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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상고전연구 [Yeol-sang Journal of Classical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열상고전연구회 [Society of Yol-Sang Academy]
  • ISSN
    1738-2734
  • 간기
    격월간
  • 수록기간
    1988~2018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810 DDC 810
제53집 (16건)
No

기획논문1 : 수신사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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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에서 수신사로의 변화

다카하시 히로미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3집 2016.10 pp.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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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과 일본 문인 사이에 이뤄진 시서화 교류는 마치 학예공화국처럼 느껴진다. 기무라 겐카도(木村蒹葭堂) 그룹과 통신사 교류는 바다를 넘어 서울의 지식인에게 전해졌고 그들은 이윽고 북경에 이르러 교류의 바퀴를 더욱 넓혀갔다. 본고에서는 에도시대 마지막 통신사와 메이지기 첫 수신사의 문사(文事)를 집중 비교하는 것을 통해, 통신사로부터 수신사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The exchange of poetry and calligraphy between Japanese literati and Tongsinsa, Korean delegations, appeared as an aspect of a Republic of Letters in the Edo period. For instance Kimura Kenkado and his friends enjoyed their companionship in Osaka. This information was warmly welcomed by intellectuals in Seoul. Some of them then left for Beijing to visit their great friend, thus spreading the communication even further. Now by comparing the last Tongsinsa at Tsushima with the first Korean Sushinsa in Tokyo, I am tracing the changes that occurred from the Tongsinsa to the Sushin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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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신사(修信使)에 대한 조선과 일본의 태도 차이

허경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3집 2016.10 pp.2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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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시대에는 조선과 일본 지식인들이 만나서 적극적으로 한시 창화를 하고 필담을 주고받았지만, 수신사와 조사시찰단 시대에는 그 분량이 현저하게 줄었다. 일본 문물을 시찰하러 파견되었으면 당연히 적극적으로 시찰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고, 필요한 인물들을 만나서 필담을 주고받으며 일본의 정보를 획득해야 했지만, 성공적인 결과물이 적었다. 사법제도를 시찰하러 파견된 엄세영(嚴世永)의 수행원 최성대(崔成大)가 일본 사법관 출신의 미시마 주슈(三島中洲)를 만나 필담한 기록을 보면 오히려 미시마 주슈가 적극적으로 필담을 주도했으며, 최성대의 질문은 사법제도 핵심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다. 그나마 최성대는 필담초(筆談抄)를 가지고 귀국하지 않아, 필담록이 일본에 남게 되었다. 최성대는 일본인과의 필담, 더 나아가서는 개화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서 일본 지식인들은 조선 통신사의 지침서였던 『일관요고(日觀要考)』를 백년이 넘게 보완해 가면서 필사하여 읽었고, 250년이나 된 권칙(權侙)의 필담도 가지고 다니며 조선 문인에게 질문하였다. 조선에 대한 그들의 정보는 통신사시대부터 계속 축적되었으며, 준비된 상태에서 수신사와 조사시찰단을 상대하였다. 보고서 작성이나 필담에 소극적이었던 조선 수행원들의 태도가 개인적인 문제인지, 아니면 적극적인 개화파 인사들을 선정하여 파견하지 않았던 조선 정부의 문제인지는 나머지 자료들을 모두 분석해보아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Before the Japan-Korea Treaty of 1876, the envoys of the Chosŏn diplomatic missions met with Japanese intellectuals and actively exchanged Classical Chinese poetry and written conversations, but these interactions reduced drastically after 1876. Although the envoys were dispatched to observe Japanese civilization and write reports, as well as meet and converse in writing with important individuals to gain information about Japan, they did not have much success. Ŏm Se-yŏng’s attendant, Ch’oe Sŏng-dae, was dispatched to Japan to observe its judicial system, and his written conversations with judge Mishima Chūshū show that it was Mishima who actively led the conversation, while Ch’oe asked questions that were irrelevant. Moreover, Ch’oe left the drafts of the conversations behind in Japan. In other words, he had no interest in communicating with Japanese, nor in Korea’s enlightenment. In contrast, Japanese intellectuals read, copied, and supplemented the manual of Chosŏn envoys, Essential Survey of Observations on Japan(Ilgwannyogo) for over one hundred years, carried Kwŏn Ch’ik’s written conversations, which were 250 years old, and asked the Chosŏn envoys questions. They continued to accumulate knowledge about Chosŏn since before 1876, and were prepared to deal with the Chosŏn envoys. Further analysis of sources needs to be conducted to accurately judge whether the passive attitude of the Chosŏn envoys in writing reports and conversations stemmed from individual issues or because the Chosŏn government failed to select and dispatch personnel who favored enlightenment.

7,000원

4

1881년 조사시찰단의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 차이 -『日東録』, 『東行日録』, 『東京日記』를 비교하며

문순희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3집 2016.10 pp.5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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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의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개항한 한국은 조약 직후 1876년에서 1885년까지 수신사를 5차례 조사시찰단을 1881년에 한차례 일본에 파견했다. 현재 조사시찰단을 포함한 수신사들이 남긴 사행록은 대략 20종이 확인되며 그 외에도 국가에 제출한 보고서 형식의 기록도 남아 있다. 보고서를 제외한 개인 사행관련 기록은 서술 주체, 서술 시기, 서술 내용 등 각각 기록 성격이 다르다. 이 기록들을 나란히 펼쳐봤을 때 개인마다 사행에 참여하는 태도와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본 논고에서는 일본 사행에 대한 태도, 그리고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 등이 개인마다 어떻게 달랐는지 비교 고찰하였다. 이를 위해 1881년 조사시찰단 수행원의 세 기록-강진형의 『日東錄』, 민건호의 『東行日錄』, 송헌빈의 『東京日記』를 텍스트로 선택하였다. 일본사행록을 남긴 세 인물은 동일한 시기 동일한 직책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세 사행록에는 각각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 차이가 나타났다. 강진형은 가장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수행원으로 도일하여 새로운 문물들을 쉽게 수용하지 못하고 근대에 적응할 수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사행록에 개인적으로 방문한 장소나 근대문물, 도시 풍경에 대한 감상 등을 기술하지 않았고 개인적으로 어떤 사물에 특별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유일하게 교류를 나눈 일본인에게 지은 시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가 일본 근대 문물에 부정적이며 문명화된 일본에 적응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와 반대로 민건호의 경우 견문한 사물에 대한 감상이나 개인 생활을 기록에 남겼는데, 민건호는 일본 생활에 적응하여 다양한 계층의 일본인과 교류하였고 일본 문화와 풍습에 대한 관심이 컸다. 송헌빈은 사행록에 여러 제조법을 필사하는 등 근대 문물과 기술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흔한 필담이나 시문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는 민건호와 달리 일본인과의 사적 교류가 거의 없었거나 이에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시찰단 수행원은 기존의 사행의 사신들과 비교했을 때 훨씬 다양한 감정과 태도로 일본을 대하고 있었다. 이는 극변하는 시기에 기존의 일본에 대한 인식이 국내에서도 점차 변화하고 있었고, 일본에 파견된 사행원들이 전통적인 대외 사행과는 다른 역할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Korea that had opened the ports by Ganghwado Treaty in 1876 dispatched five times of Sooshinsa(修信使) from1876 to 1885 and one time of Inspectors(朝士視察團) in 1881 to Japan. Up to now, approximately 20 Sahangroks(使行錄) which had been written by Sooshinsa including Inspectors were identified. The characteristics of these records are different by writers, writing time, writing contents, and so on, which reflects the different viewpoints and attitudes on Japan by individuals, referring to each record review. In this article, the differences by individuals were investigated for the attitudes to the Japanese investigational trips and the viewpoints on Japan. To do so, three records by the attendants of Inspectors in 1881 were selected as the textbooks including Ildongrok, Donghangilrok, and Dongkyungilgy by Jin Hyung Kang(姜晉馨), Kun Ho Min(閔建鎬), and Hun Bin Song(송헌빈), respectively. Three people to leave Japanese travel records were dispatched as the same position to Japan, while their viewpoints on Japan were different in the records. Jin Hyung Kang, an attendant with the most traditional way of thinking, was shown that he had hardly accepted the new products of civilization easily not to be adaptive well to the modern times after crossing to Japan. He did not describe the places to visit personally, products of civilization, thoughts on the city scenery, and so on in the travel records, which reflected not to be interested in any objects specially. From the poem that he wrote for a Japanese person only with whom he made relationship, it was known indirectly that he was negative to the products of civilization in Japan and was not well adaptive to the civilized Japanese life. On the other hand, Kun Ho Min left the records on his personal life or thoughts on the observed objects, and he was well adaptive to the Japanese life to make the relationship with a variety of Japanese classes with high level of interests in the cultures and customs in Japan. Hun Bin Song showed the progressive attitude on the modern products of civilization and the technologies transcribing multiple manufacturing methods in the travel records, however, he did not record the common conversations by writing or the poems. Unlike Kun Ho Min, it was estimated that he had made relationship with few Japanese people personally or no interest at all. The attendants of Inspectors showed much more dynamic emotions and attitude to Japan compared to the existing envo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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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논문2 : 조선 류큐 문화교류 600년-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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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748년 조선의 통신사와 동아시아의 지식 유통 양상 - 일본 학파에 따른 교류 양상을 중심으로 -

구지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3집 2016.10 pp.95-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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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기존 연구에서 의원간의 필담창화집에 비해 비교적 덜 다루어졌던 유학자들의 필담창화집을 대상으로 조선과 일본의 교류를 전체적으로 조망하여, 일본 문인들의 학파에 따라 조선인과의 교류가 어떻게 이루어졌고, 이에 따른 양국의 지식이 어떤 양상으로 유통되었는지 정리하는 데 목적이 있다. 양국인이 만나 주고받은 필담과 창화를 수록한 문헌만을 대상으로 하고, 의안(醫案)을 다룬 의원 간의 필담집을 제외하면, 30종의 필담창화집이 현전한다. 일본 문사들의 학파를 살펴보면, 관학 역할을 한 린케(林家)의 문인 외에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 1619- 1682)의 기몬학파(崎門學派),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의 고의학파(古義學派),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의 겐엔학파(諼園學派) 등 당시 일본 한문학을 대표하는 학파의 문인들을 두루 망라하고 있다. 그리고 학문의 성향에 따라 조선인과의 교류 양상이 다르게 드러났다. 기몬학파의 문인들은 정주학을 추숭하고 이단을 배척한다 점에서 조선 문사들과의 동류의식을 형성하였다. 퇴계의 영향을 받은 이들 문인은 조선의 유학과 문헌에 상당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고, 필담도 가장 활발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필담창화집은 기몬학파의 학술을 드러내는 하나의 지식으로 유통되기도 하였다. 고의학파는 조선 문사에게 가장 경계의 대상이 되었으나 결과적으로 논쟁이나 공격하는 양상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탐색하며 진사이의 저술을 수집하였고, 국내로 유입되어 유통되었다. 당시 가장 번성하던 겐엔학파는 소라이를 안사이처럼 조선문사에게 인정을 받게 하려는 욕구가 내재되어 있었고, 일본 내 통용되는 조선 문사의 인정이 필요하였다. 조선인이 정주학 외의 학설을 배척한다는 사실을 아는 지점에서 자기주장을 그친 한편, 필담창화집에는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한 과장된 표현들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리고 소라이의 저술은 겐엔학파의 과시욕으로 인해 조선문사에게 증여되었고, 귀국 후 조선 내에 유통되게 되었다. 양국 사이의 교류와 지식 유통은 직접적인 대화보다는 문헌과 저술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통신사는 일본 내 새로운 문헌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 동시에 필담창화 자체가 하나의 지식으로 일본 내 유통되었던 것이다.
This study observes Chosŏn-Japanese exchange as a whole in the lens of relatively less studied poetry and written conversation collections between Confucian scholars than those of physicians. It examines how exchanges occurred between Chosŏns and Japanese literati based on their schools of thought in order to see how knowledge circulated between the interactions of the two countries. Thirty such collections exist aside from those of medical theories between physicians. Included in these collections are writings from the Hayashi Clan rectors, Yamazaki Ansai of the Kimon School, Itō Jinsai of the Kogigaku School, and Ogyū Sorai of the Kenen School, the leading Japanese scholars of Classical Chinese at the time. The interactions of these scholars with Koreans also differed based on the tendencies of their respective schools. The fact that scholars of the Kimon School followed the Cheng-Zhu School and sought to ban heterodoxy created a common bond with Chosŏn literati. The Kimon scholars were highly interested in Korean Confucian texts as they were influenced by Yi Toegye, and had the most lively written conversations with them. Such conversation and poetry collections were a form of circulating knowledge that showed the scholarship of the Kimon school. Although Chosŏn literati were most wary of the Kogigaku school, in the end they did not take a hostile or oppositional stance towards them. However, they continued to investigate the school’s teachings, collecting Jinsai’s works and circulating them within Chosŏn. The most flourishing school at the time, the Kenen school, sought to have Sorai as highly regarded as Ansai by the Chosŏn literati, as the latter’s recognition was valued within Japan. Although they did not push their own opinions in light of the fact that Chosŏns recognized only the Cheng-zhu school, they used bombastic expressions in the written conversation collections to display their superiority. They also gave Sorai’s works to Chosŏn literati in order to show off, which were then circulated within Chosŏn. Interactions between the two countries and knowledge circulation were carried out through texts and writing rather than face-to-face conversations. Written conversations and poetry exchanges were not only opportunities for the Chosŏn embassies to discover new texts but were also a form of knowledge that circulated within Japan.

7,800원

7

동아시아 증류주의 발생과 문화교류 - 한국 호남의 꽃주[花酒]와 일본 오키나와의화주(花酒)를 중심으로

이화선, 구사회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3집 2016.10 pp.131-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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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한국의 증류주가 북방의 대륙 경로를 통해 들어왔을 가능성 이외에, 남방의 해양 루트를 통해서도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 위하여, 한국 호남지방의 증류주 중 하나인 이른바 꽃주[화주(花酒)]와 일본 오키나와제도의 아와모리[유구포성(琉球泡盛)] 가운데 하나인 요나쿠니[요나국(与那國)]의 화주(花酒)를 비교했다. 이 과정에서 동아시아 증류주의 발생기원을 원(元)나라[몽골]에서 시원(始原)했다고 주장하는 설에 대한 타당성을 논증하기 위하여, 원나라 기원설을 반박하는 자료로서 중국 것을 제시했다. 이는 북방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중국 자료 중 일부가 정작 자료 내에서도 모순을 지니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기존 학설로 되어 있는 몽골 기원을 제시한 후, 기존 학설과는 다른 가능성으로서 남방교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문화는 어떠한 방향성을 지니고 교류를 해오면서, 확장성을 띠고 형성되어 온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 문화교류의 방향성이란 문화는 외부로부터 일방적으로 전래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삶의 개선을 의도하여 상호 유용한 기술 문명을 주고받으며 주체적으로 형성되어 온 것임을 말한다. 그리고 확장성이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현재 다양성과 독자성이라는 모습으로 시간과 공간상에 순행적으로 나타난 상태를 말한다. 이는 논문 <그림 5>의 동아시아의 증류주를 중심으로 본 문화교류 경로를 통해서도 알아 볼 수 있다. 종합해보면 동아시아의 증류주는 고유한 취반문화로 인해 서역에서 증류기술이 전해지기 훨씬 전부터 자체적으로 발달해왔음을 알 수 있다. 한국 호남과 일본 오키나와에 남아 있는 증류주와 그 문화의 흔적은 기존의 주류 학설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즉, 그리스의 과학기술이 이슬람을 거쳐 몽고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주변국들에 영향을 주었고 증류주의 경우도 예외가 아닌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현재의 학설들은 재고해볼 여지가 있다.
In this paper, I compared ggotju, one of distilled liquors from Honam, Korea and hanashu, a variant of awamori from Yonakuni, Japan’s westernmost island in Okinawa, to trace the outbreak of distilled liquors and the routes of cultural exchange. In the process, I was able to verify the theory which claimed that the distilled liquors in East Asia originated from Yuan, China. Even though there must be many more studies, I endeavored to propose the origin and types of distilled liquors and routes of cultural exchange different from current theories by approaching from the aspect of linguistics and cultural history. It is believed that a culture, while retaining its own course of direction, was formed through exchanges with expandability. Here, the course of direction of cultural exchange does not denote a unilateral passing down of culture from outside, but rather refers to an autonomous formation attained by giving and receiving civilization of useful technology with the intentions of improving life. Moreover, expandability refers to an orderly manifestation on time and space with the inadvertent forms of the current diversity and identities. This is also illustrated in the routes of cultural exchanges with distilled liquors in East Asia in Figure 5. In summary, due to the inherent rice cooking culture, distilled liquors were developed in East Asia long before the distillation techniques arrived from the West. The distilled liquors and their traces of culture remaining in Honam, Korea and Okinawa, Japan make us reconsider current theories on liquor. In other words, we may need to reconsider the common understanding that Greek technology affected many surrounding nations while spreading to Mongolia through Islam and distilled liquor is no exception.

7,900원

8

횡단하는 아리랑 - 일본의 아리랑 유입과 오키나와 아리랑

박애경, 이민규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3집 2016.10 pp.167-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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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목적은 1971년 沖繩縣敎職員組合에서 발간한 『애창가집』에 실린 <아리랑>과 오키나 미야코지마(宮古島)에 남아있는 ‘아리랑비’에 주목하여, 오키나와에 남아있는 아리랑 문화의 원류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일본 내 아리랑이 전승된 과정을 추적하고, 그 다층성과 편차를 해명하고자 한다. 1960년, 1971년 두 차례 발간된 『애창가집』은 오키나와 내 생활노래운동의 흐름을 알 수 있는 노래집인 동시에, 미군정 하 오키나와 지역에 행해진 언론, 출판탄압의 실상을 확인하는 사료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키나와 미야코지마(宮古島)에는 종군위안부로 끌려갔다가 모국 땅을 밟지 못하고 오키나와에서 생을 마감한 조선인 여성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한 기념비인 ‘아리랑비’가 남아 있다. 미야코지마 주민 요나하 히로토시의 개인 추모사업에서 시작된 ‘아리랑비’는 평화를 염원하고, 여성의 성노예화를 비판하는 연대의 상징이 되고 있다. 이 연구에서는 오키나와 아리랑문화의 저변에는 노래 <아리랑>이 가진 원천적 힘과 다양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그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아리랑이 일본으로 유입하게 된 경로와 방향도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으로의 아리랑 유입은 조선인의 이주와 일본 내 정착과 함께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1894년 5월 31일자 『郵便執知新聞』 3면에는 ‘朝鮮の流行謠’로 <아리랑>을 소개하고 있다. 일제통치기에는 아리랑의 인기를 파악한 레코드 산업자들이 김연실, 채규엽, 이난영와 같은 조선의 배우나 가수가 부른 아리랑을 발매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 건너 간 가수 뿐 아니라 일본 내 엔카 가수인 고바야시 치오코나 스기와라 스즈코도 아리랑을 취입하여, 아리랑이 엔카의 한 부류로 수용되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일본 내 아리랑은 디아스포라의 노래, 매력적인 이국의 문화상품,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저항과 연대의 노래로 그 역할을 바꿔가며 꾸준히 불리고 있다. 이 발표에서는 <아리랑>의 다양한 면모가 ‘동시대적’으로 횡단하는 모습을 통해 아리랑이 가진 역사성과 현재성을 동시에 다시 한 번 확인하려 한다.
The main purpose of this study is to seize the origin of Arirang culture in Okinawa focusing on the fact that the song Arirang was shown on a songbook "Aechanggajib (Book of Favorite songs)" in 1971 and the monument of Arirang constructed in Miyakojima((宮古島). To reach this goal, this study tried to pursue the route of inflow into Japan and explain the diversity in the acceptance process. "Aechanggajib", that was printed twice in 1960 and 1971, was songbook to understand the flow of the life-song movement in Okinawa aw well as the historical record to reveal the real fact of suppression of the media and publication. And the monument of Arirang for remembering and cherishing Comfort women couldn't return to homeland and died in Okinawa, was remained in Miyakojima. The monument of Arirang that was started by Yonaha Hirotoshi, resident in Okinawa, has become the the opposing symbol of wishing the peace and opposing. This study pays special attention to the fact that potential and diversity of song Arirang has been being placed in the base of Arirang culture in Okinawa. To enquire into this possibility, this study also inspects the route and the direction of Arirang to inflow to japan. The inflow of Arirang to Japan was naturally advanced with the immigration and the settlement of Korean into Japan. Third page of Upyunjiphisinmoon (郵便執知新聞, the paper of the postal service) on may 31th in 1894 introduced Arirang as popular song of Joseon(朝鮮の流行謠). In Japanese colonial era, the practicians of record industry who realized popularity of Arirang, published Arirang songs sung by Korean actresses and singers including Kim Yonsil, Chae Gyuyeop, Yi Nanyoung. Not only Korean singers but also Japanese singers such as Kobayashi Chioko, Sugiwara Suzuko obtained Arirang, the fact that Arirang was accepted as the kind of Enka was also. Like these, Arirang in Japan has been sung continuously and changed several roles from the song in Diaspora to the attractive and exotic cultural product and the resisting and cooperating song to oppose war and wish peace. This study inspects historicity and nowness by analyzing the contemporaneously crossing trace of Arirang's diverse aspects.

6,700원

9

<도라지타령>의 양상과 일본ㆍ오키나와로의 수용

이고은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3집 2016.10 pp.195-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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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에 오키나와에서 출판된 『애창가집(愛唱歌集)』에 실려 있는 조선의 민요 두 곡은 <아리랑>과 <도라지타령>이다. 두 노래는 모두 20세기 초 조선에서 유행했던 신민요이나, <아리랑>은 학계의 지속적인 관심으로 인하여 연구가 상당히 축적되어있는 것에 반해, <도라지타령>에 대한 관심과 논의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본고에서는 <도라지타령>이 오키나와의 『애창가집』에 수록되기 이전 20세기 초 조선에서의 사설 양상과 향유 맥락을 살펴보고 이후 일본과 오키나와에 수용된 <도라지타령>의 의미를 도출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0세기 초 출판된 잡가집에 의하면 <도라지타령>을 제목으로 하여 조선에서 불렸던 노래에는 세 종류가 있었다. 이 중 한 버전이 1930~1940년대에 기생의 인기 가창곡이자 유행가로 불리며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노래는 일본에서도 거의 동시대적인 인기를 가져왔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해방 이후 <도라지타령>은 <아리랑>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노래로서 세계 각지에서 불리게 된다. 일본에서 <도라지타령>은 음반과 방송과 같은 매체, 담당 가창자의 일본 공연 등을 통해 일본의 유행가에 속하는 한 노래로서 향유되었다. 여기에는 일본이 <도라지타령>이 가지고 있는 조선성, 친숙성, 대중성이라는 특성에 기인하여 취사선택했을 개연성이 있다. 특히 <도라지타령>은 <아리랑>에 비해 저항성이 상대적으로 낮고 유희성이 더 두드러지는 노래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특성이 <도라지타령>이 일본의 유행가로서 자리매김하는 데에 일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애창가집』에 수록된 <도라지타령>은 “친숙한 노래”로 분류되어 당시 널리 불렸던 유행가들과 함께 실려 있다. 오키나와에서 <도라지타령>은 식민지 조선의 노래에서 식민성이 탈각되고 유희성을 담보하는 가창레퍼토리로서 인식되어 향유되었던 것이다.
Two pieces of Joseon folk songs listed in 『Favorite Songs(愛唱歌集)』 having been published at Okinawa in 1971 are and . Though two are new folk songs having been popular in Joseon Dynasty, early 20th century, researches on have been accumulated considerably due to continuous interests of learned circles, but interests and discussions about is insufficient relatively. This study looks into aspects of poetic diction and enjoying context in Joseon Dynasty, early 20th century, before was listed to 『Favorite Songs Collection』 of Okinawa, and aims at deducing the meaning of having been accepted to Japan and Okinawa afterwards. According to vulgar songs having been published at early 20th century, there were three kinds which were sung in Joseon by being titled like . One version among them was sung as popular songs for singing by Korean geishas in 1930~1940s, and became to greet the golden age. The point of bringing almost contemporaneous popularity of this song in Japan requires attention. After liberation, became to be sung in all parts of the world as the song representing Joseon along with . In Japan, was enjoyed as a song which belonged to Japanese popular songs through media like record and broadcast, Japan performance of the singing person in charge etc. In this respect, there is a probability of properly selecting by being derived from characteristics such as Joseon character, intimacy, and popular appeal. Specially, has lower resistance than relatively, and could be said as a song whose enjoyment is more obvious, and such characteristics seems to play a role in being settled as a popular song of Japan. listed in 『Favorite Songs Collection』 was put together with popular songs having been sung widely at that time by being classified into “familiar song.” In Okinawa, was recognized and enjoyed as a song repertoire in which colonization was cleaned out from the song of colony Joseon, and enjoyment was guaranteed.

6,300원

[일반논문]

10

『八家手圈』에 보이는 選本上의 특징과 韓愈文의 수용 양상

王潔淸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3집 2016.10 pp.22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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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正祖가 選集한 『八家手圈』의 選本上에 있어서의 특징과 『八家手圈』에서 韓愈文이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가에 대해 살핀 논문이다. 먼저 중국과 일본에서 唐宋八大家文이 選集되던 상황과 『唐宋八大家文鈔』가 再選되던 상황에 대해 고찰했다. 『八家手圈』의 저본이 된 茅坤의 『唐宋八大家文鈔』가 중국에서 再選集되고 중국은 물론 일본과 조선에서 다양한 唐宋八大家文 選集들이 등장하게 된 일련의 과정에 대해 점검했다. 중국에서는 『唐宋八大家文鈔』가 나온 뒤에 분량이 방대해 읽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이를 저본으로 삼은 再選集도 등장했는데 이런 再選集의 분위기가 正祖로 하여금 『팔자백선』을 만들게 했던 한 동인이 되었다. 동아시아에 존재하는 어떤 당송팔대가문 선집들과 매우 다르게 『八家手圈』은 節錄이란 편집 방법의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四部手圈』의 편집 방법이 절록의 형태를 띠었기 때문이고 『八家手圈』은 그 일부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팔가수권』은 ‘批’, ‘圈’, ‘選’, ‘校’ 등 네 단계를 거쳐 완성되었으며, 그 選集 목적은 부진한 세상을 격려하고 글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짧은 문장으로 간단명료하게 八大家文의 진미를 알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책을 만드는 데 있었다. 『팔가수권』의 특징은 節錄의 방법으로 편집하고 있다는 점이다. 正祖가 韓愈文을 선호했던 가장 큰 이유는 한유의 문이재도 문학관과 獨尊儒術의 유교사상에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정조가 『팔가수권』에서 한유문을 뽑아 절록할 때 書牘과 贈序에 비중을 두었는데 그 이유는 본래 한유문은 書牘과 贈序가 많은 까닭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유문에 드러난 절록 방법상의 특징은 첫째로 문장 안에서 부사절이나 접속사 등을 대거 삭제하는 방법을 통해 인물이 처한 특정한 상황이나 수사적 언어를 일반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원래 문장이 지니는 의미에서 벗어나는 좋지 못한 결과를 낳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두 번째 특징은 『팔가수권』에서 뽑고 있는 한유문 가운데 길고 화려한 排比句를 선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한유문이 지닌 특성을 잘 살리는 효과를 얻었다.
King Jeongjo, who is considered as one of the most successful and visionary rulers of the Joseon Dynasty, is also well-known for his philomathy and love of literature. He devoted himself to reading large collection of books out of state affairs, and was deeply concerned about the lacking of reading social atmosphere. 『Sabusugwon(四部手圈)』 was developed under this circumstance and was extracted by Jeongjo himself form the books he had read since he was the crown prince. It is composed of four parts, including Gyeong(經, confucian classics), Sa(史, history), Ja(子, philosophy), Jip(集, literature). And as a part of 『Sabusugwon』, 『Palgasugwon(八家手圈)』 contents excerpts of essays written by eight great essayists in Tang Song dynasty. Jeongjo used Maokun(茅坤)'s 『The Prose Selections of Eight Great Essayists in Tang Song Dynasty(唐宋八大家文鈔)』 as original text and considered it would be helpful to write decent articles. The selections of Eight Great Essayists in Tang Song Dynasty was not only wildly-spreading in China but also attached great popularity in Japan. Compared to the situation in Joseon, in Japan Shen Deqian(沈德潛)'s 『Textbook of Eight Great Essayists in Tang Song Dynasty(唐宋八家文讀本)』 produced more lasting influence than Mao Kun's book. The compilation characteristics of 『Palgasugwon』 is that its passages were extracted by Jeongjo according to his own preferences, and thus it indicated his literary idea. According to the ‘Project Schedule(課程日表)’ at the frontispiece of 『Palgasugwon』, the book was carried out in four stages as “Mark(批)”, “Circle(圈)”, “Select(選)”, “Revise(校)”. Due to the limited space, some essay's structure was inevitably truncated. The reason for Jeongjo's giving a high appraisal to Han Yu was that he agreed with Han's view of “writing is for conveying truth” and “respect Confucianism and defeat Buddhism”. Han Yu's essay is considered to be powerful and vigorous by many critics of every dynasty, one important reason is that it employed a lot of Parallelism which enhance the tones and emotions. In Jeongjo's excerpts, this characteristic is well-p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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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의 사단칠정설과 그것에 대한 비판과 옹호

이종우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3집 2016.10 pp.247-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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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우암 송시열이 사단은 선 뿐만 아니라 악도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황 뿐만 아니라 그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이이도 비판적으로 본 것과 그렇다면 사단은 칠정과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연구하였다. 송시열은 사단은 中節 뿐만 아니라 不中節이 있고 성인의 칠정은 純善하다고 해석한 것은 이황과 이이 모두 사단을 순선하다 하고 칠정을 선악이 함께 있다고 한 것과 다르다. 하지만 사단의 중절과 칠정의 순선, 사단의 부중절과 칠정의 악의 성향은 그 구분이 모호해진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는 사단과 칠정을 구분하는 것 보다 중절과 부중절,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을 더 중요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그가 사단은 理發 뿐만 아니라 氣之發, 칠정은 기발 뿐만 아니라 理之發도 있다고 말한 것은 기존의 설인 주희, 이황, 이이 등과 다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황을 사숙한 이익은 송시열이 사단이란 겸선악하다는 설은 이이의 선일변도와 다르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송시열이 이이의 학맥을 계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설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송시열의 제자 이희조는 송시열의 사단설은 맹자와 주희를 정확하게 해석하였다고 지지하면서 이이와 이황의 사단 순선설은 그들의 사단설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을 보았다며 비판적이었다. 반면에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는 이이의 사단설을 선 뿐만 아니라 악도 있다고 해석하여 맹자와 주희의 설과 같다고 지지한다. 따라서 맹자와 주희를 이이가 계승하고 송시열이 그를 계승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이희조와 다른 점이었다.
I studied that Uam Song Siyeol argued that Four Beginnings is not only harmony but also disharmony, and criticized that Yi Hwang's and Yi I's, Song's teacher, and a difference between Four Beginnings and Seven Feeling. Song's Four Beginnings, including good evil, is different from Yi Hwang and Yi I, only pure good. Song is based on Zhu Xi's Four Beginnings. Four beginnings is good when issued clear energy and is evil when issued turbid it, Song's argument. But Yi Hwang and Yi I's argument is that Four Beginning is pure good. Because of this, Song criticized them. He also said not only Four Beginnings but also Seven Feeling are good and evil. In this case, It is difficult distintion between Four Beginning's and Seven Feeling's good and evil. Then, what is a difference between Four Beginnings and Seven Feelings's good and evil? About it, Song was important better good and evil than distinguish from them. Moreover, he said that Four Beginning issue by energy as well as principle. This is a difference between Song, Yi Hwang and Yi I. After that, Yi Ig, admired Yi Hwang, criticized Song's Four Beginning because Song is different from Yi I, Song's teacher. About it, Yi Hijo, Song's student, advocated Song because Song succeeded Mencius and Zhu's whole, but Yi Hwang and Yi I succeeded their part. However, Gwon Sangha, Song's other student, argued that succeeded Mencius and Zhu's not only Song but also Yi I, because he also considered that Four Beginnings are good and evil in Diagram of Mind, Naure and Feeling in Reply to Seong Howon. Consequently, he saw that Song and Yi I had succeeded Mencius and Zhu. Finally, he made them orthodox. This is a difference between Gwon Sangha and Yi Hi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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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수용과정에 나타난 고대주술의 밀교화 고찰

정성준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3집 2016.10 pp.269-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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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종교적 정서 가운데 주술은 인간과 하늘의 소통을 위한 원시적 종교의식으로 주문, 의식, 비밀한 문양, 상징물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왔으며 이러한 주술의 소재는 인류의 정신 내면에 감추어진 원시적 주술에 기인한 것이다. 삼국유사를 통해 볼 수 있는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의 주술은 인간의 안녕과 풍년, 발복이나 저주 등의 다양한 목적에서 이루어지며 주술의 영험을 일으키는 주체는 조상, 동물, 산, 바다 등 다양한 소재를 보이고 있다. 부족국가가 고대국가로 발전하면서 주술은 하늘이나 태양, 별과 같은 천체, 생명의 근원 등 고등종교에 접근하고 제천의식의 설행과 같이 점차 인간의 윤리와 사회규범을 결정하는 간접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원시성에 기반을 둔 주술을 문명사회에서 볼 수 있는 고등종교의 형태로 대치한 중심에는 불교와 더불어 유교, 도교 등이 있다. 특히 불교 가운데 밀교는 인도 고대종교에 존재하는 수많은 비의적 소재로 둘러싸인 종교적 환경으로부터 성장했다. 불교는 샤머니즘에 유래한 다양한 종교적 소재들을 성불의 도구로 승화시키며, 신라를 포함한 대승불교권에서 약사신앙을 비롯해 사리탑신앙, 영성신앙, 제석신앙, 사천왕 신앙 등을 발전시키고 수많은 주변 유적과 문물을 남겼다. 『대일경』의 수입으로 동아시아의 밀교는 성불을 목적으로 한 세련된 수행체계를 소개하였고, 신라의 불가사의는 중국에 유학 후 『대일경』의 주석을 통해 종자나 진언 같은 주술적 소재가 번뇌를 물리치고 자아의 본성을 관조하는 수행체계의 소재가 될 수 있음을 밝혀 한반도의 주술문화를 밀교를 통해 이타적 수행과 깨달음으로 탈바꿈하는데 기여하였다.
Incantational factors in the mind stream of ancient Koreans were known by Mantras, rites, artificial constructions and symbols to accomplish the wishes of sentient beings by secret power which comes from factors of shamans from all over the world. The purpose of those incantational factors are presented by various forms which the foundation of the power comes from totemic animals, ancestors, spirit for ghost, natural materials. By the landing of Buddhism those traditional incantations were replaced by heaven of universe or the intrinsic nature of life that enables the higher foundation of ancient form of religion of people. Those incantations provided the ideology of a tribe nations which were developed to an ancient kingdom, hereby means Kojosun(古朝鮮) around Korean peninsula which ideologies were represented by morality of social and national religious rites. By the import of Buddhism those autogenous incantational factors were changed by refined rites of Mantras, Dharanis, Maṇḍalas, rites and religious tools to show higher level of religious factors which wee developed to social precepts and norm consciousness of a society or a nation. While most of those religious aspect come from sect of Esoteric Buddhism. As Buddhism has have passed so many centuries on the grounds of Indian's shamans Buddhism it eventually had a flexibility of adapting shaman's religious factors of other areas. In Samgukyusa it is found those historical repetitions occurred in India that Esoteric Buddhism influenced and transferred ancient factors of shaman's to the religious rites of Esoteric Buddhism which phenomenon is presented by belief of Stupa, Maṇḍala, religious rites along with the practice of Mantras and Dharanis and visualization of Tantras. Acarya Bulgasawi(不可思義) studied abroad to Tang of China and learned highest subjects of Esoteric Buddhism studying Vairocana Sūtra from Acarya Sunmuwei(善無畏) and wrote a commentary of Vairocana Sūtra. The Sūtra consists of lots of religious elements that actually lead the practitioner to a realization of enlightenment which religious tools like Mantras, Dharanis and Maṇḍalas comes from ancient religious factors of Indian's reli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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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자료 서강대 소장, 최부(崔溥)의 『금남표해록』 한글본 연구

유춘동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3집 2016.10 pp.299-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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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학계에 소개되지 않은 서강대학교 로욜라도서관 소장, 최부(崔溥, 1404 -1504)의 『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 한글본을 검토하고, 이 자료의 특성과 가치를 밝히는 데 목적을 둔다. 그동안 최부의 『금남표해록』은 국내외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받았고, 그 결과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국내에서는 역사학자들의 연구와 문학연구자들의 연구가 있었고, 동아시아 학자들 또한 이 자료에 관심을 갖고 많은 연구를 진행했다. 그러나 이 책을 한글로 번역한 한글본 『금남표해록』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논의가 없는 상황이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진 한글본은 19세기에 필사된 국립중앙도서관본 한 종뿐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최부의 『금남표해록』은 한문(漢文)을 자유자재로 읽을 수 있었던 양반사대부 계층을 제외하고, 국내에서 널리 읽히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정설(定說)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이번에 새로 발굴한 서강대본 『금남표해록』을 보면 이러한 기존의 주장을 재고(再考)할 수 있다. 서강대본은 기존에 알려진 19세기 한글 번역본보다 한 세기 앞선 18세기에 무렵에 필사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서강대본은 원전인 한문본 『금남표해록』과 대조해보면 축약번역본임이 확인된다. 중요한 점은 이때 필사자가 직접 번역했던 것이 아니라 선행했던 한글본을 가져다가 재필사한 본이란 사실이다. 이는 『금남표해록』은 한글본이 다양한 형태로 일찍부터 존재했었고, 여러 사람들에게 필사되어 읽혔던 정황을 보여준다. 새로 발굴한 서강대본의 특색은 원전 대부분의 내용을 생략하고 특정 부분만 번역했다는 점이다. 자세히 번역한 것은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제주도를 떠난 뒤, 풍랑을 만나 표류하고 해적을 만나는 등의 모진 고생에 대한 이야기와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 우두(牛頭) 앞 바다에 도착하기까지이다. 그밖에 강남과 강북에 대한 세밀한 풍광의 묘사, 경유한 지역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지리와 문화정보, 중국 각 지역에서 만났던 관원(官員)과 문사(文士)들의 대화 등은 모두 생략했다. 이러한 면들을 보면 한글본으로 최부의 『금남표해록』을 읽었던 사람들의 관심은 최부의 극적인 구조와 무사히 조선으로 귀국하는데 있었고, 그 밖의 중국의 역사, 지리, 문화에 대한 것들에는 관심을 덜 가졌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는 한문으로 원문을 읽을 수 있었던 독자와 그렇지 않은 독자들을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으며, 당대 한글로 번역해서 읽었던 독자들의 관심과 수준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서강대본의 특성, 내용들을 다루고 서술했다.
This study aims to review the Korean version of ‘Geumnampyoaerok’ of Choi-Bu, which has not been introduced to academia and is kept in Loyola Library of Sogang University, and find out its characteristics and value. ‘Geumnampyohaerok’ of Choi-Bu has been received lots of attention from domestic and overseas scholars and it led to various studies. In Korea, there have been studies of historians and of literature researchers, and East Asian scholars have also been interested in this material and have studied it. However, there have been no discussions on the translated Korean version of ‘Geumnampyohaerok’. The reason is that there has been only one version that was known to academia, the transcribed version of the 19th century, kept in the National Library of Korea. This led to the widespread belief that ‘Geumnampyohaerok’ of Choi-Bu was read only by the nobility that could read Chinese letters, not by the general public. By reviewing ‘Geumnampyohaerok’ of Sogang University, however, we can reconsider the existing belief. First of all, the Sogang University version was transcribed in the 18th century, a century earlier than the existing Korean version of the 19th century. Also, when compared to the original Chinese version of ‘Geumnampyohaerok’, it can be found that the Sogang University version is an abbreviated translation. It can also be found that the person who transcribed it did not translate it himself, but used an already-translated version and re-transcirbed it. Based on this fact, it can be seen that, contrary to existing belief, there were various types of Korean versions which were read by many people. The unique feature of the Sogang University version is that it left many parts out and translated only specific parts. What was translated in detail was about the hardship that the character went through when leaving Jeju Island, being caught in storm, and meeting pirates, and the part leading to his arrival to the Wudu Sea. Other than that, it skipped other parts such as the description of the landscape of Gangnam and Gangbuk, specific geographic and cultural information about the travel stops, and conversations with the officials and literary men whom he met in China. Based on this, it can be inferred that those who read the Korean version of ‘Geumnampyohaerok’ by Choi-Bu were interested in the dramatic structure of his travel and his safe return to Joseon, not so much in the history, geography, and culture of China. This can be the basis that will distinguish the readers of original Chinese version from other readers, and it serves as an important indication that shows the interest and level of the readers who read translated Korean version. Those are what were discussed and described in this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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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임규의 한시를 읽는 두 가지 방법, 매체와 교유관계

권두연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3집 2016.10 pp.323-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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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는 320여 수의 한시를 지었고 이를 『北山散稿』라는 책으로 남겼지만 이 시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작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고찰이 없었다. 스스로를 시인으로 자처하지 않았고 한시에 대한 이론적인 생각을 밝혀 놓은 글도 많지 않지만 임규는 191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한시를 창작했고 『開闢』과 『三千里』, 『啓明』, 『啓明時報』, 『春秋』등에 한시를 발표했다. 흥미롭게도 󰡔북산산고󰡕에 수록된 시들 중 상당수가 이 매체들에 소개된 적이 있으며 그의 한시에 상당히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음이 포착된다. 이러한 점에 착목하여 이 논문은 『북산산고』가 엮이기 이전, 신문이나 잡지 등의 매체를 통해 소개된 임규의 한시들을 추적해 봄으로써 그의 시 창작 과정과 시에 나타난 교유관계를 재구해 보았다. 특히 지금까지 학계에 널리 소개되지 않은 잡지 『계명시보』에는 북산일민(北山逸民)이나 북한일민(北漢逸民)이라는 필명으로 게재한 글들도 목격된다. 이 점은 임규가 우정(偶丁) 외에 다른 필명을 사용하였음을 알려주는 동시에 ‘북산’이 그의 시 쓰기에 상징적인 대상이었음을 드러낸다.
Lim Kuy(林圭) wrote the Chinese Poetry of the more than 320 articles and left these as a book called Buksansango(北山散稿). However the consideration that these Chinese Poetry passed through any process, and was made was not seen in particular. Lim Kyu did not have many sentences that revealed a theoretical thought about the Chinese Poetry without dealing with a poet by oneself, but he continued to create the Chinese poetry from 1910 and announced the Chinese Poetry in the media such as Gaebyeok(開闢), Samchunli(三千里), Keimyung(啓明), Keimyungsibo(啓明時報), Chunchu (春秋). Interestingly Buksansango(北山散稿) a considerable number of Chinese poetry, which was recorded to have been introduced in these magazines. Also considerably large number of people in his Chinese poetry has appeared. I paid attention to such a point, This paper tracked the Chinese poetry of LimKuy introduced through the media such as a newspaper or the magazine before Buksansango(北山散稿) was knit and reconstituted the Companionship that appeared in his creation process. In particular, The Chinese poetry which LimKyu placed in pen names called Buksan- Yimin(北山逸民) and Bukhan-Yimin(北漢逸民) is seen in magazine Keimyungsibo(啓明時報) which is not introduced by the society widely until now. This shows that Lim Kyu used pen names except Woojeong(偶丁), and Buksan(北山) expresses that it was the symbolic object in his po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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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대 초 북한 잡지 <인민창작> 연구

김영희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3집 2016.10 pp.365-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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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는 남한과 북한 모두 일제강점과 전쟁 이후 각각 ‘한국문학’과 ‘조선문학’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이에 따라 ‘민족문학’ 혹은 ‘인민문학’으로서 ‘한국/조선 문학’의 개념과 범주, ‘한국/조선 문학사’의 학문적 전통과 계보 등을 새로이 구축해야 하는 때였다. 식민지 경험의 단절면을 지우고 문학적 전통의 내재적 동질성을 재구축하는 동시에 이전 시기와는 다른 새로운 ‘문학’의 정체성을 정립해야 하는 시기였기에 남한과 마찬가지로 북한 역시 어떤 전통은 지우고, 어떤 전통은 복원하거나 발굴하는 일에 매진해야 했다. 특히 1960년경 북한 문학연구자들은 식민지 경험 이전의 전근대 민족 문화 유산으로부터 문학적 정체성의 근간을 세우되, 반봉건적 요소를 타파하고 ‘인민문학’적 정체성을 강화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였다. 북한 문학의 혁명적 전통을 발굴하는 한편,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문학을 정립하는 일에 몰두한 것이다. 이를 위해 문학연구자들이 주목한 것 가운데 하나는 ‘구전문학’이었다. 이에 따라 1950년대 후반 북한 사회과학원 조선어문학연구소 문학연구실 소속 연구자들이 각 지역의 전문가와 공직자, 교사, 지역민들의 도움을 받아 체계적인 조사 지침 아래 구전이야기, 민요, 가면극, 속담, 수수께끼 등의 자료를 전국 범위로 수집하여 정리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조사 및 정리 활동의 성과로 ‘구전문학’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물로 다수의 구전문학 자료집이 발간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조사 및 연구 성과의 대표적인 결실이 바로 1960년에 창간된 사회과학원 기관지 『인민창작』이었다. 『인민창작』은 나중에 ‘구전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인민창작’을 ‘구전문학’에 대한 대체 개념으로 내세운 잡지였다. ‘인민창작’은 소련 민속학에서 ‘민속(folklore)’을 ‘인민(folk)의 것(lore)’으로 번역한 전통을 따르면서 ‘인민문학’으로서 ‘북한문학’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항일무장투쟁기 구전 자료들을 혁명적 전통으로 소환하기 위해 내세운 개념이었다. 『인민창작』은 ‘구전문학’ 자원들 가운데 인민성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인민적 형상과 인민적 자질의 원천을 발견할 만한 자료들을 찾아내어 이를 소개하고 해설함으로써 구전 자료를 새로운 인민 창작과 교양의 근간으로 삼으려 한 의도에서 발간된 자료집이었다. 또한 이는 전근대적 봉건 유산이 내재된 민족 문화 유산이 아니라 항일무장투쟁기 유산으로부터 ‘북한 문학’의 전통과 계보를 일으켜 세우려 한, 이후 북한 문학 연구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면서 이와 같은 전환을 정당화하는 데 필요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This essay is the analysis on the official journals of “In-min-chang-jak”(meaning of a creation by the people) published in North Korea(1960-1961). The researchers of Korean literature had concentrated on framing and making tradition, genealogy, and identity of Korean literature or Joseon literature. And they had made an effort to re-construct the history, the concepts and categories of Korean literature or Joseon literature on the post-colonial groundwork by cutting off the colonial legacy of literature studies after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had finished. Specially in North Korea, the researchers of Joseon literature had played their active roles in issues, from the late 1950s to the early 1960s: What is the revolutional tradition of Joseon literature?, how does feudalistic ideas of the past Joseon literature deal with?, what are the valuable works in Joseon literature from a point of view of socialist-realism?, who are the important writers in Joseon literature from a point of view of socialist-realism?, who is the subject of Joseon literature?, what is the oral literature?, who is the folk?, who is the people of Joseon literature?, what is the creation of the people?, and so on. The researchers studying Joseon literature of the institute for research in social science in North Korea had investigated oral narratives, folksongs, folk dramas, proverbs and riddles in the nation from the late 1950s to the early the 1960s, and they had published the journals. One of the journals was “In-min-chang-jak”(meaning of a creation by the people), which was the organ papers of the institute for research in social science in North Korea. The researchers studying Joseon literature of the institute called as oral narratives, folksongs, folk drama, proverbs and riddles “In- min-chang-jak” (meaning of a creation by the people), not oral literature at that time. Go-Jeong-Ok was one the researchers leading projects of the institute, of investigating, of studying, of educating, and of publishing oral narratives, folksongs, folk drama, proverbs and riddles. He had studied about Joseon folksongs the class of Joseon literature of Kyeogseoung(Keijo) Imperial University(京城帝國大學) in 1930s. When he graduated in law and literature from Kyeogseoung(Keijo) Imperial University in 1939, he wrote the thesis about the history, concept, category, characters and vision of Joseon-folksongs. After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had finished, he revised his graduation thesis and then published the book of the study on Joseon-folksongs(『朝鮮民謠硏究』) in 1949. Then he had went to North Korea, and had written the book of the study on oral literature of Joseon(『朝鮮口傳文學硏究』) in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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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16

휘보 외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3집 2016.10 pp.415-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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