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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어 기반 가설에서는 고구려어를 백제어나 신라어와 다른 계통에 속한 이질적인 언어, 곧 이국어로 규정한다. 즉, 이에서는 오늘날의 한국어는 조선어를, 조선어는 고려어를, 고려어는 방언적 차이 정도만 있는 백제어를 흡수한 신라어를 계승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고구려어는 신라어나 백제어와는 계통이 다른 언어, 곧 이질적인 언어이며, 단지 고려어에 ‘들온말’이라고 본다.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은 설을 언어학적 측면에서 논의하였다. 논의의 결과는 아래와 같다. 첫째, 신라어와 고구려어는 어휘적 측면에서 유사하며, 음운 체계와 문법 구조가 일치한다. 둘째, 고구려어와 고려어 역시 어휘적 측면에서 유사하며, 문법 구조가 일치한다. 그리고 고려어의 음운 체계는 고구려어의 음운 체계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 한국어는 한국어를 구성하는 모든 방언의 총체다. 따라서 신라어만이 한국어 형성에서 기반이 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 어려워 보인다. 결론적으로, 한국어 형성에서 신라어가 기반이 되었다고 보는 가설은 언어학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설을 유지할 경우, ‘중국사에 고구려사 편입하기’에 이론적 토대가 될 우려가 있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 설은 ‘한국어 단일기원설’을 부정하는 것이어서 남북 이질화를 부추기는 데 이용될 우려도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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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堤上은 5세기 초 외국에 인질로 간 두 왕자를 구출하고 목숨을 바친 신라인이다. 歃良州干 박제상은 이사금 시기에 삽량주로 이주하여 정착한 婆娑王의 방계 후손이었다. 박제상의 희생이 있은 후, 그의 둘째 딸이 未斯欣에게 출가하여 박제상의 직계후손은 김씨왕실의 외척이 되었다. 삽량주는 탈해왕 시기 무렵부터 가야-왜와 경쟁하던 신라의 거점지역이었다. 신라는 경자년(400) 고구려군의 도움을 받아 국가적 위기를 벗어난 이후 국내에 고구려군이 주둔하게 되었는데, 특히 삽량주는 한반도 모든 국가와 왜까지 얽힌 분쟁지역이 되었다. 박제상은 5세기 초반 신라 대외관계의 주요 지역인 歃良州의 干으로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사람을 꿰뚫어 보는 안목과 설득력 있는 언변을 지녔다. 또한 국제정세에 정통한 지식을 바탕으로 외교적・전략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강인한 절개와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눌지왕이 박제상을 발탁한 이면에는 정치적인 배경도 고려되었다. 고구려가 이이제이 전략으로 신라 내정에 간섭하는 가운데, 내물왕 이후 눌지왕 즉위까지 奈勿系와 實聖系는 치열한 왕권다툼을 펼쳤다. 최종 승자가 된 눌지왕은 실성계를 제압하였고 석씨족단을 추방하였다. 아직 중앙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한 눌지왕은 자신의 세력 기반인 소백산맥 부근 재지세력과 인질구출 문제를 상의하였다. 그들은 박제상을 추천하였는데, 박제상이 지닌 성품과 실성왕의 사위로서 중앙정치에 참여했던 경험, 삽량주간으로서의 실무능력이 고려된 결과였다. 박제상이 임무를 완수한 이후 눌지왕은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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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身分을 나타내는 威勢品으로서 耳飾에 대한 논고는 상당히 축적된 바 있다. 그런데 주목을 요하는 耳飾이 존재한다. 백제의 한성 도읍기(BC.18~AD.475)에 제작한 4곳의 耳飾들이었다. 서울의 석촌동과 익산 입점리와 전라남도 谷城 석곡리와 방송리에서 출토된 모두 4개의 金製 耳飾에 관한 것이다. 백제의 國都였던 서울을 軸으로 할 때 익산은 그렇다 치더라도 곡성은 산간 지대인 동시에 交通路의 부담이 큰 遠距離임이 분명하였다. 그런 관계로 곡성 출토 耳飾의 편년을 웅진성 도읍기(475~538)로 상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경우는 日本書紀 神功 49년조에 대한 이해가 전제될 때 풀리게 된다. 神功 49년인 369년에 백제군은 낙동강유역에서 우회한 후 古奚津인 康津에서 집결하여 忱彌多禮를 屠戮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백제가 要港인 강진을 장악했고, 침미다례인 해남을 철저하게 제압했다는 것이다. 백제는 이때 중국의 新나라 화폐인 貨泉이 출토될 정도로 교역의 거점이기도 했던 군곡리 패총을 끼고 있는 해남을 장악했다. 그 후에 백제 아화왕의 무례함을 빌미로 倭가 빼앗아 갔다는 東韓의 땅 가운데 침미다례와 더불어 谷那가 보인다. 이로 미루어 볼 때 谷那 역시 침미다례와 더불어 369년 무렵에 백제에 장악되었던 것으로 간주된다. 동시에 고흥반도의 안동 길두리 고분의 피장자가 백제 중앙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음이 드러 났었다. 그렇다고 할 때 한성 도읍기의 백제는 지금의 전라남도 해안인 강진과 해남 및 고흥반도 일원을 장악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4세기 후반 이후 백제는 전라남도 해안을 장악했던 것이다. 그런데 백제 근초고왕은 倭에 使臣을 파견하여 谷那鐵山의 우수함을 선전하였다. 백제왕이 倭王에게 하사한 七支刀는 谷那鐵山의 山鐵로 제작한 것이었다. 그러한 谷那鐵山의 위치에 대해서는 황해도 谷山을 비롯하여 그 인근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많았다. 백제가 이 무렵 고구려에 대한 군사적 우세를 취하는 상황에서 새롭게 지배한 鑛山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정은 전혀 타당성이 없는 것으로 밝혔다. 반면 谷那는 전라남도 谷城으로 究明되는 동시에 백제가 남해안 일대를 장악하는 상황에서 개척한 鐵鑛으로 밝혀졌다. 곡성에서는 철광의 존재를 암시하는 정황적 증거들이 많았다. 良質의 鐵鑛인 谷那鐵山의 개발과 관련해 당시 중요한 鐵鑛은 운송로의 용이한 개척이 전제되어야만 했다. 곡성의 谷那鐵山은 보성강과 섬진강을 매개로 한 후 남해안과 서해안을 거슬러 올라가서 백제 중앙으로 공급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니 백제의 섬진강유역 진출과 장악은 4세기 후반까지로 소급될 수 있는 것이었다. 무녕왕대에 이르러 섬진강유역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백제와 대가야가 대립하게 된 것은 谷那鐵山의 광물 운송로의 항구적인 확보와 대외 교섭 창구의 확보라는 양보할 수 없는 긴박한 이해관계가 충돌된 데서 비롯되었다.
古代 韓・中・日 漢字音 比較를 통한 韓國漢字音의 變化 考察-[기, 시, 지] 漢字音에 限하여-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5집 2011.08 pp.10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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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강원도 인제군에서 전승하고 있는 김부대왕(마의태자)제에 대한 고찰이다. 김부대왕(金富大王)은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소위 마의태자를 이 지역에서 부르는 칭호이다. 이 제사는 현재 정사(正史)에 기록이 없으므로 역사적 사실여부에 대한 논란이 많다. 김부대왕의 실체부터 대왕제의 신격, 대왕제의 실체, 변화 등까지 그야말로 극과 극의 대결이 이뤄지고 있다. 이들 논란을 정리하면서 필자의 입장을 밝혔다. 먼저, 김부대왕의 실체에 관한 것이다. 김부대왕의 실체는 한자표기에서 혼란이 있었다. 경순왕을 삼국사기에서 한자로 김부대왕(金傅大王)으로 표기하였는데, 부자 부(富)자를 쓰는 김부대왕(金富大王)과 한글 음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논의 결과 한자음의 부(傅, 溥, 富)는 혼용되어 쓰였고, 한자표기 자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에 金傅大王과 金富大王은 다른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다음은 신격에 대한 것이다. 신격에 대한 논란은 마을에 흔히 있는 신당(神堂)이었는데 어느 시기부터 김부대왕(마의태자)을 모시는 인격신으로 바뀌었다는 주장과 원래부터 김부대왕을 모셨다는 주장의 대립이었다. 역사적 사실은 알 수 없으나, 현재 김부대왕제를 지낸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다음은 제사의 변화를 살폈다. 김부대왕제는 개인-마을-조상제사의 형태로 변해왔다. 그리고 동제는 복을 구하는 것과 인격신에 대한 것이 복합적으로 진행되다가 어느 시기부터 인격신을 제사하는 추모제의 성격을 띠었다. 그리고 김부대왕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층의 신이었고, 인구수의 변화에 따라 제각의 수에도 변화가 있었다. 김부대왕제는 김부리 지역의 인격신으로 좌정해 있었고, 이 지역에서만 전승했으며, 제의 속에 구국활동과 관련한 특성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 논의는 천 년 이상 이어져왔다고 추정하는 제사의 실체와 그 변화를 고찰했다는 측면에서 의의를 가진다. 곧, 우리나라 인격신을 모시는 동제의 변천과 특성의 단면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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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서남해안 지역에서는 중국의 위진남북조시대와 당대를 배경으로 하는 石舟說話가 전승해오고 있다. 석주설화의 핵심은 배가 石舟, 石船이라는 점, 海岸漂着形이란 점, 佛法을 전하는 傳法船이란 점이다. 전법선에는 불상, 불경, 불탑 등 사찰 창건과 관련하는 불교보물이 배안에 가득 실려있다. 그리고 석주는 海岸에 漂着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는 佛緣의 땅을 찾아서 해안 포구에 到來하는 형식이다. 傳法船 외에 觀音像을 안치한 觀音船도 있다. 이러한 석주는 중국 長江 下流 杭州灣과 明州, 舟山群島에서 해상항로를 따라 한반도 서남해안에 漂着하는 방식을 보여주는데, 실제 중국 절강성 보타산에는 돌로 만든 배형상의 석주가 기념물로 보호받고 있다. 한반도 서남해안에서는 석주의 실체없이 설화전승이 이뤄졌지만, 중국 주산군도 보타산에서는 석주의 실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불법전래가 중국의 항주만 장강유역인 明州 일대에서 한반도 서남해안 사이에서 이뤄졌음을 입증해준다고 볼 수 있다. 석주설화는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魏晋南北朝時代와 唐代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에 활발한 불법전래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석주는 중국에서 佛像과 經典을 실고 海東 諸國에 불법을 전파할 목적으로 바다를 건너오지만, 중국 용문석굴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유민들이 불사활동을 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양국 사이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불사활동은 한반도 서남해안에 傳法船과 觀音船이 표착하는 석주설화의 배경이었다. 석주는 중국의 삼국시대, 위진남북조시대, 唐代에 이르는 기간에 신라와 백제 지역으로 건너오고 있다. 석주의 한반도 도래는 중국에서도 불교문화가 발달하던 西晋과 唐代에 집중되고 있다. 서남해안 지역에서 석주설화가 깃든 곳에는 불사활동 및 불교문화가 발달한 곳이다. 성덕사 관음사 사적기에 등장하는 대흥현은 충남 예산지역으로 백제불교가 발달한 곳이며, 해남 미황사에도 僧侶, 村主, 香徒가 佛事活動을 주도하였다는 역사 기록이 석주설화의 신빙성을 높게하고 있다. 석주설화는 단지 구전설화가 아니라 事迹記와 事蹟碑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건일 수 있다. 석주설화의 역사성은 해남 미황사와 고창 大懺寺의 大雄寶殿이 一千年동안 5重修를 하였다는 상량문 기록도 뒷받침한다. 석주설화는 삼국시대 불교 공인 이전과 이후에 한반도 서남해안으로 중국의 불교문물이 전파해와 불사활동이 활발하게 전파되었음을 말해주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1624년 奏請 使行錄의 변이 양상과 그 의도 - 한문본 「朝天錄」과 국문본 「됴텬녹」을 중심으로-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5집 2011.08 pp.20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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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624년 奏請使行을 소재로 한 使行錄들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이 사행록들은 奏請使 李德泂(1566-1645)을 비롯한 사신 일행이 중국 황제의 誥命과 冕服을 허락받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일화를 소재로 한 사행록은 한문본과 국문본을 통틀어 현재 다섯 작품이 남아 있다. 본고에서는 이 중 한문본과 국문본의 善本(「朝天錄」・「됴텬녹」)을 중심으로 비교・대조하고, 그 차이의 양상을 도출했다. 그 차이는 ‘한문본보다 국문본이 인조반정의 정당성을 보다 강조하고 주청사행의 성사를 보다 낙관한다’로 정리할 수 있다. 특히 국문본 초반부를 보면, 인조반정의 정당성을 과거 정권의 倫紀의 부재에서 찾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는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가. 역사학계의 논의를 살펴보면, 인조는 집권 이후 人倫 중에서도 특히 天倫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인조가 오랑캐에 굴복함으로써, 反正의 명분 중 하나였던 背明을 스스로 자행했기 때문에, 또 다른 명분이었던 廢母殺弟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풀이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국문본의 특징적 모습은, 이 당시 정치 명분론의 변동과 관련이 깊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객관적 기록물의 성격이 강한 한문본에 비해, 국문본은 상대적으로 당대의 정치적 이념이나 주관적 해석이 작품에 많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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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은 사도세자의 아내인 혜경궁 홍씨의 회고를 담은 작품이다. 저술시기에 따라 세 권, 혹은 네 권으로 나뉘는 <한중록>은 각 권마다 다른 성격을 갖는다. 궁중 여성의 자전적 수필, 정치적 관점을 피력한 역사서, 영조와 사도세자 등 문제적 인물의 심리를 관찰하고 탐구한 심리분석서이자 전기, 긴 세월의 객관적 사실에 주관적 정서가 혼합된 소설적 허구 등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기존의 단일한 장르 개념에 넣어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한중록>의 이러한 특성은 자유롭고 독자적인 글쓰기 방법을 택한 여성적 글쓰기의 한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본고는 특히 <한중록>의 극적인 특성에 주목하고 임오화변에 대한 기술을 중심으로 하여 극적인 구조를 추출하였고 주요 인물에 대하여 극적 캐릭터로서의 인물 분석을 시도하였다.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의 파란만장하고 강인한 인생이 뛰어난 문학성을 통해 구현된 작품이다.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보편적 인간의 내면과 가족간의 갈등과 권력에 대한 근원적 욕망을 드러냄으로써 공간적으로는 세계적인 보편성을 갖는 동시에 시간적으로도 과거에 고착되지 않고 현대성을 획득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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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대 중국 지식인들에게 있어, 예맥을 단지 중국 밖의 ‘오랑캐’의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근대에 접어들어 ‘민족’에 대한 근대적 해석이 이루어지면서 예맥은 동북지역의 중요한 종족의 한 갈래로 인식 및 주목되기 시작한다. 1930년대 침략 정당화를 위한 일제의 동북 연구가 본격화 되면서 그에 대한 반발로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예맥을 비롯한 동북지역 고대 종족・역사・지리에 대한 현대 학문체계를 접목한 연구가 시작된다. 그 뒤 80년대, 개혁개방과 학문의 자유화는 예맥을 포함한 동북 지역사 및 민족사에 관한 활발한 연구를 이끌어냈다. 또 최근 들어 고구려 귀속 논쟁과도 맞물리면서 예맥 연구는 더욱 주목 받게 되었으며, 대량의 연구 성과를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이들 연구의 시작 자체가 현실적인 국경문제 내지는 역사문제와 연관되어 있어, 지나치게 정치적인 시각을 전제로 하고 있다. 중국 학계의 예맥 연구는 주로, ‘예’・‘맥’・‘예맥’의 실체에 관한 문제, 예맥의 기원과 지리적 위치에 관한 문제, 부여・고구려와의 연관성 문제, 예맥 문화 등 분야에 초점이 맞춰져왔다. 현재 중국학계에서는 예와 맥이 서로 다른 실체의 종족집단이라는 說이 대체적으로 우세하고 있는데, 예와 맥, 예맥을 동일한 종족 실체로 이해할 경우, 어떻게든 현재 한반도 인종과 맥・고구려 등 문제를 연관시킬 수밖에 없는 부담 때문이다. 또 예맥의 기원과 지리적 위치에 대한 논의는 크게, ‘토착설 (동북지역 및 한반도)’, ‘이동설 (내륙지역, 발해연안)’, ‘예=토착, 맥=이동 설’로 3분되고 있다. 토착설에서는 예맥족의 독자성을 강조하여, 중국영토의 일부인 동북지역 토착종족의 한 갈래라는 정체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그에 비해 이동설에서는 예맥의 기원 자체를 中原 등 내륙지역에서 찾음으로써, ‘고대적 연관성’에 대한 부각을 통해 ‘현재적 연관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또한 ‘예족=토착, 맥족=이동’설에서는 예와 맥의 구분을 전제로, 예족과 한민족의 연관성은 일부 인정하더라도, 맥족은 전혀 별개의 종족으로서, 중국과 친연성이 깊은 족속임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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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이나 국가의 시조신화에서 시조의 혈통은 신성화되게 마련이고, 그 신성화의 방법은 대체로 불부이잉(不夫而孕)의 형태를 띠며 천제자(天帝子)를 상징하는 매개체를 통해서 잉태하는 것이다. 그런데 탁발선비족(拓跋鮮卑族) 시조신화에서는 천녀(天女)가 지상의 남자와 관계하여 시조를 낳는 구조로 되어 있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유형이라고 할 만한 이러한 ‘천녀의 아들’ 시조신화는 은・주 시대부터 내려오던 천명(天命)사상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한편으로 탁발선비 사회 여성의 높은 위상을 바탕으로 생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대국(代國)에서 북위(北魏)로 이어지는 탁발선비족 국가에서 황후는 황제권을 대신할 정도로 정치적 권한이 컸고 국가의 흥성을 기원하는 제천의례를 직접 주관하기도 했다. 제의에서 여무(女巫)는 천지의 신들에 대한 제사를 담당하고 사관(祀官)은 조상신들에 대한 제사를 받드는 것으로 역할이 구분되었다. 즉, 천(天)에 대한 제의에 여무, 황후 등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천녀 시조모는 바로 이러한 여성의 높은 지위와 천(天)과의 연관 속에서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 천녀 시조모는 한편으로 당시에 많이 등장하던 천녀설화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어 <동영과 천녀>와 <백수소녀>는 천명을 받은 천녀가 하강하여 남자를 돕거나 혼인하는 내용인데, 이는 천명을 받은 천녀가 탁발힐분과 동침하여 시조를 잉태하게 되는 탁발선비 시조신화의 구조와 똑같다. 즉, ‘천명을 받은 천녀’의 하강이라는 동일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탁발선비 시조신화는 이 두 설화와 같은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탁발선비족에게서 시작된 ‘천녀의 아들[天女之子]’ 형 시조신화는 이후 거란족, 여진족, 만족, 그리고 몽고 두이백특족(杜爾伯特族), 몽고 계통의 달알이족(達斡爾族) 등으로 이어져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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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蕃’・‘歸化’ 등, 당·일본・고려에서는 동일한 律令 개념이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각각의 이해도에는 차이가 있었다. 즉 당에 있어서는 自他의 국가간의 관계가 상하라는 수직적 관계로, 일본에 있어서는 특별한 상하 의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 고려에 있어서는 유동적 상하관계로 등의, 각각의 상이한 對 他國觀을 바탕으로 하여 ‘蕃’이라는 율령적 개념도 사용되고 있었다. 또한 ‘歸化(投化 등)’에 대해서도, 고려와 같이 중국식의 王權 歸依 이데올로기 차원에의 해석에 집착하지 않고 단순히 「來投」정도로 이주민의 유입을 이해하고 있거나, 일본과 같이 일본 영역내로의 정착 정도를 ‘歸化’라고 이해하는 등, 3국에 있어서의 그 이해도에는 서로 다름이 있었다. 이는 동일한 율령 개념에 의한 표현이라 할지라도, 이에 대한 그 국가 나름의 이해와 인식 정도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말해준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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滿開한 연꽃에서 神이나 貴人, 또는 亡者가 상반신을 드러내며 출현하는 연화화생 모티브의 그림이나 부조, 벽화 등은 아시아의 전 지역에서 발견되는 글로벌 문화이다. 그러나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 본다면 연화화생과 연엽화생은 구별해야 마땅한 용어였다. 따라서 한국이나 일본의 연화화생 문화가 중국에서 전래되었다는 통속적인 언설이 아니라, 연엽화생과 연화화생이 본래 인도에서는 어떠한 신화적 사상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을까 하는 중국불교 이전의 문제로 접근하려고 하였다. 먼저 일본의 불교장식이나 회화에서는 연엽화생과 연화화생에 대한 단계적 표현이 두드러졌는데, 가령 前者를 인간의 화생, 後者를 신의 화생으로 나누려는 의도가 읽혀졌다. 한국의 사찰 벽화에서도 연엽화생은 연화화생의 前段階라는 화가의 의도가 엿보인다. 즉, 전자에서 극락에 도달한 망자가 후자에선 왕생을 완성해가는 것이다. 그 밖에도 한국과 중국의 민속에서는 연엽화생이 祈子信仰과 부부의 금실을 대표하는 도안으로 토착화하였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편 연엽화생의 발상지인 인도에서 본다면 연엽이나 연꽃은 신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생명력의 원초적 형상화가 연잎이었으며 조물주가 최초로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낸 곳도 연못(lotus pond)이었다. 神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개별자 역시 연잎에서 비롯하였으니 연잎은 바야흐로 연꽃보다 한 발 앞선 생명력의 근원이었다. 연엽화생의 보편성과 상징성을 이상과 같이 일본에서 인도에 이르는 문화 전파의 루트를 따라 살펴보았다. 이 세상이 구체적으로 만들어지던 단계에서는 연화화생이 화려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 부정할 수 없으나, 그 전 단계, 즉 최초의 생명력이 응집하던 단계야말로 연엽화생의 역할이었다. 즉, 연엽화생과 연화화생은 신화적 전개의 전후관계나 상하관계를 표상하는 단계적 장치였다. 연엽화생은 구체적 신들이 본격적으로 태어나기 전 단계, 다시 말해서 태초의 생명력 형성의 이야기였으며 우주에서의 개별자 형성, 즉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을 보여주기 위한 시각적 장치였다. 연엽화생에 담긴 고대 인도의 신화적 사상이 중국을 경유하면서 형이상학에서 형이하학, 즉 속화(俗化)의 길을 걷기도 하지만 원의를 지금까지 남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상이 누락된 상태의 민속은 문화변이를 일으키면서 한국과 일본에까지 전래되기도 하였다. 요컨대 하나로 존재하는 우주적 전체와 그곳을 출처로 무수한 개별자들이 탄생한다는 신화 이야기, 즉 고대 인도인들의 범아일여 사상은 연엽화생과 연화화생이라는 두 개념이 상호 불가분으로 존재하면서 성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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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다문화시대에 민족갈등을 유발하는 단일민족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다문화적 관점에서 신화에 대한 해석과 새로운 가치를 규명하고자 한 것이다. 한국사회는 급격하게 다문화사회로 이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가 혼재되기도 하고, 문화 간의 충돌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시대에 기존의 단일민족주의에 기반 한 신화 해석은 타자에 대한 배척과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 따라서 신화의 보편성에 초점을 맞추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신화에 내재된 보편적 원형과 신화적 상징으로 공존과 융합의 가치를 모색해야 한다. 건국신화는 건국 시조의 신성성과 국가의 정당성이 강조되는 신화이기 때문에 연대와 통합의 시각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건국신화를 통합의 서사로 해석하면 단군신화의 경우 환웅과 웅녀의 결합은 타자가 주체에 일방적으로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 모두 기존의 자기정체성을 변화시키면서 새로운 연대와 통합에 이르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또한 주류 신화에서 소외된 타자를 중심으로 하는 신화 해석이 요청된다. 특히 남성 건국주체 중심의 건국신화에서 소외된 女神 중심의 무속신화를 주목해야 한다. 바리공주의 경우는 아버지로 상징되는 남성 중심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저승에 약수를 구하러 간다. 이것은 표면적으로 보면 바리공주가 주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 같지만, 바리공주는 자기부정과 희생으로 타자와 주체의 관계를 해체하고 포용과 화해를 통한 새로운 연대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신화는 상징을 통해 세계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다문화시대라는 변화한 환경을 맞이하여 기존의 민족주의적 관점을 극복하는 다문화적 해석이 필요하다. 신화에 내재된 문화적 다양성과 통합과 화해의 가치를 주목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주체와 타자의 조화로운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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