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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상고전연구 [Yeol-sang Journal of Classical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열상고전연구회 [Society of Yol-Sang Academy]
  • ISSN
    1738-2734
  • 간기
    격월간
  • 수록기간
    1988~2018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810 DDC 810
제47집 (21건)
No

기획의도 : 조선 류큐 문화교류 육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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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 채온(蔡溫)의 <사옹편언(簑翁片言)>과 18세기 동아시아 담론의 가능성

윤주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7집 2015.10 pp.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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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는 오늘날 서구 문명권의 대안이 될 만한 유력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적어도 전통과 현대의 결합을 통해 동아시아가 하나의 고유한 문명권이라고 개념화되는 데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구’라고 지칭되는 체제 안에서 삶을 영위했던 사람들의 공동체 의식과 정체성의 문제는 비단 ‘오키나와학’의 범주에 그치지 않고 동아시아 문명권의 중요한 역사적 표본이자 연구 과제로 부각된다. 한국에서의 유구 연구는 최근에 이르러서 활발해지는 추세에 있다. 이에 비해 유구의 인물 자체를 문제 삼는 연구는 아직까지 드문 편이다. 본고는 18세기 활약했던 채온(蔡溫, 1682~1761)에 주목하면서 그의 <사옹편언(簑翁片言)>을 고찰했다. 채온은 중세왕조 유구의 전통적 관료였다. 그는 유구가 사쓰마(薩摩)의 침략에 의해 에도 막부의 간섭을 받으면서도 중국 청나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이른바 ‘양속기(兩屬期)’의 최고위 문신이자 학자였다. 그는 동아시아 유학 문명권의 지배층이었던 ‘사대부’라는 개념의 문인이자 유구의 정치가였다. 그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시기는 유구가 나름대로 문예부흥기를 이뤘던 쇼케이왕(尙敬王)의 재위기간(1713~1751)과 거의 겹친다. 그는 평생을 관직에 있으면서 적지 않은 저작을 남겼다. 국사 편찬에 책임자로 관여했고 실무적인 글을 주로 썼다. 65세(1746년)에는 본고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사옹편언>을 저술했다. 채온의 저술 가운데 <사옹편언>은 단연 이채로운 작품이다. 가공적 인물 ‘사옹(簑翁)’이 불특정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여러 주제를 다루되 내용적으로는 저자의 다른 저술들과 통하는 부분도 많다. 그러나 다채로운 대화 방식과 글쓰기 수법을 구사했지만, 주로 ‘사옹’이 문제의 핵심을 지적하고 대화 상대자가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게끔 유도했다. 일방적인 자기 주장에 그치지 않고 문답을 주고 받으면서 대화자 스스로 깨우침에 이르게 하는 전개 방식은 전통적 한문학 글쓰기로서 우언(寓言)의 양식적 특성에 부합하고 있다. <사옹편언>은 모두 46칙(則)의 각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옹’은 매편 등장하며, 대화 상대자로는 승(僧)과 사(士)가 가장 많다. 그러나 어느 쪽에 치우지지 않는 참학자(參學者), 인인(隣人), 향인(鄕人) 등의 부류를 합하면 사(士)보다 많이 등장한다. 승려와 사족은 신분적으로 이미 고정된 존재라면, 이들은 신분이 다소 유동적이면서도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거나 필요로 하는 모집단으로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사옹은 초가집[茅廬]에 거처하며 몸소 농경(農耕)을 일삼는 인물로 묘사되므로 농은(農隱)의 형상을 띤다. 또한 상대자를 찾아 나서기보다는 찾아오는 자를 상대하는 경우가 월등히 많으므로 숨은 지혜자의 모습을 지닌다. 담론 방식으로는 역설(逆說), 반어(反語)의 구성과, 경구(警句), 고사(故事)의 활용이 두드러지며, 이를 통해 사옹은 문제적 상황의 이면적 의미를 일깨우는 논평자의 구실을 하는 경우가 많다. <사옹편언>은 18세기 동아시아의 담론 가운데 사농빈부론(士農貧富論), 삼교동이론(三敎同異論)과 같은 주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작품집은 중세사회의 신분제를 지탱하는 근거로서의 사민론(四民論)이 흔들리는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신분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사회구성체의 개념을 모색해야 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대체 논리는 아직까지 노(勞)·일(逸), 치(恥)·락(樂) 등의 노동 강도와 노동 감정의 관련성 등을 문제 삼는 데 그쳤지만, 18세기 동아시아 담론과 견주어 볼 때 사회계급을 문제 삼는 빈부론(貧富論)으로까지 발전될 소지는 충분하다. 또한 이 작품집에는 동아시아 종교사상의 범주에서 삼교(三敎)의 같고 다름을 문제 삼는 작품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유교와 불교는 공자와 석가의 본지가 다르지 않으며 처사접물(處事接物)의 법칙은 누구도 외면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만 노장(老莊)은 성인의 취지에 어긋나는 이단이며 선술(仙術)의 기이한 사적은 요술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정통과 방편의 통치 방식이 때와 장소에 따라 달리 시행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배우는 자들이 습속과 기질에 물들어 성현의 죄인이 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 대안으로서 실재의 형식을 뛰어넘는 심령의 일자(一者)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닦으며 기(氣)를 연구하는 공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이는 마음을 절대화하면서 속습에 물들지 않고 때와 장소에 따라 현실적 실천을 강조하는 양명학(陽明學)의 영향을 짐작하게 한다. <사옹편언>의 이러한 사상적 모색은 한국의 박지원(朴趾源)의 <양반전(兩班傳)>과 홍대용(洪大容)의 <의산문답(毉山問答)>, 일본의 안등창익(安藤昌益)의 <법세물어(法世物語)>, 베트남의 작가미상의 <송백설화(松柏說話)>와 오시임(吳時任)의 <죽림대진원각성(竹林大眞圓覺聲)> 등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이들을 구체적으로 비교하면 18세기 동아시아 담론장에서 사상과 문학이 보여준 문제의식과 인식 수준을 효과적으로 점검할 수 있을 것이다.
Sai-On, who was a high-ranking bureaucrat and a scholar in 18th centuary Ryu-Kyu, remained a allegorical anthology named as the in his old age. The work consists of 46 pieces, in which the oldman appears all the times, Buddhist monks and Confucian scholors are the most of the others of talk with him, and besides those there are various men from learners to neighbers. While Buddhist monks and Confucian scholors were stable beings identically, the extra others were in the unstable status with whom the writer dealt seriously as a population who seeked or needed to a new thought in Ryu-Kyu. Meanwhile, the oldman was shaped as agricultural hermit, who lived in a thatched house and did farming by himself. He was a fictional character who reflected the writer’s lifelong expierences, represented his critical mind and his own solutions. has a allegorical writing mainly through paradox, irony, aphorism, and fable. The paradox and the irony get involved in the method of becoming a allegory, the aphorism and the fable are related with the method of expressing the allegorical meaning. The paradox, through showing the rear aspect of a matter, has a open structure to reject the social conventions and direct to a new idea. The irony, through disclosing the contradition state of a matter, exposes the false of the conventions and communicates writer’s underlying meaning. The use of aphorism shows the allegorical meaning emblematically. The use of fable increases the narrativity of allegory and the persuasive power of allegorical meaning. Also in the aspect of discourse in 18th centuary East Asia, covers subjects like as theory of the rich and the poor in the classes of scholars and famers, theory of identity and difference in the three religions. Finding wayes of thought in this anthology are well compared with Park, Ji-won’s and Hong, Dae-yong’s of Choson dynasty and Anto, Shoeki’s of Japan, and anonymous and Ng Th Nhm’s of Vietnam.
東アジアは今日西欧文明圈の対案となるだけの有力な地域として浮上している。少なくとも伝統と現代の結合を通して東アジアが一つの固有の文明圈であると概念化するのに無理はないように見える。それにも関わらず、「琉球」と称される体制内において生を営む人びとの共同体意識とアイデンティティーの問題は単に「沖縄学」の範疇に止まらず、東アジア文明圈の重要な歴史的標本であり、研究課題として浮き彫りされている。韓国での琉球研究は最近に至り、活発化している趨勢である。これに比べ琉球の人物それ自体を問題とする研究はいまだ少ないと言える。本稿は18世紀活躍した蔡温(1682-1761)に注目しつつ、彼の<蓑翁片言>を考察したいと思う。   蔡温は中世王朝である琉球国の伝統的官僚であった。彼は琉球が薩摩の侵略を起点として江戸幕府の干渉を受けつつ、中国清国との関係を顧慮しなければならない、いわゆる「両属期」の最高位の文人官僚であった。東アジア儒学文明圈の支配層であった「士大夫」という概念の文人であり、琉球の政治家としてその活躍が際立っていた時期は、琉球がそれなりに文芸復興期をなした尚敬王の在位期間(1713-1751)と殆んど重なっている。彼は生涯官職にありながら、少なくない著作を残している。国史編纂に責任者として関与し、実務的な文を主に著述した。65歳(1746年)の時には本稿において分析しようとする<蓑翁片言>を著した。   蔡温の著述のうち<蓑翁片言>は断然異彩を放つ作品である。虚構の人物「蓑翁」が不特定の人物たちと対話を交しつつ、様々な主題を扱うのだが、内容的には著者の外の著作と通じる部分も多い。しかし多彩な対話方式と作文技法を駆使しつつ、主に蓑翁が問題の裏面を指摘し、新たな認識に到達するよう誘導している。一方的な自己主張に終らず、問答を交しながら対話の相手が自ら悟りに至ることになる展開方式は、全体的に漢文学の著述法である寓言のジャンル的特性に符合するものであった。   <蓑翁片言>は全46則の各篇により構成されている。「蓑翁」が全篇に登場し、対話の相手としては官吏、僧侶、百姓、獄吏、参学者、士などがあって多様である。蓑翁は茅蘆に住み、自ら農耕を業とする人物として描写されることで「農隠」の形像を帯びている。また、相手を求めて外出するよりは訪ねてくる者を相手とする場合が圧倒的に多いことで、隠れた智者としての姿を帯びてもいる。談論方式ではの逆説、反語の構成とエピグラム、故事の活用が著しい、蓑翁は問題的状況の裏面的意味を悟らせる論評者の役割を果たしている場合も多い。   <蓑翁片言>は18世紀東アジアの談論のうち、士農貧富論、三教同異論といった主題を多く扱っている。この作品集は中世社会の身分制を支える根拠としての四民論が動揺する時代状況を反映し、身分を代替するだけの新たな根拠を模索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逆説的に表現している。この代替論理はいまだ労・逸、恥・楽といった労働強度と労働感情との関連性などを問題とするに止まっているが、18世紀東アジアの談論と較べてみるとき、社会階級を問題とする貧富論にまで発展する素地は十分にある。またこの作品集には東アジア宗教思想の範疇において三教同異論の変奏が多くの部分を占めている。特に儒教と仏教は、孔子と釈家の本旨は異ならず、処事接物の法則は誰も無視できない点を強調している。ただ老荘は聖人之旨にたがう異端であり、仙術奇異の事跡は妖術に過ぎないと批判している。経権の治道が時と場所により、異なって行えることが理解できず、それを学ぶ者たちが習俗と気質に染まり、聖賢の罪人になると批判もしている。その対案として実在の形式を飛び越える心霊の一者を認めつつ、治心修身と攻気工夫に注意を傾けなければならないと述べている。これは心を絶対化しつつ俗習に染まらず随処随時の現実的実践を強調する陽明学の影響を窺わせる。   <蓑翁片言>のこうした思想的模索は韓国の朴趾源の<両班傳>と洪大容の<毉山問答>、日本の安藤昌益の<法世物語>、ベトナムの作家未詳の<松柏説話>と呉時任の<竹林大真圓覺聲>などとよい対比をなしている。これらを具体的に比較することで、18世紀東アジアの談論の場において思想と文学が示した問題意識と認識水準を効果的に点検す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

7,600원

기획논문 : 조선 류큐 문화교류 육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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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向神話の「韓国」 - 『三国遺事』に描かれた「倭」と比較して― 日向神話の「韓国」―『三国遺事』に描かれた「倭」と比較して-

堂野前 彰子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7집 2015.10 pp.4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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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 of “WA” is often described in the Korean books. For example, it is said that the fourth king of Silla has come on a ship from “Tabana-koku”, which is “Tajima” in Japan. The Silla’s dynasty seemed to be connected with Japan. On the other hand, in Japan, it is handed down that Inahi-no-mikoto (son of the Emperor Jinmu) was a founder of Silla. It could be that the relationship of Silla and Japan is equal to two sides of the same coin.x Therefore, checking the example of word “Wa” in the Korean books (“Samguk Yusa” and “Samguk Sagi”) and “Karakuni” in the Japanese books (“Kojiki” and “Nihonshoki”), the Korean books have many motifs same as the Japanese books. Why have they the same motifs? It could be that there were exchange between Korea and Japan. Taking notice the resemblance of motifs and tracing the distribution of legends of “Utubo-ship”, there were the net-work of “Ama” (fisher) surrounding the East China Sea. It would be the world of ancient people.
韓国の書物に「倭」が登場することがしばしばある。例えば『三国史記』新羅本紀の冒頭では、始祖の誕生に続いて倭人の襲来が語られていて、新羅にとっていかにそれが重要な問題であったかということが理解できる。その後も倭人は、幾度となく船団を組んで新羅沿岸まで攻め寄せており、「倭」はいつでも敵対する隣国として描かれてきた。また、赫居世の時馬韓に遣わされた瓠公は、その出身が明らかではないとされながらも、もと倭人で瓢を腰に下げて海を渡って来たので瓠公と名乗ったといい、第四代脱解王は、倭を基点として位置が示される「多婆那国」(「龍城国」)から船に乗ってきたとされていて、新羅の始祖伝承の中に「倭」はその影を落としている。 一方、日本でも『新撰姓氏録󰡕に稲飯命は新羅の祖とあり、そのような系譜語りは新羅王家と天皇家の結びつきを暗示しているのだろう。記紀の中で「新羅」が語られることも多く、『日本書紀󰡕神代では天上界を追放されたスサノヲがはじめに天降ったところとして語られる。あるいは、神功皇后の新羅征伐で帰還してすぐに応神天皇が誕生していることからすると、日本にとって新羅に向かうことは、あたかも母胎回帰のような意味があったのかもしれない。このように韓国の書物に描かれた「倭」と日本の記紀に描かれた「新羅」は、同じコインの裏表の関係にあるように思われてならない。 そこで記紀神話に語られた「韓国」の用例を詳しく調べてみると、西の海上から上陸し東を指向する王権が潮の流れに沿うようにして「新羅」を目指していくことが、その言葉に秘められた意味であることがわかった。それが『古事記』における「韓国」の孤例、日向神話天孫降臨のくだりで描かれている心象風景でもあって、日向神話における二部構造、すなわち阿多(薩摩南部)を舞台とした隼人の神話と対馬を舞台とした海人の神話を接続するものでもあった。そのような神話形成を可能にしたのは、九州南部と北部の間でなされた人々の交流や移住であり、そこには東海(日本海)を中心とした新羅系渡来人のネット․ワークが存在していた。 そのような視座から『三国史記』や『三国遺事』の「倭」の用例をみてみると、記紀伝承と同じモチーフが多くあることに気づかされる。その類似の背後にあるのもまた人々の交流であり、日光感精神話やウツロ舟伝承まで視野を広げて韓日伝承の比較を行うのなら、東シナ海を包括するような海人のネット․ワークを見出すこともできるだろう。そのような海を中心とした交流․交易圏こそが、古代人が思い描いた世界像であった。

6,7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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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모험과 水路夫人

고운기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7집 2015.10 pp.73-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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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본(특히 오키나와)의 두 가지 자료 곧 『만엽집(萬葉集)』첫 번째 노래와 『유로설전(遺老說傳)』 ‘101화’를 가지고 『삼국유사(三國遺事)』‘수로부인’ 조의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 본 것이다. ‘수로부인’ 조는 일상적인 사건과 신화적인 사건의 복합체이다. <헌화가>는 일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해가>는 신화의 자장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사건을 노래한다. 아름다운 여인에게 꽃을 바친다는 일이야 지극히 일상적이다. 용이 부인을 납치해 가는 것부터 일상을 벗어난 두 번째 사건이다. 구출을 위해 사람들이 모여 노인의 지시를 받는 대목은 그 자체로 평범하지만, 지팡이를 들고 해안을 두드린다든지, 바다의 용이 부인을 받들고 나와 바친다든지, 아연 신화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헌화가>는 구애(求愛)의 서정시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굿 형식의 서사’로 볼 수 있는데, 기존의 노래인 <헌화가>를 원용하여 굿의 대본으로 확대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일본의 『만엽집』첫 번째 노래와 비교해 보았을 때 명확히 드러난다. 한편 오키나와의 『유로설전』 ‘101화’는 이나후쿠바(稻福婆)라는 여성 주인공이 홀연히 사라졌다가 용궁을 경험하고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이나후쿠바는 노로(祝女)이다. 그러나 뛰어난 능력을 지닌 노로가 아니었는데,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다음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용궁과 같은 다른 세계와의 왕래가 영력(靈力)의 근원이 되는 것이며, 신성의 획득이고, 일상세계의 질서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다. 수로부인 이야기와의 비교는 여기서 접점을 찾는다. 수로부인 이야기를 여성 주인공의 모험담으로 보았을 때 전혀 다른 해석이 우리를 기다린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로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다. 비록 외견상 납치이지만 수로부인은 그 상황을 즐기고 있다. 『삼국유사』에 정착된 수로부인 이야기는 본디 모습에서 상당한 변형이 이루어졌을 터인데, 그 상황은 이나후쿠바 이야기가 『유로설전』에 정착될 때와 비견(比肩)된다. 당당한 모험의 주인공으로 나설 수 있는 여성이라면 수로부인은 이나후쿠바 같은 사제(司祭)로 비정(比定)될 수밖에 없다. 다만, 모험담으로는 수로부인 쪽이 보다 견실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This context attempted the new interpretation of Suro-buin(水路夫人) in Samkuk-Yusa(三國遺事) with 'Episode 101' of Yuro-Seoljeon(遺老說傳) and Manyoshu(萬葉集). Suro-buin is the complex of a mythical incident and daily incident. sings about the things that happen in daily life and sings about the incidents that go into the lullaby of myth. It is normal to give flowers to a beautiful woman. The dragon kidnapping the lady is the second incident away from daily life. Receiving the orders of the elder where people gathered for rescue is normal, but knocking on the sea with a cane, dragon of the sea bringing out the lady, the two views lead to the world of myth. is a lyrical poem of courtship. However, the story can be seen as a 'narration of exorcism form'. was claimed to expand the script of exorcism. This is identified clearly in when comparing the first song of Manyoshu of Japan. On the other hand, Okinawa's Yuro-Seoljeon episode 101 is about the female protagonist Inahukuba leaving and experiencing the Dragon Empire. Inahukuba is a cursed woman. She did not have special ability, but the situation changes after she returns. She became the source of the soul with the other world like the Dragon Empire, acquired sacredness, and escaped from the order of the daily world. The point of contact can be found here for the comparison with the story of Suro-buin. When the story for Suro-buino was read for the first time, a completely different interpretation awaits. The story was made under the initiative of Suro-buin. Although it was an apparent kidnap, Suro-buin enjoyed the situation. The story of Suro-buino in Samkuk-Yusa showed relative change in the original appearance. The situation is comparable to when Inahukuba's story in the Yuro-Seoljeon. For a woman that becomes the protagonist of a brace adventure, Suro-buin is heartless like Inahukuba. However, Suro-buin has more reliable structure for adventure story.

7,200원

일반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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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30년대 근대매체의 <騎牛老翁> 소환과 그 변모양상

이동월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7집 2015.10 pp.105-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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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조선 후기 야담집 소재 <騎牛老翁>을 일제강점기였던 1920∼30년대에 근대매체가 소환한 현황을 살피고 야담이 시대 변화에 대응한 양상을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다. 조선 후기 야담집 소재 <기우노옹>은 임진왜란 때 무명의 노인이 명나라 장수 이여송에게 조선에도 인재가 있다는 것을 알려 그의 기를 꺾는다는 내용이다. 임진난에 왜적에게 짓밟힌 산하를 남의 도움으로 지킬 수밖에 없었던 우리 민족의 수모를 만회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1920∼30년대에 근대매체에 소환된 <기우노옹>은 전대 야담의 전사에 그치기도 하지만 사회변화에 대응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野老豈是盡愚夫 一代名將喪氣魄>, <여송의 혼나든 일>, <혼쭐난 이제독>, <이여송과 이인>은 전대 야담과 비교하여 서사구조가 동일한 반면 <임진란시의 통쾌기담 기우노옹>과 <명장 이여송이 봉변하던 비화>는 전대 야담에 충실한 가운데 새로운 삽화를 부가하여 서사구조가 변화한다. <임진란시의 통쾌기담 기우노옹>은 기존 인물인 노인 외에 새로운 인물인 기생 소월이 등장하여 이여송이 당하는 수모를 배가 했다. 그 과정에서 민족성과 민중성을 강화하고 역사 기술에도 구체성을 더했다. <명장 이여송이 봉변하던 비화>는 노인이 거울로 이여송의 욕망을 통제한다는 삽화를 새로 투입하여 이여송을 무력화했다. 그 결과 야담의 서사는 계몽 담론에 기울어 경직되고 동화적 환상으로 현실과의 괴리를 심화했다. 민중의 발랄함을 담아내는 야담 본연의 모습에서 퇴행한 것이다. 하지만 야담의 서사구조 변화가 1920년대 계몽 이념의 확산과 1930년대 말의 피폐한 민중 삶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야담이 사회변화에 대응한 한 양상이라 할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situation of as a historical storybook of late Josen dynasty, summoned by modern media during 1920∼30s under Japanese imperialism and to grasp the aspect of confrontation of Yadam on periodical change. The content of as a historical storybook of late Josen dynasty was the story of a nameless old man during Japanese invasions of Korea. Namely, the old man damped Lee Yeo-song's ardor as a commander of Ming, by informing talented persons in Josen to him. And such a story includes quite editor's intention to improve national pride in Josen. summoned by modern media during 1920∼30s shows sign of enlightenment conversation in society and stays in decal of yadam in previous generation. The narrative structures of , , , and are similar to previous yadam. On the other hand, and redoubled Lee Yeo-song's humiliation, by adding new illustrations to the previous yadam. Accordingly, an enlightening discussion on 'the race․the public․the history' stood out and the narration became stiff. And it deepened estrangement from reality by treating fantastically it.

6,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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毅堂 朴世和의 闢異端論

김종수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7집 2015.10 pp.135-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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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고원에 연고를 둔 의당 박세화는 점차적인 남하를 거듭한 끝에, 호좌권인 월악산 일대 지역에 정착하여 일련의 활동을 전개한 구한말의 정통 주자학자였다. 의당학파의 창시자이기도 한 박세화는 일제 강점기를 전후로 한 시대를 호흡하면서 “정학을 숭상하고, 이단을 물리치는” 벽이단론의 주된 기조를 제시하였다. 박세화의 벽이단론은 좀 더 넓은 범주를 갖춘 위정척사론에 대해 포함 관계 하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이 담론의 중요한 위상이 확인된다. 일단 박세화는 천에 연원을 두고 성인에 의해 판정되는 과정을 거쳤을 뿐만 아니라, 제반 인간 관계망과 사무 등으로 대변되는 유학적 일상 속에서 구현되는 진리를 정학․오도․사도․오상[오륜]․실․양 등과 같은 개념으로 표현하였다. 반면에 교주 일인의 가르침에 의해 좌우되는 이단은 허․음․소인적 특성을 띠게 되면서, 유파가 극히 세분화되는 특징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이단이 정학인 유학을 넘보는 사태는 유학사의 전개 과정과 줄곧 병행되어 온 것이었다. 한편 박세화는 고금의 다양한 이단군들을 “옛날의 이단”과 “오늘날의 이단”으로 재분류하는 이론적 조처를 취하기도 했다. 예컨대 양주․묵자 및 노장․불교 등이 전자를 대변해 준다면, 물질문명을 뜻하는 利誘와 새로운 서구의 과학기술을 의미하는 技巧 및 각종 사치품인 奇玩之物 등은 후자에 포함된다. 그러나 해독의 심각성 정도는 후자가 전자를 압도한다. 박세화가 제출한 벽이단론의 마지막 국면은 공자에서 안자․증자․자사․맹자․정자․주자로 이어지는 도통 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세화가 설정한 도통 상전의 계보도 하․은․주 삼대를 밑그림으로 설정하고는 있지만, 요․순을 계보상에 직접 등록시키지는 않았다. 또한 박세화는 칠흑처럼 어두웠던 도의 암흑기를 다시 밝혀낸 맹자와 정자․주자 등과 같은 인물들을 향해 심히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 특징도 발견된다. 이 같은 선양 작업은 유학적 진리[도]를 해명하고 전파하기 위해 일평생 부심했던 자신의 삶의 지향성과도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박세화가 정식화한 도통 계보는 율곡․우암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일면 박세화가 설정한 도통 계보는 화서학파의 그것과 유사한 양상을 취하고도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의당학이 구축한 독자적인 위상이 결코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Uidang Bak Se-hwa defined the schools, which broke away from the legitimate Confucianism, as the heresies and suggested the discourse of ‘Exclusion of Heresies’ (闢異端論), which ‘respects legitimate study and excludes the heresies’. In addition, Bak Se-hwa classified the heresies into the ‘old heresies’ and the ‘current heresies’. The traditional Lao-zi (老子), the Buddhism (佛敎) and the doctrines of Wang Yangming (陽明學) belong to the ‘old heresies’. On the other hand, he included the ‘yi-yu’ (利誘), meaning material temptation, and the ‘gi-gyo’ (技巧), meaning the scientific technology from West, in the ‘current heresies’. He classified the heresies into two kinds so that he can advocate more elaborate ‘Exclusion of Heresies’ discourse. Meanwhile, the ‘Exclusion of Heresies’ discourse suggested by Bak Se-hwa also includes the discourse of Taotong (道統論) (the argument of authenticity lineage), of which the origin is the Confucius (孔子). Especially, Bak Se-hwa highly evaluated the contribution of the Mencius (孟子), Cheng-zi (程子) and Zhu-zi (朱子), who overcame the dark period of Tao (道) in the history of Confucianism. The Taotong (道統) lineage set up by Bak Se-hwa ends with Yul-gok (栗谷) and Wuam (尤庵) in Joseon (朝鮮) and the flow of it takes the same pattern with the Hwaseo School(華西學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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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도와 문학 텍스트에 그려진 닝구타(寧古塔)의 경관과 인식

문상명, 권혁래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7집 2015.10 pp.145-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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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650년대 나선정벌의 무대였던 중국 헤이룽장성(黒龍江省) 닝구타(寧古塔) 지역의 장소성 고찰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북정록』, 『북정일기』, 『영고탑북정지』 등의 텍스트에 기록된 닝구타(寧古塔)의 경관과 노정, 조선인들의 인식 내용을 검토하였고, 세계지도, <성경지도>, <북계지도>류 고지도에 표현된 지리공간과 노정을 통하여 당시의 사회적 인식을 고찰하였다. 현재 헤이룽장성(黒龍江省) 무단장시(牧丹江市) 닝안현(寧安縣)에 위치한 닝구타는 17-19세기 동안 중국 동북부를 관할하는 가장 큰 거점도시였으며, 17세기 중반 이후 만주 동북지역을 관할하는 주요 행정기구의 소재지며, 경제․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중국과 조선의 지도 제작자들은 많은 북계지도에 닝구타의 존재 및 경역을 비중있게 인식하여 표시하였고, 닝구타까지의 노정을 그리고, 글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1650년대에 나선정벌이 이뤄지면서부터 조선의 각종 문헌에도 닝구타가 기억할 만한 장소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1658년의 나선정벌기를 기록한 『북정록』, 그리고 이를 허구화한 『차한일기』ㆍ『배시황전』ㆍ『북정일기』 등은 닝구타의 노정, 인문지리, 닝구타장쥔(寧古塔將軍)에 대한 비판적 인식, 상상지리 등을 서술함으로써 우리 역사와 문학에서 닝구타의 비중을 각인시키는 데 기여했다. 조선인들에게 16-18세기 조선의 북방은 살기에 험난하고 피폐한 장소였다. 이에 비해 두만강의 대안이자 그 북쪽의 닝구타 지역은 물이 많고 소산물이 풍부하며, 번화한 장소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인식과 상상력의 일단이 『차한일기』ㆍ『북정일록』ㆍ『배시황전』ㆍ『북정일기』에서 닝구타를 이국적이며 풍요로운 공간으로 그리는 데 작용하였다. 『영고탑북정기』는 1870년대의 기근과 조선 유민, 잔류한 조선족들과 함께 가장 늦은 시기의 닝구타 신성의 경관을 보여주는 텍스트다. 조선의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 닝구타로 향한 노정은 일찍이 조선과 청의 북방교역의 길이었고, 1654년과 1658년 두 차례에 걸쳐 나선정벌에 동원된 조선병사들이 왕복한 길이었다. 17세기 후반, 조선정부는 청조의 '영고탑 회귀설'에 촉각을 기울이기도 했었다. 이는 지린성과 조선 북방지역에 대한 지리적 인식이 잘못되어 생긴 일이었다. 17세기 중반 이후 닝구타 지역은 조선의 존망에 영향을 끼치는 주요 지역이 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조선족 이주의 역사가 닝구타로를 근간으로 해서 시작되었다. 이상, 우리 역사와 문학, 지리학의 영역에서 닝구타의 장소성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This article is to study the Ningguta discourses of the late Joseon period by reviewing its landscape and journey appeared on the old maps and literature texts. The research team recognized the importance of the Ningguta, which was the stage of Sino-Soviet border conflicts, and reviewed the contents recorded on such literatures as Bukjeongrok, Bukjeong Diary and Ningguta Bukjeongji as well as the pictorial recognition appeared on the world maps, Shenyang maps, and northern border maps. Currently Ningguta is a mere small city located in Ning'anxian, Mudaniiang, Heilongjiang province, however it used to be the biggest hub controlling over the northeast regions of the Qing since the mid-17th century. Ningguta had become the major administrative location governing the northeast of Manchuria as well as the economic and cultural hub. Chinese and Joseon cartographers marked the Ningguta’s existence and boundary on a number of northern border maps as understanding its great importance, and also drew and recorded its journey. Bukjeongnok, which recorded the Sino-Soviet border conflicts of 1658, and its fictional works such as Chahan ilgi, Baesiwangjeon and Bukjeong-ilgi contributed to engrave the existence of Ningguta in Korean history and literature by describing its journey, human geography, critical recognition of Ningguta general, and imagination geography. In these texts, the Ningguta region was described as an exotic space to Joseon people and sometimes imagined as an utopian space. Ningguta Bukjeongi is the text that shows the famine in the 1870 and the latest divine landscape of Ningguta along with the remaining Joseon people. The journey from Hoeryong of Joseon to Ningguta by crossing the Tuman river used to be the road of northern trade between the Qing and Joseon, and Joseon soldiers who were mobilized to the Sino-Soviet border conflicts made round trips two times in 1654 and 1658. In the late 17th century, the Joseon government paid sharp attention on the reversion theory of Ningguta by the Qing. This was resulted from the incorrect geographical recognition regarding the Jilin province and the northern region of Joseon. Since the mid-17th century, the Ningguta region had become the major area influencing the life and death of Joseon. Since the late 19th century, the history of ethnic Korean immigrants had been started based on the Ningguta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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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누이>와 중국의 妖妹型 설화의 비교 - 변신 주체의 변이와 원조자의 존재 양상을 중심으로 -

王潔清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7집 2015.10 pp.167-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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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국의 <여우누이> 설화 유형은 대륙 가운데서는 몽고지역에만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학계에 보고되었을 뿐 중국에서의 분포 여부는 확인된 바 없었다. 본고에서는 중국 문헌 가운데 『한국구비문학대계』와 같은 성격의 문헌인 『中國民間故事集成』과 『中國民間故事全集』을 검토하여 <여우누이> 설화 유형이 중국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제시한 동시에 이들 작품을 상호 비교하여 전승 양상과 변이태에 대해 살폈다. 그 과정을 통해 <여우누이> 설화가 대륙에서 몽고지역과 중국 그리고 한국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광포 설화라는 사실을 확인했고 한국과 중국에 전승되고 있는 <여우누이> 설화 유형의 동이점에 대해서 밝혔다. 한국의 <여우누이>와 중국의 요매형 설화의 비교를 통해서 이들 유형에서 보편적으로 드러나는 서사적 의미도 찾아낼 수 있었다. 중국의 요매형 설화는 주로 유목민 거주지나 방목생활지에 분포되어 있고 유목지역적인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파악했다. 한국의 <여우누이> 설화와 중국의 요매형 설화의 차이점은 주로 변이의 주체와 조력자의 양상에서 현저히 드러난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한국의 <여우누이>에서는 누이의 정체가 여우로만 등장하지만 중국의 요매형 설화에서는 늑대로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요매형 설화에 유목생활 방식이 내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이들 이야기의 줄거리는 유목민이 목양견의 도움으로 늑대를 퇴치한다는 내용으로 귀결된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 요매형 설화 각편의 대부분은 조력자가 퇴치에 등장하지 않고 오빠에게 위험을 알려준 경고자로 등장하는데 반해 한국의 <여우누이> 설화에서는 아내가 조력자로 등장하고 퇴치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우누이>와 요매형 설화에 드러나는 공통서사는 여우나 늑대, 요괴 등과 같은 異類들이 안정된 공간인 ‘집’을 침입하고 집을 지키는 아들에 의해 퇴치된 뒤 다시 안정을 찾게 된다는 것으로 보았다.
This comparative research on each country’s fables can also be said to be an operation of discovering each country’s culture and their distinct ways of thinking. Same storyline frames do exist and are spread across countries, but depending on their ethnic group or regional characteristics some changes happen in the process of transmission. Through those stories we can understand their ethnic lifestyle and ways of thinking. In this paper, the Korean and China’s ‘the monster sister type’ fable will be compared to find these general meanings in them. China’s fable on ‘the monster sister type’ usually spread across nomad tribal regions or residential pasture lands, and the nomad district distinctiveness is clearly shown. In Korea’s fable and China’s fable on ‘the monster sister type’ the difference is that the commonly changed factor is the helper and there are two different ways the helper is portrayed. In Korea, the sister’s identity is portrayed only as a fox, where as in China’s fable on ‘the monster sister type’ is appears usually as a wolf. This can be seen as the influence of the nomad lifestyle. In the fable, ‘the monster sister type’, the main plot is about a nomad who was able to rid of the wolf from the help of a sheepdog, which concludes the story. In China’s fable ‘the monster sister type’ most of the time the helper does not appear to directly participate in the work of getting rid of the wolf but rather takes on the role that gives the brother a warning. On the other hand, in the fable the wife is the helper who In Korea’s fable, the wife is considered a being from the celestial world, the reason for her being a transcendental character was concluded to be from the influence of fable.

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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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진양문록>의 작가의식과 이데올로기적 재생산

유광수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7집 2015.10 pp.19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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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진양문록>은 하 씨 집안과 진 씨 집안의 기록이라는 제명과는 달리, 하 씨 집안의 딸 하옥윤을 중심으로 서사가 구성되어 있다. 그녀가 어떻게 家權을 획득하고 어떻게 몰락한 집안을 일으키는지를 다양한 사건과 인물들간의 관계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여성인 하옥윤이 가권을 획득하는 것을 데릴사위제를 통해 상황을 호도하여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하고, 모든 여성을 총괄하는 여총재 지위를 통해 결혼해서도 남편의 가문보다 우위에 서도록 형상화하였다. 이런 작가의 의도는 노력과 성취를 통한 지위 획득이라는 여성의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옥윤을 중심으로 한 집안과 가문을 만들어냈지만, 그 가권과 가문은 상상적 영역에서 이뤄지는 집안이었고 영토였을 뿐이다. 작가가 소설을 통해 제시한 가치는 작가가 스스로 형상화한 핍진한 설정으로 인해 의도치 못한 측면을 부각시키고 말았는데, 대표적으로 남성은 군자처럼 형상화되고 여성은 음녀로 규정되는 등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는 작가적 세계관의 한계와 작가가 살던 그 시대의 패러다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이유도 있다. <하진양문록>은 여성의식을 고취하고 강조한 작품이지만 궁극적으로 남성 가부장제에 포착될 수밖에 없는 서사 내적 한계로 인해 작가의 의도가 온전히 성취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남성’과 ‘가부장’에 대한 유연한 비판과 ‘여성’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Unlike the name , a story of Ha and Jin family, indicates, it is a novel structured around Hawokyoon(河玉潤), a daughter of Ha family. It shows how she acquired an authority of the family and how she revives a fallen family through various events and the relationship with people around her. The author shows Hawokyoon acquiring an authority of the family naturally through matrilocal residence, and a position of female governor who controls all female shapes her superiority to the husband's family after marriage. The intent of the author was to present the possibility of obtaining the statue of woman through effort and accomplishments. Despite making a home and family around Hawokyoon, the family and its authority were only achieved in the imaginary area. The merit that the author tried to stir up through the novel has magnified to the unintended side. Because the author tried to add vividness to his/her novel, the male illustrated as a noble man, and the female illustrated as a lewd woman. The reasons may came from the limit in a view of the world of the author and the paradigm of era the author was living. Even though the author tried to stir up the female consciousness by , there is a limit to express it metaphorically because of the patriarchal property. However, it is worth to read this novel since it criticizes the “male” and “patriarchal ideology” in pliable way. Also, it takes a positive view of female at that time.

8,200원

10

신유와 나선정벌 승리의 재인식

권혁래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7집 2015.10 pp.229-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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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원

11

나선정벌의 영웅 신유 장군 기념관 건립과 전시 콘텐츠 개발 방안

김재웅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7집 2015.10 pp.233-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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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나선정벌에서 활약한 신유 장군의 업적과 조선군의 활약을 기억하는 기념관을 건립하고 그 속에 필요한 전시 콘텐츠 개발 방안을 제시했다. 나선정벌에 참전한 신유 장군과 조선군은 흑룡강 유역의 러시아군을 격퇴하고 귀국한 영웅이다. 특히 신유 장군은 당시 극동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러시아의 존재를 인식하고 북만주의 지리와 토착민의 풍습을 경험한 최초의 인물이다. 이 때문에 나선정벌의 영웅 신유 장군 기념관을 건립하여 후세에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신유 장군 기념관은 칠곡군 약목면 남계리 신유 장군의 유적지에 건축해야 한다. 그곳은 신유 장군이 출생한 고향일 뿐만 아니라 그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신유 장군의 유적지에서 묘소까지는 ‘나선정벌의 길’로 스토리텔링하기에도 좋다. 신유 장군 유적지에 소규모로 건축된 기념관에는 그의 생애와 업적, 나선정벌의 현장 사진, 노정 지도, 역사다큐 등과 같은 콘텐츠를 개발하여 전시할 필요가 있다. 신유 장군 유적지에 기념관을 건립하여 그의 업적과 나선정벌에 참전한 조선군의 활약상을 소개하는 것이 ‘망각의 역사’를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This thesis is about suggestion on construct of a memorial hall for General Shin You(申瀏), a hero of Nasun(羅禪) Conquest and exhibition contents of his achievements. Shin You and Korean Army were heroes who defeated Russian Army around the Amur river. Moreover, Shin You was the figure who was acquainted with North Manchurian area and Russia and experienced the native custom. Therefore, This paper have suggested the necessity of building the Memorial Hall. Shin You Memorial Hall should build in Namgye-ri, Yakmok-Myeon, Chilgok-gun where he was born and buried. The Memorial Hall should exhibit the contents such as his career and achievements, the journey maps, historical documents, photographs and so on. It is the best way of recollection of the history to make Shin-You’s achievements and Korean Army’s participation in Nasun conquest known by building the Shin You Memorial Hall.

7,6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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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설의 동시사건 서술기법에 대한 사적(史的) 고찰

박상석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7집 2015.10 pp.267-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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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서 각각 일어난 사건들이 차례로 서술되는 경우가 있다. 본고에서는 그러한 사건을 ‘동시사건’, 그것을 서술하는 기법을 ‘동시사건 서술기법’이라 명명했다. 한국 고소설에도 이러한 동시사건 서술기법이 활용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소설사(小說史)의 처음부터 활용되었던 것일까, 어느 시기에 와서 활용되기 시작했던 것일까. 본고에서는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시기와 장르를 대표할 수 있는 표본 작품들을 대상으로 동시사건 서술기법의 활용 유무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소설사의 초기 작품인 <금오신화>, <기재기이>, <구운몽>, <사씨남정기>, <소현성록> 등에는 이 기법이 활용되지 않았으며, 표본 작품 중에서는 <최척전>을 거쳐 <숙향전>부터 그것이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고소설에 동시사건 서술기법이 등장한 이후 모든 작품에서 이 기법이 활용된 것은 아니다. 같은 장르 안에서도 작품에 따라 그것이 활용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판소리계소설의 경우 이 기법을 활용한 예를 찾을 수 없어 동시사건 서술기법의 배제를 하나의 장르적 표지(標識)로 볼 수 있겠다. 동시사건 서술기법은 왜 출현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고소설의 인물이 많아지고 사건이 복잡해지면서 자연스레 나타난 기법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하지만 <구운몽>이나 대장편소설 <소현성록> 같이 인물이 많고 사건이 복잡한 소설도 동시사건 서술기법을 사용하지 않은 채 얼마든지 서사를 끌고 나갈 수 있었던 예는 이 기법이 그렇게 저절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동시사건 서술기법은 무엇보다 독자의 흥미를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 혹은 도입된 것이라고 보게 된다. 새로운 시간기법의 출현은 소설사의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동시사건 서술기법이 처음 선보였을 때 당대 독자에게는 그것이 상당히 파격적이고 신선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기법은 고소설 독자로 하여금 나와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대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상상할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There is a narrative technique that tell the simultaneous events occurred in each place. We named that "narrative technique of simultaneous events", and studied from when this technique have been used in the history of Korean old novels. At the beginning stage of Korean old novels, narrative technique of simultaneous events have not been used. , , are examples of that. This technique have begun to be used in , . Of course, since then this technique have not used in all the works. Using or not using of this technique was the option of each work. Especially this technique have nearly not been used in the works related with Pan-so-ri(판소리). Why have this technique appeared in the old novels? Otherwise common-sense point of view, the increase of character or complexification of events was not inevitable reasons of that. This technique have been devised or adopted consciously for the interests of a novel above all. Time technique is very important in the novel, and it influences a world view of reader. The narrative technique of simultaneous events would have made readers at that time imagine the others of other place more actively. So the appearance of this technique was very important event in the history of Korean old novels.

7,800원

13

<경판본 흥부전>의 두 가지 번역지평 - 알렌, 쿠랑, 다카하시, 게일의 <흥부전> 번역사례를 중심으로-

이상현, 이진숙, 장정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7집 2015.10 pp.355-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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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경판본 흥부전>을 저본으로 한 알렌, 쿠랑, 다카하시 도루, 게일의 번역사례를 중심으로, <흥부전 번역본>의 두 가지 번역지평에 관해 고찰했다. 물론 ‘한글’과 ‘서적’이라는 조건을 동시에 구비한 고소설은 외국인에게 한국인의 구어를 보여주는 ‘구술물’이자 한국민족의 고유성을 담지한 ‘문학텍스트’로 인식되었다. 그렇지만 <흥부전 번역본>은 이러한 ‘설화’와 ‘문학텍스트’라는 번역 지평을 동시에 구현했으며, 늘 이 두 가지 번역지평이 공존하는 독특한 특성을 보여준다. 이는 일차적으로 불어, 영어, 일본어와 한국어가 지녔던 서로 다른 관계망에 의한 것이었다. 즉, 파리외방전교회로부터 한국주재 일본인으로 이어지는 외국인의 한국어학과 한국어에 관한 인식수준의 차이로 발생했던 사건이다. 동시에 <흥부전>이 ‘전래동화’란 측면에서, ‘설화’라는 번역지평 하에 지속적으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기도 하다. ‘설화’로서의 <경판본 흥부전>의 번역은 원전에 대한 축약을 통해 ‘설화화’된 새로운 원전의 형상을 창출했다면, ‘문학텍스트’로서의 <경판본 흥부전>의 번역은 원전의 세밀한 언어표현에 관한 번역의 난제를 제시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The paper aims at investigating two translation approaches to Heung-boo Jeon with focus on H. N. Allen, Maurice Courant, Dakasi Doru(高橋亭), and Hosoi Hajime(細井肇), all of whom selected Heung-boo Jeon published in Seoul as their source text. It is needless to say a Korean classical novel whose language was Hangul and which was published as type of book was regarded as 'a oral text' and 'a literary text.' The former contained Koreans' colloquial language and latter showed the Koreans' unique characteristics. Translations of Heung-boo Jeon embodied their translation approaches to the original as 'a fairy tale' and 'a literary text. These two approaches coexisted in the translations of Heung-boo Jeon. The primary reason was that Korean language had different relations with French, English, and Japanese. That is, the command of Korean language and their knowledge and recognition of Koreanology from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 to the Japanese in Korea were in different levels. At the same time they thought of Heung-boo Jeon as 'a traditional fairy tale' and they translated the Heung-boo Jeon as kind of 'a folk tale'. This approach to Heung boo Jeon published in Seoul created a new abridged version of Heung-boo Jeon. On the contrary, translation of Heung boo Jeon regarded as a literary text had the characteristics of literal translation and it shows how hard it is to translate detailed expressions of the origi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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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壽圖帖』에 실린 申仲淹의 慶壽宴圖에 대한 고찰

이상주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7집 2015.10 pp.41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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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仲淹(1522∼1604)의 아들 申湜(1551∼1623)과 申湧(1561∼?)은 1601년 아버지가 80세 되던 해부터 1604년까지 4년 동안에 아버지 신중엄의 長壽를 축하하기 위해 당시 서울의 고위 관리, 명문장가, 명필가들을 초청해 6회의 경수연을 열었다. 이는 개인이 열은 경수연으로는 最多이다. 許穆(1595∼1682)에게 修學한 申湧의 高孫子 신택이 경수연 그림 4폭과 20명의 親筆 詩와 文을 褙接하여 『慶壽圖帖』이라는 책으로 만들었다. 현재 전하는 경수도는 ‘宣廟朝諸宰慶壽宴圖’ 5본, ‘七太夫人慶壽圖’ 2본, 신중엄 경수연도 1본이다. 신중엄의 경수연도를 제외하고는 原本이 아니고 模寫本이다. 따라서 신중엄의 경수연도는 現存 唯一의 原本 慶壽宴圖이다. 본 논문을 통해 신중엄의 경수연도 原本을 학계에 널리 소개한 것으로도 일정한 의의가 있다. 1605년 그린 ‘선묘조제재경수연도’와 1711년 경 그린 ‘칠태부인경수도’의 경우 朝廷으로부터 잔치 비용을 지원받은 公的인 性格을 지닌 경수연으로, 기념적 의미와 기록성에 더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신중엄의 경수연도처럼 상징적으로 묘사하기 보다는 연회장면을 사실적으로 상세히 묘사했다. ‘신중엄의 경수연도’ 4폭 중에 제1폭에는 경수연을 개최한 사실을 알 수 있게 경수연 거행 장면을 그렸으며, 나머지 3폭에는 신선같은 삶을 살은 신중엄과 신중엄의 집이 神仙의 庭園이라는 점을 寫意傳神的 畵風으로 그려냈다. 따라서 ‘신중엄의 경수연도’ 는 신선처럼 장수한 신중엄의 삶과 그 가문의 번창함을 寫意傳神的으로 표현한 작품이라 평가할 수 있다.
Shin Sik(申湜) and Shin Yong(申湧), sons of Shin Jung-um, held a party in celebration of his father’s long life when he came of 80 years old for four successive years from 1601 to 1604. They invited many celebrities such as top-ranking officials, famous calligraphers and writers in Seoul at their father’s banquets for six times. These are the greatest in number among parties for longevity. Shin Taek(신택) is Huh Mok(許穆)’s great grandson. Shin Yong is Huh Mok’s one of disciples.『KyungSooDoChup(慶壽圖帖)』, a sort of picture album or book in celebrating of long life, was made by Shin Taek with four pieces of celebrating party pictures and about 20 writers’ excellent poems and sentences. The five different kinds of ‘SunMyoChojeJaeKyungSooYeonDo(宣廟朝諸宰慶壽宴圖)’, two different kinds of ‘ChilTaeBooInKyungSooDo(七太夫人慶壽圖)’ and the only Shin Jung-um’ ‘KyungSooYeonDo(慶壽宴圖) are handed down until now. They are replicas except Shin Jung-um’s work of art. Accordingly, Shin Jung-um’s picture is the only existing original. It is meaningful to introduce the Shin Jung-um’s original picture to academic worlds through my paper. These two parties in the picture ‘SunMyoJoJaeKyungSooYeonDo’ in 1605 and the ‘ChilTaeBooInKyungDo’ in about 1711 were painted by the money from the government. Because these two pictures of celebrating longevity are focused on the monumental meaning and record, the scenes depicting parties are expressed vividly and graphically. Shin Hung-um’s picture is painted symbolically. In conclusion, Ling-lived Shin Jung-um and his fine pedigrees are delineated splendidly and gorgeously in the Shin Jung-um’s picture. There are scenes portraying the party in the first part of Shin’s picture. There are scenes portraying Shin Jung-um’s reclusive life and his beautiful and holy garden in the other three parts of it. It is painted with a peculiar style of painting, SaUiChunSin(寫意傳神) style. Thus, his picture painted with a specific and unique style of painting, that is SaUiChunSin style.

8,7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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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中戦争期における植民地出身の舞踊家―崔承喜、蔡瑞月、李彩娥

星野幸代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7집 2015.10 pp.455-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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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 전쟁기, 중국은 해방구(解放區), 국통구(國統區), 윤함구(淪陷區)로 나 뉘었으며, 각각의 지역에서는 여러 가지 프로파간다 전쟁이 있었다. 윤함구에서는 무용을 일본군의 오락과 사기 고양을 주요한 목적으로 하면서, 무용을 통해 동시 에 ‘대동아(大東亞)’ 공영권의 사상을 넓히려는 의도도 있었다. 일본인 무용가뿐 만 아니라, 식민지였던 조선의 최승희(崔承喜), 대만의 채서월(蔡瑞月)・이채 아(李彩娥) 등 식민지 무용가가 ‘위문무용’에 참가했다. 제국 일본의 ‘동포’라는 명목이기는 했지만, 국내외에서 춤추는 것은 그녀들에게 있어서 대만・조선의 민 족성을 어필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전후, 이들 무용가들은 고국의 모던 댄스 를 보급시켰다. 한편, 조선의 남북분단과 대만의 백색테러라는 정치적 변화 속에 서 제국 일본에서 배운 무용은 그녀들을 억압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During the Sino-Japanese war, Mainland China was divided into three areas, that is, "Liberated Region", "enemy-occupied Area" and the "National Party-ruled Area", and in each area both side of the war used propaganda to shape the opinions of the people. In enemy-occupied Area" Japanese dancers organized dance companies and performed to entertain the Japanese Army or artisans working in munition factories and to spread "Five Races under One Union", which was a national polity in Manchuria, among the occupied Chinese people. Therefore, they danced traditional Chinese, Taiwanese and Korean dances as well as traditional Japanese dance and German modern dance to military song. It is worthy of notice that colonized Taiwanese and Korean dancers participated in those Japanese companies. This study examines how propaganda took advantage of dancers during the Sino-Japanese War and focuses on three dancers: Choe Seung-hui, Tsai Rui-yueh, and Lee Tsia-Oe. On the contrary, that was a kind of tactic for them to pass the ethnic culture of their own through dancing at the dance company of "the Empire Japan". After the war these Taiwanese and Korean dancers have contributed to make the modern dance become popular in their country. However, in the political changes by the Korean War and the White Terror in Taiwan, some dancers were suppressed because of their “cooperation with Japanese imperialism.
日中戦争期、中国は解放区、国統区、淪陥区に分けられ、その夫々で様々なプロパガンダ合戦が見られた。淪陥区では、日本軍の娯楽と士気高揚を主な目的としつつ、舞踊によって「大東亜」共栄圏の思想を広める意図も見られる。日本人舞踊家だけでなく、植民地であった朝鮮の崔承喜、台湾の蔡瑞月、李彩娥といった植民地の舞踊家がこの「慰問舞踊」に加わっていた。帝国日本の「同胞」の名目ながらも国内外で踊ることは、彼女達にとって台湾․朝鮮の民族性をアピ―ルするための戦略でもあった。戦後、これらの舞踊家達は故国にモダン․ダンスを普及させた。反面、朝鮮の南北分断、台湾の白色テロといった政変の中で、帝国日本で学んだ舞踊は彼女達が抑圧される要因となった。

5,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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清人对朱熹比兴观念的接受

張萬民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7집 2015.10 pp.477-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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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代의 유학자들에 의해 확립된 ‘比興의 寄託 전통’은, 寓意가 은근하면서도 깊이가 있음을 추구한다. 육조시대에 확립된 ‘사물을 통해 감회를 일으키는 전통’ 은 정취의 진실성과 遙遠함을 추구한다. 주희는 이와 같은 두 갈래의 기본 전개 외에, 새롭게 賦比興의 비평 체계를 확립하여 시의 맥락에서 賦比興을 완전하게 해석할 수 있게끔 하였다. 주희의 비흥 체계는 비흥의 기탁 전통과 사물을 통해 감회를 일으키는 전통과 더불어, 후대의 詩經學과 문학비평 이론에 수용되어 중 요한 과제로 자리매김하였다. 본고는 청대 사람들이 비흥 전통을 발전시키는 맥락 을 살펴봄으로써, 그들이 주희의 비흥관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비평하고 수용하였 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The concept of bi-xing has two main orientations in ancient China. The first one concentrates on allegorical meaning in poetry, while the second one foregrounds the spontaneous and evocative elements of poetry. Zhu Xi offers a new definition of bi-xing when he uses bi or xing to explain every stanza of poetry in the Book of Odes and take them strictly on the basis of the whole stanza of poetry. The article aims to explore the reception of Zhu Xi’s idea of bi-xing in classics studies and poetics in the Qing dynasty.
由汉儒确立的比兴寄托传统,求寓意的婉与深;由六朝确立的感物兴会传统,求情趣的真与远。朱熹在比兴传统的两大主线之外,重新建立起赋比兴的批评体系,完全从诗章语脉来解释赋比兴。朱熹的比兴观念,如何与比兴寄托传统、感物兴会传统共存,并被后世的诗经学和文学批评接受,是一个重要课题。本文试图梳理清人在比兴传统的发展脉络中,如何理解、批评、接受朱熹的比兴观念。

8,1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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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 경기체가의 후절 구성 방식 연구

최형우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7집 2015.10 pp.51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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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불교계 경기체가의 후절이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되었고, 내용적으로 어떻게 구조화되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이다. 일반적으로 경기체가의 창작에서 후절의 구성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경기체가의 작품형태가 변화하는 시점에서 후절 만으로 작품이 구성되는 현상들이 일어났던 점을 고려하여 볼 때, 경기체가 작품들의 후절이 가지는 의미 구성상의 중요성은 충분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포교를 위하여 유학자들이 주도적으로 향유한 경기체가 양식을 빌려온 승려들이 후절을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가는 경기체가의 갈래적 특성을 규정짓는 데도 상당히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후절 구성 방식을 살펴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고려되어야 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작품의 소재 원전의 성격과 연행에 대한 정보일 것이다. 불교계 경기체가를 소재 원전의 성격과 수록방식을 고려하여 볼 때, 대부분의 작품들이 연행보다는 내용적 완결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계 경기체가의 후절 구성은 반복 나열, 강조의 측면으로 단순하게 일반화시킬 수가 없으며, 작품의 내용적 완결성을 위한 효과적인 방법들을 활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불교계 경기체가의 후절 구성은 ‘축약, 반복’, ‘이미지 연상’, ‘경전 및 선어구 인용’의 세 가지 차원에서 대부분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다른 경기체가 작품들에 비해 보다 전절과의 상관성 속에서 구조화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결국 불교계 경기체가를 창작한 승려들이 불교 교리 및 사상의 전달에 초점을 두고 작품을 창작하였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는 포교를 위하여 다른 집단에 의해 주도적으로 향유되는 문학 양식을 빌려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단순한 구조로 반복,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한다. 즉, 유학자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향유되던 이 갈래를 수용하여 자신들의 세계관 및 사상 표출에 효과적인 형태로 작품을 창작하였다는 점에서 불교인들의 주체적인 작품 창작의 면모도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
This thesis covers the matter of the way Buddhist kyonggiche-ga(景幾體歌) consisted of and formed itself contextually. In creation of kyonggiche-ga, generally, the latter lines’ composition implies considerably significant meaning. Considering the fact that the pieces had been composed only by post lines as the format of kyonggiche-ga start to be changed, important enough are latter lines of kyonggiche-ga’s independency and significance on composition of meaning. How monks borrowed the style of kyonggiche-ga from confucian scholars who had enjoyed it for propagational purpose is a significant factor which determines the feature of kyonggiche-ga genre. Although several factors have to be pondered, the most important should be the original texts’ character and information about its actual playing in the past times. Considering characters of original texts and the way it was contained, it can be said that most of the pieces focused on the completion of contents, rather than their actual playing. Therefore composition of kyonggiche-ga’s latter lines should not be generalized as repetitive listing and emphasizing, but as effective means for completion of contents. Composition of Buddhist kyonggiche-ga‘s latter lines is mostly done by three of ‘Consicion and Repetition’, ‘Image association’ and ‘Citation from scriptures and phrase about Zen’. Additionally, They focuses on correlative formation with the former lines, compared to other kyonggiche-ga pieces, which confirms that monks had created Buddhist kyonggiche-ga focusing on propagation of Buddhist doctrines and conveying Buddhist ideology. It also proves that they did not just ‘repeat’ or ‘reproduce’ them although they were borrowed from other society for propagational purpose. In other words, considering they adopt this genre when the independency of latter lines got reinforced but created different, it shows the independent side of Buddhists’ creation.

7,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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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비문학(口碑文學)’이라는 개념과 범주의 형성 과정 탐색

김영희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7집 2015.10 pp.547-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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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 탐색의 핵심 대상을 언어로 규정할 때 이는 크게 ‘구술언어’와 ‘문자언어’로 대별된다. 문학의 역사가 이 두 가지 언어 사이의 길항 관계나 교섭 양상을 핵심 동력으로 전개된다고 할 때 ‘기록’과 ‘구술’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서술하느냐 하는 것은 문학사 연구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문학사 서술에서 ‘구술’과 ‘기록’의 문제는 ‘구술에서 기록으로의 이행’이라는 진화론적 도식을 공고히 하거나 ‘구술언어=피지배언어’, ‘문자언어=지배언어’라는 환원론적 이중언어 공식을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인식되어왔다. 이 글은 이와 같은 인식의 배후에 ‘구비문학(口碑文學)’이라는 개념과 범주가 자리잡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구비문학’이라는 말 속에는 서로 엇갈리며 때로는 부딪히는 ‘구술’과 ‘기록’의 관념이 기묘하게 동거하고 있다. 시간성에 얽매이며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구(口)’와 공간적이면서 고정적인 관념을 가리키는 ‘비(碑)’가 서로 붙어 있고, 여기에 리터러시(literacy)에 입각한 개념인 ‘문학(文學, literature)’이 결합되어 있다. 서로 모순되는 관념들의 이와 같은 기묘한 동거는 ‘구비문학’이라는 개념의 형성 과정에 개입한 의지와 지향들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긴장과 역동을 짐작케 한다. ‘구비문학’이라는 학문 범주 형성의 씨앗은 일제강점기 일본인과 조선인 학자들이 주도한 ‘설화’ 및 ‘민요’의 수집과 연구에서 맨처음 발견된다. 해방 후 다양하게 전개된 탈식민의 지향 속에서 ‘구비문학’은 제국/식민주의 담론이자 식민지 ‘조선학’의 하위 영역을 구성하던 ‘민속학’의 그늘에서 벗어나 ‘한국문학’의 하위 영역으로 재편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구비문학’이 ‘한국문학’의 하위 범주로 구성되어 안정적인 위치를 형성한 것은 해방 직후나 1950년대가 아니라 1970년대 이르러서였다. 이 시기 ‘한국문학’은 ‘민족문학’으로서의 성격을 명확히 하면서 식민지 경험의 단절면을 지우는 지속성을 확보하고 ‘민족문학’ 내부에 민중적 지향을 확고히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이와 같은 연구 지향에 부합하는 것이 바로 ‘구비문학’이었다. 이 글은 ‘구비문학(口碑文學)’이라는 개념과 범주가 어떤 동기와 문제의식에서 만들어졌는지 살펴보고 이와 같은 용어의 발명이 이후 문학사 인식과 서술에 남긴 흔적을 따라간다. ‘구비문학’이라는 개념의 계보학적 탐색 작업은 한국문학사 서술에서 오래도록 견고한 틀을 유지해온 구술-기록을 둘러싼 관념, 역사적 도식, 관계망 등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성과를 이끌어낼 것이다.
This study is intended to analyze historical formation process of the conceptualization and the categorization of ‘oral literature’. In Korea, the study and the investigation of oral transmission(for example folktale, myth, legend, folksong, proverb, riddle and so on.) has been started from colonial period as a substudy of folklore. The term ‘oral literature’ was made by researchers of Korean literature in 1960s. The ‘oral literature’ became to be a branch of Korean literature, deriving out of folklore at the time. It is a significant event in history of Korean literature research. The core theme is to cognize and to narrate tension, rivalry, interchange and contrast inherent interaction between orality and literacy. In the history of Korean literature, the relationship of orality and literacy has been interpreted towards the tendency of intensifying the idea that the culture has evolved into literary culture from oral culture, and discourse that oral language has belonged to the subjugated class and literary language has belonged to the establishment class. The term ‘oral literature’ came into light to the field of the research of korean literature in the 1960s, but was not established as a branch of korean literature until the 1970s. In those times, the researchers of korean literature intended to formulate ‘korean literature’ as a ‘national literature’ to find continuity, removing severance from the history of korean literature, made by colonial experience, and the properties of the people as the subjugated class in ‘national literature’. The formation of ‘Oral literature’ accorded with the purpose of korean literature research in 1970s. The escape from ‘Korean folklore’ meant that ‘oral literature’ was recognized as a substudy of Korean literature and that it finally got to get out of the shadow of the colonial period. Korean folklore derived from ‘Choseon folklore’, which has been deeply influenced by Japanese folklore. Korean literature was formed as a ‘national literature’, and it has symbolic meaning of breaking away from colonialism. But the term ‘oral literature’ connotes a contradiction between orality and literacy. So we need to interpret and solve the contradiction, and to trace the historical process of the formation of ‘oral literature’ in Korean literature genealogically.

9,1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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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책본 <상운전> 연구 - 나손 문고 소장 필사본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

정대혁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7집 2015.10 pp.59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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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출현한 창작 국문소설 <상운전>은 여러 이본들이 존재하는 가운데 세책본(貰冊本)으로 제작되었을 만큼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작품으로 생각된다. 이때 대전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상운전>은 세책본이며, 다른 이본들에 비해 내용적 편차가 큰 편이다. 한편 대전대학교 <상운전>은 그 이본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한 권이 빠진 결함이 있는 이본이라는 이유로 그간 제대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일실된 대전대학교 <상운전> 권3에 들어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내용은 완질본 <상운전>을 참고하면 대략적인 서사 진행 상황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연구 텍스트로써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대전대학교 <상운전>은 ‘조선 후기 고소설의 상업화 현상’을 보여주는 텍스트라는 점에서 반드시 연구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위와 같은 판단을 바탕으로 이 글에서는 대전대학교 <상운전>과 완질본인 나손본을 비교하여 이들의 내용과 표현상 차이를 알아보고, 아울러 세책본 <상운전>의 서사적 특징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대전대본은 대체로 나손본의 서사적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세부적인 측면에서 내용과 표현상 일정한 차이를 보이는 텍스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손본과 같은 일반적인 필사본과 다른, 대전대학교 <상운전>의 서사적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는 ‘서술량 확대’와 ‘흥미성 강화’ 등은 일반적으로 영리 추구를 목적으로 제작되는 세책본 고소설의 상업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is very popular novel written in Korean in late Chosun Dynasty era, it has many different versions as a whole. Among many of them, Dajeon-University version of cut a heterogeneous form. Because a novel for lending, Dajeon-University version of , completely different many other version of handwritten-novel. By the way Dajeon-University version of is defective version, it’s a lacking volume. So Dajeon-University version of is not studied all the while. But if we can refer to a complete version of , we make a rough guess the lacking of Dajeon-University version of . Therefore Dajeon-University version of can stand comparison as a subject of study. And above all, Dajeon-University version of can show in the late Joseon period, commercialization of novel, so it must be studied. In this regard, this thesis compared the Dajeon-University version of and Nason, a complete version and look into difference in respect of their content and expression. Also, this article discussed about descriptive feature of Dajeon-University version of from the commerciality of novels for lending.

6,6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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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기이」 부여ㆍ고구려 관련 기사의 서술 의도 -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에 대한 역사적ㆍ서사적 접근 -

엄태웅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7집 2015.10 pp.623-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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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삼국유사』 「기이」의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 <변한 백제>,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 등의 기사에 주목하였다. 그 결과 이들 기사가 고구려, 백제를 ‘부여 계열 국가’로 인식하고, 고구려를 졸본부여로, 백제를 남부여로 명명하고 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찬자가 비단 국가명만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부여 계열 국가로서의 면모를 설명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에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 기사를 중심으로, 부여와 고구려의 역사를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찬자의 의도를 살폈다. 찬자는 글 배치의 변화 및 관련 기록의 생략 및 추가, 적극적인 주석 작업 등을 통해 기사에 자신의 서술 의도를 효과적으로 녹여냈다. 서술 의도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북부여의 계승자는 동부여의 해부루(금와, 대소)가 아니라 졸본부여의 주몽이다.’와 ‘졸본부여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북부여와 같은 위치에 나라를 세웠는데, 그곳은 다름 아닌 요동지역이다.’이다. 찬자는 이러한 자신의 주장에 맞춰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 기사를 서술하였다. <북부여>는 북부여 그 자체보다도 후대 부여 계열 국가의 존재 양상에 포커스를 맞추어 서술이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북부여 발원의 위치에 대한 명확한 입장이 개진되기도 했다. 이를 통해 부여 계열 맥락화의 단초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동부여>는 부여 혈통에서 해부루 및 그 후손들을 배제시키고, 그 자리에 주몽을 대체하려는 목적에서 서술이 되었으며, 아울러 그 과정에서 북부여 발원지의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한 서술 전략이 엿보였다. <고구려>는 이상 두 기사에서 주장한 바를 다시 확인하고 강조하며 보호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었다. 이에 주몽의 부여 계승적 면모를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졸본부여의 위치와 관련하여 일말의 혐의도 남기지 않고 관련 기록들에 조목조목 입장을 개진하였다. 결국 세 기사는 일관된 하나의 입장을 토대로 작성이 된 것으로, 이를 통해 『삼국유사』 찬자가 신라의 역사와 함께 부여 계열 국가들의 역사를 고려의 시원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역사축으로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The chapter 「Kiyi」, 『Samgukyusa』 is the history book and narrative book in one. In Chapter 「Kiyi」, we can find a few interesting records written about Buyeo & Goguryeo. There are 「Buk-buyeo」, 「Dong-buyeo」, 「Goguryeo」, 「Byeonhan Baekje」 in chapter 「Kiyi」, interestingly they are named by writer(s) in different title. The writer left the name 「Buk-buyeo」 & 「Dong-buyeo」 as it is, meanwhile added explanations in the name 「Goguryeo」, 「Byeonhan Baekje」 that 「Goguryeo」 is 「Jolbon-buyeo」 and Baekje in 「Byeonhan Baekje」 is 「Nam-buyeo」. After changing existing records, writer homogenized the meaning of four chapters affiliated with 'buyeo'. Then why did writer intend four records as the story of 'buyeo'. Because the writer wanted to appreciate the history of Buyeo and Goguryeo, and spoke that the territory of two countries was larger than we had kn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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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화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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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외시화(場外詩話) (8)

남상호, 詹杭倫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7집 2015.10 pp.667-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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