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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상고전연구 [Yeol-sang Journal of Classical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열상고전연구회 [Society of Yol-Sang Academy]
  • ISSN
    1738-2734
  • 간기
    격월간
  • 수록기간
    1988~2018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810 DDC 810
제58집 (12건)
No
1

【화보】제82차 춘계 학술발표회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8집 2017.08 p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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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논문

2

이야기 ‘나눔’의 문화적 생산성 : ‘이야기 연행’의 대안적 구성

김영희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8집 2017.08 pp.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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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논문 : 이야기 ‘나눔’의 문화적 생산성 : ‘이야기 연행’의 대안적 구성

3

식민지기 재조일본인의 구연동화 활용과 전개양상

김광식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8집 2017.08 pp.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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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구연동화가 이와야 사자나미와 구루시마 다케히코의 활동을 조선과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개략하고, 그 영향을 받은 재조일본인의 움직임을 고찰하였다. 재조일본인 구연동화가는 경성일보를 통해 활동했는데, 구루시마의 인맥(오토기구락부와 회자회)이 활용되었다. 1918년에 다쓰야마 루이코는 재조일본인 소학교를 중심으로 오토기 강연회를 실시했지만 단기간의 활동에 그쳤다. 매일신보 및 경성일보는 1921년 말부터 소아회를 발족시켜 그 대상을 조선아동으로까지 확대시켜 구연동화를 보급시키려고 노력했고, 1923년 조선동화보급회를 통해 구체화 된다. 소아회와 조선동화보급회는 시모노세키 오토기구락부의 야시마 류도와 회자회(回字會)의 사다 시코가 동시에 참여했는데, 야시마는 전자를, 사다는 후자를 주도했다. 사다는 계속해서 1925년 말부터 1931년까지 조선아동협회를 이끌며 스승 구루시마를 비롯해 회자회 회원을 다수 조선에 초청해 구연 순례회를 개최했다. 영미권(英美圈)에서는 도서관원이 원화(原話)에 중점을 두고 소규모로 스토리텔링하는 방식으로 발달․보급된데 반해, 일본에서는 구연동화가, 교육자, 종교 관계자가 큰 장소에서 웅변술과 같은 화술과 제스처를 중시하고, 대중적 성격을 지니고 독특한 발전을 이루었다. 구연동화의 보급자 구루시마는 근세적 일본 전통과 개인적 전쟁체험(청일전쟁, 러일전쟁 참전), 군인, 기독교 신자, 당대 내셔널리즘을 복합적으로 활용하여, 정신 및 인격 수양을 목표로 구연동화를 보급하였다. 사다는 아동애호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1923년 조선동화보급회, 경성소년의용단, 1924년 내선(內鮮)아동애호연맹, 1925년 경성소년단, 조선아동연맹(조선아동협회로 개칭) 등 여러 단체명을 수시로 바꾸면서 아동애호를 위한 교화활동, 잡지 발행, 강연회, 모성존중, 모체보호사업 장려, 일본에서의 조선 소개 구연활동 등을 전개했다. 1928년 당시 사다의 구연활동은 대중구연동화, 교실동화, 종교동화를 전부 포괄하며 조선아동협회 주간, 경성사범학교 내 순광(醇光)동화연구회 고문, 종교동화일본연맹 간사 등을 역임하며 전방향적으로 활동했지만, 그 주요 활동의 대상과 목적은 일본아동과 ‘내선융화’에 있었다. 읽기용 일본어 조선동화집에 비해, 일본어 구연동화는 조선아동에게 더 높은 일본어 능력을 요구했다. 일본어 구연동화의 활용은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취학률과 일본어 식자율의 저조로 인해 조선아동으로까지 대상을 확장하는 데 한계로 작용하였다. 이를 민감하게 인식한 고이케 다케루는 의태어 등을 생략한 구연을 제안했지만, 이 또한 대안이 될 수는 없었고 식민지 언어 문제는 심각한 균열을 야기했다. 본고는 일본어를 중심으로 다루었지만, 조선어와 일본어를 통한 읽고 쓰기용 조선동화집, 듣기용 구연동화, 말하기용 구연동화집의 수용과 확산에 대한 구체적인 비교 검토는 앞으로의 과제다.
Activity of Fairy tale storytelling writer who represents Japan (Sazanami Iwaya and Takehiko Kurushima) was considered in concerning with Chosun by this paper. And the movement of the Japanese Settlers in Chosun under Japanese Rule who underwent influence of Takehiko Kurushima was considered. The Japanese Settlers in Chosun Fairy tale storytelling writer came into action through the Gyeongseongilbo mainly. And That concerned connections of Kurushima (Otogi-club and Kaijikai). The Maeil-sinbo and the Gyeongseong-ilbo made the children’s committee start from the end of 1921, and even made them expand to a Chosun child, and tried to make a Fairy tale spread. It was embodied through the Chosun Fairy tale spread Group in 1923 actually. Yashima of Shimonoseki Otogi-club, Sada of Kaijikai participated with the children’s committee and the Chosun Fairy tale spread Group. Yashima took the lead in the children’s committee and Sada took the lead in the Chosun Fairy tale spread Group. Sada led a Chosun child society from the end of 1925 to 1931 continuously. Sada asked a member of Kurushima and Kaijikai to Chosun and held a Fairy tale storytelling meeting. A library clerk put emphasis on field talk in the area of England and America, and it developed by the system which does small-scale storytelling. But an art of conversation like an oratory and a gesture are emphasized at a big place in Japan, and, it's popula. Kurushima is the spread person of a Fairy tale storytelling in Japan. Kurushima utilized Japanese tradition and nationalism and made a Fairy tale storytelling spread, targeting the training of spirit and the character. Sada had the interest in child's kind movement and established various child groups. Sada organized the Chosun Fairy tale spread Group (1923), child love union of Japan and the Chosun (1924) and Chosun child society (1925) etc. But Sada had the interest in Japanese child and was aiming at goodwill of Japan and Chosun. Japanese Fairy tale storytelling requested the high Japanese ability of a Chosun child compared with the Japanese Fairy tale collection for reading. The percentage of school attendance in the colony Chosun and the expert rate of Japanese were low in 1920's. Chosun child couldn't understand Japanese Fairy tale storytelling with that. For example, Takeru Koike understood such situation and proposed Fairy tale storytelling from which an imitative word was omitted. But this couldn't be also an alternative. Language problem in a colony has caused a serious crack.

7,200원

4

이야기할머니 구연 활동의 실제와 과제

박현숙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8집 2017.08 pp.4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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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의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사업은 2009년부터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는 현대의 대표적 생활현장형 이야기판이다. 이 글의 목적은 이야기할머니 이야기판의 현지 조사를 통해 이야기 연행에 필요한 이야기, 화자, 청중 3요소를 중심으로 이야기할머니 구연 활동의 실제를 파악하고, 이야기꾼으로서의 이야기할머니 연행 양상과 특성을 밝히는 데 있다. 나아가 이야기할머니 구연 활동의 향후 개선방향과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야기할머니 구연 활동은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사업단에서 기획하고 제작한 운영 지침에 의해 이루어진다. 구연 활동에 필요한 이야기는 연간 계획에 따라 사업단에서 별도로 제작한 교재에서 매해 구연 목록을 선정하여 제공한다. 최근 3년간 선정된 이야기 목록을 살펴본 바, 문헌에 기록된 선현들의 미담을 다룬 역사인물담 선정 비중이 매우 높았다. 현지 조사를 통해 분석한 이야기할머니 연행 방식은 소통개방형, 오락놀이형, 연기형으로 나타났다. 소통개방형 화자는 지난 이야기 되새기기 단계와 생각 말하기 단계에서 다양한 질문기법을 통해 청중을 이야기판에 참여시켜 화자와 청중의 소통을 적극적으로 유도하였다. 오락놀이형 화자는 본격적인 이야기 구연 전후로 오락성이 가미된 노래와 율동을 삽입하여 청중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판에 참여시켜 이야기판을 놀이판 양상으로 이끌어 나갔다. 연기형 화자는 다양한 목소리 연기를 통해 청중이 흥미를 갖고 이야기판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였고, 대화 삽입을 통해 서사를 확장해 나갔다.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사업은 이야기를 통한 조손 세대의 교감과 훈육의 목적을 넘어 이제는 단절되고 사라져가는 전통적인 이야기 구술문화를 회복시키는 구심으로의 역량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따라서 향후 이야기할머니 구연 활동은 이야기판의 3주체인 이야기, 화자, 청중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화자가 기억하여 구연하기 쉽고, 청중의 상상력을 자극시킬 수 있는 생명력과 전승력을 지닌 구전설화 발굴과 목록 확대가 필요하다. 둘째, 화자가 구연 활동을 통해 개성 있는 이야기꾼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화자에게 구연의 자율성과 개방성을 확대해야 한다. 셋째, 청중이 이야기판의 한 주체이자 잠재적 이야기꾼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이야기판에서 청중의 위상을 높여야 한다.
The project 'Beautiful Storytelling Grandmother' of Korean Studies Advancement Center is modern typical storytelling sites of life fields type which was started since 2009.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understand the actualities of storytelling activities by ‘Storytelling Grandmother’ using the three requisites of story, storyteller, and audience through a field investigation about their storytelling site, and try to figure out their performance aspects and characteristics as a storyteller. Further more this paper is to suggest improvement and tasks of Storytelling Grandmothers’ oral narration activities. The Storytelling Grandmothers' oral narration activities follow guidelines for operating which is made by the project team of 'Beautiful Storytelling Grandmother'. Stories required for oral narration activities are selected and provided by the project team according to annual plan. Looking at the list of stories selected over the last three years, the stories of historical figures with impressive tales of ancient sages was chosen very highly. In the field investigation, the performance of Storytelling Grandmothers as a storyteller falls into three categories; the open-communication type, entertainment- play type, and acting type. The open-communication type is a way of inducing communication between the storyteller and the audience by engaging the audience into the story site through various questioning techniques in the story-reminding stage and the thought-talking stage. The entertainment-play type is a way of leading the story site to the play site by engaging the audience actively using songs and movements accompanied with entertainment. The acting type is a way of getting the audience to concentrate on story site using storyteller's various voice acting. It also has the characteristics of expanding stories through dialogue-centered storytelling. The project 'Beautiful Storytelling Grandmother' should expand its capacity as a center for restoring the traditional storytelling culture that is disconnected and disappearing beyond the purpose of communion and education of the generation of grandparents and grandson with storytelling. Therefore, future storytelling activities by Storytelling Grandmothers should be centered on the story, storyteller, and audience, which are the three requisites of story site. The following is suggestions for this. First, it is necessary to discover oral folk tales that has a power of vitality and transmission and expand its lists because it has the power that the storyteller narrating the folk tales can remember and narrate the stories easily and stimulate the imagination of the audience. Second, it is necessary to expand the storyteller's autonomy and openness so that the storyteller can grow up as a characterful storyteller through their storytelling activities. Third, it is necessary to enhance the audience's position in the story site so that the audience can grow as a subject and potential storyteller.

9,100원

일반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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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세기 동ㆍ서양 세책(貰冊) 문화 연구 시론

이민희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8집 2017.08 pp.87-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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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전 세계 세책 문화의 특징을 밝히고자 한 시론에 해당한다. 세책(貰冊)을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파악하고 세책 문화사가 독서 문화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전 세계적으로 나타났음을 통시적 관점에서 고구하고자 했다. 세책 독서는 저렴한 값을 지불하고 일정한 대여 조건 하에 빌려다 읽는 새로운 독서방식을 의미한다. 18세기 들어 일반 독자가 독서의 주체로 급부상하면서 지식을 소유, 또는 공유하려는 의식이 강해졌다. 이때 원하는 책을 마음껏 사 볼 수 없는 독자는 책을 직접 구매하기보다 빌려 읽는 것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상품 가치가 높은 소설책 위주의 독서문화가 형성되면서 유럽(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슬로바키아 등)과 북미(미국, 캐나다), 그리고 동아시아(한국, 일본 등)에서 18-19세기에 공통적으로 세책 문화가 발달했다. 세책 문화는 오락성과 상업성을 토대로 책의 소비와 지식의 확산, 그리고 일반 독자가 출현해 만들어 낸, 독서사의 진보이자 동서양 공동의 보편적 문화유산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계 여러 나라 세책 문화 사례를 통해 세책 문화의 형성 및 발달의 공통적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세책업의 등장 및 발달의 중요 기반은 상업․경제적 요인에 있다. 돈(화폐)의 이용가능성이 높아지고 여가 시간의 증가, 그리고 소비 활동으로서의 독서 추구가 세책 문화를 만들어냈다. 둘째, 유럽과 북미, 그리고 동아시아 등 전 세계적으로 세책 문화가 공히 18-19세기에 융성했다는 점이다. 셋째, 특별히 소설 독서가 세책 문화 발달을 견인했다. 소설은 현실 문제와 연애담에 기반한 오락 및 교양 독서물 성격이 강한 서사였다. 기존 상층(귀족) 남성 독자와 달리 새로운 취향의 소설을 즐겨 찾는 시민과 여성 독자들이 세책을 통해 독서의 주체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넷째, 세책업은 일정한 경제 규모와 소비 활동이 가능한 대도시나 휴양지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다섯째, 도시 내 세책점의 위치 및 영업방식이 세책점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소였다. 여섯째, 일반 대중 독자의 의식 각성과 독서에 대한 인식 변화가 상업적 세책 문화를 이끌었다. 일곱째, 국가별 정치적 검열, 또는 서적 출판 및 유통 정책이 나라별 세책 문화의 성격 및 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여덟째, 전 세계적으로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에 이르러 점차 세책업이 쇠퇴해 갔다. 이렇듯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으로 나타난 세책 독서의 의미를 다음 몇 가지로 요약 가능하다. 첫째, 세책 독서는 여유가 있는 중간 독자층의 급성장과 소설 시대를 여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둘째, 독서를 매개한 의사소통의 변화를 가져왔다. 사회적, 시대적 요구와 독자의 취향을 반영한 독서물의 생산(출판, 필사)과 소비(독서) 활동은 독서 방법과 내용까지 결정짓는 요인이 되었다. 셋째, 독서 자체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세책은 독서가 더 이상 진지한 학문 탐구 내지 종교적 수양 활동이 아닌, 일종의 소비 활동이자 개인적 여가 또는 취미, 교양 활동이라는 인식을 갖게 만들어 주었다. 넷째, 세책 문화는 사회 여러 분야에 걸친 융합 내지 결합을 이끄는 역할을 수행했다. 상층과 하층 독자를 하나로 묶을 수 있게 만들고,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그 차별적 경계를 허무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세책 문화는 전 세계적으로 공히 ‘신흥 독자층의 등장→소설의 성장→상업적 유통의 발달→문화 장려(출판 유통 검열의 완화) 정책→세책 독서의 발달’이라는 과정을 거치며 18-19세기에 그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세책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던 중국이나 유럽 중심부 국가들의 사정까지 살펴 세계 세책 문화의 제 특징을 아우르는 지형도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This study is an attempt to reveal the characteristics of the world circulating library culture. I tried to understand from the point of view that lending book was a cultural phenomenon, and that it was closely related to the history of reading and culture, and appeared worldwide. A reading by rent book means a new reading method that borrows books at a low price under certain rental conditions. In the 18th century, ordinary readers emerged as the subject of reading, and their consciousness to own or share knowledge became stronger. At this time, readers who can not buy the books they want are beginning to prefer borrowing rather than buying books themselves.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it was common for general readers (especially female readers) to borrow various novels in Europe(Britain, Germany, France, Russia and Slovakia etc.), North America(USA and Canada), and East Asia(Korea and Japan etc.). It can be seen that the book circulating culture is the progress of the bookmaker and the universal cultural heritage of the East and the West shared by the consumption of books and the spread of knowledge based on entertainment and commerciality and the emergence of general readers. Through the common features found in the cases of various countries in the world, we examined the formation and development factors of the book circulating culture. As a result, firstly, commercial and economic factors were found to be important foundation for the appearance and development of book rental business. Increasing availability of money, increased leisure time and pursuing reading as a consuming activity have created a book circulating culture. Second, the book- borrowing culture in Europe, North America, and East Asia has flourished throughout the 18th and 19th centuries. Third, especially novel reading led to book rental cultural development. The novel was a narrative with a strong character of amusement and literary reading based on real problems and love stories. It was a change that appeared to be a new readership, a citizen and a female reader, who was able to read a novel of a new taste, to escape from the existing upper(noble) male reader, Fourth, in order to develop the book rental business, big cities and resort areas suitable for a certain economic scale and activities were suitable. Fifth, the location of the book rental store in the city also played a role in determining success or failure. Sixth, public conscious awareness of readers and changes in their perceptions of reading led to the borrowing of commercial goods through book stores. Seventh, political censorship or book publishing and distribution policies had a great impact on the development of book circulating culture. Eighth, the book rental business, which had been well into the 18th and 19th centuries, has gradually declined throughout the world from the late 19th century to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In this way, we can summarize the meaning of book rental reading which is universally universal in the following several ways. First, the rental book reading acted as a catalyst to open up emerging of public readers and the era of the novel. Second, it brought about a change of communication through reading. The production of reading materials(publishing, mortal) and consumption(reading) in consideration of social and time demands and reader's tastes were factors that determine reading method and content. Third, it has changed the perception of reading itself. Book renting is a kind of consumption activity that makes reading more than a serious academic inquiry or religious fostering activity, but a lot of perception that it is personal leisure, hobby, and liberal activity. Fourth, the book circulating culture led to convergence and unification among the fields. The book rental activity was able to bind the upper and lower readers together and played a role in nullifying the discriminatory boundary in the male-centered society. This book circulating culture is common to all over the world:the emergence of new readers(female and lower readers)→the growth of novels→the development of commercial circulation→the promotion of culture (easing publishing censorship) →the development of reading through book borrowing It bloomed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It is necessary to build up a topography that covers the characteristics of the world book circulating culture by examining the circumstances of the central countries of China and Europe where the book circulating culture has not developed.

10,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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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전환기 해양 네트워크에 대한 상상과 추구 - 梅泉 黃玹의 해양 인식의 변화를 중심으로 -

배종석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8집 2017.08 pp.139-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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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근대전환기를 살다간 매천 황현의 해양 인식의 변화를 중심으로 해양 네트워크의 일면을 살펴보았다. 근대전환기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큰 변화는 바닷길이 열린 것이다. 개항을 통해 서구의 문물이 물밀 듯이 들어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바다가 근대로 가는 문을 열어준 셈이다. 매천 황현은 시대의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하여 󰡔매천야록󰡕을 서술하였고, 시를 읊을 적에도 뛰어난 관찰력으로 주변 풍경을 읊었다. 그는 시골에서 태어나 평생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갈구하였다. 그 지식의 원천이 바다 너머에 있으면 거친 바다를 건너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바다는 두렵고 단절된 공간이었지만, 매천에게는 새로운 지식을 위해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바다는 늘 위험한 존재로 여겨진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개항 이후 화륜선을 통한 국제통상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바다는 더 이상 위험한 존재가 아니었다. 또한 중국 남통에 있는 김택영의 편지가 망망대해를 건너 불과 열흘 만에 도착하였고, 김택영이 한․중을 오가는 것을 보며 매천에게 바다는 소통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특히 매천은 김택영의 서신을 통해 중국 인사들의 논문을 읽기도 하고, 그들의 근황에 대해 묻기도 했다. 전통적인 해양이 갖는 두렵고 단절된 공간의 인식이 변화된 것이다. 불행히 경술국치에 매천이 자결함으로써 이들의 교유는 끝이 났지만, 여기에서 근대전환기 해양을 통한 인문학적 네트워크의 일면을 볼 수 있다. 한편 근래 해양인문학이 주목을 받으면서, 많은 연구물이 나오고 있다. 대부분 문학의 영역에서 해양문학을 새롭게 조명하여 문학의 범위를 넓히고, 좀 더 다양하게 나아가자는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또한 해양인문학의 현황과 전망을 원론적으로 모색한 연구도 나왔다. 하지만, 아직까지 해양인문학이 나아갈 방향을 뚜렷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본 논문은 앞으로 해양인문학이 나아갈 방향에서 근대전환기의 특징을 들어 또 다른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하였다.
This paper gives a description of Maecheon Hwanghyeon's marine network in modern transitional period. Although there were many changes in modern transitional period, the opening of sea route was the most significant change. Because through the opening of its port, the western culture was introduced to East-Asia in large quantities which became a completely different world. The sea opened the door for modern times. Maecheon Hwanghyeon had a good sense of the changing times and he wrote a collection of essays named "Maecheon Hwanghyeon's essays". When he was reciting a poem he would recite the landscape around him under his outstanding observations. He was born in the countryside and he had desired new knowledge for life. If the sources of the knowledge was beyond the sea, he would cross the tough sea. Although the sea was a terror to people, he considered it as something to overcome for new knowledge. After the opening of the port, as steamboats appeared, the circumstances have changed much. The sea wasn't a terror anymore. He received letters from Kim Taeyoung who was in nantong city of China only for 10 days, however while he was getting to know that Kim Taeyoung had been oscillating between China and Korea, the sea turned into a space for communication to him. Especially, Maecheon could read Chinese people' papers and ask their recent condition by Kim Taeyoung's letters. Unfortunately, Maecheon committed suicide when Japan-Korea Annexation Treaty was signed in 1910, this brought Maecheon and Kim Taeyoung's companionship to an end. Nevertheless, it can be regarded as one aspect of the humanities network with the sea in modern transitional period.

6,400원

7

서울에 있는 동천(洞天) 바위글씨의 분포와 성격

허경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8집 2017.08 pp.165-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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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가 없던 시대에 인류는 자신들에게 의미있는 사건이나 이야기를 바위에 그림으로 그리거나 새겨서 남겼다. 글자가 그림을 대신하면서 바위글씨의 내용이 다양해졌는데, 이미 일어난 사건보다는 앞으로 이뤄지기를 바라는 이상향(理想鄕), 또는 자신의 인생관을 표현하는 글자들이 많다. 바위에 많은 글자를 새기기 힘들었으므로 주로 서너 글자를 새겼는데, 그 가운데 많은 글자가 바로 동천(洞天)이다. ‘동천(洞天)’ 앞에는 자신의 호(號)나 지명, 또는 주변 경관의 특성을 함축하는 두 글자를 많이 새겼다. 필자는 현재까지 서울시에서 130 개의 바위글씨를 조사했는데, 이 가운데 14군데 40여 개의 바위글씨가 동천을 표방하였다. 전체 바위글씨의 삼분의 일이나 되는 셈이다. 이 가운데 자하동천은 관악산, 벽운동천은 수락산, 제일동천은 도봉산에 새겼으니 글자 그대로 신선세계 동천(洞天)이라고 생각하여 새길 만하지만, 나머지 바위글씨들은 대부분 사대문 안팎에 걸쳐 있어서 동천이라고 붙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주거지를 소유한 사대부들은 자신의 주거지 주변 바위에 동천이라고 새겼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귀거래(歸去來)하지 못하는 사대부들이 동천이라는 바위글씨에 자신의 이루지 못하는 꿈을 담은 것이다. 서울시의 바위글씨를 집중적으로 조사하면 바위글씨의 숫자도 더 늘어나고, 동천도 더 찾아낼 가능성이 있다. 서울시의 바위글씨를 집대성하여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염원을 분석하고, 자연경관과 역사문화유산 복원의 자료로 삼으며, 바위글씨 둘레길 지도를 시민들에게 소개할 필요가 있다.
In an age without written characters, humankind painted or carved pictures of significant events on rocks. When pictures were replaced by written characters, their content diversified, with many more of them expressing ideals of future utopias or individual life values rather than events in the past. As primarily three or four characters were carved into rock as it difficult to carve more, one frequently written set of characters was dongch’ŏn (洞天), literally “grotto-heaven,” or also “scenic view.” One’s courtesy name, the place name of the location, or two characters describing the nearby landscape were also frequently written in front of dongch’ŏn. The author has surveyed over one hundred carved rock writings in Seoul, and forty such writings claiming to be dongch’ŏn were found in fourteen locations, close to half of all the writings. Among these, Chaha dongch’ŏn is carved on Kwan’aksan Mountain, P’yŏkun dongch’ŏn on Suraksan Mountain, and Cheil dongch’ŏn on Topongsan Mountain, and although these may be interpreted as grotto-heavens as written, it is difficult to read the other carved rock writings as such because they are written outside the four gates of Seoul. Despite this however, noblemen who owned villas carved the characters dongch’ŏn onto the nearby rocks. For such noblemen who could not return home for various reasons, the dongch’ŏn rock carvings represented their unfulfilled dreams. If Seoul’s carved rock writings are surveyed intensively, there is a possibility of finding more dongch’ŏn. There is a need to compile these writings, analyze the wishes of their noblemen writers, and introduce them to citizens in the form of a map with carved rock writing trails.

6,4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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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時期時調對楚辭的受容研究 - 以『青丘永言』ㆍ『海東歌謠』ㆍ『歌曲源流』 三大時調集為中心 -

崔妙時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8집 2017.08 pp.19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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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한국의 시조 작품 중에는 초사의 수용 요소를 담지하고 있는 작품이 많다. 본고는 한국의 삼대시조집인 『청구영언』,『해동가요』,『가곡원류』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조선시대의 관련 시조 작품을 수집 정리한 후 분석을 진행하였다. 시조는 유연한 장르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기초로 초사의 낭만적이면서도 호매한 특질에 효과적으로 삼투되었다. 초사는 고대 문학의 정화이자 전통적인 경전으로서, 조선시대 시조 작가들의 모방과 학습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의 시조 작가들은 초사의 특유한 문장 구조, 이미지, 언어 등을 시조 창작에 인용 모방하여, 시조의 내재적인 생명력을 한층 풍부하게 표현하였다. 시조의 초사 수용은 인용과 계승의 일면 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창작의 측면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시조에서 드러나는 민족 정서와 전통적인 정신은 시조 창작의 초사 수용 과정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특징이다. 또한 초사의 재래적인 정서와 사고는 시조를 통해 진일보 숙성 발효되어, 시조의 애국적인 정신력 전달에 있어서 감동의 깊이를 더해 주었다.
The existing Sijo of Korea preserves much information about the ancient Korean's acceptance of "ChuCi". This passage has collected related works from three poetry collection 『青丘永言』․『海東歌謠』․及『歌曲源流』, and expands the analysis from three aspects. By means of it's own flexibility style, Sijo corresponds to the natural beauty and magic docking of "ChuCi", which has the peculiar romantic trait, and that is a combination. "ChuCi" as one of the ancient literature resources, uses the traditional typical style identity, and has become the object of imitation and authors always quotes from it. Special sentence, images and words of "ChuCi" used in Sijo greatly enriched the inherent vitality of Sijo. Sijo is not only the reference and inheritance of "Chuci", but embodies innovation and unremitting efforts. Sijo's function of the poetic expression of national sentiment and the traditional spirit is strong. This capacity promotes the spirit of "ChuCi" in the process of acceptance and the further fermentation in the poems, and makes the expression of spirit of personality and patriotism more powerful.
韓國現存的時調中保留著韓國古代文人對楚辭的受容資料, 本文通過在三部時調集 青丘永言, 海東歌謠 及歌曲源流 中搜集相關作品並從三個方面展開分析. 時調借助自身詩體的這種靈活性, 天然地對接楚辭特有的清麗幻美浪漫豪健的特質, 這種受容表現出一種契合感. 楚辭作為一種先在的文學資源, 它以傳統經典文體的身份, 成為時調作者引用和摹仿的對象, 楚辭特有的句式, 意象和語詞在時調中的運用, 大大豐富了時調的內在生命力. 時調對於楚辭不單是引用和繼承, 還有創新的不懈努力. 時調表現民族情緒和傳統精神的功能是強大的, 這種容納力在對楚辭的受容過程中, 促進了楚辭所傳達的精神和思考在時調中的進一步發酵, 使時調對於愛國精神和人格精神的傳達更為有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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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 김영근의 삶과 시세계 - 영물시를 중심으로 -

김기림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8집 2017.08 pp.209-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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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개화기 및 일제 강점기 초의 강진 유림이었던 景晦 金永根이 남긴 영물시를 고찰하였다. 경회는 1865년 강진에서 태어났다. 吾南 金漢燮과 重菴 金平默을 사사했다. 이들은 華西 李恒老의 衛正斥邪 정신을 계승하였는데 경회도 이를 적극 받아들여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으로 삼았다. 을사늑약 및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후 이주 목적 또는 항일 활동 목적으로 간도에 갔으나 잠시 머물렀을 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신흥리에 학사를 열고 후학을 가르쳤다. 한편 人道公義所 와 같이 유교 부흥을 목적으로 설립된 모임에 적극 참여했다. 경회가 이런 활동을 한 것은 유림으로 자처하며 유교를 수호하고 유학적 소양을 지닌 후학을 양성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모두 1,527수이고 그 중 약 140여 수가 영물시이다. 그의 詠物詩는 서양과 일본을 배척하는 위정척사 정신과 존화 의식을 담고 있다. 또한 당시 조선을 배반하고 참혹한 백성들의 삶에 고통을 가중하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여 자신들의 책임을 放棄했던 조선 대신과 지방 목민관들을 준엄하게 비판하였다. 더 나아가 서양 및 일본에 의해 夷化하여 윤리가 타락하고 이익 추구가 만연한 사회에 대해 비판적 의식, 자각, 분별력 없는 일반인들에 대해서도 질타했다. 경회는 사회, 세태에 대한 비판의 준거를 자신에게도 엄격하게 적용하여 세상에 도움이 되지 못했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자신을 비판하면서 부끄러움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유림으로서의 정체성을 견지하기 위한 자기 警戒 및 단속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러한 경회 영물시는 영물시 영역 안에 위정척사와 존화 정신 및 자기 반성 등의 내용을 확장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척사 정신을 읊음으로써 당시 유희적, 친일적인 한시 풍조에 저항했고, 오랑캐 공간으로 변한 조선 사회에 대한 문학적 저항을 보여주었다.
This study speculated on 'Youngmul' Poetry by Gyeonghoi Kim Young-Geun who was a Confucian scholar in Gangjin during the flowering time and the early Japanese Colonial Period. Gyeonghoi was born in Gangjin in 1865. He was taught by Onam Kim Han-Seop and Jungam Kim Pyong-Mook. The teachers succeeded to the Wijung Chuksa(defending orthodoxy and rejecting heterodoxy)’ developed by Hwaseo Lee Hyang-Ro and Gyeonghoi accepted it actively and considered it as a lifelong motto. After the Eulsaneukyak and the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were completed, he moved to Gando for migration or anti-Japanese movement, but he stayed there for a while and came back to his hometown. Then, he opened an academy to teach junior scholars. Meanwhile, he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group which was aimed at rehabilitation of Confucianism. It was derived from this intention to protect Confucianism and nurture junior scholars with Confucian knowledge. He wrote a total of 1,527 poems of which about 140 were verses on natural things. His 'Youngmul' Poetry was intended to expel western power and Japan and preserve Wijung Chuksa and Chinese civilization. Also the verses criticized federal ministers and local governors who betrayed Joseon, imposed pain on the tragic life of people and abandoned their responsibility to care the people. Furthermore, he criticized the society which abandoned ethics and pursued only profit and the common people who were unaware of terrible social condition without critical mind. Gyeonghoi stuck to strict standards of criticism against society and the prevailing state of society and was ashamed of himself as he was not helpful for society and did not anything for society. Therefor, he firmly controlled himself to maintain his identity as a Confucian scholar. His 'Youngmul' Poetry has meaning in that it contains Wijung Chuksa, respect for Chinese civilization and self-reflection in his poetry. As he recited the Wijung Chuksa mind to resist against the trend of pro-Japanese Chinese poetry, he was also considered as a literary resistant against Joseon society which was changed into barbarian 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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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倡’ 관련 이미지 표현 작품의 창작 순서 고찰 - ‘倡’ 관련 이미지에 대한 의식 변화 양상을 중심으로 -

장만식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8집 2017.08 pp.243-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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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허난설헌 작품 속 ‘倡’ 관련 이미지에 대한 의식 변화 양상을 토대로 ‘倡’ 관련 이미지 표현 작품의 창작 순서를 고찰한다. 즉 ‘倡’ 관련 이미지에 대한 의식 변화가 긍정적 의식에서 부정적 의식, 절망적 의식으로까지의 양상으로 전개됨을 밝혔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倡’ 관련 이미지를 표현한 허난설헌 작품의 창작의 선후관계를 밝혔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첫째, <相逢行-2>, <長干行-1>, <西陵行-1> 등의 작품은 허난설헌이 혼인을 하지 않은 시기에 창작된 작품이거나, 혼인을 한 뒤라도 혼인 초기의 작품이다. 둘째, <相逢行-2>, <西陵行-1> 등은 <長干行-1>보다는 먼저 쓰였다. 셋째, <少年行>과 <靑樓曲>, <遣興-3, 4>, <閨怨歌> 모두 <長干行-1>보다는 나중에 창작되었다. 시기상으로는 혼인 후이다. 넷째, <少年行>이 <靑樓曲>보다는 먼저 창작되었고, <靑樓曲> 다음으로 <遣興-3, 4>, <閨怨歌> 등 창작되었다. 다섯째, <遣興-3>보다는 <遣興-4>가 나중에 창작된 작품이고, <遣興-3, 4> 다음으로 <閨怨歌>가 창작되었다.
This paper study on the order of creation of the image expression works of Heo Nanseolheon related to ‘chang’ based on the changing aspects of consciousness of the image related to ‘chang’ in the works. in other words, It is revealed that the change of consciousness of the image related to ‘chang’ has evolved from positive consciousness to negative consciousness and the desperate consciousness. and Based on this, It revealed the order of the Heo Nanseolheon works expressing image of related to ‘chang’ Thus, the following conclusions are reached. First, This work such as <相逢行- 2>, <長干行-1>, <西陵行-1> is a work of a time when it is not married, or it is the work of the marriage even after marriage. Second, the works such as <相逢行-2>, <西陵行-1> were created before <長干行-1> was created. Third, the works such as <少年行> and <靑樓曲>, <遣興-3, 4>, <閨怨歌> were created later than <長干行-1>. The time is after marriage. Fourth, The time of creation of <少年行> is faster than the time of creation of <靑樓曲> and after the creation of <靑樓曲>, the works such as <遣興-3, 4>, <閨怨歌> was created. Fifth, after the creation of <遣興-3>, <遣興-4> was created. and after the creation of <遣興-3, 4>, <閨怨歌> was cre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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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사단칠정설 연구 비판과 그것에 관한 원인 분석

이종우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8집 2017.08 pp.283-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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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다산 정약용이 사단칠정설에 대한 연구를 비판하면서 왜 그가 그 설에 대하여 연구하였는지에 대하여 그 원인을 구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는 공자의 도란 수기치인(修己治人)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학자들이 평생 사단칠정설을 연구하는 것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연구는 수기치인에 속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단칠정설을 연구하면서 주희의 그것을 비판한다. 정약용의 사단은 천리의 공에서 발현할 뿐만 아니라 형기의 사에서 발현하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칠정도 형기의 사에서 발현할 뿐만 아니라 천리의 공에서 발현하기도 한다고 주장하면서 주희를 비판하였다. 하지만 그가 사단과 칠정 모두 천리의 공과 형기의 사에서 발현되었다고 주장한 것은 이황을 사숙한 이익의 영향을 받았다. 정약용이 사단과 칠정에 모두 천리의 공과 형기의 사가 있다고 하면 사단과 칠정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는 사단과 칠정을 구분하는 것 보다 천리의 공과 형기의 사를 구분하는 것을 더 중요시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그가 사단칠정설을 연구하는 것을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연구하였다. 왜냐하면 사단칠정설은 수기치인의 이론적 기초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성리학자들이 수기치인과 무관하게 사단칠정설을 연구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사단칠정설을 수기치인과 연속선상에서 연구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사단이란 천리의 공이고 칠정이란 형기의 사이며 천리의 공으로서 형기의 사를 제어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수기치인이라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그는 당시 성리학자들이 수기치인과 무관하게 사단칠정을 연구하는 것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또한 정약용이 율곡학파는 기발이승일도설을, 퇴계학파는 이기호발설을 고수하면서 상대를 비판하면서 논쟁하는 것을 종식시키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 그러한 논쟁을 그는 공리공담으로 여기고 유학의 본지로서 수기치인으로 복귀하고 그 차원에서 사단칠정설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정약용은 그들의 사단칠정설 연구풍토를 비판하면서도 그 역시 수기치인에 관련하여 사단칠정설을 연구하였던 것이다.
I will investigate why Chŏng Yagyong criticized on theory of Four-Seven and researched that. Chŏng said that theory of Four-Seven is not the Way of Confucius, self-cultivation and politic people. Nevertheless, scholars devote themselves to research that in lifetime. However, He had also researched that. So I will also consider his that. Chŏng's Four Beginning is issue in principle and issued in public of heavenly principle and use to be issued in shape of energy. His Seven Feeling is issue in energy and use to be issued in private of shapely energy. His theory is criticizing against Zhu's that. However, Zhu's Four Beginnings are both harmony and disharmony. Accordingly, those is common between Chŏng and Zhu's that. But their theory of Seven Feeling are different. Chŏng's theory, Four Beginnings have both Heavenly Public and Physical Private's issuance as well as Seven Feelings, have issued on Zhu, Yi Hwang, Yi I and Yi Ik's it. Chŏng is influenced by Yi Hwang and Yi Ik. Chŏng's theory of Four Beginning are common between that of Zhu. Chŏng are common between that of Yi Hwang. Chŏng is common not only different between Yi Hwang and that of Zhu but also had different against those, theory of Yi Hwang and Zhu. Chŏng have succeeded Yi Hwang and Yi Ik. Why Chŏng have criticized for theory of Four-Seven but researched on that? At the time, Neo-Confucian scholars had research only on the Four-Seven that didn't relate self-cultivation and politic people, the Way of Confucius. So, he criticized their theory of Four-Seven. Since he researched on that related self-cultivation and politic people. That is, Four Beginnings mean Public of Heavenly Principle and Seven Feelings mean Private of Physical Energy. Consequently, the human should control the latter through the former. This just is self-cultivation and politic people, he emphasized.Therefore, Chŏng critiqued that Neo-Confucian scholars have studied on theory of Four-Seven regardless self-cultivation and politics at that time. Also, Chŏng's criticism implys to finish their debate:Yulgok school argues "energy manifestation and principle mounts on it in one way", criticizig theory of Toegye school. Toegye school argues argues "mutual issuence of principle and energy", criticizing theory of Yulgok school. He supposes the debate to indulge in academic discussion and so should return to self-cultivation and politic people. Therefore, he argues that should study theory of the Four-Seven reference to self-cultivation and politic people. Owing to that, he criticizes their way of the Four-Seven study, researching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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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보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8집 2017.08 pp.307-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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