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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상고전연구 [Yeol-sang Journal of Classical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열상고전연구회 [Society of Yol-Sang Academy]
  • ISSN
    1738-2734
  • 간기
    격월간
  • 수록기간
    1988~2018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810 DDC 810
제28집 (15건)
No

기획논문

1

국왕의 시문과 생활 - 『列聖御製』를 중심으로

김남기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28집 2008.12 pp.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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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세조조부터 고종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列聖御製』를 편찬, 간행하였다.『열성어제』의 편찬은 列聖을 추숭하는 국가의 중대사로 인식되었으며,『열성어제』에는 태조부터 철종까지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국왕이 공적, 사적 영역에서 자신의 뜻과 감회를 피력한 다양한 작품이 실려 있다. 본 논문에서는 선행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열성어제』의 편찬 과정과 체재, 국왕 시문의 주요 내용, 공사의 차원에서 지은 한시 중에서 국왕 생활상과 의식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열성어제』의 편찬 과정과 체재에서는 편찬자와 편찬 및 간행 연도, 판본, 국왕별 시문의 편수 등을 살펴보았고, 국왕 시문의 개관에서는 각 국왕이 지은 시문의 주요 작품과 경향 등을 고찰하였다.『열성어제』에 나타난 국왕의 생활은 먼저 세조의 <射侯御製詩>, 선조 등의『光國志慶錄』, 숙종, 정조, 철종 등이 諸臣들과 창화한 시편을 중심으로 하여 정무 및 군신의 회합 등 공적인 자리에서 지은 살펴보았고, 이어서 단종, 효종, 숙종, 익종 등이 궁중에 머물거나 영월, 심양 등 특정한 공간에 있을 때 자신의 심회를 피력한 작품을 고찰하였다. 국왕이 신료와의 회합과 조종의 칭송 등 공적인 차원에서 지은 작품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의식이 매우 강하였고, 개인적 심회를 토로한 사적인 시편은 국왕으로의 특수성이 일부 있기도 하지만 크게 볼 때 일반 문인의 한시와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The Yeolseongeoje(列聖御製) several times compiled and published in Joseon Dynasty from Sejo(世祖) to Gojong(高宗). The Yeolseongeoje recorded King's literature from Taejo(太祖) to Cheljong(哲宗). For national auspicious occasions, the ruler and the ruled wrote poetries and proses to think over the significance and to congratulate the king. Among the many cantillation poetries and proses, analyzed in this paper are Sahueojesi(射侯御製詩), Kwanggukjikyeongrok(光國志慶錄), Gukjobogam(國朝寶鑑), contemplating the examples and characteristics of the cantillation poetries and proses of the ruler and the ruled. Danjong(端宗), Hyojong(孝宗), Sukjong(肅宗), Ikjong(翼宗) observed the work which expresses the sentiment of the individual in the royal palace or Yongwol and Shenyang etc.

7,800원

2

宣祖와 駙馬의 시문수창 연구

김은정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28집 2008.12 pp.4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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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은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를 향유, 생산하므로 문화사적 관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다. 본고는 군왕 스스로가 문학창작의 주체가 된 경우로서, 宣祖와 여러 駙馬가 酬唱한 詩文을 살펴보았다.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시문 수창은 일정한 문학 집단을 형성하여, 문학적 지향을 공유한다. 선조가 여러 부마와 수창한 시문은 개인적으로 장인과 사위의 시문 수창이면서, 왕실 가족간의 문학 활동 양상을 드러내며, 당시 학계나 문단과 일정한 관계도 보여준다. 선조와 부마의 시문 수창은 세 가지 측면에서 살필 수 있다. 첫째 선조가 자연인으로서의 사위를 위로하고 자신의 내면을 토로한 시편이다. 선조는 부마들의 가정에 일이 있거나 궁궐에 입직하는 경우에 종종 시문을 내렸으며, 이에 화답한 부마들은 그 은혜를 어버이와 자식과 같다고 하였다. 둘째 性理學 공부에 정진할 것을 독려한 시편이다. 선조는 스스로가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었는데, 李滉과 李珥 등의 성리학적 업적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선조가 성리학 공부를 독려한 시편을 부마들에게 내리며 갱화하도록 한 것은 성리학 공부를 통하여 심성을 수양할 것을 당부한 것이다. 셋째 韓文과『史記』를 하사하며 내린 시편이다. 선조가 부마들에게 韓文과『史記』를 하사한 것 역시 당대 조선 문단의 흐름을 반영한다. 당시 조선 문단은 明의 復古理論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史記』학습에 적극적이었다. 한편, 조선문단은 복고주의 이론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韓文의 형식미를 재발견하기 시작하였다. 선조의 부마들 또한 이러한 문단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는데, 선조 역시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겠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선조와 부마의 수창 시문은 궁정 내부에서 이루어졌으나, 그 내용은 궁정 범위를 넘어서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선조가 직접 제작한 시편과 부마들의 화답시를 통해, 임금 스스로가 학계와 문단의 동향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The Royal Family enjoy and produce the highest level of cultures, so is very interested subject of investigation. This paper researched the Cantillation of King SunJo(宣祖) and royal sons-in-law. King SunJo(宣祖) made many poetries and proses his sons-in-law and let cantillate them. The poetries and proses of King SunJo(宣祖) celebrated happy events, consoled the night duty of his sons-in-law. YunSinji(尹新之) and ShinYigSeong(申翊聖), royal sons-in-law of King SunJo(宣祖) represented their thanks and for parental affections. While, the Cantillation of Royal Families reflected academic circles and literary circles of at that time. In the middle Chosun(朝鮮) dynasty, the level of Neo-Confucianism was upgraded by LeeWhang(李滉) and LeeYi(李珥). King SunJo(宣祖) also studied their acheivements, and persuaded his sons-in-law to study in his poetries and proses. While, King SunJo(宣祖) send Shiji(『史記』) and writings of HanYu(韓文) his sons-in-law, persuaded to study them. The literary circles at that time well acquainted with the Reactionism(復古主義) of Ming dynasty, So Shiji(『史記』) was emphasized in the view of "the prose should follow JinHan(秦漢)". But also the Reactionism(復古主義) of Ming dynasty was critical accepted in the middle Chosun(朝鮮) dynasty, so writings of HanYu(韓文) was revalued in the view of the beauty of writing form. King SunJo(宣祖) and royal sons-in-law cantillated in the palace, but reflected academic circles and literary circles in the middle Chosun(朝鮮)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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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궁중문학에 나타난 통치자 연구 -『삼국유사』 소재의 건국신화를 중심으로

김효림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28집 2008.12 pp.8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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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국가에서 왕실문화는 그 시대의 여항문화를 선도하는 고급문화의 정수다. 그 중 여항문학의 양반문학과 평민문학(또는 서민문학)에 대한 연구는 괄목할 만한 업적이 이루어졌으나 궁중문학은 그렇지 못하다. 20세기 중반까지 군주제였던 한국은 궁중 문화가 한류의 초석으로 인식되어 음식과 복식 등 문화적인 면에서 괄목할 만한 연구가 되어오고 있으나 문학에서는 그 성과를 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는 그동안 궁중문학의 범주를 기존에 알려진 몇 가지 작품으로 한정시켰기 때문인 것 같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미 여러 학자들이 제시한 궁중문학의 개념을 정리하여 범주를 확대하였다. 또한『삼국유사』속의 궁중문학을 구분하고,『삼국유사』속 궁중문학에 나타나는 통치자를 연구하였다. 이번 연구의 결과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통치자들의 양상이 시대의 변이에 따라 그 능력이나 통치자로서의 면모가 확대되어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신(神)의 혈통만을 강조하는 정당성에서 벗어나 점점 통치자로서의 현실적인 능력과 자질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시대가 흐르면서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궁에 대한 기록이 후대로 갈수록 더 자세히 묘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봉건사회에서 왕조국가로서 변함에 따라 궁이 왕권강화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건국신화에서 궁에 대한 서술이 증가하는 것은 통치자로서의 권위와 정당성을 널리 알려 왕권강화를 꾀하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궁중문학으로 인정할 수 있는『삼국유사』소재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통치자의 양상에 대하여 연구하고, 후대의 문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 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고급문화를 선호하는 대중들의 뜻에 따라 문화도 점차 고급문화를 수용하여 발전했으며, 문학에서도 그러한 변화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궁중문학의 연구가 다른 문학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구의 영역을 너무 축소하여 논의의 전개상 빈약한 부분이 많았으리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궁중문학연구를『삼국유사』에서 시작하였지만 앞으로는 각 방면의 영역까지 확대하여 연구하도록 하겠다.
Court literature in a dynasty country is the essence of high class culture that leads the Yeohang (middle class) culture. Researches about Yangban (noble class) literature and common people’s literature of Yeohang literature have produced remarkable accomplishments, but researches about court literature have been only a few. Korea was monarchial system until mid 20th century, so court culture was recognized as the basis of Korean Way and many researches about foods and clothes in aspect of culture have been conducted. However, it is not easy to find researches about literature. The reasons seem to be that the category of court literature has been limited to only a few well-known pieces. Therefore, in this research, I expanded the category by rearranging the concept of court literature that has been suggested by many other researchers. Moreover, I categorized court literature in and researched about rulers revealed in the court literatures in . It was found that the rulers in the birth myth of a nation had changed their abilities or aspect as a ruler along the changes of the period through this research. In other words, they escaped from the authenticity that emphasized they had the lineage of god but tried to be appealed with realistic ability and talents as a ruler. Moreover, it was found that the records about court revealed in the birth myth of the nation in became more descriptive in the late period as time had passed. This was because they recognized that the court was an important element to reinforce the royal authority as the society was changed from feudal system to dynasty country. Therefore, they increased descriptions about the court in the birth myth of the nation in order to reinforce the royal power by showing the authority and authenticity as a ruler. I have looked at the ruler pattern in that can be recognized as a court literature and studied about the effect on literature of later periods. As the public favor high class literature, culture also has been developed by adopting high class culture, and such change may be seen in the literature, too. Thus, it can be considered that court literature takes an important role to research about other literatures. However, the research area was too narrow that may have many weak points to process the discussion. Although this research started with the study in to inquire court literature, further researches will cover broader areas.

12,400원

일반논문

4

蓀谷 李達의 學唐에 대한 試考

한계호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28집 2008.12 pp.147-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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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조선 중기 삼당시인의 한사람인 손곡 이달에 대한 점진적인 학당의 과정을 추적하여 보려고 하였다. 손곡 이달은 정사룡에게서 두보를 배웠고 박순의 문하에 드나들면서부터 본격적인 학당을 지향하였다. 그는 當時의 ‘詩必盛唐’이라는 견해에 얽매우지 않고 성당 시인들의 장끼가 들어나는 시체를 중점적으로 학습하면서 심도 있은 학당을 시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당시의 源流라고 할 수 있는 전 시기의 문학총집『文選』(梁, 蕭統) 에 대한 학습을 중시하고 中唐 시기 일가를 이룬 유장경, 위응물에 대하여서도 홀시를 하지 않으면서 훌륭한 시선집을 선정하여 독파함으로써 학당의 폭을 넓혀갔다. 이달의 점진적인 학당의 과정은 다음과 같은 단계를 겪었다. 우선 당나라시기에 유행되던 시체에 대한 擬作을 지으면서 당시의 주제 및 분위기가 자신의 시적 문맥에 겹치도록 하여 당풍에 가까운 시를 창작하려고 하였다. 다음으로 각종 시체 및 시풍 사이의 자유로운 전환을 시도하면서 악부체의 이백 시 <遠別離>를 고체시로 적어본다든가, 두보의 칠언고시 <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에 유사한 내용을 자유분방한 시풍의 <漫浪舞歌>로 엮어보기도 하였다. 또한 왕유의 오언 절구의 <雜詩>와는 풍격과 시체를 달리하여 칠언 절구 <路中憶蓀谷莊示孤竹>를 지어보기도 하였다. 그 다음으로 이달은 시창작에서 唐詩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까지는 전 시기 문학작품에 대한 계승과 학습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후 이달은 전 시기의 문학작품에 대한 點化, 飜案, 換骨의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자체의 독특한 시풍을 형성해갔다. 이달은 唐詩의 ‘말 밖에 그 뜻을 두다(意在言外)’, ‘즐거운 정경으로 슬픔을 써 그 슬픔이 곱절로 되게 하다(以乐景写哀, 一倍增其哀)’ 등등의 작시기교를 원숙하게 사용하면서 당풍의 경지에 이르는 시들을 창작하였다. 총적으로 이달은 학당의 과정에서 넓고도 높은 식견을 보여주면서 갖가지 꽃에서 화분을 채취하여 꿀을 만드는 벌과도 같이 당나라의 문학적성취가 높은 시인들로부터 그 영양분을 섭취하여 나중에는 자신의 독특한 시풍격을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나중에 ‘三唐詩人’ 가운데서도 문학적 역량이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평가를 받게 되었다.
本論文試圖追蹤朝鮮中期三唐詩人之一蓀穀李達的漸進的學唐過程。蓀穀李達曾在湖陰鄭士龍處學過杜詩,後出入樸淳門下時立志要學唐詩。他並不囿於當時‘詩必盛唐’的見解,劃時爲牢,上探唐詩源流-≪文選≫,下逮中唐自成一家的劉長卿、韋應物等人。李達博采名耀於初、盛、中唐的眾家之長。又挑選優秀的唐詩選集予以突破。拓寬視野。李達漸進的學唐過程經過了如下幾個階段。首先以唐朝流行的詩體創作擬作,努力做到使自已的詩和唐詩的主體及氛圍相符。其次,各詩體及詩風之間進行自由轉換出入的練習。他以古體詩<斑竹怨>記錄李白樂府體<遠別離>中的內容,以<漫浪舞歌>自由奔放的詩風, 編寫杜甫七言古詩<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類似的內容。又以區別於王維的五言絕句<雜詩>風格,創作七言絕句子<路中憶蓀穀莊示孤竹>。再其次,李達在詩歌創作中表現出了對唐詩的淵博知識。這時期爲止,李達在“學唐”中相當部分是對前時期文學作品的繼承和學習. 蓀穀李達在對前人詩意的點化、飜案、換骨等繼承與發展過程, 逐步形成了自己獨特的詩風。幷熟練習得了“意在言外”,"以樂景寫哀,一倍增其哀"等作詩技巧,最終脫盡前學的宋詩尚理之風,接近了唐詩意興。綜上所述,李達在‘學唐’的過程中表現出‘識貴高,見貴廣’的特點。李達若蜜蜂曆采百花,自成一種佳味與芳馨,成就了“三唐詩人”之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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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711년 신묘통신사와 아라이 하루세키[新井白石]의 필담을 통한 상호 소통

구지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28집 2008.12 pp.187-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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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통신사 조태억 일행과 일본의 아라이 하쿠세키가 필담을 통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켰는지 과정을 추적하고자 한 것이다. 1711년 신묘통신사는 예외적인 사행에 속하는데, 아라이 하쿠세키가 추진한 빙례개혁, 일본국왕호 사용, 避諱문제 등 이례적인 의례를 행함으로써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는 일본을 문치(文治)의 국가로 새로 세우려는 아라이 하쿠세키의 정치적 이상이 있었고, 그 와중에 통신사는 문치를 실현하는 하나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반면 조선은 일본의 재침략을 경계하는 수준에서 우호를 이어가는 수구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양국의 입장은 여러 차례 만남을 통해 상호소통의 이해와 굴절을 겪었다. 그 과정을 보여주는 필담이 1711년 11월 3일의 필담을 기록한『坐間筆語』와 11월 5일의 필담을 기록한『江關筆談』이다.『坐間筆語』에서는 하쿠세키가 준비한 음악보다는 “중화의 고대문물”이라는 테마가 조선인의 흥미를 끌었다. 하쿠세키는 이 테마를 통해 접근해 일본이 고대부터 문명의 세례를 받은 나라임을 강조한다.『江關筆談』에서는 같은 테마로 대화를 시작하였으나 곧 양쪽의 관심이 분명해진다. 하쿠세키는 일본이 유형의 문물뿐 아니라 중화의 도를 체득한 나라임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조태억 일행의 관심은 일본의 정세를 탐색하는 데 있었다. 필담의 후반부에서는 우회적인 표현을 통해 각자의 정치적 의도를 드러낸다. 조선에서는 일본이 평화를 유지해 갈 의향을 타진하였고, 하쿠세키 쪽에서는 우호의 의지를 표현하면서 양국 대등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에 대해 절대 양보하지 않을 뜻을 보였다. 요컨대 양국의 외교담당자는 소통 과정에서 오해가 있기는 하였어도 서로의 의도를 전달하는 데는 성공하였고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This study examines the diplomatic letters between the group headed by Diplomatic Envoy Jo Tae-eok and Japan’s Arai Hakuseki to explore the process by which each party understood the other and persuaded the other to accept its opinion. The Year 1711 Shinmyo Diplomatic Envoy was sent on an exceptional mission, prompted by the conflicts caused by the unprecedented and protocol-breaking actions implemented by Arai Hakuseki related to such issues as the Bing-rye-gae-hyeok(reform of welcoming ceremonies for diplomatic envoys from Joseon), the use of the Japanese emperor’s title and the naming of the emperor. In the background of this situation was Arai Hakuseki’s political ambition of reconstructing Japan as a nation of civil administration, with the Joseon Diplomatic Envoy to be used as a tool for realizing his goal. On the other side, Joseon took on the conservative position of maintaining a good relationship, at the level of guarding against another invasion by Japan. Through many meetings, the position of each nation was both understood and rejected by the other in mutual communication. The diplomatic letters which show this process are the Jwa-gan-pil-eo(坐間筆語) recorded on November 3, 1711 and the Gang-gwan-pil-dam(江關筆談) recorded on November 5, 1711. In the Jwa-gan-pil-eo, the Joseon side showed more interest in the theme of the “Ancient Civilization of China” than the music prepared by Hakuseki. By approaching through this theme, Hakuseki emphasizes that Japan is a nation that has been blessed by civilization from ancient times. In the Gang-gwan-pil-dam, discussions begin with the same theme, but the interests of both parties become clear. Hakuseki asserted that Japan was a nation that had not only realized material civilization, but also the way (tao) of China. Jo Tae-eok’s entourage, however, was interested in probing Japan’s political situation. In the latter part of the diplomatic letters, the political intentions of each party are circuitously expressed. Joseon gauged Japan’s inclination to maintain peace, while Hakuseki’s side expressed the intention of friendship, but also made it clear that there would be absolutely no concession to anything violating the principle of equality between the two nations. In short, although there were at times misunderstandings in the communication process, the diplomats were successful in conveying their intentions and were able to reach points of agreement.

8,400원

6

家系記錄의 체계와 家乘의 문학성 小考 - 은진 송씨 家『德恩家乘』을 중심으로-

윤현숙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28집 2008.12 pp.227-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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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의 연구대상으로서 가계기록에는 ‘족보’가 있고 족보는 史的인 관심 안에 있었다. 연구의 역사와 추이를 생각했을 때 텍스트의 일반화는 지나치게 고답적이라고 하겠다. 본 연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러한 사고의 定型에 새로운 경향을 일으킬 수 있는 계기의 마련이다. 가계기록의 체계는 보다 더 조직적이며 족보의 영역은 역사의 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특히 ‘家乘’이라는 가계기록의 문학적 조명은 인식의 변화에서 비롯된 가치의 발견이 될 수 있다. 오랜 연구 기간 동안 낯선 텍스트에서 익숙한 문학성이 발견되었지만 연구자의 초점은 의도한 시선을 벗어나지 않았고 새로운 시도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길들지 않은 텍스트에 대한 연구의 단초가 요구되는 바이다. 가계기록에 ‘족보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족보로’ 대표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족보와 함께 가계기록으로서 동질성을 띠면서도 뚜렷한 개별성을 갖는 것이 가승이다. 가계기록의 체계를 조직하는 기록물 대부분은 족보 ‘類’로서 자연스럽게 통합되지만, 가승은 그 틀이 적당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가승이 족보 못지않은 역사성과, 문집만큼의 문학성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승의 특성은 텍스트 간의 비교를 통해 더욱 두드러질 수 있다. 『德恩家乘』은 1835년에 편찬한 은진 송씨 집안의 가승이다. 가승은 작가 연구 등의 일차 자료로 참고하는 단계에서 족보와 함께 자연스럽게 활용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양한 문체를 수록한 텍스트의 특성이 단순한 일차자료 이상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더불어 고전문헌이면서도 현대에 끊이지 않고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은 개별 연구대상으로서 충분한 매력이다.『덕은가승』 역시 이와 같은 요건을 충족하며 역사성 및 문학성의 도출을 분명히 한다.
Family line record includes Genealogical table as a koreanology's object of study and Genealogical table was a matter of historical concern. Text generalization seems to be too highbrow when we consider in terms of history and change of time. The ultimate purpose of this study is a motive preparation which arouses new tendency to thought of this regular type. A family line record system is more systematic and Genealogical table region is not limited to only history form. Especially Ka-Seung, that is Family line record's literary point of view can be discovery of value which is derived from understanding change. Even if familiar character of literature have been discovered for a long period time from unfamiliar text, researchers' point was not against their intentions and they couldn't get a new attempt opportunity. The clues about unfamiliar text are required to study. Family line record includes not only Genealogical table but other things; however, it is apparent that Genealogical table represents Family line record. Ka-Seung has marked individualities and identities at the same time as a Family line record with such a Genealogical table. Family line record system consists of most of the documentaries is integrated into group of Genealogical table naturally but Ka-Seung seems not to be appropriate. That's because Ka-Seung has a history character which is not inferior to Genealogical table and it has character of literature as much as collection. Thus, Ka-Seung's characteristic can be well revealed through comparison among texts. 『德恩家乘』 compiled in 1835 is Ka-Seung of Eun-Jin Song family. Ka-Seung is useful to refer to writer study as a primary material with Genealogical table naturally and not much later it has found out that character of text including various literary style has one or more meanings. Besides although Ka-Seung is humane learning , it is good enough to has been reproduced constantly in modern times as a particular object of study.『德恩家乘』 meets those requirements as well as makes clear it has character of history and literature.

8,200원

7

淵民 李家源先生의 漢文學 咸就過程에 대한 고찰

許捲洙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28집 2008.12 pp.265-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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淵民 李家源(1917-2000)은 근세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한학자, 국문학자, 서예가이다. 그는 대학자일 뿐만 아니라 한문문장과 漢詩를 마음대로 지을 수 있는 한문학 작가였다. 淵民은 駿逸한 자질과 剛毅한 집념으로 6세 때부터 학문에 정진하였다. 가정적으로는 父老들의 정성어린 교육을 받아 家學을 계승하였고, 외가쪽으로는 畏齋 丁泰鎭, 西洲 金思鎭 같은 通儒를 만나 학문의 깊이와 폭을 넓힐 수 있었고, 처가 쪽으로 匯溪 柳建宇으로부터 文學的 修鍊을 받았다. 23세 때 鄕吏에서의 硏學을 종결짓고, 서울로 올라와 5년 동안 당대 우리나라 漢文學界의 最高峰인 山康 卞榮晩, 爲堂 鄭寅普을 從遊하며 새로운 안목을 키웠다. 그리고 中國文學을 전공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漢文學史를 저작한 聖岩 金台俊을 따라 漢文學史 집필의 의지를 세우고 민족의식을 고취받았다. 서울에서 공부하는 동안 晋州의 碩儒 晦峯 河謙鎭을 알게 되었는데, 서신왕복을 통해서 문학의 바른 길을 인도받게 되었다. 서울 明倫專門學校에 재직하면서 四庫全書 등 많은 中國 書籍을 접하게 되어 학문의 깊이와 폭을 더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나중에 우리 나라 최초의 中國文學史인『中國文學思潮史』를 집필하게 되었다. 淵民은 대학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100여 권의 저서와 2500편의 한시와 2000여 편의 漢文文章을 저작해 낸 대학자요, 대문장가, 대시인이다. 그리고 韓國漢文學會, 漢文敎育學會 등 여러 학회나, 退溪學硏究院 등 여러 학술단체를 맡아 운영하면서 후학들을 인도하고 학문할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하였다. 동시에 儒道會總本部 委員長, 陶山書院, 竹樹書院, 深谷書院 등의 원장을 맡아 傳統儒林의 지도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일본의 우리 문화 말살과 해방후의 서양문물의 범람으로 우리 民族의 學問이 인멸되어 가는 시기에 태어나 우리 학문을 정립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淵民의 漢文學은,『韓國漢文學史』,『朝鮮文學史』 집필 등 漢文學을 전반적으로 조감하는 巨視的인 학문과 蛟山, 燕巖 등 참신한 改革派의 학문에 관심이 많았고, 家學으로서 退溪學도 평생 연구하였다. 그의 문장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의 최고 경지에 이른 山康 卞榮晩, 爲堂 鄭寅普, 晦峯 河謙鎭, 碧史 李佑成, 芝薰 趙東卓 같은 분들이 극찬을 했고, 그의 漢詩文集인『淵淵夜思齋文藁』를 읽고, 孔子의 宗孫이며 대만대학 교수인 孔德成, 대만대학 高明 등 여러 대가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Lee Gawon[1917-2000], also known as Yeonmin, was great Sino scholar, Korean literature scholar who stood for our contury. He was not only great scholar, but also writer who could freely write Chinese classic sentences. He was born with excellent talents, and devoted himself to studies from six years old. He has accept best education from his elders of family, in account of this education he could inherit his studies handed down in the family. In addition to that, he was presented with academic guidance from his wife's family and mother's family. From twenty three years old, he had terminated studies in his hometown, and had moved to Seoul. from that time he continued to study at Myunglyun special school, at this period, he had studied classics setting Sangang and Widang as the masters, so his appreciation was amplified. At that time, Sangang and Widang were the best scholars in our country. Yeonmin has met Kimtaejun who majored in Chinese literature and made Yeonmin make up his mind to write Korean classics history. Yeonmin had known great Confucian Hagyumjin by corresponding letters and had been educated the right path of classics study. During study period in Myunglyun special school, Yeonmin had read many Chinese books for instance the Four Collections therefore his study was more deep and wide. Later he had first written Chinese literature history owing to his stock of knowledge in this period. Yeonmin was great scholar and poet who has taught student at university, he had written one hundred sort books, 2500 prose and 2000 poems. Besides, he administered the academic society like Sino literary society of Korea, Sino literature educational society of Korea, had lead younger scholars, had made academic climate. As a leader of Confucian scholars, he has been the chairman of confucian center committee, Dosan classical academy, Juksu classical academy, Simgok classical academy. Yeonmin had been born the period when Korean classical study was robbed by Japan or Western nations, he had contributed much to the settlement and development of traditional study. He had studied Korean classics macroscopically, so he could write The history of Korean classics in Sino, and Korean history of literature. On the other hand, he had studied innovative scholars like Heo gyun, Pakjiwon, also he had studied Taegye's study, because Taegye's study was the study of his family. His prose written in Sino character had received many eulogies from many great scholars no matter what nation he belongs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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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생전(周生傳)>의 사랑, 그 상대적 인식의 서사

김현양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28집 2008.12 pp.32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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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생전(周生傳)>은 ‘상대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서술된 소설 텍스트이다. <주생전>은 ‘주생(周生)과 배도(俳桃)의 사랑’[조건적 사랑]과 ‘주생과 선화(仙花)의 사랑’[진정한 사랑]을 복합적으로 서술하면서, 이 두 사랑을 위계화하지 않고 있다. 조건적인 사랑도 사랑이며 진정한 사랑도 사랑이라는 것이 <주생전>의 상대적인 서술시각이다. ‘주생과 선화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지만 불온한 사랑이다. 이 불온한 사랑은 배도에 의해 대상화되면서 ‘주생과 배도의 사랑’과 대립한다. 이 서사적 대립은 중세적 질서[이념, 제도]와 탈중세적 지향[불온한 욕망] 사이의 대립이기도 한데, 이 과정에서 중세적 질서의 우위를 선언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현실의 지배이념을 상대화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전기(傳奇) 작품인 <곽소옥전(藿小玉傳)>이나 화본(話本) 작품인 <연옥관음(碾玉觀音)>의 서술시각과 다른 면이다. <곽소옥전>에서는 ‘배신’을 비판하며, <연옥관음>에서는 ‘불온한 욕망’을 경계하고 있는데, 이는 현실의 지배이념을 절대화하는 시각이다. <주생전>의 ‘상대적 인식’―그 서술시각은 ‘소설’ 성립의 바탕이 된다. 자아와 세계가 상호 우위에 입각해 대결하는 소설의 서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주체[세계]를 주체로 용납해야 하는데, 이는 ‘상대적 인식’을 바탕으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is a novel text which is described a relative recognition. describes ‘Love of Jusaeng and Sunhwa[True love]’ and ‘Love of Jusaeng and Baedo[Conditional love]’ complex, these two loves does not rank. Also the love which is conditional is love and is a description sight whose is relative also for the true love to be love. ‘The love of Jusaeng and Sunhwa’ is a true love is the love which destroys an order. This love which destroys an order is opposed in compliance with Baedo when becomes the object, from ‘Love of Jusaeng and Baedo’. Like this narrative opposition is an opposition between of medieval order[ideology and system] and post-medieval intention[desire which destroys an order]. From process of narrative opposition, The high position a medieval order does not become declaration and is not exacted. We makes recognize relatively the dominative ideology of actuality. This is a view of narration of or the is visual other aspect. criticizes ‘betrayal’, and is watching the desire which destroys an order. This is viewpoint that absolutely recognize an actual dominant ideology. The relative recognition of is the base that a novel genre comes into being works. The narrative showdown that the self and the world face tightly each other shall permit another subject to the subject so that it is possible. The reason is as this is possible if text base on relative recogn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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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전』 목판본 49장본에 대하여

이윤석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28집 2008.12 pp.355-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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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목판본 49장본『임경업전』은 여러 장의 낙장(落張)과 보각판(補刻板)이 섞여 있어서 최초의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다. 이 연세대본『임경업전』에는 ‘歲庚子孟冬京畿開板’이라는 간기가 있다. ‘歲庚子’에 대해 연구자들은 1780년, 1840년, 1900년 등의 여러 가지 설을 제시했는데, 2002년에 마쯔바라 타카토시(松原孝俊) 교수가 쓰시마(對馬島)에서『임경업전』 필사본을 발견하여 ‘歲庚子’는 1780년으로 확정되었다. 쓰시마에서 발견된『임경업전』 필사본은, 조선어 통역관으로『상서기문(象胥紀聞)』을 쓴 오다 이쿠고로(小田幾五郞)가 연세대본의 초간본을 보고 1799년에 필사해놓은 것이다. 오다가 필사한『임경업전』을 찾아낸 마쯔바라 교수는, 연세대본의 간행 시기가 1780년이므로, 조선에서 한글 방각본소설의 출판은 1780년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를 고소설 연구자들은 대체로 수용하고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연세대본이 방각본이 아닌 관판본(官版本)일 가능성을 얘기했다. 연세대본의 간기에 나오는 ‘京畿開板’의 ‘京畿’가 방각본의 발행소가 아닌 경기감영(京畿監營)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학계에 보고된 방각본 간행소 가운데 ‘京畿’라는 방각본 간행소는 없다. 그리고 경판본 방각본의 간행소는 모두 간행소가 위치한 지역의 동리 이름을 상호로 쓰고 있으므로 ‘京畿’라는 간행소 이름은 일반적인 경판 방각본 간행소의 이름과는 다르다.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한 학계의 논의가 필요하다.
延世大學中央圖書館に所藏されてある木版本49張本『林慶業傳』は、複数の落張と補刻板が混ざってあるため、その最初の姿を捕らえがたい。この延世大本『林慶業傳』には「歲庚子孟冬京畿開板」という刊記が記されている。「歲庚子」について硏究者達は1780年、1840年、1900年等の様々な説を提示してきたが、2002年に松原孝俊敎授が對馬島にて『林慶業傳』の寫本を発見し「歲庚子」は1780年と確定した。對馬島で発見された『林慶業傳』の寫本は、朝鮮語通譯官として『象胥紀聞』を書いた小田幾五郞が延世大本の初刊本を読み、1799年に筆写しておいた物である。小田が筆写した『林慶業傳』を発見した松原教授は延世大本の刊行時期が1780年であることから、朝鮮におけるハングル坊刻本小說の出版は1780年以前から始まったとみるべきだと主張した。そして、この見解は大概の古小說研究者たちに受容されている。筆者は、本稿において延世大本が坊刻本ではなく、官版本である可能性について論じた。延世大本の刊記に見える「京畿開板」の「京畿」が、坊刻本の發行所のことではなく、京畿監營である可能性が大きいためである。これまで學界に報告された坊刻本の刊行所のうち、「京畿」という坊刻本の刊行所はない。そして、京板本の坊刻本の刊行所は皆、刊行所が位置していた地域の村の名を商號として使っていたため、「京畿」という刊行所の名は一般的な京板坊刻本の刊行所のそれとは違うものである。今後、この問題に対する学界の論議が必要とさ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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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소장 <적성의전>필사본과 초기 경판본의 관계

유광수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28집 2008.12 pp.383-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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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글필사본 <적성의전>은 경판본 <적성의전>과 깊은 친연성을 가지고 있는 이본이다. 이 연대본은 현재는 남아 있지 않은 초기 경판본을 모본으로 1861년에 필사한 이본으로 그 이본적 가치가 매우 높다. 경판본 <적성의전> 중 현재 남아 있는 이본은 경판31장본, 경판30장본, 경판23장본, 안성판19장본인데, 改板한 19장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앞선 경판본의 앞부분을 번각하고 뒷부분을 축약한 이본들이다. 가장 앞선 이본인 31장본 역시 ‘번각-축약’의 형태로 되어 있어 경판본 <적성의전>의 온전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특히 축약부분에 오류가 많아 경판본 연구에 어려움이 있다. 연대본과 31장본을 비교한 결과, 연대본이 31장본의 24장까지는 필사시의 사소한 실수를 제외하고는 완벽하게 같고, 25~31장 부분은 연대본이 31장본보다 더 자세히, 더 온전히 서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연대본의 정제성, 분량, 시기 등의 분석을 통해, 결국 연대본은 경판31장본보다 선행했던 경판33장본을 보고 필사한 이본임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연대본의 필사 시기인 1861년 이전에 이미 <적성의전> 33장본이 판각되어 유통되었음도 밝혔다. 본고를 통해 연대본이 경판33장본을 모본으로 필사했음이 밝혀짐에 따라, 앞으로 연대본이 경판 <적성의전> 연구의 중요한 초석이 될 것으로 여겨지며, 완판본과 경판본의 관계, 구활자본과 경판본의 관계, 세책본과 경판본의 관계 등 향후 연구의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This Study is about text transcribed at 1861. That text is in the Library of Yonsei University now. So, this variant was called ‘Yonsei-text’. This text is very important. Because ‘Yonsei-text’ has many relations with xerographic text of published in Seoul. Xerographic text of published in Seoul remains 31-leaf -version, 30-leaf-version, 23-leaf-version, 19-leaf-version. 31-leaf-version is the earliest text found out in present. This text's latter is diminished. So the latter has many mistakes. A comparison ‘Yonsei-text’ and 31-leaf-version makes ours know that ‘Yonsei-text’ is based on 33-leaf-version which is not exist now. So, ‘Yonsei-text’ is very important to know what process influenced on the Xerographic text of published in Seoul and to study on the various variants of . The foregoing study will be investigated on the original text and revealed many various variant's states. So, the foregoing study will make us clear how the readers translated and how the reader enjoyed reading during the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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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容 談論의 推移와 그 傳承의 問題

박경우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28집 2008.12 pp.41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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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처용가와 처용 관련 배경설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진위 분별의 차원이 아니라 담론의 차원으로 이해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대개의 연구자들이『三國遺事』의 처용 관련 기사를 토대로 처용의 성격을 단선적으로 규명하려 했지만, 문집에 나타난 처용의 모습은 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즉, ‘處容’을 龍神으로 보거나 왕의 臣下로 보는 시각, 아니면 한낱 廣大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시각을 처용 관련 배경담에서 찾을 수 있다. 본고에서는 배경담 사이의 간극은 談論의 차이이지 眞僞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전제로 처용 관련 자료들이 ‘처용’을 어떤 층위의 담론에서 형상화하고 있는가를 살폈다.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조 기사를 비롯한 처용 관련 자료들은 크게 세 개의 담론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자료<1>~<6>(처용담론1 : 삼국유사 기록 기준)은 처용의 정체를 용신으로 보고 있어 처용의 신성성이 강조되어 있는 반면, 자료<7>~<14>(처용담론2:『고려사』 <악지> 기록 기준)에서는 처용이 왕의 성덕을 찬양하는 모습이 강조되어 신하로서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자료<15>~<23>(처용담론3)는 용신, 신하로서의 모습을 포괄하며 처용놀이의 연희자로서의 모습이 병렬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처용 담론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변이는 향가가 하나의 노랫말을 기준으로 전승, 창작(한역)된 것이 아니라 담론이라는 거시적 향가를 기반으로 전승, 변이되었음을 시사한다. 처음 지방신(용신)으로 출발했던 처용의 성격이 궁중악의 연희자로 바뀌면서 그 배경 설화의 초점도 처용의 덕을 찬양하는 것보다는 왕의 성덕을 찬양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고려조와 조선조의 자료 공히 처용의 3가지 모습(용신, 신하, 연희자)을 담고 있다. 애초부터 처용 담론은 하나의 기준점을 제공하지 않고 다양한 변이를 허용하면서 새로운 해석과 변용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처용의 전승이 앞으로 계속 이어지기 위해서는 현대적 변화가 인정되어야 한다. 처용가, 처용배경담을 현대시, 소설, 연극 등으로 새롭게 구성한 작품들이 많이 있지만 이에 대한 연구나 비평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다. 현전하는 처용가, 처용배경담은 원형 보존의 방식으로 전승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 변화를 수반하며 그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 현대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새로운 처용의 모습을 창작해 나가고 이를 연구하는 것이 처용의 현대적 계승의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In this study, I insist that we should interpret the background story about CheYoung(處容) and CheYoungGA(處容歌) on the dimension of discourse rather than on the dimension of discriminating truth from falsehood. Although not a few researchers have tried to explain the characteristic of CheYoung(處容) in one direction in according to the context of SamGukYuSa(『三國遺事』), CheYoung written in a collection of works(文集) of Chosun appears in various images. In this thesis I examined 23 materials related to the background story about CheYoung(處容). They were considerably chosen from some of historic material and artistic material. Through analyzing 23 materials(related to CheYoung), I could come to a conclusion that there are 3 views(horizons) about CheYoung(處容) that could be recognized as the Sea God, A faithful retainer(臣下) and A performer(廣大). This conclusion means that there exist some gaps among stories(23 material). I present what kind of horizon the image of CheYoung(處容) has been made upon, now that this kind of gap should be understood on the dimension of discourse rather than on the dimension of discriminating truth from falsehood. All the materials related to CheYoung(處容) including SamGukYuSa(『三國遺事』<處容郞 望海寺>) record could be divided in 3 groups. In materials <1>-<6>(Discourse of CheYoung 1 : Analyzed based on SamGukYuSa<三國遺事> record), CheYoung(處容) was identified as the Sea God. All the story of that material is focused on the divinity of CheYoung. On the other hand, In materials <7>-<14>(Discourse of CheYoung 2 : Analyzed based on <高麗史> record), CheYoung was identified as a subject in the nation. All the story of that material is focused on CheYoung‘s praising his King. In materials <15>-<23>(Discourse of CheYoung3), CheYoung(處容) was identified as a clown including the aspects of the Sea God and a subject. These various changes in discourse of CheYoung(處容) indicate that HyangGa(鄕歌) had been transmitted and changed not only based upon a HyangGa(鄕歌) lyrics but also based on the macroscopic HyangGa(鄕歌), which is actually a discourse of CheYoung(處容). In an early stage, the character of CheYoung(處容) was the Sea God. Later its character had been changed into a clown who performs in the Royal Court. Therefore, the focus of the background story had been transferred from praising CheYoung(處容)'s virtue to praising king's virtue. Materials from both Koryo(高麗) dynasty and Chosun(朝鮮) dynasty contains 3 horizons of CheYoung(處容)'s character in common. From the beginning the discourse of CheYoung(處容) had not persisted one criterion but permitted various changes, and had tried a variety of interpretations. In order to go on the transmission of CheYoung(處容), we have to admit its changing in modern days. There have been a lot of works which was reconstructed in modern poem, novel and drama etc. Nevertheless, there has been little interest on researching them. CheYoungGa(處容歌) and its background story have been handed down till now and have survived not in the way of preservation but in the way of letting it change continuously swimming with the current of the times. I think that it is the reasonable researching direction on CheYoung to create a new CheYoung character meeting the needs of the current society and taking it to our research for CheYoung's modern inherit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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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三國遺事』에 나타난 聖顯으로서의 돌[石]

이강엽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28집 2008.12 pp.451-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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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三國遺事』에 나타나는 聖顯 가운데, 돌에 집중하여 그 양상과 의미를 분석하였다. 돌은 그 영속성이나 견고함 때문에 자체적으로도 신성시되는 데다가 신성한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성스러움이 새롭게 부각되기도 하는데,『삼국유사』는 그 둘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텍스트이다. 첫째, 聖石의 조건과 聖顯의 양상에 대해 살폈다. 성석의 조건은 외형상의 특성과 성현이 되는 이유로 나누어 분석했는데, 돌이 성스러움을 갖게 되는 이유는 돌 자체의 속성에 연관한 경우와 그 돌이 신령스러운 존재와 관계를 맺기 때문에 신성하게 여겨지는 경우로 나뉘었다. 둘째, 상황 맥락에서 성현의 의미를 살폈다. 성현은『삼국유사』의 한 조목 내에서의 맥락뿐만 아니라, 그 조목이 담긴 역사적 맥락, 그리고 자료가 서술된 고려 후기의 상황에서의 맥락 등에 따라 다각도로 읽힐 수 있다. 먼저 자료가 속한 조목 내의 전후 맥락에 따라, 다음으로 그 설화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맥락에 따라, 끝으로『삼국유사』가 서술된 고려후기의 사회문화적 맥락에 따라 최초의 聖顯이 생성되었던 시점을 넘어 그 의미가 연장, 확대되는 것이다.
This thesis analyzed the aspect and meaning of a stone among hierophany appearing in The Legend and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First, it looked into the requirement for a holy stone and aspect of hierophany. As for the requirement for a holy stone, it analyzed by dividing its external form and the reason for being a holy stone. There are two reasons for a stone's having holiness; on the whole, it has to do with the attribute of a stone itself and it is regarded as sacred as the stone has a relationship with a divine spirited being. In case of hierophany by the category of the proper attribute, a stone has an element making people consider it to be sacred by showing a marvel with its overwhelming size or its floating on the water. Next, in case of hierophany by the relationship with a sacred being, the stone itself looks very common , but a sacred being does something on it or the strength of a sacred being is soaked into it. Second, this paper took a look at the meaning of hierophany in a situational context. Hierophany could be read differently depending on not only the context in an item of "the Legend and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but also the historical context suggested by the item as well as the hierophany-related context under the situation of the latter period of Goryeo. First, to take a look at an item including data on hierophany, it contained an inevitable reason for becoming a sacred stone depending on the context before and behind. Next, to go into the historical context, it stands out plainly that it is theophany of special authority in relation to the royal prerogative; for example, they tried to seek political stability by bringing a sacred being's special authority into relief by the medium of a stone, they tried to seek political stability, Finally, in the situational context which stated "the Legend and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it is noted that they tried mainly to make a change to encourage pride to confront with foreign power and an emphasis on Buddhist country 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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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통한 사회인식과 문화콘텐츠 - 한국『아기장수설화』와 일본『잇순보시』의 비교연구

김응교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28집 2008.12 pp.487-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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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의 「아기장수설화」와 일본의 「잇순보시[一寸法師]」 를 비교하여. 두 이야기에 나타난 영웅이미지와 정치적 지향성을 살펴본 논문이다. 두 이야기는 16세기 문헌에 나오고 이후에 계속 전승되어 왔으며, 교과서에도 실려온 양국의 대표적인 옛 이야기다. 「아기장수설화」는 남성에게 민족역사를 교육하는 사회입문을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이며, 진보적인 개혁성향을 갖고 있다. 한편 「잇순보시」는 여성의 사회인식을 위해 만들어진 교훈서에 실려 있으며, 우익 보수성향의 이야기임을 볼 수 있었다. 또한 두 이야기 모두 영화, 만화, 게임 등의 문화콘텐츠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를 보고, ‘아기장수 이야기〓진보적 / 잇순보시〓보수 우익적’이라고 이해하고, 이것을 확대 해석하여 ‘한국〓진보 / 일본〓보수 우익’으로 단순하게 판단한다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두 가지 이야기의 비교를 통해, 필자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집단심리, 극히 작은 부분을 비교 설명하고자 했다.
この文章は、韓国の「子供壮士説話」と、日本の「一寸法師」を比較して、2つの物語に出る英雄のイメージと、政治的な指向性を分析した論文である。2つの物語は16世紀の文献に出た以降、ずっと伝承してきたし、教科書にも載せて来た両国の代表的な昔の話である。 「子供壮士説話」は男性に、民族の歴史を教育する社会入門のために作られた物語であり、進歩的な改革志向を持っている。一方、「一寸法師」は、女性の社会認識のために作られた教訓書に載せられており、右翼保守性向の物語であることを見ることができる。また、 2つの物語の映画、アニメ、ゲームなどの文化コンテンツを使って拡大・再生産されている。 しかし、このような比較を見て、「子供壮士説話〓進歩 / 一寸法師〓保守」として判断し、これを拡大解釈して「韓国の〓進歩/日本〓保守右翼」として単純に判断すれば、誤解を招くことができる。 2つの物語の比較によって、筆者は、韓国人と日本人の集団心理、「極めて小さい部分」を比較しようと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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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반기 이야기 음반과 문화콘텐츠

장유정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28집 2008.12 pp.523-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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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일제시대에 발매되었던 이야기 음반 자료의 현황과 DB(data base) 구축 방법, 그리고 이의 활용 방안을 고찰한 것이다. 이제까지 이야기 음반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나 당대 대중문화의 핵심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콘텐츠의 원천 소스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야기 음반의 ‘이야기 창고(story bank)’를 구축하는 것은 크게 자료의 수집 및 정리 단계와 이의 활용 단계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남아 있는 유성기 음반 목록집을 참조하여 이야기 음반 자료의 정보 사항을 정리하고 가급적 모을 수 있는 텍스트를 모두 모아서 입력한다. 또한 남아 있는 이야기 음반의 음원과 이와 관련된 이미지도 수집하고 정리한다. 그리고 인물과 사건을 핵심어로 하여 DB를 설계해서 이야기 창고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 창고는 그 자체로 당시 대중문화의 체험이라는 차원에서 교육, 학습 자료로 이용할 수 있다. 또한 DB화된 이야기 음반은 다양한 문화콘텐츠의 원천 소스로 활용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당시 음반 자료의 곡종명과 실상을 고려하고 문화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여 이야기 음반을 크게 다섯 부문으로 나누었다. 아이들 이야기, 영화, 연극 이야기, 노래 이야기, 슬픈 이야기, 우스운 이야기가 그것이다. 각각은 다른 방식을 적용하여 문화콘텐츠의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아이들 이야기를 동화 등으로 새롭게 각색해서 변용시킬 수 있다면, 영화, 연극 이야기와 슬픈 이야기는 드라마나 영화 등의 소재로 활용할 수 있다. 노래 이야기는 ‘이야기가 있는 노래 콘서트’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공연물로의 변형이 가능하고, 우스운 이야기는 오늘날 코미디의 소스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앞으로 이야기 음반에 대한 관심과 자료 정리가 시급한 과제이다.
This paper considered the situation of the story record files and Data base method and this application plan. So far, the story disc was especially unable to receive the attention. However, the story disc shows the core of the present age popular culture. Moreover, it can use as the well source of the various cultural contents. The story bank build-up of the story record files can divide into the collection of data and arrangement step and application stage. The Bibliographic Information of the story record files is arranged and a text is collected and it inputs. In addition, it collects the sound source and image of the story disc and it organizes. This story bank can use for the education, learning material in the attention at that time. Finally, the data based story disc can use as the well source of the various cultural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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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15

휘보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28집 2008.12 pp.549-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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