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rticle

Home

열상고전연구 [Yeol-sang Journal of Classical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열상고전연구회 [Society of Yol-Sang Academy]
  • ISSN
    1738-2734
  • 간기
    격월간
  • 수록기간
    1988~2018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810 DDC 810
제63집 (10건)
No

기획논문 : 통신사 연구 자료의 탐색

1

통신사 연구 자료의 탐색

구지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3집 2018.06 pp.5-6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에 따라 개인회원에게 무료로 제공됩니다.

기획논문: 통신사 연구 자료의 탐색

2

왜관 『관수일기』의 학술적 가치

정성일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3집 2018.06 pp.7-31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1687년 9월부터 1870년 윤 10월까지 왜관(倭館)의 일본인 관리자인 관수(館守)가 작성한 일지(日誌)를 가리켜 『관수일기』라 부른다. 이 글에서는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 소장된『관수일기』의 개요와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소개하였다. 『관수일기』는 조선과 일본의 외교와 무역이 이루어지는 현장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다. 따라서 『관수일기』를 활용한다면 조선 후기 한일관계사의 다양한 측면을 입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요컨대 근세에서 근대로 전환하는 시기의 한일관계사를 재조명하기 위해서는 『관수일기』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분석이 필요하다.
This paper deals with the historical documents compiled by the Director (J. Kanshu) of the Waegwan Japan House, which were called the Daily Records of the Manager of the Japan House (J. Kanshu Mainikki). The Daily Records extend from the ninth lunar month of 1687 to the tenth leap month of 1870 in the lunar calendar. This paper also introduces the outline and the method of using these documents, which are preserved in the National Diet Library of Japan. Different aspects of the diplomacy and the trade between Japanese and the Korean government are included in the Daily Records of the Manager of the Japan House. Thus, it is possible to analyze variously the Korean-Japanese relations in the late Joseon period by using these documents. In short, it is necessary for researchers to access and analyze the Daily Records of the Manager of the Japan House in reviewing Korean-Japanese relations in the transition period from the premodern to the modern age.

6,300원

3

1746년 관백승습고경차왜 접대 - 종가문서로 보는 다례 이후 -

다사카 마사노리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3집 2018.06 pp.33-60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1747년 11월에 한양을 떠나 이듬해 윤 7월에 복명하기까지의 이른바 제 10차 조선통신사 초빙을 위해, 대마번은 관백퇴휴고지차왜, 관백승습고경차왜를 잇달아 부산에 보냈다. 제 10차 통신사는, 도쿠가와 이에시게(徳川家重)의 에도막부(江戸幕府) 제 9대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관백)직 승습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졌으며,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에 큰 문제나 갈등 없이 이루어진 통신사로 평가 받고 있다. 통신사초빙의 발단이 된 요시무네(吉宗)의 관백직 퇴위와 이에시게(家重)의 승습인 만큼, 두 번의 대차왜도 통신사 초빙의 교섭과정에 포함된다. 본고는 제 10차 통신사 초빙 교섭과정 중의 하나인 관백승습고경차왜의 다례의 이후, 부산 왜관에서 이루어진 조선과 대마번 사이에서 이루어진 교섭과정을, 의식(儀式) 연향(宴享) 등을 기록한 조선과 대마번 양쪽 사료를 대조한다. 그 결과 한 쪽 사료만으로는 알지 못했던 모습을 조명하고, 사료 해석에 있어도 서로를 대조하는 것으로 더 정확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았다.
In order to invite the so-called 10th Joseon Tongsinsa from November 1747 to The following Leap July, the Tsusima sent Delegation from Japan to announce, one was accession, and two was retirement of Gwanbeak to Busan one after another. The 10th Tongsinsa was sent to celebrate the accession of the Edo Shogunate's 9th Shogunate(= Gwangbeak) of Tokugawa Ieshige. And this time Tongsinsa is evaluated as a peaceful one without any conflicts. It was the beginning of the invitation of Tongsinsa by Yoshimune's retirement and Yoshimune's accession of Gwanbeak. Two delegations to inform these facts are also included in the negotiation process of Tongsinsa invitation. This paper describes the process of bargaining between Joseon and Tsushima in Busan Waegwan, followed by the ceremony and so on, which is one of the 10th Joseon Tongsinsa invitation negotiation process, through a comparison of both historical documents of Joseon and Tsusima(Soke document). As a result, I could see that it is possible to interpret more accurately by illuminating what we did not know with just one document and by comparing them with each other in document interpretation.

6,700원

4

기행사행(1719)에서의 말을 둘러싼 분쟁 연구

이재훈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3집 2018.06 pp.61-89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 12차례 일본에 보내졌던 통신사 가운데, 9차 사행(1719)에 해당하는 기해사행은 문화적 교류가 활발한 사행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문화적 교류뿐만 아니라, 쓰시마와 통신사 측에서는 많은 사건도 발생하였다. 기존의 연구는 신유한이 예법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며 논쟁을 벌였던 일과, 교토 다이부쓰지(大仏寺)를 방문하는 것을 거절했던 일에 집중되어 있다. 본고는 이중 9월 11일과, 9월 23일에 말이 부족한 상황에 집중하였다. 9월 11일과 9월 23일은 동일하게 말이 부족하였으나, 두 날에 있어서, 통신사 측의 반응은 전혀 다르다. 9월 12일이 되자, 어제부터 출발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 출발하지 못 하겠다며 출발을 거부한다. 그리고 게인(京尹)에게 알리겠다고 말을 한다. 쓰시마의 설득 끝에 다시 출발을 결정하였지만, 정사는 도중에 가슴이 아파서 더 이상 이동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쓰시마의 설득도 아무 소용없이, 결국에는 정해진 일정을 변경하게 된다. 이 정사의 병에 대해 쓰시마는 꾀병으로 의심하고 있는 것 같다. 이에 비해 9월 23일은 9월 11일보다 말이 더 부족하였지만, 별다른 불만을 말하지 않고 예정대로 출발을 한다. 이것은 과연 말이 부족한 것에 대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11일부터 23일까지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원인이었을까? 9월 11일 이전에는 바닷길을 안내하던 쓰시마가 통신사보다 우위에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9월 11일 전에는 통신사 측의 주장이 일방적으로 좌절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9월 11일에만 유독 말이 부족한 것을 두고 과민하게 반응한 것은 통신사 측이 지금까지 갖고 있던 불만을 표출했던 알력 다툼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Among the Tongsina(通信使) who were sent to Japan 12 times in the Latter Period Chosun Dynasty, the 9th Tongsinsa(己亥使行, 1719) is known to have active cultural exchanges. However, not only cultural exchanges, but also many incidents occurred between Tushima-han(対馬藩) and Tongsinsa. Previous research has focused on the case in which Shin Yoo-han argued over the issue of etiquette and refused to visit Daebutsu Temple in Kyoto. The magazine focused on the fact that there were short of horses on September 11 and September 23. Both September 11 and September 23 were equally short of horses. But in the two days, the Tongsinsa are totally different. On the morning of September 12, they said, “There were short of horses yesterday, so there was someone who couldn't start, We won't start today.” and they refused to start. And they also said that they will tell Keiin(京尹). Tushima-han persuaded them and they finally decided to leave. However, on the way the General Manager Chungsa says, “I can't move anymore because of my chest pain.” Tushima-han tried hard to persuade. However, the schedule was finally changed. Tushima-han thought the disease of the General Manager Chungsa was a fake illness. On the contrary, September 23 was short of horses than September 11. However, the General manager Chungsa starts off without complaining so much. Is this because they have experienced short of horses before? There was no special incident in the record of Tushima-han and the Tongsina from September 11 to 23. If so, what caused it? Before September 11, Tushima-han, the guide to the sea route had far greater power than the Tongsina. Before September 11, Tongsina‘s claims were unilaterally frustrated. I think the sensitive response to the short of horses on September 11 should be seen as a power game expressing discontent over the sea route.

6,900원

일반논문

5

삼연 김창흡의 미발설과 호락논쟁에서 그 위상

이종우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3집 2018.06 pp.91-112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삼연 김창흡은 마음이 미발한 상태란 순선하다고 주장하면서 남당 한원진의 유선악설을 비판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원진은 김창흡의 순선설을 비판하면서 그것은 외암 이간과 같다고 평가하였다. 마음의 미발이 순선하기 때문에 성인과 중인의 미발도 역시 같다고 김창흡은 주장하였고, 그것은 이간과 공통점이다. 하지만 이간은 중의 상태에서 미발과 부중의 상태에서 미발을 구분한다. 전자는 성인과 중인이 같지만 후자는 중인의 미발로서 성인의 그것과 다르다고 한다. 그 점이 김창흡과 다르다. 당시 김창흡은 이간을 지지한 적도 없고, 이간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김창흡의 문하인 정암 이현익과 여호 박필주의 논쟁에서 이현익은 미발과 정을 구분하여 미발시 공부가 필요 없다고 주장한 반면에 박필주는 미발과 정은 같다며 미발시 공부로서 함양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창흡은 이현익을 비판하면서 박필주를 지지한다. 하지만 이현익의 설이 오히려 김창협에 가깝다. 당시 김창흡은 낙학의 종장으로서 역할을 하였고, 그 연원을 형 김창협에 두었다. 하지만 김창협의 미발설과 차이점이 있다. 김창흡은 스스로 낙학이라고 하면서 호학인 권상하의 설과 이현익이 비슷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낙학은 자신의 미발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미발설의 일부가 이간과 일치하지만 그를 낙학이라고 칭하지도 않았으며 그의 설을 언급하지도 않았다.
Samyeon Kim Changheub was arguing that the not-yet-aroused mind has pure good, criticizing for Han Wonjin's theory that it has good and evil. Namdang Han Wonjin criticizing for that of Kim Changheub, was seeing like Oiam Yi Gan's theory. Kim Changheub was arguing is the same mind of the sage and the people, because he not-yet-aroused mind has pure good. This has a common point with Yi Gan's theory. Yi Gan was dividing the yet aroused of moderate state and non moderate state. This has a difference with Kim Changheub. He had not supported Yi Gan at that time, nor had Yi Gan. They had a debate between Jeongam Yi Hyeonig and Yeoho Bag Pilju in Samyeon school. The not-yet-aroused mind and the quiet mind are same. Owing to this, human do not self-cultivate at Yi Hyeunig's argument. However, Bag Pilju reputing Yi Hyeonig, he was arguing: the not-yet-aroused mind and quiet mind are different. According to this, human must self-cultivate. Kim Changheub criticizing for Yi Hyeonig, he was supporting Bag Pilju. Futhermore, Yi Hyeonig's argument was close Kim Changhyeob's. at this time, Kim Changheub had played representative of Nak school and it based on Kim Changhyeob, Kim Changheub's elder brother. However, The theory of Kim Changheub was a bit different from Kim Changhyeob's. Kim Changheub calling Nak school himself, he was crticizing for Yi Hyenig's argument like Gwon Sangha's theory at Ho school. Therefore, the theory of Kim Changheub means Nak theory. The part theory of Kim Changheub is consistent with Yi Gan's, but he did not even call Yi Gan Nak school, nor even to mention it.

5,800원

6

자아성찰의 개념 규정과 번역ㆍ역번역 문제 - 국어학적 고찰과 동양적 어원을 바탕으로 -

장만식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3집 2018.06 pp.115-152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이 논문은 연구자의 논문, ‘자아성찰과 자기성찰 용어 사용 양상 및 제언’의 후속 논문이다. 연구자는 용어 ‘자아’와 ‘자기’, ‘성찰’, ‘자아성찰’ 등의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고, 번역, 역번역할 것인가의 문제를 고찰했다. 국어학적 고찰뿐만 아니라 동양적 어원과 심리학적 전통을 바탕으로 논의하였다. 먼저 우리말의 ‘자아’와 ‘자기’의 쓰임과 용법뿐만 아니라 프로이드와 융의 개념과 의미에 대해 검토하였다. 둘째, 동양적 어원과 심리학적 전통에서 ‘성찰’에 대한 개념을 중심으로 그 어원을 찾고 의미를 고찰하였다. 이 속에서 서양의 대표적인 철학자, 심리학자들의 개념을 비교하였다. 셋째, 이러한 논의를 통합적으로 고려하여 용어 ‘자아성찰’의 개념과 의미를 규정하였다. 넷째, ‘자아성찰’의 번역․역번역 문제를 고찰하였다. 그리하여 ‘Self-examination’, ‘Self-reflection’, ‘Self- introspection’, ‘Self-finding’ 등을 자아성찰로 번역하거나 아니면, ‘자아성찰’을 ‘Ego-examination’, ‘Ego-reflection’, ‘Ego-introspection’, ‘Ego-examination’, ‘Ego-finding’ 등으로 역번역할 것을 제안하였다.
This paper is a follow-up paper of 'The study of the Aspects of use of ‘ego- introspection' and ‘self-introspection' terms and Suggestion' paper. Researchers examined how to define the terms 'ego', 'self', 'introspection', and 'self-introspection' and their translation and reverse translation problems. In addition to the study of Korean language, It was discussed based on the oriental origin and the psychological tradition. First, we examined the concept and meaning of Freud and Jung as well as the usage and usage of 'ego' and 'self' in Korean. Second, In the oriental origin and psychological tradition, I have searched for the origin of the concept of 'introspection' and examined its meaning. In this context, Researchers compared the concepts of representative Western philosophers and psychologists. Third, the concept and meaning of the term 'ego-introspection' are defined by taking these discussions together. Fourth, I examined the Translation․Reverse Translation problems of 'ego-introspection'. So it suggested to translate ‘Self-examination’, ‘Self-reflection’, ‘Self-introspection’, ‘Self-finding’ into ‘自我省察’ and it suggested to reverse translate '自我省察' into ‘Ego-examination’, ‘Ego-reflection’, ‘Ego-introspection’, ‘Ego-examination’, ‘Ego- finding’

8,200원

7

18~20세기 초 영국의 세책(貰冊) 및 독서 문화 연구

이민희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3집 2018.06 pp.153-193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세계 세책(貰冊) 독서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사례를 빼놓을 수 없다. 상업적 서적 유통과 세책 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한 곳이 영국이었다. 본고에서 국내에서 처음으로 영국 세책업의 발달사와 세책 독서 풍경을 개관하고,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했다. 세책점(=유료 대출 도서관)은 공공 도서관(=무료 대출 도서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유료에서 무료 대출로 전환되기 전, 상업적 유통과 일반 독자를 위한 오락용 독서 문화 형성에 불을 지핀 장본인이 바로 세책 독서였다. 영국에서 세책업이 처음 나타난 곳은 18세기 초 국민교육 덕분에 식자율이 높고 출판문화가 발달했던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였다. 그러나 17세기 말~18세기 초 런던에서 인쇄업자 인허가법의 쇠퇴와 지적재산권 인정은 소설 발생과 출판을 자유롭게 만들었고 18세기 잉글랜드 세책 문화 융성을 견인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영국도 18세기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 세책업이 성행했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19세기 중반 신문․잡지에 대한 인지세 폐지 이후 장편 연재소설이 대거 나타나고 분책형 3부작 장편 소설이 세책점을 통해 퍼진 것이 특징적이다. 양국에서 여성 독자층의 증가와 국문 통속 소설의 독서가 세책점을 매개로 발달해 나간 과정이 공통적이다. 정치적 통제가 약화되고 상업과 오락이 발달함에 따라 대도시와 휴양지를 중심으로 세책 독서가 발달했다. 조선에서 여가를 즐기고 교양을 쌓기 위한 목적에서 사대부 여성 독자들이 즐겨 찾았던 국문 장편소설처럼, 영국은 여성 독자가 좋아하는 3부작 소설을 대여해 읽는 것이 유행했다. 책을 직접 사는 것보다 빌려 보는 것이 훨씬 저렴했고 다양한 책을 두루 읽을 수 있었다. 19세기 초 영국 전역에는 천여 개의 세책점이 있었다. 18세기의 미네르바(Mine rva) 세책점을 비롯해 19~20세기에 무디(Mudie) 세책점과 스미스(W.H. Smith) 세책점, 그리고 부츠(Boots) 세책점은 대형 세책점으로 지방에까지 체인점을 두고 운영되었다. 대개 일 년 단위로 회비를 내고 책을 빌려 보았다. 만약 책을 분실하거나 훼손시키거나 반납 예정일보다 늦을 경우, 벌금을 냈는데, 이것도 주 수입원이었다. 특히 이들 세책점은 도서 대여뿐 아니라 각종 물건을 판매하는 겸업 형태로 운영되었다. 세책업자가 출판업자이기도 해 출판과 세책을 겸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무디 세책점의 경우, 당대 윤리와 관심사에 부합한 3부작 소설책을 기획해 출판하고 빌려주기까지 했다. 이러한 세책점이 20세기 중반에 문을 닫았다. 주된 이유는 무료 대출이 가능한 공공도서관 이용이 일반화되고, 저렴한 책 구입이 용이해졌기 때문이다. 도서대여 독서와 여성 독자의 소설 독서 활동을 비판적으로 본 시각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도서대여용 소설은 당대 영국 여성의 현실과 여성의 환상 사이의 갈등을 잘 표현해 낸 작품이라는 인식 하에 많은 여성 독자의 사랑을 받으며, 소설 발달에 큰 기여를 했다. 세책점은 일반 대중 독자(여성, 노동자 포함)의 독서욕을 충족시켜 주었고, 일반 독자들이 소위 ‘제멋대로’ 독서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In order to understand book lending culture in the world properly, the case of England can not be overlooked. This paper aimed at introducing the history of commercial lending libraries and their effects on reading culture in Britain and tried to investigate their literary and social implication. The circulating library is a prototype of the public library. General readers except for a difference of whether book reading is free or not; for the circulating library usually payed annual subscription fee. Considerable amount of fine was charged for over-due, or lost and damaged books. The history of commercial libraries and consequent circulation of commercial books went back early before they fully developed and flourished during the eighteenth and nineteenth centuries. The circulating libraries stocked their shelves with a wide range of books, including nonfiction, fiction, and children's books. In Korea, as in the case of the Britain, it is confirmed that the book lending business flourished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In particular, the process of developing popular literature based on the increase of female readership and the reading of Korean novels through circulating library is common. The first book lending business in the Britain was Edinburgh in Scotland, where literacy and publishing culture developed thanks to public education in the early 18th century. Soon, however, commercial lending libraries spread to cities and provinces, including London, England. In the days of the Victorian dynasty, reading of book rental grew rapidly, centered on large cities and resort areas, due to the development of commerce and entertainment rather than political restrictions. Just like Korean novels, which women sought to enjoy for leisure purposes and cultivate in Korea, it was prevalent for Britain to borrow and read trilogy novels favored by female readers. It was cheaper to borrow than to buy books directly, and general readers were able to read various books. In the early 19th century there were over a thousand circulating libraries throughout the Britain, including the Minerva circulating library in the 19th century, the Mudie circulating library, the Smith circulating library, and the Boots circulating library in the 19th and 20th centuries. In particular, these circulating libraries have been operated as a form of multi-purpose sales of various items as well as rental of books. There are a few book rental host who are also book publishers. In the case of the Mudie's circulating library, owners selected and lent trilogy novels in line with current ethics and interests. These circulating libraries were closed in the mid 20th century. The main reason was that the use of public libraries, which can borrow free of charge, became more common and the purchase of affordable books became easier. There were also many criticisms of the popular reading and female readers' novel reading activities. However, in recognition of the fact that the novel for book lending expresses the conflict between the realities of British women and the fantasy of women, it has been loved by many women readers and contributed greatly to the development of novels. Each country had different censorship and control over book lending, but circulating library fulfilled reading desire of the general public (including women and workers) and made it possible for ordinary readers to do so-called "self-indulgent" reading.

8,700원

8

『삼국유사』 「연오랑세오녀」의 ‘도기야’

전수연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3집 2018.06 pp.195-226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일본서기』 응신천황 14년~16년 조에 궁월군이 대규모의 무리를 이끌고 신라에서 일본에 도착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5세기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들 신라계 이주민들은 하타씨[秦氏]라 불리며, 지금의 교토 서쪽 우즈마사 지역에서 세력가로 성장한다. 이렇게 일본에서 크게 성공한 신라계 이주민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떠나온 지역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삼국유사』에 실린 「연오랑세오녀」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형성된 설화가 아닐까 추정해 보았다. 5세기 포항지역에는 대규모 이주민을 이끌만한 세력집단이 존재했다. 진 왕조로부터 인수를 받을 정도의 예족의 세력가가 지배하는 일정수준의 정치적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 포항지역 세력이 집단이주를 감행했던 배경에는 5세기의 정치사회적 불안감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정복전쟁에 의하여 소국들이 독자적 정체성을 잃어가자 포항지역에서도 위기감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2세기 아달라왕의 시대는 박씨에서 석씨로 왕권이 넘어간 시대이고, 5세기 내물왕의 시대는 석씨에서 김씨로 왕권이 넘어간 시대이므로, 두 시대는 왕권을 장악한 성씨가 바뀌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일본이주의 시기로 설정된 ‘아달라왕 때’의 함의는 정치사회적인 불안이다. 이 불안감이 「연오랑세오녀」에서 일식이라는 하늘의 변고로 상징화되었다. 이주민을 이끌었던 궁월군은 ‘융통왕’이라 일컬어졌다. 포항지역은 ‘도기야’ 즉 ‘도기왕의 들’이라 불렸다. 사마천의 『사기』 「흉노열전」에 의하면, ‘도기왕’은 ‘현명한 지도자’라는 의미이다. ‘궁월군’과 ‘도기왕’의 의미는 상통한다. 포항지역의 가장 오래된 지명인 ‘근오기현’은 ‘도기야’와 같은 뜻의 말이다. ‘도기’를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이 ‘斤烏支’이고,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이 ‘都祈’이다. 흉노는 다른 북방유목민족과 달리 선우의 처를 ‘알씨閼氏’라 하였는데, 인접하였던 예맥족의 말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도기왕’도 예맥족의 언어일 개연성이 있다. 포항의 예족 일파는 고도의 비단직조술을 보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고조선과 부여지역의 출토유물이 비단직조기술을 실증해준다. 신라계 이주민인 ‘하타씨’는 고도의 비단직조기술을 바탕으로 우즈마사지역의 세력가로 성장하였다. 하타씨인 진하승의 위상은, 광륭사 본전에 진하승 부부의 목각상이 목조미륵반가상 바로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우즈마사 지역에는 누에신사가 있다. 예맥족을 근간으로 하는 고조선이나 부여의 생활근거지와 관련되는 곳에서 출토된 대리석의 누에모양 장식품이나 도잠용은 6~7천 년 전에 이미 누에를 숭배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누에숭배와 비단직조 기술이 포항지역 예족의 세력가인 도기왕에게 전승되고, 일본으로 집단이주함으로써 궁월군의 후손인 하타씨와 우즈마사씨에 이르러 비단직조술이 고도화되고, 누에신사도 세워져 누에숭배가 계승되었다고 여긴다. 「연오랑세오녀」에서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이주하자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는 것은, 도기왕의 일본이주가 신라사회에 타격을 주었음을 뜻한다. 연오랑 세오녀 부부가 일본에서 왕과 왕비가 되었다는 것은, 우즈마사지역에서 신으로 추앙받았던 진하승 부부의 모습이 투영된 것이다. 세오녀의 비단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자 재앙이 없어졌다는 설화의 내용은, 신라계 이주민의 비단직조 기술이 신라 본토보다 선진적이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세오녀 비단에는 이러한 일련의 역사가 집약되어 있다.
The aim of this thesis is to analyze and prove that a fork tale “Yeonorang Seseonyeo” included in a famous Korean history book “Samgugyusa” is based on a historical fact of the success story of the migrants from Korean Peninsula to Japan in 5th Century (the “Migrants”, or “Migration”). For that purpose, the issues that will be discussed in the thesis are as below. (i) Whether there was a powerful figure who had power to organize and lead the Migrants from Pohang area in Korea to Kyoto area in Japan and (in case there was such an powerful figure) the characteristics of the Migrants; (ii) The political and social situation of Pohang area which caused the Migration; (iii) The meaning of “Gungweolgun” which referred to the leader of the Migrants and the relation between “Gungweolgun” and name of places within Pohang area; (iv) Whether the Migrants had advanced level of silk weaving skills and if so what is the root of such silk weaving skills; and (v) Whether the Migrant enjoyed the authority similar to that of the king and queen in Japan. First, there was an influential figure within Pohang area who had power to organize and lead the Migrants. The excavation in Pohang area, of a copper seal, manufactured Qin Dynasty (265 A.D. ~ 316 A.D.) that was awarded to the leaders of the surrounding ethnics, indicates the existence of a powerful leader at Pohang area. Second, political and social instability and insecurity appears to be the main reason for the Migration. At that time, territorial expansion by the Kingdom of Shilla was causing small sized tribal countries to lose autonomy and such phenomenon must have caused fear and stress to Pohang area as well. The excavation in Pohang area, of a “wood coffin covered with pebbles mound” which holds typical characteristics of the ones at Kyungju area, indicates that Pohang area was indeed becoming a part of “Kingdom of Shilla”. Further the pheonmenon of the solar eclipse (which was seen as the rage of the God by then) as portrayed in the story of “Yeonorang Seseonyeo”, indicates the fear and stress of Pohang area. Third, “Gungweolgun” which referred to the leader of the Migrants is also known as “Yungtongwang”, meaning a leader with flexibility and expertise while the same was named “Dogiya” at Pohang area before the Migration. What is worth noting here would be that not only the word “Dogiya” was originated from one of the oldest villages at Pohang area, but could also be traced back to the language of the “Yemaek Tribe”, a tribe originally located in the North of Korean Peninsula, not the “Huns”, which indicates that Migrates are branch of “Yemaek Tribe”. Fourth, the surname of the Migrants in Japan was written in “Zin” in Chinese characters and locally pronounced as “Hata”. Although the origin of the aforementioned surname is still under the dispute amongst Japanese scholars, they all agree that such notion is related to “silk” or “silk weaving skills”. Based on relics discovered at Liaoning Province in China (the territory governed by Gojosun Dynasty), “Yemaek Tribe” appears to have held advanced level of silk weaving skills, which must have been succeeded to the descendants at Pohang area, and then eventually to Japan through the Migrants. From this prospective, the description in the story of “Yeonorang Seseonyeo” that the sun and moon lost its lights, should be interpreted as depicting the history that the advance silk weaving skills is lost in “Kingdom of Shilla” due to the Migration. Lastly, the Migrants became a powerful figure in Japan based on their advance silk weaving skills they held. “Ilbonsagi”, a famous Japanese history book, records a story of one of the descendants of the Migrants, “Zin Jugong”, who was awarded the surname of “Daezin” (locally pronounced as “Uzumasi”, which literally means the great Zin) for his contribution of large amount of tax. Also the leader of the Migrants or the descendants thereof are worshipped as the God at shrines, located at Kyoto area in Japan. From this perspective, the description in the story of “Yeonorang Seseonyeo” that husband and wife became the king and queen respectively, should be understood as indicating a great success for the Migrants.

7,300원

9

김택영과 중국 문인의 교유

곽미선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3집 2018.06 pp.227-265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김택영은 근대 중국 지식인 가운데 중국의 학술계, 문화계 名士들과 교유를 하면서 다양한 형식을 통하여 중한 양국의 문학에 대해 담론하였으며 천애지기의 우정을 쌓아갔다. 이 글에서는 김택영과 중국 문인의 문집에 수록된 기록을 살펴본 기초 상에서 김택영과 중국 문인의 교류양상을 전체적으로 조망해보았다. 김택영과 중국 문인 교류의 양상은 크게 보아 세가지 경향을 지니면서 전개되었다. 시문수창과 교유시를 통한 천애지기로서의 교류, 필담과 서신을 통한 양국 학계의 동향 의논, 서발문과 기문을 통한 문학적 소통이다. 김택영은 중국에서 22년간 망명생활을 하면서 중국의 지식인과 친분을 쌓았고 다양한 형식을 통하여 교유를 이어갔다. 김택영과 중국 지식인들은 유교문화에 기반한 문화적 동질성을 지니고 적극적으로 교유할 수 있었다. 본고에서는 중국문인의 입장에서 자국중심주의와 중화주의 시각으로 문화적 우월성, 주도성을 중국에 두고 한중 지식인의 교류를 바라본 것과 달리 김택영과 중국 지식인의 교류를 뒷받침할 수 있는 텍스트를 중심으로 상호인식을 집중적으로 탐구하였다. 김택영의 국제교류활동은 개인 차원의 활동에 머물지 않고 시대의 요구를 반영한 결과로서 문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김택영이 중국 지식인들의 도움으로 남통 한묵림인서국에서 편찬한 서적들은 통감부와 총독부의 검열이 없는 중국에 있었기에 자유롭게 해낼 수 있었으며, 김택영이 출판한 서적들은 민족 문화의 명맥을 유지할 소중한 불씨가 되어 조선 학계에 참신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김택영이 남긴 글과 중국 문인의 기록을 조명해 볼 때 이들의 교유는 매우 이채로우면서도 20세기 한중 문화교류사에서 특기할 만한 양상을 보여준다.
When Jin Zerong exiled in China, he met and made friends with a lot of Chinese cultural celebrities through various channels. The deep international friendship was established among them. This paper takes the materials recorded by Jin Zerong and Chinese literati as the research object, and discusses the ways of communication between literati of two countries. They were congenial. They associated with each other by poetry communications and friends poem, written discussion and letters, prefaces and postscripts. During Jin Zerong’s stay in Nantong, he found there were a lot of similarities between them in Confucian cultural factors, and they attracted each other. Jin Zerong’s work published in Nantong, not only played a positive role in preserving our country’s culture, but also provided the new information for Korea’s academic community. Jin Zerong’s contacts with Chinese Literati is a memorable chapter in the history of cultural exchanges between China and South Korea.

8,400원

부록

10

휘보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3집 2018.06 pp.267-282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4,900원

 
페이지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