon-house". This ritual is held on the 15th of January in Korean, but is held in June or July in Japan. If we study the “tugs of war" in both countries, we can see that the Kyusyu Area in Japan is affected by the farming culture of both China and Korea. In addition, we see that the tugs of war in Japan are strongly related to those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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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九州 海岸島嶼와 동아시아의 교류

李在碩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15집 2007.06 pp.17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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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州(규슈) 해안 도서지역의 대외 교류는 지리적 특성상 韓半島와 中國 방면과의 교류가 주된 형태였다. 그 중에서도 한반도와의 교류는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對馬(쓰시마)島와 壱岐(이키) 라인을 매개로 하여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 간의 왕래가 시작되었으며 그 교류의 始原은 先史時代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본격적인 교류는 彌生(야요이)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전개되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교류로 인하여 비로소 야요이 시대 자체가 성립할 수 있었다. 농경문화의 전래와 청동기․철기문화의 이식으로 상징되는 일본열도의 야요이 문화는 종래의 縄文(죠몬) 문화에 기초해있던 왜인사회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그 과정에서 対馬를 비롯한 九州 北部 의 도서해안 지역은 큰 역할을 하였다. 4세기 이후 국가형성 단계의 일본열도는 주로 한반도 諸國으로부터 많은 先進文物을 제공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열도의 관문에 해당하는 九州 지역은 畿内(기나이) 야마토 王権에게 대단히 중요하였다. 야마토 조정은 畿内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 지역이 사적으로 한반도 諸國과 결탁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특히 신라에 대한 경계감은 대단하여 신라와의 사적 밀통 행위를 끊임없이 경계하였다. 6세기 초 신라와 九州 토착세력의 연계로 발발한 소위 磐井(이와이)의 乱, 9세기 이후의 新羅海賊의 출현과 그들과 결탁하려는 지방 세력의 등장 등의 사례는 畿內 지배층의 경계심이 기우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五道列島 및 九州 南部의 소위 南島 지역은 지리적 위치상 唐과의 교류관계에서 그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었다. 특히 遣唐使의 왕래에 이들 지역들은 遣唐船의 주된 寄港地로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중앙정권과의 공적인 관계와는 별도로 이들 도서지역의 現地住民과 新羅의 해상세력 및 唐의 商人들 사이에는 사적 결탁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九州の島嶼地域の對外交流は. して韓半島との交流と中國との交流といった両方面から行われてきた. に韓半島との交流はその歷史がひさしい. 的に韓半島ともっと近くあるのは對馬島であった. この對馬島—壱岐ラーインにそって. 島の南部と日本列島との往來が始まり. 交流の始原は先史時代にまで遡る. し. と列島とのより本格的な交流は . 彌生時代に入ってからのことであった. より正確に言えば. この交流によって始めて弥生時代そのものが成立したわけである. 農耕文化の傳來や靑銅器․鐵器文化の移植に象徵される日本列島の弥生文化は. 従来の縄文文化に基づいていた倭人社會に大きな變革をもたらした. その過程で. 対馬を始めとした九州北部の島嶼沿岸地域の役割は. 決して無視できないものであった. 紀以降の國家形成期における日本列島は. して韓半島の諸国から多くの先進文物を将来してきた. ため. 列島の關門にあたる九州地域はㆍ 畿内のヤマト王権にとって非常に重要であった. ․新羅․伽倻と日本列島の交流にさいして. やその沿岸部の架橋の役割というのは相変わらずであった. ト朝廷は. 畿内から遠く離れているこれらの地域が. 私的に向う側の政治勢力とくに新羅と密通することを絶えず警戒していた. 紀始め頃のいわゆる磐井の乱や. 紀以降の新羅海賊の出現や彼らと結び付いていく地方の在地勢力の登場は. いうことが中央の朝廷からすれば. な脅威になりかねないものであったことを示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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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州 海岸島嶼와 東아시아의 遺民

李根雨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15집 2007.06 pp.206-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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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동아시아에서 일본열도의 구주 지역으로 다수의 유민이 발생한 경우는, 첫째 일본열도에 벼농사를 전래한 이른바 야요이인의 이주, 둘째로는 5세기를 중심으로 한 가야인들의 도래, 셋째로는 7세기 중엽의 백제인들의 망명을 들 수 있다. 이처럼 다수의 유민이 발생하는 직접적인 이유로는 크게 전쟁과 기근을 들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전쟁과 기근의 배경으로는 기후변동이라는 자연환경의 변화를 지적할 수 있다. 야요이인의 이주의 경우, 중국 대륙에서 주가 건국된 이후의 정치적 변동, 특히 전국시대의 격렬한 동요가 한반도를 비롯한 주변지역에 영향을 미쳤고, 그러한 영향의 여파로 벼농사인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 특히 구주지역으로 이주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5세기를 중심으로 한 가야계 유민의 도래 역시, 5세기의 기후변동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5세기는 기후가 한랭한 시기였고, 한반도에서 한발, 누리, 기근 등이 빈번하였다. 삼국 간의 항쟁이나 왜의 신라 침입이 빈번하였던 것도 고분한랭기라고 불리는 5세기의 기후의 영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가야계 유민들은 須惠器의 祖形인 도질토기 및 제철 기술을 전래하였고, 온돌이나 화덕과 같은 유구를 남겼다. 백제인의 망명은 백강구전투를 치르고 난 663년 이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구주지역에 백제인들이 거주한 사례는 보이지 않으나, 近江國이나 武藏國 등에 다수의 백제인이 거주하게 되었다. 또한 왜의 조정 내에서 활동한 백제 관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한반도에 일본열도로 건너올 때, 우선 구주지역에 상륙하였을 것이다. 한편 왜는 신라와 당의 침공을 예상하고, 대마도를 비롯하여 구주 및 세토 내해를 따라서 산성을 축조하였는데, 이 또한 백제인들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There are three tides of migrants from continental East Asia to Japan archipelago for ancient period. First, rice farming people came over Kyushu area, especially Itazuke and Nabatake about 4th century B.C. They used the wood and stone tools to cultivate and crop. Recently, rice farming was discussed to be transmitted to Japan earlier than 4th century B.C.. But the earlier rice farming does not seem to affect the life style of Jomon period's Japan. The background of transmission can be the drastic change of climate in China and Korean peninsula. The second tide was occurred about 4-5th century A.D. The people of Kaya area flowed into Japan acrhipelago, and delivered several new techniques of iron and pottery. They built their house equipped with cooking stove and underfloor heating system. The radical change of climate for 4-5th century also affected the movement of Kaya people. During the period, the draught and large quantity of grasshopper visited Korean penninsula, and war and famine were repeated. The third tide resulted from the fall of Backjae. A large number of Backjae remainders emigrated to Japan. Among them, several scions of Backjae royal stock and high ranking officers like Satak Somyong(沙宅紹明) were included. They contributed greatly to transplant the advanced civilization and systems such as Chinese legal system. And In the Kyushu area, they built several mountain fortress walls like Mizuki, Onozo etc. Maybe they dwelled this area to preserve and defend the wa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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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3세기부터 7세기에 걸치고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한반도의 남해 연안지역과 큐슈 북부의 해안 지역에서 전개된 전쟁 즉, 포상 8국의 전쟁, 고구려와 왜의 전쟁, 반정전쟁, 백촌강의 전투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포상 8국의 전쟁은 3세기 초 公孫씨의 帶方郡 설치로 인한 낙랑군과 구야국을 연결하는 해상 루트의 혼란과 한반도 남해안 연안 세력과 가야세력과의 해상 교역권의 질서 재편을 둘러싼 것이었다. 광개토왕릉비로 보이는 백제를 매개로 한 고구려와 왜의 전쟁은, 중국 대륙의 불안정한 정세에 연동된 4세기 초 고구려의 낙랑․대방군 지역에의 군사적인 병합에 의한 한․일 지역사회의 새로운 질서 재편에 의한 결과였다. 6세기반정의 전쟁은 일본 열도의 大和정권과 九州 북부 연안의 筑紫정권과의 싸움이었지만, 가야와 신라, 백제와 신라의 가야지역에의 세력 확장이란 정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7세기에 전개된 백강전투는 당시의 동아시아 제국 즉, 신라와 당의 세력과 백제부흥군과 왜, 고구려 세력이 참가한 국제전이었다. 전쟁의 배경에는 중국 대륙의 당제국의 출현과 각 지역 정치 세력의 권력 집중을 매개로 한 통일 국가로의 정치적인 의지가 있었다. 이상의 전쟁은 한반도의 남해 해안의 도서와 일본 구주 북부 연안의 도서를 포함한 두 지역이 공유하는 해양이라고 하는 지리적인 공간을 무대로 전개되었지만, 한․일 지역세계에만 한정한 것은 아니고, 동아시아 세계의 정치, 외교 정세와도 밀접한 연결을 가져 전개된 특징이 있었던 것이다. 또, 이들 전쟁은 발 생 시기와 각 지역의 고대국가에의 성장과 발전, 사회경제적인 변화에 따라 관여한 정치세력의 변화는 있었지만, 대마도를 중간 기착지로서 생활을 해 온 한반도의 남해안과 큐슈 북부 연안의 도서 즉, 고대 한․일 해역세계 도서의 해상민들이 직접 관여하고 있었다고 하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고대 한일지역 세계는 바다라고 하는 자연적, 지리적인 장벽에 의해서 단절되고 있던 것은 아니고, 오히려 해양을 매개로 한 도서라는 네트워크를 통해서 고대 한․일 지역세계 나아가서는 고대 동아시아 세계와 역사적, 전통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本稿は3世紀から7世紀にかけて大韓海峡を挟んだ韓半島の南海沿岸地域と九州北部の海岸地域で展開された戦争すなわち􀫠浦上八国の戦争􀫠高句麗と倭の戦争􀫠磐井戦争􀫠白村江の戦いについて考察して見た􀫡浦上八国の戦争の場合は􀫠3世紀の初め􀫠公孫氏の帯方郡の設置によって樂浪郡と狗邪国を繋ぐ海上ルートの混乱がもたらされた結果􀫠韓半島の南海岸沿岸の勢力と加耶勢力との海上交易圏の秩序再編を取り囲んでのことであったと言える􀫡広開土王陵碑に見える百済を媒介とした高句麗と倭との戦争は􀫠中国大陸の不安定な情勢に連動された4世紀初めの高句麗の樂浪․帯方郡地域への軍事的な併合による韓日地域社会の新しい秩序再編による結果であったと見られる􀫡6世紀磐井の戦争は日本列島の大和 勢力と九州北部沿岸の筑紫政権との戦いであったが􀫠これらの戦争には加耶と新羅ひいては高句麗南下による百済と新羅の加耶地域への勢力拡張という古代韓国の政治􀫠軍事的な状況と密接な関係があったと見られる􀫡7世紀に展開された白江の戦いは当時の東アジアの諸国すなわち􀫠新羅と唐の政治勢力と百済復興軍․倭․高句麗の政治勢力が参加した国際的戦争であった􀫡この戦争の背景には中国大陸における唐帝国の出現と各地域政治勢力の権力集中を媒介とした統一国家の政治的な意志があったと言える􀫡 このように􀫠これらの戦争は韓半島の南海海岸の諸島と日本九州の北部沿岸の諸島を含む両地域が共有する海洋という地理的な空間を舞台に展開されたが􀫠韓日地域世界のみに限ったのではなく􀫠東アジア世界の政治􀫠外交情勢とも密接な繋がりを持って展開されたという特徴をもっていると言える􀫡また􀫠これらの戦争は発生時期と􀫠各地域の古代国家への成長と発展􀫠社会経済的な変化に連れて関与した政治勢力の変化はあったが􀫠対馬島を中間寄着地として生活をしてきた韓半島の南海岸と九州北部沿岸の諸島すなわち􀫠古代韓日海域世界の諸島の海上民たちが直接関与していたという点である􀫡このような視点から見る時􀫠古代韓日地域世界は海という自然的􀫠地理的な障壁によって断絶されていたの ではなく􀫠むしろ海洋を媒介にした諸島というネットワークを通じて古代韓日地域世界ひいては古代東アジア世界と歴史的․伝統的に繋がれていたと見ら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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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규슈의 해안도서는 예로부터 우리나라와의 접촉이 많았다. 백촌강 전투 패배 후 야마토정권은 당, 신라 연합군의 일본침공에 대비하기 위하여 기타규슈를 중심으로 한 방위강화가 절실해 지고 이러한 대비와 조치로써 택해진 곳이 쓰시마와 이키로써 그 위치상 필연적인 그리고 운명적인 전쟁과 분쟁의 산실이 되었다. 츠쿠시는 당시 규슈를 지칭하고 있었는데 규슈를 총괄 지휘하던 다자이후가 설치되어 있던 곳이다. 문학적으로 보면 􋺷만요슈􋺸에 츠쿠시, 쓰시마, 이키등 북규슈와 관련하여 관동 지방에서 징집된 병사의 노래가 후반부에 많이 실려 있다. 한편 츠쿠시가 일본왕조문학 최고작품인 􋺷겐지모노가타리􋺸에 등장한다. 주인공 겐지는 츠쿠시에서 성장한 짧고도 안타까운 인연을 맺은 유가오의 딸타마카츠라를 각별히 생각한다. 츠쿠시는 타마카츠라를 통해 운명의 땅, 도피의 땅에서 성장의 땅, 희망의 땅으로 도약되고 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예쁘게 성장하여 당시의 왕조의 중심세계로 신분이 향상됨으로써 츠쿠시는 성장지로서의 포용력을 보여주고 있다.

北九州の海岸島嶼は古代から韓国との交流が盛んであったが􀫠中でも􀫠両者を繋ぐ通路として一層密接な関係を維持してきた 対馬􀫠壱岐􀫠 筑紫の地が担ってきた地理的役割や位相について􀫠􋺷万葉集􋺸􀀠􋺷源氏物語􋺸 などの古代文学を通して探っていく􀫡古代において􀫠権力層は西に広が る九州地域に対しては􀫠東の東国とは比べられないほどの関心を寄せ􀫠 この地に対し畿内と同一水準の知識を得ていた􀫡それは􀫠白村江の敗戦 以後􀫠大和政権が唐􀫠新羅連合軍の日本への侵攻を恐れ􀫠防衛強化の必 要上􀫠ここに様々な防備や措置を取らざえるを得なくなったことによ る􀫡このような歴史的􎊊地理的条件により􀫠対策と措置の地として選ば れたのが対馬􀫠壱岐であり􀫠ここが必然的􀫠運命的に戦争と紛争の地と なったことをも意味している􀫡 筑紫とは現在の九州を指し􀫠この地を総括指揮した大宰府が設置され ていた􀫡なお􀫠大宰府は九州と壱岐􀫠対馬の二島を管轄し􀫠外国からの 侵略に備えて外交の業務も担当していた􀫡 日本最古の歌集である􋺷万葉集􋺸には􀫠東国から国土防衛のため遠く壱 岐􀫠対馬などの北九州へ派遣された防人の歌が多数載せられている􀫡こ れらの作品にはその出身地である東国の方言や風習が詠みこまれ􀫠歴史 的にも貴重な資料として評価されている􀫡歌の内容は防人が家族と別れ た寂しさや残してきた家族の無事を祈る心などが主となっている􀫡採録 者の大伴家持は家族と離れて過ごす彼らに同情を寄せ􀫠忠誠を誓う作品 よりもむしろ家族を偲んで離別する痛みなどを高く評価していたらしい􀫡彼が主に感銘を受けたのは別れの悲しさであったが􀫠その舞台と なったのが􀫠正に対馬􀫠壱岐という北九州の地域であった􀫡 􋺷源氏物語􋺸は日本の古代王朝の最盛期である平安時代の最高傑作であ る􀫡作品の主人公光源氏は優れた容貌と才能をもって天皇の息子という 最高の運命を持って生まれた􀫡ここにおいて􀫠「筑紫」は彼と短く切ない 縁を結んだ恋人である夕顔の娘玉鬘が成長した処であった􀫡光源氏は玉 鬘を心から愛でその世話をしていく􀫡ここでの「筑紫」とは􀫠その地にお いて美しく育ち􀫠王朝という中心的世界に身分的に向上した玉鬘の運命 を通して􀫠逃避の地から成長の地􀫠希望の地へと変わっていったのであ る􀫡このように􀫠北九州の対馬􀫠壱岐􀫠筑紫は􀫠奈良時代までは多くの 侵略を受け􀫠防備の地域として受難を受けた地として描かれているので あるが􀫠平安時代においては成長と希望の地として新たな様相を呈して いることが􀫠古典文学を通して究明さ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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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에서 최초로 벌어진 국제전인 백촌강 전투의 여파로 당시 일본인 야마토의 병사들은 규슈(九州)의 방위를 명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인 􋺷만엽집(万葉集)􋺸에 84수나 되는 노래를 남긴다. 병사의 노래(防人歌)가 그것이다. 병사의 노래에는 충군애국을 노래한 노래와 강제 징집을 원망하는 노래가 있다. 하지만 이런 노래는 소수에 지나지 않고, 병사의 노래는 대부분의 노래가 가족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노래이다. 그런데 지난 아시아․태평양전쟁기에 병사의 노래는 학교교육 등에 의해 천황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노래로써 일본 사회에 널리 퍼진다. 그리고 병사의 노래는 전의를 고취시키는 데 이용됨으로써 ‘전쟁문학’으로 탄생하게 된다. 이와 같이 ‘예술의 정치화’를 위해 전쟁협력자들이 취한 것은 다름 아니 ‘배제의 원리’였다. 즉 병사의 노래가 가지고 있는 노래의 세계 가운데, 천황에 대한 찬미를 읊은 노래만 선택하고 가족과의 이별을 노래한 작품이나 병사 징집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작품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그런 작동 원리를 무엇보다도 잘 나타내는 것이 바로 병사의 노래가 만들어졌던 당시 그들의 노래를 편집하면서 그들의 아픔을 읊었던 오토모노 야카모치의 세 장가작품의 존재이다.

東アジアで行われた「白村江の戦い」の影響によって􀫠天平勝宝七(七五五)年防人たちは徴兵されるようになる􀫡彼らは勤務地に向かう間に歌を歌ったが􀫠それが万葉集に八四首も残されている􀫡防人歌には忠君愛国を歌った作品や強制徴集に対する反発を歌った作品もあるが􀫠それらの数は多くない􀫡むしろ防人歌のほとんどを占めるものは􀫠家族との別れを悲しむ歌々である􀫡一方􀫠万葉集には防人の悲別に共感した大伴家持の作品(巻20․四三三一~四三三三􀫠巻20․四三九八~四四〇〇􀫠巻20․四四〇八~四四一二)も載せられている. ところで􀫠アジア․太平洋戦争期に学校教育などによって􀫠防人歌は天皇に忠誠を誓う歌としてのみ日本社会に広がるようになり􀫠そして戦意を高ぶらせる戦争文学として生まれ変わるようになる􀫡こうした「芸術の政治化」のために􀫠戦争協力者が用いた方法とは􀫠ほかならぬ「排除の原理」だった􀫡すなわち防人歌が持っているいろいろな性格のうち􀫠「大君の命畏み」的発想を有する歌だけを取り上げ􀫠その他の性格を帯びている作品を排除したのである􀫡それらには家族との悲別を詠んだ歌や家族の実情を無視して徵召する現実を批判する歌などが入っている. つまり􀫠防人の悲別をテーマとした大伴家持の三つの長歌作品は􀫠「防人歌の政治化」のために用いられた方法が「排除の原理」だったということをよく表せ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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總評

申東旭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15집 2007.06 pp.348-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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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眉巖日記』에 나타난 민속 일고찰

宋宰鏞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15집 2007.06 pp.352-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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眉巖 柳希春(1513~1577)은 宣祖 때의 名臣․學者․文人으로서, 그의 『眉巖日記』(11책)는 정치․경제․사회․문화․역사․사상․어문학․민속학적으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특히 􋺷眉巖日記􋺸는 1500년대의 민속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러므로 필자는 『眉巖日記』에 나타난 의례, 특히 관․ 혼․상․제례와 세시풍속과 민속놀이 등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하였다. 본고에서 논의한 사항들을 종합하여 결론으로 삼으면 다음과 같다. 유희춘의 『眉巖日記』를 보면, 관․혼․상․제례의 경우 朱子家禮를 따르기는 했으나 완전히 정착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것은 관례를 행할 때 약식으로 하거나, 士大夫家에서 조차 관례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상례에서는 古禮를 따르는 경우도 있었다. 즉, 襲과 小殮을 첫째 날에 한꺼번에 행하거나, 弔問할 때 成服을 하지 않았는데도 變服을 안 하고 護喪의 얼굴만 보고 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제례 때 진설(특히 제사 상 차림)이나 성묘 순서, 奉祀 代數 등에서 주자가례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로써 보건대 당시까지 주자가례의 일반화가 덜된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眉巖日記』에는 당시의 의례와 禮俗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기록들이 많은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시풍속과 민속놀이의 경우 관련 각종 기록 등을 많이 남기고 있어 민속학적으로 높이 평가된다. 그 중에서 특히 立春裸耕과 大小男兒의 귀고리 다는 민속에 대한 기록은 『眉巖日記』에만 볼 수 있어 주목된다. 이밖에도 오산잡희․채봉놀이․산대놀이 등에 대한 기록 역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결과 『眉巖日記』는 당시의 禮俗과 의례절차, 세시풍속과 각종 민속놀이 등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바, 당시의 민속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문헌 자료로 평가된다. 그러므로 『眉巖日記』는 16세기의 대표적인 민속 관련문헌 자료로 민속학적으로도 그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아울러 『眉巖日記』에 기록된 민속은 임진왜란 이후의 민속, 나아가 조선 후기의 민속이 어떻게 변모되었는지를 이들 민속들과 비교하여 추찰해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Mi-am Yoo, Hee-chun was a well-known statesman, scholar and a literary man. Mi-am Ilgi(11 books) are worth in many scientific side. Especially, Mi-am Ilgi is a very important researching material to understand 15th century folk customs. So I discussed about ceremonies, season's customs and folk games. As a result of this thesis, the customary formalities of a family followed Joojagarye but was not settled as shown at Mi-am Ilgi. It is proved by the coming-of-age ceremony was hold informality and omitted at the official families. I could realize from it that Joojagarye was not popular till that time. It is worth of researching Mi-am Ilgi because it has a lot of ceremony records of the time. There are many only records about season's customs and folk games such as a man with earing and Ipchunnakyung in Mi-am Ilgi. As shown as above, orders of royal and general ceremony, season's customs and many folk games of the time are recorded at Mi-am Ilgi. So the book is very important at the point of researching folk customs of the time. In conclusion, Mi-am Ilgi includes many records of 16th century folk customs and it is a representative researching material. In addition to this, we can compare folk customs between the time and later ages and study its transfiguration by 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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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스콧(Elspet Robertson Keith Scott),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 金台俊 (1905~1949)의 전근대와 변별된 근대 􋺷구운몽􋺸􀀠읽기를 분 석했다. 근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서구 독자를 위한 􋺷구운몽􋺸􀀠서설’, ‘􋺷구운몽􋺸􀀠영역본’, ‘조선소설사 기술을 위한 􋺷구운몽􋺸􀀠연구’라는 글쓰기 형태로 􋺷구운 몽􋺸에 대한 이들의 독서체험․활동이 표출되었다. 이들의 􋺷구운몽􋺸􀀠읽기는 ‘동양 과 서양’, ‘전근대와 근대’, ‘한국어와 영어’, ‘남성과 여성’이란 인식론적 구별에 의거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한 언어에서 또 다른 언어로의 번역’을 상정하는 바 탕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것이었다. 스콧에게 있어 􋺷구운몽􋺸은 ‘사랑이야기’(로맨스)였으며, 텍스트 속 남녀관계 는 서구의 ‘러브’와 동등한 층위로 가치를 지닌 ‘사랑’이었다. 스콧은 􋺷구운몽􋺸􀀠독 서체험을 통해, 그가 들을 수 없는 동양 여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목소리’ 그리고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자율성(혹은 주체성)을 지닌 여 성형상 그리고 결혼에 있어 ‘Love와 등가물적인 련’관념(낭만적 사랑)을 발견 했다. 그러나 그러한 독서체험의 전제에는 게일의 텍스트 변용이 있었다. 미성년 의 성진을 성년의 성진으로 변모시키고, ‘연애의 통로가 없이 직접적으로 이루어 지는 육체적인 정사’를 제거함으로 『구운몽』의 사랑을 ‘낭만적 사랑’에 근접한 것으로 번역했다. 이러한 『구운몽』의 일부다처제 속 여성형상은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전근대의 동양 그러나 근대에 와서도 지속되는 전근대의 공간, 이상화된『구운몽』의 시공간 중국에 놓여 있기에 더욱더 정당화되었고, 스콧의 독서체험의 표출을 일으킨 셈이다. 그 속에는 『구운몽』속에 내재되어 있는 서구와는 다 른 남녀관계를 이해하며 읽어낸 게일의 독서체험이 있었다. 김태준은 『구운몽』이 일부다처주의를 정당화한다는 점을 비판했다. 스콧이 발견한 마음속의 불만을 말하는 『구운몽』의 여성들 자신도 불교적 숙명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 그는 파악했으며, 개별 여성들의 형상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서 일부다처주의는 불교적 숙명론과 함께 귀족과 노비란 계급적 모순을 지닌 극복해야할 동양의 과거로 존재했는데, 『구운몽』은 이를 정당화해주는 텍스트였다. 이런 김태준에게 􋺷구운몽􋺸은 신비로운 동양의 이문화를 말해주는 텍스트로만 규정되어서는 조선의 고전소설일 수가 없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조건은 ‘조선말’의 중요성을 강조한 국민문학가 김만중이란 텍스트 외부에 놓인 조건이었으며, 이것이 게일, 스콧의 『구운몽』읽기와 변별되는 김태준의 『구운몽』읽기였다.

本稿は』 Elspet Robertson Keith Scott, James Scarth Gale(1863~1937), 金台俊 (1905~1949)の前近代と辨別される近代の『九雲夢』の読みについて考察したものである􀫡近代以前には存在していなかった欧米の讀者のための『九雲夢』の序說 『九雲夢』の英譯本􎊊朝鮮小說史記述のための「『九雲夢』の硏究という書き物の形態で『九雲夢』について彼らの讀書體驗と活動が表現されている. 彼らの『九雲夢』の読みは􀫠「東洋と西洋」․「‘前近代と近代」․「韓國語と英語」․「男性と女性」という認識論的な區別に依據しているという点􀫠そして一つの言語からまた他の言語への翻訳を想像の枠の中で行なっていることで近代的であつたと言える. Scottにとっては『九雲夢』は􀫠「恋の物語り(ロマンス)」であって,テキストの中て男女關係は􀫠欧米の「Love」と同じような 價値をもった「Love」であった􀫡Scottは􋺷九雲夢􋺸の讀書體驗を通じて』 彼女が知らない東洋女性のことを知ることができた􀫡そして「自分の声」「‘自分の選擇」という自律性(あるいは主體性)をもった女性形象􀫠そして結婚について「Loveと等價物的な恋愛觀念(漫的な恋)」を見つけた􀫡しかし􀫠そのような讀書體驗の前提にはGaleのテキストが変容されていた』 未成年の楊少遊を成 年の楊少遊に變貌させて􀫠「恋愛の過程がなくて直接する肉體的な情事」を除去することで 『九雲夢』の恋を「浪漫的の恋」に 飜譯した. このような『九雲夢』の一夫多妻制についての女性形象は􀫠彼らには理解できない前近代の東洋􀫠ところが􀫠􀁇 近代になっても持續される前近代の空間􀫠理想化された『九雲夢』の視空間は中國にあるからもっと正當化され』 Scottの讀書體驗の元を成している』 その中には『九雲夢』の中に 存在されている欧米とは違った男女關係を理解して読んだGaleの讀書體驗があった. 金台俊は『九雲夢』が一夫多妻主義を正當化されたことを批判した􀫡Scottが發見した心の中に不滿をいう『九雲夢』の女性たちの自身も佛敎的宿命論から逃れられない存在と彼は把握して􀫠個別女性たちの形象は重要な問題ではなかった』 ここで一夫多妻主義は􀫠佛敎的宿命論と共に貴族と奴婢という階級的矛盾した克復すべき東洋の過去は存在した􀫡彼に『九雲夢』は􀫠神秘的な東洋の異文化を語ってくれるテキストだけに規定されている朝鮮の古典小說にならなかった􀫡それを可能するようにした 條件は「朝鮮の言葉」の重要性を强調した國民文學家金萬重というテキストの外部に対する條件だったので』 Gale, Scottの『九雲夢』の読みに辨別される『九雲夢』の読みであったと言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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頭蓋變形과 巫의 通天意識

金仁喜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15집 2007.06 pp.422-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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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고대 동이족 지역에서 유행한 두개변형습속의 분포권, 양상, 의미에 대하여 살펴본 논문으로 주로 초나라문화와 비교연구를 진행하였다.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편두, 발치, 구함구는 따원코우문화인들 사이에서 유행한 습속으로 두개 변형이란 개념으로 포괄하여 설명하여야 한다. 둘째, 두개변형의 분포권과 동이문화권을 비교한 결과 두개변형은 동이문화의 확산과 함께 주변지역으로 전파되었는데, 특히 서쪽으로는 중국의 후베이성, 동쪽으로는 한국의 남부, 일본에서 발견된다. 셋째, 先楚문화는 동이족의 문화와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초문화속에 서도 강한 동이문화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어 초나라 무속과 관련된 자료를 이용해 동이족의 두개변형습속을 이해할 수 있다. 넷째, 동이족의 신인 복희, 치우, 전욱, 후직은 모두 두개변형을 하였다. 다섯째, 한국의 시조모인 유화와 알영, 그리고 신라의 왕들에게서도 두개변형이 발견된다. 여섯째, 문헌과 유물을 통해 발견되는 우인들, 즉 복희, 치우, 전욱, 후직, 우인, 환두, 신라토우상의 우인, 유화, 알영은 모두 새의 모습으로 변장한 무당이며 동시에 신이다. 일곱째, 초나라 유물과 문헌자료를 통해 볼 때 무당들은 두개변형과 그 밖의 장식물을 이용해 신인 새의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舞를 통하여 강신하였으며 전욱은 무당의 시조라 할 수 있다. 여덟째, 동이문화의 새숭배는 태양조숭배라는 특징을 갖는다. 아홉째, 두개변형을 한 이유는 어둠에 대한 공포증을 이기기 위한 것으로 새의 영혼을 빙의함으로써 태양신과 神人合一할 수 있었다. 따라서 두개변형=새=태양=신=무당=두개변형의 관계로 나타낼 수 있다. 열째, 공포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엑스타시체험에 대한 욕구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두개변형을 하게 하였던 근본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론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문제점이 남는다. 첫째, 따원코우인과 예안리인은 편두의 부위가 다르다. 따원코우인은 침부를 편평하게 하였고 예안리인은 이마를 후퇴시켰다. 아무르강의 꼰돈 유적에서 발견된 편두 인물상의 경우 앞이마가 후퇴하였다는 측면에서 한국의 예안리와 같은 예에 해당한다. 따원코우의 경우 두개변형을 한 모습이 전체적으로 방형인데 비해 예안리의 경우 턱쪽이 좁고 이마가 후퇴하여 전체적으로 두형이 긴 형태를 보여 두 지역의 두개변형한 모습이 다르다. 둘째, 본고에서 따원코우의 두개변형은 일반인들도 하였으나 후기에 와서는 무당계층에 의해 전승된 것으로 보았는데 예안리의 경우 4세기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 사이에서 편두가 발견된다. 셋째, 따원코우문화와 롱산문화에서 발견되는 편두와 발치는 예안리에 비해 시간적으로 2000년 이상 앞서 있다. 이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면 두 문화 간의 관련성이 이주 또는 전파, 접촉, 교류 중 어느 것에 의한 것인지를 밝힐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위의 문제점들은 2000년의 공백을 메워줄 고고학적 발굴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本文对在古代东夷地区曾经流行过的人工头骨变形习俗的分布圈, 局面, 意思进行了研究, 特别东夷文化, 楚文化, 古代韩国文化之间进行了比较研究. 研究的成果如下 ; 第一, 扁头, 拔牙, 口含球习俗是流行在大汶口文化人当中, 应以人工头骨变形概念来说明这种习俗的原因. 第二, 对人工头骨变形分布圈和东夷文化圈进行比较研究结果, 这种现象跟东夷文化的扩散有联系, 特别是发现在中国湖北和韩国南部. 第三, 先楚文化和东夷文化的关系非常密切, 而且楚文化里面可以发现东夷文化的因素. 于是可以楚国的巫文化来解释东夷族的人工头骨变形习俗. 第四, 东夷神伏羲, 蚩尤, 颛頊, 后稷都做了人工头骨变形. 第五, 韩国始祖母柳花, 阏英和新罗王们也做了人工头骨变形. 第六, 文献和考古上发现的羽人们, 则伏羲, 蚩尤, 颛頊, 后稷, 驩头, 新罗土器上的羽人, 柳花, 阏英是假装成鸟的巫同时也神. 第七, 通过看楚国文物和文献资料, 巫师们利用人工头骨变形和用装饰品扮成鸟的摸样, 还通过跳舞来使神灵附在巫身上, 颛頊是巫的始祖. 第八, 东夷文化中的鸟崇拜具有太阳鸟崇拜特征. 第九, 人工头骨变形的原因是要克服恐惧感, 被鸟灵魂凭依(possession)能过跟太阳神神人合一. 所以可以说人工头骨变形=鸟=太阳=神=巫=人工头骨变形. 第十, 恐惧和对它反抗的心理出现的ecstasy体验的要求是他们可以忍受痛苦做人工头骨变形的主要原因.但是有以上结论, 还是留下有些问题. 第一, 大汶口人和礼安里人的压扁头的部位不一样. 大汶口人是压枕部为平的, 礼安里人是压前额为平的. 最近韩国考古学家在黑龙江流域Kondon 遗址发现的人物像也是压了前额, 他们属于礼安里人一个种类. 第二, 本文认为大汶口的普通人民做人工头骨变形, 后来巫师集团继承这种习俗. 可是礼安里人是公元4世纪的人, 还是普通老百姓做人工头骨变形,需要解释这个原因. 第三, 大汶口文化和龙山文化出现的扁头和拔牙习俗比韩国礼安里早2000年. 如果能说明2000年时间上的空白, 可以解决两个文化之间的共同点是因传播或迁徙的结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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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新羅使人의 歌群에 나타난 空間觀

李相俊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15집 2007.06 pp.461-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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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世紀의 야마토(大和)는 当時 東아시아의 中心이었던 唐나라와 국제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新羅와 渤海를 中心으로 하는 国際関係를 維持하는 새로운 國際的인 空間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와의 관계는 쌍방 신라사와 견신라사를 활발히 파견하고 있었지만, 양국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않았다. 본 論文에서는 145首에 達하는 遣新羅使人들의 歌群을 통해서, 新羅와 大和를 兩軸으로 형성된 空間이 어떻게 형상화되어 있는가를 중심으로 있는가? 를 중심으로, 견신라사인으로서의 사명감과 자부심 유무, 初秋歸京 집착 등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본 歌群을 통해서 신라의 실상은 알 수 없지만, 나라시대(奈良時代)의 大和人들은 新羅라고 하는 나라는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어, 그곳으로 여행하기는 힘든 나라였고, 白色을 중히 여기는 나라(国)로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의하여, 「新羅」를 「시라키 : シラき」라고 읽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大和는 「皇都인 奈良」와 「지방(鄙)」으로 되어 있으며, 그 경계가 「아카시해협(아카시노토 : 明石の門)」이다. 「奈良」는 하늘에 흰 구름이 아름다운 곳이고, 色彩가 선명하고 훌륭한 宮에서 天皇이 살고 있는 皇都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여인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매미 울음소리, 기러기, 창공의 달」 등을 통하여, 皇都를 떠난 使人들과 皇都는 연결되는 것이다. 皇都를 「아오니요시 나라노 미야코(あをによし奈良の都)」(15/3602歌, 15/3612歌)라고 형상화하여 「皇都인 奈良」를 賛美함과 더불어, 「지방(鄙)」 「아마자카루 : 天離る」(15/3608歌, 15/3698歌)라고 하는 枕詞를 붙여서 「아마자카루 히나(天離る鄙)」라고 형상화하여 지방(鄙)을 軽視하는 등, 皇都와 地方의 차별의식을 견신라사인들의 歌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皇都인 奈良는 견신라사인들에게 있어서 皇都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언제나 빨리 돌아가고 싶은 그리운 고향 같은 공간이지만, 그들은 신라에서 추방당하는 등 외교적인 실패에 의해 奈良에 가까이 돌아와서도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흰 파도가 높이 일렁이는 거친 바다를 위험하게 건너는 오랜 여행을 하면서, 도중에 체념하지 않고 임무를 다한 것은 견신라사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고, 그들이 부른 이 歌群에서도 그 자부심과 사명감은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여행자의 조속한 무사귀가를 기원하는 마음을 조속한 귀가로 형상화하여 노래하는 것은 旅行歌의 전통기법의 하나인 것이다. 이와 같은 기원을 담아서, 견신라사인들이 임무를 완수하고, 초가을에 귀경하여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이 歌群에서는 초가을 칠석 저녁에 서로 헤어졌던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고 하는 칠석재회라고 하는 시적서정에 기인하여, 견신라사인들의 초가을 귀경을 노래하고 있는 것을 견신라사인들의 無事歸京을 기원하는 최고의 덕목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가을의 귀경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견신라사인들의 가군에서는 칠석재회라고 하는 칠석전설을 皇都와 使人들을 연결하는 매체로서 이용하여, 황도와 使人들을 하나의 공간으로 묶을 수 있었던 것이다.

8世紀の新羅と大和は同じ東アジアという国際政治的な空間をなしていたけど􀫠両国の関係は上手く行かなかった􀫡そのせいであるか􀫠奈良時代の大和人においては新羅は遠くて韓旅が辛い国であった􀫡しかし􀫠新羅は「白」の枕詞として使われていたのは􀫠発音の類似性だけではなく􀫠新羅は「白」が好きな外国として認識されていたことからである􀫡また􀫠「辛い」の枕詞も使われているほど􀫠当時の人々において􀫠「新羅」という国は親しかったのではないかと考えられる. 新羅と大和という空間を連結することは新羅使と遣新羅使である􀫡遣新羅使人の歌群に現れた奈良の都はいつも速く帰りたくなつかしい故郷のような空間であった􀫡しかし􀫠遣新羅使人たちは新羅からの追放など􀫠外交的な失敗によって奈良の都の近くまで帰って来ては􀫠速くて入られない空間になってしまったのである􀫡また􀫠この歌群でも万葉の世界において􀫠一つの伝統になったと言える都と鄙の差別意識が見られるのである. 白波の高く立っている荒海を危なく渡る長い旅行をしながら􀫠途中で諦めないで任務を尽くしたのは遣新羅使人としての自負心と使命感なくしては考えられないことであり􀫠彼らの歌群からもその自負心と使命感は確認できるものであった. 現実的には初秋に帰って妹に逢うことはできないにもかかわらず􀫠遣新羅使人の安全な旅と速い帰りを祈るために􀫠早い帰りを歌う歌い方は旅の歌の伝統に基づいている􀫡「一年間お互いに引き離されていた彦星と織姫が初秋の七夕の夕べに必ず逢う」という七夕伝説のように􀫠遣新羅使人も早く帰って妹に逢えるようにと祈るために􀫠この歌群では初秋の帰京ということに執着していたと考えられるのである. それゆえに􀫠遣新羅使人の歌群では七夕再會という七夕傳說を皇都と使人たちを結ぶ媒體として使って, 皇都と使人たちをひとつの空間と結んでいる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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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 대학의 요시조 이타바시 교수는 고구려어에 관한 2개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하나는 1996년, 다른 하나는 2003년에 발표되었다. 첫 번째 논문에서 그는 음성학적 변화 -r- > -s-, 즉 고조선어(Ancient Korean)에서 -r-을 가지고 있다가 고구려어에서 그것이 -s-로 변하는 현상에 근거하여 대륙 한국어영역에서 하나의 언어분할선이 그려질 수 있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 -r-은 한국어 조어(韓祖語, proto-Korean) -*r²-에서 온 것이고, 이 한조어는 알타이어 조어(proto-Altaic) -r²-와 -l²-로부터 온 것이다. 그것을 일부 투르크어와 일본어에서 치찰음 -s-로 변하는 유음 (流音) (liquid consonant)으로 종종 얘기해왔던 학자는 로이 앤드류 밀러(Roy Andrew Miller)였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현상을 고구려어의 규칙 1 : 한조어 -*r²- > 고구려어 -s-)이라 부르는 하나의 음성학적 규칙으로 공식화하기로 결정했다. 밀러가 애용했던 본보기는 ‘chestnut' 꿀밤 kkur-pam이었는데, 이것은 열도 한국어(일본어)에서 2가지 형태, 즉 くり kur-i와 くじ kuz-i를 갖고 있다. 우리는 또한 -r- : -s/z-나 -s/z- : -r-로 대비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보여주고 있는 친족어 어근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우리의 한국어 어원사전 파일을 찾아보고 그 속에서 모두 135개의 친족어 항목들을 발견해냈다. 고구려어 기원으로 추정되는 -s/z-는 102개의 열도 한국어 형태(64.2%)에서, 그리고 57개의 반도 한국어 형태(35.8%)에서 발견되었다. 한편 고조선어 기원으로 추정되는 -r-은 103개의 반도 한국어 형태(60.2%)에서, 그리고 68개의 열도 한국어 형태(39.8%)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2개 계통의 후손 언어들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고구려어 계통과 고조선어 계통이다. 이것은 또한 이 135개 친족어 어근으로부터 170개의 현대 열도 한국어 형태와 160개의 현대 반도 한국어 형태가 파생했으며, 오늘날까지 남아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어근들이 2개의 기본계통을 통해 이어져 오면서 서로 단어 형태들을 빌려오고 섞인 결과, 다른 기원이면서 갖고 있는 하나 이상의 형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2003년 논문에서 이타바시 교수는 67개의 고구려어 단어들을 일본어 및 중세 한국어와 비교하면서 전자와는 47개의 친족어(70.1%), 후자와는 32개의 친족어(47.8%)를 발견하였다(p.159). 그리고 그는 “고구려어는 그 친족어 숫자로 볼 때, 일본어와 가장 가까울 수 있으며, 중세 한국어와는 두 번째로 가까울 수 있다(p.185)”고 결론지었다. 이것은 대체로 우리의 결론과일치하고 있다. 우리는 열도 한국어가 고구려어로부터 직접 구어체의 기본 어휘들을 물려받았으며, 나중에 반도 한국어를 통하여 고조선어로부터 문어체의 문화적 및 문학적 어휘들을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이제 그의 결론에 덧붙이고자 한다. 또한 우리는 한국어 역사에 있어서 이런 현상을 “이중 복식 구조(double duplex structure)”라고 부르고자 한다. 즉 “二重(double)"이란 두개의 계통을 가진 후손 언어들 때문에 붙여진 것이며, “複式(duplex)"이란 “구어체”와 “문어체”사이의 구별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Professor Yoshizo Itabashi, of University of Kyushu, published two papers on Kokuryo language, one in 1996 and the other in 2003. In the first of them he suggested that a line of division could be drawnin the Continental Korean area on the basis of the phonological change -r- > -s-, the Ancient Korean retaining the -r- and the Koguryo changing it to -s-. This -r- comes from proto-Korean -*r²-, which in turn comes from proto-Altaic -r²- and -l²-. It was Roy Andrew Miller who often talked about them as liquid consonants which change to sibilant -s- in some Turkic languages and Japanese. So we decided to formulate this situation in a phonological rule called Koguryo language’s rule 1:proto-Korean -*r²-> Koguryo language -s-. Miller's favorite example was ‘chestnut' 꿀밤 kkur-pam, which has two forms くり kur-i and くじ kuz-i in Insular Korean (Japanese). Since we were also aware of the existence of cognate roots which show -r-:-s/z- or -s/z-:-r- contrast, we searched our Korean etymological dictionary file and found 135 cognate items in all. The -s/z- of supposed Koguryo origin was found in 102 Insular Korean forms (64.2%) and 57Peninsular Korean forms (35.8%). On the other hand the -r- of supposed Ancient Korean origin was found in 103Peninsular Korean forms (60.2%) and in 68Insular Korean forms (39.8%). This shows the two lines of descent clearly : the Koguryo line and the Ancient Korean line. This also means that from 135 cognate roots the total of 170 modern insular and 160 modern peninsular forms are derived and remain to this day, indicating that many roots have more than one form of different origins as a result of intermingling of the two basic lines of descent and mutual borrowing of word forms. In his 2003 paper Professor Itabashi compared 67 Koguryo words with Japanese and with Middle Korean, and found 47 cognates (70.1%) with the former and 32 cognates (47.8%) with the latter (p.159). And he concluded “that Koguryo may be closest to Japanese and second closest to Middle Korean from the number of the cognates”(p.185). This coincides roughly with our conclusion. We would like to add to it that Insular Korean now seems to have received its basic vocabulary in spoken language directly from Koguryo and later its written cultural and literary vocabulary from Ancient Korean over Peninsular Korean. We would like to call this situation in the history of Korean languages “a double duplex structure", “double" because of the two lines of descent, and “duplex" for the distinction between “spoken" and “written" langu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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