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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상고전연구 [Yeol-sang Journal of Classical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열상고전연구회 [Society of Yol-Sang Academy]
  • ISSN
    1738-2734
  • 간기
    격월간
  • 수록기간
    1988~2019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810 DDC 810
제54집 (19건)
No
1

『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 기사 ‘五陵’ 신화의 ‘地上的’ 의미

신연우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4집 2016.12 pp.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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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전하는 바, 승천했던 박혁거세의 시신이 분할되어 땅으로 떨어졌고 모아서 합장하려 하자 큰뱀이 이를 막았기에 따로따로 무덤을 만들었다는 박혁거세 신화의 결말은 우리 건국신화로서는 예외적이고 특이해서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 자체만으로 납득이 되지 않기에 이집트 신화에서 몸이 열 네 조각으로 갈라져 땅에 묻힌 오시리스나 파푸아뉴기니의 서세람 섬에 전해오는 곡물기원신화의 하이누웰레와 연관지어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왔다. 고구려의 주몽신화와 비교해보면 혁거세 신화에서 굳이 혁거세가 하늘로 가버리지 않고 그의 시신이 나뉘어 묻힌다는 것은 지상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몸이 다섯으로 나뉘었다는 것은 하나가 다섯으로 분화되었다는 말이다. 주몽이 그대로 하늘로 가버린 것은 지상의 몸조차 버리고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육신도 한계가 명확한 것이어서 신이 되어서는 한계를 갖지 않는 존재라는 점을 하늘로 올라갔다고 나타냈다. 즉 주몽 신화는 지상으로 내려오면서 몸을 가졌던 주몽이 죽어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면서 초월적 존재 추상적 존재로 통합되는 측면이 부각된다. 이에 반해 혁거세의 시신은 분화된다. 이를 통합과 분화라는 대조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죽은 주몽은 초월적 존재로 우주와 통합되고 죽은 혁거세는 통합이 아니라 분화되어 지상에 남았다. 혁거세 신화가 지상의 원리를 나타낸다는 점을 다시 잘 보여주는 것이 뱀 화소이다. 혁거세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막는 원리이고, 통합을 막는 일이다. 오릉에 묻힌 임금들은 신화적 통치가 아니라 지상 세계 인간을 향하는 현실적 통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고구려 초기 임금들이 여전히 신화적 능력을 보여주는 것과 대조된다. 이러한 차이는 시조 임금의 죽음의 형식의 차이와 같다. 주몽의 승천이 보여주는 천상적 원리가 유리왕과 대무신왕으로 이어졌고, 혁거세의 오릉이 보여주는 지상적 원리가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의 지상적 원리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신화 마지막의 큰뱀(大蛇)는 알영을 낳았던 계룡의 다른 이름이다. 오릉은 알영 쪽 즉 수신이나 지신 쪽에 더 친밀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알영의 근거지로서 하늘보다는 땅의 질서가 강조되는 지역이다. 여기에 외지에서 수용된 혁거세 집단의 신화가 결합되었다고 생각된다. 대조적인 두 세력이 화합을 이루어 초기 신라를 형성하였으나, 뒤로 가면서 하늘 원리에 입각한 혁거세 세력은 자기 입지를 강화하지 못하고 4세기 마립간 시기에 이르면 알영 세력의 땅의 원리에 융화되어 버리게 된 역사적 과정을 신화적으로 나타낸 것이 혁거세의 오릉 신화라고 이해할 수 있다. 지상적 의미가 강조되는 혁거세 오릉 신화는 큰뱀을 계룡과 연관지어 보면 알영집단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알영 집단의 영향력이 그렇게 클 수 있었던 것은 용이 보여주는 풍요의 상징 때문일 수 있다. 따라서 이왕의 논의에서 제기되었던 바, 풍요제의의 관점에서 용의 역할과 함께 혁거세의 몸의 산락되어 분장되는 것을 풍요 신화로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Samguk Yusa(The Tales of Three Kingdoms) tells us the story of the tomb of HyukKeoSe, the founder of Silla Dynasty; he died and ascended to heaven but the royal remains were divided into five parts and descended to earth. A large snake appeared and prevented the people from burying them in the same tomb and that is why we have 5 Tombs in Gyeongju. The story is too unusual to understand. So comparing the myth of Egyptian Osiris whose body was cut into 14 parts by his brother Set, some scholars insist that it is a similar myth implying fecundity through death and rebirth. In fact, Five Tombs are not the royal tombs of HyukKeoSe. I compared it to Jumong’s ascending to heaven in Koguryo birth-myth and came up with an idea that separatedly buried five parts of HyukKeoSe’s body are meant to emphasize the land-based governing principle of Silla. The large snake represents the counteraction on the ideology of a nation trying to unify all countries. While the early kings of Koguryo showed us their mythical power, the kings buried in the Five Tombs were actually not mythic heroes. They showed the pity for the poor and tried to find the sages, wanted common assent of all the members of the tribe headmen at the meetings. There are also Aryoung’s tomb, also popularly known as Snake Tomb, in Five Tombs. Aryoung, HyukKeoSe’s wife, was born from under left side ribs of a chicken featured dragon, which seemed to be a similar character to the large snake appearing at the end of HyukKeoSe Myth. Historians say that Five Tombs were constructed in the fourth century, not at the time of the death of HyukKeoSe. So we can understand as follows; there was Aryoung’s tribe at the site of O-Reung at first, whose totem was a snake, but the tribe of HyukKeoSe from the North came and tried to unify the Saro Province as a whole, Around the fourth century, the tribe of Aryoung took the leadership on the basis of the regional characteristics of Silla, the Southern part of the Peninsular. The myth of falling parted-body of HyukKeoSe seems to a symbolization of the political situation of early Silla.

6,400원

2

전란에 뒤흔들린 민간인의 일상 - 민간인의 무신란(戊申亂) 체험 실기 연구 -

박상석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4집 2016.12 pp.3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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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민간인이 영조 4년(1728)에 일어난 무신란(戊申亂, 李麟佐의 난)을 겪고 쓴 실기 두 편을 검토하여 과거 전란이 민간의 생활인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피해를 입혔는지 자세히 살폈다. 그 기록은 김경천(金敬天)이 쓴 『손와만록(巽窩謾錄)』 중의 「무신난리(戊申亂離)」, 김원조(金遠祚)가 쓴 『무란록(戊亂錄)』 중의 「무란록(戊亂錄)」이다. 향리 출신인 김경천은 이십일 세 이후로 줄곧 과거에 응시하다가 오십이 세가 되어서야 소과에 입격하여 진사가 되고, 오십사 세가 된 무신년에 생애 처음으로 대망의 문과 회시를 치르기 위해 경상도 의성의 집을 나서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충청도 음성에서 난리를 만나게 된 것이다. 당연히 즉시 발길을 돌려 집이 있는 남쪽으로 피란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김경천은 행여나 과거가 예정대로 시행되지 않을까 하는 집념과 기대로 위험천만한 북행을 계속했다. 그리하여 남한산성 아래까지 이르렀으나 거기서 앞길이 끊겨 끝내 서울행이 좌절되고 말았다. 김경천에게 무신란은 오십 평생을 바쳐 얻어 낸 대과 응시의 기회를 박탈한 통한의 사건이었다. 김원조는 당시 삼십사 세였으며, 충청도 공주의 자기 집에서 지내던 중에 난리를 당했다. 난리가 성해져 피란을 떠나야만 할 상황이 되었을 때 그의 마음을 가장 괴롭힌 것은 신주의 안전을 위해 그것을 매안(埋安)해야 하는 일이었다. 조상께 신주가 땅에 묻히는 욕을 봬 드리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도 송구스러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행여 난리가 가라앉기를 바라면서 매안을 미루었고, 심지어 절차를 갖춰 신주를 매안하고 도로 꺼내기까지 했다가, 결국 피란에 앞서 매안을 단행했다. 그런가 하면 난리가 진정될 기미가 보이자 바로 환안(還安)을 하려다가 주위의 만류로 단념했고,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피란처로부터 환가(還家)하기에 앞서 기어이 서둘러 환안을 해 드렸다. 김원조에게 무신란은 조상을 위하는 지극한 정성을 가로막고 심한 불안과 조민(躁悶)을 안긴 크나큰 장애였다. 지금까지 조선조 전란 실기에 관한 문학 분야의 연구가 대규모 외란인 임병양란의 실기를 위주로 해 온 가운데, 무신란 실기의 문학 연구는 매우 희소했으며, 「무신난리」․「무란록」에 관한 별도의 연구는 아직 없었다. 두 기록은 전란이 일상을 영위하던 민간인에게 끼친 피해를 특정 상황에 집중해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의의가 있어, 전란에 대한 인문학적 반성의 자리에서 중시되어야 할 것이다.
This paper looked through what damage the past war have caused to civilian by examining two records about the Mu-sin-lan(戊申亂, revolt of 李麟佐). That records are 「Mu-sin-nan-li(戊申亂離)」 of 『Son-wa-man-rok(巽窩謾錄)』 written by Kim- Kyeong-Chun(金敬天) and 「Mu-lan-rok(戊亂錄)」 of 『Mu-lan-rok(戊亂錄)』 written by Kim-Won-Jo(金遠祚). At that time 金敬天 was going to Seoul to take an civil service examination(文科). That was the first chance which he have gained through constant challenge for 50 years. Then he met the rebellion on his way. And the war made him give up the examination and turn back. At the same periods 金遠祚 met the rebellion at his home. The most painful thing to him occurred by the war was burying ancestral tablet for its safety. Because at that time ancestral tablet was the most precious thing to Korean. So he have delayed burying it as late as possible, and have restored it to the original state as soon as possible. Two records show concretely the damage that the past war have caused to civilians. So we have to consider them as important for the humanistic reflection upon war.

7,500원

3

湖南地域 士林들의 華陽九曲 探訪과 華陽九曲詩 - 趙鍾悳과 趙愚植을 중심으로 -

李相周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4집 2016.12 pp.6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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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鍾悳(1858~1927)과 趙愚植(1869∼1937) 두 사람은 尊師意識과 尊周大義意識을 공고히 하고 실천하기 위해 화양구곡을 탐방했다. 그리고 시를 지어 그 의식을 강화 실천하기 위해 화양구곡시를 지었다. 趙鍾德은 尤庵 宋時烈(1607 ~1689)의 9세손 宋秉珣(1839∼1912)의 제자이다. 조종덕은 평생 일곱 번 화양구곡을 탐방했다. 조종덕은 1911년 화양구곡을 탐방했을 때 화양구곡시를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조종덕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小華遯人이라 자칭하고 經傳과 程子朱子書를 탐독하면서 은둔했다. 趙愚植은 崔益鉉(1833~1906)의 제자이다. 趙愚植은 1906년 1월 25일 崔益鉉이 전라북도 泰仁 武城書院에서 발기한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조우식은 1910년 화양구곡을 탐방하고 화양구곡시를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듯 두 사람은 기호학파 우암학맥 사림의 제자로 尊師意識과 尊周大義意識을 행동과 문학으로 실천했다. 이 두 사람이 지은 華陽九曲詩에 표출된 尊周大義意識의 形象化 樣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尤庵의 尊周大義意識의 聖地化에 대한 讚揚, 둘째, 淸에 대한 復讐雪恥의 좌절에 대한 痛恨, 셋째, 明나라 神宗皇帝의 공덕에 대한 崇慕 등이다. 이렇듯 이들이 화양구곡을 탐방하고 화양구곡시를 지은 이유는 조선말 일제강점기에 ‘존주대의의식’‘항일의지’를 공고히하고 그를 실천하려는 의지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의식을 화양구곡시에 표출했다. 이로서 그들은 선비로서 자기시대의 도리를 다했다고 그 시대적 구곡문학적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Jo, Jongdeok(趙鍾悳1858~1927)and Jo, Usik(趙愚植1869∼1937), two persons’ Jonsa sense(尊師意識) and Jonjudaiui sense(尊周大義意識) in order to firmly practice so they visited Hwayanggugok. And in order to strengthen the sense and to celebrate the visiting they composed Hwayanggugok poems. Jo, Jongdeok(趙鍾德) is a disciple of Uam Song, siyeol(尤庵 宋時烈, 1607~1689)’s 9th descendent, Song, Byeongsun(宋秉珣1839∼1912). Jo, Jongdeok had titled by himself as Sohwadunin(小華遯人) after Gyeong- sulgukchi in 1910 and he lived hidden as he read cannon(經傳) and Jeongjajujaseo(程子朱子書). Jo, Usik(趙愚植) is a disciple of Choi, Ikhyeon(崔益鉉, 1833~1906). Jo, Usik(趙愚植) took part in revolt Japanese movement caused Taein Museongseowon(泰仁 武城書院) in Jeollabukdo in Jan. 25th in 1906 by Choi, Ikhyeon(崔益鉉). Like these, two persons practiced as a action and literature of Jonsa sense(尊師意識) and Jonjudaiui sense(尊周大義意識). These two persons’ Hwayanggugok poems(華陽九曲詩) can be greatly divided into three types of expressing Jonjudaiui sense(尊周大義意識) phases(樣相). At first, it praised certain fact that is made sacred place(聖地) which strengthened Hwayanggugok(華陽九曲) through Jonjudaiui sense(尊周大義意識) by Uam Song, Siyeol. Second, they expressed their inconvenience feelings about frustraiting plan which is revenged(復讐) the dishonor from Cheong(靑) Chinese country. Third, they expressed the sense of yearn(崇慕心) for charity(功德) of Sinjong emperor(神宗皇帝) of Myeong(明) Chinese country. As looking the above search, these persons visited Hwayanggugok and composed Hwayanggugok poem in order to strengthen the intention which practice firmly ‘Jonjudaiui sense’ in late Joseon Japanese colonial era. And they had showed their feelings at Hwayanggugok poem. Like these, they did their duty in their contemporary era as classical scholars so I can put meaning of the contemporary Gugok literary.

9,000원

4

장무진(張茂辰)과 조선연행사의 교유에 대한 고찰

정신남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4집 2016.12 pp.113-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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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학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청조 문인 장무진(張茂辰, 1838-1863)이 남긴 『접빈관시존(蜨賓館詩存)』과 조선연행사가 남긴 기록을 연구 자료로 삼았다. 이들 자료를 통해서 장무진과 조선연행사 이상적 및 신석우의 교유경위와 사행 이후의 서신 교류, 즉 이른바 “신교(神交)”의 상황을 분석하였다.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하여 당시 조선과 청나라를 연결한 인적 관계망이 청조 문인과 조선연행사의 교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밝혔다. 또한 그들의 교유과정에서 나타난 친교를 맺는 것일 뿐만 아닌 문단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지위를 높이거나 정치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목적성을 살펴보았다. 조․청 양국 문인들의 교류는 관례적으로 파견된 조선 사절단의 인편을 통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개인 및 공동의 벗의 근황에 대한 정보 교류, 서적을 포함한 예물의 교환 등은 그들의 “신교” 의 주요 내용이다. 그리고 조선연행사는 이러한 신교를 통하여 청조 문인에게 이후 북경에 들어갈 연행사를 미리 소개했고, 북경에 있는 청조 문인과 연행사 간의 인적 관계망을 공고히 하고 확장하였다. 장무진과 조선연행사의 교유는 바로 이 인적 관계망에 의해 진행된 조․청 문화의 교류의 일례로 그 관계망의 중요성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들의 교유에 대한 고찰이 19세기 중기 주로 북경에서 이루어진 조․청 양국 문인 교유의 전모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Based on Mao-chen Zhang’s Die Bin Guan Shi Cun and records of Joseon emissaries, such as Lee Sang-jeok and Shin Seok-woo, this paper studies the travelling experiences and epistolary communications between Zhang, Lee, and Shin (i.e. Shenjiao). This study focuses on the significant impact that the social network between Chinese litterateurs and Joseon emissaries had on their relationship in the 19th century. The communication between Chinese litterateurs and Joseon emissaries was sustained through delegations to China and through letters (i.e. Shenjiao). Shenjiao contains mainly information about common friends and gift exchanges, including books. Joseon emissaries also took the chance to introduce their successors to the Chinese litterateurs in order to strengthen and expand their social network. The communication between Zhang Mao-chen and Joseon emissaries is a typical example of cultural communication between China and Korea within this network, vividly showing the important role that social networks played in cultural communication.

8,500원

5

조선후기 유구 지식의 형성과 표해록

최영화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4집 2016.12 pp.153-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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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후기에 작성된 표해록을 통시적으로 고찰하여, 조선후기 유구 지식의 형성과정과 이러한 지식이 지식체계에 편성하는 과정을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조선후기 유구 표류담의 가공을 통해 유입된 유구 지식은 굉장히 다면적이다. 유구의 풍속, 문물, 문화로부터 유구의 정세, 언어, 주변 국가와의 관계 등이 모두 관심의 대상이었다. 유구에 대한 정보와 지식은 주로 유구에 직접 표류했던 사람들을 통해 조선에 유입되었지만, 일부 일본이나 중국 등 주변 국가에 표류했던 표류민을 통해서도 조선에 전해졌다. 이에 본고는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유구 정보의 수집과 지식화의 경향에 초점을 맞추어, 표류를 매개로 한 유구 지식의 축적 과정을 추적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고는 다음과 같이 연구를 진행하였다. 우선, 머리말에 이어서 2장에서는 폐쇄적이던 전근대시기에 유구 정보의 전달자로서 표류민의 긍정적인 역할에 대해 살펴보고, 지식인들이 유구 정보와 표류민을 대하는 맥락에 대해 알아보았다. 조선후기 지식인들은 표류민이 확보하고 있었던 유구 정보에 중시를 돌렸으나 이들의 증언을 맹신한 것이 아니라 辨證의 방법으로 표류담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었음을 논증하였다. 宋廷奎의 『海外聞見錄』과 金景善의 『濟州漂人問答記』 등에서 이러한 경향을 살펴볼 수 있었다. 3장에서는 漂流談의 가공을 통한 유구 지식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았다. 구체적으로 조선 중후기에 작성된 유구 표해록 8종을 정리하고, 각각의 표해록에 보이는 지식화의 과정, 지식화의 경향이나 유구 문화를 대하는 태도 등에 대해 알아보았다. 조선후기 표해록에서 감지되는 변화를 크게 (1) 사회 운영 구조에 대한 관심, (2) 유구 문화에 대한 관심, (3) 유구와 주변국가와의 관계에 대한 주목, (4) 남방 해로에 대한 관심 등 네 가지로 귀납하였다. 아울러 이러한 문제들은 시대 변화와 함께 변화를 보이는 사안들로서, 해당 사항과 관련된 정보와 지식은 지속적인 更新을 필요로 하는 정보들이었음을 설명하였다. 4장에서는 표해록의 저술을 통해 유입된 유구 지식이 새로운 저술에 수용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표해록에서 제시한 유구 지식들은 李圭景의 『五洲衍文長箋散稿』, 李裕元의 『林下筆記』, 成海應의 『蘭室譚叢』, 李肯翊의 『燃藜室記述』, 黃胤錫의 『頤齋亂藁』, 근대시기 崔南善의 『故事通』 등 잡다하고 다양한 지식을 집합해놓은 저술에 선별적으로 인용되었음을 밝혔다. 구체적으로 표해록에서 제시한 유구 지식들이 인용되는 맥락을 살펴보고, 표류를 통해 유입된 유구 지식이 더욱 방대한 지식체계에 재편되었음을 논증하였다. 아울러 이러한 과정이 유구를 포함한 해외에 대한 관심을 자극하여 문화의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놓았음을 밝혔다.
Information and knowledge about Ryuku (present Okinawa) were introduced to Chosun directly through people drifting in Ryuku, and it was performed by those drifting in neighboring countries, for example, Japan or China, too. This study focuses on late Chosun intellects’ collection of Ryuku information and tendencies of becoming knowledge in order to trace the process of accumulating Ryuku knowledge with the mediation of drifting. To attain the goal, this author has adopted the following procedure. First of all, after the preface, Chapter 2 examines the positive roles of drifting people as delivers of Ryuku information during the closed, pre-modern era and investigates the context of how those intellects treated Ryuku information and drifting people. Chapter 3 examines the formation of Ryuku knowledge through processing on the tales of drifting. In detail, this researcher organizes eight records of drifting about Ryuku written in mid- and late Chosun and examines the process of becoming knowledge found in each of the records of drifting, tendencies of becoming knowledge, and attitudes towards Ryuku culture. Chapter 4 looks into the process of accepting that Ryuku knowledge introduced into new books through writing those records of drifting. Furthermore, it has revealed that the process intrigued people about foreign countries including Ryuku and laid the grounds to accept the diversity of culture.

8,400원

6

<崔忠傳>과 일본의 관계

유광수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4집 2016.12 pp.19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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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조선에서 창작된 <최고운전>은 한문본, 한글본으로 전승되면서 다양한 제명으로 불렸는데, 그 중 ‘최충전’이란 제명을 지닌 일련의 이본들이 있다. 그동안 <최충전>을 조선에서 필사된 것으로 여겨 <최고운전> 이본의 계통을 세우거나 논의하는데 심각한 오류가 있었다. 본고에서는 <최충전> 이본 6종을 수집ㆍ정리ㆍ분석하였다. 1883년 일본외무성에서 간행된 활판본을 비롯하여, 아스톤본, 와세다본, 도쿄대본, 교토대본, 심수관본 등 6종의 이본을 면밀히 비교ㆍ대조하여 분석한 결과, 이들 <최충전> 이본들은 단순한 조사 같은 어휘적 차이를 제외하고는 완벽하게 부합하는 이본임을 밝혀냈다. 또한 이 이본들은 모두 조선이 아닌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전승된 곳이 일본일 뿐만 아니라, 소장한 인물, 필사한 인물 등이 모두 조선이 아닌 일본과 관련 깊음을 알아냈다. <최충전>이 일본에서 전승된 것은 오래되었는데, 와세다본이 1750년에 필사되었고 도쿄대본이 1873년, 활판본이 1883년에 간행되었다. 필사연도는 아니나 수집연도가 1900년인 아스톤본까지 감안해 보면, 대략 150년 정도 전승되면서도 그 변이의 폭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100년 이상 전승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본적 편폭이 거의 없었던 것은 <최충전>을 중요한 텍스트로 인식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최충전>을 조선어 통역관 양성을 위한 교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ChoiGoWoonCheon(崔孤雲傳)> created in 16th century Joseon was called by diverse titles in a transmission with Korean letter and Chinese character, and some of those variations are called ‘ChoiChungCheon(崔忠傳)’. There has been a serious error in debating or claiming the system of <ChoiGoWoonCheon(崔孤雲傳)> remake by regarding <ChoiChungCheon(崔忠傳)> as a one written in Joseon. In this article, 6 types of <ChoiChungCheon(崔忠傳)> adaptations was collected, organized and analyzed. Including a printed book published in 1883 at Ministry of Foreign Affairs, Aston Edition, Waseda Edition, Tokyo University Edition, Kyoto University Edition Simsukwan Edition and etc was precisely compared and analyzed, resulting that these <ChoiChungCheon(崔忠傳)> adaptations were perfectly the same except lexical differences. Also, all of these editions had close relationship with Japan but not with Joseon, and revealed that not only they were passed down in Japan, but also the person who kept, and the one who wrote this book were deeply related with Japan, not Joseon. It has been a while since <ChoiChungCheon(崔忠傳)> transmitted and during this period, Waseda Edition was written in 1750, Tokyo University Edition in 1873 and Printed Book was published in 1883. Considering the collected year of Aston Edition, even though it is not the written year, it is noticeable that it has been almost no variation during about 150 years of succession. The reason for the stability of these adaptations despite of more than 100 years of transmission, is because they thought <ChoiChungCheon(崔忠傳)> as an important text, which used as a textbook to train Joseon language interpreters.

6,300원

7

한국 도교의 죽음의식

안동준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4집 2016.12 pp.219-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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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적인 ‘죽음’ 인식은 ‘돌아간다’는 말로 표현한다. 그 내력은 도교의 죽음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노장철학의 죽음의식은 죽음의 본질을 해명한 것이고, 그러한 죽음의 본질을 잘 드러낸 사례를 신라 화랑들의 생사관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도교의 연단술은 죽음의 기제를 形神의 문제로 파악하여 장생불사의 꿈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러한 사례는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仙人인 북창 정렴과 수암 박지화의 죽음의식으로 대표된다. 이러한 논의의 결과로 신라 화랑과 조선의 선인이 모두 내세에 의존하지 않는 죽음의식을 드러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도교는 仙界라는 초월적 세계를 설정하고 있어서 ‘도교적 죽음’이라면 흔히 선계에서 영생을 누린다고 여긴다. 하지만 도교와 관련된 한국인의 죽음 의식에서는 초월적 존재에 의존하는 구원관을 엿볼 수 없다. 죽음의 문제에 대면한 한국인의 내면의식에서는 육체가 소멸되면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죽음의식은 기복신앙을 기저로 하는 교단 형태의 도교의 그것과는 다르고, 죽음보다 삶에 의미를 두고 초월적 대상에 延命을 희구하는 도교적 운명론과는 구별된다.
Korean’s traditional perception of death is expressed in word 'return'. Its origin is related to the Taoist understanding of death. Taoist philosophy is a clarification of the nature of death, and as well as Taoism, evidence plainly represents the essence of death is found in Hwa-rang’s view of life and death during the period of Silla. Also internal alchemy of Taoists were to recognized the mechanisms of death as the body and soul binding problem, wanted to achieve the dream of immortality. These cases are represented by deaths awareness of Jeong-ryeom and Park-jeehwa, who lived in the Joseon Dynasty. As is well know, Taoist perception for the dead is set against a background of the transcendent world, and ‘Taoist death’ is considered to enjoy eternal life in the Seongye(仙界). However, the Korean consciousness of death associated with Taoism can not find the idea of relying on transcendental existence. As the philosophy of Lao Tzu, what stands out most from the inner consciousness of Koreans is that the spirits ‘return’ to the origin of life when the body has disappeared. these Korean’s view of death are different from the relief faith and fat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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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頭流紀行錄」에 나타난 김일손의 排佛的 認識

노의찬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4집 2016.12 pp.251-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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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의 「頭流紀行錄」은 15세기 말의 두류산을 묘사하는 글로서 아주 소중한 기록이다. 이는 그 당시에 존재했던 두류산의 사찰들을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하겠다. 실제로 유학자 김일손은 정여창과 장기간에 걸쳐서 산사를 답사하고 나서 두류산에 관련된 구체적이면서도 세부적 평가를 남긴 글에서 의미하는 바가 큰 내용들이라 이해된다. 김일손은 두류산의 산사를 여행하는 동안, 각 절들에 대한 기원에서부터 시작하여 흥망성쇠뿐 아니라, 사찰의 특징적인 요소 하나, 하나를 상세하게 보여 주었다. 더불어 그는 자기가 본 것들에 대하여 설명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신의 평가가 연이여 나타나 김일손의 배불적 입지를 분명하게 내 비취며 서술하여 나갔다. 김일손은 함양에서 출발하여 마지막 佛日菴에 도착할 때까지 산사의 스님들과 전반적인 시간들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여정 속에서 김일손은 불교와 관련된 내용에서는 유교적 가치관에 기인하여 불교비판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 구체적 내용을 보면, 斷俗寺에 있는 화상을 보고는 저속하고 비루하다 하여 회피해 돌아나갔으며, 고려조의 仁宗과 毅宗 부자에 대해서는, “禪佛에 지극정성을 다하였지만 인종은 이자겸에게 곤욕을 당하였고, 의종은 거제로 쫓겨 가는 액운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불교의 아첨으로 인한 국가의 무익함이 이와 같다”며 일침을 가하는 논평을 하였다. 한편으로는 “석가의 가르침이 서역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불교 받들기를 공자보다 심하며, 또한 사악함에 탐욕 되어서 정도를 독실하게 신봉하지 못 한다” 라며 그릇되고 부패된 불교에 대하여 비난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최치원이 지었다는 비문을 대할 때에, 김일손은 최치원이 만년에 불교에 귀의한 사실에 대하여 너무나 안타까워하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해하거나 찾아내려는 모습이 역력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김일손의 이러한 태도는 최치원의 흠집으로 남은 불교적 흔적들을 두둔하거나 대변하려는 유자로서의 배불적 성격을 선명하게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김일손의 「頭流紀行錄」은 오늘날 우리에게 역사적 진실을 알리는 데에 적지 않은 사실들을 전해주고 있다. 당시 김일손과 정여창을 포함한 여행객들은 두류산을 여행하는 동안 줄곤 산사에서 많은 시간들을 보내게 되었으며, 그 사이에 불교의 이색적인 장면들도 쉽게 접 할 수 있었다. 김일손은 두류산을 여행하면서 잊을 수 없는 풍경들을 가슴속에 담아 두었지만, 불교나 토속적 신앙에 관해서는 퇴색되고 사악한 대상이라 꺼리거나 기피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두류산여행 전체에서, 김일손이 유학자로서의 견해와 입장 차이를 뚜렷하게 나타낼 뿐 아니라, 불교에 대한 그의 내면세계도 동시에 엿볼 수 있게 하였다. 실제로 김일손은 유교 이외의 신앙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 들렸는지 그 당시의 유학자가 바라본 관점에서 생생하면서도 현실감 있게 논평한 것에 대하여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반면에 15세기의 유학자들은『朝鮮王朝實錄』의 척불이나, 배불상소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분명한 비판의식과 동떨어지게 일상생활에서는 불교적 삶을 영위한 것이 보편적 모습이었다. 특히 성현이 남긴 『慵齋叢話』에서는 인물, 역사, 문학, 제도, 풍속, 설화 등 조선전기의 실체적 삶들과 직결되는 기록들을 세세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 각 지방의 읍지에 연관된 내용들을 들여다보면 사족들은 집 근처에다 토굴이나, 분암을 두는 등 불교와 밀접한 생활환경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김일손의 「頭流紀行錄」은 조선이 지향한 성리학체제에서 강직한 유자의 일면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당시 사림 또는 지식인들의 위상이나 사회구조 하에서 어느 정도의 뚜렷한 차별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분야이다.
「Du ryu Mounttain travelogues Record」of Kim Il-son was very important record to depiction of Du ryu Mountain for The end of the 15th century. also, it is very high value to grasp and understanding of historical true existed at that time. Together, Confucians Kim Il-son directly finished the Mountain Temples for long time. it is very important history record to remain assessment. Kim Il-son was during the Mountain travel, This Temples know the rise and fall together prosperity and decay from genesis. But not, shoed detailed the one, the one to characteristics of Mountain Temples. he was not only written the explain of ever seen, but also describe his view followed their evaluation Kim Il-son was arrived from Ham yang to Bul il am, he has much time with the monks of Mountain temples. in this time, Kim Il-son was clearly reflect related to Buddim as Confucian view. Looking the specific content, he was back go out for side step when see the king portrait of Koryo Dynasty to king In Jong and king Ui Jong. Because it is very vulgar and despicable related to Buddim. also king In Jong was plagued from Yi Ja Gyeom, Despite Buddhist qualitative, king Ui Jong became cast out to Geo Je do in spite of evaluated countries of the futility about Buddhist. in addition, Kim Il-son was not hesitate to Buddhist criticism to Buddhists teachings to start Wastern provinces. and foolish people were very believed more than confucians. Contrary Kim Il-son try to find unavoidable circumstance for become Buddhists to Choi chi-won. this attitude was able to observe the Buddhism rejects character for defended or understand of Buddhist trail to remain blemish this Travelogues, Today provides much facts to know historical truth. travelers were spend much time succession to mountain temples during Du ryu Mountain travel and easy able to see the particular scenes. Kim Il-son, in the entire Du ryu mountain travel, clearly appeared of views and positions as Confucians during visit temples of Du ryu mountain, As a result, he was appear his inner world. about this phenomenon, Kim Il-son was how understand, how accept from point the confucians and have deep mean to pointing bar for vivid and realistic seen confucians The other side, 15century Confucians was common appearance of Buddhist life separated criticism of Buddhism rejected to record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Especial, Seong Hyeon remained 『Yong Je Chong Hoa』 was appeared everythings of Chosun about character, history, literature, institution, custom, tales. A mong them, Confucians was closely maintained environment of Buddhist life made temple to nearly house. Therefore, 「Du ryu mountain travelogues record」of Kim il son was the sector to see distince difference to social structure to intellectual or confucians during chosun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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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왕가> 사설의 전승과 향유의식 연구

최형우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4집 2016.12 pp.287-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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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의는 현재 나옹화상의 作으로 점차 인정되고 있는 <서왕가>를 대상으로 하여 18~20세기 기록된 원전 자료들을 바탕으로 사설 전승 상에 나타난 변화와 이 변화에 담긴 당대의 향유의식에 대해 다루었다. <서왕가>에 대한 종래의 논의가 주로 고려말기 나옹선사와 관련된 부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가운데, 실제 원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18~20세기의 사설 향유 양상에 대한 관심은 부족하여 <서왕가>의 의미 지향점과 향유의식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본 논의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나옹화상이 창작한 <서왕가>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전승되면서, 18세기에 문헌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기존의 전제로부터 18~20세기에 걸쳐 <서왕가>의 사설이 어떻게 변화하였으며, 이 과정에 영향을 미친 향유자의 의식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논의하였다. 특히, <서왕가>와 같은 불교 국문시가의 경우 중생제도라는 목적의식의 한 방편으로 창작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연행된 <서왕가> 사설에는 이 사설을 수록한 편집자의 의식과 대중들의 기호가 복합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들은 결국 다양한 이본계열의 <서왕가> 사설들이 언제, 어떻게 기록되었으며, 이들 간에 사설의 차이가 어떠한가에 대한 정보들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현재 전하고 있는 서왕가의 이본 계열은 크게 『염불보권문』본, 『신편보권문』본, 『조선가요집성』본의 세 계열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가장 먼저 기록된 『염불보권문』본에 비해 『신편보권문』본은 ‘讀’의 향유방식을 고려한 내용의 완결성 및 의식의 표출을 중심으로 한 변화가, 『조선가요집성』본의 경우 대중들의 기호를 반영하는 차원에서의 사설 변화가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염불보권문』본 사설과 『신편보권문』본 사설이 20세기까지 꾸준히 전승되는 가운데 『조선가요집성』본이 유행하였다는 점에서 이들 사설이 복합적으로 연행, 전승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서왕가> 사설 전승의 구체적인 모습들과 이에 담긴 당시 <서왕가> 향유자의 향유의식은 종래의 <서왕가> 이해에서 주목할 수 없었던 <서왕가>의 의미를 밝혀내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This study focused on transmission of lyric-words and enjoyment consciousness about “Seowang-ga”, writing by monk Naong. The study about “Seowang-ga” was presupposed a knowledge of monk Naong’s creation, but miniority people are concerned about enjoying this lyric-words at 18th-20th century. That is a starting point about this study. So, this study research to people, living 18th-20th century, how to enjoy this literary work, and enjoyment consciousness was reflected by lyric-words. Especially, buddist korean folk-song was created about the purpose of redeem mankind. Therefore this literary work is reflected about saving the world, and catching the public fancy. This study is reached through when to write this song, what the difference is about different versions. Differewnt versions are writed at Bogunnumbulmun, Sinpyunbogunmun, Josungayojipsung. Sinpyunbogunmun version was changed lyric- words to having completion about a sense of purpose, Josungayojipsung version was changed lyric-words to catching the public fancy. Of course, These three versions were enjoyed together, Bogunnumbulmun version, Sinpyunbogunmun version were enjoyed by people at 18th-20th century, in contract, Josungayojipsung version was enjoyed by people at 20th century. These lyric-words were enjoyed to influenced each other. Tansmission og lyric-words about “Seowang- ga” and enjoyment consciousness wewe provide important information for mean og “Seowang-ga” being not attention till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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异域视角下的中国帝王 - 韩国古典文学中的明太祖形象 -

韩梅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4집 2016.12 pp.323-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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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전문학에 나타난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엄하고 까다로운 면이 가끔 드러나지만 천명과 민심에 부응하여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유능한 황제요, 인﹒효﹒예 등 유학적 덕목을 두루 지닌 성군 등 긍정적인 인물로 형상화된 것만큼 폭군의 모습이 두드러진 중국 문학에서의 이미지와 크게 차이가 난다. 본고는 한국 고전문학에서 나타난 명태조의 형상을 정리하고 그런 형상을 만들고 부각시킨 작가들과 그 소속집단의 명태조 관련 직﹒간접적인 체험과 기억, 그들의 사상의식, 현실적 욕구 등과 결합시켜 그 형성원인을 조명하고 그 형성﹒변천과정에서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았다. 명태조의 유능한 황제 이미지는 여말선초 친명파 문인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17세기 명나라 멸망 후 중국의 역대 황제 중에서도 1인자로 추앙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성리학의 수용에서 비롯된 정통적 화이사상 즉 한문화, 한족 정권의 정통성 인정,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형성된 개인적 호감, 그리고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전쟁과 위기에 대한 공동 대응에서 형성된 동류의식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명태조의 인자하고 효성스러운 도덕군자 이미지는 16세기 사림파 문인에 의해 강조되었다. 이는 조선의 군주가 따라 배우도록 명태조라는 이상적인 군주상을 제시한 것으로 보여진다. 17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문학에서 명태조의 성군 형상이 한층 더 완벽해졌을 뿐 아니라, 그 향유층은 한문 식자층에서 한글 식자층까지 확대되었다. 그런 와중에 명청교체가 이루어지면서 고조된 존명반청(尊明反淸) 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명태조의 까다로운 종주국 군주 형상은 명태조의 은혜와 위엄을 병행하는 대(對)고려, 조선 정책에 상처를 입은 문인의 기억이 전승된 결과물이라고 생각된다. 그외에 명태조는 대국 천자의 이미지로 민간설화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민중들이 빈민에서 황제로 상승한 명태조의 형상을 빌려 신분상승의 욕구를 표출하고, 이성계와의 비교를 통해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 위해 이미 형성된 명태조의 긍정적 형상에 설화적인 상상을 더해 만들어 낸 것으로 보인다. 한국 고전문학에서 명태조 형상의 형성과 변천 과정에서 크게 작용한 요소는 3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문학 형상화 대상 자체의 행동이 중요하다. 명태조가 중국에서 문자옥을 비롯한 참혹한 통치로 악명을 얻은 반면에, 고려와 조선에 대한 평화적 외교정책을 시행한 것이 한국 고전문학에서의 긍정적 이미지 형성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영향력이 큰 사회지도층의 역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여말선초 친명파 문인들의 명태조 미화가 명태조의 긍정적 이미지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결국에는 작가 및 그 소속 집단, 사회의 욕구가 이국 인물의 형상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명태조의 긍정적 이미지가 17세기 중후반에 극도로 미화되고, 또 그 형상이 광범위하게 수용된 원인은 명태조의 완벽한 성군 만들기가 조선사회에서 명에 대한 감은(感恩) 의식, 동정 및 추억, 청(淸)에 대한 멸시와 적개심을 나타내는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Although Zhu Yuanzhang, Ming Taizu(the founder and first emperor of the Ming Dynasty) in Korea classical literature occasionally exposed his shortcomings as harshness, he was basically portrayed as an outstanding emperor as well as a modest and gentle monarch, so his image is significantly different from the image of tyrants in Chinese literature. This paper analyzed the image of Mingtaizu Zhu Yuanzhang in Korea classical literature of, and combining with the direct or indirect experiences, memories, thoughts, practical demands and other considerations of their writers and the groups that they belong to, the paper also discussed the formation of the image of Mingtaizu Zhu Yuanzhang, and analyzed the characteristics of the formation and evolution. The image of Zhu Yuanzhang originated from scholars who supported the Ming Dynasty during the periods of late Goryeo and the early Joseon Dynasty. In the 17th century during the alternation of Ming and Qing Dynasties, he was even highly praised as the most excellent emperor. After investigating the reasons, we found that the China centric view in Neo-Confucianism, the favorable impressions generated in personal experiences and sharing a bitter hatred of the enemy generated in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nd the Manchu Invasion of Korea in 1627, 1636 played an important role. The image of benevolence, filial piety, modesty, and gentleness came from faithful scholars in the 16th century, aiming to set up an ideal monarch model and promote reform. Since the middle of the 17th century, the image became better, and it spread widely because of its accordance with the strong idea that the people at all levels in Joseon respected Ming and repelled Qing; while the aggressive imperial image was bound to the memories and embodiment of Korean scholars’ suffering from persecution by Zhu Yuanzhang’s policies. The image of power stem from the folk literature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people recreated it on the basis of the existing positive image of Ming Taizu, and they expressed their dissatisfaction with Taejo of Joseon and Joseon Dynasty with the aid of the image of Zhu Yuanzhang. With respect to its formation and evolving mechanism, the behavior of speakers is a factor of shaping its own image--the peace policy in the Ming Dynasty didn’t leave a seriously negative memory on the Korean peninsula. The elite group who led the society had a very important function, and since then, the literati who mastered the speaking right beautified Ming Taizu, which played an important role in forming his positive image. In the final analysis, writers and the groups that they belong to and social demands generated a huge influence on shaping images of exotic characters. In the mid and later 17th century, the image of Ming Taizu was shaped into a perfect one, and it further spread in Korea. It was because the writers took the extreme beautification of Ming Taizu as an important means of expressing their gratitude, sympathy and memories to the Ming Dynasty and their hatred and contempt to the Qing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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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한 사건, 다른 기록 - 『태평한화골계전』을 중심으로 -

김준형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4집 2016.12 pp.345-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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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문명전환의 기운이 흥성하던 여말선초 잡록의 등장 배경과 그 과정에 나타난 글쓰기의 변화, 그리고 변화된 글쓰기가 지닌 의미를 살피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주 텍스트로 『태평한화골계전』을 선정하였다. 조선 초기 문인들은 이제현의 『역옹패설』을 잡록의 전범으로 삼았다. 『역옹패설』은 파한을 표면에 내세웠지만, 그 이면에서는 역사성을 지향한다. 이는 문인과 역사가가 구분되지 않았던 동아시아 서사학의 전통이기도 하다. 선초 서거정이 이 책을 본받아 저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제 『태평한화골계전』에 수록된 작품을 보면 역사적 글쓰기와 문학적 글쓰기 사이에 간극이 크지 않다. 『태평한화골계전』을 통해 역사를 보완한다는 작가의 책무가 작동한 까닭이다. 그러니 『태평한화골계전』에 대한 접근 방식을 ‘정통 대 비정통’ ‘공식 대 비공식’의 문제로 맞춰야지, 이를 온전한 허구적 글쓰기로 치부하는 것은 잘못이다. 『태평한화골계전』에 실린 이야기는 다른 잡록에도 중복된다. 그것은 실재한 사건을 다른 경로로 접한 탓이지, 잡록 상호 간 직접적인 영향 관계에 놓인 것은 아니다. 그런지라 실재한 사건을 해석하여 평가를 할 때에도 사례에 따라 다른 평가가 마련되기도 한다. 이 역시 역사를 해석하는 사가의 입장이 반영된 결과다. 여말선초 문명전환의 시대에 문인들이 잡록을 즐겨 편찬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그 하나는 일상에 대한 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일상생활에서의 실천이 그러하다. 인간의 운명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에서 자신의 실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낙관론에 따른 결과라 할 만하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take a look at the background of appearing on the end of Goryeo and early Joseon when the spirit of civilization transition was high along with the change of writing and implication of the changed writing as appeared in the process. For resolving the issue, <Taepeonghanwhagolgejeon> is selected as the main text. The intellectuals in initial time of Joseon had Lee Je-hyun’s <Yeokong Paeseol> as the model of Japrok. <Yeokong Paeseol> was set out for killing time, but it strives for historic value on its inner side. This is the tradition of the East Asian Study on lyrics that was not classified by literary men and historians. This is why Seo Geo-jeong quoted this book. In fact, <Taepeonghanwhagolgejeon> did not have significant gap between the historic writing and literary writing. The sense of responsibility of the author to supplement the history through <Taepeonghanwhagolgejeon> was great. However, <Taepeonghanwhagolgejeon> should be approached as the issue of ‘legitimacy versus non-legitimacy’ and it is wrong to consider as a fiction. The story quoted on <Tae> is overlapped in other Japroks. However, the matters actually occurred were recorded in different routes that each author renders different assessment. This also has to be considered as reflecting the position of historians that interpreted the history. At the end of Goryeo and early Joseon, namely, the era of civilization transition, the reasons to write this Japrok is largely outlined in two ways. One is the interests in the ordinary matter and the other is the practice in the ordinary life. This is the result following the optimism that the destiny of human may be possible only under its own practice in the space where we live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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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刊 『選賦抄評注解刪補』引 『楚辭』 各篇之考實

賈捷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4집 2016.12 pp.395-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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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기에 유통된 『선부초평주해산보(選賦抄評註解刪補)』는 필사본, 관판본, 방각본 세 종류가 있다. 『선부초평주해산보』는 필사본이 먼저 유통되었다가 지방 관아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하였고, 후에 또 방각본이 간행되면서 내용의 증보가 발생하였다. 『선부초평주해산보』는 『문선』 중의 부(賦) 작품들을 위주로 선별하여 수록하였고 『문선』 외에 기타 부 작품들도 추가하였다. 이 책의 관은본은 『초사(楚辭)』속의 「이소경(離騷經)」 한 편만을 수록하였고, 방각본에는 「이소경(離騷經)」 외에 또 『초사』속의 「구가(九歌)」, 「구장(九章)」, 「천문(天問)」을 더 추가하였다. 이로부터 『선부초평주해산보』는 비록 직접 『초사』를 저본으로 간행한 것은 아니지만 모두 『초사』속의 「이소경」, 「구가」, 「구장」, 「천문」을 부 작품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초사』 작품의 주해(注解)도 주희의 『초사집주(楚辭集注)』를 바탕으로 주석하였는데 조선 시기에 복각한 주희 『초사집주』양상림(楊上林) 간본을 저본으로 하여 수정하였을 것으로 본다. 『선부초평주해산보』의 주해에는 정확하고 합리적인 산삭도 있지만, 잘못된 삭감도 있다. 관판본 속의 「이소경」 주석에는 오류가 비교적 적고, 방각본 속의 「구가」, 「구장」, 「천문」의 주석에는 상대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많다. 그 외에 방각본의 「구가」, 「구장」, 「천문」 각 편은 많은 부분을 삭감하고 교감과 주음을 하였는데, 관판본 속의 「이소경」에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선시기에 간행한 『선부초평주해산보』간본은 조선시기의 『초사』의 「이소경」, 「구가」, 「구장」, 「천문」의 수용과 주희의 집주를 높이 평가하는 양상을 연구하는 면에서 매우 중요한 문헌적 가치가 있다.
Xuanfu Chaoping Pizhu Shanbu(Deleting and Adding Commentary of Selected Works) which was circulated in Chosun era included three versions, namely written edition, offical edition and folk printed edition. This was a process of recarving, deleting and adding up for various versions, ranging from being written by hands, locally printed in official houses to being printed in the folk houses. Xuanfu Chaoping Pizhu Shanbu, mainly on fu (descriptive prose interspersed with verse) from Wenxuan (selected proses), added other proses outside Wenxuan. The official edition only selected one prose, namly Lisao Jing from Chuci, while the folk house printed edition added Jiuge Jiuzhang, and Tianwen from Chuci. The version of Xuanfu(Selected Works)was not the same as Chuci,but both official and folk printed versions identifies Lisao Jing, Jiuge, Jiuzhang, Tianwen as a piece of fu (descriptive prose interspersed with verse). Besides, Xuanfu(Selected Works), whose explanatory notes were completely based on Zhuxi’s Chuci Jizhu, was likely to be deleted and added up according to Yang Shanglin’s Chuci Jizhu reprinted in Chosun era. The explanatory notes of various chapters of Chuci in Xuanfu Chaoping Pizhu Shanbu was reasonably deleted and changed, sometimes mistakenly removed. However, compared with Jiuge, Jiuzhang and Tianwen of folk printed edition, Lisao Jing of official edition contained much less commentary errors. In addition, Lisao Jing of official edition was not deleted, collated and phonetically notated in such a large quantity in every chapter as Chuci of folk printed edition. Therefore, Xuanfu Chaoping Pizhu Shanbu had important literature value not only in exploring the acceptance of Lisao Jing, Jiuge, Jiuzhang and Tianwen in Chosun era, but also in canonizing Zhuxi’s anno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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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구록(使琉球錄)』의 조선 간행과 16세기 조선의 관심

조영심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4집 2016.12 pp.419-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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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갑진자 동활자로 조선에서 간행된 『사유구록(使琉球錄)』을 소개하고 이 텍스트가 간행되었던 16세기에 조선이 유구(琉球)에 대해 관심을 지속하고 있었음을 살폈다. 『사유구록』이란 현재의 오키나와현(沖縄縣)에 해당하는 옛 유구왕국(琉球王國)을 사신으로서 방문하고 남긴 기록을 말한다. 본고의 대상이 되는 『사유구록』은 조선인이 집필한 것이 아닌, 명나라인 진간(陳侃)이 저술한 것을 조선에서 편집 간행한 것이다. 1534년 쇼세이(尙淸)를 유구국 중산왕으로 책봉하기 위한 명나라 책봉사(冊封使)가 유구를 향했다. 진간은 이 사절단의 정사(正使)로서 사행에 임했다. 그리고 약 4개월 간의 유구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유구의 실정을 담은 『사유구록』을 저술했다. 이것은 가정(嘉靖) 연간에 간행된 텍스트라고 하여 가정본 『사유구록』이라고 칭해진다. 이 텍스트는 조선에까지 전해져 조선본 『사유구록』으로 편집되었다. 조선본 『사유구록』은 갑진자 동활자로 중종 말기부터 명종조 시기에 간행되었으며, 2권1책으로 되어 있다. 임진왜란 시기 약탈되어 현재는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내용은 가정본 『사유구록』에 비해 생략이 많은데, 생략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조선이 명과 유구의 관계보다는 ‘유구’의 실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의 텍스트인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도 진간의 『사유구록』이 인용되어 있다. 조선본 『사유구록』에 생략된 부분이 인용되어 있어 『패관잡기』와 조선본 『사유구록』 사이의 상호 보완성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패관잡기』의 기록에서도 ‘유구’ 자체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본 『사유구록』과 어숙권의 『패관잡기』가 작성되던 무렵은 조선과 유구의 직접적이던 교린 관계가 간접적인 방법으로 변화한 직후였다. 종종 조선을 내방하던 유구의 사신들이 1519년 이후 더 이상 조선을 방문하지 않았고 조선 조정에서는 이러한 변화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중종(中宗)은 그들이 오지 않는 연유와 유구까지의 육해상 거리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더불어 조선에 표착한 유구 표류민과 유구에 표착한 조선 표류민의 송환 문제도 화제로 부상했다. 중국 또는 일본을 통한 송환이라는 두 가지 경로 사이에서의 유구의 실제 위치와 이동 방법 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 시기 조선본 󰡔사유구록󰡕이 간행된 것은 조선의 유구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This study discusses the publication of the Records of Visiting Ryukyu(使琉球錄) in Kapjin (甲辰字) copper type and the interest in Ryukyu of the 16th century Chosŏn. Records was written by Ming envoy Chen Kan(陳侃) and described his impressions of the Ryukyu Kingdom, or present-day Okinawa Prefecture, and was edited and published in Chosŏn. In 1534, Ming China sent Chen Kan as chief envoy to invest Shousei(尙淸) as King of Ryukyu, and wrote Records upon his return from traveling for about four months in Ryukyu. It was published during the reign era of the Jiajing(嘉靖) Emperor, and thus was called the Jiajing edition of the Records of Visiting Ryukyu. This text then moved to Chosŏn, and a Chosŏn edition of the text was made. The Chosŏn edition was published in Kapjin copper type during the end of King Chungjong’s reign until King Myŏngjong’s reign as one volume and two books. However, it was stolen by the Japanese during the Imjin War(壬辰倭亂) and is currently held by the National Diet Library in Japan. Although it omits much of the information contained in the Jiajing edition, the omitted content shows that Chosŏn was more interested in Ryukyu’s actual state of affairs rather than its relationship with Ming China. A text from a similar period, Ŏ Suk-kwŏn’s Paekwanjabgi(稗官雜記), also quotes from Chen Kan’s Records, particularly that of the content omitted in the Chosŏn edition of Records; both writings therefore complement each other. In addition, Paekwanjabgi also takes an interest in Ryukyu itself. The period in which the Chosŏn edition of Records and Ŏ Suk-kwŏn’s Paekwanjabgi were produced was when Chosŏn had shifted from direct to indirect relations with Ryukyu. After 1519, Ryukyu envoys no longer visited Chosŏn and the Chosŏn court was suspicious of this change in relations. King Chungjong became interested in their reasons for not visiting Chosŏn and in the distance from Chosŏn to Ryukyu. Moreover, the issue of repatriating Ryukyuan castaways that landed in Chosŏn and vice versa also came to the fore. Chosŏn became interested in the actual location of Ryukyu and the methods of transporting these castaways because repatriations took place through either China or Japan. In sum, the publication of the Chosŏn edition of Records shows how Chosŏn was interested in Ryukyu.

7,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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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시가 속 권력의 한 양상과 그 문화론적 함의

박상영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4집 2016.12 pp.455-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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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고전 시가 속 권력의 한 양상과 그것의 전변 양상, 그 속에 담긴 문화론적 함의 등을 두루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권력은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관계적 힘이자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 온 것임에도 그간 고전시가 연구에서 권력 논의는 주로 조선조 사대부 시가에만 한정되어 온 경향이 크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본 연구는, 권력을 바라보는 상반된 시각들과 개념적 정의를 살펴본 뒤, 권력 논의의 주변부였던 중세시가(고대가요~고려속요)를 대상으로 권력의 일면을 살펴보고, 그것의 전변 과정을 사설시조를 중심으로 한번 짚어 보고자 하였다. 먼저 고대가요에는 권력자에게 복종하게 만드는 신성한 절대 권력, 강제적으로 동조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불가피한 절대 권력, 이에 대항하는 저항 권력 등이 발견되고, 향가에서는 자발적 동조를 근간으로 하는 절대 권력, 절대적인 듯 실제로는 흔들리던 권력, 주체의 저항으로 흔들려 버린 권력 등이, 고려속요에서는 주체들 간의 이원적인 관계 속에서 제시되는 절대 권력, 목격자의 ‘시선’에 의해 흔들리는 권력 등이 발견된다. 일면 무질서한 듯 보이는 이러한 권력 양상들은 크게 보면 절대 권력과 저항적 권력의 관계 속에서 전자가 우세하고 후자가 부분적으로 나타난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처럼 절대 권력은 그것이 견고하거나 흔들리거나 불가항력적이거나 간에 대체로 신, 종교적 존재, 임금 등 ‘중심’을 대변하는 힘으로서의 상징성을 지녀왔다면, 저항 권력의 경우는 기존의 지배적인 힘에 대항해 ‘주변’을 대변하는 힘으로서의 상징성을 지니면서, 이후 그 편폭의 확장을 보여준다. 즉 절대 권력의 경우, 기존 시가에서 보이던 권력 양상과 더불어 여성을 타자화 하고 대상화하는 새로운 형태의 권력이 보인다면, 저항 권력의 경우는 평범하고도 일상적 인물들이자 주변부 인물들인 여성과 아이들에 의해 중심부 힘을 향한 저항이 표면화 되는 형태의 모습이 발견된다. 절대 권력과 저항 권력, 이 두 가지 힘은 시가사적 흐름 속에서 상호 길항하는 가운데 나름의 문화적 함의를 드러내기도 한다. 즉 중세를 지배하던 절대 권력은 일상을 작품 속에 詩化하는 데서 균열을 드러내기 시작하며, 그러한 일상이 지배하는 작품은 또 서정-서사의 미학적 긴장, 중심(주체)-탈 중심(탈 주체)의 문제를 의미 있게 제기하면서, 이 시기 문화 권력의 거대한 밑그림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권력 양상은 이를 작동시키는 이면의 거시 권력 구조와의 관련성 속에서 보다 큰 의미를 지닐 수 있지만, 그 실체성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분명 주류 담론과 주변 담론 간의 미학적 긴장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지표는 뚜렷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This study is intended to explore on the features of power in Korean Classical Poetry, as well as its transformational patterns and its cultural implications. Although power has existed in every age as a relational force that every human being who is part of a society has experienced, the discussion of power in the classical poetry study tends to be limited mainly to the upper classes’ poetry during Choseon Dynasty. This study which starts from the consciousness of this problem, attempts to examine characteristics and aspects of power in medieval poetry(Ancient songs, Hangga, Goryeosokyo) which has been as the periphery of the power debate and also its transforming process in terms of Saseolsijo after the opposing views and conceptual definitions of power, This study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In Ancient songs, divine absolute power that makes obedience to the power, inevitable absolute power that forced to compromise, and resistance power against it are discovered. In Hangga, absolute power based on voluntary sympathy, power that seemed to be absolute and shaken in reality, power that was shaken by the resistance of the subject are discovered. In Goryeosokyo, absolute power which is presented in a dual relationship between the subjects, power shaken by the gaze of the witness are discovered. These seemingly chaotic aspects of power show characteristics that indicate the absolute power is dominant and resistance power is partial in the relation of two powers. Likewise, absolute power has been usually symbolized as a power representing the ‘center’ such as a god, a religious being, a king, etc. whether it is robust, shaky or irresistible. In contrast resistance power has been symbolized as a power representing the ‘periphery’ against dominant absolute power. These two powers show the expansion of the slope in the poetry of late Choseon Dynasty, Saseolsijo. In the case of absolute power, a new form of power that is targeted by women appears as well as the power pattern seen in the previous poetry and in the resistance powers, resistance to the central force by ordinary and everyday figures(especially women and children) surfaces. These two powers, absolute power and resistance power, reveal their cultural implications in mutual antagonism in the historical flow of poetry. In other words, the absolute power that dominated the Middle Ages begins to reveal cracks in the poetization of everyday life and the works dominated by everyday life also have begun to show a huge sketch of cultural power in this period by positive raising the question of center-centeredness and the aesthetic tension of the lyric-narrative. These aspects of power can be more meaningful in relation to the macro power structure on the back that operates it. However, it is meaningful in that they are clear visible that the aesthetic tension between mainstream discourse and peripheral discourse has begun to be made.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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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의 미간행 육필 <백학선전> 영역본 고찰

이진숙, 김채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4집 2016.12 pp.499-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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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캐나다 토론토대학 토마스피셔 희귀본장서실 『게일 유고』 소재 미간행 육필 <백학선전> 영역본의 원문과 그에 대한 우리의 재구본을 학계에 소개하며 이에 대한 해제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는 게일 영역본이 경판계열 즉 <경판24장본>과 <경판20장본> 중 <경판20장본>을 번역저본으로 삼았음을 확인했다. 게일의 <백학선전> 영역본은 다른 미간행 육필 고소설 영역본들과 같이, 완역과 직역의 번역양상을 보여준다. 게일은 <경판20장본>의 뜻뿐만 아니라 언어적 표현을 번역에 반영하려고 하였고, 어휘 단위에서도 누락이 거의 없다. 게일은 <백학선전>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보고 그 속에 담긴 언어적 표현을 담으려고 하고 문학작품의 다층적 의미를 담지 하는 번역을 보인다. 게일의 이러한 번역양상은 한국 사회와 문화를 반영할 수 있는 견우직녀설화의 틀 안에서 <백학선전>을 확대, 누락, 축소한 알렌의 번역양상과 비교해 볼 때 더욱 두드러진다.
The paper aims to introduce to the Korean academic the unpublished handwritten English translation "Paik Hak Sun(White Stork Fan, 白鶴扇)" located in James Scarth Gale Papers, a collection of the Thomas Fischer Rare Book Library at the University of Toronto in Canada. It also provides introduction to translation practices of Gale's Paik Hak Sun. Gale's Paik Hak Sun uses the 20-sheet Paik Hak Sun Chun as its source text. It is based on the comparison between a 24-sheet version and a 20-sheet version and Gale's Paik Hak Sun. Gale's translation in Paik Hak Sun is more literal and complete than other his unpublished translations. Gale tried to represent the linguistic expression as well as its meaning of the source text. Gale's translation practices are revealed more evidently compared with Allen's Pai Hak Sun Chun which is more liberal in expanding, reducing and deleting the source text. Through the comparison of two texts, we can find that while Allen is directed to reduce the novel Paik Hak Sun Chun into the frame of Kwain-oo and Ching yuh tale and represent the traditional view of Korean women Gale tries to convey multi-layered interpretations included in the source text.

18,4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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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설의 서사방식 변화와 필사 시기 추정의 상관성에 대한 시론

한영균, 유춘동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4집 2016.12 pp.605-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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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글 필사본 고소설 중에서,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여 필사한 국한혼용문(國漢混用文) 고소설의 등장 배경, 서사방식(書寫方式)이 지닌 의미, 이후 필사본에 생긴 변화 및 생성 시기의 문제 등을 다룬 것이다. 국한혼용문 고소설은 크게 (1)한글과 한자를 혼용한 것(國漢文混用文), (2)한글과 한자를 병기하여 표기한 것(國漢文幷行文), (3)한자를 주로 사용하고 한글을 종(從)으로 사용한 것(漢文懸吐本)으로 유형을 나누고 있다. 고소설 전공자들은 이러한 유형의 국한혼용문 고소설의 존재를 잘 알고 있으며, 작품을 연구할 때 이본군(異本群)에 포함시켜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자료들을 단순히 후대에 필사되었다고만 언급하거나 생성 시기가 후대인 이유로 이본 연구에서 제외시키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이러한 이본군의 서사방식이 지닌 의미, 언제, 어떠한 요인에서 산출되었으며, 이본으로서의 가치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시론적 연구인데, 요약하면 국한혼용문은 20세기 이전의 고소설 자료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서사방식이며, 근대적 국한혼용문의 등장과 함께 이와 관련된 문학사(文學史) 관련 자료들이 등장 및 확산하면서 생긴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본군이 필사되거나 산출된 시기는 대체로 1910년 이후로 보아야 하며, 이러한 사회, 문화적 분위기를 반영하여 자료의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들의 판단이다. 국한혼용문 고소설은 단순히 일반대중들의 독서물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현대적 국한혼용문의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고 여겨지는데, 이 글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이 문제는 차후 과제로 남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meaning, matter of time for creation, and background of narrative in classical novels with the use of Mixed Scripts Korean and Chinese selecting classical novels transcribed in Hangeul. Generally, classical novels written in mixed Scripts can be classified into (1) those with mixed use of Hangeul and Chinese characters, (2) those using Hangeul accompanied with Chinese characters, and (3) those using Chinese characters primarily and Hangeul secondarily. Majorities of the researchers in classical novels are well aware of the presence of the classical novels with mixed scripts tend to include different versions, too, when they study the works. These materials, however, have been often transcribed by next generations just obscurely or become excluded from discussion. Therefore, we cannot discuss the meaning of narrative in those different versions or when exactly they were provided for which factors. Considering those issues, we are to examine the meaning, matter of time for creation, and background of narrative in classical novels in mixed scripts mentioned earlier. This study is based on a series of work regarding the formation of Contemporary Mixed Scripts of Korean, and the discussion proceeds by figuring out the amount of classical novels in mixed scripts which are relatively many now. In conclusion, the use of mixed scripts is not found in classical novels before the 20th century, and it appeared along with the appearance of materials related to history of literature in mixed scripts. Therefore, we think that the creation or production of the works group should be around that periods and also conclude that classical novels in mixed scripts play crucial roles in the formations of Contemporary Mixed Scripts. This study deals with introductory discussion about connection between classical novels with mixed scripts and Contemporary Mixed Scripts, and follow-up research will have to be done about this matter further afterwards.

6,1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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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한국학자, 이익습(李益習, Yi Ik-seup)과 The Korean Repository誌의 ‘훈민정음 기원론’ 논쟁

이상현, 빈첸자 두르소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4집 2016.12 pp.629-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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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1892년, 1896년 The Korean Repository 소재 익명의 한국학자, 이익습(李益習, Yi Ik Seup)의 ‘훈민정음 기원론’을 고찰하는 데에 있다. 특히 그가 한국개신교 선교사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의 ‘티베트어 문자기원설’을 반대하며 그와는 다른 ‘발음기관 상형설’을 제기한 모습과 이후 두 사람 사이 펼쳐진 지면논쟁에 대해 살폈다. 이익습, 헐버트 두 사람의 훈민정음 기원론과 이후의 지면논쟁은 동일한 한국 측 문헌자료를 기반으로 했지만, 한글을 바라보는 서양과 한국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언어관 및 문화전통의 만남을 함의했다. 이익습은 헐버트의 ‘훈민정음 기원론’을 통해 서구의 역사비교언어학적 지식을 접촉할 수 있었지만, 이를 수용할 수는 없었다. 이에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훈민정음의 제자원리와 관련된 당시의 통념이자 동양의 언어학적 지식을 제시해 주었다. 두 사람의 서로 다른 훈민정음 기원론과 지면논쟁은 결코 서로에게 생산적인 새로운 논의의 지평을 열어 주지는 못했다. 한글을 바라보는, 서구의 역사비교언어학과 조선의 유학이라는 서로 다른 두 시각은 ‘티베트어 문자기원설’(헐버트)과 그에 대한 부정(이익습)이란 형태로 반복되었을 따름이다. 이익습에게 헐버트는 한글을 한국의 불교문명 또한 동북아시아의 더 많은 문자체계 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계기였으며, 이는 『훈민정음』에 ‘내재/망각’된 역사이기도 했다. 헐버트 역시 이익습을 통해 과거 한국지식인이 중국 성운학을 매개로 만들었던 언어학적 지식을 만날 수 있었다. 이익습은 당시 발견되지 않았던 『훈민정음』(해례본)의 지식을 간접적으로나마 전승, 내면화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당시 자료적 여건 그리고 서양인과 한국인의 상호이해의 한계 속에서 양자의 생산적인 대화는 불가능했다. 두 사람이 훈민정음의 기원문제와 관련하여 제시한 문헌이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료로 한정되는 모습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역사적 사료이자 언어학적 지식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 『훈민정음』이라는 세계에 유례없는 이 서적의 존재를 상상하는 것은, 그만큼 두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This paper investigates 'the origin of Hunmin-jeongeum' claimed by an anonymous Korean scholar, Yi Ik-seup(李益習) in The Korean Repository in 1892 and 1896. Especially, Yi objected to H. B. Hulbert's theory that Hunmin-jeongeum(訓民正音, the Korean Alphabet) derived from the Tibetan. Unlike Hulbert, Yi suggested that the Korean Alphabet was designed after the shape of vocal organs. This paper examines their theories and their following paper debates. Both of them proceeded their claim on the basis of the same literature on Humin-jeongeum. However, their theories were affected by their different backgrounds, that is, the West and the East, so their perspectives represented their different background knowledge of language and traditional culture. Yi could be informed of the knowledge of historical comparative linguistics through Hulbert's theory on origin of Korean alphabet, but he could not accept it. Instead, he provided the prevailing eastern linguistic knowledge regarding 'an explanation of the design of Hunmin-jeongeum”. Their debates on the origin did not provide a new productive horizon of the field. Hulbert's perspective from the western linguistic knowledge and Yi's perspective from the eastern Confucianism trapped in their repetitive fixed claims. However, the encouraging mutual influence was that due to Hulbert, Yi could approach the Korean Alphabet(한글) in the broader letter systems of Korean Buddhism and the northeast Asia. It is true that these backgrounds are implicit in the Korean Alphabet but it has been forgotten in the history of the Korean Alphabet for a long time. For Hulbert, Yi could help Hulbert to approach Korean scholars' linguistic knowledge which was produced through the mediation of the Chinese phonology. It is because Yi is a Korean scholar who internalized the knowledge and transmission of Hunmin-jeongeum (Haeryebon)(『訓民正音』(解例本)). However, their mutual productive contribution was not possible under the cultural environment at that time. It is well revealed in the fact that their theories were only grounded by the limited historical reference regarding the origin of Hunmin- jeongeum. It is well-known that hunmin-jeongeum is evaluated to be an unprecedented alphabet system which includes not only linguistic knowledge but also the historical materials. It means that regrettably Hunmin-jeoneum was beyond Hulbert and Yi's limited knowledge and imagination.

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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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說時調와 淸代 時調의 언술방식과 주제적 지향 비교

이진녕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4집 2016.12 pp.663-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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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유의 장르인 사설시조(辭說時調)와 함께 동아시아 문화권 내에서는 이와 비슷한 시기 중국의 청대에도 시조(時調)라고 불리는 시가 장르가 존재하고 있어 주목된다. 대체로 시정 남녀의 사랑을 노래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외에도 매우 다양한 소재들을 다루고 있다. 대다수가 작자미상의 작품으로 민간에서 유래하고 성행하였으며 언술방식과 표현에 있어서도 구어체를 사용하고 있다. 아울러 반복과 나열 어법의 사용을 통해 풀이성을 극대화하는 사설시조와도 유사한 형식적인 자유로움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하므로 사회 경제적 상황 및 사상적 배경과 같은 외적인 측면에서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특히 상공업이 발달한 도시의 시정 및 유흥공간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작품의 형식과 주제적 지향 면에서는 비교적 뚜렷한 차이점도 존재한다. 하여 본고에서는 양국의 대표적 가집을 중심으로 청대 시조를 비교하여 우선 언술방식과 주제적 지향 면에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피고 그 의미를 분석하였다. 이 글에서는 먼저 장르적 유사성과 소재적인 공통성 및 시대적 성격에 주목하여, 이를 중심으로 문학적 유사성과 변별성을 비교하여 살피고 그 의미를 규명하였다. 그리고 해당 시기의 큰 문화권 내의 흐름 속에서 고찰하여 민족어시가가 내재된 미학적 특징도 조망해 보았다. 비교를 통해 살펴본 대로 사설시조와 청대 시조는 비록 일부 차이점이 존재하지만 대체적으로는 여러 가지 측면에 있어서 다양한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현실적인 차원에서의 미감을 공유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비록 각자 다른 민족언어로서 작품화 하였으나 결국 여러 가지 비슷한 양상을 보였고 차이점도 나타났지만 이를 통해 볼 때, 공동문어문학 외에도 문명권의 동질성을 보여주는 작용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해당 두 장르가 성행한 시기 양국의 문화적인 특징도 고스란히 담아냈다. 이러한 지점에 국한시켜 본다면, 사설시조와 청대 시조는 동류의 성격이 강한 시가라는 사실을 규명할 수 있으며, 동아시아라는 특정 공간을 무대로 함께 성장한 독특한 시가장르임을 알 수 있다.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a kind of Korean vernacular poetry called Saseol-Sijo, formed and became to contribute to expressing the unique ideas and emotions of Korea. Interestingly, it is a remarkable fact that in the East Asian culture sphere, there is a poetry genre also called Sijo in the China’s Qing Dynasty. Love between men and women of the market places is often explored. Besides, there are a lot of other themes too. Most of them are works of unknown authors, and they were performed and handed down among people. In expressions, this genre uses quite a few spoken form and dialects. In addition, in terms of the freedom of the form, the Chinese Sijo have much in common with Saseol-Sijo which by using the expression of repetition and enumeration to maximize the extensibility. Besides, because Korea and China are belong to the same East Asian culture sphere, they are closely related to each other in terms of their socioeconomic impacts and ideological backgrounds. In particular, there is a common point which these two genres both have a strong foundation in the market places of the industrial and commercial cities and entertainment spaces. So in this paper, by doing the comparative research between the Korean Saseol- Sijo (focusing on the representative works which are Chungguyungeon and Haedonggayo) and Chinese Sijo in Qing Dynasty (focusing on the representative works which are Nishangxupu and Baixueyiyin), the author found th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between them and explained their meaning. In this article, firstly the author paid attention to the similarity of the genre, the community of the material, and the spirit of the age. Focusing on these, the author investigated th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in literature between them and explained their meaning. And then, with extending the thesis to the socioeconomic impacts and ideological backgrounds of that period, the author analyzed the thesis in the East Asian culture sphere, presented a panorama of inherent aesthetic characteristics of this poetry genre, and put forward the new views. Though the comparative research between the Korean Saseol-Sijo and Chinese Sijo in Qing Dynasty, the author found that there are many similarities in various aspects between them and they sharing aesthetics on a practical level too. If we limit it to this point, we can find out that the similarity between the Saseol-Sijo and Chinese Sijo in Qing Dynasty is so strong that they could be regarded as the same genre. Besides, the genre could be described as a unique poetry genre growing on the stage called East Asian in the rapidly changing times.

11,4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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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보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4집 2016.12 pp.72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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