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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예술 [Oriental Art]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국동양예술학회 [The Korean Society of Oriental Art Studies]
  • ISSN
    1975-0927
  • 간기
    계간
  • 수록기간
    2000~2018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예술체육 > 예술일반
  • 십진분류
    KDC 600 DDC 700
제20호 (15건)
No

論文

1

古代 韓日의 龍鳳紋環頭大刀 고찰

홍성화

한국동양예술학회 동양예술 제20호 2012.12 pp.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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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考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 간에 나타나는 龍鳳紋環頭大刀에대한 분석을 통해 고대 한일관계에 대해 분석해보고자 하였다.우선 龍鳳紋環頭大刀는 일본의 경우 그 양에 있어서 한반도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출토되고 있다.일본에서 나타나는 龍鳳紋環頭大刀는 백제 무령왕 출토 龍鳳紋環頭大刀를 모태로 하여 6세기 중, 후반에 걸쳐 성행하고 있는데,초기 單龍環頭大刀의 분포가 北九州, 세토 내해, 畿內를 중심으로하고 있어 야마토 정권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백제로부터 전파된 경로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파는 七支刀가 408년 일본에하사된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백제로부터 賜與 가능성을 상정할수 있을 것이다.이후 일본에 전해진 龍鳳紋環頭大刀는 6세기 후반에 들어서 일본 열도 자체 제작 체계를 확립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龍鳳紋環頭大刀와 관련한 일본의 변화는 그 원인이 6세기 후반 당시 日本 列島의 재편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며, 그동안세토 내해를 중심으로 하고 있던 야마토 정권이 6세기 후반 이후에 각 지방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으로생각된다.한편, 한반도에서 나타나는 龍鳳紋環頭大刀를 살펴보면 이른 시기 한반도의 서남부에서 나타났던 龍鳳紋環頭大刀가 5세기 말-6세기 초에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정황을 살펴볼 수있다. 따라서 형태적인 유사성이나 공통된 제작기법 등으로 보아이는 백제로부터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이처럼 龍鳳紋環頭大刀는 백제로부터 가야와 신라뿐만 아니라일본 열도에 전해져 5-6세기 동아시아 각국의 역학 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특히 龍鳳紋環頭大刀를 분석하면, 기존 일본학계가 고대 한반도남부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 야마토 정권이라는 통설과 달리,한반도 남부는 백제의 영향권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analyze the Ring-pommel swords with dragon-phoenix decorations in ancient Korean peninsula and Japanese archipelago to underst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wo ancient countries. Above all, this study showed that the number of the Ring-pommel swords with dragon-phoenix decorations excavated from tumuli in Japan is larger than those in Korea. In the case of Japan, ancient Japan produced the Ring-pommel swords with dragon-phoenix decorations in the late 6th century, which were derived from the prototype of ancient Korea, especially Baekje(百 濟), suggesting that those were spread early to ancient Japan from Baekje. Especially, we could understand that the Ring-pommel swords with dragon-phoenix decorations was granted to Japanese King(倭王), as in the case of the Seven-Branched Sword(七支刀) in 408 A. D. We could also understand Baekje(百濟)’s influence on the southern Korean peninsula, which was based on the distribution of the Ring-pommel swords with the dragon-phoenix decorations in ancient Korean Peninsula and analyses of its shapes. Therefore, the correct analysis of the relationship between ancient Korea and Japan is that the situations of Korean peninsula in 5-6th century should be described from the Baekje(百濟)’s viewpoint, not from the Yamato government’s. In other words, it is reasonable that from the existence of the Ring-pommel swords with the dragon-phoenix decorations in the ancient Korean peninsula, southern Korean peninsula was administered by the Baekje(百濟), not by the Yamato gover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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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발리 춤에서 神과 人間의 類比關係 認識 硏究

정강우

한국동양예술학회 동양예술 제20호 2012.12 pp.4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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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니 발리에서 춤은 신앙자체이며 신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제의식에서의 시각적 헌물이다. 이는 사람이 신을 향한 감성적 응집의 사고적 경험이며 인간의 이성에 의한 시감각 적용에서 벗어난 것이다. 발리의 신앙에는 여타 종교에 있는 경전과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고 사원전체를 감싸고 있는 부조의 이야기와 인물들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조의 형태는 곧 신체로 모든 것을 드러내는 춤에 투영되고 심화되면서 급기야 신을 모사하려는 행동으로 신체에 고스란히 담게 된다. 그 결과로 춤의 감상을 통해 곧바로 신의 성질을 느끼고 신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은 경험을 이룬다. 춤을 통해 신의 기운을 감지하고 또 신과 같은 행동을 취해 삶에서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여 신앙적 이상에 도달한다. 이처럼 발리의 춤은 단순히 미적 체험물을 넘어 신과 사람과의 신앙관계에서 사람이 신과의 모사적인 관계를 추구할 경우, 사람도 신과 같은 성질이나 모습을 공통으로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유비’ 사고를 갖게 된다. 이러한 유비사고에서 근원된 춤은 정해진 법형식과 절차에 따라 정확하게 진행되면서 ‘마술적 영령’으로 나타나 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다. 발리에서는 춤-신-인간은 서로 융합하는 유비의 필연적 관계이며 이를 통해 삶에서 진정한 진리와 믿음을 실현하는 것이다.
In Indonesia, Bali, dance is whole religion or visual thing which show the god's form in the religious ceremony. This is affective cohesion's thought expression that head to god, and getting out from applying visual sensation by human's reason. The religion of Bali, didn't exist scriptures like any other religions. Instead, story of donation and personage does. So the form of donation is projected body to dance and getting more harder, in the end that likes to copy the god. So through the admiring dance, we can experienced to feel the character of god. Through dance, detecting the energy of god, also performing like god to goal to religion ideal. Like this, Bali's dance is if having relationship of copy with god, we can have analogy think. In Bali, Dance-God-Human are fusion each other to have analogy, and fulfill the real things and trusts in life from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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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복 저고리의 여밈에 관한 고찰

이상은, 김경미

한국동양예술학회 동양예술 제20호 2012.12 pp.8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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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밈은 의복을 착용하였을 때 옷깃이 교차하여 정돈되는 과정의 하나로 여밈의 종류로는 右衽, 左衽, 合任이 있으며, 좌임은 왼쪽으로 옷깃을 여미는 방법으로 고구려초기까지 사용되었으나, 중국 문화의 영향으로 좌임이 미개한 문화로 인식되어 사라지고, 현재에는 염습에서만 쓰고 있는 여밈의 방법이다. 우임은 오른쪽으로 옷깃을 여미는 방법으로 현재까지 유지되어오는 여밈 방법으로 일반성을 유지하고 있다. 합임은 중앙에서 마주 여미는 방법으로 덧저고리(마고자)에서 사용되었다. 저고리 여밈의 도구는 帶와 고름, 단추가 있다. 저고리의 길이따라 여밈의 도구가 변화되었다. 즉, 저고리의 길이가 엉덩이까지 오던 삼국시대에는 帶를 매어 여몄으며, 고려시대 저고리 길이가 허리를 덮는 길이로 이전시대보다 짧아지게 되어 帶 대신 가는 끈을 이용하여 여밈을 하였다. 이 가는 끈은 점점 길이가 길어지고 넓어져 옷고름을 발전하였다. 끈 하나로 연봉매듭의 기법을 이용하여 만든 맺음단추는 적삼에 사용되었다. 시대별 저고리의 변천을 통해 본 여밈의 종류와 도구는 고구려고분벽화와 사신도에 나타난 여밈의 형태를 살펴보면 左袵, 右衽이 공존하고 있으며, 여밈의 도구로 帶를 사용하고 신분에 따라帶의 너비가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즉, 서민은 가는 帶를 사용하고 신분이 높으면 넓은 帶를 사용하였다. 고려시대 저고리의 여밈은 右衽으로 통일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으며, 여밈의 도구로 帶의 사용보다 옷고름의 사용이 보편화 되었다. 여밈의 도구로 사용되는 옷고름은 겉고름과 안고름을 별도로 달아 여며 주었으며, 이때부터 옷고름이 등장하게 되었으나 끈에 가까울 정도로 가늘어 기능적인 역할만을 담당하였다. 조선시대 저고리의 변화는 후기로 갈수록 저고리 길이가 급격히 짧아지고 풍성했던 품도 작아졌음을 알 수 있다. 현대인들이알고 있는 전형적인 한복저고리의 형태가 갖추어지는 시기이기도하다. 여밈은 右衽이며 여밈의 도구로 사용된 옷고름의 변화는 조선전기, 중기는 기능성을 강조한 형태의 옷고름으로 고려시대보다 조금 길어지고 넓어졌다고는 하나 그 변화가 미비하던 시기이다. 조선후기로 가면서 옷고름이 여밈의 기능 뿐 아니라 장식적인 기능까지 더 하여 발전하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근ㆍ현대 전통저고리의 경우는 보편적으로 저고리 길이는 길어지고 여밈은 右衽으로 통일 되어있고, 여밈의 도구로 옷고름과 단추의 혼합형으로 이전 시대의 옷고름이 넓고 긴 길이로 중심을 잡아주었다면 현대의 옷고름은 편리함과 실용성을 강조하여 좁고 짧은 옷고름과 좁고 가는 옷고름이 공존한다. 이상에서 볼 때 한복저고리의 여밈은 전통저고리에서는 한복의고유성을 유지시키는 역할로서 右衽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유지되리라 생각되며, 여밈의 도구는 기능성과 장식성에 따라 변화의가능성이 무한하며 한복 저고리의 변화의 한 측면을 담당하는 부분이 되리라 사료된다.
Ye’mim is the way the collar and lapel of a garment are closed to make a neat appearance. There are 3 kinds of Ye’mim; Woo’im, Ja’im, and Hap’im. Ja’im is the collar crossed to the left. This Ye’mim was used until the early Gogurieuk period. People who used this type of Ye’mim after Korea accepted the Chinese culture of that period, were considered to be less educated and wary of the culture of that time. Ja’im is used only for Yumsip nowadays. Woo’im is the collar crossed to the right. It has been being used in public since its beginning. Hap’im is the collar lined up in the middle. It was used for Tutjagori. There are accessories for the closure of the garment in Ye’mim; dae, gorum, and buttons. These methods of closing are each used for a designated type of garment. Full length jackets coming to the mid-thigh in the Samguk period were closed with dae. Medium length jackets coming to the top of the thigh were closed with gorum, a piece of thin lace. Through time the lace became longer and wider to become Ut’gorum. Images of garments using each type of Ye’mim and their accessories can be seen in Goguriuek Gopunpyeokua, and Sashindo paintings. In the paintings can be seen ja’im, woo’im, and dae. The dae can be seen to be being used differently depending of the person portrayed’ social status. Wider dae was used by people in higher positions. Utgorum first appeared in the Gorieuk period, and throughout the period woo’im was the only Ye’mim used. The utgorum had 2 designations; inner and outer. Because the utgorum was so thin though, it was used solely for function, not for its beauty. In the Josun period the jackets became shorter and tighter around the chest. This style is the one most widely recognized as being the genuine traditional Jogori. Woo’im was closed with utgorum. Utgorum was more functional for the people of the Josun period. The utgorum became a little bit longer and wider but didn’t change much throughout the period. In the late Josun period utgorum changed from being simply a functional piece, to something more decorative, as well as maintaining its functionality. In recent history jackets became longer and Woo’im was being used. A combination of utgorum, and buttons were being used as accessories. It emphasized convenience and practicality by being narrow and of short length, as compared to the utgorum of Josun’s time. As a result Ye’mim must be recognized as an important and unique part of Hanbok, and it is important to consider it as part of Hanboks tradition. As far as the future is concerned it seems that Woo’im will be the Ye’mim of choice due to its history and recognition as being part of the genuine traditional Hanbok. The style of the accessories has the potential to change along with the Hanbok. The accessories will change according to the functionality and decorativeness people desire.

7,800원

4

米芾 書法의 특징 고찰

안병관

한국동양예술학회 동양예술 제20호 2012.12 pp.117-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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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는 동양예술의 여러 장르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동양의 사유와 문화의 특징을 가장 많이 內含하면서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대표적 예술로 일컬어진다. 서예는 동양의 사유와 문화의 창조실존형식이라 할 수 있는 음양ㆍ유무ㆍ흑백ㆍ허실 등 상반적인 모순대대요소의 조화ㆍ통일을 통해 내적 생명의 미적 존재 차원을 표현해내는 일종의 心象 예술ㆍ意象예술이면서, 이들 조화 통일이 구현해내는 심상 의상의 미는 필경 합규율성과 합목적성의 조화 통일이요, 필연과 우연의 조화 통일이요, 자유와 절제의 조화 통일이라는 점에서 和美 또는 조화미의 예술이기도 하다. 서예는 이상과 같은 속성과 특징을 내함하고 있으므로 하여, 지극히 순수하고 높은 차원의 경지에 진입한 서예가는 스스로가 창출해 내는 갖가지 자유로운 서예형식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기도 하고, 때로는 상상력의 격발에서 활성화되는 환상을 통해 해탈에 이르기도 하고, 때로는 환상의 끝없는 확대를 통해 불합리한 현실을 부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달관해 내기도 한다. 서예창작의 생명이 氣韻生動에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성실성과 진지성이 상실된 방자한 붓질에서 나온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그리고 외형적인 姸美와 淡泊美등을 연약한 것으로만 이해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자연미ㆍ醜拙美ㆍ雄渾美 등을 창출시키고자 붓의 收起와 운행길로부터 과도하게 벗어나서도 안 된다. 자연스럽게 오가고 들고나는 붓의 바른 길 속에서 무리 없이 이루어진 것임을 알아야 하겠다. 사실 송대 서예의 특징은 “意”를 尙意했다는 점이며, 미불은 이러한 서풍을 기본으로 하였다. 미불은 어렸을 때에 어머니의 출신의 이유로 좋은 작품의 진적을 많이 보고 자라면서 훌륭한 식견을 가져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지방관 시절에 많은 명사들과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서 또한 풍부한 인적 교유와 관점의 확대를 가졌다. 그의 이러한 행적 이면에는 당나라 복장을 착용하고, 지나친 결벽증과 돌과 서화에 대한 집착이란 이면이 따라 다닌다.그리고 그의 학서 과정은 평생에 걸쳐 진행되는데 안진경을 시작으로 하여 구양순, 유공권, 저수량, 심전사 등을 배워나갔다고 자술하였는데, 이것 이외에도 당연히 二王의 글씨를 포함하여 많은학습을 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확연히 이해할 수 있다.미불은 이와 같은 법고의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자기만의 서풍을 만들어 갔는데, 여러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趣”를 중하면서도 無意做作의 평담미를 중시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상당수는 이를 노장의 무위자연에 따른 예술의 자유성 강조를 근거로 삼기도 한다.
书法东方艺术的各种流派只有一个,但也被称为最具有代表性的艺术,表 达东方的思想和文化的特点,大多数内含. 书法东方理由和文化的创造性的存 在形式,如阴与阳,存在和黑色的和,白和heosil相反到抵触营元素的和谐统 一内生活的审美存在的维度,以表达那种心象艺术ㆍ意象艺术和推形象的服 装,这些和谐统一,实现所谓的统一和谐,和谐的自由和节制。终局和美或調 和统一,和谐统一的必要性和机会。和美或調和艺术。如时间更长,內含的性 质和特点,所以书法进入到一个国家的纯洁和非常高维书法家,自己创造各种 免费书法式的自我实现,有时在想象中被激活的打击乐通过解放从虚幻与现 实,有时幻想的无限膨胀,不合理的,消极的,有时在现实中達觀赌注. 书法 创意生活,气韵生动失去了它的完整性和眞知性笔触是一种误解是不。由此超 越了自然的美丽和理解,只有向外姸美淡泊美ㆍ丑拙美ㆍ雄浑美的创建和从站 和党}的刷收起过度外不软。当然大量的保持合理的宽容,以正确的方式刷,我 就知道。事实上,这些特征的宋代书法和尊敬的“意”(尙意)是优秀的西风基 本. 杰出当你是一个孩子的母亲的原因,看到了很多的逐步成长起来的良好的 工作和能够继续带来很大的启示. 和总督是一个机会,以满足许多名词,也有 过丰富的个人相识的角度扩大.在他的行为唐代的服装穿在石头上,书法,和过 度是痴迷与伊朗。 这是除了他的學書一个终生的过程,这是穿孔问题,歐陽詢,水库容积, 心脏的的转录起始顔眞卿等移动学习,进步二王信,当然,其中包括了很多学 习中,我们可以清楚地可以理解的。拖欠去创建一个新的自我西风通过这样的 偏平淡许多学者的共识,强调“趣”的过程中,但美国无意做作更大的价值。, 其核心特点是“刷”党}。,强调艺术的自由的基础上心爱的也很多无为而治。

6,900원

5

조선시대 향교 건축의 공간 구성 -기문 및 문헌자료를 중심으로-

조상순

한국동양예술학회 동양예술 제20호 2012.12 pp.147-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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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건축물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모습과 형태를 갖추면서 변화하여 왔다. 문화재의 元形1)을 언급하거나 건축물을 수리할 때에는, 역사적 변화과정을 감안하여, 각 시대의 흔적이 유지되도록 하되, 완전성과 진정성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향교는 고려시대부터 존재하여 온 대표적인 조선시대 건축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다양한 시각에서 이루어져 왔으나, 대부분 현존하는 형태와 공간에 대한 유형학적 연구에 그쳤으며, 이의 원형과변화 과정에 대한 고찰은 부족했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문헌자료를 근거로 현존향교의 공간 구성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현재와 같이 정형화 하였는가’에 대하여 고찰하여, 내재된 공간 구성의 기본 원칙과 변화과정을 체계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으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문헌에 나타난 조선 전기(1530년대) 향교는 328개이며, 과반수인 65.6%의 향교가 邑治의 동쪽과 북쪽에 입지하였고, 읍치와의 거리는 5리 미만이 86.9%였다. 향교의 입지는 개인 주택, 사찰터 등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하기도 하였다. 좌향은 기본적으로 남향을 선택하였으며, 이는 조선 중기이후에 향교 입지 선정의 기본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둘째, 대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향영역과, 명륜당을 중심으로 한강학영역은, 조선 전기 향교에서 하나의 공간에 존재하고 있었고, 조선 전기를 거치면서 현재와 같이 구분되었다. 특히 명륜당은 조선 전기를 거치면서 향교의 구성 요소로 자리하게 되었으며, 조선중기에 창건되는 경우도 있었다. 셋째, 두 영역은 전후 관계에 따라 소위 ‘前廟後學’과 ‘前學後廟’, 두 가지 유형의 배치로 구분된다. 後者는 이미 중국 宋代 지방 향교 배치에 적용되고 있어, 이러한 배치는 지방 향교가 갖는보편적 배치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넷째, 開城 成均館2)이 후자의 배치를 갖고 있는 반면, 서울 成均館이 전자의 배치를 갖게 된 배경은, 서울 성균관이 유교적 예법을 강조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 성균관과 같은 배치를 갖고 있는 전주와 경주의 향교는 이를 모방하여 건립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다섯째, 경상도에 위치한 자인향교의 경우 조선 초 선산의 해평향교, 강릉의 연곡향교의 예에 따라 건립한 기록이 있어 경우에 따라 타 향교를 모방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여섯째, 명륜당은 15c까지도 일반 향교에 보편화되지 못했으며, 이것이 제도화되어 정착되는 시기는 16c전후이다. 조선 후기에는 건물 간 배치 관계가 명확해졌고, 소위 ‘上殿下堂’의 원칙이 완성되었다.
Historic buildings, depending on the era, while equipped with a variety of looks and shapes have changed. So, whenever we mentioned about its original68) form or repair it, under consideration of its historical process of change, we should pay attention to keep its traces of each periods and also consider its totality and authenticity. Hyang-gyo69) has existed since the Goryeo Dynasty(A.D. 918-1392) and it is a representative architecture of the Joseon Dynasty(A.D. 1392-1910). And researches about it has been made from a various viewpoints. But most in cases, it concentrated on its typological research on form and space of present state. And there was the lack of consideration for the originality and the process of change. In this study, based on literatures throughout the Joseon Dynasty, I have considered the process of change of the spatial configuration of current Hyang-gyo architecture. By this, I tried to examine systematically the spatial configuration of the basic principles and processes of change inherent. The results are as follows. The First, the number of Hyang-gyo of the early Joseon period(A.D.1530s) in the literature are 328. More than half of them are located eastern and northern area of village or city. And 86.9% of them are located within 2km's distances. In some cases, Hyang-gyo located on past-residence or past-temple site, and basically they were set southward. The second, the shrine zone centered by Dae-sung-jeon and the school zone centered by Myung-ryun-dang was originally existed in one space in case of beginning period of Joseon Dynasty. And they divide into two zones during former term of Joseon Dynasty. Especially, Myung-ryun-dang start to exist during former term of Joseon Dynasty and in some cases, it was build first during medium term of Joseon Dynasty. The third, these two zones would be layout as two types. The one is front-shrine and rear-school and the other is front-school and rear-shrine. As the layout of the latter was already adopted in Chinese local Hyang-gyo during Song dynasty(A.D. 960-1279), so this type of layout could be a typical one in hyang-gyo. In case of the former layout, it was the unique one of Joseon dynasty. The forth, there are two Sung-kyun-kwan which are the top educational institutions in Goryeo and Joseon dynasty. But they have different layouts. And the reason must be a difference of emphasis on Confucian etiquette and the one of Joseon dynasty take a front-shrine and rear-school layout. In cases of hynag-gyo in Jeonju and Gyeongju have imitated the layout of Sung-kyun-kwan of Joseon dynasty. The fifth, in case of hyang-gyo in Jain, it imitated the hyang-gyo in Hae-pyong of Sun-san and the hyang-gyo in Yeon-gok of Gang-neung in early Joseon dynasty. And it means that there were some cases of imitations regardless of the area. The sixth, Myung-ryun-dang(a study building) was not being common until 15th century. And its institutionalization and settlement period is around 16th century. During late Joseon dynasty, the clear relationship between buildings was placed and the principle of 'upper-shrine & below-school' was completed.

8,500원

6

세종의 음악 정치 목적과 방법 고찰

송혜진

한국동양예술학회 동양예술 제20호 2012.12 pp.187-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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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세종대에 이루어진 여러 가지 음악관련 일들을 ‘음악정치’ 관점에서 재조명하였다. 음악은 감정의 언어로 인간의 감정을 유발, 발산, 정화, 격려하며, 메시지를 전달한다. 감정 언어로서의 음악의 성격은 고대로부터 인지되었다. 그래서 국가가 애써 교육하고 퍼뜨려야 할 음악과, 배격해야 할 음악을 분류하고, 국가의 지도자는 ‘건전한 음악’, ‘교육하기에 적합한 음악’, ‘바른음악’을 알고, 국민들을 ‘바른 음악’의 세계로 이끄는 것을 중히 여겼다. 이처럼 음악을 정치의 목적과 수단을 위해 어떤 음악이‘선전(propaganda)’되고 ‘금지’되었다. 이 같은 예는 중국의 고전樂記의 예악론에서부터 서양의 근현대사에서 이루어진 다양한음악정치의 사례까지 무수히 많으며, 관련 연구도 적지 않다.기존의 연구에서 세종의 음악정책을 예악론과 연관지은 논의는있었으나 음악정치의 관점에서 세종의 음악정치 역량, 목적, 방법,평가 등을 고찰한 논저는 없었으므로, 본고에서는 이에 초점을 두었다. 음악정치의 성공여부는 통치자의 음악 이해도와 관계가 깊다.이 관점에서 볼 때 세종은 음악 소양을 갖추고, 이론적 체계를 공부하였으며, 일상에서 향유할 줄 아는 知音 군주였다. 이를 토대로 세종은 尊卑의 차등이 분명하되 각기 능멸하지 않고 크게 조화를 이룬다는 예악론을 현실에 구현할 수 있었다. 또한 직접 신악을 창제하고, 악보를 창안하였다는 점에서 세종은 음악정치를 주도할만한 역량을 충분히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세종의 음악 정치 목적에 주목해 본 결과, 守成期의 정치상황을음악으로 풀어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세종은 上下通情의 화합을 도모하고 건국의 명분과 정당성을 펼치는데 관심이 높았다. 세종이 정치의 목적을 담은 歌詞 짓기를 독려하여 수십곡의 樂章이 新制된 점, 여러 곡 중에서 선왕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의 노랫말을 선별하여 가사에 담긴 ‘이야기’를 직접 작곡하여 발표한 일련의 과정들은 세종의 정치적 목적을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다. 세종이 택한 음악 정치의 방법은 첫째, 백성들과 교감할 수 있는 음악언어, 즉 향악의 선택, 둘째, 가사에 담긴 내용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악가무 종합구성 양식의 선택, 셋째, 전파, 전승을 위한 기록방법 고안, 넷째. 강제적인 선전이 아닌 점진적 교화였다. 세종은 건국 정당성과 선왕의 업적을 기리는 노랫말에 전통적인 예악론에서 중시되는 ‘아악’ 대신 고려 전래의 토속성 강한 향악을 선택하였다. 이는 사람과 지리, 기질, 풍토에 따라 말과 音이다르다는 점을 간파하고, 백성과 교감하는데 향악의 음악요소가보다 효율적임을 판단한 결과였다. 세종은 정치적 목적을 담은 가사를 연주와 노래뿐 만 아니라 복식, 儀物을 갖춘 무용수들의 움직임 등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진 대규모의 작품으로 완성하였다. 이는 단순한 이야기의 전파를 염두에 둔 민요풍의 노래만들기가 아니라, 왕조의 위엄과 권위를 시각적, 청각적으로 공감하게 하는 장치로서 중요한 선택이었다고 판단된다. 한편, 세종은 새로이 제정한 음악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연주제도를 만들고, 악보를 편찬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를 강제로 선전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즉, 음악정치에서 흔히 논의되는 독재자들의 음악정치 선전 양상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밖에 세종은 국가의 풍속을 바른 데로 이끈다는 명분으로 불교 및 무속관련 음악을 ‘폐풍’으로 규정, 통제하고, 향락적인 유흥은 금하였다. 그러나 통제의 방법에서도 오래된 풍속이어서 백성들이 알지 못하여 죄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점진적인 방식을 택하도록 하였으며, 예악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원론에는 맞더라도 관습을 참조하여 규제를 유예함으로써 통제가 억압과 독재에 이르는 것을 방지하였음을 밝혔다. 이같은 세종시대의 음악정치는 동시대에는 대내외적으로 예악문물이 중화에 못지않으며 周 시대의 이상을 재현한 것으로 평가받았고, 후대의 통치자들에게는 예악으로 善政을 펼친 성군으로 인식되고 있다.
In politics, music has been exploited as one method used to govern a country. In the ancient document, Akki, Ye-ak (the formal practice of human ethics and music) is defined as the root ideology used to govern the country, and politics can be comprehended by the understanding of music. Based on various examples related to the exploitation of music in politics in the history of Western society, the notion that music is political whether fair or foul has been current for a long time in western society as well. Therefore, the relation between music and politics is surely very close. If we look at aspects of music based on a political view, some music takes on the role of propaganda while other music is prohibited. Also, some musicians use their music to praise somebody or something while others use their music to oppose. Music is a language of emotion. It induces and releases the emotion of human beings. At the same time, it also purifies and encourages people's emotion, and delivers a message. The characteristics of music as a language of emotion have been recognized from ancient times. Therefore,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 state assorted music into several various kinds such as music that should be promulgated and distributed, and music that should be rejected. It was regarded as an important matter that the leader of the state understood 'healthy music', 'music that is suitable for education', and 'correct music', and thus guided the people to the realm of 'correct music'. From the early Joseon dynasty, Ye-ak (thought based on Confucianism) was regarded as the basic ideology of society. The realization of politics with human ethics and music was a significant issue since the early years of the dynasty. Therefore, in this period, the organizing and institutionalization of the state's ceremonial music based on this ideology was a matter of great concern. In particular,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the degree and extent of effort aimed at achieving this end reached a high point. In this paper, I have re-examined various achievements related to music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based on a political point of view. Sejong was well equipped in this regard, since he had learned about the theory of music and was able to enjoy music in his daily life. With this background, he organized court music, created new musical pieces, and used these pieces in various court ceremonies and parties. There were three purposes for this. First, it was to maintain the Ye-ak concept that is possible to distinguish between the high and the low but at the same time to create harmony between them. The second purpose was to promote accord and good rapport between the high and the low people throughout times of prosperity. The third was to clearly define the justification and legitimacy of the state's foundation. Numerous songs were created, and performance forms mixing song and dance were selected to express 'stories' of the songs' texts in synesthetic metaphor. Such presentations were stylized, and high levels of performances were accomplished with appropriate costumes, accessories and movements. Although Aak, which had been introduced from China and influenced by its music, was used in court music during his time, several elements from native Korean traditional music were also adopted based on Sejong's understanding that the language and music must be different according to people, geography, tendencies, and natural characteristics. A new system of dissemination was established, and several new score books were published to promulgate achievements. However, no enforced propaganda was carried out. Music and dance related to Buddhism and Shamanism were restricted, and this was justified on the grounds that the state's custom had to be guided in a correct direction. Also, entertainment merely for pleasure and enjoyment was prohibited. However, enforcement progressed gradually, and several regulations were postponed, and so national control never reached a level of oppression or dictatorship. Such achievements related to the exploitation of music in politics were well evaluated during this time. It was also deemed that the Korean Ye-ak culture was well established, and conducted just as well in Korea as in China, such that it was often compared to the ideal level of the Chu state of China when the Ye-ak ideology had reached its climax. In addition, Sejong has been recognized, even up to now, as a good and wise king who governed the people very well using Ye-ak thought and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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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조선시대 주현사직단의 시설 및 부속 건축물 설치에 관한 연구

유훈조

한국동양예술학회 동양예술 제20호 2012.12 pp.221-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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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는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 제사하는 ‘사직단’을 세우고 이곳에 제사하며, 농업 중심국가로서 풍요와 평화를 기원했다. 사직 제도를 정립하기 위해 태종은 전국적으로 각주부군현의 행정 단위마다 사직단을 세우고 사직의 신에게 제사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국왕의 명에도 불구하고 주현사직단은 그 크기와 형태, 그리고 형식에서 통일되지 않고 다양하게 세워졌다. 현사직단 영역 내에는 제단과 신실, 유와 홍살문 등이 배치되었는데 각각의 배치방식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제사를 위한 제단의 개수, 크기와 형태, 제단의 계단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반면 제단의 방향에서는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단의 보호시설인 유ㆍ장ㆍ원에서는 크기와 형태, 개구부방식 등이 달랐으며 홍살문의 형태와 설치 방식 또한 다양했다. 신실과 재실 등 부속 건축물에서 건축물의 명칭과 재료, 형태와 크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차이를 보였다. 이러한 차이의 원인으로는 첫째, 예제의 규정보다는 사직단이 위치한 자연환경에 대한 고려가 우선했다. 둘째, 지방 읍치의 제사시설 운영방식과 경제력 등 인문환경에 맞추어 설치되었기 때문에 주현사직단의 유형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다. 셋째, 주현사직단의 시설과 부속 건축물은 여러 제사시설이 있었던 당시의 사회상황에서 유지관리와 제사 수행의 합리성을 우선 염두에 두고 설치되었다. 넷째, 지방 백성과 관리들의 관심도와 유지관리의 수준 역시 주현사직단의 차이를 가져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 Sajik-dan altar' which held memorial service for the god of the earth 'Sa' and the god of grain 'Jik' was made and prayed for prosperity and peace as a nation centered around agriculture. King Taejong commanded to install the Sajik-dan altars in every national administrative units and to hold a memorial service for establishing the system of Sajik. However, despite the command from the king, the Ju/Hyeon Sajik-dan altars which were the local Sajik-dan altars were installed not showing the unity of the sizes, shapes and formats. Altars, Sinsil, fences and a red gate with spiked top were placed within the area of Ju/Hyeon Sajik-Altars, and they showed much difference in the each installed location, methods and the presence of the facilities. These differences are considered to be due to the different natural environment for each Ju/Hyeon and the social conditions when installing Ju/Hyeon Sajik-dan Altars, as a result, each of the facilities and attached buildings are appeared in a wide variety of forms, numbers and locations. The causes of these differences are, first, they prioritize the natural environment where sajik-dan Altars was located rather than the Confucian ritual codes. Second, the types of Ju/Hyeon Sajik-dan Altars varied as they were installed to fit the operating manners of memorial services, economic power and human environment of local administrative centers(Eupchi). Third, the facilities and attached buildings of Ju/Hyeon Sajik-dan were installed, keeping in mind of maintenance and rationality of the performing the memorial service at the time when various facilities for the memorial services existed. Fourth, the degree of interest and maintenance of the local people and the government officials were the major causes for the difference in Ju/Hyeon Sajik-dan Al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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葦滄 吳世昌의 題跋의 時宜性 연구

이승연

한국동양예술학회 동양예술 제20호 2012.12 pp.265-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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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한국미술사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葦滄 吳世昌이 남긴 題跋에 관한 연구이다. 제발이란 크게는 글씨나 그림에 대한감상을 서화작품이나 비첩 등의 앞과 뒤에 기록한 문장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기 安平大君의 <夢遊桃園圖>의 발문에서 시작되어 이어지다가 秋史 金正喜가 38편의 제발을 남긴 이후 위창이 170여 편의 제발을 남겼다. 위창의 제발문은 서화작품과 서화첩, 금석탁본 등의 작품에 쓰여졌으며, 특히 제발이 가장 많은 서예작품 중에는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이나 탁본을 통해 書蹟의 소재, 시대, 서체의 특징, 풍격 등을 기록하고 있어서 그의 학맥인 실학적 예술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특히 국내작품으로는 추사학맥의 서예작품이 주가되었으며, 회화작품은 주로 조선후기와 근대 작품에 남긴 제발이 많다. 그러나 위창은 회화작품에 남긴 제발에서도 당시 상황과 심정을 대변할 수 있는 작품인 추사의 <歲寒圖>를 비롯하여, 민영익의 <露根墨蘭圖>에서 당시의 시대적 아픔을, 申潤福ㆍ金弘道ㆍ金得臣의 그림에서는 같은 中人으로서의 신분적 공감을 하였고, 추사와 翁方綱ㆍ田琦ㆍ權敦仁 등의 서첩 등에서는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유감없이 드러내어 고증에 의한 평가와 서평을 적고 있다. 이외에도 한국과 중국의 대표적인 비문의 금석탁본 84편의 제발에서는 雙鉤 형식을 도입하여 작품성을 倍加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위창의 시대적ㆍ신분적ㆍ학문적 時宜性에 의한것으로 추사 학맥과 고증학의 학맥을 따라 표출되는 그의 예술관에서 기인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This treatise is the study on Jebal(題跋) which was remained by Wichang, Oh, Se-chang (葦滄 吳世昌) called as the father of Korean art history. In the wide meaning, Jebal is the description of impression about the calligraphy works or pictures on the front or rear of calligraphy works, album of rubbing, and pictures, etc. In our country, Jebal started with ˂Mongyudowondo(夢遊桃園圖)˃ by Prince Anpyeong in the early Chosun. And since Chusa(秋史) had left 38 pieces of Jebal, Wichang left more than 170 pieces. Jebal of Wichang remained on the calligraphy works and the pictures , on the album of paintings and writings and on the rubbing of metal or stone. He remained the footprints of calligraphy, its material, its age, the characteristics of calligraphy style and the style, etc, in many calligraphy works. In the result, we can see his positive view of art which was his spirit of school, as it was, through Jebal on the relics or rubbing we can actually ascertain. Especially in the domestic works calligraphy works of Chusa's school were major, and for the pictures there were remained the large number of Jebal in the works of the later Chosun and the modern age. In Jebal that Wichang had left on the pictures, he expressed the circumstance of that time and his feeling. He revealed the pain of the times in ˂Sehando(歲寒圖)˃ by Kim Jeong-hee(金正喜) and ˂Nogeunmukrando(露根墨蘭圖)˃ by Min Yeong-ik (閔泳翊) and also he disclosed his anguish of social position in the intermediary class on the pictures by Shin Yun-bok(申潤福), Kim Hong-do(金弘道), Kim Deuk-sin(金得臣). Moreover, through historical investigation he wrote the evaluation and review for the calligraphy albums by Chusa(秋史), Ongbangang(翁方綱), Jeongi(田琦), Kwondonin(權敦仁) and others. He fully showed his own learning and thought in them. In addition, he introduced the form of Ssanggu(雙鉤) and doubled the value of works on Jebal of the famous 84 pieces of rubbing in Korea and China. I think the inclination came from his circumstances he was confronted with like as the times, the social position and the learning. His view of art originated in the spirit of Chusa's school and methodology of historical research as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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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상의 『12월12일』에 발현된 무의식연구

강윤신

한국동양예술학회 동양예술 제20호 2012.12 pp.303-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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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운명’으로 태어났지만, 끝내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이상. 이상은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다른 운명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곧 자아재생을 꿈꾼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바, 결국 이상은 한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우연에 의한 것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12월 12일』을 통해서 자신의 불행할 수밖에 없었던 삶 역시 운명이라는 우연이었음을 토론한다. 그간 소설 『12월 12일』의 (조두영) 연구를 살펴보면 이상의 무의식세계를 어머니에 대한 모태회귀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상의 정신세계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에 대한 양가감정에 대한 보다 정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이에 본 연구자는 어머니에 대한 양가감정으로 접근하여 프로이트의 영유아의 정신성적 발달단계와 직접 연결시키고자 한다. 이상은 무수히 모태회귀를 갈망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머니와의 단절을 꿈꾸는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와의 일치감이 형성되지 못하고 큰집으로 양자로 보내졌기 때문에 결코 성공할 수 없었다. 어머니와의 완전한 일치감을 형성한 다음단계에서만이 어머니에게로부터 자아독립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상의 어머니 천시실패는 그가 타고난 운명처럼 어쩔 수 없는 저장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운명까지도 새롭게 만들고 싶어 했으며, 결국 재생을 꿈꾸기에 이른다.
Though Lee Sang was adopted to his father's elder brother's family, he was dominated by the thought that he was abandoned by his parents in unconsciousness. According to Spitz, people who lost their birth mothers around when weaning have a huge mental blow, and even can be killed by it. When they are grown up to kids, they are very quiet, feel cheap and live under the feelings like rage for being abandoned, and a guilty conscience and self-contempt caused by self-interpretation in which they think that they probably have done something wrong. Such an anaclitic depression becomes a basic emotion of them, and this is left as a basic emotion in unconsciousness even after being adults. If they encounter something similar to the shock from losing mothers in childhood like divorce, bereavement, rejection and losing a job, the symptoms of depression come back even when they are adults. Lee Sang's 'Sad Story' was written in 2-3 years after his uncle died. Around that time, Lee Sang started living back with his birth parents and a grandmother. ‘Someday, I will go down secretly while you guys are in deep sleep. This is the only thought written. Without telling to my parents or calling my friends, I will go down like a child that is abandoned…’ This is Lee Sang's revelation of unconsciousness in which he will not look after his parents after going down when they are asleep(just as he was one day moved to his uncle's house while he was sleeping in his childhood), just like they abandoned him while he was sleeping. Like above, Lee Sang's sense of abandonment was hiding in his unconsciousness with grudge, anger, revengeful thought and self-destroying drive even after being an adult. On the other hand, Lee Sang was running around the alleys whenever he missed his mother. He probably hope to meet his mother who was selling muk(jello) by chance. Lee Sang showed remarkable double-sided feelings about his mother. From the novel, 'December 12th', Up feels scared by his anger. He is terribly angry especially when Lee Sang Misses his birth mother. At that time, Lee Sang probably felt a fear of castration. In this novel, he becomes the uncle that is his foster father. Children who earlier experienced consentience with their mothers mostly give up their mothers due to the fear of castration. Going through this process, children in the phallic stage overcome incestuous Oedipus complex. However, it might not be easy for Lee Sang to overcome Oedipus complex. Thus sea bathing becomes a link to his mother. The sea bathing is the ocean which is the amniotic fluid in mother's womb. In Lee Sang's unconsciousness, the nurse C in the novel reveals as Lee Sang's mother. Going to the beach with the nurse C who is Up's lover is Lee Sang's unconscious desire to go back to the inside of his mother. The novel burns down a bathing kit that contains such meanings. Wby Lee Sang, but by him(uncle). It was a defense against incest, performed not by himself, but by others. With the second arson, however, Lee Sang buys a bathing kit and burns it in front of him. It could be a revenge that has been dreamed on him(including his parents) and also killing mother with his self-will. However, killing mother here means not mature self-independence from mother, but a mental state that denies his mother. He who denies his mother 'has to forget about the past' and deny himself. He who denies himself has no choice but killing himself. As Lee Sang carries out revenge with his death, he dreams of regeneration. The new generation is clearly described in the novel. It shows his thought about destiny and coincidence that can change someone's destiny. And in seven years, the existing cells will be all dead and replaced by new ones. The existing studies on the novel, 'December 12th' usually analyzed it as double-sided feelings and returning to matrix. However, this study examined it in connection with Freud's infants mental/sexual development stages by approaching more detailed double-sided feelings about mother. Lee Sang's unconsciousness is not formed unilinearly. While he longed for returning to matrix so bad, he also attempted to overcome Oedipus complex as dreaming of cutting off from his mother. However, it might not be successful to do that because he was sent to his uncle's house when he had not yet form consentience with his mother. It is because it is possible to have self-independence from mother only in the next stage after forming a complete consentience with mother. Just like his destiny, Lee Sang's failure in disdainingith the first arson, Up's bathing kit was burnt, which is the arson not mother is just stored. However, he wanted to newly create his destiny and eventually, it might become a chance to dream of regen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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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일원론적 세계관의 복원과 시서화 수행

신현경

한국동양예술학회 동양예술 제20호 2012.12 pp.327-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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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근대화는 데카르트적 관점에 의한 西洋化의 과정이었고, 오랜 기간 지켜왔던 전통문화를 잃고 주변화 되어 정체성마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서양화된 동양문화는 이러한 시각의 변화와 함께 자기중심적 시각의 한계는 강화되었으며, 일원론적 세계관은이원론으로 분리되고 좌우뇌를 조화롭게 활용하여 관계적으로 ‘보는 관점’을 상실하게 하였다. 이 논문은 현대의 데카르트적 관점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이를 해결 하기위하여 일원론적 관점을 회복하기 위하여 동양의 전통교육이었던 시서화 수행 과정에 드러나는 정신적 작용의 가치를 살펴본다. 전통 사회에서 문인들의 교육은 유ㆍ불ㆍ도 동양철학을 기본으로 하는 서예의 문자적 표현과 회화의 시각적 표현이 결합된 시서화 일률로서 그 작업 과정은 수행이었다. 시서화 수행의 일원론적 관점은 1)사실과 추상의 매개로서 상징과 은유를 통한정신(보이지 않는 세계)과 물질(보이는 세계)의 합일, 2)표현 매체로서 시ㆍ서ㆍ화 일률, 3)석도의 일획론에서 심상의 전달매체로서 형상화 과정을 통한 마음과 그림의 합일로 설명할 수 있다. 문인들이 지녔던 우주를 아우르는 일원론적 시각의 회복을 근대의시각적 왜곡으로 인한 자기중심적 시각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안한다.
The modernization of East Asia has been a process of Westernization that has involved the growing dominance of the Cartesian perspective. The region’s monistic worldview has been distorted by the Cartesian dichotomy, and many Asians have also lost sight of their true identity. Traditionally, Eastern education consisted of the visual and literal practice of shishuhua, which combines poetry, calligraphy and painting. The education of the Eastern literati was based on the ancient philosophies of Confucianism, Buddhism, and Taoism. Poetry, calligraphy and painting, the literati's modes of expression, were characterized by the theory of oneness, and the process of making art also played a role in meditation. This paper considers the value of the spiritual function revealed in their shishuhua practice. The literati’s monistic perspective can be explained as 1) the unity of the material (visible) and spiritual (invisible) worlds, joining the real and the abstract; 2) the unity of shi (poetry), shu (calligraphy), and hua (painting) into one expressive medium; and 3) the unity of the mind and the picture through the visualization process, used to liberate one's mind as explained in Shitao's oneness of painting theory. This paper proposes that restoring the literati's united vision can serve as a viable method of overcoming the self-centered visual limitations imposed by the Cartesian persp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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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성과 소통가능성으로서 예술론에 관한 연구 -한국서예의 근·현대성(Modernity) 문제를 중심으로-

이종선

한국동양예술학회 동양예술 제20호 2012.12 pp.359-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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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예술로서의 서예는 근ㆍ현대 예술로서가 아니라, 여전히 전근대적 가치체계 안에 놓여있다. 書如其人 등의 수양론적 접근이서예의 주류를 이루며, 훌륭한 인격이 선행되지 않으면 작품성은 논의할 바가 못 된다는 담론이, 서예의 현실적 실체들과는 무관하게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서예’를 예술의 근대성 지표인 ‘자율성’의 측면에서 ‘정감을 대상화한 형식’ 또는 ‘의미 있는 형식’으로 인식하는 견해가 제출되기도 한다. 취미론적 견지에서 ‘의미 있는 형식’으로 이해된 서예에서는 수양론적 인식은 부정되고, 인성이나 실용, 효능 등과는 무관하게 美 그 자체, 서예 그 자체를 예술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수양론적 서예관이 서예를 인성이나 개인적 수양에 종속된 것으로 인식하며 근현대 예술로서 서예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 반면, 취미론적 서예관은 서예 그 자체의 자율성을 어떻게 확보하고 규정지을 것인가에 대한 합리적 대답을 내놓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이러한 서예에 대한 이중적 인식은 자본의 시장논리와 맞물려 한국서예의 침체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 논문에서는 서예를 근ㆍ현대적 예술의 지표로서 자율성을 중심으로, 수양론적 서예관과의 관계를 고찰함으로써 서예와 非서예적 관계들의 소통가능성을 검토해 보려고 한다. 자율성과 소통가능성의 문제는 서예에 있어서 ‘예술로서의 서예’와 수양론에 근거한 ‘교육으로서의 서예’로 대두된다고 할 수 있다. 근대사회의 여타의 예술처럼 서예에도 자율성을 부여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자율성을 중심으로 소통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면 Modernity와 Post-Modernity의 담론과 지표들의 혼재 속에서, 그리고 자본의 논리가 시장을 지배하는 엄정한 현실 속에서, 오늘의 예술로서 서예가 부흥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적 의미에서 서예를 어떻게 개념적으로 정의하며, 서예에게 현대적 예술성을 부여해 줄 것인가에 대한 담론의 논의의 시급성을 요구한다고 하겠다.
Korean calligraphy still lies in the premodern value system not as modern․contemporary art. Self-cultivated approaches such as Seoyeogiin (A handwriting reflects the personality of a person) etc. is the mainstream of calligraphy and discourse that work quality cannot be discussed if not preceded by great personality is formed independent of the practical realities of calligraphy. However, a view recognizing ‘calligraphy’ as ‘the form objectifying sentiment’ or ‘meaningful form’ in terms of 'autonomy', the modernity indicator of art is also presented. It is the argument that self-cultivated perception should be denied and beauty itself, calligraphy itself should be understood as art regardless of personality or practicality, efficacy etc. in calligraphy understood as ‘meaningful form’ from the standpoint of the theory of taste. However, while the self-cultivated view of calligraphy that may result in denying calligraphy as modern․contemporary art, perceiving calligraphy as dependent on personality or personal cultivation, the taste theoretical view of calligraphy did not present a reasonable answer on how can secure and prescribe autonomy of calligraphy itself. This dual recognition for calligraphy seems to act as the cause of stagnation of Korean calligraphy in line with market force of capital. This thesis attempts to examine the possibility of communication of calligraphic and non-calligraphic relationships by studying the relationship with the self-cultivated view of calligraphy focusing on autonomy as the indicator of modern․contemporary art. The issue of autonomy and the possibility of communication can be said to be raised as ‘calligraphy as education’ based on self-cultivation and ‘calligraphy as art’ in calligraphy. If autonomy can be granted to calligraphy like the other arts and the possibility of communication can be secured focusing on the autonomy, the possibility of revival of calligraphy as today’s art can be secured in the mixture of discourse and indicators of Modernity and Post-Modernity and in the strict reality where the logic of capital dominates the market. Therefore, discourse on how calligraphy is conceptually defined in the current sense and can grant modern artistry to calligraphy is urgently required to be discus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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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헤어 이미지 스케일링에 관한 연구

정연자

한국동양예술학회 동양예술 제20호 2012.12 pp.387-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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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스타일링에 있어서 퍼스널 컬러와 얼굴형에 맞는 메이크업과 헤어 스타일링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실 한복 메이크업은 피부계절형과 한복의 색에 맞는 섀도 표현에 따른 아이 메이크업을 하는 것 이상으로 메이크업 패턴에서 특별한 디자인이 요구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헤어스타일은 한복 이미지에 맞는 헤어디자인이 요구되기 때문에 헤어이미지 스케일링과 한복 이미지 스케일링은 필요하다. 본 연구는 I.R.I 이미지 스케일에 따른 형용사 이미지 스케일과 배색 이미지 스케일을 알아보고 이에 따라 헤어 이미지 스케일링과 한복 이미지 스케일링을 함으로써 이미지 스케일에 따른 한복의 표현 방법을 살펴보고 헤어와 한복의 이미지스케일링을 통해 한복 스타일링의 기초 자료를 제시하고자 한다. 연구 방법으로는 문헌고찰과 사진자료를 통한 실증적 고찰을 병행 하였다. 헤어와 한복의 이미지 스케일링을 위한 사진자료는 각 종 인터넷 자료 검색을 이용하였다. 사진 자료를 수집, 조사, 분석, 평가하여 I.R.I 이미지 스케일의 10개 이미지를 중심으로 이미지 스케일링을 하였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미지 스케일은 깨끗한, 은은한, 소박한, 정감 있는, 화려한, 고상한, 중후한, 고운 경쾌한, 다이나믹한 등의 이미지 유형에 따라 이미지 스케일을 하였으며 한복헤어 이미지 스케일링이 가능하였다. 둘째, 한복 이미지 스케일에서 이미지 유형에 따른 형용사 이미지 감성군이 표현된 각 이미지 구별이 가능하였다. 표현된 감성이미지의 커뮤니케이션은 선과 형태, 색채, 장식 등 디자인 요소에의해 형용사 이미지스케일과 전통배색 이미지스케일에 따라 한복의 이미지스케일이 <표2>로 구성되었다. 셋째, 한복헤어 이미지 스케일에서는 업스타일 중심으로 살펴본 결과 이미지 유형에 따른 형용사 감성군의 표현이 전달된 작품들을 선별할 수 있었다. 이미지 표현에 따른 스케일에서 헤어컬러링은 표현 정도가 약하여 헤어스타일 중심으로 선과 형태, 표현기번 등에 따른 한복헤어 이미지 스케일을 <표3>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넷 째, 한복헤어 이미지 스케일에 따라 이미지 유형에 따른 이미지 스케일링을 (그림23)으로 정리하여 제시하였다. 본 연구는 한복헤어 이미지스케일링에 따라 한복스타일링을 연출할 때 T.p.O에 맞는 효과적인 한복스타일링의 기초자료로서의 기대효과를 가진다.
This study aims to come up with basic data by scaling hair images which fit for hanbok image for hanbok styling. After scaling hanbok and hair images according to I.R.I image scale, results were obtained. Then, image scaling was performed based on 10 different image types in I.R.I image. First, image scaling was conducted depending on image type such as clean, soft, humble, intimate, fancy, elegant, refined, smooth, light and dynamic. It was able to scale hanbok hairstyles as well. Second, it was able to discriminate images expressed by image emotion group in hanbok image scale. For communication of the expressed emotion images, hanbok image scales were configured by designed factors such as line, shape, color and ornament as shown in Table 2 according to image scale and traditional coloring image scale. Third, in hanbok hairstyle scale, up-styles were primarily examined. As a result, it was able to select the styles in which the styles of emotion groups were expressed by image type. In image expression-based scale, hair coloring was weak. Therefore, hanbok hairstyle scales were summarized based on line, shape and expression techniques focusing on hairstyles as shown in Table 3. Fourth, image scaling by image type was shown in Figure 23 according to hanbok hairstyle scale. It is expected that the results of this study would be used as basic data for effective hanbok styling fit for T.p.O according to hanbok hairstyle sca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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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패션 사업의 전개와 글로벌화 전략 : 전통문화유산의 국가이미지 제품화 사례

문광희

한국동양예술학회 동양예술 제20호 2012.12 pp.413-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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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패션 사업이란, 한국문화유산 속에 내재된 예술적 가치와 이야기꺼리, 정신적 가치를 현대의 패션제품에 적용시켜 제품을 개발하고, 세계시장에 진출시켜 한국의 브랜드 가치를 제고하는 사업으로, 한국의 문화유산 속에서 심미성을 발굴하고, 이를 현대의트렌드에 맞추어 재해석하여 제품을 직접 생산하고, 브랜딩과 마케팅을 통해 시장경쟁에 진출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이 사업은 2007년 지식경제부 RIS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으며,지난 6년간 인테리어제품, 의류제품, 생활패션제품 등 20여종의아이템, 200여점을 개발하였으나 본 연구에서는 12종 50여점을대상으로 한다.대표적인 개발제품으로는 카펫을 중심으로 한 인테리어제품, 신생아복, 아동복, 남녀의상, 그리고 목욕가운 등의 의류제품, 우산,타월수건, 넥타이, 스카프, 모자 등 생활패션제품 등이며, 문양으로 다양한 측면에서의 한국문화유산을 활용하였다. 제품의 가치창출과 세계시장으로의 진출을 위해서 융합마케팅을 전략적으로개발하였고, 본 연구에서는 환경과 정책 그리고 문화와 융합하는사례를 제시하였다.향후 한국문화유산 활용의 패션제품이 국내외 시장에서 명품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심도 있는 전문가 구성, 시간의 투자,한국인의 감성과 정신적 자산을 함축시켜 표출할 수 있는 디자인개발, 정부기관의 지속적인 지원 등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Han Fashion project is intended to enhance Korea’s national brand in the global market by applying Korea’s national symbols and traditional images to modern fashion products. This is very comprehensive processes ranging from identifying uniqueness in Korea’s cultural heritage, re-interpreting them for modern uses, developing and producing the products, and to dealing with severe market competition through systematic branding and marketing activities. The project has been pursued as industry-university consortium since 2007, supported by Ministry of Knowledge Economy's Regional Innovation System, a regional economy revival project. The products used in this study are 12 items, 50 kinds. Most successful cases include carpets, Garments for baby, young casual, men and women, and fashion accessories. The carpets patterned after Korean alphabets, developed first time by the Consortium, were installed in Los Angeles Korean Cultural Center (2009) and Beijing Korean Cultural Service (2011). Those carpets proved very ideal for overseas Korean government agencies in demonstrating Korean cultural characteristics. About the garments, important Factors are Fabrics and patterns. They are different according to the items. The fashion accessories are designed with Korean alphabets and traditional pattern which loved by many people for a long time. About Marketing, the products designed by Han-Fashion, it is better to have collaboration with other factors, for instance, environment, policy from government and culture etc.. Year after year, the Consortium is approaching to its goal of establishing Korea's world-class brand in global fashion mar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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论韩国民艺设计之美及其在当代设计中的传承

毛可利

한국동양예술학회 동양예술 제20호 2012.12 pp.44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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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디자인은 동서양 디자이너들의 주목을 끌면서 날이 갈수록 세계에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동양문화를 소중하게 품고서동양과 서양, 전통문화와 현대문화를 조화롭게 융합하여 민족특색을 잘 드러내는 독창적인 디자인 풍격을 형성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성공의 중요한 원인이 바로 야나기 유네요시가 민예연구에 대한 추진한 점과 한국정부가 한국의 전통민예품 연구를 지지하고 육성시킨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한국의 디자인을 이해하고 싶다면 반드시 먼저 한국의 전통민예품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민예품은 사람들의 일상생활 중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도구이지만 사람들은 늘상 민예품을 가볍게 여기고 홀시했다. 한데이렇게 너무 흔해서 특별함이 없는 민예품이 오히려 보통 서민들의 심미관과 가치관을 아주 명확히 투사해 내어 대중문화를 가장잘 대표할 있게 된 것이다. 본 논고에서는 한국의 전통 민예품이가지고 있는 동양문화의 공통점인 친밀감, 민예품 제작자의 無心창작이 가져다 준 무기교의 자연미, 민예품 제작재료가 체현해 내는 질박미, 그리고 한국의 전통 민예품이 현대생활 속에서 그 가치가 이어져 나가는 모습 등을 통해 꼼꼼히 살펴본다. 아울러 전통 민예가 디자인영역에 가져다 준 영향을 분석해 본다. 생활은예술창작의 기초이다. 생활 속에 뿌리 깊이 자리 잡아야만 우리는따뜻하고 정감 있는 디자인을 창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植其中,其成功是必然的。究其成功的渊源,笔者认为离不开最初柳 宗悦先生对韩国朝鲜时期民艺研究的推动以及继而韩国政府对韩国传 统民艺品研究的支持与保护。韩国民艺在健康文化环境中的延续发 展,将大众的审美文化灌输给每一代人,为当今设计者提供了丰富而 深刻的素材。因此,若要了解了解韩国的设计,必须先了解韩国的传 统民艺品。 民艺品作为人们日常生活中不可或缺的平凡器具,是最能代表大众 文化的载体,它可以透过生活的表层折射出一般民众的审美观与价值 观。本文从韩国传统民艺品所具有的东方文化共性的亲切感、无技巧 的自然美、材料展现出的质朴美对韩国传统民艺、民艺品进行了解 读,并通过对韩国传统民艺在现代生活中的延续的简要分析得出传统 文化的传承只有随着时代的发展不断注入新的文化元素才会焕发出新 的生机与活力。生活是艺术创作的基础,只有深植于生活,我们才可 能创作出具有情感的设计。如果脱离了生活,那么设计也必会成为无 源之水,无本之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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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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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동양예술학회 彙報 외

한국동양예술학회

한국동양예술학회 동양예술 제20호 2012.12 pp.458-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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