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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학보 [The Korea Journal of Donghak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동학학회 [The Donghak Society]
  • pISSN
    1598-7566
  • eISSN
    2713-3605
  • 간기
    계간
  • 수록기간
    2000 ~ 2026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역사학
  • 십진분류
    KDC 151 DDC 181
제12호 (8건)
No
1

경북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와 의의

신영우

동학학회 동학학보 제12호 2006.12 pp.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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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은 지역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경상도 북부지역의 전개과정을 전라도와 비교하면 시기에 따라 다른 형태가 뚜렷이 드러난다. 전라도에서는 동학 교단과 일정한 거리를 둔 남접의 지도자들이 강력한 지도력을 가지고 독자 세력을 확보하였다. 경상도 북부지역의 동학조직은 동학 교단의 지침 아래 활동하였다. 하지만 6월 말 이후 경상도 북부지역의 동학 조직은 전국 어느 지역보다 앞서서 무장활동을 서둘렀고, 8월에 들어오면 무장봉기에 나서고 있었다. 이 지역의 동학 조직이 무장봉기를 일찍 준비하게 된 까닭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경계 때문이었다. 청과의 전쟁을 위해 육군 대부대를 도보로 북상시킨 일본군은 경상도 요지에 병참부를 설치했는데 이 병참부가 공세의 대상이 되었다. 경상도 북부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이 2차봉기를 전후해서 무장활동을 격화시킨 군현은 예천·경·상주·선산·김산·안의·거창·의흥·성주 등지였다. 모두 일본군 병참부가 가까이 있던 지역이었다. 이들 지역에서 활동한 조직은 관동포(예천·문경 일대), 충경포(상주·선산·김산 일대), 상공포(상주·예천 일대), 선산포(선산·김산 일대), 영동포(김산·개령 일대)의 5개 대접주 조직이었다. 경상도 북부의 각 군현에서 1894년에 동학 조직이 활동하는 모습은 시기에 따라 확연히 구분이 된다. 편의에 따라 4시기로 나누면, 제1기는 3월에서 7월 초까지 동학 조직이 표면에 드러나서 활동을 펼치던 시기이다. 제2기는 7월 초에서 8월 하순까지 일본군과 대적하기 위해 무장을 강화하던 시기이다. 제3기는 8월 하순에서 9월 하순까지 무장봉기와 기포령에 의해 읍내 점거를 시도했던 시기이다. 제4기는 9월 말 이후 일본군·관군·민보군에 의해 동학농민군이 진압, 추적을 받던 시기이다. 일본군과 충돌한 것도 경상도 북부지역이 가장 먼저였다. 예천의 동학 조직이 산양에서 집결하여 일본군 병참부 공격을 준비하자 태봉병참부의 일본군 다께우찌 대위가 병정 2명과 함께 정탐하러 왔다가 발각되어 피살당하였다. 청과 전쟁을 위해 수많은 일본군이 북상하는 것을 보게 된 이 지역의 동학교도들이 무장 활동을 시작하면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가장 먼저 예천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9월 18일 동학 교주 최시형의 기포령은 경상도 북부지역의 동학 농민군이 일제 봉기하는 신호였다. 9월 22일 상주·선산 등 대읍이 동학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고, 관아의 무기는 모두 탈취되었다. 관아 건물은 동학농민군의 주둔지가 되었다. 그러나 경상도 북부지역의 동학농민군은 민보군과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급속히 위축 되었다.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격화된 지역을 순회하는 남영병에 맞서서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제4기는 9월 하순 상주와 선산 같은 주요 군현에서 물러난 동학 농민군이 외촌에 흩어져 있다가 민보군과 관아의 추적을 받아 체포 되거나 영동과 황간에 집결한 북접농민군 대군에 합류하여 공주 우금치 전투에 참여한 시기이다. 체포를 모면한 동학농민군 가담자들은 산골 깊숙한 지역으로 피신하거나 충청도 등 외지로 피난하여 숨어 있었다. 군현에 따라 동학에 입도했거나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한 사람들에게 호된 보복을 하기도 하였다. 경상도 북부지역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여러 문제를 집약해서 보여주고 있다. 첫째 영남 북서부에서도 사교로 탄압받았던 동학이 유교를 대신해서 세력을 확산해간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는 아직 양반 가문의 향촌사회 지배력이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었지만, 향리들의 힘이 관아의 실무를 장악한 것을 배경으로 점차 양반층을 압도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던 사실이다. 셋째는 일본과의 전쟁을 앞두고 조선 사람이 조선 사람을 해치는 분열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동학농민군과 양반층 또는 민보군은 서로 합세할 여건을 갖지 못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양반층에게 합세를 요구하면서 부농과 지주에게 과거의 원한을 보복함으로서 협력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고, 이 지역의 양반층은 국왕이 경복궁 안에 주둔한 일본군에 의해 인신이 장악된 상태에서 동학농민군과 적대하고 일본군을 끌어 들여서 동학농민군을 학살하였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뒤에는 예천과 김산의 민보군과 양반들이 의병을 결성해서 활동하지만 경군과 남영병과 제대로 전투조차 벌이지 못하고 패산하였다. 1894년에 힘을 합하지 못했던 동학농민군과 반일 양반세력은 결국 일본군과 친일 관료들이 장악한 관군에 의해 각각 격파되었다. 일본은 이러한 내부 갈등에서 발판을 마련하여 조선 국가와의 전면 전쟁이 없이 침략을 감행하였다.

The development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differs in each province. In Gyeongbuk province, the Donghak Peasant Army operated in accordance with the order of the Donghak. Hence the army submitted to local authorities and militia activity was restrained. However, when invaded by Japanese military, they were first to arm against Japanese and tried to drive them out. The armories and supply depots of Japanese army in Gyeongbuk province were targeted. And this campaign of securing munitions and supplies brought a backlash from the aristocracy, ``Yangban``, and wealthy landlords, ``Jiju``. Consequently the Donghak Peasant Army fought the Home Guard sent by the aristocracy and wealthy landlords and later the Japanese army. As a result the peasant army was defeated.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Gyeongbuk province highlighted several facts. First, the Donghak had strong influence over the peasant instead of Confucianism. Second, as for ``Yaecheon`` and ``SangJu``, the power of petty officials (``Hyangni``) who are in charge of practical affairs of the local government office has grown significantly. Third, the revolution also manifested clear division among Korean societies even prior to the imminent war against Japanese. While they wanted to combine forces against Japanese army, as the peasants pursed old personal grudges against the aristocracy and wealthy landlords the peasant army lost the opportunity to join the forces. Furthermore the aristocracy in Gyeongbuk province who are socio-economically in opposition to the peasant slaughtered the peasant army in collusion with Japanese even as the Japanese army in ``Gyeongbokgung`` palace took the King as a hos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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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지역 동학교단의 활동과 동학가사

김상일

동학학회 동학학보 제12호 2006.12 pp.47-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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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원

본 논문에서는 최제우의 동학 발생이후 상주지역 동학교단의 활동과 동학가사를 선택하여 동학의 발생과 계승, 상주 동학교당의 성립 과정, 상주 동학가사의 창작배경 등을 살펴보았고, 아울러 최제우의 전기 동학가사 9편과 김주희의 후기 동학가사 100편, 총 109편의 동학가사에 대해, 주제유형화를 시도해본 결과 아래의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東學은 1860년 4월 5일, 철종 11년에 水雲 崔濟愚에 의해서 창도되었는데, 동학의 발생은 당시 전개되었던 대내외적인 혼란과 변화에 대한 민중 불만의 산물이었고, 이를 슬기롭게 대처하는 과정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주인의식의 산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상주동학교는 교조 최제우, 2대 최시형을 거쳐 1900년대에 3대 손병희에 이르러 남북접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도통전수에 불만을 품은 원로들이 각기 독립된 교당을 설립하여 30여 개의 교파가 생겼을 때, 상주에는 김청림이 敬天敎로 분립하였는데, 이것이 상주동학교당의 전신이 된다. 그러나 김청림은 정득우에게 도통을 전수하고, 정득우는 교도들을 군대화하여 무력투쟁을 하려 하자 이에 뜻을 달리한 김주희는 독립하여 상주 동학교단을 열었다. 둘째, 동학가사라 함은 ``東學의 思想과 宗敎的 敎理를 傳播하거나 修道하기 위해 대체로 3·4調나 4·4調의 4音步 연속체의 가사체로 창작된 작품으로써, 東學敎徒에 의해서 지어졌거나 그들 사이에 종교전파·교리수도·친목·단합·투쟁 등의 목적으로 창작되거나 전파된 가사를 일컫는다. 崔濟愚의 『龍潭遺詞』9篇과 金周熙의 『尙州 東學歌辭』100篇, 총 109篇의 東學歌辭는 작품의 창작시기에 따라 前期 東學歌辭 9篇과 後期 東學歌辭 100篇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었고, 主題類型에 따라 前期 東學歌辭는 다시 (1) 得道類 東學歌辭 4篇과 (2) 布敎類 東學歌辭 5篇으로, 後期 東學歌辭는 (1) 布敎類 東學歌辭 19篇, (2) 修道類 東學歌辭 81篇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작품의 내용에 따라 (1) 得道類 東學歌辭는 宗敎體驗類 4篇으로, (2) 布敎類 東學歌辭는 1) 宗敎傳播類 5篇, 2) 敎理解說類 19篇으로, (3) 修道類 東學歌辭는 1) 修身類 48篇, 2) 儒敎類 20篇, 3) 道敎類 3篇, 4) 陰陽五行類 7篇, 5) 日常生活類 4篇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셋째, 동학가사 109편의 내용을 살펴본 결과, 수운 최제우의 전기 동학가사에서는 수운 탄생 이전을 先天으로, 수운 탄생 이후를 後天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先天을 타락한 세계로 규정하고 앞으로 다가올 後天을 先天의 극복으로 파악함으로써, 後天開闢을 통하여 조화로운 세계 즉, 上元甲의 개벽된 세상이 도래하리라고 규정함으로서, 後天開闢의 조화로운 세상의 도래를 주장했음에 비하여, 김주희의 후기 동학가사에서는 반대로 先天을 조화로운 세계로, 後天을 타락한 세계로 파악, 先天回復을 주장했다. 그러므로 전기 동학가사 쪽이 진보적인 역사사관이라고 한다면, 후기 동학가사 쪽은 循環史觀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前者가 다가올 세계에 대한 인간의지의 적극적 개입을 중시한 반면, 後者는 다가올 세계의 소극적 기다림을 중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으로 본 연구자가 상주 동학가사를 선택하여 동학가사의 문학성을 점검해 본 결과 최제우의 전기동학가사와 김주희의 후기 동학 가사는 19세기후반 한국 문학사의 전환기 역할을 한 작품군으로서 중세문학을 근대문학으로 지향하게 한 공로가 컸던 작품군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전후기 동학가사가 한국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연구성과는 너무나 미비하다고 할 수 있다. 현전하는 동학가사 작품 중에는 아직도 소개되지 못한 작품들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으며, 다양한 異本들이 존재하는 바, 前人未踏의 지속적인 연구와 이본에 대한 체계화 작업이 절실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논의들은 同學들의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In this paper, it attempts the first term and the latter period Donghak Kasa to be type, and it also wants to examine discrimination such as content, structure, and form. We used Choi, Che-woo`s 9 [Yongdam Yusa]s and Kim, Joo-hee`s 100 [Sangju Donhak Kasa]s, that is, total 109 Donghak Kasa books for studying. The following is the result of study. The first, Donghak was created by Choi, Che-woo on April 5th in 1860, but it was the product of masses` dissatisfaction against confusion and variation of the inside and outside, which are formed at that time. The second, Donghak Kasa is Kasa that is created and propagated for the purpose such as religion propagation, instructiom spiritual exercise, friendship, unity, and struggle as continuous 4 joints Kasa of 3 words and 4 words in order to propagate and discipline Donghak`s ideology and instruction. Donghak Kasa can be classified 9 Donghak Kasa books of the first term and 100 Donghak Kasa books of the latter period by creation time, and the first term Donghak Kasa also can be sorted 4 Dukdolyu Donghak Kasa books[得道類 東學歌辭 4篇], 5 Pokyolyu Donghak Kasa books[布敎類 東學歌辭 5篇], and the latter period Donghak Kasa can be classified 19 Pokyolyu Donghak Kasa books[布敎類 東學歌辭 19篇], and 81 Sudolyu Donghak Kasa books[修道類 東學歌辭 81篇] by a topic type. Dukdolyu Donghak Kasa[得道類 東學歌辭] can be classified as 4 Jongkyochehemlyu[宗敎體驗類 4篇], Pokyolyu Donhak Kasa[布敎類 東學歌辭] can be sorted 5 Jongkyojenpalyu[宗敎傳播類 5篇], 19 Kyolihaesellyu[敎理解說類 19篇], and Sudolyu Donghak Kasa [修道類 東學歌辭] can be divided 48 Susinlyu[修身類 48篇], 20 Yukyolyu [儒敎類 20篇], 3 Dokyolyu[道敎類 3篇], 7 Umyangohaenglyu [陰陽五行類 7篇], 4 Ilsangsaenglyu[日常生活類 4篇] by contents of a product. The third, we know that Choi, Che-woo`s Donghak Kasa of the first term grasped as a new world before he was born, and after he was born it grasped as an old-fashioned world by using the result, which was examined a content of 109 Donghak Kasa books. And a new world was prescribed as depraved world, and future an old-fashioned world was grasped as conquest of a new world. Although it persists advent of harmonious world throughout the beginning of the world of an old-fashioned world[後天開闢], Kim, Joo-hee`s Donghak Kasa of the latter period persisted a new world as harmonious world, and she also asserted an old-fashioned world as depraved world oppositely, so she persisted recovery of a new world. In conclusion, I inspected Donghak Kasa`s literary grade throughout contrast of the first term and the latter period Donghak Kasa with choosing Donghak Kasa, which is Donghak Kas` lower type. Donghak Kasa had a role of transition period in the latter half of 19 century, and it have many merits to develop from the middle ages literature to modern ages literature. There are so many products, which were not introduce, among existent Donghak Kasa products. Therefore, it needs to study continually, and it also requires organizational works because various theories exist, so I want to postpone these arguments nex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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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00원

이 글은 경북(영남)지역의 사상적 흐름을 매개로 하여, 퇴계의 성리학과 수운의 동학사상에 관철되어 있는 철학적 논리의 내적 연관관계를 규명해 보는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주자는 이 세계의 궁극적 절대자인 太極(理)이 도덕적 원리이기 때문에 無爲하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퇴계는 리에는 무위한 측면도 있지만 어떤 형이상학적 힘을 갖는 有爲한 측면도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독창적인 학설을 이끌어 냈다. 그의 후학들은 이러한 퇴계의 리의 성격을 無爲와 有爲가 종합된 ``無爲而爲``라고 하였다. 반면에 최제우의 사상은 핵심은 절대자로 대표되는 한울님은 인격적 요소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원리적 측면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원리적인 무위한 측면과 힘을 가지는 유위한 측면을 포괄하는 ``無爲而化``로 설명한다. 이렇게 보면 ``無爲而爲``와 ``無爲而化``는 어떤 내적 연관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하여 논자는 절대자의 유위한 측면을 강조하는 천주교의 논리와 그것을 비판하는 영남 퇴계학파의 천주교 비판 논리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연관관계 속에서 이 동학의 논리를 규명하려고 하였다.

The present study purposed to explain the internal connection between Toigye`s Neo-Confucianism(性理學) and the philosophical logic underlying Suwoon`s Donghak(東學) philosophy through the medium of the Intellectual history of Gyeongsangbuk do. As known well, Zhuxi maintained that the Great Absolute (太極; li, 理) is inactive because it is just a constant principle of Nature including morality but Toigye led his unique doctrine, insisting that li has the aspect of inactivity as body(體) but it has also an aspect of activity as function(用). His followers defined the nature of Toigye`s li as Muwi-yi-Wi (無爲而爲; inactive activity) integrating inactivity and activity. On the contrary, the core of Choi Je woo`s philosophy is that Hanulnim(the Heaven) has not only personality but also constant principle. In other words, his philosophy can be explained as an Muwi-yi Wha (無爲而化: inactive change) comprehending the inactive aspect of principle and the active aspect of power. In this sense, Muwi-yi-Wi has an internal connection with Muwi-yi Wha. To clarify this, I examined theory of Catholicism emphasizing the active aspect of the Absolute God and the logic that Yeongnam Toigye`s school used to criticize Catholicism. Through such a investigation, I attempted to explain the Donghak logic of Muwi-yi W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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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의의와 과제

김한식

동학학회 동학학보 제12호 2006.12 pp.247-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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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각국 동학농민혁명연구』라는 주제의 기조강의록 이다.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용어도 혁명참여자 명예회복을 위한 국회법 따른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연구자의 주변상황과 자신의 입장에 따라 전개과정 이나 미친 영향이 다를 수 있어 이를 종합적으로 비교·평가하고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동학혁명이 한국 근대사의 한 획일 뿐 아니라 국제정치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자료의 발견 가능성에 대해 기대되는 바가 크다. 이 분야 연구의 주된 관점을 변혁사상에 유의하여 연구하되 동학 농민혁명의 정치·사회변동의 특징을 서양 정치변동이론의 발전과정과 비교하여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역사적 단면에서뿐만 아니라 의식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며, 근대성이라는 기준에서 살펴보는 것이 유용하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가 이렇게 다양하게 그리고 한국사상 전반의 관점에서 이뤄질 때 비로소 한국인의 심성상의 특이성이 드러나고 이를 서구 근대 지성사의 고민에 대한 대안으로 승화시키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하는 접근방법은 혁명주도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방법과, 시대사 중심의 연구방법 그리고 주된 사상(또는 종교) 중심의 연구방법 등 세 가지 방법의 장점을 살려 혼용되는 형태를 취하되, 시대사 중심의 연구방법과 주된 사상 중심의 연구방법을 배경으로 하여 인물 중심의 연구가 행해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This paper addresses three major views. First, I appraise this kind of study can be a step for finding some more materials on Dong-hak Revolution and for giving a motive to more comparative studies on Dong-hak itself. Second, although there is lack of researchers and a financial supports to keep collecting concerning data, I propose the study on Dong-hak Revolution should be based on a view of change through the stream of ideas among Koreans since 16th century. Finally, I would like to suggest an approach for better studies to contribute not only to understanding Dong-hak Revolution more comprehensively but also to providing a hint for categorizing wondering Korean modern thoughts. That would be a leader-centered approach based on both a main idea-centered one and a situation-centered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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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의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현황과 특성

이현희

동학학회 동학학보 제12호 2006.12 pp.27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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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0원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연구는 다양한 논제로 많이 축적되어 왔다. 아직까지 농민운동의 동학혁명과의 연계성과 관련하여 용어나 지도이념 원리, 평가의 문제 등이 명확히 정립, 정의되지 못한 부분들이 많이 노출되고 있어 논의의 초점이 되어 왔었다. 동학농민혁명이나 운동은 그 뒤 일제강점기에 하나의 큰 역사적 사건으로서 맥락 지어져 본격적인 학문적 연구가 시작되어 혁명적인 3·1운동 이후에는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8·15광복 이후에는 식민사관의 극복이라는 당면과제를 위한 한국사의 활발한 연구와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연구도 더욱 활성화되었다. 이후 1970년대까지 연구는 기본적으로 농민운동을 조선후기의 사회경제 발전에 따른 결과로 연결, 반봉건 반침략투쟁을 전개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1980년~2000년대에는 군사정부에 대한 정치의식이 싹트면서 근대화 문제와 사회개혁의 주체로서 민중인식이 확산됨으로 동학혁명과 농민운동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많은 연구들이 학술 포럼이나 논문집을 통해 발표되었다. 특히 1994년에는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학회 기관 등에서 특집논문집들이 발간되었으며, 이 시기를 전후해 각 기념회나 연구모임들이 관련 자료집 또는 저서를 발간하여 동학농민혁명에 있어 논점이 되는 다양한 연구주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1990년대 들어 농민운동에 대한 개념과 용어, 호칭문제가 본격적으로 쟁점화 되어 논의되어졌는데, 이는 농민운동의 성격을 가늠하는 중요한 단서로 동학을 기반으로 한 농민혁명론과 농민 주체 론을 근거로 한 농민전쟁론이 논쟁의 중심선에 놓여 있다. 1894년의 농민운동은 동학사상과 그 사회적인 기능을 연계하여 전체적 관점에서 구조적으로 접근해야 명확한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1894년의 농민운동은 동학이 선도하였음으로 해서 가능하였고, 그 진행경과 및 지휘계층의 인물도 동학도임을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이며, 정치 경제사적 변화, 청일전쟁, 대외무역 촉진, 자작농의 대두, 자급자족적 능력 확대, 전통사회에 평등사상, 남녀차별 철폐구호, 인권 평화 도래에 대한 희망 등 총체적인 방향에서 연구가 심화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농민운동의 전개, 발전이 동학으로 인해 동력이 제공되었으니 농민운동은 동학의 경전과 의식을 통한 교리적 차원의 연구도 함께 심층적으로 이루어져야 보다 타당성, 객관성 있는 동학농민혁명으로써의 역사적 위상의 정립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본다.

Study about Donghak peasant movement was achieved much meantim. But there are many part to be studied yet. In 1894 peasant movement must evaluate clearly did big part Donghak. And leader of peasant movement must understand is a person who believe Donghak. That is, peasant movement is spreads and develops but must know that Donghak became important factor. Therefore, Donghak peasant movement served as an important movement to korean modern history such as reformism national movement. But analysis of Donghak peasant movement and estimation differ according to a studying person. More wide and comprehension by objective study and estimation may have to be reac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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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사상의 어제와 오늘

윤석산

동학학회 동학학보 제12호 2006.12 pp.30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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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동학사상의 전개를 살펴보는 데에 그 목적을 둔다. 동학사상의 역사적 전개를 살펴보기 위하여 먼저 동학의 시대와 천도교의 시대로 나누었다. 그러므로 동학의 가르침을 편 스승들인 수운, 해월, 의암의 동학사상 전개의 특징을 찾아보고자 했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은 경신년 결정적인 종교체험 이후 일년 가까운 시간을 수련을 하며 보낸다. 그러므로 자신이 받은 도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한다. 수운은 도의 학문화를 통해 ``시천주``를 중심사상으로 삼는다. 이 시천주를 근거로 새로운 차원의 삶을 이루고자 하는 ``후천개벽사상``을 세상에 내놓는다. 아울러 후천의 세상에 이르기 위한 수도법인 ``수심정기``와 도의 요체를 이루는 ``주문``을 내놓는다. 그러므로 이들을 통해 자신의 도를 학문적으로 체계화시켜 나갔다. 수운으로부터 도를 전수받고 동학의 2세 교주가 된 해월은 ``도의 생활화``를 꾀하게 된다. 일상 속에서 우리가 매일 같이 먹는 ``밥``에서부터,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 그리고 숲속에서 우는 ``새소리``까지, 모두를 자신의 도를 펴는 대상으로 삼게 된다. 또한 한 가정의 구성원을 이루고 있는 며느리에서 어린아이, 또 부부의 문제, 조상에게 행하는 제사, 나아가 생활 속에서 실행하는 실천윤리까지 모두 도를 설명하는 대상으로 삼게 된다. 해월이 꾀하였던 ``도의 생활화``는 우리의 일상 속에 도를 실천하므로, 우리의 속화된 일상을 성화(聖化)된 삶으로 이끌고자 하는 데에 그 본의가 있다. 즉 해월은 ``일상의 성화``를 통해 차원을 달리하는 삶을 이 지상에 이룩하므로, 새로운 후천의 세상을 우리의 삶 속에 열어가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해월로부터 도를 받아 동학의 3세 교주가 된 의암은 동학의 시대를 접고 천도교의 시대를 새롭게 연 인물이다. 이는 곧 당시 처해 있던 시대의 요청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의암은 서구적 종교의 제도를 받아들이므로 체제를 정비하고, 또 교리를 체계화시키므로 ``도의 종교화``를 꾀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도의 종교화``는 그 외양상 서구의 제도와 체제를 따르고 있지만, 실상 그 내면적으로는 수운과 해월이 견지해 오던 자력적 신앙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데 주력을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동학의 스승들이 펼친, ``도의 학문화``, ``도의 생활화``, ``도의 종교화``는 단순한 동학사상의 시대적 변천만은 아니라고 본다. 즉 용시용활(用時用活)에 의한 시대적 적용의 적극적인 모습이었던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study the development of Donghak thought. I have divided Donghak history into two periods, to better investigate the development of Donghak thought. One is the Donghak period, the other is the Chodogyo period. I researched the first three leader`s (Suun, Haeweol and Uaim) thinking as they were the developers and masters of Donghak Suun, who was the founder of Donghak, received a defining religious experience in April 1860 where he met Hanulnim (God). He then spent almost a year in spiritual training, during which time he scientifically systematized the Tao that he had receive from God. The main thought that developed through the systemization of the Tao was "serving God within me" (侍天主). He revealed that the "post-cosmic creation" (後天開闢) was based on this concept of "serving God within me" which would create a new system of life. He also revealed the "keep a good mind and have a right spiritual force" (守心正氣) as the method to reach the "post-cosmic creation" (後天開闢). He also revealed that "incantation" (呪文) was the core of Tao. Therefore he systematized Tao scientifically. Haeweol, who was a second leader of Donghak, practiced the principles of Tao in his life. Haeweol taught us that the daily meal, the sun and the moon, and bird-singing in the forest, are all objects which explain Tao. Also, the family, which consists of a husband and wife, the children, the daughter-in-law, and even the problems between a husband and wife are also an explanation of Tao; as are sacrificial rites and practical ethics, and every part of ordinary life. Haeweol`s desire was to change an ordinary life into a holy life through practice of Tao. Haeweol wanted to build a life of new dimension on the earth through a holy life, and to open the new post-cosmic creation in our life. Uaim, who became the third leader, studied Tao under the tutelage of Haeweol, Due to the incursion of Western society, Uaim changed Donghak, which means Eastern Learning, to Chondogyo, which means The Heavenly Way. Political and social upheaval in those days demanded a new way of thinking. Uaim incorporated Western religious methods of worship, creating a new systematized way of practicing Tao religious doctrine. He changed the ancient Tao philosophy into a Western style religion. It follows Western system and order on the outside, but maintained the original religious beliefs of Tao on the inside. This resulted in Tao spreading out into ordinary life, and becoming a major religion. While on the outside it may appear that he changed Donghak`s thought, this is not true. It is instead, a positive change in the practice of Tao in keeping with the changing times(用時用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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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성립 초기의 종교적 정체성

고건호

동학학회 동학학보 제12호 2006.12 pp.337-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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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동학의 초기 활동이 이루어진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창교주 최제우의 종교경험으로부터 ``교단 종교``로서의 동학의 정체성이 형성 되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동학의 종교사적 위상과 의미를 짚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창교주 최제우의 종교경험으로부터 포교를 준비 하면서 종교로서의 자의식을 갖추어 나가는 과정, 동학의 기본적인 교리, 의례, 조직의 틀이 체계화되는 과정을 검토하였다. 다음으로 세습교주 최시형을 중심으로 교단 활동의 범위가 확산되면서 창교주의 종교경험이 창조적으로 해석, 적용되는 과정을 교리, 의례, 조직의 ``합리화``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이 시기는 동학이 민중 계층으로 널리 확산되면서 이를 토대로 본격적인 제도종교로의 발전이 이루어 졌던 시기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동학운동의 종교 사적 위상과 의미를 해명해 보았다. 사적 위상과 의미를 해명해 보았다. 동학은 유교와 민간신앙이 공존하고 있던 조선후기의 종교사 영역에서 신종교로 성립한 종교적 혁신운동이었다. 즉 동학이라고 하는 신종교는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종교사 영역을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체제종교였던 유교가 그 내적 혁신의 역동성을 상실함으로써 야기된 세계관 차원에서의 공백을, 민간신앙이 지니고 있던 개벽지향적인 운수관에 기초해서 혁신해낸 것이었다. 동학은 창도와 포덕 초기부터 줄곧 관의 지목과 탄압에 직면하였기 때문에 교조신원과 동학 금령의 해제를 통해서 신앙, 포덕의 합법성을 쟁취하는 문제는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중심적인 혁신의 과제였다. 그래서 이러한 외부적 강제에 대처하는 동학 교단의 대응 방식과 그 내용에 대한 교리적 정당화가 내적 혁신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었다. 동학은 이와 같은 내적 혁신의 과정을 통해서 시천주, 무극대도, 후천개벽을 핵심으로 하는 교리체계를 동학 교단이 처하고 있던 구체적인 상황과 신앙인 집단의 요구에 기초하여 동학 교단의 종교적 전망과 실천에 적용하고, 의미를 부여해내는 능동적인 해석과 적용의 과정을 수행하였다.

This thesis aims to elucidate the position of Donghak(東學), and its implication in the history of korean religions by concentrating on its development from the religious experience of the its founder to its formation into a religious organization. The founder of Donghak, Su-un(水雲) formed its sacred books, its rituals and organization and the second leader, Haewol(海月), spread the message of its doctrine to the people so that Donghak developed into an institutionalized religion. Donghak was one of the new religions that originated in Korea and formed during the Chosun Dynasty when Confucianism and other folk religions coexisted. The belief system of Donghak was based on innovation-oriented worldview of folk religions of that time. Donghak was able to fill the gap in the world-view that arose from the lack of inner innovative dynamics in Chosun Confucianism. As Donghak, from the beginning, was suppressed by the state, the problem of legitimacy was a central innovative task during its formative years. Therefore, both its reaction against this outer suppression and its doctrinal justification was the source of its inner innovations. Its main hermeneutical innovations were centered on Sicheonju(侍天主), Mugeukdaedo(无極大道), Hucheongaebyuk(後天開闢), which had to be grounded on the concrete situations of that time and on the needs of the believers. Such inner innovations of interpretation and application resulted in a unique but syncretic philosophy and doctrine of Dongh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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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강소의 농민사회 신질서 수립을 위한 개혁활동

황묘희

동학학회 동학학보 제12호 2006.12 pp.363-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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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州和約 이후 전라도 각군현에 설치한 집강소의 활동은 동학농민의 봉기가 새로운 사회질서를 요구하는 혁명운동이었음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었다. 농민군의 執綱所 설치와 농민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는 전라도 지역에 한정된 일이기는 하나, 봉건적 정치사회 구조속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농민대중이 정치일선에 나서 농민사회의 신질서 수립을 위한 강력한 폐정개혁 활동을 실행하였다는 면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할 것이다. 즉 집강소는 농민사회의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그동안 농민대중의 숙원이었던 문제들을 개혁해 나갔다. 탐관오리와 횡포한 부호의 징계, 동학의 공인, 사회신분제도의 철폐와 신분 해방, 환곡의 무효화 및 환상제도의 폐지, 고리채와 사채의 엄금, 미곡의 일본유출 금지, 토지제도의 개혁과 균등한 분작, 삼정의 개혁, 백성들이 제출한 인민소장의 처리, 관리들이 작성하였던 문서의 검열과 집강소 정책의 문서화 등 체계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해 나갔다. 그리고 집강소는 향촌의 치안과 외세개입에 따른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농민군을 증대하였으며 횡포한 부호들로부터 부당하게 수탈한 재산을 압수하여 군수전과 군수미를 확보하였다. 특히 천민 출신의 부대를 창설함으로 무력의 증강과 함께 신분해방정책도 실행 하였다. 이러한 집강소의 활동은 제 2차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시기에도 계속 진행되었다. 따라서 집강소의 활동은 동학농민운동의 개혁적 혁명성과 근대성을 평가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핵심이 되며, 근대사회를 확립하는데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Donghak Peasant movement was important reformism that bring big change in korean history. Specially, Jipgangso that establish in cholla province since gunpowder has very important meaning in mordern age innovation and farmer rule. Jipgangso reformed problem that suffer meantime to establish new order of farming community. Jipgangso propeled politics innovation that punish government officials who plunders and persecutes people in cholla provice vicinity. Also, enforced farmer rule to collapse enfeoffing order through abrogation of new dust chemical and innovation of land system. Jipgangso`s innovation activity became Gapogaehyeok`s motivation and korean history became modernize important b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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