達의 南下經路는 戰死處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온달의 戰死處는 자신이 탈환을 목표했던 지점과 관련하여 찾는 게 합당한 해석이라고 본다. 온달의 전사처로 적혀 있는 阿旦城은 서울의 아차산성으로 지목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광개토왕릉비문」에서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빼앗은 64개 城 가운데 아단성이 보인다. 이 아단성이 서울의 아차산성이라고 한다면 한강을 격하여서 백제 王城과 맞대치한 형국이 된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 벌어졌다면 백제는 遷都했어야 한다. 그러나 백제가 이때 遷都했다는 明證은 없다. 그랬기에 「광개토 왕릉비문」의 阿旦城은 아차산성으로 지목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한다면 乙阿旦城으로 일컬어졌던 동일한 한 강 水系를 끼고 있는 단양군 영춘면의 온달성으로 지목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阿旦城은 한강 하류와 상류 2곳 에 소재하였던 것이다. 온달성은 당초 백제의 阿旦城이었다. 그렇다면 城內에서 백제 유물이 출토되었어야하지 않냐는 의문이 제기 될 수 있다. 과거의 調査에서 온달성 뿐 아니라 적성에서도 백제 토기편이 확인된 바 있었다. 이와는 달리 서 울의 아차산성에서는 백제 유물이 출토된 바 없다. 그렇다고 아차산성이 개로왕이 捕送되어 간 아단성이 아니 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달리 代案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고학적 물증은 어디까지나 傍證일 뿐 절대적 지 표가 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590년 이후 온달의 南下路는 평양→수안→신계→화천→춘천→원주→제천→단양으로 이어지는 經路 설정이 가능하다. 629년까지 고구려군이 주둔했던 낭비성은 충청북도 청원으로 비정되고 있다. 이와 맞물려 청원의 남성골산성과 진천의 대모산성 및 대전의 월평동산성은 고구려군이 진출한 유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 서 본다면 고구려군은 의외로 한반도 종심 깊숙이 진출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6세기 말에 온달이 남한강 상류 지역까지 진출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한 배경을 지녔던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머리말 Ⅱ.溫達傳과 고구려 남진 거점 및 南下經路 Ⅲ.溫達의 戰死處阿旦城 Ⅳ.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동아시아고대학회 [The Association Of East Asian Ancient Studies]
설립연도
1999
분야
인문학>기타인문학
소개
본 학회는 동아시아권역의 고대의 역사와 문화, 언어와 문학, 종교와 철학, 민속과 사회, 고고학 등에 관한 고대학 관련분야의 학문을 학제적 국제적인 협력과 유대를 통해 연구의 가능성을 확대하고, 연구의 질을 향상시키며,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학문발전과 문화교류 및 학자, 연구자, 회원 상호간의 유대와 국제적 친선을 도모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를 위하여 본 학회는 동아시아고대학에 관한 연구발표회, 학술강연회, 강독회, 학술답사, 도서출판, 학회지 발행 등의 사업을 기획하여 집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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