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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상고전연구 [Yeol-sang Journal of Classical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열상고전연구회 [Society of Yol-Sang Academy]
  • ISSN
    1738-2734
  • 간기
    격월간
  • 수록기간
    1988~2018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810 DDC 810
제52집 (15건)
No

[기획의도]

1

4,000원

기획논문

2

고영주 가옥의 중인자료관 활용 방안

허경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2집 2015.08 pp.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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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과 양인(良人) 사이의 신분이었던 중인(中人)은 서울에 주로 살았던 전문직 종사자였는데, 중인들의 종가는 알려진 곳이 없으며, 거주지도 확실한 곳이 많지 않았다. 옥계사(송석원시사) 주인 천수경(千壽慶)의 집터만 추사 김정희가 써준 바위글씨 송석원(松石園)의 위치를 확인하여 종로구 옥인동 47번지 일대로 확정할 뿐이었다. 서울시에서 종로구 필운동 88-1번지에 있는 문화재 급의 한옥을 매입하여 보수하고, 민속문화재 제33호로 지정하여 홍건익가옥(洪建翊家屋)으로 명명하였다. 홍건익이 어떤 인물인지 확인할 만한 기록이 없는데, (구)토지대장과 (구)가옥대장을 확인한 결과 이 집터에는 홍건익 이전에 고영주(高永周)가 살았음이 확인되었다. 고영주는 한어(漢語) 역관이며, 그의 형제들은 한어와 일어(日語) 역관, 영어(英語) 번역관으로 활동하였다. 형제와 조카들도 필운대 주변의 옥동, 통동에 거주하며 역관이나 외교관으로 활동하여, 서촌(西村)이 중인 역관들의 거주지라는 통설이 입증되었다. 고영주 형제는 개화기에 역관으로 활동하며 외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고영철의 아들 고희동은 한국 최초의 화가로 활동하였다. 이들 형제를 비롯한 중인들의 자료는 전기(傳記), 시문(詩文), 기행문(紀行文), 편지(便紙) 등이 방대한 분량으로 남아 있는데, 이들 자료를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연구자와 일반 시민들에게 제공할 필요가 있다. 중인 고영주의 집터에 세워진 홍건익가옥을 중인자료관으로 활용하여 다양한 중인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할 수 있는 중인 연구의 기지로 삼기를 제안한다. 일반시민들에게는 흥미로운 디지털 중인전시관으로도 공개할 수 있다.
The class system in the Chosŏn dynasty was divided into the three grades: aristocrats(yangban, 兩班), commoners(yangin, 良人), and base people(ch’ŏnin, 賤人). However, some middle people(chungin, 中人) responsible for professional services lived in the capital of Seoul. In contrast to the yangban who were selected for jobs through the military and civil service examination(munmukwa, 文武科), they took the miscellaneous examination(雜科) to become interpreters(譯官,) physicians(醫員), and lawyers(律士) or the technical examination(取才) to become court painters (畵員), musicians(樂工), accountants(算員), and lower clerks(書吏). Interpreters lived in Inwangsan’s Sŏch’on(西村) for convenient access to the Office of Interpreters (司譯院) or in Chongno to easily sell merchandise. Since the city of Seoul issued its ‘Statement on Seoul Hanok’ in 2008 and encouraged its denizens to build hanok, it also purchased hanok from owners who wished to sell them and used them as ‘public hanok.’ Although the city purchased a site of 740.5㎡ with a hanok of 142.14㎡ in Chongno-ku P’irun-dong No. 88-1, the city petitioned to have the building designated as a cultural heritage as it was a beautiful building over eighty years old. This hanok was outfitted with a doorway, servants’ quarters, guesthouse, and main building, complete with a taegŭk symbol on its walls; thus it was designated as Seoul’s Cultural Heritage No. 33. The public name of the building was ‘The House of Hong Gŏnik (Hong Gŏnik kaok, 洪建翊家屋)’ but all we know today is that someone by the name of Hong Gŏnik built the house; his identity remains a complete mystery. In the process of verifying the building’s land and house registries, I found that the first owner of the site was Ko Yŏngju. The land registry notes that the land was assessed for taxation purposes, demonstrating that Ko had already been living there at the time that Korea’s modern land registry was first compiled in 1912. Since the house registry states that Hong first started building his house there in 1934, it is unclear as to when Ko first built his own house. The site of Ko’s house was known as the biggest in Sŏch’on at 467 p’yŏng (1543.8㎡), and then partitioned into today’s area of 224 p’yŏng (740.5㎡) after Hong. If the letters exchanged between Chosŏn interpreters and Chinese and Japanese literati are to be studied through this method, we will then be able to observe cultural exchange in 18-19thcentury East Asia in a single glance. If the interpreter KoYŏngju’s residence is used as a digital chungin source archive, then the evidence of East Asian cultural exchange in the form of travelogues, letters, Classical Chinese poetry, and paintings can be seen digitally, and joint studies between scholars of different nations in diverse ways will be feasible, all in the house of a 19thcentury interpreter.

6,700원

3

Lost and Found : Go Hui-dong and Diamond Mountain

Kim, Sung-lim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2집 2015.08 pp.3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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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화가 춘곡 고희동(1886-1965)과 그의 작품세계에 대하여 두 가지를 중심으로 연구했다. 첫째, 한국미술사에서 고희동의 의미와 기여를 알아보았다. 고희동은 한국인 최초의 서양화가로 널리 알려졌으나 본 연구에서는 혼란스러운 격동기인 20세기 초를 살았던 그가 화가로서 또한 민족주의자로서 겪었던 갈등과 그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떻게 작품 활동을 하였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일본유학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화가로서 고희동은 새로운 접근법과 풍경에 대한 객관적 표현을 시도함과 동시에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민족주의자로서 한국의 민족정기와 정체성, 그리고 자부심등을 보존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였다. 그는 역사적, 문화적 혼란기에서 그가 맞닥뜨린 여러 가지 미술양식, 기법과 재료들에 대한 모순과 갈등적 요소를 해결 또는 청산하고 끊임없이 절충하고 융합하여 독특하고 새로운 미술세계를 개척해냈다. 둘째, 이 연구에서는 한국회화사에서 오랜 전통을 가진 금강산도가 일제강점기에 고희동과 그의 지식인 동료들에게 어떤 상징적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았다. 민족주의자로서 고희동은 금강산이 완전한 자연미의 덩어리 일 뿐만 아니라 한국과 한국인의 민족정신, 그리고 자부심 을 대표하는 영산이라 여기며 금강산도 연작활동을 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고희동의 현존하는 금강산도를 살펴보는 동시에 그동안 한국미술사가들에게 원작이 망실되어졌다고 알려진 1934년 고희동이 서화협회전에 출품했던 <금강오제>를 소개하였다. 1930년대 한국학생회를 통해 미국 뉴욕에 위치한 콜롬비아 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에 기증된 이 작품은 동아시아 도서관 소장품으로 지난 1970년대까지 도서관에 전시되어졌다. 최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보존연구실 팀에 의해서 복구된 금강산의 진주담을 그린 이 작품은 현재 한국에 남아있는 1940년과 1946년에 제작된 <진주담도>보다 더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고희동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뿐 아니라 1930년대 강점기에 민족정신과 자부심을 복구하려던 한국 미술가들과 미술세계를 이해하는데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This paper has two objectives. First, it explores the contributions of Go Hui-dong (1886–1965) to Korean art history. He is best known as Korea’s first Western-style painter, but here I focus on his struggles, how he tried to define himself as artist and nationalist in the tumultuous and confusing first half of the twentieth century. As an artist, Go experimented with new approaches, trying to produce “objective” representations of actual scenes, while at the same time seeking to preserve Korean national spirit, values, identity, and pride. He navigated the turbulence of his time, adjusting and compromising along the way, to resolve contradictions and conflicts in style, methodology, and media. The second part of the paper examines the painting tradition relative to Korea’s beautiful and beloved natural wonder, Diamond Mountain of Geumgang-san, and explores its symbolic role for Go Hui-dong and his intellectual colleague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s a nationalist, Go found that Diamond Mountain could represent not only the pure beauty of nature in general, and the Korean landscape in particular, but also the pride and spirit of the Korean nation. A significant aspect of this paper is its introduction of Go’s rediscovered Jinju Pond painting in the collection of the Columbia University East Asian Library in New York. Once thought lost, it provides a missing link in Go’s artistic development of the 1930s. The painting, through its bold depiction of a part of Diamond Mountain, also expresses a determined, forward-looking Korea, struggling to emerge from foreign control.

10,800원

4

NegotiaModernity : Elegant Gathering by Go Huidongting

Kim, Ji-yeon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2집 2015.08 pp.9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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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한국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1886-1965)의 <아회도>에 대한 분석이다. <아회도>는 고희동의 집에서 열렸던 “일기회”라는 모임을 그린 것으로 고희동의 아들 고흥찬의 증언에 의하면 모임에 참석했던 위창 오세창(1864 -1953), 육당 최남선(1890-1957) 등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전통적인 아회도의 형식을 채택하여 그려졌으나 기존 아회도의 정형성을 탈피한 즉각성, 친밀감 등 근대성의 지표가 발견된다. 이 작품이 제작된 배경에는 고희동이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이후의 교유관계, 특히 중인출신 문인과 서화가들과의 공고한 네트워크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지만 작품 자체는 전통아회도와 사뭇 다른 시각으로 그려져 있어 고희동의 서양화가로서의 역량을 보여주는 동시에 가족, 교유관계를 포함한 그의 일상에의 잔잔한 근대적 묘사를 찾아볼 수 있다. 이 논문은 고희동의 작품 <아회도>에 나타난 근대성의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근대 화단에서의 주도적인 정치적 역할과는 달리 근대화가로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지녔던 고희동의 예술적 성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This paper discusses Elegant Gathering by Go Huidong (1886-1965), who is best-remembered as the “first Western-style painter of Korea.” Depicting a small gathering of the artist and his circle of friends, including the art collector and critique O Sechang (1864-1953) and the poet and historian Choe Namseon (1890-1957), the painting adopts a traditional theme of East Asian literati painting. It appears as a mildly modified version of a literary gathering painting, depicting a group of literati enjoying wine, poetry, and art, in a tastefully arranged setting. A closer look at the painting, however, reveals that it deviates from the old stereotypes long been used in the literary gathering theme and suggests the roles of the participants in a new way. This paper attempts to explore the multi-layered meanings of the painting by highlighting Go Huidong’s intensive networking within his artistic circle as well as his often self-doubted role as modern artist in Colonial Korea. Modernity, although largely negotiated, defines the painting both in its visual directness and in its way of reflecting the artist’s reaction to social changes.

6,400원

일반논문

5

滿殿春別詞의 名義와 性格에 대한 연구

손종흠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2집 2015.08 pp.119-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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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는 매우 특수한 형식과 내용을 가지고 있는 시가(詩歌)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니고 있는 형식적 특성이나 내용적 성격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렇게 된 이유로는 첫째, 작품의 명칭이 가지는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점, 둘째, 작품의 형식적 통일성을 올바르게 찾아내지 못한 점, 셋째, 내용적 일관성을 밝혀내지 못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작품의 명칭에 대한 해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자 그것과 내용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게 되었으며, 내용의 일관성 역시 발견하기가 어렵게 됨으로써 전체적인 해석이나 이해가 난관에 봉착했던 것이다. 더구나 ‘만전춘별사’의 형식은 동일한 형태의 주기적 반복 구조를 가지는 일반적인 문학적 형식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구조적 통일성을 찾아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만전춘별사’는 작품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 특성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종합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작품으로 취급되었고, 그러한 현상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만전춘별사’에 대한 이해와 연구를 어렵게 만드는 주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작품의 명칭에 대해 정확하고 올바른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내용과 형식이 가지는 일관성과 통일성을 밝혀내기 위한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명칭은 대상의 본질을 함축적이면서도 종합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므로 이것을 통해 대상의 본질적 성격을 가장 정확하게 밝혀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본 논문에서는 ‘만전춘별사’의 내용과 형식에 가장 잘 부합하는 측면에서 명칭에 대한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작품의 문학적 성격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도록 연구의 방향을 잡았다. ‘사랑의 종말에 대한 노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만전춘별사’는 중국 송(宋)나라 때 성행한 사(詞)문학에 기반을 두면서도 음악성을 배재한 시문학의 양식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것으로 첫째, 두 개의 장(章)이 마주보는 대련(對聯)의 형식, 둘째, 동일한 형태의 행(行)을 반복하는 형식, 셋째, 장의 마지막 구절(句節)을 반복하는 형식, 넷째, 사랑이 끝남을 알리는 징조, 사랑이 끝나는 순간, 사랑이 끝난 후의 상태를 소재로 한 화자의 정서를 표출하는 내용 등의 특성을 가지는 노래임을 밝혀낼 수 있었다. ‘만전춘별사’에 대한 이러한 연구는 작품이 지니고 있는 문학적 특성을 체계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함으로써 민족의 노래인 속요(俗謠)가 간직하고 있는 예술적 아름다움을 한층 분명하게 밝혀내는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Although ‘Manjeonchunbeolsa’ has a very specific form and content as a classical poetry, there has not been much discussion of ‘Manjeonchunbeolsa’ regarding its characteristics of content or form. There are several reasons. Firstly, failure to truly understand of the meaning of the name of ‘Manjeonchunbeolsa’, secondly, failure to properly figure out the formal unity of ‘Manjoenchunbeolsa’, and thirdly, there is the failure to find out the coherence of the content. The poor interpretation of the meaning of the name of ‘Manjoenchunbeolsa’ led to the failure to find out connection between ‘Manjoenchunbeolsa’ and its content and this condition resulted in difficulty to find out the coherence of the content. Therefore, eventually there was a difficulty to understand the whole interpretation or understanding of ‘Manjeonchunbeolsa’. In addition, it was not easy to find out its structural unity because the form of ‘Manjoenchunbeolsa’ shows noticeable difference with the form of general literature which has an identical conformation and regular and repetitive pattern. Thus, ‘Manjoenchunbeolsa’ has been continuously treated as difficult literacy work to make a comprehensive interpretation through its unique characteristics. To address this issue, it is key point to find out the main cause that make it difficult to study and understand about ‘Manjoenchunbeolsa’. It is as a starting point for finding out the consistency and unity of form and content through attempting to right interpretation about the name of literature. As name of the literature includes the nature of the subject implicatively and comprehensively it is considered that an intrinsic attribute of the subject could be figured out through the name of the ‘Manjoenchunbeolsa’. Based on these ideas, this paper will attempt to interpret the name of the ‘Manjoenchunbeolsa’ by considering its content and form in order to properly understand about the characteristics of literacy writing. ‘Manjoenchunbeolsa’ can be construed as ‘the song for the end of love’. It is based on ‘SA’ literature in the ‘song’ dynasty and is made in the form of poetic literature regardless of musicality. Firstly, the two chapters are composed of distich format and secondly, there is a format that a row of identical conformation is repeated. Thirdly, there is a format that the last phrase is repeated. Fourthly, it can be found that some characteristics of the poetry are based on an expression of narrator's feeling about the sign, the moment and after the ending of love. This study about ‘Manjoenchunbeolsa’ can reveal its own literary characteristics via systemic and specific ways. Thus, this study about ‘Manjoenchunbeolsa’ is expected to become a good stepping stone to discover the artistic beauty of Sok-yo.

8,100원

6

洪吉周對 『詩經』 的理解與運用

최묘시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2집 2015.08 pp.157-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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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吉周(1786~1841)는 호가 沆瀣, 조선 正祖시기에 道學과 古文의 合一이란 관점에서 文章을 중시했던 古文家였으며, 儒家 경전에 精通하였고 많은 작품을 남겼다. 홍길주가 살았던 조선왕조는 마침 중국 청나라 시기였으며 청나라의 문화와 사상은 조선왕조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조선왕조는 유교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유교경전은 줄곧 유학자들의 핵심 연구대상이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洪吉周가 문장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六經의 내용을 빈번히 인용하였는데, 그 중 특히 『詩經』에 매우 익숙하였다. 洪吉周의 문장을 살펴보면 『詩經』의 내용을 익숙하게 자신의 논술에서 활용했는데, 이를 통해 그의 『詩經』에 대한 조예와 선호를 짐작할 수 있다. 洪吉周는 개성이 두드러지고 多產적인 문인이나 『詩經』에 대한 전문적인 저술은 없다. 그러나 그의 문장을 살펴보면 『詩經』과 관련된 구절을 곳곳에 발견할 수 있으며, 『詩經』의 내용을 익숙하게 인용하여 당대 『詩經』의 理解와 수용 양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洪吉周의 『詩經』에 대한 理解와 運用 등 내용에 대한 연구는 현재까지 학술계에서 많이 주목받지 못하였는데 본고의 분석은 洪吉周의 중국 고대 문화의 이해에 따른 구체적인 활용을 살피는 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본고는 『현수갑고(峴首甲藁)』, 『항해병함(沆瀣丙函)』, 『표롱을첨(縹礱乙懺)』, 『숙수념(孰遂念)』에서 나타나는 『詩經』과 관련되는 시구 및 『詩經』의 원문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주로 洪吉周의 『詩經』에 대한 理解, 運用, 그리고 『詩經』을 통해 본 전통문화에 대한 중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洪吉周의 『詩經』에 대한 理解와 수용 양상을 살펴봄으로써 한 특정시기에 『詩經』이 사회에 침투되어 인용된 양상, 당시의 학자들이 『詩經』에 대한 解讀의 한 측면, 및 당시 시대 배경 하에 학자들의 사회문화 발전에 부합되는 요소 등을 반영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Heung Gilju was born in 1786, and died in 1841, his alias was 沆瀣. He was a Korean scholar of Chinese ancient literature in 正祖 period of Joseon Dynasty. He had great knowledge of Confucian classics, and wrote many books. The time he lived was the time of Qing Dynasty of China, the culture of which had great influence on the Korea. The Korean Empire imported Chinese Confucian thoughts, including its literature, of which especially The Book of Songs was very popular one, and reached its climax in the Joseon dynasty. As a prominent personality and prolific writer, he was not specialist of the Book of Songs, however, it is not difficult to find citations of the Book of Songs in his articles and works. Therefore, Heung Gilju is a typical representative in this social and literary background. This paper summarized and analyzed the citations of the Book of Songs or related words of the Book of Songs from his four works "峴首甲藁", "沆瀣丙函", "縹礱乙懺" and "孰遂念", in trying to show the understanding and application of the Book of Songs, to reflect the specific interpretation of the Book of Songs in average scholars of his time and the call of the development of social culture from his time. According to my understanding, the academic circle has not been given enough attention to this topic so far, but Chinese cultural acceptance and understanding of Heung Gilju have an important implication apparently.

5,800원

7

불교 관련 속담을 통해 본 속담의 파생 양상

이황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2집 2015.08 pp.17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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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 말하는 불교 관련 속담이란 불교와 관련된 어휘가 들어간 속담을 일컫는다. 필자가 속담사전에서 찾아 정리한 불교 관련 속담은 대략 400개가 된다. 하지만 그 중 2개 이상의 속담이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는 유사 속담이 69개 항목(203개 속담)에 달한다. 그리고 의미가 다른 속담인데도 유사한 형태와 구조를 하고 있는 속담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곧 민중이 속담을 유통시키는 과정에서 모방이나 제2의 창조 방식으로 새로운 속담을 생성시키고 파생 시켜왔음을 짐작케 한다. 이에 필자는 본고에서 불교 관련 속담을 대상으로 하여 속담이 어떠한 방식과 유형으로 파생되는지 그 양상을 살펴보았다. 본고에서는 불교 관련 속담의 파생 유형을 ‘동의 속담으로의 파생’과 ‘이의 속담으로의 파생’ 두 가지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그리고 와전 현상으로 인한 파생은 그것이 민중의 의도에 의해 파생된 앞의 두 유형의 파생과는 달리 민중의 착각이나 오해에 의해 의도치 않게 파생되었다는 점에서 다소 특이한 사례라 판단되어 별도의 항목으로 다루었다. 본고는 불교 관련 속담을 중심으로 속담의 파생 양상을 살펴본 것이긴 하나, 이를 통해 속담이 보통 어떠한 방식과 유형으로 파생되는지 속담 파생의 전반적인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리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In this study, the reason why there are many similar ones in Buddhism-related proverbs is due to various and active derivation within the boundary of Buddhism. This paper divided the derivation type of Buddhism-related proverbs into ‘derivation to proverbs with similar meaning’ and ‘derivation to proverbs with different meaning’, and it also examined proverbs whose meaning was distorted over time. The various and profuse derivation of Buddhism-related proverbs proves the active participation of the public in the creation, distribution, and derivation of them. Their active participation was possible because Buddhism was always existent in their lives either in visible or invisible forms and they found and used materials for proverbs in the religious characteristics of Buddhism. It is thought that the derivation type and aspects of proverbs examined in this paper would not be limited to Buddhism-related, but could be applied to other proverbs.

7,300원

8

『事文類聚』의 조선 수용과 전개 - 관판본으로부터 방각본, 필사본에 이르기까지 -

최영화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2집 2015.08 pp.21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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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중국문헌인 「사문유취」의 영향력의 자장 안에서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사문유취」를 활용하였는지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중국문헌이 조선적인 맥락에서 수용되는 과정을 추적해보았다. 본고는 우선 「사문유취」가 조선에 유입되어 관판본으로 간행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15세기에 최초로 조선에 유입되어 금속활자로 간행된 「신편고금사문유취」가 祝淵의 遺集이 포함되지 않은 원대 간본임을 밝히고, 신묘본 「사문유취」의 간행연대를 확정하였다. 다음으로, 「사문유취」를 저본으로 축약 간행된 방각본 판본의 계통관계를 정리하고 이러한 축약본이 제시하는 지식의 범주를 개략적으로 밝혔다. 다음으로, 현재 각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사문유취」의 필사본들을 조사하여 제시하고 필사 경향을 분석하였다. 마지막으로 「사문유취」의 체제를 모방한 조선의 유서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를 통해 조선의 지식인들이 다양한 층위에서 「사문유취」를 수용하고 자기화하였음을 논증하였다.
This paper examined whether intellectuals of Chosŏn used the Chinese document, 『Shiwenleiju(事文類聚)』, within its influence and traced the process of Chinese documents being accepted in Korean context. This paper first looked into the process that 『Shiwenleiju』 was introduced to Chosŏn and published as government publication. It found out 『Xinpiangujin Shiwenleiju(新編古今事文類聚)』, which was first introduced to Chosŏn in the 15th century and was published as metal type, was the original printed book that did not include Jooyeon’s manuscripts, and clarified the year that Shinmyo version(辛卯本) of 『Shiwenleiju』 was published. Then, it organized the lineage relationship of commercial publications that were made by summarizing the original script of 『Shiwenleiju』, and roughly showed the scope of knowledge that such simplified version suggests. After that, the manuscripts of 『Shiwenleiju』 that are currently kept in libraries were examined and presented, and the trend of transcription was analyzed. Lastly, similar books of Chosŏn that imitated the system of 『Shiwenleiju』 was studied. Through this process, it was proven that intellectuals of Chosŏn accepted 『Shiwenleiju』 and adapted it as their own in several levels.

6,700원

9

<이씨효문록>의 ‘효’ 관련 서사와 다층적 서술의식 연구

김동욱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2집 2015.08 pp.239-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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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이씨효문록>의 주제를 ‘효’로 파악한 기존 논의를 출발점으로 삼아 <이씨효문록>에 대한 한 단계 심화된 이해를 목표로 수행되었다. <이씨효문록>은 이명현의 서사와 이재희의 서사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명현의 서사는 유부인과 이명현의 ‘악모선자(惡母善子)’형 갈등구조를 중심으로 한다. 그러나 유부인은 천성적 악인이라기보다는 나름의 현실적인 동기를 지닌 인물로 형상화되어 있었으며, 이명현의 효행에 대해서는 한편 감탄하면서도 이를 무정한 행동으로 여기는 등 선인과 악인에 대한 이분법적 시선이 약화되어 있었다. <이씨효문록>의 후반부는 전반부와 달리 손윗사람의 명에 곧잘 항거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번영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이재희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또 그의 부인 원씨는 추한 외모와 우스꽝스러운 행동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에게 효부로 인정받고 남편에게도 사랑받는다. <이씨효문록>은 전통적인 효행담의 선악구도를 약화시킨 이명현의 서사와, 기존의 효자, 효부 형상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드러낸 이재희의 서사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효’에 대해 다층적인 서술의식을 지닌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This study was conducted with the aim of understanding Leessihyomunrok one step further from the previous research, which concluded the theme of the text ‘filial piety of protagonist Leemyunghyun’. Leessihyomunrok can be divided into the narrative of Leemyunghyun and his second son, Leejaehee. The first half of the work was mainly about the conflict between Leemyunghyun and his mother, Yubuin. Yubuin had been described as a person with real and own motives rather than inherently wicked. Also, the work showed a positive yet negative perspective for Leemyunghyun’s extreme filial piety. The second half of the work made Leejaehee key figures, who often rejected his father’s commands but decisively contributed to the prosperity of the family. Despite the ugly looks and ridiculous behavior, Leejaehee’s wife Wonsi got recognized as filial daughter-in-law for adults and as lovely wife for husband. Leessihyomunrok is a work with a multi-layered narrative consciousness in that it consists of a narrative of Leemyunghyun which weakened the structure of conflict between good and evil in the traditional filial piety story, and of a narrative of Leejaehee which showed a critical attitude towards traditional filial son and daughter-in-law.

6,7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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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世紀韓中傳奇小說的還魂母題比較研究 - 以『金鰲新話』與『剪燈余話』為中心 -

王夢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2집 2015.08 pp.267-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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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말처럼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이러한 거스를 수 없는 법칙에 대하여 사람들은 늘 문학작품을 통해서 영생불멸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을 표출하군 하였다. 괴테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불멸의 증거를 담고 있다고 하고, 노자는 사이불망(死而不亡)이라고 하며 장재는 형궤반원(形潰反原)이라고 하였듯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영생불멸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영생불멸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영원히 살아서 죽지 않는 것이고 하나는 죽었다가 다시 부활할 수 있는 것, 즉 환혼을 말한다. 따라서 본고에서 필자가 주목한 것은 바로 환혼의 경우이다. 필자는 환혼의 종류를 4가지로 나뉘었다. 첫째, 부활(復活), 즉 개체가 죽은 후, 개체의 영혼이 개체로 떠났다가 다시 개체로 돌아오는 경우이다. 둘째, 차시환혼(借尸還魂), 즉 죽은 개체의 영혼이 다른 죽은 이의 시체를 빌려 재 부활하는 경우이다. 셋째, 투태(投胎), 즉 개체의 영혼이 다시 모태에 들어가 재차 세상에 태어나는 경우이다. 넷째, 회생(回生), 즉 죽은 개체의 영혼이 저승으로 떠났다가 다시 이승으로 돌아오는 경우이다. 다만 다시 개체로 돌아오지 않고 영혼의 상태로 이승에서 존재한다. 그동안 한국의 『금오신화』와 중국의 『전등신화』에 대한 비교연구는 많이 진행되어왔지만 『전등신화』의 적류(嫡流)로서의 『전등여화』와의 비교연구는 부족하다고 본다. 본고에서는 『금오신화』가운데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과 같은 성격의 문헌인 『전등신화』 가운데 「가운화환혼기(賈雲華還魂記)」, 「추천회기(秋千會記)」, 「봉미초기(鳳尾草記)」를 검토하여 5편의 작품을 읽었을 때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환혼 모티프와의 대비를 통해 드러나는 변별점과 공통점들을 제시한 동시에 이런 점들이 발생한 이유에 대해 살폈다. 『금오신화』의 환혼 모티프와 『전등여화』의 환혼 모티프의 공통점은 세 가지를 발견했다. 첫째, 여주인공이 남자로 환혼한 경우가 있다. 둘째, 환혼을 이루게 하기 위해 종교의 힘을 빌리는 경우가 있다. 셋째,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에 대한 사랑의 깊이는 환혼을 하게 되는 종류의 설정에 대하여 어느 정도 결정 작용을 한다. 이처럼 공통점을 갖고 있는 동시에 세 가지 면에서의 변별점도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오신화』의 환혼 모티프와 『전등여화』의 환혼 모티프의 차이점은 주로 여주인공 사망의 원인, 환혼의 종류와 환혼의 이유에서 현저히 드러난다는 사실 알 수 있다. 『전등여화』에서는 그녀들의 비극이 봉건예교(封建禮教)의 진부한 누습, 가정의 몰락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금오신화』에서는 여주인공이 전란으로 죽고 한을 품고 있는데 이는 조선 초기 정치적 혼란이 심각했던 사실에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또 하나의 차이점으로 들 수 있는 것은 『금오신화』의 경우 일시적 환혼을 위주로 하는 반면에 『전등여화』의 경우에는 영구적 환혼을 위주로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금오신화』중에 나타난 환혼을 이루게 한 힘(환혼의 이유나 방법)은 모두 천명(天命)인데 『전등여화』의 대부분은 천명이 아닌 지극한 사랑이라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두 가지 사이를 해명하기 위해 두 작가의 신분과 그들의 사상(특히 귀신론)을 살펴서 이유를 도출했다.
Geumoshinhwa(『金鰲新話』) which was written by Kim Si-seup(金時習 1435~1493)in the early Joseon Dynasty(about 1465~1472), and Jeondeungyeohwa(『剪燈余話』)which was written by Li Chang-qi(李昌祺) in the 18th year of the reign of Ming Emperor Yongle(about 1419). One is a Korean work, one is a Chinese work. It seems far away from each other, however, if we pay further attention to these two works, we'll find that there exists a subtle attachment between each other. For example, the two works were both written in fifteenth Century(the founding period of two dynasties), both underwent Jeondengshinhwa(『剪燈新話』)'s influence. So there are a lot of same themes and motifs between Geumoshinhwa and Jeondeungyeohwa. One of the most obvious motif that can be found in these two works is the motif of 'the return of the dead sprit'. This article mainly talks about 'the return of the dead sprit' motif of Geumoshinhwa and Jeondeungyeohwa. Regardless of national differences of China and Korea in these two works, 'the return of the dead sprit' motif based on its universal symbolic has som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which is well worth us to study. The comparative research between these two works can also explain the reasons for this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This paper summarizes three similar points. Firstly, in these two works, there is a same type that the heroines can reincarnate in the form of males. Secondly, the means of religion are found used in the process of resurrection. Thirdly, to a certain extent, the heroines’long-cherished wishes when they are alive play a decisive part in deciding the type of resurrection. This paper also summarizes three different points. Firstly, the difference in the cause of death. Secondly, the difference in the type of 'the return of the dead sprit'. Thirdly, the difference in the reason of 'the return of the dead sprit'.

8,4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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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연본 <춘향전>을 통해 살펴 본 조선성악연구회 <춘향전>의 장면 구성 방식과 그 의미

김남석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2집 2015.08 pp.307-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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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규형의 한문연본 <춘향전>은 창극 연행 대본의 초기 원형을 담고 있는 대본이다. 지금까지 이 작품에 대한 연구는 이에 대한 의의를 밝히는 것에 맞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현재 연구는 이러한 대본의 구성과 형식 그리고 그 목적과 활용 가능성을 점검하는 것으로 이전해야 한다. 본 연구는 한문연본 <춘향전>을 통해 1910년대 창극 대본의 초기 형식을 살펴보고, 1930년대 조선성악연구회의 창극 <춘향전> 대본(개요)와 비교하고자 했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창극 연행 대본의 변모 과정과 정립 과정을 고찰하고자 했다.
Yeogyuhyeong’s Chunhyangjeon written by Chinese is the early origins of Chunhyangjeon drama transcript of Coseonseongagyeonguhoe(Choseon folk music theater). A research to date on a comparison of Yeogyuhyeong’s Chunhyangjeon and Chunhyangjeon drama transcript of Coseonseongagyeonguhoe has focused on the meaning of works as early plays. But a current research interests should be transferred from the previous concerns to the check for the structure and format and purpose and application possibilities of Chunhyangjeon as a Changgeug(choseon folk music) script. This study tries to analyze the early form of Changgeug script through Yeogyuhyeong’s Chunhyangjeon written by Chinese in 1910’s, and compare the early form and form of Chunhyangjeon of Coseonseongagyeonguhoe(Choseon folk music theater). This study tries to investigate the transformation process and established procedures in comparison with Chunhyangjeon written by Chinese and Chunhyangjeon of Coseonseongagyeonguhoe.

6,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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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에서의 패턴 전승과 운율 형성에 대한 고찰 : 소환형 시조를 중심으로

박경우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2집 2015.08 pp.337-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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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시조 초장에 ‘한정어 + 호격 구조’로 일정한 패턴을 보이는 작품군을 중심으로 시조의 창작과 전승이 문학적 관습에 의해 이루어져 왔으며 시조의 운율 역시 패턴을 중심으로 형성 및 전승되었음을 논하였다. 시조에 자주 쓰이는 문장 구조를 패턴으로 명명하였으며, 이런 패턴화가 이루어지는 통사적·화용론적 제약에 대해서 논하였고 이는 다시 운율적 제약으로 연계될 수 있음을 밝혔다. 소환형 시조 68편에 대해 초·중·종장별 패턴을 󰡔역대시조전서󰡕 3,335편을 대상으로 전수 조사하였으며, 각 장별 패턴에 대해 관련되는 작품들을 정리하였다. 세종21말뭉치와 구축된 시조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시조에 패턴 전승 현상을 확인하였으며 패턴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담화 구조 제약을 제시하였다. 시조의 주 담당층이 유학자들이라는 점에서 성리학자들의 지향과 언어적으로 호격 구조 자체가 가지는 제약이 맞물려 담화 구조 제약을 생성하였다. 소환형 시조는 내부 패턴과 외부 패턴을 충분히 활용하면서 동시에 독창적인 표현을 창작하려고 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는 시조 장르가 문학적 관습에 기대면서도 새로운 표현을 갈구하며 그 생동성을 이어간 자취였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고시조 운율론은 창작 당대의 담당자들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운율을 전승하였는가에 주목하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문학적 관습이라는 측면에서 시조의 패턴 전승이 운율의 형성 및 전승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This study shows that the creation and transmission of Sizo had been done by literary convention among the works which are comprised of 'modifier + the vocative case' and has also some poetic patterns in them. Poetic pattern in this paper means the sentence structure which was frequently used in Sizo. This kind of patterning which is affected by syntactic and pragmatic restrictions could be linked with metrical restriction. 68 works of the recalling pattern sizo were examined by the way of checking up their poetic patterns in all the texts(3,335) of (󰡔역대시조전서󰡕) and organizing the related works to each pattern. After ascertaining the pattern transmission in Sizo through Sejong 21 corpus and Sizo Database, restriction of discourse plot was suggested as a main factor which affected poetic pattern. it could be interpreted that restriction of discourse plot in sizo was generated by both poetic orientation of confucian scholars and linguistic structure which is formed by the vocative case itself. It is found that the recalling pattern sizo was utilizing the inner pattern and outer pattern, also trying to make creative expression. This could indicate that Sizo genre had been dependent on the literary convention, and at the same time it had tried to create new expressions for its own generic life. So far many studies on the Sizo Meter have not paid attention on how it transmitted the class in charge of old Szo the meter of Sizo. This study has unveiled that the pattern transmission was closely related to the forming and handing down Sizo's me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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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菴 金在植의 「鄕居四時卽事」에 대한 고찰

이상주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2집 2015.08 pp.375-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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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在植(1860~1928)은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1904년 그의 고향인 지금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외천리에 귀향했다. 그러다 산수가 좋은 지금의 부강면 扶江里로 이사했다. 그는 귀향생활을 하면서 사계절 기간에 직접 목격했던 당시 농촌의 典型的인 실상을 「鄕居四時卽事」 3편 36수의 시에 寫實的으로 그려냈다. 그는 識見을 구비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張喆相의 「松菴孝行記」등의 글을 통해 김재식은 인자하고 善하여 빈민을 구제하고 곤궁한 사람을 구휼하기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그의 자애심과 구휼정신이 당시 대다수 농민들이 4계절 동안에 겪는 삶의 모습 36개 사항을 3편의 「鄕居四時卽事」에 담은 것으로 여겨진다. 「鄕居四時卽事」는 내용상으로 紀俗詩에 해당된다. 김재식의 「鄕居四時卽事」는 당시 扶江一帶의 농민의 어렵고 힘든 생활상을 다룬 農村紀俗詩에 해당된다. 시의 형식은 聯作詩이다. 이는 조선후기 기속시 창작에 적용된 보편적 형식이다. 그가 연작시의 형식으로 시를 지은 이유는, 그가 목격한 농촌의 생활상과 다양한 풍속세태를 묘사하기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鄕居四時卽事」 3편 36수의 시에 담아놓은 내용은 1970년대 중반까지도 거의 볼 수 있었다. 먼저 당시의 전형적인 풍속을 몇 몇 제시해본다. ‘紡績生涯’, ‘赭山拾薪’, ‘殺靑稻’등이 있다. ‘午日禱神分餠’과 ‘招巫賽鬼’을 통해 신령에게 고사를 지내고 안택굿을 하는 풍속도 알 수 있다. ‘假欺’를 통해 紙牌놀이 때 속이는 세태를 알 수 있다. 다음은 당시의 새로운 모습이나 흔하지 않은 장면을 보기로 하자. ‘고추장에 상추쌈 싸먹기(喫萵苣)’와 ‘浪漢歐妻’이 있다. ‘歲初浦女’에 여인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담았는데, 풍속도에서는 종종 볼 수 있으나 시에 언급한 사례는 흔치 않은 듯하다. ‘凉棚會話’에서는 남자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이 보편화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早稻駈雀’에 벼논 주위에 새끼줄을 치고 그 줄을 잡아당겨 참새를 쫓은 방법이 새로운 방법이라고 언급했다. 김재식의 「鄕居四時卽事」 36수는 그 당시 전형적인 농촌의 실상을 읊은 시로는 적은 분량이 아니다. 아울러 1900년대 초 우리 농촌의 실상을 현장을 보듯이 연상할 수 있다. 이렇듯 김재식이 지은 「鄕居四時卽事」 36수는 1900년대초 농촌의 전형적인 農村風俗生活實態를 시로 쓴 농촌생활 詩史이자, 農村風俗寫生畫이라 그 의의를 평가할 수 있다.
Kim, Jaesik(金在植1860~1928) had lived in Seoul and he have gone home at Oechon-ri, Nami-myeon, Seowon-gu, Cheongju-si contemporary, his home town in 1904. In doing so he moved at presently Bugang-ri(扶江里), Bugang-myeon hills and rivers are so good. As he lived his home coming life, he realistical(寫實的) described 3chapters 36 poems through Hyanggeosasijeuksa(「鄕居四時卽事」)about farm's typical(典型的) at that time reality which he has directly observed for four seasons. He was evaluated as a person having insight(識見). This his insight revealed to represent the farming difficulty and poor life and so on, reality facts from at that time farmers through the poems. Kim, Jaesik(金在植)'s Hyanggeosasijeuksa(「鄕居四時卽事」) is belonging to Gi-sok-si(紀俗詩[poem of folklore]). Kim, Jaesik's Hyanggeosasijeuksa(「鄕居四時卽事」) is a Nongchon Gi-sok-si(農村紀俗詩) which dealt with farmer's difficult and hard life conditions at that time Bugang whole place(扶江一帶). The form of poetry is consecutive poem(聯作詩 ). This is a general form to apply at Gi-sok-si writing in late Choson. The reason of his consecutive poem form, this is to think that he saw farm village(Nongchon)'s life condition and a variety of manners and customs and social condition and that he favorably judged to describe these. Hyanggeosasijeuksa(鄕居四時卽事) 3chapters 36 poems contents can be seen in the middle 1970 period. At first, I present several typical manners and customs at that times. ‘Bangjeoksaengae(紡績生涯)’, ‘Jasanseopsin(赭山拾薪)’, ‘Salcheongdo(殺靑稻)’ and so on. We can know the manners and customs of the shaman rite for the household god and offering a sacrifice to spirits through ‘Oildosinbunbyeong(午日禱神分餠)’ and ‘Chomusaegui(招巫賽鬼)’. And we can also know the prevailing state of society which deceives play of Jipae(紙牌) through ‘Gagi(假欺)’. Next let's see the scene which was not common or new figure at that times. There are ‘Eating of lettuce ssam with thick soypaste mixed with red peppers(GGikwageo喫萵苣)’ and ‘Nanghangucheo(浪漢歐妻)’. ‘Sechoponyeo(歲初浦女)’ represented the figure of smoking woman, there were often seen manners and customs picture but the case of mentioned poem was not common. In the ‘Yangbunghoehwa(凉棚會話)’, it can be known the fact that there were generalized the figure of smoking men. In the ‘Jodogujak(早稻駈雀)’, he mentioned the new method of chasing sparrow by pulling the rope molding which was established around rice farming. Kim, Jaesik's Hyanggeosasijeuksa(「鄕居四時卽事」) 36poems were not few quantity as the recited typical farm's reality at that times. In addition, we can associate as we see the our farm reality spot in early 1900 period. Like this, Hyanggeosasijeuksa(「鄕居四時卽事」) 36poems by Kim, Jaesik can be evaluated the meaning such as poetry history(詩史) of farm life and Nongchonpungsoksasaeng- hwa(農村風俗寫生畫) as the composed poems of typical Nongchonpungsok- saenghwasiltae(農村風俗生活實態) in farm village in early 1900 period.

9,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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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중국 여행기록의 존재양상

최해연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2집 2015.08 pp.425-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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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조선인이 쓴 중국 여행기록은 그동안 연행록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중국의 다양한 지역과 인식을 고찰하는 것에서 의미가 깊다. 20세기 초 서양의 영향으로 근대로 넘어오면서 더 이상 국가적인 공식행사가 아닌 사적인 관광 체제의 수립으로 대중들도 해외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20세기 초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중국은 서양과 일본에 비해 그 위상이 낮아졌지만 여전히 찾아가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특히 유교적 교양을 체화하고 있던 지식인들은 자신의 여행기록을 개인문집에 수록하기도 하고 단행본으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격변기를 겪은 유교지식인들에게 중국 여행은 전통시기의 단순한 유기(遊記)나 사행록(使行錄)과 달랐다. 그들은 중국 여행을 통하여 또 다른 중국의 내면을 들어다 보고 ‘중화’라는 문화적 개념의 효용이 떨어진 중국이 과연 어떻게 변화해 가는 지를 눈여겨보았다. 한편 신문, 잡지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여행기록이나 소설, 광고들을 지면에 싣기 시작하였고 그 중에서 여행기록은 해외 견문 욕구를 충족시켰으며 이 여행기록들은 각 시대별 상황에 맞춰 변화해 갔다. 20세기 초 조선인이 쓴 중국 여행기록에는 중국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들이 있다. 여행을 한 사람의 신분, 여행목적, 여행지역에 따라 중국에 대한 인식도 달랐고 여행기록을 실은 매체, 체재, 표기수단에 따라 보는 관점도 달랐다. 본 논문에서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20세기 초 조선인의 중국 여행기록을 발굴하고 다양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목록을 제시하고 검토한 후 전체적인 존재양상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Chinese travel notes written by Koreans in the early 20th century have far-reaching significance on showing the various regions and cognitions, which never appeared in Yon-haeng-rok . In the early 20th century, Influenced by western society, Korea entered into modern times. Personal Travel System was established. It means common people have a chance to travel abroad. Although Chinese infuluence is lower than Japan and Western Countries in the 20th century, its still a mecca for confusianism-intellectuals. Their own Chinese travel notes are included in their own corpus and published in book form. For confusianism-intellectuals, travel to China become different from past times. After Chinese influence is lower, they try to see another side of China and pay attention to the change of China. The contents described in Chinese travel notes at that time are different from the contents described in You-gi and Sa-haeng-rok. On the other side, a lot of newspapers and magazines beginning to be published. Usually, travel notes and advertisements are appear in the newspapers and magazines. Furthermore, the travel notes satisfy the curiosity of foreign countries. The Chinese travel notes written by Koreans in the early 20th century, approach China from different angles. according to a person‘s identity, purpose of tourist and tourist destination, the understanding of China is different. The angels of view also be effected by media, writting style and writting tools. Main purpose of this thesis is, find out the notes, collect and make a list of the notes and examine awarness of Koreans in the time.

10,500원

부록

15

휘보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2집 2015.08 pp.479-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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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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