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rticle

Home

열상고전연구 [Yeol-sang Journal of Classical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열상고전연구회 [Society of Yol-Sang Academy]
  • ISSN
    1738-2734
  • 간기
    격월간
  • 수록기간
    1988~2018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810 DDC 810
제65집 (12건)
No

기획의도

1

4,000원

2

17세기 중반 동북아 국제정세와 조선의 나선정벌

김경록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5집 2018.10 pp.11-51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러시아의 동양진출은 17세기 흑룡강 유역을 중심으로 청나라와 러시아,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통일전쟁에 국가의 역량을 집중하였던 청나라는 모든 병력을 남방의 전선에 투입하였다. 청나라는 가장 안전한 배후지역 으로 인식하였던 동북방에 새로운 러시아세력의 진출에 대해 처음 사소한 지역의 무력충돌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중앙정부는 패전소식을 인지했지만, 현 실적으로 남방의 병력을 옮겨 투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동북방의 가용한 병력을 투입하여 대응했다. 또한, 청나라는 첫 전투에서 패전한 이유를 화력의 부재라고 분석하고 가장 근접한 위치에서 조총부대를 보유한 조선에 파병을 강요했다. 청나라의 파병부대 요구를 받은 조선은 당시 국왕이었던 효종의 즉위과정에서 발생한 왜정자문사건을 무마하고, 조선과 청나라의 국제관계를 원활하게 진행시 키기 위해 청나라의 파병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효종은 파병 가능한 병력을 고려하고, 파병부대의 안전을 최대한 확보하고자 최정예 부대를 차출하여 파병했 다. 조선의 정치, 외교, 군사적 목적에 부합하여 파병부대는 큰 승리를 거두고 안 전하게 귀국했다. 이후 지속적으로 러시아군의 국경침입에 대응하여 청나라는 지방군대를 강화하 면서 한편으로 조선에 2차 전투부대의 파병을 요구했다. 청나라는 남쪽 전선에서 저항세력에 대한 정벌전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기 때문에 강력한 부대를 동북 방으로 옮겨 투입할 수 없었다. 조선은 청나라로부터 파병요구를 받고 1차 파병부 대의 승리경험을 바탕으로 2차 파병부대를 구성하고 출병시켰다. 조선의 2차 파 병부대는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며, 청나라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조선의 나선정벌은 17세기 중반 동북아 국제정세에 크게 영향을 받아 실시되었 으며, 향후 국제질서에 영향을 주었다. 청나라는 부족한 병력으로 중국에 진입하 여 반항세력을 제압하였으며, 투항한 군대에 대한 통제 및 반란세력의 진압을 위 해 주요 병력을 중요 지점에 배치했다. 청나라는 러시아군의 침입을 계기로 동북 방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가지고 군사통치제도를 정비했으며, 남쪽의 해군세력을 동 북방에 배치하기도 했다. 조선은 나선정벌을 통해 미묘한 갈등관계였던 청나라와 의 관계를 원활한 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이후 조선은 어느 정도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체적인 군사력 강화를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Russia's advance into the East, influenc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Qing and Russia, Joseon and Qing, centering around Heilongjiang River(黑龍江) basin in the 17th century. The Qing Dynasty, which had concentrated its national capabilities on the Chinese reunification war, put all its troops on the Southern Front. The Qing Dynasty was the first small armed conflict in the region to be recognized as the safest backdrop for the advance of new Russian forces in the northeast. However, the central government of the Qing Dynasty recognized the news of the defeat, but because of the fact that it could not transfer the troops from the south, it put the local troops into the northeast. In addition, the Qing Dynasty analyzed the reason for the defeat in the first battle as the absence of the firepower, and forced it to dispatch to the Joseon, which had the rifle unit in the closest position. Upon receiving the request of the Qing troops, Joseon actively accepted the request for dispatch of the Qing to smoothly promote the international relations between Joseon and the Qing, and to dispel the dispute on the whistleblowing that occurred during the king(孝宗)'s ascension. The King of Joseon took into account the troop dispatchable troops and dispatched the most elite troops to secure the maximum security of the dispatched troops. In line with the political, diplomatic and military objectives of Joseon, the dispatched troops returned victoriously and safely. Since then, in response to Russian invasion of the border, the Qing dynasty strengthened the local army, while demanding the Joseon of the second combat unit. The Qing continued to pursue a war of captivity against the insurgents in the southern front, so it was not possible to transfer powerful troops to the northeast. Joseon received a dispatch request from the Qing, and based on the victory experience of the 1st dispatch unit, the 2nd dispatch unit was formed and dispatched. The 2nd dispatched troops of Joseon fought bravely in battle and contributed greatly to the victory of the Qing. The Manchu-Joseon Expeditions to the Amur of Joseon was greatly influenced by the international situation of Northeast Asia in the mid 17th century, and it affected the international order in the future. The Qing entered China with scarce troops and overthrew the rebel forces, and placed major troops at key points in order to control the troops that were deployed and suppress the insurgency. With the invasion of the Russian army, the Qing improved its military rule with a high degree of interest in the northeast and deployed naval forces in the south to the northeast. Chosun was able to transform the relationship with the Qing Dynasty, which was a subtle conflict, through a Manchu-Joseon Expeditions to the Amur into a smooth relationship. Since then, Joseon has been able to escape the interference of Qing and try to strengthen its own military power.

8,700원

3

나선정벌기(羅禪征伐期) 흑룡강(黑龍江) 유역한 소수민족의 삶과 대응 -『다호르故事』를 중심으로-

최원오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5집 2018.10 pp.53-102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본 논문은 17세기 중엽 러-청의 제국적 침탈 전쟁 시기에, 그 격전의 현장인 흑룡강 유역에 거주한 다호르족의 삶과 대응을 고찰한 것이다. 전쟁 당사자인 러 시아, 청의 입장을 연구하고, 또 청의 요청에 의해 원정길에 나선 조선의 입장[나 선정벌(羅禪征伐)]을 연구하는 게 상례겠지만, 그 제국적 침탈 전쟁에 어쩔 수 없이 휘말려야 했던 중국 동북지역 소수민족의 입장도 연구될 필요성이 있다. 이 에 본 논문은 <다호르고사>라는 작품을 대상으로 하여 다호르족의 삶과 대응을 분 석하였다. 분석 결과, <다호르고사>는 충정의 서사, 효행의 서사, 정조의 서사, 인 정의 서사를 중심축으로 하여 구성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 네 개의 서 사는 전쟁담과 가족담이라는 더 큰 서사의 개념으로, 즉 충정의 서사는 전쟁담, 그리고 나머지 세 개의 서사는 가족담으로 포괄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전쟁담을 통해서는 표면적으론 다호르족이 청 정부에 충정을 다한 것처럼 묘사되지만, 실상 은 다호르족이 전통적으로 견지하여 온 민족적 저항정신을 찬양한다. 가족담을 통 해서는 효행(孝行), 정조(貞操)와 의리(義理), 인정(人情) 등 전통적 가치관을 강조한다. 또한 전쟁담은 역사의 관점에서 묘사된다면, 가족담은 문학의 관점에서 기술된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다호르고사>는 기록된 역사를 갖지 못 했던 다호르족의 역사이자 문학으로서의 특성을 갖는다. 한편, <다호르고사>에서 ‘가족적 인간애’는 동족 및 이민족과의 사이에서 형성되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초국적 공간 담론에서 주장되고 있는 보편적 윤리와 맞닿아 있고, 과거 우리의 17 세기 중엽 전쟁문학인 <최척전(崔陟傳)>에서 파악되는 것과 유사한 것이기도 하 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This paper examines the living and correspondence of the Dahor minority who lived in the Heilongjiang River Basin, the site of the war, in the middle of the 17th century Russian-Qing’s imperial overstretch period. It is common to study the positions of Russia and Qing Dynasty, the parties to the war, and to study the position of Joseon(the Conquest to Russia(Nasun, 羅禪)) on the road by the request of the Qing Dynasty. However, there is a need to study the position of minority ethnic groups in northeast China, which had to be forced to engage in the war of Russian-Qing’s imperial overstretch. Therefore I analyze the living and correspondence of the Dahor minority with . As a result of the analysis, it can be seen that is composed of the narrative of loyalty, the narrative of filial piety, the narrative of fidelity, and the narrative of humanity. Also, these four narratives could be encompassed by the concept of a larger narrative of Warfare and Family, that is, the narrative of loyalty is warfare, and the other three narratives are Family Narrative. On the face of Warfare Narrative, although the Dahor are described as having to be loyal to the Qing government, but in reality they praise the spirit of national resistance that the Dahor minority have traditionally held. Through the Family Narrative, the traditional values such as filial piety, filial piety and humanity have been shown to be related to the maintenance and expansion of the family. In that respect, is a historical and narrative materials of the Dahor minority, which had no recorded history. Among these, the family humanitarianism seen in Family Narrative is formed between the same people and with other people. However, this is in line with the universal ethics alleged in today's transnational space discourse, and is also similar to the in the middle of the 17th century.

10,000원

4

나선정벌 신류 장군의 『북정록 北征錄』에 담긴 허저주(赫哲族)의 삶과 문화-헤이룽장성 자무쓰시 아오치춘(佳木斯市 敖其村) 허저주를 중심으로-

문상명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5집 2018.10 pp.103-138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조선인들은 신류장군의 전쟁일기 『북정록(北征錄)』을 통해 새로운 공간과 문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중국 동북부 헤이룽지앙, 쑹화지앙, 우쑤리지앙 일대의 낯선 공간에서 조선의 용병들은 적군 루오차 뿐 아니라 허저, 달알이, 솔룬, 삐아커, 어룬춘 등 이 지역의 소수민족들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북정록』에는 전쟁의 상황 뿐 아니라 이러한 민족들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나선정벌 100여 년 이후, 조선에서 제작한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에 표현된 허전국(虛全國, 허저국)은 당시 조선인들이 그들의 문화를 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조선의 ‘북벌론’이 신류 장군의 『북정록』을 통해 ‘북방인식’으로 전환되는 시대적인 변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강과 함께 살아가는 허저인들의 생활공간은 담비사냥과 초피류 교역, 어렵이라는 특수한 경제활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담비사냥과 어피옷 제작 문화 등을 자랑스러워하며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주로 생산되는 값비싼 담비의 가죽은 러시아와 전쟁을 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담비는 서양 고지도 가운데 한반도를 그린 최초의 한국전도 ≪Royaume de Corée≫의 삽화에도 등장한다. 이것은 당시 한반도의 북부지역까지만 답사했던 서양 선교사가 직접 보고 느꼈던 조선에 대한 인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그들이 보았던 조선은 담비의 나라였다.
When General Shin Ryu went on a second conquest of Russia he wrote 『Bukjeongnok』 Joseon was enable to learn new region's culture. Of those new regions, I considerated the historical geographical culture of Hezhe people, who resided at Heilong River, Songhua River, Wusuli River, which is at the east-northern area of China. Their geographical environment enabled them of unique economic activity, such as sable marten hunting, trading marten species, and fishing. After a century, ‘Hejenguk’ was mentioned in map of ≪Sebukpiayangkyemanliyillam-jido≫. It symbolizes that Joseon people’s awareness spread over east- northern area of China. Korea map ≪Royaume de Corée≫, which the western people made for the first time, shows the illustration of martens. This means that sable marten is an important symbol of the Korea penensula’s northern part, and the western people reconized the Joseon as the country of sable martens.

7,900원

5

러시아 자료로 본 1650년대 흑룡강원정(나선정벌)

계승범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5집 2018.10 pp.139-168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흑룡강원정(나선정벌)을 전하는 사료는 조선 측 자료가 거의 절대적이다. 원정을 주도한 청 측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정의 상대방인 러시아 쪽에서도 적지 않은 자료를 남겼다. 현지 지휘관이 상부에 보고한 패전보고서와 생존자들이 상부기관에서 진술한 신문조서 등이다. 러시아 자료의 분석을 통해 이번에 새롭게 확인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1650년대 흑룡강 유역의 러시아 부대에 대한 상부의 지원은 매우 열악하였다. 이런 상황이 바로 러시아 부대들이 송화강을 따라 남하를 거듭 시도한 주요 이유라 할 수 있다. 둘째, 러시아 병사들이 우수한 개인 화기로 무장한 덕분에 현지인들로부터 모피를 마구 징수할 수 있었지만, 소규모로 움직일 경우에는 현지인들과 충돌이 잦았고 인명 손실도 컸다. 이는 필연적으로 흑룡강 유역 현지와 상부 지휘소 사이의 소통에도 큰 장애였다. 셋째, 2차 원정 때 참패한 스테파노프 휘하 병력의 전사자 수는 220명 정도였다. 넷째, 스테파노프의 패전과 함께 흑룡강 일대의 러시아 병사들은 청에 대한 공포에 휩싸였다. 청의 후속 공세 가능성 및 최고 지휘관 파슈코프의 행방이 묘연한 상황은 그들의 공포감을 배가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물론, 이런 공포심은 청군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상대방을 잘 몰랐기에 나타난 ‘미지의 공포’라 할 수 있다. 다섯째, 2차 교전 당시 러시아 측이 파악한 적군(청군)의 병력 규모는 매우 정확한 편이었고, 청군(연합군)이 파악한 적군(러시아)의 병력 규모도 마찬가지였다. 종합하면, 러시아 자료는 교전 자체보다는 교전을 전후한 상황을 잘 전해준다. 이는 이미 패퇴한 병사들로부터 전투 상황을 일일이 파악하기보다는 전투의 결과 및 그 대응책에 더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던 상부기관의 입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측 자료가 주로 출병 동기, 청과의 관계, 교전 상황 등에 많은 분량을 할애한 것과 대조적이다.
With the Manchu conquest of Ming China in the mid-1600s, Manchuria became a sparsely populated region: the majority of the Manchu population left their homeland and rushed into China. The Qing authority also concentrated all its energy on the military campaigns against Ming loyalists in the south. It was in this situation that new-comers began to infiltrate into northern Manchuria alongside the Amur (Heilung) River. In the early phase of the Manchu-Russian conflicts, the Manchu suffered some successive defeats because they were surpassed in firepower and mobility. In the 1650s, for this reason, the Manchu authority demanded twice that Chosŏn send some troops armed with Korean-type muskets. A variety of Korean sources provide the details of the expeditions from a Korean perspective, while few Chinese sources tell the expeditions. Some Russian sources such as combat reports and survivors’ statements also provide the various activities of the Cossack-Russians as well as the conflicts per se. Yet they were hardly used among scholars so far. Referring to Russian sources, this paper recasts the expeditions from a Russian perspective with emphasis on the Cossack-Russians who survived the battles.

7,000원

6

17세기 중엽 청-러시아의 충돌과 흑룡강 유역의 부족민

이훈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5집 2018.10 pp.169-205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이 논문은 17세기에 청과 러시아가 충돌한 흑룡강 유역에 거주하던 부족민들에 대해 서술하고, 청이 1644년 입관한 후에 만주지역의 북부 변경인 흑룡강 유역의 부족민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여 그들을 팔기의 일부로 조직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러시아의 침입에 있었음을 논한다. 청은 누르하치 통치기인 1616년에 최초로 흑룡강 유역으로 원정한 이래, 홍 타이지 시기에 계속된 원정을 통해 흑룡강 유역을 복속시켜갔다. 17세기 중엽 청은 흑룡강 유역의 부족민을 솔론, 흑룡강의 후르카, 동해의 후르카, 인다훈 타쿠라라 구룬 등으로 구분했다. 러시아는 이들을 다우르, 고굴리, 주체르, 골디, 길약 등으로 분류했다. 러시아는 1649년부터 하바로프의 지휘 하에 흑룡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부족민을 약탈했다. 청은 1652년 우잘라 전투에서 러시아군에 대패한 후에 만주지역 변경에 대한 정책을 새로 수립했다. 청은 후르카 출신의 샤르후다를 닝구타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부족민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닝구타 지휘관의 지위를 기존의 머이런 장긴에서 암반 장긴으로 승격시켜서 독자적이고 효율적인 지휘를 가능하게 했다. 이후 닝구타는 성경과 동등한 지위로 승격되어 부족민의 영역을 관할하는 변경의 중심이 되었으며, 1676년 닝구타장군의 주재지가 길림으로 이동한 후에는 길림의 보조도시로서 對러시아 방어의 역할을 수행했다. 청은 우잘라 전투 이후에 러시아와의 전투를 점차 유리하게 진행해갔다. 그 원인은 청이 부족민과의 관계를 강화하거나, 부족민을 청의 관할을 받는 군대로 조직하거나, 부족민을 이동시켜서 러시아군이 식량과 모피를 약탈할 대상을 없애버리는 등의 다양한 정책이 효과를 낳은 데 있었다. 강희 초기부터 청은 흑룡강 유역의 부족민에 대한 쟁탈전에서 러시아를 누르고 확실한 승기를 잡기 시작했다. 부족민이 청에 복속되는 데 있어 이 지역에 대한 청의 지배력과 군사적 역량이 러시아보다 오래 되었고 강력했던 것이 큰 흡인력으로 작용했지만 경제적인 원인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약탈에 주력했던 러시아와 조공의 명목으로 이루어지는 교역을 통해 부족민의 이익을 보장했던 청 사이에서 부족민은 청을 선택했다. 부족민의 지지를 획득하고 우세한 전투력으로 러시아를 압박한 청은 마침내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흑룡강 유역을 청의 지배영역으로 확보하게 되었다.
This paper explains the movements of the local tribes living in the Amur River basin in the seventeenth century when Qing China and Romanov Russia clashed over the control of this region, and argues that it was the Russian invasion that the tribal people came to put under direct control of the Qing Dynasty. Nurhachi, the founder of the Qing, began to send his troops to the Amur River basin in 1616, and his successor Hong Taiji continued to attack the local tribes and expand his power in this region. The Qing government divided the tribes in the Amur River basin into several groups, such as the Solon, Hūrka of Amur river (Ma. Sahaliyan ula i hūrka), Hūrka of East sea (Ma. Dergi mederi hūrka), Dog Keepers (Ma. Indahūn takūrara golo) and Fiyaka. On the other hand, the Russians called them in different names, such as the Daur, Goguli, Jucher, Goldi and Gilyak. Since 1649, Russia had made its way into the Amur River basin under Khabarov's command and plundered the local tribes. After being defeated by the Russian army in the Battle of Ujala in 1652, the Qing developed a new policy to strengthen its power in Manchuria. It first appointed Šarhuda, a Manchu officer who originally came from the Hurka, as the commander of Ningguta and reinforced its control over the local people. The Qing also promoted the position of Ningguta commander by raising its rank from meiren janggin to amban janggin. By so doing, Ningguta came to have a strategic position, equal to the secondary capital Mukden, and became the military center in Qing Manchurian frontier. Later in 1676 when the headquarter of Ningguta general moved from Ningguta to Girin, Ningguta became a second important city next to Girin. After the Battle of Ujala, Qing troops continued to proceed into the region and eventually defeated the Russian soldiers. There were several reasons for the Qing success in the Amur River basin: the Qing government established relations with the local tribes, strengthened its power and control, and eventually succeeded in transforming local people into Qing banner soldiers or relocating them to different places, by which the Russian lost their target for plundering. From the early years in the Kangxi reign, the Qing political and military power became superior to the Russia’s in the Amur River basin. The economic relations with the local tribes also played a key role during the period when the Qing became dominant in this region. While the Russians largely focused on plundering the tribes and looting animal fur, the Qing provided the local people with trade opportunities in the name of tribute paying, which secured their economic interests. Eventually Qing succeeded in gaining support from the local tribes and pressured Russia with superior military power. The Nerchinsk Treaty in 1689 was an announcement that the Qing finally secured the Amur River basin as its territory.

8,100원

7

1945,6년 동경성 일대의 서사지리-『포효하는 목단강』(윤일산)을 중심으로-

이승수, 황인건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5집 2018.10 pp.207-239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이 논문은 소설 『포효하는 목단강』을 텍스트로 삼아, 1945,6년 중국 흑룡강성 寧安市 渤海鎭(소설에서는 東京城) 일대 지리 공간의 역사 상황과 조선인의 삶을 조명한 글이다. 본 논의에 앞서 ① 윤일산의 행적과 작품 세계, ② 『포효하는 목단강』의 간행과 연구 상황, ③ 1930년대 조선인의 목단강 이주와 1945,6년 동경성 일대의 역사 정황, 세 가지를 예비 검토했다. 5절과 6절은 본론에 해당한다. 인물의 성격과 갈등은 크게 네 개의 유형과 구도로 파악하였다. 소설 속 인물들은 대부분 실존인물이거나, 실존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으며, 전형성이 강하다. 작가는 스스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이 소설을 창작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서사공간은 크게 세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중에서 중요한 곳들은 사건들이 펼쳐지고 전개되는 몇몇 조선인 집거촌이다. 제목에는 ‘목단강’이 드러나 있고, 서사의 중심 장소는 동경성(지금의 발해진)이며, 여러 전투는 철로 연변의 마을들에서 벌어진다. 목단강 · 동경성 · 철로는 각각 이 지역의 자연 · 역사(고대) · 조선인 이주(근대)를 표상한다.
This study focused on the life of the Koreans and the historic situations in the geographical space around Bohai Zhen, Ninganshi, Heilongjiang Sheng (Dongkyengsung in the fiction) in 1945 and 1946 with the fiction “Roaring Mokdangang” as the text. Prior to the analysis, three subjects were examined; ① records on and the works of Yun Ilsan; ② publication of 『Roaring Mokdangang』 and his research; ③ movement of the Koreans to Mokdangang City in 1930s and historic situation around Dongkyengsung in 1945 and 1946. Sections 5 and 6 are the main body. The personalities of characters and their conflicts were identified in four types and structures. The characters in the fiction were mostly real persons or modelled after real persons, and showed very typical tendencies. The author told that he created this fiction on the basis of the socialist realism. The narrative space was classified largely into three types. The important space was several enclaves of the Koreans where the events started and developed. The title of the fiction includes ‘Mokdangang’. The center of the narration is Dongkyengsung(Bohai Zhen at present). Battles occurred in the villages along the railroad. Mokdangang and Dongkyengsung Railways symbolized the nature and history of the areas(ancient times) and the movement of Koreans(modern times) in this area.

7,500원

8

중국 南京圖書館 소장 한국관련 고문헌에 대한 분석

朴現圭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5집 2018.10 pp.241-274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본 논고는 중국 남경도서관에 소장된 한국관련 고문헌을 실물 조사한 뒤 특별히 소개해야 할 책자를 중심으로 분석한 것이다. 남경도서관은 1907년(광서 33)에 양강총독 端方이 세운 강남도서관으로부터 출발했다. 그 후 江蘇省立第一圖書館, 第四中山大學國學圖書館, 江蘇大學圖書館, 中央大學區立國學圖書館, 江蘇省立國學圖書館, (남경)國立中央圖書館 등으로 개명 또는 합병되었다. 1954년 남경도서관으로 개명된 이래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현재 중국 제3의 도서관으로 꼽히고 있다. (남경)국립중앙도서관장 구장본은 현 (대만)국가도서관과 (중국)국가도서관 고적관(북해분관)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남경도서관 소장 한국관련 고문헌의 출처를 보면 청말 4대 장서가인 정씨의 팔천권루, 무창 장서가 범지희의 목서향관, 왕정위정부 시절 진군의 택존서고 등 구장본이 상당수 있다. 한국관련 고문헌 가운데 타도서관에서 없거나 찾아보기 힘든 책자, 동아시아 서적 유통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책자들이 상당수 보인다. 명 만력간본 조선총서 『유헌록』 잔책본, 1914년부터 1916년에 전병훈이 중국 명사들로 받았던 서찰을 모은 『고려전병훈상서각당도서고』는 유일본이다. 『인재선생집』, 『어정규장전운』 등은 청 명인들의 묵기가 적혀 있다. 『고려사』, 『제중신편』 등은 청 명장서가들의 장서인 또는 초록이 보인다. 『통문관지』, 『동국통감』은 청말에 중국대륙으로 흘려 들어왔던 일본 필사본이다. 『조선태조고황제실기』, 『용비어천가』 등은 북경대학 출신 위건공이 1927년에 서울에서 구입한 책자이다.
The article investigated the Korean rare books in Nanjing library of China, and analyzed the results. The Nanjing library originated from the Jiangnan library(江南圖書館) in 1907 (33rd year of the reign of Emperor Guangxu). Later it was renamed or merged as Jiangsu Sengli Diyi library(江蘇省立第一圖書館), Disi Zhongsan University Guoxue library(第四中山大學國學圖書館), Jiangsu SengliGuoxue library(江蘇省立國學圖書館) and (Nanjing) National Library of China(中央圖書館). In 1954 it changed its name as Nanjing library of China. It is regared as one of the top three libraries in China. Among the Korean rare books collected in the Nanjing library of China, there are Ding Baqian juanlou, Muxi xiangguan(木樨香館) of Fan zhixi(范志熙) and Zecun shuku(澤存書庫) of Chenqun(陳群). The collections in the Nanjing library constitutes the ancient Korean literatures owned in the National library of Taiwan and the National libray of China (Beihai annex; the annex of ancient literatures). 『Youxuanlu(輶軒錄)』, written about Joseon, during the reign of Emperor Manli(萬曆), and the 『Gyoryeo jeonbyeonghun sangseogo(高麗全秉薰上書各當道書稿)』 in which Jeon byeonghun(全秉薰) collected letters from Chinese celebrity from 1914 to 1916, are the only books. In 『Injae munjip(忍齋先生集)』 and 『Gyujang jeonok(奎章全韻)』, handwritings of Ching celebrity are written. In 『Gyoryeosa(高麗史)』, 『Jejung sinpyeon(濟衆新編)』, there are ownership stamps and abstracts of famous Ching bookcollectors. The 『Sopa nyeosa sijip(小坡女士詩集)』 of O hyowon(吳孝媛), 『Joseonsa(朝鮮史)』 of Kim gyeongjung(金暻中), 『Tangdo gihaeng(湯島紀行)』 of Gong seonghak(孔聖學), and 『Cheonyu sijip(天游詩集)』 of Park mungyu(朴文逵) are thought to be donated by the authors or the persons concerned. Also there are 『Joseon taejo gaohwangje silgi(朝鮮太祖高皇帝實紀)』 and 『Yongbi eocheonga(龍飛御天歌)』, which Wei jinggong(魏建功) of Peking University bought from Seoul in 1927.

7,600원

9

근대전환기 女訓書에 나타난 烈의 형상과 그 의미

성민경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5집 2018.10 pp.275-318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본고는 근대전환기 女訓書에 나타나는 여성의 ‘烈’의 문제에 대해 탐색해보고자 한다. 근대전환기 여훈서에서 여성의 열행과 정절에 관련된 내용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그 다양성은 전대에 비해 유난한 것이었다. 이것은 여성의 ‘열’을 민족/국가의 도덕적 우월성을 보증하는 특성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전환기 여훈서의 열은 ‘협의의 열’이 중심이 된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을 중심으로 ‘광의의 열’이 다양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렇게 확장된 열의 형상은 (1)복수를 통해 실현되는 烈, (2)하층까지 확산된 烈, (3)忠義와 결합하는 烈로 유형화될 수 있다. 이렇게 확장된 근대전환기 여훈서의 열은 전근대사회에서 여성의 일방적인 희생이었던 ‘열’ 관념에 남성 못지않은 적극성과 공의에 기여하려는 모종의 충성심까지 덧붙여진 형국이다. 이것은 여성차별적인 제도와 관념을 존속시킴으로써 근대화가 여성들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혜택은 배제한 채 여성에게 더욱 무거운 의무만을 짊어지게 하는 것으로, 근대전환기 여훈서 편자들이 가지고 있는 시대적 한계를 노정한다.
This paper aims to explore the problem of 'Yeul(烈)' in Yeo-Hoon-Seo(女訓書) in the modernization period. In the modernization period of Yeo-Hoon-Seo(女訓書), the proportion or diversity of the contents related to the passion and fidelity of women was unfavorable compared to previous generations. This can be attributed to the recognition of women's '烈' as a trait that guarantees the moral superiority of the nation / state. In the modernization period of Yeo-Hoon-Seo(女訓書), the '烈 in the narrow sense' is the center, and the '烈 in a large sense' is arranged in various ways. This enlarged the figure of 烈 (1)烈 realized through revenge, (2)烈 spreading to tthe lower class, (3)烈 that is combined with loyalty and impartiality can be typed in that three ways. The expansion of the modernization period of Yeo-Hoon-Seo(女訓書) is a kind of added loyalty to the '烈' idea, which was a one-sided sacrifice of women in pre-modern society. This is to keep women discriminatory systems and ideas in mind, thereby eliminating the benefits that modernization can bring to women and to bear more heavy duties to women.

9,100원

10

일본 <혹부리영감> 설화의 춤과 제의적 성격-가구라(神樂)와 ‘혹 가면(こぶ面)’을 중심으로-

조은애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5집 2018.10 pp.319-351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한국과 일본의 <혹부리영감> 설화의 가장 큰 차이는 노인의 재능이 춤인가, 노래인가 여부이다. 한일 설화에서 이러한 차이가 왜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논의된 적이 없었다. 본 연구는 한일 <혹부리영감> 설화의 본격적인 비교연구에 앞서, 일본 혹부리영감 설화에서 ‘춤’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하였다. 일본 혹부리영감 설화에서 노인의 춤 모티브는 일본 고유의 제의적 구도가 바탕이 된 것이며, 옆집 노인이 징벌을 받은 것은 예능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인의 춤은 ‘난폭한 신’을 ‘복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변화시키는 진혼적 성격이 있는 가구라(神樂)의 춤과 유사하다. 노인은 ‘나무구멍’이라는 공간과 ‘외따로 사는 예능인’이라는 조건이 있어 신과 교류할 수 있었다. 옆집 노인은 신에게 춤을 바칠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징벌을 받았다. 규슈 지역에서 행해지는 ‘혹 달린 가면을 쓴 민간 가구라’는 춤과 제의적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혹부리영감’ 자료이다.
The most difference between Korea and Japan in the story of “Hokburi- younggam(Kobutorijii)” forktales is dancing and singing. However, there has been no study the reason, of why the difference between dancing and singing. The study considered the meaning of dance in "Kobutorijii" in Japan. The dance's meaning is similar to that of “Kagura” a traditional Japanese ceremony. The kagura's dance that turns a evil god into a good god by dancing. It is represent a good god and to bless people. The disappearance of the old man's hump is similar to the blessing of God. And the tree hole where Old man, meets Oni is Space that he meets the existence of another world or perform rites to god. The old man meets the Oni in the hole of the tree and dances, and the Oni takes off his hump, because it feels better. In contrast the old man next door failed to fulfill his wish because he was not a entertainers. The point of here, It is only the entertainers who can dance to God. It also introduced the Kagura in Kyushu area, which is associated with “Kobutorijii”. This Kagura dances in a mask with a hump. It is a proposal to dance to God and pray for a good harvest in the year. The dance to God and mask with a hump motifs have an important meaning.

7,500원

11

圓通 均如의 賢首 法藏 사상 수용과 응용-敎判論과 法界觀을 중심으로-

고영섭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5집 2018.10 pp.353-389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이 논문은 10세기에 동아시아 불교사상사에서 독자적인 지위와 위상을 확보한 고려 원통 균여(圓通均如, 923~973)의 현수 법장(643~712) 사상 수용과 응용에 대해 교판론과 법계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글이다. 균여는 지엄-법장 이래의 교판론을 수용하면서도 자신의 관점에 맞게 응용하였다. 그는 지엄의 『수현기』에 근거한 수상점(修相漸, 漸敎), 실제돈(實際頓, 頓敎), 궁실원(窮實圓, 圓敎)의 점돈원(漸頓圓) 3교에 있어서 『화엄경』은 돈교와 원교 2교라 하면서도, 법장의 5교판의 돈교까지 포함하여 나머지 4교를 수상점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균여는 『화엄경』을 돈원일승(頓圓一乘)으로 보면서 다시 별교일승(別敎一乘)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고 있다. 균여는 『법화경』의 교상은 시간[時]과 대상[事]에 의거하면 숙교(熟敎)와 돈교에 해당하지만, 뜻[義]에 의거하면 동교(同敎)와 별교에 통한다고 해명하고 있다. 그는 오교판에서 대승원교를 다시 동교와 별교로 나눠볼 때 동교는 별교일승인 화엄의 아래에 있으며, 오교판 중 4교의 위에 있기 때문에 아래의 4교보다는 위에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교는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하여 균여는 화엄원교(華嚴圓敎)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 별교이며 그 별교만이 원교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종래 화엄학자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인 것이다. 균여는 의상의 횡진법계관과 법장의 수진법계관을 원용하면서도 자기의 안목 위에서 이 둘을 아울러 주측법계관(周側法界觀)을 시설하였다. 균여가 근원적 이치와 구체적 사태를 근본(根本)과 지말(枝末)에 대비시키며 설명하는 까닭은 그가 사태[事]보다는 이치[理]를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근본에서 지말로 나아가려는 연기론(緣起論)적 사유와 달리 지말에서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성기론(性起論)적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균여가 근본과 지말을 이치와 사태에 대응시킨 것은 비실체의 실체인 묘유(妙有)를 통해 비실체인 진공(眞空)으로 돌아가는 것을 중시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있다. 균여가 이치와 이치의 무애[理理無碍]에 역점을 두는 반면 법장은 사태와 사태의 무애[事事無碍]를 강조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균여는 의상의 화엄을 전승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의상과 같이 이치를 절대적인 이치[理]로 보면서도 그 이치에 다시 다함[無盡]과 다함이 없는[不盡] 사태를 설정함으로써 이치와 이치의 무애를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균여는 지상 지엄(至相智儼), 602~668)과 현수 법장, 분황 원효(芬皇元曉, 617~686)와 부석 의상(浮石義湘, 625~702) 등의 사상을 원용하고 응용하여 독자적인 교판론과 창의적인 법계관을 수립하였다. 따라서 균여는 의상을 계승하면서 법장을 원용하고 응용한 한국의 독자적 사상가로서 새롭게 자리매김시켜야 할 인물이라 할 수 있다.
This paper examines the ideology of Wontong Gyunyeo, a renowned Buddhist monk in tenth-century eastern Asia, in accepting and applying Hyunsoo Fazang’s ideology, focusing primarily on Gyunyeo’s doctrinal taxonomy and view on dharma dhatu. When Gyunyeo accepted Zhiyan and Fazang’s doctrinal taxonomy, he did so in accord with his own viewpoint. In accepting Zhiyan’s doctrinal taxonomy in the Suhyungi, where doctrines are composed of the three categories of gradual teaching, sudden teaching, and the perfect teaching, Gyunyeo recognized that there actually were only two categories—sudden teaching and the perfect teaching. However, in accepting Fazang’s doctrinal taxonomy, where doctrines are composed of five categories, he put the first four categories, including sudden teaching, into the gradual teaching category. This means that ultimately, Gyunyeo’s take on Huayan Jing was the ideology of two of these, first, the idea of one vehicle, where sudden teaching and the perfect teaching are the same, and second, the idea of a distinct teaching of the one vehicle. According to his doctrinal taxonomy, the Lotus Sutra corresponded to sudden teaching in regard to time and phenomena, but regarding its meaning, it corresponded to two ideologies—first, the same teaching of the one vehicle, and second, a distinct teaching of the one vehicle. In regard to the perfect teaching of Mahayana, which is the highest level of the five categories of Huayan doctrinal taxonomy, Gyunyeo understood that it had two taxonomical characteristics. One was the “same teaching of the one vehicle,” and the other was the “distinct teaching of one vehicle that completely transcends the three-vehicle view.” He thought that the “same teaching” corresponded to one level below the “distinct teaching;” however, it still took a position at the second- highest level compared to the remaining four categories of Huayan doctrinal taxonomy. Therefore, the “distinct teaching of one vehicle” was the highest of the highest, and it was the only perfect teaching for him. This was a unique understanding of doctrinal taxonomy that had never previously existed. In terms of Gyunyeo’s view on dharma dhatu, he viewed it as a combination of both the horizontal and vertical, compared to Uisang’s horizontal view and Fazang’s vertical view. However, his understanding of “principle” and “phenomenon” was that principle was foundational and phenomenon was derivational. This means that his complex view of dharma dhatu took a stance that put more stress on principle than on phenomenon. In this way, we can observe that Gyunyeo put more stress on the “unity of principle and principle” compared to Fazang’s attitude in attaching more importance to the “unity of phenomena and phenomena.” This signifies that Gyunyeo handed down Uisang’s Huayan philosophy rather than Fazang’s. However, we can also note the fact that he comprehensively handed down the philosophies of all the following philosophers and summarized them in accord with his own view: Jisang Zhiyan (至相智儼, 601–668), Hyunsoo Fazang (643–712), Bunhwang Wonhyo (芬皇元曉, 617–686), and Buseok Uisang (浮石義湘, 625–702). That was how his unique doctrinal taxonomy and creative view on dharma dhatu was established. In this sense, we can say that he deserves recognition as a unique philosopher who handed down Uisang’s Huayan philosophy while creatively and uniquely accepting the views of other philosophers, such as Fazang.

8,100원

12

휘보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65집 2018.10 pp.391-407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5,100원

 
페이지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