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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상고전연구 [Yeol-sang Journal of Classical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열상고전연구회 [Society of Yol-Sang Academy]
  • ISSN
    1738-2734
  • 간기
    격월간
  • 수록기간
    1988~2018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810 DDC 810
제33집 (11건)
No
1

宋時烈의 <次康節首尾吟韻>에 구현된 몇 가지 특질

徐志嘯, 김창화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33집 2011.06 pp.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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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宋時烈은 宋나라 성리학자 邵雍의 학문에 심취해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가 지은 首尾吟 시에 차운해 <次康節首尾吟韻>134수를 지었다. 매수 頭尾를 “尤翁非是愛吟詩”로 통일한 이 연작시는 그가 지은 전체 시 분량의 6분의 1이나 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그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낸 시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그는 이 방대한 연작시에서 스스로를 경계하였으며, 중국 역사와 사상, 전적, 인물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토로하였다. 제100수에서 제122수까지 송시열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朱子에 관해 評述한 이 장편 연작시를 통해 성리학자 宋時烈이 중국문화에 얼마나 정통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는 宋時烈 개인 문학의 특성이라기보다, 평생 儒家 서적을 읽었던 조선조 유학자들의 공통적인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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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从≪次康节首尾吟韵≫看韩国文人宋子与中国文化

徐志啸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33집 2011.06 pp.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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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mous philosopher Song Shilie(Song Zi) of the Li Dynasty in Korea esteemed Shao Yong(styled himself Kang Jie) of the Song Dynasty in China, he was deeply influenced by the thought of Shao Yong and had written the poems ≪次康节首尾吟韵≫(130 poems), which absolutely were showed Song Zi’s idea、moral quality and sentiment. The Paper analyses the poems “Shouwei yin” “首尾吟”of Song Zi, and it tells that the philosopher Song Zi in Korea was familiar with Chinese culture, especially Chinese history and thought of the Confucian school . So we can know about influence and exchange of culture in history of in China and in Korea.
韩国李朝时代著名哲学家宋时烈(韩国人尊称为宋子),心仪中国宋代理学家邵 雍(字康节),深受其思想影响,曾专写下拟邵雍“首尾吟”诗≪次康节首尾吟韵≫ (两者均为130首),该诗充分表现了宋子的理想、人格与情操。本文通过对宋子 “首尾吟”诗内容的具体剖析,让读者看到一位韩国历史上的哲人对中国文化的熟 悉及所受影响,尤其是中国的历史和儒家文化与思想,由此,足可见中韩两国历 史上的文化影响与交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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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輶軒續錄』을 통해 본 姜時永과 淸朝文士들의 문화교류

허경진, 김창화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33집 2011.06 pp.3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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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時永(1788-1868)의 집안은 8대에 걸쳐 燕行에 참여한 가문으로 이름났는데, 강시영 자신은 18세 되던 1805년 봄에 정순왕후의 부고를 알리는 고부사 서장관으로 선임된 아버지 강준흠을 따라 연행 길에 올랐다가 평양에서 감기로 낙오되었다. 이후 1829년에 進賀使의 서장관으로 연행길에 올라 『輶軒續錄』을 썼다. 그 뒤 1848년에 동지사 정사로 다시 연행의 길에 올랐으며, 1853년에는 진하정사로 세 번째 연행 길에 올라 『輶軒三錄』을 썼다. 姜時永은 중국 경내에 들어서면서 적극적으로 문사들을 만나려 했고, 筆談과 漢詩 唱和, 揮毫 등의 방법을 통해 교유 인맥을 쌓았다. 그랬기에 道光皇帝의 詩題에까지 次韻할 수 있었으며, 이때 구축한 인맥이 2차, 3차 燕行에까지 활용되었다. 지금까지의 연행록 연구가 18세기에 치중되었는데, 『輶軒續錄』『輶軒三錄』연구를 통해 19세기 중반까지 관심 영역을 넓힐 필요가 있다.
姜时永的 『輏轩续录』亦为燕行录之一种,是姜时永于1829年作为进贺使书 状官而入燕时的记实记行著作。『輏轩续录』虽已有影印本和翻译本,但尚未引 起学界的注目,更没有有关『輏轩续录』的研究。本文试图通过姜时永的『輏轩 续录』,着重探讨朝鲜使臣与清文士间的文化交流形式及其特征,以窥视十九 世纪前期韩中文化交流之一斑。 著者姜时永,字汝良,号星沙,生于1788年,是为姜俊钦之长子。追溯姜时 永的家系,其先祖姜俊钦(1768~1833)、姜世靖(1743~1818)、姜必得(1700~ 1771)、姜㰒(1662~1727)、姜硕宾(1631~1691)等均为南人之核心人物,且其父 姜俊钦、祖父姜世靖等历经八代曾出使入燕。父姜俊钦自幼天资聪颖,有神童 之誉,二十四岁入成均管学习,二十六岁庭试及第,被选为奎章阁抄启文臣。 正祖二十三年(1799)则提为六品,被任为司諫院正言和司宪府持平。 姜俊钦对 诗文、书法也甚有造诣,1805年作为告讣使书状官入燕时,与当代清文豪吴嵩 梁也有交谊。 姜时永继其父尘登仕途,1890年进士及第,1820年庭试文科及第。宪宗时 先后任副修撰(1838)、忠清道观察使(1843)、行护军(1846)、汉城府判尹、刑曹 判书(1848)等地方及承政院诸职。至哲宗时,又历任汉城判尹、大司宪、礼曹 判书、工曹判书、等职,1866年大院君掌权之后大举起用南人,作为南人出身 的姜时永又适逢机遇,先后被任为弘文馆提学、吏曹判书、崇禄大夫,1868年 升为右赞成,当年九月去世。谥号文宪。姜时永亦擅长诗书。 说起姜时永的出使入燕,可追溯到乙丑年(1805)。是年未满二十岁 的姜时永 随其告讣使出身的父亲姜俊钦,登入燕之途,至平壤时不幸身患重感,只好半 途而弃行,“未得入燕为恨”。成为一大憾事。时过二十四年之后,其燕行之梦 成为现实,姜时永作为进贺使书状官身份随正使李光文、副使韩耆裕等再度 踏上燕行之途。正因为有初行未得志的经验,此行对姜时永来讲甚有感触,身 至平壤之后,姜时永触景生情,重咏二十四年前初行时写过的诗篇,并道“今 于几年之后身作此行经过此地,人生万事可见自有前定矣”。此行姜时永留有 『輏轩续录』。1848年姜时永作为冬至使正使身份再度入燕,1853年则作为进贺 使正使三度入燕,此行又留有『輏轩三录』。 所谓『輏轩续录』,意即『輏轩录』之续编,但『輏轩录』并非姜时永之作,而是 其父姜俊钦于1805年入燕时留下来的燕行日记,而时过二十四年之后的1829 年,姜时永出使入燕时留下来的燕行记录便是『輏轩续录』。之所以称为续录, 似乎为继其先亲之『輏轩录』之意。『輏轩续录』分乾坤两册,乾篇有第一卷和第 二卷,写有自年己丑年(1829)十一月一日至庚寅年(1839)年一月十日间的使行过 程及见闻,还有栅门礼物记录及进入栅门之后的沿路下程记录。坤篇有第三卷 和第四卷,写有庚寅一月十一日至三月二十一日的日程记录,此外还有别单、 见闻事件、己丑年进贺兼谢恩使一行名单。『輏轩续录』除了对燕行使日常事务 的记录之外,还有一些有关对中国古迹及史实的考证记录、对民风民俗的见 闻、各种诗作、与清文士间的笔谈及和诗等诸方面的内容。 在古史与史迹考证 过程中他所参照的书籍主要有『邃雅堂集』(姚文田)、 『开国方略』、『明史』、 『台湾 纪略』(林谦光)、『白沙朝天日乘』(李恒福)、『朝天录』(李廷龟)及 『乙丑日记』(即 为姜俊钦所著『輏轩录』)等。 正因为著者所属门第历经八代有过出使入燕经验,且代代维持不同时期的 高位职,姜时永的『輏轩续录』在韩中文化交流研究中具有重要的研究价值。尤 其是『輏轩续录』中录有姜时永本人创作的诗作41篇、引用的诗(包括清朝以前 历代中国文人的诗及与清文士间的和诗)有75篇,这些诗篇无疑对朝鲜后期韩 中两国间文化交流研究具有非常重要的史料价值。 關鍵詞 姜时永, 『輏轩续录』, 燕行录, 『輏轩三录』, 朝清文化交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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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高峰 文學觀의 性理學的 양상

권미화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33집 2011.06 pp.6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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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6세기 조선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문인인 고봉 기대승의 문학관에 관한 연구이다. 논문은 고봉의 문학관에 그의 성리철학을 도입하여 문학관에서의 키워드인 道, 文, 物, 興 등 개념 및 그 관계를 성리학적 개념으로 해석하고 그 이론화를 시도함으로써 문학에 대한 고봉의 입장과 미의식을 검토해보려 하였다. 고봉은 ‘理氣妙合’을 전제로 하고 있는 理氣一元論과 ‘七包四’의 四端七情論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天地之性과 氣質之性을 구별해 말하면서도 천지지성이 기질지성 속에 떨어져 있다고 보아 하나로 보기도 한다. 고봉은 인간의 본질을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보고자 하였는데 인간의 본질로서 사단과 칠정을 가치적으로 구별해 나누기보다 칠정 하나로 설명하였다. 그는 인간에게 있어 食色의 욕구 또한 天理이기에 영원히 끊어버릴 수 없는 인간의 본질임을 인정함으로써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사단보다는 보다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칠정을 중심으로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고봉은 유학자로서 ‘道本文末’의 文以載道論을 주장하였다. 그는 ‘理氣妙合’을 전제로 하고 있는 理氣一元論을 주장하고 있기에 文道論에서 道를 근본으로 하면서도 文을 소홀하지 않는 道文一致를 주장한다. 그의 心性論에 의하면 心이 物에 감응하여 發한 것이 情인데 사람의 心은 一身을 主宰하는 것으로 만사의 근본이다. 따라서 文 또한 心에 근원하고 있다. 즉 사람이 外物과 접했을 때 일어나는 감정이 情인데 이를 읊은 것이 곧 詩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文은 道에서 저절로 流出되는 ‘以道爲文’의 문학론을 주장하는데 이 역시 道를 體로 文을 用으로 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고봉은 朱子의 「武夷櫂歌」를 사물에 因하여 興을 일으켜 가슴 속의 旨趣를 쏟아낸 것이라고 해석하였는데 그는 주자의 「武夷櫂歌」가 시인의 心이 무이산의 경물에 감응하여 발한 興을 표현한 것이라 여긴 것이다. 이때의 興은 곧 情이 되는 것이다. 이를 그의 四端과 七情을 같은 情으로 보고 七情 속에 善한 정이 바로 四端이라 하여 이른바 ‘七包四’의 四端七情論에 의하여 해석하면 고봉이 문학에서 추구하는 情은 절도에 맞는 七情 즉 七情之善이며 그는 절도에 맞는 七情이 그대로 표출된 시를 吟詠性情의 시라고 여긴 것이다. 즉 모두 절도에 맞고 사람으로서의 참된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감정이라면 자유롭게 표현해도 된다는 것이 고봉의 관점이다. 그는 시는 도학을 담을 수는 있지만 生硬한 造道詩보다도 ‘因物起興’의 吟詠性情이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論文是對16世紀朝鮮朝具有代表性的性理學者高峰奇大升(1527-1572)的文 學觀研究。論文在充分理解高峰哲學觀的基礎下, 以高峰的性理哲學觀解釋 “道”、“文”、“物”、“興”等概念及其關係, 並且對他的文學觀及審美意識進行深 入探究。 高峰在性理學上主張“理氣一元論”和“七包四(七情包含四端)”的“四端七情 論”。高峰對“本然之性”和“氣質之性”加以區別, 認為“本然之性”應包括在“氣 質之性”中。高峰從現實主義觀點來理解人的本質, 認為“四端”和“七情”作為人 的本質並沒有根本上的區別, 只用一個“七情”來說明人的本質。他認為人的各 種欲望屬於天理, 也是人的本質。 高峰作為一個文人士大夫, 始終堅持“以道為本”的載道主義文學觀, 但在 “道”與“文”的關係上卻有著不同的觀點。如朱子《武夷櫂歌》普遍被認為是說 理詩, 而高峰卻把它看作是“因物起興”的抒情詩, 由此可知他更傾向於重視情 感的純藝術, 說明他的文學觀是超越了士大夫觀念主義視角的獨特的文學觀。 他認為《武夷櫂歌》表現的是, 朱子對武夷山的景物受到感應而起的“興”, 而這 “興”就是“情”。根據他“七包四”的“四端七情論”, 高峰所追求的“情”就是適度 的“七情”, 即“七情”之善。他認為表現“七情”之善的詩, 就是吟詠性情的詩。對 於他來說, 人的各種欲望只要是適度的, 就是善的情, 創作時不該刻意地去抑制 它。他認為表露真實情感的、適度的“七情”的詩, 才是真正感動人、教化人的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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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야기, 문학, 역사

이윤석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33집 2011.06 pp.95-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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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역사를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는 믿음 이래로 역사와 문학 연구자들은 각기 자기 분야에서 독자적인 연구를 해왔다. 이런 경향은 이야기를 문학연구자들의 연구 분야로 한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이야기는 다시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야기는 주로 문학 연구자들의 연구대상이다. 1979년 로렌스 스톤은, ‘새로운 역사가’들에 의한 서사에 대한 운동은 한 시대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으로, 과거의 변화에 대한 정합적인 과학적 설명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는 끝났다고 했지만, 과학적 역사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믿음은 별로 흔들리지 않는 것 같다. 문학 연구자들도 허구가 사실을 얘기하는 것보다 진실을 더 잘 전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게다가 대학의 분과학문으로 문학과 역사는 각자의 배타적인 영역을 굳건히 지키고 있으므로 역사와 문학은 분명한 경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개별 연구자의 실제 연구에서 역사와 문학의 경계가 그렇게 명확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 경계가 매우 모호해서 사실과 허구라는 기존의 역사와 문학을 대표하는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객관적 사실과 문학적 진실, 또는 단순히 사실과 허구라는 식으로 역사와 문학을 나누는 일은 앞으로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문학 분야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연구자는 대부분 현대문학 분야의 연구자들인데, 고전문학 연구자들도 여기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문학과 역사의 경계에 서있는 몇몇 작품을 제시하고, 이 작품들을 잘 설명해내기 위해서는 이야기에 대한 매우 정치한 분석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필자는 네 작품을 예로 들었다. 󰡔용비어천가ꡕ는 역사를 편찬하는 일이 이야기의 수집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 고전문학 연구자들이 소설이라고 여기고 있는 1780년에 간행된 한글본 󰡔임경업전ꡕ이 간행될 당시에는 임경업의 실제 전기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점에 대해서 말했다. 또 중국소설 󰡔설인귀정동(薛仁貴征東)ꡕ을 번역한 󰡔설인귀전ꡕ에서 당(唐)나라 장수 설인귀가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무찌르는 이야기를 조선 독자들이 즐겨 읽었다는 ‘사실’을 둘러싼 논의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고려보감ꡕ이라는 조선후기 소설에 등장하는 허구적 인물을 족보에 올려놓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등을 간단히 언급했다. 사실과 허구라는 단순한 구분만으로는 이런 문제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라는 문학과 역사의 오랜 전통을 불러올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야기를 잘 분석해내기 위해 우리가 갖춰야 할 능력은 무엇인가도 아울러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The researchers in the fields of history and literature had developed their original works under the belief that scientific method could be applied to these fields. This trend brought the result of confining the characteristics of narrative only to the object of academic interest in literature. Although it can be said that narrative is still the subject of literary researches mainly, it has also become a focus of academic attention from other fields since the late twentieth century. In 1979 Lawrence Stone said that the movement to narrative by the "new historians" marks the end of era: the end of the attempt to produce a coherent scientific explanation of change in the past. The belief in the scientific history still seems to remain quite firm among historians. Many literary researchers also seem to believe that fiction is a better tool to convey truth than telling facts. Besides, literature and history exist as independent departments in the university academism and this makes a clear distinction between them. However, this distinction between literature and history is not so much clear when it comes to the level of actual research. It is so ambiguous that sometimes such notions as ‘history representing fact’ and ‘literature representing fiction’ cannot simply be applied. And it will get more and more difficult to define literature and history in such simple ways. In the field of literature, it has mainly been the researchers of modern literature who have shown interest in this problem, but I think it is also necessary for the researchers of classic literature to have interest in this problem. In this paper, I introduced some of the works that stand on the borderline of literature and history, and emphasized the necessity of precise and detailed analysis of the narratives. I introduced four pieces as examples. First, I mentioned Yongbieocheonga(龍飛御天歌) as to show that editing a history book began with collecting stories. Second, Im gyeongeop-jeon(林慶業傳). This is a piece, which was published in the 1780’s and researchers consider it as a literary work i.e. novel nowadays. However, I think that people at the time regarded it as an actual biography of Imgyeongeop rather than as a fiction. Third, Sol Ingui-jeon(薛仁貴傳). This is a piece, which was translated from Chinese novel Xue Rengui's Campaign to the East(薛仁貴征東). It is a story of General Xue Rengui of Tang(唐) defeating Yeongaesomun of Koguryo(高句麗). Here, I ask the meaning of the debate revolving around the ‘fact’ that such story was actually popular in Choseon. Last, I raised a question of how to interpret action such as putting the names of fictional characters of late Choseon dynasty novel Koryobogam(高麗寶鑑) onto actual genealogy book. Such simple way of categorizing, i.e. ‘fact and fiction’, is not enough to answer to these questions. In order to solve this problem, I think that it is necessary to call on long-standing tradition of narrative in literature and history. And also, it is necessary for us to think about the requirements for analyzing narrative.

7,000원

6

보조인물의 성격으로 본 ‘춘향전’ 이본 간의 특성 차이 - <남원고사>와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를 중심으로 -

최재우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33집 2011.06 pp.125-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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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은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우여곡절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이들의 사랑이야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 사이사이에서 보조인물들이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중에서 ‘월매’, ‘방자’, ‘농부’는 현재 남아 있는 ‘춘향전’의 가장 초기본인 <만화본춘향가>에서부터 거의 모든 이본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여기에서는 ‘춘향전’ 이본군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본으로 간주되고 있는 세책본 <남원고사>와 완판계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를 대상으로, 이들 보조인물들의 형상화 차이를 살피고, 향유층의 변화라는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살폈다. 분석 결과, 서울지역에서 향유되던 <남원고사>에 보이는 인물들은 약삭빠르거나 의뭉스러운 성격을 지니면서, 양반인 이도령과의 관계에서 순응적인 모습을 보이는 한편 하층민 상호간에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반면에 전라도 지방에서 향유되던 <84장본>에 보이는 인물들은 마이너스적인 하층민의 모습은 약화되거나 사라지면서 보다 건강한 하층민의 모습으로 그려지게 되고, 인물간의 관계도 하층민 상호간에는 긴장감이 사라지고 양반과의 사이에 긴장감을 조성하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각 이본군의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물간에 보이는 이러한 상이한 지점을 관계성에 초점을 두고 수직적 질서 속의 개인으로부터, 여전히 봉건적 수직 질서 속에 놓여 있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주체성이 강화된 하층민으로 변화한 것으로 파악했다. 구체적으로 월매는 양반도령을 맞이하는 퇴기에서 주체적인 어머니상으로, 방자는 주인 도령에게 순종하는 관청의 방자에서 양반과 하층민을 연결하는 중간자적 존재로서의 메신저로, 농부들은 단순한 정보 전달자에서 학정의 고발자로 변화했다고 보았다.
Many assistant characters appear in 'Choonhyangjun' besides the heroine Choonhyang(춘향) and hero Yidoryung(이도령). Especially, Wolmae(월매), Bangja(방자) and Farmers(농부) appear in almost all variant texts, and they accomplish various roles being connected through many twists and turns of Choonhyang(춘향) and Yidoryung(이도령)'s love. This paper examined their characteristics by focusing on ‘Namwonkosa(남원고사)’ and ‘Yulnyuchoonhyangsujulga(열녀춘향수절가)’. Namwonkosa(남원고사)’s assistant characters who read to the people of the Jullado(전라도) district are conniving and have black-hearted personalities, but those of ‘Yulnyuchoonhyangsujulga(열녀춘향수절가)’ are described as the healthy lower clas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m and Yidoryung(이도령) in Namwonkosa (남원고사) is adaptable, but there is tension with them and Yidoryung(이도령) in Yulnyuchoonhyangsujulga(열녀춘향수절가). From these points, it was confirmed that the characteristics of the two works are different. It was observed that there was a change from the individual in the vertical order to the independent lower class's people. Concretely, Wolmae(월매) changed from retired kisang(기생) receiving yidoryung(이도령) to the image of independent mother. Bangja(방자) changed from compliable hasher to yidoryung of the public office to the messenger who connected yangban(양반) to lower class people. Futher more farmers(농부) changed from simple beings who pass on data to the relators who tyrannize to administrators.

7,200원

7

고소설 유통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 - 목활자본 『王慶龍傳』의 출현을 통해서 본 -

정명기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33집 2011.06 pp.157-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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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북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木活字本 『왕경룡전』의 성격과 의의를 살핀 것이다. 『왕경룡전』이 목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는 사실은 학계에 알려진 바가 없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일단 이 본의 書誌事項을 구체적으로 검토했고, 성격과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필자가 수집한 것을 포함한 27종의 『왕경룡전』을 대상으로. 소설의 내용, 서사전개 상황, 작품 속의 詞와 詩 등을 대조해보았다. 이를 통해서 확인한 사실은 현존하는 대부분의 이본에서 ‘詞 작품의 탈락, 서술문면의 부연이나 중복’이 확인되어 善本으로 삼기에는 모두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목활자본은 이들 이본에서 보이는 오류를 거의 볼 수 없다. 따라서 목활자본이 현재까지 알려진 『왕경룡전』異本群에서는 善本이라고 여겨진다. 목활자본 『왕경룡전』이 만들어진 시기는, 이현조 나)본의 筆寫記를 통하여 原本이 1599년부터 1688년 사이에 창작이나 유통되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적어도 이 시기 이전에 만들어졌다고 보인다.
This Dissertation is to try to observe the quality and meaning of Wooden Movable Type Printing Old-novel of 『wangkyoungryongjeon』. This book was published fact is not becomes known during that time. So I tried to observe the bibliographical fact of this book first. and tried to compare to 27's differents versions. Mainly tried to compare the contents and the lyrics. Resultant, the differents versions of the most that confirmed with error there being duplication. but Wooden Movable Type Printing of wangkyoungryongjeon the error confirmed a nil but almost. So as the book where this book is most excellent comes to think. This book approximately is visible with the fact that from 1599 comes to make at between 1688. Like this judgment is to be based to Lee, Hyun-cho' books of record. Base is like this contents is from this dissertation

7,900원

8

詩와 歌의 위계화와 歌의 위상을 둘러싼 제 논의

박애경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33집 2011.06 pp.193-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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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歌란 말 그대로 시와 가를 합해 이르는 말이다. 시와 가를 하나의 실체로 사유하는 관습은 ꡔ詩經ꡕ에 전범을 두는 동양가요의 전통 안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이전 우리 시가사는 한시와 국문시가가 각각 詩와 歌로 존재하며 공존해왔다. 시는 문집에 실리며 기록의 대상이 되는 반면, 가는 구연을 통해 향유되어 왔다. 이는 국문으로 된 시가가 문자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시와 분리된 채 존재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시와 국문시가 간에는 향유방식과 장르실현 방식의 차이뿐 아니라 眞書와 諺文, 문어와 구어라는 언어체계의 차이가 근본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국문시가와 한시라는 영역 주위에는 이렇듯 표기 체계의 차이라는 근본적 문제뿐 아니라, 구어와 문어의 불일치, 시와 가의 분리, 담당층의 분리라는 문제가 중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국문시가와 한시는 이러한 위상과 담당층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존하고 때로는 영향 관계를 주고받으며, 표기 체계의 차이로 인한 간극을 해소해왔다. 이 연구의 목적은 한시와 국문시가가 각각 시와 가로서 존재했던 이중언어 시대 국문시가의 존재의의와 가치를 재구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詩文에 익숙하면서도, 국문시가를 남겼거나 국문시가에 대한 비평의식을 보여준 문인들의 글과 작품을 분석하였다. 이들의 시가관은 ꡔ詩經ꡕ의 風敎나 性情論이라는 전범적 사고에서 출발하였지만, 그것이 이론과 창작에서 실현되는 방식은 개인의 창작 동기나 시대정신에 따라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이 연구에서는 문인들의 국문시가에 대한 관심을 詩餘라는 표현론적 관점과 敎化와 觀風이라는 효용론적 관점에서 살펴 보았다. 또한 민간문화 역량이 증대함에 따라, 歌의 본질과 효용에 대한 재발견이 문예사조로 나타나는 경향도 주목하였다. 시와 가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는 문인들의 노력과 민간문화의 역량이 더해지면서, 詩와 歌, 眞書와 諺文, 문어와 구어로 확고하게 위계화된 질서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중세적 문예 질서의 균열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The history of Korean traditional poetry has been being within the structure of diaglosia before 20th century. The materials of verse spoken and written in Korean vernacular has been regarded as a part of ‘歌 songs’, being enjoyed in the tradition of oral culture while the poetry written in Chinese classic has existed as typical written literature. It can be said that the materials of verse spoken and written in Korean vernacular was excluded from the field of literacy. In this way, there has been fundamental differences of linguistic system including the hierarchy of ‘眞書 Chinese classic’ and ‘諺文 Korean vernacular’ or written language and spoken language as well as the difference of enjoyment methods around the poetry written in Chinese classic and materials of verse spoken and written in Korean vernacular. Despite of the difference in terms of status, the poetry written in Chinese classic and materials of verse spoken and written in Korean vernacular has been trying to narrow the gap resulted in the writing system. The main purpose of this paper is to inquire into the meaning and value of the materials of verse spoken and written in Korean vernacular in the age of diaglosia. To reach this goal, I analyzed the material works or critical essays of literati who created poetry in Korean vernacular or showed critical views on Korean vernacular songs. Even though their views toward the Korean vernacular songs seem to be inspired by the spirit of '詩經 great books of odes', the practice means were differentiated according to their own creation motive or the spirit of the times. In this paper, I looked into the interest toward the materials of verse spoken and written in Korean vernacular in terms of ‘詩餘 the rest of poetry’, ‘敎化 edification’ and ‘觀風 observation of custom’. In addition, I paid attention to the change of literary trend and the movement of ‘rediscovery of Korean vernacular songs’ as the potential power of folk culture was growing gradually. As a consequence, the sign of change cloud be found in hierarchy order between poetry and songs, ‘眞書 Chinese classic’ and ‘諺文 Korean vernacular’ and written language and spoken language. Needless to say, it indicates to the crack of medieval literary o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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措大에 관한 小考

윤호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33집 2011.06 pp.231-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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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우리말의 쪼다의 어원으로 알려져 있는 조대라는 말의 용례와 의미, 그리고 어원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이 말은 중국에서도 오래전 동한시절부터 사용이 되었고, 청나라 때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중기 때부터 조선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조대라는 말이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조대라는 말은 사전에 ‘청렴결백한 선비를 이르던 말’이라고 정의되었다. 어떤 경우는 높은 벼슬아치까지를 포함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개의 경우 선비라는 뜻으로 쓰였고, 빈궁하고 빈한한 선비를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더러는 秀才를 가리키기도 하고, 수재를 빈정거리는 말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것을 모두 종합하여 보면, 첫째는 선비들이 醋溝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醋大라고 불렀고, 여기에서 措大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둘째는 선비들의 거조가 성글기 때문에 措大라고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선비의 자태가 마치 식초를 마신 사람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넷째는 선비들이 사민의 으뜸으로 까칠하여서 초대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어쩌다 그들을 범하게 되면 신맛을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섯째는 선비가 교외에 거주하면서 식초를 팔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곱째는 선비들이 큰일을 잘 처리하였기 때문에 조대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조대를 풀이한 여러 설 가운데 송나라 曾慥가 편한 ꡔ類說ꡕ에 그대로 소개되고, 진계유도 ꡔ침담ꡕ에서 지지한 이광예의 설, 곧 선비가 큰 일을 잘 처리하여 조대라고 불렀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Before teacher was extremely respective title, but now teacher is sometimes used to call someone sarcastically. Likewise the word Zhoda could have been changed from the original meaning. Some poor classical scholars who didn't know nothing of world were called Zhoda, and we could easily imagine that to emphasize Zhoda people accented the word hardly like Zhoda. The word Zhodae[措大] was used from Donghan[東漢] dynasty and was used occasionally at Tang[唐] dynasty and was used pervasively at Song[宋] dynasty. In our country, people used it from the middle of the Korea[高麗] dynasty to the end of the Joseon[朝鮮] dynasty. Then what was the meaning of Zhodae[措大] before? The meaning of Zhodae sometimes included high officers, but most of the time it was used to call impoverished classical scholars; Sometimes it was used to call brilliant minds or to call them sarcastically. There are several origins of this word. Firstly, it is because classical scholars lived together at Chogu[醋溝]. Secondly, it is because classical scholars behaved stupidly. Thirdly, it is because classical scholars' attitudes were like someone who had drunk vinegar. Fourthly, it is because they were impolite and fifthly is because they sold vinegar in suburb area. Sixthly, it is because they would let somebody taste bitter when somebody had insulted them. Finally, it is because classical scholars have capability to do some big affai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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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960년대 인문학 학회지에서의 한국학 연구 구성의 특징 : 개념ㆍ범주ㆍ방법론

최기숙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33집 2011.06 pp.265-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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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는 대학을 중심으로 근대적 학문 체계가 정립된 시기다. 이 때 분과학문 별 학회가 형성되었고, 각각의 고유한 학술 의제를 형성하고 공유하면서 과학으로서의 학문 연구 방법론을 수립해 나갔다. 대학별로 한국학 연구소가 설립된 것도 이 시기인데, 국문학ㆍ역사학ㆍ철학 등 인문학 내부의 분과학문별 전공자가 한국학의 주요한 연구 영역을 구축했다. 이때 한국학의 키워드로 작용한 ‘고전’과 ‘전통’의 개념은 현재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1950~60년대의 인문학 분과학문별 학회지에서는 전근대시기를 대상으로 각 학문 영역의 범주설정과 학문사를 구축하려는 연구 성향을 보여주었다. 국문학의 경우, 학술지에 고전 자료를 소개하고 문학사 서술에 관한 공동 의제를 형성하면서 학문 연구의 대상과 방법론에 대한 쟁점을 형성하고 학술의제를 공유해왔다. 역사학의 경우, 근대적ㆍ과학적 연구방법론으로 조선사를 재구성하고자 했으며, 조선학의 전통 속에서 ‘사학사’를 수립하는 형식으로 학적 성과를 축적했다. 철학의 경우, 학문의 출발이 서양의 개념을 유입한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철학 연구는 서양철학의 방법론을 한국 상황에 적용하는 차원에서 수행되었다. 한국학의 주요 범주를 구성하는 ‘국문학-한국철학-한국사’의 영역은 1950년대에 이미 확정되었으며, 각 학문 분야별 학적 정체성을 형성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역을 넘나드는 학제간 연구 성향이 발견되었다. 이는 전근대 시기의 통합 인문학을 대상으로 한 분과학문별 접근이 사실상 무의미해지는 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내부의 한국학연구소에서 이러한 학적 경향은 대체로 1980년대까지 지속되었으며, 학술지에서 기획 특집을 구성하면서 인문학 내부의 분과 학문의 학술 의제를 합집합적으로 총합하는 단계를 넘어서, 한국학 의제를 기획하여 분과학문별 학제간 연구를 주도하고 각각의 학술 의제를 한국학을 중심으로 재배치하는 연구 단계로 이행했다. 이러한 한국학 연구는 1990년대에 이르러 방향 전환을 시도하게 되는데 첫째 자료의 전산화, 둘째 분단과 통일을 고려한 한국학의 재구성과 세계화 시대의 한국학의 모색, 셋째 동아시아학으로서의 한국학 연구라는 세 방향의 전망을 제시하고 구현하는 과정으로 나타났다.
It was 1950's that modern academic system was institutionalized in Korean universities. Every dept. of Korean universities was institutionalized at those period, and in each part suggested its own academic topics and came to share amongst each researcher group. By doing so, they began to establish their professional research methodology. The institutes of Korean studies were organized at that time in every university, surrounding dept. of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history and philosophy. Such research sections were sharing the same key words of ‘the classic’ and ‘the tradition’, and those concepts has been some influential effect until now. Most of research topics of the journals of Korean studies were published in the institute of Korean studies in university dealt with the pre-modern period, especially Joseon period. First, in case of dept. of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the papers were contributed in journal of Korean studies were about the classical texts with notes and lots of papers dealt with the topics regarding literary history. Second, in case of dept. of history, the researchers tried to recompose of Joseon history with modern academic methodology, and also came to accumulate some study of historiography in the lineage of tradition on study of Joseon, alias JoseonHak. Third, in case of dept. of philosophy, the academic identity was formed according to import the western academic discipline of university. So even in a case of Korean philosophy, the western research methodological styles were adapted by the Korean philosophers who were majoring Korean philosophy. The system of three dept. of college of humanities in Korean universities like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Korean history-Korean philosophy’ were confirmed in 1950's. Even though each department tried to confirm its own identity, it could be founded some tendency of interdisciplinary studies. Such a tendency shows that some approach on the humanities of pre-modern period had some blind spot as long as approaching such a modernistic academic system. Such a tendency was kept until 1980's, and later, in 1990's, the institute of Korean studies in Korean universities tried to find out their own turning point; computerization of materials, global korean studies, and recomposition of Korean studies as East Asian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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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11

휘보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33집 2011.06 pp.303-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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