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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학연구 [Journal of the Pure Land Buddhism]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국정토학회 [The Korean Society of Pure Land Buddhism]
  • ISSN
    1229-1846
  • 간기
    반년간
  • 수록기간
    1998~2018
  • 주제분류
    인문학 > 불교학
  • 십진분류
    KDC 220.1 DDC 294
제16권 (12건)
No
1

四溟堂 惟政의 정토사상

한태식(보광)

한국정토학회 정토학연구 제16권 2011.12 pp.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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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溟堂 惟政(1544-1610)은 西山大師의 法嗣로서 선교에 통달하였고, 詩文에도 능하였으며, 壬辰倭亂을 맞이하여 儀僧軍을 이끌고 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나라를 구하였다. 또한 전후의 처리를 위해 일본에 講和使 역할도 하였다. 그의 사상적인 측면은 간화선 중심의 無字公案 수행을 하였으며, 교학적으로는 󰡔법화경󰡕과 정토교학을 깊이 공부하였다고 보여진다. 뿐만 아니라 儒佛仙의 삼교에도 밝았으며, 사대부들과도 넓게 교류하였다. 그의 많은 시문에는 불교교학적인 내용보다 자연을 읊은 서정시와 상소문 등의 글이 많다. 그의 정토사상을 나타내고 있는 자료로는 󰡔圓俊長老法華後跋󰡕가 대표적이다. 여기서는 타력신앙과 指方立相的인 정토에 대해여 적극적으로 권유하고 있다. 특히 그는 唯心淨土보다는 칭명염불을 중시하고 있으며, 서방극락정토가 존재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그가 지은 󰡔彌陀造成點眼疏 󰡕와 󰡔畵諸佛菩薩慶讚疏󰡕 등에서도 극락정토에 대해서 설하고 있으며, 극락왕생천혼문으로는 󰡔華嚴經後跋󰡕, 󰡔韓方應薦父母印經跋󰡕, 󰡔覺林寺尋劒堂落成疏󰡕, 󰡔月精寺法堂改椽疏󰡕 등이 있다. 이뿐만 아니라 백련결사도량의 승려들에게 지어준 몇 편의 게송에서 그가 백련결사를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백련결사의 염불행자인 것 같기도 하다. 이 밖에도 그가 전쟁에서도 항상 수지하였던 호신불의 복장이나 강화사로서 일본에 갈 때 관음상을 모시고 가면서 항상 예불이나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도 그의 정토사상과 신앙적인 측면을 가름해 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끝으로 그가 지은 「浮石寺安養樓重創記」는 부석사 안양루가 그대로 현세 정토임을 대변하고 있다고 하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그의 정토사상은 정토삼부경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입상적인 정토이며, 칭명염불을 수행의 일과로 삼았다고 보여진다.
Samyeongdang, Yujeong (1544-1610) was the authorized successor of Seosandaesa, who mastered the Zen sect and non-Zen sect of Buddhism, was skilled in the poetry and prose, and saved the country by participating in the war leading the voluntary Buddhist army in the Imjinwaeran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He also played the role of peace delegate to Japan for the post-war treatment. In his ideology aspect, it looks that he had disciplined the Mujagongan based on the Ganhwaseon and studied the 󰡔Beobhwagyeong󰡕 [Siddharma Pundarika-Sutra] and the pure land theory in depth in terms of the non-Zen sect. In addition, he was bright in the 3 religions of Confucianism, Buddhism, and Taoism, also he interchanged with the noble class scholars. There are lots of lyric poems reciting the nature and appealing works more than the contents of Buddhistic lesson in the plenty of his poetry and prose. The 󰡔Wonjunjangrobeobhwahubal󰡕 is the representative material expressing his pure land ideology. It suggests the Taryeok faith [the faith by the other’s power] and the directional & tangible pure land positively. Particularly, he took serious view on the Chingmyeongyeom -bul [invocation to Buddha] rather than on the Yusimheongto [spiritual pure land], and stated clearly that there exists the Buddha’s nirvana pure land. Also, he explained the nirvana pure land in the several Soh [alienation verses] he composed, and put stress on the Buddhist invocation in the Geuklakwangsaengcheonhonmun [writing on the dead person’s soul for easy passage into eternity]. We can see that he paid keen attention on the white lotus fraternity in several verses he had composed for the Buddhist monks in the white lotus fraternity training center. So, it looks that he was the Buddhist invocation pilgrim of the white lotus fraternity. In addition, it is the evidence to discern his pure land ideology and his aspect of faith that he always possessed the clothing of guardian Buddha in the war and that he did not neglect the invocation and prayer all the time holding the statue of Buddhist Goddess when visiting japan as the peace delegate. Finally, it may not be the exaggeration to say that the 「Buseoksa Anyangru Jungchanggi」 [reconstruction story of Anyang Building of Buseoksa Temple] he wrote is speaking by proxy that the Anyangru of Buseoksa Temple is the pure land of this life. Therefore, it is understood that his pure land ideology had been the directional tangible pure land based on the Jeongtosambugyeong [three Sutra of pure land], and he had practiced the daily discipline of invocation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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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불교조계종 현행 ‘상단칠정례’ 고찰

신규탁

한국정토학회 정토학연구 제16권 2011.12 pp.5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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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각종 의례문(儀禮文)도 시대 변화에 따라 바뀔 수 있겠지만,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상응하는 교리적 설명과 절차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행 대한불교조계종의 ‘예불문(禮佛文)’은 합당한 교리적 설명과 절차도 없이, 특히 본존(本尊)을 설정함에 있어 전통과 크게 달라졌다. 필자는 이 변질을 밝히기 위하여,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 유통하던 각종 문헌 자료 속에 나타난 ‘예불문’을 비교하고 분석했다. 그리하여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에서 ‘예불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상단칠정례’가 전통과 달라졌음을 논증했다. ‘예불문’이란 그것을 함께 사용하는 공동체의 신앙적 내지는 학문적 이념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문서로서, 교단의 실질적 측면은 물론 상징적 측면에서도 의미가 매우 크다. 이런 면에서 볼 때에, ‘예불문’의 변질은 교단의 정체성의 변질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게다가 많은 의례문 중 유독 ‘예불문’만 바꾸었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여타의 의례문과 모순을 초래했고, 더 나아가서는 전통과의 단절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런 모순과 단절의 극복 대안으로, 필자는 법신(法身) 신앙에 대한 옛 전통을 계승하여, ‘예불문’과 ‘예참문’을 정비할 것을 제안했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한자(漢字) 불교권에서 전통적으로 ‘예불문’과 ‘예참문’이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음도 논증했다.
Various Buddhist ceremonial writings are subject to change. However, for the alteration, there should be doctrinal explanations and reasonable procedure. The current ‘Worship writings for Buddha’ in the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 have been changed without doctrinal explanations and reasonable procedure. Especially, the principal image of Buddha(本尊) has been significantly altered from the traditional. I, in order to explain the transition, compared and analyzed abundant ‘Worship writings for Buddha’ contained in various historical documents which were circulated during the Chosun Dynasty and the colonial period. This study demonstrates that ‘Seven bows on ceremonial occasion’(7정례), used for ‘Worship writings for Buddha’ in the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 has been altered from the traditional. ‘Worship writings for Buddha’ are significant documents in terms of symbolic meaning as well as practical aspect, revealing the faith or academic philosophy of the community which uses the same worship literature. From this point of view, the alteration of ‘Worship writings for Buddha’ could change the identity of Buddhism. Moreover, the only alteration of ‘Worship writings for Buddha’ among many ceremonial writings caused the contradictory situation: contradiction between ‘Worship writings for Buddha’ and the other ceremonial writings; contradiction between ‘Worship writings for Buddha’ and the doctrine of Buddhism. As an alternative to overcome this contradiction, I suggest that ‘Worship writings for Buddha’ and ‘Writings for penitential bow’ should be improved, following after the old tradition of faith. Through this research, I demonstrate that there is a close relationship between ‘Worship writings for Buddha’ and ‘Writings for penitential bow’ within the area of Buddhism and Chinese characters.

7,300원

3

불교예불의 의미와 행법

이성운

한국정토학회 정토학연구 제16권 2011.12 pp.8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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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예불은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는 일상의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원에서는 아침저녁 송주를 외는 정근과 더불어 전각에 모신 존상과 달리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상주삼보와 삼보 중 승보를 다시 네 곳으로 세분해 일곱 배의 절을 하고 있다. 이 같은 형태의 예불은 상주예경이 아닌 신행하는 불법승 삼보를 세분해 청해 세분해 예경하고 참회하고 권청하는 ‘예참’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어떻게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언제 올리며 어떤 마음으로 올려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먼저 불 재세 시의 예경을 통해 처음 뵀을 때의 예경과 부처님 곁을 떠나갈 때의 예경을 보여준다. 부처님을 뵙는 순간 감화를 받는 장면으로 위의교화의 전형을 보고, 설법을 듣고 마음이 열린 이들이 부처님을 떠나가는 장면에서 부처님을 세 번 돌고 발에 얼굴을 대고 절하고 떠나가는 예경을 확인하고 있고, ‘빠알리경전’의 예경법에서는 예불, 삼귀의, 지계오계서원, 찬탄의 예경순서를 확인하고 있다. 예불은 육시, 삼시, 조석 이시의 정시(定時)와 법당에 들어가게 되는 수시(隨時)에 하게 되는데 이때 행하는 보례게주(普禮偈呪)의 모습이 등장하는 과정을 찾아 예불을 올리는, 보례게송의 의미를 밝힌다. 또 예불 앞에 향과 청수로 공양하는 다게(茶偈)와 오분향게(五分香偈)의 역할을 밝혀내고 있다. 중국과 일본에서 쓰이는 노향찬(爐香讚)이 아닌, 오분향게는 통신의 향으로 저녁에 올리고, 다게는 청해 모신 분이나 상주하시는 분에게 올리는 공양이므로 아침에 시설되지 않았을까 하고 추론하고 있다. 이 글은 현행 한국불교의 7정례 예불은 ‘예참’의 형태가 축약된 ‘소청예불’이라고 결론을 맺는다
Buddhist worship is a daily worship done to greet Buddha. Even though it is only a daily greeting worship done to Buddha, different from Junggen(精勤), which is done Songju(誦呪) in the morning and night and the sacred image of Buddha, kowtows are done 7 times to Sakyamuni Buddha among Sangju-Sambo(常住三寶: Three treasures that are always present), Sambo(三寶: Three treasures) and Sengbo(僧寶: Buddhist monk treasure) which are again divided into other different four places . This kind of Buddhist worship is not Sangju-Yaegyung(常住禮敬: Always praying in front of Buddha) but is a form of ‘Yaecham’(禮懺: Praying in front of the Buddha) which is done by firstly dividing the kind of Buddhist monks that does Sinhaeng(信行) into 3 parts and doing Chung Hae and praying in front of the Buddha, repenting and doing Gunchung(勸請: Sincerely listening). This writing talks about how and when to pray in front of Buddha and what kind of mind should go aside with it. Through Yaegyung(禮敬) done at the moment of Bul-Jaesae(佛在世: Buddha is present in the world), we can see the Yaegyung done at the first moment of meeting and leaving the Buddha. The scene of being influenced from the instant people meet Buddha is one kind of edification that is mentioned above and Yaegyung can be found in the scene where people who opened their heart after listening to Buddhist sermon leaves Buddhist which is done by going around the Buddha three times and doing kowtow by making contact with Buddha's feet with their face then leaving. Further more, Yaegyung order is identified in Yaegyung rule of Pāli Buddhist scriptures, Yaepul(禮佛), Samgyuei(三歸依), Jigyae(持戒) 5Gyae-Syuwon(五戒誓願) and Chantan(讚嘆: Admiring). Yaepul is done at the fixed times 6 o'clock, 3o'clock, 2 a.m., 2 p.m. and Susi(隨時: Occasionally) when people go in to the Buddhist sanctuary and the meaning of Bolyaegaejoo(普禮偈呪) is found at the process of the Bolyaegaejoo(普禮偈呪) scene appearing at this moment. It is inferred that Obunhyanggae(五分香偈) is offered as the scent of Communication in the evening, not Nohyangchan(爐香讚) that is used in China and Japan and Dagae(茶偈) is was set in the morning because it is the offering which is offered to the person who is kept by request or the person who resides in the place. This writing is a summary of ‘Yaechan’(禮讚), current Korean Buddhism's Ch'ilchŏnglye, called 'Sochung(召請) Buddhist worship

6,700원

4

대승불교 서원(誓願, praṇidhāna) 의식의 초기 불교적 모습에 대한 일고찰

최봉수

한국정토학회 정토학연구 제16권 2011.12 pp.113-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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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은 가장 중요한 대승불교의 덕목 중 하나이다. 이미 대승의 주요 덕목을 열거해 놓은 열 가지 바라밀다 중 하나로 등장함을 보면 그 중량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모든 대승불교의 덕목은 사실 초기불교에서 그 배경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하므로, 서원도 초기불교에 그 기원 또는 배경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초기불교의 경설들을 살펴볼 때, 실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사실이 드러난다. 우선 첫째로 ‘서원’(paṇidhāna, praṇidhāna)이라는 말 자체는 이미 많은 연구가들이 주목하듯이 초기불교에서는 그다지 긍정적인 덕목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무원삼매(無願三昧) 무원해탈(無願解脫)로 이어지는 수행법과 그 결과에 주목해 볼 때 오히려 부정되어야 할 분위기마저 배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둘째로 ‘성구’(聖求, ariya-pariyesana)라는 표현이 초기불교에 출현하거니와, 이는 강렬한 서원 의식의 시작을 알리는 표현이다. 부처님이 출가 후 6년간 보살행을 전개해 나감에 있어서 근본 동기가 바로 ‘성구’라는 표현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성스런 것을 간절히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성구’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역시 ‘성구’ 할 것을 당부하고 계신다. 그리고 셋째로 결의바라밀다(adhiṭṭāna-pāramitā)의 존재는 대승불교의 원바라밀다에 육박하는 무게로 다가온다. 결의 바라밀다의 결의에는 ‘의무(vata)’ 및 ‘서약(pratijñā)’의 뜻이 들어 있거니와, 성스런 것을 간절하게 구하면서[‘성구’] 아울러 반드시 이루어야할 ‘의무’처럼 그리고 반드시 지켜야 할 ‘서약’처럼 결의하라는 요청은 그대로 서원 의식으로 귀결된다. 즉 서원이라는 술어에 입각하여 고찰할 때 초기불교에 부정적 분위기가 느껴졌을 뿐이지, 서원 의식 또는 서원 정신은 오히려 강렬하고 활발하게 표출되는 것이 초기불교인 것이다. 그리하여 넷째로 부처님이 반열반에 즈음하여, 깨달은 직후의 사건 하나를 회고하는 대목이 있거니와, 거기서 남녀 재가출가의 모든 불자들이 똑같이 불법 수행에 전념하기를 목적으로 두시고 아울러 전법에 나아가기를 목적으로 하신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결국 불자들은 단순히 자신의 해탈 열반은 물론 이웃의 해탈 열반까지 서원해야 한다는 뜻이 성립하고 마니, 여기서 초기불교 서원 의식의 절정을 보게 된다.
In the Mahāyāna-Buddhism, it is taught that there are various pāramitās. There are ten pāramitās listed, but for our purposes, we are going to understand the praṇidhāna-pāramitā. In general the ten pāramitās may be divided into two groups, one of which is belonging to the prajñā-pāramitā, and the other to jñāna-pāramitā. The first group includes the six pāramitās and they are dāna(alma-giving), śīla(morality), kṣānti(forbearance), vīrya(exertion), dhyāna(meditation) and prajñā-pāramitā(perfection of wisdom). The prajñā-pāramitā suttas are preaching of these pāramitās. The second group includes another four pāramitās which are upāya(approach), praṇidhāna, bala(power) and jñāna-pāramitā(perfection of ultimate knowledge). we will focus on the praṇidhāna of these pāramitās. In the Early Buddhism, it is taught that there are ten pāramitās, too. But there is no praṇidhāna-pāramitā at these Early Buddhist pāramitās. Instead, we think that the adhiṭṭhāna-pāramitā is in place of the praṇidhāna of the Mahāyāna-Buddhism. This pāramitā is appeared several times at the Early Buddhist scriptures, the Buddhavaṃsa and the Cariyāpiṭaka[Khuddaka-nikāya vol 7.]. We also find other aspects of the praṇidhāna at the Early Buddhist scriptures, and one of the more important ones is the ariya-pariyesana of the Pāsarāsi Sutta[Majjhima-nikāya 26th sutta]. We do not have time now to discuss all the various levels of the meaning of the ariya-pariyesana, but suffice it to say that the most basic significance of the ariya-pariyesana is the avoidance of the unwholesome aims and the ardent longings of the sacred aims. The ariya-pariyesana is exemplified in the life of the Buddha by his own aims of leaving home and wandering about as a recluse. There are many other important elements in the meaning of the praṇidhāna. But if we can begin to see and understand the two elements of the adhiṭṭhāna-pāramitā and the ariya-pariyesana; if we can begin to appreciate the values and qualities that are exemplified in the life of Buddha, we will have gained greater insight into the real significance of the mind of praṇidhāna of the Early Buddhism.

8,400원

5

義湘 華嚴觀行의 特徵과 傳承

이홍구

한국정토학회 정토학연구 제16권 2011.12 pp.153-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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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 화엄관행의 특징은 不住中道的 華嚴觀行으로 󰡔十地經論󰡕의 제6現前地의 緣起觀行에서 ‘生死涅槃常共和’ 의미로 一心 위에서 관찰되어지는 제법의 空性과 緣起로 명확히 파악하고 있다. 의상의 부주중도관행은 法性과 眞性의 不住中道的 관계와 진성의 하부구조에서 事事無碍觀行, 緣起觀行, 因緣觀行으로 분화되어 펼쳐지는 것이다. 義湘 直弟子 表訓의 五觀釋에 따르면 의상의 觀行인 事事無碍觀行이 實相觀․無住觀․性起觀 형태로 분화되고 緣起觀行과 因緣觀行은 性起觀․緣起觀․因緣觀의 형태로 분화된 구조인 것 같다. 그리고 760년에 皇福寺에서 강설한 四滿義科와 四門釋과 眞定의 3門釋은 부주중도적 화엄관행을 계승한 것이다. 神琳․法融의 時代(8C중)에 의상의 3세 법손이 되는 신림은 일승의 법계가 바로 범부의 五尺身이며, 일승을 자각하는 初․中․後에 증감이 없이 不動한 자리라고 하는 의상의 ‘五尺法性成佛思想’의 방향을 계승하여, ‘一乘法界圖’라고 하는 제목의 설명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9세기 초엽에 활동한 신림의 직제자인 법융은 의상과 같이 證分과 緣起分을 不住中道的 관계에서 이해하고 증분을 더욱 더 강조하며, 의상보다 원교의 포용성을 보다 분명하게 제시하여 일승과 삼승, 별교와 동교를 모두 포괄하는 입장에서 ‘五尺法性成佛’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法融以後, 均如以前(8C후-9C초)의 시대에 󰡔大記󰡕와 󰡔眞記󰡕도 의상과 같이 증분과 연기분을 부주중도적 관계에서 이해하고 증분을 더욱 더 강조한다. 이와 같이 의상계 법손들은 증분과 敎分의 관계를 일승의 두 기능으로 보면서 부주중도적 화엄관행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Summarizing Hwaeom Gwanhaeng of Euisang it can be categorized in mainly 2 viewpoints. First, the Bujujungdo-relationship between Beopseong(法性) and Jinseong(眞性) that is Sasamuyae(事事無碍)-Gwanhaeng which does not separate the whole Beopgae(法界) and one's body and mind that already possessed Beopseong. Second, the Bujujungdo-relationship between Yeongi(緣起) and connection that is the structure of realizing Beopseong in one's body and mind through Yeongi-Gwanhaeng and Inyeon-Gwanhaeng. On a standpoint of aspiring Wonkyo of Byeolgyoilseong(別敎一乘) while it has been observed that the relationships among these 3 types of Gwanhaeng takes into account Wonjoong and the respective gradation simultaneously, from the aspect of Gyobeop(敎法) of Budda it is structured as Sasamuyae-Gwanhaeng -> Yeongi-Gwanhaeng -> Inyeon-Gwanhaeng and from the aspect of response of a people's desire and level it is structured as Inyeon-Gwanhaeng -> Yeongi-Gwanhaeng -> Sasamuyae-Gwanhaeng. However this dual structure is Wonjoongmuyae(圓融無碍) as the relationship of Sangjeok(相卽). It has been observed that the effort to understand the system of Bansi as contents or the gradation of Bujujungdo-Gwanhaeng instead of looking at it from logical and religious scientific aspect is the original Hwaeom Gwanhaeng of Euisang extraction and contrarily it has exposed the more concretized aspect as it descends from the times of Euisang to the next generation. Specially, in Ogwanseok(五觀釋) Which was approved from Euisang to Pyohoon(表訓) Jeongbunbeopsung is Silsanggwangwan(實相觀), the Bujujungdo-relationship of Jeongbun and Yeongibun is Mujugwan(無住觀), the indiscretional viewpoint of Yeongi and Inyeon is Seonggigwan(性起觀), and there are Yeongigwan and Inyeongwan from the indiscretional view-point of Yeongi and Inyeon. This Gwanhaeng appears that it shows the respective gradation connoting Wonjoong in terms of Inyeongwan -> Yeongigwan -> Seonggigwan -> Mujugwan -> Silsanggwangwan. Namely, it seems the structure is that Sasamuyae-Gwanhaeng, which is Gwanhaeng of Euisang, is specialized into forms of Silsanggwangwan, Mujugwan and Seonggigwan, and Yeongig-Gwanhaeng and Inyeong-Gwanhaeng is specialized into forms of Silsanggwang, Yeongigwan and Inyeongwan. At the end, the universal Bosalhaeng practices mercy by exposing itself to the people through time and space, the particular Gwanbup practices through awareness by exposing wisdom into the people's mind. However the above Bosalhaeng and Gwanbup is Muyaejajae(無碍自在) on the ground that one's body and mind is SangipSangjeok as Bujujungdo-Gwanbup. Therefore any moment of Hang․Zoo․Jwa․Wa Eu․Muk․Dong․Jeong(行住坐臥 語黙動靜) by moment to moment being conscious of no existence of delusion to be cut off by means of endlessly seeking mind through body and seeking body trough mind one could become Guraesungbul eventually

5,700원

6

원묘 요세의 이동경로에 따른 사상 추이 고찰

최동순

한국정토학회 정토학연구 제16권 2011.12 pp.175-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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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최자(崔滋)가 쓴 「만덕산백련사원묘국사비명 병서(萬德山白蓮社圓妙國師碑銘 幷序)」에 기록된 원묘 요세(圓妙 了世, 1163∼1245)의 이동경로를 알아보고 그 현장 확인, 그리고 그의 사상적 추이를 분석하였다. 요세가 방문했던 사암(寺庵)에 대한 사전 조사, 그리고 이동한 장소를 따라가 확인하는 방법을 취했다. 󰡔만덕사지(萬德寺志)󰡕나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지리서들을 참고하였다. 비명은 요세의 생애를 시간적 흐름과 장소적 변화에 따라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출생지인 의령군 부림면 신번리를 비롯하여, 승선(僧選)에 따른 개경 진출, 은둔에 따른 장연사와 상무주암의 경로가 나타난다. 요세는 남원지역 활동을 거쳐서 월생산 약사난야에 거처를 정한다. 맹렬한 예참행으로 만덕산과 백련산에 크게 불사(佛事)를 일으켰음을 확인하였다. 이들 가운데 현장 확인이 어려운 곳은 개경(개성)이며 현재 장연사와 약사난야의 위치를 알기 어렵다. 요세가 활동했던 장소는 그의 사상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동에 따른 사상적 추이의 고찰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천락사에서 천태학을 배우고 승선으로 개경에 진출하여 (천태) 종장이 되기까지의 행로를 추정할 수 있다. 권력을 혐오했던 그는 은둔으로 돌아섰으며 상무주암에서 천태 및 조계의 교판적 차이점을 경험한다. 이후 남원 지역 활동을 거쳐 약사난야에서 본격적인 천태 교관(敎觀)을 실천하며 이를 현실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보인다. 이후 만덕산에 보현도량을 개설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에 따라 본 연구는 요세의 생애사 기록을 토대로 현장을 조사하였으며 보다 생생한 맥락적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This study examined the movement route of Wonmyo Yose (1163∼1245) recorded in Choi Ja's 「Mandeoksan Baekryeon Sa Won myoguksa Bimyeong Byeongseo(萬德山白蓮社圓妙國師碑銘 幷序)」, verified its point, and analyzed his transition of thought. It employed a method to have preliminary investigation of Saam (寺庵) which Yose visited and to confirm the movement areas. Geographical works like 󰡔Mandeoksaji (萬德寺志)󰡕 or 󰡔Translated Sinjeung Dongguk yeojiseungram󰡕 were cited. Bimyeong(Inscription) recorded the life of Yose according to the time flow and spatial change clearly. It recorded his birth place, Sinbeon-ri, Burim-myeong in Euiryoeng-gun, advancement to Gaegyeong according to the his vow as a monk(僧選), and movement route to Jangyeonsa and Sangmujuam according to his seclusion. Yose resided in Yaksa nanya at Wolsaengsan after his activity in Namwon area. It is confirmed that he had a great success in Buddhism work at Mt. Mandeok and Mt. Baekryeon. Among these, the points that are not available to figure out are Gaegyeong (Gaeseong), and also current Jangyeonsa and Yaksa nanya. The place he worked had been highly related to his idea. It means it is able to figure out his transition of though according to his movement. The route from his study Cheontaehak at Cheonraksa through advancement to Gaegyeong and to becoming a chancellor of Cheontae Order can be conjectured. He returned to nature as he hated power, and experienced the differences between Cheontae Order and Jogye Order at Sangmujuam. Thereafter, he came to practice his Cheontae doctrine at Yaksa nanya after the activity in Namwon. It also showed his working to open Bohyeon Buddhist training camp at Mt. Mandeok vividly. Thus, this study investigated the life of Yose in a field based on the records and could obtain more vivid contextual resources.

8,400원

7

천태수행법의 기본원리 - 지계와 참회를 중심으로

김종두(혜명)

한국정토학회 정토학연구 제16권 2011.12 pp.215-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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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죄를 습관적으로 짓는다. 그리고 반성하고 참회하는 노력을 등한시 한다. 그래서 마음이 황폐화 되고 윤리적이고 도덕적 관념을 상실한다. 이러한 때에 계율을 지키고 수행을 한다면, 잃어버린 도덕성을 회복하고 황폐화된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 시대에 계율은 참회와 더불어 인간성 회복과 바른 수행과 증득으로 이어진다고 생각된다. 당시에 지의는 계를 지키고 참회를 하며 수행을 하여 깨달음을 증득하는 기본원리를 강조하였다. 그러한 방법은 그의 저서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먼저 󰡔천태소지관󰡕에서는 수행자를 세 종류로 나누어서 계와 삼귀오계와 사미십계와 구족계 등의 참회의 방법을 10가지로 설하고 있다. 다음에 󰡔마하지관󰡕에서는 10종의 계와 참회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사종삼매에서는 계율과 참회와 수행과 증득이라는 구조를 통해서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지의는 이러한 정리를 통해서 계율과 참회와 깨달음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짓게 되는 죄에 대해서도 참회를 통해 그 업장을 소멸하고 수행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즉, 계율(계)→ 참회→수행[정(定)]→ 깨달음[혜(慧)]이라는 공식이 성립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계와 정과 혜의 수행에서 간과 되었던 참회의 중요성을 재인식 시킨 것이라고 생각된다
Almost every person habitually commits big and small sins throughout their lives and they tend to neglect the act of self-reflection and penitence. Due to this, a person's mind becomes ruined and the conception of ethic and moral are lost. In cases of such, if people can follow the religious precepts and perform the asceticism, it is believed to restore the ruined mind and further, purify our mind. At present days, religious precepts along with penitence will allow people to restore one's humanity, to perform correct asceticism and to achieve enlightenment. Zhiyi(智顗) had emphasized the basic principle of following precepts, performing asceticism to achieve enlightenment. The details of the methods are well described in his writings. In his 󰡔T'ien-ta char chih-kuan󰡕, he classifies ascetics in to three and describes ten types of penitence including the three refuges and five basic precepts(三歸五戒), the ten rules for Samanera(沙彌十戒) and the rules of Sangha(具足戒). In 󰡔Mohe Zhiguan󰡕, he describes ten types of precepts and methods of penitence. In his four kinds of Samādhi, he emphasizes the importance of achieving enlightenment through the structure of following precepts, penitence and asceticism. Through such arrangements, Zhiyi emphasizes that precepts, penitence and enlightenment cannot be separated and he makes suggestions as to how people can remove karma from their sins through asceticism. In summary, conditions for the formula of precepts → penitence → asceticism → enlightenment can be achieved. This is a formula that suggests a new understanding of penitence which was neglected in between of precepts, asceticism and enlighte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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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濤의 一畫에 나타난 禪思想

이민경(탄호)

한국정토학회 정토학연구 제16권 2011.12 pp.245-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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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말기 중국 화단에서는 작가의 개성표현이 비교적 활발하였으나 그 이론적 배경은 동기창의 南北宗論의 사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청대화가들의 화풍은 전형적 전통을 의식적으로 따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정통성을 주장하고 나서는 이들의 擬古典主義적인 流波에는 반발하고 전형적 전통에 대해서는 자신만의 독특한 자아세계를 자유로운 표현방식으로 실질적 체험을 통해 이끌어 나갔으며 자신의 화법을 명확하게 찾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를 통해 석도는 자신의 작품세계에서 표현상 자유로운 정신과 사상을 획득할 수 있었으며, 독창적인 특징과 개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석도의 󰡔畵語錄󰡕은 일관된 자신의 화법과 화론을 전체 18장으로 꾸몄으며 중국예술 정신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三家思想을 배경으로 펼친 이론서라 말할 수 있다. 그는 󰡔畵語錄󰡕에서 一畫의 원리를 바탕으로 三家思想과 회화사상의 기초문제와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회화 창작원리 및 방법과 본인의 인격수행에 관한 내용 등을 간략하면서도 명료히 밝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畵語錄󰡕의 핵심은 三家思想을 종합한 畵論의 결정체라 말할 수 있으며, 三家의 형이상학이 내재된 추상적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석도의 一畫는 觀念的 소향으로부터 구체적인 형상세계를 가능케 하는 회화예술의 첫 출발이자 또한 시작이다. 一畫는 우선 一畫의 畫를 “그리다”를 뜻하는 畵가 아닌 “긋는다”를 의미하는 畫로 발음함으로써 실제 창작에서 화가가 화면 위에 한번 긋는 한 줄의 線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다 더 근원적인 일획의 본체는 단순히 창작의 기본요소로서가 아니라 그것이 전통적인 三家思想의 토대 위에 성립된 것인 만큼 하나의 우주론적 본체로 생각하는 형이상학적 견해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禪宗의 禪思想에 기초한 석도의 회화사상을 禪僧이었을 때의 그와 畵僧이었을 때 그의 삶에 대한 변화와 그림을 통해 나타나는 선적 의미의 표현들을 살펴볼 때 과연 청대 개성주의의 시조라 말할 수 있으며, 석도가 이룩한 예술과 이론의 자유정신 사상은 후에 양주팔괴 뿐만 아니라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석도는 出家하여 禪僧의 길을 걸으면서 無爲自然의 道와 三家에 기초한 󰡔畵語錄󰡕을 저술하였다. 그의 화법은 한 가지로 고정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일관된 자신의 화법과 화론을 전체 18장의 󰡔畵語錄󰡕 가운데에서 때로는 추상적으로 때로는 구체적으로 전개하여 자신의 창조적인 화법을 확립한 것이다. 오늘날의 풍토는 옛 그림에 대한 이해와 탐구적 자세보다 모방적 성향이 흘러들어 젖어버린 것이 사실이다. 청초 끊어져가던 순수그림의 정신세계가 석도를 통해 이어졌듯이 석도 역시 옛 고전의 형식을 타파하고 순수한 자신만의 정신세계를 鼓吹해 나가며 자유로운 영원을 간직하기 위해 많은 노고에 힘썼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While the individual expression of painters in the artistic community of the late Ming Dynasty was comparatively lively, the theoretical background of this community does not depart very much from the ideas found in Qichang Dong's division of style into the Northern and Southern a religious polemic. The tendency of Qing Dynasty painters to consciously employ traditional artistic form also predominated. Opposing the totality of tradition and this mimetic school with its insistence on traditionalism, there were those who emphasized a definitive search for one's own painterly style, where an individual's real experience of freely expressing his own particular inner world leads him forward. It was through these individuals that Shi-tao was able to obtain a liberated ethos and philosophy of expression and manifest his creative character. The eighteen pages of Shi-tao's Record of Paintings and Words display a coherence of personal artistic style and philosophy. These in turn constitute a theoretical work which emerges from the background of the source of Chinese art's genius, the “philosophy of the three schools.” The Record of Paintings and Words succinctly yet lucidly makes clear the fundamental problems of the “three schools” ideology and artistic theory, concrete and direct creative principles and methods of painting, and Shi-tao's personal cultivation on the basis of the principle of “one painting.” While we can say that the essence of the Record of Paintings and Words is a decisive model for the synthesis of the philosophy of the Three Schools and art, we can also say that the metaphysics of the Three Schools was an abstract theory of immanence. The conceptual direction of Shi-tao's “one painting,” however, is that the graphic arts' departure point and its beginning both lie in making possible the expression of the concrete phenomenal world. Foremost is that the “painting” (畫) of “one painting” does not mean a picture, but articulates the significance of a stroke, as in “to draw a line”, which means the actual creation of a single line on a canvas by an artist. An even more basic form of the single stroke is not simply that a line is an element of creation but that based the traditional ideology of the Three Schools, a single line is also one part of the cosmological form. There is a need to examine this metaphysical viewpoint as well. Shi-tao's artistic philosophy, based on the principles of the Ch'an sect, held that if one, through spiritual cultivation and by means of the infinite universe's abstract beauty, could unify one's spirit with the universe's nature and awake to the truth, then naturally that artist would transcend mere draftsmanship and would have no need for formal learning. The artist would only give importance to accomplishing the merging of spirit and vitality and the awakening of his artistry. When we examine the transformation of Shi-tao from a Ch'an-monk to an artist-monk and the expression of Ch'an in his paintings, ultimately I must call him the beginning of Qing Dynasty individualism. The art and theory of the free spirit Shi-tao established was a huge influence not only on the “Eight Eccentrics of Yanzhaou” (揚州八怪) but also modern and contemporary artists. While walking the path of a Ch'an monk, Shi-tao created the Record of Paintings and Words, which was based on the doctrine of the unconditioned nature and the Three Schools. Shi-tao's style is not fixed, but throughout the work's entirety his consistent personal artistic style and philosophy develops, sometimes abstractly and sometimes concretely, and he establishes his personal creative meth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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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潤의 不二的 禪觀 연구

박소령

한국정토학회 정토학연구 제16권 2011.12 pp.279-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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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代 승려인 一雨通潤은 어려서 출가하여 儒家의 典籍들과 佛典을 두루 수학하였으며, 명대 화엄종의 학승 설랑홍은(雪浪洪恩, 1548-1608)에게 오랫동안 사사하면서 교법을 연찬하였다. 통윤은 󰡔維摩經󰡕ㆍ󰡔圓覺經󰡕ㆍ󰡔楞嚴經󰡕ㆍ󰡔法華經󰡕ㆍ󰡔起信論󰡕ㆍ󰡔成唯識論󰡕 등의 여러 經論에 註釋書를 쓸 정도로 敎學에 능통하였으며 禪學에도 정통하였다. 이와 같이 通潤은 明代 佛敎의 특색을 반영하는 주요 佛典들을 두루 통달하고 깊은 사색과 간명한 필치로 여러 저술을 남기고 있어서, 著述에 매우 능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저술한 주석서 가운데 하나인 󰡔維摩詰所說經直疏󰡕를 통해 󰡔維摩經󰡕의 不二思想을 禪과 관련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특히 그 중에서도 禪思想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유마경󰡕 「弟子品」에 나오는 舍利弗의 宴坐(坐禪)에 대한 維摩居士의 비판과 참다운 좌선을 제시한 것에 대한 통윤의 해석과 관점을 살펴보았다. 경전에서 유마거사는 ‘참다운 宴坐’에 대한 정의로 ‘三界에 몸과 생각을 나타내지 않는 것[不於三界現身意]’, ‘滅定에서 일어나지 않고 모든 威儀를 나타내는 것[不起滅定而現諸威儀]’, ‘道法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凡夫의 일을 나타내는 것[不捨道法而現凡夫事]’, ‘마음이 안에도 住하지 않으며, 밖에도 住하지 않는 것[心不住內不在外]’, ‘모든 견해에 움직임이 없고 37品을 수행하는 것[於諸見不動而修行三十七品]’, ‘煩惱를 끊지 않고 그대로 涅槃에 드는 것[不斷煩惱而入涅槃]’의 6가지를 말하고 있다. 다음 6가지 宴坐의 정의에 대해 통윤은 菩薩의 不二宴坐로 설명하면서 二乘이 坐禪하는데 看過할 수 있는 병폐를 不二的 禪觀의 입장에서 지적하고 있다. 그는 󰡔維摩經󰡕을 설명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一貫되게 不二法門을 나타내고 있다”고 언급한 것과 같이, 坐禪도 일관되게 不二의 觀照가 관건이 됨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통윤이 坐禪을 ‘菩薩의 大定’과 ‘二乘의 小定’으로 나눈 것은 진정한 좌선을 제시하는 동시에 한쪽에 치우친 좌선에 대한 비판적 해석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점은 당시 禪修行者들의 잘못된 인식을 󰡔유마경󰡕의 不二思想을 통해 논파하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있다. 그 중에서도 不二的 宴坐에 들지 못하는 二乘禪에 대한 비판적 해석이 당시 禪修行者를 비판한 내용과 잘 들어맞고 있다.
Tongrun who was a monk of the Ming dynasty entered the buddhist priesthood in his childhood, and studied many books of confucianism as well as buddhist doctrine extensively. He studied under Xuelanghongen(雪浪洪恩) who was a learned priest(學僧) of the Hua-yen school(華嚴宗) in Ming dynasty for ages. and pursued his studies a doctrine. Tongrun is well acquainted with Buddhist and Seon doctrine enough to comment lots of treatises, sutras such as the Vimalakīrtinirdeśasūtra(維摩經), the Saddharmapuṇḍarīkasūtra(法華經), the Mahahavaipulya-purnabuddha-sutra-prasannartha-sutra(圓覺經), the Laṅkāvatārasūtra(楞伽經), the Awakening of faith(大乘起信論), the Vīdyāmātrasiddhiśastra(成唯識論). Like this, it is plain enough that he was well-versed in writing because he was acquainted with essential buddhist doctrines which characterize buddhist in the Ming dynasty, and wrote voluminous works as a deep contemplation and a concise writing. Thus, this thesis dealt with how to understand mainly the Vimalakīrtinirdeśasūtra nonduality which is related to Seon through the Weimojiesuoshuojingzhishu(維摩詰所說經直疏), one of his annotations. Most of all, this thesis covers his interpretation and viewpoints, in which Licchavi Vimalakirti(維摩居士) criticized the sitting-meditation(坐禪) of Sariputra and showed a true sitting meditation in disciple chapter(弟子品), the Vimalakīrtinirdeśasūtra that was closely related to the Seon thought. Licchavi Vimalakirti defined true sitting meditations as 6 kinds in sutra. first, without appearing body and mind in the triple worlds. second, without raising nirodha-samapatti(滅盡定), appearing a dignified bearing(威儀). third, without abandoning buddhist path, appearing an ordinary person's as it is. fourth, without staying inside and outside in mind. fifth, without moving all kinds of views, practicing the thirty-seven aids to enlightenment(37助道品). finally, without renouncing affliction, entering into nirvana as it is. He explained the nonduality sitting-meditation(不二宴坐) of bodhisattva with six definitions above mentioned, and pointed out ills to miss easily when two vehicles sat in meditation from the position of the nonduality viewpoint of Seon(不二的 禪觀). As he mentioned the Vimalakīrtinirdeśasūtra that show nonduality thought consistently from beginning to end, he said that sitting-meditation also need consistently contemplation of nonduality. It is for interpreting critically about sitting meditation biasedly and suggesting a true sitting meditation at the same time for Tongrun to divide sitting meditation into bodhisattva's greater-concentration(大定) and two vehicles's lesser-concentration(小定) This is his intention to controvert misconception of Seon-disciplinants(禪修行者) at that time through nonduality of the Vimalakīrtinirdeśasūtra. Chief of all, Tongrun's criticism about two vehicles-Seon which wasn't absorbed in nonduality-sitting meditation coincide with criticism about Seon-disciplinants in those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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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震黙禪師遺蹟攷』에 보이는 經典名과 그 의미

이선이(태경)

한국정토학회 정토학연구 제16권 2011.12 pp.309-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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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는 공동생활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문학의 일종이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 불교와 관련한 많은 설화를 탄생시켰다. 불교설화는 민중들이 요구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담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역할일 것이다. 진묵스님(1562-1633)의 이야기는 경전에 근거하며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설화이다. 초의스님의 󰡔진묵선사유적고󰡕에서는 󰡔비화경(karuṇā-puṇḍarīka-sūtra)󰡕의 인행과 진묵대사의 인행이 같다고 경전(sūtra)으로 증거를 들고 있다. 수기의 인연은 오탁악세에서 석가여래(Śākya-tathāgata)의 화현으로 드러난다. 수기를 받는 보살은 4가지 게으른 법은 말아야 하고 4가지 정진하는 법은 수행해야 한다. 이 결과 중생(bahujana)의 예토에서 자비(maitrya)의 하얀 연꽃[puṇḍaīka]을 피운다. 화현하는 석가여래는 자비의 대비보살로 영취산(靈鷲山 Gṛdhrakūṭa)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의 화현인 것이다. 이 석가모니(Śākya-muni)의 화현이 이곳 동쪽나라에서는 바로 진묵스님이다.
Tales were an type of literature formed naturally with in the communalism. The introduction of buddhism in Korean history's three kingdom period gave rise to a many fables. Probably, the most important role of many Buddhism tales is complying to people's demands about real-life problems. The story of Jinmook(1562-1633) is representative tales based on the sūtra that scripture of buddhism. 󰡔Jinmooksuensayujukgo󰡕 written by Choui says that hetu-saṃskāra of karuṇā-puṇḍarīka-sūtra is equal to hetu-saṃskāra of Jinmook. Deep connection of vyākaraṇa is revealed that the emerging of the Śākya-tathāgata in the corrupt world. The Buddhist saint following the vyākaraṇa observe that abstaining the four idle law and acting the four training law. As a result, puṇḍaīka of maitrya blooms in the secular world. The Emerging of Śākya-tathāgata is the merciful Bodhisattva as well as the emerging of preaching Śākya-muni in the Gṛdhrakūṭa. It was Jinmook that the emerging of Śākya-muni in this eastern 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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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선사의 차문화 중흥의 의미와 그 영향

박동춘

한국정토학회 정토학연구 제16권 2011.12 pp.339-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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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는 조선 후기 민멸 위기에 처했던 한국의 차 문화를 중흥시킨 인물이다. 그는 대흥사에 이어진 선차(禪茶)를 복원하여 총림(叢林)의 끽다거(喫茶去)전통을 회복함과 동시에 한국의 정체성을 함의한 차를 재현하여 근현대로 이어지는 차 문화의 토대를 마련했다. 초의의 다풍(茶風)은 선차(禪茶)에서 연원(淵源)된 것이다. 선차의 시원(始原)은 달마(達磨)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참선(參禪) 수행(修行)의 장애였던 수마(睡魔)를 해결하기 위해 차를 활용한 이후, 선종 사원에서는 잠을 적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하는 차의 효능을 적극 활용하였고, 백장 회해(百丈懷海, 749∼814)가 청규(淸規)를 만든 이후로부터 차는 수행승들이 수지해야할 필수품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9세기 선종과 함께 차가 유입되어 고려시대 왕실의 비호 아래 수준 높은 유차(孺茶)와 작설차가 생산되었고, 명전(茗戰)이 유행되는 등, 송(宋)과 비견(比肩)될 정도로, 난만한 차문화를 이룩했다. 고려 말, 왕실의 사치는 차 또한 화려해져, 차가 지닌 담박함이나 검소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이러한 차의 폐단은 조선이 건국된 후, 차가 쇠퇴되는 요인으로 작용된다. 태종16 (1416)년 예조(禮曺)의 요청을 받아들여 왕실의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기신재제(忌晨齋祭)에 차 대신 술과 감주를 쓰라는 조칙이 내려진 이후, 차는 점차 쇠퇴 되어, 감기나 이질을 치료하는 단방약(單方藥)으로 전락된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민멸(泯滅) 위기에 놓인 차를 복원, 중흥시킨 인물은 초의선사이다. 그는 차의 이론을 정립, 초의차(草衣茶)를 완성하였고, 그가 만든 차는 경화사족들의 차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낸 매개물이었다. 특히 추사 김정희((秋史金正喜, 1786∼1856)와 자하 신위(紫霞申緯, 1769∼1845), 유산 정학연(酉山丁學淵, 1783∼1859) 등은 초의가 차의 애호층을 확대하는데 영향을 미쳤고, 초의와 교유했던 경화사족(京華士族)들은 초의차(草衣茶)를 통해 우리 차의 우수성을 인식했다. 당시 금령 박영보(錦舲朴永輔1808∼1872)의 「南茶幷序」와 신위(申緯, 1769∼1845)의 「南茶詩幷序」,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편지 등은 초의에 의해 집대성된 차를 칭송하는 한편 그가 이룩한 차문화 중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후일 초의의 다풍은 제자 서암 선기(恕庵善機?, ∼1876), 견향 상훈(見香尙熏, 1801∼1885), 만휴 자흔(萬休自欣, 1804∼1875), 범해 각안(梵海覺岸, 1820∼1896)에게 이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초의가 이룩했던 차의 중흥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이러한 한계점은 그들의 차에 대한 안목이나 열정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근현대로 이어지는 혼란기 속에서 차의 애호층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초의의 다풍은 범해의 제자 원응 계정(圓應戒定, 1856∼1927)에게 이어졌고, 원응은 다시 응송 박영희(應松朴映熙, 1896∼1990)에게 이어주어, 초의가 복원한 한국 차의 원형을 고스란히 근현대로 이어질 수 있게 하였다. 본고에서는 이 점을 주목하여 초의선사가 중흥한 차문화의 의미와 그 영향을 밝혀 보고자 하였다.
Seon Master Cho-ui(1786-1866) played an important role in reviving the Korean tea culture when the tea culture was at a risk of demolishing in the late Chosun dynasty. Master Cho-ui not only retored tea culture of Korean by reproducing the tea of meditation of Daehueng Temple and recovering the tradition of Kikdageo, but also he established the foundation of the tea culture that had been continued to the modern times. His philosophy of tea drinking originated from tea drinkong as meditation practice. by Bodhidharma. Bodhidharma drank tea to overcome sleepiness which was the main obstacle in meditation. Since then, the Buddhist monks drank tea to lessen drowsiness and to clear the mind, and tea drinking became an necessity for the meditating priests after Baekjang Hoehae(749-814) made it a rule to carry tea. Tea drinking was introduced in Koryo Dynasty along with meditation practice by the Buddhist priests. Under the protection of the Royals, high quality teas were produced and tea culture became very popular and sumptuous as it was in Song(宋) of China. The extravagant life of the Royals at the end of Koryo Dynasty affected tea culture as well. Tea no longer carried its clear taste, simplicity and frugality. As the dynasty moves on to Chosun, tea culture deteriorated. In 1416, King Taejong accepted the request by Yaejo which was to use the traditional liquor and rice drink instead of tea during the royal ancestral rites and ceremonies. Thus, tea was downgraded even further and used as cure for mere cold or dysentery. At the verge of being extinct, Master Cho-ui restored and revived the tea culture. His accomplishment in establishing his theory of tea making and producing his own tea arose attention and interest from the scholar group, Kyeongwhasajok. Among the scholars, Kim Junghee(1786-1856), Shin Wee(1769-1845), Yusan Jung Hakyeon(1769- 1845), and Park Youngbo(1808-1872) were tea lovers and they were the mediators who further introduced Master Cho-ui's tea to other scholars and people. In these scholars' letters, they all wrote about the high quality of the tea and praised the master's achievement of tea making and tea culture. Making of the master's tea was carried on by is student priests, Seoam Sungi, Kyeonhyan Sanghoon(1801-1885), Manhyu Jageun(1804- 1875), and Beonhae Gakan(1820-1896). However, the tea culture did not flourish any further. As Korea moved on to more complex modern world, it was difficult to find people who really enjoyed and appriciated tea culture. Nevertheless, Master Cho-ui's tea making was handed down to Weonwung Gyejwong(1856-1927), Beonhae's student. From Weonwung, it was continued by Eunsong Park Younghee(1986- 1990) and the tea making restored by Master Cho-ui was able to exist until the modern era. The paper focuses on the lineage of Master Cho-ui's tea making and researches on the influcence and the effect of Master Cho-ui's tea ma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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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초월의 항일운동과 一心敎

김광식

한국정토학회 정토학연구 제16권 2011.12 pp.37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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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고찰은 일제하 항일운동을 전개한 승려인 백초월의 비밀결사체인 一心敎를 정리한 논고이다. 백초월은 3.1운동부터 1944년 옥중 순국할 때까지 치열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의 행적, 독립운동 내용 및 성격 등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백초월의 행적은 2009년 진관사에서 백초월이 만세운동 당시 활용한 태극기를 비롯한 독립운동 자료가 대거 발견되어 언론에 큰 주목을 받았다. 백초월은 백용성, 한용운에 버금가는 항일투쟁을 전개한 승려임이 확인되었다. 본고에서 필자는 백초월이 20여 년간 항일투쟁을 전개하면서 활용한 비밀결사체인 일심교에 대한 전모를 정리하였다. 백초월은 1918년 화엄경에서 일심을 착안하여, 독립운동에 활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3․1운동 직후 불교계 중앙 차원의 독립운동을 추동하면서 비밀결사체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그래서 일심교를 창설하고 진관사 포교소에 사무소 개설, 강령 제정, 결사체의 확대, 결사대원의 모집 등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9년 만주로 가는 군용열차에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낙서사건을 주도한 것이 일제에 발각되어 일심교의 전모가 드러났다. 일심교에 관련된 80여명이 체포되고, 3명은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백초월도 체포되어 청주교도소에 수감 중 순국하였다. 백초월의 항일운동과 일심교의 관련 내용을 정리하였지만 추후에는 이 내용을 불교독립운동사에 편입시키고, 그 관련 자료 및 증언을 수집할 필요성이 있다.
This paper has organized the Ilsimgyo [One spirit religion], the secret fraternity of Chowol Baek who was the Buddhist monk unfolding the anti-Japan movement in the Japanese ruling period. Chowol Baek had unfolded fierce anti-Japan campaign from the March 1st Movement until he died in the prison in 1944. However, his achievement, independence movement detail, and character have not been known well Such an achievement of Chowol Baek attracted the attention of mass media when his independence movement materials including Taegeuk flag [Korean national flag] that had been used in the March 1st Movement were discovered in the Jingwansa Temple in 2009. It has been verified that Chowol Baek was the Buddhist monk who had unfolded the anti-Japan campaign actively next to Yongseong Baek and Yongwun Han. The author has organized the whole aspect of Ilsimgyo in this paper, which is the secret fraternity that was used by Chowol Baek to unfold the anti-Japan movement for about 20 years. Chowol Baek noticed the Ilsim in the Hwaeumgyeong [one Buddhism Sutra], and thought that it could be utilized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He recognized the necessity of secret fraternity while propelling the independence movement of the central level of Buddhism world right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He founded the Ilsimgyo, therefore, opened the office in the propagation center of Jingwansa Temple, established the general principles, expanded the fraternity, unfolded the recruit of death-defying corps, and so on. However, the whole figure of Ilsimgyo was disclosed as it was revealed to the Japanese government that he had led the scribbling incident inspiring the racial consciousness on the military train bound for Manchuria in 1939. About 80 persons related to the Ilsimgyo were arrested, and three of them were killed by torture. Chowol Baek also was captured and died while being arrested in the Cheongju Prison. The anti-Japan movement of Chowol Baek and the details related to Ilsimgyo have been organized, but it is necessary to enlist it in the Buddhist independence movement history and to collect the relevant data and testim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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