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rticle

Home

열상고전연구 [Yeol-sang Journal of Classical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열상고전연구회 [Society of Yol-Sang Academy]
  • ISSN
    1738-2734
  • 간기
    격월간
  • 수록기간
    1988~2019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810 DDC 810
제55집 (14건)
No

기획논문 : 가천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잡지 창간호

1

기획의도 : 가천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잡지 창간호의 성격과 의미

이춘실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5집 2017.02 pp.9-10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에 따라 개인회원에게 무료로 제공됩니다.

2

최남선 간행 잡지 ‘『怪奇』제2호’의 특징과 그 의미

엄태웅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5집 2017.02 pp.11-42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이 글에서는 그간 실물이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으며, 연구자들에 의해 고찰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최남선 간행 잡지 『괴기』제2호의 소재를 알리고 잡지의 특징을 소개하였다. 이 잡지는 지금까지 두 차례 간행된 최남선 전집을 통해서는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그런데 확인 결과 이 잡지는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고,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을 통해 간편하게 열람이 가능했다. 이 잡지는 최남선이 대중들에게 인문과학의 진면목을 전파하기 위해 기획된 것으로 보인다. 대중적 차원의 수준 낮은 교양에 附會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동서고금을 막론한 수준 높은 인문과학적 지식을 수록하려 한 것이다. 제2호에 실린 기사는 크게 ‘性的 화제를 다루고 있는 경우’, ‘역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경우’, ‘서사 장르의 작품을 다루고 있는 경우’, ‘기타’로 나눌 수 있다. 이 기사들은 대체로 우리 민족의 주체적 면모를 강조하려는 의지와 관련이 깊다. 아울러 인류 보편의 차원에서 조선과 여타 세계와의 同異에 대해 고찰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그런데 이 잡지는 제2호를 끝으로 더 이상 발간되지 못하였다. 이 잡지가 왜 더 이상 발간되기 어려웠으며, 최남선이 생각한 괴기의 정체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는 표면적인 의미 외에 앞으로 더 많은 고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Through this research, I introduce the magazine 『Goi-gi(Mystery)』 second issue, published by Choi Nam-sun. Until now, magazine 『Goi-gi(Mystery)』 never introduce to the researchers. There are so many reason, but the most important reason is we could not find and read this magazine. I found this magazine in the public library(INDEPENDENCE HALL OF KOREA), and even we can watch and read online(http://www.koreanhistory.or.kr). This magazine purposed people to upgrade Humanities and Cultures. Choi Nam-sun didn't want to make this magazine with easy and accessible contents. There are sophisticated and high-quality article in the magazine, and he showed a great wealth of knowledge across the all times and places. But after second issue, he couldn't publish this magazine any more. From now on, it is necessary that we find some unknown reason.

7,300원

3

계량정보학적 측면에서 본 우리나라 근현대 잡지 창간호의 모습 - 가천박물관 소장본을 중심으로 -

이춘실, 이혜은, 허지수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5집 2017.02 pp.43-72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이 연구는 현재까지 확인된 잡지 창간호 소장처 중 가장 많은 장서를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 가천박물관 자료를 통하여 우리나라 잡지 창간호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가천박물관에서 잡지 창간호로 구분하여 관리하는 자료는 모두 20,141점이며 이 자료들의 간행시기는 1900년대부터 2010년대에까지 분포되어 있다. 본 연구에서는 이들 자료 중 상대적인 희소성을 갖고 있다고 판단되는 1900년부터 1969년까지의 자료 1,652점 중에서 복본과 일본잡지, 창간호가 아닌 자료등을 제외한 1,356종에 대하여 심층적인 분석을 하였다. 조사 결과『寶成校友會報(1921)』, 『大東公論(1923)』, 『사랑의동무(1926)』, 『學友會誌(1935)』, 『同窓會誌(1937)』, 『소국민육학년(1947)』, 『文鶴山(1948)』, 『師大文學(1950)』, 『學生藝苑(1952)』등은 그동안 확인된 잡지목록에 등재되지 않은 유일본으로 추정된다. 잡지 창간호의 시기별 분포를 보면 190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 점차적인 증가추세를 보이다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대폭 상승하였다. 잡지의 주제별 분포는 교육과 문학관련 잡지가 높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잡지명은 한자로 된 경우가 가장 많았으며 한글 잡지명은 16.9%였다. 잡지 본문의 언어는 국한문 혼용이 다수 나타났다. 잡지의 본문을 가로쓰기 하는 것은 1940년대에 이르러 나타났으며 가로쓰기가 활발히 진행된 주제 분야는 교육학 분야였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에서 더 많이 등장하였다. 또한 대학 도서관에서 폐기한 자료가 다시 박물관의 소장품으로 재활용되는 사례도 확인할 수 있었다. 1900년부터 1945년까지 자료의 인쇄소는 서울이 대부분이었고 서울 소재 인쇄소는 종로구와 중구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들 인쇄소는 이후 1960년대까지 서울시 주변으로 점차 퍼져나가는 양상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잡지 발간의 매우 이른 시기부터 선금 지급을 통한 정기구독이 나타났으며, 선금 지불 시 우편료와 운송료에 관한 부분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연구의 대상이 된 잡지가 우리나라 모든 잡지 발간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역사와 문화는 유사한 양상으로 나타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연구가 관련 분야의 심도있는 연구로 이어져 우리나라 잡지 발간사를 완성하는데 횔용되기를 기대해 본다.
This study investigated the Magazine Collection of the Gachon Museum which encompass more than 20,000 first issues of magazines published in Korea since 1900. In order to assess the characteristics of magazines published in Korea in modern times, the study focused on the first issues of magazines published from 1900 to 1969. For each first issue of 1,356 magazines launched in that modern time period, bibliographic elements such as full title, language of title, language of main texts, writing directions (vertical/horizontal), publisher, printing press, place of publication, subscription fee and subjects were fully described. The number of magazines launched was gradually increased till 1940s, but it was rapidly and significantly grown from 1950s. The magazines published in those days mostly covered education and literature. The writing direction was changed from vertical to horizontal during 1940's. Interesting portion of the Gachon Colletion was the magazines that were discarded by university libraries. The majority of printing presses was located in Seoul. They were centered around Jongro-gu and Jung-gu, then were spread out to surrounding areas over time. The bibliometric analysis of the first issues of magazines distinctively showed the characteristics of Korean magazines published in modern times. The bibliometric approach also captured the historical changes reflecting the cultural, social and political situations of the time periods examined.

7,000원

일반논문

4

시맨틱 웹에 기반한 한문학 연구의 효율성 탐색

박순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5집 2017.02 pp.73-97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은 한문학 연구자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다. 그러나, 현재의 웹 시스템은 많은 한계가 있으며,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팀 버너스-리(Tim Berners-Lee)는 1998년에 시맨틱 웹(Semantic Web)을 제안하였다. 기존의 웹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차세대 웹의 출현을 알린 것이다. 본고는 이러한 시맨틱 웹의 개념에 대해 소개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기술 언어와 전문 연구자의 역할은 무엇인지, 시맨틱 웹에 기반한 한문학 연구는 어떠한 효율성이 있는지에 대해 논하였다. 현재의 웹은 사람을 위한 것이며, 사람이 잘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모니터 화면의 시각화 기술에 중점을 둔 것이다. 따라서, 컴퓨터가 문서(document)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으며, 모니터 화면을 통해 사람이 일일이 그 의미를 해석하고 정리해야만 한다. 하지만 시맨틱 웹은 “문서의 웹(Web of documents)”이 아닌 “데이터의 웹(Web of data)”을 추구한다. 이로써 사용자는 각각의 문서들을 일일이 클릭해 읽어보지 않아도 되며, 필요한 데이터만을 모아서 원하는 정보를 훨씬 효율적으로 얻을 수 있게 된다. 또한, 시맨틱 웹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모든 데이터가 서로 연결(link)되는 것이다. 즉, 웹 안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정보가 서로 연결되고 통합되는 것이다. 현재의 웹이 하이퍼링크(hyperlink)를 통해 웹 페이지를 기계적으로 연결해주고 있다면, 시맨틱 웹은 컴퓨터가 자동적으로 데이터의 의미를 추론하여 데이터 간의 관계를 찾아, 관련된 데이터가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하자는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시맨틱 웹의 구현을 위한 기술 언어로는 대표적으로 3가지를 들어 보였다. 첫째는 XML(eXtensible Markup Language)로서 특정 단어나 문장에 대해 의미를 명시하는 태그를 붙여 컴퓨터도 그 의미를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둘째는 RDF(Resource Description Framework)이다. RDF의 기본 구조는 ‘주어’, ‘서술어’, ‘목적어’로 이루어지며, 각 개체의 관계를 밝혀주는 것으로서, RDF 형식을 충실하게 명시해주는 만큼 웹상에서의 데이터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잘 연결될 수 있다. 셋째는 온톨로지(Ontology)이다. RDF 구문만으로는 시맨틱 웹이 완전히 구현될 수 없으며, 정보의 의미와 관계를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한 명세서가 반드시 필요한데 이것이 온톨로지이다. 시맨틱 웹이 한문학을 연구하는 데에 어떠한 효율성을 가질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크게 3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보다 효율적이고 정확한 검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 데이터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link)되면서 지식 정보가 통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컴퓨터가 지능을 갖추면서 스스로 데이터를 분류하고 분석하여 연구자의 충실한 비서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맨틱 웹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자료의 의미와 확장성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해당 분야의 연구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그들도 시맨틱 웹의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The World Wide Web has been a great benefit for researchers of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But, today’s Web system has many problems. Aware of these problems, Tim Berners-Lee suggested the Semantic Web in 1998. To improve the current Web environment, the emergence of a next-generation Web will be announced. This paper introduces the concept of Semantic Web, discusses the technical language and the role of professional researchers to implement it, and discusses the efficiency of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Research Based on the Semantic Web. The current web is for people, and it focuses on the visualization technology of the monitor screen to enable people to understand. Therefore, the computer can not understand the meaning of the document, and the person has to interpret the meaning of the document through the monitor screen. However, the Semantic Web seeks “Web of data” rather than “Web of documents”. This makes it possible for the user not to click on each of the documents to read the data, and to gather the necessary data to obtain the desired information more efficiently. Also, one of the important goals of the Semantic Web is that all the data is linked to each other. In other words, all knowledge information existing in the web is connected and integrated. Although the current web is mechanically linking web pages through hyperlinks, the semantic web has a tendency that the computer automatically deduces the meaning of the data and finds the relation between the data, so that the related data can be connected with each other. There are three representative languages ​​for the implementation of the Semantic Web. The first is XML(eXtensible Markup Language), which allows a computer to recognize the meaning of a specific word or sentence by attaching a tag that specifies its meaning. The second is RDF(Resource Description Framework). The basic structure of RDF consists of 'subject', 'predicate', and 'object', which reveal the relationship of each resource. As RDF format is specified faithfully, data on the web can be linked and linked to each other. The third is Ontology. The RDF syntax alone can not be fully implemented in the Semantic Web, and a systematic statement of the meaning and relationship of information is essential. This is an Ontology. The efficiency of the semantic web in studying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is roughly divided into three. First, searches can be more efficient and accurate. Second, knowledge information can be integrated through close data links. Third, a computer can have intelligence and analysis capabilities, and can classify data by itself as a faithful assistant. Finally, in order to properly implement the semantic web, researchers in the field who deeply understand the meanings and extensibility of the data should take a leading role and emphasize that they need to understand the concept of the semantic web.

6,300원

5

교육자로서의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에 관한 종합적 고찰

이민희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5집 2017.02 pp.99-138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본 연구는 가람 이병기를 근대 초기 교육자로서 재조명하기 위한 목적에서 마련되었다. 가람의 전 생애를 고려할 때 가람이 일관되게 행해 온 주요 활동은 교육과 관련한 것이었다. 따라서 가람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고자 할 때, ‘교육자’로서의 가람을 논하지 않고 제대로 가람을 이해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까지 교육자로서 가람을 본격적으로 살핀 논의는 부족했다. 이에 본고는 관립 한성사범학교 졸업 후 평생 걸어갔던 가람의 교육자로서의 삶을 대중교육자(계몽가), 공교육자(교사), 그리고 국어교육자 측면으로 나눠 살펴보았다. 첫째, 가람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기회가 될 때마다 한글과 시조, 고전문학, 그리고 우리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고자 한 계몽가이자 대중교육자였다. 특히 변화된 세상에서 새로운 교육 주체로 여성에 주목해 여성 교육을 힘써 강조했다. 가람이 신여성이 교육을 받고 주체적인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사연을 다룬 단편소설을 창작한 것 자체만으로도 여성 교육에 대한 그의 관심사를 대변한다. 또한 가람은 눈높이 교육과 역사적 위인과 사건을 소재로 한 역사교육을 중시했다. 아동에게 민족정신을 심어주고자 정성을 쏟았다. 둘째, 가람은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까지 제도권 내 교육기관에서 평생 교사 또는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공교육자였다. 비록 나라 잃은 상태에서 그 역할이 제한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과 정신 교육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개인적으로 우리말글의 우수성과 고전의 가치를 가르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교사 시절, 자신이 직접 고서를 읽고 고전을 탐구한 결과를 신문과 잡지, 단행본 등으로 발표했는데, 이 또한 일반인과 학생들로 하여금 쉽게 고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에서였다. 날 것 상태의 시조, 고전문학, 한글, 문법, 고서 내용을 체계화․이론화해 민족 교육의 대상으로 만든, 일종의 가람식 공정(工程)이었다. 셋째, 가람은 해방 후 편수관이 되어 초창기 국어교육의 기초를 다지는데 일정 부분 기여한 국어교육자였다. 국어 교과서 편찬 및 집필 등 초기 국어 교재 개발뿐 아니라 교수요목 및 교육과정에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람일기』 수록 일부 자료를 제외하면 공식적 자료에서 가람이 국정 국어 교과서 제작에 참여한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자유발행제 체제하에서 가람이 만든 국어교재(인정 교과서)를 본고에서 처음 평가했다. 가람의 국어교재는 교육목적과 방법을 충분히 고려한 본격적인 교재였다기보다 일종의 작품 선집에 가까웠다. 가람은 시조창작 및 교육뿐 아니라, 평생 어려운 고전을 쉽게 풀어 소개하고 교주, 번역하는 일에 골몰했다. 가람이 자신의 교수 경험을 토대로 학습자 및 일반인을 위한 각종 고전 독서물과 학습용 교재 등을 선보인 것은 평생 교육자로서의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생 학생과 일반 대중, 여성, 아동을 위한 교육과 전통 계승을 위한 고전 교육에 평생을 바친 초창기 국어교육의 선구자로 가람을 자리 매김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This research is purposed to assess comprehensively the various activities and aspects which Garam(嘉藍) Lee Byong-gi(李秉岐) showed as an educator. Garam walked the road as a lifelong educator after graduating from College of Education in Seoul. Garam can be evaluated as public educator and teacher at the elementary, middle, high schools, and university, and educator of Korean studies. Public educators can greatly evaluated by three as follows. : First, Garam dedicated to teach Hangul to the illiterate and to enlighten people as a member of the Society of Korean Language. He made by means of enlightenment by teaching the Korean language to the public through a national tour and several journals and newspapers. He also taught Hangeul to more popular on the radio. Second, Garam regarded education of women as the main target of enlightenment in modern society. So he have a keen interest in women's education and published several articles about this. It is important for us to know that Garam wrote a short story about new women, not as a Shijo poet, but a writer. It represent how much Garam was interested in women's education. Third, Garam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children's education and practice through the eye-level education and training activities, and education of the history using historical events and materials. He struggled to provide reading materials that children can dream and hope. On the other hand, Garam taught students for a lifetime in elementary and middle schools, high schools, and universities. He taught the excellence of Korean language and value of Korean classic, and dedicated to foster the intellectuals. And he sought to easily adapt to school education. Garam had a responsibility for public education as a teacher of public education and emphasized importance of public education through several papers and journals. Finally, after the liberation, he participated in a portion of compilation of Korean textbooks and involved in the early development of Korean textbook materials, and contributed to curriculum development. In other words, he was the expert who designed the direction and content of Korean classical literature's education, and laid the foundation for Korean education. It is required to assess his educational lessons accurately. It was none other than saying education that Garam showed us through a variety of activities and numerous works throughout his life. It was interested for him to teach easily difficult classics, and to cultivate talented people with knowledge and skills. That is good evidence that Garam have released a variety of classic reading and learning materials that can easily access numerous articles and paperback, based on actual teaching experience. Therefore, we need to remember him as a great teacher.

8,500원

6

『日觀記』 「唱酬諸人」의 인명 표기 유형과 특성 - 1764년 필담창화집 및 인명사전과의 비교 작업을 중심으로 -

진영미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5집 2017.02 pp.139-177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전통시대 한일 교류 관련 문헌을 읽다보면, 동일인물로 여겨짐에도 달리 표기되어 있는 인명들을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된다. 1763,4년 통신사행 때 제술관으로 사행에 참여하였던 남옥이 쓴 사행록 『일관기』의 항목 「창수제인」에는 500여명에 이르는 일본문사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들 문사들은 이름 위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창수제인」과 관련된 필담창화집에 등장하는 인명은 이름과 자호 등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고 일본사전에는 대부분 호 위주로 표기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조선문헌과 일본문헌 및 일본사전과의 소통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연구 작업에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어 「창수제인」의 인명을 1764년 필담창화집 및 일본사전에 나오는 인명과 비교 고찰해 봄으로써 「창수제인」의 성격 규명은 물론 표기의 유형, 나아가 오기의 정도 등을 고구해보고자 한다.
While reading the literature about Korea-Japan exchange of Chosun Dynasty era, we can easily discover from many literatures that many correnspondents’ names were marked differently, even if they are the same person. In ‘Changsoojein’, one of the parts of envoy record named ‘Ilkwanki’ which was written by Nam-Ok (Jesoolgwan - Poem exchanger) during Chosun envoys in 1763~4, nearly 500 Japanese writers were contained and written by their names in general. However, in ‘Pildamchanghwazip’ which is closely related to “Changsoojein’, all the Japanese writers were listed by their names, art names, and courtesy names. Also in Japanese dictionary, most of them were marked by their art names. Hence, due to this complication and miscommunications between Chosun literature, Japanese literature and Japanese dictionary, there are difficulties in research works. In this paper, all the writers names listed inside ‘Changsoojein’ will be recognized by comparing and considering between ‘Changsoojein’ and 1764 ‘Pildamchanghwazip’ and Japanese dictionary. By doing that, we expect to recognize all the writers in ‘Changsoojein’ by their roles, name list type, degree of mistaken writings

8,400원

7

조선후기 표해록(漂海錄)에 담겨진 일본 관련 지식정보 - 나가사키를 통해 유입된 정보를 중심으로 -

최영화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5집 2017.02 pp.179-227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본고는 조선후기 표해록을 대상으로, 일본에 표류했던 조선인을 통해 조선에 유입된 일본발 지식정보, 특히 나가사키를 통해 유입된 지식정보에 대해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2장에서는 나가사키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 기록인 『해외문견록(海外聞見錄)』, 『탐라문견록(耽羅聞見錄)』, 풍계현정의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 이종덕의 『표해록(漂海錄)』 등 자료에 대해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3장에서는 조선 표류민들의 일본 체류 과정에서 일본발 지식정보의 매개자로서 조선어통사들의 역할에 대해 고찰하였다. 4장에서는 조선 표류민들의 나가사키 견문과 나가사키를 통해 유입된 해외 지식정보들의 특성을 살펴보고, 이를 (1) 나가사키를 통해 입수한 서양 정보, (2) 일본의 국제무역에 대한 정보, (3) 해외 선박제도, (4) 일본의 군사 동향과 정치외교 동향에 대한 정보 등 네 갈래로 귀납하여 분석을 진행하였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onsider records of drifting written in late Chosun and examine Japan’s knowledge and information introduced to Chosun through Chosun people drifting in Japan, particularly those introduced from Nagasaki. In Chapter 2, 『Haeoemungyeonrok (海外聞見錄)』, 『Tamramungyeonrok (耽羅聞見錄)』, Punggye Hyeonjeong’s 『Records of Drifting in Japan(日本漂海錄)』, and Lee Jong-deok’s 『Records of Drifting(漂海錄)』 are examined generally as records describing Nagasaki in detail, and in Chapter 3, Korean interpreters’ roles are studied as mediators for Japan’s knowledge and information while drifting people from Chosun were staying in Japan. In Chapter 4, this researcher investigates drifting people’s experiences in Nagasaki and the characteristics of overseas knowledge and information introduced from Nagasaki and also conducts inductive analysis in four parts: (1) information about the West transmitted from Nagasaki, (2) information about international trade in Japan, (3) overseas’ vessel systems, and (4) information about military trends and political and diplomatic trends in Japan.

9,900원

8

일제 말 『매일신보』 소재 신년 현상 한시 연구 - 칙제(勅題)를 중심으로 -

한길로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5집 2017.02 pp.229-257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본고는 신춘문예와 맥락을 같이하며 유지된 “신년현상한시”에 주목하며 전시체제기 한시 창작의 특징적 면모를 분석해 보았다. 당시 이른바 ‘민족말살정책’이 강행된 시대적 상황은 ‘신년현상한시’에도 짙은 흔적을 남기고 있었는데, 일제는 신년 궁중행사인 ‘우타카이 하지메(歌会始)’ 시행에 앞서 제시되는 ‘칙제(勅題)’를 『매일신보』의 신년 시제로 제시하며 조선인의 동참을 유도했다. 즉 조선인의 한시 창작 전통과 일본의 신년 행사를 결합하여 조선인 역시 일본인과 동일한 방법으로 칙제라는 ‘천황의 성지(聖旨)’를 수용하도록 구조화하며 황민화를 조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획에는 대략 1000여 명이 넘는 인원들이 참여할 정도로 비교적 성황리에 진행되기도 했는데 지방의 하급관리나 유림 출신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는 이들 작품들은 지배층․저명인사․문단작가들에 한정되지 않은 일제의 전방위적인 ‘총동원’의 흔적과 동시에 그것에 대응하며 살아간 각 지역 보수 엘리트 인물들의 ‘식민지적 대응’을 반영한다 할 수 있다. 즉 일제는 ‘구체제적 인사’들을 체제 속으로 편입시키는 하나의 방편으로 이들이 여전히 향유하고 있는 문예물인 ‘한시’를 하나의 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작성된 시들은 전시이데올로기를 ‘유교적 에토스’로 수용하고 있었고 전통적 ‘천하관’을 견지하며 ‘일본 신민’의 입장에서 세계를 주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결론적으로 이들 작품은 ‘봉공과 멸사’를 의무화하고 ‘만세일계(萬世一系)’라는 신화를 주입하려던 일제의 전시이데올로기와 근대기 한문맥의 왜곡된 결합 양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The context of Times when so-called ‘genocide policy’ is enforced left a heavy trace and the Japanese Empire induced Koreans’ participation proposing ‘chikje(勅題)’ as a subject for a poem, which is suggested before ‘Utakai Hajime(歌会始)’, an event in Royal Court in New Year, is started. In short, they combined Koreans’ tradition in creation of Sino-Korean Poetry and Japanese New Year’s event and aggravated Imperial Citizen Forming structuralizing Koreans in order to accept ‘a shrine of the Japanese emperor’, chikje(勅題), in the identical way with Japanese. Roughly more than 1,000 of people participated in this project and it went successfully. Most ‘winners’’ backgrounds were not identified and some identified ones were minor officials in the provinces or from Confucians. In other words, these people constituted creating class of Sino-Korean Poetry in the late Japanese Empire and they took charge of ‘pro-Japanese’ Sino-Korean Poetry at this time. As a link, the Japanese Empire utilized Sino-Korean Poetry, a Literary Works that is still enjoyed as an instrument to make famous figures or writers‘ ‘words’ but also unknown ‘specific figures’ who are not well-known but work on all social standings include in a system. Poetry written in this background embraced the war time ideology as ‘the emotion of the context in Chinese letter’ and watched the world from a point of view of Japanese by sticking to the traditional world view. In conclusion, these works directly show the skewed aspect of combination of the war time ideology and the context in Chinese letter in Modern times, which required ‘a public duty and devotion for the country’ andself-annihilation for the sake of one's country self-annihilation for the sake of one's country indoctrinated the mythology, ‘Manseilgye(萬世一系)’.

6,900원

9

호랑이와 인간의 결연설화에 나타난 한중(韓中) 인식 비교

손지봉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5집 2017.02 pp.259-286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본고에서는 일연이 <김현감호(金現感虎)>에서 중국설화와 비교한 점에 착안하여 인간과 호랑이의 결연설화에 있어서 한국설화와 중국설화를 비교하여 그 차이를 밝히려 하였다. 한국과 중국의 호랑이와 인간의 결연설화에서는 배우자를 얻지 못한 결핍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호랑이라는 이류(異類)를 만난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울러 호랑이의 수성(獸性)이 지닌 흉포성으로 인해 결핍의 해소는 바로 위기의 빌미가 되고 한국이나 중국설화 모두에서 공생에 실패하는 경우가 공통적이다. 다만 한국이 인성(人性)을 존중하고 인성의 회복을 위해 호랑이와의 결연을 끊는 설화를 보여주고 있으며, 김현감호전승설화에서처럼 종교적으로 승화한 숭고한 인성의 실천을 지향하고 있는데 반해 중국은 인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수단으로서의 호랑이의 수성을 평가하고 있으며, 나아가 인간사회의 부조리함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물리적으로 인간보다 강한 호랑이의 힘을 존중하는 면을 보인다는 차이가 있다. 한국과 중국이 호랑이의 흉포함을 인정하면서도 이와 같이 다른 인식을 보이는 이유는 한국에 있어서는 단군신화와 <김현감호>설화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중국에서는 호랑이를 토템으로 숭상하는 소수민족으로서의 특성과 물리적 힘의 존재를 존중하는 경향이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
This paper attempts to compare Chinese folktales and Korean folktales in terms of an interspecies romance between a tiger and a human being, inspired by the comparisons made by Il Yeon, based on Kimhyunkamho, and other Chinese folktales. Chinese folktales and Korean folktales have this in common: a human being is involved in a romantic relationship with a tiger, a different species, since no human candidate for a spouse can be found. Often in both folktales, the attempted relationships end in a crisis due to the violent bestiality of the tiger, which leads to the end of the symbiotic relationship. In Korean folktales, the human being often severs the interspecies relationship in order to restore his humanity and, as in Kimhyunkamho, tries to live a noble human life, which is elevated to a religious dimension. On the contrary, in Chinese folktales, the tiger’s bestiality is regarded as a means to overcome the human condition, and the tiger’s superior physical power is used to address the irregularities of human society. Both folktales share a fear of the tiger’s ferocity. The difference seems to derive from the fact that, in Korea, the Myth of Dangun and Kimhyunkamho have had a significant impact on subsequent folktales and in China’s case, the minority races worshiped tigers as totems and tended to respect physical power.

6,700원

10

『홍재전서』 수록 正祖의 詩에 관한 小考 - ‘아버지’와 주체형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

이상욱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5집 2017.02 pp.287-323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본고는 『홍재전서』 수록 시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다. 정조는 ‘시사’(詩史)적 관점에서 특기할 만한 작품을 남기지 않아 그 동안 적극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정조는 시 자체를 많이 남기지 않았고, 있는 시도 대부분 국왕으로서 의례적으로 쓴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정조는 ‘문이재도론’의 입장에서 다분히 보수적인 시관을 가지고 있어, ‘문학사적’ 성취를 중요시하는 현대의 학계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은 면도 있다. 하지만 본고는 기존의 문학사적 관점에서 다소 벗어나, 감정표현의 도구로서의 시의 역할에 주목하고, 정조 인생 단계 마다 미묘하게 변화하는 시의 내용들을 관찰하고자 했다. 궁극적으로는 18세기 후반 조선 사회의 중심에 있던 정조의 여러 선택과 행위의 맥락을 살펴볼 수 있는 배경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홍재전서』 소재 정조의 시 작품들은, 인간 정조의 본 심리를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보다는, 정조라는 메타주체가 자기 검열과 취사(取捨)를 통해, ‘선택한’ 자기의 형상이라는 관점에서 접근될 것이다. 본고는 『홍재전서』 소재 시 작품을 대략 세손시절, 왕위에서의 전반기, 왕위에서의 후반기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본고에서 이와 같은 시기 구분은 정조의 시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기준으로 나누었으나, 시와 관련하지 않더라도 정조의 인생과 정치적 조건 및 위상 변화에 의해서도 시기가 위와 같이 구분되기도 한다. 세손시절은 대략 즉위 전까지를 뜻하며, 왕위에서의 전반기는 『시관』이 편집된 1792년까지, 후반기는 이후 서거하기 직전까지이다. 본고는 정조의 시 변화가, 정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심리적으로 은밀히 의지하는 대상, 즉 ‘은유로서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기인했다고 보며, 정조가 서거 직전 지은 「근화주부자시(謹和朱夫子詩)」 8수는 이 필생의 문제를 정조 나름대로 ‘해결’한 결과라고 본다.
This paper deals with the poems which had been ultimately selected in the literary collection of King Chŏngcho, Hongjaejŏnsŏ. The poems of The King Chŏngcho, haven't been adequately noticed yet not only because he did not leave much of the poetry, and most of which was written in rather ceremonial circumstances than from expressive motivation, but also because he, who had a rather conservative viewpoint of literature, was on the other side of poets who have been popular among the modern literary historians. This paper explores, however, several trends of King Chŏngcho's poems along with his life story beyond the modern way of historicizing the poetry in the narrow terms of literature. It aims, eventually to reveal the context of his choices and actions, as a main player of Chosŏn society in the late eighteenth century. In this study, King Chŏngcho himself reflected on the poetry pieces won't be identified with his existential self but will be regarded as a literary and rather artificial self that was purposedly created by his meta-self. This paper divides his lifetime into three stages: a prince period (1765-1776), an early period of his throne (1776-1792) and a late period of his throne (1792-1800). King Chŏngcho's poems of each period had changed on the basis of his relationships with the “Father” that was metaphorical object on which he psychologically relied when he needed to defend himself against his political enemies. 「Harmonized Rhymes on Zhu Hui's Poems 謹和朱夫子詩」 8 pieces which were written just before his death (1800) were ultimate “interpretation” on his place in the diverse kinds of lineages.

8,100원

11

신유의 일본과 중국 두 나라 인식에 대한 비교 연구 - 『해사록』 및 『연대록』을 중심으로 -

허경진, 조혜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5집 2017.02 pp.325-366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신유의 연행록 『연대록』과 통신사행록 『해사록』을 텍스트로 삼아, 그의 사행에 대한 태도 및 대중․대일 인식을 고찰하였다. 신유는 일본 통신사행에 대해 ‘한묵(翰墨)’으로 양국간의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선조 신숙주가 1443년에 서장관으로 일본에 갔기 때문에 사행이 집안의 전통이라고 생각하였다. 연행(燕行)에 있어서 명나라에 갔느냐, 청나라에 갔느냐에 따라 신유의 태도가 달라졌다. 박수문이 1635년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신유는 박수문의 조천(朝天)을 부러워하며, 조천을 통해 학식과 마음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1652년에 신유 자신이 청나라의 연경에 갔을 때 그는 “이왕(二王)을 섬기고 있다”고 자책하며, 명나라를 배신한 행동이라고 인식하였다. 신유는 일본에 대해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사행이 진행되면서 일본의 경치와 문학에 대해 긍정적 인식을 갖게 되었다. 성대한 일본 풍경을 시로 기록하였으며, 일본에도 문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야시 부자를 비롯한 일본 승려나 문인과 문학 교류를 하였다. 그들과 한시 수창을 하고, 그들을 통해 일본의 지리․문학․역사 등의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리고 하야시 가문 부자의 문학 수준을 높이 평가하였다. 통신사행 때의 신유는 사신 이외에 여행자와 문인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신유는 연행 도중에 전쟁 유적을 탐방하며 명나라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시로 표현하였다. 청나라의 수도인 연경을 묘사하는 시는 한 수도 남기지 않고, 오히려 회고시를 통해 반청의식을 표출하였다. 명나라 추종자의 모습이 뚜렷하다. 이같이 대일․대중 인식의 차이가 난 것은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신유는 병자호란의 참상과 고통을 직접 느꼈던 사람이다. 반면에 임진왜란은 신유가 출생 전에 일어났고, 임진왜란이 이미 51년이나 지나서 일본을 방문했으므로 청나라만큼 일본을 미워하지 않았다. 둘째, 조선에서 소중화사상이 태동되었기 때문이다. 소중화사상은 구체적으로 ‘중화회복의식’과 ‘중화계승의식’이 있는데 신유는 ‘중화회복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은 명나라의 멸망으로 더욱 깊어졌으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명나라 멸망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아서 청나라만큼 심하지 않았다.
This paper, using Sin Yu's 『Yeontaerok』and 『Heasarok』as target text, study his attitude to the diplomatic travel to China and Japan, and compare his perception of China and Japan. When he went to Japan, maintaining peace between Joseon Dynasty and Japan by his ‘writings(翰墨)’ was his main purpose. In addition, he thought that going to other country is a tradition of Koyeong Sinssi(高靈申氏). Because Sin Suk Zu who is his progenitor has gone to Japan in 1443. As for China, Sin Yu showed different attitude toward the travel to China because of different target country. When Park Su Mun went to Ming Dynasty in 1635 as a Yeonhangsa (燕行使), Sin Yu hold a positive attitude on Yeonhang (燕行). He admired Park Su Mun's travel and thought Yeonhang can broaden people's knowledge. However, when he went to Qing Dynasty as a Yeonhangsa (燕行使) in 1652, he thought he was “serving two kings”, and it was a betrayal of the Ming dynasty. Sin Yu hold a negative attitude to Japan basically. But with a better understanding of Japan, he hold a positive attitude to scenery and literature of Japan. He communicated with the Lin family about Chinese poetry, and collected information about Japanese history, geography, literature and so on from them. In the 『Heasarok』, Sin Yu showed a variety of features such as envoy, tourists and scholars. As for China, Sin Yu showed the nostalgia for the Ming Dynasty and he was strongly against the Qing Dynasty. He went to the ancient battlefield on the way to Beijing, and expressed his nostalgia for the Ming Dynasty with poetry. However, missing the Dynasty so much led to avoiding the Qing Dynasty. So when he was in Beijing, he did not write any poetries about then Beijing, but showed a strong sense of against Qing Dynasty in his history-nostalgia poetries. There are two reasons to explain the different perception of China and Japan. First of all, he personally experienced Byeongjahoran (the Manchurian Invasion of Korea in 1636)(丙子胡亂). He went to Shen Yang as a member of Crown Prince Sohyen's Saejasigangsiwon(世子侍講院) in 1639, and in Shen Yang he suffered from disease and homesickness. While Imjinwaeran(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壬辰倭亂) happened before Sin Yu was born. When Sin Yu went to Japan in 1643, it has been more than 50 years after Imjinwaeran happened. So his anger toward Japan is not as deeply as his anger toward Qing Dynasty. Second, small Sinocentric attitude(小中華意識) was prevalent in Joseon Dynasty at that time. At that time, small Sinocentric attitude was segmented into ‘restoring China attitude’ and ‘inheriting China attitude’. We can judge that Sin Yu was tended to restore the Ming Dynasty by military force from different aspects. For example, he thought back to historical stories which are related to military force and missed famous generals in his Yeonhaengrok. Also Japan were not belonged to the same cultural circle with Joseon Dynasty and China from the aspect of cultural identity. So the ruin of the Ming Dynasty and small Sinocentric attitude did not have too much effect on Sin Yu's perception of Japan.

8,800원

12

나카무라 료헤이(中村亮平) 조선전설집의 개작 양상 고찰

김광식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5집 2017.02 pp.367-402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본고에서는 『지나․조선․대만 신화전설집(支那․朝鮮․臺灣神話傳說集)』(1929)에 수록된 나카무라 료헤이(中村亮平)의 조선편의 개작 양상을 분석하였다. 나카무라는 『조선동화집(朝鮮童話集)』(1926) 발행 후, 조선전설집을 펴냈다. 선행연구에서는 『조선동화집』에 대해서는 일정한 연구가 행해졌지만, 전설집은 전혀 다뤄지지 않았다. 이에 나카무라의 조선동화집과 전설집을 구체적으로 비교 분석하여 그 관련양상을 명확히 하였다. 나카무라는 전설과 동화의 차이를 엄밀히 구분하지 않고 이를 중복 수록했다. 나카무라는 조선 전설의 특징으로 지나(支那)와의 교섭을 지닌 것, 직접 일본과의 교섭을 모티브로 한 것, 일본과 동근(同根)인 것, 조선 특유의 것으로 4구분 했는데, 이를 잘 반영해 주는 동화를 전설집에 재수록 한 것이다. 나카무라 전설집에는 신화전설 13편, 제국(諸國)전설 106편이 수록되었는데, 신화전설은 일본과의 교섭을 중심으로 한 신화를 비체계적으로 수록하며 개작했음을 밝혔고, 제국전설에 새롭게 수록된 86편의 전설의 출전을 명확히 하였다. 특히, 미와 다마키와 야마사키 겐타로의 전설집을 바탕으로 무려 70편을 개작했음을 확인하였다. 70편을 일일이 대조 분석한 결과, 그 인명 및 줄거리는 대부분 일치했지만, 「김무달과 청룡」에서는 김선달의 이름을 ‘김무달’로 바꿨다. 나카무라의 의도적 개작은 임진왜란과 관련된 전설 중에 반영되었다. 나카무라는 ‘내선융화’를 위해 그 내용을 의도적으로 왜곡했는데, 「천도래(千度来)」에서는 ‘임진란 때’라는 기술을 ‘전란’으로 개작했다. 또한 「낯선 노인」에서는 임진왜란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삭제하고, 중국이 조선을 공격한 것으로 개작하였다. 나카무라는 조선을 이상화 하여 조선동화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조선 신화전설을 형상화 하려 한 측면이 있지만, 이러한 개작은 식민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었으며, ‘내선융화’를 위해 생각해낸 것이었다.
This paper analyzed Ryohei Nakamura’s Korean legend collection in “China, Korea and the Taiwanese Myth and Legend collection)” (1929). Nakamura issued Chosun legend collection After issuing “Chosun fairy tale collection” (1926). It was studied about “Chosun fairy tale collection” by the preceding study, but the legend collection isn't studied at all. First of all, analyzed Nakamura's fairy tale collection and Nakamura's legend collection, and its relation was made clear. The fairy tales (43) and the legends (17) were filmed by the fairy tale collection, but the fairy tales (11) and the legends (17) were recorded in Nakamura's legend collection. Nakamura has the problem that an overlap filmed this without dividing the difference between the legend and the fairy tale strictly. Nakamura is sharing the feature of Chosun legend with four. The stories that influenced from China, an account related to Japan, the same account as Japan and the account peculiar to Korea are mentioned. Nakamura recorded the stories that four features were often reflected in the legend collection. Legends in regions were recorded in Nakamura’s legend collection, but 86 sources were made clear. I made it clear that Nakamura referred to Tamaki Miwa’s legend collection and Gentaro Yamasaki’s legend collection and adapted 70 stories in particular. Nakamura's aim is reflected in the legend related to colonial rule. Nakamura distorted the contents intentionally for 'extension harmony'. China eliminated the time-like background as Colonial rule by “strange aged people”, and was conscious of 'extension harmony', and that attacked Korea, it was adapted. Nakamura idealizes Chosun beauty. Nakamura tried to adapt a beautiful Chosun legend. But such way of thinking was different from actuality in a colony. Nakamura’s legend collection was issued by at least four publishing companies and repeated an additional printing in a colony period. Nakamura’s legend collection read widely seems to have had a big influence on Chosun legend recognition in modern Japan. And future's problem is consideration to acceptance of Chosun legend in modern Japan.

7,900원

13

성 정체성에 대한 인식과 유동의 징후, 그리고 서사의 반동 - <유화기연>의 ‘유춘’을 중심으로 -

서경희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5집 2017.02 pp.403-437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유화기연>은 향유자와 서술자의 의식 저변에 놓인 성정체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은 작품이다. 이분법적 성별로 구분되지 않는 몸을 지닌 유춘이 신체적 특성으로 인해 죄의식과 우울감을 지니고 방황을 하면서 자존감을 잃은 모습을 보이지만 다른 인물과는 새로운 관계 모델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는 제 3의 성에 대한 징후를 드러내면서도 주변의 바람에 부응하기 위해서 남성의 성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사회적으로 남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남성을 ‘연기’한다. 이러한 패싱은 서사 전략에도 영향을 미쳐서 작품 전반부가 문제삼는 성정체성의 새로운 가능성이 후반부에서는 통속적 영웅담의 강화로 대체되며, 오히려 남성적 몸과 기질을 부각시키는 반동적 전개를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유화기연>은 성, 몸,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상식과 통념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나면서 공고한 성 인식, 사회적 편견, 이에 대한 현실적 대응 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또 소설 속에서 성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통해 기존 성 인식의 부조리와 빈틈을 발견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Yuhwagiyeon is a work that reveals the recognition of sexual identity underlying the consciousness of the audience and the narrator. Yoochun, whose body is not distinguished by dichotomous sex, shows a sense of guilt and depression, wandering and loss of self-esteem, but presents a different relationship model from that of a traditional couple. However, while showing signs of a third sex, he creates his own identity as a male in order to live up to the hopes of his surroundings and plays a male to live as a socially male. This passing affects the narrative strategy, so the new possibility of sex identity, which the first half of the work deals with importantly, is replaced by the reinforcement of popular heroism in the latter half, and rather the reactionary narrative is proceeding. Nevertheless, Yuhwagiyeon reveals the awareness of sex, social prejudice, and realistic response to it, as it moves away from common sense and myths about sex, body, and identity. It is also a noteworthy work in that it allows us to discover absurdities and gaps in existing sexuality through a person with a third sexual identity.

7,800원

부록

14

휘보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5집 2017.02 pp.439-455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5,100원

 
페이지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