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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상고전연구 [Yeol-sang Journal of Classical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열상고전연구회 [Society of Yol-Sang Academy]
  • ISSN
    1738-2734
  • 간기
    격월간
  • 수록기간
    1988~2018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810 DDC 810
제60집 (10건)
No
1

4,000원

기획논문 : 영안위 홍주원의 『무하당유고』 출판기념

3

『무하당유고(無何堂遺稿)』 이본의 비교 검토

장진엽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0집 2017.12 pp.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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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선조의 부마였던 무하당 홍주원의 문집인 『무하당유고(無何堂遺稿)』 이본의 체제 및 내용상의 특징을 비교, 검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무하당유고』는 현재 완질인 서울대 규장각 소장본(7책)과 연세대 소장본(6책), 그리고 결질인 국민대 소장본(2책)이 전하고 있다. 먼저 각 본의 형태 및 기본서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 본은 모두 필사본으로, 똑같이 1684년 송시열의 서문이 붙어 있다. 필사연도 및 필사자는 미상이며, 세 본의 선후관계도 알 수 없다. 국민대본은 필사 방식이나 작품 내용으로 볼 때 연세대본과 같은 계열의 이본이다. 한편 1824년 간행된 『풍산세고(豊山世稿)』에 수록된 무하당의 작품은 연세대본과 일치하는데, 이를 통해 연세대본 계열의 이본이 가장 후대까지 홍석주 집안에서 활용되던 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세 본의 체제상 특징을 검토하였다. 주목할 만한 것은 세 이본의 분책 방식이 각각 상이하다는 점이다. 이는 원고본에 권차 설정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으로, 『무하당유고』가 간행에 이르지 못하고 여러 대에 걸쳐 재편집이 시도되면서 이본을 생성해 왔음을 보여준다. 작품의 배열 순서는 세 본이 동일한데, 그 순서는 시체․문체별 분류를 기본으로 하고 각 항목 내에서는 창작 연대에 따라 배열하는 방식이다. 원고본이 이미 체계적으로 편집을 마친 상태였기에 후대의 사본들도 동일한 순서에 따라 작품을 수록한 것이다. 한편 규장각본과 연세대본은 모두 교열의 흔적이 있는데, 이는 선본의 제작이나 간행의 추진을 위한 후속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완질인 규장각본과 연세대본의 수록 작품은 대부분 일치하는데, 연세대본에는 규장각본에 없는 칠언율시 3수와 오언절구 1수, 제문 1편이, 그리고 규장각본에는 연대본에 없는 제후(題後) 1편과 서(書) 2편이 실려 있다. 마지막으로 세 본의 작품 수록 양상을 비교하였다. 기존의 고전번역원 해제에서는 연세대본을 규장각본보다 더 선본(善本)으로 보고 있으나, 작품 내용과 필사의 정확성 측면에서는 오히려 규장각본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연대본이 맞게 되어 있고 규장각본이 틀린 경우도 간혹 있으므로 원문 확정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또, 국민대본을 두 본과 대조해 보면 본래 연세대본 계열의 이본과 규장각본 계열 이본의 글자 출입이 있었던 곳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홍주원 작품의 원문 확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무하당유고』 이본 검토는 홍주원 문학 연구의 기초자료를 확인하고 원문을 확정하는 데 필수적인 작업이다. 나아가 이를 통해 조선후기 문집 전승의 한 양상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This study compares the content and structure of the various editions of Muhadang yugo (無何遺稿, Posthumous Works of Muhadang), written by Hong Chuwŏn, King Sŏnjo’s son-in-law. Complete editions of the text exist in the Kyujanggak Library of Seoul University (seven books) and Yonsei University (six books) while Kookmin University owns an incomplete edition (two books). Firstly, an examination of each edition’s form and bibliography is as follows. All three editions are transcribed copies with a foreword written by Song Siyŏl in 1684. It is unknown which of these editions was transcribed first as their transcribers and dates of transcription are unspecified. The Kookmin University edition seems to be affiliated with the Yonsei University edition from the method of transcription and content. Hong Chuwŏn’s writings in P’ungsan sego (豊山世稿, Generational Works of the P’ungsan Hong Clan) also match the content in the Yonsei University edition, demonstrating that the editions affiliated with this version were used by the latest generation of Hong Sŏkju’s household. Secondly, observing the structure of each edition shows each one has a different system of dividing the works into books since the original manuscript was not divided into volumes. As Muhadang yugo was never published, attempts to edit the works across generations produced different editions. All three also contain the same sequence of works, dividing them into categories based on poetic or discursive forms and chronologically arranging each work based on its year of creation under each category. Transcribed editions in later generations anthologized the works in the same sequence of the original manuscript as it had already been systematically edited. Traces of editing in the Kyujanggak and Yonsei University editions also show efforts later continued in preparing it for publication or producing a better edition. Despite most of the content matching in the Kyujanggak and Yonsei University * Yonsei Univ. 무하당유고(無何遺稿) 이본의 비교 검토 47 editions, the latter contains an additional three pieces of seven-character regulated verse, one piece of five-character truncated verse, and an elegy, while the former contains two letters and an afterword. Finally, the conditions of the three editions’ works were compared. Although a summary by the Institute for the Translation of Korean Classics views the Yonsei University edition as superior to the Kyujanggak edition, the latter can be said to be superior in the content of the works and accuracy of transcription. However, a detailed investigation is required for determining the original texts since the Yonsei University edition is correct in some places where the Kyujanggak edition is wrong. Moreover, by comparing the Kukmin University edition with the other two, we can identify inherent differences in content between the version affiliated with the Kyujanggak edition and the versions of the Yonsei university edition. This comparative work is needed to determine the original texts of Hong Chuwŏn’s works. Comparing the editions of Muhadang yugo is necessary for verifying sources on literary research on Hong Chuwŏn and determining the original texts of his works. Furthermore, this work is meaningful in showing how late Chosŏn anthologies were passed down through generations.

8,100원

4

無何堂 洪柱元의 중국 사행시 전개 양상

구지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0집 2017.12 pp.4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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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원(洪柱元, 1606-1672)은 당대 명문가인 풍산 홍씨 출신으로, 17세 때 정명공주(貞明公主)와 결혼하여 영안위(永安尉)에 봉해졌다. 비록 벼슬을 할 수 없는 부마의 위치에 있었으나, 정치적, 사회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네 차례 중국으로의 사행에 정사(正使)로 다녀왔던 일이다. 규장각 본 7권에는 연행에 다녀오면서 지은 시를 모아놓은 「연행록(燕行錄)」이 실려 있다. 『무하당유고』의 여타 시와 비교하여 개인적인 감정과 역사적인 인식을 드러내기 때문에 홍주원의 내면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그의 『연행록』은 지배층의 의식구조 흐름을 살피기에 적합한 텍스트라 할 수 있다. 그의 사행시를 살펴보면, 횟수를 거듭할수록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양상이 보인다. 1647년 첫 사행에 임했던 시기 왕명을 완수해야 하는 사신으로서의 책임감과 함께 청나라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명나라에 대한 회고가 여과 없이 드러났다. 그리고 1653년 세 번째 사행 때의 시는 직접적인 분노와 비판이 약화되고 먼 길을 떠나온 나그네로서의 회포가 좀 더 강해지는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1661년 마지막 사행에서는 외조부 이정귀(李廷龜)의 시법이 차용되어 시적 함축성이 높아짐과 동시에, 차운시를 통해 중국의 경물을 새로이 발견하고, 이전의 “哀怨”이 승화되어 경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특성을 볼 수 있었다. 사행은 새로운 경물을 통해 시적 영감을 일으키는 경험이기도 하였지만 선인의 시를 따라 문학적인 성취를 이루는 길이기도 하였다. 홍주원의 연행시는 초기에 이루어진 연행시인 만큼 사행시에 대한 문학적 검토의 필요성을 제기해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Hong Chuwŏn, a member of the famous Pungsan Hong clan, married Princess Chŏngmyŏng at seventeen and was invested as Yŏnganwi. Despite hold his apolitical position as the king’s son-in-law, he exercised significant political and social influence. His appointment as chief envoy on four missions to China demonstrates this, and the poems written on these journeys are compiled in volume seven of the Kyujanggak version of Record of Missions to Beijing (Yŏnhaengnok, 燕行錄). The poems here more strongly display his personal emotions and historical awareness and thus better display his interiority than those in Posthumous Writings of Hong Chuwŏn (Muhatang yugo, 無何堂遺稿). His Record of Journeys to Beijing is a fitting text for examining the change in the ruling class’s mindset at the time. His four-line poems show gradual changes over the course of repeated missions. His sense of responsibility in fulfilling the royal command on his first mission in 1647, as well as his negative view of Qing and reminiscence of the Ming, are prominent in his first set of poems. However, his explicit rage and criticism weaken while his feelings as a traveler on a long journey gradually intensify in the poems on his third mission in 1653. In the final set of poems written in 1661, he borrows the prosody of his maternal grandfather Yi Chŏnggwi, increasing the poetic implications of his poetry. At the same time, he writes rhyme-matching poems when he newly discovers the landscape of China, sublimating his past “grief and rage” and indirectly displaying it through these landscapes. Although there are experiences where new landscapes give rise to poetic inspiration in four-line verse, they were also a path to literary accomplishment by following the poetry of their predecessors. Thus, Hong’s linked verse also demonstrate a need for a literary examination of his early four-line verse.

6,300원

[일반논문]

5

藥泉 南九萬의 上疏文에 나타난 선비의식 연구

申斗煥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0집 2017.12 pp.7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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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藥泉 南九萬(1629~1711)의 상소문에 나타난 선비의식에 대한 연구이다. 그는 28세부터 관료로 출사하여 83세 별세할 때 까지 55년 동안 관각에 있으면서, 정치적 경륜가로서 이름을 떨친 조선 중기 관료이자 문인이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밖으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외세의 침략을 당하고 난 직후였고, 안으로는 당파싸움이 치열하게 전개 되었던 대 혼란기였다. 그는 효종, 현종, 숙종의 세 임금을 섬기면서 관각에서 다양한 문체를 다루었던 大文豪로 이름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정치의 일선에서 260여 편이나 되는 상소문을 남긴 상소문의 대가였다. 그의 상소문은 관각문학의 정수로서 한국의 문학사 속에서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다. 상소문은 문장에 대한 구성논리와 설득을 위한 비유, 당대 사회에 대한 현실인식 등 문예적인 내용들이 들어있다. 상소문은 오랜 역사를 두고 계승 발전되어온 장르로 장중하고, 사실적이며 전아한 문체를 구사해야 한다는 문예미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고전산문 중에 정치문학의 성격으로 최고의 현실인식과 치밀한 ‘관료 문학’의 정수를 볼 수 있는 글이 상소문이다. 그의 상소문은 제가들로부터 공정하고 객관적인 우국애민의 문장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그의 사람됨과 관료적인 태도는 후세의 사람들이 추앙하고 사모하는 전범이 되었다. 남구만의 상소문에는 막힌 언로를 열고, 임금을 바르게 보좌하며. 끊어진 학문을 이어 유풍을 진작하고,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국토를 보호하려는 특별한 국체의식으로 태평성세를 열어가는 강직한 실천정신인 선비의식이 함의되어 있었다. 약천 남구만은 한 시대를 경륜한 위대한 관료이자, 한 시대 관각의 문장을 호령한 대문호로서 한국한문학의 범주에서 우뚝한 존재이며,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관각문학의 한 줄기를 점유하고 있는 위대한 문학가이기도 하다. 약천 남구만의 상소문과 문학적 위상이 올바로 조명되고, 그의 상소문 안에 함의된 선비의식이 올바로 평가되기를 기원한다.
This paper is a study on scholar Spirit of Yakchon, Nam Guman's ‘the sentence of presenting a memorials to the king(上疏文)’. literary style of ‘the sentence of presenting a memorials to the king’ include in the aesthetic. ‘the sentence of presenting a memorials to the king’ is the flower of the prose and this have literary art gesamtkunstwerk. this is a kind of bureaucratic literature and for king persuasion and impression is literary key-ward. The ‘the sentence of presenting a memorials to the king’ are based on historical facts, but the construction of these eulogies is very close and the plot is unified. The realistic and vivid description makes them outstanding the sentence of presenting a memorials to the king literary works. Memorial to the Throne is a representative literary style and genre of court literature. As it is a kind of formal record presenting writer's thoughts and his perception to realities, it has its own aesthetics and logic to fully express his thoughts to persuade king. It is no wonder to write his memorial in his highest literary capabilities and knowledge. Yakchon, Nam Guman's penname(1629~1711), was a great statesman and outstanding man of letters, who, as an official in central government, also was a leader of literature in mid-Chosun dynasty. Especially he was famous for his memorials to the Throne. Statesmans have to make a lot of important decisions for our society. This paper is a study on the memorials to throne of Yakchon. His memorials to Throne were highly estimated as a model memorial by his disciples and many men of letters in later years. I focused on the formalistic beauties and his logic to realities of Yakchon.

8,100원

6

한민족정보마당DB를 활용한 현대 누정기 연구

박순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0집 2017.12 pp.113-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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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한민족정보마당 사이트에 수록되어 있는 전통옛집DB를 활용하여 1950년 이후에 집필된 현대 누정기에 대해 살펴보았다. 누정기 자료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 논문이 축적되어 있지만, 현대에 집필된 누정기에 대해 연구된 바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말기 과거제가 폐지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문학의 시대는 끝났다고 할 수 있으므로 한문학의 연구 하한선도 일제강점기를 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도 한문학 양식을 갖춘 글은 소수에 불과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쓰여지고 있으며 이 또한 한문학의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더욱이 공적인 성격을 가지면서 모두에게 공개되는 글이라면 전통문화의 공동체적 계승이라는 관점에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렇듯 현대에 쓰여진 누정기에 주목한다고 했을 때 옛집DB는 대단히 값진 창구가 되어준다. 이에 본고에서는 전통옛집DB에 수록되어 있는 누정기 중 현대에 집필된 누정기만을 선별하였는데, 방편적으로 1950년 이후를 그 기점으로 하였으며, 선별된 목록을 제시하고 실제 내용을 표기 언어별로 분류하여 살펴보았다. 전통옛집DB는 전국에 소재한 옛집 가운데 주거(住居)․사묘(祠廟)․재실(齋室) 건축만을 대상으로 하였는데, 각각에 대해 1950년 이후 집필된 누정기 목록을 작성해보면 주거 32건, 사묘 53건, 재실 63건 등 총 148편을 선별할 수 있었다. 전근대 시기의 누정기는 표기 언어가 한문으로만 되어 있지만, 현대 누정기는 표기 언어가 3가지이다. 즉, 한문, 한문 현토, 한글로 한문 표기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한글이며, 한문 현토는 가장 적게 쓰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한문-한문 현토-한글 표기의 순으로 각 누정기들의 내용을 개관하였다. 현대 누정기에서는 문화재로 선정되었음을 부각하고, 선정되기까지 문중에서 얼마나 노력하였는지 강조한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는데 전근대시기의 누정기라면 볼 수 없는 면모이다. 또한 현대 누정기는 표기 언어 방식과 관계없이 전통적인 누정기의 장르적 관습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적 방식의 글쓰기를 통해 근대기 이후에 있었던 일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현대 누정기의 고유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해당 집에 대한 근대기 이후의 역사적 정보를 남겨두어서 후세에 전해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본고의 전체 논의를 바탕으로 현대 누정기의 자료적 가치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대 누정기는 과거의 한문학 전통이 현재에도 계승되고 있는 실물 자산이다. 둘째, 건물의 역사에 대한 근대기 이후의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셋째, 한문․한문 현토․한글이라는 표기 방식의 다양함은 현대 누정기만의 특성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이 현대 누정기는 그 존재 이유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으며, 한문학 연구자뿐만이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누정기라는 한문학 전통이 과거의 유물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에도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값진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본고는 그러한 의미를 환기시키고자 작성되었다.
In this paper, we examined the modern writings about traditional houses written after 1950 by using the Traditional Houses DB in the Hanstyle database homepage. Although many research papers have been accumulated for the writings about traditional houses, it seems that no research has been done on modern period. Since the national examination of Joseon has abolished at the close of the Joseon dynasty, the era of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has ended, so it is common for the lower limit of research not to go beyond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But even after the 1945 liberation, even with only a handful of classical Chinese-style forms, it is still being written, and I think that this can also be the object of research of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Moreover, it is necessary to pay attention in terms of community succession of traditional culture if it is a public character and it is open to everyone. When we pay attention to the modern period writings in this way, the Traditional Houses DB becomes a very valuable window. In this DB, I selected the modern writings about traditional houses. As a convenience starting from 1950 onwards, I presented selected lists and classified the actual content by notation language and searched it. The traditional houses DB is only for the residence, the shrine, and the memorial house. If we made a list of each of them written after 1950, the residence was 32 cases, the shrine was 53 cases, and the memorial house was 63 cases. The writings of the pre-modern period are written in classical Chinese only, but the modern languages ​​have three notation languages. In other words, classical Chinese, classical Chinese-Korean, and Korean. In this paper, the contents of each language are outlined in the order of classical Chinese, classical Chinese-Korean, and Korean. In the modern writings about traditional houses, it is emphasized that it has been selected as a cultural asset, and it is often seen that it has been emphasized how much effort was made until it was selected. It is an aspect that can not be seen in the pre-modern period. In addition, the modern writings about traditional houses inherit the genre conventions of traditional ones, regardless of the written language. By the way, it is possible to find the meaning of the modern writings in that it records the work of the present period. The historical information on the house at the modern period was left to be transmitted to the posterity. Based on the whole discussion of this paper, we can summarize the data values ​​of the modern writings about traditional houses as follows. First, it is a real asset whose past classical Chinese literary tradition is still inherited. Second, it contains detailed information about the history of the building. Third, it is interesting that the diversity of notation system such as classical Chinese, classical Chinese- Korean, and Korean. In this way, the reason for its existence is enough, and I hope that not only classical Chinese literary researchers but also more people will be interested. I believe it is very valuable that the tradition of writings about traditional houses is not only a relic of the past, but also to be handed down today. This paper is written to remind you of such meaning.

8,200원

7

18세기 경상지역의 『보권염불문』 간행과 수록 가사 향유의 문화적 의미

최형우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0집 2017.12 pp.151-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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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조선 후기 경상지역에서 간행된 『보권염불문』을 대상으로 이 원전이 간행된 용문사, 수도사, 동화사, 해인사를 주목하고, 이 원전에 수록된 <서왕가>, <인과문>, <회심가> 향유의 문화적 의미를 도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조선후기 불교는 전란으로 무너진 사찰을 재건하고, 지역사회에서 勢를 확장하기 위해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포교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사찰을 재건하고, 각종 의례나 불사를 행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경제력이 필요하였고, 이러한 경제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지역 사회를 대상으로 한 포교 활동이 필수적이었다. 이들 네 사찰이 위치한 경상지역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영향이 강하였던 곳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역의 분위기 속에서 사찰의 세를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관심이나 기호에 부합하는 활동이 필수적이었으며, 이러한 가운데 가사작품이 수록된 『보권염불문』이 유통된 것이다. 또한 조선후기 중요하게 대두되었던 법맥의식은 지역 사찰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필수적인 부분이었으며, 각 사찰의 편양계를 중심으로 한 법맥의식이 이 원전의 유통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 가운데 불교가사의 수록과 유통은 불교가 지역사회에서 대중들과 소통하기 위한 방편적 차원에서 주로 이루어졌으며, 아울러 지역 사찰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특히 이 원전에 수록된 가사작품들은 경상지역을 중심으로 유행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지역 중심의 유통은 성리학적 영향력이 강하였던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가사 세 작품의 지역적 유행은 당시 불교가 대중들과 소통하고, 이후 지역 사회의 가사 문학 향유를 더욱 다채롭게 하였다는 점에서 그 문화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This study focused on Gasa works including 『Bogwunnyumbulmun(普勸念佛門)』. 『Bogwunnyumbulmun(普勸念佛門)』 trended in Kyeongsang Area, and published verious versions. Four temples(Youngmun-temple, Sudo-temple, Dongwha-temple, Haein-temple) where published a 『Bogwunnyumbulmun(普勸念佛門)』 different version, desired to being active in propagating in the local community. Buddist 3 Gasa, there are , , , were distributed in the process. So, these Gasa works were used of social interaction and communication about Buddism in different way. Publication of 『Bogwunnyumbulmun(普勸念佛門)』 and trend of Gasa works were a sign of comunication of temple and local community at 18th century.

8,200원

8

소파 오효원의 자기 탐색적 시세계

황수연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0집 2017.12 pp.189-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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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사에서 마지막 세대를 장식한 여성 작가로 평가 받는 소파 오효원은 그동안 꾸준한 관심을 받으며 연구되어 왔다. 하지만 여학교 설립과 국내외 유명 인사들과의 교유와 관련한 시세계가 집중 조명되었으며 소파의 내면세계와 의식의 성장을 다룬 시세계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주목받지 못했다. 소파 오효원은 전통과 근대, 유교와 개화, 신여성과 구여성의 경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누구보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 과정을 자신의 시세계에 담아내었다. 소파 오효원의 자기 탐색적 시를 통해 근대 전환기 지식인이자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살펴 볼 수 있다. 소파는 학문과 교육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모색하였다. 여성 보다는 시인으로 인정받고 싶어 했으며 연령과 성별, 국적을 불문하고 시로 교유하며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을 확고히 하였다. 외유를 통해 사마천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꿈꿨던 오효원은 여성 혁명가와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의식이 확장되었다. 오효원은 기독교에 입문했지만 선험적 지식이었던 유교를 바탕으로 기독교를 수용했고, 공자의 묘에 배알하며 효와 충 담론을 중시하는 전근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문명과 개화를 원했지만 상층 문화에 대한 자부심 또한 지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점은 오효원의 한계가 아니라 구학문과 신학문, 전/근대, 수구와 개화, 전통과 문명 등의 경계에 선 여성 지식인의 경험으로 인정받고 올바르게 평가받아야 한다.
Sopa Oh hyo won, who is regarded as a female writer who decorated the last generation in Chinese literature, has been studied with steady interest. However, the poetic world related to the establishment of girls' school and the exchange with famous people from home and abroad has been highlighted. Sopa seriously thought about how to live in the boundaries of tradition, modernity, Confucianism, flowering, new and old women, and put the process into his own world. Through the self-examination poetry of the Sopa Oh hyo won, we can see the aspect as a modern intellectual and a poet. Sopa sought identity through learning and education. She wanted to be recognized as a poet rather than a woman. She was active in the poetry party, regardless of age, gender, nationality, and tried to establish her identity as a poet. Oh hyo won, expanded his consciousness through direct and indirect encounters with female revolutionaries and encounters with various people. Oh hyo won embraced Christianity based on Confucianism, which was a priori knowledge, though it entered Christianity. It also shows pre-modernity that emphasizes reverence discourse in the grave of Confucius. She wanted civilization and flowering, but she wanted to keep her pride in upper culture. This is not the limit of Oh hyo won, but it should be recognized and appreciated as an experience of female intellectuals in the transition period to modern era.

7,500원

9

『靑丘永言』 박순호본,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김천택 편 『청구영언』의 선행본일 가능성에 대하여

강혜정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0집 2017.12 pp.223-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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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2012년 최현재에 의해 처음 학계에 소개된 『靑丘永言』 박순호본(『청박』)과 기존에 『청진』으로 불리던 김천택 편 『靑丘永言』(『청김』)을 비교하여 『청박』이 『청김』의 선행본일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최현재는 『청박』을 소개하면서 『청박』이 『청김』의 초고본일 가능성과, 『청김』의 후대본일 가능성을 모두 제시하였다. 하지만 『청박』과 『청김』이 동일한 편자에 의한 가집이라는 사실을 토대로 둘을 비교해 본 결과, 『청박』은 『청김』의 선행본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첫째, 김천택이 남긴 여항인 발문이 『청김』에는 있지만, 『청박』에는 없으며, 여항인의 작품 수 또한 『청박』이 『청김』보다 적다는 점에서 볼 때 『청박』이 선행본일 가능성이 높다. 김천택은 『청김』 ‘여항육인’에 주의식과 김성기 작품의 全譜를 수록하고, 그 뒤에 발문을 통해 김천택이 전보를 수집하지 못해 가졌던 한스러움과 全譜 수집 과정, 그리고 전보 수집 후의 감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반면 『청박』에는 이러한 발문이 없고, 이 작가들의 작품도 일부만 수록하고 있다. 편자가 자신이 작성한 기록을 삭제하며 재편집한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는 점과, 김천택이 全譜 수집에 대한 강한 열망과 의지를 가졌던 점을 고려한다면, 발문도 없이 작품의 일부만을 수록하고 있는 『청박』은 全譜를 모으기 이전에 편찬된, 『청김』의 선행본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둘째, 무명씨 항목의 경우, 『청김』과 『청박』 모두 주제별 분류를 취하고 있는데, 『청김』은 주제어를 제시하고 세밀하게 분류한 반면, 『청박』은 주제어를 명시하지 않았고 『청김』보다 더 큰 범주의 주제로 분류하되 때로는 연상작용에 의해 배치하기도 하는 등 『청김』보다 덜 체계적이었다. 『청박』을 후대본으로 본다면, 『청박』은 『청김』이 작은 범주의 주제어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배치한 작품들을 굳이 뒤섞어 큰 범주의 주제로 재배치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이는 매우 부자연스럽다. 셋째, 열성어제의 위치 또한 『청박』이 선행본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청김』의 열성어제는 이삭대엽의 중반부에 놓여 있고, 다수의 18세기 가집들이 열성어제를 이삭대엽의 맨 앞에 두는 것을 고려하면, 열성어제는 이삭대엽 중반부에서 이삭대엽 서두로 이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청박』의 열성어제는 가집의 맨 뒤, 삼삭대엽 다음에 놓여 있다. 따라서 일반적인 열성어제의 배치 경향으로 볼 때, 『청박』이 『청김』보다 후대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넷째, 『청김』은 김천택의 작품을 30수나 수록하고 있는데 비해, 『청박』에는 김천택의 작품은 단 한 수도 없다. 편자가 재편집 과정에서 자신의 작품을 모두 삭제했다고 보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따라서 『청박』은 아직 자신의 작품을 수록하지 않은 시기에 편찬된 가집으로 『청김』의 선행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다섯째, 작가에 관한 정보를 담은 小註와 작품 표기 양상을 비교해 보아도 『청박』이 선행본일 가능성이 높았다. 마지막으로, 『청박』에만 존재하는 악곡의 풍도 형용 역시 『청박』이 이른 시기에 편찬된 가집임을 보여주고 있다.
This paper aims to advance the possibility that the Cheongguyoungan which was once owned by Park Soonho(Cheong Park) was compiled before the Cheonggu youngan which is now owned by and housed in the National Hangeul Museum(Cheong Kim). There are many Shijo anthologies entitled Cheonggu youngan. Cheong Kim is a representative example, having been compiled by Kim Cheontak in 1728. There is a record of Kim’s compilation in Cheong Park but there is no record of exactly when it was compiled. As a result, Cheong Kim is known as the first Shijo anthology. However considering that both Cheongguuoungan were compiled by the same person, it was likely that Cheong Park was published earlier than Cheong Kim. This is because, first of all, Cheong Park contains fewer works produced by middle class authors than Cheong Kim, and unlike Cheong Kim there are no Chinese postscripts about the works which demonstrates Kim’s aspiration to assemble as compendious as possible a collection of works of such writers, and the way in which he collected them. Because Kim belonged to this middle class, he made a special effort to collect works of this class. Considering his goals as a collector, it can be assessed that Cheong Park, which contains only a small selection of middle class works without postscripts, was compiled earlier. Second, both anthologies classified the works whose writers could not be identified by theme. All the texts in Cheong Kim were identified the subject of the works and classified accordingly. Although Cheong Park also arranged the works by subject, it did not do so as systematically as Cheong Kim and it did not identify the subjects. Third, in Cheong Park, the works of the kings are placed at the end. Given that in the 18th century, the works of kings tended to be placed in the beginning of the anthologies, it is likely that Cheong Park was compiled very early. Fourth, Cheong Park has none of Kim’s works, but Cheong Kim contains 30. In addition to these indications, it is more plausible to place the publication of Cheong Park before that of Cheong Kim in the light of the information each provides about the relevant writers, their respective notations on the works they include, and their respective explanations of the melodies they con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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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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