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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고대학 [DONG ASIA KODAEHAK ; The East Asian Ancient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동아시아고대학회 [The Association Of East Asian Ancient Studies]
  • pISSN
    1229-8298
  • 간기
    계간
  • 수록기간
    2000 ~ 2026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기타인문학
  • 십진분류
    KDC 910 DDC 950
제29집 (11건)
No
1

韓國의 麻姑와 中國의 媽祖의 比較硏究

宋華燮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9집 2012.12 p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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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00원

마고와 마조는 중국의 여신이다. 마고는 神仙으로서 山神이고, 마조는 神女로서 海神이다. 마고는 중국의 지식인과 수련자들이 동경하고 흠모하는 신선이었다. 이러한 마고신선이 한반도로 건너온 시기가 조선 전기이다. 조선시대 사대부와 유학자들도 마고를 흠모하고 동경하는 시문을 남겼다. 그러나 중국에서 18세기경 상공업의 발달과 시장경제의 번창, 민중의식의 성장에 따른 서민문화의 확산 과정에서 마고신선도 대중화되면서 서민들 곁으로 다가왔다. 마고가 신선세계에서 서민층으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젊고 아리따운 마고신선에서 나이 든 할머니로 변모하여 마고헌수도(麻姑獻壽圖)에 등장한다. 한국에서도 18세기에 마고할미가 등장한다. 한국의 마고할미는 키가 크고 힘이 센 신체를 가졌는데, 이 ‘거인의 노파’는 중국 보타산의 할머니신과 천태산의 마고가 결합한 마고할미가 다시 남해관음이 결합하면서 태동한 것이다. 이 거인의 마고할미가 주산군도에서 사단항로를 타고 한반도로 건너온다. 반면에 마조는 중국 복건성 미주도의 임씨 집안에서 출생한 해신이다. 마조는 진씨부인이 꿈에 관음보살이 준 환약을 먹고 아기를 잉태하여 낳았다는 출생담을 갖고 있다. 마조는 5살이 되었을 때 󰡔觀音經󰡕을 외웠다. 마조는 관음보살이 점지시켜 낳은 아이라는 점에서 관음마(觀音媽)라 할 수 있다. 관음마는 마조의 뿌리가 관음보살이라는 이칭이다. 관음마는 관음과 마조가 해신으로서 미분화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마조는 어려서 신통력을 가진 신녀였는데, 관음보살의 濟度를 받아서 항해보호신으로 영험력을 발휘하게 된다. 마조는 송대이후 원대에 이르기까지 해상교역과 해외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중국 남동해안 전역에서 마조묘와 천비궁이 번창하였다. 마조신앙은 중국의 대표적인 해양신앙이며, 마조는 항해보호신이다. 마고할미신앙의 한국의 대표적인 해신이자 산신이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마조신앙과 한국의 마고할미신앙은 관음보살에서 파생된 海神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2

三國遺事에 보이는 시간관과 과거구성

金承鎬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9집 2012.12 pp.3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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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00원

三國遺事는 사람에 따라 역사서가 아닌 설화집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런 인식은 타 역사서와 다른 시간관념과 기억의 구성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삼국유사가 자연적 시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예에서 신화적 시간이 투영된 것을 볼 수 있다. 이점에서 三國遺事의 시간관과 역사 서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겠는데 이 글에서는 前・後의 분절 인식을 넘어 과거를 자의적으로 통합하는 측면, 시간이 중첩되어 像이 분열되는 측면, 순환을 거듭하는 生과 輪廻의 초극의 측면 등 세 방향으로 논의를 진행했다. 前・後의 시차를 부정하고 과거를 자의적으로 구성하는 대표적 사례로는 ‘武王’ ‘皇龍寺丈六’ ‘味鄒王竹葉軍’ ‘魚山佛影’ 등을 거론할 수 있는데 연대기적 시점에서 이탈하여 전후 시간을 통합하여 새롭게 역사를 구성해내고 있다. 이는 역사의 실제적 복원이 아니라 바라는 바대로 과거를 마련해 나가고자 하는 전승 집단의 의식이 작용한 결과로 보았다. 다음 ‘二惠同塵’을 통해 三國遺事에 나타나는 시간의 중첩성에 주목하였다. 여기서 二惠의 像과 삶이 일관성없이 제시된다거나 자연적 시간관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운 장면의 나열은 세속적 시간에 갇혀 사는 사람들의 미망을 허물어뜨린다는 의도로 이해해도 좋을 듯싶다. 이외에 삼국유사는 순환적 시간관을 강조하는 불교 철학을 이야기에 폭넓게 반영하고 있다. ‘金庾信’, ‘金大城’, ‘郁面’, ‘竹旨郞’의 이야기는 현생적 단위의 시간보다는 오히려 三生的 구도 안에서 전생은 물론 후생까지 포괄하여 윤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苦를 드러내면서 그 초극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주관적으로 과거와 기억을 재구성함으로써 역사서의 본령에서 벗어나고 있는 듯 보이나 어느 사서보다 앞서 역사적, 전통적 시간관에서 벗어나 진보적 시간 인식으로 과거를 해석하고 재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3

연잎(蓮葉)과 사이호(サイホウ)의 나례적 성격 비교연구

남성호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9집 2012.12 pp.6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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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00원

산대극에는 연잎과 눈끔적이라는 특이한 존재가 등장한다. 기존의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에 관한 뚜렷한 정설은 없는 형편이다. 현재 산대극 자체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산대극에 가장 근접하다고 일컬어지는 양주별산대놀이의 연잎・눈끔적이를 연구대상으로 삼고 그 정체성을 밝히기 위한 작업으로 일본의 니이노 유키마쓰리에 등장하는 사이호와 모도키를 비교 검토하였다. 이에 앞서 연잎・눈끔적이에 대한 기존학설을 검토하여 비교의 기준을 제시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쳐 기록된 채록본을 비롯하여 현재 남아 있는 가면의 조형적 특징들을 검토한 결과 연잎・눈끔적이는 산대극의 전반부에 위치하면서 사악한 존재들을 물리치는 나례적 성격을 유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면은 가장 고형이라고 일컬어지는 서울대 소장 목제가면을 비교대상으로 삼았다. 일본 유키마쓰리에 등장하는 사이호와 모도키는 연잎・눈끔적이와 마찬가지로 앞마당 행사(庭の儀)의 전반부에 등장하여 축제의 장소를 정화시키는 나례적 성격을 지닌다. 양자의 연행 형태 및 구성 소도구, 의상 등을 검토한 결과 다음과 같은 유사성을 찾을 수 있었다. 첫째, 연잎과 사이호는 특별한 존재로 취급되고 있으며 축제 전체의 대표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둘째 양자는 공히 전체 행사의 전반부에 등장하며 쌍으로 등장한다. 세째, 눈끔적이・모도키는 각각 연잎・사이호에서 파생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반복과 모방을 통해서 신앙적인 효과를 배가시키고 연희(예능)적인 성격이 부각된다. 넷째, 양자 모두 뾰족한 관을 쓰고 있으며 관 끝에는 둥근 구슬(곡식 주머니)과 같은 것이 달려있는 조형적 형태가 공통된 상징성을 띤다. 다섯째, 극적으로 진행되는 스토리 보다는 등장 자체 즉 모습을 드러내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러한 유사성은 나례적인 성격과 함께 근본적인 존재 양태의 개연성을 확인할 수 있다. 축제의 시공간적 환경 및 존재양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만약 이러한 가설이 인정된다면 산대극의 연잎・눈끔적이는 물론 일본의 사이호와 모도키의 정체성을 밝히는 작업에도 일조하리라 기대된다.

4

홍천군 산간지역 인물설화의 지역적 특징

崔明煥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9집 2012.12 pp.113-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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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0원

설화는 ‘전승(傳承)’을 토대로 형성되는 문학이다. 설화 전승자와 수용자가 한 자리에서 전달과 표현 그리고 수용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지역과 관계를 맺으며 전승하는 설화들은 해당 지역의 다양한 자연적・사회적・문화적 환경과 영향관계를 지닌다. 특히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한 인물설화는 사건들을 구체적인 증거물과 관련시켜 전승하기도 하며, 설화 전승을 통해서 역사 속에서 숨겨지거나 잊혀진 사건과 인물들을 남겨두기도 한다. 강원도 홍천군의 산간지역인 내면과 내촌면 일대에서 전승하는 권대감(權大監), 서곡대사(瑞谷大師), 마의태자(麻衣太子) 등의 인물 설화들은 이야기로서의 흥미유발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증거물을 토대로 마을 제의 및 지명 형성 등에 영향을 주고 있다. 권대감설화는 ‘신화적 전설’의 형태로 강원도 홍천군 내면 광원리, 자운리, 율전리, 명개리, 창촌리 등을 중심으로 전승하고 있으며, 전승 권역이 어느 정도 제한되어 있다. 특히 자운리와 광원리는 ‘말무덤’과 ‘권대감사당’, ‘삼봉약수’ 등의 설화 증거물을 중심으로 비교적 전승력이 활발하다. 권대감설화는 삼봉약수의 발견과 지역민들의 치료, 말무덤의 유래, 칡이 없는 이유, 신으로서의 영험담 등이 주를 이룬다. 이들 설화들을 조합해 보면, 권대감은 ‘고개’를 넘어 내면으로 들어 왔으며, 내면에 거주하면서 지역민들을 치료해 주었고, 사후(死後)에 내면 지역 마을신으로 좌정(坐定)하는 모습을 보인다. 곧 권대감이 마을신으로 좌정한 내면지역에서는 이들 설화들이 마을 제의(祭儀)의 타당성과 형성의 모태로 작용하고 있다. 서곡대사설화는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서곡리를 중심으로 전승하며, 고승(高僧)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천리안(千里眼)으로 화재를 진압(동면 수타사, 원주 서곡리 절, 해인사 등)하거나, 사냥꾼들의 놀림을 극복하는 지혜로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서곡대사설화의 전승 권역은 홍천군에서 횡성군, 원주시까지도 확장된다. 마의태자설화는 홍천군 인근 지역인 인제군 김부리를 중심으로 전승한다. 설화 속에서 인제군 김부리로 가기 위해 마의태자가 홍천군 지역을 지났다고 하며, 마의태자의 지나는 모습과 행위를 석탑(石塔) 등의 증거물과 지명 등으로 남기고 있다. 이들을 통해서 산간지역 고개를 넘는 마의태자의 긴박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5

몽골비사에 반영된 몽골 유목민들의 물질문화 연구

박환영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9집 2012.12 pp.145-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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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0원

본 논문 몽골비사 속에 반영된 몽골 유목민들의 물질문화를 통하여 몽골 유목민들의 생활문화를 구체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생활문화 중에서 물질문화는 문화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물질문화 속에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정신문화와 사회문화가 잘 반영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물질문화의 이러한 측면을 고려한다면 몽골의 대표적인 역사문헌자료이자 몽골 민족의 대서사시인 몽골비사에는 물질문화에 대한 내용이 많이 들어있다. 예를 들어서 몽골의 물질문화를 다른 문화권 혹은 지역의 물질문화와 구별해 주는 색깔, 재료, 기능, 사용방법 등 유목문화를 반영해 주는 내용이 많은 편인데, 특히 13세기 몽골의 유목문화 중에서 물질문화와 관련하여 말(馬)과 관련한 민구(民具), 의식주와 관련된 생활재(生活財), 사냥 및 어로활동과 관련한 각종 도구, 군대 및 전투용 무기, 의례와 축제와 관련된 민구 그리고 기타 유목생활과 관련한 일상적인 생활도구에 대한 부분이 주목할 가치가 있다. 몽골비사에 내재되어 있는 몽골의 물질문화와 관련해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유목생활에서 중요한 가축인 말(馬)과 관련한 민구가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또한 사냥이나 전쟁에서 필수적인 생활도구이면서 무기였던 화살에 대한 내용을 보면 화살의 세부적인 부분에 대한 묘사와 각종 종류의 다양한 화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작은 상처를 내어서 새를 잡는데 사용하는 살동개에서부터 장거리용 화살 그리고 대량 살상용 화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화살에 대한 내용이 잘 기술되어 있다. 한편 유목민들의 의식주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종류의 민구에 대한 내용도 제법 많이 나오며, 몽골 유목민들이 가졌던 의례와 축제와 관련한 도구에 대한 내용도 재미있다. 그 외에도 일상적인 유목생활과 관련한 민구로는 수레와 수레바퀴에 대한 내용이 많고, 죄인이나 포로를 잡아두거나 이동을 할 때 주로 사용되었던 형구(形具)인 목에 쓰는 칼에 대한 내용도 몽골의 유목문화를 고찰하는데 좋은 자료를 제공해 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몽골비사에 나오는 물질문화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크게 네 가지 영역에서 당시(13세기)의 유목문화를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예를 들면 생업활동, 자연관 및 방향관, 젠더(gender) 그리고 군대 및 전투와 관련한 무기 등이 두드러진다. 즉 생업활동과 관련해서 사냥과 물고기를 잡는데 필요한 도구에 대한 내용이 잘 반영되어 있다. 또한 전통적인 몽골 유목민들의 자연관과 방향관이 내재되어 있는 주거 공간인 게르(ger) 내부와 외부의 구조와 공간의 배치 그리고 젠더와 관련해서 일상적인 유목생활 속에서의 생업공간이 젠더에 의하여 구분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내용이 몽골비사 속에 들어있다. 덧붙여서 몽골비사에는 활과 화살과 같은 13세기 유목민들이 즐겨 사용했던 병기(兵器)와 무기(武器)에 대한 기능과 재질 등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유목사회의 군사문화를 이해하는 물질문화로도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

6

6,100원

1930년 일제강점기, 세끼노다다시[關野貞]가 이끌던 고고발굴조사단은 평양지역의 낙랑일대에서 많은 와당을 발견하게 된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와당은 고적조사특별보고에 ‘漢式瓦當’이라고 명명하여 수록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까지 국내외의 수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결론을 여전히 따르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 책에 수록된 낙랑와당과 관련된 기록과 한대시기의 운문와당, 특히 한무제 무고에서 발굴된 와당을 중심으로 세끼노다다시가 주장한 ‘한식와당’이라 명명한 것이 과연 성립될 수 있는지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낙랑와당에는 충분한 한대와당의 요소가 나타나고 있다. 4분 구획, 當心은 기본적인 와당의 특징은 거의 같다. 그러나 한무제시기 혹은 그 전후의 와당과 낙랑일대에서 출토된 와당의 문양면에서는 차이점이 발견된다. 와당문양을 비교 연구한 결과 한대와당은 當面의 문양 혹은 當心의 변화 등 비교적 복잡 다양함이 발견된다. 낙랑와당은 當面의 변화가 거의 없으며 聯珠紋정도가 배치되는 경우거나 아니면 운문의 말단 부분의 매듭을 하는 정도라 할 수 있다. 當心에는 大圓乳釘紋이 배치된 특징이 일반적인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낙랑와당은 양각문과 권운문, 雙雲紋이 가장 큰 특징을 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雙雲紋의 경우 한대와당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는 와당 중 하나이다. 한무제 이후 출현되는 한대와당은 낙랑일대에서 출토되는 운문와당이 다르다는 점이다. 이것은 분명 낙랑일대의 토속문화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7

고구려의 社稷祭祀

조우연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9집 2012.12 pp.198-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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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00원

중국의 社稷祭祀가 농경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듯이, 고구려 사직의 원초적 형태 역시 농경과 연관이 있다. 따라서 초기 일본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고구려 ‘穀靈信仰’의 존재 자체는 타당성 있어 보인다. 다만 중국사 상, ‘사직’의 기능과 의미가 역사의 전개와 함께 변화됐던 것처럼, 고구려의 사직관념 또한 고정불변이 아니었으며, 사회적 변동에 동반하여 변모되었다. 그러므로 농경신앙이라는 원초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고구려의 사직제사를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고구려 사직제사의 원초적 형태는 地母神의 神主를 石洞에 안치했다가, 제사 당일에 강가에 모셔 풍작을 기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종교행사는 비록 那部聯盟 강화라는 숨겨진 정치적 목적성을 띤 것이라고는 하나, 祭天의례와 마찬가지로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농경의례의 외형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일반 참여자들에게 있어, 풍요와 다산 기원이 주목적이었다. 3세기 중국 측 문헌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靈星社稷’에서 ‘사직’은 ‘영성’과 같은 이미를 중복해 병기한데 불과하며, 국토의 상징으로 고정된 후대 ‘사직’의 의미와는 별개의 것이다. 그러므로 일각에서 제기되어왔던 고구려의 사직제사는 중국의 영향이라는 견해는 적어도 3세기를 전후한 시기 고구려의 ‘사직’에 대한 정확한 이해라 할 수 없다. 4세기 이후 고구려의 사직과 관련해, 故國壤王代의 ‘立國社’가 주목된다. 앞선 연구에서도 제기되었듯이, 고구려의 ‘국사’의 건립이야말로 유교적 예법에 따라 새롭게 정립된 국가와 영토의 상징으로서 사직제사체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렇게 새롭게 정비된 사직제사체계는 이미 농경신앙과 같은 순수 종교적 기능이 제거된 채, 왕권과 밀착하여 일종의 정치적 장치로 고정된다.

8

백제양식석탑의 분포와 주변지역 석탑양식 비교연구

전지혜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9집 2012.12 pp.233-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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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00원

현재 고려석탑으로 분류되는 百濟故土의 백제양식석탑은 수적으로는 그 비중이 미미하지만, 고려석탑의 다양한 양식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그 가치가 높다. 9세기 이후 석탑은 중앙인 경주로부터 지방으로 확산되어 건립되고, 건립주체도 다양화됨에 따라 양식적으로 기존의 정형성을 많이 탈피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석탑들이 신라양식과 친연성을 갖는데 반해 백제고토인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우는 백제양식을 비롯하여 다양한 양식의 석탑이 건립되었다. 따라서 백제고토의 석탑은 백제양식 혹은 백제계의 단일계통을 중심으로 한 단편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보다 세분하여 첫째로, 백제양식의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접근해야 한다. 둘째로, 백제양식석탑을 분명히 하고 다양한 양식의 석탑 건립을 살펴보기 위해 백제양식석탑이 건립되는 중심지 일대를 벗어난 주변지역의 석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이들 백제고토의 석탑들은 석탑 건립에 따른 지역성과 장인집단이 보유한 조탑기술을 추적해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접근해야 할 것이다. 본 글에서는 주로 순수 백제양식석탑이 건립되는 분포지역에 따라 그 일대를 중심으로 한 영역과 따로 주변지역을 구분하여 각 군의 석탑양식과 건립배경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백제양식석탑을 재확인하고, 백제고토에서 동시대에 보다 다양한 양식의 석탑이 건립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9

唐津의 고대 海港都市的인 성격 검토와 航路

尹明喆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9집 2012.12 pp.269-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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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00원

동아시아와 한민족의 역사활동 무대는 육지질서와 해양질서가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都市의 선택과 항로의 개발은 국가발전정책과 관계가 깊다. 한반도 서해안지역에서 瑞山 泰安 唐津 牙山 등을 포함한 공간을 ‘內浦문화권’이라고 부른다. 당진은 몇 개의 복잡한 만과 내륙 깊숙한 곳에서 만으로 흘러드는 강들, 주변의 충적평야 등이 발달하였다. 또한 외해로 나가 몇 종류의 국제항로를 이용하여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과 교류를 할 수 있었다. 당진은 이러한 환경으로 인하여 선사시대부터 해양활동이 활발했으며, 삼한시대에는 소국들이 있었다. 그 후 삼국시대에 들어오면서 당진은 백제의 영토 내에서 해항도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백제시대의 전기에는 특별한 상황이 생겼을 때에 국가항구의 역할을 담당하였고, 웅진 백제시대의 전기에도 국제항구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웅진백제의 후기와 사비시대에는 금강하구가 국가항구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후 신라가 경기만을 장악하고 통일신시대에는 당진이 국제항구의 역할을 일부 담당하였을 것이다. 당진은 자연위치와 해양환경, 체계를 고려할 때 해항도시의 조건을 갖추었고, 특히 역사상을 통하여 그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10

7,000원

유럽과 북한 그리고 남한의 연구를 통해 청동기 시대 고인돌에서 여러 천문학적 특징이 알려졌다. 유럽의 많은 고인돌이 동지 일출 방향으로 배치된 것이 알려졌으며 덮개돌에 새겨진 별자리 패턴의 홈이 발견되었다. 국내 고인돌 연구에서도 많은 고인돌 덮개돌에 북두칠성과 남두육성, 묘수(昴宿, Pleiades), 삼성(Three stars) 등의 별자리 패턴 홈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 별자리 홈은 고구려 무덤 벽화에 이어지고 있어 청동기 시대부터 한반도에 별그림이 전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고인돌 별자리 연구와 함께 몇몇 국내 암각화에 대한 천문학적 해석이 진행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중국 요녕성 해성 고인돌과 주변 두 지역의 바위 암각화에 대한 고고천문학적 특징을 조사하고 이들을 남한의 고인돌 암각화의 천문학적 특징과 비교하였다. 진남북 방향을 기준으로 측정한 유적의 배치를 태양의 일출・몰 방향과 비교하였으며 세차운동에 따라 바뀌는 별자리의 위치를 이용해 별자리 관측 시점을 추정하였다. 또한 국내에서 확인된 고인돌의 별자리 홈 패턴과 답사 지역의 암각화를 비교하여 공통점을 조사하였다. 덮개돌 윗면에 홈이 있는 일반적인 고인돌과 달리 중국 해성 고인돌에는 두 개의 받침돌 안쪽에 홈이 새겨 있다. 그러나 비슷한 크기의 홈이 받침돌 전면에 가득히 있어 홈 패턴을 별자리와 동정하지 못했다. 고인돌의 배치 방향을 측정한 결과 고인돌의 측면 받침돌이 해성 지역에서의 하지 일출・몰 방향으로 놓여 있음을 확인하였다. 고인돌 주변의 첫째 지역에는 홈이 있는 바위와 여러 암각화가 새겨 있는 암반이 있다. 바위의 윗면에는 여러 홈과 함께 북극 주변의 항현권을 표현한 둥근 테두리와 안쪽의 북두칠성 모양의 홈을 발견하였다. 세차운동을 이용해 북두칠성의 관측 시점을 계산한 결과 바위에 새겨진 별들은 BC31C~15C의 위치임을 알아냈다. 이 바위 아래쪽 암반에는 여러 홈과 특징적인 암각화가 남아있다. 우리는 암반에 새겨진 암각화를 조사하여 남한의 고인돌과 고구려 고분 벽화의 묘수 별자리와 같은 모양의 패턴을 확인하였다. 다른 암각화와 달리 묘수 별자리 모양의 암각화는 암반의 세 곳에 공통적으로 새겨 있어 특별한 의도로 새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두 번째 지역에는 위쪽에 여러 홈이 있는 바위가 있는데 묘수 별자리 모양의 홈이 새겨 있다. 이 바위에 새겨진 별자리 바위 홈은 가운데를 중심으로 바깥쪽의 홈과 서로 연결선으로 이어져 있는데 바위 홈이 서로 연결된 것은 남한의 고인돌이나 암각화에 흔히 나타나는 모습이다. 우리는 해성 고인돌의 배치 방향과 주변 두 지역의 바위 홈과 암각화 조사를 통해 천문학적 연관성을 확인하였다. 이들의 천문학적 특성을 조사한 결과 일부 별자리 모양의 바위 홈이 남한의 고인돌과 고구려 무덤 벽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과 유사함을 확인하였다. 최근 한민족 고대 문화와 유적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고 있다. 앞으로 한민족 고대 유적에 대한 고고천문학적 연구가 본격화 된다면 한국 상고사 연구에서 유적의 배치 기준과 조성 시기 추정 뿐 아니라 유적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의미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11

禹의 治水 시대에 대한 一考 -「皐陶謨」를 단서로

김연주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제29집 2012.12 pp.34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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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록이 부족한 夏와 그 이전 시대를 탐구할 때 문헌에 대한 실증적 분석과 함께 고고학과 신화학, 문화인류학적인 방법들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 이 논문은 그러한 방법들을 활용하여 우의 시대를 신화의 영역에서 역사시대로 이해하려고 했다. 우가 치수를 한 목적과 그 시대적 배경은 우와 동시대 인물이자, 동이족으로 알려진 皐陶를 탐구함으로써 접근해 나갈 수 있다. 󰡔史記󰡕와 󰡔書經󰡕에 따르면, 고요는 士로서 요순임금의 이민족 퇴치 사업을 주도하였으며, 貞人 곧 巫祝으로서 우의 치수를 도왔다. 고대 중국에서 홍수는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없애는 혼돈이었으므로, 우는 치수를 통하여 중앙과 지방, 중심과 경계의 질서를 회복하려고 했다. 중앙으로부터 떨어진 거리의 원근 개념으로 만들어진 五服의 要服과 荒服, 四海는 낙후된 변경, 오랑캐들의 영역을 의미했다. 치수의 목적은 이들 이민족의 교화와 굴복이었다. 이 가운데 동이족들은 풍부한 자원과 뛰어난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와 그 집단의 경계와 견제의 대상이 되었다. 하를 세운 우는 부자세습을 감행하였고, 아들 계는 동이집단을 진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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