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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상고전연구 [Yeol-sang Journal of Classical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열상고전연구회 [Society of Yol-Sang Academy]
  • ISSN
    1738-2734
  • 간기
    격월간
  • 수록기간
    1988~2018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810 DDC 810
제59집 (13건)
No

기획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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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원

기획논문 : 수신사 및 조사시찰단 기록의 다양한 면모 탐색을 위하여

3

통신사(通信使)의 전통에서 본 수신사(修信使) 기록의 특성 - 제1차 수신사 기록을 중심으로 -

구지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9집 2017.10 pp.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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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파견된 수신사는 오랜 외교의 공백 후에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근대화를 단행한 일본의 요구와는 달리 조선은 이전 시기 외교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신사의 선발과 파견은 통신사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이들이 관찰한 일본이 이전 시기와 다른 근대화된 모습이었으나 이를 받아들이는 김기수 일행의 태도는 전근대적인 임무에 충실하였다. 이런 태도는 제 1차 수신사 사행록인 『일동기유(日東記游)』, 『창사기행(滄槎紀行)』에서도 보인다. 김기수의 『일동기유』는 사행 이후 고종의 요구에 맞추어 일본 견문을 다시 충실히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전히 통신사 견문록의 전통을 그대로 보여준다. 임금의 명을 받아 관료로서 이전 지식을 축적 찬술하여 지리지로 저술하는 방식은 이후 유길준의『서유견문』까지도 일관되게 보이는 성격이다. 고종과 대면한 연석에서의 질문을 통해, 자세한 기록의 필요성을 느꼈고, 관련 기록의 수집 위에 다시 저술된 것이 『일동기유』라 할 수 있다. 『일동기유』가 작성될 수 있었던 것은 안광묵의 『창사기행』의 존재 때문이었다. 반당으로 참여하였으나 그의 기록은 개인의 여행기가 아니라 김기수를 비롯한 사행원들의 경험이 종합된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사행록이 공동저작으로 인식되었던 예는 능서관, 서기 등을 대동하던 이전 시기 사행에서 지속적으로 보이는 통신사 기록물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전근대적인 인물인 김기수는 일본 사행에서 관습적인 정탐을 행하였으나 일본의 새로운 문물에 대한 자세한 견문을 요구받았다. 이러한 요구를 전통적인 글쓰기 방식인 견문록과 사행일기로 최대한 수용한 것이 제 1차 수신사 기록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사행은 국가의 공식적인 활동이었기 때문에 공적인 여행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해외 견문이 개인으로서 흥미롭고 특별한 경험이라도 국가의 위신을 드러내야 한다. 개인이 기록한 사행 경험의 기록이라도 공적인 효용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The 1876 Chosŏn mission to Japan were a revival of a long diplomatic tradition that had been broken. Despite modern Japan’s demands however, Chosŏn continued to perceive them as an extension of their past diplomatic relationship. The selection and dispatching of the 1876 Chosŏn mission members was also an extension of past practices. Although the modern Japan they surveyed was different than that of the past, the group led by Kim Kisu was faithful to its premodern duties. This mindset is shown in the first records of Chosŏn envoys to Japan since 1876, Record of a Journey to Japan (Iltong kiyu, 日東記游) and Record of an Ocean Raft Journey (Changsa kihaeng, 滄槎紀行). While presumably Kim rewrote Journey to Japan in more detail according to King Kojong’s demands after the mission, it still follows the tradition of travel journals written by Chosŏn envoys to Japan pre-1876. Government officials compiling past knowledge of foreign countries and writing gazetteers under the royal order is a feature that appears consistently even till Yu Kil-chun’s Record of a Journey to the West (Sŏyu kyŏnmun). Journey to Japan is a text that underwent detailed rewriting by Kim after questioning by Kojong and compiling previous related literature on Japan. Journey to Japan could not have been written were it not for An Kwangmuk’s Record of an Ocean Raft Journey. Although An was merely an escort guard, his Record was a synthesis of the experiences of the mission’s members rather than being a personal record. The precedent for mission records being recognized as jointly written works is a feature extending from pre-1876 missions to Japan being accompanied by clerks and secretaries. Although the premodern Kim scouted out Japan during his mission, he was faced with demands for detailed records on Japan’s new institutions. Adapting these demands as much as possible to the traditional writing style of mission records and journals is unique to the records of the first mission to Japan since 1876. As Chosŏn’s missions were public travels recognized as official state activities, individual records by envoys still had to display national dignity even if they described interesting and unique experiences. Thus their writers had to consider their public utility even if they were personal mission records.

6,3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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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信使日記』의 체재와 내용 연구

문순희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9집 2017.10 pp.3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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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修信使日記』의 1차적인 문헌 검토를 목적으로 했다. 방법으로는 『修信使日記』의 이본 현황을 밝힌 후 각각의 수록 내용과 서술체재를 검토하고, 『日東記游』 및 『滄槎紀行』과의 내용 비교를 통해 그 특징을 살펴보았다. 이 작업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로, 『修信使日記』는 『日東記游』에 그 내용이 그대로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단순히 김기수의 공적 일기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근대 수신사 사행록 중에서도 가장 많은 9종의 이본이 확인되었다. 각각의 『修信使日記』는 구성 내용이 다양하고 한 계통의 원본을 필사 전과한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修信使日記』는 단순히 김기수의 공적 기록으로 보기는 어렵다. 둘째로, 『修信使日記』는 일기 형식으로 기록된 공식 문서가 아닌 <修信使日記>라는 일기와 함께 보고서, 서찰, 시 등이 함께 서술된 전통적인 사행록의 서술체재를 갖추고 있었다. 9종의 필사본 중 2종을 제외한 모든 필사본이 일기 외에도 견문록을 비롯한 공적 보고서와 사적 기록인 시와 제문 등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중 4종은 일기와 공식 보고서만을 포함하고 있어, 형식적으로는 전통적인 사행록의 서술체재를 답습하고 있으나, 서술된 내용 중 시나 제문과 같은 사적 기록의 비율은 많지 않았다. 이는 전근대로 이행하는 시대의 이중적인 모습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로, <修信使日記>에 기록된 날짜는 총 9일로 사행 일정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기록 내용에는 특정한 규율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기록한 날짜의 선택 기준 또한 명확하지 않았다. 내용을 살펴본 결과, 공통점을 한 가지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정사 김기수와 일본측 고위관료들의 대화 내용이라는 점이었다. 이러한 내용의 특징을 고려했을 때 본 일기의 내용은 일부분만이 선택적으로 발췌된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가능성은 김기수의 『日東記游』과 안광묵의 『滄槎紀行』의 서술내용과의 비교를 통해 한층 분명해졌다. <修信使日記>는 김기수가 직접 편집한 공적인 기록이 아니라, 처음에 <修信使日記>를 제작한 인물이 사행 관련 기록에서 필요한 정보만을 발췌하여 일기로 구성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내용이 이후 필사되어 전과되었고, 후에 수신사 정사인 김기수가 제작한 것으로 전해진 듯하다.
This paper was written with the purpose of reviewing the primary source literature of Susinsa ilgi (Journal of an Envoy to Japan, 修信使日記). Comparing the extant editions of Susinsa ilgi, Kim Kisu’s Iltong kiyu (Record of a Journey to Japan, 日東記游), and An Kwangmok’s Changsa kihaeng (Record of an Ocean Raft Journey, 滄槎紀行) showed the following differences in their format and content. First, Susinsa ilgi was simply regarded as Kim Kisu’s official journal as it was included in Iltong kiyu. In fact, however, Susinsa ilgi has the greatest number of extant copies among records written by envoys to Japan post-1876, with a total of nine. It is presumed that that even more existed based on the diversity of the copies. Moreover, as each copy differs in format and structure, they were probably copied and passed down from different versions of an original. Thus it is difficult to regard Susinsa ilgi as Kim’s official record. Second, Susinsa ilgi is not written in the style of an official document, but in the format of traditional envoy records which contained a journal, report, letters, and poems. Seven of the nine copies include the official report of a travelogue and personal records such as poems and funeral addresses, in addition to the journal. However, four of these seven had a lower proportion of personal records such as poems and funeral addresses despite stylistically following the format of traditional envoy records and including the journal and official report. This demonstrates an ambiguous and complex picture in the transition from the premodern era. Third, only nine days are recorded in five copies of the Susinsa ilgi, which does not comprise of even half of the journey. However, no specific rules on these records’ contents were discovered, nor is it clear why only certain days were recorded. They do share a common point in recording the conversations between chief envoy Kim Kisu and high-level Japanese officials. When seen in this light, it is highly likely that portions of Susinsa ilgi were specifically excerpted. This becomes even more apparent when comparing Kim’s Susinsa ilgi with An’s Iltong kiyu. To conclude, Susinsa ilgi is not an official record “written” by Kim, but probably first composed as a journal by someone who excerpted the essentials of an envoy record. These contents were then copied and passed down, and later attributed to having been written by Kim Ki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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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 履行期의 형법 -『日本司法省視察記』의 「新律綱領」과「改正律例撮要」를 중심으로-

김동석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9집 2017.10 pp.7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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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嚴世永(1831-1900)이 편찬한 『日本司法省視察記』의 6권에 대한 분석이다. 엄세영은 신사유람단으로 1881년 2월 21일 동래에 도착했고, 4월 10일 일본으로 출항했다. 閏 7월 1일 長崎를 출발하여 조선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 사법경으로 있었던 田中不二(1845-1909)와 사법대보 玉乃世履(1825-1886)를 만나 법전과 자료를 시찰한다. 그리고 돌아와 『문견사건』과 7권의 『일본사법성시찰기』를 정리하여 국왕 고종에게 올린다. 『日本司法省視察記』의 6권에는 『新律綱領』과 『改正律例撮要』를 담고 있다. 이 당시 일본은 江戶 시대의 幕藩法 대신 중국법제의 영향을 받아 1868년 「假刑律」과 1870년 「新律綱領」을 공포하게 된다. 명치 3년인 1870년에는 『新律綱領』을 제정하고, 명치 6년에는 『改正律例』를 制定한다. 본고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司法省視察記」의 제 6권은 바로 엄세영이 『新律綱領』과 『改正律例撮要』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신률강령』은 명나라와 청나라의 형법을 底本으로 삼고 『養老律』과 덕천막부의 형법을 참고하였다. 『改正律例』는 『신률강령』을 대체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보충법령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내용상으로는 『신률강령』과 같았다. 『新律綱領』과 『改正律例』은 근대 신분형법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즉 국가의 명령을 보호하는 신분제도의 통치질서를 유지하려고 하고 있다. 士族과 官吏에게는 예외적으로 너그러운 법을 적용했으며 하급 사람이 상급사람에게 반항을 하면 가중처벌을 받기도 하여 신분이 같지 않으면 법과 형법에도 차이가 있었다. 이 법은 내외 官司員들이 모두 법을 준수해야 했고 臣僚 또한 법을 준수해야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한다. 또한 이 법은 법률 내용을 공포했다는 점에서 이전 막부시대보다는 진일보 한 형법으로 인정받기도 한다. 『新律綱領』은 일본에 전래하고 있던 『養老律』을 참고하였다고 한다. 718년 일본에서는 당나라의 『大寶律令』과 『永徽律令』을 근거로 『양노률령』을 撰修한다. 律과 令, 格, 式을 갖추어 당나라 법률과 유사한 법령을 가지게 된다. 여기에는 妻妾에 대하여 尊卑의 구분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 법에는 五刑과 閏刑, 不應爲, 從重論, 盜賊贓, 枉法贓, 規避에 관한 규정도 두고 있다. 이밖에도 전통관습을 반영하고 있다. 『양노률』은 중국 당나라의 법률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일본 고유의 풍속도 배려했다. 당률에서 동성결혼을 徒刑 2년에 처벌하고 이혼하여 떨어져 살게 하였지만, 일본에서는 이러한 법을 수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본에서는 동성결혼을 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예가 또 있다. 당나라 법률에서는 道士와 여자도사[女冠]의 범죄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경감시켜주어 처벌에 우대가 있었으나 일본에서는 이러한 법률을 모두 제거했다. 여기에 일본은 불교를 숭상하였기 때문에 齋戒할 때에 육식하면 범죄가 되었다. 승녀에 대해서는 특별히 윤형이 있었다. 그리고 전통관습을 반영한 것에는 華士族에 관한 규정이 있다. 화사족은 일본에 있었던 독특한 신분 계급이다. 260개의 藩國의 藩主는 大名 또는 領主라고 불렸는데, 1869년에서 1871년에 걸쳐 명치 정부는 領地 지배권과 領民 통치권을 박탈하고, 중앙집권 체재를 확립한다. 이때 사민평등의 미명아래 신분제도의 개혁을 추진한다. 이런 특정시기 公卿과 藩主인 大名은 華族으로, 武士는 士族으로, 사농공상은 평민으로 편입되었다. 구형법은 시민 자유주의를 기초로 하여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중점을 둔 형법으로 자본계급 성질을 가지는 법전이었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기에는 많은 어려운 점이 있었다. 왜냐하면 1810년 제정된 불란서 법을 모방하여 실행하려고 했지만 일본은 사회 전반적으로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법전과 사회생활의 거리를 좁히지 못해 罪刑法定의 원칙을 지키기 어려워졌다. 그런데 독일 帝政은 일본과 서로 흡사한 점이 있었다. 이후 일본은 1882년 앞으로의 헌법을 독일 헌법을 원본으로 하기로 결정한 후, 1890년 초안을 여러 번 토론을 거치고, 1906년 법률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1907년 회의를 거쳐 통과시킨다. 이후 여러 차례 내용상 수정을 거쳤으며 지금 일본 현대헌법으로 탄생하게 된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determine Ilbon Sabŏpsŏng sich'al ki 日本司法省視察記, Vol. 6 written by Se-yŏng Ŏm 嚴世永 (1831-1900). As a member of Sinsa mission (Sinsa yuramdan 紳士遊覽團), Ŏm arrived in Dongnae 東來 on February 21, 1881, and departed to Japan on April 10. On July 1, he departed from Nagasaki to Chosŏn. In Japan, he examined law books and materials by the aid of Tanaka Fujimaro 田中不二 (1845-1909) and Tamino Seiri 玉乃世履 (1825-1886). After coming back to Chosŏn, he reorganized Munkyŏnagŏn and the Ilbon Sabŏpsŏng sich'al ki and reported them to Kojong 高宗. The Ilbon Sabŏpsŏng sich'al ki, Vol. 6 contains Shinritsu kōryō 新律綱領and Kaitei ritsurei 改正律例. With the effect of the Chinese law fabric, the Japanese government promulgated Karikei ritsu 假刑律 in 1868 and the Shinritsu kōryo in 1870. The government enacted the Shinritsu kōryo in 1870 and the Kaitei ritsurei in 1873. Se-yŏng Ŏm reorganized the Shinritsu kōryo and the Kaitei ritsurei in the Ilbon Sabŏpsŏng sich'al ki, which I am going to investigate in this paper. The Shinritsu kōryo was based on the criminal law of the Ming and Qing dynasties and referred to the Edo bakufu’ criminal law. The contents of the Kaitei ritsurei were same as those of the Shinritsu kōryo and it also contained the supplementary laws of the Shinritsu kōryo. The Shinritsu kōryo and the Kaitei ritsurei differentiated the punishments based on a status system. The more generous punishments were employed to gentries and officials, while the harsher punishments were employed to the despised lower classes. That is, one of the purposes of these laws was to sustain the contemporary ruling system. On the other hand, those laws in modern Japan are also recognized as more progressive criminal laws than the Edo periods in that, regardless of their statuses, all officials had to observe the la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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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조사시찰단의 보고서 작성 방식과 그 의미

윤현숙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9집 2017.10 pp.10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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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881년 조사시찰단이 작성하여 고종에게 제출한 보고서의 특징을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조사시찰단은 암행어사라는 특명사신으로서의 직분으로 비공식 사행에 임했고, 그들의 시찰과 물정탐색(物情探索) 결과는 공식적인 외교활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제한적이고 선별된 정보 외에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보고서로 생산되었다. 또, 1880년 2차 수신사행(3월23일 임명)과 1881년 3차 수신사행(윤7월7일 임명) 사이에 이루어진 이들의 사행은 독립적인 사절단으로서의 소임을 충족하면서 동시에 수신사행의 보완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였고, 조사시찰단의 보고서는 그 결과물로서의 특징을 확보하고 있다. 조사시찰단의 사행 기록은 15세기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행해진 통신사행, 그리고 1876년과 1880년의 수신사행 기록물과 비교하여 근대적인 성격의 보고서 형식으로 작성한 것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사행과 그 보고의 명령자인 고종에게 올리기 위해 작성한 조사시찰단의 기록물을 문견사건류 보고서와 시찰기류 보고서로 구분하여 보면, 그들이 특사로서 수행한 성과를 보고서로 작성한 이유가 더욱 분명해지기도 한다. 본고에서는 조사시찰단이라는 사절단의 특별한 입장과 더불어 그들이 복명서(復命書)로 남긴 자료의 특징 및 의미에 대해 사행록의 전통과 변이, 그리고 보고서에 사용한 용어 등을 근거로 접근해 고찰하였다. 이를 통해, 조사시찰단의 보고서가 당시 상황을 반영하여 그 목적의식이 남달랐다는 점,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내용으로 서술하려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 보고서의 내용이 기존 자료를 취사선택하여 채록(採錄) 내지는 전재한 것이었다는 점, 그리고 근대적인 용어가 다수 사용되었다는 점 등의 구체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This thesis was intended for a examining of the characteristics of reports submitted by the Official Observation Mission in 1881 to King Kojong. The Official Observation Mission was charged with an unofficial mission as a special envoy called a secret emissary, and their inspection and search results were based on concrete and practical data in addition to the limited and selective information obtained through official diplomatic activities. It was produced as a report. Also, between the second Susinsa’s envoy in 1880 and the third Susinsa’s envoy in 1881, their’s envoy was an independent Envoy Group, fulfilled mission and at the same time achieved the goal of complementing the Susinsa’s Envoy. The report of the A has achieved its characteristics as a result the Official Observation Mission. The record of the Official Observation Mission is mostly written in the form of a modern character compared to the record Tonshinsa’s Envoy(Korean Envoy to Japan in Choson Dynasty) in from the 15th century to the early 19th century and the record Susinsa’s Envoy in 1876 and 1880. If the records of the Official Observation Mission are divided into Knowledge incident record type and Inspection record type, it becomes clear why they have written 'report' as their performance as a special envoy. The report was written to be submitted to Kojong who ordered the meandering. In this thesis, a special position of a mission called the Official Observation Mission and the characteristics and meaning of the data they left as a report were examined based on the tradition and variation of records, and the terms used in the report. This allows specific features such as Reflecting on the situation at that time, the sense of purpose was special, showed a positive attitude to describe it in concrete and substantive content, the contents of the report were either ‘채록(採錄)’ or ‘전재(轉載)’ among other materials, and many modern terms are used to be found.

6,900원

일반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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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도일사(東渡日史)』를 통해 본 19세기 말 향촌 지식인의 동아시아 인식

장진엽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9집 2017.10 pp.131-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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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도일사(東渡日史)』는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에 갔을 때 향서기로 수행했던 박상식(朴祥植)이 남긴 사행기록이다. 본고는 『동도일사』의 일기 부분을 중심으로 저자 박상식의 일본 및 동아시아 인식의 양상을 검토함으로써 19세기 말 조선의 향촌 지식인의 세계 인식의 한 특징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동도일사』에 나타나는 저자의 일본 및 동아시아 인식의 특징과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에서 접한 서구문물에 대한 박상식의 반응은 ‘몰이해’에 가까우며, 이는 개화정책이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던 1880년 당시 조선 문인들의 일반적인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또, 박상식은 급변하는 세계정세와 러시아의 위협에 대한 일본 관료들의 주장을 과장된 것으로 치부하면서도 그에 대한 명확한 비판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개항과 국제관계에 대한 동시대 일반 문인들의 막연한 인식을 대표하고 있다. 둘째, 박상식은 수신사행에 참여함으로써 ‘서양(西洋)’의 존재를 비로소 인지하게 되었으며, 이는 일본에 대한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같은 동양인으로서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는 또한 청나라에 ‘중화(中華)’로서의 일정한 역할을 기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인식은 동아시아 세계에 대한 전통적인 화이론적 인식과 개항기의 새로운 인식이 착종되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을 보여준다. 또한 박상식은 개인적으로 만난 중국인과 일본인을 통해 사해동포적 세계상을 접하기도 하였다. 이는 19세기 말 향촌 지식인이 해외 체험을 계기로 새로운 세계관과 조우하고 있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개항기 조정의 요직에 있던 인물들의 세계관을 살펴보는 일이 이 시기 조선의 대외정책의 향방 및 사상적 지형을 파악하는 데 특히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박상식과 같은 일반 문인이 당시의 정세에서 어떠한 인식의 변모를 보이고 있는지 검토하는 작업 역시 당대 조선인들의 전반적인 의식의 변천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본고는 이러한 측면에서 『동도일사』의 가치에 주목한 것으로, 관련 분야의 사료에 대한 폭넓은 검토를 통해 본고의 분석을 보다 구체화할 필요가 있음을 밝혀둔다.
Tongdo ilsa (東渡日史, Record of Travels in Japan) was written by village clerk Pak Sangsik who accompanied the 1880 mission to Japan led by the envoy Kim Hongchip. This paper focuses on the journal portion of Tongdo ilsa to verify the world view of late 19th century Chosŏn provincial intellectuals through examining Pak’s perception of Japan and East Asia. The characteristics and significance of Pak’s perception of Japan and East Asia in Tongdo ilsa are as follows. First, Pak had close to ‘zero comprehension’ of the Western institutions he encountered in Japan, which reflected the general awareness of Chosŏn intellectuals as modernization reforms had not occurred. Moreover, Pak dismissed the opinion of Japanese government officials about the Russian threat and the rapidly changing world order as exaggerated. Despite not presenting a clear criticism of this opinion, this view on the opening of the ports and international relations was widespread among his contemporaries. Second, as Pak first became aware of the existence of the “West” by joining this mission, he came to feel an affinity with Japan as a fellow Asian nation despite his suspicions of them. He also expected Qing to play its presumed role as the “center of civilization,” a hodgepodge view that combined the traditional civilized/barbarian dichotomy of China and peripheral East Asian nations with that of the new awareness brought on by the opening of the ports. The Chinese and Japanese Pak personally met with also exposed him to the ideology that all men are brothers, a new world view to a late 19th century provincial intellectual brought about by overseas travel. It is true that examining the world view of those in important government posts during the open port period is quite important in understanding the directions of Chosŏn foreign policy and the intellectual landscape of this period. However, examining the changes in perception of the circumstances in normal intellectuals such as Pak is helpful for understanding the process of change in the general awareness of Chosŏn people at the time. This paper thus focused on Tongdo ilsa from this angle, and calls for a broader examination of relevant sources for a more concrete analysis.

7,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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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 시조 연구

김준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9집 2017.10 pp.167-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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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표는 심훈의 시조에 대한 인식을 개괄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심훈 시조 연구의 외연을 확장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있다. 심훈에 대한 그간의 연구는 영화 및 소설에 집중한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심훈 시조를 중심으로 논의를 한 선행연구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심훈 시조의 형식적인 완성도를 현재 통용되고 있는 관점으로 평가했다는 점이다. 심훈의 관점이 아니라 현재의 관점으로 형식을 평가한다면, 심훈 시조의 범위가 불분명해진다. 또한 식민지 시기 검열을 피하기 위해 시조를 택했다는 점 또한 선뜻 수긍하기가 어렵다. 이것은 시조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적인 측면 및 수사적인 측면에서 분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강호한정을 주제로 하는 시조도 형식 자체는 다른 내용을 다루고 있는 여타의 시조와 동일하다. 시조 형식이 우회성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 및 내용을 풀어나가는 방식에 있어서 변별점을 갖는 것이다. 또한 일제가 대한제국 지배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 개화기의 신문과 잡지에는 일제에 항거하는 내용을 담은 수많은 시조 작품이 산출되었다. 본고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선행연구의 미진한 부분을 보충하려 한다. 이를 위해서 심훈의 시조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 있는 텍스트를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개하고자 한다. 우선, 심훈이 언제부터 시조를 인식하기 시작했는지부터 검토할 것이다. 심훈이 시조를 창작할 수 있었던 데는 분명한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이는 심훈의 성장 과정을 살펴보면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볼 것이다. 다음으로는 심훈 시조의 형식적 특징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심훈이 생각했던 시조의 형식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서 심훈의 다수의 시 작품 중에서 이에 부합하는 작품은 어떠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다음으로는 심훈 시조의 내용적 특징에 대해 검토할 것이다. 심훈이 시조를 창작함에 있어서 어떤 내용을 담아내고자 했는지에 대해 살펴보는 작업까지 더해진다면, 심훈 시조에 대한 개괄적인 특성을 짚어내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으리라 본다.
The objective of this study is to provide an opportunity of extending an external boundary of Sijo research of Shim, Hoon by generally observing cognition for Shim, Hoon's Sijo. Researches on Shim, Hoon so far have been generally concentrated on film and novel and preceding study that mainly discussed Shim, Hoon Sijo has following problem. Formal completeness of Shim, Hoon Sijo was evaluated based on a currently prevailing perspective. Range of Shim, Hoon Sijo becomes unclear if its form should be evaluated based on a current perspective, not that of Shim, Hoon. In addition, it is hard to readily accept the fact that Sijo was selected in order to avoid censorship under colonial rule because it is required to be analyzed in contents, rhetorical aspect, not an issue of Sijo form. Sijo form of which topic handles Gangho Hanjeong is same as that of other Sijo that handles other contents. Sijo form does not cover detouring nature but it has discriminating point in contents and its solving mode. In addition, in newspapers and magazines during blooming period when Japanese imperialist started to expose an ambition of dominating Daehan Jegook, numerous Sijo works having contents of defying Japanese rule were published. In this study, unsatisfactory part of above mentioned preceding study is intended to be supplemented. For this objective, following contents are intended to be developed based on a text exposing cognition for Shim, Hoon Sijo. First, when Shim, Hoon started to recognize Sijo will be reviewed. A There must have been a clear opportunity for Shim, Hoon in his effort of being able to create Sijo and while observing his growing process, its solution would be explored. As a next step, formal characteristics of Shim, Hoon Sijo will be observed. And what type of Sijo form Shim, Hoon kept in mind and what works of Shim, Hoon among his numerous works could be summarized as acceptable one will be observed. And characteristics of contents of Shim Hoon Sijo will be reviewed as well. If a work of observing on what contents were intended to be contained in creating Sijo by Shim, Hoon should be added, an opportunity of being able to identify general features of Shim, Hoon Sijo would be provi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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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숙영낭자전>의 창극화 도정 연구 - 1937년 2월 조선성악연구회의 공연 사례를 중심으로 -

김남석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9집 2017.10 pp.193-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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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성악연구회는 1937년 2월 <숙영낭자전>의 창극 공연을 시행했다. <숙영낭자전>은 고전소설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작품임에는 틀림없었으나, 판소리 가창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성악연구회는 이 작품의 창극 공연에 도전했고, 그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성과와 한계를 경험했다. 일단 이 작품을 공연하게 된 일차적인 계기는 정정렬과 박록주가 <숙영낭자전>의 판소리 가창에 익숙했고, 그 내용이 당대의 관객이 선호할 만한 사건과 모티프를 함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공연 제작의 입장에서도 <숙영낭자전>의 창극화 과정은 수월한 측면이 있었고, 작품 수용의 측면에서도 <숙영낭자전>의 관극 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더구나 조선성악연구회는 <춘향전>, <심청전>, <흥보전>이라는 전래의 레퍼토리에서 벗어나 신작 레퍼토리를 개발 보급해야 할 입장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숙영낭자전>의 창극화 작업은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본 연구에서는 판소리 <숙영낭자전>(창본과 녹음)을 바탕으로 하고, 고전소설 <숙영낭자전>에 대한 연구 성과와 동양극장 관련 제작 정황을 결부하여 창극 <숙영낭자전>의 실체와 그 특성 그리고 성패의 원인을 찾아보고자 한다.
Choseon folk music theater(Choseonseongakyeonguhoe) performed Sugyeongnangjajeon in the form of Changguek in February 1937. Sugyeongnangjajeon was a popular work in classical novels, but it was not widely known as a Pansori style. However, Choseon folk music theater challenged the Changguek performance of this work and experienced some notable achievements and limitations in the process. The primary reason for this performance was that Jung Jeongryeol and Park Rokju were accustomed to the pansori vocals of Sugyeongnangjajeon and the content of Sugyeongnangjajeon implies motives and events that contemporary audiences would prefer. In other words, the process of converting Sugyeongnangjajeon into Changguek form was easy, and in terms of acceptance of works, Sugyeongnangjajeon was quite attractive. Moreover, Choseon folk music theater had to escape from the traditional repertoire of Story of Chun-Hyang(Chunhyangjeon), Story of Simcheong and Story of Heungbu. And after that, Choseon folk music theater had to develop and disseminate a new repertoire as a substitute for this original repertoire. However, as a result, the conversion of Sugyeongnangjajeon into Changguek form did not succeed. In this study, based on the Pansori Sugyeongnangjajeon(script and recording), the results of the study on the classic novel Sugyeongnangjajeon were related to the related production of Dongyang theater. Therefore, this study tried to present the reality of Sugyeongnangjajeon as Changguek form, its characteristics, and the causes of success and fail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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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孝子傳」의 敍事 構造와 特徵 考察

李聖炯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9집 2017.10 pp.233-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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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海月 黃汝一(1556~1622)이 立傳한 「朱孝子傳」의 敍事 構造와 特徵에 대해서 고찰해 보았다. 海月은 忠孝堂 朱景顏(1536~1614)의 행적이 泯滅될 것을 염려해서 親見한 내용과 傳聞한 내용을 바탕으로 「주효자전」을 입전했다. 「주효자전」은 크게 13가지 행적으로 서술되었고, 논찬부에서는 해월의 직접적인 포폄의식이 표출되어 있다. 「주효자전」의 내용은 서사 구조를 크게 3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1~8번째 행적은 內篇으로 忠孝 中心의 行蹟인데, 忠孝堂의 충효가 일치된 행적을 배치하면서 頑吏의 농간에 대한 세태 고발로 마무리 되는 서사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다음으로 9~13번째 행적은 外篇으로 孝行이 擴張된 行蹟인데, 효행에 기반한 성리학적 수양론의 체계에 따라 관계가 ‘스승→이웃→현령→유배객→강원감사’로 점증되는 구조를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행적은 다시 『小學』의 준행으로 수렴되어, 󰡔소학󰡕이 관계의 확장과 온전한 守身의 근본이 됨을 환기시켰다. 마지막으로 논찬부는 충효와 세태에 대한 논찬인데, 전반부는 변론과 가치 부여이며, 후반부는 세태에 대한 고발과 입전 동기로 구분되었다. 「주효자전」의 특징적인 敍事로는 주제 의식을 부각하기 위해 옴니버스식 서사 구조에 따른 행적의 분리 배치, 非整合性 모티프를 반영한 행적, 對句와 排比句의 효과적 활용 등을 통해서 독자의 흥미와 생동감을 높이는 서사를 보여준다. 따라서 「주효자전」은 性理學的 載道論에 충실하게 교화의 목적성을 추구하면서, 흥미와 생동감을 제고하기 위한 서사가 정치하게 교직된 고전서사문학 작품으로 그 문학적 가치가 있다. 특히 「주효자전」은 해월의 문학관과 屬文 역량을 대표할 수 있는 작품 중의 하나로 판단된다.
In this study, narrative structure and characteristics of 「Joohyojajeon(朱孝子傳)」 narrated by Haewol(海月) Hwang, Yeo-Il(黃汝一, 1556-1622) was considered. Haewol(海月) wrote 「Joohyojajeon(朱孝子傳)」 based on his direct travelogue and hearsay for being concerned about that deeds of Choonghyodang(忠孝堂) Joo, Gyeong-An(朱景顏, 1536~1614) would be extinct. 「Joohyojajeon(朱孝子傳)」 was mainly narrated in 13 deeds and in comment on deeds, direct criticism of Haewol(海月) was expressed. Narrative structure of 「Joohyojajeon(朱孝子傳)」 could be mainly divided into three parts. First, 1~8th deeds were writer's main point based on filial piety showing consistent filial piety deed of Choonghyodang(忠孝堂) and finalized by social accusation against tricky behavior of callous government officers. As a next step, 9~13th deeds were extended filial piety as We-pyeon showing that its relation was gradually increased to 'teacher→neighbor→Hyeon-ryeong→the exiled→Gangwon Gamsa' based on filial piety centered Confucian Sooyang theory(修養論) system. In addition, this deed became a norm of 『Sohak(小學)』 and it was recalled that 『Sohak(小學)』 was a base of relational extension and perfect self-cultivation. Finally, comment on deed was focused on filial piety and social trend and its former half shows pleading, indulgence and the latter half accusation against social trend and writing motivation. As characteristic narration of 「Joohyojajeon(朱孝子傳)」, a narration arousing interest of the readers and vividness were represented through separated arrangement of deed based on omnibus styled narrative structure, deeds reflecting disconformity motif and effective utilization of parallelism and comparison. Therefore, 「Joohyojajeon(朱孝子傳)」 has a literary value as classic narrative works in which a narration for arousing interest and vividness was delicately represented while pursuing finality of reformation by strictly adhering to Confucian Jaedo theory(載道論). In particular, it is considered that 「Joohyojajeon(朱孝子傳)」 would be one of the works that may represent literary view and Sokmoon(屬文) power of Haewol(海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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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창가집(愛唱歌集)』을 통해 본 오키나와의 노래문화와 노래운동

박애경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9집 2017.10 pp.28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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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1960년, 1971년 두 차례에 걸쳐 오키나와 교직원회(沖縄教職員会)에서 펴낸 『애창가집(愛唱歌集)』과 편찬 전후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오키나와의 노래문화와 노래운동을 살펴보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1960년에 발간된 『애창가집』은 미군정 하의 ‘출판물의 허가 포령’에 의해 배포가 금지된 바 있다. 미군정 당국은 회원들의 반발에 직면하자 ‘아동을 대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허가한다’고 하여 전면 금지 방침에서 일부 물러난 듯 보였지만, ‘불허’ 입장을 근본적으로 철회하지는 못하였다. 이 가집은 1965년 포령의 철폐로 비로소 양성화되었다. 두 차례에 걸쳐 간행된 『애창가집』은 이러한 전후 사정 외에, 일본의 사회운동조직과 결합한 ‘우타고에(歌声)’ 운동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말하자면 『애창가집』은 이들이 추구했던 ‘새로운’ 노래의 실체이고, 이를 선별하고, 간행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문화적 실천이자 사회적 연대의 시발점이라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1960년 간행된 『애창가집』 2부 ‘외국민요, 학교 창가’편에 <도라지>가, 1971년 간행된 『애창가집』 2부 ‘친숙한 노래’ 편에 <아리랑>과 <도라지> 두 곡이 조선민요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하고 있다. 이 중 ‘아리랑’은 식민주의의 피해를 직접적으로 입었던 오키나와인과 조선인 간의 연대와 문화적 실천과 결합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형태의 연대는 생활에 뿌리를 둔 문화, 생활 현장에서 불리는 건강한 노래를 지향했던 『애창가집』의 간행 취지와 향후 오키나와 주민들의 노래운동 방향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처럼 사회 각 부분의 실천적 영역과 결합되어 있는 오키나와 노래운동을 『애창가집』을 통해 점검하고, 이것이 지역문화와 결합되는 지점을 모색하려 할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공동체 구성원 간 정서적 소통을 매개하고, 사회적 연대를 위한 의식을 공유하는 노래의 기능이 발휘되는 지점을 주시할 것이다.
This study will look at Okinawa’s lyrical culture and the cultural identity of the Okinawans who gave birth to these verses through the Collection of Popular Odes published by the Okinawa Teachers Association. This 1960 work has a history of being banned by the Act for Publication Approvals under the US military government. The fervent backlash by the Association had the ban slighted adjusted to a partial approval with the condition that the songs are not suitable for children, but the disapproval remained rooted. The two-time published Collection of Popular Odes is noteworthy not only in such context, but also as it was an outcome of a conscious effort to revamp the society by putting forth a new musical culture. In other words, the Collection is the substance of the ‘new’ kind of music these people aspired to; and the selection and publication itself is a significant action taken and a move toward solidarity. This study will also take due note of the introduction of two Korean folk songs - Arirang and Doraji - in the Familiar Odes chapter. The titles are written in katakana, and have Japanese translations of the lyrics. These two verses are testament to the Korean folk songs that traveled to the neighboring Archipelago during the colonial times and the fact that there were Joseon people who remained in Okinawa even after Korean independence in 1945. In particular, Arirang is well worth noting as it brings together solidarity between the two people that colonialism directly touched the lives of, and a sense of cultural activism. Such forms of solidarity is also in line with the objectives of the Collection of Popular Odes and the cause to promote lyrics for more grounded songs that are actually sung by people going about their daily lives. This study will review the Okinawa movement that is combined with various practical areas of our society via the Collection of Popular Odes, and will seek to discover points where this comes together with community culture. This will allow us to appreciate how music functions as a conduit of communication between community members and to share views for greater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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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책 <전운치전>의 위상과 의미 - 신문관 육전소설 및 경판 37장본과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

전상욱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9집 2017.10 pp.31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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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본 교토대에 소장되어 있는 아현 세책 <전운치전>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신문관 육전소설 <전우치전>, 경판 37장본 <전운치전> 등과의 비교를 통해 이본 사이의 관계와 개별 이본의 상대적인 특징을 밝힘으로써, <전우(운)치전> 전체의 이본 구도와 의미를 밝히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 동안 목록으로만 소개되었던 아현 세책 <전우치전>을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단락 차원에서는 아현 세책이 경판 37장본과 관련성이 더 높아보이지만, 행문 차원에서는 신문관본과의 강한 친연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단락 차원에서의 관련성은 신문관본에서 시도된 최남선 의 개작 결과이기 때문에, 결국 아현 세책 <전운치전>은 경판 37장본보다 신문관본과 더 긴밀한 관련이 있는 이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신문관 육전소설 <전우치전>이 경판 37장본 아니라 세책 <전운치전>을 대본으로 형성되었음을 새롭고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육전소설의 대본으로 경판본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세책도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최남선이 의도했던 육전소설 <전우치전>의 개작의 방향을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아현 세책과 경판 37장본과의 비교를 통해서는 세책과 37장본은 직접적인 영향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서로 다른 문장으로 다시쓰기를 한 결과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간행 연도가 50년 이상 차이가 나는 이본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두 이본의 선후관계를 확실하게 규정하는 것은 아니고, 세책과 경판본 사이의 일반적인 관계에 이해를 심화시키는 자료로 삼아 몇 가지 논의를 진행하였다. 마지막으로 이상의 논의를 이어서 앞으로 아현 세책에 대한 일반론, 육전소설에 대한 일반론을 진행함으로써 고소설의 대표적인 상업출판 형태인 세책-경판본-활판본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과제로 남겼다.
This article aimed to concretely introduce the Ahyeon lending book Jeonunchi-jeon held in Kyoto Univ. in Japan, and to establish a relationship between versions and relative characteristics of individual differences through comparison with the 6-coin novel Jeonuchi-jeon published by Sinmunkwan and Gyeonpan 37-leaf Seoul version Jeonunchi-jeon etc. Based on such result, We can understand the composition and meaning of the whole Jeonuchi-jeon versions. In the meantime, Ahyeon lending library book Jeonunchi-jeon was introduced only as a list. But by this article, lending library book Jeonunchi-jeon’s specific sentences were confirmed. Based on the above results, it was newly confirmed that the 6-coin novel Jeonuchi- jeon published by Sinmunkwan was formed by the lending book Jeonunchi-jeon rather than Gyeongpan 37-leaf Seoul version Jeonunchi-jeon. And we could clearly see the direction of adaptation Choi Namseon intended. Finally, through the above discussion, we can advance the general thesis on Ahyeon lending library and 6-coin novel published by Sinmunkwan. We need to have a deeper discussion on the relationship among the three parties, lending library book, Gyeongpan (commercial woodblock print in Seoul) book and typical book. These three type of book is an important commercial publications in Joseon Dynasty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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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보 외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9집 2017.10 pp.343-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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