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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고대학 [DONG ASIA KODAEHAK ; The East Asian Ancient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동아시아고대학회 [The Association Of East Asian Ancient Studies]
  • pISSN
    1229-8298
  • 간기
    계간
  • 수록기간
    2000 ~ 2026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기타인문학
  • 십진분류
    KDC 910 DDC 950
제18집 (15건)
No
1

黃浿江 先生 年譜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18집 2008.12 pp.-3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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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0원

2

黃浿江교수님의 學德을 기리며

신동욱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18집 2008.12 p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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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원

<東아시아古代學會 特別記念講演>

3

나의 學問과 人生

李鍾學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18집 2008.12 p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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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대 加耶와 吉備의 교류 양상

李永植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18집 2008.12 pp.2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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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고대의 키비(吉備)와 가야의 정치적 교섭과 키비지역에 남아있는 가야계 도래문화의 몇 가지를 검토한 것이다. 키비와 가야의 정치적 교섭은 ‘吉備反乱伝承’이 전하는 야마토정권의 키비 통합을 전후로, 5세기 전반까지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造山․作山古墳의 주인공이 가야와 독자적인 교섭을 추진하던 단계와, 키비의 외교교섭권이 야마토 정권에 흡수되는 5세기 후반 이후의 단계로 나누어진다. 「欽明紀」에 任那日本府로 기록된 키비노오미(吉備臣) 등은 왜에서 가야에 파견되었던 사신으로, 5세기 후반 이후 야마토 정권에 의해 좌우되던 키비와 가야의 지역적 교섭을 보여주는 것이며, 「応神․雄略紀」에 보이는 韓계통, 특히 가야계 집단의 이주와 정착에 관한 전승 등은 그 이전의 인적 물적 교류를 반영하는 것이다. 키비지역에 남아있는 가야계 도래문화의 흔적에 대해서는 고대의 지명 인명 씨족명, 키노죠(鬼ノ城)의 우라(溫羅)전승, 貨泉 鐵生産 부뚜막(竈) 등에 주목하였다. 키비지역에 남아있는 고대의 지명 인명 씨족명에는 가야의 명칭 ‘가야’와 ‘아야’로 읽혀지는 것이 아주 많다. 가야 관련의 고고자료에 비추어 남는 자료만으로 키비와 가야의 교류사를 복원하고자 하였다. 서기 9년 중국의 新왕조가 주조했던 貨泉이 가야와 키비에서 출토되고 있다. 화천은 1~3세기경의 전기가야 시기에 황해도의 대방군에서 김해의 구야국을 거쳐, 왜국에 이르는 바닷길을 통한 인간과 물자의 왕래를 보여주고 있다. 빗츄(備中)의 가야씨(加夜氏)와 빈고(備後)의 아나씨(穴)는 가야계 씨족으로, 8세기경까지 키비지역을 지배하던 씨족집단이었다. 특히 가야씨는 키비씨의 본가이기도 하였다. 이에 우리 학계에 소개된 바 없는 아시모리하치만신사(葦守八幡神社=葦守宮) 정문(鳥居)에 새겨진 명문을 제시하여, 14세기 중엽까지 가야씨가 키비 중심씨족의 하나였음을 밝혔다. 가야군(賀陽郡)군 중심에 존재하는 키노죠(鬼ノ城)에는 가락국(김해)의 건국신화와 흡사한 우라(溫羅)전승이 전해지고 있다. 변신하는 동물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쫓기는 세력(키비의 우라와 가야의 탈해)과 쫓는 세력(키비의 키비츠히코와 가야의 수로)의 대결구도와 변신의 패턴은 같은 꼴이다. 고대의 키비가 철의 선진지역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로, 그 시작에 철의 왕국 가야와의 인적 물적 교류가 중요한 전제로 되었음에 대해 목간과 󰡔일본서기󰡕와 같은 문자기록과 고고자료를 제시하여 논증하였다. 끝으로 키비에서 검출되는 5세기 중엽 이전의 부뚜막은 가야계 이주민의 사용과 신앙 활동의 흔적으로 판단하였다. 쏘우자시(總社市)의 오기야쿠시유적(窪木藥師遺跡)의 고정식 부뚜막은 󰡔三國志󰡕가 전하는 변진=전기가야의 부뚜막신앙과 통하는 것으로, 김해 부원동유적과 진주 평거동 유적 등에서 확인되는 것과 동일하고, 폐기의례에 사용되었던 鐵鋌과 鐵钃은 동래 복천동고분군 출토품과 같은 것이다. 김해 부원동유적에서는 부뚜막 근처에서 卜骨과 4세기 전반의 산인계(山陰系) 하지키(土師器)가 출토되고 있다. 가야의 부뚜막신앙과 키비에 인접한 산인지역과의 교류가 아울러 확인되고 있다. 가야인들이 부뚜막과 부뚜막신앙을 가지고 키비지역에 이주했던 흔적은 키비츠신사(吉備津神社)와 ‘가마솥님(お釜殿)’, 그리고 ‘울리는 부뚜막제사’에서도 확인된다. 키비츠신사에서는 가야의 건국신화와 같은 변신경쟁의 주인공 키비츠히코(吉備津彦)가 주신으로 모셔지고 있으며, 또 다른 주인공이었던 우라(溫羅)의 머리는 숭배대상의 ‘가마솥님’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키비츠신사 역시 에도시대까지 가야씨에 의해 경영되었으며, 신사의 북쪽에는 지금도 카라천(辛=加羅川)이 흐르고 있어, 가야계 이주민들의 흔적으로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本論文は、古代韓日における吉備と加耶の政治的交涉や、吉備地域における加耶系渡來文化に關わる幾つかの要素について私見を述べてみたものである。 吉備と加耶の政治的交涉については、いわゆる吉備反乱伝承が物語る、大和政権による吉備統合を前後にして、二つの時期に分けられる。まず、5世紀前半まである程度の独立性を維持していた造山․作山古墳の主人公たちが、加耶諸國を相手に、独自的な交渉を押し進めていた段階があり、その後その外交交渉権が大和政權に吸収された5世紀後半以後の段階と分けられよう。「欽明紀」に任那日本府として記された吉備臣などは、倭国から加耶に派遣された使者として、5世紀後半以後、大和政權によって牛耳られた吉備地域と加耶諸国との政治的な交渉を示すものであり、「応神․雄略紀」にみえる韓系統、特に加耶系渡来人の移住や定着に関わる伝承などは、それ以前の人的․物的交流を物語るものと考えられよう。吉備地域に残る加耶系渡來文化の痕跡については、古代の地名や人名また氏族名、 鬼ノ城に残る溫羅傳承、貨泉․鐵生産․竈などの考古資料に注目した。吉備地域に残る地名․人名․氏族名の中には、カヤまたアナと読まれるものが非常に多く、それらの中には古代韓国の加耶との何らかの関わりを持つものも多い。もちろん、近似した指摘や研究が以前から無かったわけでもないが、厳密な史料批判や客観的な検証の過程を経たものはあまりみられない。本稿では政治的また人的․物的交流に関わる文献または伝承史料を、吉備地域に残る考古資料に照り合わし、それに耐えたものだけを、吉備と加耶の交流の痕跡を留めているものと評価し、それらをもって両地域における交流の復元を試みた。 A.D9年、中国の新王朝が鑄造した貨泉が加耶と吉備の遺跡から出土している。貨泉は1~3世紀(前期加耶)頃、北朝鮮黃海道の帶方郡から狗邪國(金海)を経て、倭國に至る海上の道を通じた、人間や物資の往來をみせてくれる。吉備と中國の文物が、金海の加耶国で交換され、加耶の文物もこの道を通じて吉備に傳えられたのである。古墳時代に先立つ吉備と加耶の交流を物語る重要資料となる。備中の加夜氏や備後の穴氏が、加耶系渡来氏族であり、8世紀頃まで吉備地域の支配氏族であったことは、「日本書紀」․「國造本紀」․「風土記」などから明らかで、特に加夜氏は吉備氏の本系でもあることが、「吉備津神社」․「葦守八幡神社」などの縁起から確かめられた。今まで殆んど紹介されたことのない、葦守八幡神社(葦守宮)鳥居の銘文を提示し、カヤ(賀陽)氏が14世紀中葉まで吉備地域の中心氏族として名を馳せていたことを論証した。賀陽郡の中心に位置する鬼ノ城には、加耶(駕洛國、金海)の建國神話と酷似している溫羅傳說が、今でも伝えられている。變身競爭のモチ—フがそれで、変身する動物の種類には若干の違いはあるが、追い出される勢力(吉備の溫羅、加耶の脫解)と、追い出す勢力(吉備の吉備津彦、加耶の首露)の対決構造や変身のパタン—はソックリである。同じ勢力争いの出来事が、同じ物語の構造やモチ—フで伝えられることは、住民の移動のような人的交流の痕跡としてみてよかろう。古代の吉備が鐵の先進地域であったことはよく知られている。同じく、古代の加耶が鐵の先進国であったこともよく知られている。4世紀の岡山市金藏山古墳から出土したの斧形鐵器は、慶南の鎭海熊川貝塚や陜川玉田M3號(121個)出土のものと同じ製品で、加耶の鐵が吉備に渡った痕跡でもある。窪木藥師遺跡の竪穴住居でみられるごとく、吉備の製鐵や鍛冶には、加耶系の韓鍛冶が投入されていたと考えられる。平城宮跡出土の木簡に記された「大井鍬十口」の大井は賀夜郡の大井鄕と考えられており、この大井鄕は千引カナクロ谷遺跡に近接する地で、東漢人部がいる。カヤ(賀夜)郡でアヤ(漢)部である。吉備の製鐵の始まりに、加耶諸國との關連が考えられる。吉備で検出される5世紀中葉以前の竈であれば、渡來人による築造と使用の可能性が高い。總社市南東の窪木藥師遺跡には、北西の壁に造り付け竈が設けられ、竈には鐵鋌と鐵钃が置かれていた。この鐵鋌と鐵钃は、加耶の釜山東萊福泉洞古墳群22號と21號墳(5世紀)の出土品と酷似している。󰡔三國志󰡕は弁辰(前期加耶)の竈信仰を伝え、皆戶西に竈を施したと書かれたが、同時期の金海府院洞遺跡で造り付の竈が報告される。なお、竈の近いところから卜骨も出土し、4世紀前半の山陰系土師器も出土している。加耶における竈信仰の存在や、中国地域との交流が裏付けられた。竈や竈信仰を携えて吉備地域に移住した痕跡は、吉備津神社やそこのお釜殿と鳴る釜の神事でも考えられる。吉備津神社と釜殿は、加耶の建國神話と近似した變身競爭モチーフをもつ、吉備津彦が主神として奉られ、溫羅の頭が埋られた所でもある。何よりも吉備津神社は江戶時代までカヤ(賀陽、加夜)氏によって營まれてきた。さらに、吉備津神社の北には今もなおカラ(辛=加羅)川がある。以上のごとく、吉備における加耶の竈と竈信仰、そして加耶系渡來人の影を垣間見ることができ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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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고각 남해석각 해석

문치웅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18집 2008.12 pp.5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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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석각은 상고시대부터 제천을 하던 곳에 있는 제단에서 고조선의 건국 초기에 삼신이 환웅에게 제를 지낸 사실의 내용인 桓雄出獵致祭三神을 표현한 것이다. 석각에 새겨진 문자들은 桓雄出獵致祭三神의 여덟 글자들에 대한 부수만을 뽑아 전서의 문자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석각에 새겨진 문자들은 木, 隹, 凵, 犬, 至, 示, 一, 示이다. 이 석각이 있는 곳은 상고의 환웅시대부터 제를 지내기 위한 제단이 마련되어 제천을 하던 곳이었으며, 그 제단에 후에 형상의 그림을 하여 제천을 하는 곳임을 표시하였다. 고조선 초기에 다시 그 형상의 그림과 짝을 이루어 후세도 알아 볼 수 있도록 하고자 남해석각을 만들었다. 본 연구에서 이 형상의 그림을 한 제단 유적도 함께 제시되었다. 남해석각과 제단의 유적이 갖는 의미는 환웅들의 시대와 고조선과의 역사적 연계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그 석각에 새겨진 문자들은 당시의 한반도에서의 문자 문명의 수준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되며, 중국의 은허 지역에서 발견되는 갑골문과의 연관관계에 좋은 자료가 된다. 또한 제천의식과 관련하여, 남해석각이 있는 곳은 상고시대의 제단과 제사의 기록이 석각에 함께 유적으로 남아 있어 가장 오래된 제단의 역사성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 󰡔삼국유사󰡕의 「고조선」편에 설명된 신단(神壇)과 더불어 환웅, 환인, 단군과 관련한 역사를 증명할 중요한 유적이 된다.

The main purpose of this study focuses on the interpretation of the Namhae stone inscription, that is carved on the early years of Ko-choson. The stone inscription contains the contents that Samshin(三神) performed memorial services for Hwanung(桓雄) who is an his ancestor. In this study we describe the result of interpretation of the Namhae stone inscription. The ancient carved characters on the rock express the radical words of 桓雄出獵致祭三神, which means Samshin performed memorial services for Hwanung at the altar in a hunting field located on Namhae. We also found out the ancient altar ruin for performing a sacrificial rite in the same place. The significant contribution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1) We have proved that the characters of the stone inscription were carved by a seal character on the early years of Ko-choson. They are one of the oldest characters existing in human history. (2) The ruin of altar makes a pair with the stone inscription. It is a convincing material evidence to verify the beginning of performing memorial services. (3) The Namhae stone inscription and the ancient altar ruin play an important role to demonstrate the historicity of Ko-choson with Samshin and Hwan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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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아시아 역사는 육지와 해양을 하나의 틀 속에서 유기적인 관계로 파악해야 한다. 즉 海陸史觀이란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는 선사시대부터 해양활동이 활발했으며, 그 능력에 따라 지역 또는 국가의 발전이 영향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표류현상이 발생했다. 표류란 바다와 강 등에서 특별한 이유로 배가 방향을 잃고 위험한 상태에서 움직이는 상황을 의미한다. 해양문화와 역사상을 이해하려면 농경민의 인식과 생활방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해류 조류 바람은 해양활동과 문화가 만들어지는 틀과 성격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 특히 표류는 자연환경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해양교류는 육지교류에 규모가 작고 비조직적이다. 뿐만 아니라 不規則的이고 連續的이지 못하다. 특히 표류는 더욱 그러하다. 표류는 한국의 남해안인 대한해협, 동해, 황해 그리고 동중국해의 전 해역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항해조건이 나쁜 동해에서 많이 발생했다. 표류의 기능을 정치, 문화, 경제, 항로문제와 연관시켜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첫째, 표류는 航路의 발견과 계발을 촉진시킨다. 선사시대에는 주로 이러한 역할을 했다. 둘째, 표류는 漂着 해역 및 지역에 대한 정보를 취득하는 계기가 됐다. 고대국가가 완성되면서 조직적으로 활용하였다. 셋째, 표류는 민간인의 移住(settlement)를 낳고 이어 植民活動(colony)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다. 고대 한국지역에서 일본열도 진출할 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다. 넷째, 표류와 표착은 진출과 정복이라는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계기로 활용됐다. 다섯째, 표류와 표착은 국제질서의 변화를 가져오는 변수의 역할도 하였다. 漂流는 정상적인 항해에 비해서 일상적이지 못했고, 역사와 문화현상에 대한 파급력도 약했다. 하지만 부정적인 측면 외에 역사적으로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 때문에 시대에 따라서는 국가가 표류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관리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표류의 현상과 기록은 전근대시대의 航路와 航海의 메카니즘을 파악하는 데 유효한 자료를 제공했다.

The history of East Asia should be examined based on organic relationships in a single framework of the land and the seas. Namely, it is necessary to adopt the historical point of view based on the seas and land. East Asia has showed vital ocean activities since the prehistoric age and they have influenced regional or national development according to the capacity. During the process, the phenomenon of drift occurred. Drift means the situation that a ship on the sea or river was in danger, losing control caused by specific reasons. In order to understand ocean cultures and history, they should not be interpreted in the recognition and lifestyle of farmers. An ocean current, a tide, and wind have a strong effect on the framework and characteristics in which ocean activities and cultures develop. Especially, drift is directly influenced by natural environment. Ocean trades are relatively smaller and less unorganized than land trades. Furthermore, they are irregular and discontinuous. Especially, drift is much irregular and discontinuous. Drift occurred in South Coast of Korea includes the Straits of Korea, the East Sea, and the Yellow Sea and all ocean areas in East China Sea. Especially, it occurred frequently in the East Sea which had a horrible voyage condition. From the results of the analysis on the function of drift related with politics, cultures, economy, route issues, the roles of drift are shown bellow. Firstly, drift speeds up the discovery of new routes and development. That was a major role in the prehistoric age. Secondly, drift paved the way for obtaining the information about the discovery of drifting ashore and regions. It was applied systematically as ancient nations were established. Thirdly, drift allows people to build settlement and tends to develop to colony. Such phenomena occurred while advancing from ancient Korean regions into the Japanese Islands. Fourthly, drift and drifting ashore were applied as a moment to achieve political purposes such as advance and conquest. Lastly, drift and drifting ashore played a role of a variable to change an international order. Drift was less usual than ordinary voyage and had little influence on history and cultural phenomena. However, In spite of negative aspects, drift played positive roles. With regard to times, it can be observed that a nation manages the phenomena of drift. The phenomena and records of drift provided useful data to examine routes and voyage in the previous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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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 韓․中 忍冬唐草紋樣 名稱과 形態의 再考

許仙瑛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18집 2008.12 pp.133-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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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은 인동과(忍冬科)에 속하며 추운계절을 잘 견디어내어, 언제나 푸르고 잘 시들지 않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장수와 태평성대의 길상 의미로 고미술사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소재로 나타나고 있다. 상징적 대상을 예술영역에서 표출하는 경우 지역적, 시대적 특색에 맞게 강조되며, 때로는 숭배의 대상을 표현해 내는 방법으로 응용을 시키기도 한다. 본 논문은 한, 중간 해석하고 있는 인동문양의 명칭과 문양에 관하여 기술하였다. 인동문은 팔메트 형식의 꽃잎을 갖춘 인동에서 시작된 문양으로 초기 인동문의 모체가 된다. 후에 운문 혹은 곡선의 리듬을 추가하여 인동문을 좀 더 복잡하고 다양하게 표현한 형식으로 만초 문양의 추가와 강한 곡선을 더한 인동문으로 다시 출현한다. 인동문의 시대적 발전 변화를 살펴보면 한대의 권운문에서 위진남북조의 인동문, 당대의 권초문(당초문) 근대의 香草文으로 등으로 나누짐을 알 수 있다. 각 시대마다 명명한 이름은 다르나 그 문양의 기본형식은 하나에서 출발한 것으로, 중심선의 굴곡을 주면서 꽃 혹은 잎을 추가로 덧붙인 덩굴형식으로 표현해진 것으로 사료된다. 이 같은 시대적 명칭의 변화는 운문에서 시작된 기본형식을 두는 운기문에서 발달하여 구름의 형태를 묘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동한 말기에 출현된 인동문은 남북조시기에 가장 크게 유행한다. 수당을 거치면서 구름의 유동하는 모습을 완전히 탈피하고 풀초 잎의 뒤엉키긴 잎을 둥글게 말아 올린 모습으로 그 주요 형태가 변화한다. 그러나 수당 이후에 나타나는 인동문형식은 초기의 운문형식과 유사한 형태를 종종 나타내고 있다. 唐代는 인동문은 主가 아닌 副가적인 요소로 등장한다. 주요 모체가 되는 것은 구체적인 사물을 나타나내는 연꽃이나 모란, 국화, 나비 등으로 화려한 예술성을 나타내며 인동의 굴곡과 리듬의 변화로 부가적인 예술의 미를 가져온다. 따라서 인동의 이와 같은 문양형식의 경로가 唐代에는 唐草라고 명명한 것으로 사료된다. 이것은 인동이 지니고 있는 꽃봉오리의 형태가 사라지고 덩굴줄기를 강조하기 때문이며, 인동 혹은 인동당초, 당초 등의 구별은 문양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아닌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문양의 주요 관건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에 실질적 근거를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한중간의 인동문양의 형태에 있어서 그 문양형식의 변화는 확연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인동문과 인동당초 혹은 당초등 문양은 그 명칭만이 다를 뿐 문양을 대동소이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만 중국의 경우 고대와당에서는 인동문이 출현하지 않고 있으며, 고구려와당에서만 유독 인동문 와당이 출현하는 것은 고구려 문화 연구영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The Indong Moon(Lunicera japonica) is a Palmet type that comes from flower leaves, which becomes a base of early Indong Moon. Later, it was born as a more complicated and diverse type of Indong Moon, adding shape of cloud and curve rhythm. The name of Indong Moon is called as Indong Moon of Wi Chin period and Tang Cho Moon of Tang period and Hyang Cho Moon of Modern. And also, those name changes of Indond Moon by period are to describe shape of cloud which had developed from the basic shape of Woonki Moon. The practical application of Indong Moon is found in Joo period of China and the application of those forms are in Chunchoo Cheonkook period. However, in case of China, the trace of Indong Moon is rarely found in Han dynasty. On the other hand, after Wi Chin period, Indong Moon was shown again in Sudang period, at this period, it was called Tang Cho that is a quite a lot of change, compared to the early Indong. When looking at the change of development of Indong Moon , we can see that it is divided to Kwonwoon Moon of Han dynasty, Indong Moon of Wi Chin period, Kwoncho Moon of Tang period and Hyang Cho Moon of modern. In each period, the way to name the Indong is different. But the shape and form of Indong Moon was started from the same basic of Indong which expresses curving the center line or flower or leaves adding. The Indong Moon of Tang period is appeared in supplement element, it is named as Tang Cho. This makes to eliminate flower bud that Indong Moon had before and to emphasize vine stem. Thus, it can be assumed that Indong, Indong Tang Cho or Tang Cho was named by time transition not by the shape or form of Indong. The advent of Indong Moon is also formed by the characteristics or symbol of plants. Ancient paintings and culture are highly related together. In this regard, when discussing about Indong Moon, expanding the range of ancient paintings, we need to understand the identity of Ancient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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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동아시아 불교와 문학

이연숙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18집 2008.12 pp.163-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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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가 아시아 문학에 미친 영향을 아시아 공통의 문학적 특성인 산문과 운문의 결합형식을 중심으로 하여 논하였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인도의 쟈타카 등의 영향으로 변문이 생성되었고, 유선굴이라는 새로운 문체의 소설이 생성되었으며, 삼국유사 소재 향가의 산문과 운문의 결합형식은 변문이나 유선굴 등의 영향이라는 점, 향가는 형식적인 특성뿐만 아니라 내용․기능적인 측면에서도 변문과 공통된 특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논하였다. 일본의 萬葉集 16권의 ‘有由緣雜歌’는 변문의 영향일 것이라는 점, 平安시대가 되면 大和物語 등에 ‘歌語’라는 산문과 운문의 결합형식이 성행하였다는 점, 그러나 일본의 경우 문학적 형식에서만의 수용일 뿐, 내용이나 불교포교라는 종교적인 목적에서의 수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임을 논하였다.

This paper examined effects of Buddhist culture on Asian literature focused on combined form of prose and verse which was a common character of Asian literature. As Buddhism spread into China, transformational literary was developed in China, affected from such as India's Jataka which was a combined form of prose and verse. Transformational literary generated a new literary style of novel called Yuseongul which was a combined form of prose and verse and had a great effects on Chinese literature. In Korea a verbal feature was found in Shilla's Wonhyo, Hyegong, and such Hyangg writers as Wolmyungsa and Youngjai. This tradition continued to Koryo's Gyunyeo. Works of Hyangga of combined form of prose and verse in Samgukyusa were affected from literary works of such transformational literary and Yuseongul and written at the stage of recording them. Hyangga had common character with transformational literary in not only stylish feature but also functional aspect. However, effects of pictorial aspect such as transformational symbol did not found in Hyangga. In Japan, a form of combination of backgroud tale and song beginning ‘Mukasi-ari(昔有)’ was found in ‘有由緣雜歌’ in Manyoshu Vol. 16. ‘Mukasi-ari(昔在)’, which could be considered as the same as ‘昔有’. Since ‘昔在’ was seen to be affected by transformational literary, ‘昔有’ was also seen to be affected by transformational literary. In 평안 period, the combined form of prose and verse such as ‘Utagatari(歌語り)' which explained the background of songs, were prevailed in Yamatomonogatari․Isemonogatari. Tales in 31volumes of Conzakumonogatari, which was estimably formed around 1120, were examined in relation to transformational literary in their structure and purpose, the fact of beginning the form of ‘今昔(Now is Past)’, intension of writing, and structural and substantial characters. Since Conzakumonogatari was thinly related to the combined form of prose and verse, examination was limited to poetic literatures. In case of Japan, the combined form was accepted only in the aspect of literary form but was not accepted either in subject matter or missionary purpose of Buddhism. Japanese were more interested in Buddhist pictures such as transformational symbol and independently developed pictorial volumes which drew literary works into pic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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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불 신앙’을 바탕으로 생겨난 설화 <불씨와 동삼>이 전승되는 구체적인 실상을 살피면서, 그것이 <야래자설화>의 영향을 받아 구조와 의미가 변하여 현재의 전승 모습을 갖게 되었음을 밝히기 위하여 작성된 것이다. 우선, 구전자료들을 이야기의 핵심 요소의 변화에 따라 <현장 추격형>(A형)과 <명주실 추적형>(B형)으로 대별하고 전자를 다시 세 개의 자료군으로 나눈 뒤, 네 자료군들이 내용상 어떤 특징을 보이는지 살폈다. 이를 토대로 이 설화의 기본적인 의미를 다음 네 가지로 추출하였다. 첫째, ‘집안의 불의 간수는 여성이 담당하며, 여성이 어떠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불을 지켜야 한다.’는 우리의 전통적인 민간신앙과 관습이 드러난다. 둘째, 불씨를 간수하면 그 집안이 복을 받는다는 사람들의 믿음을 반영한다. 셋째, 며느리의 입사식담의 성격을 지닌다. 넷째, 사악과 부정을 제거하며 생식을 소생하는 불의 의미 외에도 가계의 계승과 한 집안의 복을 의미를 내포한다. 다음으로, ‘불씨 회복’의 과정이 원래는 이야기 속에 들어 있어야 마땅함을 입증하기 위하여 비교민속적인 관점에서 우리와 주변 민족의 설화 및 불 신앙 등을 살폈다. 그 결과 ‘매년 정기적으로 묵은 불을 끄고 새불[新火]을 일으키는 불 의식’이 널리 퍼져있음을 확인하였고, 이를 통해 이야기 결말의 ‘동삼 얻어 부자되기’보다는 ‘불씨의 회복’이 더 원래적인 요소임을 추정하였다. 또한, 결말의 ‘동삼 얻어 부자되기’가 <야래자설화>의 영향에 의한 것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이와 관련된 야담과 구전민담을 제시하며 그 타당성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두 설화가 접변할 수 있는 근거로서, <불씨와 동삼>에 <야래자설화>의 내용이 공통된 것이 많다는 점, 두 나무를 마찰하여 불을 일으키는 것과 총각이 오줌을 누어 불을 끄는 것 등이 남녀의 성적인 교합을 의미하는데 이는 <야래자설화>의 이물교혼 부분과 연관된다는 점, ‘화롯불을 지키는 여사제가 수목신과 신성혼을 거쳐 영웅을 낳았다.’는 내용의 <로물루스> 탄생담처럼 <불씨와 동삼>도 ‘수목신과 여성의 성적인 결합’의 내용을 가질 수 있으며 이러한 구조적 친연성으로 인하여 <야래자설화>의 영향을 쉽게 받을 수 있다는 점 등을 들었다. 끝으로, 이 설화의 구조와 의미가 변모하는 과정으로 세 단계를 설정하였다. 곧 원래 ‘불씨의 보존과 간수’를 중시하는 민간신앙과 의식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생겨난 첫째 단계, ‘묵은 불을 새로운 불로 바꾸는 불 의식’이 반영되는 둘째 단계, <야래자설화>가 결합되면서 이야기의 구조, 줄거리, 의미 및 성격 등이 변하는 셋째 단계 등이 그것이다.

In this study, I investigated the actual tradition process of <Bulssi and Dongsam> which is based on the faith in fire and showed that this process was affected by <the tale of Yaraeja>. This intellectual endeavor was also the efforts of attempting to disclose the underlying meaning of <Bulssi and Dongsam>. To this end, I looked at the folk belief dimension and the thinking of fire that are held by Korean and the neighboring peoples. First, each version of <Bulssi and Dongsam> is classified into four types according to its core elements, and the common story structure that exists in different versions is extracted. This exhibits a few key meanings of the story. 1) the story reflects our traditional folk belief and custom that keeping the fire in a house alive is the duty of women and they must not fail in any difficulty, 2) this story shows the belief that the whole family will be blessed when the fire is kept wholeheartedly, 3) this folklore can be seen as the initiation story of a daughter-in-law, and 4) the fire in this story symbolizes 'the succession of family' and 'the blessing of the family.' This last element appears to emerge due to the fire being combined with the belief on Jowang(竈王). Next, I noted that nowhere in the story are shown the women's efforts to restore a extinguished fire while their efforts to keep fire are omnipresent. I attempted to show that the efforts of restoring fire had originally been included in the story. For this, I examined the folklore and the belief of fire of Korea and its neighboring peoples. Based on the findings, I concluded that the missing part must have been existent in the story. Finally, this paper investigates how <the tale of Yaraeja> has changed the meaning and the structure of the story. It is pointed out that both of the stories have elements that are reflective of sexual relationships. This illustrates that the story has gone through a few stages of transformation. The first stage is that the story began to emerge based on folk belief and thinking of maintaining and cherishing fire, which can be easily found in the story. It is the second stage that the thinking of changing a old fire to a new one became embedded into the story line. This stage is the one that is easily expected due to the belief that an extinguished fire must be restored. Third, the story transformed its structure, its story line, its meanings and characteristics as it got blended with <the tale of Yaraeja>. I claim that upon the influence of <the tale of Yaraeja>, 'extinguishing a old fire' transformed to 'searching for the reason why the fire died' to 'tracing the thread' and to 'identifying the person who extinguished the fire.' Accordingly, 'obtaining a new fire' has also changed to 'getting Dongsam,' and as a result the story has come to emphasize the meaning of becoming rich. Therefore, becoming rich with gold and silver in each of the story versions is claimed to be due to the blending of the two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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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학에서 채록된 자료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이는 설화학이 자료를 떠나서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화학자는 설화학을 자료학의 하나로 다루고 있으며 설화학도라면 누구나 일단 자료수집에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러시아의 작가 가린(Garin)은 일찍이 1898년 가을 한국의 북부 두만강과 압록강 지역을 답사한 후 그 이듬해인 1899년 󰡔조선, 만주, 요동반도 기행󰡕이라는 한국으로서는 아주 소중한 문헌을 남긴다. 전 6장으로 구성되었는데, 5장까지는 기행기이고, 6장은 기행의 결과로 얻어진 설화 자료이다. 그 후 6장은 별도로 분책되어 󰡔조선설화󰡕라는 이름으로 러시아(1904), 에스토니아(1918), 불란서(1925), 중국(1933), 독일(1948)에서 각각 간행되어 세계설화학계에 한국설화가 알려지게 된다. 󰡔조선설화󰡕는 전대에 없었던 개화기 최초의 현장 답사 채록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채록 데이터(data)를 상당수 복원할 수 있는 1장에서 5장까지의 기행기가 수반된 설화집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기념비적 자료집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작 한국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일제시대의 대러정책과 미․소 냉전에 따른 국내의 정치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간 한국에서 대할 수 있었던 자료는 불역본과 독역본이 고작이었는데 이는 가린의 원저 러시아판 64편 중, 불역본은 20편, 독역본은 25편을 각각 발췌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80년간 단절되었던 한러국교가 1990년 9월 다시 정상화되기 이전 양국간의 해빙무드를 타 1987년 金綠陽에 의해 러시아판이 최초로 아동을 위해 번역되었고, 그 후 2006년 安相薰에 의해 학술적으로 번역되었다. 한편 6장을 제외한 기행기는 󰡔조선설화󰡕보다는 비교적 일찍 한국에 소개된다. 논의의 편의상 6장을 제외한 기행기를 이하에서는 󰡔조선기행󰡕이라 칭하기로 한다. 󰡔조선기행󰡕은 1980년도에 金鶴秀에 의해 민족사(1980.9)와 단대출판부(1981.6)에서 거의 동시에 간행된다. 그러나 서지학상으로 보면 동일지형의 동종본이다. 그리고 이는 󰡔문학사상󰡕에 연재되었던 것을 묶은 것이다. 그러나 필자에 의하면 󰡔문학사상󰡕에 발표된 것이 최초로 한국에 공개된 것은 아니다. 이미 1931년 金東進에 의해 󰡔東光󰡕에 초역으로 발표된 바 있다. 이렇게 󰡔조선설화󰡕는 김녹양, 안상훈에 의해, 기행기는 김동진, 김학수에 의해 러시아어로 된 원전이 번역되었다. 그러나 본 자료들은 인명, 지명 등 고유명사 표기의 경우 미상인 경우가 적지 않다. 그리고 설화학상으로 볼 때 1장에서 5장까지의 󰡔조선기행󰡕은 결국 6장 󰡔조선설화󰡕를 읽기 위한 채록기이다. 따라서 󰡔조선기행󰡕에 나타난 인명, 지명 등과 역사적 사건 등을 면밀히 고증 검토한 후 채록 데이터(data)를 가려 뽑아 6장의 󰡔조선설화󰡕 각 편에 채록 데이터를 붙여 복원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따라서 󰡔조선기행󰡕에 나타난 인명, 지명 등과 역사적 사건 등을 면밀히 고증 검토한 후 채록 데이터(data)를 가려 뽑아 6장의 󰡔조선설화󰡕 각 편에 채록 데이터를 붙여 복원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따라서 본고는 󰡔조선기행󰡕의 도처에 나타난 산발적인 채록 데이터를 가려 뽑아 통역자 및 후원자의 고증, 제보자의 복원 등을 거쳐 󰡔조선설화󰡕 각 편의 설화와 연계시켜 최종적으로 채록 데이터를 일목요연하게 정리 복원하여 연구자가 쉽게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일차적으로 예비 작업을 함으로써 󰡔조선설화󰡕의 학술적 자료로서의 이용도와 가치를 높이고자 한다. 이에 본고는 전술한 바와 같이 어디까지나 예비 작업의 일환으로서 분량상 조사자, 통역자, 후원자, 제보자의 복원과 고증 작업만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앞으로 본고의 결과를 각 편의 설화와 연계시켜 연구자가 채록 데이터를 더욱 쉽게 볼 수 있도록 후속 논문을 쓰고자 한다. 가린의 󰡔조선설화󰡕는 19세기말 한국 초유의 현장 채록 설화로서 한국의 양강 지역은 물론 한국 설화의 원형(prototype)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한국설화의 새로운 유형(type)도 더러 발견되며 <수달에 관한 전설> 등 훗날 채록된 설화와 동일 유형이라 하더라도 정형성을 획득한 최초의 현장 채록설화라는 점에서 한국설화연구사상 그 의의가 매우 큰 자료이다.

説話学における採録された資料は絶対的な価値を持つ。説話学は資料から離れては成り立たないからである。したがって、説話学者たちは説話学を資料学の一つとして扱い、説話学を研究しようとする者は、まず資料収集に関心を持たなければならない。ロシアの作家ガリン(Garin)は、1898年秋、韓国の北部豆滿江と鴨綠江の地域を踏査してから、その翌年の1899年に󰡔朝鮮․満州․遼東半島の紀行󰡕という韓国に関する貴重な文献を残した。全6章の中、5章までは紀行記で、第6章は旅行先で集めた説話資料を収録している。さらに、第6章は分冊され、󰡔朝鮮説話󰡕という題で、ロシア(1904)、エストニア(1918)、フランス(1925)、中国(1933)、ドイツ(1948)で出版されて、諸外国の説話学界に韓国説話として知られるようになった。󰡔朝鮮説話󰡕はそれまでなかった開化期最初の現場踏査の採録書である。そのうえ、この説話集は採録データの復元できる、第1章から第5章までの旅行記が付いているので、学術的価値の高い記念碑的な資料集となる。しかし、残念ながら、韓国国内ではあまり注目されなかった。その理由として、植民地時代の対ロシア政策と米ソ冷戦による韓国国内の政治状況をあげることができる。とにかく、長い間韓国で接することの可能な資料はフランス語版とドイツ語版だけであったが、この二つの資料もガリンの原著ロシア語版の総64話に対照してみると、フランス語版は20話、ドイツ語版は25話をそれぞれ抜粋しただけのものである。韓国とロシアの国交が80年ぶりに再開した1990年9月の少し前の1987年、金緑陽によってロシア語版から初めて児童用に翻訳された。さらに、2006年安相薫によって学術的に翻訳されるようになった。一方、第6章を除いた紀行記は、󰡔朝鮮説話󰡕より比較的早い時期に韓国に紹介された。論議の便宜上、第6章を除いた紀行記を以下で󰡔朝鮮紀行󰡕と称することにする。󰡔朝鮮紀行󰡕は1980年代、金鶴秀の翻訳で民族社(1980.9)と檀大出版部(1981.6)からほぼ同じ時期に刊行された。しかし、書誌学上から見ると同一誌形の同種本である。これは󰡔文学思想󰡕に連載されたものを一冊の本にしたものである。しかし、筆者によると󰡔文学思想󰡕連載ものが韓国で初めて公開されたものではない。すでに1931年金東進によって雑誌󰡔東光󰡕に初訳として紹介されていた。こうして󰡔朝鮮説話󰡕は金緑陽、安相薫により、󰡔紀行文󰡕は金東進、金鶴秀によりロシア語の原著から翻訳されたのである。しかし、本資料に表われている人名、地名など固有名詞の表記の場合、未詳のものが少なくない。説話学の立場から見れば、第1章から第5章までの󰡔朝鮮紀行󰡕は結局第6章の内容を理解するための採録記である。従って、󰡔朝鮮紀行󰡕に表されている人名、地名などと歴史的事件などを詳しく考証してから、第6章の󰡔朝鮮説話󰡕各話にそれぞれ採録データを照らし合わせて復元する作業が要求される。したがって、本稿は󰡔朝鮮紀行󰡕の随所に表われている採録データから通訳者及び後援者の考証、提報者の復元という作業をしてから、󰡔朝鮮説話󰡕の各説話と関連させ、採録データを一目瞭然として整理․復元する。このように、本資料を利用する研究者たちのための予備作業をすることで、󰡔朝鮮説話󰡕の学術的資料としての価値と利用性を高めたいと思う。これを機会に、韓国説話研究においてガリンの資料がたくさん利用されるよう期待する。ガリンの󰡔朝鮮説話󰡕は19世紀末の韓国初有の現場採録の説話として、韓国の両江地域の説話はもちろん、韓国説話のプロトタイプとみてもいいと思う。中には韓国説話の新しいタイプと思われるものも見られる。例えば、「カワウソに関する伝説」などは後に採録された説話とほぼ同じタイプの話であることが分かっても、定型性を獲得した最初の現場採録の説話であるという点で、韓国説話の研究史上、その意義の高い資料とい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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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옥전>의 대중성-도식성과 환상성을 중심으로-

이명현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18집 2008.12 pp.285-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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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영웅소설의 도식성과 환상성이 사실성을 떨어뜨리는 요소라는 비판에 대한 반론의 일환으로 작성되었다. 영웅소설은 천편일률적이고 허황된 이야기라는 비판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고소설이 소멸하는 시기까지 지속적으로 창작되었다. 대부분의 영웅소설은 비현실적이고 우연적인 사건이 자주 등장하고, 앞부분만을 읽어도 뒤의 내용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당대 독자들은 그 내용에 열광하고 중독되었다.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는 영웅소설의 장르관습으로 도식성과 환상성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시각에서 고소설의 마지막 시기에 생산된 <김진옥전>을 분석하였다. <김진옥전>은 영웅의 일생이라는 도식적 유형을 기반으로 흥미요소를 지닌 다양한 삽화를 첨가하여 이야기를 확장하고 있다. 또한 초현실적 존재의 개입에 의한 사건해결이 빈번히 나타나지만, 초월성이 가지는 문제의식이 상실됨으로써 현실의 문제는 소거되고 유희적 환상성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이와 같은 현상은 독서에 몰입하여 작중인물과 동일시하고 있는 독자들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작품 내에 발생한 모든 갈등이 해결되기를 기원하는 독자의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서사전략이라 할 수 있다. 문학은 사실재현과 소망충족이라는 각기 다른 방식을 통해 진실을 탐구하고 즐거움을 제공한다. 영웅소설의 도식성과 환상성을 사실재현의 측면에서 비판하기 앞서 영웅소설의 미학적 요소로 인정하고 작품 속에서 기능하는 방식을 규명해야 할 것이다.

This essay links to the counter argument criticism which states that scheme and fantasy of heroic story is the element which decreases the reality. Despite the fact that heroic story receives criticism that it is monotonous and unbelievable, it has been created endlessly until the extinction of ancient story. Many of heroic stories frequently contain non-realistic and accidental events, and the end is easily conjectured by reading the beginning. However, lifetime readers are exhilarated and addicted to this story. The background of this state is because scheme and fantasy is applied as heroic story’s genre custom. This essay analizes the <KimJinOkJun> which has been written in the last period of ancient story in this view. <KimJinOkJun> expands the story by adding variety of episodes with interest with the hero’s life as scheme pattern. Moreover, although problems are frequently solved through intervention of surrealistic being, by loss of problem awareness of transcendencethe actual problem is eliminated and amusing fantasy replaces it. This kind of state alleviates the tension of the reader, who is at the same status as the character of the story, and is a transcription strategy which fulfills the reader’s desire to solve all the discords in the story. Literature researches the truth and provides joy through reemergence of actuality and fulfillment of hope. We need to approve the esthetic value of heroicstory and closely examine the functional formula within the work before criticizing the scheme and fantasy of heroic story in the view of reemergence of actu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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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事記의 文字表現-「請」과 「乞」의 용법을 중심으로-

박미경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18집 2008.12 pp.315-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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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가 없었던 시대부터 전해오던 옛 전승을 기록하기 위해 󰡔古事記󰡕의 편자가 상당히 의식적으로 용어를 선택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은 이미 주지하는 바인데, 본 논문은 특히 종래에 여러 논의가 있어 왔던 󰡔古事記󰡕의 「請」과 「乞」의 용법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古事記󰡕의 문자표현의 세계에 다가가고자 시도한 논문이다. 먼저 󰡔古事記󰡕에 보이는 「請」과 「乞」의 전용례를 조사하여 그 구문적 특징과 󰡔古事記󰡕의 문맥에 근거하여 두 글자가 사용된 상황 등에 대해 검토하였다. 그 결과 󰡔古事記󰡕의 「請」은 모두 자력으로는 解決(遂行, 成就) 등이 곤란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타인의 힘을 기대하고 상대쪽으로 찾아가서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나 문제의 경위를 설명하고 상대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는 비슷한 상황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점과 「請」을 받는 쪽은 「請」을 발하는 쪽보다 능력이나 신분에 있어서 상위자이거나 강자에 한정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에 비해 「乞」은 대상이 명시되어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는 「請」과 달리 문맥상 자명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그 대상이 명시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명시되는 대상도 모두 사람이나 사물과 같은 구체적인 것에 한한다는 점에서 명령 등과 같은 추상개념을 대상으로 하는 「請」과는 다르고, 「乞」의 받는 쪽은 오히려 대등하거나 하위자인 경우가 많다는 차이점을 지적할 수 있었다. 아울러 종래의 연구는 「請」을 「乞」의 同訓異字로 보아 ‘고우’라는 음으로 읽게 하고 있는데 이상과 같은 「請」과 「乞」의 용법을 고려해 보면 역시 「請」은 ‘고우’라고 읽히는 「乞」과는 다르며, 「請」이 사용되는 상황도 역시 단순히 아뢰거나 말하는 ‘모오스’와도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필자의 소견으로는 ‘세이스’라고 음독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향후의 과제로 삼고 싶다.

󰡔古事記󰡕の編者が、かなり意識的な用字意識のもと、文字のなかった時代から伝わっている古伝承を記録すべく努力していたことは、すでに知られている通りであるが、本論文は特に従来様々な議論がなされてきた󰡔古事記󰡕の「請」と「乞」の用法について考察を行うことで、󰡔古事記󰡕の文字表現の世界に迫ろうとしたものである。まず、󰡔古事記󰡕における「請」と「乞」の全用例を調べ、その構文的特徴や󰡔古事記󰡕の文脈に基づいて両字の使われ状況などを中心に検討した。その結果、󰡔古事記󰡕における「請」は、いずれも自力では解決(遂行、成就)などが困難な問題に直面した時、他力を期待して先方に出向き、自分の置かれている状況や問題の子細(経緯)を説明し、先方の力によって問題の解決を図るという似たような状況で使われていることを明らかにした。また、「請」を発する側は「請」を受ける側より能力や身分において上位者、または強者に限られることがわかった。一方「乞」の場合は、その対象が明示される場合と、そうでない場合のある「請」とは異なって、文脈上自明な場合を除いては必ずその対象が明示される。その対象も抽象的な事柄に限られる側面をもつ「請」とは違って、人や物のような具体的な対象に限られる。また、「乞」の受ける側は、発する側よりむしろ対等であるか、又は目下の場合が多いことを指摘できた。以上のような両字の用法を考慮に入れて考えると、「請」を「乞」の同訓異字とし、「請」を「こう」などと訓ませている従来の説への再考も必要であろうが、この点については今後を期し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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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감치 아스카 나라(飛鳥․奈良)時代에 고대 중국의 칠석전설이 전래 문화로 정착 형성되어져 온 흔적을 만뇨슈(万葉集)의 七夕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즉, 七夕 날에 우타아와세(歌合わせ: 좌우 두 패로 나뉜 사람들이 短歌을 한 수씩 읊어 판정자로 하여금 그 우열을 결정짓게 하는 놀이)의 궁중행사가 있었는데, 이러한 만뇨의 칠석가는 고대 중국에서 싹튼 전설을 서민생활 情緖로 감정이입하여 승화 발전시킨 詩情을 모태로 하여 궁정의 宴席에서 그 시적 재능을 발휘하게 하였던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중국 한시에서도 두 별의 짧은 재회의 기쁨을 뒤로 하고 帰途를 서두르듯 [새벽(暁)]이 다가오는 장면이 묘사되어 「은하수에는 暁光이 비추이고, 새벽이 밝아왔다」 「오늘밤 이별의 회한」 「새벽이 됨을 아파하다」 「벌써 시간이 지나 아침도 가까워」 등으로 다양한 이별의 아픔을 描出해 내고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 히토마로(人麻呂)의 칠석가를 고찰해보면 「만나기 드문」 妻를 만난 뒤에 새벽을 맞이하여 부른 노래의 예(10‧2021)」가 있다. 이에 대비되는 ㋣張文恭의 「七夕詩」의 예에서 똑 같은 「새벽(暁)」의 表現句가 서정으로 읊어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万葉歌의 原形에 가장 근접한 詩情이라는 것을 窺知할 수 있다. 또한, 히토마로歌集의 七夕歌群(권10‧1996~2033)중에서 万葉歌가 탄생하게 된 詩情의 發源과 흔적을 유추하여 보면, 먼저 漢詩文에서 「하룻밤 (칠석날)만의 歓情을 탄식하는」 詩想이 있고, 여기에서 觸發되어진 「년(年) 중에 만나기 힘든 妻를 만나다」는 心緒風景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2021번 노래의 [새벽 닭] 표현은 「그야말로 칠석 밤 만남의 짧은 기쁨은 새벽 닭울음소리에 이별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으로, 「새벽(暁)」이 다가옴에 따라 이별의 아쉬움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心象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곧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의 전승인 칠석시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를테면 漢詩의 原風景이 万葉歌에 反映되어 歌心을 유발하게 되고, 우타(歌)를 構想함에 있어서 서정의 요체가 되었다는 것을 추찰해볼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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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가를 통해서 본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大伴坂上郎女)시가의 독자성

사이토 아사코(斎藤麻子)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18집 2008.12 pp.38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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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만엽집(万葉集)󰡕를 대표하는 여성가인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이하 ‘이라쓰메’로 함) 작품 중에서, 특히 자연물(自然物)을 읊은 노래(본고에서는 이것을 ‘자연가’로 함)를 중심으로, 이라쓰메가 어떠한 자연물을 작품 속에 인용하고, 또 그것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지를 밝히고자한다. 이라쓰메의 자연가는 만엽 제 1‧2기부터 만가에 도입된 「구름」을 답습하면서, 병행하여 「눈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다른 여성가인에게는 볼 수 없는 한시문(漢詩文)의 영향이다. 또 그녀의 자연가는 타지에 체재했을 때나 연회에 참석했을 때 부른 노래가 많다. 이러한 점은 시대를 대변하는 여성가인 이라쓰메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상문(相聞, 연가)에서는 사호강(佐保川)과 물새(水鳥), 그리고 검은말(黒馬)이라는 경물(景物)이 도입되며, 강은 「물가의 사랑(水辺の恋)」이라는 모티브가 그 근저에 깔려있다. 특히 「새(鳥)」는 동떨어진 공간적인 간극을 극복하는 존재로서 의식되었다. 또 그녀는 「여름(夏)」 노래에 「青」과 「白」, 「青」과 「紅」이라는 선명한 색채를 조합하여, 이들을 「미소(咲み)」와 「사랑의 괴로움(苦しさ)」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봄은 도래하는 것이고, 경축할 만한 계절로 노래되어 지고 있지만, 이라쓰메는 「봄 안개(春霞)」를 「답답함(こころぐきもの)」으로 노래하고 있다. 겨울 매화는 당대 가인에 있어서는 매우 인상적인 것이었으나, 이라쓰메는 매화가 「떨어지는(散る)」 모습으로 표현하여, 그녀만의 독특한 감수성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이라쓰메의 자연가는 동시대 가인들과는 다른 새로운 노래의 세계를 구축했던 것이다.

This study strives to clarify what natural objects Iratume cite to the works, and how she expresses them focusing on the songs written about natural objects among the works of the woman poet representing <Manyosyu>, Otomoto Sakanoueno Iratume. Iratume's natural songs following <cloud> introduced at elegy from the 1st and 2nd term of Manyosyu, used the word of <tears>, which is influenced by a Chinese poetry and prose we have not seen from other poets. Also her poetry on nature includes many songs sung during staying at other place, or participating at a party. This aspect can be said to maintain the phase of Irasseume as a women poet representing the times. In songs of love(Somon), scenery and natural objects appear, for example, Saho River, water bird, and black horse, where the river is based on agony of love in the waterside. Especially <bird> was recognized as a being to get over a spatial gap. Also she combined clear colors of <blue> and <white>, <blue> and <red> and expressed them as <smile> and <agony of love>. In general, spring will come, and it was sung as a celebratory season, but Iratume sings <spring mist> as <stuffiness>. Winter flower of plum was greatly impressive for the poet at the time. Iratume tried to reveal her peculiar sentiment expressing the flower of plum as a shape of <falling>. Like this, the nature song of Iratume built a new world of her 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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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보 외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18집 2008.12 pp.413-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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