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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상고전연구 [Yeol-sang Journal of Classical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열상고전연구회 [Society of Yol-Sang Academy]
  • ISSN
    1738-2734
  • 간기
    격월간
  • 수록기간
    1988~2018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810 DDC 810
제41집 (22건)
No

기획논문 1 : 한창기선생 수집 유물 고문헌 자료의 성격과 가치

2

기획의도

정명기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1집 2014.09 pp.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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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원

3

뿌리깊은나무 판소리 음반 전집의 현황과 가치

김석배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1집 2014.09 pp.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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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뿌리깊은나무에서 출반한 판소리 음반 전집인 <뿌리깊은나무 판소리>와 <뿌리깊은나무 판소리 다섯 바탕> 의 현황과 가치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뿌리깊은나무 판소리 감상회’가 1974년 1월부터 1978년 9월까지 100회 열려 박동진 명창 등이 판소리를 불렀는데, 이 감상회가 뿌리깊은나무 판소리 음반 전집을 출반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둘째, <뿌리깊은나무 판소리>는 1982년 5월에 음반 23장과 사설집 6권으로 출반되었다. 김세종제 조상현의 <춘향가> (6LP), 서편제 한애순의 <심청가>(5LP), 동편제 박봉술의 <흥보가>(4LP), 동편제 박봉술의 <수궁가>(3LP), 서편제 정권 진의 <적벽가>(4LP), <단가>(1LP)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수는 모두 김명환이었다. 이 판소리 음반 전집은 명창의 소리와 명고수의 북 장단이 조화를 이룬 기념비적 명반이고, 최초로 기획 제작한 판소리 다섯 바탕의 완창 음반으로 판소리 음반 사적 의의가 크다. 그리고 판소리 다섯 바탕의 사설을 모두 채록하고 상세히 주석하여 판소리 이해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뿌리깊은나무 판소리 다섯 바탕>은 1990년 1월부터 1992년 2월 사이에 음반 22장과 사설집 5권으로 출반되었다. 정정렬 제 최승희의 <춘향가>(7LP, 고수 김명환), 보성소리 조상현의 <심청가>(5LP, 고수 장종민), 동초제 오정숙의 <흥보가> (4LP, 고수 김동준), 유성준제 정광수의 <수궁가>(3LP, 고수 정철호), 송판 송순섭의 <적벽가>(4LP, 고수 김성권)를 담 고 있다. 이 판소리 음반 전집 역시 창자의 소리와 고수의 북 장단이 조화를 이룬 명반이다. 귀명창들의 추임새를 반영하 고, 다섯 바탕의 사설을 채록하여 상세히 주석하고, 오선보로 채보하여 판소리를 이해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This paper explored the present state and value of the two pansori collections of LP records ( and ) produced by the publishing company "The Deep-Rooted Tree". The results are as follows:First, 'The Deep-Rooted Tree Pansori Gamsanghoe' was held 100 times in September, 1978, starting in January, 1974, where Park, Dong-jin, a great pansori singer and other singers sang pansori. This was the origin of the two pansori collections of LP records produced by the publishing company "The Deep-Rooted Tree". Second, the collection of 23 records were produced in May, 1982 with six explanatory books. It contains Kim Se-jong's sung by Jo, Sang-hyeon (6 LPs), Seopyeonje sung by Han, Ae-sun (5 LPs), Dongpyeonje sung by Park, Bong-sul (4LPs), Dongpyeonje sung by Park, Bong-sul (3 LPs), Seopyeonje sung by Jeong, Gwon-jin (4 LPs), and Danga (1 LP). Kim, Myeong-hwan was the drummer. This collection of pansori records has its meaning in that a great singer and a great drummer were in harmony, and in that pansori daseosbatang was sung to the end. It also contributed to understanding pansori using six explanatory books. was produced, which was composed of 22 LP stereo records and 5 explanatory books. 22 LP stereo records consist of the following LP records:Jeong, Jeong-ryeol's sung by Choe, Seung-hui, 7 LPs, drummer Kim, Myeong-hwan; Boseong style sung by Jo, Sang- hyeon, drummer Jang, Jong-min, 5 LPs; Dongchoje sung by O, Jeong-suk, drummer Kim, Dong-jun, 4 LPs; Yoo, Seong-jun style sung by Jeong, Gwang-su, drummer Jeong, Cheol-ho, 3 LPs; Songpan style sung by Song, Sun-seop, drummer Kim, Seong-gwon, 4 LPs. A great singer and a great drummer were also in harmony in this collection of pansori records, and it contributed to understanding pansori by reflecting the chuimsae of the audience, writing music on the stave and writing explanatory notes.

7,800원

4

강촌재본 『임화정연긔봉』을 넘어서 - 세책본소설ㆍ순천시립 뿌리깊은나무 박물관본ㆍ구활자본과의 비교를 통해서 본 -

정명기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1집 2014.09 pp.5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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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강촌재본 『임화정연긔봉』에 대한 본격적인 문학적 가치 탐색에 앞서서 해당 이본이 完本 또는 善本으로서의 가 치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 이루어졌다. 검토의 대상이 된 여러 자료들(세책본소설ㆍ뿌리 본ㆍ활자본)과 강촌재본 『임화정연긔봉』의 서사문면의 같고 다름을 구체적으로 비교해 본 결과, 강촌재본 『임화정연 긔봉』은 결코 完本 또는 善本에 해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었다. 그 근거는 첫째, 세책본 또는 뿌리본에는 있되 강촌재본에서는 해당 부분이 나타나지 않는 부분, 둘째, 세책본 또는 뿌리본에는 없되 강촌재본․구활자본에서는 해당 부분이 나타나는 부분, 셋째, 뿌리본과 강촌재본의 동일 서술문면이 과도하게 생략되는 부분, 넷째, 뿌리본과 강촌재본에는 있되 구활자본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부분, 다섯째, 세책본 또는 뿌리본과 강촌재본의 같은 문면에서 대체가 나타나는 부 분 등을 들 수 있다. 나아가 완질인 강촌재본 『임화정연긔봉』이 결코 完本이자 善本이 될 수 없는 또 다른 근거로 發話 主體의 착종이 빈번 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하였다. 이런 사실은 강촌재본 『임화정연긔봉』이 原 『임화정연긔봉』이나 그것을 대본으로 후대에 이루어졌던 선행 이본을 轉寫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결정적 오류인 바, 강촌재본 『임화정연긔봉』이 완질이라고 해서 무비판적으로 해당 자료를 수용ㆍ연구해서는 아니됨을 보여주는 좋은 경우라고 하겠다. 이점이 바로 본고에서 거둔 소득이다.
This thesis aims to answer fundamental question whether this version has value as a complete version or rare and excellent version before exploring the literary value of of Gangchonje(江村齋)As a result of comparing several data under review and literature of of Gangchonje(江村齋), it was proven that of Gangchonje(江村齋) could not be a complete version or rare and excellent version. It is a good example showing that of Gangchonje(江村齋) should not be accepted and studied without criticism under the reason that of Gangchonje(江村齋) is the complete version since of Gangchonje(江村齋) must be the detrimental error found in the process of transcribing the original or the precedent version made in the later generation with original as a script. This is the outcome of this thesis.
在正式探討江村齋本≪林花鄭延奇逢≫的文學價值之前,筆者首先要明確一個根本問題,即該異本是否具有完本或善本價值,然而本稿以此爲目的進行了研究。爲了解答這一問題,筆者對諸多版本(貰册本小說․樹大根深博物館本․舊活字本)與江村齋本≪林花鄭延奇逢≫的字面敘述異同進行了比較研究,總結出一個事實。 江村齋本≪林花鄭延奇逢≫不可能是一個完本或者善本。其根據有五。 第一,部分內容在貰册本或樹大根深本≪林花鄭延奇逢≫中可以看到,而江村齋本≪林花鄭延奇逢≫中沒有該內容。 第二,部分內容在貰册本或樹大根深本≪林花鄭延奇逢≫中沒有,而在江村齋本和舊活字本󰡔林花鄭延奇逢󰡕中可以看到。 第三,樹大根深本和江村齋本中有些相同的敘述過度被省略過。 第四,部分內容在樹大根深本和江村齋本中有,而在舊活字本中沒有。 第五,貰册本或樹大根深本、江村齋本的相同敘述中出現代替現象。而且,完帙形式的江村齋本≪林花鄭延奇逢≫不可能是一個完本或者善本,其另外一個根據就是內容里頻繁地出現發話主體的錯綜現象。筆者認爲以上種種情況是江村齋本≪林花鄭延奇逢≫在轉寫原版≪林花鄭延奇逢≫或者後期轉寫以此爲底本的先行異本過程中所引起的錯誤,所以不能僅僅因爲江村齋本≪林花鄭延奇逢≫是完質而去盲目地接受,並且不進行批判研究。 這一點正是筆者通過研究所得到的結論。

12,900원

5

한창기본 필사본 <별춘향전>에 대하여

임성래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1집 2014.09 pp.12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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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창기가 수집한 75장의 필사본 <별춘향전>을 학계에 소개하려는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필 자는 먼저 한창기본의 서지 사항을 소개하였다. 한창기본은 표지를 포함하여 전체 75장인데, 소설 본문은 71장 반이다. 각 면은 12-13줄이고, 각 줄은 17-24자로 불규칙한 것이 특징이다. 필사 시기는 경술년이란 간지로 볼 때 1910년 1월로 추정 된다. 한창기본의 줄거리는 장황한 편이고, 일부 단락의 내용은 다른 이본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특 징이다. 그러한 예를 몇 가지 소개하겠다. 작품의 서두에는 다른 이본에 없는 내용이 많고, 춘향이 황능묘에 가는 꿈의 내 용에도 독자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도령이 서울에 올라가서 취처하였다든지, 과거에 급제한 이도령의 꿈에 이비가 보낸 동정용왕의 딸이 나타나 구정(춘향)을 잊고 공명만 탐한다고 이도령을 책망한다든지, 신관의 생일잔치에 참 석한 이도령이 한시를 지은 후에 취흥이 도도하여 영산 한 마디를 한다든지, 이도령이 춘향에게 어사의 수청을 명하자 춘 향이 어사의 임무를 나열하면서 이를 비판하며 거절한다든지, 춘향방의 벽화로 조선시대에 민간에서 많이 유통되었던 구 운몽도 가운데 성진이 석교상의 팔선녀와 희롱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 등장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다른 이본에는 발견되 지 않는 한창기본만의 독자적인 것이다. 한창기본의 계열을 분류하면 완판 계열과 판소리 사설 계열의 양면성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인 단락의 내 용으로 볼 때 판소리 사설 계열의 요소가 더 많이 나타나고 있으나 판소리 사설 계열에 비해 그 내용이 풍부하고 장황한 것이 특징이다.
This study has been done to inform to academic circles the presence of Han, Chang-Ki manuscript Byeol- Chunhyang-jeon of 75 sheets, which belongs to Han, Chang-Ki. First of all I researches into the bibliography of this version. This book consists of 75 sheets, including its front and back covers, and 71 and half sheets as its contents. Each page has 12-13 lines and each line 17-24 letters. This version has long and boring narrative structure, and a few different contents from the other versions. Specially in the beginning of this version, there are many different stories, which can not be found in the other versions. For example, there is an original substance in the Chunhyang’s dream of going to Whangneung Grave. Mr. Lee got married in Seoul. After passing the state examination, he dreams that Dragon King’s daughter sent by two queens scolds him for forgetting his old beloved and eagerly searching for his fame. In the birthday party of the newly appointed statesman, Mr. Lee wrote a Chinese poem and sang a Song(Yeongsan) in drinking spirit. Mr. Lee, as a royal secret inspector, demanded Chunhyang to do a sexual service, but she refused his request and criticised him for not doing his duty. There is a folk picture painted in the Chunhyang’s room wall, in which Seongjin played with eight heavenly girls on the stone bridge, whose story can be found in the novel Ku-un-mong well-known in Chosun Period. The Han, Chang-Ki Byeol-Chunhyang-jeon includes both the elements of Block- printed of Jeonju narrative and Pansori narrative. But its whole contents shows us elements of Pansori narrative. And compared to other Pansori narratives, this version includes more abundant and glorious contents.

5,800원

6

한창기 선생이 수집했던 조선시대 출판문화 관련 자료들

유춘동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1집 2014.09 pp.143-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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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창기 선생이 수집했던 조선시대 출판문화와 관련된 자료 중에서, 경판본 고소설 『월왕전』의 책판, 언문반절표의 책판, 다양한 서목이 기재되어 있는 책가도, 책을 보관했던 책궤, 액막이를 위한 부적 책판을 검 토하면서 이 자료들이 지닌 의미를 다루어 보았다. 경판본 『월왕전』의 책판은 총 여섯 판이 남아있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경판본의 책판으로는 유일하다. 이 책 판에는 “油洞新刊”이라는 간기가 새겨져 있어, 현재 을지로 부근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경판본 방각소였던 유동 에서 책판이 제작되고 간행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책판은 경판본 『월왕전』<3권3책(63장본)>의 <하 19장>의 책판으로 확정할 수 있다. 언문반절표의 책판은 삼성출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책판만 확인되었는데, 이 박물관에도 소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판은 간기 부분이 지워져 있어서 정확한 제작연대를 알 수 없지만 정축신간반절표(丁丑 新刊反切表, 1877)와 기축신간반절표(己丑新刊反切表, 1889)가 간행되었던 무렵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덟 폭으로 구성된 책가도에는 당시에 인기 있었던 28종 책들을 기재해 두었던 것이 특징이다. 이 서목에는 사서삼경 이외에 『삼국지』, 『수호전』, 『서상기』와 같은 중국소설이 존재한다. 책가도를 통해서 중국소설이 인기등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책궤를 통해서는 상층 사대부 집안에서 책이 어떻게 보관되고 관리되 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박물관에는 삼두매 부적 책판이 소장되어 있다. 이 부적은 삼재(三災)를 막아주는 액막이로 현재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책판은 삼두매 부적의 제작 과정, 기원과 역사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This writing examines prints of Seoul wood block printed book ‘Wolwangjeon’, prints of the Korean alphabet, scholar's accoutrements listing various book titles, book boxes storing books and prints of talisman preventing misfortune among materials related to the publishing culture of the Joseon dynasty collected by the scholar, Han Chang-gi, to review their significance. The summary of the content covered is as follows. A total of six prints of Seoul wood block printed book ‘Wolwangjeon’ remain, which are confirmed to be the only prints of Seoul wood block printed book known so far. This prints have an imprint of “YuDongShinGan( 由洞新刊)” to show that they were produced and published by a Seoul wood block printed book publishing company “YuDong(由洞)” located near current Euljiro. These prints were determined to be the second 19 chapter of the 63 collection of books upon review and Hannambookstore(翰南書林) took over the prints after to continue to publish them until the early part of Daejeong Yeongan. The prints of the Korean alphabet were the prints housed in Samsung Museum of Publishing so far with new discovery of prints owned by the museum. These prints had the imprint erased failing to reveal an exact date of production. However, they are estimated to date back to Jeong Chuk Shin Gan Alphabet Table(1877) and Gi Chuk Shin Gan Alphabet Table(1889) that include imprints and carry similar content and formats. The 8-fold scholar's accoutrements notably list 28 books that were popular at that time. The book titles include the seven Chinese classics that were the required reading for the learned as well as Chinese novels such as the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Su Ho Jeon and the Story of the Western Wing. The books listed in the scholar's accoutrements demonstrate the popularity of Chinese novels at that time in a factual and visual manner. Additionally, the scholar's accoutrements show how books were maintained and stored in a family of noble class back then. The museum also possess SamDu(三頭) Mae prints of talisman in the Korean alphabet. This talisman was widely used by people of that time to prevent three kinds of misfortune. Only books in print were found so far while these prints provided new information related to how they were published.

5,200원

7

박효관이 하순일에게 준 생애 마지막 가집, 한창기본 『가곡원류』

權純會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1집 2014.09 pp.161-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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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한창기 선생이 수집한 『가곡원류(歌曲源流)』의 서지적 특성과 편찬 경위, 편집 특성, 박효관에 서 하순일로 이어지는 가곡 전승의 맥락을 고찰하였다. 이제 한창기본 『가곡원류』가 학계에 소개됨으로써 우 리는 총 19종의 『가곡원류』이본을 보유하게 되었다. 논의 결과 다음과 같은 새로운 사실이 파악되었다. 첫째, 한창기본 『가곡원류』는 1879년 박효관이 직접 편집해서 문생 하순일(河順一)에게 건네준 가집이다. 박 효관의 나이 80세 되던 해이다. 그는 이듬해 세상을 뜨는데 한창기본 『가곡원류』는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편 집한 가집이다. 둘째, 한창기본 『가곡원류』에는 남창 699수, 여창 203수, 도합 902수를 수록하였다. 이는 『가곡원류』이본 가운데 최다이다. 필체는 1872년 완성한 국악원본과 초기본 계열인 동양문고본과 매우 흡사하다. 이러한 사실 은 바로 박효관이 『가곡원류』를 편집하는 수 년 동안 전문 필사자를 동원했음을 시사한다. 셋째, 한창기본 『가곡원류』는 남창 31곡, 여창 20곡으로 한바탕을 구성하면서도 남창을 중심으로 편집한 가 집이다. 때문에 통상 남녀 병창으로 부르며 한바탕을 마무리하는 대가(臺歌)를 남창 한바탕이 끝나는 부분에 배 치하였다. 편찬 경위를 밝힌 박효관 발문이 가집 중간인 남창 한바탕 뒤에 배치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또 표지에도 “男唱 附女唱”이라고 적어 이러한 편집 의도를 분명히 밝혔다. 넷째, 그동안 막연하게 추정했던 박효관의 사승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박효관은 20세 무렵 김재성(金載成) 이라는 사람에게 가곡을 배워 일가를 이루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 하순일과 문생 관계를 맺고 특별히 가집을 편 집해준 정황을 소상하게 기술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김재성-박효관-하순일-하규일’로 이어지는 19세기 후반 에서 근대 초의 가곡 전승의 맥락을 보다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In this paper, I introduced Gagokwonryu collected by Han Chang-gi(Gagokwonryu by Mr. Han from here on) to the academic circles, and considered bibliographic features, details of the compliation and context of the transmission of the anthology from Park Hyo-gwan to Ha sun-il. As this Gagokwonryu is introduced to the academic circles, the total number of versions of Gagokwonryu that we now have and hold is nineteen. Some conclusions of my analysis of this anthology are shown as follows:First, Gagokwonryu by Mr. Han that Park Hyo-gwan revised himself in 1879 was given to the disciple, Ha sun-il, and allowed him to keep it at his home. Park Hyo-gwan was an 80-year-old in 1879. He passed away next year, Gagokwonryu by Han Chang-gi was his dying anthology of songs that he revised. Second, in Gagokwonryu by Mr. Han, 902 poems, 699 poems for male and 203 poems for female, are included in this anthology. This marks an all-time high in nineteen versions. The writing is very similar to version of Gugakwon(National Gugak Center) in 1872 and the early publication version of The Toyo Bunko (The Oriental Library in Japan). This fact shows professional transcribers had been mobilized for several years when Gagokwonryu was revised. Third, Gagokwonryu by Mr. Han consisted of 31 songs for male and 20 songs for female, its editing centered on songs for male. Because of this editing, including songs for both men and women, it places Daega(臺歌), sang in chorus after finishing songs, at the end of songs for men. This is the reason why Park Hyo-Gwan’s preface, including details of the compliation, is placed after songs for men, which is in the middle of the anthology. Also, 男唱 附女唱(it means this anthology centered on songs for male and songs for female are added) is written on the anthology cover to disclose clearly the intention of the redaction. Fourth, Park Hyo-gwan’s veiled instruction is revealed. He states that he studied under Kim Jae-seong when 20 and was an authority in this field. And it minutely decribes the history of a link with Ha Sun-il as disciple. Also it reveals that Park Hyo gwan values Ha Sun-il’s personality and his passion for singing, and it describes the history of editing. This clearly shows that context of the transmission of this anthology that led to Kim Jae-seong, Park Hyo-gwan, Ha Sun-il and Ha Gyu-il in the late 19th century.

7,000원

8

≪순천 시립 뿌리깊은나무 박물관≫ 所藏 資料의 國語史的 價値 - 임란전 간본 및 주요 필사 자료를 중심으로 -

韓榮均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1집 2014.09 pp.19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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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순천 시립 뿌리깊은나무 박물관≫ 소장 국어사 관련 자료를 소개하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당관 소장 자료는 목록조차 국어학계에 소개된 적이 없음을 고려하여 전적 자료 중에서 국어사 연구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되는 간본(刊本) 자료를 중심으로 필자가 국어사적으로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자료를 중심으로 살폈다. 2장에서는 당관의 전적 자료 소장 상황을 개괄적으로 정리하고, 3장 및 4장에서는 그 중 典籍 文化財로서의 가치가 높아서 지방 혹은 국가문화재로 지정하여 보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는 자료(3장)와 앞으로 국어사적으로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자료(4장)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 부록으로 당관의 고서 목록을 토대로, 현지 실사를 통해서 확인하여 정리한 언해본 목록을 제시하였다.
This paper aims to survey the books in Korean Translation(Eon-Hae) in , focusing on those have been published in Korean transltions. Because the published materials in are too many to be surveyed in one paper, the author focused on the materials which seems to be valuable in the view of cultural properties and materials which are not introduced yet in the historical studies of korean language. As a appendix, the author arranged the books in korean translation whicih can be used for the historial study of Korean Language

6,300원

9

순천시립 뿌리깊은나무 박물관 소장 한문 문집 자료의 성격과 가치

백진우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1집 2014.09 pp.217-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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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순천시립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문헌 자료 가운데 한문 문집 자료의 현황을 개 괄하고 자료적 가치와 성격을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기존에 잘 알려져 있듯이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에서는 고(故) 한창기(韓彰琪, 1936~1997) 선생께서 평생 동안 수집한 자료 6,50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기존에 박물관에서 작성하여 활용하고 있는 목록에는 6,500여점의 자 료 가운데 고문헌 자료를 1,726건으로 등재해 두었다. 하지만 이 목록은 책(冊) 수를 기준으로 작성한 것이며,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고문헌 자료를 헤아릴 때 사용하는 종(種) 수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향후 실물 자료를 전 수조사 해야겠으나, 기존 목록에 의거할 경우 대략 640종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현재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문헌 자료는 대략 640종 1,726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고문헌 자료들 가운데 한문 문집 자료는 93종 318책을 차지하며, 여타 소장 기관과 비교할 때 그 비중이 크다 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한글과 우리 전통 문화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한창기 선생이 주로 국어학․판소리․가 곡집․한글소설 등의 자료를 집중적으로 수집했던 사실을 상기해보면, 결코 적은 숫자라고 할 수는 없다. 이 논문에서는 먼저 뿌리깊은나무 박물관 소장 한문 문집 자료의 현황을 개괄하고,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자료 들과 향후 활용 방안에 대해 간략히 짚어보았다.
In this paper, I tried to analyze the value and attribute of literary works collection written in classical Chinese stored in the Deep Rooted Tree Museum, Suncheon. This museum is well known for its valuable collection about Korean linguistic materials before. The late Mr. Han Chang-gi collected lots of antiquities during his life time, and his bereaved donated more than 6,500 antiquities to the Deep Rooted Tree Museum in Suncheon. There are almost 640 titles(1,726 volumes) of old books in his collection. And 93 titles(318 volumes) are literary works collection written by classical Chinese. It is certainly given little weight comparing to the other libraries. However, we can not forget about the importance of those books because it has its own value. In this paper, I recapitulated the present condition of literary works collection written in classical Chinese. And I also mentioned some notable books and suggested application plan for the future.

7,000원

10

한창기본 <장경전>의 특징과 가치

김준형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1집 2014.09 pp.247-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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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창기본 <장경전>을 대상으로, 완판계열과의 대비를 통해 한창기본의 특징과 가치를 파악하는 데에 그 무게를 두었다. 한창기본 <장경전>은 완판 계열에 속한다. 현존하는 완판 65장본의 31장과 45장은 복각된 것인데, 앞뒤 내용이 상호 모순된다. 이는 철저한 고증 없이 앞뒤 맥락만 고려하여 급히 책판을 만든 까닭이다. 한창기본은 이 부분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즉 이전에 존재했던 완판본의 모습을 재구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 을 한다. 특히 한창기본은 이전에 존재했던 완판본을 필사한 본일 개연성이 높다. 한창기본 모본의 한 줄이 25 자 내외이고, 한 면이 12행은 현존하는 완판본의 형태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한창기본은 완판본의 원 형을 재구하는 데에 중요한 텍스트라 할 만하다. 다음으로 한창기본은 다른 본을 필사한 본이다. 그런데 원 텍스트 역시 파손된 상태로 있었던 터라, 이 부분은 새로 써 넣을 수밖에 없다. 이 도정에서 한창기본은 새로운 내용으로 창작한 부분이 드러난다. 그 부분을 통해 당시 필사와 개작이라는 경계에서 소설 향유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한창기본의 모본 역시 적어도 두 장 이상이 낙장 상태였다. 한창기본 필사자는 이 부분을 기워 넣으면서 새로운 내용을 써 넣었다. 서두 부분은 새롭게 쓰고, 중간 부분은 요약적으로 진술하였다. 또한 이야기 화소에 대한 기호에 따라 특정 화소를 축약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애정 화소가 부각되고, 그에 따라 지향이 경판본과 닮았다. 군담과 애정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그 양상이 복잡하게 나타났다. 또한 독자들은 이야기를 나름대로 평가하기도 하는데, 소설 속 등장인물에 대한 품평도 그러하다. <장경전>에서 선악 구도가 분명하지 않은 왕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본마다 각기 다르게 나타난 것도 그 한 예다. 독자의 기대지평에 따라 이야기 의 전개가 달라지고 있음을 확인케 한다.
JangKyeungJeon. of HanChangGi is an old novel lined [Wanpan(Chonju) edition]. However, in order to identify the enjoyment aspect lined [Wanpan(Chonju) edition], this literature is worth it. First, allows to confirm the existence of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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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논문 2 : 신묘 통신사행과 유구사절단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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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도

구지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1집 2014.09 pp.277-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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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사행의 饗宴과 舞樂 - 아라이 하쿠세키와 요시무네를 중심으로 -

김효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1집 2014.09 pp.28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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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신묘년 통신사를 위한 향연접대에 舞樂이 연주된 점에 주목해, 舞樂이 갖는 의미를 고찰하고, 신묘통 신사에 대한 빙례개혁을 시도한 아라이 하쿠세키의 의도는 무엇인지, 그리고 요시무네가 雅樂을 어떻게 인식했 는지에 관해서 검토한 것이다. 신묘사행의 가장 이례적인 점은 국서에 사용하는 칭호가 ‘日本國大君’에서 ‘日本國王’으로 변경된 점과 통신사 접대가 쇼군(將軍) 주최로 에도성에서 행해지고 궁중음악인 아악이 연주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德川實紀󰡕에는 신묘년 조선통신사 접대를 위해 삼방악인(三方樂人)이 에도에 와, 모미지야마(紅葉山)악인 과 함께 무악연주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三方樂所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조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궁 중아악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6대 쇼군 이에노부(家宣)시대에는 왕조문화가 침투해 에도성 이 교토화 경향을 띄게 된다. 아라이 하쿠세키의 개혁은 천황계의 유서 깊은 문화를 이용해 에도성에 사는 최고 권력자인 쇼군을 제왕화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을 국내외에 발신하기 위해 조선통신사에 게 전달하는 국서에 ‘日本國王’으로 칭호를 변경하고, 통신사를 위한 접대를 에도성에서 조정의 권위를 상징하 는 ‘舞樂’ 즉 아악을 연주하게 한 것이다. 아라이 하쿠세키의 빙례개혁은 이에노부 사후 쇼군에 취임한 요시무네(吉宗)가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쇼토쿠 이 전의 상태로 되돌려진다. 신묘사행 접대에 공연된 무악은 조선통신사측에서는 이전의 노가쿠(能樂)보다 높이 평가되지만 이후 한번도 통신사 향연에 공연되지 않았다. 요시무네 이전에는 무악, 특히 아악의 정통을 잇는 교토 요쓰쓰지가(四辻家)의 관리하에 있던 三方樂人을 불러 들여 천황계의 깊은 유서를 가지고 있는 舞樂의 힘을 빌려 쇼군의 권위를 고시하려고 했다. 한편 요시무네는 역 대 쇼군의 法會에舞樂을 공연하게 했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三方樂所에 의지하지 않고 막부지배하에 있던 모미 지야마악인과 닛코악인들에게 주악을 행하게 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에야스(家康)의 130회기만큼은 다른 쇼군의 법회를 축소했던 것과는 달리 三方樂人, 모미지야마악인, 닛코악인을 총동원해 성대히 치룸으로써 도쇼 다이곤겐(東照大權現)으로 신격화된 이에야스의 권위를 전면에 내세워 쇼군의 武威를 나타내려고 했다.
Bugaku (court music and dancing) was performed at the welcoming ceremony held for the diplomatic envoy from Joseon in the first year of Shotoku (1711). By examining thefirst-timeuse of Bugaku at the reception banquets, this research aims to explore the meaning of Bugaku and what Arai Hakuseki intended to do at this reform. Yoshimune’s view on court music is discussed as well. The Joseon envoy was sent to Japan twelve times in the Edo period. At the time of the eighth visit in the first year of Shotoku (1711) Arai Hakuseki carried out ceremonial reformand the reception style was altered: The title in credentials was changed from “Japanese Lord” to “Japanese Emperor”; the reception banquet was held under auspices of Shogun (Japanese emperor) in the Edo-jo Castle, and Bugaku was performed among other things. According to the book Tokugawa Jikki(德川實記), the prestigious Musicians of Three Areas (三方楽人) called from Kyoto to Edo and performed court dances and, together with Momijiya musicians, played musicto entertain the Shinmyo Diplomatic Envoy. The Music Post of Three Areas (三方楽所) was considered to be the legitimate organization of transmission of traditional court music and to symbolize the Japanese Emperor’s authority. Under the reign of the sixth Shogun Ienobu, imperial culture spread to Edo and the Edo-jo Castle was clad in the Kyoto style. Arai Hakuseki apparently used the respected culture of court music for the purpose of raising the status of Shogun to that of Emperor. To make this announcement known far and wide both within and outside of Japan, the title of “Japanese Emperor” was used, and the ceremony was held in Honmaru (the keeper of the castle) of the Edo-jo Castle, accompanied with the “Bugaku” performance signifying the Emperor’s supremacy. After Ienobu’s death, however, this Bing-rye-gae-hyeok (聘禮改革), the reform of reception banquets for diplomatic envoys from Joseon, was overruled by Yoshimune and the ceremonial style was reverted back to that of the previous Tenna (天和). Despite the fact that the Joseon envoy appreciated Bugaku more than Nohgaku (能楽), which was played before this reform, Bugakuwas never performed after that time. Before the reign of Yoshimune, the Emperor’s authority was displayed with the performance of prestigious Bugaku. The Musicians of Three Areas under the control of the Yotsutsuji family of Kyoto, legitimate successors of Kyutei Gagaku (traditional court music), were sent to Edo to perform Bugaku. Yoshimune, on the other hand, though he used Bugaku for Buddhist memorial services for the shoguns of Tokugawa, never relied on the influence of the Musicians of Three Areas. It was the Momijiyama and Nikko musicians under control of the Tokugawa Shogunate that did the performance. Nevertheless, the memorial service for the 130th anniversary of Iyeyasu’s death was an exception. The Musicians of Three Areas and the Momijiyama and Nikko musicians all performed together in grand style to exhibit the absolute dignity of Ieyasu deified as “Tosho Daigongen.”
本研究は、正徳元年の朝鮮通信使への饗宴において、他の通信使接待饗宴には見られない舞楽が用いられたことに注目し、舞楽の持つ意味を考察し、新井白石の聘礼改革の意図は何か、また吉宗の雅楽に対する考え方について検討した。朝鮮通信使は江戸時代十二回にわたって来聘したが、そのうち第八回正德元年(一七一一)の朝鮮通信使は新井白石の建議により聘礼改革が行われ、通信使に対する待遇が変更される。特に国書に使う称号が「日本国大君」から「日本国王」に変更された点と、通信使への饗宴が、将軍主催により江戸城で行われ、宮廷音楽である雅楽が用いられたことは正徳元年通信使のもっとも大きい特徴である。󰡔德川実紀󰡕には正徳元年朝鮮通信使の接待のため三方楽人が下向させられ、紅葉山楽人と共に舞楽奏楽につとめたことが記されている。三方楽所は朝廷の権威を象徴するもので宮廷雅楽の正統性を持つものと言えよう。第六代将軍家宣時代になると、王朝文化が浸透し江戸城の京都化傾向が見られる。新井白石は朝廷の由緒ある文化を用い、江戸城に住む最高権力者である将軍を、帝王化することにその目的があったと思われる。それを国内外に発信するために朝鮮通信使来訪の際、国書に使う称号を「日本国王」号に変更し、通信使への饗宴を江戸城本丸で将軍主催の元で開催し、朝廷の権威を象徴する「舞楽」を用いたのであろう。新井白石の聘礼改革は家宣の死後、吉宗により否定され正徳以前の天和の時に戻される。通信使の接待に用いられた舞楽は朝鮮側からすると、それ以前の能楽よりは高く評価されているが、以後一度も用いられなかった。吉宗以前は舞楽、特に宮廷雅楽の正統を継ぐ京都の四辻家管理下にあった三方楽人を下向させ、朝廷の由緒を持つ舞楽の力を借りて将軍の権威を誇示しようとした。一方、吉宗は歴代将軍の法会に舞楽を用いるが、注意すべきことは三方楽所に頼らないで、幕府支配の紅葉山楽人、日光楽人による奏楽を行っている点である。しかし、家康の百三十回忌だけは他の将軍の法会を縮小したのとは違って、三方楽人、紅葉山楽人、日光楽人を総動員させ大変盛大に行うことで、東照大権現として神格化された家康の権威を前面に出しながら将軍の武威を表そうとした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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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徳元年朝鮮通信使への饗宴 - 新井白石と吉宗をめぐってー -

金孝珍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1집 2014.09 pp.309-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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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研究は、正徳元年の朝鮮通信使への饗宴において、他の通信使接待饗宴には 見られない舞楽が用いられたことに注目し、舞楽の持つ意味を考察し、新井白石 の聘礼改革の意図は何か、また吉宗の雅楽に対する考え方について検討した。 朝鮮通信使は江戸時代十二回にわたって来聘したが、そのうち第八回正德元年 (一七一一)の朝鮮通信使は新井白石の建議により聘礼改革が行われ、通信使に対 する待遇が変更される。特に国書に使う称号が「日本国大君」から「日本国王」に変更 された点と、通信使への饗宴が、将軍主催により江戸城で行われ、宮廷音楽であ る雅楽が用いられたことは正徳元年通信使のもっとも大きい特徴である。 德川実紀には正徳元年朝鮮通信使の接待のため三方楽人が下向させられ、紅 葉山楽人と共に舞楽奏楽につとめたことが記されている。三方楽所は朝廷の権威を 象徴するもので宮廷雅楽の正統性を持つものと言えよう。第六代将軍家宣時代にな ると、王朝文化が浸透し江戸城の京都化傾向が見られる。新井白石は朝廷の由緒 ある文化を用い、江戸城に住む最高権力者である将軍を、帝王化することにその 目的があったと思われる。それを国内外に発信するために朝鮮通信使来訪の際、国 書に使う称号を「日本国王」号に変更し、通信使への饗宴を江戸城本丸で将軍主催 の元で開催し、朝廷の権威を象徴する「舞楽」を用いたのであろう。 新井白石の聘礼改革は家宣の死後、吉宗により否定され正徳以前の天和の時に 戻される。通信使の接待に用いられた舞楽は朝鮮側からすると、それ以前の能楽よ りは高く評価されているが、以後一度も用いられなかった。 吉宗以前は舞楽、特に宮廷雅楽の正統を継ぐ京都の四辻家管理下にあった三方 楽人を下向させ、朝廷の由緒を持つ舞楽の力を借りて将軍の権威を誇示しようとし た。一方、吉宗は歴代将軍の法会に舞楽を用いるが、注意すべきことは三方楽所に 頼らないで、幕府支配の紅葉山楽人、日光楽人による奏楽を行っている点である。 しかし、家康の百三十回忌だけは他の将軍の法会を縮小したのとは違って、三方楽 人、紅葉山楽人、日光楽人を総動員させ大変盛大に行うことで、東照大権現とし て神格化された家康の権威を前面に出しながら将軍の武威を表そうとした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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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通信使)와의 비교를 통해 본 유구사절(琉球使節) - 荻生徂徠의 <琉球聘使記>를 자료로 하여 -

구지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1집 2014.09 pp.333-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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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오규 소라이(荻生徂徠)가 1710년 유구사절(琉球使節)을 관찰한 기록인 󰡔유구빙사기(琉球聘使記)󰡕 를 1711년 여타 통신사 기록과 비교하여, 일본인의 유구사절에 대한 인식을 파악하고 통신사와의 변별점을 고 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막부는 유구를 표면상 의례에서는 독립적인 외국으로 보이도록 놓아두었다. 그러나 오규 소라이는 유구가 사쓰 마에 복속된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유구가 대등한 국가인 것처럼 위의를 갖추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였 으나 동시에 명나라의 위의를 구현하는 문명국이라고 생각하였다. 문명국의 이미지는 유구사절의 행렬에 보이 는 중국풍의 의복과 중국풍의 아악에서 구현되었다. 교린국인 조선은 유구보다 낮은 신분의 사신을 파견하면서 도 일본의 높은 지위의 인물에게 접대를 받았고 입성하는 의례 등에서도 우대를 받았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는 빙례개정을 통해 이런 점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조선과의 조율 없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구사절과 통신사는 전혀 다른 성격의 외국사절이었다. 고의로 이국사절을 연출하였던 유구사절과 달리 통신 사는 무위를 과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의도와는 달리 통신사도 유구사절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이국취미를 자 극하였고, 통신사의 시서화는 유구사절의 아악처럼 일본에서 향유되었다. 유구사절의 이중적 성격과 일본 민간 의 이국취미는 통신사의 성격을 오해하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This research compares Ogyū Sorai’s observations of the 1710 Ryūkūan Mission to Edo in the record Ryūkū heishi ki(琉球聘使記) with the Korean Embassy to Edo (t’ongsinsa) records in 1711 to study the Japanese perception of the Ryūkūan Mission and how it differed from that of the Korean Embassy. Although the bakufu formally let the Ryūkūan Kingdom alone as an independent country, Ogyū already perceived it as a de facto vassal state of the Satsuma Domain. Hence, Ogyū criticized the bakufu for recognizing the Ryūkū Kingdom on equal terms, but considered it to be a civilized state realizing the dignity of Ming China, as seen in the Ryūkūan Mission‘s procession with their Sinic-style robes and court music. The diplomats of the neighboring country of Joseon were of lower status than those of the Ryūkū Kingdom, but were received by high Japanese officials and enjoyed preferential treatment even in their entrance. Arai Hakuseki tried to change this when reforming the procedure for diplomatic missions, but did not do so without mediation from Joseon. The Ryūkyū and Joseon envoys were totally different in nature. The former, who deliberately acted as foreign delegates, differed from the latter who sought a low profile. However, despite their intent, the Joseon envoys stimulated Japan’s interest in things foreign and their poetry, calligraphy, and paintings were appreciated along with the court music of Ryūkū. The dual nature of the Ryūkū envoys and the interest in the foreign of the Japanese commoners were the main reasons why the nature of the Joseon envoys was misunderst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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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조선통신사와 류큐사절단의 筆談(對談) -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를 중심으로 -

조영심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1집 2014.09 pp.357-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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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711년 신묘통신사행을 보다 객관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를 위해 동시대 일본에서 이뤄졌 던 외국인 행렬인 류큐사절단과 비교했는데, 18세기 초 막부의 집정관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 가 조선통신사가 나눈 필담을 정리한 『강관필담(江關筆談)』과 류큐사절단이 나눈 필담을 정리한 『백석선생 류인문대(白石先生琉人問對)』를 주 텍스트로 이용하였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1682년과 1711년 통신사와 접촉했는데, 『강관필담』은 1711년 조선 측 삼사(三使) 등과 나 눈 필담을 정리한 것이다. 『백석선생류인문대』는 1710년과 1714년 류큐사절단을 만나 대담한 기록으로 보인 다. 이 시기 아라이 하쿠세키는 막부의 행정을 주도하는 인물이었기에 그의 위치에 따른 대담이 오갔다. 『강관필담』의 경우 아라이 하쿠세키와 조선통신사들 간에 자국에 대한 과시와 견제가 깔려있으나 우호와 사 귐의 정을 나누며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도 나타났다. 대등한 관계에서 그 동안 쌓아놓은 지식을 표출하며 필담 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백석선생류인문대』의 경우는 아라이 하쿠세키의 일방적인 질문과 류큐 인 상대의 대답으로 이루어져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류큐에 대한 정보를 서적을 통해 습득하던 중 발생한 질 문들을 문목으로 만들어놓고 류큐 사절을 만나자 질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라이 하쿠세키에게 있어서는 자주 접할 수 없는 류큐인을 통해 이국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는 기회였던 것이다. 두 텍스트에 모두 드러나는 것은 ‘중국’에 대한 아라이 하쿠세키의 관심이다. 그런데 이 관심이 표출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백석선생류인문대』의 경우, 여러 차례 중국에 대한 질문을 류큐인에게 던지며 자신의 호기심 을 드러냈다. 반면, 『강관필담』에서는 중국 문헌을 인용하며 중국에 대한 지식을 표출하는데 집중한다. 중국 에 대한 호기심을 감추고, 일본이 중화의 제도를 이어가고 있는 모습을 강조하는 ‘내세우기 외교’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 속에는 조선에 대한 견제와 조선과 동등한 선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담겨있다.
This article was written to investigate Tongshinsa in 1711 (the year of Shinmyo(辛卯)) more objectively. To do so, comparison was made with Ryukyu diplomatic delegation, which was a third power, taken place during the contemporary period. Gang-gwan-pil-dam, which is the compilation of the conversations by writing exchanged between Joseon Tongshinsa and Arai Hakyuseki (1657-1725), who was a consul of Japan´ s feudal government in early 18thcentury, and Baek Suk Sun Sang Ryu In Mun Dae that is the conversations by writing of Ryukyu diplomatic delegation, were used as the main text for the study. Arai Hakyuseki contacted Josoen Tongshinsa in 1682 and 1711. Gang-gwan- pil-dam is the compilation of the conversations that he made with Samsa(三使) from Joseon. Baek Suk Sun Sang Ryu In Mun Dae seems to be a record on the conversations exchanged between Arai Hakyuseki and Ryukyu diplomatic delegation in 1710 and 1714. During this period, Arai Hakyuseki was the leading character in the administration of Japan’ s feudal government. He exchanged discourses to his position. Gang-gwan-pil-dam shows mutual affinity and jokes as well as connotes the ostentation and check on each country exchanged between Arai Hakyuseki and Joseon Tongshinsa. It seems that the both parties had exchanges conversations in equal footing, displaying knowledge that they had accumulated. On the other hand, Baek Suk Sun Sang Ryu In Mun Dae consists of the one-sided questions of Arai Hakyuseki and the answers of Ryukyu counterpart. It seems that when he met Ryukyu counterpart, Arai Hakyuseki had asked questions out of the question list he prepared while learning the knowledge of Ryukyu. It was a rare opportunity for Arai Hakyuseki to obtain information through Ryukyu. What was found from the two texts is the interest Arai Hakyuseki had in ‘China’. However, he used quite different ways to express. In Baek Suk Sun Sang Ryu In Mun Dae, Arai Hakyuseki appears to reveal his curiosity, tossing questions to Ryukyu counterpart about China several times. In the meantime, Gang- gwan-pil-dam shows that he had focused on expressing his knowledge in China, quoting Chinese literature. It can be regarded as part of ‘Showing-Off Diplomacy’, hiding his curiosity about China and showing that Japan supports Chinese system. In the hidden lines, he showed a check on Joseon and effort to stand on equal footing with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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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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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기본 <슉영낭자젼> 소재(所在) 가사 작품 8편에 대하여

구사회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1집 2014.09 pp.39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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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천의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에는 한창기(韓彰琪, 1936~1997)선생이 평생 수집한 6,500여점의 자료가 수 장되어 있다. 이곳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소설 <슉영낭ᄌᆞ젼>에는 8편의 가사 작품이 필사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가사 8편은 <규영헌가>․<사낭자석별가>․<사모가>․<계ᄆᆡ사>․<동상연분가>․<직여사>․<셰 황가>․<바늘가>이다. 이 중에서 새로운 작품은 모두 5편으로 <규영헌가>․<사모가>․<계ᄆᆡ사>․<셰황가>․<바늘가>이다. <사모가> 는 사친연모류 규방가사의 일종이고 <계ᄆᆡ사>는 계녀교훈류 규방가사의 일종으로 이들과 유사한 이름의 작 품들이 많다. 하지만 한창기본은 기존 작품의 내용과 전혀 다른 새로운 작품이다. <규영헌가>는 한국가사문학 관에 가사 제목과 첫 구절만 전하며 이번에 나온 한창기본을 통해 그 전모를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작품이다. <셰황가>와 <바늘가>는 예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작품이다. 다만, <바늘가>는 가사 작품의 일부 만 기록되어 있다. 나머지 <사낭자석별가>․<동상연분가>․<직여사>는 이미 학계에 알려진 것으로 새로운 작품이 아니다. 그렇지 만 다른 <동상연분가>와 <직여사>에는 누락 부분이 있었다. 이번 검토를 통해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에서 소장 하고 있는 한창기본이 원전에 가깝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헌 자료에 대한 수집과 해체의 측면에서 이들 가사 작품의 생성 공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 작품들은 경 북 내륙 지방에서 창작되어 수집과 공간 이동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규영헌가>와 <사낭자석별가>는 경북 영주에서, <사모가>는 경북 안동 지역에서 작품이 생성되었다. 이 점은 박순호가 소장했던 <사낭자석별 가>와 <규영헌가>, 그리고 <용암산 화전>을 통해 그대로 확인된다. 한 마디로, 한창기본 <슉영낭ᄌᆞ젼>에 부기된 가사 작품 8편의 자료적 가치는 높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가사 작품이 5편이나 있었고, 이미 알려진 작품도 완성도가 높아서 기존의 작품을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Deep Rooted Tree Museum in Suncheon, Jeonnam preserved 6,500 resources which Han Changki collected for his entire life. In the museum, it was confirmed that 8 Gasa works of old novel were transcribed. Those include , , , , , , and . Among them, , , , and are new works that have not been known. And and were already known to the academic circle which are not new. And, these contained parts that are not in the existing works. This seemed to be omitted during transcription. Accordingly, it was confirmed some part of Gasa was omitted during transcription. And, it is conjectured that these works were composed or transcribed in Yeongju area, Gyeongbuk in the late 19th century.

12,000원

17

한국 고시가의 강남 문학지리학

윤주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1집 2014.09 pp.455-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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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한국 고시가의 강호시가와 기행시가에서 강남 문학지리학이 중요하게 작동되고, 일부 유흥적 주제나 가 상적 구성의 시가에서도 나름의 기능을 지니고 있음을 살폈다. 강남 문학지리학은 단순한 한문학적 상식에 그 치지 않고 동아시아 문명권에 속하는 특정한 시공간에서 세속적 가치와 대립되는 은둔과 풍류의 미의식을 표현 하기 위한 보편적 준거였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본고는 중국의 그것을 넘어서서 한국 고시가에 구현된 강남 문학지리학의 보편성과 개성을 밝히고자 노력했다. 먼저 본고는 강호시가에서 <어부가> 계열 및 <소상팔경> 시조를 중심으로 강호의 인식 문제를 따졌다. 이들 작품은 중국 장강을 따라 형성된 강남 문학지리학에 전거를 둠으로써 이국적 흥취를 고양시키고 은둔의 미학을 가탁했다. 그러나 장강 중류의 호상(湖湘) 문화와, 하류의 동오(東吳) 문화는 강개와 풍류의 미의식에 있어 대립 되는 경향을 보였다. 물론 강남 문학지리학에 전혀 기대지 않고 자신의 강호 시공간을 그려내기도 하고, 강남과 대비되는 동국의 강호에 기반하여 자신만의 풍류를 자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기행가사에서는 무엇보다 악양루가 중요하게 활용됐음이 특징적이었다. <악양루기>의 ‘선우후락(先憂後樂)’의 정신을 투사함으로써 ‘강호-정치’의 관계에서 오는 불안감을 해소하고 사대부의 이상을 성취하려는 작품도 있 고, 몽유와 가상의 서사적 형식을 통해 ‘악양루 구경’이라는 유흥을 즐기고자 한 작품들도 있다. 특히 후자에서 는 강남 문학지리학에 근거하여 이국적 공간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허구적으로 엮어서 재배치하고, 때로는 취 락의 절정감을 나타냈다. 강남 문학지리학은 한국 고시가에서 강호의 경치와 흥취 및 이념의 기준점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를 오히려 대 비적 관점으로 활용하여 동국의 강호와 작가의 현실을 표현하고자 노력한 자취도 현저하다. 특히 집구나 용사 의 수준을 벗어나 자국어 시가로서의 표현과 사대부 문인관료로서의 이념적 주제를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발달 해 간 측면은 특기할 만하다. 반면에 기행시가에서는 강남 문학지리학이 이국적 흥취를 제공하는 소재원의 구 실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강남의 권역이 고시가에서는 호상과 동오 지역으로 편중되는 것도 하나의 특징 이다. 이는 한문학이나 구비문학에서 운남, 귀주, 복건 등을 아우르는 광의의 강남까지 제재로 다루고 있는 현 상과 큰 차이를 보인다.
I researched in this essay that literary-geography of Chinese Gangnam area was a significant factor on Korean old poetry, especially ones in nature(i.e. rivers and lakes) mode and in travel mode. I could recognize that this literary-geography was merely not common sense of Chinese classics but general frame of reference by which the Korean poets and singers represented their aesthetic sense in seclusion or taste for the arts to be contrasted with the secular value at a certain space time among Eastern Asia's civilization. First, on the poetry in nature mode, it is mainly with the series and sijos that I considered their conciousness about the rivers and lakes. These group of works enhanced a exotic atmosphere and pretended aesthetic sense in seclusion, taking reference to the literary-Geography of Gangnam which had built up around the Chang-Jiang(River) area. However, Hu Xiang's culture around mid-stream of Chang Jiang and Dong Wu's culture around the lower Chang Jiang were distinguished between their aestheic senses of sorrowful indignation and elegant appreciation for the arts. Of course there were ones which expressed their own time-space of the rivers and lakes without relying on the literary-geography of Gang Nam, the others which were proud of their own elegant appreciation for Eastern country's(=Korean) rivers and lakes through the contrast with the Gangnam. Second, on the poetry in travel mode, it is distinctive that the Yue Yang Pavilion was importantly applied. One work would like to relieve anxiety from the relation between nature(rivers and lakes) and politics and to approach to the idea of literary bureaucrat's class in Eastern Asia, projecting the spirit of Concern Before Pleasure After derived from written by a ruler in Song danasty. The other works were willing to enjoy the amusement called 'sightseeing at the Yue Yang Pavilion' through a narrative pattern of dream journey and imagine. Especially the latter collected and rearranged various imformation about the exotic space based on the literary-geography of Gangnam, occasionally expressed ultimate emotion of the fun of being drunk. Literary-geography of Chinese Gangnam has offered a standard point of scenery, excitement, and ideology in the Korean old poetry. But all the more in adopting the contrast view with this, it is conspicuous that there were many trace to try to express the Eastern country's own rivers and lakes and the reality of writters. Especially it is remarkable that the works were developed to the direction to make the most vitality in the expression as Korean languge's poetry and in the ideological theme as literay bureaucrat's c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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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筠 <和思潁詩> 与歐陽修 “思潁詩” 比較研究

좌강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1집 2014.09 pp.499-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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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은 조선 중기의 저명한 문인이며, 그의 작품 중 구양수의 “사영시”를 창화한 <화사영시>30수가 있다. 본 논문은 우선 허균 <화사영시>의 창작 시기와 은거지에 대한 논증을 하고, 이어서 시 속의 서정 대상, 시가 意象, 시가 情境등에 대한 분석을 진행하였다. 이를 통해 허균의 구양수 “사영시” 창화는 단순한 모방이 아닌, 엄정한 차운의 형식으로 창작되었고, 일정 수준의 변용과 초월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창화시는 허균의 慕華사상의 표출이며, 자국 문학의식의 자각과 표방의 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그가 중국 문단에서 다른 문인들과의 경쟁에서 자기 나름의 입지를 확보하도록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Heo Gyun was the famous scholar in the middle Korea Dynasty. He had written thirty poems named Responsory of Siyingshi correspond to Chinese poet Ouyang Xiu’s Siyingshi. This paper discussed and illustrated the writing time of Heo Gyun’s Responsory of Siyingshi and his cloistered place, and then analyzed the object, the images and the contextual situation of the poetry. From the analysis we could see that Heo Gyun’s responsing to Siyingshi was not mere imitation, but a variation and transcendence to a certain degree, meanwhile it could meet the demand of strict rules of meter in writing poetry. Responsory of Siyingshi showed Heo Gyun’s literary talent and his admiration to China. It was an expansion of his own Korean literary consciousness and a great effort in competing with China and occupying a prominent position in Chinese literature.
許筠為朝鮮朝中期著名文人,其作品中有唱和歐陽修“思潁詩”的<和思潁詩>三十首。 本文首先對許筠<和思潁詩>的寫作時間及歸隱之地進行了論證,又對詩作中的抒寫對象、詩歌意象、詩歌情境等進行了分析,可以看出許筠對“思潁詩”的唱和,並非簡單地模仿復製,而是在嚴格的步韻要求下,表現出相當程度的變奏與超越。和詩是許筠慕華的表現,是其本國文學意識的自覺與張揚,更是他爭勝于中華、力求在中華文壇占一席之地的努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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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운공여대사유망록(應雲空如大師遺忘錄)』의 상호텍스트성

이대형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1집 2014.09 pp.519-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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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활동한 응운 공여(應雲空如, 1794~?)는 화엄학으로 유명했던 용암 혜언(龍岩慧彦, 1783~1841)의 제 자이며, 당대 저명한 문신 김조순(金祖淳)에게 호를 받고 그와 편지를 교류한 승려인데 현재는 이렇다하게 알려 진 바 없다. 그의 󰡔유망록󰡕에 시는 한 편만 있고 나머지는 산문만 수록되어 있으니, 문예미에 대한 관심이 적 었다고 짐작된다. 사상적으로는 「삼교성명설」 등에서 삼교일치론을 주장하였고, 나아가 󰡔칠성경(七星經)󰡕을 읽으라고 권하였다는 점에서 도교적 취향을 보인다. 응운 공여의 글쓰기에는 상호텍스트성의 측면에서 볼 부분이 상당히 많다. 기존 문헌을 글쓰기에 이용하는 것 은 일반적이지만 글 전체가 인용으로 채워지는 경우들은 특이하다 하겠다. 인용을 할 때는 대체로 발췌 축약하 는 경우가 많은데 축약하면서 일부 표현구조를 바꾸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읽힐 수 있는 경우들도 생겼다. 공여는 자기만의 독자적인 글을 쓴다는 의식보다는 기존의 문헌을 활용하여 현재 문제되고 있는 것들에 대한 해답을 구하여 지금 필요한 글을 쓰는 데 중점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용 위주의 글쓰기가 그만의 독특한 것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고려 승려 진각 혜심(眞覺慧諶)이나 조선 김시습( 金時習)의 불교 저술에서도 확인되는 등 불교 관련의 문헌에서 드물지 않게 발견된다. 이는 사실보다는 의미를 중시하는 불교적 태도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The Youmangrok(遺忘錄) is written by Eungoon Gongye(應雲空如)r; he was the direct disciple of Yongam Heoeon(龍岩慧彦) who was known for Hwaom idealism. His buddhist pen name, ‘Eungoon’, was given by Kim Jo Soon(金祖淳) who was one of the most influential civil service bureaucrat at the time and they carry out their relationship through exchange letter. Youmangrok is composed by only one poetry and the remaining parts are prose, which is not common way of collection work in Josun. So we can assume he had less interest in beautiful literary art. He assisted unity of the three religions, and encouraged to read the Sutra of Big Dipper(七星經). The writing style of Eungoon Gongyer seems to be based on the mutual text way. If you read Youmangrok carefully, you will find that it is composed of quotation mostly. It is common to use summary or extract when quote from other references, but he sometimes modify, revise, and skip the original part when he quote. Because of this way, there are sometimes misreading and misunderstanding parts as well. He might prefer to use the existing reference for supporting his opinion, instead of his own independent writing. This mutual text method of writing is not only available in his work; occasionally, we can still find this writing style in the Buddhist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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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정6대강보로 읽는 장진주사의 악곡구조분석

김영덕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1집 2014.09 pp.545-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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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장진주사의 악곡 구조 분석이다. 먼저『가곡보속』에 있는 장진주곡을 살펴보면 16정간보로 되어 있다. 또한 장구장단이 다른 곡들에는 1곡에 1개씩 있는 것과 달리 1곡에 3개의 장구장단이 있어 불합리한 것을 볼 수 있다. 『세종실록』에는 ‘柱杖擊地爲節 一夕內定 주장격지위절 일석내정(지팡이를 짚고 땅을 차면서 음악의 절도로 삼았으며 하룻저녁에 정하였다)’이라 하여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柱杖擊地’는 ‘柱杖(지팡이를 짚고 )’과 ‘擊地(땅을 차면서)’의 두 동작, 즉 손과 발을 써서 음악의 절도를 셈하며 대강과 정간을 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조실록악보』, 「서문」의 기록을 살펴보면, “創作此譜 畫爲十六井 而 作六大綱(이 악보는 16井을 그어 6大綱을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創作此譜’의 ‘作’과 ‘作六大綱’의 ‘作’은 동일한 대상‘此譜’를 가르 키고 있어 ‘此譜’의 내용이 ‘16정’과 ‘6대강’임을 알려주고 있다. 『세종실록』의 ‘柱杖’과 ‘擊地’의 두 동작의 의 미와 『세조실록악보』, 「서문」의 기록인 ‘畫爲十六井(16정을 그었다)’과‘作六大綱(6대강을 만들었다)’의 두 가 지 사실 관계를 밝혀보면 ‘16정’과 ‘6대강’의 두 가지 표기가 ‘柱杖’과 ‘擊地’의 실제 동작으로 나타난 것이다. 혹 시 ‘柱杖’과 ‘擊地’가 바뀔 수도 있지만 ‘16정’과 ‘6대강’의 표기는 바뀌지 않는다. 이상과 같은 16정6대강보의 해석을 현행가곡 중 원곡이랄 수 있는 ‘이삭대엽’에 적용하면 ‘전반각(1ㆍ2ㆍ3대강)’ ㆍ‘후반각(4ㆍ5ㆍ6대강)’ㆍ‘1각=16정6대강’이 나타난다. 또한 ‘전반각 생략ㆍ후반각 고정’현상이 나타나는데 ‘언 락’에 1곳, ‘언편’에 2곳이 있다. 그리고 이를‘장진주’에 적용하여 분석하면 ‘6각~16각’까지 11각 전체가‘전반각 생략ㆍ후반각 고정’ 현상이 나타난다. 비록 16정간만으로 기록되었다 하여 1각=16정간의 시각으로만 볼 수 없 고 1각 16정6대강을 합해 보아야만 정확한 실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본고에서 ‘이삭대엽’ㆍ‘언락’ㆍ‘언편’ㆍ‘장진주’4곡에 대하여 16정 6대강보로 해석하고 그 유용성에 대해 살펴본 결과, 『세조실록악보』의 16정 6대강이 변함없이 적용되었다. 현재는 6대강의 인식 없이 16정간만 전해져 내 려 왔던 것이다. 이것은 1948년 악보 명칭을 임의로 ‘정간보’라고 지칭하면서부터 학문적 논의 없이 지속적으로 사용하여 왔던 것이다. 더더군다나 ‘오선보’로 역보해서 학술적 분석을 할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이제 까지 16 정간으로만 연구하던 가곡보에 대해 6대강을 첨가하여 올바르게 분석해낼 수 있는 것이다. 오선보 역보는 그 다 음이다.
This study aims at an analysis of Jangjinjusa piece structure. At first, the piece, Jangjinjusa in 『Sequel Song Score』, is composed of 16 jeonggan scores. Other than other pieces having one janggu beat, the pieces in 『Sequel Song Score』have three janggu beats a piece, absurd. 『Sejong True History』 used the words jujanggyeokjiuiseol ilsiknaejeong(lean on sticks and strike the land to get beats on one evening), and didn’t use the terms. Here ‘Jujanggyeokji’ means two motions, ‘jujang (lean on the land)’ and gyeokji (‘strike the land’). With the hands and feet, players confine daegang and jeonggan, counting phrases. 「An introduction」 of 『Sejong True History Score』 described, “This score made 6 daegangs by lining 16 jeongs. ‘作 (‘make’) of 創作此譜 (making creative score)’ and ‘作 (‘make’) of 作六大綱 (making six classification) designate the same object ‘此譜 (this score)’, meaning that the contents of 此譜 (this score)’ is 16 jeongs and 6 daegangs. The relation between the meanings of ‘jujang (lean on the land)’ and introduction record ‘strike the land’as well as ‘lined 16 jeongs and made 6 daegangs’ shows the real motions of ‘lean on the land’ and ‘strike the land’ Though ‘lean on the land’ and ‘strike the land’ may be changed, the writings of ’16 jeongs’ and ‘6 daegangs’ are not changed. As shown above, the application of the analysis of 16 jeong 6 daegang scores to ‘Isakdaeyeop’, the original piece of the current songs, makes it clear that 1 gak means 16 jeongs and 6 daegangs in the first half gak (1st, 2nd, 3rd daegang) and in the second half gak (fifth, sixth, seventh daegang). In one place at ‘Eonrak’ and in two places at ‘Eonpyeon’, the phenomena appear, ‘first half gak omission, second half gak fixation’ The analysis on it to ‘Jangjinjusa’ shows the phenomena of ‘first half gak omission and second half gak fixation’ over all of 11 gaks ‘the sixth gak~the sixteenth gak’ The writing of 16 jeonggak shows the view of 1 gak=16 jeonggak. The general analysis of 1gak 16 jeongs 6 daegangs shows the accurate actuality. This study analyzed and examined the availability by 16 jeongs 6 daegangbos over four pieces, ‘Isakdaeyeop’, ‘Eonrak’, ‘Eonpyeon’, and ‘Jangjinju’. It was found that 16 jeongs and 6 daegangs of 『Sejong True History Score』were applied the same. But the users didn’t recognize 6 daegangs. Since the name of scores was designated to be ‘Jeongganbo’ arbitrarily in 1948, it was used continuously without an academic discussion. Furthermore, the conversion into ‘five-line score’ made it impossible to analyze it academically. Now, this study created a clue to analyze old scores into 16 jeongs 6 daegangs. It is not applied only to the songs but to all over the traditional music. It enables to study newly. The musical world classifies our traditional music with jeongak (regular music) and minsokak(folk music), but it is not classified. It is necessary to correct into ‘song, not ‘sijo’ and to put into a practical position rhythm theory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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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화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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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외시화(場外詩話) (2)

南相鎬, 詹杭倫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1집 2014.09 pp.575-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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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22

휘보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1집 2014.09 pp.589-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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