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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상고전연구 [Yeol-sang Journal of Classical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열상고전연구회 [Society of Yol-Sang Academy]
  • ISSN
    1738-2734
  • 간기
    격월간
  • 수록기간
    1988~2019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810 DDC 810
제39집 (13건)
No

기획논문

1

한중 문화교류의 유형과 석릉수간의 위상

허경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39집 2014.03 pp.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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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漢字)가 우리나라에 수입된 뒤에, 한중 문화교류는 주로 한자를 통해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유학생이나 무역상들도 자 유롭게 중국을 오갔지만, 조선시대에는 일 년에 몇 차례 사신만 국서를 가지고 오 갔다. 조선에서 중국에 가는 사신을 명나라 때에는 조천(朝天), 청나라 때에는 연 행(燕行)이라 하였는데, 이들은 시대 분위기에 따라 소극적, 또는 적극적으로 북 경(北京)에서 중국 문인들과 필담(筆談), 창화(唱和)를 통해 교류하였다.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오면 접반(接伴) 문인들과 한시를 주고받았으며, 이때 지은 작 품들은 황화집(皇華集)으로 출판되었다. 대부분의 한중 문화교류는 북경에서 두 나라 문인들 사이에 이뤄졌는데, 임오군 란(1882) 때에 오장경(吳長慶) 부대가 조선에 주둔하면서 청나라 장수(將帥)와 종군문인(從軍文人), 조선의 영접관이 문화교류의 주역이 되었다. 오장경의 막료 (幕僚) 가운데 나이가 가장 어렸던 원세개(袁世凱)가 조선에 머무는 동안 권력을 쌓아 결국 중화민국의 대총통을 거쳐 중화제국의 황제까지 올랐다. 임오군란의 영 접관 김창희(金昌熙)가 오장경의 막료 25명에게서 받은 시문(詩文) 138건을 묶은『석릉수간(石菱受柬)』에는 124편의 편지가 실려 있으며, 이 가운데 상당수는 청나라 문인들의 문집이나 서간집에 실려 있지 않다. 한양(漢陽)이라는 공간, 1880년대라는 시간, 대원군(大院君)의 실각, 138건이라는 분량, 원세개가 황제 까지 오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점들로 볼 때에, 『석릉수간(石菱受柬)』은 한중 문화교류사에서 독특한 위상을 지닌다.
Since Chinese characters were introduced to Korea, the letters have served as a means of cultural exchange between Korea and China.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and the Goryeo Dynasty Period, a wide range of people, including students and merchants, were allowed to travel to China. During the Joseon Dynasty, however, only a small number of envoys responsible for delivering sovereign messages were permitted to cross the border. Those envoys were called Jocheon(朝 天) in the Ming Period and Yeonhang(燕行) in the Qing Period. They made contact with literary circles in Beijing, actively or cautiously depending on the social atmosphere at that time, through literary exchange(筆談) and verifying poetry(唱和). When Chinese envoys came to Joseon, they exchanged Chinese poems with reception (接伴) poets, and those poems were published in Hwanghwajib(皇華集). Sino-Korean cultural exchange most often took place in Beijing. However, when Im-O Gunran(the Military Mutiny of 1882) occurred and General Wu Changqing’s troops were stationed in Joseon, commanders and military writers from Qing and reception officers from Joseon were the key players in cultural exchange. Yuan Shikai, the youngest member of Wu Changqing’s staff, built up his political power while staying in Joseon, eventually becoming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China and later Emperor of the Empire of China. During Im-O Gunran, Kim Chang-Hee, a reception officer of Joseon, collected 138 poems and 124 letters from 25 members of Wu Changqing’s staff and published Seok-neung-su-gan(石菱受柬). The poems and letters in this book cannot be found in any anthologies or correspondence books from the Qing Period. Seok-neung-su-gan holds a unique and important status in the history of Sino-Korean cultural exchange given that it was published in a special space, Hanyang (the former name of Seoul), and at a special time, the year 1880, when Daewongun was ousted. It is also meaningful because of the large number of poems in the book, and Yuan Shikai was able to become an emperor on the basis of the power he amassed in Joseon.

6,900원

2

김창희의『석릉수간』과 임오군란 직후 한중 교류의 한 국면

김규선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39집 2014.03 pp.3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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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study introduced and Seokneungsugan which Kim Chang Hee received from a Chinese official who stationed in Joseon during the Im-O Military Revolt and examined the details of exchange in it. SeokneunAbstractgsugan which discovered recently contains 138 letters which were not known before. The recipient was Kim Chang Hee and there are 25 senders all of whom were staff officers of Oh Jang Gyeong of the Ching’s armed force. Seokneungsugan shows a feature of Korea-China exchange of the time. Firstly, it contains humanities based diplomatic tradition between Korea and China right after the Im-O Military Revolt. Secondly, it demonstrates diplomatic cooperation between the Ching’s armed forces stationing in Joseon and Kim Chang Hee. One is the military affair between Won Se Gye of China and Kim Chang Hee, and the other is the details of harmful effects of Dangojeon, a Joseon’s money raised by China. These letters are new that were not shown in existing historical documents. Besides, there are 10 letters sent by Won Se Gye who became the political power in China to Kim Chang Hee. In particular, poems of persons from China on Seokneung’s Damseol were new resources that have not been found anywhere. So, it is believed that those resources have literary value.

6,400원

3

임오군란 직후 淸종군인사들의 조선 내정 개혁안 새 자료 『三籌合存』독해를 중심으로

최우길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39집 2014.03 pp.6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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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籌合存』은 1882년 7월 임오군란 당시 영접관이었던 石菱 金昌熙(1844∼ 1890)가 엮은 책이다. 『三籌合存』는 이제까지 그 제목만 알려져 있고 그 구체적 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던, 장건의 「조선선후육책」과 이연호의 「조선부강팔의」를 담고 있다. 『삼주합존』에는 또한 장건과 이연호의 취지에 따라, 김창희가 지은 「善 後六策補」, 「富强八議補」, 「六策八議再補」가 함께 실려 있다. 이 논문은 새 자 료인 장건의 「조선선후육책(六策)」과 이연호의 「조선부강팔의(八議)」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삼주합존』은 임오군란이라는 변란의 와중에서, 조선의 젊은 관리 김창희가, 청의 지사인 장건과 이연호를 만나 나눈 정책적 대화록이다. 장건과 이연호는 공 히 조선의 內修自强을 충고하고 있다. 장건은 조선의 시급책으로 인심소통, 인재 등용, 청렴관리, 재정확보, 군제개혁, 국방강화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연호는 재 정확충, 광산개발, 개간사업, 시장발전, 해군강화, 군제정비, 교육강화, 인재양성 등을 조언하고 있다. 두 사람의 제언에 따라 작성된 김창희의 경세책이 현실정치 에서는 적용되지 못하였다. 동아시아 격동기, 세계관 충돌의 시기에, 양국의 젊은 지식인들이 글로 나눈 정치적 대화는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Samjoohabjon』 was a book of collected papers edited by Kim Changhee(1844∼ 1890), a governmental official of Chosun Dynasty, who was responsible for receiving the army of Qing Dynasty during Imogunran period in 1882. 『Samjoohabjon』includes 「Six Policies for Chosun Dynasty(朝鮮善後六策)」 of Zhang Jian(張謇) and 「Eight Suggestions for a rich and powerful Chosun(朝鮮富强八議)」 of Li Yan Hu(李延祜). These two thesis were known just by their titles, not by their contents. This article is designed to introduce their detailed contents for the first time in public. Samjoohabjon is a recollection of conversation record between Kim Chang-hee, a young and conscious bureaucrat of Chosun, and Zhan Jian and Li Yan Hu, two major responsible officials of the Qing army in Korea. Zhang and Li suggested domestic reformation and strenuous effort for regeneration. Zhang proposed getting public support, appointing competent persons, rectifying bureaucrats, securing finance, reforming army system, and strengthening national defence. Li suggested securing finance, developing mines, reclaiming land, progressing market, building up navy, rectifying army system, reforming education, and fostering talented youth. Kim Chang-hee made out a reformation plan, but could not apply it to the tough reality of the late Chosun. The policy conversation of conscious officials of two dynasties has significant meaning in itself.

7,800원

4

『석릉수간(石菱受柬)』을 통해 본 朝ㆍ淸 문사 교류 속의『담설(譚屑)』

구지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39집 2014.03 pp.97-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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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설」은 본래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에 온 장건(張謇)과 이연호(李延祜)에 게 김창희가 답례로 주었던 문장이었으나, 1883년과 1884년에 걸쳐 조선에 머물 던 중국 문사들이 서문을 써주고 제목의 글씨를 써주었으며, 또한 중국문사들의 교열을 거쳐 책으로 간행되었다. 「담설」은 김창희(金昌熙)의 저작 가운데 중국 문사의 관심을 가장 많이 불러일으켰다. 김창희의 적극성과 중국 문인들의 호응, 그리고 당시 주둔하고 있던 오장경(吳長慶)의 후원으로 간행에까지 이른 것이다. 또한 교유 관계에 있던 중국 문사들은 이 책을 중국으로 가져가기 위해 매우 적극 적으로 요청하였다. 담설의 간행은 조선과 중국 문사들의 공동 작업의 결과물 로, 이렇게 간행된 담설은 임오군란 시기의 교유를 기념하는 저작물이라 할 수 있다. 담설의 신선한 이야기 방식과 고전적인 취지는 중국 문사들에게 새로우면 서 받아들일 수 있는 글쓰기 방식이었고, 이러한 이해는 조선과 중국 공통의 문화 의식이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Damseol』 had originally been written by way of return to Zhang Zha and Li Yen-hu, but some Chinese writers who had been staying in Korea wrote the preface, added titles for the stories and proofread them to be published into a book over the period of 1883 and 1884. Among the stories of 『Damseol』, the writings of Kim Chang-hee aroused the interest of Chinese writers the most. The aggressiveness of Kim Chang-hee and the favorable response of the Chinese writers, together with the support of a Chinese official called Wu Changqing who had been stationed at the time in Korea, made it possible to be published. In addition, the Chinese writers who had the cultural relationship with Korea actively requested to take this book to China. The publication of 『Damseol』 is regarded as the result of the collaboration of the writers of Korea and China, which celebrates the cultural exchanges during the period of the Im-O Military Revolt. The fresh storytelling style and the classic approach of 『Damseol』 was a new and acceptable writing style to the Chinese writers, and this understanding was possible as it was based on the common culture between the two countries.

6,300원

5

石菱 金昌熙와 南通 文人 張謇의 交流 - 임오군란 직후 교류척독을 중심으로-

千金梅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39집 2014.03 pp.123-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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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大陣尺牘』,『石菱受簡』, 『東廟迎接錄』등 자료를 통해 1882년 임 오군란이 발생한 후 조선으로 온 청군의 영접관을 맡았던 김창희와 청군 총독 오 장경의 막료로 있었던 張謇의 교류를 고찰하였다. 김창희는 청군 영접관으로서 조선에 온 종군 문사들과 많이 접촉하였으며 그중에서 특히 장건과의 교류가 밀접 하였다. 장건은 임오군란을 계기로 두 차례나 조선에 와서 머물러 있으면서 조선 의 많은 사대부들과 교류가 있었는데 김창희와의 교류가 각별하였다. 김창희와 장건은 공무집행을 위해 자주 만나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 시문을 교 유하고 필담을 하고 척독도 주고받으면서 깊은 친분을 맺었다. 특히 장건이 귀국 한 후에도 두 사람은 계속 척독을 오가며 서로 소식을 전하였다. 또한 근대전환기 조선의 자구책을 함께 모색하며 사상을 교류하였다. 김창희는 장건에게서 조선의 안정과 자강을 도모하는 대안책 「조선선후육책」을 제공받았고, 또 청군 막료 이연호로부터 조선의 부강을 위한 제안 「조선부강팔의」 를 받아 이를 토대로 조선의 자강을 모색하는 「육팔보」를 저술하였다. 「육팔보」 는 장건의 「육책」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조선 현실 상황에 맞게 자신의 관점을 덧붙혔으며 자체적으로 조선의 국정 개혁안 여덟 가지를 내놓았다. 그의 경세사상은 여전히 유교의 이상적 치국이념을 바탕으로 하고 수구와 맹목적 개화 두 가지를 모두 비판하고 기존 질서의 제건을 통한 안정적인 부강책을 추구하였 다. 김창희와 장건은 조선문제에 있어 여러 면에서 공동의 관점을 갖고 있었으며 필담과 저술을 통해 상호 교류와 탐색을 하였다. 김창희와 장건의 교류는 19세기말 서구세력의 침략과 확장의 시국에 맞서 한중 양국 지식인들의 고민과 대책, 동아시아적 배경하의 양국 문인들의 문화와 사상의 교류의 일면을 보여주었으며 이시기 한중 양국의 외교관계를 연구함에 있어 중요 한 의미가 있다.
本文通過 『大陣尺牘』,『石菱受柬』, 『東廟迎接錄』等資料揭示了1882年朝 鮮“壬午軍亂”之後, 朝鮮金昌熙與張謇的交流。金昌熙作爲援朝淸軍迎接官, 與隨軍幕僚官員多有接觸, 張謇以淸軍總督吳長慶幕僚, 曾兩次赴朝鮮, 两人 在朝鮮相遇, 密切交流, 结下深厚友谊。 金昌熙與張謇, 雖因公務經常接觸, 但個人交往也甚多, 他們時常有詩文唱 酬, 筆談, 尺牘來往, 張謇回國之後, 仍與金昌熙往來書信, 互通消息。且時値 內憂外患紛亂時期, 金昌熙與張謇共通探索朝鮮的自强策略, 相互交流。 金昌熙著述了關於朝鮮現實改革方案的論著「六八補」, 這是在部分吸收、 採納張謇的「朝鮮善後六策」和李延祜的「朝鮮富强八議」的基礎上, 補充和增 加了他本人對朝鮮問題的解決對策。而他的觀點以儒家治國理念爲基礎, 反 對守舊和盲目逐外, 追求穩定的改善方法, 提出安定富强之策。金昌熙與張謇 通過筆談、著述相互交流和探討,在諸多方面两人持有共同觀點。 金昌熙與張謇的交流, 揭示了19世紀末期面對西方列强的侵略和擴張的時 局下, 中韓兩國文人的共同苦惱和探索, 反映了在相同文化背景下的文學交流 和思想交流, 對于硏究這一時期中韓兩國關係具有重要意義。

7,500원

일반논문

6

방각본 「한양가」 연구

이윤석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39집 2014.03 pp.157-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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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방각본으로 간행된 「한양가」에 대해서 상업출판물이라는 관점에서 접 근한 연구는 거의 없다. 「한양가」는 작품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서울에 관한 글 을 쓸 때 작품 속의 내용이 자주 인용되는 자료로서의 의미가 컸다. 이 논문에서는 이제까지 나온 「한양가」 연구를 검토하고, 방각본의 시각으로 작품의 내용을 간단 히 분석했다. 필자가 검토한 기존 연구는, 1949년 송신용이 낸 「한양가」 교주본 과 「한양가」를 주제로 한 몇 편의 논문이다. 이 검토를 통해 송신용이 낸 교주본이 훌륭한 것이기는 하나 새로운 교주본이 나와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말했고, 「한양 가」를 방각본의 관점에서 다룰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Few are the researches on the 1880 version of the woodblock-printed Hanyang-ga that have considered it as a commercial publication(bangakbon). The focus of interest, rather than its value as a literary work, has been on its importance as a useful material in order to gain information about the Seoul of the period. This paper examines the previous researches on Hanyan-ga and briefly analyzes its contents regarding it as a commercial publication; after examining Song Shin-yong’s annotated edition of Hanyang-ga and other articles dealing with the Hanyang-ga, I show that, although the fine quality of Song’s work, there is need of a new edition. Furthermore, I emphasize the importance of treating Hanyang-ga as a commercial publication.

7,800원

7

한문현토활판본 <옥루몽>에 대하여

유광수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39집 2014.03 pp.193-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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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판본으로 만들어진 고소설 중에 한문으로 현토한 현토활판본이 있다. 주로 한 문필사본이 있는 고소설의 경우 그렇게 만들었는데, <옥루몽>의 경우 한문현토활 판본이 만들어졌지만 한문필사본이 있지는 않다. 게다가 <옥루몽>의 원작이 한문 이 아닌 한글이란 주장이 제기된 상황이므로 한문현토활판본의 위상을 점검할 필 요가 생겼다. 본고에서는 ‘한문현토활판본’과 한글활판본인 ‘신문관본’, 그리고 善 本인 한글필사 ‘규장각본’을 비교 대조하여 한문현토활판본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면밀한 검토를 통해 현토본은 다른 활판본인 신문관본을 대상으로 성립한 이본 이 아니라는 점과 선본인 규장각본과도 다른 이본을 모본으로 성립했음을 확인하 였다. 또한 현토본의 모본이 한문본이 아닌 한글본이라는 사실을 방증했다. 이로써 <옥루몽>의 유일한 한문본인 한문현토활판본은 근대에 들어 한글본을 대상으로 한문에 익숙한 자가 현토해서 만든 텍스트임이 밝혀졌고, 나아가 <옥루몽>의 원작이 한문이 아닌 한글일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There are two versions of the printed book of <Okrumong(玉樓夢)>. One is written in Korean letters and the other in Chines characters. Many of Korean ancient novels were written in Korean letters. When there is a printed book with Chinese characters, in many cases the manuscript of that in Chinese also exists. However, we do not have a Chinese character manuscript of <Okrumong>, but only a printed book written in Chines characters. Therefore I researched the printed books of the <Okrumong> texts written in Korean and Chinse, and the manuscript written in Korean. As a result, I proved that the printed book of <Okrumong> Chinse character text is different from any other texts, and that this text is the translation from the Korean manuscript. I assert that the printed book of <Okrumong> was translated from Korean into Chines, and the original <Okrumong> text created by the author was primarily written in Korean.

7,800원

8

동반자형 이야기의 원형성 연구

고운기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39집 2014.03 pp.229-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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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자형 이야기는 분신(分身)으로서 상보적 관계를 형성하며 최종적인 합일 을 기도하는 짝패(Double)와, 상보적이며 상반적인 성격과 행동으로 이야기의 다채로움을 끌어내는 버디(Buddy)를 원형으로 두고, 짝패와 버디가 상호대응하 거나 조응하는 유형으로 설정한 것이다. 그 원형적인 모습을 삼국유사의 설화에 서 찾을 수 있는데, 동반자형 이야기로서 해석이 가능한 설화 21편을 모아 분석하 였다. 이 동반자형 이야기는 4개의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동반자형 이야기는 두 주인공이 등장한 이야기의, 이야기로서의 다채로움에 무 엇보다 주목하게 된다. 한 인물로는 그려내지 못할 상황의 다양성을 두 인물에게 지움으로써 현실성을 획득하고 있다. 만약 이런 성격을 한 인물에 집중하여 그려 낸다면 꽤 작위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또한 이런 이야기에는 제3의 인물군이 조연 으로 등장한다. 이 조연들도 주인공 2인과 연쇄적이며 복합적인 관계를 맺게 된 다. 양상은 더욱 다채로워질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을 동반자 관계로 설정하고 거기에 부여하는 대조적인 캐릭터를 통해 이 야기의 다면적 성격 창조에 이르는 것이다. 서사와 재미가 함께 가는 유효한 방법 이다. 게다가 불교철학적인 내용의 깊이가 따른다. 종교는 인간의 내면에 잠재한 가치의 울림을 중요시 여긴다. 흥미 위주에 치우치지 않는 이야기 속 숨은 주제는 가치 있는 삶에 대한 교훈이다. 이 같은 이야기가 삼국유사에서 원형으로 흘러나와 재해석된 이야기, 새로운 이야기의 거점 콘텐츠가 될 수 있으리라 본다. 이 글에서 특히 주목하여 분석한 것은 광덕/엄장, 원효/의상․혜공․사복 같은 불교설화와 승전(僧傳)이었는데, 장르의 엄숙함과 다른 이야기의 재미가 돋보이 기로는 편찬자 일연의 서사 능력에 힘입은 바이지만, 두 주인공 형식을 취한 서사 방식에도 일정 부분 기대었다고 해야겠다. 표리(表裏)의 반전하는 역동적 전개가 플롯을 복합적으로 만든다. 새로운 이야기의 창출에 효율적으로 활용할 부분이다.
連れ人形話は、分身として相補的関係を形成して、最終的な合一を企てる Doubleと, 相補的で相反的な性格と行動で話の多採性を引っ張り出すBuddyを原型 で置いて、ダブルとバーディーが相互対応するとか照応する類型で設定したのだ。 その原型的な姿を三国遺事の説話で捜すことができたが、連れ人形話として解 釈が可能な説話21編を集めた。この連れ人形話は五つの類型で分けることができ る。 連れ人形話は二人の主人公が登場した話の、話としての盛りだくさんさに何よ り注目するようになる。一人物では描き出すことができない状況の多様性を、二人 の人物に消すことで現実性を獲得している。もし、こんな性格を一人物に集中し て冩するなら、かなり作為的に見えたはずだ。また、こんな話には第3の人物群が 助演で登場する。この助演たちも主人公の2人と連鎖的で複合的な関係を結ぶよう になる。様相はもっと盛りだくさんになるしかない。 二人をパートナー関係で設定して、そこに付与する対照的なキャラクターを通じ て、話の多面的性格の創造に至るのだ。敍事と楽しさが共に行く有效な方法だ。 それに仏教哲学的な内容の深みが加える。宗教は、人間の内面に潜在した価値の 響きを重要視と思う。興味主にかたよらない話の中隠れた主題は、価値のある生 に対する教訓だ。 このような話が、三国遺事で原型に流れ出て再解釈された話、新しい話の拠 点コンテンツになることができると見る。 この文で特に注目して分析したことは、広徳/厳荘、元曉/衣装․恵空․蛇福み たいな仏教説話と僧伝だったが, ジャンルの厳肅さとあは違う、話の楽しさが引き 立つには編者一然の敍事能力に負ったところだが、二人の主人公の形式を取った 敍事方式にもある程度たよったとしなければならない。表裏の反転する躍動的な展開がプロットを複合的に 作る。新しい話の創出に効率的に活用する部分だ。

8,100원

9

<충노 만석전(忠奴萬石傳)>과 유흥문화의 담당층

이대형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39집 2014.03 pp.267-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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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노 만석전>은 이보상이 매일신보에 1936년에 10개월에 걸쳐 연재한 한 문현토소설이다. 이보상은 여러 작품들을 연재했는데 그 가운데 이 작품은 몇 안 되는 창작소설이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 정조 때로서, 노비가 주인의 원한 을 공적인 방법을 통해 풀어준다는 내용이다. 신분제 사회에서 제일 하층에 속하 는 노비가 부호와 수령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과 교유하고 도움을 받는다. 주인공 노비가 다른 계층의 인물과 교유할 수 있는 매개는 주인공 의 음악 실력이다. 주인공은 누구에게 배운 적이 없지만 판소리를 잘하고 퉁소도 잘 불어서, 전문가들도 그의 실력을 능가하지 못한다. 개연성이 부족한 설정이기 는 한데 이렇게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작품에서는 다양한 유흥 장면이 형 상화된다. 조선시대 유흥에서 빠질 수 없는 게 기생이므로 여기에는 여러 기생들 이 등장하고, 기생과 관련한 계층들 즉 궁노와 승정원 사령, 무부 등이 등장한다. 이들의 존재는 다른 소설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주요 특징 이 된다.
Loyal servant Manseok jeon(忠奴萬石傳) is a novel which Lee Bosang(李輔相) published serially for ten months in 1936 on the newspaper Maeilshinbo(每日新報). He published many novels, and it is a creative work. The hero in this novel is a servant who has a brilliant musical genius. Though he is a low social position, he meets many kinds of high classes. He has never taken any lessons in music, but any other experts can’t surpass him. It is not a realistic plot. By the way because of music’s narrative function, many scenes of party are described in this novel. In Chosun dynasty, gisaeng(妓生) play an very important part in party. We can find many various gisaeng in this novel, and many other classes related with gisaeng such as court servant, apparitor(使令), warrior(武夫). This is distinguished from any other novel, because these characters can’t be found easily in any other novels. This novel is worthy of notice in point of having entertainment culture of Chosun’s dynasty.

7,000원

10

현대시조의 율격 변이 양상과 그 의미 - 이호우 시조를 중심으로 -

김진희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39집 2014.03 pp.29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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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조의 형식적 면모는 시조장르의 본질 및 존립과 관련하여 논란거리가 되 고 있다. 고시조의 형태를 전제로 창작되어지는 시조 중에서 어느 정도의 일탈을 현대시조로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본고에서는 현대시조의 율격적 변이 양상을 살피고 그 의미에 대해 논의하였다. 제2장에서는 시조의 율격이 “반행 내의 앞마디가 뒷마디보다 짧거나 같으며(단, 마지막 반행은 종결부로서 그 반대), 각 마디는 3․4음절로 주로 구성된다.”라는 음수율적 성격을 지닌 것임을 밝혔다. 이어 제3장에서는 그러한 율격의식이 현대 시조에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이호우 시조의 예를 들어 살펴보았다. 먼저, 3․4 음절을 넘는 過音節로 시조의 마디가 구성된 경우를 검토한 후, 이어 ‘앞마디≦뒷 마디’의 반행 형태가 전도된 경우에 대해 분석하였다. 그 결과, 이러한 변격이 고 시조에 비해 이호우 시조에는 훨씬 잦았음을 보았으며, 이는 시적 주제 및 시의식 과 관련하여 일어난 결과임을 알 수 있었다. 과음절의 다용은 불안정하고 부조화 스러운 정서의 표현과 관련되어 있었으며, 반행 형태의 전도는 심상과 구어에 대 한 중시, 그리고 시상과의 부합을 꾀하는 내재율적 의식 등과 관계가 있었다. 본고의 논의를 요약하면, 첫째, 시조에는 음수율과 관련된 율격 의식이 존재하 며, 둘째, 그러한 율격 의식과 작가의 리듬 충동이 교섭하는 가운데 현대시조의 율격 변이는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만일 음수율과 관련된 시조의 율격 의식을 체 득하지 못하고 그것을 무시한 채 작품을 짓는다면 난삽한 작품이 형성될 것이요, 반대로 예민한 시의식과 내재율의 감각이 부족한 채 시조의 이른바 기준 음수율만 준수하려 한다면 고루한 작 품이 만들어질 것이다. 따라서 현대시조를 짓고 감상하 는 일은 시조의 율격 의식과 시인의 리듬 충동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는 일 이 되어야 한다.
The formal aspects of the modern sijo have been controversial with regard to the essential features of the sijo genre and its survival. The formal deviation of modern sijo poems raised the question such as how much deviation could be allowed. In this regard, this paper investigated the transformation of the sijo metrics in modern sijo and its implication. In chapter2, the metrical features of the sijo genre were discussed because they had still been controversial. This paper suggested that the metrics of the sijo should be understood as syllabic. Although the syllabic number of a colon is not fixed in a sijo, it follows less strict rules; a colon is often composed with three or four syllables, and the latter colon is greater than or equals to the former one in a half line of a sijo poem. In chapter3, the transformation of the sijo metrics in modern sijo was discussed. In Lee Ho-woo's sijo poems, which were selected as examples, the metrical features of the sijo were often transformed with regard to the poetic themes and the poet's literary consciousness. The longer colons that were often used in Lee's works were related to the anxiety and disharmonious feeling of his time. The reversed form of the half-lines also had connection with the modern poet's consciousness, which considers the poetic imagery and colloquialism as important and pursues the rhythm of free verse. In summary, the transformation of the sijo metrics in modern sijo poems occurs while the sijo metrics negotiates with the rhythmic sense of modern sijo poets. Disregarding the existing metrics would result in abstruseness, whereas sticking to the metrical rules would produce antiquated works. Therefore, the writers and the readers of modern sijo poems should be able to feel the tension between the sijo metrics and the poets' rhythmic sense and poetic consc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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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蠹 鄭汝昌의 불교적 자취

노의찬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39집 2014.03 pp.327-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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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蠹 鄭汝昌(1450~1504)은 朝鮮朝 五賢(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으 로서 사림의 영수인 김종직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손꼽혀 왔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국가에서 공인받는 문묘배향이 이루어져 백세 뒤에도 우러러 볼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정여창과 관련된 연구들도 조선전기 유학사상의 발전 과정 속에서 개인의 학문적 가치관과 실천적 행위와 관련하여 주된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하 지만 이러한 연구 성향은 부분적인 요소가 되었으며, 실제 정여창의 삶들은 기존 의 내용과 다르게 분명한 차이를 두고 있었다. 그는 당시의 유학자들과 상반적으 로 불교를 수긍하고 받아들여 자신의 실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굳혀져 갔음을 여러 모로 발견할 수 있었다. 남효온은 자신의 문집 속 「師友名行錄」에 정여창에 대하여 불교적 내용들을 적지 않게 기록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남효온의 秋江集에서 최초로 정여창 의 이면적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었다. 또한 남효온의 글은 정여창 이 유학자로서의 평가보다는 불교적 사유를 지향한 행적들을 선명하게 묘사해 줌 으로써 그의 전반적인 삶들을 쉽게 파악하도록 하였다. 더불어 이런 요소들은 정 여창의 진실 된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사료로서 가벼이 여길 수 없는 분야라 이해된다. 한편 위의 사실들과 관련하여 성호 이익은 실학자로서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문헌적 고증으로 확인되어지자, 정여창에 대한 신랄하면서 도 혹독한 비평을 주저하지 않았다. 즉 허무적멸한 불교가 유학과 같다는 정여창 의 사상적 견해에 재평가가 이루어 져야 한다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김일손의 「頭流紀行錄」은 15세기 말의 두류산을 보여주는 글로서 아주 귀중한 기록이다. 이는 그 당시에 존재했던 두류산의 사찰들을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사료 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하겠다. 실제로 유학자 김일손은 장기간에 걸쳐서 산사를 답사하고 나서 두류산에 대한 구체적이면서도 세부적 평가를 남긴 글에서 오늘날 가리키는바가 크다고 하겠다. 무엇보다도 김일손의 기행문으로부터 이제까지 전혀 알 수 없었던 정여창의 흔적들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더욱 진술된 내용에 있어 서는 너무나 중요한 가치를 재삼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정여창과 김일 손은 두류산의 산사를 여행하는 동안 유학자로서 둘 사이의 견해와 입장 차이를 뚜렷하게 나타내어 그들이 내면세계도 동시에 엿볼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들 로부터, 정여창의 불교적 자취들이 보다 더 현실적으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물이 보여주듯, 정여창은 오직 제한된 범위 내에서 유학자 로서의 가치와 평가에 핵심적 초점을 둘 뿐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가 유림의 사표로서 문묘종사 되었다는 역사적 평가가 너무나 두드러지게 작용했음을 추측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여창은 자신의 큰 틀은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지만, 실제 자신의 생활 속 자체는 불교적 사유로 나타남을 쉽게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요인들은 또한 다른 유학자들과 비교하여 사상적 견해를 분명히 달리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는 분야들이다. 따라서 본고는, 『秋江集』, 「頭流紀 行錄」, 『星湖僿說』등의 문헌에서 정여창의 사상적 이해를 새롭게 조명하는데 있 다고 하겠다.
Jeong Yeo-chang(1450~1504) was one of five sages(Kim Kwing-pil, Jo Kwang-jo, Lee Eon-jeok, Lee hwang) in the Joseon Dynasty and has been regarded as the representative literary man of Kim Jong-jik, the leader of Sarim. He was worshipped at the Confucian shrine official approved by the state for more than 100 years. He has become the object of major study in relation to the individual's academic value view and practical conduct in the developmental process of the Confucian thought in the early Joseon Dynasty. But unlike the tendency of this study, Jeong Yeo-chang accepted Buddhism and naturally proceeded to adhere to it in his real life contrary to the existing Confucian scholars. Nam Hyo-on was record a very much story to the Buddhist life to relate the Jeong Yeo-chang to 『A Collecting of Chugang,s writing,s』of Nam Hyo-on. in the Fact, the first, Nam Hyo-on of『A Collecting of Chugang,s writing,s』was showed the several behave of the different shape. Also, Nam Hyo-on of writing was understand all his action to explain the Buddhist thinking. Addition, This fact was showed the very important evidence to understant the Jeong Yeo-chang of the real action. Further, These facts was receive harch criticism in appear the literature evidence from Seong Ho Lee ik. Eventually, Seong Ho Lee ik was claimed the new revaluation to the Buddhism of the Jeong Yeo-chang 「Duryu Mounttain travelogues Record」of Kim Il-son was very important record to depiction of Duryu Mountain for The end of the 15th century. also, it is very high value to grasp and understanding of historical true existed at that time. Together, Confucians Kim Il-son directly finished the Mountain Temples for long time. it is very important history record to remain assessment. Kim Il-son was during the Mountain travel, This Temples know the rise and fall together prosperity and decay from genesis. But not, shoed detailed the one, the one to characteristics of Mountain Temples. Kim Il- son, in the entire Duryu mountain travel, clearly appeared of views and positions as Confucians during visit temples of Duryu mountain, As a result, he was appear his inner world. about this phenomenon, Kim Il-son was how understand, how accept from point the confucians and have deep mean to pointing bar for vivid and realistic seen confucians As found in the findings of studies conducted up to the present, they focused on the value and evaluation of Jeong Yeo-chang as Confucian scholar only in the limited scope. This fact is proved by the historical evaluation that he was worshipped as the guiding light of the Confucian scholars at the Confucian shrine. But it was found that he based his great framework on Confucianism but was infatuated with Buddhism in his real life. This indicates that his ideological view was clearly different from other Confucian scholars. Accordingly, this study was intended to shed new light on his ideological understanding in the literature such as 「Duryu Mounttain travelogues Record」,『A Collection of Chugang's Writings』, 『Seong Ho Sa Seol』and the l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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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책 춘향전과 완판 춘향전의 공시적 비교연구 – 동양문고본 세책과 완판 84장본을 중심으로 -

성아사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39집 2014.03 pp.355-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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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의 계보와 그 이본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수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때로는 정설로 여겨졌던 이론이 시간이 흐르면서 아닌 것으로 밝혀지기도 하고, 전혀 타 당하지 않은 가설이라고 여겼던 것이 지금은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상식이 되기도 했다. 다만 그러한 중에도 정확한 가설을 찾아 연구해온 선학들의 노력이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는데 끊임없이 일조하고 현재에 이르게끔 했다는 것은 자명 하다. 춘향전의 판본 문제에서 현재까지 논의된 바로는, 세책이 경판을 만드는데 일조 하였고 경판 안에서의 분화가 완판에 영향을 미쳤으며, 다시 완판 내에서의 변화 는 최종본인 완판 84장본에 영향을 주었다고 이야기된다. 완판 84장본은 새롭게 창조된 듯 보이는 독특한 구성과 변화된 인물 성격에도 불구하고 경판의 영향이 없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예전에는 완판 84장본을 중심으로 춘향전의 내용과 체 재를 논했기 때문에 다른 이본과의 연결 면에서 잘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존재 했었다. 이렇듯 통시적 흐름으로 진행된 춘향전 연구에서만 본다면 세책 춘향전과 완판 춘향전은 그 거리가 좁힐 수 없을 만큼 멀게만 느껴진다. 경판 춘향전을 거치지 않고는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과연 실제로 그러할까? 완 판 84장본과 세책 춘향전과의 친연성은 전연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인가? 이들 두 작품은 계열로 본다 면 시작과 끝으로 그토록 거리가 멀게 느껴지지만 실 은 1900년대 초 같은 시기에 유통되던 판본들이다. 즉 기존의 연구에서 더 나아가 세책에서 완판으로 바로 연결하는 공시적 관점으 로도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때 두 작품이 공유하는 다른 여러 요소를 발견할 수 있겠지만, 이번 논의에서는 몇몇 핵심화소와 노정기를 중심으로 공시적 비교연 구를 진행했다.
There have been repeated discussions up until now about the genealogy and variant versions of Chunhyang-jeon. Some of the theories that had been thought to be true were turned out to be wrong after some time, and some of the hypotheses that have been regarded invalid have become common sense which everyone agrees with. But in the meantime, it is obvious that the efforts of previous scholars striving to study to find out an accurate hypothesis did aid the discovery of new facts constantly and lead us to the present. According to the discussions that have been conducted so far, sechaek did support the creation of gyeongpan, the division within gyeongpan influenced wanpan, and again the changes within wanpan had an influence on the final edition of the wanpan 84 pages edition. Even though the wanpan 84 pages edition seems to have been newly created for its unique plot and different characters, they see it must have been influenced by gyeongpan. Seen from the research of Chunhyang-jeon that has been conducted to the diachronic flow, the sechaek Chunhyang-jeon and the wanpan Chunhyang-jeon seem too distant to narrow the gap. It means that there exists some gap which can never be overcome without the gyeongpan Chunhyang-jeon. But is this really true? Can’t the affinity between the wanpan 84 pages edition and the sechaek Chunhyang-jeon be the object to be considered at all? In terms of the lines, the two works seem too distant like beginning to end, but in fact, they are the editions that were distributed in the same period of the early 1900’s. In other words, exceeding the previous research, we also need to see it with the synchronic view to connect the sechaek to the wanpan directly. At this time, we may find the other elements that the two works share, but in this discussion, synchronic comparative research was conducted mainly around some of the motives and the itine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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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13

휘보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39집 2014.03 pp.383-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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