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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고대학 [DONG ASIA KODAEHAK ; The East Asian Ancient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동아시아고대학회 [The Association Of East Asian Ancient Studies]
  • pISSN
    1229-8298
  • 간기
    계간
  • 수록기간
    2000 ~ 2026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기타인문학
  • 십진분류
    KDC 910 DDC 950
제32집 (12건)
No
1

『高麗圖經』에 나타난 高麗의 民俗 硏究

宋宰鏞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32집 2013.12 p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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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0원

高麗圖經은 宋의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徐兢(1091~1153)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글로 쓴 뒤, 모두 그림을 그려 서 300여조 40권 분량으로 편찬한 책이다. 고려도경은 12세기 고려의 정치・경제・사회・문화・역사・종교・교육・ 민속・음악・미술・공예・복식・해상교통・軍制・지리・건축 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집이다. 특히 필자가 주 목한 것은 고려도경에 나타난 민속이다. 현전하는 고려의 민속 관련 자료가 별로 없는 상황에서 특히 고려도 경에 나타난 민속은 12세기의 민속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러므로 필자는 고려도경에 나타 난 민속 가운데 의식주・의례・민간신앙 등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하였다. 본고에서 논의한 사항들을 종합하여 결론으로 삼으면 다음과 같다. 고려도경에 나타난 衣食住에서 衣의 경우, 왕의 冕服은 대체로 九旒冕 九章服이며, 公服과 喪服에 대한 기록 은 고려도경에서만 보인다. 특히 白紵袍는 고려시대의 基本袍制였다. 그리고 서긍이 고려를 다녀간 전후의 풍 속은 白紵衣, 黃裳이 상하 婦女의 通服이었다. 고려도경은 12세기 나아가 고려시대의 의생활을 살펴볼 수 있 는 귀중한 자료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食의 경우, 곡물로는 멥쌀・보리・밀・수수・기장・조・참깨 등을 들 수 있고, 면은 잔치음식에 사용하였다. 그리고 서민들은 채소류를 주로 먹고 고기를 먹는 일은 거의 드물었으며, 土産茶와 탁주를 주로 마셨다. 그리고 住의 경우, 당시 서민들의 住生活이 열악했음을 알 수 있다. 의례에서 국가의례의 경우, 圓丘祭와 宗廟제사, 神祠제사를 지냈다. 일반의례의 경우, 당시의 납폐와 혼인제 도(일부다처제와 축첩, 이혼과 재혼)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가난한 서민들 중에는 봉분도 안 만들고 野 葬을 한 사실, 그리고 제례에 불교의식이 영향을 끼쳤다 점 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2세기의 혼례와 상례, 제례 등을 엿볼 수 있어 의미가 있다. 민간신앙의 경우, 무속과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고려조의 전통적 민간신앙은 祈福信仰이었다. 고려는 불교 가 국교와 같으면서도 도교와 더불어 민간신앙도 공존하고 있었다. 기타에서는 불교적 세시풍속인 연등회와 팔관재, 그리고 百戱와 부채, 松烟墨과 黃毫筆, 고려청자 등이 눈길 을 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도경은 12세기의 고려의 민속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려도경은 민속학적으로도 그 의미와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2

우언의 교육적 가치와 활용 방안

윤승준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32집 2013.12 pp.3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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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00원

본고는 우언의 교육적 가치와 활용 방안을 검토함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우언의 교육적 가치를 ‘내면적 자아의 고양과 인격의 성숙’, ‘논리적 추론과 정서적 공감에 기초한 설득’, ‘표층적 현상 너머의 이면적 의미 파악’ 등 3가지 측면에서 검토하였다. 즉 우언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반성을 통해 내면적 자아의 고양과 인격의 성숙을 도모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으며, 인지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정서적‧행위적 차원의 태도 변화까지 고려한 설득 방식이라는 점에서도 교육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고정관념이나 관습적인 태도로는 읽어낼 수 없었던 표층적 현상 너머의 진실을 대면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교육적 가치가 있다. 한편 우언은 의사소통교육과 사고교육, 가치관교육에서 활용할 수 있다. 의사소통교육과 관련해서는 우언을 통해 표층적 의미와 이면적 의미를 모두 읽어내게 하는 중층 독해를 수행하도록 할 수 있으며, 우언 글쓰기의 원리를 활용한 쓰기 교육을 시도할 수 있다. 사고교육에서는 학습자의 관찰력과 추론 능력, 상상력을 신장시키는 데 우언을 활용할 수 있고, 가치관교육에서는 우언에 담긴 도덕적 교훈이나 철학적 깨달음을 활용하여 학습자의 가치관 형성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특정 교과나 영역을 넘어선 통합 교육을 시도하고자 할 경우에는 그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우언이 더욱 큰 빛을 발할 것이다.

3

菊圃 姜樸과 白蓮詩社의 한시 연구

맹영일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32집 2013.12 pp.69-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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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00원

조선후기의 영조‧정조‧순조 시대는 각 색목과 기술직 중인, 서얼, 여류 시인들이 집단을 형성하여 문화활동을 활발히 전개한 시기로, 그 우호적 친선관계를 유지하고, 고금의 사적을 담론함으로써 詩事를 논하는 기능을 수반하였다. 18C 시기 남인의 대표적인 시인이었던 菊圃 姜樸(1690~1742)도 여러 차례 시사를 결성하여 시창 작을 하였다. 국포의 문학연구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시사는 ‘白蓮詩社’와 ‘西泉梅花詩社’이다. 두 시사는 시 기적 차이뿐만 아니라, 참여한 인물에도 차이가 있다. 백련시사는 국포를 비롯한 남인 문외파 계열의 핵심인 물이었지만, 서천매화시사는 대부분 소론계 인물들이었다. 백련시사는 문외파 남인들인 국포 강박, 신절재 이 인복, 모헌 강필신, 청담 이중환, 약산 오광운에 의해 결성되었다. 경종의 즉위 후 희망과는 달리 정치적 입지 를 회복하기가 쉽지 않았던 이들은 시사를 통해 정치적 불안감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백련시사는 ‘정치적 실 의와 좌절’을 극복하여 ‘새롭게 바꾸고자 했던’ 노력의 과정이었다. 백련시사의 시 경향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들의 시에서는 정치적 의견을 같이하는, 자신과 뜻을 같 이하는 지우에 대한 강조, 論詩와 시창작을 통한 學詩의 방법, 불확실한 현실을 탈피하여 은거하고자 하는 의 지 등이다. 백련시사에서 창작된 작품의 핵심중 하나는 지우에 대한 강조였다. 자신들이 처했던 정치적 위기 에 자신들의 단결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경종의 즉위로 인해 정치적 재기를 꿈꾸었으나 쉽지 않 았던 당대의 현실로 인해 자신을 알아주는 지우의 존재가 필요했으며, 백련시사는 지우를 만나서 돈독한 관계 를 유지할 수 있는 좋은 결사체였다. 백련시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시를 공부하는 일이었다. 시에 대한 이론적 공부와 함께 시창작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옛 사람의 시를 차운하고, 서로 운자를 내며 화답하여 시를 지었다. 또 경치, 역사적 사실 등을 소재로 시를 창작하였는데, 이는 모두 시를 공부하는 방법이었다. 백 련시사 이전 시기에 정치적 활동이 활발하지 않았던, 이들은 순탄치 않은 현실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였고, 이 를 시로 표현하였다. 국포는 시사활동을 통해 자신의 문학론을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시를 창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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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00원

본고는 <홍길동전>에서 길동의 ‘호부호형’과 ‘병판 제수 요구’ 등의 발언이 허균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서얼들의 통청(通淸) 요구가 급증하는 조선후기의 서얼들 및 일부 사족(士族)의 의식과 입장을 대변하는 과정 에서 그것이 작품 속에 삽입된 것임을 밝히기 위해서 집필되었다. 제2장에서는 서얼 허통 및 소통의 전개과정을 살폈다. 조선 초 서얼의 한품서용과 금고법이 만들어져 서얼 차 대가 시작된 이후 서얼과 일부 사족들은 서얼의 허통을 요구하였다. <홍길동전>의 작자 허균(1569~1618)이 생존했던 선조와 광해군 대에는 납속책, 군공 및 공훈에 의해 허통이 이루어지거나 또는 불법 응시를 통해 서 얼들이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지만 관직제수가 하급의 지방 수령에 그칠 뿐이었다. 그러다가 인조3년(1625)의 <허통사목>으로 서얼이 등과 후 요직(要職)에 나갈 수 있자, 서얼들은 ‘허통’에서 ‘등과 후 청요직의 제수’ 를 요구하였다. 정조1년(1777) <정유절목>으로, 서얼은 과거급제자의 경우 처음에 교서관과 수문장 부장에 천거 될 수 있었고, 부사(종3품)와 목사(정3품)에 한품되었다. 그 후 서얼들의 요구로 순조23년(1823)에는 <계미절 목>으로 ‘문관은 종2품 및 정3품, 무관은 종2품의 관직까지 제수될 수 있었고, 철종2년(1851)에는 <계미절목> 의 변통조치로 서얼은 ‘문괴무선(文塊武宣)’ 곧 문무과 서얼급제자가 괴원(槐院)과 선전관(宣傳官)에 천거될 수 있었다. 고종 대에는 서얼들이 법전에 있는 ‘서얼금고 조항’을 삭제하라는 상소를 올렸고, 1894년 갑오개혁 에 의해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그 법적 조항은 완전히 철폐되었다. 제3장에서는 홍길동의 언행을 통해 나타난 ‘서얼 차대’의 내용과 그의 인식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차대’ 발언 대목이 모두 10군데였는데, 다음 두 가지 특징을 찾을 수 있었다. 첫째, 어린 길동이 차대를 자탄하는 부 분을 기점으로, 가정 안에서는 부모에게, 국가 안에서 국왕 및 위정자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말하는 부분 등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지며, 이 네 부분은 논리적인 틀로 짜여서 그 서사가 전개된다. 둘째, 가정과 국가의 활동영역에서 일관되게 드러난 ‘서얼 차대’ 발언은 ‘호부호형 금지’ 및 ‘가중 천대’이고, 여기에 입신양명의 벼 슬길인 ‘정2품의 병조판서 제수’에 대한 욕망이 드러난다. 아울러 ‘병조판서 제수’가 이루어진 이후에야 길동 이 왕에게 ‘서얼이 과거급제 후 문무과 관직에 나갈 수 있는 한계’로서 ‘옥당과 선전관에 각각 임용되지 못함’ 을 하소연하고 있다. 4장에서는 서얼 차대의 발언이 서얼의 소통 과정과 연관되어 있음을 밝혔다. 먼저 ‘호부호형’ 문제의 경우, 1660년대까지도 ‘가내에서의 서얼에 대한 호부호형 금지’가 당연하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고, 1700년대 초엽 유수원이 이에 대해 그 부당성을 지적한 이래로 1700년대 후반까지 선각적 지식인들이 이의 문제를 제기하였 으며, 순조대 이후로는 서얼들도 상소문을 통해 이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로써 길동이 이 문제를 ‘아버지와 왕’에게 하소연한 것은, 1700년대 중반 이후에야 가능한 일이라고 판단된다. 다음으로 ‘관직 제수’ 문제는, 서얼의 관직 한품을 종3품으로 규정한 정조1년의 <정유절목> 조치 이후부터 정 2품으로 규정한 순조23년(1823)의 <계미절목> 조치를 거쳐 ‘문괴무선’의 허용이 가능한 철종2년(1851)의 변통 조치라는 역사적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무반의 경우 종2품의 한품에도 불구하고 작품에서 ‘정2품의 병조판서’ 요구로 설정된 것은 병판이 무반의 최고관직으로 군사권의 우두머리에 해당하기 때문에 비록 그 관 직이 실제로 허용되지 않았지만 이를 ‘소설적 상상’으로 가능하게 하려는 향유층의 사고가 작동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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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구곡 시문에 나타난 九曲의 場所性 考察

이효숙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32집 2013.12 pp.151-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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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0원

본고의 목적은 조선 후기 문인들의 작품에 나타난 화양동의 의미를 밝히는 데 있다. 송시열이 은거했던 화양 동을 배경으로 창작된 시문은 20세기 초까지 창작되었다. 이 작품들에 나타난 화양동의 장소성을 분석함으로 써 조선 후기 노론계 문인들의 세계관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2장에서는 화양구곡을 다룬 작품 목록을 제시하 였다. 이 과정을 통해 “화양동”이 “화양구곡”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밝혔다. 3장에서는 화양구곡을 다룬 작품 에 형상화된 화양구곡의 정체성을 분석하였다. 구곡이 지닌 물리적 환경 요소와 그 장소를 식별할 수 있게 하 는 이정표, 그 속에서 행해진 행위와 경물을 대하는 태도, 그를 통해 구현하고자 한 의미를 중심으로 하여 작 품에 형상화된 화양구곡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화양구곡은 1) 혼란한 세계와 대비되는 순정한 구역, 2) 여러 선현을 향한 숭모의 장소, 3) 대명의리론을 구현한 장소라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음을 파악하였다. 송시열 사후 권상하를 비롯한 제자들의 노력을 통해 송시열의 은거지였던 ‘화양동’은 ‘화양구곡’으로 재탄생하 기에 이르렀다. 당대에 시작된 사적 정비와 더불어 18세기 후반부터 관련 기록을 정리하면서 화양동은 구곡으 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화양구곡은 대명의리론을 구현한 장소인 동시에, 주자의 무이구 곡을 조선에 재현한 장소로 재탄생하였다. 구성원들의 노력을 통해 화양구곡의 정체성은 보다 확산되고 권위 를 지닐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존주론적 세계관이 점차 권위를 잃게 되면서 화양구곡 또한 주자 중심의 성리학적인 가치를 잃고 정세성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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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세기 정월 세시풍속에 보이는 동전

조한정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32집 2013.12 pp.189-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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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00원

8~19세기를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소원은 돈 귀신과 사귀고 싶다거나 배불리 먹고 돈 많이 버는 것이었다. 우 리들이 흔히 하는 푸념과 같다. 이렇듯 연말연시 소원이었던 동전은 조금만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도 그 위상 이 상당히 초라해진다. 동전 유통정책은 고려부터 칠백 년 동안 번번이 실패하여 동전은 쌀과 베에 밀려 화폐 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동전은 창고에 쌓이거나 다른 용도로 쓰이기 위해 녹여지는 일도 흔했다. 쌀과 베에서 동전으로의 변화는 정치와 경제 뿐 아니라 사회가 크게 달라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동전을 유통 시키기 위한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농업, 상공업, 광업 등의 발달로 화폐유통이 추진력을 얻으면서 동전은 우 리 조상들이 갈망의 대상이었고 신분 상승의 도구였다. 오랜 세월동안 별 쓸모가 없었던 동전이 조선후기부터 커다란 힘을 발휘하게 되면서 세시풍속에 반영되기에 이르렀다. 사회변화가 세시풍속으로 정착하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만 일단 정착되면 쉽게 변하지 않는 속 성을 지녔다. 일 년 중 정월의 세시풍속이 가장 중요했다. 이러한 정월 세시풍속에 동전이 출현한 것만으로도 조선후기 사회에 동전이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동전이 정월 행사에 등장한 것이 설날의 떡국 먹기, 덕담, 법고였고 정월대보름의 적선, 제웅치기, 호로버리기 , 돈치기였다. 돈 걱정 없이 살고 싶은 소망이 덕담과 법고로 나타났다. 또한 동전은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행 사 위주인 정월대보름에도 가족을 위한 주술적 용도로 사용되었다. 제웅치기를 통해 주술적인 부분으로 확대 된 동전의 힘을 확인했다. 제웅치기는 가족의 액막이를 위해 일반적으로 행하여졌는데, 이전에 제웅 속에 넣 던 쌀, 음식이 동전으로 대체되었다. 가난한 집은 사기로 동전 모양을 깎아서 제웅 속에 넣었을 정도였다. 어 린이를 위한 액막이로 호로버리기를 했고 어른과 아이가 섞여 돈치기도 했다. 세시풍속에서 보이는 동전은 정월 한 달 기간 동안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또한 동전은 기복, 액막이를 주목 적으로 가정 내의 행사에 머물렀을 뿐 그 이상의 범위로 확대되지 않았다. 18∼19세기 동안 동전이 나타나는 세시풍속은 그 수가 조금씩 증가하다가 20세기 이후에는 점차 축소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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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00원

항아리 어깨 부분에 소형 토우를 장식하는 습속은 4-6세기경 한국 경주와 3-4세기경 중국 저장성 북부와 장쑤 성 남부 일대에서만 발견된다. 이러한 기물을 한국에서는 토우장식장경호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혼병이라고 한다. 독특한 형태의 기물이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지역에 한정되어 발견된다면 두 지역 사이에 교류가 있었 을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다. 두 기물은 구조에 있어 일부 차이점이 발견되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구조상의 공통점이 발견된다. 첫째, 하부 는 배가 불룩한 항아리이며 상부의 어깨 부분에 토우장식을 하였다. 둘째, 항아리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경우가 있다. 셋째, 토우장식이 모두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형태이다. 토우의 종류도 대체로 유사하다. 인물형 토우 의 경우 공연하는 토우, 몽둥이를 든 토우, 장례식을 거행하는 토우, 노동하는 토우, 동물을 타고 있는 토우가 모두 등장하며 차이점은 혼병에는 성 관련 토우가 없으며 토우장식장경호에는 기도를 하는 승려토우가 없다 는 것이다. 성 관련 토우의 경우 수량이 적기는 하지만 저장성 일대 동오시기 무덤에서 발견되어 토우장식장 경호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동물형 토우의 경우 날짐승, 육지동물, 수생동물, 상상의 동물이 모두 발견되며 종류에 있어서도 유사하다. 토우장식장경호에는 당시 신라에서 볼 수 없는 남방계 동물인 구세계원 숭이와 개미핥기가 등장하는데 이는 중국 남방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혼병의 각 부분은 지하계, 인 간계, 천상계를 의미하며 다시 혼(魂)을 위한 공간과 백(魄)을 위한 공간으로 양분할 수 있다. 혼병의 상부는 혼을 이끌고 승천을 하기 위한 공간이고 하부의 항아리는 백을 담기 위한 공간이다. 토우장식장경호의 경우에 도 남녀 나체상이나 성교 장면은 망자의 영혼을 초도하거나 재생시키기 위한 것이며 계림로 토우장식장경호 의 구멍은 혼병과 같이 백을 담는 공간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혼병의 인물토우 중 80%이상이 호인( 胡人)토우인데 토우장식장경호에서도 호인토우가 발견된다. 삼국지에는 “손권이 군사를 파병하여 이주(夷洲)와 단주(亶洲)를 찾게 하였는데 단주를 찾지 못하였으며 회계 동쪽 바다에서 바람과 해류를 타고 표류하여 단주에 도착한 사람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단주의 단(亶)은 한 국어 ‘섬’의 음사표기이며 닝보(寧波) 일대 바다에서 여름철에 쿠로시오해류를 타면 쉽게 제주도에 도착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단주는 제주도임을 알 수 있다. 원나라 마단림(馬端臨)이 쓴 문헌통고에 의하면 “육조 시기에 동중국해 사단항로가 개설되었다”고 하는데 230년 손권의 해군이 단주를 찾는 일에 실패한 것으로 보 아 동중국해 사단항로는 230년 이후에 개척되었으며 혼병과 토우장식장경호의 공통점으로 볼 때 동오시기에 이미 개척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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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達의 南下經路와 戰死處 阿旦城 檢證

李道學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32집 2013.12 pp.26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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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0원

達의 南下經路는 戰死處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온달의 戰死處는 자신이 탈환을 목표했던 지점과 관련하여 찾는 게 합당한 해석이라고 본다. 온달의 전사처로 적혀 있는 阿旦城은 서울의 아차산성으로 지목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광개토왕릉비문」에서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빼앗은 64개 城 가운데 아단성이 보인다. 이 아단성이 서울의 아차산성이라고 한다면 한강을 격하여서 백제 王城과 맞대치한 형국이 된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 벌어졌다면 백제는 遷都했어야 한다. 그러나 백제가 이때 遷都했다는 明證은 없다. 그랬기에 「광개토 왕릉비문」의 阿旦城은 아차산성으로 지목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한다면 乙阿旦城으로 일컬어졌던 동일한 한 강 水系를 끼고 있는 단양군 영춘면의 온달성으로 지목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阿旦城은 한강 하류와 상류 2곳 에 소재하였던 것이다. 온달성은 당초 백제의 阿旦城이었다. 그렇다면 城內에서 백제 유물이 출토되었어야하지 않냐는 의문이 제기 될 수 있다. 과거의 調査에서 온달성 뿐 아니라 적성에서도 백제 토기편이 확인된 바 있었다. 이와는 달리 서 울의 아차산성에서는 백제 유물이 출토된 바 없다. 그렇다고 아차산성이 개로왕이 捕送되어 간 아단성이 아니 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달리 代案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고학적 물증은 어디까지나 傍證일 뿐 절대적 지 표가 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590년 이후 온달의 南下路는 평양→수안→신계→화천→춘천→원주→제천→단양으로 이어지는 經路 설정이 가능하다. 629년까지 고구려군이 주둔했던 낭비성은 충청북도 청원으로 비정되고 있다. 이와 맞물려 청원의 남성골산성과 진천의 대모산성 및 대전의 월평동산성은 고구려군이 진출한 유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 서 본다면 고구려군은 의외로 한반도 종심 깊숙이 진출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6세기 말에 온달이 남한강 상류 지역까지 진출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한 배경을 지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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滿文本 『언두리[神]가 들려주는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文化史的 意義

金亮鎭, 金洙景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32집 2013.12 pp.293-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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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족의 민간 설화집인 <언두리[神]가 들려주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중국 서명:『尸語故事』)는 인도 카슈 미르 지역에서 창작되어 티벳, 몽골을 거쳐 중국의 일부 소수 민족과 만주족에게 전해졌고 일부 이야기는 한 국과 일본까지 전해져서 동북아시아 전역에 걸쳐 전파되어 있는 전형적인 국제적 성격의 무속(巫俗) 관련 설 화집이다. 각 지역으로 전파된 이 설화집은 해당 지역의 언어에 따라 편폭과 내용에도 일정한 차이가 있어서, 티벳어본 11종, 몽골어본 30여종, 한문본 3종, 만주어본 1종 등이 있고 각각의 판본에 수록된 이야기의 수에 따라 7장본, 13장본, 15장본, 16장본, 21장본, 23장본, 24장본, 26장본, 30장본, 35장본 등 다양한 유형이 있으며, 전승되는 과정에서 점차 내용이 불어나는 경우가 많다. 이 가운데 만주어 유일본으로 알려진 <언두리[神]가 들려주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몽골어본 13장본의 내용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거기에 8편의 내용이 추가되어 총 21편의 내용으로 구성되었고 다른 판본에서 보이지 않는 짧은 무가적 창사와 서문이 덧붙여져 있다. 『언두리 [神]가 들려주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에 수록된 21편의 이야기들은 주된 내용은 형제 혹은 남매 간의 우애, 부부간의 애정 등 개인적 내용으로부터 군왕이나 승려 등 통치 계급의 흉악함과 탐욕, 우매함과 비겁함 등을 다루고 있으며 전형적인 민간 설화 주제인 개과천선, 권선징악 등을 주요 메시지로 전달하면서 만주족의 민간 신앙인 샤만교와 만주족의 풍속에 관련된 요소들이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다. 만문본 『언두리[神]가 들려주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갖는 문화사적 의의는 첫째, 인도의 『베탈라판차 빔자티』와 티벳어본, 몽골어본과 달리 만문본은 짧은 唱詞로 시작하고 전체를 개괄하는 서문이 추가되어 있 어서 단순한 번역을 넘어서 창작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둘째, 만문본이 원본과 마찬가지로 불교 이야기를 고 수하면서도 그 안에 만주족의 신앙인 샤먼교[薩滿敎]의 요소를 더하고 있고, 셋째, 만문본의 번안 과정에서 만주어를 강조하려 한 흔적들도 많이 볼 수 있으며 넷째, 몽골어 어휘를 다수 사용하고 있어서 몽골어본과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고, 다섯째, 설화문학의 전파와 관련하여 한국 설화와의 관련성에 대해서도 주 목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이 이야기책의 내용들은 우리 민족과 북방민족 간에 이루어진 문화 교류의 실체를 확 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설화나 이야기의 보편성에 입각한 문학 작품의 비교문학적 해석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갈 수도 있을 것인데, 이 책에 담겨있는 신기하고도 괴기스러운 이야기들은 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재미를 갖추고 있어 가히 동아시아의 천일야화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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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0원

한국과 중국에는 오랜 천문 역사와 함께 많은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다. 한국은 삼국시대부터 체계적인 천문 기록이 남아 전해지고 있는데 이들 기록을 살펴보면 천문역법과 28수 별자리체계 그리고 성도 등 전통천문학 전반에 걸쳐 중국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왔다. 그러나 한국의 고대 천문학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탓에 역사시 대 이전의 두 나라의 천문학 특징과 상호 교류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청동기 시대 고인돌 덮개 돌에 새겨진 별자리와 고구려 고분 벽화의 별자리 배치 체계 그리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독자적 천문 기록의 사실 검증에 대한 몇몇 연구를 통해서 역사시대로부터 이어진 우리의 고유한 천문 지식과 문화에 대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한편, 중국은 고고천문학 연구를 통해 중국 여러 지역에서 발굴된 역사시대 이전의 천문 유물과 유적에 대해 그 내용과 특징을 밝히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중국의 고고천문 자료들은 역사시대 이전 고대의 문화 지역 인 하모도문화(河姆渡文化), 앙소문화(仰韶文化),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 그리고 홍산문화(紅山文化)와 하가 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 지역을 중심으로 발견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이들 문화지역에서 발견된 고고 천문 자료를 지역별로 분류하여 그 특징을 살펴보고 한반도와 인접한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의 고고천문 유적을 중심으로 중국 다른 지역의 고고천문 유적과 비교하였다. 하모도문화에서 발견된 고고천문 유물의 특징은 뼈나 도자기에 태양을 상징하는 그림을 그린 것으로 당시 사 람들이 태양을 중시하거나 신성시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중원 내륙에 위치한 앙소문화에서는 무덤에 북두 칠성과 사신체계를 표현한 천상도와 도기에 그려진 별이 발견되어 원시적인 별자리 체계가 형성되고 있는 모 습을 볼 수 있다. 산동반도에서 발견된 대문구문화의 대표적인 고고천문 유물은 도자기에 그려진 태양그림이 다. 산 위에 화염과 함께 그려진 태양그림은 단순히 상징적인 도안을 넘어 일출몰 전후에 산 위에 있는 태양을 관찰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문구문화에서는 태양 그림 외에도 태양조 토템을 상징한 그림이 도자기에서 발견 되었는데 모두 태양을 주요 대상으로 하고 있다.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에서 발견된 고고천문 유적은 우 하량(牛河梁)과 동산취(東山嘴) 그리고 성자산(城子山)으로 이들 유적은 진남북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천 문 방위 측정에 사용된 곳으로 보이는 입간측영의 장소도 함께 발견되었다. 또한 유적의 모양이 고대의 우주 구조론인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구조를 가지고 있어 고대 제천의식의 장소로 이해되고 있다. 하모도문화 대문구문화 그리고 앙소문화 지역의 고고천문 유적은 도자기나 무덤 등 개별적인 유물에 천문 기 록이 남아 있는 반면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의 특징은 개별적인 유물이나 무덤이 아닌 집단의 대표적인 장소에 천문학적 요소가 남아 있다.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의 이러한 고고천문 유적의 특징은 과거 이들 지역에서 천문이 지배 계급을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활용되고 전승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제천 의식의 장소 가 모두 진남북 방향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는 것은 당시 천문관측을 통해 방향을 측정하였음을 말해주며 남아 있는 입간측영의 장소는 당시의 천문관측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 중국 고고천문 유물이 발견된 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살펴보면 태양과 관련된 유적이 발견된 하모도문화와 대 문구문화 지역은 모두 중국 동쪽의 해안 근처에 위치하며 원시 별자리 자료가 남아 있는 앙소문화는 중국 내 륙 중심에 위치한다. 개별적인 천문 유물이 남아 있는 이들 세 지역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 반 면, 제천의식과 관련된 제단 유적이 남아 있는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 유적지는 이들 세 지역과 멀리 떨 어진 중국 동북부 지역인 한반도 인접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역사시대 이전의 고대문화는 지리나 기후 등 여러 지역적 환경요소에 따라 그 특징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이 러한 사실은 중국 고고천문 유물의 지역적 분포 특성에서도 잘 나타난다. 고대로부터 천문학이 주변 문화와 교류하면서 발전해 왔다면 인접한 문화 지역의 천문학적 특징을 통해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다. 앞으로 한반 도의 고고천문 유적을 찾아 한반도와 인접한 지역의 특성과 비교한다면 천문학 뿐 아니라 우리 고대 문화의 특징과 역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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占事와 易道를 통해본 易學의 世界觀

이현중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32집 2013.12 pp.363-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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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占事와 易道를 중심으로 그것들이 주역과 역전에서 어떻게 규정되고 있는지 그리고 양자의 관 계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역학자들은 주역이 점을 치는 데 사용되어지는 占筮書이며, 역전은 주역을 다양하게 해석한 哲學的 著書라는 데 이견이 없다. 주역과 역전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역학의 연구 방법에 영향을 미친다. 전통적 입장의 역학자들은 양 자를 하나의 체계로 보고 역전을 토대로 주역을 연구하고자 한다. 반면에 비판적 입장의 역학자들은 양자의 성격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철저하게 구분하여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주역의 내용인 占事와 역전에서 밝히고 있는 易道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고찰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양자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양자의 세계관을 살펴보는 문제로 귀결된다. 주역의 괘효사와 역전에서는 占事를 미래를 아는 知來의 문제로 재시하고, 지래는 시간의 세계를 넘어서 있는 형이상적 세계를 파악(知來)하여 그것을 주체로 현실에서 살아가는 일(通變)로 밝히고 있으며, 역전에서는 역 도를 만물의 만물된 所以로서의 형이상적 존재로 규정하고 그것을 사물의 관점에서 性, 性命으로 밝히고 있다 . 占事에서 밝히고자 했던 미래의 세계와 역도의 내용으로서의 性命은 형이상적 존재로 물리적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존재이다. 따라서 양자의 세계는 동일하다. 형이상적 존재인 도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 변화여 자신을 드러내다. 그러한 도의 변화가 현상적 측면에서는 만물의 생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도를 역도, 변화의 도라고 한다. 점사와 지래, 성명, 역도의 세계를 막론하고 모두 변화인 점에서 보면 고정된 실체가 없다. 그것은 세계 자체 가 형이상과 형이하, 道와 器 등의 어느 일면으로 규정할 수 없음을 뜻한다. 주역과 역전에서는 그것을 中正으 로 규정하여 만물이 실체적 존재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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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00원

본 논문에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학을 풍미했던 풍류(風流)가 고대 일본 문학에 언제부터 존재했고, 이 풍류 는 어떻게 변천해서,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문학의 미의식을 대변하는 「미야비」로 발전하였는가? 그리고, 이 미야비는 <이세 이야기>의 「이치하야키미야비」와는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을 구명하려고 한다. <만요슈(万 葉集)>의 「풍류(風流)」와 「유(遊)」는 일본의 상대(上代) 문학과 헤이안 시대 문학을 연결하는 중요한 미의식의 하나다. 중국에서 도덕적 풍격을 의미하는 풍류가 호색을 의미하는 풍류로 변화하는 것은 육조기(六朝期)의 노장사상 (老莊思想)의 유행, 특히 육조 후기에 신선도(神仙道)가 큰 세력을 가진 것과 관련된다. 선계(仙界)의 생활을 모방하는 것으로, 금(琴), 시(詩), 술(酒), 기(妓)를 중요한 요소로 하는 당시(唐詩)의 풍류가 생겨나게 되었다. 오후미조(近江朝)에는 여가가 생겨서, 한시문(漢詩文)이 흥륭(興隆)하고, 이것은 의례제도(儀禮制度) 정비의 일환이고, 그 성공을 현창(顯彰)하는 것이다. 오후미 풍류(近江風流)는 천자(天子)와 현신문사(賢臣문사文士) 의 풍류로, 중국의 풍류 중에서 개인적인 도덕적 품격을 의미하는 풍류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풍류」와 「미야비(みやび)」는 본래 다른 말이다. 「풍류」를 「미야비」로 읽는 것은 「풍류」가 서울 풍(都風)으로 인식된 것에 의한다. 「미야비」가 지토조(持統朝)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지토조에 후지와라쿄(藤原京)가 건설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후지와라쿄는 도성제(都城制)를 채용한 최초의 본격적인 서울인 미야코(都)다. 서울 풍(都風)인 것을 주장하는 「미야비(みやび)」는 본격적인 서울(都) 없이는 출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 02/0126-0127 가군(歌群)의 「미야비」는 서울이 예의질서의 공간으로 간주된 것은 무관하지 않다. 후지와라쿄 에서부터 천황(天皇)의 덕(德)을 유출(流出)시키고 있는 한, 후지와라쿄에서는 예의가 지켜진다. 후지와라쿄 의 예의질서는 천황의 덕성(德性)이 발현되는 증명이다. 그리고, 상기의 가군에서는 후지와라쿄의 예의질서를 지키는 풍류를 「미야비」로 하고 있는 것이다. 후지와라구(藤原宮)의 풍류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 오호토모 스쿠네타누시(大伴宿祢田主)의 「풍류」이고, 그의 풍류는 도덕적인 것이다. 이시카와 이라츠메(石川女郎)의 풍 류는 호색적인 것으로 헤이죠쿄(平城京)의 「미야비」의 가교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관매(觀梅)의 대아연(大雅宴)은 덴표(天平)의 「풍류사(미야비오)」들에 의해서 정진정명(正眞正銘)한 「미야비」 라고 하는 말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결국, 만요 시대의 미야비는 이렇게 해서 중국으로부터 도래한 풍류사상과 새롭게 완성된 서울 문화를 중심으 로 해서, 일본적인 문화이념으로까지 발전하여 헤이안(平安) 시대의 문학이념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세 이야기(伊勢物語)>의 「이치 하야키 미야비」는 미야비의 세계를 생애 처음으로 경험하는 젊은이가 과감 하면서도 세련되게 한 성급한 행동」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표현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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