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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상문화 [PhilosophyㆍThoughtㆍCulture]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동국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Institute for East-West Thought Dongguk University]
  • pISSN
    1975-1621
  • 간기
    연3회
  • 수록기간
    2005 ~ 2026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철학
  • 십진분류
    KDC 105 DDC 105
제4호 (10건)
No
1

동서철학인가, 비교철학인가 - 연구방법론의 양식성과 내재성 -

박연규

동국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철학사상문화 제4호 2006.12 pp.1-34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동서철학이라는 용어에는 철학함에 있어 동서라는 지리적 영역의 한계와 철학 외적인 한계를 벗어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중립적이면서 철학적 태도에 근접하는 비교철학이라는 용어로 대치할 필요가 있다. 서론에서는 왜 동서철학이 아니라 비교철학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를 최근에 일어났던 동양담론을 비판하면서 전개한다. 그 동안의 동양담론이나 동양 대안론이 동양과 서양의 철학을 이원화시킨 데에 그 원인이 있었음을 밝힌다. 본론에서는 이렇게 대치된 용어로서의 비교철학의 방법론을 양식성과 내재성이라는 두 주제를 가지고 설명한다. 양식성에서는 철학적 문제를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며, 비교철학의 자격요건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다룬다. 이러한 문제적 관심과 자격요건을 충족하는 사례로서 우리말로 비교철학하기를 제시한다. 내재성에서는 주체적으로 철학하기의 요건이 왜 필요한가를 다루면서 관계성을 또 다른 사례로 제시한다. 즉 비교철학은 나의문제와 타자와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결론에서는 동서철학은 넓은 의미에서 비교철학의 하나의 연구 영역이지 그 자체가 비교철학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In The word 'East West Philosophy' there are some difficulties; in which doing philosophy we cannot escape from the geographical limit of east and west that is the very exterior limitation. To solve these difficulties, I propose a new but used in accustomed way by which we can do philosophy in a neutral and more philosophical way. In the introduction of this article, with a critical attitude I summarize why the 'east west philosophy' should be changed to the 'comparative philosophy.' I also tried to discover most of arguments of 'Eastern Dialogue' or 'Eastern Alternative Dialogue' have been misled and exaggerated. In my main arguments, I suggest two ways of formality and intrinsicality in which we can make up the method of comparative philosophy. Through the formal way we set up the attitude and eligibility of doing the comparative philosophy. A Koreanized philosophy is exampled. Meanwhile, through the intrinsic way we also fix the requirement of identity for the comparative philosophy. Thus the philosophical meaning of relation is illustrated. In conclusion, I show east west philosophy might be a subject of comparative philosophy but not the methodological way itself.

2

우리시대의 고전 드라마 공연

김한

동국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철학사상문화 제4호 2006.12 pp.35-58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인문학의 위기에 처한 이 시대에서 고전 드라마를 어떻게 접근하게 할 것인가? 영화와 뮤지컬에 의해 연극이 밀려나고 있는 이 시대는 또한 연극의 위기 시대인가? 이 시대의 젊은 세대들과 관객과 고전드라마의 접합점은 과연 찾아질 수 있을 것이며, 어디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인가? 그 해답은 오히려 연극의 기원을 주목함으로써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고대그리스에서, 연극은 생명력을 표방하는 디오뉘소스신를 기리는 예배의식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디쓰람에서 출발하고 있다. 디오뉘소스를 찬양하는 아테네의 거대한 도시 축제였던 “씨티 디오뉘시아”(디오뉘소스 축제)는 그리스 비극을 탄생시켰다. 제의적인 양상은 현대 서구무대가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흥미로운 양상들의 하나로서, 연극의 기원에로의 환원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대도시들은 앞 다투어 공연예술들의 거대한 무대들을 제공한다. 이는 연극이 발생했던 아테나의 도시축제와 공통된 양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기본적으로 구전 문화권을 보여주고 있고, 그들은 읽기 보다는 듣고 구경했다. 연극은 고대 그리스의 디오뉘소스 축제라는 그 출생의 자리가 말해 주듯, 글로 씌여진 문학 텍스트의 선재적인 것이었다. 오늘의 교육현장에서의 드라마의 도입이 활발히 시도되고 있다. 지식과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책을 읽는 대신, “듣고 구경하는” 오늘날의 영상세대와 인터넷 세대들에게 있어서, 고전 드라마 텍스트의 무대화하기 작업은 특히 드라마 교실이라는 학습현장에서 실로 효과적이고 의미 깊은 교육방안의 하나라 하겠다. 또한 자아를 비워내고, 극 세계에 속한 인물들의 하나가 되어보기의 과정은, 세익스피어가 그의 극들의 핵심적인 은유를 통해 거듭 거듭 강조해 주듯이, 연극과 인생의 핵심적인 본질--인생의 연극적 속성과 연극의 인생과의 유사성이라는--에 인도해 주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Is it possible to make Classical Drama accessible to today’s audience? Have we arrived at a time when a declining dramatic stage is being replaced by the film and the musical? What methods are available to us as we try to teach Classical Drama successfully? The humanities are in crisis. We find the answer in the origin of drama. In ancient Greece, the drama was derived from the dithyramb, a sort of worship dedicated to Dionysos, a life force represented as the god of wine and fertility. ‘City Dionysia’, the great Athenian civic festival held in Athens honoring Dionysus was the occasion of the annual tragedy contest, and the most widely accepted theory about the birth of tragedy holds that Dionysian worship ritual resulted in the birth of tragedy. The emergence of ritual drama proves one of the interesting features of the modern Western stage, a return to the origin of drama. Nowadays big cities compete in providing huge stages for the performing arts, and they offer the sort of civic festivals once seen in Athens when drama began. Today’s students are constantly being bombarded with information. They have too many choices. In the age of the Internet, the young tend to watch and listen rather than read. The Greeks, who had basically an oral, pre-literacy culture, also listened and watched, rather than read. The theater came before written literature. Today, the performance of Classical Drama is particularly meaningful for the drama classroom. "Play’s the thing(Hamlet 3.1. 557)." Having students perform a drama will prove to be one of the most successful teaching methods. It will add an active, personal dimension to the cerebral approach of reading the text, then reading secondary literature, then analyzing the various elements of the play. Acting the play out means allowing the students to find and experience the dramatic qualities in their own lives. This is the theatricality of life and the life-like qualities of the theatre, as Shakespeare frequently reminded us through metap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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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세주의(pessimism)와 종교비판 - 쇼펜하우어(Schopenhauer) 사상의 종교철학적 함의 -

전석환

동국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철학사상문화 제4호 2006.12 pp.59-81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염세주의라는 말과 더불어 서양 철학사 안에서 항상 연상될 수 있는 쇼펜하우어에 있어 종교는 ‘통속의 형이상학(Volksmetaphysik)’ 라고 정의되었다. 쇼펜하우어의 종교비판은 주로 유일신의 종교, 특히 서구 기독교 비판에 집중되어 있다. 더 나아가 그는 서구사상의 전통에 놓였던 이성에 기초한 유토피아적 통로를 아예 차단해 버린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문맥에서 그가 역사를 보는 눈은 부정적인 기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사실은 너무나 당연하다. 염세주의에 입각한 쇼펜하우어의 ‘역사철학에의 거부’는 그러한 의미에서 역사발전의 의미를 부정하는 견해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비타협적인 명목론’의 입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험세계에 대한 지극한 존중, 즉 실존으로부터 세계와 인간에 대한 구체적 혐오를 표현했다는 의미에서 지극히 ‘현실적 염세주의’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전제로 프랑크푸르트 학파 초기 비판이론의 대표주자인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쇼펜하우어를 ‘혜안의 염세주의자’로 극찬하면서, 그로부터 ‘염세주의의 비판적 기능’을 부각시킨다. 그는 쇼펜하우어를 어떤 곳에도 현혹되지 않았던 견고한 ‘이데올로기 비판자’로서 높이 평가한다. 이런 전제로 본다면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염세주의’는 세계에 대한 변하지 않는 부적응을 보일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저항이었다는 점에서 ‘변혁의 프로파간다에 더 어울린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의도는 더 나아가 그의 철학이 탈서구적 종교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서양적 사유 전체의 탈이상화’ 작업으로 확장시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인간개체와 통일되어야 할 세계의 근원적 존재가 의지로 구현됨을 보았고, 이성 아닌, 브라만과 일치되어 다시 통일되는 것 안에서 진정한 인간 구원을 보았다. 그러나 그의 의지철학은 세계와 표상 사이를 연결시키는 소위 ‘의지의 객관화’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쇼펜하우어가 칸트의 물자체가 독단이라고 비판한 것처럼 그의 의지는 근본적인 해명됨 없이 ‘의지 스스로’, 혹은 ‘의지가 의지에 의해’ 기초지어져 있다.

Das Wort Pessimismus in der europäischen Geschichte der Philosophie ist eng mit dem Namen Schpenhauer assoziert, der die Religion als ‘eine Volksmetaphysik’ definiert.Genau genommen kritisiert Schopenhauer die Religion der Monotheismus, besonders bemängelt den Widerspruch an dem europäische Christentum. Außerdem wird bei ihm der Durchgang abgesperrt, der in die Utopie der auf der europäischen philosophischen Tradition basierten Vernunft führen könnte.Seine auf den Pessimismus gründete ‘Absage an die Geschichtsphilosophie’ ist daher nicht nur nicht für die Entwicklung der Geschichte pointiert, sondern auch im wesentlichen als ‘den Nominalismus des Nonkompromisses’ betrachtet. Trotzdem wird der Pessimismus von Schopenhauer durch ‘den realexistierenden Pessimismus’ charaktersiert, denn in dem wird der große Respekt vor der empirischen Welt dargestellt. Aus diesem Grunde besteht Max Horkheimer gerade darin, daß Schopenhauer ‘ein hellsichtiger Pessimist’ war, um ‘die kritische Funktion des Pessimismus’ scharf hervor zu treten. Im weiterem Sinn ist Schopenhauers Versuch die Entidealisierung des ganzen europäischen Pilosophiesystems, in der er die enteuropäische Religion, namentlich den Buddhismus, als den geistlichen Ersatz reflektiert. Im Willen des Menschen sieht er die Vereinigung von Individuum und Ursprungsexistenz, dabei die wahre Rettung des Menschen nicht in der Vernunft, sondern in Brahman.Aber seine Willensphilosophie wird weter nicht gestellt in Frage darüber, welche Verbindung in der ‘Objektitation des Willens’ zwischen der Welt und der Vorstellung steht. Wie Schopenhauer selber Kantsche ‘Ding an sich’ als ein Dogma betrachtet, läßt seine Wllensphilosophie keine Antwort auf die Frage nach den wesentlichen Erklärungen des Willen. Trotzdem legt Schopenhauers Denken Zeugnis ab, den Abstand der Philosophie zur religiösen Metaphisik verringert zu hab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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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섭 한국미술사론의 연구 -「조선고대의 미술공예」에 관한 분석을 중심으로 -

이유진

동국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철학사상문화 제4호 2006.12 pp.83-108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朝鮮古代의 美術工藝[A short History of Korean Art]」에서 고유섭은 한국미술사의 전개 과정을 애니미즘, 고전주의, 낭만주의 등의 개념을 도구로 설명한다. 고유섭의 논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애니미즘의 바탕에 있는 의력[생명력Vitality]은 한국미술사의 전 과정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한다. 의력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이상Ideal이다. 이상은 주자학적 이상이다. 고유섭은 暢暢을 의력의 類義語로 사용하고, 주정성, 주지성, 이상주의를 이상의 유의어로 사용한다. 한국미술사는 도덕적 이상주의로 귀결된다. 고유섭의 한국미술사론[Theory of History of Korean Art]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주류의 지위에 있는 미술사론과 다르다. 전자는 의력을 중시한다. 후자는 이상을 중시한다. 전자는 힘의 동경으로귀결될 수 있는 위험한 가능성을 함축한다. 후자는 하나의 절대가치 만을 허용하는 위험성을 함축한다.

In his essay "A short History of Korean Art[朝鮮古代의 美術工藝]", Koo Yu-Seob explains History of Korean Art, fall back on the concepts of Animism, Classicism, Romanticism, Koo says; Vitality is base of Animism, and has influence in entire process of the History of Korean Art. Vitality is confronted with Ideal. Ideal is Neo-confucian Ideal. Koo use 暢暢[chang-chang] as a synonym of Vitality, and use sense-centralism, intellectuality, Idealism as a synonym of Ideal. The consequence of History of Korean Art is Ethical Idealism. Koo's Theory of History of Korean Art differs from 21th century predominent Theory of History of Korean Art. The former attachs importance to Vitality. The later attachs importance to Ideal. The former has risk of adoration for power. The later has risk of totalitar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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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향적 대상의 인식론적 위상

홍성훈

동국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철학사상문화 제4호 2006.12 pp.109-134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물리주의가 현대 심리철학의 주된 경향이라는 점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철학자들이 물리주의에 반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리주의에 반대하는 철학자들은 물리주의적 용어만으로는 감각질이나 심적 상태의 현상적 측면들을 설명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물리주의를 논박한다. 그리고 물리주의를 반대하는 또 다른 주요한 이유는 물리주의가 지향성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향성은 심적 현상에 고유한 특징으로서 정향성이나 관여함 등으로 규정된다. 지향적 대상은 심적 상태가 관여하거나 정향하고 있는 대상이다. 그리고 지향적 대상은 신비로운 존재론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 지향적 대상은 존재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존한다. 지향적 대상의 이러한 신비한 존재론적 위상 때문에, 지향적 대상에 대한 논의는 주로 지향적 대상의 존재론적 위상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지향적 대상의 인식론적 위상에 대한 문제 역시, 존재론과 인식론이 상호 관련되기 때문에,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래서 이 논문의 목적은 지향적 대상의 인식론적 위상을 검토하는 것이다.이 논문에서는 지향적 대상이 인식론에서 어떠한 중요한 역할도 하지 않음을 주장할 것이다. 아울러 지향적 대상의 존재론적 위상 역시 과대평가 되고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지향적 대상의 유용성을 간과할 수 없음도 지적할 것이다.

Physicalism is the main stream of contemporary philosophy of mind. But there are also anti-physicalists. They refutes against physicalism as theory of mind, for it cannot explain qualia and the phenomenal aspects of mental states by means of only physicalistic terms. And Intentionality is one of the main reason of their anti-physicalistic attitude. Intentionality is the unique feature of mental states and characterized by directedness or aboutness. Intentional object is the object which mental states are about or directed at. The ontological status of Intentional object is mysterious. The object need not to exit but is not non-being. It is inexistent. Because this mysterious feature, disputations concerning intentional object are concentrated on its ontological status. But epistemological status of Intentional object should not be underestimated, for ontology is correlated with epistemology. So,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examine epistemological status of Intentional object. And, in this aricle, it is argued that there is no significant role of Intentional object in epistemology and its ontological status is overestimated. However, it is pointed out that the usefulness of Intentional object cannot be underestim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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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秦儒家의 樂論에 관한 小考(「樂記」를 중심으로)

이고경

동국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철학사상문화 제4호 2006.12 pp.137-152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音樂을 하나의 명사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선진 유가에서는 音은 백성의 德을 반영하는 것이고, 樂은 임금의 德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여 구분한다. 또한 樂은 詩歌․音樂․舞樂의 종합 예술체로서 禮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禮와 樂을 상관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선진 유가에서의 樂은 단지 미학적 측면뿐만 아니라 윤리․정치 관계까지 반영하고 있다. 樂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선진 유가의 공통된 특색이다. 그런데 선진 유가 중 맹자와 순자는 인성론 상에서 성선과 성악을 주장함으로써 상반된 견해를 제시한 듯 보인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仁을 바탕으로 한 樂의 수양적 기능과 中和美를 바탕으로 한 악의 교화적 기능을 살펴봄으로써 그들의 견해가 결코 상반된 것이 아니며 ‘樂’을 통해 종합 통일되고 있음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今天我們使用‘音樂’這樣的複合詞, 是以‘音’與‘樂’字連用組成的. 但先秦儒家區別‘音’與‘樂’. 他們所謂的‘音’是反映百姓之德, ‘樂’是反映君子之德. 在先秦儒家的思想, ‘樂’是詩歌․音樂․舞樂的綜合藝術體, 與‘禮’具有緊密聯關性. 因而我們可以認爲, 就是他們把握‘禮’與‘樂’于相互的關係之中. 因此, 我們可以說先秦儒家所說的‘樂’, 不僅反映在美學的側面, 還反映倫理․政治的關係. 這樣理解的‘樂’, 是先秦儒家的共同特色. 顯然, 孔子以後, 在人性論上, 孟子主張‘性善’, 荀子主張‘性惡’. 雖兩者的立場, 認爲猶相反的, 但實則不然. 在論文, 據作者的考察, 兩者的立場不是決對相反的, 而是以‘樂’來綜合·統一. 此將表出具體的論議以下的兩點, 就是以置基于‘仁’爲‘樂’的修養的機能與以置基于‘中和美’爲‘樂’的敎化的機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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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도덕철학』에서 정언명제와 가언명제를 제시했으며, 선언명제는 숨은 전제였다. 그래서 칸트철학은 이원론으로 오해되었다. 칸트의 선언명제는 들뢰즈/가따리의 이접과는 다르며, 무엇보다도 그것은 들뢰즈/가따리의 접속이라는 개념과 닮아 있다. 그 개념은 지구적 민주주의를 구성할 이성의 능력에 상응하는 것이다. 칸트의 삼단논법의 의미는 들뢰즈/가따리에 의해서 '아버지-어머니-아이'라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안티 외디푸스』는 칸트의 삼단논법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욕망의 생산, 등록, 소비라는 리비도 경제학적 원리로 변형시킨다. 『천개의 고원』은 칸트의 삼단논법을 계승하여, 사회적 신체들인 이른바 기관 없는 신체, 암적 신체, 텅 빈 신체로 변형시킨다.

Kant proposed categorical proposition, hypothetical proposition in <Moral philosophy>, but only disjunction proposition as behind proposition. Therefore Kant's moral philosophy was misunderstood as dualism. Kant's disjunction differ from Deleuze/Gattari's disjunction, and After all It is similar of D/G's concept of 'connection' and The concept correspond to reason's force that makes Global democracy. Kant's syllogism's meaning was understood 'father-mother-child' Oedipus triangle by D/G. but <Anti-Oedipus> take over Kant's syllogism critically, and It was translated to libido economic principle of desire's production, record, consumption. and <A Thousand Plateaus> take over Kant's syllogism, and translated to social body and that body without organ, cancerous body, emptied b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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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시민 저항권과 법의 기원 - 군주의 강제권 개념을 중심으로 -

허유선

동국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철학사상문화 제4호 2006.12 pp.187-224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칸트에게 시민들의 저항은 절대적으로 불법적이다. 국가의 수장은 국민의 반란 및 봉기를 금지하고 만약 저항이 발생하였을 경우 그것을 제압하고 처벌할 강제권을 갖는다. 군주의 강제권은 매우 강력하고 절대적이다. 설령 국가의 수장이 국민에게 부당한 고통을 가하고, 국민과의 약속을 위반했을지라도 수장의 국민의 저항에 대한 금지로서의 강제권은 유효하다. 군주의 강제권은 정의롭지 않은 법을 무조건적으로 실행하는 폭력으로서의 권력과는 다르다. 군주의 강제권은 시민 사회를 성립하게 하는 원초적 계약의 이념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법의 기원은 순수 실천 이성의 이념, 즉 보편적 원칙과 합치하는 도덕성에 있다. 시민들은 원초적 계약을 통해 자연 상태의 개인에서 시민 국가의 국민이 된다. 시민은 원초적 계약을 통해 외적 자유의 제한에 동의하였기 때문에 원초적 계약은 시민에게 절대적 의무가 된다. 시민에게는 양도 불가능한 권리가 있으며, 부정의에 항거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군주의 강제권은 원초적 계약이라는 절대적 의무에 기반하기 때문에, 시민의 양도 불가능한 권리 역시 절대적인 의무 하에 놓인다. 비록 명백히 부당한 법률에 대항하는 비폭력적인 저항이라도 군주의 강제권을 넘어서 합법화될 수 없다. 합법화된 불복종은 법 외부의 법으로 법의 개념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초적 계약의 이념을 위반하거나, 시민의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탄압하고, 시민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지 못하는 정의롭지 못한 군주나 법에 대해서는 언론의 자유와, 사회 내 자신의 직분에 맞는 한에서의 공적인 이성의 자유로운 사용을 통해 비판이 가능하다. 칸트는 이를 공공성의 준칙으로 정식화하였다. 공공성에 근거한 비판은 군주가 보편 원리의 잘못된 적용에 의한 통치를 자행하지 않게 경계하고, 군주를 비롯한 전 국민의 계몽 의식을 고취시키며 원초적 계약의 이념에 따르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지향하게끔 독려한다.

In Kant's theory, a people who already subject to an existent civil community cannot offer resistance to the head of state.For a people to be authorized to resist, there would have to be a public law permitting it to resist, that is, civil laws are over civil constitution, this is self-contradictory. It is grounded on an original contract that lies a priory the rational idea of pure pracitce reason in civil condition that before a public lawful condition. A people are allowed only that oppose any injustice by complaint but not by resistance although the head of state violates an original contract. But they too havetheir inalienable rights against the head of state by a idea of the first contract, even though it cannot allowed coercive right against the ruler. Thus freedom of pen is the only guardian of the people's right. For it is a public use of reason by maxim of publi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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Über die Bedeutung des "Fürwahrhaltens" in Kants kritischer Philosophie

Joachim Kopper

동국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철학사상문화 제4호 2006.12 pp.225-253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방법론”에서 자신이 “선험적 원리론”(“선험적 원리론”은 “선험적 감성론”과 “선험적 논리학”을 포함하고 있고, 또 “선험적 논리학”은 “선험적 분석론”과 “선험적 변증론”을 포함하고 있다) 에서 충분히 다루지 못한 것에 대해 논하고 있다. “선험적 원리론”은 순수이성의 완전한 체계를 위한 소재를 제공한다면, “선험적 방법론”은 이러한 소재를 토대로 해서 순수하고 사변적인 모든 인식의 건축물의 체계를 그리고자 한다. 순수사변 이성은 진리의 논리학을 가능케 한다고 칸트는 “선험적 원리론”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칸트는 자신이 “선험적 원리론”에서 이러한 과제를 달성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방법론”에서 순수이성의 철학은 단지 오류를 방지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며, 이러한 역할은 결국 “소극적 내지 부정적” 역할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방법론”에서, 그 앞의 “원리론”에서 이러한 점에 대해 적절하게 논하지 못한 점을 보완하고 있다. 칸트는 “방법론”에서 순수이성의 진리의 성격을 ‘...라고 생각함)’(Fürwahrhalten)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표현은, 이전의 객관적 진리에 대한 주장을 독단적 태도라고 보면서, 우리의 진리는 결국 ‘실천적-독단적’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점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우리의 진리 체계는 일종의 도덕적 체계라는 것이다. 도덕적 체계란 우리의 인식은 쾌불쾌, 욕구 및 경향성과의 관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언제나 경험적 원천과 관계할 수밖에 없고, 경험적 과정을 통해서 일어나는 인식은 그 자체로 ‘발생’(Geschehen)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인식의 ‘발생’은 객관적 진리의 ‘정적인’, ‘영원한’ 성격을 지양한다. 그리고 인식의 ‘발생적’ 성격은 다른 한편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진리는 확신(Überzeugung)의 성격을 지니며, 주관적으로 어떠한 것을 ‘진리라고 생각함’의 성격을 지닌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로크와 버클리의 회의주의를 한편으로 수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넘어서는 진리론을 제시하고 있는데, 칸트는 특히 “방법론”에서 이러한 진리의 전 체계를 약도하고 있다. 칸트는 로크의 경험적 주관주의를 넘어서는 동시에 버클리의 언어의 추상성을 넘어서서 새로운 진리론을 보이고 있다. 그것의 특징을 크게 세 가지로 언급할 수 있다. 하나는, 선험적 감성론에 의해 경험의 주관성을 지양하고, 둘은, 철학적 사유는 단지 추상적 사유가 아니라 순수 감성적 직관을 통해서 세계의 현재함(Gegenwärtigsein)에 대한 이해의 표현으로서 일어난다는 점이며, 셋은, 이러한 사유는 일종의 회의주의의 휴지상태를 거쳐 일어난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유는 칸트의 비판철학에서 객관적 진리에 대한 주장(Behaupten)으로서가 아니라, 진리라고 생각함(Führwahrhalten)이라는 형태로 일어난다(geschehen).

Kant handelt in der transzendentalen Methodenlehre der Kritik der reinen Vernunft von der Unzulänglichkeit der transzendentalen Elementarlehre. Die Elementarlehre legt das Material und Bauzeug für das System der reinen Vernunft vor. Aber mit Material und Bauzeug kann die Vernunft ihr Anliegen nicht vollständig leisten. Denn empirisches Material und Bauzeug ist für die Vernunft das Andere. Daher kann die reine Vernunft sich selbst nur indirekt erfahren. Die Aufgabe der reinen Vernunft, d. h. die Erstellung der Logik der Wahrheit kann durch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und die transzendentale Analytik nicht bewerkstelligt werden. In der Ästhetik und der Analytik bleibt diese Aufgabe unverstanden. Dieses Unvermögen drückt Kant in der transzendentalen Dialektik und der transzendentalen Methodenlehre auf eine Weise des Skeptizismus aus. Dieser Skeptizismus ist aber nicht ein empirischer Subjektivismus. Der Skeptizismus in der Kritik der reinen Vernunft hängt mit dem theoretischen(spekulativen) Gebrauch der Vernunft zusammen. Durch den theoretischen Gebrauch kann die Vernunft ihre eigene Aufgabe nicht adäquat tun, weil die Vernunft die Dinge nur auf die Weise der sinnlichen Erfahrung weiß. Ihr Wissen ist dadurch nicht die Logik der Wahrheit. Kant stellt fest, daß die Vernunft nur in ihrem praktischen Gebrauch die Legitimation der Wahrheit hat. Dieser Charakter der Wahrheit enthält die Bedeutung des Führwahrhaltens. Das Führwahrhalten der Wahrheit geschieht auf die Weise des reinen sinnlichen Anschauens. Das reine sinnliche Anschauen ist subjektes Erkennen, aber zugleich objektiv gült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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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ㆍ사상ㆍ문화』원고모집 및 심사규정

동국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철학사상문화 제4호 2006.12 pp.255-258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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