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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상고전연구 [Yeol-sang Journal of Classical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열상고전연구회 [Society of Yol-Sang Academy]
  • ISSN
    1738-2734
  • 간기
    격월간
  • 수록기간
    1988~2018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810 DDC 810
제44집 (10건)
No

일반논문

1

정순왕후 한글편지의 내용과 가치

최어진, 박재연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4집 2015.04 pp.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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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貞純王后(1745~1805) 한글편지를 소개하고 그 자료적 가치를 밝 히는 글이다. 정순왕후 한글편지는 총 18점으로, 이 중 대부분은 정순왕후가 오빠 인 金龜柱(1740~1786)의 둘째아들 金魯恕(1772~1804)와 주고받은 것이 다. 오빠 김귀주에게 보낸 편지도 1점 있다. 이 편지들은 대개 정순왕후 수렴청정 기간인 순조 원년(1801)부터 순조 3년(1804) 사이에 주고받은 것으로 추측된 다. 다만 오빠 김귀주에게 쓴 편지는 정조 10년(1786) 무렵에 보낸 것으로 판단 된다. 이 편지들에는 英祖-正祖-純祖 대에 걸쳐 일어난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이 언급되어 있으며, 공식 기록에서 잘 포착되지 않는 주변정황이나 사건에 대한 정 순왕후의 개인적인 소감이 담겨있어 주목된다. 또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 기간 동 안 친정의 식구들에게 人事나 上疏 문제 등을 직접 상의․지시하는 정황들이 드 러나 있어 자료적 가치가 크다. 소생이 없었던 정순왕후가 조카들에게 쏟았던 애 정을 확인할 수 있어 정순왕후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도 있으며, 신앙생활, 친정과의 교류 등과 같은 왕실풍습의 일단도 확인할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introduce the Hangeul letters written by Queen Jeongsun[貞純王后, 1745~1805] and to examine its material value. Most of the letters were sent to her nephew Kim no-seo[金魯恕, 1772~1804] and his father Kim gui-ju [金龜柱, 1740~1786], who is the elder brother of Queen Jeongsun. Queen Jeongsun and Kim no-seo had been in correspondence for years between 1800~1804, the period of under the regency of Queen Jeongsun. These letters contain confidential issues and political agendas of the government from the reigning period of King Young-jo[英祖] to King Sun-jo[純祖]. Therefore, through the letters, we can see how Queen Jeongsun got involved in official affairs, such as personnel and appeal[上疏] problems. Furthermore, the letters show humane qualities of Queen Jeongsun and present valuable information about royal mores.

7,800원

2

18세기 堤川 義林池의 樓亭文化

金鍾秀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4집 2015.04 pp.4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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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제천에 소재한 의림지는 농경문화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국내 最古 의 저수지다. 의림지는 애초 이 저수지를 시축한 목적인 농경․수리적 용도 외에 도, 유흥․상경을 추구하는 호수로서의 기능을 겸하게 된다. 즉, 의림지는 저수지 와 호수를 동시에 아우르는 湖池 개념의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의림호․임 호․의호․감호 등과 같은 명칭들은 호수로서 의림지를 바라보았던 역사적 정황 을 환기시켜 주고 있고, 금번 논의의 출발점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이에 학고 김이만을 비롯한 조선조 사대부들이 남긴 문집과 각종 읍지류 등을 면밀하게 추적해 본 결과, 이미 17, 8세기를 전후하여 의림호는 숱한 유객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로 변모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추세에 병행하여 의림 호에는 다양한 누각․정자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즉,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의 림호에는 기존의 의림정․우륵당에 추가하여 진섭헌․후선각․임소정․대송 정․홍류정․영호정․의호사 등과 같은 누정․사우가 추가로 건립되었던 것이 다. 의림호 변에 창건된 대부분의 누정들은 조망․완상을 추구하는 식의 소박한 누정문화를 추구한 공통된 특징이 발견된다. 때문에 의림호의 누정들은 시가문학 의 산실로는 기능하지 못했다. 한편 진섭헌의 경우 조선 초기에 건립된 의림정과 더불어, 의림지가 시축된 설화를 간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또한 대송정․임소정은 김이만의 <어장사참사가>의 기․결 구조와 결속된 정자라는 점 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어장사참사가>는 이서우․오삼렴에서 김이만에 이르는 남인계 지식인들에 의한 전승 변이 과정을 거쳤다는 점에서, 이 기록에 담긴 정치적 함의의 여지가 읽혀지기도 한다. 홍류동과 용추폭포 주변에 건립된 홍류정은 비록 최치원의 비화를 접목하지는 못했으나, 지금의 경호루가 터한 곳과 함께 의림호 변에서 누정 건립이 가장 선호되던 지대였다.
The Uirimji located in Jecheon of Chungcheonbuk-do(忠北) is the best reservoir in terms of conserving the prototype of Korean farming culture. Meanwhile, Uirimji is also a typical example of a lake-reservoir(湖池), which has both functions of a lake and a reservoir. This article is directly related to the spaces in Uirimho Lake(義 林湖), which is the lake aspect of Uirimji. In fact, Uirimji already had become a famous tour spot in 18th century attracting numerous tourists. Together with this trend, various tall buildings and gazebos began to appear around Uirimho Lake. Most tall buildings and gazebos built at Uirimho Lake have the characteristics of pursuing modest tall building and gazebo culture by viewing and appreciating beautiful landscape. On the other hand, the tall buildings and gazebos at Uirimho Lake did not have the function of a cradle for poetry and song literature. Among them, Jinseob-heon Building(振屧軒) and Uirim-jeong Gazebo(義林亭) are notable by having the tales of Uirimji construction in them. In addition, Daesong-jeong Gazebo (大松亭) and Imso-jeong Gazebo(臨沼亭) have special meaning by being linked to the literary works of Kim I-man(金履萬). The location of Hongryu-jeong Gazebo(紅流亭) and Gyeongho-lu Building(鏡湖樓) are most favored locations for the construction of tall buildings and gazebos.

7,500원

3

모리스 쿠랑의 서한과 한국학자의 세 가지 초상 - 『플랑시 문서철』(PAAP, Collin de Plancy Victor)에 새겨진 젊은 한국학자의 영혼에 대하여 -

이은령, 이상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4집 2015.04 pp.75-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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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첫째, 프랑스외무부 문서고에 소장된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이 콜랭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에게 보낸 육필서한 33 종 전반을 학계에 소개하는 것이다. 둘째, 그 속에 새겨져 있는 쿠랑의 초상을 면 밀히 재구해보는 것이다. 쿠랑의 한국학 논저와 그의 중요한 이력 그리고 그가 서한을 보냈던 장소를 겹쳐볼 경우, 쿠랑의 서한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다. ① 쿠랑이 한국 서울에서 근무하던 때(1891.7.3.~1892.2.25.)에 보 낸 11종의 서한, ② 쿠랑이 통역관으로 중국, 일본 등에서 근무하다가 결국 전문 적인 학자의 길을 선택하여 프랑스에 정착하게 된 과정 속(1892.6.17.~ 1899.12.18.)에 보낸 10종의 서한, ③ 동양어학교 교수임용이 좌절된 이후 리옹 대학에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결국 중국어과 교수로 임용되어 활동한 과정 속 (1902.7.14.~1921.4.24.)에 보낸 12종의 서한이다. ①의 서한들에는 극동 미지의 땅에 배치된 ‘젊은 외교관’ 쿠랑이 플랑시의 도움 을 받아 한국의 서적과 그 고전세계를 연구하는 과정이 보이며, ②의 서한들에는 쿠랑이 한국서지 1~3권을 홀로 출간해나가며 한국의 문헌자료를 엮어 근대지 식을 창출할 수 있는 ‘한국학 전문가’로 성장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다. 물론 쿠랑의 한국학 기획은 불행히도 한국서지와 대등한 규모의 새로운 저술로는 구현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대한제국의 멸망’이란 사건은 그가 발견한 한국고전의 가능성을 구현할 길을 차단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렇듯 ‘한국학 저술=근대적 지 식’이라는 층위에서 구현되지 못한 한국문명의 가능성, 쿠랑이 보여준 낯선 한국 문화에 관한 수평적 시선을 ②와 ③의 서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속에는 성 숙한 동양학자의 시선에서 한국학 연구와 논저집필을 염원했던 젊은 한국학자의 영혼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서지만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쿠랑의 모습으로, 때로는 외교관으로 때로는 중국․일본학자로 보이는 프랑스외무성문서 고에 잠들어 있던 젊은 한국학자의 초상이다. 쿠랑의 서한문에 담긴 그의 세 가지 초상은 한국학이 제도적이며 학술적으로 부재했던 시기 한국학자의 초상이며 동 시에 우리가 복원해야 될 젊은 한국학자의 영혼이었던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first, to introduce total 33 hand-written letters of Maurice Courant to Victor Collin de Plancy housed in the Document Room of French Foreign Ministry; and second, to minutely examine the portrayals of Courant within the letters. Considering the studies on Korea by Courant, his key backgrounds and the places he wrote the letters, the letters of Courant can be categorized into three time periods : ① the 11 letters he wrote during the time he was working in Seoul, Korea (July 3, 1891~February 25th, 1892); ② the 10 letters he wrote during the time he worked in China and Japan as a interpreter, and then, finally settled in 3rd France after choosing to become a professional scholar (June 17th, 1892~December 18th, 1899); and ③ the 12 letters he wrote during the time he was appointed as a Chinese professor at University of Lyon after failing to attain a position at Institut Nationale des Langues et Civilisation 0rientales (July 14th, 1902~April 24th, 1921.) In the letters during the time period ①, the process of Courant, a 'young diplomat' placed in the mysterious land in the Far east, studying classical literatures of Korea under help of Plancy is portrayed. In the letters during the time period ②, the process of Courant's becoming an 'expert of Korean study,' who can produce modern knowledge from classical literature of Korea, through his publication of Bibliographie Coréenne Volume 1~3. Unfortunately, Courant's visions in Korean Study were not substantialized into a new writing comparable to Bibliographie Coréenne. After all, the fall of Korean Empire had eliminated all chances for him to materialize the potentials of Korean classics he had discovered. However, the potentials of Korean civilization that was not realized on the ground of 'writings of Korean study=modern knowledge' and the horizontal perspective on a unfamiliar subject that is Korean culture presented by Courant are still inherent in the letters during the time period ② and ③ because, the spirit of the young scholar, who longed to study and write about Korean study in a mature perspective of an orientalist can be found in those letters. In those letters are the portrayals of young Courant as a diplomat and as a scholar of Chinese or Japanese study that could not be found from reading Bibliographie Coréenne. Thus, the three portrayals of Courant in his letters are a portrait of a scholar of Korean study during the time when Korean study was systematically and academically absent, and at the same time, a spirit of a young scholar of Korean study.

12,600원

4

『일관요고(日觀要考)』의 형성과 일본 전래의 의미

구지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4집 2015.04 pp.143-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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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관요고(日觀要考)』는 작자미상의 문헌으로, 현재 14종 가량의 이본이 남 아있으며, 필사자는 모두 일본인이다. 전반부는 통신사행과 관련된 외교 의례 및 관례가 기술되어 있고, 후반부는 신유한의 『해유록』에서 발췌한 일본 관련 기사가 재편집되어 있으며 마지막에 정묘년 창수한 일본 인물 일부가 일정한 체계 없이 기술되어 있다. 1747년 통신사행원 가운데 누군가가 일본 사행을 대비하여 작성 해둔 책자로 추정된다. 일본 쪽 기록에 따르면 1748년, 1764년 연이어 『일관요고』가 일본 쪽으로 흘러들어가게 되었다. 현전하는『일관요고』는 필사기에 따라 두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겐엔 학파 계열의 학자인 오타 겐포에 의해 필사된 것으로, 이 계열을 통해 『일관요고』는 일본 내 조선 정보지로서의 기초 문헌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 른 하나는 오와리번의 유학자 오카다 신센의 필사본으로, 이토 게이스케의 소장본 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계열을 통해 메이지 시대에 이르기까지 일관요고가 조 선 연구의 자료로서 일본 학자에게 유효했음을 알려준다고 할 것이다. 일관요고는 체제의 특성상 일반적인 사행록으로 다루어지기 어려우나, 일본 내로 유전된 거의 유일한 통신사행 관련 개인 기록물이며, 일본 내에서 조선 정보 에 대한 기본 자료로 인정받았고 메이지시대까지 조선 연구의 대상 텍스트로 활용 되었다.
The Ilgwannyogo is a written work of unknown authorship, with all extant fourteen editions having been copied by the Japanese. The first half describes the diplomatic formalities and customs of the Chosŏn mission to Japan, while the latter half recompiled articles on the Japanese from Sin Yuhan’s Haeyurok, with the last section containing poems exchanged between Japanese and the Chosŏn diplomats in the jongmyo year(1747) in no particular order. The record is thought to be a booklet written by one of the Chosŏn diplomats as it contains the Chŭngjŏnggyorinji along with other primary sources, suggesting it was meant order to prepare Korean envoys with knowledge of Japan before their diplomatic missions. According to Japanese records, the Ilgwannyogo passed into Japanese hands in 1748 and 1764. The fact that the Koreans were extremely cautious about the leaking of mission records in Japan after the Imjin War makes the fact that it ended up accidently in Japanese hands and copied after 1748 an extremely rare example. The multiple editions and their dissemination show that Japanese Confucian scholars were curious about the nature of the diplomatic missions, and the Japanese diction that also appears in the process of making multiple copies shows that there was a movement to edit this work for Japanese tastes. The extant copies of the Ilgwannyogo number fourteen, either copied or recopied by Japanese and can be separated into two categories: 1) Copies by the scholar Ota Kenpo of the Kenen school, which show that the Ilgwannyogo was recognized as part of the basic literature on Chosŏn in Japan and 2) Copies by the Confucian scholar Okada Shinsen of Owari Domain possessed by Ito Keisuke, which shows that the Ilgwannyogo was used until the Meiji era in research on Chosŏn. Although the Ilgwannyogo is difficult to label as a normal emissary record due to its systemic peculiarities, it is almost the only emissary record to pass into the hands of Japanese individuals and used as a text to conduct research on Chosŏn until the Meji era.

6,700원

5

고소설 천문화소 ‘太乙’의 서사적 수용 양상과 의미

김수연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4집 2015.04 pp.173-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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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우주론과 종교사상에서 다루어 온 ‘태을’을 문학화소의 측면에서 논한 작업 이다. 태을의 이미지는 역사적 시간 속에서 변모해왔다. 변천과정을 우주론적 측면과 종교적 측면에서 살피면, 먼저 우주론 측면에서 태을은 ‘至高神格→인간세계 災禍 구제신→神符’로 변화함을 알 수 있다. 종교적 특히 도교적 사유에서도 태을은 ‘지고 신격→인격신(최고인격신→하급신격)→神藥名과 神符名’으로 그 이미지가 달라 졌다. 이는 천문우주적 관념으로서의 태을이 종교적 신격화 과정을 거치며 의례화되 는 과정과, 이에 따라 그것이 종교제의의 대상에게 요구되는 구체적ㆍ인격적 이미지 를 갖추게 되었음을 설명한다. 나아가 신격화ㆍ인격화된 태을의 이미지는 의례의 居所와 의례 대상의 神力을 상징하는 것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많은 고소설이 태을의 이미지를 문학화소로 수용하고 있는데, 그 양상은 첫째 남성인물의 존재론적 기반을 형성하는 天上 前生, 둘째 결연공간과 守護神符의 이름, 셋째 여성의 존재가치구현에 기여하는 화소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문학적 상상력이, 첫째 태을을 중심으로 펼쳐진 천인조응의 철학적 사유를 민간이 소망하는 영웅적 인물에 대한 이미지로 연결하고 있음, 둘째 민간화된 太 乙生兩儀 사상을 바탕으로 태을의 제사 공간을 남녀인물의 화합 장소로 잇고 있 음, 셋째 태을의 구제신력을 소외된 백성까지도 살리는 치유력으로 연결하고 있 음, 넷째 여성성의 가치와 긍지의 기원이 되는 이미지를 창작해내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는 고소설의 태을 수용이 서사적 기법차원에 머물지 않고, 향유자의 마음을 담아내는 인문화의 방식을 지향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In this paper, 'Taeul' treated in cosmology or religious thoughts is discussed in terms of a literary material. The imagery of Taeul has been changed in the passage of historical time. Considering the process of transition in cosmological and religious aspects, the former Taeul has transformed in three phases: 'the highest divinity→ disaster relief God in the human world→ an amulet'. Religious, especially, in the taoist speculation, the imagery of Taeul has changed from the highest divinity into a personal God and finally into the name of divine drug and an amulet. This explains that Teaul, as and astronomical and cosmic concept, has satisfied the course of formalization throughout the process of the religious deification, and the ensuing concrete and personal imagery required as an object of religious ceremonies. Furthermore, the imagery of deified and personified Teaul has been widened to symbolizing the place of ceremonies and the divine power of the object. Many Korean old novels accepted as a literary material, and the aspect runs thus: First, heaven-previous life forming ontological base of the male character. Second, the linkage place and the name of a guardian amulet. Third, the material contributing the realization of an existence value. Through this we can confirm four facts. First, the philosophical speculation of God and men's correspondence spreaded with Teaul as the center is connected to the imagery of a heroic figure that people want. Second, based on the civilianized thought of Teaul giving birth to Yaneui, the place for memorial services of Teaul is connected to the meeting place of male and female figures. Third, the divine power for poor relief of Taeul is linked to the healing power saving neglected people. Lastly, the imagery making the value and the pride of womanhood is created. It shows that the acceptance of Taeul not only remains in descriptive technique but also aims at humanized method including enjoying readers' minds.

6,900원

6

한국시가의 전통과 <가시리>

김진희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4집 2015.04 pp.20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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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高麗俗謠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중 하나인 <가시리>의 문학적 특성을 한국시가의 전통에 비추어 분석하였다. 고대가요, 향가, 고려가요로 이어 지는 한국시가의 전통 내에서 <가시리>가 공유하는 구조적․律的 특성들에 대해 분석하고, 이러한 특성들이 발현될 수 있었던 외적 맥락으로서 儀式性․演行性 을 고찰하였다. 한국시가는 ‘결핍과 기원’의 내용을 詩化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시리>는 이러 한 한국시가의 전통을 반영한다. 특히 <가시리>는 군더더기 없는 짧은 시형 속에 한국시가의 구조적․정서적 전통을 녹임으로써 간결하면서도 완결된 형식미를 드 러내었다. 또한 이 작품은 한국시가의 전형적인 4행구조를 취하며 동시에 중층적 인 병렬 형식을 갖춤으로써, 리듬면에서도 전통에 기반한 미학을 구현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한국시가의 특성은 儀式性․演行性이라는 한국시가의 외적 맥 락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의성과 닿아 있는 의식성은 ‘결핍과 기원’ 이라는 한국시가의 구조와 관련되어 있고, 의식성에 내포되어 있는 연행성은 한국 시가에 담긴 ‘구조의 리듬’과 연관되어 있다. 이렇듯 의식성과 연행성의 맥락 속에 서 한국시가의 전통은 형성되었고, 그러한 전통을 <가시리>는 잘 구현해 내었다.
This paper interpreted "Gasiri", which is one of the most famous koryo-sokyo, comparing it to the tradition of Korean classical poetry. I analyzed the structural and rhythmical features of the poem, which were found in other Korean classical poems in common. I also considered the context of the Korean classical poems in connection with rituality and performance. The poetic structure of "deficiency and pray", which is typical in Korean classical poetry, influenced "Gasiri". The parallelism of the four verse lines is also embedded in it. "Gasiri" reflected the structural and emotional traditions of Korean classical poetry in its compact form and achieved the formal beauty of simplicity. The structural and rhythmical features of the Korean classical poetry, which this paper analyzed were formed in the context of rituality and performance. The rituality was associated with the structure of "deficiency and pray", and the performance yielded the rhythmical features of the Korean classical poetry, based on the orality and parallelism. "Gasiri" realized the poetic traditions of Korean classical poetry, founded on the context of rituality and performance.

7,600원

7

조선조 중후기 歐陽修 散文의 수용과 영향

金春蘭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4집 2015.04 pp.237-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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歐陽脩의 글은 韓愈․蘇軾․曾鞏의 고문과 함께 ‘韓歐’, ‘歐蘇’, ‘歐曾’ 등으로 불리여 당대나 후세의 중국 문인들에 게뿐 아니라 한국문인들의 문학관과 글쓰기의 전범으로 되여 한문학의 발전을 크게 추진하였다. 조선조 중후기 문인들은 󰡔歐蘇手簡󰡕의 서정성을 발견하고 ‘情’, ‘情懷’, ‘情致’ 등 용어로 글에서 사용하였는 데, 이는 󰡔歐蘇手簡󰡕이 尺牘문학의 단서로 되었음을 말해준다. 한문사대가 張維는 歐陽修의 문학관을 ‘花實 兼備’로 새롭게 표현하였으며, 歐陽修의 刻意潭思하는 창작태도에 동감을 표했다. 金昌協은 歐陽脩 散文의 예 술적 효과로 되는 ‘陰柔’와 ‘風神’ 요인을 분석했으며, 歐陽修 碑誌文의 편장구조와 서사기법을 탐색수용하여 碑誌文이 실용성으로부터 문예성으로 전변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文體는 세상의 汚隆과 관계가 있다는 전통적 관념과 ‘意順’과 ‘辭達’의 문장관을 갖고 있는 正祖는 文體反正을 일으켜 공고한 통치체제를 이루고자 하였으며 문체 혁신을 하여 문풍을 바로 잡은 歐陽修 같은 인물을 갈망하 였다. 문체반정의 결과 歐陽修의 글은 洪奭周, 金邁淳 등 관각문인을 중심으로 하여 문장작법의 準的인 기준이 되었다. 이들은 ‘骨骼’과 ‘風韻’이 뛰어난 글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와 같은 글을 짓자면 반드시 마음 수양을 닦아 도에 가까워지는 것이 관건임을 지적함과 아울러 도의 진실한 내용과 마음의 형상화, 즉 꾸밈이 통일되어 “文道合一”을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글에서는 문장학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의식의 대두와 散文이 시와 대립되는 하나의 장르로 부상하는 시기 를 둘러싸고 조선조 문인들이 歐陽脩 散文의 어떤 요소를 어떻게 수용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는지를 알아 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The prose and poems of ancient poet Ou-Yang Hsiu(歐陽修), together with the literary works of ancient poets HAN Yu(韓愈), Su Shi(蘇軾), Zeng Gong (曾鞏), whose works are known as “HANOU”, “OUSU”, “OUZENG” in short, have been models in terms of literary outlook and literary writing for not only contemporary and later Chinese scholars but also for Korean scholars, this phenomenon has greatly promoted the development of Korean literature. In The Florilegium of the Letters Ou-Yang Hsiu (歐陽修)and Su Shi(蘇軾), the Scholars of the Middle and Latter Joseon Dynasty discovered the lyricism and then started to use words such as “Sentiment (情)”, “Feelings (情懷)”, “Temperament(情致)” in their literary works, which indicates the Florilegium of the Letters Ou-Yang Hsiu (歐陽修)and Su Shi(蘇軾) was the beginning of Epistolary Literature. Jang Yu(張維), of the Joseon Dynasty, one of the four greatest Joseon Scholars in Han Chinese Literature, with a novel look, indicated that the literary outlook of Ou-Yang Hsiu (歐陽修)was expressed in “the representation of both Flowers and Their Fruits”, and expressed his identification with Ou-Yang Hsiu’s composition spirit in the profound contemplation. Kim Changhyeob(金昌協), of the Joseon Dynasty, gave analyses over the artful effect of “Feminine Delicacy (陰柔)” and “Literary Grace (風神)” in the prose of Ou-Yang Hsiu (歐陽修). He studied and took in textual structure and narrative techniques of the epitaphs of Ou-Yang Hsiu (歐陽修), and made significant contribution in converting the practicality of epitaphs into the literariness of epitaphs. Cheong-cho (正祖)in whose traditional thoughts literary style was considered to have much to do with rise and fall of a regime, and in whose literary concept “Coherent Expression(意順)” and “Accurate Wording(辭達)” were given much attention, longed for a character like Ou-Yang Hsiu (歐陽修) who could rectify literary style, in order to realize literary reformation and to establish a solid control system. Literary style rectification has made the prose of Ou-Yang Hsiu (歐陽修) a standard of writing for the Gwangak literary men such as Hong Shijoo (洪奭周)and Kim Maesun(金邁淳). They advocated that words should reflect “Literary Structure(骨骼)” and “Literary Style(風韻)" through constant cultivating moral values and achieving Taoism, and through “Fusion of Literature & Taoism” where there is representation of true content and mindset visualization. In acknowledging the rising consciousness of independency in the article study, focusing on the period when prose and poem began to appear in contradictory style in Joseon Dynasty, this study is to explore how the literary men of Joseon Dynasty took in what element from the prose of Ou-Yang Hsiu (歐陽修)for their own utilization.

8,400원

8

한국 고전문학에서 본 중국 산동과 강남의 체험과 인식

尹柱弼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4집 2015.04 pp.277-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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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대의 한국인이 중국을 직접 경험하는 방식은 제한적이었지만, 역사적 변혁기에 사신이나 난민이 되는 비상한 상황에서는 의외의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본고는 원명 교체기, 명청 교체기, 청제국 통치기에 있어 한국 인의 사행, 포로, 유랑, 표류 등의 체험 문학을 통해 중국 동남방의 강남 지역과 동북방의 산동 및 요동의 체험 과 그에 대한 인식을 비교 고찰했다. 요동은 중국의 동북방 유목민족의 흥기에 따라 한국과 중국이 충돌하거나 때로 연합하는 공간이었다. 산동은 요동이 막힐 때 바닷길로 연결되는 한국과 중국의 소통 공간이었으며, 산동인들은 요동의 관리 혹은 군인으로 서 한국인과 접촉할 계기가 많았고 비교적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에 비해 강남은 늘상 조선인들의 선망적 공간이었다. 청제국의 안정기에는 중국의 남북 지방을 한꺼번에 체험하는 기회를 공식적으로 갖기 어려웠으나 , 제주도에서 표류하여 조선으로 귀환했던 경험을 반영한 표류 문학이 이따금 산출됐다. 그들 표류인들은 ‘이 민족의 난민’[難夷]을 구휼한다는 청제국의 취지에 따라 강남과 산동과 북경 및 요동을 거치면서 중국 각 지역 에 대한 나름의 체험과 인식을 표현하여 조선 후기 지식인사회의 관심을 끌었다. 한국 고전문학에서 산동은 상대적으로 가난하지만 유교 본향이라는 측면에서 관심의 대상이 됐다. 그에 비해 강남문화에 대한 선호와 동경은 편집증적으로 강화되어 나타나기 일쑤였다. 반면에 중국 문학지리학적 선입견 이 조선인의 실제 체험에까지 침투해 들어갔다는 점을 따지는 논쟁적 글도 없지 않았다. 이상과 같은 동국인의 체험과 인식은 근대 이전의 동아시아 문학지리학이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어 보편적 문 화 의식을 드러내 보였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오늘날 동아시아권 현대문명을 구축하기 위한 참고자료로서도 가치가 있다.
The Koreans in traditional times had a narrow way to have first-hand experience of China, but in the period of historical change they had various unexpected ones in the situation of being envoies or refugees. This paper studied Korean comparative conciousness between Chinese Shan-Dong and Jiang-Nan through Korean experiment literatures in which they depicted experiences of envoy, captive, wandering, and drifting in the period of change between Yuan and Ming dynasty or Ming and Ching dynasty. Liao-Dong was a place in which Korea and China came into conflict or combination according to the arise of Nothern nomadic tribes. Also Shan-Dong was a communicative place in which Korean and Chinese were contacted by sea routes as Liao-Dong was blocked, and Shan-Dong people maintained close relaiotnship as became a Shan-Dong’s officer or soldier. On the contrary Jiang-Nan was a enviable place of Choson pepole. Altough they were difficult to have a official opportunity to experience the Southern and Nothern area of China at the same time in the stable period of Ching dynasty, sometimes experiment literature drew Choson literati’s interest, in which reflected the experience of drifting at Cheju-Island, passing the way at Jiang-Nan and Shan-Dong and Beijing and Lio-Dong, finally returnning Choson according to the purpose of Ching dynasty to relieve the ‘Babarian refugees’. In Korean classic literature the relative poverty and Confucian hometown of Shan-Dong were often depicted. While, faver and envy on the Jiang-Nan culture were frequantly represented to reinforce paranoidlly. But it was not unknown for the argumentative writers to dispute how much the literary- geograpical prejudice to infiltrate in the real experiences of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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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조선 후기 대책(對策) 형식의 역사적 추이

이상욱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4집 2015.04 pp.31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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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 시대 과문의 일종인 대책(對策)의 형식에 관한 연구이다. 대책이라는 문체는 본래 왕이 신하에게 현재의 폐단에 대해 해결책을 구할 때 사용한 문체이지만, 과거 시험에 사용되면서 일종의 시험용 문체로 변하게 되는 역사적 과정을 겪는다. 특히 조선에서는 과거 시험 응시자의 저변이 확대되면서, 과거 시험용 문체로서의 대책에 대한 작법이 민간에서 발달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조선 후기로 오면 소위 대책의 정식이 상당히 미세하게 규정되기 시작하였고, 답안들도 점차 천편일률적으로 상투화되던 결과를 낳았다. 조선 후기의 많은 과폐관련 문헌들이 이를 지적하고 있다. 대책 형식에 관한 선행연구에서는 집책(執策)과 전책(殿策)이 구분되어 있다는 점과 대책의 정식이 역사적으로 다른 적용 양상을 보인다는 점을 대책 형식 분석에 충분히 감안하지 않았다. 본고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집책과 전책의 형식적 구분에 근거하여 대책의 구문 형식을 논하고, 대책 정식이 실제 대책문에 적용되는 양상을 역사적으로 검증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조선 과문 형식의 역사적 변화라는 큰 틀의 관심에 대한 하나의 사례로써 이용하고자 한다.
This study aims to elucidate historical development of policy answer writing in the Chosŏn civil examination system. Policy answer writing was, originally used for answering to King's question, who had been looking for effective countermeasures on pending issues of the time. However as this writing form had been adopted in the civil examination, its intrinsic function had changed from suggesting pertinent advices to the ruler to showing answerer's erudition and talent in writing. Increased number of test-takers in the late Chosŏn period, had developed their own form of policy answer writing to cope with various questions. To date former studies on this policy answer writing form have ignored that there were two sorts of writing styles, palace policy answer 殿策 writing and exam policy answer 執策 writing, and that there had been quite historically meaningful changes in the form of writing. This study, accordingly, explores its writing structure of policy answer writing from the historical perspective and discusses its meanings of its historical development as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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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화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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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외시화(場外詩話) (5)

남상호, 詹杭倫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4집 2015.04 pp.349-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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