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t worship is a daily worship done to greet Buddha. Even though it is only a daily greeting worship done to Buddha, different from Junggen(精勤), which is done Songju(誦呪) in the morning and night and the sacred image of Buddha, kowtows are done 7 times to Sakyamuni Buddha among Sangju-Sambo(常住三寶: Three treasures that are always present), Sambo(三寶: Three treasures) and Sengbo(僧寶: Buddhist monk treasure) which are again divided into other different four places . This kind of Buddhist worship is not Sangju-Yaegyung(常住禮敬: Always praying in front of Buddha) but is a form of ‘Yaecham’(禮懺: Praying in front of the Buddha) which is done by firstly dividing the kind of Buddhist monks that does Sinhaeng(信行) into 3 parts and doing Chung Hae and praying in front of the Buddha, repenting and doing Gunchung(勸請: Sincerely listening). This writing talks about how and when to pray in front of Buddha and what kind of mind should go aside with it. Through Yaegyung(禮敬) done at the moment of Bul-Jaesae(佛在世: Buddha is present in the world), we can see the Yaegyung done at the first moment of meeting and leaving the Buddha. The scene of being influenced from the instant people meet Buddha is one kind of edification that is mentioned above and Yaegyung can be found in the scene where people who opened their heart after listening to Buddhist sermon leaves Buddhist which is done by going around the Buddha three times and doing kowtow by making contact with Buddha's feet with their face then leaving. Further more, Yaegyung order is identified in Yaegyung rule of Pāli Buddhist scriptures, Yaepul(禮佛), Samgyuei(三歸依), Jigyae(持戒) 5Gyae-Syuwon(五戒誓願) and Chantan(讚嘆: Admiring). Yaepul is done at the fixed times 6 o'clock, 3o'clock, 2 a.m., 2 p.m. and Susi(隨時: Occasionally) when people go in to the Buddhist sanctuary and the meaning of Bolyaegaejoo(普禮偈呪) is found at the process of the Bolyaegaejoo(普禮偈呪) scene appearing at this moment. It is inferred that Obunhyanggae(五分香偈) is offered as the scent of Communication in the evening, not Nohyangchan(爐香讚) that is used in China and Japan and Dagae(茶偈) is was set in the morning because it is the offering which is offered to the person who is kept by request or the person who resides in the place. This writing is a summary of ‘Yaechan’(禮讚), current Korean Buddhism's Ch'ilchŏnglye, called 'Sochung(召請) Buddhist wor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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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예불은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는 일상의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원에서는 아침저녁 송주를 외는 정근과 더불어 전각에 모신 존상과 달리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상주삼보와 삼보 중 승보를 다시 네 곳으로 세분해 일곱 배의 절을 하고 있다. 이 같은 형태의 예불은 상주예경이 아닌 신행하는 불법승 삼보를 세분해 청해 세분해 예경하고 참회하고 권청하는 ‘예참’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어떻게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언제 올리며 어떤 마음으로 올려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먼저 불 재세 시의 예경을 통해 처음 뵀을 때의 예경과 부처님 곁을 떠나갈 때의 예경을 보여준다. 부처님을 뵙는 순간 감화를 받는 장면으로 위의교화의 전형을 보고, 설법을 듣고 마음이 열린 이들이 부처님을 떠나가는 장면에서 부처님을 세 번 돌고 발에 얼굴을 대고 절하고 떠나가는 예경을 확인하고 있고, ‘빠알리경전’의 예경법에서는 예불, 삼귀의, 지계오계서원, 찬탄의 예경순서를 확인하고 있다. 예불은 육시, 삼시, 조석 이시의 정시(定時)와 법당에 들어가게 되는 수시(隨時)에 하게 되는데 이때 행하는 보례게주(普禮偈呪)의 모습이 등장하는 과정을 찾아 예불을 올리는, 보례게송의 의미를 밝힌다. 또 예불 앞에 향과 청수로 공양하는 다게(茶偈)와 오분향게(五分香偈)의 역할을 밝혀내고 있다. 중국과 일본에서 쓰이는 노향찬(爐香讚)이 아닌, 오분향게는 통신의 향으로 저녁에 올리고, 다게는 청해 모신 분이나 상주하시는 분에게 올리는 공양이므로 아침에 시설되지 않았을까 하고 추론하고 있다. 이 글은 현행 한국불교의 7정례 예불은 ‘예참’의 형태가 축약된 ‘소청예불’이라고 결론을 맺는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은 현세에 살아가는 인간의 고뇌와 고통이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의 인식이 그의 깨달음이었으며, 그 깨달음을 사회화하려는 노력이 그의 가르침이요 실천행이었다고 우리는 믿는다.
따라서 불교인에게 있어서의 궁극 목표인 열반은 탈(脫)사회의 경지가 아니며, 자주(自主), 자율(自律), 자유(自由)의 인격을 사회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아울러 개인적 완성인 열반을 사회화하려는 노력이 부처님의 실천행이었고, 그 결실이 승가 사회였다.
이러한 우리의 인식은 이미 역사상 정토(淨土)사상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이는 그 행태에 있어서 기복적 신앙으로 치우침으로써 그 본의가 침체된 면이 없지 않다. 이에 우리는 자주, 자율, 자유라는 인류의 이상적 인격을 완성해 가듯이 자유, 평등의 사회를 구현해 가는 것이 정토를 이루는 길임을 재인식하고, 이를 뒷받침할 객관적 연구와 능동적 실천을 위해 "한국정토학회"를 결성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개개인의 불교적 인격완성이 저절로 정토를 이루게 할 것이라는 안이함을 경계하며, 부처님의 이타적 노력을 교훈 삼아, 사회의 제반 문제를 불교적 입지에서 해결하는데 일익을 도모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따라서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윤리, 예술, 사회 등의 제반 분야도 당연히 우리의 관심 영역이 된다.
결국 우리의 취지는 불교 교학의 이론적 토대 위에서 정토 실현의 현실적 실천방도를 모색하자는 것이며, 당시대에 요구되는 불교의 실천성을 회복함으로써 불교가 정신적 위기에 처한 인류를 구할 대안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모든 학문의 활동을 정토에로 승화시켜서 인류 이상(理想)의 구현에 이바지 하고자 함이니, 이것이 우리의 염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