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rticle

현재 위치 Home

동아시아고대학 [DONG ASIA KODAEHAK ; The East Asian Ancient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동아시아고대학회 [The Association Of East Asian Ancient Studies]
  • pISSN
    1229-8298
  • 간기
    계간
  • 수록기간
    2000 ~ 2026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기타인문학
  • 십진분류
    KDC 910 DDC 950
제26집 (13건)
No

特輯 : 이익의 ‘세상만물’ 새로보기

1

『성호사설』「만물문」의 실학적 만물관과 자연학

김일권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6집 2011.12 pp.3-59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11,100원

『성호사설』은 18세기 중반에 편집된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의 류서류 저술이다. 여기에 담긴 다양한 지식 범주와 컨텐츠는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전개에 큰 영향을 끼쳤던 까닭에 그가 추구하였던 지적 지향성을 이해하고 그 저술적 가치를 재검토하는 일은 학술적 의의가 높다 하겠다. 성호의 고제자 순암 안정복(1712~1791)은 성호가 평소에 잡다하게 적은 글을 산삭하여 5편 20문으로 편집한 『성호사설류선』(10권 10책)을 펴내었고, 이 분류안을 그대로 중용하여 국역한 민족문화추진회는 성호의 지식 범주를 천지, 만물, 인사, 경사, 시문의 다섯 류문으로 설립하여 제시하였다. 본 논문은 이 중 「만물문」에 담긴 저술 내용을 분석하여 성호의 만물관과 자연학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성호는 애초에 만물문 항목들을 체계적 계통을 세워 분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궁금해하는 지적 호기심에 따라 백과사전식으로 나열한 정도였다. 이에 필자는 성호가 만물문을 통해 내보이려는 만물의 지식 컨텐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재분류하여, (1)조류, (2)동물류, (3)어패류・충류, (4)식물류, (5)기물류, (6)복식류, (7)음식류, (8)자연현상류, (9)사건사리류, (10)풍속제도류의 10개 류문과 그 하위로 54개 소분류를 포괄하는 류문 재구성안을 제시하였다. 그 구체적 서술 내용들은 성호의 만물관과 자연학 관점을 잘 드러내고 있었는데, 첫째, 서양문물과의 접변을 통해 과학기물의 우수성을 적극 평가하여 당시 사변적 성리학 지형 속에서 실용적 실학성을 제시한 의의가 있었으며, 둘째, 곤충의 습성관찰기와 같이 자연과학적 경험지식을 추구하였으며, 셋째, 석회의 제습과 보습 성질 관찰기와 같이 자연현상과 사물의 변화 원리를 물리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근대 자연과학적 태도까지 보여주었다. 넷째, 반면에 기상기후의 변화를 용의 조화로 설명하는 것과 같이 주술적 사고를 여전히 보여주었다. 다섯째, 그의 물명고증학적 접근은 지적 책임성을 제고한 것이었으며, 여섯째, 여러 기물류의 제작과정 고찰은 그의 실용적 관심과 물리적 자연관을 엿보게 하였고, 일곱째, 농기구, 병장기, 마구, 수레 등 일상생활 중의 실용적 용구에 대한 경세치용적 관찰을 대폭 수록한 점도 인상적이었다. 여덟째, 갯벌의 바닷게 종류나 도량기물의 종류를 세밀히 관찰 기록하는 점 등은 그의 만물 분류학적 태도를 매우 돋보이게 하는 대목들이었다. 아홉째, 기상과 물리화학, 생물현상 등 다양한 자연현상에 대한 자연과학적 관심도 주목되며, 열째, 서화서체, 점복류, 금수오륜설 등은 만물이 아니라 만사에 대한 사건사리적 관찰을 다룬 것들로써 그의 분석적 통찰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실용적이고 경험적인 그의 만물관과 자연학적 기술은 조선 후기 지식의 생태를 크게 변모시키는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星湖僿說』は18世紀の半ばに編輯された実学者の星湖李瀷(1681~1763)の類書類の著述である。『星湖僿說』に盛り込まれた様々な知識の範疇とコンテンツは朝鮮後期に実学思想の展開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為、彼が追求した知的志向性を理解し、その著述の価値を再検討する事は学術的な意義が高いといえるだろう。星湖の高弟子である順菴安鼎福(1712~1791)は星湖が普段から雑多に書き残した文章を刪削し、5編20門に編集した󰡔星湖僿說類選󰡕(10卷10冊)を編纂した。この分類案をそのまま重用し国譯した民族文化推進會は星湖の知識の範疇を天地、万物、人事、經史、詩文の五つの類門を設立し提示した。本稿はこの中で「万物門」に含まれた著述の内容を分析し、星湖の万物観と自然学を検討した。ところで、星湖は初めから万物門の項目を体系的な系統をつくり、分類したのではなく、自ら興味のある知的好奇心に従い百科事典のように羅列したものであった。これに対し、筆者は星湖が万物門を通じ示そうとした万物の知識コンテンツを分かりやすく再分類し(1)鳥類(2)動物類(3)魚介類・蟲類(4)植物類(5)奇物類(6)服飾類(7)飮食類(8)自然現象類(9)事件事理類(10)風俗制度類の10にわたる類門とその下位として54の小分類を包括する類門の再構成案を提示した。 その具体的な敍述の内容は星湖の万物観と自然学の観点を反映しているが、第一に、西洋文物との接触を通じ、科学器物の優秀性を積極的に評価し、当時、思弁的な性理学の中で実用的な実学性を提示する意義がある。第二に、昆虫の習性観察記のように自然科学的な経験知識を追求し、第三に、石灰の除湿と保湿の観察記のような自然現象と事物の変化の原理を物理的な観点からアプローチし、近代の自然科学的な態度まで示した。第四に、その一方で気象気候の変化を竜の調和として説明したように、呪術的な思考を依然として見せている。第五に、彼の物名考証学的なアプローチは知的責任性を高めた事であり、第六に、様々な器物類の製作過程の考察は彼の実用的な関心と物理的な自然観をうかがわせ、第七に、農機具、兵仗器、馬具、車など、日常生活の中の実用的な用具に対する経世致用的な観察を大幅に収録した点も印象的である。第八に干潟の海辺の蟹の種類や度量器物の種類を細密に観察し、記録した点等は、彼の万物分類学的な態度を大変引き立てる部分であった。第九に、気象と物理科学、生物現象など様々な自然現象に対する自然科学的な関心も注目され、第十に、書画書体、占卜類、禽獣五倫說等は、万物ではなく万事に対する事件事理的な観察を扱うものとして、彼の分析的な洞察力をあらわしている。このように実学的で経験的な彼の万物観と自然科学的な技術は朝鮮後期の知識の生態を大きく変貌させる基盤となったと評価される。

2

8,400원

본고는 조선후기 실학의 학문적 특징을 성호(星湖) 이익(李瀷)과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을 통해 비교분석한 것이다. 두 사람은 각각 『성호사설(星湖僿說)』과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라는 거질의 저작을 남겼는데, 각각 18세기와 19세기의 학술을 집대성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고에서는 특히 성호의 학술이 오주의 학술로 어떻게 이어졌는지 그 양상을 분석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먼저 성호의 학문경향이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학자로서 실천적 자세를 보여주고, 오주는 박학(博學)을 추구하여 그 호기심이 방대한 저술을 남긴 원동력이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저자들이 살았던 시대상에 따라 저술의 내용도 각기 달라졌음을 규명해 보았다. 다음으로 도표를 통하여 각 저술이 모두 인사문(人事門), 경사문(經史門) 등 현실생활과 관련된 내용에 중점을 두었음을 주목하여, 두 저술 모두 조선후기 실학의 면면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음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각 저술의 구성에서 시문(詩文) 부분이 매우 소략하여 문인학사(文人學士)의 우아한 생활을 읊은 저술과는 성격이 다름을 보여주려 노력하였다, 다음으로 『성호사설』이 구축한 학술내용이 『오주연문장전산고』로 대거 영향을 미쳤음을 도표를 통해 계량화하였다. 그 결과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성호사설』의 내용이 105회 인용되어 다른 저술들에 비해 매우 광범하게 인용되고 있음을 도출해 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당파가 서로 달랐던 탓으로 오주는 성호의 학술을 인용하면서 특별한 존칭은 사용하지 않았으나, 그의 학술만큼은 매우 권위를 인정하여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어서 성호의 학술이 오주의 학술에 이르기까지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기 위해 지상(地桑)이란 한 가지 사례를 뽑아 분석하였다. 성호의 <지상(地桑)>이란 글이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와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정착되는 과정을 포착하여, 조선후기 필기(筆記)・유서(類書) 사이에선 활발히 전개된 학술의 교류와 변용의 한 가지 실례를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필기・유서의 유행은 명청(明淸) 서적의 대량 수입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살폈고, 후대로 갈수록 청대학술을 대폭 수용했으며 『오주연문장전산고』가 그 대표적 사례임을 밝혔다.

The main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academic attributes of Silhak(實學, Practical Science)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rough comparing the writing of Seongho Yi Ik(星湖 李瀷, 1681-1763) and those of Oju Yi Kyukeyong(五洲 李圭景, 1788~1856). Both scholars wrote masterworks called Seongho-saseol(星湖僿說) and Oju-Yeonmunjangjeon-Sango(五洲衍文長箋散稿) each, and these are not too much to be named as comprehensive compilations of the 18th and 19th scholarships. This thesis focuses on how Seongho’s scholarship had been passed on to Oju’s studies. The study begins with presenting Seongho’s practical pursuit seeing him as a Silhak-scholar with Gyeongse-chiyong(經世致用), and indicates that Oju had sought Bakhak(博學) and his academic curiosity had been a driving force to leave numerous writings. Accordingly, it demonstrates the reflection of authors’ times on the contents of their writings. A chart that comes next, points out that both writings put emphasis on real life related items such as Insamun(人事門) and Gyeongsamun(經史門), which provides a clue to the continuous flow of Silhak in the late Joseon dynasty. By showing quite a small portion of poetry in both writings’ composition, these two compilations are defined as the writings that have different qualities from the ones appreciating elegant lives of literati-scholars. A great influence of Seongho-saseol’s academic contents on Oju-Yeon munjangjeon-Sango is quantified as shown in next chart. Oju-Yeon munjangjeon-Sango contains 105 quotations from Seongho-saseol, which indicates a vast use of Seongho-saseol in Oju-Yeonmunjangjeon-Sango in comparison to the use of other books and writings. Oju did not mention particular names referring to Seongho in case of quoting due to the difference in their parties. However, these quotations assure that Oju had accepted Seongho’s scholarship acknowledging his academic authority. To trace how Seongho’s scholarship had influence on Oju’s studies, a case study on “Jisang(地桑)” is performed. By analyzing the process of how “Jisang” had became implanted in Imwon-kyungje-jee(林園經濟志) and Oju-Yeonmunjangjeon-Sango, active academic exchange and transformation between Pilgi(筆記) and Yuseo(類書) can be inferred. Finally, this study shed light on the following issues; a spread of Pilgi and Yuseo was based on bulk import of the books written in Ming and Ching dynasties, more of the Ching’s academy had been accepted as time goes by, and Oju-Yeonmunjangjeon-Sango is the most representing example for this phenomenon.

3

9,300원

한 시대의 문화적 산물이라고 하는 복식을 연구하는 데 있어 가장 좋은 방법은 첫째, 문헌을 기반으로 한 철저한 고증이며, 둘째, 실물과의 비교를 통한 분석과 검증이다. 그러나 문헌자료가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 실물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도 있고, 실물은 남아 있다할지라도 그것의 유래나 제작방식 또는 그 복식이 갖는 함의 등을 밝힌 텍스트가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호 李瀷(1681~1763)은 『성호사설』 「만물문」에 많은 복식기록을 남겨 놓았으며, 이는 조선 중기의 복식연구에 있어 중요한 문헌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성호의 기록이 철저한 고증을 통해 기록되었다 할지라도 이들 자료를 십분 활용하기 위해서는 검증이 필요한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성호 李瀷(1681~1763)이『성호사설』 「만물문」에 수록해 놓은 복식관련 자료를 그림이나 실물 등의 시각자료와 함께 비교・분석함으로써 성호가 당시 관심을 갖고 있었던 복식이 무엇이며, 그것을 통해 밝히고자 한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고찰하고자 하였다. 성호 이익이 「만물문」에 수록해 놓은 복식관련 자료는 36종이며, 그 중 18종의 복식기록을 시각자료와 함께 비교・분석하였으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도포, 괘배, 피견, 멱리, 난삼, 잠도, 계장 등은 철저한 고증을 통하여 이들 자료에 대한 기원 및 유래를 고찰함으로써 복식의 근본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둘째, 裘, 초구, 목극, 옥영, 백갑 등은 고증을 통해 잘못 알고 있거나 잘못 알려졌음을 밝힘으로써 각각의 가치를 재발견하고자하였다. 셋째, 발개, 지척, 부인복 등은 고증을 통하여 복식이 변화하게 된 원인을 분석함으로써 잘못된 풍속은 교화하고 그에 걸 맞는 대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와같이 철저한 고증에도 불구하고 고습요습, 패대, 복건, 여모 등은 성호가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본 연구에서 바로잡았다. 그러나 여전히 성호의 복식기록은 조선중기의 복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준거자료로써 활용될 것이며, 그 가치 또한 높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The dress and its ornament is called the cultural product of an era and the first and the best way to study is the exhaustive historical research based on the literature and secondly, comparison of the actual through the analysis and verification. The best effective study of the dress and ornament is to consider them thorough the comparative analysis of visuals that are based on the literature data, however, remaining of literature data does not mean the actual is remaining too and there would be no text about the origin and form of production or the Ham (a box of wedding gifts went by a bridegroom to his bride before wedding) of the dress and ornament has been revealed even if the actual was remaining. Sungho(Lee-ick, 李瀷)(1681~1763) has contained the references about the dress and ornament in 『Seonghosaseol』(editorial of Seougho) 「Manmulmun」 and this is currently the useful material in the study of dress and ornament. However, to take the advantage of these materials, verification of his record is a matter of common knowledge even though Seoungho’s records are through an exhaustive historical research. In this study, the contents of the pictures and actual visuals of the dress and ornament data that Sungho Lee-ick(李瀷)(1681~1763) has contained in 『Seonghosaseol』(editorial of Seougho) 「Manmulmun」 with comparative analysis and study of the dress and ornament that have interested Sungho and what was the content to reveal them were discussed. Therefore, comparative analysis was done by 18 types of the dress and ornament with visuals among 37 types of data that Sungho Lee-ick has contained in 「Manmulmun」, and the results are as follows. First, the origins of Dopo(man’s jacket as a dress), Gwaebae(clothes that were strapped by beads and rings in both sides), Pigyeon, myeokri, nansam(the clothes for scholars in Joseon Dynasty), Jamdo(to fix the hat for government officials using hairpin or wood material) and Gyejang etc were considered through an exhaustive historical research and secondly, the opportunity has been arraged to rediscover the value by correcting the misconceptions about the dress and ornament like Gu(裘, The animal fur lined clothing) Chogu, Namaksin(straw shoes), Okyoung(wooden shoes) etc. Thirdly, Balgae and Ja, Woman Dress etc have created the standard rules and regulations to correct the negative effect and edify the custom as well as the recorded references are highly valued in understanding the dress and ornament in the middle of the Joseon Dynasty. Nevertheless, due to Sungho was not a dress and ornament scholar, there were some part that he misunderstood the origin and how to wear the Goseupyoseup, Paedae (belt), Bokgun, (the hat for the confucian scholar), Yeomo (women’s headgear) etc.

一般論文

4

한국 동심원암각화의 상징 - 물과 관련하여

이하우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6집 2011.12 pp.149-192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9,100원

한국 암각화의 표현물 중에는 여러 점의 동심원암각화가 있다. 동심원암각화에 대한 인식은 이것이 태양상징으로 이해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필자는 대구 천내리의 한 고인돌에서 새로운 암각화를 조사하면서, 이 조사를 계기로 그간 학계에 수용되어 온 동심원암각화가 태양상징이라는 설에 대하여 재검토하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한국 동심원암각화의 성격을 밝혀보고자 한다. 이미 잘 알려진 동심원암각화 외에 근래에 와서 새롭게 조사된 자료도 여러 점 있다. 증가된 자료를 바탕으로 필자는 동심원암각화가 제작된 바위의 조건과 방위, 동심원이 바라보고 있는 전방의 입지조건, 그리고 문양의 성립과 같은 부분을 중점적으로 분석하였다. 이에 따르면 동심원암각화는 태양보다는 물과 관계가 깊다는 여러 현상을 발견할 수 있으며, 결론적으로 필자는 동심원암각화를 물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보고자 한다. 대구 진천동과 같은 입석이나 일부 고인돌이 제의장소의 기능이 있다는 고고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볼 때, 몇몇 고인돌은 공동체 사회의 집단적 제의장소로서 활용되었을 것이다. 동심원암각화가 새겨진 고인돌도 같은 기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고인돌에서 제의형태는 우선 거석숭배나 조상숭배와 같은 방식을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외에 가뭄과 같은 재해를 피하고자 물 또는 비의 상징물로 동심원암각화를 새겨놓고 기우제와 같은 의례가 수행된 것이 아닐까 한다.

Since several figures in the form of concentric circle have been found in the remains of petroglyphs in Korea, reserchers have long considered them a symbol of the Sun. We have studied for a while, however, with the idea that they may indicate some other objects. Recently examining petroglyphs in Chunnae-ri(Daegu), we suggest a critical reexamination of the established hypothesis in order to reconsider the characteristics of these figures. There were a lot of recently found and examined remains of Korean petroglyphs such as petroglyphs in Jincheon-dong(Daegu), Anin-ri(Milyang), Jicho-ri(Musan, North Korea), not mentioning some well-known ones in Cheonjeon-ri(Woolsan), Yangjeon-dong(Goryung) and Dohang-ri(Haman). In addition to it, more recently, the remains in Chunnae-ri were now also being studied, their figures in concentric circles. With this increased number of data now we had, the method applied to our serious analyctic works was based on the close examination of the rocks and the conditions of their location, including what the front area that these figures were directly facing forward was like. Following this method, we could more count on menhirs and dolmens than natural rocks in order to draw better results. For menhirs and dolmens, a maker can choose the location and direction of their works more freely. Therefore, these samples show better the intentions of the maker. Thus we put more minute efforts on the observation about them. For the matter of directions, we studied first, they all showed inconsistency. Each rock on which these concentric circles were engraved was towards each different direction. This fact opposed the idea that these figures referred the sun, for symbols of the Sun were usually made in a certain range of north-eastern directions. We found, on the contrary, that where these concentric circles were directly facing are always the waters, rivers etc. For this discovery went with all the examples we studied, it showed the possibility that these circles are more related to water than the sun. Plus, considering that some menhirs and dolmens such as the ones in Jincheon(Daegu), had been regarded for religious ritual and ceremony, we thought it was even more probable that dolmens in Chunnae-ri, Anin-ri, Dohang-ri might had been for the same usage. Their locations were very likely to have been a religious cite for people in collective society. For many typical Korean ancient societies which were mostly dependant on farming since the Bronze Age, irrigation was crucial problem. We think, therefore, besides admiration of giant stones and ancestors, there might have been largely practiced way of religious ritual for rain in order to overcome droughts. All in all, we suggest that the concentric circle figures found in Korean petroglyphs are basically a symbol of water, used for religious rituals, most likely for rain.

5

거란성에 대한 초보 연구

복기대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6집 2011.12 pp.193-225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7,500원

한국학계에서 최근까지 거란역사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란사는 한국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역사라고 생각하였다. 한국학계의 생각은 그랬지만 실제 거란의 역사와 풍속은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상징이 거란 성이다. 거란이 성을 갖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고구려에 의지하면서 부터이다. 거란은 원래 초원에서 짐승을 기르면서 부족을 성장시킨 민족이다. 그들은 주변세력들의 계속되는 압박속에 스스로의 생존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단결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만의 독특한 부족체제를 구성하여 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고구려제도의 영향이었다. 일부 조직에서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지만, 큰 틀은 고구려제도를 이어받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거란과 고구려의 행정체제의 유사성과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성을 짓는데도 유사한 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거란은 고구려의 축성방식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雉’라는 독특한 구조가 보이는 것이다. 이 구조물은 만주지역의 고유한 축성양식으로 그 기원은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어 계속하여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사람들이 대를 이어가면서 문화를 계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계승과정에서 하나 중요한 것은 발해와의 관계이다. 고구려-발해-거란은 시대적으로 선후관계를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거란이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했다하더라도 그 과정은 반드시 발해를 통과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즉 거란이 계승한 고구려의 전통은 발해시대에도 계승되던 전통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거란의 전통은 고구려→발해→거란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세 나라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현상은 거란의 역사를 기록한 󰡔遼史󰡕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거란의 역사는 한국사와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거란은 민족이동사에도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멀리 서로는 멀리, 알타이산맥까지 북으로는 북몽골까지 세력을 펼쳤다. 이들이 세력을 펼친 곳에는 그들이 정주를 하면서 배운 풍속들이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봐야 한다. 이 이동지역에 대한 연구는 훗날 이어지는 초원지역의 역사전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거란의 역사는 다양한 부분에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It is true that Korean academia has no concern in history of the Khi Tai. For that reason, Khi Tai history was considered irrelavent to Korean History. In spite of thought in Korean academia, actual Khi Tai history and tradition are revealed to be very closely related with Goguryeo. Khi Tai Castle is the representative relationship. The reason of Khi Tai owning this castle is as them leaning on Goguryeo. Khi Tai originated from nomadic tribe which grows their power with bringing up livestock in grassland. Therefore with no necessity of ​administrative organization, they should have been united to find way of survival against surround influences. As a result, they could grow their power with unique tribe system. In this course, system of Goguryeo had a decisive effect on Khi Tai. Some part of system seem to be influenced by Tang Dynasty, yet we could see that framework of the system inherited from system of Goguryeo. Thses similarity is found in castles and ​administrative system in Khi Tai and Goguryeo. Khi Tai inherits way of castle construction of Goguryeo. The typical thing is unique structure, called “Chi.” We could know that this structure is handed down from the Bronze age in Manchuria region as unique style. People inherit the traditional heritage carrying on family line. The importance in this inheritance process is relationship with BalHae. Goguryeo, BalHae and Khi Tai have clear order of the heritage. Therefore, even though Khi Tai inherit tradition of Goguryeo, Khi Tai must need to get through BalHae. In other word, tradition of Goguryeo is inherited to both Khi Tai and BalHae. So, the tradition of Khi Tai continue in order after Goguryeo and BalHae. This shows that these three countries have close relationship. This phenomenon is shown at ‘遼史’, the record of Khi Tai history. So, we know that history of Khi Tai and Korea is an inseparable relation each other. Khi Tai is also important in history of racial migration. They extend their power to the Altai Mountains as far west and North Mongolia as far north. We assume that there are very higher possibility of tradition to be transfered where Khi Tai settled. This research about migration would be very related to later history of grassland. Therefore, History of Khi Tai should be studied at various views.

6

9,000원

필자는 <이성계와 산제>, <부정한 제삿밥>, <복 많은 백정 딸>, <소금장수와 딸> 등을 <우연히 엿들은 ‘신령들의 제물 품평’> 설화군으로 통칭하고, 이들 설화에 공통적으로 <신령 품평>이 결합하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각 설화의 전승 양상을 통해 <신령 품평>이 나타나는 모습을 점검하였으며 나아가 ‘부정한 제물’에 대한 신령의 신벌과 제사자의 극복 방식이 개별 설화별로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보았다. 우선 이들 설화를 제사자가 어떤 신령에게 제사를 드리는지에 따라 <산신 응감>형(A), <조상신 응감>형(B), <삼신 응감>형(C)으로 크게 나누어 이들의 전승 양상을 점검하였는데, 세 유형 모두에 한 사람이 묘(나무)곁에서 잠을 자다가 ‘신령 간 제물 품평’을 우연히 엿들으며, 부정한 제물로 신령이 제사자에게 화복(禍福)을 점지한다는 내용이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신령 품평>의 서사단락을 7개 단락으로 추출한 뒤 이것이 세 유형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살폈다. 그 결과 ‘다시 제사하기’ 대목(단락4, 5, 6)이 대부분 유형에서 누락되어 있었는데, 이는 신령의 성격, 신벌에 대한 제사자의 의식 등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각 설화 유형의 의미를 생산해내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세 설화의 주제를 살피기 위한 작업의 하나로서 제사 목적과, 제사 대상이 되는 신령의 성격을 살폈는데, A형에서는 이성계가 즉위야망으로 산신에 제사를 드리고, B형에서는 죽은 부모에 대해 유교식 기제사를 드리며, C형에서는 신생아와 산모를 보호하는 삼신에게 삼밥을 대접하고 있었다. 그런데 각 유형에 부정한 제물에 대한 신령의 벌이 내려지는데, 이에 대한 제사자의 의식에 따라 신벌의 극복양상이 달랐다. 곧 A형의 경우 이성계는 즉위야망으로 다시 재계하여 제사하기를 감행한 뒤 신령으로부터 ‘삼한차지의 복’을 점지 받고 있지만, B형에서는 제사자가 손자화상의 신벌을 감수하면서 제사를 정성껏 지내야 함을 각성하는 계기로 삼는다는 일군의 자료군(<자손에 해 끼치기>형)과, 신벌과 같은 조상신의 위력을 부정하고 오히려 ‘자식의 화상’을 치유하기 위하여 유교에서 음사로 간주되는 ‘다시 제사하기’를 감행한다는 자료군(<다시 제사하기>형)으로 나뉘고 있었다. 또한 C형에서도 신생아와 산모를 보호하는 삼신에 대한 신앙이 강한 탓에 삼신이 내린 신벌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못하고 결국 신벌을 받는다는 자료군(<부녀상간>형)과, 신벌을 인지한 뒤 박복한 자식을 ‘복 많은 백정 딸’과 혼인시킴으로써 신벌을 극복하고 있는 자료군(<복 점지>형)으로 나뉘고 있었다. 이러한 신벌과 그 극복의 결과로서 제사자가 겪는 화복의 영역이 세 유형별로 서로 다르니 곧 A형은 이성계의 건국과 즉위에, B형은 가계의 지속에, C형은 개인의 욕망 내지는 먹고살기에 걸쳐 있어서, 결국 화복이 각각 ‘건국 및 즉위 → 가계의 지속 → 개인의 욕망 및 생계유지’에 대응하면서 인간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세 유형이 제사설화로서 어떤 특징을 지니는지 살폈는데, 모두 ‘제사를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특히 <조상신 응감>형이 ‘제사자의 마음과 제물의 정결함’을 가장 강조하고 있어서 제사의 수신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 외 유형에도 제사의 정결함이 강조되고 있었다. 세 유형에 <신령 품평>이 결합하게 된 이유를 살폈는데, 첫째는 제사에서 신령이 흠향과 응감했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소원과 욕망을 해소하는 데 적합하고, 둘째 신령 간 대화를 통해 청자의 미래사를 알 수 있을 것이라는 호기심과 믿음을 충족시켜주고 있어서 여러 설화에 결합할 수 있다고 보았다.

The tales, that is, <Lee seong-gye and Sanje>, <Filthy offerings>, <A fortunate daughter of a butcher>, <Salter and Daughter> are called <the overhearing ‘divine spirits' criticism on offerings’> folktale-cycle. This tale-cycle combines <criticism of a divine spirit> tale. This paper tries to investigate patterns of combining <the overhearing ‘divine spirits' criticism on offerings’> folktale-cycle with <criticism of a divine spirit> tale, and explore what those tales display meanings. First, I classify those tales into <Mountain spirit's response>type(A), <Ancestor spirit's response>type(B) and <Sam-sin's response>type(C) according to divine performing a religious service, then explore to traditional patterns of the three types. As a result, the three types all contain that a man overhear ‘divine spirits' criticism on offerings’ near a graveyard(or tree) during sleeping at night, and divine spirits give ‘fortune and misfortune’ to man who hold ancestral rites because of filthy offerings. Next, I extract 7 epic paragraphs out of <criticism of a divine spirit> tale, and explore how paragraphs appear in the three types tale. As a result, most of types except A type miss out ‘re-perform a religious service’ part(i.e., paragraph 4,5,6). I understand that this result is caused by the difference of the divine's characteristic and performer's consciousness for a divine punishment, therefore those three types make a tale's meaning. And, for the purpose of the looking at the theme of <the overhearing ‘divine spirits' criticism on offerings’> folktale-cycle, I explore aim of a religious service and divines' characteristic. This work can be summarized in those aspects : 1) In A type, Lee Seong-gye perform a religious service to Mountain spirit for an accession to the throne, but Mountain spirit don't response his effort because of filthy offerings. Then he dare to re-perform a religious service, and achieve his purpose from Mountain spirit in the end. 2) In B type, a man perform ancestral rite, but ancestor spirit don't response for same reasons like A type and punish his son with fire-hurt. However out of this B type, there are two sub-types according to performer's consciousness for a divine punishment. : B-1 sub-type show that a man realize his wrongs by oneself and receive the divine punishment. And B-2 sub-type show that he don't accept the divine punishment and cure fire-hurt of his son after re-performing ancestral rite. 3) In C type, there are a religious service to Sam-sin(the three gods governing childbirth) in two families. One family's offerings are filthy, the other family's offerings are clean. Therefore Sam-sin don't response offerings of the former and punish performer's son with misfortune to the one, but on the other hand, Sam-sin give a great fortune to daughter of the latter. Finally, I explore the characteristic of 3 types. Those tales all make an issue of how to hold ancestral rites. Especially <Mountain spirit's response>type(A) stress the need of the true heart of performer and the cleanness of offerings, and so does the other types. Two are reason of combining <the overhearing ‘divine spirits' criticism on offerings’> folktale-cycle with <criticism of a divine spirit> tale. : 1) Its tale is suitable for solving the hope and desire that men want to know whether divine spirit receive and response a religious service. 2) Its tale satisfy men's curiosity and belief that can guess their future events by overhearing dialogue between divine spirits.

7

6,900원

이 글은 한국 애정비극의 대표적인 작품인 <운영전>과 <변강쇠가>의 미학적 특성을 설화적 전통 속에서 규명해 보고자 했다. 운영은 설화, ‘선녀와 나무꾼’의 선녀와 같은 존재이다. 그녀는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는 공간, 수성궁에 사는 궁녀로서 특별히 선발되어 시문(詩文)을 비롯한 온갖 재예를 익힌 특출한 미인이다. 선녀는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한 남자가 이 선녀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러나 이 인연은 정상을 벗어난 것이다. 여기에 이미 비극의 씨가 뿌려진 것이다. 이들은 결국 갈라지게 된다. 이것으로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이들 작품에는 비극에 관여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끈이 존재한다. 관계이다. 나무꾼은 어머니를 보러 왔다가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고 선녀를 잃은 슬픔 속에서 죽어 하늘을 보고 우는 수탉이 된다. 운영 역시 동료들과 가족에게 미칠 화에 생각이 미치자 탈출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변강쇠가>의 강쇠는 죽으면서 자신의 아내인 옹녀에게 접근하는 모든 남자를 다 죽이겠다는 아내 독점의 욕망을 유언으로 남긴다. 그는 옹녀에게 붙은 상사뱀과 같은 존재이다. ‘상사뱀’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이가 뱀으로 환생하여 짝사랑했던 사람에게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사랑의 희생자가 가해자로, 무심했던 가해자가 희생자로 되는 위치의 역전이 주요한 모티프이다. 희생자는 이 뱀을 퇴치하고자 하지만 상사뱀은 퇴치되지 않는다.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 먼저이다. 죽은 강쇠를 둘러싼 사건들의 난해함은 정으로 세상을 읽던 옛 시선과 논리로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선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사랑받는 자보다 사랑하는 자 편에 서 있는 한국인을 본다. 때로 그 사랑이 아름답거나 현명하지 않아도 그 처절함을 긍정하는 마음이다.

本文把韩国爱情悲剧的代表作品“云英传”和“卞钢铁歌”的美学特点在故事化的传统中进行了研究。云英是和故事“仙女和砍柴郎”中的仙女一样的存在。她是生活在外界人无法轻易接近的空间-寿成宫的宫女, 是经特殊选拔习得各种才艺(包括诗文)的出类拔萃的美人。仙女是人类无法相及的存在。可是一位男子却与这位仙女接上了姻缘, 但这是偏离正常的姻缘, 在此埋下了悲剧的种子。他们终究分了手。由此已表现得非常充分。但他们之间还存在一个关系到悲剧的强有力的线索-关系。为看望母亲来到人间的砍柴郎因回不到天间在失去仙女的悲痛中死去, 变成了望天泣鸣的公鸡。同样云英也因想到同聊和家族将会招致祸害而迟迟未能把出走付诸于行动。“卞钢铁歌”中的钢铁在临死前留下了将杀死所有接近自己妻子-玉女的男人们即把强烈的妻子独占欲的遗言。他是像一条附在玉女身上的相思蛇般的存在。‘相思蛇’是未能如愿爱情而死去的人脱胎为蛇后附在单恋过的人身上寸步不离的故事。此故事中爱情的牺牲者变成加害者, 加害者变成牺牲者的角色逆转成为了重要的主题。牺牲者欲要去除这条蛇而相思蛇却除不掉。解除怨恨才是首要的。围绕钢铁的诸事件的难解是因为以情解读社会的古代视线和以伦理看待社会的我们现代视线相冲突的缘故。在此笔者发现了比被爱的人更是站在爱别人的立场上的韩国人。有时那些爱情即便不那么美丽和明智但内心深处却十分认同它的凄凉。

8

<林下筆記>에 나타난 歲時風俗과 民俗놀이 硏究

宋宰鏞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6집 2011.12 pp.301-329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6,900원

『林下筆記』(한문. 필사본 39권)는 李裕元(1814-1888)의 대표적인 저술 가운데 하나로, 정치・경제・사회・문화・역사・사상・제도・지리・금석 및 서화・음악・문학・민속학 등 각 분야를 博物學的・百科全書 식으로 기술한 책이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단순한 기록만이 아닌, 사회 전반에서부터 國事와 개인 신변잡사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관한 내용과 견문, 체험까지도 기록하고 있어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임하필기』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해서는 이미 연구자들에 의해 언급된바 있다. 필자는 『임하필기』의 종합적 연구의 일환으로, 특히 민속 분야 그 중에서도 연구가 전무한 歲時風俗과 民俗놀이에 주목하였다. 본고에서 논의한 사항들을 종합하여 결론으로 삼으면 다음과 같다. 이유원은 세시풍속과 민속놀이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는 『임하필기』에 세시풍속과 민속놀이 관련 기록들을 많이 남기고 있다. 세시풍속과 민속놀이는 「文獻指掌編」, 「華東玉糝編」, 「春明逸史」, 「旬一編」 등에 주로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문헌지장편」과 「화동옥삼편」에 많이 실려 있다. 그런데 그 내용도 비교적 간단할 뿐만 아니라, 19세기에 행했던 세시풍속과 민속놀이보다는 주로 조선 전기나 후기 문헌들에 수록된 세시풍속과 민속놀이를 참고 인용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있어 다소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하필기󰡕를 통해 당시의 세시풍속과 민속놀이의 지속과 변모를 파악할 수 있는바,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세시풍속의 경우, 元朝 때 행했던 聽讖의 유래와 변모, 上元 시 행했던 곡식 이삭 늘어놓기 행사, 花朝 풍속 행사의 토착성, 上巳日에 雪糕를 만들어 먹는 풍속의 고유성, 除夕 때 행했던 儺禮儀式 등은 주목할 만하다. 민속놀이의 경우, 紙鳶을 전쟁 때 구제용으로 사용했다는 중국의 고사, 이유원의 금천교에서의 다리밟기, 儺禮 의식 행사 중 새벽 근정문 밖에서 승지가 역귀 쫓는 계청서부터 끝나는 부분, 假面의 기원과 시초, 山棚戱와 橦絙戱의 재질과 많이 행하는 지역, 陞官圖와 選仙圖의 중국(唐・宋)에서의 유래와 놀이 방식, 陞官圖를 만든 사람, 宣和牌의 牙・天・地・和牌의 점수와 의미, 葉子戱의 일화와 紙牌의 시초, 骰子를 만든 사람, 재질, 만드는 방법 및 일화 등은 참고가 되거나 자료적으로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임하필기』에 나타난 세시풍속과 민속놀이는 민속학적으로 의미가 있다.

『Yimhapilgi』(林下筆記. 39 books of manuscripts in Chinese character) is one of the famous works by Lee Yu-won (李裕元. 1814-1888), and it is a natural historical and encyclopediac writing that integrates various areas such as politics, economics, society, culture, history, ideology, system, geographical information, minerals and rocks,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music, literature and folklore. Besides, this book records not only simple histories but also various knowledge and experience from politics over the society to the stories about private areas thus the value of the book is highly estimated. The importance and value of 『Yimhapilgi』 have already been mentioned by many researchers. Therefore, this study focuses on seasonal customs and folk games that have never studied before among various area of folklore as a part of integrate study. The findings discussed in this study are as follows. Lee Yu-won is assumed to be very interested in seasonal customs and folk games. Thus he had left many recordings about seasonal customs and folk games in 『Yimhapilgi』. The seasonal customs and folk games are mainly recorded in 「Munheonjijangpyun」 and 「Hwadongoksampyun」 among the main chapters such as 「Munheonjijangpyun」, 「Hwadongoksampyun」, 「Chunmyungilsa」 and 「Soonilpyun」. However, the contents are relatively simple and only the seasonal customs and folk games quoted from the documents in Early Chosun era or Late Chosun Dynasty. Nevertheless, it still has an important meaning since it still conveys the maintenance and changes in seasonal customs and folk games at the Late Chosun Dynasty. In the cases of seasonal customs, the origin and changes of Cheongcham on New Year’s Day, crop spikes scattering on Daeborum Day, indigenousness of custom events on Hwazo Day, the uniqueness of cooking and eating Seolgo on Sangsa Day and Narye ceremony on Jesoek Day are remarkable. In the cases of folk games, the historical story of using kite in the war in China, walking play on Geumcheon bridge, the story about seungji exorcising evil spirit outside of Geunjeongmoon during Narye ceremony at dawn, the origin and first introduction of masks, the materials used in sandae play and donghwanhee and the legions where they were often played, the origin and rules of seungkwando and seonseondo from China, the inventor of seungkwando, the scores and meanings of ah, cheon, ji and lanhwa of seonhwapae, story of yubjahee and origin of jipae, the inventor, materials and manufacturing method of dice can be used for reference or has an important value as historical data. Therefore, the seasonal customs and folk games observed in『Yimhapilgi』convey important meanings from folklore view.

9

人麻呂歌集 七夕歌의 文學史的 意義

尹永水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6집 2011.12 pp.331-371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8,700원

본고는 일본의 고대가집 『萬葉集』卷十에 수록되어 있는 人麻呂歌集의 七夕歌 38수의 작자・제작시기・특징 등에 관한 고찰을 통하여 人麻呂歌集 칠석가의 문학사적인 意義에 대하여 고찰해 본 것이다. 人麻呂歌集 칠석가의 문학사적인 의의로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萬葉集』의 칠석가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백제계 渡倭人의 후손인 柿本人麻呂 자신에 의해 칠석가가 제작되었고, 그것이 일본문학에 있어서 칠석가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제작시기는 天武九年(680) 이후 또는 天武持統年間(672~696)에 지어진 것이 확실하나, 백제의 망명지식인에 의한 한문학의 융성과 和歌의 발달을 가져온 近江朝(667~672) 시절에 人麻呂 자신이 직접 듣고 배웠던 중국의 七夕漢詩에 대한 한문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天武朝에 와서 본격적으로 人麻呂歌集 칠석가를 제작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내용과 표현방법에 있어서도 人麻呂歌集 칠석가는 구승문학에서 기록문학으로, 신화적 세계에서 역사적 세계로 넘어오는 과도기에 제작된 만큼, 전대로부터 내려오는 문학적 전통과 한문학적인 자취를 남기면서 매우 독창적이고 창조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칠석한시와는 달리, 일본적 전통과 현실 생활적・신화적 배경 하에 제작된 작품이 많고, 천상의 슬픈 러브스토리를 현실생활과 밀접한 인간적이고 지상적인 사랑이야기로 변용하여 노래함으로써 일본적 칠석가의 전통을 창조하고 이룩했다는 데에 문학사적 의의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本稿は日本の古代歌集『萬葉集』中の七夕歌のなかで人麻呂歌集出典の七夕歌38首の作者・制作時期・特徵などに關する考察を通して人麻呂歌集七夕歌の文學史的な意義について考察してみたものである。 人麻呂歌集七夕歌の文學史的な意義としては、何よりも先ず『萬葉集』の七夕歌のなかでは最も早い時期に百済系渡来人の子孫である柿本人麻呂自分により、七夕歌が制作され、それが日本文學において七夕歌の先驅的な役割をはたしているという点があげられる。その制作年代は天武九年(680)以後、または天武持統年間(672~696)に作られたのが確かであるが、百濟の亡命知識人による漢文學の隆盛と和歌の 發達をもたらした近江朝において人麻呂自身が直接聞いて学んだ中國の七夕漢詩についての漢文學的な知識をもとに、天武朝に来て本格的に人麻呂歌集の七夕歌を制作しただろうと判斷される。 內容と表現方法においても人麻呂歌集七夕歌は口承文學から記載文學へ、神話的世界から歴史的世界へと移る過渡期に制作されただけに、前代からの文学的伝統と漢文学的な名残を留めつつ、すこぶる獨創的で創造的に詠んでいる。特に、中國の七夕漢詩とは違って日本的傳統と現實生活的・神話的背景のもとに詠まれた作品が多く、天上の悲しい戀物語を現實生活と密接な人間的な地上的な男女間の戀物語に変容して歌うことによって日本的七夕歌の傳統を最初に築きあげたところに文學史的な意義があるのではなかろうかと考えられる。

10

만엽 여행가 연구

이상준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6집 2011.12 pp.373-403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7,200원

오늘날 우리들에게 여행이란,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 새로움을 재충전하거나 기분전환을 위해 국・내외로 자유롭게 떠나는 자발적이고도 능동적인 행위이자 창조적인 행위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과 달리 교통을 비롯해, 열악한 환경 속에 살았던 만엽시대 사람들은 여행을 어떻게 인식했으며, 그들이 체험한 여행을 어떻게 시적서정으로 형상화하였는가를 만엽집의 노래를 통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만엽시대는 인류 역사의 발달과정을 보면, 주거지를 옮기면서 생활하던 오랜 수렵・채집의 시대를 지나, 정주생활을 하게 되는 농경시대다. 그러나, 농경시대의 여행은 국가 등의 공권력에 의해서 비일상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만엽시대는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의 전개와 더불어, 관인들의 지방부임, 서민들의 조・용・조 납입을 위한 도・농간의 왕래도 빈번하게 행해지고, 사절단의 해외여행이 행해지던 시대였다. 만엽시대 사람들은 여행을 「다비: 旅」라고 했다. 훈 가나(訓假名)인 「旅, 客, 去家, 羈」를 통해서, 여행의 의미를 알 수 있다. 「去家」의 용자에 의하면, 「다비」는 집(家)을 기점으로 인식하고 있다. 즉, 다비는 「자기 집을 떠나, 말을 타고 떠돌거나, 다른 곳에서 머무는 나그네 길」이다. 하지만, 일반백성의 여행은 대부분 걸어야하는 도보여행이고, 말을 이용하는 「羈」의 여행은 일정한 관리이상의 여행에 국한된 것으로 생각된다. 천황의 명령에 의한 다비는 강제적이기에, 「천황의 명령이 지엄하기에」라고 하는 상투적인 표현이 등장한다. 이 「천황의 명령이 지엄하기에」는 지방관으로 파견되는 관인의 심정, 당나라와 신라로 파견되는 견당사와 견신라사인들의 심정, 강제 부역에 동원된 노동자의 심정, 강제로 동원되는 사키모리(防人)들의 심정 등을 노래하는 여행가에 사용되고 있다. 성덕태자의 전설가에서는 여행을 「客」으로, 여행자 즉 나그네를 「旅人」으로 표기하고, 「다비(たび)」와 「다비토(たびと)」라고 읽었다. 이 「客」은 집을 떠난 상태 즉, 「나그네 길」을 의미한다. 특히 집에서는 사랑하는 아내의 팔을 베개 삼아 공침(共寢)하지만, 여행은 「사랑하는 아내의 팔베개를 할 수 없는 나그네 길」이다. 태자의 전설가에는 성덕태자와 나그네가 등장한다. 태자는 출유 중이고, 고향을 떠나와 길가에 쓰러져 죽은 나그네는 여행 중이었다. 태자는 스이코천황(推古天皇) 하에 섭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황과 같은 통치자 반열에 있다. 그러므로, 태자는 지방(國)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천하를 다스리는 천황과 같은 통치자이기 때문에, 야마토를 넘어 다른 지방으로 출유를 해도 이를 여행으로는 볼 수 없고, 통치행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태자의 출유에는 고통스럽고 힘든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軍王의 견산작가(見山作歌)를 비롯해, 만엽집의 행행 종가가(行幸從駕歌)에서 보듯이, 천황의 행행에는 가인(歌人)들이 따르고, 토지랑 천황을 찬미하는 노래를 만드는 것이 통상적이다. 견산작가는 실질적으로 다비라고 하는 詩語를 사용한 萬葉 최초의 旅行歌라고 하는 문학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천황이 야마토를 떠나 다른 지방으로 출타하는 통치행위를 행행이라 하고, 그 행행에 종가하는 신하의 출타를 다비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 구성은 「집(家)」 와 「여행(旅)」이 대비하고 있는 여중비가(旅中悲歌)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지방관으로 떠나보내고 고향에 남은 사람들은 그의 무사귀환을 위하여, 침상에 齊瓮을 꽂는 주술과 임지의 지신(地神)에게 기원하는 풍속을 엿볼 수 있다. 관인의 노래임에서도 다비의 마쿠라코토바인 구사마쿠라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관인들의 여행도 일반 백성 못지않게 힘들고 고달픈 여행인 것을 엿볼 수 있다. 筑前의 国守인 야마노 우에노 오쿠라(山上憶良)는 05/0880歌에서 皇都를 떠나 오랜 시골생활에 황도의 풍류를 잊었다고 노래하고, 05/0882歌에서는 자신을 돌봐준 상사에게 황도로 불려줄 것을 간청하는 맘을 노래하고 있다. 「柹本朝臣人麻呂見香具山屍悲慟作歌一首(03/0426歌)」에도 행로사인(行路死人)을 보고 노래를 부른 「가키노 모토노 아소미노 히토마로(柹本朝臣人麻呂)」의 관인으로서의 여행과, 노래 속에 등장하는 행로사인의 여행이 있다. 관인으로서의 가키노 모토노 아소미 히토마로는 행로사인들이 쓰러져 있는 그곳을 무사히 통과하기 위하여 통과의례로서 행로사인가를 부른 것으로 보아, 관인들의 여행도 행로사인 못지않게 고달프고 힘든 여행이었던 것이다. 일본만가(05/0794)에도 세 개의 여행이 있다. 천황의 지엄한 명을 받고 쓰쿠시 지방을 다스리기 위한 다자이후에 온 남편의 여행과, 사랑하는 남편을 찾아온 아내의 여행이다. 그리고, 집을 떠나가 버린 아내의 죽음이라고 하는 여행이 있다. 농사를 짓기 위하여 집을 나와 겪는 고달픈 생활도 힘들고 고된 여행과 같다. 만엽시대의 사람들을 비롯해 수많은 고대인들이 어명을 수행과 생존을 위한 농사일을 위하여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얼마나 시달렸던가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今日旅行とは息苦しい日常を脱して新しさを再充電したり、気持ちを切り替えたりするために、国・内外へ自由に去る自発的で能動的な行為でもあり、同時に創造的な行為でもある。今日と違く、不便な交通を含めて、劣悪な環境の中で生きてきた万葉の人々には旅行というのはどんなことであり、彼らの体験した旅行をどんなに詩的敍情で形象化したのかを万葉の歌を通じて考察してみることにする。万葉時代は人類歴史の発達過程から見れば、食べ物を探しにあちこちに移動しながら生きてきた長年の狩猟・採集の時代が過ぎて、定住生活をするようになる農耕時代である。農耕時代の旅行はむしろ国家などの公権力によって非日常的な性格を持つようになった。また、中央集権的な国家体制の展開と共に、官人たちの地方赴任、庶民たちの租・庸・調の納入のための都農間の往来をはじめて、使節團の外海旅行が行われた時代であった。万葉時代の人たちは旅行を「旅」といった。訓仮名の「旅・客・去家・羈」を通じて、旅行の意味が分かる。「去家」は「旅」が家を基点にしていることを現わしている。「旅」は「自分の家を離れて、他の所に泊まる旅人」という認識がうかがえる。しかし、一般民の旅行は歩いて去るべき徒歩旅行なので、馬に乗る「羈」の旅行は一般民たちには当たらないで、決まった官吏以上の旅行に限ったことである。天皇の命令による旅は強制的に行われてしかたがなった。「大君の命畏み」は天皇と皇子に対する畏敬を表現するお決まりの表現であるが、旅の歌での「大君の命畏み」は官人が地方官に派遣される時の状況と、国外である唐と新羅に派遣される遣唐使と遣新羅使人たちの心情、強制賦役に動員された労動者の心情、強制で東の末から西の末に旅行しなければならない防人らの心情などを表す詩句なのである。 聖徳太子の伝説歌では旅行を「客」で、旅人を「旅人」で表記した。これを「たび」と 「たびと」と読んでいる。この「客」は家を離れた状態すなわち、「旅人」を意味する。特に家では愛する妻の腕を枕にして共寝をするが、旅行では「愛する妻と離れていて、彼女の手まくらができない旅人」なのである. 太子の伝説歌には聖徳太子と旅人が登場する。すなわち、出遊中の太子と故郷を離れて来て道端に倒れて死んだ旅人である。太子は天皇のような統治者のレベルにいるようである。それで、太子は国を治めるのではなくて、天皇の代わりに天下を治めるような統治者なのである、大和を越えて他の地方へ出遊してもこれは旅行ではなく、統治行為と見るべきである。それで太子の出遊には苦しくて大変な雰囲気は捜してみ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ある。軍王の見山作歌は実質的に旅という詩語を使った万葉最初の旅行歌という文学史的な意義を持っている。この歌では天皇が大和を去って他の地方に出かける統治行為を行幸と言って、その行幸に従駕する臣下の外出を旅であると歌っている。だから、この歌も「家」と「旅」が備えている旅中悲歌の構造をとっているのである。地方官として離れていった人の無事のために、故郷に残っている人々は彼の無事帰還のために、寝床に斉瓮をさす呪いと任地の地神に祈る風俗がうかがえる。官人の歌でも旅の枕詞である草枕が使われていることをみれば、官人たちも一般民たちと同じく苦しかった旅行をしたのである。山上憶良は05/0880歌で、皇都を去って長年の田舍生活に都の風流を忘れたと歌い、05/0882歌では自分の面倒を見てくれた上司に都と引き上げてくれることを懇請する心を歌っている。柹本朝臣人麻呂見香具山屍悲慟作歌一首(03/0426歌)にも行路死人を見て歌を歌った柹本朝臣人麻呂の官人としての旅行と、歌の中に登場する行路死人の旅行がある。官人としての柿本朝臣人麻呂も行路死人のように命かけた旅をしていたのである。日本挽歌(05/0794)にも三つの旅行がある。天皇の至厳な命を受けて来た夫の旅行と、愛する夫を尋ねて来た妻の旅行、そして、家を立ち去ってしまった妻の死であるという旅行である. 農耕のために愛しい妹を家において、離れてきた山田での生活は大変でつらい旅行のようであった。だから、彼等は家においてきた妹をいとしがる旅の歌を歌いながら、つらい労働を堪えて働いたのである。このような歌を通じて、万葉時代の人々を含めて多くの古代人たちは劣悪な環境の中でいくら苦しがったかを忘れてはいけない。

11

7,600원

본 논문은 ‘유배(流配)’가 일본 상대문학(上代文學) 한시(漢詩)・와카(和歌)에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지를, 이소노 가미노 오토마로(石上乙麻呂, いそのかみのおとまろ, 이하 ‘오토마로(乙麻呂)’)의 유배관련 한시(漢詩) 및 와카(和歌)의 특징과 상호적인 의미를 통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상대문학(上代文學)작품 『회풍조(懐風藻)』(751)와 『만엽집(萬葉集)』(630~760)은 공통적으로 오토마로(乙麻呂)의 유배 관련 노래만이 실려 있어 일본 유배문학을 고찰하는 단초가 된다. 일본의 유형 제도는 당의 율령제도의 도입으로 시작한다. 유형은 율(律)에 따라 정한 5형 중의 하나이다. 유배(流配)를 모티브로 하는 작품의 초출(初出)은『일본서기(日本書紀)』(720)에서 「卜者曰、有内乱。蓋親々姦乎」로 시작되는 부분이다. 인교천왕 24년(允恭天皇 24年, 435) 가루노 히쓰기노 미코(軽太子, かるのひつぎのみこ, 이하 ‘가루노 미코(軽太子)’)와 가루노 오이라 쓰메(軽大郎女, かるのおおいらつめ, 이하 ‘가루노 이라쓰메(輕郎女)’)는 오누이간의 금단(禁斷)의 사랑으로 유배된다. 가루노 미코(軽太子)의 유배의 원인이 간통이라는 남녀 관계였다는 점이 주목되는 대목이다. 또, 일본의 최초의 한시집(漢詩集)인 『회풍조(懐風藻)󰡕에는 오토마로(乙麻呂)가 도사(土佐)로 유배되었을 때의 네 수가 있다. 또, 와카집(和歌集) 『만엽집(萬葉集)』에는 아미노 오오키미(麻続王, おみのおおきみ)노래군(1권/23, 24), 오토마로(乙麻呂)가 도사(土佐)로 유배될 때의 노래군(6권/1019~1023), 나카토미노 야카모리(中臣宅守, なかとみのやかもり)와 사노노 지가미노 오토메(狭野茅上娘子, さののちがみのおとめ)의 증답가(贈答歌) 군(群)(15권/3723~3785)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오토마로(乙麻呂)의 유배는 상대문학(上代文學)작품 『회풍조(懐風藻)』와 『만엽집(萬葉集)』에 문학적 소재로 쓰일 정도로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것이다. 물론, 이는 오토마로(乙麻呂)가 용모(容貌)・문재(文才) 모두 뛰어난 당대를 대표하는 명문가 귀족이면서도 정치적 비극의 주인공이라는 점이 그 비극성을 한층 더 배가시켰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먼저, 한시(漢詩) 네 수는 유배 당사자인 오토마로(乙麻呂)가 읊은 것인데, 제 1수와 제 2수는 비록 유배지에 있어도 정적(政敵)에 대한 원한은 보이지 않는다. 한시문학(漢詩文學)의 세계인 ‘시(詩)는 생각을 드러내는 지(志)(詩は志なり)’라는 지식인으로서 냉정함을 유지하면서 당시의 풍류인을 상징하는 ‘고토(琴, 거문고)’를 공공연하게 가지고 노는 우아함이 보인다. 그러나 제 3수에서는 계절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지식인으로서의 고독감을 느끼며 원한은 더욱 더 깊어진다. 이어지는 제 4수에서는 지적인 생각(志)은 사라지고, 그 대신에 저녁부터 새벽 사이에 정(情)의 세계에 대한 번민을 호소한다. 원래, 한시(漢詩)의 세계에서 남성이 자신의 사랑을 표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픽션상의 것이었다. 따라서 오토마로(乙麻呂)의 정시(情詩)는 한시(漢詩)의 명맥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와카(和歌)에서 표출되고 있었던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면, 오토마로(乙麻呂)에게 유배라는 절망적인 시간의 심정은 외래(外來) 한시(漢詩)의 형식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와카(和歌)에서는 여행의 수호신에게 가호를 기원하는 형식으로 유배가 표현되어 있다. 이는 사건 당사자인 오토마로(乙麻呂)의 노래가 아니고, 그를 ‘미코토(命)’로 경칭하는 제삼자가 여행의 풍속적인 요소를 도입하여 와카(和歌)가 가진 ‘여행(旅)’이라는 전통적인 형식을 빌어 유배라는 주제를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한시(漢詩)에서는 유배지에 있는 오토마로(乙麻呂)자신의 심정표출 및 도읍지를 향한 심정, 그리고 도읍지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정념이 표현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와카(和歌)에서는 오토마로(乙麻呂)의 유배라는 비극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토마로(乙麻呂) 개인의 격렬한 내면적 감정을 표출하지 않고, 제삼자가 유배지로 가는 오토마로(乙麻呂)의 여정을 설명하면서 여행의 안전과 가호를 기원하는 표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8세기 일본 문인들은 오토마로(乙麻呂)의 유배사건의 문예화(文藝化) 과정을 통하여 표현과 시정(詩情)을 달리하는 한시(漢詩)와 와카(和歌)를 어떤 식으로 자기화(自己化)했는지 엿볼 수 있었다.

本論は「配流」という主題が漢詩・和歌というジャンルの異る上代文学作品において如何に表出されているのかを考察するものである。日本における流刑制度は唐の律令導入に始まると考えられるが、流刑は律における五刑の1つで、初めて記録の中に現れるのは、「卜者曰、有内乱。蓋親々姦乎」に始まる允恭天皇24年(435)の軽太子と軽大郎女の同母兄妹の愛の露見であるが、この 軽太子の流配は姦通という男女間の関係が起因となっている点が注目される。また、漢詩集『懐風藻』での配流に関する詩としては、石上乙麻呂が土佐に配流された時の四首が、和歌集『萬葉集』には麻続王歌群(巻一/23、24)、石上乙麻麻呂が土佐へ配流される時の歌群(巻六/1019~1023)、中臣宅守と狭野茅上娘子との贈答歌群(巻十五/3723~3785)があげられるが、『懐風藻』『萬葉集』という上代韻文に共に石上乙麻呂の配流が主題とされていることは、この時代において彼の配流は重要な文学的モチーフとなっていたことを示している。それほどこの事件は当時の人々の耳目を集め、深く心に留められていた。それは石上乙麻呂が当時を代表する名門の容姿・文才共に優れた貴族でありながらも、政治的悲劇の主人公であったことに大きく起因している。漢詩は配流の当事者石上乙麻呂によるものである。最初の二首ではたとえ配流の地にあり、政敵への怨はあっても、漢詩文学の世界である「詩とは志」という知識人として冷静さを保ちつつ、当時の風流人を象徴する「琴」を弄ぶ優雅さを述べる。しかし、第三首では季節の移り変わり時間の流れに従い、知識人として孤独感から怨は益々募る。やがて、第四首では志は消え去り、夕方から朝に掛けての情の世界への悶えを訴える。漢詩の世界での男性の愛の表出とはあくまでもフィクション上のものであった。石上乙麻呂は配流という絶望の時間の心情表現を外来の漢詩がもつそのままの形式ではなく、男女の相愛を男性も詠むという和歌の手法を取り入れているのである。一方、和歌の世界での配流は石上乙麻呂にかかわる歌の前にも後にも歌われている。しかし、奈良の都から配流地である土佐への移動が、それぞれの要所での旅の守護神の加護への祈りとしてあるのはこの歌群のみであり、旅の風俗の要素を取り入れつつ配流という主題が「旅」の歌として、和歌の世界の伝統に基づき構成されている。このように石上乙麻呂の配流事件の文芸化からは、漢詩と和歌という表記方法・内包されている詩情も異るものがを8世紀の文人たちが如何に自己化していくのかを窺う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

12

「玉鬘」와 谷崎潤一郎소설 비교

김상원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6집 2011.12 pp.439-463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6,300원

겐지모노가타리는 다니자키 준이치로 연구에 있어, 문체나 플롯, 등장인물간의 관계, 뿐만 아니라 사체애나 페티시즘, 그리고 모성사모 등의 글쓰기의 모티브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 관련성을 보이고 있다. 이는 다니자키가 그의 작품에 겐지모노가타리적인 요소를 적극 수용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그러한 다니자키의 겐지모노가타리 수용을 겐지모노가타리의 玉鬘十帖 중 첫 번째 帖인 「玉鬘」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연구의 방법으로는 첫째, 겐지모노가타리 원전과 요사노 아키코의 『全訳源氏物語』, 그리고 다니자키겐지의 세 텍스트를 비교분석하는 것으로 인해 드러나는 다니자키겐지만의 특징을 고찰하였다. 둘째로, 다니자키겐지와 다니자키의 소설들을 비교하는 것으로 다니자키가 그의 작품들에 겐지모노가타리적인 요소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본고의 결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다니자키겐지의 특징으로는 크게 세 가지의 특징이 나타남을 고찰하였다. 먼저 『全訳源氏物語』가 겐지모노가타리 원전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에 반해, 다니자키겐지에서는 원전에 없는 구체적인 상황설명을 부연함으로 인해 플롯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남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니자키소설에서 자주 나타나는 마조히즘적 경향이 다니자키겐지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이는 다니자키가 겐지모노가타리를 현대어역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조히즘적 경향이 이입된 결과로 파악되었다. 또한 다니자키소설에서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인 악마적인 성향의 히로인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잔인한 그림 등의 묘사수법이 다니자키겐지에서도 쓰이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둘째 다니자키의 겐지모노가타리 수용측면에서는, 「玉鬘」에서 나타나는 겐지의 다마카즈라와 무라사키노우에에 대한 심리상태가 『瘋癲老人日記』의 우츠기노인에 투영되어 반영되고 있음을 고찰하였다. 그리고 다니자키 소설의 중요한 테마 중 하나인 <교육>이라는 테마도 「玉鬘」에서의 다마카즈라에 대한 겐지의 <교육>의지와 관련성이 나타남을 고찰하였다. 마지막으로 다니자키의 『武州公秘話』, 『春琴抄』, 『卍』, 『吉野葛』와 같이 마치 화자가 제 3의 인물이나 문헌에서 전해들은 내용을 독자에게 전하는 방식을 취하는 소설들도 「玉鬘」에 종결부에서 쓰인 전개방식과 관련성이 있음을 고찰하였다.

本稿では、紫式部の『源氏物語󰡕と谷崎潤一郎(以下谷崎と称する)の小説との比較分析を通して、谷崎文学の『源氏物語』の受容がどういふうになっているのかを考察した。谷崎の小説と『源氏物語』との関連性は、かつてからの先行論文が少なくないが、『源氏物語』と谷崎の小説、及び谷崎が訳した『新々訳源氏物語』(以下谷崎源氏と称する)とのテクストを比較した論文はない。それゆえに、本稿のテクスト比較分析は谷崎研究において大きな意味があると思う。本稿の研究方法として、まず第一は、『源氏物語』と谷崎源氏を比較した。ところが、研究の客観性ともっと深層的な研究のため、谷崎と同時代の小説家である与謝野晶子の『全譯源氏物語』も研究テクストに含め、三つのテクストを比較分析して谷崎源氏の特徴を考察した。第二は、谷崎源氏と谷崎の小説の比較であった。第一で研究方法として考察してみた谷崎源氏の特徴、あるいは『源氏物語』的特性が、谷崎の小説の中でどういう形で現れているのかを考察した。その結果、まず谷崎源氏の特徴としては、『全譯源氏物語』が『源氏物語』原典の形式をそのまま従っていることに対して、谷崎源氏では原典にないもっと詳しい状況を敷衍しているのが分かった。それは、谷崎のプロットとマゾヒズムを重視いた結果であった。最後に谷崎源氏と谷崎小説の比較では、谷崎小説の『瘋癲老人日記』での主人公の心理と谷崎小説のキーワードの中の一つである<教育>への主人公の心理、そして『武州公秘話』、『春琴抄』、『卍』、『吉野葛』などで使われた伝聞の手法が『源氏物語』と関連性があることを考察した。

附錄

 
페이지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