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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이론을 통해서 본 하이데거(Heidegger) 철학에 대한 비판 : ‘현존재(Dasein)’ 개념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철학사상문화 제5호 2007.07 pp.1-38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현존재’ 개념은 현대의 새로운 존재물음으로서 『존재와 시간』의 중심개념을 이루지만, 또 다른 중요한 의미는 ‘현대비판’이라는 과제를 담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그의 시도는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존재론적으로 규명했다고 평가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현존재로서의 인간의미’를 탐구한 인간학적 차원에서 음미될 수 있다고 보여 진다. 이런 문맥에서 초기 비판이론, 특히 호르크하이머의 하이데거 비판은 ‘현존재’에 ‘비판적 주체’를 대비시키면서 명시적 차별화에 그 초점이 모아진다. 즉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인간주의적 형이상학’의 한 아류인 ‘허구적 주체’이며, 더 나아가 ‘역사적 주체의식의 결핍’의 다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후기 비판이론은 초기에 비해 확실히 ‘비판적 주체’의 실체성은 ‘주체 없는 주체’로 약화되었지만, 하이데거의 ‘현존재’ 개념에 대비시켜 볼 때 그것은 주체의 해체를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평가된다. 물론 잔존되어 다시 도래한 관념론적 이상주의의 극복이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지만, 비판이론에서의 변이를 ‘이성주체의 자기주장’으로부터 ‘이성주체의 자기비판’이라는 과정의 측면에서 본다면 여전히 그 주체는 주체해체에 기인한 ‘현존재’의 무력성과는 명백히 대별된다. 그러한 의미선상에서 하이데거의 후기철학은 ‘테크놀로지를 형이상학적 지배의 한 표현’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주체가 기술문명을 통해 총체적 지배대상이 되었다고 보는 후기 비판이론 관점과의 잠정적 유사성을 공유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이데거의 기술문명의 비판은 ‘현존재’와 같은 모호한 주체에 기초한 채로 외연적 자연과 인간에 대한 관심에 여전히 수동적으로 머물러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한 전제로 비판이론에서 바라 본 하이데거의 ‘현존재’ 개념에 기초한 현대비판의 의미는 내재적으로 은폐된 동일성에 대한 자기비판의 부재 때문에 그러한 과제를 담지할 수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Der Begriff von Dasein Heideggers läßt zwei Interpretationen zu, eine der neuen Fragestellung an das Sein in der modernen Welt und eine der Deutung der Kritik an Modern. Aus diesem Grunde soll sein Versuch nicht nur ontologisch, sondern auch anthropologisch bewerten. In der frühen Phase der Kritischen Theorie, besonders aus den Ansätzen von Horkheimer wird es deutlich, daß ‘das kritische Subjekt’ im Kontrast zu ‘Dasein’ Heideggers steht. Dabei sei natürlich nicht nur an eine anthropogische Metaphisik, sondern auch an den Mangel an das historische Subjektbewußtsein zu denken. Horkheimer behauptet darum das Wesen des Daseins als ein fitives Subjekt, weil das die Aufgabe der gegenwärtigen Zeitkritik gar nicht leisten könne. In den mittelern und spätern Kritischen Theorie glaubt man feststellen zu können, daß das auf das Subjekt basierte kritische Bewußtsein geschwächt wird. Trotzdem führt die Dechiffrierung des beiden Vergleiches nur zu einer sehr äußerlichen Analogie, wenn man keine Auflösung des Subjekts, wie im Dasein, in der Kritischen Theorie sieht. Aud diesem Grunde trifft der auf dem Subjekproblem zentrierete Strukturwandel der Kritischen Theorie für die Subjektabwesenheit nicht in vollem Umfang zu. In den mittelern und spätern Kritischen Theorie bedeutet ‘das Subjekt ohne Subjekt’ nur ein Wandelsprozeß von ‘der Selbstbehautung’ zu ‘der Selbstkritik des Subjektes’, in dem die Aufgabe der Zeitkritik, bzw. der Kritik an Modern noch erfüllt werden kann. Unter besonderer Berücksichtigung von ‘Dasein’ Heideggers kommt die Kritische Theorie hier zu der Feststellung; Auf eine lautlose Weise, aber radikal habe Heidegger kritisiert an Moderne. Aber heimlich habe er ‘die Selbstkritik des Daseins’ in spezielle Identitätsphilosophie aufgelöst.
한국의 종교적 사유를 구성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던 증산은 진정한 도덕적 연격을 개발하기 위해 성(誠)·경(敬)·신(信)을 통한 인간 심(心)의 수양을 강조 했다. 심적 수양에 대한 이론인 성(誠)·경(敬)·신(信)은 사람이 스스로 수련하기 위해 지녀야 할 필수적인 태도이다. 이 세 가지 방법은 실천적인 수련자를 위한 건전한 근본에 대한 준비역할을 한다. 성(誠)·경(敬)·신(信)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 방법들이 궁극의 범위를 관통하려는 목적을 위해 심적, 물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시도라는 종교 철학의 가치 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Jeung-san, who played an important role in constituting the religious thoughts of Korea, emphasized the cultivation of human's mind through 'Cheng'(誠) 'Jing'(敬) 'Xin'(信) in order to develop true moral personality. 'Cheng'( 誠) 'Jing'(敬) 'Xin'(信) in the theory of mental cultivation indicate the necessary attitude possessed for person who trained himself. These function as arrangement of sound foundation for practical trainee. The reason why the cultivation has put emphasis on 'Cheng'(誠) 'Jing'(敬) 'Xin'(信) is because these show the value in religious philosophy that human being tries to get over his mental and physical limitation for the purpose of going through the boundary within the ultimate.
본 논문은 사이버스페이스와 관련된 철학적 논쟁을 들뢰즈 ․ 가따리의 입장에서 정리하였다. 먼저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에서는 진본의 권위가 강조되는 반면, 사이버스페이스는 무한히 복제되는 사본들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수직적 위계로 정보를 처리하는 나무구조와 정보를 분산시켜, 중심 없는 그물망으로 만드는 리좀 구조의 관계를 통하여, 이 두 가지의 정보연산이 결합되는 양태를 이중 분절로 바라본다. 이 이중분절은 정보와 소통이라는 측면에서의 분절과 연관을 가지며, 인간과 기계의 합성인 사이보그와도 관련된다. 또한 맑스주의의 기계에 대한 사고를 발전시켜, 일반지성의 산물인 기계를 하나의 다중의 비물질적 지성의 구성물로 바꾸어낸다. 그러므로 기계적 코드의 심층을 분석을 통하여, 일방적인 미디어-커뮤니케이션을 넘어선 다중적 커뮤니티의 형성가능성을 전망한다.
This Thesis regulate philosophical argument of cyberspace in Deleuze/Gattari. Above all, the authority of the original in the Idea of Platon, but cyberspace constitute in the copies that copied infinitely. In the relation of the Tree construction that is processed information in to straight a grade of rank, the Rhizome construction that is made of net without center, regarded dual segments of the mode that is combined in two information processing. The dual segments relate not only in segments of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but also in combination of the human and the machine. Also, this paper developed the thinking of the machine of marxism and translated the machine that output of the general intellect, of construction of no-material intellect in multitude. Therefore in the analysis of the mechanic code, this paper prospect formation possibility of multiple community beyond one-sided media-communication.
칸트 인식론에서 선험적 관념론과 경험적 실재론의 이해 < 반박>에서 드러난 현상의 실재성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철학사상문화 제5호 2007.07 pp.89-116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칸트의 관념론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통해 우리 지식의 규정이 주관의 직관 형식에 의한 작용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 역시 관념론 특유의 유아론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관념론 반박>에서 우리 밖의 사물의 현존이 경험적 현상인 한에서는 충분히 증명될 수 있음을 보인다. 칸트에게 자기의식이란 시간 속에서 현존하는 나에 대한 경험적 규정이다. 이것은 나를 공간과 시간 안에서 현상으로 표상하였다는 것이다. 인식하는 주관이면서 동시에 대상화된 현상으로서 표상된 나는 이미 공간 중에 고정불변하는 것의 실재를 지각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즉, 외감의 가능성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공간 안에 있는 것을 ‘지각’한다는 것은 직접적 의식이며, 그러므로 외감의 직접 경험이 내감의 직접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내적 경험은 외적 경험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규정된 현상으로서의 자기 의식 즉, 우리가 인식 가능한 자아 의식은 세계 속에, 공간 중에 존재하는 신체를 가진 나에 관한 인식을 언제나 동반한다. 현상과 인식은 세계 속에 주관의 참여 활동을 통해서만 성립한다. 그래서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은 곧 경험적 실재론이다. 이전의 인식론에서 세계는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거나 혹은 내가 세계로부터 벗어나 세계를 관찰하였다면, 칸트의 경험적 실재론에서 나의 인식은 곧 세계의 인식이 된다.
Kant asserts that human knowledge consists of his own intuition. It is so called the Copernican revolution. But Kant’s theory has a difficult problem like Descartes or Berkeley has. It is an existence of things outside me and my self-consciousness. So Kant proves that they really exist as far as they are experiential appearance in “Widerspruch des Idealismus”, in his own Kritik der reinen Vernunft . A ‘I’, subject, self-consciousness is a experiential condition through the time for Kant. It works as cognitive subject and objective representation at the same time. It is possible only that internal sense has an external sense as a premise. A self-consciousness can be in that condition, time and space. It always accompanies an existing particular body in the real(sensible) world. Just by a subject’s work, an appearance and a knowledge are possible. Therefore Kant’ theory is transcendental Idealism and experiential Realism at the same time. In the theory, my own cognition becomes the world’s.
‘나는 생각한다’를 중심으로 한 데카르트와 칸트의 이원론적 관점의 차이에 관한 고찰
동국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철학사상문화 제5호 2007.07 pp.117-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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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라는 것이 명석 판명한 개념이라고 했을 때, 이러한 명석 판명한 개념은 확실히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에 기인한다. 이러한 믿음은 칸트가 사유의 선험적 주관인 X라고 부른 바로 그것이다. 즉 칸트 스스로도 주관 그 자체나 대상 그 자체를 인식하거나 실재적인 추론을 통해 알 수는 없지만 존재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데카르트와 칸트는 결국 유사한 형식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유사한 형식에 있는 이유는 그 두 사람이 이원론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칸트와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대한 차이점과 유사성을 고찰해보고 소위 근대철학이 거대한 데카르트적 체계 안에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단지 낡은 체계에 불과하다고 판단되었던 데카르트의 철학이 근대철학과 현대철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철학사적인 작은 해명이 될 것이다.
When Descartes asserted that 'I think' is a clear-distinct notion, the notion is caused by believing that it surely exists. Kant calls the notion the transcendental thought of a subject, and also believes that things-in-themselves exist even though human being does not know a things in themselves. Therefore the fundamental thought of Kant and Descartes is similar. Because this thought is grounded on Dualism. Therefore, in this treatise, I will consider the similarity and difference of the dualism of Kant and Descartes, and demonstrate that modern philosophy is established on cartesian system. This treatise is to be an philosophical-historical explication about the influence of the cartesian philosophy on modern philosophy.
Talking over the Fence From Toleration to Dialogue
동국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철학사상문화 제5호 2007.07 pp.142-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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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서로 다른 신념체계나 생활양식, 문화, 혹은 종교들 간의 갈등에 직면하여 자유와 관용을 기초로 상호공존을 위한 근거로서의 공통된 토대를 확보하려는 고전적인 근대적 자유주의 전략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종교적 갈등과 관련하여 하나의 보편적 토대를 정립하려는 자유주의적 시도가 오히려 자유의 수호라는 허울 뒤에 하나의 기준을 절대화하고 그것을 공존과 화해라는 미명 하에 모든 신념과 사상 체계에 획일적으로 적용함으로써 결국에는 다양성과 차이를 부정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역리 적인 결과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적시함으로써 참된 공존과 평화가 차이를 부정하고 하나의 거대담론과 같은 보편적 토대를 확립하는 데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관용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각각의 종교적 전통을 긍정하고 그 전통에 충실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과 북미의 역사는 종교적 신념에 근거한 도덕적, 정치적, 문화적 기초로서의 보편적 토대를 확보하려는 일련의 시도로 이해될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그러한 제반 시도들 간의 갈등과 대립, 경쟁의 과정이기도 했다. 각자의 종교를 가질 자유와 사회적 통합 및 공존이라는 상반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분리했던 계몽주의의 시도는 사적 영역이 공적 영역에 미치는 영향이 커져감에 따라 사적 영역이 공적 영역에서 가지는 경쟁력을 확대하려는 상이한 신념 체계들 간의 대립과 각축으로 귀결됐다. 상호간의 차이에 대한 관용이 보편원리의 쟁탈에 근거한 강자독식의 대립구도로 변질되는 근대 계몽주의의 이러한 역리를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리하여 , 차이의 평화로운 공존을 목적으로 오히려 그 차이를 묵살하고 억압하는 보편적 토대의 확립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그러한 진정한 관용의 근원이 되는 각 종교의 고유한 전통을 있는 그대로 긍정함으로써 각 종교의 성원들이 자신이 속한 전통으로부터 진정한 관용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이성에 근거하여 하나의 절대적 공통분모를 확립하려는 노력은, 그러한 절대적 공통성이 언제나 구체적 전통과 더불어서만 주어진다는 점에서 불가능한 일이 된다. 따라서 진정한 화 해와 평화로운 공존은 차이에서 시작하여 그 차이 안에서 실현되는 자기초월적 관용의 능력으로부터 이루어지는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 그것이 이 글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바이다.
In his Inaugural Lecture as Chairman of the Department of Religion at Boston University with the title 'Religious Diversity and Public Reason' John Clayton has elaborated the image of the fence in order to point to the rules of engagement that must be observed in a situation where common ground has been lost or where the search for common ground may lead to ignoring and restricting difference and diversity. Clarification of defensible difference, not identification of common ground, may be what is required to gain the cooperation of disparate religious interests in achieving pragmatically defined goals that enhance human flourishing. This is rephrased in the conclusion of the lecture with reference to the New England Poet Robert Frost: it is not so much common ground as good fences that make good neighbours. The line "Good fences make good neighbours" is taken from the poem "Mending Wall" from Frost's collection North of Boston, first published in 1915. The poem relates to the situation where after the ground swell of frost in the Winter and the destruction caused by hunters two neighbours come together to restore the wall between them. "Talking over the fence" while "mending wall" is clearly an image for the cooperation Frost had in mind and which still contains a vision for a relationship of religious communities in which, in John Clayton's words, "the recognition of cultural and religious diversity" is "a positive good".
동국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철학사상문화 제5호 2007.07 pp.175-212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자기 자신의 사상이 한편으로는 플라톤과 칸트 다른 한편으로는 , 인도원시종교사상(특히 우파니샤드 통해)에 의해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 등에서 얻은 지식을 많은 경우 불교사상과 혼동해서 알고 있다. 이는 그 당시, 유럽에서 불교사상에 대한 자료의 입수 내지 번역작업이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데서 연유한다. 그는 이러한 애매한 지식으로써 서양사상과 동양사상 내지는 서양의 종교(기독교)와 불교브라만교를 비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상의 이러한 양대 진영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이해비교를 통해 우리는 동서양사상 간에 서로 교차점을 찾아볼 수 있는 창조적인 계기를 구할 수 있다는 데서 논자는 쇼펜하우어의 시도에 의의를 두고 있다. 에케르트교수는 쇼펜하우어 사상에 있어 미학과 신비주의의 문제로써 동서양사상 간의 관계를 시사하고자 한다. 에케르트는 쇼펜하우어에 있어 미학을 인간의 형이상학적 물음(인간의 참다운 본질은 무엇이며 참다운 삶은 무엇인가 등의 물음)을 해결하는 수단내지 과정으로서 보고 있으며, 인간의 이러한 형이상학적 물음을 쇼펜하우어는 서양적 사고의 합리론적인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고대 인도사상(불교 포함)에 의해 풀어보려고 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쇼펜하우어의 미학(감성론 내지는 예술이론)과 동양사상(신비주의 에 있어서의 인식론(『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바탕하고 있는)에 대한 개관적 논의를 보여준다. 1) 물자체로서의 의지는 인간의 자기보존 욕구로서 나타난다(현상한다). 2) 이와 같은, 인간의 자기보존 욕구로서 나타나는 현상의 세계는 분열되어 있으며(조화,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고통과 죽음을 가져올 뿐이라는 것을 인간의 이성은 인식하도록 해준다. 3) 이러한, 이성의 인식을 통해 우리 인간은 현세(고통, 죽음으로 끝나는)로부터 해방, 구제되어 물자체로서의 세계(현상 세계의 분열, 투쟁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일치, 나와 세계의 일치통일조화가 성취되는)에 도달하게 된다. 위에 열거한 1), 2), 3)의 과정을 현세적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을 쇼펜하우어는 그의 미학이론(예술이론)을 통해서 보여주는 데, 쇼펜하우어는 특히 그의 비극이론을 통해 그것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나 괴테의 비극에 있어 영웅들의 끊임없는 노력, 투쟁의 장과 이것을 관람하는 관객 간의 관계를 통해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비극을 관람하는 관객은 영웅들의 1) 종국적인 파멸, 죽음, 고통에 의해 우리의 삶 자체의 고통, 불행을 2) 인식하게 되며, 이러한 인식 통해 현존재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또한 인식하게 되며, 나아가서 3) 이 고통의 삶을 초월하고자 한다. 이 초월의 순간들은 비극에 의해 도달될 수 있다. ‘비극’의 관람에 의해 순간순간 가능한 초월의 체험은 선의 훈련에 있어서 체험되는 무아탈아의 경지와 비교될 수 있다. 이 경지에 있어서는 나와 객관적 세계 간의 분리가 사라지며, 나 또한 완전히 통일된 것으로서 체험된다. 쇼펜하우어 개념에 따르면 현상과 물자체 간의 구별이 사라지고, 물자체가 오로지 물자체로서 체험되는 순간이 실현되는 것이다.
Schopenhauers ästhetische Theorie läßt Kunst vor allem als ästhetisch-mystisch Medium des Übergangs und der Vermittlung metaphysischer Erkenntnis- und Lebenshaltungen verstehen. Eckerts These betont mehrere Aspekte: zum einen soll die Erfahrung der Kunst ästhetischen Abstand gewinnen lassen, der die Vorstellungswelt der Immanenz transzendiert, d.h. sthetische Kontemplation soll im Kontext der Philosophie Schopenhauers die Befreiung des Intellekts von der Macht des ‘Willens’ ermöglichen. Zum andern trägt der ästhetische Abstand zur Welt Züge mystischer Kontemplation, Momente intensiver Augenblickserfahrungen, die aber immenr wieder zurückfallen in immanente Erfahrungsbezüge von Welt. Darin ist ästhetisch-mystische Kontemplation zurückvermittelt in die Suche nach der Bedeutung, die mystischer Unmittelbarkeit zuzukommen vermag. So läßt sich schließlich die Freiheit der ästhetisch-mystischen Kontemplation zugleich als Verttlungsmedium metaphysischer Erkenntnis wahren Lebens verstehen; und zwar im Sinne der Negation immanenter Selbsthaltungstendenz, um für die Erlösung des ‘Nirwana-Nichts’ frei werden zu können. Zugleich muß man erwähnen, daß Schopenhauers Position stärker am unmittelbaren Ausnahmezustand ästhetischer Kontemplation als an ihren Übergangscharakter interessiert ist, sucht er doch Kunst als Anschauung von ‘Ideen’ gegen das bloße Wissen der Philosophie zur Geltung zu bringen. Freilich gelingtihm dies nicht immer widerspruchsfrei. Es scheint daher legitim, daß Echerts Deutung die Momente des genannten Zusammenhanges anders gewicht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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