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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思想 [일본사상]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국일본사상사학회 [Korean Association For Japanese Thought]
  • ISSN
    1229-9235
  • 간기
    반년간
  • 수록기간
    1999~2018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철학
  • 십진분류
    KDC 153 DDC 181
제34호 (14건)
No
1

전후 일본의 ‘반지성주의’와 마이너리티 - 양정명과 도미무라 준이치를 중심으로 -

곽형덕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4호 2018.06 pp.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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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후 일본의 마이너리티에 대한 ‘반지성주의’적 경향을 양정명과 도미무라 준이치의 사례를 중심으로 분석한 글이다. 재일조선인 양정명과 오키나와인 도미무라 준이치는 1970년에 각각 분신자살과 도쿄타워 점거사건을 일으키는 것으로 일본 내의 민족 차별과 전쟁 책임방기에 항의했다. 양정명의 분신자살은 자기 존재에 대한 비극적이고도 처절한 심판이었다. 양정명은 전공투 투쟁을 통해 일본 사회를 민주화시켜 자신을 둘러싼 민족 차별 문제를 해소시키려 했다. 하지만 학생운동이 퇴조하자 그는 자신의 갈 길을 잃었다. 귀화를 했지만 일본인으로 살아 갈 수 없고, 조선인으로서의 삶을 꿈꿨지만 그마저도 부정된 그의 삶은, 1970년에 끝났다. 하지만 우리는 양정명의 죽음을 그저 추도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끝나버린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되는 헤이트스피치와 뿌리 깊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도미무라 준이치는 1970년 7월 도쿄타워에서 인질사건을 일으켰다. 그는 법정에서 일본 천황(天皇)의 전쟁책임과 일본제국주의의 전쟁책임을 정면으로 비판했다.도미무라의 도쿄타워 인질 사건은 일본을 역사의 재판에 세우기 위해 스스로 피고가 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일본 내 마이너리티를 향한 반지성주의적 경향은 전후민주주의가 융성하던 시기에도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혁명의 에너지가 꺼져가자 일본인과 소수민족 사이의 구별선은 이전보다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1970년, 양정명과 도미무라 사건은 마이너리티를 향한 일본 사회의 차별과 식민주의적 위계가 소멸되지 않았음을 알리는 외침이었다. 그것은 끝난 과거의 목소리가 아니라 메아리로써 현재의 우리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This article analyzes the tendency of ‘Anti-intellectualism’ with focusing on the case of Yang Jungmyung and the case of Junichi Tomimura after post-war Japan. Yang Jungmyung, a naturalized Japanese citizen, and Tomimura Junichi, an Okinawan, had protested the national discrimination and abandonment of Japanese war responsibility in Japan. Yang Jungmyung’s suicide was a tragic and sorrowful judgment of self-existence. Yang endeavored to democratize Japanese society through Zenkyoto student movement in order to escape from national discrimination in Japanese society. But when the student had movement collapsed, he lost his way. Although he was naturalized as Japanese, he was not able to live as a Japanese. Yang set himself alight and died in 1970. We are not able to just commemorate the memory of Yang’s death. This is because it is not the ending past. It is not difficult to say that hate speech against zainichi Korean which brought Yang’s death has threw its shadow in Japanese society. Tomimura Junichi caused the hostage case in Tokyo Tower in July 1970. In the courtroom he criticized the Japanese Emperor for war responsibility and colonialism of Japanese imperialism. Tomimura’s Tokyo Tower hostage case was a strategic choice to become a defendant himself in order to put Japan on trial of history. The anti-intellectual tendency toward minorities in Japan remained deeply rooted in the period of postwar democracy. When flame of the revolution was blown out, the distinction between Japanese and ethnic minorities became very clear. Yang Jungmyung and Tomimura Junichi’s outcries illuminate that the discrimination of Japanese society towards minorities and the colonial hierarchy had not been over. Their outcries are not an ending voice from the past, but an echo that is being conveyed to the present.
本稿は戦後日本のマイノリティの「反知性主義」的な傾向を梁政明と富村順一の事例を中心に分析することを目的とする。在日朝鮮人、梁政明と沖縄人、富村順一は、1970年にそれぞれ焼身自殺と東京タワー占拠事件を引き起こすことによって日本の民族差別と戦争責任放棄に抗議しようとした。 梁政明の焼身自殺は自分の存在に対する悲劇的で凄絶な審判だった。梁政明は全共闘運動を通じて日本社会を民主化させ、自分を取り巻く民族差別を解消させようとした。しかし、学生運動が退潮すると、彼は日本人学生とは違って自分の行く道を失った。帰化はしたが、日本人としては生きていけず、朝鮮人としての生を夢見たがそれさえも否定された彼の人生は、1970年に終わった。しかしながら、私たちは梁政明の死をただ追悼することはできない。これは、終わってしまった過去ではなく、現在も続くヘイトスピーチと深い所でつながっているからである。 富村順一は、1970年7月に東京タワーで人質事件を起こした。彼は法廷で日本の天皇の戦争責任と日本帝国主義の戦争責任を正面から批判した。富村の東京タワー人質事件は、日本を歴史の裁判に立たせるために自ら被告になるという戦略的選択だった。。 日本におけるマイノリティに対する反知性主義的な傾向は、戦後民主主義が隆盛していた時期にも根強く残っていた。革命のエネルギーが消えていくと日本人と少数民族の間の区別線は著しく鮮明になった。1970年、梁政明と富村順一の両事件はマイノリティに対する日本社会の差別と植民地主義的な位階が消滅していないことを示す叫びだった。それは終わった過去の声ではなく、エコーとして現在の私たちに届い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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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세기의 환동해지역과 하코다테(函館)의 공간위상

김석희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4호 2018.06 pp.2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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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코다테의 개항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환동해지역(East Sea Rim)의 지도를 완성하고자 했던 서구의 오랜 욕망의 결과였다. 하코다테를 무대로 하여 서구문명사의 커다란 몇 갈래의 흐름이 만나게 되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 영국의 아시아 시장 활로 개척, 미국의 서부개척의 연장선이 모두 하코다테를 향했던 것이다. 18세기를 전후하여 서구열강의 에너지가 환동해지역에 집중되면서, 북방 경계지역에 위기의식을 느낀 에도막부는 마쓰마에 번을 강화하였고 그런 에도막부의 거점으로 하코다테가 부상하였다. 일본 북방 경계지역의 중심이 된 하코다테는 아이누를 포섭하고 착취하는 거점이기도 했다. 미일화친조약(1854) 이후의 하코다테는 하코다테 전쟁(1868-1869)과 메이지유신(1868)을 거치면서 보다 철저한 식민지 정책과 동화정책을 학습하게 된다. 선주민이던 아이누는 일본인으로서의 위상을 획득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상하관계가 존재하는 정체성 사슬에서 내부식민지에 속할 수밖에 없었다. 하코다테의 위상과 아이누의 위상이 그 궤를 달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코다테는 일본이 서구의 제국주의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홋카이도라는 실험실을 관리하는 거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코다테는 전지구적 의미에서의 변경성과 그 변경 내부에서의 중심성을 동시에 지닌 공간이었다.
The opening of the Port of Hakodate was not an event that occurred by chance, but the culmination of a long-standing desire harbored by 18th-Century Western imperial powers—completing the map to navigate the entire world with the East Sea Rim, the last waterway unknown and inaccessible to them. It was a period in which the Western imperial powers focused their energy into expanding their political and economic influences—Russia turned its eyes to Siberia, Britain was transforming Asia into its markets, and the United States was continuously pushing its borders, and its influence, toward the West. Their pursuit of geographical expansion converged in Hakodate, the coastal town in the northernmost region of Japan and the remotest border region of the world, instantly transforming it into one of Japan’s “open” ports and the northern fort of the shogunate. The modern history of Hakodate is largely divided into before and after the 1868 Meiji Restoration. It is ironic that Hakodate saw its highs as a center of cultural exchange and diversity between 1854 and 1868, after the port was “forced” open by the “invasion” of the Western imperial powers. With the arrival of the Restoration, Hakodate, however, turned into a center of cultural violence such as the forced assimilation of the indigenous Ainus. Ironically, Hakodate emerged on the international stage and acquired the “globality” precisely for its remote border location on the northern boundary of the East Sea Rim. Although the port city symbolizes the oppressed who were forced to open themselves up to the outside world, it also carries its own history of coercion and oppression. In this context, the port city Hakodate possessed both the quality of a remote border region from the global perspective as well as the quality of a central region within the boundaries of its borders.
ロシアのシベリア開拓、英国のアジア市場への活路模索と確保、アメリカの 西部開拓というそれぞれの西欧列強のエネルギーが環東海地域に向かった18世紀を前後にして、辺境であった日本の北部、その中心地の函館は、開港場、または幕府の北部拠点として浮上した。 日米和親条約以降の函館は、函館戦争(1868-1869)と明治維新(1868)を経て、より徹底的に内部植民地政策と同化政策を経験することになる。そして周知の通り、先住民のアイヌ民族は、日本人としての位相を獲得したかように見える。しかし、上下関係が前提になっているかぎり、その位相の変化があったとは言えないものであった。函館の位相とアイヌの位相とはその軌を異にしていたのである。すなわち、函館は日本が欧米の帝国主義を受容する過程において、北海道の実験室を管理するための拠点であった。そういう意味で、函館は全地球的な意味での辺境性とその辺境内部での中心性とを同時に持つ都市であったといえよ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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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컬처 비평담론과 ‘전후민주주의’ - 오쓰카 에이지(大塚英志)를 중심으로 -

남상욱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4호 2018.06 pp.6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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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90년대 이후 일본 서브컬처 비평담론 속에서 ‘전후민주주의’는 어떻게 표상되었는지를, 서브컬처 비평가 오쓰카 에이지(大塚英志)를 통해서 고찰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일본 서브컬처는 냉전의 종식에 따른 거대담론의 해체 이후의 문화적 현상으로서 이해되곤 하는데, 오쓰카는 그것과 ‘전후민주주의’와의 관련성을 매우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기반이 되는 헌법 9조 수호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가게 된다. 그렇다면 오쓰카에게 일본 서브컬처와 ‘전후민주주의’는 어떤 관련성을 갖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이 글에서는 먼저 90년대 오쓰카에게 일본 서브컬처란 스스로를 표현할 말의 형식을 찾는 담론공간이자, 말의 민주주주의가 실현된 장소로서 인식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나아가 에토 준처럼 ‘전후민주주의’를 부정하려는 시도들에 대해, 오쓰카는 그것이 기호 소비를 통한 사회의 평등화에 기여했다고 옹호할 뿐만 아니라, ‘전체문화’를 지향하는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는 방어기재로서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인식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2000년대 이후 오쓰카는, 현대 일본인들이 감정에 휘말리는 모습에 반발하며, 야나기타 쿠니오의 ‘공민’이라는 개념에 착목하여 헌법 수호 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한편, 현대 일본인들의 ‘군중의식’을 비판한다. 이는 그가 명실상부한 전후민주주의의 수호자임을 보여주는 한편, 80년대 그가 비판했던 대중과 유리된 지식인에 동화되어가는 모습으로도 비춰진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서 현대 일본의 민주주의와 서브컬처의 거리를 엿볼 수 있다.
This article aims to examine how ‘postwar democracy’ was represented in the subculture criticism discourse of Japan since the 90s, through the subculture critic discourse of Eiji Otsuka. The subculture of Japan can be understood as a cultural phenomenon after the dissolution of the grand discourse as like history, democracy that accompanies the end of the Cold War. Otsuka not only emphasizes the relationship between it and ‘postwar democracy’, but also positively develops the constitutional Article 9 protection act as the foundation of it. If so, what relevance does Otsuka have with Japanese subculture and post-war democracy? First of all, this article reveals that For the Otsuka in the 1990s, Japanese subculture was a discourse space in which the form of words expressing oneself was recognized and recognized as a place where language democracy was realized. In addition to the attempts to deny post-war democracy like Etō Jun, Otsuka advocated that it contributed to the equalization of society through consumption of symbols, as well as a defensive instrument to control his desire for “whole culture” It is recognized as an effective means. Since the 2000s, Otsuka has opposed the “emotionalization” of contemporary Japanese society and has been developing the constitutional protection movement, focusing on the concept of Yanagita Konio’s “citizen”. On the other hand, he criticize the contemporary Japanese “consciousness of the crowd”. This shows not only that he is a guardian of democracy after the war, but also that he is assimilated by intellectuals he had criticized in the 1980s. From his current situation, the distance between democracy and Japanese subculture seems to be in the distance.
本稿は、90年代以降日本サブカルチャー批評言説の中において「戦後民主主義」はどのように表象されたかを、サブカルチャー批評家大塚英志を介して考察することを目的とする。 日本のサブカルチャーは、冷戦の終息に伴う「大きな物語」の解体以後の文化的現象として理解されることがあるが、大塚の場合、それと「戦後民主主義」との関連性を非常に強調するだけでなく、それに基づいている憲法9条守護活動を積極的に展開していくことになる。では、大塚にとって日本のサブカルチャーと「戦後民主主義」はどうかかわるのか。 こうした問題意識の下で、本稿では、まず、90年代の大塚にとって日本のサブカルチャーとは自らを表現する言葉の形式を見つける談話スペースであり、言葉の民主主義が実現された場所として認識されていたことを浮き彫りにする。さらに江藤淳のように「戦後民主主義」を否定しようとする知識人に対し、大塚はそれが記号消費を通じた社会の平準化に寄与したとし擁護するだけでなく、「全体の文化」を目指す自分の欲望を制御する防御基材として効果的な手段として認識されていたことを確かめる。 2000年代以降大塚は、現代日本社会が「感情化」することに反発し、柳田国男の「公民」という概念に着目して、憲法守護運動を展開していく一方で、現代日本人の「群衆の意識」を批判的にとらえる。このことは、彼が名実共に戦後民主主義の守護者であることを示す一方で、80年代に彼が批判していた大衆と遊離された知識人にやや同化されていくとも見受けられる。こうした彼の現状から、現代​​日本の民主主義とサブカルチャーの距離がうかがえると思わ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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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万葉集』に見られる神仙思想

村松正明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4호 2018.06 pp.89-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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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사상은 중국에서 발생한 기원이 오래된 민간신앙의 하나로 불로불사하고 하늘을 비상할 능력을 가진 선인의 존재나 그들이 사는 신선경의 실존을 믿고, 자신도 선술을 통해서 신선이 되려고 하는 사상이다. 고고학 자료와 문헌을 보면 신선사상은 불교보다 일찍이 일본에 전래된 것을 알 수 있고, 궁중의식에도 도입되었다. 문학작품에서는 『가이후소(懐風藻)』에 신선사상이 현저하게 보이고, 요시노(吉野)를 신선경으로 비유하는 한시가 13수에 이른다. 『다케토리 이야기(竹取物語)』도 신선사상적인 어휘와 내용이 넘치고 있으며, 인간세계와 신선세계가 교차하는 극적인 구성을 가능하도록 했다. 『만요슈』에서는 히토마로(人麿), 다비토(旅人), 오쿠라(憶良), 야카모치(家持)등의 가인에게 신선사상의 영향이 보인다. 이 논문은 『만요슈』에 투영된 신선사상의 전체상을 파악하려는 목적으로, 신선사상적인 네 개의 키워드 「도코요(常世)」「요시노」「불노불사(不老不死)」「선녀(仙女)」에 주목하고, 이것들이 노래에 어떻게 반영되어 묘사되고 있는지를 고찰했다. 「도코요」에서는 다양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개념이 불로불사의 이상향이라는 이미지로 수렴된 것을 확인했다. 또한 우라시마(浦島)전설에 관해서는 『만요슈』보다 『풍토기(風土記)』나 『우라시마전(浦島伝)』이 더 신선사상적인 요소가 많은 것을 확인됐다. 「요시노」에서는 후지와라(藤原)궁과 요시노의 관계, 『가이후소』의 요시노의 시와 『만요슈』의 쓰미노에(仙柘枝)전설 등을 고찰한 뒤, 요시노를 신선경으로 보게 된 원인은 신비스러운 대자연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불노불사」에서는 서복(徐福)전설과 다지마모리(田道間守)전설을 조사한 뒤, 노고(老苦), 그 괴로움에서 구해주는 오치미즈(変若水)와 선약(仙薬)의 노래를 고찰했다. 「선녀」에서는 산림수행자에 대한 오쿠라의 비판과 산림수행을 금지하는 칙령(勅令)을 확인했다. 또한 선인의 이미지에 관해서는, 늙은 남자가 중심인 중국과는 달리, 다케토리나 우라시마전설, 다비토의 마쓰라(松浦)강의 노래처럼 일본에서는 젊은 여성의 이미지가 중심임을 확인했다.
Taoism is one of the old folk beliefs that originated in China. People believed in the existence of hermits who have the ability to fly and have eternal life. People also believed in the existence of their own utopia. Archeological materials and documentary records shows that Taoism was introduced to Japan earlier than Buddhism, and was incorporated into the court rituals. Among literary works, the influence of Taoism is conspicuous in “Kaifuso” because there are 13 Chinese-style poems which consider Yoshino as a utopia. “the Story of Taketori” is also full of Taoist words and contents, and it shows a dramatic composition in which the human world and the supernatural world are intermingled. In “Manyoshu” the influence of Taoism is seen among poets such as Hitomaro, Tabito, Okura, and Yakamochi. This paper tried to grasp the whole picture of Taoism in “Manyoshu”. I focused on the four key words of “Tokoyo”, “Yoshino”, “immortality” and “fairy”, and tried to examine how these key words are reflected in the work. In the chapter of “Tokoyo” it is confirmed that the concept of Tokoyo which had contained a variety of images was integrated into the image of a utopia of immortality. In the chapter of “Yoshino” I examined the relationship between Fujiwara Palace and Yoshino, poetry on Yoshino in “Kaifuso” and the legend of Tsuminoe in “Manyoshu” and verified that the reason why Yoshino came to be considered as an utopia. In the chapter of “immortality” after researching the legend of “Jofuku” and “Tajimamori”, I considered the pain of aging, rejuvenating water and the elixir of life. In the chapter of “fairy” I confirmed the criticism of Okura against ascetics in the mountains and the imperial edict prohibiting ascetic practices in the mountains. Furthermore, as for the image of fairy, unlike in China, where old man is a major image, young woman is a major image in Japan.
神仙思想は中国で発生した起源の古い民間信仰の一つで、不老不死で空を飛翔できる能力を有する仙人の存在や、彼らが住む神仙境の実在を信じ、自らも仙術によって仙人になろうと願望する思想である。考古学資料や文献から神仙思想は仏教よりも早く日本へ伝来し、宮廷儀式にも取入れられたことが分かる。文学作品では『懐風藻』に神仙思想の影響が顕著で、吉野を仙境と見立てる漢詩が13首にも及ぶ。『竹取物語』も神仙思想的な語彙や内容に溢れており、人間世界と神仙世界が交錯する劇的な構成を可能にした。『万葉集』では人麿や旅人、憶良、家持などの歌人の歌に神仙思想の影響が見られる。 本稿は『万葉集』に投影された神仙思想の全体像を把握しようとするもので、四つの神仙思想的なキーワード「常世」「吉野」「不老不死」「仙女」に注目して、これらが歌に如何に反映され、描写されているかを考察した。「常世」では多様なイメージを有していた常世の概念が不老不死の理想郷というイメージへ収斂されたことを確かめた。また浦島説話に関しては『万葉集』』よりも『風土記』『浦島伝』の方がより神仙思想的であることを確認した。「吉野」では藤原宮と吉野の関係や『懐風藻』の吉野の詩、『万葉集』の仙柘枝伝説などを考察した後、吉野を神仙境と見なすようになった理由が神秘的な大自然にあったことを確認した。「不老不死」では徐福伝説や田道間守伝説について調べた後、老苦と、その老苦から救ってくれる変若水や仙薬の歌を考察した。「仙女」では倍俗先生への憶良の批判や、山林修行を禁止する勅令について確認した。また仙人に対するイメージは、老翁が中心の中国とは異り、竹取や浦島伝説、旅人の松浦河の歌のように、日本では若い女性が中心であることを確かめ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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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즈 우즈히코의 전후민주주의 비판과 신도적 정치론

박규태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4호 2018.06 pp.115-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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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체론자 신도가이자 대표적인 신도 저널리스트인 아시즈 우즈히코(葦津珍彦, 1909- 1992)는 패전 후 <신사본청>(神社本廳, 1946)과 <신도정치연맹>(神道政治連盟, 1969)의 창설에 깊이 관여하고 그 이론적 지도자로 오랜 기간 활동하면서, 일관되게 신도의 입장에서 팽대한 분량의 시국론, 천황론과 국체론, 일본사론, 황실법론, 헌법론, 정교(政敎)론, 국가신도론 등을 남겼다. 이를 통해 그는 전후 신사계 뿐만 아니라 민족파라 불리는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침으로써 국체론적 국가주의 고양운동 가령 헌법개정, 종교법인법 개정, 신기(神器)계승 복원, 기원절 부활, 야스쿠니신사 국가호지법 제정, 이세신궁 제도의 시정, 정교문제, 원호문제 등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본고의 목적은 이와 같은 아시즈 우즈히코의 <일본국헌법>과 전후민주주의에 대한 비판 및 그 대안으로 제시된 신도적 정치론을 중심으로 신도와 전후민주주의의 연관성을 고찰하는 데에 있다. 이때 본고는 아시즈의 주장이 가장 첨예하게 전개된 195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의 시기에 나온 그의 저서 중에서 특히 『천황·신도·헌법』(1954), 『근대정치와 양심문제』(1955), 『근대민주주의의 종말』(1972)에 주목하면서, 일본 신도에 대한 연구가 일천한 국내 학계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가급적 아시즈 주장의 전체상을 있는 그대로 조감하는 데에 치중하고 있다. 요컨대 아시즈의 전후민주주의 비판은 무엇보다 철저한 <일본국헌법> 무효론과 <제국헌법>의 예찬으로 대변될 수 있다. 그는 <일본국헌법>이 미국식 민주주의의 직역이자 일본의 항복적, 대외추종적 평화주의 원리에 불과하다고 보면서 그런 주장의 정당성을 피력하기 위해 미국 민주주의 자체에 대해서도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국체론적인 신도 정치론에 입각하여 <제국헌법>의 복권을 주창했던 것이다. 이때 그는 ①신도적 양심(인생관 혹은 인간관)에 의한 도덕적 정당성의 확보 ②천황의 정신적·문화적·정치적 권위의 절대화를 통한 역사적 정당성의 확보 ③왕도 인터내셔널리즘에 의한 시대적 정당성의 확보라는 세 가지 측면을 통해 신도 정치론을 근거지우고자 했다.
Ashizu Uzuhiko, who is said to be a Shintoist based on Kokutai-ron(discourse on national body) and a representative Shinto journalist as well, has been broadly influencing on the postwar Shinto world. in Japan. The main purpose of this essay is to examine the relationship between Shinto and post-war democracy, centering on his harsh criticism against Constitution of Japan and postwar democracy, with his suggestion of Shintoist politics. In so doing, I will give special attention to his three writings such as Emperor·Shinto·Constitution(1954), Modern Politics and Conscience Isses(1955), and The End of Modern Democracy(1972).
國體論主義神道家であり代表的な神道ジャーナリストである葦津珍彦(1909-1992)は、敗戰後「神社本廳」(1946)や「神道政治連盟」(1969)の創設にふかく關與するうえでその理論的指導者として長年活動しながら、一貫して神道の立場から膨大な時局論、天皇論、國體論、日本史論、皇室法論、憲法論、政敎論、國家神道論などを残した。それらを通して彼は戰後の神道系のみならず國體論的な國家主義の高揚運動、たとえば憲法改定をはじめ、宗敎法人法の改定、神器繼承の復元、紀元節の復活、靖国神社國家護持法の制定、伊勢神宮制の是正、政敎問題、元號問題などの理論的土臺を提供することに大きく寄與した。本考の目的は、こうした葦津珍彦の「日本國憲法」と戰後民主主義に対する批判やその代案として提示された神道的政治論を中心に神道と戰後民主主義との関わり方について考察することにある。その際、本考は彼の著書のなか特に『天皇·神道·憲法』(1954)、『近代政治と良心問題』(1955)、『近代民主主義の終末』(1972)に注目しつつ、なるべく葦津珍彦の主張をありのままで全體的にみるように努力している。要するに、葦津珍彦による戰後民主主義の批判は何よりも徹底した「日本國憲法」無效論や「帝國憲法」への禮讚として集約できると思われる。彼は「日本國憲法」とは米國民主主義の直譯でありしかも日本の降伏的·對外追從的な平和主義の原理にすぎないとみながら、そうした主張の正當性を주장提示するうえで米國民主主義そのものに対して強く批判したのである。そうするなかで彼は民主主義の代案として國體論的な神道政治論に基づき「帝國憲法」の復權を主唱したわけである。そこで彼は①神道的良心(人生觀あるいは人間觀)による道德的正當性の確保、②天皇の精神的·文化的·政治的權威の絶對化を通した歷史的正當性の確保、そして③いわゆる「王道インターナショナリズム」による時代的正當性の確保という三つの側面から神道政治論を根據づけようとしたのである。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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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통예능의 후계양상 고찰 - 가부키를 중심으로 -

백현미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4호 2018.06 pp.141-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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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일본 전통예능 가부키의 계승자들을 주축으로 가부키 세계의 세습형태인 습명(襲名)에 관한 전반적 양상을 검토하고 이러한 후계제도에서 가문 외에 어떠한 내부권력이 작용했는지에 주목하여 고찰한 것이다. 연구대상으로는 메이지 시대 이후부터 집안의 단절 없이 계승되어 온 가문(이치카와 단주로(市川団十郎), 오노에 기쿠고로(尾上菊五郎), 나카무라 우타에몬(中村歌右衛門), 가타오카 니자에몬(片岡仁左衛門), 모리타 간야(守田勘弥))에 관하여, 가문과 기예(芸)가 어떻게 계승되었는지를 배우들의 증언, 경험담인 예담(芸談)을 중심으로 검토했다. 그 결과, 습명의 경우 과거에는 힘 있는 원로 배우들의 의견이 중요시 되었지만, 지금은 가부키 흥행을 쇼치쿠(松竹)가 독점하게 된 이후부터 각각의 집안에서 정했던 ‘선대이름의 습명’에 쇼치쿠가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그래서, 나카무라 우타에몬이라는 명적을 지닌 6대 우타에몬과 같이 권력을 지닌 배우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쇼치쿠의 승인 없이는 습명할 수 없는 쇼치쿠 주도의 습명이 늘어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절대 권력을 지닌 쇼치쿠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것과 습명이 변화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This paper, tried to examine Japanese tradition through succession of acting skills and power, focusing on the unique system of hereditary succession in Japan, that is, succession of names, especially the state of succession of kabuki. To this end, it was analyzed through acting skills story of families, in other words, Ichigawa Danjuro, Onoe Kikugoro, Nakamura Utaemon, Gataoka, Nijaemon, and Morita Kanya were examined, which have lasted without discontinuation since the Meiji era. How the ancestry and acting skills have been passed down since the Meiji era was examined by selecting the core families of the kabuki world, from Danjuro generation to Ebijo generation. In addition, the general aspects of ancestry, acting skills, and power, the main elements deciding rise and decline of a family, were examined. Then, the reason Tamasaburo, a successor of ‘Morita Ganya’, which has the right for succession of names but does not exert the right, and Ichigawa Ennoske, which does not seek ‘power’ escaping from kabuki-za, are gaining support from audiences, despite the various phenomenon and problems of hereditary succession, was examined. As a result, since Shochiku monopolized the kabuki performance, Shochiku has had a great influence on the succession of names. The shochiku-led succession of names that has increased. This suggests that Shochiku’s influence has increased and that the succession of names has changed. It should be a task of both the past and the present for kabuki actors to deeply think about how to pass down acting skills and follow the changing times simultaneously.
本稿は、日本の伝統芸能、歌舞伎の継承者を中心に歌舞伎界の襲名に関する全体的な様相を検討し、このような後継制度において家以外にどうような内部権力が作用したのかに注目し考察したものである。 研究対象は明治から家が絶えることなく、継承されてきた家である市川団十郎、尾上菊五郎、中村歌右衛門、片岡仁左衛門、守田勘弥に関して、主に「家」と「名」と「芸」の継承に対する役者の芸談を中心に検討した。 その結果、襲名の場合、過去は権威のある俳優の意見が重要視されたが、今は歌舞伎の興行を松竹が独占してから、それぞれの家で決めた、「先代の名跡を継ぐ襲名」に「松竹」が影響力を及ぼすようになった。それで、中村歌右衛門という名跡の六代目歌右衛門のような権力を持つ役者が存在したものの、松竹の承認がなければ、襲名ができなかったと考えられる。いわば、松竹主導の襲名が増えることになったのである。これは松竹の影響力の拡大とともに襲名の変化してきたとい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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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宇津保物語』における秘琴の信仰的な様相

柳瀞先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4호 2018.06 pp.163-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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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쓰호 모노가타리(宇津保物語)』에 나타난 비금(秘琴)의 신앙적 양상은 「군자좌금(君子左琴)」이라는 유교의 예악사상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의 민간신앙적 요소가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비금(秘琴)에 나타난 불교적 요소와 민간신앙적 요소는 비금의 신성성을 나타내기 위한 장치로서 설정되어 있다. 『우쓰호 모노가타리』에서 도시카게(俊蔭)가 문인으로서 즐겼던 칠현금은 파사국(波斯国)에서 칠선인(七仙人)에 의해 전수된 과정을 계기로 비금의 영험적 성격을 띠게 된다. 따라서 도시카게 일족(一族)에 있어서 천인의 계보에 의해 획득한 비금의 영험성은 왕권을 표상화하는 수단으로, 또는 도시카게 가문의 우위성(優位性)을 나타내는 수단으로서 그 기능을 하고 있다. 먼저 비금의 불교적 양상은 「도시카게(俊蔭)」권의 파사국 표류담과 비금전승 과정에서 현저히 나타나고 있다. 즉, 도시카게와 비금과의 인연은 관음신앙(観音信仰)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도시카게가 전수받은 비곡(秘曲)은 극락정토(極楽浄土)의 음악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윤회사상(輪迴思想)을 바탕으로 도시카게가 천인의 자손이라는 계보의 설정은 도시카게 일족의 신성성(神聖性)과 비금에 의한 도시카게 가문의 영화(榮華)를 예언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한편 비금의 주술적, 영험적 성격은 고대 일본의 민간신앙적 성격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특히 고대 신화와 설화에 보이는 비금의 주술적인 측면은 활의 현을 울려 신을 부른다는 명현신앙(鳴絃信仰)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쓰호 모노가타리』에서는 이러한 명현신앙이 비금에 적용되어 도시카게 일족이 위험에 빠졌을 때, 비금을 켜서 신을 부르고, 도시카게 일족을 보호하는 주술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 또한 비금의 현을 켜서 신을 부르는 주술적인 행위에 있어, 그 신의 주체는 조령신(祖靈神)로 조령신은 도시카게 일족의 수호신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The belief elements related to Kin(琴) in Utsuho Monogatari are represented not only by Confucian d of philosophical thought of Reigaku(礼楽), but also by various faith. Especially, Buddhist elements and folk belief elements in Hikin(秘琴) are set as a device to express the divinity of Kin, which Toshikage enjoyed as a literary person, the writer in Utsuho Monogatari, became a spiritual character of Hikin with the process transferred from Hashikoku(波斯国)to Seven Hermit(七仙人). Thus, the spirituality of Hikin acquired by the genealogy of celestial beings in the Toshikage family functions as a means to confront to the sovereign right or as a means of representing the superiority of the Familly. The magical and spiritual character of this Hikin is based on the civil character of ancient Japan, and various Buddhist elements are evident in castaway story of Toshikage and tradition process of Hikin. In other words, the connection between Toshikage and Hikin has its origin in Kannon Faith, and the secret music, which is passed on to Toshikage, can be said to be the music of Paradise Pure Land. In particular, the genealogical setting that Toshikage is a descendant of celestial beings is based on the philosophy of Rinne(a belief in reincarnation) and acts as a factor for predicting the glory of the Toshikage family by Hikin and the sacredness of Toshikage family. On the other hand, the magical and spiritual character of Hikin is mixed with these Buddhist elements as well as the folk faith elements. The magical aspect of Hikin seen in ancient myths and fables is based on Myung Hyun Faith(鳴絃信仰), which ring the string of the bow and calls the God. In Utsuho Monogatari, when this Myung Hyun Faith is applied to Kin and Toshikage family is in danger, it has a magical function of playing Kin by calling God and protecting Toshikage.
『宇津保物語』における秘琴の信仰的な様相は、「君子左琴」という儒敎の礼楽思想のみならず、仏教と古代日本の民間信仰的な要素をもとにしている。 まず、『宇津保物語』の秘琴の仏教的な様相は「俊蔭」巻の波斯国漂流譚で濃厚に表れており、琴を仏教思想の体現の一要素として扱っているといえるほど、俊蔭一族の秘琴の伝授過程には、観音信仰、極楽浄土、輪廻思想など様々な仏教的な要素が関わっている。すなわち、秘琴獲得と秘琴伝授を主題とする俊蔭一族の琴の物語には、観音信仰によって「琴を弾き遊ぶ」極楽浄土に入り、輪廻によって「天女のゆくすえの子」という資格で秘琴伝授を受け、「琴弾きて族立つ」始祖になる仏教的な要素が設定されている。そして極楽浄土で学んだ琴を、最後、楼という人工的な極楽浄土の設定の上で披露した秘琴の音には、俊蔭一族の琴が極楽浄土の音楽であるという一貫した繋がりを表し、その極楽浄土の音楽の繋がりによって俊蔭一族の琴の神聖性を強調していくのである。 一方で、『宇津保物語』における秘琴の神聖性には、仏教的な要素とともに琴に持たされた民間信仰的な要素がその背景になっている。まず、呪術的な霊琴の様相において、琴の弦を弾いて‘神を呼ぶ’ということは、鳴弦信仰がその基になっている。 なお、琴の弦を弾き、鳴弦の呪術的な行為によって呼び起こす神は祖霊神である。祖霊神は家の繁栄を願い、予言や神託などで霊験的に子孫を保護する。すなわち、琴によって栄え行く子孫は祖霊神の保護のもとで繁栄していくことになる。このように『宇津保物語』における秘琴は、王権と結びつく礼楽思想の側面ばかりではなく、秘琴の神聖性·霊験性には、仏教的な要素と民間信仰的な要素が作用している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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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일본의 방송법에 관한 인식론적 고찰

엄현섭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4호 2018.06 pp.189-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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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근대 동아시아 라디오 방송 연구를 목적으로 한다. 이것은 1920년대를 시작으로 제국 일본이 패전한 1940년대까지를 연구의 시간적 범위로 설정하였다. 당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근대 동아시아 라디오 방송은 문화적 변동에 어떤 역할을 했고, 현대 방송 체계의 전파는 동아시아 방송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그 대응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를 고구(考究)하는 것은 본 연구에서 중요한 목적이다. 한국과 그 이웃국가들이 공유한 과거와 현재를 ‘동아시아’라는 공간적 틀에서 새롭게 사려는 시도는 1990년대 초반 이후 학계의 중요한 시도로 꾸준히 이뤄져 왔다. 일국사적 접근을 뛰어넘는 동아시아라는 시각의 대두는 냉전 해체라는 세계사적 흐름과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는 일국사적 흐름이 일치하는 시기에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이 시대적 변화에 조응해 자신의 시야를 새롭게 확장하려는 중요한 시도 중 하나였다. 이후 한국의 인문사회과학계에서는 동아시아적 단위를 관찰과 통찰의 단위로 한 일련의 의미 있는 연구가 제출되어 왔다. 본 연구가 주제로 하고 있는 근대 동아시아 라디오 방송에서도 다양한 연구가 제출되어 왔다. 물론 선행연구는 그동안 한국 학계가 간과해온 근대 동아시아 시공간에서의 지식·문화 상호작용의 역사적 경로와 특성, 함축을 규명하고 있는 데서 본 연구에 중요한 자극과 참조점을 제공해주고 있다.
This study is aimed at the study of modern East Asian radio broadcasting. Thus, it was established as a time span for the study from the 1920s to the 1940s, when imperial Japan collapsed. Under the circumstances of the times, modern East Asian radio broadcasting played a role in the cultural shift, and what was the significance of modern radio waves (Shinshin) in East Asian broadcasting? For this purpose, we will also conduct comparative studies on radio broadcasting in East Asia. Obviously, the most important purpose of comparative studies is to identify ourselves. Developing a radio broadcasting culture during the modern colonial period is not only a problem at the time, but also a significant meaning for reviewing the current broadcasting culture and creating future values. The attempt to redefine the past and present shared by South Korea and its neighboring countries in a spatial framework called ‘East Asia’ has been a major attempt by the academic community since the early 1990s. At a time when the “view of East Asia” beyond the country’s historical approach was to combine the global trend of dismantling the Cold War with the private trend of expanding the democratic system in Korean society, the era of social science was significant in Korea. Since then, the nation’s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have come up with a series of meaningful studies using the East Asian units as a unit of observation and insight. Various studies have also been submitted on modern East Asian radio networks. Of course, prior studies provide significant stimuli and reference points in that they identify historical paths, characteristics, and implications of modern cultural interaction in East Asian time and space that has been overlooked by Korean scholars.
本研究は近代東アジアラジオ放送研究を目的とする。これに1920年代を視点で帝国日本が敗戦した1940年代までを研究の時間的範囲で設定した。当時の時代的な状況の中で近代東アジアラジオ放送は文化的変動にどのような役割をし、近代的な放送体系の伝搬は、東アジア放送にいかなる影響を及ぼしており、その対応の姿は何だったんだろうは、本研究で重要な目的だ。 このため、近代東アジアラジオ放送研究は比較研究を並行しようとする 周知のように比較研究の最も重要な目的は、自ら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把握することにある 近代植民地時期ラジオ放送文化を考究(考究)するのは、当代の問題だけでなく、現在の放送文化を点検して未来的な価値を創出する上でもその意味が重大なことだ。 韓国とその隣国が共有した過去と現在を‘東アジア’という空間的枠組みで新たに思惟する試みは1990年代初盤以来、学界の重要な試みで着実に行われてきた。 一国史的なアプローチを超える‘東アジアという見方’の台頭は、冷戦の解体という世界史的な流れと韓国社会の民主化とは一国私的の流れが一致する時期に、韓国の人文社会科学が時代的変化に照応して、自らの視野を更新、拡張しようとする重要な試みの一つだった。 以降、韓国の人文社会科学系では東アジア的単位を観察と洞察の単位にした一連の意味のある研究が提出されてきた 本研究がテーマにしている近代東アジアのラジオ放送でも様々な研究が提出されてきた もちろん、先行研究はこれまで韓国の学界が見過ごしてきた近代東アジアの時空間での知識·文化相互作用の歴史的経路と特性、含みを究明していることから、本研究に重要な刺激とチャムチョジョムを提供してく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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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아베의 역사수정주의와 새 한일관계의 정립모색 - 일본역사인식의 본질과 해법으로서의 독일역사인식 -

이기용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4호 2018.06 pp.209-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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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가 존경하는 요시다 쇼인은 ‘정한론’에서 “한국, 중국. 필리핀을 지배하고 일본의 판도를 넓히라”고 일본의 ‘대동아 공영론’을 최초로 펼친 사람이다. 따라서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사상을 보면 아베정권의 향후 방향을 짐작 할 수 있다. 아베는 고노 무라야마 담화 계승에 대해서 왔다 갔다 애매하나 야스쿠니신사 참배, 독도 영토도발, 일본군‘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서는 일관된 역사수정주의를 지니고 있다. 미래 밝은 한일관계의 전망은 일본이 독일과 같은 반성적 역사인식과 실천을 따를 수 있는가에 달려 있으며 앞으로도 일본에게 독일의 ‘역사인식’을 제시하면서 지속적으로 각성시켜나갈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IN the summit talks between Korea’s president Kim Dae Jung and Japan’s prime minister Keizo Obuchi held in Tokyo in 1998, “The Declaration of Korea-Japan Partnership toward the 21st Century” was made. This year, 2018, marks the 20th anniversary of the declaration. The declaration between president Kim, an expert on Japan, who was known to be opening the nation’s door to Japanese culture and prime minister, Obuch, who was known as a dove in the Liberal Democratic Party and a pro-Korea politician, was meant to be a resolution to move forward as genuine partners, going beyond the historical enmity between the two in the coming 21st century. The declaration was every bit future-bound. Now, 20 years later, where does Korea-Japan relations stand? Have Japan and Korea forged a genuine partnership? Unfortunately, the relations have been worse off without mutual trust. There may be many reasons for it. Not least of them is the incorrect historical perception of Japanese leaders, including Abe and their inaction to change. On the contrary, Japanese leaders are reverting to imperialism of the past. The long economic recession from 1990 to 2010 in the wake of the bursting of the bubble in 1989 gave Japanese people a sense of depression and loss, especially because they had enjoyed sustained rapid economic growth up until 1980s thanks to the surge in demand during the Korean War. Against this background, Japan tilted toward the right characterized by such organizations as “The Group for Making a New History.” Prime Minister Abe, as an executive of the organization, led the history distortion even before becoming the prime minister. What about Germany, another war criminal country which invaded other countries? Germany has defined the massacre of Jews by Nazis as a crime without statute of limitation and continued to indemnify the victims. The reason is that the Germans have a diametrically different perception of history. That is why it is a leader of the EU. Japan is called upon to shift its historical perception as Germany did.
阿部が尊敬する吉田松陰は‘征韓論’で “韓國̀̀、日本、中國、フィリピンを支配して日本の版圖を廣めるべし”と日本の‘大東亞共榮論’を初めて主張した人物である。從って、吉田松陰の征韓論思想をみれば、阿部政權の今後の方向性をある程度豫測することが出來るのである。阿部は河野、村山談話の繼承に關しては曖昧であるが、靖國神社參拜、獨島領土挑發、日本軍‘慰安婦’等 過去の歷史問題に關聯しては歷史修正主義を一貫している。 未來、明るい韓日關係の展望は、日本がドイツの樣な反省的な歷史認識とその實踐までもともなえるかどうかにかかっている。これから後も、日本にドイツの‘歷史認識’を持續的に提示しながら日本が覺醒するよう努力する必要があると思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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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민중예술논쟁 재고 - 혼마 히사오의 민중예술론을 중심으로 -

이석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4호 2018.06 pp.245-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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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예술논쟁은 1910년대를 대표하는 논쟁으로 일본 지식인들의 민중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선행연구에서는 처음으로 논쟁을 제기한 혼마 히사오를 간과해 왔으나 본 연구는 혼마의 주장에 주목해 그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했다. 우선 혼마는 당시 지식인 사이에서 유행했던 톨스토이주의에 대항하여 “민중예술”과 “일반적 예술”을 분리시켰다. 이로써 혼마는 민중의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게다가 혼마는 교육을 받지 못 하는 이들의 “민중예술”을 “고등문예”와 동등하게 취급한다. 이처럼 혁신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혼마가 예술에 내재하는 가치보다는 예술이 주는 쾌락을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혼마가 이런 주장을 펼친 사상적 배경을 조사해보면 윌리엄 모리스로부터 혼마가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혼마는 윌리엄 모리스의 사상을 수용하여 민중이 즐기는 문화와 예술을 있는 그대로 긍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혼마의 민중예술론에 오스기 사카에가 반발한 이유도 쉽게 이해된다. 오스기는 로맹 롤랑을 번역하며 신흥계급에 의해 새로운 예술이 탄생하는 것에 희망을 걸었다. 그 과정에서 오스기는 민중이 즐기던 기존의 예술을 부정하게 된다. 혼마와는 달리 오스기는 민중을 지나치게 이상화하여 현실의 민중을 도외시했던 것이다.
The debate over popular arts was the most famous debate in the 1910s, which has impacted the image of the people in modern Japan. This study paid attention to the ideas and thoughts of Honma Hisao, who had been neglected in the precedent studies. By opposing Tolstoyism, Honma succeeded to separate the popular arts and liberal arts. It was very innovative for Honma to secure people’s own place in the field of art. Moreover, Honma equally valued the popular arts and belles-lettres. Honma accomplished this because he emphasized the pleasure of art more than art’s inherent beauty. Because Honma was under the influence of William Morris, he affirmed the common people just the way they are. Criticizing Honma, Osugi Sakae, influenced by Romain Roland, belived that the new emerging classes would create the new form of art. However, the idea of ​​Osugi was so ideal that it caused Osugi to deny the popular culture and to ignore the actual people.
民衆芸術論争は1910年代を代表する大論争であって近代知識人たちの民衆論に大きな影響を及ぼした。先行研究では、初めて論争を提起した本間久雄に注目しなかったが、本研究では本間の主張に新たな光を当ててその歴史的な意義を考察した。 まず、本間は、当時知識人たちの間で流行ったトルストイの芸術論を批判して、「民衆芸術」と「一般的芸術」を分離した。これは非常に革新的な出来事で、民衆だけの独自的な領域を本間が確保したことを意味する。さらに、本間は、教育を受けていなかった人たちの「民衆芸術」を「高等文芸」と平等に評価する進歩性も見せた。本間は芸術作品に内在する価値よりは芸術が与える快楽を重んじたために、他の知識人たちと異なる思想を示すことができたのである。その思想的な背景を調べてみれば、本間がウィリアム·モリスから多大な影響を受けたことが分かる。本間はモリスの民衆芸術論を受容して民衆が楽しむ文化や芸術をそのまま肯定したのである。 こうした背景を念頭に置けば、本間の民衆芸術論に大杉栄が反発した理由も理解できる。大杉はロマン·ロランを翻訳しながら、新興階級の作る新しい芸術に希望をかけた。その過程のなかで、大杉は既存の民衆芸術を批判し、否定することになる。つまり、大杉は民衆を理想化し過ぎて、現実の民衆を度外視してしまった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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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마쓰리(祭り)’의 변용을 통해 본 지방창생

이창수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4호 2018.06 pp.273-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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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제2차 아베내각이 발족하면서 일본 정부는 지방창생(地方創生)정책을 최우선과제로 내걸었다. 도쿄권의 인구 유입 억제를 통해 지방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자는 것이 핵심내용이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같은 해 11월 ‘마치·히토·시고토 창생법’을 마련하여 본격적인 지방창생정책을 가동하여 올해 4년차를 맞고 있다. 각 지방에서도 지방창생은 사활을 건 생존전략으로 인식하고 독립성, 지역성, 결과 중시의 원칙을 내세우며 매력 있는 마을 만들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중에서 창생의 모티브를 민속 문화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주목을 끌고 있다. 본고는 일본의 ‘마쓰리’의 변천과정을 살펴보고 지역 공동체 속에서 ‘마쓰리’가 어떤 변용을 거쳐 지방창생에 기여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원래 마쓰리는 액막이와 오곡풍요를 바라기 위해 신을 모시는 제의임과 동시에 지역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마을의 활성화를 위한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통상적으로 ‘마쓰리’를 ‘전통 마쓰리’와 ‘시민 마쓰리’의 형태로 구분하는 것은 야나기타 구니오가 규정한 ‘제례’가 시대의 변화에 맞게 계승되고 변용된 민속문화라 할 수 있다. 마쓰리는 지역주민들에게 정체성의 원천이고 지역 주민 뿐 만 아니라 지역 연계와 지역 사회의 활동에 주체적·적극적으로 참가할 수 있는 촉매제로 새삼 활성화시켜나가고 있다. 최근 ‘마쓰리’의 매력을 재발견하여 경제효과도 고려하면서 유객 수법을 다양화함으로써 참가자와 관람자, 심지어 방일외국인도 자유롭게 수용할 수 있는 마쓰리의 개방성에 지방창생의 호기를 모색하고 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롭게 변용되어가는 마쓰리가 지방 창생의 열쇠로 더욱 주목되는 이유이다.
In September 2014, when the second Cabinet of Ministers Abe was established, the Japanese government laid out the policy of regional revitalization as a top priority. The key point is to reinvigorate the province by restraining the influx of population in Tokyo. In order to specify this, the Japanese government established the “Machi, Hito, Shigotto Law for Revitalization” in November of the same year, and it is the fourth year of this year that the full-scale regional revitalization policy was put into operation. In each province, regional revitalization is recognized as a survival strategy and strives to make charming towns with the principles of independence, locality, and consequence. Among them, efforts to find the motif of revitalization from folk culture are grabbing attention. this article examines the change process of ‘Matsuri’ in Japan and also examines the ways how ‘Matsuri’ has gone through change and contributes to the regional revitalization in the local community. Originally, Matsuri was a rite for god in order to pray for preventing misfortune and good harvest, as well as identifying the local identity and playing a central role in energization of the village. Normally, distinguishing Matsuri in the form of “traditional Matsuri” and “citizen events” is the folk cultures that the ‘Sairei’ defined by Yanagita kunio have been inherited and transformed according to the changes of the times. MatsurI is a source of identity to local residents, and they are actively promoting not only local residents but also as a catalyst for participating in linkage between regions and activities of local communities. Recently, Japan has been rediscovering the charm of Matsuri, considering the economic effect, and diversifying the way to attract tourists. Also, they try to find to develop the regional revitalization through the openness of Matsuri that participants, spectators and even foreigners visiting Japan freely participate in. This is why MatsurI, which is newly transformed according to the changes of the times, is the key to regional revitalization.
2014年9月第2次安倍内閣の発足とともに、日本政府は地方創生政策を最優先課題に掲げた。東京一極集中の現象を是正し、地方に新たな活力を吹き込むというのが核心内容だ。これを具体化するために、日本政府は、同年11月「まち·ひと·しごと創生法」を成立し、本格的な地方創生政策を運営して今年で4年目を迎えている。各地方においても地方創生は生き残り戦略に取り入れ、独立性、地域性、結果重視の原則を掲げ、魅力ある町づくりに努力している。 その中で創生のモチーフを民俗文化から探そうとする努力が注目を集めている。本稿は日本の祭りの変遷過程を見て地域共同体の中で祭りがどのような変容を経て、地方創生に貢献しているのか調べてみた。もともと祭りは厄払いと五穀豊穣を願うために神を祀る祭儀と同時に地域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確認して村の活性化に向けた中心的な役割を果たしてきた。普通祭りを伝統祭りと市民祭りの形で区分することは柳田国男が規定した祭礼が時代の変化に沿って継承しかつ変容された民俗文化といえる。祭りは地域住民にアイデンティティの源泉であり、地域住民だけでなく、地域連携と地域社会の活動に主体的·積極的に参加できる媒介と認識され、改めて活性化させている。最近、祭りの魅力を再発見し、経済効果も考慮しながら誘客手法を多様化することで、参加者や観覧者、しかも、訪日外国人も自由に受け入れられる祭りの開放性に地方創生の好機を模索している。時代の変化によって新たに変容していく祭りが地方創生の鍵の一つとして注目される理由と言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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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와 경쟁하는 인간 - 『이 몸은 고양이야』를 중심으로 -

이한정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4호 2018.06 pp.295-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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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국민 작가라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의 삶은 ‘불안’ 속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그의 불안의식은 인간의 경쟁심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로 나타났다. 초기 작품 『이 몸은 고양이야』에는 ‘경쟁하는 인간’에 대한 문제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경쟁이 고조되는 인간사회에서 자아에 사로잡인 개개인은 ‘고립’에 내몰린다고 나쓰메 소세키는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나쓰메 소세키는 인간이 지녀야할 독립적 사고를 ‘자기본위’ 사상으로 말했다. 그러나 여기에 ‘이기주의’를 내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치열한 ‘생존 경쟁’에 내몰리면서 인간은 자기만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쓰메 소세키는 자신의 자아를 중시하는 만큼 타인의 자아도 존중해야한다고 했다. 그는 문명개화로 인해 ‘생존 경쟁’이 치열해지던 시대에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라 했다. 『이 몸은 고양이야』는 고양이라는 동물 화자의 눈으로 경쟁하는 인간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작품 속에 나타난 인간의 경쟁 양상은 현재의 한국에서 보이는 경쟁 사회의 모습과 대비시켜도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쓰메 소세키가 말한 타인에 대해 ‘관용하는 동정심’은 치열한 경쟁으로 인간의 고립이 심화되는 현실에서 공동체를 이루는 인간들이 다시 되새겨야 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The life of Natsume Soseki, who is called the nation’s author of Japan, started within ‘anxiety’. His such consciousness of anxiety led to his attitude of observing human competition critically and thus his early work called “Wagahai wa Nedo dearu: I am a Cat” has a deep awareness of problem on ‘competing humans’ The ‘competition’ of humans that accelerated along with the advancement of civilization ultimately causes the ‘isolation’ of humans, said Natsume Soseki. At that time, he emphasized ‘egotism’ as a means to pursue one’s self-independence. In other words, this thought he referred to as ‘individualism’ can easily engender ‘egotism’, but regarding this, Natsume Soseki said humans need to respect others’ ego as much as they respect their ego. Egotism is also a trait of humans who compete with each other, and Natsume Soseki said what humans need in the era of intensifying ‘competition for survival’ was ‘sympathy’ for others.“Wagahai wa Nedo dearu: I am a Cat” shows the actualities of humans who compete through the eyes of cat, the animal speaker. Human competition in this work is not much different even when compared to the overheating ‘competition’ in the Korean society. Therefore, ‘sympathy of tolerance’ on others that can also be ‘romantic morals’ as Natsume Soseki said can be said to have a more important meaning in the human society of intense competition.
日本の「国民作家」と呼ばれる夏目漱石は生まれて間もなく本家を離れ里子に出されたことで根源的「不安」を感じ続けていた。彼が抱いた不安感は競争に没頭する人間に批判的な態度の観点を与えた。初期作である『我輩は猫である』には「競争する人間」に対する問題意識が投影されている。競争心が高められていく人間社会において人間の「孤立」は避けられないと夏目漱石は考えた。その一方、彼は人間における独立的精神を重視する立場で「自己本位」の思想を強調した。しかしながらこの態度から生まれてくるエゴイズムに警戒心をも示した。激しい生存競争に晒された人間は他人を意識し自己中心になりやすい。夏目漱石は自我を確立していくと同時に他人の個性も尊重すべきだと説いた。彼は生存競争が激しくなるのが開化の趨勢だとし、その競争社会において人間に要することは他人に対する「同情心」であると述べた。『我輩は猫である』では猫という動物の語り手の眼差しで競争する人間像を捉えている。このような人間の競争心は現代社会の中では激しくなる一方だ。ということで人間の孤立化は今日の競争時代にも深めていく。本稿では夏目漱石の言う「寛容する同情心」から競争社会における倫理を考えてみ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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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좌익의 전후민주주의 비판과 ‘조반 운동’

조관자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4호 2018.06 pp.323-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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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일본의 신좌익이 ‘일본의 양심’을 대표하며 일본의 ‘우경화’와 맞서는 세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좌익은 일본의 전후민주주의를 비판함으로써 오히려 오늘의 사상적 혼돈과 변화를 재촉한 세력이기도 하다. 신좌익이 일본의 국민적 의지를 대표하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 글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벌어진 인식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일본 신좌익의 족적과 당대의 이념을 살펴본다. 특히, 동아시아의 내셔널리즘과 맥락을 공유하면서, 일본 신좌익의 마오이즘과 폭력운동의 전개 양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1960년 안보투쟁 후에 신좌익은 의회제와 시민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혁명론을 펼쳤다. 리버럴리즘을 모두 비판한 신좌익 혁명론 중에서도 마오이즘을 수용한 세력의 활동이 동아시아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속되고 있다. 필자는 먼저, 신좌익과 전공투의 차이를 밝히고, 폭력을 긍정하는 그들의 사상적 배경을 고찰한다. 거기에는 ‘패배’의 감정을 각인시킴으로써 ‘저항’을 촉구하려는 반어법이 관철되고 있다. 이러한 저항 내셔널리즘은 중국의 근대와 마오이즘을 수용한 다케우치의 사상과 직접 연결되는 것이지만, 다케우치가 신좌익의 사상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이 글은 마오이즘을 수용한 신좌익 논객으로 쓰무라 다카시의 활약에 주목하고 있다.
In Korea, Japan’s new left wing is known as a force opposing “right turning” on behalf of “conscience of Japan”. However, today’s thoughtful chaos is also a result inspired by the new leftist’s criticism on the postwar democracy in Japan. The new leftist does not represent Japanese society and national will. However, in Korean society, Japanese new leftist’s opinion are widely accepted, but understanding of their history and thought is insufficient. Since the opposing struggle to the adoption of the revised Treaty of Security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Japan in 1960, the new left wing has criticized civil democracy and developed a radical revolution theory. In this paper, I focus on accepting Maoism in their revolutionary theory. First, I will clarify the difference between the new left wing and the Zenkyoto, and consider the background of their thought affirming violence. The irony is penetrated by letting the emotion of “defeat” that promoting “resistance” there. Such nationalism of resistance is also directly connected with thought of Kaoru Takeuchi who accommodated Maoism.
韓国では、日本の新左翼が「日本の良心」を代表して、日本の「右傾化」に対抗してきた勢力のように知られている。しかし、今日の思想的な混沌と変化は、新左翼の戦後民主主義に対する批判によって促された結果でもある。新左翼が日本の国民的意志を代表するわけでもない。韓国の社会には、日本の新左翼の主張が広く受容されている反面、新左翼の歴史と思想に対する理解は不足している。こうした問題に着目して、本稿では、日本の新左翼の歴史と思想を東アジアのナショナリズムに共通する文脈において理解したいと思う。 1960年の安保闘争の後、新左翼は市民民主主義を批判し、急進的な革命論を展開した。この論文では、彼らの革命論の中でもマオイズムの受容に注目する。筆者は、まず、新左翼と全共闘の違いを明らかにし、暴力を肯定する彼らの思想の背景を考察する。そこには「敗北」を刻印させることで「抵抗」を促すようなイロニ-の語法が貫かれている。こうした抵抗のナショナリズムは、マオイズムを収容した竹内好の思想と直接的につながっているものでも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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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본사상사학회 회칙 외

한국일본사상사학회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4호 2018.06 pp.359-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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