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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상고전연구 [Yeol-sang Journal of Classical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열상고전연구회 [Society of Yol-Sang Academy]
  • ISSN
    1738-2734
  • 간기
    격월간
  • 수록기간
    1988~2019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810 DDC 810
제42집 (23건)
No

기획논문 1 : 『운양집』완역 출판과 김윤식의 재인식

1

기획의도

백승철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2집 2014.12 pp.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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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원

2

운양 김윤식의 국제 정세인식과 외교론

백승철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2집 2014.12 pp.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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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문명의 대전환이 전개된 역사상 초유의 격변기를 맞이하여, 당대의 유교적 관료이자 지식인으로서의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이 대내외적으로 당면한 시대적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과 해결방안을 어떻게 모색하 고 실천하려 했는가하는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김윤식이 살았던 한말 일제초기는 조선에 대한 서구 열강의 각축이 본격화되는 한편, 그에 동반된 서구문명의 영향으로 전통적 유교문명에서 서구문명사회로의 변화가 태동되던 격변기였다. 정치가로서 김윤식의 삶 또한 격변의 시기만큼이나 파란만장 하였다. 88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는 내외의 요직을 역임하는 가운 데 격변하는 국내외 정치 환경 속에서 당대의 모든 중요한 사건들에 연루되었고, 19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의 정치적 행보 또한 친청(親淸)과 친 일(親日), 일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극단을 오가며 끊임없이 변신을 행하였다. 이 러한 그의 행적은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까지 그에 대한 평가가 극단으로 갈리는 양상을 초래하고 있다. 김윤식이 외교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개항기 조선왕조는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 특히 조선을 둘러싼 청과 일본, 러시아의 각축은 당장이라도 조 선왕조의 존속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당시 조선이 직면한 이러한 국제적 현실과 이에 대응하여 생존을 모색해야만 하는 조선의 열악한 내적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즉각적인 군사력 육성을 통한 자강(自强)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는 있었다. 그러나 김윤식이 파악하기에 즉각적인 자강은 불가능한 현실로, 어디 까지나 조선왕조의 전면적인 개혁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는 장기적인 과제였으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왕조의 현실상황을 개혁하여 자강을 완수할 때까 지 외세의 침략을 제어하기 위한 즉각적인 방안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김윤식이 선택한 당장 실현 가능한 방안은 외교 전략을 통한 자주권의 수호였다. 김윤식이 선택한 외교 전략은 서구 제국들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국제사회에 서 고립을 면하는 한편, 전통적인 사대외교에 입각한 중국과의 속방 체제(屬邦體 制)를 유지, 강화하는 가운데 그 속에서 내치(內治)와 외교(外交)에서 자주권을 확보하는 방안이었다. 김윤식이 파악한 국제적 현실속의 조선은, 섣불리 대외적으 로 자주국임을 주장하다가는 자칫 다른 나라의 속국(屬國)이 될 위험성을 안고 있는 약소국이었다. 자강(自强)을 통해 자주(自主)가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섣 불리 자주국임을 전면에 내세울 경우 오히려 자주권을 상실하고 망국을 초래할 우 려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1895년 이전까지 김윤식이 채택한 중국에 대한 속방 외교 전략, 즉 친청 노선(親淸路線)은 어디까지나 약소국인 조선이 자강(自强) 을 할 때까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안전장치인 것이다. 청일 전쟁(淸日戰爭) 이후 갑오정권과 러일 전쟁과정에서 보인 김윤식의 친일 적(親日的)인 태도 또한 중국을 대신하여 동아시아의 강자로 떠오른 일본을 조선 의 자주(自主)를 위한 새로운 보호막으로 설정한 외교 전략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김윤식은 특히 1900년 의화단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보인 일본의 활약 과 러시아에 대한 견제 소식을 접하면서, 일본이 중국을 대신하여 서구세력의 침 략으로부터 조선의 자주권을 지켜줄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러일 전쟁 후 곧바로 진행된 을사조약(乙巳條約)은 그의 일본에 대한 이러한 기대감을 산산조각 내 버리고 말았다. ‘삼천리강토가 남의 것이 되고 황실 이 있어도 허명인’ 보호국(保護國)이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강대국을 보호막으로 삼아 자주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가운데 자강을 추진하려던 그의 외교정책은 이제 설 곳이 없게 된 것이다.
In this thesis, awaiting a historical upheaval era of a great turn in the civilization, it is to look into how Unyang(雲養) Kim Yun Shik(金允植)(1835~1922), the confucionista bureaucrat and intellectual, searched and acted on the issues and solutions for the pending initiatives of such era. The Chosun dynasty of the opening port era when Kim Yun Shik started to enter the diplomatic stage was in a situation where the aggression of foreign imperialism especially the fight between Chung, Japan and Russia would imperil the existence of Chosun dynasty itself. He precisely knew the grim internal reality of Chosun that needed to react and survive such international reality that Chosun faced and realized that strenuous efforts through enhancing a sudden military force were needed. However, Kim Yun Shik realized that a sudden strenuous effort was impossible and was a long-term initiative that could be possible through a widespread innovation of the Chosun dynasty and it was not easy. Therefore, a sudden plan to control the foreign aggression were needed till the Chosun dynasty could reform the current status and have strenuous efforts of their own. The plan that Kim Yun Shik chose that could be implemented right away was to protect the autonomy through diplomatic strategies. The diplomatic strategy that Kim Yun Shik chose was to align with foreign powers in terms of commercial treaty and avoid the isolation from the international society and maintain and strengthen the client country system with Chin based on the traditional worship diplomacy while securing the autonomy from the domestic politics and diplomacy. Kim Yun Shik realized that within the international arena, Chosun was a small and weak country that has a risk of becoming a subject country of another country if it would claim to become a autonomous country. When you claim to become a autonomous country at a state where autonomy cannot be guaranteed through having strenuous efforts, you could lose your autonomy and become a country forgotten. The client country diplomacy strategy, that is the pro-Chung line toward China that was opted by Kim Yun Shil till 1895 was a safety device to protect themselves from foreign aggression till the weak Chosun has its strenuous efforts by themselves. The pro-Japan attitude of Kim Yun Shik after the Chung-Japan war and Gabojunguan and Russia-Japan war was also a part of a diplomatic strategy that was set as a new protection shield for the autonomy of Chosun upon Japan that became the new leader in East Asia replacing China. Witnessing the effort of Japan and its reaction to Russia during the process of su pressing the Euihwadan event in 1900, Kim Yun Shik was sure that Japan would be the new force replacing China that can protect the autonomy of Chosun from the aggressions of foreign forces. However, the Ulsa treaty that was signed right after the Russia Japan war smashed his expectations of him toward Japan. At a state where it became a protected country that ‘the whole nation became someone else' property and a king with no power’, his diplomatic policy which was to maintain the status of a autonomous country by having a strong country as its protecting shield and enhancing its own strenuous efforts became useless.

6,600원

3

운양 김윤식의 서화 감상과 미술 활동

송희경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2집 2014.12 pp.4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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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구한말 온건개화파의 중심인물인 운양 김윤식의 문집인 운양집에 실린 서화 관련 자료를 토대로 그의 미술활동 및 예술관을 분석했다. 김윤식은 중국, 조선 의 고서화와 동시대 일본화의 제화시를 남기고 각종 서화단체에 고문으로 추대되거 나 직접 휘호회를 주관하는 등 미술활동에 적극 참여한 일제강점기 고위 관료이다. 김윤식의 미술활동은 온건개화, 동도서기로 압축되는 그의 사상이 내재되어 있다. 예컨대 조선의 과거를 모방한 시문서화의과대회를 개최하거나 서화미술회 개회식을 전통 아회 형식으로 진행했다. 그러나 김윤식은 당대의 신미술도 적극 수용하여 일본 인 여성작가 작품의 제화시를 썼고, 김관호의 서양화에도 거부감이 없었으며, 외국인 여성 화가의 초상화 제작 요청에도 적극 응했다. 무엇보다도 1910년대 미술연구기관 의 설립과 물질적 후원은 근대기 미술 교육제도를 정착시키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따라서 김윤식의 운양집에 수록된 서화관련 자료는 단순한 서화 감상문이 아닌, 혼란과 격변의 시간을 거친 지식인의 예술적 행보이자, 고전 문학과 역사에 해박한 고위관료의 문화 체험이다. 이 자료를 통해 고위 관료의 예술관, 구한말의 서화 유통 과정, 한 일 간의 회화교류가 자세히 규명되기 때문이다.
This essay discusses the artistic activities and the aesthetics of “Unyang” Kim Yun-shik, who was a high-ranking official in the Korean government in the last years of the Joseon Empire. Having studied and mastered the characteristics of drawings and paintings of all genres and eras in China, Korea, and Japan, Kim left his critical remarks in poems and proses. The art works he critiqued can be mainly divided between the older art works dating back to periods prior to the 20thcentury, and the contemporary art works that were created during Japanese occupation. Kim’s remarks regarding the for mere vince a certain kind of pride in takes in being an heir to the learned culture and tradition of Joseon. Kim’s remarks regarding the latter reflect the intellectual's growing interest in the modern civilization and his role in the cultural diplomacy between Korea and Japan Kim was favored as an advisor on a number of organizations of artists, and also actively served as a father figure in the art community in Korea, organizing exhibitions of paintings himself. Kim's critical works and aesthetics show both a conservative attachment to tradition and an open and active embrace of new contemporary artistic trends. Most importantly, the support he provided for the foundation of artistic research institutions in the first two decades of the 20thcentury paved grounds for modern art education in Korea. The poems and proses Kim wrote upon encountering and appreciating artworks are therefore not mere reviews, but embody the unique perspective of a learned man with strong backgrounds in the classics and history and undergoing an unprecedentedly tumultuous time.

7,200원

4

김윤식과 스에마쓰겐초의 시문 수창에 대하여

김용태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2집 2014.12 pp.7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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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양 김윤식(1835~1922)은 한국의 정치사와 사상사, 문학사에 있어 매우 비 중 있는 인물이기에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왔고, 그 문집이 완역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앞으로 연구가 더 심화되기 위해서는 운양집에 실린 ‘친일적’ 면모를 정면에서 다루지 않을 수 없는 과제가 놓여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본 고에서는 서로 활발하게 교유하였던 김윤식과 末松謙澄(스에마쓰 겐초, 1855〜 1920)의 문집을 검토하여 그 시문수창의 양상과 의의를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두 사람의 수창은 매우 우호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나, 그 심층에는 서로 대치하는 국면도 존재하고 있었다. 김윤식은 ‘爲民’, ‘安民’과 같은 유교의 道를 강 조하며 末松謙澄을 견인하고자 하였던 반면에, 末松謙澄은 ‘大局’과 ‘形勢’를 강 조하며 김윤식에게 일본의 우월적 지위를 승인하도록 압박하였다. 이러한 대치가 비록 전면화 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末松謙澄이 적극 주선하여 김윤식이 제국학 사원상을 받을 수 있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둘의 관계가 이후 단절되고 말았던 원 인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末松謙澄의 경우, 동아시아의 유구한 한문학 전통을 계승한다는 점을 내세웠 지만 이는 결국 일본을 새로운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를 욕망하였다는 점에서 이후 에 전개되는 ‘대동아론’의 전조가 된다고 볼 수 있으며, 김윤식의 경우는 삼일운동 을 맞아 유교적 대의를 내세우며 일제 당국에게 독립을 요구하게 되는 하나의 바 탕이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Unyang(雲養) Kim Yun-sik(金允植, 1835~1922) was a political and representative writer of the last generation of Chinese Literature, so researchers have studied on his works and his collection literary works Unyangjip(『雲養集』) has been translated recently at last. However we should focus on his aspect of Pro-Japanese through Unyangjip to deepen his works. This paper examines patterns and significance of poetry exchange from the works of Kim Yun-sik and Suematsu Kenchō(末松謙澄, 1855〜1920) whom they interacted with each other frequently. The results of the study show that their poetry exchange is very friendly but had some disagreements in an in-depth level. While Kim Yun-sik emphasized Confucian way such as “Wee-min(爲民)” and “An-min(安民)”, Suematsu Kenchō enforced Kim Yun-sik to acknowledge the superior status of Japan, stressing the “great power” and “current state of things.” This conflict was not explicit, but this may cause them to separate from each other even though Suematsu Kenchō helped Kim Yun-sik receive the Japan Academy Prize. As in Suematsu Kenchō, he insisted that he had succeeded tradition of Chinese literature with a long history in East Asia. But he had a desire for Asia where Japan was the new center, and it resulted in a sign of the Greater East Asia Co- Prosperity Sphere. In the case of Kim Yun-sik, It seemed that he demanded Choseon independence from Japanese authorities under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based on Confucianism

6,300원

5

김윤식의 동도서기론과 개화론

이지양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2집 2014.12 pp.9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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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養 金允植(1835~1922)의 東道西器論과 開化論은 일찍부터 학계의 주목 을 받았다. 그것은 운양의 활동 범위가 넓고 운양이 작성한 중요 문서가 많기 때문 이기도 하지만, 운양이 추구한 길이 급박하게 개화에 경도된 지식인들이나 경직된 수구적 지식인들과 달리 유교의 정신적 가치를 지켜가면서 개화를 이루고자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道와 器는 일치된다는 道器合一의 관점에서 보면, 김윤식처럼 도와 기를 분리시켜 동도와 서기라는 이질적 범주를 하나로 묶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논리적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본고는 김윤식이 어떤 사유의 과정을 거쳐서 동도와 서기를 하나로 연계시켰으며, 그 논리적 모순을 어 떻게 해소했는지 고찰하였다. 또 김윤식이 견지한 동도서기론은 그가 주장한 개화론, 즉 開化란 時務에 힘쓰 는 것이라고 했던 개화론과도 논리적 관계가 모호하다. 그 당시의 개화, 즉 時務 에는 東道의 범주에 드는 것과 西器의 범주에 드는 것이 혼재되어 있었기 때문이 다.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운양 김윤식의 사유 속에서 ‘동도’ ‘서 기’ ‘개화’ ‘시무’의 개념 및 그 상호 관계를 고찰하였다.
Our academia early has noticed the thoughts of Unyang(雲養) Kim Yunsik; the theory of Eastern moral and western material and the theory of enlightenment. The reason isn't only because he had a wide range of activities and he wrote many important documents but also because he tried to achieve the enlightenment in keeping with the spiritual values of Confucianism. Traditionally, in terms of the theory of moral and material unity It is impossible to combine Eastern moral and Western material like Kim Yunsik. Because Eastern moral and Western material are heterogeneous with each other, the combination produces a logical contradiction. This article is investigated his reasoning which combined Eastern moral and Western material and how he resolved the contradiction. Also His theory of Eastern moral and western material is ambiguous with his theory of enlightenment. The enlightenment in that time meant to work for current affairs. But in current affairs we can't separate Eastern moral and western material. Then Kim Yunsik refined how have been logical to think this problem? This study is investigated Eastern moral, western material, enlightenment and current affairs with a focus on the problem.

6,300원

기획논문 2 : 모당 홍이상의 생애와 행적

6

기획의도

허경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2집 2014.12 pp.125-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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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원

7

그림과 작품을 통해본 홍이상의 한평생

허경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2집 2014.12 pp.13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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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한평생을 살펴보려면 문집이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그러나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 1549~1615)의 문집이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아, 그림이나 서첩 (書帖) 같은 자료를 통해서 그의 생애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 홍이상의 작품을 문집 밖에서 찾아보려면 시축(詩軸)과 간찰첩(簡札帖)을 먼 저 살펴보아야 한다. 승가수창록(僧伽酬唱錄) 뿐만 아니라 모당의 세 차례 연 행(燕行)에 함께 다녀왔던 문인들의 문집이라든가 이 시기 간찰첩들이 제1차 검 토 대상이다. 예를 들면 성균관대학교 존경각에 소장된 근묵(槿墨)에 모당의 유묵이 실려 있고, 연세대학교 간찰집에도 실려 있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모당선생유묵(慕堂先生遺墨)에 40여점의 한시와 간찰이 실려 있는데, 한시는 연행(燕行) 시기에 지은 시가 대부분이다. “가모선생친필사십장(可慕先 生親筆四十章)”이라고 했으니(<그림 6>), <행장(行狀)> 첫 줄에 “공의 처음 이 름은 인상(麟祥)이었고, 자는 군서(君瑞)였으며 호는 가모당(可慕堂)이었다”는 기록과도 들어맞는다. 임진왜란 중에 명나라에 갔던 시기의 편지라서 병부상서 석 성(石星)과 관련된 내용도 보인다. 이 유묵(遺墨)이 홍이상의 친필로 확인되면 작품이 많이 늘어날 뿐만 아니라 생애를 밝히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가 훌륭한 집안에 태어났기에 많은 그림의 주인공이 되었다기보다는, 율곡의 말처럼 한미한 가운데 태어나 훌륭한 인품을 지니고 높은 벼슬에 올랐으므로 그림 도 많이 그려지고 훌륭한 집안을 일으켰다. 재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본디부터 중망이 있었고”, “단정하고 방정한 선비”인데다, 오랫동안 명망을 쌓은 노성한 관 원이었기 때문에 그는 다양한 계회(契會)를 주선하여 많은 그림을 남길 수 있었다. 사람 모 으기를 좋아했던 홍이상이 계회(契會)를 결성하고, 즐거운 모임을 오 래 기억하기 위해 화공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다. 모당이 지방 수령으로 나갔을 때에 동료들이나 동방(同榜)들을 불러모아 계회 를 결성하고 그 모임을 그림으로 남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과거시험에 응시하 는 이유는 집이 가난한데다 아버지가 병들었기 때문이었고, 모당이 수령으로 나가 려던 이유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춘천부사, 안동부사, 청주목사로 나아가 어머니를 효성껏 모셨는데, 어머니만 즐거워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즐거 워하였다. 모당이 주선한 두 차례 동방(同榜) 계회(契會)도 결국은 어머니를 위 한 잔치였다. 홍이상은 부모를 모시기 위해 공신(功臣)에 들지 못했지만, 공신보다 더 많은 그림의 주인공이 되었다. 부모에게 효도하면서 그 즐거움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많은 계회도를 그리게 하다보니, 결국은 가장 행복하게 한평생을 보냈던 사대부로 남들에게 인정받아 첫 번째 평생도(平生圖)의 주인공까지 된 것이다.
One’s collection of works is the important source in examining the life of a literati. However, as the writings of Mo Tang(慕堂) Hong Isang(洪履祥, 1549~1615) are presently not completely extant, his paintings and sketchbooks must supplement his biography. In order to find works outside of Hong’s writings, one must first examine his letters and poetry, including not only Sŭnggasuch’angnok(僧加酬唱錄), but the writings from his third diplomatic journey to Beijing with other emissaries and poetry from this period. For instance, the Kŭnmuk(槿墨) in the Chon'gyŏnggak Library of Sŏnggyun'gwan University and poetry scroll sat Yonsei University contain his calligraphy while Korea University Library’s Master Mo Tang’s Posthumous Works (慕堂先生遺墨) has around forty pieces of Classical Chinese poetry and scrolls, with most of the poetry being written during his journey to Bejing. In the Forty Letters of Master Ka Mo”(可募先生四十章), the first line of the biography states: “His first name was Insang(麟祥), his courtesy name was Kunsŏ(君瑞), and his pen name was Kamodang(可募堂),” which matches with what is recorded of Hong Isang. Written while in Ming during the Imjin War, the letters also mention the Ming’s Minister of Defense Shi Xing(石星). If this is confirmed as Hong’s, it will not only add to his list of works but also aid in shedding more light on his life. Rather than becoming the frequent subject of many paintings as the descendant of a famed household, in the words of Yi Yulgok, Hong raised his impoverished household into prominence with his fine character, numerous paintings, and rise in the civil service. Although he did not obtain the post of Prime Minister,he “was by naturepopular”, “an upright and well-groomed scholar,” and well-reputed and experienced civil servant, organizing various fellowship meetingswherein he left behind many paintings. A man who enjoyed the company of others, he formed many fellowships which he had artists paint so that they would be long remembered. Why did Hong holdfellowship meetings with his colleagues and civil service exam taking peers as a provincial magistrate while leaving records of them in paintings? Hong took the civil service exam because of his poor household and ailing father, and went down to the provinces as magistrate to look after his mother. He served his mother with utmost filial piety during his posts as governor of Ch’unch’ŏn, Andong, and Ch’ŏngju County magistrate, but enjoyed not only the company of his mother but that of the people. Indeed, the second fellowship gathering of his peers who took the civil service exam with him was a feast in honor of his mother. Hong did not become a merit subject due to taking care of his parents, but instead became the main subject of many paintings. In the end, while being filial and expressing that joy to posterity through the many paintings of his fellowship meetings, he was recognized as the literati who enjoyed life most and the first to be the subject of many genre paintings featuring it.

6,100원

8

儒臣 홍이상의 학업과 관직 생활

원창애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2집 2014.12 pp.155-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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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履祥은 선조․광해군대 활동한 문관 관료이다. 그의 본관은 풍산이며, 초명 은 洪麟祥이다. 1573년(선조 3)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9년(선조 12) 문과 장 원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대사헌까지 지냈다. 그는 서경덕의 제자인 민순의 문하에 서 공부하면서 의리를 깊이 연구하였고, 성균생원이 되어서는 교우들과 함께 성 리대전․심경과 같은 성리서를 강독하는 등 학문에 열의를 쏟았다. 經學으로 이름이 난 홍이상은 문과에 급제한지 1년 만에 사가독서를 받고, 홍문록에 올랐 다. 그는 특히 참상 청요직과 당상관을 거치는 동안 경연관으로서 활약이 컸다. 선조는 그를 최고의 講官이라고 인정했을 정도이다. 또한 홍이상은 조선 건국 후 에 門地가 약해져 가는 풍산홍씨 가문 출신으로 조선 후기 풍산홍씨 가문이 관료 가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본고에서는 홍이상이 관직에 나가기 전의 학업과 관직 생활를 통해서 그의 어떠 한 면들이 가문을 일으킬 수 있는 동력이 되었는지 살펴보았다. 홍이상은 12세 때 서울로 유학을 와서 승보시를 통해 성균관에 기재되었다. 그는 학교 교육이나 科 業에만 힘쓰는 유생은 아니었다. 20세 때에 민순을 찾아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 였다. 배운 바의 실천을 중히 여긴 유생 홍이상은 성균관의 잘못된 관습인 성균관 유생 좌차 문제를 개혁하는 데에 앞장섰다. 그는 문과 급제 후 육조․홍문관․사헌부․성균관․의정부․사간원․사복시․ 사재감 등을 두루 거쳐서 12년 만에 당상관으로 승진하였다. 그의 승진은 당시 능 력 있고, 門地가 높은 관원의 승진과 비교할 때 결코 늦지 않았다. 당상관에 진출해 서 약 23년간 재직하였다. 홍이상이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지켰던 소신은 ‘公明’과 ‘誠’이었다. 그가 ‘공명’을 추구했기에 학연이나 당파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사간으로 서 정여립의 난 당시의 처신, 당상관이 된 이후 임진왜란 발발 후 파천의 책임론 공방 그리고 기축옥사에 대한 성혼의 처벌론 등이 거론될 때 正道에 근거한 公明 만을 염두에 두고 간쟁하였다. 그가 역임한 관직을 볼 때, 실무형 관료는 아니지만 외관직에 나가서도 성실하게 직임에 임하였다. 그의 소신은 사적인 생활에서도 드러난다. 출사 이후 그는 사사로운 교유관계가 많지 않았다. 16세기에는 서울에 지식인들의 모임이 많았고, 관원의 계회도 성행 했다. 그럼에도 그가 주도한 계회는 과거 시험을 매개하거나, 노모를 위한 계회 정도였다. 그가 참석했던 모임 중 사사로운 성격을 띤 것은 新橋 모임이다. 그가 신교에 살았기에 이웃과 함께 하는 신교 모임에는 가끔 참석하였던 것으로 보인 다. 사적인 생활에서도 修身에 힘쓰는 성실한 삶의 태도는 형제들과 자손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의 동생들도 생원진사시와 문과로 관직에 진출하였고, 그의 아 들 여섯 명 중 네 명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가 닦은 기반 위에 후손들의 지속적 인 관직 진출로 가문의 門地가 높아져서 조선 후기 명문 관료 가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Mr. Isang Hong was a high scholar official who served his careers during the reigns from King Sun-jo to Kwang-hae-gun. His clan was from Pung-san Hong family. When he was young he was called In-sang Hong. He passed the first stage examination of Saeng-won in A. D. 1573(the 3rd year of the Sun-jo reign), won the first place of the list in the final official examination of Moon-kwa. He was finally in honour to be appointed at the topmost position, Tae-sa-heon, of Office of the Inspector-General. He began to learn, at the age of 20, Mind and Law under the supervision of Min-soon who was a disciple of the famous scholar, Kyong-duck Seo(The school of Hwadam). Becoming a student of National Confucian School, Sungkyun-kwan, he was eager to master typical books of Neo-confucianism with his friends such as ‘Comprehensive Compilations of Mind and Law’ and ‘Scriptures on Mind’. He was renowned for his understanding on Confucian Classics. He was given, with honour, a Leave for Reading, a year after the final official examination, Moon-kwa, and was also listed in the Roster of Hong-moon-rock. King Sun-jo acknowledged that he was the best scholar around the time as he attended the seats regularly for teaching the King(Gyeongyeon-gwan). His ancestors were outstanding in the initial period of Chosun dynasty and then gradually faded out as much as other families. He was evaluated as a person who set up to reconstruct his family again in late Chosun dynasty. He came over to Seoul to study at the age of twelve. After he passed the Seung-po examination, he became a student of Seong-kyun-kwan. He was not satisfied with the routine course work at that time to be an official. He began to look for a new teacher to pursue some fundamental Neoconfucian ideas. He met a master, Soon Min, when he was twenty years old. He was not usual to aim at passing official examinations, but rather inclined to learn about the Essences of Conduct of the Neo-confucian Ideology. He also initiated a reform in Student Order of Seong-kyoon-kwan. He served so many low official positions as in six Ministries, Hong-moon-kwan, Sa-heon-pu, Seong-kyoon-kwan, Ui-jeong-pu, Sa-kan-won, Sa-pok-si, Sa-jaekam, and others, after he passed Moon-Kwa. It took twelve years that he was promoted to a High Official Rank, Tang-sang-kwan, after Moon-kwa. His advancement was relatively not to be late, when compared with good background persons at the time. Twenty three years witnessed his moto, ‘Fairness’ and ‘Sincerity’, as Tangsang- kwan careers. He did hardly pay attentions to belong to any party member nor a school lineage at all. He took his duty as a critic to dispute the matters with Fairness, when there happened historical disastrous events : when it was reported the rebellion trial by Yo-rip Chung, when they quarrelled over who was responsible to ask the King to flee to China around the Japanese invasion in 1592, and when they debated about the punishment of Mr. Hon Sung who instigated the treason in 1589 in which over a thousand of persons got harmed. He was not a practical bureaucrat if the positions which he seated were considered, but he was also assigned to a position outside the central administration body. Although it was common, among literati in 16th century, to join in gatherings in a private mode to support each other, he was unusual in setting up a few private bonding with others. To count, he joined in such a group as the official examination passers and the filial meeting supporting old mothers faithfully. He seemed occasionally to take part in a private gathering of Sinkyo villagers in which he lived in. His strict life style as a Confucian scholar was a model for his siblings and offsprings so that his younger brothers became officials after passing the national examinations and his four sons out of six passed the final stage examinations of Moon-kwa. The succeeding appointments of his family members to an official position elevated his family renowned again in late Chosu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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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輓詞ㆍ祭文』에 드러난 慕堂 洪履祥의 面貌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哀悼의 感情

윤호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2집 2014.12 pp.199-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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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洪履祥의 13대 후손 洪基弘씨가 소장하고 있는『輓詞ㆍ祭文』에 드러나 있는 慕堂 洪履祥의 여러 가지 모습과 인식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홍이상은『慕堂集』이란 문집을 남기고 있는데, 그 안에는 홍이상이 세상을 떠 났을 때 지은 만사와 제문 특히 만사가 극히 적은 양이 수록되어 있었다. 동시대 인물들의 문집을 검색하여 보아도 홍이상의 만사는 몇 수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홍기홍 씨가 소장하고 있는『만사ㆍ제문』에는 만사가 71제 83수가 수 록되었고, 제문이 13편 수록되었다. 여기의 만사는『모당집』에 거의 실리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며, 특히 만사 작자의 문집에도 수록되지 않은 것이 대다수이다. 따 라서 이 만사들은 홍이상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할 뿐만 아니라 당대 만사 작자들 의 작품을 추가하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만사에는 貞明公主의 커다 란 도장이 앞 뒤에 찍혀 있고, 정명공주가 지은 것으로 보이는 시도 한 수 실려 있어 이 책의 가치를 더해준다. 이 논문에서는 만사․제문에 수록된 만사를 중심으로 홍이상의 만사를 지은 작자들이 홍이상을 생각하는 모습을 다음 다섯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는 홍이상의 죽음에 대한 생각인데, 대체로 그의 죽음을 보고 매우 애석해 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다만 죽음에 앞서 그가 고양으로 물러나 은퇴하였다가 병이 들어 돌아가게 된 과정을 묘사한 부분도 죽음을 읊은 것과 관련지어 애석해 하는 마음을 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는 홍이상이 학자로서의 자질과 학문적 성과가 꽃을 피우지 못하고 끝난 것을 아쉬워하 는 내용이다. 이에 겸하여 문장도 뛰어나다고 하였고, 특히 그는 효성 으로 대표되는 훌륭한 행실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드러내었다. 셋째는 그가 과거시험에서 합격한 것에 대한 것이다. 당시 과거는 한 사람의 인 생을 결정짓는 커다란 계기가 되는 것이었다. 특히 홍이상이 세 차례의 장원 급제 를 하는 등 두드러지게 뛰어난 모습을 보인 것과 이러한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죽은 것에 대한 슬픔을 노래했다. 넷째는 자손의 번성함을 통하여 고인에게 위로를 전하는 것이다. 홍이상에게는 여섯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뛰어나 옛날 진나라 때 謝氏 집안의 뛰어난 사람 들, 荀氏의 여덟 아들들에 비유되었고, 또한 용봉, 난옥 등 고귀한 사물로 표현하 며, 이들이 집안을 일으키고 가업을 이어갈 것이라며 고인의 넋을 위로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이상에서 이야기한 것 이외에 다른 다양한 것에 대한 예찬 및 평가이 다. 타고난 성품이라든지, 뛰어난 능력, 그리고 어머니를 위해 경로연을 베풀었던 일 등 여러 가지와 혹은 평생의 많은 일을 한꺼번에 시에 소개해 놓은 것 등이다.
Koreans’ perception and embodiment of Ohodo(Jeonhengdo) of China were examined in prior part. Ohodo was geographically close to Korea, and it was a seaway to China. Because historic events related with Ohodo matched with Chosun gentry’ ideological intention, Ohodo drew attention from gentry and writers from earlier time. Geographically Ohodo had beeline distance on the same latitude as Hongseong, Korea. Though there were inaccurate knowledges that Ohodo was brought up in Buan, Chonnam and seen from Baengnyeongdo, natural climate and folklore at Ohodo were specifically described by visiting there, including especially temples, portraits of the deceased, and sacrificial tables at Jeonheng. It was revealed that in late Chosun dynasty groundless stories about this island were approached thorough historical research. From the earlier time, poems were written about Ohodo, stories and people related with this island. Specifically in late Koryo Dynasty shifting to Chosun dynasty people had higher concern about Ohodo. Prominent scholars, writers, and politicians , such as Jeong Mong-ju, Lee Sungin, Jeong Do-jeon, Lee Cheom at that time composed various poems about this island. Since then poets and calligraphers had written Ohodo poems in which Jeonheng and his family were consoled and their rightous deaths were compared to Noh Jungnyeon or Hakui and Shukusei, the loyal brothers of Chinese lore. Among those poems, Lee Sungin’s Ohodo poem was given a glowing account by his master, Lee Sek and roused his alumnus, Jeong Do-jeon’s jealousy, which caused various affairs and stories. Seo Geojeong mentioned this in his book 『Dongin Sihwa』. This story regenerated interests from Yun Geun-su, Yang Gyeongwoo, and Heo Gyun. This content was reproduced in 『Seungsu Sihwa』, 『Jaeho Sihwa』. Kim Suhang achieved recognition with his Ohodo poem from a writer, Taekdang Lee Sik at that time. Taking this oportunity, his literary talent was recognized and became a foundation for his successfu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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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수창록(僧伽酬唱錄)』의 성립과 교유양상

구지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2집 2014.12 pp.241-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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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현전하는 2종의 『승가수창록』을 대상으로 하여 그 성립 과정을 추적 하고 시 수창자들의 교유양상을 분석한 것이다.『승가수창록』은 1575년 여섯 명 의 젊은 성균관 유생들이 봄 한 철 승가사에 머물면서 공부할 때 주고받은 시를 수록해 놓은 것이다. 여섯 사람은 허성, 홍이상, 우복룡, 석함, 이선경, 이정우이 다. 이들 가운데 수창 기록을 남기도록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사람은 허성과 홍이 상이었고 이후 『승가수창록』의 형태로 수습한 이는 홍이상이었다.『승가수창록』은 20대의 유생들이 어떻게 창화를 통해 동인의식이 싹트는 지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This research traces the making of the extant two volumes of Sŭnggasuch’angnok (僧加酬唱錄) and analyzes the poets’ social intercourse. Sŭnggasuch’angnok is an anthology of poetry exchanged among six Sŏnggyungwan Confucian scholars, Hŏ Sŏng, Hong Isang, U Pokryong, Sŏk Ham, I Sŏnkyŏng, and I Chŏngu, studying at Sŭnggasa Temple in the spring of 1575. Hŏ Sŏng and Hong Isang sought to record the poems and Hong collected them in the form of the Sŭngga Such’angnok. While the six studied Neo-Confucianism, appreciated natural landscapes, and exchanged poetry, they also actively included members of the lower class Sŏ Ki and Yu Hŭikyŏng in their gatherings. Despite their status, they shared a poetic space with the members of the Sŭnggasa Temple and were respected as seniors and poetry companions for their learning and poetic themes. Through these sources, one can examine the daily lives of sixteenth century Confucian scholars studying and associating freely back and forthin the walls a Buddhist temple away from the confines of Sŏnggyungwan Acade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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慕堂 洪履祥의 學問에 대한 小考

허권수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2집 2014.12 pp.27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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慕堂 洪履祥은 儒學의 기초를 확고히 갖춘 전형적 文臣으로서, 그의 학문을 현실에 적용하여 국가를 발전시키고 백성들을 구제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는 花潭學派의 杏村 閔純에게서 학문을 전수받아 大學의 誠意正心에 바 탕한 敬思想을 자기 학문의 精髓로 삼았다. 그는 31세에 文科에 狀元하여 출사 한 이래로 평생의 대부분을 관료로서 지냈기 때문에 학문적 저술을 남기지는 못 했다. 그러나 관직에 있으면서 학문을 현실정치에 적용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그는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國王의 德이 중요한데, 國王이 德을 기르기 위해서 는 經筵에 자주 나와 군자다운 儒臣들의 강의를 경청해야 한다고 국왕에게 여러 차례 이야기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經筵官을 맡아 수준 높은 강의를 성실하게 하 였다. 그 결과 宣祖 임금으로부터 ‘제일 가는 講官이다’라는 칭찬을 듣기에 이르 렀다. 成均館의 책임자인 大司成을 맡아 學政을 바로잡기에 힘썼고, 지방장관으 로 나가서는 반드시 먼저 학교를 일으키고 敎化를 펼쳤다. 치국의 방도로 君德을 輔養하고 학교를 일으켜 백성들을 교화시켜 나가는 데 목표를 두었다. 이는 학문 을 통해서 정상적인 儒敎國家를 건설하려는 것으로 孔子 孟子 朱子의 학문목표 와 일치한다. 그는 학문을 자신의 관리에 잘 적용하여 出處의 大節에 어긋나지 않았고, 당쟁 에 휩쓸리지 않았고, 몇 차례의 獄事에도 온전히 지낼 수 있었고, 평생 한 점 흠 없는 完人으로 考終命할 수 있었다. 慕堂은 北京에 사신으로 세 차례 다녀왔다. 더구나 壬辰倭亂 중에 두 차례 사 신으로 다녀온 것은 국가가 그의 능력을 절실히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명나라에 세 번 사신으로 갔다 온 것이 家門의 특징 있는 전통이 되어, 朝鮮 英正祖代에 이르러 그의 후손들 가운데는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온 사람이 아주 많았다. 모당의 후손 가운데서 燕行使臣으로 다녀온 인물이 15명이나 되었 고, 이들이 다녀온 횟수는 모두 20회에 이르렀다. 慕堂의 선조 가운데는 그렇게 저명한 인물이 없었는데, 모당 후손들 가운데는 학자, 문인, 대신 등이 많이 나왔다. 이는 慕堂이 깊이 있는 학문을 바탕으로 자기 관리를 잘하여 바르게 산 표본을 만들어 후손들에게 드리웠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Modang Honglisang was Typical fumiomi with strengthening the foundation of Confucianism. He applied his studies on reality and had the goal of salvation to the people, furthermore development of the country. He received a scholarship from the Haengchon Minsoon who was a disciple of Hwadam, He took the thought of venerate to the core of self-discipline. He passed the examination in the first place and went to the government office, when 31 years old. Since then he stayed the bureaucracy and tried to apply the academic groundwork in reality. So he could not leave many writings. He thought that Knowledge and virtue of king is very important to rule the country, because he spoke several times to the King that the King should often listen to the lecture of Confucian scholars in order to raise the country. He lectured very well, so he heard several times that he was the best instructors from the King He have became the president of the national college and try to correct school administration, And tried to educate many talents. When he became gauleiter, he established a local school first, and widely spread edification. His goal was to build a normal state through the study. His goal was consistent with the goals of Confucius, Mencius and Zhuxi. He had kept his principles to step down or out on government office. He did not get into a partisan fight, not even involved in the criminal case. Well, he ended his life as a person without blemish. He went Beijing with envoy three times, and done well the mission of the envoys. Because The country needed for his ability during the Imjin War. At that time, the diplomacy with Ming Dynasty was very important national business. Since he had diplomatic activities, the diplomatic activities have became tradition of his family. Although his ancestors were not much known, a lot of famous talent have came out among his descendants due to he seemed a good exa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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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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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 『韓國魂』의 판본 및 번역판본의 연구

이금선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2집 2014.12 pp.303-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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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이 한국 독립운동가의 이미지로서 크게 부각되어 온데 비해 문학사 측면 에서는 그다지 큰 조명을 받아오지 못한 데에는 신규식이 한국에서가 아닌 중국에 서 중국어로 작품 활동을 한 것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규식의 대표작 이라고 할 수 있는『韓國魂』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도 아직까지 진행되지 않았다. 텍스트로서의 한 작품의 구체적인 이해가 없이 한 작품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본 연구는 신규식의 작품 『韓國魂』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연구 작업의 하나가 될 것이다. 본 연구는 신규식의 대표작인 『韓國魂』의 여러 종류의 판본과 여러 종류의 번 역본들을 연구대상 자료로 하여 각 판본들을 비교하는 연구방법을 취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韓國魂』의 판본과 번역판본의 변화의 역사를 정리하고 『韓國魂』의 문학사상의 위치와 의의를 분석했다. 1910년 한일병합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신규식은 중국에서 중국어로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중국어로 씌어진 이 작품은 중국 중경에서 초판 발행되었다가 대만에서 증정 재판되고 해방 이후에 한국에서 한국어로 여러 판본으로 번역된다. 여러 판본들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韓國魂』은 망명의 땅 중국에서 중국어로 씌 어져 한국어로 번역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작품으로 특별한 역사적 시기에 특별한 사명을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한국문학 및 동아 시아의 문학교류의 중요한 현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즉 이 작품은 한 국문학의 또 다른 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작품은 국가 간 경계를 넘는, 다양한 시각에서 한국의 역사, 한국의 문학 현상을 재조망해 볼 수 있는 중요한 한 텍스트로서 그 역사적 문학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이 텍스트의 판본 연구를 통해 텍스트의 발생, 증보, 번역 등 판본 변화의 역사 및 상관관계를 확정하는 기초 작업은 그 자체로 한국문학 연구의 기반을 확 립하고 확장해나가는데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글에 서는 신규식의 작품 『韓國魂』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연구 작업의 하나로 신규식의 『韓國魂』 및 그 번역본의 판본들을 점검해 보았다. 또한 여러 판본들을 비교하 는 과정에서 아직 일부 자료들은 발굴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신규식에 대한 더 활발한 연구를 위하여 새로운 자료의 발굴은 앞으로 연구자들이 해나가야 할 새로운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 논문에서 『韓國魂』의 여러 판본들과 그 번역 판본 들의 고찰을 통해 여러 가지 복잡한 관계망 속에 놓여있는 이 텍스트의 중요성은 제시했지만『韓國魂』에 대한 내용분석을 진행하지 못했다. 차후 본 논문을 기초 로 하여 『韓國魂』에 대한 세밀한 내용분석, 그리고 『韓國魂』과 『震壇』과의 관계, 『韓國魂』텍스트에 대한 더욱 정밀한 고증 등 후속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Until now, the research about Shin Gyu Sik has been mostly conducted in the perspective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history. Shin Gyu Sik has been magnified as the image of independence movement activist, however his importance in the field of history of literature has not been paid attention to. The reason is that he wrote his works in Chinese in China, not in Korea. The specific research on his masterpiece, 『Han Guk hon(韓國魂)』, has not been conducted yet. Therefore, this paper will be the most basic and fundamental research on his work, 『Han Guk hon(韓國魂)』. The research objects of this paper are the various versions and translations of 『Han Guk hon(韓國魂)』, and we will conduct this research in the way of comparing these versions with each other. Through this process, we will summarize the transformation history of the editions and translations and analyze the 『Han Guk hon(韓國魂)』’s position and significance in the history of literature. After the Korea- Japan Annexation in 1910, Shin Gyu Sik went into exile in China and began to write 한국혼 in Chinese. The first edition of this book was published in Chongqing, China, then republished in Taiwan. And after the Korea’s liberation, it was translated into some versions in Korean, in Korea. In the process of comparing different versions, we realized that 『Han Guk hon(韓國魂)』has a unique place in the literature history since it transcends barriers of East Asia countries and is of significance in multiple perspectives. What’s more, we recognised that some materials are not available. For the further study about Shin Gyu Sik, collecting new research materials is another important task to be solved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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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판본에 나타난 刊記의 특징

이태영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2집 2014.12 pp.32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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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완판본 중에서 사찰본, 감영본, 태인본, 한글고전소설, 방각본 등에 나타나는 간기의 특징을 살피고, 이 특징을 경판본, 중국 방각본과 비교하는 데 목적이 있다. 간기는 책을 간행한 기록으로, 연호, 간행년, 간행월일, 간행지, 간행방법, 간 행자 등을 기록하는데, 이들 구체적인 항목을 조사해 보면 완판본 옛 책들의 특징 을 파악할 수 있어서 매우 흥미로운 자료가 될 수 있다. 완판 사찰본은 15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주로 출판되는데 중국의 연호가 거 의 쓰이고 있고, 간행지가 명시되는 특징을 보인다. 전라감영본은 연호가 아주 일 부만 쓰이고, 간행지가 ‘完營’으로 표시되는 특징을 보인다. 태인본은 간행자가 기 록되는 특징을 보여 다른 완판본의 종류와 대비된다. 한글고전소설과 방각본은 간 행지에서 ‘完山’과 ‘完’을 많이 사용하는 특징을 보인다. 한글 간기는 주로 19세기 후반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을 배려한 것으로 이 해된다. 완판본의 간기를 경판본 한글고전소설과 경판 방각본의 간기와 비교해 보면 경 판본은 ‘한양, 경성’과 같은 도시 이름을 쓰지 않고 ‘紅樹洞, 美洞’과 같은 동네 이름을 쓰는 점에서 상당히 다르다.
The purpose of this this paper is to look at the characteristics of the old books of temple, gamyeong, taein, banggakbon, and hangul classic novels, among wanpanbon. also to compare this characteristics to gyeongpanbon, chinese banggakbon. The imprint is the record published a book, is written in era of the King, year published, place published, publishing methods, human published. if we look closely at them, we can identify the unique characteristics of wanpanbon. Wanpan temple’s books are mainly published from the 15th century through the 18th century. they are being used nearly era of china, concrete published places. in the 'chollagamyeongbon', era is being used partially, the published place is represented by ‘完營(wanyeong)’ uniquely, taein books had recorded the person who published the book. in the Hangul classic novels and banggakbon, ‘完山(wansan)’ and ‘完(wan)’ represents published place. The Hangul gangi was used mainly from the late 19th century, which is understood to be a consideration for those who do not know Chinese. Compared the wanpanbon with the gyeongpanbon, wanpanbon had wrote the name of the city, gyeongpanbon had wrote the neighborhood 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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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다산 박영철의 세계기행과 시적 특질

구사회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2집 2014.12 pp.351-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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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다산(多山) 박영철(朴榮喆, 1879~1939)이 1928년 여름에 세계 12개국을 여행하면서 지었던 기행시를 고찰한 것이다. 박영철 일행이 세계 여행 을 떠난 것은 이 해 7월 28일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되는 제9회 국제올 림픽대회를 참관하기 위해서였다. 박영철은 세계 여행을 하면서 틈틈이 견문과 감 회를 시로 형상화하였다. 그리고 돌아와서 여행 중에 지었던 한시 33수를 모아서 구주음초(歐洲吟草)라는 기행시집을 발간하였다. 당시 박영철 일행의 세계기행은 국제올림픽대회 겸 유럽 대도시 방문시찰단이 라는 명목으로 이뤄졌지만 실제로는 언론사에서 주도했던 상업 여행의 일종이었 다. 이들 시찰단은 6월 28일에 경성역을 출발하여 압록강을 넘어 봉천과 하얼빈 을 지나 이르쿠츠크로 갔다. 그곳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으로 가서 폴란드, 독일, 벨기에,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를 방문하였다. 돌아오는 길은 지중해와 수에즈 운하를 통해 홍해와 인도양을 지 나 중국과 일본을 거쳐 동래항을 통해 입국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럽으로 가는 길은 대부분이 동지나와 인도양을 지나 수에 즈 운하와 지중해를 통해서 들어갔다. 때로는 태평양을 건너 미대륙을 횡단하여 유럽으로 간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박영철은 중국과 러시아 시베리아를 통해 모 스크바를 거쳐 유럽으로 들어갔다. 박영철의 기행 한시는 크게 두 방향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여행 중의 견문이나 풍광에 대한 미감, 또는 이국적 풍물을 형상화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작자가 여행 중에 서구의 근대문명을 접하면서 그들을 타자로 인식하여 자신의 문명담론이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투영시킨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후자의 경우이다. 그것에는 일제가 조선 침략을 은폐하고 호도하려는 친일담론이 내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친일파 일물로써 조선의 문명개화를 위해서는 식민통치를 감수하더 라도 일제의 선진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문명담론을 추종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박영철이 세계를 기행하고 지은 이들 기행 한시들은 친일담론을 바탕 으로 지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박영철의 친일문학은 그의 친일 행 적과 함께 이미 역사적 단죄를 받았다. 앞으로 일제강점기에 지어졌던 여러 문인 들의 친일한시에 대한 보다 진지한 논의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This study examined the travel poetry of Park Young Cheol(1879~1939), a pro- Japanese figure in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during his world tour. On July 28, 1928, he travelled 12 countries for 3 months to attend the 9th Olympic Games held in Amsterdam in the Netherlands. After his return from travel, he published a travel poetry book Gujueumcho with his 33 Sino-Korean poems. In the next year, he published his autobiography Retrospection of 50 years which he included his travel essay together with his travel poetry book. The travel group started from Gyeongseong Station on June 28 and passed through Amrok River, Bongcheon, and Harbin. At Irkutsk, they took the Trans-Siberian Railway and went to Europe via Moscow. At Europe, they visited Poland, Germany, Belgium, the UK, the Netherlands, France, Swiss and Italy. For his return voyage, he went to the Red Sea and Indian Ocean through the Mediterranean and the Suez Canal and passed Singapore, China and Japan. Then, they arrived at Busan Dongnae Harbor. Park Young Cheol’s travel poetry is roughly divided into two. One is, like other persons’ poem, the embodiment of feeling of the scenery and experiences during the travel and curiosity of exotic customs. The other is to project his own civilization discourse or ideology while recognizing the western modern civilization as the other. The latter is problematic. It is because Japan intended to conceal and mislead the process of invasion to Joseon. Likewise, Park Young Cheol, as a pro-Japanese figure, supported a distorted civilization discourse of Japan that Joseon had to accept advanced civilization of Japan for the civilization of Joseon despite the sufferings of the colonial reign.

6,6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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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판본 <하진양문록> 동미서시본에 대하여

유광수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2집 2014.12 pp.379-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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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진양문록>은 장편한글소설이다. 필사를 통해 유통되던 것이 19세기에 접어 들면서 대중적 텍스트로 만들어져 유통되었다. 대중적 텍스트는 다수의 사람들이 읽고 향유했다는 점에서 당대 문화지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데, <하진양문록>의 대중적 텍스트는 세책본과 활판본이 있다. 본고에서는 善本인 러시아본과 세책본 인 동양문고본을 활판본 동미서시본과 비교ㆍ대조하여 활판본의 특징을 분석했다. 그 결과 1915년에 간행된 최초의 활판본인 동미서시본은 러시아본이나 동양문 고본과는 서로 같지 않은 이본임이 밝혀졌고, 세 텍스트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둔 채 형성되고 유통되었음도 알게 되었다. 동미서시본은 자잘한 실수와 부주의로 인한 오류가 꽤 많지만, 이는 단순한 실 수가 아니라 나름대로 ‘<하진양문록>’의 미비점을 보완하여 완성도를 높이려는 노 력을 하는 가운데 발생한 것이다. 본래 <하진양문록>의 갈등 발생의 원인과 인물 들의 대립 양상은 개연성이 떨어졌는데, 동미서시본은 인물형상화를 강화하고 서 사의 구성을 조정, 대립ㆍ갈등 상황의 예각화, 비개연적인 부분 삭제와 생략 그리 고 보완적 첨가 등과 같은 개작을 통해 개연성을 높였다. 그 결과 다른 이본들과 달리 갈등이 더 첨예하게 부각되었고 서술이 명확하며 안정적인 서사가 되어 대중 소설이 지니고 있는 ‘기대-확인’의 통속적 전략에 충실하게 되었다. 이런 점은 최초의 활판본이 지니고 있는 부주의한 실수와 오류에도 불구하고 이 후 다른 활판본에 영향을 주게 되었고, 나아가 활판본이 대중적 텍스트로 널리 유통되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 로 보인다.
<HaJinYangMoonRok(河陳兩門錄)> is a novel written in Hangul. Being transcribed by hands, it has been circulated as a popular text from the 19th century on. A popular text is important for understanding the cultural topology of its period, for many people have read it and shared it. There are a lending library and several printed books, for the popular text of <HaJinYangMoonRok>. In this article, I have analyzed the features of the printed book DongMiSerSi(東美書市) version, by comparing and contrasting with the earlier version from Russia and the lending library DongYang- MunGo version. My conclusion is that the first printed book DongMiSerSi version is a different version from the version Russia or from DongYangMunGo, and those three versions were formed and circulated independently, separated from each other. The DongMiSerSi version has quite many small mistakes and errors cased by carelessness. Those errors are, however, not mere mistakes but made during the process of supplementing and improving what lacks of the original <HaJinYang- MoonRok>, in its own way. The original <HaJinYangMoonRok> had problems of loose causal relationship of its conflicts and the improbability of the opposing characters, but the DongMiSerSi version made it a better narrative by strengthening the character representation, modifying the structure of narrative, adjusting to a acute angle of conflicting situation, removing improbable scenes, and adding supplemental statements. In the end the narrative became clear and stable, highlighting the conflicts more than in other versions. As a result it achieved to meet the needs of the conventional 'expect-check' strategy of popular stories. These features contributed for the printed version DongMiSerSi to be circulated in popular, affecting other printed versions in spite of its careless mistakes and errors.

8,4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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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と王権 - 『三国遺事』の説話から -

堂野前 彰子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2집 2014.12 pp.419-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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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gukYusa describe that a dragon is god of water such as Poseidon and a sacred beast to symbolize kingship. In some case a dragon is a beast that harms to human beings, in some case it is god of thunder, but in many cases it defends territory of kingdom and protects the Buddhism, to be so in China. In addition a man born between a dragon accedes to the throne. On the other hand, in Japan there is a myth of a large snake, as god of water. It symbolizes the flooding of a river, and to destroy it means to improve the river. Therefore it is exterminated by Hero such as Susanoo. Behind such myth, rich harvest is promised by controlling the river. So the snake is not a symbol of kingship. Why is there such difference? I suppose there are two types of dragon myth. Provisionally I name them as follows. One is “the myth of the maternal dragon “that is handed down among maritime pepole, the other is “the myth of the paternal dragon” that is handed down among agricultural people. The former is a tale that a man having the blood of the dragon becomes a King, the latter is a tale that a man exterminating and controlling the dragon becomes a King. I can find the both types in Japanese myth, but in "SamgukYusa" only the former. Perhaps, what is required to a king in Korea is to protect the country from foreign enemies, more than to control a river. I think the dragon of SamgukYusa was born in such a Korean historical background.
『三国遺事』には龍の登場する伝承が、管見によれば、十三話残されている。 その 中で龍は、水神にして王権を擁護するものとして語られており、それは中国におい て王権を象徴する聖獣であったからだろう。 「水路夫人」や「恵通降龍」で龍は人間に 害をなす獣であり、「宝壌梨木」に示されるように雷神の性質を併せ持つ荒ぶる神 であったものの、「万波息笛」や「真聖女大王居陁知」に語られるように、国を護り 仏法を擁護するものであった。 また、如意玉とともに描かれることが多いことからす ると、龍には水を支配する力すなわち航海術が象徴されていて、韓国の始祖伝承 において龍との聖婚が語られているのは、龍という外部の血が王権の正当性を保証 しているからであった。 一方日本において、龍が登場する神話はなく、例えば八俣大蛇のように、水神 は大蛇となって現れ、人間によって退治されるものであった。 その背後には大河の 治水や、それによって豊穣が約束される稲作農耕があり、龍そのものが王権を象徴 することはなく、遺事における龍のイメージと繋がっているようには思われない。 そのはじめを辿っていけば中国の龍にいきつく両国であるのに、何故そのような違 いがあるのだろう。 思うに龍の神話には二系統あって、ここで仮にそれを、海洋民族が持っていた 龍の神話すなわち母系的龍の神話と、稲作農耕民が持っていた龍退治の神話すな わち父系的龍の神話と名付けてみよう。 前者は龍との異類婚が語られ、それとの間 に生まれた子孫が王となっていく神話であり、後者はあくまでも龍は退治すべきも のであって、龍を制圧し支配することで王として君臨していく神話である。 日本に おいてはその両方を見出すことができるのに、遺事においては前者しか見いだせない。 雷神 としての性質を龍の中に見出せたとしても、その雨が田を潤す水とは結 び付かないのである。 それはおそらく、韓国において王に求められていたのは、農耕 に不可欠な治水の力ではなく、外敵の攻撃から自国を護る力、すぐれた航海術や 津波を防ぐ力であったからであろう。 日本において、いかにして川を支配し稲作を 行うのかということに主眼があったのとは、なんと対照的なことか。 それが韓国とい う国の風土であり、歴史的背景ではなかろうか。

6,1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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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린의 이력과 『조선동화대집』발간에 대한 재검토 - 1926년까지 간행된 한글 설화집을 중심으로 -

김광식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2집 2014.12 pp.443-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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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먼저 선행연구와 필자가 발굴한 자료를 정리하여 1926년 심의린의 『조선동화대집』발간 이전에 한글로 발행된 번역서를 포함한 동화집을 목록화 하 였다. 그 과정에서 심의린이 1924년에 잡지 『신소년』에 조선동화를 처음으로 연 재하고, 1925년에 이솝우화를 교열하였으며, 이듬해에 『조선동화대집』을 발간하 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09년에 잇달아 『조선동화대집』이 국내에 소개되 면서 심의린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선행연구에서는 심의린의 이력 에 대한 불완전한 기술이 많았고, 그의 일본어 논고에 대해서도 분석되지 않았다. 이에 본고에서는 심의린의 해방 전의 이력을 복원하고, 그의 새로운 논고를 발굴 하여 그 내용을 재검토하였다. 『조선동화대집』이 발간되기 2년 전에 조선총독부 편 『조선동화대집』(1924)이 발간되었다. 선행연구에서는 두개의 조선동화집에 대한 이분법적 연구가 일반화 되는 경향에 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조선동화집』은 조선총독부에 의한 조선아 동의 ‘교화’ 목적으로 집필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 편자가 독일 아동문학가 다나카 우메키치가 펴낸 것임이 명확해진 만큼 앞으로는 편자 다나카의 이력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연구가 요청된다. 최근의 선행연구에서는 조선총독부 편 『조선동화집』에 대한 비판서(저항담론) 로서의 심의린의 자료집 연구가 심화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연구가 심의린의 저작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수반하지 않고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심의린은 동화 에 깊은 관심을 지닌 선구자였지만, 동화연구가는 아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식민지 상황에서 냉대 받던 조선어연구자로서, 위기에 처한 조선어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일환으로, 조선동화집을 편찬하였다. 심의린은 조선아동의 관심을 증진시키 고 고상하고 아름다운 모범적 조선어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말하기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갖고, 학예회, 동화회에서 조선동화를 활용한 선각자다. 따라서 심의린의 자료집은 우선적으로 식민지 조선어 상황과의 관련에서 그 간행 의미를 재고해야 할 것이다. 심의린이 식민지 상황에 발 빠르게 대처하며 식민통치 지배언어인 일 본어가 아닌, 위기에 처한 조선어로 조선동화집을 발간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 있는 행위였다. 하지만 심의린은 근대 이전의 조선사회 풍습, 관습에 비판적이었 고, 이를 개선하여, 조선 아동의 근대적 훈육의 필요성을 주장한 근대적 교사였음 을 본고에서 명확히 하였다.
This paper, first of all, lists up publications of fairy tales before SHIM Ui-rin's Grand Collected Works of the Korean Fairy Tales(Choseon Donghwa Daejip, following as GCWKFT). Three points are newly acknowledged in this paper during the listing-up works. First, SHIM started to publish the Korean fairy tales in the journal New Boy(Shinsonyon) in 1924. Secondly, he corrected to publish Aesop's fables in 1925. Thirdly, he did finally publish the GCWKFT in 1926. Since the year of 2009, researches on SHIM have been consecutively appeared on the basis of the reprinted version of GCWKFT. However, small numbers of mistakes, for example, are uncovered on SHIM's currilum vitae with missing of his works in Japanese language. This paper focuses on correcting those mistakes and reconstructing SHIM's cv. There seems to be thereafter a sound ground to understand SHIM and his works. General Government of Korea published Collected Works of Korean Fairy Tales in 1924 before SHIM's work as a matter of fact. The editor of it initiating to colonize Korean children by the colonial government was Umekichi Tanaka who was a well known children's literature introducing German faily tales. A recently published article tries to introduce SHIM's work(1926) as a text of the resistant discourse against General Government's works(1924) under the scheme of dualistic perspective of colonialism versus nationalism without any serious investigation of SHIM's work. SHIM was in fact not a fariy tale writer while he was very much interested and indulged into the fairy tales. It seems to be safe for me to judge that he was pursuing to protest against the colonial policy suppressing Korean languag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ism. SHIM's initial intention should be recognized as he was proliferating and flourshing the Korean language against the colonial policy on language. It should be a very meaningful point to uncover the fact that SHIM's intention was aiming at protecting the Korean language against the domination of the imperial language of Japanese under the colonial situation. This author would like to pay attention to another point of acknowledgement. That is SHIM's political ideology against the pre-modern Korean society in general. He was very much critical about the traditional Korean customs and furthermore raised a question of modernization for the Korean society in terms of education for the children.

6,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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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화기 문학 연구의 현황과 과제 - 중국학계의 한문학 연구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

곽미선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2집 2014.12 pp.473-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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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중국에서 한국 개화기 문학 연구의 현황과 과제를 밝히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에 본고는 중국에서 한국 개화기 문학 연구의 역사를 제1기(1980년대 초~1980년대 말), 제2기(1990년대 초~1990년대 말), 제3기(2000년~현재) 등 세 개 발전단계로 나누고 이 시기 한문학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각 시기의 주요한 연구 성과와 특징을 고찰하였다. 재중 망명 문인에 대한 연구와 한중 지식인의 교류 에 대한 연구, 한국 근대문학에 미친 중국 지식인의 영향 연구, 개화기 조선 지식인 의 중국체험과 해외문화 수용 연구는 중국에서 한국 개화기 문학 연구의 쟁점으로 되어 있다. 특히 중국학자들은 한국 개화기 문학 연구에서 자기들의 우세와 특색을 발휘하여 漢文學을 중심으로 중국과의 관련성에 주목하였다.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고 연구대상을 확충하여 개화기 중국 만주지역과 화동지 역으로 망명했던 문인들의 체험을 비교문학의 각도로부터 연구해야 할 것과 디아 스포라의 연구방법을 원용하여 망명 지식인들의 활동행적을 재구하는 작업, 그리 고 개화기 지식인들의 국한문체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는 것과 중국망명 문인들의 망명전후 세계관의 변화과정을 비교사적 시각으로 재조명하는 작업은 당면 중국 학파의 주요한 연구과제와 전망임을 밝혔다.
This paper focus on the Chinese Scholars' retrospect and prospect on South Korean civilized period literature. Since 1980, the research on the South Korean civilized period literature has achieved marked results in China. The research can be broadly divided into three stages: the 1980s, 1990s and after 2000, this paper will explore the main achievement of each stage. It mainly showed in four aspects. First, the research on Korean scholars exiled in China; second, the research on the contact between scholars from China and Korea third, the research on the Chinese intellectuals’ influence on South Korean modern literature forth, the research on the acceptance of overseas cultures and Chinese experience of Korean Civilized Period scholars. We should continually find new research material to push forward this research. Firstly, do research on the exotic experience of the exiled scholars in Manchuria and Eastern China from the perspective of comparative literature secondly, retarget the activities of the exiled scholars with the Diaspora method; thirdly, explore the civilized period Korean’s recognization of the Chinese style; finally, compare the world view of exiled scholars before and after they exiled to China.
本论文着重探究中国学者对韩国开化期文学研究的回顾与展望。 自1980年 以来, 中国的韩国开化期文学研究取得了显著成就, 本论文将其研究历史分为 1980年代、1990年代、2000年以后等三个历史阶段, 以开化期汉文学的研究为 中心,考察每个历史时期的主要研究成果。 研究成果主要表现在四个方面: 一 是流亡中国的文人研究、二是中韩文人的交往研究、三是中国知识分子对韩 国近代文学引起的影响研究、四是开化期朝鲜文人的中国体验与海外文化接 受研究。 在研究过程中, 中国学者充分发挥自身的优势与特色, 着重考察韩国 文学与中国的关联性研究。 今后我们应不断挖掘新的研究资料, 从以下几个方面推进本领域的学术研 究。 首先, 从比较文学的角度研究满洲流亡文人与华东流亡文人的异国体验。 其次, 采取“离散”的研究方法, 重新定位中国流亡文人的活动行迹。 再次, 考察 开化期韩国文人对国汉文体的认识。 最后, 深入研究流亡中国文人的流亡前 后世界观的比较。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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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내『설부(說郛)』의 수용과 인용 소고

박혜민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2집 2014.12 pp.513-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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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부(說郛)』는 명(明)의 도종의(陶宗儀)가 한위(漢魏)부터 원대(元代)까지 의 필기류(筆記類)를 모아 편찬한 책이다. 『설부』를 인용한 조선 문헌 중 필자가 찾을 수 있었던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권문해(權文海)의 『대동운부군옥(大東 韻府群玉)』이다. 그는 존경각의 서적을 담당하였던 성균관의 사예(司藝)ㆍ전적 (典籍)ㆍ학정(學正) 등의 직책을 거쳐, 궁중의 경서(經書) 및 사적(史籍)을 관리 하는 직책인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도 역임하였다. 그래서 그가 『설부』를 존경각에서 접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대동운부군옥』은 1589년에 완성되었고 그 뒤 20년 뒤인 허균의 『한정록(閑情錄)』에서 또다시 『설부』가 인용된다. 허균이 살았던 16세기 말 17세기 초는 중국의 사신이 대거 입국하여 중국의 동시대 문학을 접할 수 있었고 사행을 통해 대량으로 서적을 구입하는 등 민간영역의 서적 수입이 확대되는 시기였다. 그 수입 서목은 경서의 주석서나 실용서 이외에 만명(晩明) 소설 및 필기류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권문해가 『대동운부군옥』에서 51회, 이수광이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39회, 이익이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6회, 이규경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29회 인용한다. 형식적 측면에서 인물역사고사 집성 유서인 『대동운부군옥』에서는 운자를 끝자로 하는 숙 어 아래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고증을 겸한 유서인 『지봉유설』과 『성호사설』은 표제어 아래 나열, 논증의 단문으로,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조목명이 ‘~변증설’ 로 되어 있고 내용 역시 비교ㆍ논증ㆍ논평의 장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내용 적 측면에서도 『대동운부군옥』은 우리나라 고사 수집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주로 우리나라 방언, 제도, 풍속에 집중되어 있어 일서(逸書)로 『설부』에 수록되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계림유사(鷄林類事)』ㆍ『계림지(鷄林志)』의 인용이 많다. 『지봉유설』과 『성호사설』에서는 경학ㆍ경세와 연관하여 인용된다면』, 『오주연 문장전산고』는 전설 속의 인물이나 동물, 신기한 동물등 흥미에서 비롯된 인용이 비교적 많다. 이는 선행연구자가 『성호사설』과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서술상의 차이를 경세의식의 유무로 지적한 것과 연장선에 위치한다. 『대동운부군옥』, 『지봉유설』, 『성호사설』, 『오주연문장전산고』와 같은 유서의 등장은 명ㆍ청대의 학술의 세례에 힘입어 등장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 저술에서 『설부』의 인용양상을 살펴보는 것은 조선 시기 명ㆍ청대의 학술의 영향이 구 체적으로 어떻게 수용되었는가에 대한 하나의 양상을 제시하는 데 의미가 있다.
This study analyzes the transmitted and cited cases of 'Xiaoshuo' into Joseon dynasty. 'Xiaoshuo' is a book which Tao Zong-yi in Ming dynasty wrote by collecting biji from Han-Wei to Yuan Period. The earliest citation of 'Xiaoshuo' is seen from 'Daedongunbukunok' written by Kwon, Munhea in 1589. He could read 'Xiaoshuo' because he was a Royal library manager. After 20years, Hanjeonglok written by Heo, Gyun quoted 'Xiaoshuo'. At the end of 16th century when Heo, Gyun lived, Chinese ambassadors visited Joseon frequently, which led to frequent introduction of contemporary Chinese literature into Joseon. Also, ambassadors of Joseon visited China frequently as well, which led to a massive amount of importation of literature by them. The importation by the ambassadors included the genre of novel and biji as well as commentaries of Confucian Classics and practical books. 'Xiaoshuo' is one of the them and Lee, Sugwang cited 39 times in 'Jibongyuseol', Lee, ik cited 6 times in 'Seonghosaseol' and Lee, Gyugyeong cited 29 times in 'Ohjuyeonmunjangjeonsango'. 'Daedongunbukunok' was compiled for organizing idiom originated in an ancient event in the Goryeo and Joseon dynasties period. Consequently the book mainly cited Kyelimyusa which appeared on 'Xiaoshuo' introduced customs of Goryeo Dynasty. 'Jibongyuseol' and ‘Seonghosaseol' cited 'Xiaoshuo' to discuss Confucian philosophy and political thoughts.‘Ohjuyeonmunjangjeonsango' cited 'Xiaoshuo' to complement interesting stories about the figures, animals from legends or exotic animals etc. This study presents actual examples showing that Joseon accepted Chinese literature in the period of Ming and Qing in writing encyclopedias such as 'Daedongunbukunok', 'Jibongyuseol', 'Seonghosaseol' and 'Ohjuyeonmunjangjeonsango' based on the analysis above.

8,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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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야담』의 국역 양상과 의미

김준형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2집 2014.12 pp.551-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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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규장각에 수장된 19권집 국문본 『청구야담』에 주목하였는데, 우선 이 방대한 책이 왜 번역되었을까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 실마리를 찾기 위해 가 람 이병기 선생의 언술을 토대로 『청구야담』의 성격을 읽어냈다. 그 성격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텍스트의 문제. 국문본 『청구야담』은 본래 20책이었 는데, 그 중 19책에 총 262편의 이야기만 남아 있다. 완본일 경우, 275-276편 정도가 수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둘째, 가치의 문제. 『청구야담』은 사실성․오 락성․교훈성을 지닌다. 셋째, 편찬시기의 문제. 한문본은 1833~1864년에 편 찬되었고, 국문본은 1880~1890년일 가능성이 높다. 넷째, 향유층의 문제. 이 책에는 조동윤(趙東潤)의 인장이 찍혀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이 궁궐 및 조정 대신 가의 부녀자들이 향유했다. 국문본 청구야담에 한문본을 수용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은 크게 첨가, 삭제, 변이로 정리할 수 있다. 이 세 양상을 관통하는 핵심축은 서사성의 확장에 있다. 첨가가 되는 부분은 주로 여성의 기대심리가 반영된 부분으로, 여성들의 삶의 진술 일 경우가 많다. 삭제가 되는 부분은 사실성을 강조하는 언술이나 정치적인 요소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서사적으로 흥미롭지 않다고 생각하면 그 분량과 상관없이 과감하는 삭제하는 양상도 보인다. 변이가 되는 부분은 어려운 용어나 내용을 쉽게 풀어쓰는 경향이 주류를 이룬다. 이들 모두는 서사성 강화로 요약되는데, 이는 조선 중기까지 강조되던 거사직서의 원칙이 완전히 붕괴된 결과를 반영한다. 한문본 『청구야담』은 전대 문헌에 실린 이야기를 수용하되, 그것을 그대로 싣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고증을 하는 부분이나 사실성을 강조하는 내용은 삭제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만큼 한문본은 다른 야담집에 비해 서사성이 강하다. 그런데 국문 본 『청구야담』은 이처럼 서사성이 강한 야담집을 번역하면서, 한문본보다 더 적극적 으로 서사성을 강조한다. 한문본에 그나마 남아있던 사실적 징표는 모두 지워버린 다. 이는 당시 상층 여성들에게 규범적 질서 안에서 잠시 일탈의 요소를 마련해 줄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여성들을 이야기 안에 함몰시킴으로써 이데올로 기를 공고히 하기 위한 목적에서 국문본 『청구야담』은 배태된 것이라 할 만하다.
This thesis aims to research the phase of the translated Hangul version Chung- GuYaDam in Seoul National University Library and Kyujanggak. It was noted in this paper is the translation to Korean and Changing Phase of ChungGuYaDam. The Hangul version ChungGuYaDam translated Chinese version ChungGuYaDam, it is composed of a total of 19 books. This book has four characteristics. First, the book was originally 20, but that one is missing. Second, this book was the stamped seal of Jodongyun. Third, this book presents the diagram like ‘Fact’ and ‘Entertainment.’ Fourth, this book was compiled in 1880-1890. Above all things, the second is very important. Jodongyun is SinJung empress’s nephew. She acceded to the Kojong emperor throne. This book is the evidence were read in the royal palace. Translation aspect of this book can be largely summarized into three categories. First, the addition. Second, be deleted. Third, the variation is so. These common features include the extension of the narrative for entertainment. The reason of Translation of Yadam to Korean is that in order to translate to fall in entertainment by the royal palace w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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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聖御製別編’에 나타난 對明義理論의 전개

안장리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2집 2014.12 pp.585-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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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두 가지를 밝히려고 하였다. 첫째는 조선 역대 왕의 글을 모은 列星御製 에 別編이 존재하는 이유와 존재양상이며, 둘째는 열성어제별편에 표출된 대명의 리론의 국왕별 전개양상이다. 열성어제별편은 청나라에 저촉되는 글만 모아 진상․보관용으로 두고 반사하지 않았으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 등 5명만 남겼다. 별편 시문의 분량을 보면 숙종은 시가 많고 문이 적으며 문은 숙종, 영조, 정조 순으로 확대되다가 순조․익 종 대에는 현격히 줄어들었는데 이는 대명의리론의 전개와 연계되어 있었다. 본고에서는 대명의리론의 전개를 왕대별로 형성기, 정립기, 확대기, 강화기로 각각 나누었다. 대명의리론 형성기의 숙종은 대명의리보다는 청나라에 대한 분노 와 북벌의지가 컸고, 명나라에 대해서도 再造之恩의 대상인 神宗을 제향하는 대 보단을 세우는 등 신종 중심의 어제를 남겼다. 대명의리론 정립기의 영조는 신종 뿐 아니라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毅宗 그리고 명나라 태조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 여 대보단에 이 세 황제를 향사하게 함으로써 단순히 재조지은에 대한 감사가 아 니라 명나라 전체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였다. 즉 이 시기에는 재조지은보다 尊周 大義의 이념이 더 중시되었다. 대명의리론 확대기의 정조는 조선을 존주대의의 정신을 이은 나라로 보고 더 나아가 존주대의의 혈통을 이은 명나라 후손을 표창 함으로써 대명의리론의 범주를 현저히 확대해 나갔다. 대명의리론 강화기의 순조 와 익종은 명나라 황제에 대한 불손한 언행을 징치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시기 대명의리론은 의심의 여지없는 당대 이데올로기로 강화된 것이다.
This study aimed at examining two things. One is to find out why there is a separate publication to Yeolseongeoje, a collection of writings by the kings of Joseon Dynasty, and the status of the existence of the collection. Second is to examine how Joseon's loyalty to the Ming Dynasty developed by king's reign in Yeolseongeoje-byeolpyeon. Yeolseongeoje-byeolpyeon contains the writings of Kings Sukjong, Yeongjo, Jeongjo, Sunjo and Ikjong and says that writings unfavorable to the Qing Dynasty were separately published and then tributed to kings or kept instead of being distributed. As for poems and proses in Yeolseongeoje-byeolpyeon, the collection includes more poems by King Sukjong than his proses. The number of proses by kings in the collection topped in King Jeongjo's reign, followed by Yeongjo's reign and Sukjong's reign. The figure sharply decreased in the reigns of Kings Sunjo and Ikjong. In this study, the development of Joseon's loyalty to the Ming Dynasty is divided into four stages by king's reign: forming stage; establishing stage; expanding stage; and enhancing stage. According to Sukjongeoje-byeolpyeon, King Sukjong's reign was the period when resentment against the Qing Dynasty and the willingness to conquer the north were strongly prevailed. In addition, the view to regard the Ming Dynasty, specifically Ming emperor Sin-chong, as the one who saved Joseon from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ppeared, resulting in the formation of Joseon's loyalty to the Ming Dynasty. In King Yeongjo's reign, such view was intensified, emphasizing loyalty to the entire Ming Dynasty including Taejo and the last emperor Uijong. That is, during this period, respect for Zhou Dynasty that represents sinocentrism was more emphasized than repaying the Ming Dynasty's help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This is the essence of the argument for Joseon's loyalty to the Ming Dynasty, so King Yeongjo's reign is considered as the period when Joseon's loyalty to the Ming Dynasty was established. King Jeongjo regarded Joseon as the nation that had inherited the spirit of respecting Zhou Dynasty that represents sinocentrism and commended the descendants of the Ming Dynasty who inherited the spirit of respecting Zhou Dynasty that represents sinocentrism, significantly expanding the scope of Joseon's loyalty to the Ming Dynasty. In the reigns of Kings Sunjo and Ikjong, Joseon's loyalty to the Ming Dynasty was enhanced as the absolute ideology of the time, and therefore insolent words and behaviors towards the Ming Dynasty were subject to punishment. This period, therefore, is considered as enhancing stage. In conclusion, this study showed through Yeolseongeoje-byeolpyeon that Joseon's loyalty to the Ming Dynasty initiated from resentment against the Qing Dynasty and then developed from the movement to repay emperor Sin-chong's help in the Japanese Invasion to loyalty to the entire Ming Dynasty based on the respect for Zhou Dynasty that represents sinocentrism. Joseon's loyalty to the Ming Dynasty was further intensified through the reigns of kings Jeongjo, Sunjo and Ikj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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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판 17장본 <홍길동전>의 간행 양상과 소설사적 위상

서혜은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2집 2014.12 pp.613-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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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경판 17장본 <홍길동전>의 간행 양상과 소설사적 위상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경판 <홍길동전>은 17장본을 포함하여 30ㆍ24ㆍ23ㆍ21장본이 있는데, 17장본은 23장본을 저본으로 간행된 판본으로 경판 30장본이 획득한 대중성에 힘입어 출간되었다. 23장본과 비교했을 때, 17장본에 서는 길동과 지배층과의 대결 범주가 축소되면서 대결 구도가 약화되고 망당산 요 괴 퇴치담과 율도국 정벌 과정에 드러난 길동과 김현충이 대결하는 군담은 삭제되 어 있다. 하지만 서자 길동이 당대 조선의 현실에서는 불가능했던 병조판서를 제수 받음으로써 서자 신분을 탈피하고 백용과 조철의 딸과 혼인하여 가부장이 되어 적 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율도국을 정벌한 뒤 국왕으로 등극하는 내용에는 변함이 없다. 이로 인해 경판 17장본에서 확인되는 길동의 모습은 마치 <소대성전>이나 <조웅전>과 같은 귀족적 영웅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과 유사하게 형상화되 어 있다. 따라서 경판 17장본은 민중적 영웅소설인 <홍길동전>을 향유했던 대중 독자들의 귀족적 성향이 가장 집약적으로 제시된 판본으로 규정할 수 있다. 또한 경판 17장본의 판권지는 없지만 책의 표지에 <홍길동젼>이라는 제목과 함께 필사 되어 있는‘뎡유(丁酉)’년이라는 기록을 참조한다면 경판 17장본은 1897년 또는 그 이전에 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6~18장의 분량으로 간행된 경판본 소설의 간행 연대가 1899~1921년 사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경판 17장본 <홍길동전> 은 16~18장본 소설이 본격적으로 출간되는 저변을 형성한 판본이라는 소설사적 위상을 지닌다.
This paper is a study on the publication aspects and status of novel history in Seoul block printed <Hong-Gil-Dong-Jeon> of 17 sheets version. There is Seoul block printed <Hong-Gil-Dong-Jeon> of 17 sheets version at deep rooted tree museum in Sun-Cheon. Seoul block printed <Hong-Gil-Dong-Jeon> of 17 sheets version was published from popularity of 30 sheets version. There are 5 kinds of Seoul block printed <Hong-Gil-Do-ng-Jeon> of 30․24․23․21․17 sheets version. But there is only one Jeon-Ju block printed <Hong-Gil-Dong-Jeon> of 36 sheets version. The narrative of 30․23․21․17 sheets version is similar. Yet 24 sheets version is distinctive the others. And the narrative of 23․21 is same. Therefore Seoul block printed <Hong-Gil-Dong-Jeon> of 30 sheets version is popular block book. Seoul block printed <Hong-Gil-Dong-Jeon> of 17 sheets version is contraction of 23 sheets version. The Hong-Gil-Dong and Cho-Seon ruling class's duel category is got narrow and their confrontation is weaken in Seoul block printed <Hong-Gil-Dong-Jeon> of 17 sheets version. After Hong-Gil-Dong disappearance from home, he went Je-Do and beat monster at Mt. Mang-Dang. But this narration is eliminated in 17 sheets version. Beside Hong-Gil-Dong and Gim-Hyun-Chung's war narration is also eliminated in 17 sheets version. Gim-Hyun-Chung is soldier of Yul-Do. But the narration is changeless that Gil-Dong became Byeong-Jo- Pan-Seo and marry Baeg Lyung and Jo-Cheol's daughters and he became the king of Yul-Do. Therefore Seoul block printed <Hong-Gil-Dong-Jeon> of 17 sheets intensively reveals Aristocratic inclination. There is not copyright records in Seoul block printed <Hong-Gil-Dong-Jeon> of 17 sheets version. But chronicle with title <Hong-Gil-Dong-Jeon> is recorded in covers of 17 sheets version. The chronicle is Jeong-Yu(丁酉). Seoul block printed novel of 16~18 sheets version were published from 1899 to 1921. Therefore I estimate Jeong-Yu(丁酉) is 1897. In that 17 sheets version was published in 1897 or before. Seoul block printed novel of 16~18 sheets version are 15 works. Hence Seoul block printed <Hong-Gil-Dong-Jeon> of 17 sheets version is publication base of 16~18 sheets 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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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화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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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외시화(場外詩話) (3)

남상호, 詹杭倫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2집 2014.12 pp.647-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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