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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학연구 [Journal of the Pure Land Buddhism]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국정토학회 [The Korean Society of Pure Land Buddhism]
  • ISSN
    1229-1846
  • 간기
    반년간
  • 수록기간
    1998~2018
  • 주제분류
    인문학 > 불교학
  • 십진분류
    KDC 220.1 DDC 294
제26권 (7건)
No
1

한국 나한신앙의 특성 - 16나한과 500나한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

최복희(오인)

한국정토학회 정토학연구 제26권 2016.12 pp.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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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신앙은 관음신앙이나 지장신앙 등과 같이 신앙의 대상이 한 분이 아니다. 16나한, 18나한, 500나한 및 나반존자까지 포함하면, 신앙대상의 숫자가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운문사를 비롯한 거조암과 기림사 등의 나한전에는 16나한과 500나한의 존상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본고는 이 나한신앙들의 성격이 동일한 것인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하였다. 우선, 『大阿羅漢難提蜜多羅所說法住記』(이하, 『법주기』)를 소의경전으로 하는 16나한신앙의 성립을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하였는데, 하나는 ‘16’의 숫자이며, 다른 하나는 16인의 상수에 관해서이다. 경전에 나타난 ‘16’과 관련한 인물에 대한 용어는, ‘16재가보살’, ‘16현사’, ‘16정사’ 등이다. 이들 용어와 16나한 성립의 관련성은, ‘16’이라는 숫자의 공통성과 이들의 상수인 발타바라가 16나한에서는 제6존자로 상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6나한의 상수는 발타바라가 아닌 빈두로라는 점에 유의해야한다. 빈두로사상은 『법주기』 성립 이전부터 존재하였지만, 5세기에 한역된 『입대승론』과 『치선병비요법』등에는 빈두로를 대승이 아닌 성문이라고 설한다. 그런데, 학자들은 『법주기』가 소승적 성격으로 독립된 신앙이었던 빈두로신앙을 대승적으로 발전시켰으며, 나아가 나한의 개념도 대승적으로 변화시켰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들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빈두로가 성문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빈두로는 호법과 복전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의 호법은 붓다의 꾸짖음과 4대성문 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지만, 500나한과 함께 봉안된 16나한은 복전보다는 호법의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고 본다. 500나한은 붓다의 재세시는 물론 전생담에도 자주 등장하여, 붓다와 다양하고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 그러나 본고는 16나한을 함께 봉안하는 500나한의 성격을 붓다 열반 후 제1차 결집과 관련하여 규명하였다. 즉, 법장을 결집한 500나한인 것이다. 이상과 같이, 16나한은 호법의 상징이며, 500나한은 법장의 결집이라고 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한국 사찰에서는 500나한전에 16나한을 함께 봉안하고 있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한국 나한신앙의 특징인 나반존자신앙에 대한 고찰은 생략하였다. 이는 향후의 과제로 하고자 한다.
Buddha's disciples are not the object of the belief unlike Avalokitesvara in Avalokitesvara belief or Ksitigarbha in Ksitigarbha belief. The number of objects for the belief is diverse such as 16 Buddha's disciples, 18 Buddha's disciples, 500 Buddha's disciples and Nabanjonja. Therefore, at Buddha's disciples building in Unmun Temple, Geojoam and Kirim Temple sacred images of 16 Buddha's disciples and 500 Buddha's disciples are enshrined together. This study started from the question if those Buddha's disciple beliefs have the same characteristics. First of all, establishment of 16 Buddha's disciples belief based on “Taearahannanjemindarasoseolbeopjugi(大阿羅漢難提蜜多羅所說法住記)” (“Beopjuhi” hereunder) was reviewed from two perspectives. One is regarding the number of '16' and the other is regarding 16 Sangsu's. Terminologies related to number '16' in scriptures are ‘16 Non‐Sangha Bodhisattva’ ‘16 sages’ and ‘16 Jeongsa’ and etc. Relationship between these terminologies and 16 Buddha's disciples lies in that they have ‘16’ in common and their Sangsu Bhadrapala is appointed as the 6th Jongja in 16 Buddha's disciples. However, it should be noted that Sangsu of 16 Buddha's disciples is not Bhadrapala but Pindola. Pindola ideology has existed before the establishment of “Beopjugi,” but in “Ibtaeseungron” and “Chiseonbyungbiyobeop” which were translated into Korean in the 5th century, Pindola is taught as Sravaka rather than Great Monk. Scholars addressed that “Beopjugi” developed Pindola belief which was independent belief with minor characteristics into major, and that it developed concept of Buddha's disciples to major point of view. For, Pindola has characteristics of Sravaka. Pindola has two characteristics such as Hobeop and Bokjeon. Although his Hobeop has two aspects such as scold by Buddha and 4 Great Sravaka, it is considered that 16 Buddha's disciples enshrined with 500 Buddha's disciples emphasized Hobeop rather than Bokjeon. 500 Buddha's disciples often appear not only in Buddha's current life but also in Buddha's previous lives, and they have made diverse and close relations with Buddha. However, this article clarified characteristics of 500 Buddha's disciples with 16 Buddha's disciples relating with the First Unity after Buddha's entering into nirvana. In other words this article dealt with 500 Buddha's disciples who united scriptures. As we have reviewed before, 16 Buddha's disciples are symbols of Hobeop and 500 Buddha's disciples are Unity of Scriptures. Therefore, in temples in Korea 16 Buddha's disciples are enshrined in 500 Buddha's disciples' building. In this article review on Nabanjongja belief which is unique in Korea is not included. We would like to leave it as a future ta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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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의 조형 : 한국 나한상의 제작 추이와 특성

신광희

한국정토학회 정토학연구 제26권 2016.12 pp.4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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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羅漢)은 깨달음의 경지인 아라한과(阿羅漢課)를 증득한 불제자들이다. 이들의 모습은 중국에서 당말(唐末) 오대(五代)부터 신앙의 성행과 더불어 시각화되기 시작했으며 한국에서도 고려와 조선시대에 활발히 제작되었다. 나한은 십육나한(十六羅漢), 십팔나한(十八羅漢) 그리고 오백나한(五百羅漢)으로 무리를 이루며 신앙화 되어 왔는데, 한국은 이 중 특히 십육나한과 오백나한을 선호했다. 고려와 조선전기는 국가와 왕실의 불사가 주도적이어서 규모가 큰 오백나한상의 제작이 좀 더 활발했으며 조선후기는 주도권이 사찰과 민간에게로 이행하면서 십육나한상의 제작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활발했다. 나한상은 주로 나한전 내에 석가삼존과 호법신중과 함께 배치되었으며 조각상만 배치된 곳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 불단에는 조각상을 모시고 그 뒤인 후불벽에는 나한도를 봉안했다. 나한은 타 주제의 존상과 달리 도상(圖像)이 규정되어 있지 않아 장인들이 도상을 창안하기도 하고 선행 작품 혹은 타국의 도상을 탐색, 작품에 수용하면서 전개되어 왔다. 고려는 중국, 특히 송(宋)과의 활발한 교섭을 통해 도상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면서 작품에 활용했고 조선은 초기에는 고려의 도상을 계승하다가 이후에는 전통도상, 중국 명(明) -청대(淸代)의 도상 그리고 장인들이 도상을 창안하기도 하면서 다양성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한국 나한상은 왕실의 화원(畵員)이나 개인 공방의 장인, 그리고 사찰의 승려 등 다양한 집단에 의해 제작되었는데, 특히 조선후기에는 승장(僧匠)들이 전담하면서 역량을 십분 발휘했다. 한국의 나한상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 번째는 봉안(奉安)과 배치이다. 한국은 중국이 나한전 외에도 대웅전이나 관음전, 문수전 등 다양한 전각에 나한상을 봉안하는 것과 달리, ‘나한전’에 봉안하는 것을 고수했다. 물론 한국에서도 화상 중 일부는 주불전 에서도 확인되지만 이 경우는 주로 불전의 위쪽인 상벽에 그려져 있어 예배용이 아닌 장엄용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두 번째는 도상의 공유이다. 한국의 나한상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동시기 타 작품들과 도상을 적극적으로 공유하는데, 이는 공간적 근접성 그리고 장인들의 긴밀한 교류와 개방적인 태도 등이 주요하게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세 번째는 세속화(世俗化)된 이미지의 부각이다. 나한은 본질적으로 성(聖)과 속(俗)이 공존하는데 한국의 나한상은 그 중 인간적 면모가 좀 더 적극 표출되어 있다. 이는 나한이 본래 불교 수행자들이었다는 인식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인 동시에 중생들이 나한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표현하고자 했던 의지의 표출이 아닌가 여겨진다. 한국의 나한상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현존하는 수량이 적은 편이지만 한국만의 특성을 확보하고 있어 동아시아적 범주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Arhats are the Buddha's disciples who obtained the state of enlightenment, the Arhat hierarchy. People started to visualize how they were with development of faith from the late period of Dang 唐 and the Five Dynasties 五代 China. And those statues were prevalently made also in Goryeo 高麗 and Joseon 朝鮮 in Korea. Arhats have been worshipped with the composition of the sixteen Arhats, the eighteen Arhats, and the five hundred Arhats. Among them, Koreans especially preferred the sixteen Arhats and the five hundred Arhats more. In Goryeo and the early period of Joseon, the nation and the kingdom actively led Buddhist services, so it was prevalent to make the big scale of the five hundred Arhats. On the other hand, in the late period of Joseon, its leadership was moved to temples and citizens, so making the sixteen Arhats sculptures and paintings were relatively vigorous. Unlike other sorts of Buddhist deities, the Arhats did not have any regulated iconography, so master artisans created how to make the iconography and explored the previous works or the examples in other nations, and developed it by accepting those cases. Goryeo Dynasty selectively adopted the iconographies of Arhat images and used it for making the statue through the brisk interchange with Song 宋 China. And Joseon Dynasty kept the iconography of the Goryeo's images in the early period, but after then, it came to diversity as using the traditional iconographies and the iconographies from the periods of Ming 明 and Ching 淸 China, and creating ones by master artisans. The Arhat sculptures and paintings of Korea were made by various groups, the kingdom's art center Hwawon 畵員 or master artisans of private studios and monks of monasteries. Especially monk artisans mainly took the work of making those sculptures and paintings in the late period of Joseon Korea as fully showing their abilities. The Arhat images of Korea have distinctive identities from China and Japan in the three aspects. First, it was the enshrinement 奉安 and its arrangement. Unlike China which enshrined the Arhat statues in various Buddhist halls, such as the Dae'ungjeon hall, the Gwan'eumjeon hall, the Munsujeon hall including the Arhat hall, Korea adhered only to enshrine them in 'the Arhat hall'. Of course, some Arhat paintings were found in the main Buddha hall also in Korea, in this case, they were usually drawn onto the upper part of the Buddha hall for the use of decoration, not of ritual, as a discrepancy. Secondly, it was the sharing of the iconography. The iconograpies of Arhats in Korea are greatly similar to other works in the same period if comparing to China and Japan. It seems to be the result that spatial accessibility, the intimate interchange between master artisans and their opened attitudes played major roles. Thirdly, it was to stress the secularized image. Arhats intrinsically have both of holiness 聖 and secularity 俗, the Arhat images of Korea more actively shows humane aspect. It was the result of strong recognition that Arhats were originally Buddhist practitioners with human aspect, at the same time, it was assumed as the expression of people who wanted to get close to Arhats. The Arhat Sculptures and paintings of Korea were relatively fewer than China and Japan, but they had very distinctive identities that only Korea could have. Therefore it can be said that they have very significant meanings in the district of East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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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 敎學史의 측면에서 본 阿羅漢의 位相과 信仰의 樣相

최경만(정인)

한국정토학회 정토학연구 제26권 2016.12 pp.85-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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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의 보살승 입장에서는 아라한을 성문승(聲聞乘)의 깨달음이라 하여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원시 불교시대에 아함경과 소승율장에서는 아라한을 수행의 최고 경지에 도달한 자로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또한 부처님께서 아라한과를 증득하시자, 많은 제자들이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하는 과정을 아함경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라한과의 수행과정을 수도론(修道論)과 구제론(救濟論)으로 나누어 보았는데, 수도론적 입장에서는 청정한 도덕적 행위를 수반한 아라한의 수행과정 최종 단계까지를 살펴보았다. 구제론적 신앙 입장에서는 삼명(三明) 육신통(六神通)을 전법(傳法), 홍법(弘法)의 방편(方便)으로 중생 교화를 위하여 묘용(妙用)을 보여주었음을 고승들의 위신력을 문헌 자료와 야사(野史) 자료에서 찾아보았다. 그리고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왕실들이 부국강병과 태평성대를 발원하는 아라한적 신앙의 성격을 간단하게 살펴보고, 도표로 정리하였다. 아라한 신앙이 불교 도입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발원의 내용과 현 제가신도들의 신앙적 정서에서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아라한 신앙은 아라한의 본질인 응공(應供)에서 감응(感應)으로서 복전(福田)까지 이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Mahayana Buddhism perceives Arahan with a critical view by defining Arahan as a enlightment of Seongmunseung. However, in Ahamgyeong anad Soseungyuljang in the ancient Buddhism period considers Arahan very importantly as a person who has reached the tip of asceticism. Also Ahamgyeongjeon describes that when Buddha is enlightened by Arahangwa, many disciples convert themselves into Buddha. This paper divided ascetic practice into a theory of ascetic and theory of relief. In the aspect of theory of ascetic, it also examined the final stage of ascetic of Arahan which accompanied pure ethical action. In the aspect of relief faith, it is found in the reference materials and unofficial historical resources that highest monks had dignity power which effectively used trionym and six supernatural powers for reformation of people by using measures such as “delivering doctrine” and “roadly spreading doctrine.” Throughout various sources and the current faith of Jegashindo, it is sought that Arahan faith is continued from the introduction of Buddhism until today. This is because Arahan faith has a belief that the essence of Arahan is connected from arhat to response and finally to field of bless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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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의 寺格과 眀星의 불교 인문정신

김광식

한국정토학회 정토학연구 제26권 2016.12 pp.129-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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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고찰은 비구니 교육도량으로 명성이 높은 雲門寺의 현대기의 寺格을 역사적 맥락에서 살핀 글이다. 동시에 이 글에서는 현대 운문사 사격을 고양, 정립시킨 비구니 큰스님인 眀星의 교육 내용, 이념 등을 정리하였다. 운문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14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고찰이다. 이런 역사에는 신라기의 원광법사가 주도한 화랑의 수행처 라는 성격과 함께 고려시대에는 선종 사찰의 명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에는 전반적으로 사세가 퇴진하였다. 그러나 불교정화운동을 거치면서 1956년부터 비구니 사찰과 비구니 승가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1970년대부터 운문사 강주, 주지를 역임한 명성은 수십여 동의 가람을 중수, 신축하면서 오늘날의 운문사를 만들었다. 즉 명성은 제5중창주가 되었다. 이런 역사를 창조한 명성은 開放, 兼學, 立體的 교육을 추진하면서 비구니 교육에 매진하였다. 이는 비구니들을 인재로 양성하려는 원력에서 나온 교육의 현대화, 세계화이었다. 이런 명성의 교육철학은 불교 人文精神으로 부를 수 있다. 그런데 그 성격은 명성에게 가르침을 준 師僧들의 영향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었다. 그 사승들의 은사는 박한영 이었다. 박한영은 1926∼1944년까지 서울 개운사에서 강원을 열면서 승려, 지식인 등을 가르친 대강백이었다. 때문에 그의 불교학풍, 인문정신이 명성에게까지 계승되었다. 때문에 명성의 교육철학은 역사성이 있는 불교 인문정신이었다.
This article is about the research for the dignity of modern Woonmun monastery which gained great fame as the educational ground of Bhiksuni. And also, I illustrated the educational method and ideology of the great buddhist monk, Myeongseong(眀星) who boosted and made up the dignity of modern Woonmun monastery. The Woonmun monastery is the old temple with a long history of about 1400 years, since its establishment at the Silla period. In this history, it gained fame as the temple of Seon school in the time of Goryeo, with the feature of the cardle of the Silla chivalry that Dharma teacher Wongwang led in the Silla period. However, its fame markedly declined after the Joseon period. Since 1955, the Woonmun monastery became the center of Buddhist nuns' temples and Sangha education as passing through the Buddhist purification movement. Since the 1970s, the reverend Myeongseong has taken in charge of a lecturer and abbot. For many decades, she reformed and rebuilt the monastery for making today's Woonmunsa. That is, the reverend Myeongseong became the fifth ower of reestablishment. The reverend Myeongseong who created such a history strived for Buddhist nun's education as proceeding the open, doctrinal, healthy education. This was the modernization and the globalization of education coming from the wish to make Buddhist nuns as talented persons. Such the reverened Myeongseong's educational philosophy can be called Buddhist Humanial Spirit(人文精神). But this feature may come from the influence by teacher reverends who taught the Myeongseong. The teacher of those reverends was Park Hanyeong. He was the great master who opened a buddhist school at Gaewoonsa in Seoul from 1926 to 1944, and taught monks and intellects. His buddhist academic tradition and humanial spirit were succeeded to Myeongseong, so her educational philosophy was able to be the buddhist humanial spirit with histori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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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운문사의 나한신앙 고찰

박순천(일진)

한국정토학회 정토학연구 제26권 2016.12 pp.163-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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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한은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십대명호 가운데 하나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이후 모든 수행자의 이상적인 수행자상으로서 인식되었다. 부파불교의 수행자들은 바로 이 아라한이 되기 위해 수행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동북아시아 전통에서는, 다시 말해 대승 불교권 에서는 아라한의 위상을 크게 끌어내려 희화화하거나, 아니면 복을 구하는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나아가 나한신앙이 꽃을 피운 중국에서는 도교와 결합되어 신선처럼 묘사되거나, 선종의 조사가 나한으로 모셔지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나한은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엄숙하고 근엄하며 자애로운 전형적 제불 보살과는 달리 인간의 성냄과 웃음, 때로는 욕구마저도 긍정하는 나한의 모습에서 원초적인 양재초복(攘災招福)의 기도 마음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나한신앙이 우리나라에서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나한전에 모셔진 아라한은 일반적으로 16나한이며, 많게는 500나한을 모시기도 하는데, 그 전각을 응진전이라고 한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오백전, 팔상전, 독성각, 천태각이라고도 한다. 본 논문은 특히 청도 운문사의 나한신앙의 특징을 고찰하고, 오늘날 나한신앙의 바람직한 내용과 형식을 논의해 보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제 2장에서는 먼저 ‘나한 신앙의 유래와 특징’을 살펴보았다. 인도에서 중국, 한국으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나한이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그 결과 아라한이 보살의 성격을 가지면서, 나한 신앙이 형성 발전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 3장에서는 운문사가 창건된 이래 나한신앙의 중심 도량으로 발전되어 온 역사적 과정을 고찰하였다. 운문사 창건과 함께 오백전이 건립되고, 이후 1960년대에 청도읍 적천사에 모셔져 있던 500나한을 운문사 오백전에 이운해 온 것임을 밝혔다. 그리고 아울러 나한기도를 통한 영험담을 간단하게 소개하였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본 논문은 운문사가 창건 된 이래, 나한신앙의 중심도량으로서 존재해 온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그 해답으로서 조선시대 이후 왜곡된 나한 신앙의 본래 모습을 찾는 것, 즉 개인적인 복을 비는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인 중생구제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부처님의 정법을 수호하는 중심도량이 되어야 함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An arahat was recognized as one of the Buddha's ten names in Early Buddhism. Since then, it has been known for an idealistic model for all of the practitioners. Being an arahat was the very purpose for the practitioners of Early Buddhism. However, in the tradition of the northeast Asia or in another words, in Mahayana Buddhism, the status of an arahat was caricatured or was accepted as a religious figure to gain one's merit. Furthermore, in China where the belief in arahats is popular, it was fused with Taoism so Taoist hermit was depicted as an arahat or one of the previous sages of Zen Buddhism was regarded as an arahat. Even in Korea an arahat was a religious figure. Unlike all of the Buddhas and Bodhisattvas who are typically solemn, serious, and benevolent, an arahat who seems to acknowledge humans' anger, laugh, and sometimes even desires can be viewed to chastise evil spirits and bring fortune. It is since Koryo era that this type of belief in arahats has become popular in Korea. The number of the arahats at the Hall of Arahats ranges from 16 to 500 and there are some other names given for this Hall of Arahats such as Eungjinjeon, the Hall of 500 Arahats, the Hall of Eight Phases, the Hall of the Hermit Sage. The features of arahats in Cheungdo Unmunsa will be covered in this thesis and it is also aimed to discuss the advisable contents and form of the belief in arahats, To do that, ‘The Origin and Characteristics of Belief in Arahats’ is examined in the second chapter. It will be contemplated how arahats have been changed in the course of the introduction of arahats from India to China and Korea. As a result, the nature of arahats contains the spirit of Bodhisattvas and it can be confirmed to have caused to develop an arahat into a religious figure. In the third chapter, the historical process how the belief in arahats in Unmunsa has become the main stream ever since its foundation is examined altogether. The Hall of 500 Arahats was established in company with the foundation of Unmunsa and after that, the fact about the transportation of 500 arahats from Jeokcheonsa in Cheongdo town to the Hall of Arahats in Unmunsa in the 1960’s is illuminated. Additionally some brief stories of spiritual miracles were introduced. Those argumenta of this thesis mentioned above will cast a question about the meaning of the Unmunsa serving mainly as the mainstay of the belief of arahats and some solutions are proposed in this thesis how to restore the distorted features of the belief in arahats since the Joseon era; Instead of praying for one’s merits individually, it should be the Bodhi-mandala, sacred place used as a seat where the manda (essence) of enlightenment is present or practiced, to wish for the relief of all the sentient beings and well-being of the nation as well as to guard the Buddha’s teaching.

7,3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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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율학에서 금강율원의 위상

신순남(적연)

한국정토학회 정토학연구 제26권 2016.12 pp.219-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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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비구니가 승단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수행하기 위해서는 구족계(具足戒)를 받아야 한다. 수계(受戒)에 앞서 먼저 계를 설하는 장소가 정해져야 한다. 계단(戒壇)과 수계는 작지계(作持戒)의 갈마(鞨磨)에 의하여 성립이 가능하기 때문에 승가의 구성원들은 작지계의 갈마를 숙지하고 진행할 수 있어야 한다. 논자는 본 논문의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두 단락으로 검토하였다. 하나는 계단의 연기를 통하여 현재 한국 비구니율원의 역할과 정체성 확립에 대하여 재고해 보았다. 한국계단의 역사적 수계기록을 조명하여 금강계단(戒壇)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다른 하나는 금강율원이 3단계의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비구니 위상을 실현해 나간 자취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후 금강율원은 율장연구의 범위를 확장하여 실용적으로 승가의 일용작지에 활용할 수 있는 작법을 보완하였다. 이상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었던 까닭은 율장연찬 과정에서 승가운영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이수한 율원비구니들의 공감대를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For bhikkus and bhikkunis to be authorized and practice as members of the Order, they have to receive full ordination. To conduct the initiation ritual, the place where the ritual will be held should be decided first. The ordination platform and the initiation ritual should be conducted only through the particular way of judging how actively they have followed the precepts, so the members of the sangha need to conduct the ceremony with the full knowledge of the way of judging. To solve such matters of judging, this paper examined the concept in two ways. First, this paper considered the role of the Korean Bhikkuni Vinaya Institute, and how it has established its identity, by studying the background of the ordination platform. This study investigated how the Korean ordination platform has formed into the Diamond ordination platform by looking into the historical documents of initiation rituals. Second, this paper studied how Geumgang Vinaya Institute has established its bhikkuni status, going through three stages of curriculum. After those three stages, Guemgang Vinaya Institute has expanded the range of vinaya study, so it makes it possible for the sangha to apply vinaya more practically in daily life. The reason for the effects mentioned above is that in the process of studying vinaya, bhikkunis who have learned the theory of running a sangha have applied their understanding and sympathy.

10,3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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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京制) 불교음악의 갈래와 그 과제

손인애

한국정토학회 정토학연구 제26권 2016.12 pp.27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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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현재까지 논의된 연구를 토대로 경제 불교음악의 갈래 및 그 종류를 살펴보고, 앞으로 연구 과제에 대해서도 논의해보았다. 경제 불교음악의 갈래는 크게 소위 일반 염불인 평염불, 전문 염불인 안채비와 겉채비소리, 민요가락의 <화청> 및 <화심곡> 계통, 취타계통의 반주음악으로 분류된다. 갈래로 살펴본 그 대표적인 특징은, 염불의 종류가 비교적 많고, 여기에 나타나는 특정 선율 형태(또는 패턴)인 <聲>의 종류도 상당히 다채로운 점이다. 이로 인해, 평염불과 안채비, 바깥채비소리는 그 개념과 특징, 그리고 범주에 대한 정의가 아직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였고, 갈래가 중첩되는 염불들(예> 청사성, 게탁성)도 제법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는 경제 불교음악 특유의 ‘다양성’(창조성)과 ‘자율성’(유연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이는 경제 불교음악이 과거 고려와 조선의 수도였던 개성과 한양을 근거지로 형성 발전 전승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살기 좋은 지리적 조건과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라는 이점으로 경제적 기반이 풍부하고 문화적 교류가 활발하여, 그 다양하고 역동적인 ‘중심’ 문화의 성격이 불교음악에도 그대로 반영되어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이 중에서도 경제 불교음악의 기본 핵심인 안채비소리에 대한 갈래가 가장 미흡한 상황이라, 향후 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절실하다. 이는 재 의식에서 안채비소리가 겉채비소리보다 궁극적으로 그 종류가 많고, 역할이 크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경제 불교음악에서는 민중과 보다 적극적인 소통과 교감을 위해 민간음악을 적극 활용하여 염불(<화청>과 <회심가>계통)과 반주음악(민간 취타 풍류)을 만들기도 하여,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는 보살의 수행도가 잘 발현되는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지금까지 태평소 중심의 취타계통 반주음악이 경제 불교음악의 갈래로 논의된 바가 없는데, 경기 일대 민간 취타 풍류음악에 큰 영향을 끼칠 정도로 그 음악적 위상과 역할이 컸던 사실이 확인되므로 갈래로 함께 논의해야 할 대상으로 살펴보았다.
This paper aims at studying the genre of Gyeonggi Buddhist music, Gyeongje which has never been studied since the 1970s. The following are the results. Gyeonggi Buddhist music can be divided into five kinds of genres: (1) the general Buddhist prayer, Pyeongyeombul which is composed of the comparatively simple melody and rhythm and can be chanted by every Buddhist monks: (2) In door chant, Anchaebisoli which is usually sung in door of Buddhist sanctuary by the teacher of a Buddhist priest and comprised of the most many kinds of prayers; that mainly employs the four kinds of voice tone of middle chinese: (3) Out door chant, Geochaebisoli which is canted out door of Buddhist sanctuary by professional chant monks and largely consist of Hot-soli, Banhot-soli, Jis-soli and BanJis-soli: (4) Hwacheong and Hoisimgok versions which were related to the Buddhist music of Gaeseong or Seodo province and embrace the typical style of folk songs. While Hwacheong versions are the only official Buddhist chants in the temple, Hoisimgok versions are practiced by Buddhist monks for donations out of the temple: (5) Music accompaniment of Buddhist ritual, Taepyeongso music. While pieces such as Daechwita, Deureongjo, Neungge taryeong, all performed on the periphery of Chwita, have secular origins, Cheonsu, Yeombul and Yojab, part of the traditional Buddhist ceremony, were characteristic Buddhist compositions. Gyeongje Buddhist music as currently transmitted around Seoul and its vicinity, is the most influential of all forms of Korean Buddhist ritual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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