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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4년(원종 5) 참성단에서의 국왕 親醮는 원종이 몽고에 입조해야 할 수밖에 없는 절대절명의 위기상황에서의 기원과 기양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당시 지식인들에게 비록 원나라의 지배아래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왕실의 개경 환도와 태평성대를 가져다주었다는 인식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유교사회를 지향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참성단에서의 제사와 제단이 비루하여 마땅치 않으니 마리산 초제를 폐지하도록 건의하였다. 고려사회와 비교하여 조선사회에서의 참성단 초제와 도교가 가지는 의미의 변화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물론 변계량의 말대로 참성단 초제가 소격서에서의 그것과 함께 도교에서 치러진 國典의 常爾였다는 점에서 도교 제사를 대표하고 있었지만, 그 위치는 고려시대와 비교하여 차이를 가진 것이었다. 고려시대 참성단 초제는 국가제사의 잡사에 편재되어 운영되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소사에 편성되어 설행되었다. 제사의 의례는 대체로 「祀靈星儀」 체제를 적용하되 야외라는 공간적인 측면, 강화의 역사문화적인 특성 등이 감안되어 부분적인 조정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초제에서는 모두 91위의 신격을 모셨는데, 이들의 위패는 별도로 만들지 않고 紙榜을 사용하였고, 제사를 마친 후에는 燒紙하였다. 도교의 상・중・하단 제사를 따라 향사가 주관하던 옥황상제 등 4위를 모신 상단의 대한 제사, 그리고 헌관[강화유수]가 주관하던 노자와 28수 등을 모신 중단[서쪽, 좌측]의 제사, 헌관가 주관하던 염라대왕과 星神 등을 모신 하단[동쪽, 우측]의 제사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사는 3일 동안 치재하도록 되어 있었고, 제사에 참여하는 10여명의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금기도 적용되었다. 제사를 마친 후에는 제수로 올린 음식을 향사・헌관 이하 노복들까지 나누어 음복하도록 하였는데, 이 역시 기양을 위한 것이었다.
In 1264, the fifth year of Wonjong's reign, royal star festival served as a ritual of supplication and prayer for deliverance in a period of despair and crisis, with Wonjong being forced to enter into negotiations with Mongolia. In the eyes of intellectuals, the observance of this ritual -while carried out under Yuan China's rule- was still connected with the consciousness of the return of the royal house in Gaegyeong and a peaceful reign. The Joseon gentry, however, with their inclinations toward a Confucian society disagreed with this understanding. Regarding both the Chamseongdan's rites and the altar itself as vulgar and out of place in this society, they called for the abolition of these star ceremonies at Mt. Mari. This reflects a change in the concepts of the star festivals at Chamseongdan as well as the conception of Taoism itself in Joseon society. from that of Koryo society. According to the early Joseon politician Byeon Gyeryang, of course, the festivals at Chamseongdan represented the earlier Taoist festivals in the sense of the norms of the national law derived in the government department concerned with the stars ceremony from both Taoism and the festival itself. Still, a comparison of the situation in the Joseon dynasty with that of the Koryo shows discrepancies in that argument. During the Koryo dynasty, the Chamseongdan festivals were conducted according to irregular histories of the national rituals, but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se publications were compiled into more comprehensive history books. With adjustments of the sacrifice ceremony to the structure of Sa-Yeungseongui, the sacrifice ceremony for stars, and allowances for certain aspects such as holding of the ceremony outside and certain stronger characteristics of Joseon history and culture, a partial reconciliation between the two ceremonies was achieved. The star rites featured the worship of a total of 91 forms of God. The names of the gods were not inscribed on wooden plaques but on special ancestral paper tablets which were then burned and released into the air upon completion of the ceremony. The ritual followed the form of the Taoist high, middle, and low ceremonies. The high ceremony was led by a Hyangsa, the first ritual progresser and involved worshipping 4 forms of God, including the highest of the heavenly Gods and others. Then a ritual progresser led the middle ceremony worshipping Lao-tzu and 28 stars. Heongwan, the second ritual progresser then led the lower ceremony worshipping both the Yeomra-daewang, the lord of the underworld, and many star Gods. The worshipers underwent purification measures, with a variety of taboos and prohibitions being imposed on the ten or so participants in the ceremony. After the ceremony was completed, the food used as sacrifice in the ritual was shared between everyone from the first ritual progresser and the second ritual progresser down to the slaves and eaten. This ritual, also, was a form of pr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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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행해진 의례의 유형과 형식, 성격을 살펴본 글이다. 참성단 의례에는 봄, 가을로 행해진 정기제와 임시제가 있었다. 정기제는 포괄적인 국태민안을 기원하였고, 임시제는 기우나 외적의 물리침, 자연의 변괴의 해소 등 구체적인 목적을 갖고 상황에 따라 행해졌다. 참성단에서 행해진 의례는 도교의 초제 형식으로 거행된 특징을 갖고 있다. 이는 의례의 대상이 상제와 성신 등 도교의 신들이며, 제물이 소찬이고, 의례에 사용된 의례문이 청사라는 점 등을 통해 확인된다. 참성단 의례의 성격으로는 전형적인 도교의례라는 점과, 제천의례로서의 성격, 그리고 단군과의 연관성 등 세 가지를 지적하였다. 참성단 의례가 도교의 초제라는 점은 이미 의례의 유형과 형식을 통해서 충분히 밝혀졌다. 참성단 의례의 성격 가운데 흥미로운 공식적인 유교형식의 제천의례가 단절된 조선시대에 제천의례의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제천의례는 동양사회에서 국가와 정치권력의 정당성과 자주성, 독립성을 상징하는데, 특히 마니산 참성단 의례는 국조인 단군과의 관련성으로 여느 도교 초제와는 다른 차별성과 비중을 갖고 있었다. 참성단 의례의 세가지 특징 가운데 그것의 정체성을 이루는 것은 단군과의 관련성이다. 참성단 의례가 제천의례로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던 것도, 유교사회인 조선사회에서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었으며, 현재에도 우리사회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도 바로 단군과의 관련성 때문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This paper examines the types, forms, and characters of rituals performed at Chamseongdan(참성단) of Mt. Mani(마니산) in Gangwhado(강화도). There were regular rituals and temporary rituals. Regular rituals were performed for the general safety and well-being of the State, and temporary rituals were performed for rain, repulse of enemy, and settlement of natural disasters. These rituals performed at Chamseongdan had the form of choje, namely one of the rituals of Taoism. And these rituals had three character, that is of Taositic Ritual, rituals toward Heaven, relationship with Dangun(단군). It is important to notice that the rituals performed at Chamseongdan functioned as rituals toward Heaven instead of Confucianistic rituals toward Heaven in Chosen Dynasty. The relationship with Dangun is a central character of them because it is the core element of defining the identity, functions, and status of the rituals performed at Chamseongd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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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신라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태백산에서 행한 祭儀와 고려・조선을 거쳐 현재까지 마니산 참성단에서 행해지는 祭天禮에 대하여 연혁과 의례 현황을 비교・분석한 글이다. 하늘에 제사지낸다는 점에서는 태백산 천제단이나 마니산 참성단은 유사한 성격을 지닌 제의 장소이다. 그러나 그 역사적 연혁이나, 의례 과정, 주변 지역으로의 확산 등에서는 구분되는 점들이 많음을 알 수 있었다. 태백산 천제단과 마니산 참성단에서의 儀禮 현황을 비교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태백산에서의 제의 과정에 모신 신령은 신라대에 천신 또는 산신, 고려시대에 태백산신을 모셨으며, 조선시대에 天王을 모셨고, 임진왜란 이후 좀 더 명확하게 하늘[天神]에 제사지낸 사례를 다수 발견할 수 있다. 제의 과정에서 강화도 참성단에서는 도교의 신들을 제사의 대상으로 받들어 紙榜 형태로 모셨으나, 태백산 천제단에서는 하늘을 상징하는 해・달・북두칠성과 28수기를 깃발로 만들어 모셨다. 둘째, 태백산에서 제의를 주관한 제관은 고려시대까지 왕이나 국가에서 파견된 관리가 주도하였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국가제장 선정에서 탈락됨으로써 향리나 민간인이 제의를 주도함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관리를 파견하여 제의를 주관하게 하였다. 현재 태백산 천제단과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의 천제를 주관하는 이는 해당 지역 자치단체장을 비롯한 지역 인사들이다. 셋째, 조선시대까지 태백산에서의 제의에 올린 제수를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소를 헌공한 사례는 많다, 1987년부터 태백산천제위원회에서 주관하여 지낸 천제에 올린 제수는 조선시대에 소와 삼베를 헌공한 전통을 살려 소머리와 삼베를 올리며, 백설기와 소머리를 제외한 모든 제수는 생으로 올린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에 비해 마니산 참성단에서는 조선시대에 도교식 제사에서와 같이 차・탕・술과 떡을 준비하여 올렸으며, 국가에서 제수 등을 준비하기 위한 별도의 祭田을 내려주었다는 점은 태백산지역과 다른 점이다. 넷째, 의례를 행하는 시간은 두 지역 모두 子時에 지냈으나, 지금은 낮에 지낸다. 조선시대에 마니산 참성단에서 행한 의례 과정은 각종 기록을 통해 그 대략을 알 수 있다. 특히 1511년 유숭조에 의해 雲馬樂을 벌였다는 점은 태백산과 비교되는 점이다.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동안 태백산은 구국의 성지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동학을 만든 최제우 死後 동학교도들이 태백산 권역에 모여들면서 태백산은 민족의 종산으로 그 가치가 더욱 부각되었다. 신흥종교 중에서는 1937년의 태극교도[천지중앙 명류도]들의 활동이 주목된다. 이들은 조선의 독립을 기원하기 위해 태백산 정상에 구령탑을 쌓고 독립 기원제를 지냈다. 이러한 활동은 태백산이 지닌 민족의 영산이라는 관념 속에서 救國의 성지로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구국을 위한 의례가 행해지면서 태백산에서의 제의는 天祭의 형식을 갖추게 된다. 이와 함께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거나 민간 치성을 드리던 전통은 태백산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도교에 기반을 두면서 국가 제사로 행해진 마니산에서의 제천의례와 구분되는 점이다.
This study was conducted to investigate Comparative Study on the Rites in Cheonjedan[天祭壇] at the top of Mt. Taebaek and Chamsungdan[塹城壇] at the top of Mt. Mani. The ritual traditions performed in Mt. Taebaek have been continued to this day since the Silla dynasty. During the Silla dynasty, Mt. Taebaek was considered as an important place for the national rituals called Jungsa. As well, it was used for the political purpose of expanding and controlling the territories and those tradition had been continued to the Goryeo dynasty. During Joseon dynasty, although the ritual was not performed as the event of national importance, it had received the national attention until the early era of Joseon dynasty. According to the references from various sources, Taebaeksansa and Taebaeksa were assumed to be Cheonwangdang and Cheonwangsa respectively. There is a altar called Chamsungdan[塹城壇] at the top of Mt. Mani in Kanghwa Island. This altar is known as a place of ritual to sky held by Tangun[檀君], the founder of Ancient Chosun[古朝鮮] and national ancestor of Koreans. The first record touch on altar Chamsungdan appeared in 1264. So we can infer that the altar Chamsungdan was constructed before 1264. Since the Taebaeksanje received nation-wide attention, one could assume that the ritual itself was a real burden to the people. However, a number of evidences found in the areas around Mt. Taebaek and even remote areas from the mountain, show that people who were unable to worship in Mt Taebaek because of various reasons built Cheonjedan (superior shrine) and practiced the ritual. Rituals of the altar Chamsungdan was state rituals, so these were performed by officials of the state. There were two kinds of ritual ; one is periodical rituals held at spring and autumn(2 times per year), the other one is occasional rituals. And gods worshiped in these rituals were Taoist divinities, so that rituals of the altar Chamsungdan were Taoist ritu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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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는 이 글에서 강화도 참성단을 통해서 만주지역에 남아 있는 한민족관련 제사유적과 그 대상, 그리고 그 후대로 이어지는 전승과정을 알아보았다. 만주지역에서 제사유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지금부터 5500년경 홍산문화후기 부터이다. 이 시기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공통된 특징은 산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제사장의 형식은 시대마다 바뀌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홍산문화시기는 조상신에 대한 제사장과 조상신에 대한 제사를 지내던 사람이 같은 지역에서 공존하는 것을 볼 수 있고, 하가점하층문화시기는 부족적인 제사장과 권력연맹체의 제사장은 다른 지역에 분포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후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 등에서 나타나는 조상에 대한 제사는 제사장과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과 같은 지역에 자리하지 않고 서로 다른 자리에 위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제정이 분리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지낸 제사의 대상이 단군이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이 되어야 하는 건가 하는 것이다. 고조선은 그 자체만으로도 단군을 설명할 수 있으나 고구려나 신라는 특별한 설명이 없으면 그들이 단군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이미 문헌에서 고구려, 신라는 고조선의 후예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고, 심지어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조선의 시조는 단군으로 보고 있는 것 등을 볼 때,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을 것으로 본다. 지금까지 한반도에 남아 있는 단군관련 제사장은 참성단이 남아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하여 강화도 참성단은 한민족의 전통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참성단의 의미를 21세기에서 다시 음미해보고 되살려야 할 것이다.
Archaeological or historical information on Ganghwa Island Chamseungdan or worship places in Manchuria has been studied in this article. Worship places in Manchuria emerged about 5,500 years ago late Hongshan culture period. From this period on, worship rituals in the remains have been done in hilltop places; the pattern continued for several thousand years. Even so, the political nature of chief priests changed in each period. For example, in Hongshan culture period, the chief priests performing different kinds of rituals lived together in the same place while tribe priests and the chief priests of the league started to live in different regions when it comes to Lower Xiajiadian culture period. The worship rituals for ancestors in Korean kingdoms such as Goguryeo, Silla, Goryeo, Chosun etc. were done by priests who were living in the other places than the political chiefs did. In this article, we tried to consider the possibility that the worship ritual was done for Dangun. In case of Old Chosun, the speculation might not be easily ruled out. However, Dangun could not be easily speculated by us, as the subject of worship rituals performed by peoples of the other Korean kingdoms. However, considering that most of Korean kingdoms were known to be founded by descendants of Old Chosun, the possibility could not be easily denied even for the coun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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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개천절의 역사와 강화도 참성단과의 관련성을 살펴본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개천절은 단군을 중심으로 한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1909년에 제정되어 민족의 수난기인 일제시대에도 국내외, 좌우익을 막론하고 한국인이 있는 곳에서는 끊이지 않고 기념되어왔다. 그러나 일제시대에는 참성단과 개천절의 관련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참성단이 개천절과 관련을 맺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부터이며, 1946년에 처음 관련 사실이 확인된다. 그것은 참성단이 단군의 유적이기 때문에, 단군을 기념하는 행사의 장소로서는 참성단이 가장 적합하다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46년에는 서울에서 채화한 성화를 참성단으로 가져와 참성단에서 기념식을 거행했다. 또 1947년 개천절 행사는 ‘개천절경축위원회’가 조직되어 행사를 주관했고 이번에는 참성단에서 성화를 채화했다. 그리고 1948년에는 국회의장을 비롯한 다수 인사들이 참여하여 참성단 개천절의 위상을 더욱 높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개천절 행사의 중심은 서울운동장에서 거행하는 기념식이었고, 참성단 행사는 대표성을 가지지 못했다. 1949년은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지 첫 번째로 맞이하는 개천절이었다. 이때 정부에서는 개천절을 4대 국경일의 하나로 지정하는 한편, 개천절 날짜를 음력 10월 3일에서 양력 10월 3일로 바꾸었다. 그런데 바로 이해 정부 차원의 개천절 행사가 참성단에서 거행되었고, 서울에서의 개천절 기념식은 중지되었다. 이처럼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개천절 행사의 장소가 참성단이 되었지만, 바로 이듬해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참성단이 국가 차원의 개천절 기념식장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다. 그 결과 참성단에서의 개천절 행사는 강화군 차원의 것이 되었지만, 현재까지 개천대제라는 이름으로 그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This paper is a study on history of the National Foundation Day or Tangun's Day and its relation to Great festival in memory of National Foundation held in Kanghwa island. At first, I consider the history of the National Foundation Day or Day of Tangun, who is the founder of Korean nation. The National Foundation Day of Korea is a national holiday in commemoration of Tangun's birthday and Tangun's accession to Ancient Chosun king. The National Foundation Day of Korea hold in October third annually. This day began to commemorate in 1909 by the Taejonggyo, a sect of Korean new religion. Taejonggyo believe Tangun as god. So it is quiet in the nature to thing that the National Foundation day was began by Taejonggyo. Though the National Foundation Day was enacted by Taejonggyo, this day was commemorate by nation-wide from the beginning. This is made from situation of the time. At that time, Japanese imperialism push ahead the policy to colonize of Korea, so Korean protested for their independence. For independence movement, Korean needed union of all nations, and for union of all nations they needed a symbol possible to unite all nations. So they emphasized all Korean is offsprings of Tangungun, so it is fair and proper to protest Japanese invasion as Korean nation. In such a atmosphere, Taejonggyo was started and the National Foundation Day was commemorated nation-widely. In spite of Korean's independence movement, Japanese imperialism occupied Korea in 1910. But anniversary of the National Foundation Day was continued under the rule of Japanese imperialism regardless of home and aboard where Korean lived, and regardless of right and left wing. Korea independence from Japanese rule in 1945. After that, Korean commemorate the National Foundation Day freely. In 1945, anniversary of the National Foundation Day was held at Seoul Stadium. At that time, event was superintended by private organizations such as Taejonggyo sect, because Korean government was not established yet. In 1946, the anniversary of the National Foundation Day held at Seoul Stadium too. But there was added a new event which carried sacred torch from Seoul Stadium to Chamsungdan, located in Kanghwa islander.And there were also held commemorate event of the National Foundation Day. Chamsungdan is a altar where Tangun performed ritual to sky god according to legend. It is natural that Chamsungdan linked to the National Foundation Day. But this is the first time Chamsungdan have relation to National Foundation Day, as I know. In 1947, a part of anniversary content was changed. In this time sacred torch was fired from Chamsungdan and transferred to Seoul Stadium. In 1948, beside to event of Seoul Stadium, anniversary of the National Foundation Day held in Chamsungdan also with attendance of many leading persons in government and Congress. The 1949 is very important year in history of anniversary of the National Foundation Day and it's relation to Chamsungdan. The 1949 is the year Korean government established. In this year, the National Foundation Day is not only designated a one of national holidays, but also day of anniversary is changed from October third of lunar calendar to October third of solar calendar. As well as anniversary of the National Foundation Day was managed by government from this time, the first time anniversary of the National Foundation Day managed by government was held in Chamsungdan. In spite of Korean War, break out in 1950, anniversary of the National Foundation Day was did not interrupted by Korean government and continued to present. But this anniversary was held in capital and Chamsungdan loss the position of place where national anniversary held. But anniversary of the National Foundation Day was held in Chamsungdan managed by Kanghwa county named Great festival in memory of National Foundation(Kaechun Daejae) till now. And Chamsungdan regarded as symbol of Korean's national spirit without 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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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동아시아 역사상과 체계를 해석하는 몇 개의 모델을 설정하여 활용하고 있다. 동아지중해 모델 속에서 자연환경뿐 만 아니라 역사적인 존재로서 바다 및 육지는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통일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육지와 바다를 이어주는 제 3의 존재가 江이다. 하나의 역사터인 만주와 한반도는 해양과 관련하여 지리적, 지형적 생태적 역사적인 특성상 강이 많을 뿐 만 아니라 역할 면에서도 비중이 높았다. 특히 도시가 생성되는데 절대적인 조건이 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한민족의 국가들은 地政學的 地經學的 地文化的 측면에서 海陸的인 성격을 띄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국가발전전략을 수립하고자 할 때 수도의 위치와 역할은 강 하구와 바다가 만나는 접점인 ‘江海都市’에 설치하는 것이 유효성이 높다. 실제적으로 한민족의 역사에서 대부분의 수도 및 중요도시들은 강하구 및 해양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왕검성을 비롯하여 安市城(海城) 平壤城(平壤) 泗泌城(夫餘) 羅州 등은 물론이고, 특히 漢城으로 역사에 등장한 서울지역은 한강 하구에 성립한 전형적인 강해도시에 해당한다. 세계사에서 비중높은 위상에 있는 대도시들 가운데에도 강해도시들이 수없이 많다. 본고의 작업은 자연환경을 위주로 하면서 큰 틀을 구축하는 작업이므로 구체적인 역사상의 검토는 소략하였다.
In the study, a few models are applied to interpret the East-Asian historical aspects and systems. The sea and the land have an organic relationship and operate in a unified manner. The river is a mediator that connects the sea and the land. Ecologically and historically, there were many rivers in Manchuria and the Korean peninsula that were of great importance. It was one of the essential conditions in which a city was established. it is desirable that nations are conditioned with the oceanic characteristics in geo-political, geo-economical, and geo-cultural ways. Especially, it increases effectiveness when the capital city is built in 'The city of river and sea(江海都市)' where the mouth of the river and the sea intersects. In our history, most of the capital cities and big cities were closely related to the mouth of the river and the sea, for example, Ansi-city(안시성), Pyungyang-city(평양성), Sabi-city(사비성), and Naju-city(羅州). Seoul is the representative example of 'The city of river and sea(江海都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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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지금의 서울 지역인 漢城을 상실한 후에 천도한 곳이 웅진성이었다. 웅진성이 一國의 首都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王宮을 비롯해서 官廳과 民家 그리고 市場과 橋梁 그리고 墳墓群이 조성되기 마련이다. 이 가운데 權府의 핵심 시설이 왕궁인 것이다. 백제가 웅진성에 도읍하던 시기의 왕궁의 위치는 이 시기를 연구하는 데 기본적인 전제가 된다. 그럼에도 웅진성 도읍기의 왕궁의 소재지에 대해서는 2가지 견해가 맞서고 있는 실정이었다. 공산성 안에 소재했다는 설과 공산성 바깥에 소재했다는 견해인 것이다. 아울러 왕궁과 연계된 기념비적인 건조물인 임류각의 소재지에 대해서도 검토가 필요하였다. 나아가 웅진교라는 교량의 위치를 확인함으로써 웅진도성의 규모와 도시 체계를 엿 볼 수 있게 된다. 웅진도성의 왕궁 파악의 관건으로서 궁의 동쪽에 건립되었다는 임류각의 소재지 파악에 부심한 결과 ‘流’ 字銘 기와가 출토된 공산성 안의 특정 건물지를 임류각지로 비정하였다. 이와 연동하여 임류각지의 서편에서 왕궁을 찾다 보니까 쌍수정 광장이 왕궁지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流’ 字銘 기와는 현재의 추정 임류각지 뿐 아니라 만아루지를 비롯해서 여러 곳에서 출토되었을 뿐 아니라 현재 확인은 불가하지만 일제 때 공산성 동편에서도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현재의 임류각지는 통일신라 때 건물지로 추정되고 있을 뿐 아니라 ‘流’ 字銘 기와 역시 백제 때 기와도 아닌 만큼 임류각지 비정은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다. 그 밖에 諫臣의 上疏와 관련해 동성왕이 궁문을 닫아걸자 임류각의 위치를 궁안으로 단정해 왔다. 그러나 궁문은 역사적으로 신하나 백성들이 의견을 전달하는 공간이었기에 궁문을 닫아 건 기사가 나왔을 뿐이었다. 임류각이 궁성 안에 있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하였다. 그럼에 따라 임류각지에 근거한 쌍수정 광장설은 근거를 잃어버렸다. 임류각의 위치 파악은 앞으로의 과제이지만, 이름 그대로 ‘臨流’와 부합될 있는 공산성 바깥의 금강변이 적합해 보인다. 이와 관련해 輕部慈恩의 연구 성과는 충분히 참작할 값어치가 있었다. 쌍수정 광장의 적심석 건물지는 2棟밖에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공간마저 협소한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런 관계로 이 곳을 왕궁지로 비정하는 데는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더구나 왕궁 남쪽에서 大閱을 했다고 하지만 쌍수정 광장 남쪽은 공간이 전혀 없는 관계로 왕궁이 아님을 逆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그 밖에 왕궁이라면 반드시 존재했어야 할 담장과 宮殿 入室과 관련한 階段의 존재도 확인되지 않았다. 결국 왕궁지는 산성과 평지 궁성의 결합 관계를 놓고 볼 때 공산성 남쪽 일원으로 비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곳에 건물이 찬 관계로 고고물증은 확인되지 않지만 대형 초석의 존재를 비롯한 물증도 이미 확인된 바 있다. 그런 관계로 차후의 발굴이 진행된다면 그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웅진도성의 정비와 관련해 웅진교라는 교량은 ‘웅진’의 용례와 고구려의 경우를 비롯해 그 필요성을 놓고 볼 때 곰나루와 그 건너편을 연결하는 木橋로 파악되었다.
Ungchindosŏng(熊津都城) is where the Baekje dynasty moved its capital when it had lost its old capital Hansŏng, the present day Seoul. To make it a capital of a nation, not only the royal palace but every other facilities like state houses, private homes, markets, bridges, and burial places must have been constructed. The crowning construction is of course that of the royal palace, the center of the power. The location of the palace when Baekje relocated here thus provides a crucial piece of information about this time. Yet, there is still an unsettled debate between two possibilities regarding the royal palace site. One is that the palace was located within Kongsansŏng and one is that it was outside. Also, we need to review the location of Imryugak(臨流閣), an important building in relation to the royal palace. Furthermore, if the location of bridge called Ungchingyo(熊津橋) could be identified, we could get some insight on the scale and urban system of the Ungchindosŏng. Imryugak was known to be built east to the royal palace. So, as a key to the location of the palace, we made a careful investigation of the location of Imryugak. As a result, we identified the specific building site within Kongsansŏng as the site because the tile inscribed the letter 'Ryu流' was excavated there. From this, we searched for the remains of the royal palace in the west of the Imryugak site and we came to conjecture that the plaza of Ssangsuchŏng(雙樹亭 廣場) is the site. However, the 'Ryu' inscribed tiles were excavated not only in the conjectured Imryugak site but in many other places and there is estimation that the current Imryugak site is a building site of the United Silla period. In addition, it was suggested that the 'Ryu' inscribed tiles do not solely belong to the Baekje period. So we concluded that the possibility that it is the Imryugak site is close to zero. The palace door discussed in relation to appeals court by vassals also did not provide a clue to the location. It was not evidence that Imryugak was within the palace. Therefore, the Ssangsuchŏng plaza hypothesis lost its foundation. While the identification of the real site remains for the future, it looks quite likely that it will be in the area near the Keum River, thus outside the Kongsansŏng, as the name 'Imryu' signifies so. The Ssangsuchŏng plaza also did not have enough space to raise a doubt whether a designation for the palace site could ever be made in such a humble site. Especially, it had no space to the south contrary to the story that there had been big ceremonial army inspections to the south of the palace. It is another strong counter-evidence to the Ssangsuchŏng plaza hypothesis. Also the walls and steps essential for the palace were never discovered. The site for the palace would only be the south of Kongsansŏng area, provided the common relationship between the mountain fortress wall and the plain royal palace. In addition, the location of the bridge called Ungchingyo was searched in relation to the reconstruction of the Ungchindosŏng. Given the usage of ‘Ungchin', the case of Koguryŏ, and the necessity, the wooden bridge connecting the Kom port and the opposite site seems to be the Ungching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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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초월적 능력을 지닌 여우의 모습이 어떠한 양상으로 변모하는지 살펴본 것이다. <원광서학>, <강감찬>, <전우치전>, <이화전> 등의 작품을 대상으로 여우가 지니는 초월성의 양상을 살폈다. <원광서학>에서 여우는 신술로 원광이 신승의 경지에 오르는데 기여하는 神格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또한 <강감찬>에서는 영웅을 낳는 神母的 性格을 지니고 있는데, 여우의 초월성이 강감찬의 능력과 因果性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 두 작품에서 여우는 인간에게 긍정적 기여를 한다는 점에서 神異的 超越性을 지닌다고 보았다. 한편, <전우치전>에서 여우는 神物을 지니고 있으면서 전우치의 도술 획득에 도움을 주고, 惡行을 저지르는 二重的 性格을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이화전>에서 여우는 변신으로 사람을 해치는 妖怪로 怪異的 超越性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살폈다. 여우의 변신능력은 인간뿐만 아니라 神仙으로까지 확장되어 있으며, 중국 황제의 총비로 변신하여 이화에 대한 복수를 전개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초월적 성격의 여우는 初期에는 신이적 초월성을 보여주다가 後期로 갈수록 괴이적 초월성을 지닌 존재로 變貌해 가고 있음을 究明하였다
Not Assuming that fox's transcendent character consistently goes to negativity displayed from Description Literature, the paper shows what kind of aspect the superiority has shown and how it has been developed. Attempting to derive the transcendence of fox from targeting on WonKwangSeoHak: 원광서학, KangGamChan: 강감찬, JeonUChiJeon: 전우치전, EwhaJeon: 이화전 and so on, we found that the existence of appearance looked different in WonKwangSeoHak as divinity, in KangGamChan as mother of god, and in JeonUChiJeon and EwhaJeon as an goblin or demon. These looks are divided into sacred superiority and wicked one, depending on its being recognized as positive or negative with human relation. And we knew that the two stream of transcendence lived with each other and then and remained as central to ugly creature with superiority. WonKwangSeoHak was considered as the early production with a sound descriptive style in which fox's holy superiority was revealed. In JeonUChiJeon, Fox appeared as a fox's holy superiority and a wicked creature with superiority and the former held a high position to the latter. We saw that JeonUChiJeon, the fox of being wicked creature with superiority had a more prominent position than that of being holy superiority and also draw a conclusion that it got interesting part as revenge in goblin's character. Only the wicked creature with superiority appeared in EwhaJeon, who played a hostile opponent role in leading to a core narration of the work. Moreover, the revenge of goblin seen in JeonUChiJeon was operated as energy which was guarding the whole work.
<무학을 나무란 농부>계 설화의 다층적 전승 양상과 그 의미 -‘무학이 같이 미련한 소’ 모티프의 전승력 점검을 겸하여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3집 2010.12 pp.317-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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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무학을 나무란 농부>의 ‘한양터를 잡는 이야기’(<왕십리>형)・‘경복궁 궁궐을 짓는 이야기’(<학터>형)와, 이들 구조를 바탕으로 생겨난 여러 설화가 있음에 주목하여 이들을 <무학을 나무란 농부>계 설화로 명명하면서 이들이 다층적으로 전승하는 실상과 그 의미를 살피기 위하여 작성되었다. 본고에서 논의된 중요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무학을 나무란 농부>의 두 유형은 동일한 서사구조를 보여준다. 그리고 두 유형에 나오는 ‘무학이 같이 미련한 소’(꾸지람) 모티프는 서사의 핵심요소이자 전승을 가능하게 흥미소가 된다. 이어서 <무학을 나무란 농부>의 구조와 꾸지람 모티프를 수용하여 생겨난 여러 개별 유형 자료들을 <장수를 나무란 농부>(a)와 <명당터를 깨우쳐준 농부>(b)로 크게 대별하였다. 전자(a)는 <왕십리>형에 보이는 ‘국사에 관여하여 원조하는 신령의 원조담’의 성격을 지녔고, 후자(b)는 <학터>형에 보이는 풍수담의 성격이 강하다. 다음으로, <무학을 나무란 농부>계 설화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첫 작업으로, 이야기 속의 역사적 사실들이 실제 역사와 어떻게 부합하는지 살펴보았다. 그 결과 대부분은 실제 역사적 진실에 근거를 둔 역사적 사실(史實)이 아님을 확인하였다. 이 설화는 임란 이후 무학의 재평가, 풍수도참적 풍조 등에 따라 생겨났으며, 전통 민간신앙의 ‘노인’ 모티프가 민중의 역사적 상상력과 함께 활용되어 무학전설에 대한 반란의 형태로 꾸며졌다. 이어서, <무학을 나무란 농부>계 설화의 다층적으로 전승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분석하였다. 우선 정교한 형태의 유형구조를 추출하고 이를 ‘전승력이 강하면서 자기복제가 가능한 구조’라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꾸지람 모티프, 노인과 주인공의 상호 문답 등과 결부되어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개별 유형들의 상호관계를 1) ‘국사에 관여하는 신령의 원조담’의 성격이 강한 <왕십리>형 계통의 이야기들, 2) ‘풍수담’의 성격이 강한 <학터>형 계통의 이야기들로 나누어 대비하였다. 그리하여 몇 가지 기준을 설정하여 각 유형들의 서사 및 내용의 차이를 변별해내고 이를 도식화하면서 유형간 변모 양상을 밝혀냈다. 이를 통해 <왕십리>형에서 출발한 <무학을 나무란 농부>가 <학터>형을 파생시키고, 그리고 두 유형의 내용적 특징에 따라 인물과 사건이 바뀌면서 많은 개별 유형이 만들어져 <무학을 나무란 농부>계 설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끝으로 <무학을 나무란 농부>가 수많은 변이형 설화를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이유로서 인물전설이 지니는 역사성과 문학성을 고려하여 ‘민중들의 반역사적인 유쾌한 상상력’을 거론하였다.
This study examines transformational process of various folktales related to <Farmer who scolded 'Muhak(無學)'> from original versions, and also explores the meaning of these folktales. I can summarize the main findings as below : 1. Folktales related to <Farmer who scolded 'Muhak'> can be classified into two subtypes - Wangsimni(往十里) (type A) and Hakteo (type B). The two versions share basically the same story line, have the same characters, and have the scene where the farmer scolds 'Muhak'. However, they have different main events. 2. There are several folktales that borrowed the core story structure from the original version. I grouped them into <Farmer scolded the warrior> (type a) and <Farmer who enlightened the location of Myeong Dang(明堂)> (type b), and found that types a and A are similar and so are types b and B. 3. Events in the stories are not based on reality but on literal imagination. 4. <Farmer who scolded 'Muhak'> was originally created after Imjin-waeran(壬辰倭亂). Based the story on traditional narratives, people added their history identity to create the folktale. 5. Folktales of <Farmer who scolded 'Muhak'> have unique structural features that are sophisticated and complete. This structure is strong in self-reproduction, thereby being able to produce similar folktales. In addition, motif of scolding also makes this folktale easier for folks to remember and put it on stage.
<閑中錄>에 나타난 實記文學的 성격 Ⅶ* -정조의 생애를 중심으로-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3집 2010.12 pp.363-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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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은 영조 때에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비인 혜경궁 홍씨가 10년(61, 67, 68, 71세)에 걸쳐 쓴 네 편의 글을 후세에 제목을 붙인 작품이다. <한중록>이 학계에 소개 된 후 다양한 연구가 있었지만 명칭과 양식론에 대한 이견은 합일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역사적인 인물이나 사건이 문학으로 승화 된 ‘실기문학’의 하위 개념으로 궁중을 배경으로 생성된 작품을 ‘궁정실기문학’이라고 명하고 역사 기록물과 작품을 비교 검토하여 궁정실기문학의 특성을 확인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한중록>의 작자 혜경궁 홍씨의 아들 정조의 생애를 작품과 조선왕조실록과의 대비를 통하여 실기문학으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였다. 정조는 영조 28년(1752) 9월 22일 장헌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탄생과 어린 시절의 일화에서 장차 성군이 될 자질이 있었음을 <한중록>이나 영조실록, 「정조행장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10세인 영조 37년(1761) 3월 18일의 관례와 10월 29일 초간택부터 12월 22일 삼간택에서 김시묵(金時黙) 딸을 세손빈으로 간택하는 과정, 11세인 영조 38년(1762) 2월 2일의 가례(嘉禮)는 영조실록에는 간략하게 기록되었다. 그러나 <한중록>에는 영조와 세자의 갈등으로 기쁨을 온전히 할 수 없었던 가슴 아픈 내용이 자세하게 기술되었다. 영조 38년(1762) 7월 24일, 정조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동궁(東宮)으로 책봉되고 13세가 되는 갑신년(영조 40년) 2월 20일에 큰아버지 효장세자(후일 진종)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영조로서는 손자가 죄인의 아들이라는 악재를 제거하기 위한 현명한 처사였지만 어머니는 ‘갑신처분’으로 자식을 빼앗긴 아픈 사연을 여러 차례 기술하였다. 24세인 영조 51년(1775)년 12월,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정사를 하도록 하였을 때 홍인한(작자의 중부)이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을 당시의 기록이나 현재의 역사가들은 개혁정신을 지닌 정조가 등극하면 기득권을 잃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평한다. 그러나 <한중록>에는 영조가 노년으로 헛소리를 자주하던 때이고 전일 사도세자가 대리정사를 했을 때 부자간의 갈등이 더욱 깊어지게 되었던 과거의 일이 재현될까 두려워 자신이 적극 반대하도록 중부에게 부탁했다고 자세하게 기술하였다. 영조 52년(1776) 3월 5일 영조가 승하하여 3월 10일, 정조는 25세에 조선조 22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직후 “아!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하여 법적으로는 큰아버지의 후사(後嗣)지만 생부는 사도세자임을 온 천하에 공포한다. 즉위 후 탕평책으로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규장각을 설치하여 실학을 발전시키는 등 문화정치를 실현하는 훌륭한 군주였다. 또한 정조 13년(1789)에는 아버지의 묘소인 영우원을 수원(현륭(顯隆)으로 옮기고 해마다 직접 참배하는 효자이기도 했다. 정조 19년(1795)은 아버지(1월 21일)와 어머니(6월 18일)의 회갑 년이었다. 2월 9일에서 16일까지 거행한 을묘원행(乙卯園行)은 어머니의 회갑을 축하하고 한 많은 아버지의 영혼을 위로하려는 효심에서였다. 당시의 모든 일정이 정조실록에도 기록되었지만 <한중록>에는 8일간 거행되었던 모든 행사의 절차가 세밀하게 기술되어 궁중풍속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재위 24년(1800) 6월 18일, 정조는 우수한 역량으로 조선 후기 황금시대를 이룩하던 중 49세로 갑자기 승하하였다. 그 후 아들(순조)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나이가 어렸으므로 대왕대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시작되었다. 당시 대비 측의 벽파 세력은 천주교 금지를 명분으로 남인계 중심의 시파세력과 실학자들에게 일대 숙청을 가하였다. 이 때 혜경궁의 동생 홍낙임이 시파의 거두로 지목되어 정조의 외가는 몰락하게 된다. 어머니 혜경궁은 어린 왕에게 아버지 정조의 효심을 상기 시키면서 친정과 관련된 여러 사건의 진실을 손자에게 알리기 위하여 67세와 68세에 붓을 들어 작품 2편과 3편을 남긴다.
<Hanjungrok> consists of four pieces of writing written over 10 years (age 61, 67, 68, 71) by Hyegyunggung Hong, the crown princess of the Crown Prince Sado who had died trapped in a rice chest during Yeongjo period, titled in future generations. There have been various studies after the introduction of <Hanjungrok> in the academic world, but different views of name and theory of style are still not coming together. This writer has named the work as ‘court documentary literature’ created with the court as the background, as a subordinate concept of 'documentary literature' in which historical characters or events are sublimated to literature; and has compared and examined historical records and works to confirm the characteristics of court documentary literature. This paper explored the possibility as a documentary literature by contrasting Jungjo, the son of Hyegyunggung Hong who is the writer if <Hanjungrok>, with the literature and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Jungjo was born in Yeongjo year 28 (1752) September 22, as the second son of the Crown Prince Janghun and Hyegyunggung Hong. The qualities of a sage king shown in various anecdotes from birth throughout the growth process could be confirmed as well in <Hanjungrok> or The Annals of Yeongjo and 「Jungjo Haengjangmun」. The practice of Yeongjo year 37 (1761) March 18 when he was 10, the selection of Kim Si-mook's daughter as the granddaughter-in-law from initial selection on October 29 to third selection on December 22, and auspicious ceremony on February 2, Yeongjo year 38 (1762) when 11 were all briefly recorded in The Annals of Yeongjo. Yet in <Hanjungrok>, there are detailed descriptions of heartbreaking contents in which they could not completely be happy due to the conflict between Yeongjo and the Crown Prince. Also, the event in Yeongjo year 38(1762) lunar May 21 in which the Crown Prince Sado died trapped in a rice chest was recorded very briefly in The Annals of Yeongjo. Even though the death of the Crown Prince was a significant event in the court society, it was described briefly because in the late years of Yeongjo, the misdeed related to his father's death was kept from being handed down to posterity. However, in <Hanjungrok>, the cause and result of the Crown Prince Sado tragedy are recorded in detail, delivering the hidden truth that could not be open in public records, making it possible to confirm the characteristics of documentary literature. Yeongjo year 52(1776) March 5, Yeongjo died; and on March 10, Jungjo ascended the throne as the 22nd King of Joseon at the age of 25. After ascending the throne, he claimed, “Oh! I am the son of the Crown Prince Sado," proclaiming to the whole world that his birth father was the Crown Prince Sado while he was the legal son of his uncle. He was an excellent monarch, appointing fit persons with Tangpyeongchaek, establishing Gyujanggak to develop Silhak and realizing cultural politics. Also, in Jungjo year 13 (1789), he moved his father's grave, Youngwoowon, to Suwon (Hyeongroong) and visited every year to pray. Jungjo year 19 (1795) was the 60th birthday of his father (January 21) and mother (June 18). Eulmyowonhaeng, held from February 9 to 16, was due to his love toward his parents in celebrating his mother's 60th birthday as well as comforting his father's soul full of resentment. All of the schedule were recorded in The Annals of Jungjo; but in <Hanjungrok>, the procedures of all events held for 8 days are described in detail, making it a precious source for court custom. 24 years on the throne (1800) in June 18, Jungjo suddenly died at the age of 49 while achieving the golden age at the end of Joseon dynasty with excellent capability. After that, the son (Soonjo) succeeded to the throne; but he was so young that regency by the queen mother began. The Byeokpa force on the side of the Queen at the time purged Shippa force and Silhak scholars focusing on Namin, with an excuse of prohibition of Catholicism. At the time, Hyegyunggung's younger brother Hong Nakim was pointed as a magnate of Shippa, leading to the collapse of the maternal side family of Jungjo. The mother, Hyegyunggung, reminded the little king of his father Jungjo's love for parents, leaving the second and third pieces at the age of 67 and 68 in order to let her grandson know of the truth about various events related to her home.
襄陽妓와 宣城妓 史鳳姬에 대한 재고찰 -『朝鮮解語花史』 수록 작품의 오류 검토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3집 2010.12 pp.395-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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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 수록된 양양기(襄陽妓)와 선성기(宣城妓) 사봉희(史鳳姬)의 시를 가지고 작자의 신분과 작품의 출전에 대해 고찰하였다. 한국의 고문헌에서는 이들의 관련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중국 남송(南宋) 오증(吳曾)의 능개재만록(能改齋漫錄)의 관련 자료를 인용하여 양양기(襄陽妓)의 <송별(送別)>이라는 시가 사실 중국 당나라 양양기(襄陽妓)의 <송무보궐(送武補闕)>라는 작품이라는 것을 고증하였고, 후당(後唐) 풍집(馮贄)의 운선잡기(雲仙雜記)의 관련 자료를 인용하여 사봉희(史鳳姬)의 <영신계침(詠神鷄枕)>이 실제로 당나라 기녀 사봉(史鳳)의 7수 중의 한 작품이라는 것을 밝혔다. 또한 배경설명을 결부하여 개별적인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시의 의미를 파악하였다. 이러한 혼동이 생긴 주요한 원인은 중국과 한국에 모두 다 양양(襄陽)과 선성(宣城)이라는 지명이 있는 공통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고증을 통해 중국 기녀의 작품이 한국 기녀문학에 연구하는 자료로 오용되지 않게 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였다.
本文对 ≪朝鲜解语花史≫ 收錄的襄阳妓和宣城妓史凤姬诗作之出处进行了考察。由于韩国古文献中没有相关记錄,因此利用中国南宋时期吴曾 ≪能改斋漫錄≫ 的相关资料,证实了襄阳妓的 ≪送别≫ 一诗实为唐朝妓女襄阳妓的 ≪送武补阙≫。根据晚唐冯贽的 ≪雲仙杂记≫ 证实了史凤姬的 ≪咏神鸡枕≫ 实为唐朝妓女史凤七首系列作品之一 ≪神鸡枕≫。此外还结合背景说明资料对相关诗作的内容进行了详细考察,并认为造成这种混淆的原因在于中国都存在“襄阳”和“宣城”这一相同的地名。本文通过考察辨明了两首诗作者的国籍,避免了两首作品被误用为研究韩国妓女文学的资料,同时也提供了准确的意义解释,为正确理解作品内容提供了依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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堂神圖는 마을의 신당에 봉안된 神의 畵像을 말한다. 해안 도서 지역의 당신도는 豊漁 및 航路安全과 관련된 당신도가 많다. 변산반도는 서해상 해상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한다. 서해의 해상항로는 중국 주산군도에서 올라오는 사단항로와 산동반도에서 내려오는 횡단항로가 있다. 바닷길을 따라 사신을 보내고 문물교역이 이뤄졌다. 변산반도에는 백제가 중국 및 일본과 해상교류를 하였음을 보여주는 죽막동 제사 유적이 있다. 죽막동 해양 제사 유물은 백제시대 유물부터 조선시대 유물까지 출토되고 있으며, 이러한 제사 유물은 항해 안전을 위하여 海神에게 제사를 지낸 祭器 또는 奉獻物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변산반도는 백제시대 수도가 서해와 수로로 연결된 한성과 공주, 부여에 위치하여 중국, 일본과 해상교통을 통한 문물교류가 활발하던 당시 해상교통의 항해 안전을 위한(비는) 기도처였다. 바다에서 항해자들은 항해 안전을 위하여 항해보호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관행이 있다. 변산반도에는 해상교통의 요충지로서 항해 안전을 기원하는 해신당의 분포 비율이 높고, 다양한 해신들이 당신(堂神)으로 봉안되어 있다. 서해안의 堂祭는 堂神에 대한 제사가 중심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래서 해안 도서지역의 동제는 항해신과 풍어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二重構造를 보여준다. 부안 위도의 경우, 당제는 원당제와 용왕굿이 거행된다. 원당제는 항해보호신들이 중심이다. 당제는 항해신에게 먼저 제사를 지낸뒤에 용왕에게 풍어제를 지내는 형식을 취한다. 그래서 해신당은 항해안전과 관련하는 다양한 해신들이 배향되어 있다. 변산반도의 해신당은 격포 수성당, 위도의 대리 원당, 식도리 원당, 진리의 영신당이 있는데 이들 신당에는 항해안전과 관련하는 당신도가 봉안되어 있고, 특히 女神들이 많다. 여신이 당신으로 다양하게 등장하는 것은 중국 동해안의 해신당에 봉안된 항해신과 해안지역 관음도량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변산반도의 당신도는 주로 중국 절강지역에서 사단항로를 타고 올라오는 항해자들과 산동반도에서 횡단항로를 항해하던 사람들의 자취가 깊게 스며있는 당신도가 주류를 이룬다.
Dangsindo is a picture of a god on the wall of a private village temple. Dangsindos in the village temples in coast areas were for catching a lot of fish and safety of the sea routes. Byeonsan Peninsula was a hub of sea transportation. The sea routes of West Sea were Sadan sea route from Jusangundo, China and Hoingdan sea route from Sandongbando, China. There are remains in Jukmakdong in Buan, which shows that there were trades between Baekje and China or Japan. The remains which are wares and offerings for rituals for gods of the sea are from Baekje Dynasty and Chosun Dynasty. Byeonsan Peninsula located in between Hansung, Gongju and Buyoe during Baekje Dynasty was a praying place for the safety of sea transportation when Baekje had trades with China and Japan. Sailors have rituals for gods of the sea for their safety. Byeonsan Peninsula as a hub of sea transportation had temples for the safety of the sailors and various gods of the sea were enshrined in there. The Dangjae (rituals) in the west coast are mainly for gods of the sea for the safety of the sailors and catching a lot of fish. For example, Dangjae in Weedo, Buan has Wondangjae and Yongwanggut. Wondangjae is for gods who take care of the safety of the sailors and it is performed first then a service for Yongwang (dragon of the sea) is conducted praying for catching a lot of fish. Therefore various gods of the sea are enshrined in the temples (Haesindang) in the west coast. The Haesindang in Byeonsan Peninsula such as Suseongdang in Gyeokpo and Daeri Wondang, Sikdori Wondang and Jinri Yongsandang in Weedo had Dansindos of gods of sea, especially goddesses who take care of the safety of sailors. It looks like that the goddesses are from the temples in the east coast of China and the Buddhist Goddess of Mercy in the coast area. The Dansindos in Byeonsan Peninsula are mainly from Jeolgang area in China through Sadan sea route and Sandongbando through Hoingdan sea ro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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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음식을 통해 남과 情을 나누고자 하는 의식이 강하며, 간소한 식사와 함께 예절을 중시하는 측면에서 한국의 食文化는 인본주의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음식이라는 객체보다 인간이라는 주체와 주체 상호간의 인간관계가 더욱 중요시 된다. 중국이나 일본도 음식을 나눠 먹고자 하는 점에서는 우리와 다르지 않다고 볼 수도 있으나 한국과 같이 음식을 情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식사를 합리적으로 하는 편이다. 또 한국에는 윗사람이 먼저 수저를 든 다음에 식사를 할 수 있다든가, 어른 앞에서 술을 마실 때 좀 돌아서는 등 엄격한 예절이 많이 전하고 있는 편인데 비해 중국・일본은 이미 상당히 사라졌다고 본다. 한편 인간(주체)과 음식(객체)의 관계에 있어 우리는 비교적 중국・일본의 음식문화보다 더 자연친화적이므로 담백하고 기름기가 적어 신체건강에 더 유리한 편이다. 또한 우리는 일본과 달리 약식동원의 사상에 따라 음식을 보약처럼 여기며 건강에 치중해온 데 비해, 중국인들은 맛・향에 더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우리 음식문화의 특징은 객체와 객체 상호간의 관계에서 볼 때 일본・중국과 달리 건더기와 함께 국물이 중시되는 점을 들 수 있으며, 더구나 온식의 국물 중시로 인해 숟가락이 발달하고 나아가 수저문화가 형성되었다고 하겠다. 또한 한국식문화는 주식과 부식의 융합, 일상음식과 특별음식의 융복합 등에서도 특징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한중일 3국, 특히 고대동아시아의 食文化가 크게는 서로 비슷하다고 볼 수 있으나, 한국의 식문화를 통해 인간 상호간의 융합과 배려를 중심으로, 인간과 사물(재료)의 융합과 일치, 재료 또는 도구들의 융합과 복합적인 맛의 조화 등이 강함을 살펴볼 수 있다.
Korean and Chinese think that food is very important in life. Korean control the desire of food but Chinese express the desire of food on the other hand. And the Korean food culture is humane but the food culture of Chinese is practical. It is same that everybody have food together around a big table in China, too. But Koreans have the table manners as the adults eat first. But such as table manners get lost in China. And Koreans have a characteristics of simple food and eating style. Koreans take high nutritive food as important tonic. Especially Koreans point on healthy and Chinese point on the balance of nutrition and flavor of food. In China, there are much more side dishes than Korea. They are not fermented food. Chinese think natural food culture is important. But Korean food is plain and non-oily, therefore it is more better and healthier than Chinese food. Two nations have the hot food style. In the Korean food culture, every meal needs soup and the cooking method of boiling and steaming is important. In the end, the food culture of two countries is similar in many parts. But the Chinese food culture is practical and philosophical. One side the Korean food culture is humane and natural and many of stock. The food culture of Korea, China and Japan is similar. But it is important that the convergence between human and human or things, between materials and balance of flavor in the Korean food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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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설화 중 笑話를 현대적으로 전승 및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笑話를 스토리뱅크 및 웹사이트로 구축하고, 이를 각종 미디어 콘텐츠와 치유의 소재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설화에는 설화를 창작하고 향유하는 기층집단의 정서가 잘 드러나 있으며 특히 소화에는 삶의 문제적 국면에 대한 인식이 내재되어 있다. 또한 우리 민족이 지닌 해학과 기지, 지혜, 풍자 등이 용해되어 있다. 따라서 笑話를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이나 조울증 등의 정서적 병리현상의 치유 방안으로 활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笑話를 미디어 콘텐츠에 활용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고유 정신이 함께 어우러지는 웃음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할 것이다. 笑話를 현대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삶을 보다 인문학적으로 이해하고 성찰하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그동안 설화 조사 및 연구는 꾸준하고 다양하게 집적되어 왔다. 이러한 조사 및 연구 결과물은 각 지역 기층민의 삶을 이해하는데 초석이 되기도 하였고, 설화 전승 지역의 문화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되어 왔다. 하지만 설화는 더 이상 생성되지 않을뿐더러 전승이 어려운 환경 속에 놓여 있다. 따라서 집적된 설화 자료를 문화콘텐츠 원형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이 확대되고 있지만 좀 더 실질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설화의 웃음 화소를 각종 미디어 콘텐츠 및 치유에 활용하여 우리 민족의 정서적 원형이 현대적으로 전승되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This article suggests a plan to pass down and utilize a fable, Sohwa (humorous tale), into cultural contents in a modern way.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construct elements of humor appearing in the fable into a storybank or website, and suggest plans to develop it into healing materials and various media contents. The sentiments of the lower-class, which is the class enjoying and creating fables, are well expressed and the optimism to overcome dire conditions of life and warm support of the community are inherent in the elements of humor. Moreover, the humor, wits, wisdom, and parody of our nation are melted in. Over time, research and investigation on fables has been constantly and diversely accumulated. These research and investigation results were the basis for understanding the lower-class of each region and were an opportunity to enlarge our understanding of the regional culture where the fable was inherited. However, fables are no longer being created and are placed in an environment difficult to pass down. Now research and efforts on passing down and utilizing the organized fable materials are necessary. The movements to utilize fables as cultural contents in their original form are increasing. However, most fables are provided as animation source materials for children, utilized as materials for region festivals, or being published as children books. Consequently, this article seeks to provide a new possibility to stimulate public sympathy through the original sentiment of our nation merged with digital contents by utilizing elements of humor into various media contents. This article has suggested a plan to utilize various media contents requiring Sohwa (humorous tale) by constructing a website and creating a story bank after organizing and analyzing Sohwa among the fables collected over time. Furthermore, this article has suggested a scheme to utilize Sohwa as a healing method for mental pathologies such as depression and bipolar disorder arising from stress. Utilizing Sohwa in media contents will enable the element humor to contribute to the development of contents by merging with the unique national spirit, instead of merely being a one-time entertainment. Thus, humor appearing in media contents will retain its true meaning when equipped with the form of humanities while understanding and self-examining human and human life, instead of merely inducing light humor from the audience or achieving high audience ra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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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를 찬양하는 「소라미츠 야마토(そらみつ やまと)」 「아키츠시마 야마토(あきづしま やまと)」 「시키시마노 야마토(しきしまの やまと) 등의 찬사(讚辭)가 古事記 日本書紀 萬葉集 등에 전하고 있다. 이들 찬사의 대부분은 이 야마토에서 행해진 구니미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야마토찬(大和讚)」과 관련이 있는 구니미(國見・國望)를 조사하여, 그 찬사(讚辭)와 찬가(讚歌)가 지니고 있는 의미가 야마토와 어떠한 연관관계가 있는지를 구명하고자 한다. 많은 구니미 중에서도, 야마토를 찬양하고 있는 대표적인 구니미로는 진무천황(神武天皇)와 죠메이천황(舒明天皇)의 구니미를 들 수 있다. 전자는 구니미 찬사가, 후자는 구니미 찬가가 각각 日本書紀와 万葉集에 전한다. 일본 문학사에 있어서 이러한 구니미의 장에서 부른 노래를 「구니미 노래」라고 한다. 그러나, 죠메이 천황이 가구야마에서 구니미를 거행했다고 하는 역사적인 기록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어 역사적 사실유무는 알 수 없지만, 그 문학사적인 의의는 지대하기에 연구의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진무 천황과 죠메이 천황은 같은 야마토에서 구니미를 거행했지만, 그 구니미 장소는 와키가미의 호호마 언덕(腋上嗛間丘)과 가구야마(香具山)로 각기 달랐다. 이와 같은 장소의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진무 천황은 휴가에서부터 야마토로 동정(東征)을 하고, 그 결과 그곳에 정도(定都)하고, 즉위 31년 4월에 와키가미의 호호마 언덕에서 구니미를 하게 된다. 이 와키가미의 호호마 언덕은 그곳에 올라가 야마토 분지를 내려다보면, 야마토는 협소하지만 그 둥근 지형이 마치 잠자리가 교미할 때의 형상으로 보이는 언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야마토를 「아키츠시마(秋津洲)」라고 했다. 5 세기 후반 이후, 야마토를 지배한 천황과 그 조정을 구성하는 사람들 사이에, 아메노 가구야마가 야마토에서 가장 신성한 또는 중요한 산으로 생각되고 있었던 시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들에게는 아메노 가구야마는 미와야마 이상으로 고귀한 산이어야만 했다. 미와야마는 지신(地神-구니츠카미)의 산이고, 가구야마는 천신(天神-아마츠카미)의 산이어야 하고, 야마토의 오랜 세력을 지배하기 위해서도 그것은 필요했다. 이것은 5세기 후반 이후에 가구야마가 천황가(天皇家)의 왕권사상과 연관됨에 따라, 하늘에서 강림한 신성한 산으로 인식되어, 천황의 구니미 장으로 선택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진무 천황과 죠메이 천황의 구니미에서 사용된 「蜻蛉島(秋津洲와 蜻嶋)」라고 하는 것은 곡령을 상징하는 잠자리와 농경에 이용할 수 있는 수량이 풍부한 강물을 지닌 곳이란 의미로, 풍요로운 야마토를 상징하는 찬사로 사용된 것이다. 「目」, 「睨」,「登廻望」, 「登望國」라고 하는 행위는 단순히 보는 행위가 아니라, 구니미의 장(場)에서 구니미를 주관하는 자의 종교적인 행위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구니미 주관자의 이러한 행위에 의해서, 구니미 찬사나 찬가가 발설되는 것이다. 야마토의 구니미에서 발설된 찬사와 찬가는 각기 그 장소와 목적에 맞게끔 만들어지는 것이다. 記紀와 万葉集에는 많은 구니미가 있지만, 야마토에서 행해진 구니미도 여러 군데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구니미에서 만들어진 야마토 찬사에 있어서 그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진무와 죠메이의 구니미가 아닌가 한다. 이 두 구니미의 장은 같은 야마토이기는 하지만, 세부적으로는 와키가미의 호호마 언덕과 가구야마로 각기 다르다. 각기 다른 구니미의 장이기에 야마토를 찬양하는 찬사도 서로 다르다. 진무 천황과 죠메이 천황의 구니미에서 사용된 「蜻蛉島(秋津洲와 蜻嶋)」라고 하는 것은 곡령을 상징하는 잠자리와 농경에 이용할 수 있는 수량이 풍부한 강물을 지닌 곳이란 의미로, 풍요로운 야마토를 상징하는 찬사로 사용된 것이다. 「아키츠시마(秋津洲)」라고 하는 것은 첫째, 협소하지만, 국방에 유리한 지형이고, 수자원이 풍부한 곳으로 곡령인 잠자리가 서식하는 풍요로운 야마토라고 하는 의미의 야마토 찬사인 것이다. 「蜻嶋」에는 「秋津洲」에 내재되어 있는 국방의 유리한 지역이라고 하는 의미는 배재되고, 풍요로운 야마토라고 하는 의미를 더욱더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농경풍요의 기원이라는 측면에서, 진무의 「秋津洲」는 죠메이의 「蜻嶋」로 계승・발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この論文では、「大和讚」と関連ある國見・國望を調べて、その讚辭と讚歌の持っている意味が大和とどんな連関関係があるのかを、究明しようとした。 多くの国見のなかでも、大和を誉め称えている代表的な国見としては、神武天皇と舒明天皇との国見が挙げられる。前者は国見の讚辭が後者は国見の讚歌が、それぞれ日本書紀と万葉集に伝えられている。日本文学史において、このような国見の場で歌われた歌を国見歌という。しかし、舒明天皇が香久山で国見を行ったという史書はどこにもないので、史実かどうかはわからないが、その文学史的な意味は高く評価されいるので、研究すべき価値が大きいと言えるのである。 神武天皇と舒明天皇は同じ大和で国見を行うが、その国見の場は腋上嗛間の丘と香具山とそれぞれ違う。このような場の違いは何をいみしているのか? 神武天皇は日向から大和への東征をし、その結果、そこに都を定めて、即位3年四月に腋上嗛間の丘に登って国見をするようになる。この腋上嗛間の丘はそこに登って大和の盆地を見下ろすと、大和は狭いが、その丸い地形がまるで蜻蛉が交尾する時の形象のように見える丘だというのである。そのために、この大和を「秋津洲」と言った。 5世紀後半以後、大和を支配した天皇とその朝廷を構成する人たちのなかで、天の香久山が大和で最も神聖な、または大した山と考えられていた時期があったのである。この人たちには天の香久山は三輪山以上に高貴な山では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三輪山は国つ神の山であり、香久山は天つ神の山べきであり、大和の長い勢力を支配するためにもこれは必要だったのである。これは五世紀後半以後、香久山が天皇家の王権思想と関連されるにつれて、天から降臨した神聖な山と認識されて、天皇の国見の場に選択されたのである。神武天皇と舒明天皇の国見で使われた「蜻蛉島(秋津洲と蜻嶋)」というものは穀礼を象徴する蜻蛉と農耕に利用される水量の豊かな川水をもっている所という意味で、豊かな大和を象徴する誉め言葉なのである。「目」, 「睨」,「登廻望」, 「登望國」という行いは単に見る動作ではなく、国見の場で国見を執行する帝王の宗教的な行為なのである。国見の執行者のこのような行為によって、国見の誉め言葉と誉め歌は創られるのである。大和の国見で作られた誉め言葉と誉め歌はそれぞれその場と国見の目的に合うように作れたもである。記紀と万葉集には多くの国見のことが残っているが、大和で行われた国見もいろんな所で見つけられる。このような国見で作られた大和への誉め言葉と誉め歌において、その関連性を見つけられるものは神武天皇と舒明天皇の国見ではないかと思われる。この二つの国見の場は同じ大和ではあるが、もっと詳しく言えば、腋上嗛間の丘と香久山で、その場が違うので、大和への誉め言葉も同じではないのである。しかし、農耕の豊穣への祈願という側では、神武天皇の「秋津洲」は舒明天皇の「蜻嶋」に継承しているが、その象徴性は時代の要求によって、変更されてきたということが確認される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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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우란분회는 7세기경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행하여지고 있는 오랜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불교민속행사이다. 그 시대적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아스카 나라시대에는 기록이 부족하여 그 실상에 대해 파악하기 어려우나, 헤이안 시대에 접어들면 귀족들은 14일에 각기 준비한 분공을 사찰로 보냈고, 15일에 그것으로 사찰에서는 우란분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아귀들에게도 음식을 베푼다는 인식도 있었다. 둘째, 가마쿠라 시대에는 기존의 것에다 만등회와 고등롱이 생겨나고, 또 시아귀회도 정식 실시되었고, 무로마치 시대에는 성묘와 승려들을 초청하여 집에서 조령제를 지내는 경우도 많아져 사찰에서는 15일에 시아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산 이키미타마(生靈)와 봉오도리의 조형이라 할 수 있는 염불춤이 행하여졌다. 셋째 근세에는 우란분의 기간이 과거에 비해 배가 늘어났고, 조령을 집으로 맞이하여 조령제를 지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그에 따라 개별적으로 조령을 모시고 보내는 무카에비(迎火)와 오쿠리비(送火)가 정착되었고, 또 단가마이리가 정착되었다. 그리고 이키미타마는 중원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하여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관습으로 되었으며, 조령을 보내며, 산자와 사자가 모두 즐기는 봉오도리가 성행하였다. 넷째 현대의 오봉은 산업화와 근대화로 말미암아 많은 변화를 겪고 있는 가운데 교토에서는 전통적인 요소를 많이 계승하고 있으며, 또 전국 각지에서는 집단을 이루어 봉오도리를 즐기는 곳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하여 일본의 오봉은 개별적인 조령제를 넘어서 지역 축제화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오봉이란 일본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세시풍속임에 틀림없다.
日本の盂蘭盆會は、7世紀頃から始まって今日に至るまで行われている永い歷史性のある佛敎民俗行事である。時代的な特徵を探って見ると次のようである。一番目, 飛鳥奈良時代には記錄の不足でその実状を把握し難しいが, 平安時代になると貴族たちは14日に用意した盆供をお寺に送り、15日には寺はそれを持て盂蘭盆會を開催した。そして餓鬼にも飲食を施すという認識があった。二番目, 鎌倉時代には萬燈會と高燈籠が生じ, また施餓鬼會も行われたし、室町時代には墓参りと僧侶を招請して自宅で祖靈祭をすることも多くなり、寺刹では15日に施餓鬼會を開催したりした。そしてこの時期には生見玉と盆踊りの祖型というべき念佛踊りが行われた。三番目、近世には盂蘭盆の期間が過去に比べ倍くらい長くると共に祖靈を家に迎えて祭祀を行うのが一般化された。それによって個別的に祖靈を迎え見送る迎火と送火それから檀家参りが定着された。そして生靈は中元という名前で定着し、お土産を贈与する慣習になり, それから祖靈を送る際, 生者と死者が共に楽しむ盆踊りが盛行であった。四番目、現代の盂蘭盆は産業化と近代化に共に多くの變化が起きていることは事実であるが、そのなかで京都では傳統的な要素をそのまま繼承しているし、また全國各地では集團で盆踊りを楽しむ所は全然減っていない。言い換えれば日本の盂蘭盆は個別的な祖靈祭を越え地域祝祭化する現狀を見せているのである。このように盂蘭盆とは日本人に取ってはとても大切な年中行事であることは間違いない。
『万葉集』에 나타난 시어 ‘오모카게(面影)’考 -‘오모(面)’・‘가게(影)’를 통해서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3집 2010.12 pp.599-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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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만엽집(万葉集)』의 시어 ‘오모카게(面影)’를 ‘오모(面)’, ‘가게(影)’, ‘오모카게(面影)’로 나누어, ‘오모카게(面影)’의 의미와 그 변천과정을 고찰해본 것이다. ‘오모카게(面影)’는 덴표시대(天平時代) 만엽의 표본으로 여겨지는 11권・12권 및 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家持)와 그의 가권(家圈) 가인(歌人)인 가사노 이라쓰메(笠郎女),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大伴坂上郎女) 등에 계승된 이 시대의 신어(新語)이며,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하나의 어휘로서는 성립하지 않았다. 11권・12권의 작자 미상노래의 경우, ‘오모(面)’는, ‘오모(面)’뒤에 붙은 동사 ‘잊어진다(忘)’, ‘가린다(隠)’, ‘알고 있다(知)’, ‘변한다(変)’의 목적어적인 역할로, 보일 듯 말 듯 한 느낌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야카모치 가권 가인의 ‘오모(面)’는 한정적으로 사람의 얼굴・안면을 파악하는 방식이었다. 한편, ‘가게(影)’는 ‘水陰’, ‘草陰’와 같이 자연경물의 ‘그늘에 위치한 부분’이었으며, 야카모치 가권 가인의 노래에서는 11권・12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풀이나 꽃과 같은 경물과의 조합을 통해 노래되어지고 있었다. 또, ‘오모카게(面影)’는 ‘오모(面)’을 가진 사람의 전체적 형상이나 인상으로까지 표현하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현재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사랑하는 사람의 형상・인상도 미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변모해 갔다. 11권・12권의 ‘오모카게(面影)’는 남성노래에서 표현된 옷, 거울에 비치는 모습(얼굴), 눈썹, 미소 등에 의해 구상화(具象化)된 여성의 환영(幻影)을 그린 것이다. 한편, 오토모노 야카모치와 가사노 이라쓰메의 노래에서는, 점차 꽃이나 풀 등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경물(景物)을 통해 상대의 모습을 표출하고 있다. 그러나 야카모치가 실제로 경험한 것을 ‘오모카게(面影)’로 떠올려 노래한 것에 비해, 가사노 이라쓰메는 실제의 체험을 ‘오모카게(面影)’로 노래하지는 않았다. 또, ‘오모카게(面影)’를 떠오르는 시간에 있어서, 남성은 여성과 하룻밤을 지낸 ‘다음날 아침’이고, 여성은 남성을 기다리는 ‘저녁이나 밤’이다. 이처럼, ‘오모카게(面影)’는 실체(實體)로서 보이는 외부세계 ‘오모(面)’와 이를 마음에서 감지되는 내부세계의 괴리(乖離)를 ‘가게(影)’와 융합시켜 표현한 말이었다. 즉, 실제로는 거기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내 마음에 또렷하고 선명하게 보이는 것에 대한 심정을 드러낸 것으로, 덴표시대(天平時代)에 자기감정을 보다 세밀하게 표출하기 위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신어(新語)임을 알 수 있다. 이상, ‘오모(面)’와 ‘가게(影)’을 통하여 당풍(唐風)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덴표시대의 시어(詩語) ‘오모카게(面影)’를 고찰하였다. 앞으로는 『문선(文選)』이나 『옥대신영(玉台新詠)』 등 중국 문헌과의 비교를 통해, 이 시대의 신어(新語)의 특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보고자 한다.
「面影」は天平時代の歌の手本ともされた巻十一・十二にその用例が多く、相聞における心情表現として大伴家持と彼の周辺の女性歌人である笠女郎、大伴坂上郎女らに取り入れられたこの時代の新語で、中国や韓国においては一つの語彙として成立してはいない。カタチとして現れている現実という外世界に対し、心という内世界によって認識されたものとの不一致を認識し、その感情のより具体的な表出としての試みであり、実際はそこに存在しないが、眼前にありありと見えるものの不確実的な心情の表出であった。「面影」を構成している「面」は、作者未詳歌においては「面忘れ」というように、見えるか見えないかということに重きをがおかれていた。一方、「面影」とは「面」が限定的に人の顔・顔面としてある捉え方から、次第にその「面」をもつその人そのものの全体的形象ないしは印象へと広がりをもって捉えられ、やがて非現前の恋する者の全体的な形象・印象をも把握する有り様へと新たに展開してゆく。特に家持の歌の中に強く込められている「視認できる「面」と我の心に見える「面影」、内と外、他者も見ることができる「面」と我にしか見ることのできない「面影」の区分」と言う意識が働いているのである。巻十一・十二は天平文化の中で開花した女性による正真正銘の女歌の土壌をなすものである。ここでは男性の歌において衣、真澄鏡に映る姿(顔)、眉、微笑などにより具象化された女性の幻影が描き出されてる。一方、笠女郎と大伴家持の歌では、次第に花や草という身近な景物を通して、相手の面影を表出している。しかし、家持が経験の実体を通して「面影」を抱いているのに対し、笠女郎はそのような実体験を踏まえてはいない。また、「面影」の浮かぶ「時」が、女性は 「待つ時間」である夕、夜であるのに対し、男性は「後朝」であった。なお、女性は恋するものとの語らいを深く意識しているのであった。以上、「面影」が唐風文化の影響を大きくうけ始めた天平時代の内向的な志向の一表現としてのあり方について考察したのであるが、文選や玉台新詠などの中国文献との比較研究を通じこの時代の新語の特性をより明らかにしていくことが課題である。
『源氏物語』와 谷崎潤一郎소설 비교 -등장인물간의 비교를 중심으로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3집 2010.12 pp.629-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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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자키 준이치로 연구에 있어 겐지모노가타리와의 관련성은 절대적인 것이다. 다니지키의 소설들이 문체나 등장인물간의 구성, 혹은 플롯에 이르기까지 겐지모노가타리의 그것을 많은 부분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그러한 다니자키의 겐지모노가타리 수용을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 보았다. 첫째 겐지모노가타리라는 모노가타리문학과 다니자키의 소설이라는 문학장르 비교의 당위성을 검증해 보았고 두 번째로 다니자키와 히카루 겐지의 심리적 메카니즘 비교를 통해 다니자키 소설의 겐지모노가타리 수용을 고찰해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겐지모노가타리의 주인공인 겐지를 중심으로 겐지가 여주인공들에게 보이는 두 가지 성향을 다니자키소설에서의 등장인물들과 비교 고찰해 보았다. 본고의 결론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모노가타리와 소설이라는 장르상의 비교에서는 두 문학이 세대 간의 차이로 인한 특성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허구성과 모호성이라는 공통점으로 인하여 세대를 초월한 동일한 문학 장르의 테두리에 속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다니자키와 겐지의 비교에서는 실존했던 작가와 모노가타리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의 비교라는 아이러니를 뛰어넘어, 다니자키의 소설들이 겐지모노가타리에 등장하는 주인공 겐지의 간접체험의 결과물임을 고찰하였다. 마지막으로 겐지와 다니자키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간의 비교에서는 겐지의 여주인공들에 대한 행동양식들이 다니자키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서도 고스란히 전이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 세 가지 측면의 비교 고찰로 다니자키의 작품들이 겐지모노가타리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규명하였다.
谷崎研究において『源氏物語』との関連性は絶対的なものである。谷崎の小説が文体や登場人物の構成、あるいはプロットに至るまで『源氏物語』のそれを全般的に受容しているからである。本稿ではそのような谷崎の『源氏物語』受容を三つに分けて考察してみた。第一に『源氏物語』という<物語>と谷崎の<小説>という文学ジャンルの比較のゾルレンを検証してみた。第二に谷崎と光源氏の心理的メカニズムの比較を通して谷崎小説の『源氏物語』受容を考察してみた。そして最後に『源氏物語』の主人公である源氏を中心に源氏がヒロインに見せる二つの性向を谷崎小説の登場人物たちと比較考察してみた。本稿の結論をまとめてみると次のようになる。まず、<物語>と<小説>というジャンル上での比較では二つの文学が世帯間の違いによる特性の差はあるものの、虚構性と模糊性という共通性のため世帯を超越した同一の文学ジャンルの範囲に属していることを確認した。谷崎と源氏との比較では、実存した作家と物語に登場する登場人物との比較というアイロニーを越え、谷崎の小説が『源氏物語』に登場する主人公源氏の間接体験の結果物であることを考察した。最後に、源氏と谷崎小説に登場する人物間の比較では、源氏のヒロインに対する行動様式が谷崎小説に登場する人物たちにそのまま転移されて現れていることが分かった。この三つの比較考察と通して、谷崎の小説が『源氏物語』の影響を受けていることを究明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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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삼국지연의> 수용은 유입 초기부터 왕을 비롯한 상층 독자를 위해 중국에서 유입된 <삼국지연의> 원문을 그대로 인출 혹은 판각해 보급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사실로 보건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지연의>가 유입 초기부터 성행했음을 알 수 있으며, 여러 문인들의 문집에 기록된 글로 볼 때 비록 허황된 소설이지만 역사 교화서로서의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한글로 번역되어 출판되면서 이러한 역사 교화서로서의 역할은 축소되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삼국지연의>의 기본 주제인 촉한을 정통으로 하는 ‘대의’는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인식은 중국과 잇닿은 반도국이라는 지리적 여건상 중국의 정치 문화적 영향도 무시할 수 없지만, 이보다 더 큰 이유는 성리학이라는 국가 이데올로기가 <삼국지연의>의 주제의식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일본에서의 <삼국지연의> 수용은 중국에서 유입된 <삼국지연의>를 따로 출판하지는 않은 것으로 볼 때 유입 초기에 독자층이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최초의 자각적 주자학자인 하야시 라잔과 같은 문인들의 독서목록에 역사서류와 같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봤을 때 일본 역시 유입초기에는 역사서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삼국지연의>를 성리학적 맥락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한국이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촉한에 대한 정통론적 대의명분을 직접 내세우는 것과는 달리 일본은 <삼국지연의>의 정통론을 통해 자신들의 역사 정통론과 당시의 지배이념을 공고히 하는데 활용하고 있어 <삼국지연의>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일본어로 번역된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러한 차이가 더욱 두드러져 일본만의 <삼국지연의> 문화를 형성했으며, 가부키 등과 같은 공연물로 연희되면서는 일본풍이 더욱 가미되어 그 주제의식마저 ‘충의’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섬나라의 특수성 때문에 중국과의 정치 문화적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데다가 지배 이념도 달라 순수하게 문화적 측면만을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From the early stage of its reception to Chosun,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was copied and printed in its original Classical Chinese form in order to be distributed to the upper class readers, including the king. It seems to have enjoyed popularity among Koreans from the early stage of its introduction, and judging from the accounts in anthologies of many literati, it provided historical lesson and guidance to the readers, although it was a book of fiction. Though its role as historical lesson reduced when the Korean translation became available, the fundamental theme that supported the cause of Shu Han remained intact. This may have been a result of political consideration that came from Chosun's geographic location as the neighboring country of China. However, a more fundamental reason would be that the theme of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was deeply related to Chosun's state ideology, Confucianism. To the contrary,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in its original form from China was not published in Japan. This suggests the limited readership in Japan in the early stage of its reception. As it was listed along with history books in the reading list compiled by intellectuals, such as Hayashi Razan, it seems that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was also treated as a book of historical lesson in Japan. Hence, Japan seems to have accepted the Confucian context of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just as Chosun did. Nonetheless, while Chosun asserted the cause of Shu Han based on its direct relation with China, Japan used the logic of historical legitimacy demonstrated in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to support their own historical legitimacy and the ruling ideology. Japanese translation of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enhanced the difference even more and established a culture of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unique to Japan. When it was adopted in Kabuki, the Japanese-ness was far more strengthened and even the theme changed to the 'loyalty.' This could be a result of Japan's geographical location that allowed it to keep certain distance from China's political influence, and enabled it to accept the purely cultural side of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러시아 민담 <아름다운 아내>와 한국 민담 <우렁각시> 비교 연구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3집 2010.12 pp.687-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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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현장에서 이야기꾼이 민담을 구연(口演)하는 것은 하나의 예술작품을 창조해 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갖는 것이며 동일한 줄거리 유형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이야기꾼에 따라 어떤 요소가 첨가되거나 삭제됨으로써 다양한 변이형의 이야기들이 창조되어 수많은 민담 텍스트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의 민담 유형에 속하는 여러 변이형들을 비교할 때 우리는 그 유형의 다양한 변화 과정을 밝혀낼 수 있으며 비로소 그 민담의 예술세계가 드러나게 된다. 각편의 민담은 각 영역에서 자신의 논리에 따라 전개되며 독특한 의미론적 구조를 지닌다. 아울러 그 의미론적 구조가 변형될 수 있는 잠재성은 다른 문화의 전통에서 상이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본 연구의 전제이자 출발점이다. 이에 의거하여 본 연구는 민담 전통의 담지자인 이야기꾼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실제적인 의미를 개별적인 민담의 의미론적 구조분석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연구의 대상은 발생학적으로 민담 장르의 발전 단계가 다르고 문화사적으로 거의 관련이 없는 러시아와 한국의 결혼 시련에 관한 민담 가운데 하나인 AT465(아름다운 아내)이다.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의 인물이 주인공의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으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AT465 유형의 러시아와 한국 민담에 공통된 사항이다. 한국의 <우렁각시>는 약혼녀의 동물적 형상과 주인공에게 부과된 금기의 위반을 근간으로 태고적인 모델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 부과된 금기를 지키면 행복한 결말로 이어지고, 금기를 어기면 비극적인 결말로 끝을 맺는다는 측면에서 볼 때 <우렁각시>는 신화적인 전통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러시아 민담 <아름다운 아내>는 이야기의 전승과정에서 17-18세기 러시아 민중예술의 문화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로 인해 마법적 원조자 및 마법적 수단의 수적인 증가와 신비로운 ‘다른’ 세계에 대한 완벽한 묘사를 지향하며, ‘이’ 세계의 사회적인 세분화가 강화되고 사회적인 투쟁도 복잡하게 된다. 의미론적 구조 측면에서 볼 때 <아름다운 아내>에서 ‘아름다운’ 아내의 형상은 <우렁각시>와는 달리 주된 지위를 상실하고 ‘충실한’ 아내의 형상으로 변형되었다. 러시아 민담 <아름다운 아내>는 ‘민담’ 장르가 ‘소설’ 장르로 이행되어 가는 예술 세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Цель данной статьи состоит в изучении русских и корейских сказок сюжетного типа AT465. Мы исходим из предложения о том, что каждыйсказочныйтип задает определенную структуру, так же, как и определенный потенциал ее трансформации, который риализуется а разных этнических традициях по разному. В русских и корейских сказках сюжетного типа AT465 типологическое сходство проявляется фактически только в схеме основной коллизии: противник, имеющий более высокий, чем герой, социальный статус, пытается получить чудесную жену. Значимыми выглядит семантические различия русских и корейских сказок. Смысловой доминантой корейской сказки является пара персрнажей: герой - его жена. Наиболее устойчив во всех вариантах корейских сказок сюжетного типа AT465 запрет о времени, который заявляет улитка-невеста герою перед браком. Близость к мифологической традиции сказывается в наличии двух версий сюжета: соблюжение запрета ведет счастливому финалу; нарушение запрета - к традическому(трагический финал обычно нейтрализуется этиологическим мотивом - герой его жена после смерти превращаются в птиц). Русские сказки AT465 приобрели особый путь развития. Очевидно, не без влияния лубочной традиции доминантной в русских сказках оказалась установка на исчерпывающее изображение чудес и диковников ‘другого' мира, что обусловило тенденцию к увеличению ‘иных' пространств, волшебных помощников и волщебных предметов. Фактически ‘другой’ мир возникает в русской сказке как средство ‘извести’, ‘уничтожить’ героя. Предельный вариан ‘трудной задачи' в руссих сказках данного сюжетного типа передает формуливка: ‘поди туда-не знаю куда, принеси то- не знаю что'. Это абсолютная неопределенность главной ‘трудной задачи' - в какой-то степени доминирующий мотив в семантическом пространстве, позволяющии неограниченно расширять ее событийность и подчеркивающии особую самостоятельность панорамного изображения чудесного и диковинного ‘другого' мира. Параллельно усиливается социальная конфликтность. В целом для русских сказок сюжетного типа AT465 характерна к ‘романной' трансформации сказочного художественного мира и семантики.
다문화사회의 이해를 위한 한국-베트남 설화에 나타난 민족성 비교 연구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3집 2010.12 pp.725-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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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민족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설명방식도 가능하지만, 다른 나라와 비교를 통한 상대적인 설명방식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이러한 설명방식은 양국의 민중이 지닌 심층적인 사고를 비교적인 시각으로 이해하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다. 본 연구에서는 한국-베트남 양국의 기층의식을 <국가관> <사회윤리관> <가정관>으로 분류하고 각각에 해당하는 설화 작품들을 분석하고 비교하였다. 베트남의 <국가관>을 보여주는 7편의 작품을 분석한 결과, 신이 지켜주는 나라라는 의식과 국가 수호의 의지가 가장 우선적인 가치임이 드러났다. 이로 인해 온 국민이 국가에 희생할 수 있는 자세가 강조되었다. 한편 한국의 경우에는 5편의 작품을 선정하여 분석하였다. 이들 작품을 분석한 결과 국가적 차원의 행동이라기보다는 문무왕 같은 특정 인물의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과 함께 남편에 대한 정절의식이 강조됨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유교적 관점에서 여성을 평가하는 관점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회윤리관>을 다룬 작품들은 양국의 자료에서 각각 3편씩을 분석하였다. 이 단계의 기층의식에서는 다양한 인간관계의 유형이 형상화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의 기본적 덕목을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계급적 위상이나, 개인적인 명예와 이익을 초월하는 가치로 인식되었다. 기층의식으로서 <가정관>은 남녀 부부관계를 바탕으로 결혼과 재혼, 그리고 자녀에 관한 내용을 다룬 작품들을 통해 분석하였다. 베트남의 경우에는 여성의 주도성과 삶의 의지가 강렬하게 가정 결합을 유지시키는 힘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편중된다면 비극적인 파국을 맞는다는 것도 보여준다. 적절한 감정적 거리의 조절이 없거나,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이 없는 경우에 관련자들이 모두 죽음에 이르는 것에서 이를 증명할 수 있다. 한편, 한국에 나타난 수동적 여성성이 의지하는 남성의 가부장적 권위주의도 여성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개척하기에는 부족함 점이 있다. <콩쥐 팥쥐>에 나타난 이런 한계는 과거를 청산하고 현재를 긍정적 낙관적으로 보는 한국의 재혼담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를 통해서 무엇보다도 사회문제 해결을 통해 인문학적 발상을 도입한다는 점이 더욱 중요해졌다. 그리고 무엇을 한다는 사고의 내용들보다는 어떤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근본적인 시각의 교정이 중요함도 알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각국 문화가 지닌 상대적인 가치를 찾아내고 이것이 서로 보완하거나 절충할 수 있는 제한된 가치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을 중요한 연구의 성과로 제시할 수 있다.
Khi đi vào tìm hiểu tính dân tộc của bất kỳ quốc gia nào, chúng ta hoàn toàn có thể dựa trên phương pháp phân tích, lý giải, song điều đó sẽ hiệu quả hơn nhiều khi chúng ta sử dụng phương thức so sánh và đi đến những nhận định mang tính khách quan. Cách giải quyết vấn đề này giúp chúng ta hiểu được tư duy sâu sa của dân tộc hai nước qua cách nhìn đối chiếu, đồng thời, qua đó, chúng ta còn đào sâu, khám phá cụ thể hơn nữa về những ý nghĩa từ lâu đã bị bỏ qua. Nghiên cứu đi vào phân tích, so sánh những tác phẩm truyện cổ của hai nước Việt Nam và Hàn Quốc bằng việc phân loại ý thức nền tảng dựa trên những tiêu chí gồm ‘ý thức quốc gia”, ‘ý thức xã hội’ và ‘ý thức gia đình’. Qua 7 tác phẩm của Việt Nam chúng tôi thấy ý thức quốc gia là giá trị nổi bật nhất .Đó chính là ý thức về một đất nước luôn được các vị thần che chở và ý thức giữ gìn, bảo vệ đất nước, qua đó, khẳng định mạnh mẽ tinh thần đấu tranh, hy sinh cho quốc gia, dân tộc. Bên cạnh đó, với Hàn Quốc, qua phân tích và đối chiếu 5 tác phẩm, ý thức quốc gia không biểu hiện cụ thể bằng những hành động mang tầm cỡ quốc gia, mà được nhấn mạnh bởi sự trung thành với nhân vật cụ thể như Văn Vũ Vương, hay tấm lòng thủy chung, son sắt của người phụ nữ với người chồng của mình. Điểm này có thể lý giải dựa trên quan điểm nhìn nhận về người phụ nữ trong quan niệm Nho giáo hai nước. Ý thức xã hội được chúng tôi khảo sát qua 3 tác phẩm của mỗi nước. Ở giai đoạn này, hàng loạt các mối quan hệ con người đa dạng đã được hình thành, song những quan niệm truyền thống, cơ bản về đạo đức của con người đều vẫn được nhấn mạnh ở cả hai nước. Đó chính là những giá trị được coi là vượt qua mọi ranh giới địa vị tầng lớp, danh dự và lợi ích cá nhân. Một giá trị khác nữa trong nền tảng ý thức, đó là ý thức gia đình. Ý thức này được xem xét qua những tác phẩm đề cập tới việc kết hôn, tái hôn trong quan hệ vợ chồng và những nội dung liên quan đến con cái. Với Việt Nam, vai trò chủ đạo và ý chí vươn lên trong cuộc sống của người phụ nữ được coi là nguồn động lực mạnh mẽ, giúp họ gìn giữ hạnh phúc gia đình. Song đôi khi sự thiên lệch trọng trách về một phía đã dẫn đến những sụp đổ mang tính bi kịch. Điều này thể hiện qua sự thiếu khuyết những điều chỉnh cự ly tình cảm thích hợp, hoặc những giá trị mới không được xác lập, dẫn đến cái chết của những nhân vật liên quan. Mặt khác chủ nghĩa quyền uy mang tính gia trưởng của những người đàn ông đối với những người phụ nữ thụ động, lệ thuộc, đã dẫn đến sự thiếu khuyết những đột phá nhạy bén trong cuộc sống của người phụ nữ. Hạn chế này của câu chuyện <KongchuyPatchuy> có thể được tháo gỡ dựa vào quan điểm dứt bỏ quá khứ đểh ướng đến tương lai thể hiện trong luận thuyết về sự tái hôn của Hàn Quốc. Qua nghiên cứu này, điều ý nghĩa hơn cả là thông qua giải quyết những vấn đề của xã hội nhằm xác lập những tư tưởng mang tính nhân văn. Đồng thời, điều quan trọng ở đây chính là sự thay đổi những quan niệm cơ bản, không phải về mặt nội dung của quan niệm thế nào mà là tư thế hành động của con người. Về điểm này, nghiên cứu đã thu được kết quả quan trọng, đó chính là sự tìm ra những giá trị mang tính đối chiếu của văn hóa hai nước và những giá trị này là những giá trị có thể bổ sung và điều chỉnh cho nhau một cách nhất địn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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