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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상고전연구 [Yeol-sang Journal of Classical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열상고전연구회 [Society of Yol-Sang Academy]
  • ISSN
    1738-2734
  • 간기
    격월간
  • 수록기간
    1988~2018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810 DDC 810
제43집 (13건)
No

기획논문 : 산동과 한국 고전문학

2

기획의도

허경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3집 2015.02 pp.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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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원

3

한국고전시화에 나타난 산동문인들에 대한 인식 및 수용 양상 연구

郭美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3집 2015.02 pp.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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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시화에는 중국 문인의 작품에 대한 비평이 다수 수록되었지만 지금까 지 학문적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이 글에서는 한국고전시화에 나타난 산동문인 관 련 기록을 살펴본 기초 상에서 조선 문인들의 산동 문인에 대한 인식과 수용 양상 을 전체적으로 조망해보았다. 한국고전시화에서 산동문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 게 유교문화 전통에 대한 推仰, 文藝에 대한 高評, 문학교류를 통한 시문품평, 여류문인에 대한 인식 등 네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다. 우선, “유교문화 전통에 대한 推仰”에서는 유교문화를 추앙하면서 공자 이후 후 세로 詩道가 무너지게 된 풍조를 비판하였고 공맹의 文道에 대한 후세 문인들의 인식을 다루었다. 다음으로 “文藝에 대한 高評”에서는 조선조 문인들이 산동출신 이백의 시적인 능력과 명성을 추숭하고 그런 것을 시화의 소재로 활용하였음을 확 인하였다. 그 다음으로, “문학교류를 통한 시문품평”에서는 연행길에 이병연이 산 동 문인 위정희로부터 시문 품평을 받았는데 이러한 전통이 한객건연집까지 이 어져서 영향을 미쳤던 점과, 산동출신 왕사정 시의 장단점과 특색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면서 정확한 평가를 부여하였던 조선 문인들의 긍정적인 인식을 규명하였 다. 마지막으로, “여류문인에 대한 시각”에서는 산동출신 女流詞家인 이청조의 문 학적 성취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改嫁한 행위에 대해서는 失節이라고 혹 평하였던 측면을 확인하였으며, 유가적 질서와 남성의 문학경험에 기초를 두고 유 교문화의 발상지인 중국 문인들보다 훨씬 더 폐쇄적인 시선으로 여류문인을 바라 보았던 모습을 살펴보았다. 조선문인들은 한국고전시화에서 산동문인을 바라볼 때 산동의 지역적 특수성을 염두에 두고 품평했던 것이 아니라 중국문학을 거시적인 틀에서 바라보았다. 본고 에서는 산동문인에 의해 창작된 문학이 조선문학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일으켰던 측면을 주목하였다. 조선 문인들의 산동문인에 대한 수용은 크게 仙風과 神韻 등 두가지로 요약된다. 조선의 문인들은 이백의 문학에 암묵적으로 영향을 받아 仙風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신의 작품에 수용하였다. 신운의 수용 에서는 신운론을 성정론과 동등시하여 인식하였던 측면과, 문학창작의 한 전범으 로서 왕사정의 신운론을 추앙하면서 자기들의 창작에 실천하였던 모습을 확인하였다.
Many literary reviews on Chinese litterateurs' literary works are included in “Classical Notes on Poets and Poetry of Korea”, which don’t receive enough attention until now. This paper will do the research on the Korean litterateur’s understanding and acceptance of the Chinese Shandong litterateurs from macro perspectives. It related to the following four areas: the admiration of Confucian cultural tradition, the high praise of Chinese literature and art, the comments on Chinese poetry in the communication, the evaluation of Chinese poetess. First, it expounds the understanding of Confucius and Mencius by later ages. Second, it confirms Korean litterateurs’ highly praise for Shandong poet Li Bai. Third, it states that Li Bingyuan received a Shandong litterateur – WeiTingxi’s comments on his poem on the road of "Yanxing". And this kind of comments can also be found in the review in "A Collection of Poems by Four Korean Poets of Li Dynasty". Korean litterateurs evaluate the poetry of Wang Zhenzhi objectively, and give his work positive evaluation and affirmation. Finally, Korean litterateurs fully affirmed Li Qingzhao's literary achievement, but excoriate her remarrying as the dishonor behavior. It means Korean litterateurs take Confucianism and the male literary experience as the baseline; and they take more critical judgment on poetess even than the litterateurs of Confucianism cradle - China. Korean litterateurs didn't take the particularity of Shandong area into consideration, when they evaluated the Shandong Litterateur mentioned in "Classical Notes on Poets and Poetry of Korea".They only did the comments in the macroscopical framework of Chinese literature. This paper will focus on the important role that Shandong litterateurs'literary works played in the development of Korean literature. Korean litterateurs'acceptance can be summed up into two aspects: Xian Feng and romantic charm. Korean litterateurs are influenced by Li Bai subtly; they pay attention to Xian Feng and make it their own. During the acceptance of the romantic charm, we can know Korean litterateurs'cognitive view; they equal the theory of romantic charm to the views on Xing and Qing; they take Wang Shizhen's theory of romantic charm as the model of the literary creation, and put it into their own writing.
韩国古典诗话中收录了诸多关于中国文人作品的评论, 但至今仍未得到学 术界的关注。本文试从研究韩国古典诗话中所提及的山东文人相关记载的基 础上, 以宏观的角度来审视朝鲜文人对山东文人的认识与接受情况。韩国古 典诗话中对于山东文人的提及涉及到以下四点, 即对儒家文化传统的推仰、 对文艺的高评、文学交往过程中进行的诗文品评、对于女流诗人的视角。 首先, 在“对儒家文化传统的推仰”里, 批判了随儒家文化之推仰而在孔子后 世中诗道逐日衰落的风潮, 并阐述了后代文人对于孔孟文道的认识。其次, 在 “对文艺的高评”中, 确认了朝鲜时期文人对于山东诗人李白作诗能力与文名 的推崇, 并将其活用为诗话素材。再次, 在“文学交往过程中进行的诗文品评” 里, 阐明了在燕行之路上李秉渊得到山东文人魏廷喜的诗文品评, 而且这种传 统一直延续至“韩客巾衍集”的评价, 朝鲜文人客观理解山东文人王士祯之诗 文的优缺点, 并对其给予积极的评价与充分的肯定。最后, 在“对女流诗人的 视角”中, 确认了朝鲜文人充分肯定山东籍女流词家李清照的文学成就, 而对 其改嫁的行为苛责称“失节”, 由此导出朝鲜文人以儒家秩序与男性文学经验 为基, 比中国这一儒家文化发源地的文人更加苛刻的眼光来看待女流文人的 失节行为。 朝鲜朝的文人评价韩国古典诗话中的山东文人时, 没有考虑到山东地域的 特殊性, 而是在中国文学这一宏观框架下进行了批评, 因此本文着重探究山东 文人所创作的文学作品对朝鲜文学的发展历程中所起到的重要作用。朝鲜文 人对于山东文人文风的接受可概括为仙风与神韵两方面。朝鲜文人潜移默化地受到了李白文学的影响, 从而去 关注仙风并为己用。在神韵的接受过程中, 则可了解到朝鲜文人将神韵论和性情论等同起来的认知观, 将王士祯的神韵 论视为文学创作之典范, 并实践于自身创作中。

9,000원

4

보편과 특수, 중국 산동을 보는 두 시각 - 야담에 투사된 작품을 중심으로-

김준형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3집 2015.02 pp.5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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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한국 고전문학, 그 중에서도 야담을 중심에 두고 산동을 포함한, 중 국을 보는 두 개의 시각에 주목하였다. 두 시각은 보편과 특수로 대별된다. 보편은 중국에 대한 동질적인 감정에서, 특수는 중국에 대한 이질적인 감정에서 나타난 다. 그것은 중국을 보는 기대지평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 정황은 산동 사람들의 사유를 담아낸 요재지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요재지이는 조선에 유입되어 적잖이 읽혔다. 그러나 요재지이에 실린 작품 이 우리나라 작품으로 수용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산동 지방의 특수한 배경을 기초로 하여 창출된 요재지이가 주는 이질적 요소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유만주 가 주목했던 인과응보와 관련된 작품들, 예컨대 <화벽(畵壁)>이나 <종리(鍾梨)> 와 같은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향유되었다. 그것은 예양의 가치를 강조하는 동아시 아의 정서가 작동한 까닭이다. 그러나 지리적 차이에 따른 정서적 차이를 둔 작품 들은 배제되었다. 요재지이에 주된 소재로 활용된 친근한 여우가 우리나라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것은 두 민족이 살아온 지리적 환경과 그에 따라 만들어진 정서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다. 공감과 반발 양상은 산동과 연관을 맺은 인물을 이해하는 시각에도 영향을 미친 다. 신돈복의 학산한언에 실린 명나라에 충성을 다한 임경업을 보는 시각과 중 국에 반기를 들었던 이정기를 보는 시각이 공존한 것도 산동 사람을 바라보는 신 돈복의 두 개의 시각이 공존한 결과라 하겠다.
This paper focuses on point of view the Shandong province in Korean Yadam. Two point of view is Generality and Individuality. Generality emerges from homogeneous feelings. On the other hand, Individuality emerges come from extraneous feelings for China. It is made from the difference between the expectation for China. Those aspects can be found through Liaozhaizhiyi. Liaozhaizhiyi were read a lot in Joseon. But, not many works related to Liaozhaizhiyi in Joseon. It made from the emotional differences between the two nations lived in different environments. Sympathy and repulsion also affects historical figures assessment. ShinDonBog is presenting two character in the Haksanhaneon. One is ImGyeongEob, the other is LeeJeongGi. The former is the person doing yeoman service to the Ming Dynasty, the latter is the person conspire plot treason the Ming Dynasty. This is the result of the coexistence of the two point of view who ShinDonBog understand the Shandong province people.

6,400원

5

『入唐求法巡礼行記』に描かれた在唐新羅人

袴田光康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3집 2015.02 pp.8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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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닌(円仁)은 9세기에 활약한 일본의 승려이다. 그는 불법을 공부하기 위해 당 에 건너가 9년간 체재하였다. 그동안 그는 계혹 여행기를 기록하였는데 그것이 바 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라고 불리는 책이다. 이 책은 당시 재당 신라인들에 대한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그 신라인 들이 엔닌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다는 점이다. 재당 신라인들이 엔닌에게 왜 협조적 이었을까? 그 가장 큰 이유로 재당 신라인들의 리더였던 장보고(張保皐)가 엔닌 을 원조하였던 사실을 들 수 있다. 엔닌은 장보고가 적산(赤山)에 창건한 사원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받아 그곳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나타나는 재당 신라인들은 무역활동을 통해 일본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 었고, 또한 국적과 신분에 얽매이지 않은 집단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들은 엔닌 을 원조하였고 엔닌도 그들에게 깊이 감사하였다. 엔닌의 전기에 의하면 그는 귀 국 후 적산의 신을 위해 절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9세기에 쓰인 엔닌 자신 의 여행기와 10세기에 쓰인 엔닌의 전기 사이에는 확연한 차이가 발견된다. 적산 의 신은 이국(異國)의 신에서 일본의 수호신으로 변용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적산신의 변화는 9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일본에서 외교적, 그리고 문화적 전환 이 발생하였음을 의미한다. 엔닌이 살았던 9세기 이후. 일본은 급속히 자폐성(自 閉性)과 자국주의에 빠져 들기 시작한다. 엔닌과 장보고의 시대는 동아시아적 공 동체의 마지막 번영기가 되었다.
Ennin was a Japanese Buddhist in 9th century. He migrated to the Tang China to learn the Buddhism and stayed there during 9 years. A period of his travel, he kept writing his travel diary called "Ennin's Travels in Tang China ". In this travel book he recorded about Shragi's people who lived in the Tang. Special mention means putting is the case that the Shragi's people did much aid very kindly to Ennin. Why were the Shragi's people so cooperative to him? Because Chang Boko who was a leader of Shragi's people in the Tang supported him. He permitted boarding at Shragi's temple built by Chang in Sekizan and could be helped by Shragi's people in there. Chang Boko and Shragi's people met a close relation with Japan through their trading. And they didn't stick to the nationality and status. So they supported Ennin generously. He thanked them deeply. According to Ennin's biography he built a temple for God of Sekizan after returning his home country. But it is clearly different from Ennin's travel book written in the 9th century to his biography written in 10th century. God of Sekizan had changed from a foreign god to a Japanese palladium. The Change means that the gig diplomatic and cultural conversion has formed in Japan from the 9th to the 10th. After the 9th century, Japan rapidly became the autism and the nationalism. The time of Ennin and Chang Boko was the last blaze of East Asia collective.
円仁は、9世紀に活躍した日本人の僧侶である。彼は、仏法を学ぶため唐に渡 り、9年間滞在した。その間、彼は旅行記を書き続けたが、それが、入唐求法巡 礼行記と呼ばれる書物である。同書の中には、当時、唐で暮らしていた新羅の 人々について多くのことが記録されている。特に注目されるのは、その在唐新羅人 たちが円仁に対して非常に親切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ある。なぜ、在唐新羅人たち は円仁に対して協力的であったのだろうか。その最大の理由は、在唐新羅人たち のリーダーである張保皐が、円仁を援助したからである。円仁は、張保皐が赤山 の地に創建した寺院に寄宿することが許され、そこで多くの助けを得ることができ た。入唐求法巡礼行記に描かれた在唐新羅人たちは、貿易活動を通して、日本 とたいへん密接な関係にあったことがわかる。その上、彼らは、国籍や身分という ものに囚われない集団であったことも窺われる。それゆえ、彼らは円仁を援助し、 円仁も彼らに深く感謝した。円仁の伝記によれば、彼は帰国後に赤山の神のため に一つの寺院を建立したという。しかし、9世紀に書かれた円仁自身の旅行記と10 世紀に書かれた円仁の伝記の間には、明らかな相違が見られる。赤山の神は、異 国の神から日本の守護神へと変容しているのである。この赤山神の変化は、9世紀 から10世紀にかけて、大きな外交的な、また文化的な転換が日本で生じたことを意 味するものと考えられる。そして、円仁の生きた9世紀以降、日本は急速に自閉性 と自国主義を深めていくようになる。円仁と張保皐の時代は、東アジア的共同体 の最後の輝きであったとも言えるだろう。

6,900원

일반논문

6

고소설의 작자와 독자

이윤석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3집 2015.02 pp.115-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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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김시습의 『금오신화』와 박지원의 「허생전」 그리고 『홍길동전』과 『춘향전』 네 작품을 대상으로 한문소설과 한글소설의 작자와 독자 문제를 다룬 것이 다. 최초의 소설이라고 하는 『금오신화』나 「허생전」의 작자는 저명한 지식인이 고, 이 작품을 읽은 독자도 마찬가지로 당대의 명사들이다. 『홍길동전과 『춘향전』의 작자는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고, 이 소설의 독자 또한 마찬가지로 당대 도시 의 서민이다. 이제까지 고소설 연구자들은 한문소설과 한글소설의 이러한 차이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둘을 같은 범주에서 다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소 설에 대한 시각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논문에서는 『홍길동전』의 작자가 허균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했고, 또 『춘향전』을 판소리 가 사를 옮겨놓은 것이라고 보는 판소리계소설 도식의 허구를 지적했다. 특히 유진한 의 『만화집』에 실려 있는 ‘만화본 춘향가’가 1754년에 만들어진 시라고 볼 수 없는 몇 가지 가능성을 얘기했다.
This paper deals with some questions on the authors and readers of Korean Old Novel. The focus of this paper is on the following pieces:Honggildong-jeon (The Story of Honggildong), Chunhyang-jeon (The Story of Chunhyang), Kumohsinwha (New Story Written in Mt. Kumoh) by Shisup Kim and Heosaeng-jeon (The Story of Heosang) by Jiwon Park. The authors of the latter two pieces were both prominent figures and the readers of both books were also distinguished scholars of their time. On the contrary, the authors of the Honggildong-jeon and Chunhyang-jeon are unknown and the readers of these stories were ordinary people living in urban areas. However, the previous researches have put them into a single category and not given serious considerations to these differences. I think such perspective on Korean Old Novel should fundamentally revised. In this paper, I emphasized again on the fact that Gyun Heo was not the author of Honggil dong-jeon. Also, I pointed out some of the structural defects of Chunhyang- jeon's formation steps which assert that its origin was Pansori lyrics. In specification, I argued that there are some possibilities Manhwabon Chunhyang-ga could not be a poem written earlier than 1754.
本稿は、金時習の<金鰲新話>と朴趾源の許生傳、そして洪吉童傳と春香 傳の四作品を対象に、漢文小説とハングル小説における作者と読者の問題を取り 扱う。最初の小説と見なされる金鰲新話や「許生傳」の作者は著名な知識人であ り、この作品の読者もまた同じく当代の名士であった。洪吉童傳と春香傳の 作者は知られざる人々であり、その読者は当時の都市に暮らす庶民であった。これ までの古小説研究者は、漢文小説とハングル小説におけるこのような差異を軽視 し、両者を同一のカテゴリーのものとして捉えてきた。しかし、古小説に対するこ うした視角は根本的に見直されねばならない。本稿では洪吉童傳の作者が許筠 でないという事実を再度強調し、また、春香傳がパンソリの歌詞から派生したも のと見做すパンソリ系小説図式の虚構を指摘した。特に、柳振漢の晩華集に収 録されている<晩華本春香歌>が、1754年に作られた詩ではないと考えられる幾つ かの可能性について論じた。

7,500원

7

신자료 한문소설 <금산사대몽록(金山寺大夢錄)>의 성격과 의미

신상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3집 2015.02 pp.149-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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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7세기 중반에 창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작자 미상의 「금화사몽유록 (金華寺夢遊錄)」의 조선후기 개작본인 「금산사대몽록(金山寺大夢錄)」을 신자 료로 소개하였다. 「금산사대몽록」은 박철상 소장본으로 가로 20cm, 세로 32.5cm 의 크기에 총99장, 매면 11행, 매행 평균 28자, 단정한 해서체의 상하(上下) 1책 으로 필사된 17회(回) 구성의 장회체(章回體) 작품이다. 작품은 그 시작에 경주 최씨(慶州崔氏) 석계(石溪) 최 선생(崔先生)이 연의(演義)를 하고, 그 둘째 아 들인 석련(錫璉)이 부친의 유고를 편차해 정리하고 교정해 주석을 붙였으며, 최 선생의 제자였던 탐진 최씨(耽津崔氏) 기와산인(畸窩散人) 최인식(崔仁植)이 중간중간에 비평을 삽입함으로써 완성되었음을 확인해 준다. 석계 최 선생은 서문 과 발문을 통해 1760년에서 1825년까지 살았던 최덕리(崔德履)라는 인물로 1820년 3월 하순에 서문을 남기고 있어 작품의 창작시기를 알 수 있다. 이후 일실 되었던 작품을 차남이 되찾아 증보와 주석을 더하고 제자의 비평이 더해져 1852 년 이후 장정한 것으로 파악된다. 작품은 「금화사몽유록」에 기반하고 있으나 원작에는 없는 제1회와 제2회에 걸 쳐 금산사에 재앙을 부리던 요귀가 호승(胡僧)의 술법으로 오생(吳生)의 집안에 의탁해 태어나 꿈에서 중국 역대 창업군주(創業君主)들의 연회에 참여하여 그 전 말을 전하는 과정과 하편에 해당하는 제11회에서 제17회까지 전쟁 대목이 새롭게 창작되었다는 점에서 이본(異本)이 아닌 개작본(改作本)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개작의 방향이 숭명배호(崇明排胡)의 논리에 동의하면서 작품의 서사 구도를 장 회체의 군담적(軍談的) 성격을 확장함으로써 조선후기 통속화 경향에 부응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금산사대몽록」의 존재는 「대관재몽유록(大觀齋夢遊錄)」, 「사수 몽유록(泗水夢遊錄)」과 함께 적대자를 설정해 퇴치한다는 몽유록의 독특한 서사 구도를 마련한 한편, 작자가 분명하게 확인되는 문한명(文漢命)의 「금산사기(金 山寺記)」, 김제성(金濟性)의 「왕회전(王會傳)」과 함께 조선후기 「금화사몽유 록」의 장회체 개작이라는 일군의 현상이루었다는 점에서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는 「금화사몽유록」의 수많은 이본의 존재가 증명하듯이 독자들의 소중화(小中 華) 주의에 대한 동조를 기반으로 삼고, 다시 군담적 성격을 더하며 존명사상(尊 明思想)을 더욱 강화하는 일련의 현상이 19세기에 다발적으로 진행되었던 조선 후기 소설사의 의미있는 장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This article introduced the Geumsansa-daemongrok(金山寺大夢錄) as a new material, which is an adaptation of Geumhwasa-mongyurok(金華寺夢遊錄) of the late Joseon Period. Geumhwasa-mongyurok had been authored in the middle of 17th century while the author of it is unknown. Geumsansa-daemongrok, which is in the collection of Park Cheol-sang, has the size of 20cm x 32.5cm and has 99 pages. Each page has 11 lines and each line has average 28 neat ‘haeseo-che’(square style) Chinese characters. The Geumsansa-daemongrok has the transcription of the first part and the second part bound in one book. It has 17 chapters as a ‘janghoe-che'(chapter-titled style, 章回體) novel. It has been verified by this study that the Geumsansa-daemongrok had been adapted by Seokgye(石溪) Mr. Choi(崔先 生) of Gyeongju Choi family(慶州崔氏) and his second son Seokryeon(錫璉) took the posthumous work of his father for editing in sequence, proofreading and annotation. Then giwa-sanin(畸窩散人) Choi In-sik(崔仁植) from Tamjin Choi family(耽津崔氏), who was a student of Seokgye Mr. Choi, added multiple reviews in the narration to complete the work. According to the introduction and the postscript, Seokgye Mr. Choi is Choi Deok-li(崔德履), who lived from 1760 till 1825 and he authored the introduction in the late March of 1820. It has been learned by this study that his second son completed the bookbinding in 1852 or after by taking back the work which had been lent to an other person, adding supplementation, annotation and including the reviews by a student of the original adapter Mr. Choi. The Geumsansa-daemongrok is based on the Geumhwasa-mongyurok; however, it is not a different version but it is an adaptation; because it is added of newly created chapters such as the Chapter 1 and Chapter 2, in which an evil spirit, who had been causing disasters to the Geumsan-sa Temple(金山寺), was born in the family of Oh Saeng(吳生) by the magic of an outlander monk and propagated the whole stories of the dynasty-founding by attending the banquet of the past dynasty-founding kings of China, and from Chapter 11 to Chapter 17, in which the war scenes against the military power of Yuan(元) are described. Meanwhile, it has been confirmed that the adaptation direction agreed with the logic of ‘revering Ming (明) while ostracizing outlanders’(崇明排胡) and supported the popularization trend during late Joseon period by expanding the character of military story in the form of ‘janghoe-che'(chapter-titled style, 章回體) for the narration composition of the work. In addition, it is necessary to note that the Geumsansa-daemongrok is one of the adaptations of Geumhwasa-mongyurok together with the Geumsansa-gi(金山寺記) by Mun Han-myeong(文漢命) and the Wanghoe-jeon(the story of the kings’ banquet, 王會傳) by Kim Je-seong(金濟性). Like the many different versions of Geu mhwasa-mongyurok, the Geumsansa-daemongrok also has the multiple significant scenes in the history of late Joseon period novels in the 19th century, at which time the novels agreed to the Minor Sinocentrism of the readers, added the character of military story and reinforced the thought of revering Ming(明).

6,600원

8

『神斷公案』과 『古今笑叢』의 비교 연구 - 화소 비교를 중심으로 -

반재유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3집 2015.02 pp.177-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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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연구에서는 『神斷公案』 제4화ㆍ제7화를 구전설화에 바탕을 둔 작품이라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神斷公案』의 편자(編者)가 참고했을 구전설화의 출처 는 무엇이었는지 의구심이 생긴다. 문헌설화의 편자들이 당대의 구전 전승물을 직접 수집ㆍ채록하여 자신의 책에 수록했을 수도 있지만, 보통의 경우 앞서 존재했 던 문헌들 가운데 필요한 부분만을 전재하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어떠한 문헌을 참고했다고 확증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그러나 『神斷公案』의 편자가 1906년을 전후로 한 설화를 기초자료로 삼았다면, 가장 근 접한 대상은 『古今笑叢』일 가능성이 높다. 주지하듯 『古今笑叢』은 조선후기 가장 많은 수의 개별 소화집(총11편)을 모아놓은 문헌설화집으로, 상하계층ㆍ남녀 노소가 충분히 향유할 수 있을 만한 이야깃거리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당대 사회상을 반영할 만한 공안 소재의 작품들도 다수 존재하여 『神斷公 案』의 편자가 충분히 참고했을 법하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神斷公案』과 『古今笑叢』의 화소(話素)별 비교작업을 통해, 『神斷公案』의 의도 및 지향점 등을 찾아내고자 했다. 그 결과 구사법제도의 개선과 구신분제도의 철폐, 구종교의 척결이라는 세 가지 논의로 집약하였다. 이는 『皇城新聞』의 지향점이기도 했기에 신문의 논설면이나 잡보면의 기사들을 소개하여 주장을 뒷받침하였다. 결국『神斷公案』은 단순히 흥미위주로 제작․연재된 작품이 아닌, 시대의 과 도기적 모순과 폐단, 고민들이 함축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때론 해학적이면서도 진지하게 자국의 이야기 를 풀어나가야 했으므로 국내 문헌설화에서 그 모티프를 찾으려한 것이다.
Preceding researches consider the fourth and the seventh series of 「Sindan gong'an」 as a work which is based on oral folk tales. If that is the case, there is a question about what was the source of the oral folk tales which the editor referred to. There is a chance that editors of literature folk tales collected and included contemporary oral heritages in their works. On the average, however, they were more likely to reproduce parts from other literature folk tales avaliable in those days. Although there is no conclusive evidence to tell the exact source of 「Sindan gong'an」, provided that it was based on the folk tales which were circulating around 1906, the most likely one is 『Gogeumsochong』. As we all know, 『Gogeum sochong』 has the largest number of volumes (a total of 11) in late Joseon Dynasty, which contains topics for all walks of life to enjoy regardless of gender or age. Besides, it has many stories concerning trials which reflect the society of the time. This probably made them enough materials for the editor to refer to. Thus, this article focuses on identifying the intention and aim of 『Sindan gong'an』 by comparing its motifs with those of 『Gogeumsochong』. As a result, the argument falls into three parts: the improvement of former court system, the abolition of former caste system, the eradication of former religion. These points, which were the aims of 『Hwangsong sinmun』 as well, were supported by introducing some articles from the editorial pages or gossip columns of the newspaper. Eventually, 『Sindan gong'an』 is not a work which was produced and serialized for the sake of amusement, but an output which implied transitional inconsistency, negative effects, and agonies. Because the work ought to relate the tales of its own land with humor as well as seriousness, the editor sought to find motifs in the domestic literature folk ta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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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도서대여점 운영 실태 - 마포구, 서대문구, 은평구 세 지역을 중심으로 -

유춘동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3집 2015.02 pp.215-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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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서울의 도서대여점 운영 실태를 시론적(試論的)으로 다룬 것이다. 현 재 서울 25개구에 남아있는 도서대여점은 모두 261곳이다. 총량은 문헌연구와 현 장조사를 병행한 결과로, 사업자등록부, 전화번호부, 인터넷 포털싸이트 등을 활 용했으며, 도서대여점을 방문 조사하는 과정에서 도서대여점의 운영자와 이용자 들의 도움을 받아 쉽게 확인이 어려운 도서대여점도 포함시킨 것이다. 서울 25개구에 남아있는 도서대여점은 대부분 임대료가 저렴한 곳에 위치해 있 다. 이로 인하여 육안으로 영업장을 확인하기 어렵다. 이렇게나마 운영되고 있는 도서대여점은 조만간 없어질 예정이다. 그 이유는 모두 재개발 예정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도서대여점의 운영자들은 재개발 사업이 시행되고 나면 임대료가 상승 할 것이고 신규 대여자도 거의 없기 때문에 폐업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폐업한 도서대여점의 책들은 현재 헌책방에서 속속 매입하고 있다. 부산 보수동의 헌책방에 가보면 골목마다 전국 각지의 도서대여점에서 대여해주었던 책들이 쌓여있다. 도서대여점은 급속히 없어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인터넷 도서대여점과 같은 새로운 방식의 도서대여점이 등장하고 있다. 옛날처럼 매장으로 직접 찾아가서 빌 려보는 방식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서 필요한 책을 빌려보는 시대가 된 것이다. 서울을 포함하여 전국에 남아있는 도서대여점의 운영 실태 전반을 살펴보는 것 이 원래의 목표였지만 이 글에서는 우선 서울의 세 지역만을 한정시켜 살펴보았 다. 이 문제는 차후 보완하기로 한다.
This study examined the book rental shop operation status in Seoul. At present, a total of 261 book rental shops remain in 25 gus of Seoul. Total number was the result of literature review and field study, using business registration certificate, the telephone directory and internal portal site, and visiting the book rental shops in business including the book rental shops that would exist nearby under the help of users and operators of book rental shops. Most book rental shops in 25 gus of Seoul are located at the area with cheap rent. So that it is not easy to find it visually. All of them are located at the area where redevelopment is scheduled. Book store operators are expected to close once redevelopment project gets started. It is because the shop operators think that rent will rise and it must be more effective to close the business in the situation where there are no new lenders. Books of book rental shop closed this way are currently purchased by used bookstores. For example, if you visit secondhand bookstore at Bosu-dong, Busan, you can find diverse kinds of books borrowed at book rental shops throughout the country. While the closure of book rental shops is accelerated at present, new types of book rental shops like internet book rental shop appear. And internet bookstores like Interpark are prepared to actively participate at book rental business. New types of borrowing books through internet, rather than traditional bookstore operation type of the past, are newly attempted. And this study introduced this prob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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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僧] 관련 한ㆍ중 속담 비교 연구 (1) - 속담에 사용된 ‘중’에 대한 호칭 및 소재별 비교를 중심으로-

이황진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3집 2015.02 pp.243-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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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담은 그것이 전수되어 내려오는 동안 한 민족과 한 문화의 공통된 가치관을 담게 된다. 그러하기에 속담은 두 나라의 문화와 사상 등을 비교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재료가 된다. 본고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속담 가운데 ‘중’과 관련된 속담을 대상으로 하여 속담에 사용된 ‘중’에 대한 호칭에 대해 고찰하고, ‘중’과 밀접한 관 계에 있는 소재의 속담을 비교 분석하였다. 한국 속담에서는 ‘중’이란 호칭이, 중국 속담에서는 ‘和尙’(heshang)이란 호칭 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중’은 본래 ‘승려의 무리’를 뜻하는 ‘衆’이란 한자 어였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시나브로 고유어로 인식되며 승려를 지칭하는 일반적 인 호칭이 되었고 조선후기로 갈수록 승려를 비하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和尙’은 본래 승려에 대한 존칭이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송대(宋代) 이후 그것이 일반 적인 호칭으로 변하였으며 점차 남자 승을 지칭하게 되었다. 동시에 ‘중’과 ‘和尙’ 은 한국과 중국에서 각기 가장 통상적으로 쓰이는 구어적 호칭이기에 구비문학인 속담에 주로 사용된 것이다. ‘중’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소재인 중머리․오계(五戒)․염불․절과 관련된 한․중 속담을 비교 분석해 보았다. 한국 속담은 중국 속담에 비해 불교적 색채가 약한 반면 비유성이 강한 편이다. 이는 조선후기 ‘중’의 지위가 추락하면서 불교의 출가 수행자로서 존중받기보다는 오히려 하대 받는 존재가 되었던 당시의 사회적 인식이 속담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Proverbs tend to contain a nation or a culture’s common values as they are transmitted. This is why proverbs form very good materials to compare two countries’ cultures or thoughts. This study targets proverbs related with ‘monks’ among those that have been transmitted in Korea and China and considers the titles of ‘monks’ used in the proverbs and comparatively analyzes subject matters closely related with ‘monks’ in the proverbs. In Korean proverb, the title of ‘중(jung)’ was used overwhelmingly often while in Chinese ones, that of ‘和尙(heshang)’ was so. ‘Jung’ originally referred to a Chinese character, ‘衆 (jung)’, which means ‘the group of monks’, but during late Chosun, it came to be recognized as an original word and became a general title that refers to a monk. Meanwhile, ‘heshang’ was originally an honorific title for monks, but in China, after Song Dynasty, it came to be used as a general title gradually. Thereby, ‘jung’ and ‘heshang’ became colloquial titles that were the most commonly used in Korea and China respectively and came to be often adopted in proverbs, a type of oral literature. And the study comparatively analyzed Korean and Chinese proverbs with such subject matters closely related with ‘monks’ as cropped hair, the five Buddhist commandments, Buddhist prayer, or temples. Compared with Chinese proverbs, Korean ones tend to take rather vague Buddhistic color but strong figurative aspects. This is because during late Joseon, the status of ‘monks’ fell and they were rather disregarded instead of being respected as Buddhistic ascetics who had left their home, and this social recognition of the time was reflected on those proverbs after all.
諺語在流傳的過程中, 包含了一個民族和一種文化的共同價值觀。正因如 此, 在比較兩個國家的文化思想等方面, 諺語是一個再好不過的資料。本文以 中國和韓國諺語中與“僧”相關的諺語爲對象, 對其中對於“僧”的稱呼進行考察, 並對其中包含與“僧”關系密切的素材進行了比較分析。 在韓國諺語中“중”(衆)這一稱呼與中國諺語中的“和尚”這一稱呼都占據了絕 對高的使用頻率。韓語中的“중”一詞原本來自於“衆”這一漢字, 意爲“僧侶群”。 但在韓國, 漸漸被認爲是韓國的固有詞, 成了指代僧侶的一般稱呼,而從朝鮮 後期之後, 被成爲對僧侶的卑稱了。“和尚”本是對僧侶的尊稱, 但在中國, 自 宋代以後就逐漸成了一般性的稱呼。這樣, “중”(衆)和“和尚”在中韓兩國都成了 最普遍使用的口語化稱呼, 也成爲了諺語這一口碑文學中主要使用的稱呼。 本文對中韓諺語中出現了“和尙頭、五戒、念佛、寺廟”等與“僧”有著緊密 關系素材的諺語進行了比較分析。較之於中國諺語, 韓國諺語的佛教色彩淡薄, 比喻性較強。這是因爲朝鮮後期隨著“僧”地位的下降, 他們作爲佛教出家修 行者沒有受到尊重, 反而受到低等待遇, 諺語則反映了當時的這一社會認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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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孫의 자료에 보이는 尹夫人의 形象

尹浩鎭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3집 2015.02 pp.279-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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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구운몽」의 저자 김만중의 모친인 윤부인의 면모를 후손들의 여러 가지 기록에 나타난 것을 대상으로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윤부인에 대한 후손의 자료로는 아들 김만중이 지은 「先妣貞敬夫人行狀」(『西浦集』卷10), 「貞敬夫人 海平尹氏 行狀」(宋百憲, 螢雪出版社, 1977. pp. 18-19.)이 있으며, 손자인 金鎭圭가 지은 「祖妣行狀拾遺錄」」(『竹泉集』卷 35), 「叔父崇政大夫行禮曹判書兼判義禁府事 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 大提學 知春秋館成均館事 五衛都捴府都捴管 西浦先生府君行狀」」(『竹泉集』 卷35), 「太夫人 行狀 拾遺錄」(宋百憲, 螢雪出版社, 1977, pp. 36-37.), 그리고 「祭祖母文」」(『竹泉集』 卷12)이 있으며, 撰者未詳이지만 후손 누군가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西浦年譜』(金炳國, 서울大學校出版部, 1992.) 등이 있다. 이들 자료에는 누구보다도 윤부인을 잘 아는 후손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므로 윤부인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을 것으로 보이며, 특히 김만중과 윤부인을 좋아하 고 사모하던 김진규가 윤부인 사후에 바로 지은 「제조모문」에는 윤부인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제조모문」에는 윤부인의 평생의 모습을 네 가지로 이야기하였는데, 윤부인의 人性, 識見, 節操, 品德이었다. 이 글은 「제조모문」에 드러난 윤부인의 위와 같 은 네 가지 모습을 다른 여러 자료를 통하여 실상을 밝힌 것이다. 첫째, 윤부인은 천성이 어질고 착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혜옹주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의 훌륭한 가르침을 받아 약하고 힘없는 사람은 물론 가금이나 화목에 이르기까지 불쌍하게 여기는 마 음이 컸으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컸다. 둘째, 윤부인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서 집안 어른들이 여자로 태어난 것을 매우 애석하게 여길 정도였으며, 총혜함을 바탕으로 뛰어난 식견을 발휘하였다. 그래서 일을 당하여 판단이 옳고 합리적인 데로 귀결되었다. 셋째, 윤부인은 결혼 초에 남편이 입절을 하게 되자 남은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 우는 것이 죽은 남편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하여, 자식과 그 자손들 교육에 힘을 쏟았으며, 평생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고, 즐거운 음악을 듣지 않고, 잔치에 나아 가지 않았다. 넷째, 대대로 높은 벼슬이 끊이지 않는 집안의 귀한 딸로 태어났지만 어른들의 가르침으로 평생 검소하고 부지런하게 살았다. 뒤에 자손들이 벼슬을 하게 되어 스스로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바느질은 여자의 당연한 직임이라 하여 바느 질을 하였고, 자손 및 며느리에게 검약할 것을 가르쳤다.
I’ve examined about the figure of Mrs.Yun in various documents of her descendants who recorded about her after her death. 「A funeral oration of grandmother[祭祖母文]」 written by Kim Jin-gue has not introduced yet, but it is a crucial material to understand Mrs.Yun. Firstly, it is the most oldest material which remained as an written document among the materials written after her death. Secondly, it is considerably valuable because it is written by someone who knew Mrs.Yun well and respected her a lot. In this writing Kim Jin-gue describes Mrs.Yun’s lifelong figure as kinds: personality, intelligence, fidelity, virtue. It was not that there weren’t existing any records about her, yet these four kinds explain her most above all. Therefore, this thesis deals with Mrs.Yun’s figure according to these four. Mrs.Yun was good-natured and kindhearted. Due to the influence from Princess Junhae and elders in family, she sympathized not only with the poor, but with animals and plants so that we could say that she was attentive and understanding. Mrs.Yun was a smart girl who memorize things well that her parents felt sorry that she was a girl. And she showed discernment based on her knowledge that she could judge situations well and results were always end in appropriate ways. Her husband passed away soon after their marriage. She thought that raising remaining children well is her duty toward dead husband. She dedicated herself to educate children and never ate nice food and never went to parties. She was born as a precious daughter of the prominent noble family, but following her ancestors she lived frugal and industrious life. When her children became officers she didn’t need to work by herself, but she still assumed that needle work is her duty to do and taught her children and daughters-in-law thrift.

7,3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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屈復《楚辭新註》在韓國的流播研究

賈捷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3집 2015.02 pp.31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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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楚辭新註》 서울대학교 소장본의 해제, 고려대학교 소장본의 해제, 한 국과 중국에서 현존된 乾隆戊午年 간행의 《楚辭新註》의 간행 특징과 문헌적 가 치 및 조선 후기 문인 李種徽 소장의 《楚辭新註》등 내용을 통하여 屈復의 《楚辭 新註》가 한국에 유입되고 전파된 양상을 고찰해 보고자 하였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중국국가도서관 소장 《楚辭新註》 受業門人 同梓本이 초간본이고, 고려 대학교 소장본과 초간본은 모두《楚辭新註》 판본중의 선본이고, 居易堂本은 乾 隆 1738년 간행 판본중의 졸본이다. 서울대학교 소장본은 乾隆 1738년에 출판 된 또 다른 판본으로서 중국에는 소장되지 않은 것이며 그 출판 시기는 중국국가 도서관 소장 초간본 및 弱水草堂本보다 늦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李種徽의 《題楚詞新集註後》를 통하여 屈復의 《楚辭新注》가 조선에 유입된 시기는 최소 1756년 이전임을 알 수 있다.
This paper respectively explore Qu Fu's ChuCiXinZhu(楚辭新註) propagation situation in South Korea from the comments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collection and Korea University collection, published features and literature value of the extant collection version of China and South Korea of Qianlong Wu Wu annual, and the late Joseon Dynasty scholar Lee Jonghwi’s collection of ChuCiXinZhu(楚辭新註). Through the research, the author thinks that the National Library of China’s collection of ChuCiXinZhu(楚辭新註) ShouYeMenRenTongZiBen(受業門人同梓本) should be the first published version. The first published version and the collection of Korea University is the good version of ChuCiXinZhu(楚辭新註) of Qianlong published version in 1738; Juyi Tangben(居易堂本) is the bad version. Seoul National University collection is another version; and there is no this collection in China. The publishing period should be later than the National Library of China’s collection and Ruoshui Caotangben(弱水草堂本). In addition, according to Lee Jonghwi TiChuCiXin JiZhuHou(題楚詞新集註後) can speculate that the earliest introduction time of Qu Fu's ChuCiXinZhu(楚辭新註) of Joseon Dynasty should be before 1756.
本文分別從《楚辭新註》首爾大學藏本、高麗大學藏本解題, 中韓藏乾隆戊 午年刊《楚辭新註》現存本的刊印特徵與文獻價值, 朝鲜朝後期文人李種徽收 藏有《楚辭新註》等內容探求屈復《楚辭新註》在韓國的流播情況。經研究, 筆 者認爲中國國家圖書館藏《楚辭新注》受業門人同梓本似爲初印本;高麗大學 藏本與初印本均爲《楚辭新註》版本中的善本;居易堂本是乾隆1738年刊印版 本中劣本;首爾大學藏本爲乾隆1738年出版的另一種版本, 在中國未見收藏, 其出版時期應晚於中國國家圖書館藏初印本與弱水草堂本。此外, 據李種徽 《題楚詞新集註後》可推知屈復《楚辭新注》傳入朝鮮朝的最早時間應在1756 年之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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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화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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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외시화(場外詩話) (4)

남상호, 詹杭倫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43집 2015.02 pp.33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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