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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일본 보수주의의 의지와 현실 - 요시다 시게루의 ‘전후체체’로부터의 이탈과 자기 해체 -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28호 2015.06 p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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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일본의 보수주의 정치인들은 ‘전후’ 혹은 ‘전후체제’에 의문을 제기할 때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 혹은 ‘진보적 문화인’ 등을 거론하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전후 일본에서 가장 오랫동안 군림했던 것은 다름아닌 보수적인 자민당 체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민당 체제의 체질을 마련한 장본인은 GHQ 및 맥아더 사령관과 협력하면서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제도로서의 ‘전후체제’를 만든 요시다 시게루다. 현대 일본의 보수주의 정치인들은 혈연적으로 요시다 시게루와 엮여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이념에서도 닮아 있다. 따라서 보수파들이 미래의 시점에 서서 비판하려 하는 ‘과거’로서의 ‘전후체제’란 바로 보수파 자신들 출생지 혹은 출발점인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보수파들이 ‘전후’ 혹은 ‘전후체제’에서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이들은 자신의 실존적인 존재와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Whenever conservative politicians and polemicists in contemporary Japan raise doubts about 'the post-war' or 'the post-war regime', they mention the so-called progressive intellectuals or culturati. By the way if we think about it, we can know that it is the conservative LDP system itself which has reigned for a long time in the post-war Japan. However, who had made the LDP's constitution? It was Yoshida Shigeru who had made 'the post-war regime' as a continuous and lasting system. Yoshida had kept ties with GHQ and MacArthur cooperative. Conservative politicians in contemporary Japan have ties of blood with Yoshida Shigeru. At the same time they bear similarity to Yoshida Shigeru in the point of political ideology. So to speak, 'the post-war regime' as the past which the conservative criticize from the future is birthplace or starting point of the conservative themselves. Therefore, as they attempt to break out of 'the post-war' or 'the post-war regime', they have nothing to do but encounter the existence, 'the post-war regime' by name.
現代日本の保守的な政治家や論客は、「戦後」あるいは「戦後体制」に疑問を提起するさいに、いわば「進歩的知識人」もしくは「進歩的文化人」を取り上げる。ところが、よく考えてみると、戦後の日本でもっとも長く君臨したのは、保守的な自民党体制であることが分かる。このような自民党及び日本の体制を作った張本人は、GHQとマッカーサー司令官と協力しながら、持続的・恒久的な制度としての「戦後体制」を構築した吉田茂である。 現代日本の保守主義政治家は、血縁的に吉田茂と絡んでいるのみならず、政治理念から見ても似ている。つまり保守派が未来という時点で批判しようとする「過去」としての「戦後体制」とは、保守派自身の出生地かスターティングポイントのはずである。 従って、「戦後」もしくは「戦後体制」から逃れようとすればするほど、現代日本の保守主義は、自身の実存的な存在と直面せざるをえなく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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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1156년에 호겐(保元) 난이 일어난 이후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 무사 지배 사회가 되었다. 고대부터 이어진 섭관 정치는 12세기 중반부터 상왕 정치로 바뀌었다. 섭관 정치는 세습하는 후지와라 가문의 장자가 천황의 정치를 대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왕 정치는 천황이 상왕으로 물러나서 천황의 정치를 대신하는 것이다. 왕권을 문란시키는 점에서 상왕 정치는 섭관 정치와 차이가 없고 오히려, 대신들이 무력하게 되면서 폐해가 더욱 심해졌다. 상왕의 전제 정치는 부도덕하게 맞아들인 왕비들을 통해서 분명히 드러난다. 토바 상왕의 세 왕비를 통해서 상왕 전제 정치의 폐해를 살펴볼 수 있다. 타이켄몬인(待賢門院)은 시라카와(白河) 상왕의 양녀였으나, 상왕의 아들을 임신한 상태에서, 손자 토바(鳥羽) 천황의 왕비가 되어 스토쿠(崇德) 천황을 낳았다. 섭관 타다자네의 딸인 카야노인(高陽院)은 시라카와 상왕과 섭관의 갈등속에 39살의 나이에 토바 상왕의 왕비가 되었다. 한편 토바 상왕의 젊은 애첩 비후쿠몬인(美福門院)은 상왕의 총애를 업고 천황 후계구도를 좌우했다. 상왕의 무절제한 전제(專制) 정치는 문란한 왕비 간택에서 나타나고, 이것이 호겐 난의 근본 원인이 되었다.
After Hogen Rebellion in 1156, Japan beccame Samurai ruling society. It lasted over 700 years until Meiji restoration. the Fujiwara clan's monopoly was began at 9th century. It was called Sekkan Seiji. The first born son of Fujiwara clan succeeded Sekkan like Tenno. From the middle of 12th century the former Tenno's autocracy replaced the Sekkan Seiji. It was called Insei. Young children ascended the throne and they abdicated at their youth. The Insei was worse than Sekkan Seiji, because there was no way to control the autocratic former Tenno. This paper examined the former tenno Toba's three tangled queens at the Hogen Rebellion. Taikenmonin was the Toba's first queen.. She was adopted daughter of Toba's grand father Sirakawa. When Toba married with bihukumonin, she was aleady pregnant of Sirakawa's son. The son was the Sutoku Tenno who was thought to be a rebel. And the 39 years old Sekkan's daughter married with Toba after his grand father died. The young Queen bifukumonin was a favorate of Toba. When Her son, young Tenno, Konoe was dead, she had influence in deciding next Tenno. She was in conspiracy with the Sekkan who was disinheritance with his father and young brother. Hogen rebellion was originated the former Tenno's autocracy.
日本は1156年に保元の乱が起ってから、明治維新に至るまで武者の支配する社会になった。古代から行われた摂関政治は11世紀後半から院政に代わった。摂関政治は世襲する藤原家門の長者が、政治の専権を振るうのである。そして院政は天皇が退位して上皇として専制統治を行うのである。王権を乱す点では両者は差がないが、院政は大臣たちが無力になって弊害がもっと酷くなった。院政の専制政治は鳥羽上皇の三人の妃たちを通してその弊害がはっきり表われる。待賢門院は白河上皇の養女だったが、鳥羽天皇の中宮になって崇徳天皇を生んだ。摂関忠実の娘高陽院は白河上皇との葛藤の中で39歳の時鳥羽上皇の妃になった。鳥羽上皇の若い妃になった美福門院は上皇の寵愛を得て後継天皇の位をめぐる争闘の真ん中にいた。本論文はこの三人の妃たちと保元の乱の原因を考察してみたのである。
‘전후’의 기원과 내부화하는 ‘냉전’ - 홋타 요시에의 「광장의 고독」을 중심으로 -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28호 2015.06 pp.5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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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과 ‘전후’는 양립이 불가능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의미상으로 볼 때, 냉전(Cold War)이 일종의 ‘전쟁 상태’를 전제로 한다면, ‘전후(Postwar)’는 ‘평화 상태’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탈냉전 이후일본에서는 ‘전후’가 끝났다는 시간감각이 확산되었다. 이런 현상이 보여주는 것은 일본인들이 냉전의 시간을 ‘전후’의 감각으로 살았다는 ‘역설’이다. 그렇다면 이 ‘역설’의 시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어떤 논리에 의해 자명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일까? 이 글은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1951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홋타 요시에의 「광장의 고독」을 분석했다. 이 소설이 중요한 이유는 냉전의 세계에서 ‘전후’의 감각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한국전쟁 발발을 계기로 냉전이 실제로 전쟁이 벌어지는 현장(‘열전’의 장소)와 말 그대로 ‘냉전’의 장소로 분할되는 사태에 주목한다. 그리고 전쟁에 ‘연루’된 일본을 ‘열전’의 현장에서 떨어져 있는 ‘냉전’의 장소에 위치시킨다. 즉, 여기에는 ‘냉전’과 ‘전후’ 일본을 결부시키는 상상력이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 개인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보수(자유주의)와 혁신(사회주의)의 양당체제인 ‘55년 체제’로 현실화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좌익과 우익의 이념 대립은 있으나, 한반도와 달리 ‘전쟁’의 상태로 비화하지 않는 장소라는 의미를 획득한다. 「광장의 고독」은 냉전과 전후를 공존시킨 ‘역설’적 상상력의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탈냉전으로 위기를 맞은 ‘전후’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다.
Whereas the Cold War implies that the world was under war conditions, the period of Postwar assumes the conditions under with peace might be obtained. Because of that, the idea of the Cold War was not compatible with that of the Postwar period. However, it is my contention here that the end of the Post-Cold War period brought a sense of an ending of Postwar among the Japanese public. In other words, the Japanese were living with memories of Postwar during the Cold War. This paper explores ways of questioning the cause and origin of this paradoxical situation as it happened in Japan. In order to do this, I examine Hotta Yoshie’s novel, Stranger in Town, received the Akutagawa Award in 1951 which addresses the influence of the Korean War—the so-called “hot war” in the Cold War—on Japan. In this paper, however, I argue that although his novel portrays continuing ideological conflicts for over fifty years between communism and liberal democracy in the context of the Cold War, it rather asserts the compatibility of the Cold War and the period of Postwar in Postwar Japan with the fictional element.
冷戦と戦後は両立できない関係である。ところが、脱冷戦以後の事態が教えてくれるのは、日本は冷戦の時間を戦後の感覚を持って生きてきたという「アイロニ」である。では、こうした「アイロニ」の時間はいつから始まり、またそれはいかなる論理によって自明なものとなったのであろうか。本稿の問題意識はここにある。とりわけ本稿では1951年芥川賞を受賞した堀田善衛の「広場の孤独」に焦点を当てて、この問題を取り扱っている。というのは、この小説には冷戦と日本の関わりを回避した同時代の言説とは異なり、両者の関係を新たに定義しようとする発想が表現されているからである。またそれは作家一人の想像力にとどまらず、いわゆる「55年体制」の成立をきっかけとして現実性を与えられた。この想像力の内容は、以下のようなものであった。すなわち、冷戦を戦後の内部へと引き入れることで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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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모요겐로꾸 코지(訓蒙要言錄故事)』는 일본 중세부터의 제가(諸家)의 기행문을 모아 『시린이꼬슈(詞林意行集)』를 간행하고, 또 사서인 『민고슈(眠寤集)』, 시학(詩学) 입문서인 『와고엔기 캇뽀우(和語円機活法)』 등을 간행한 에도시대 중기의 국학자이자 신도가, 미야카와 도타츠(宮川道達, ?-1701)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도타츠(道達)는 『쿤모요겐로꾸코지』에서 『명심보감』과 관련한 천의 관념을 중심으로 효도가 중심이 된 치국 ․ 치가 ․ 교우를 논한 인간의 도리와 인간다운 삶의 방법을 논한 선을 으뜸으로 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지금까지 선행연구에서 언급이 없었던 도타츠의 『쿤모요겐로꾸 코지』 속에 담겨 있는 『명심보감』 관련 내용을 제시하여, 『명심보감』이 도타츠의 사상에 미친 영향을 밝혔다. 그 절차로 『명심보감』과 관련한 인용 내용을 제시하고, 그 인용을 검토한 결과 내용 중에는 『명심보감』이라는 출처를 분명히 밝힌 것도 있지만, 많은 부분은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도타츠 본인이 작성한 서문과 그의 맹우(盟友)인 마츠시타 켄린(松下見林)이 작성한 서문을 비롯하여 본문에서 도타츠가 『명심보감』의 서적명을 기록한 부분과 인용 방법에서 『명심보감』으로부터 인용하였다고 판단되는 본문을 발췌하여 그 관련을 밝히고 사상적 의의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Kunmoyogenroku Kouji is known as literary work of Miyakawa Totatsu who isclassicalscholarofcountryandShintoism.TotatsupublishedSirinikosyu, Mingosyu and Wagoengicarpou, and in this report, I want to make clear the Myoungsimbogam’s influence to the thought of Totatsu by suggesting contents related with Myoungsimbogam. Concretely, this report focus on investigating meaning of thought by determining relation of contents that Totatsu quotes Myoungsimbogam, and also prefaces that written by his friend Matsushita Kenrin.
『訓蒙要言錄故事』は、中世以降の様々な紀行文を集め、『詞林意行集』を刊行し、史書である『眠寤集』․詩学の入門書である『和語円機活法』などを刊行した江戸時代中期の國學者․神道家、宮川道達(?-1701)の作品として知られている。道達は、『訓蒙要言錄故事』において、『明心寶鑑』と関連した天の觀念を中心に、孝を主とする治國․治家․交友を論じた人間の道理と、人間らしい生を論じた善を最上のものとしている。 本稿では、今まで先行硏究で言及がなかった道達の『訓蒙要言錄故事』の中に含まれている『明心寶鑑』關聯の內容を提示し、同書が道達の思想に及ぼした影響を明らかにした。具体的には、『明心寶鑑』と關聯した内容を提示し、『明心寶鑑』が出典であることを明らかにした部分もあるが、引用書名を明らかにしえなかった部分も少なくなかった。そこで、道達本人の序文や彼の盟友である松下見林の序文をはじめ、本文で道達が『明心寶鑑』の書籍名を記した部分を取り上げ思想的な考察を加えた。また、引用の方法から『明心寶鑑』より引用したと判斷できる本文の内容を拔萃し、その関連を明らかし、且つ思想的意義を糾明することに焦點をおいた。
近代期의 元曉 再發見者들 - 鄭晄震, 崔南善, 趙明基, 許永鎬를 중심으로 -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28호 2015.06 pp.95-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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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근대기에 들어 신라시대의 인물인 元曉(617-686)의 사상과 행적에 새롭게 주목한 인물을 소개하고, 그들의‘원효 재발견’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일본유학을 경험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당시 일본과의 관계를 의식하며 원효에 관심을 쏟게 된 배경, 그리고 그 결과로 그려진 원효상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원효는 동아시아불교계에 널리 알려졌던 인물로, 그의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등이 널리 애독되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효는 문도형성이나 교단조직과 같은 활동을 하지 않았기에, 숭유억불의 조선시대를 지나오며 그 존재감은 많이 잊혀지게 되었다. 점차 名刹 창건 설화속의 신비승의 이미지가 많이 남아 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를 맞게 되며 상황은 달라진다. 한국불교계의 억불으로부터의 해방, 일본불교계와의 교섭, 서양종교와의 경쟁 등의 배경 속에서 원효는 급격히 주목을 받으며 재평가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당시의 원효인식은 불교교리나 신앙의 측면보다는 일본의 식민지배하에서의 ‘국가존립, 민족 주체성 문제’와 결부된 측면이 크다. 원효는 역사로부터 불려져 나와 당시의 국가와 불교계의 정세에 맞추어 해석되어졌는데, 그 양상은 ‘민족영웅, 개혁가, 통불교의 제창자, 군승, 호국승, 선교융합의 이념적 종조’ 등의 표상으로 나타났다. 즉 원효는 근대를 기점으로 ‘불교의 진리를 체득한 고승’이기 보다는 ‘한국민족사상과 문화의 자부심의 상징’으로서 재등장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본 고에서는 근대기 원효 재발견의 역사적 배경을 당시의 한일 양국의 관계와 불교계의 교섭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고자 하였다. 특히 정황진, 최남선, 조명기, 허영호를 중심으로 각각의 원효 재발견의 배경과 양상에 대해 고찰을 시도하였다. 이들의 원효이해에는 식민통치국가로 등장한 일본에 대한 일종의 저항감과 민족적 자부심의 모색, 그 반면 선진불교국으로 선양하고 있는 당시의 일본불교계에 대한 동경 등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음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고찰을 통해 원효라는 한 인물의 이미지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상황에 의해 다양하게 읽혀 왔으며 재창출되었음 인식하고, 나아가 현대에 있어 우리에게 원효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를 자문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하는 바이다.
The persons who paid new attention to thought and life of Wonhyo(617-686) at modern time, who was the figure of Silla period, will be introduced and aspect of their ‘Wonhyo rediscovery’ will be also examined in this study. And the back ground they had interested in Won-hyo considering the relationship with Japan at that time and the image of Wonhyo which was pictured in the result of their efforts will be introduced particularly focusing on peoples who experienced the study in Japan. Wonhyo was a person who was widely known in East Asian Buddhism world, and it is well known truth that his work Daeseung-gisin-lonso(大乘起信論疏, Commentary on Awakening of Faith) Geumgang-sammae-gyeongnon(金剛三昧經論, Commentary on Vajrasamādhi Sutra) were widely read also. In spite of that, because Wonhyo didn’t have any activity to form student group or religious organization, the sense of his existence were forgotten a lot passing through Joseon dynasty which had policy of emphasis on Confucianism and restriction on Buddhism. So the images of mysterious monk in building of famous temple story were left and gradually passed down. But entering modern time, this situation was changed. Wonhyo got quick attention from the people and became reevaluated in the background of liberation of Korean Buddhism world from restriction, intercourse with Japanese Buddhism world, competition with Western religion etc. Particularly the recognition of Wonhyo at that time has the aspect related to ‘national existence, matter of national identity’ under the colonial ruling of Japan instead of the aspect of Buddhism doctrine or faith. Wonhyo was called out from the history and interpreted fit for circumstance of the country and Buddhism of the time, and the aspect of it appeared as a symbol of ‘national hero, reformer, founder of Tong-Bulgyo(通佛敎), military monk, patriotic monk, ideologic founder of Buddhism with combined Seon-kyo(禪敎). It means that Wonhyo reappeared as ‘symbol of pride of Korean national philosophy and culture’ rather than a ‘ancient monk who realized Buddhism truth’ from the time point of modern. Related to this fact, this study tried to explain historical background of Wonhyo rediscovery of modern time considering the relationship of Korea and Japan and intercourse of their Buddhism worlds. This study tried to examination on the background and aspect of Wonhyo rediscovery particularly focusing on Chung Hwang-Jin, Choi Nam-Sun, Cho Meong-Ki, Heo Yeong-Ho. We could read complicated emotions like a kind of resistance to Japan which was appeared as colonization country and seeking for national pride, and longing for Japanese Buddhism world which was rosen as developed Buddhism country at that time etc in other aspect in their Wonhyo understanding. Through this examination, I expect that this study would be an opportunity to recognize that the image of a person called Wonhyo was not fixed but read diversely and recreated by the situation of the time, and further more to throw a question what the meaning of Wonhyo is to us in this contemporary time.
元暁(617-686)は、新羅に限らず東アジア仏教界の中で大きな存在感を持っていた人物であり、彼の『大乗起信論疏』『金剛三昧経論』などが当時の東アジア仏教界において広く読まれたことは周知のとおりである。ところが、元暁は教団形成などを行わず、門徒も形成されなかったため、崇儒抑仏の朝鮮時代を経る過程で、その存在はさほど重要視されなくなった。 しかし、近代になると、日本仏教界との交渉、西洋の宗教との競争といった背景の中で、元暁は再び脚光を浴び始めるが、それは元暁の仏教教理や信仰の側面よりは、日本植民支配下における国家存立・民族独立の主張と結びついていた。つまり元暁は「近代」を起点として「仏教の真里を体得した高僧」と言うより、「韓国民族思想と文化の自負心の象徴」として再登場したのである。 こうした問題意識から、近代における元暁の再認識・表像化、その歴史的背景を、当時の日韓仏教界の交渉をふまえつつ解明しようとした。元暁の近代的表象は、民族の英雄、仏教改革の模範、通仏教の象徴人物、救国僧、禅教統合曹渓宗の宗祖像として現れるが、本稿では、とりわけ、日本留学生の鄭晄震, 崔南善, 趙明基, 許永鎬を中心に、それぞれの元暁再発見の背景と様相について考察を試みた。彼らの元暁理解には、植民統治国家として登場した日本に対する抵抗感と民俗的自負心の模索、一方、先進仏教国として宣揚している当時の日本仏教界に対する憧れなどの感情が複雑に絡み合っていたことが読みとれる。本稿での考察を通して、元暁という人物のイメージが固定されたものではなく、時代の情況に応じて様々な形で再創出されたことを認識する機会になることを期待したい。
식민지 조선의 ‘일본어문학’(1920∼30년대)과 재조일본인 여성 표상 연구 - 조선 간행 일본어잡지 『조선급만주(朝鮮及滿洲)』와『조선공론(朝鮮公論)』을 중심으로 -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28호 2015.06 pp.139-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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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20∼30년대 사회적인 영역에 직업여성으로서 등장하는 재조선일본인 여성에 대한 사회적 담론과 표상을 연구한 것이다. 이를 위해 당시 조선에서 발간되었던 일본어 잡지인 『조선급만주』와 『조선공론』의 기사와 평론, 문학작품을 대상으로 하여 재조일본인 여성의 위상과 인식을 분석하였다. 1920∼30년대 들어서 식민지의 도시화, 근대화,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재조일본인 여성은 경제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공적인 영역에 등장하게 된다. 이들 여성들은 교육을 받았다는 자부심과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사회첨단의 일을 한다는 우월의식을 가졌고 일본어 매체는 이들을 동경과 선망 혹은 호기심의 대상으로 재현하고 있다. 더욱이 재조일본인 여성은 조선 땅에서 식민자로서의 우월의식과 자부심을 부여받으며 식민지 조선의 여성과의 차별화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일본어 잡지에서 보는 한 근대화된 공적 영역에서 노동하는 여성은 가부장적인 가족질서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희화화되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가정을 벗어난 여성들은 성적 문란함, 나태함, 부도덕이라는 지식인 남성들의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이는 결국 직업여성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확산시키는 결과로 이용되었다. 또한 식민지 조선 여성에 대해서는 우월의식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식민지 본국의 여성과는 구별되는 존재로 인식되어지고 있다. 재조일본인 여성은 계층, 젠더, 지역(내지/외지), 민족에 의해 초래되는 식민지주의의 다양한 측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This research examines social discussion and representation of Japanese female settlers in Colonial Korea in 1920-1930. More specifically, the research analyzes the status and perception of Japanese female settlers by the articles, reviews, and literatures from Chosungupmansyu and Chosunkongron, the two Japanese magazines published in Korea in this era. By 1920-1930, Japanese female settlers appeared as public figures by taking charge of financial role in the flow of Colonial Korea’s Urbanization, Modernization, and Industrialization. These women had thought highly of themselves by thinking that they were educated and thus having advanced jobs only women can work for. Japanese magazine also reproduced the images of these women as their subject of admiration and curiosity. Moreover, Japanese female settlers were differentiated from Colonial Korean women because they were given a sense of superiority as the people who had a Colonial power. However, these Japanese women working in the publically modernized field were considered as the ones standing against patriarchal system and they were often criticized because of this perception. The women out of their Home were never freed from the intellectual men’s recognition of being sexually disordered, indolent, and vicious women and this led to the negative impression of these Japanese female settlers. Also, they had a sense of superiority to Colonial Korean women but were discriminated against women living in Japan. In other words, Japanese female settlers in Colonial Korea represent various aspects of colonization brought by social status, gender, region, and nationality.
本稿は、1920∼30年代朝鮮の社会的な領域において登場した日本人の職業女性に対する社会的言説と表象を考察したものである。当時朝鮮にて発行された日本語雑誌『朝鮮及満州』や『朝鮮公論』の記事や文学作品を研究対象にし、在朝日本人女性の位相の変化や社会的な認識を分析した。1920年代に入って、植民地都市は近代化また産業化が進み、在朝日本人女性は公的な領域に進出して経済的な役割を担うことになる。彼女らは教育を受けたという自負心や女性のみができる仕事を担っている優越意識を持っており、当時の日本語メディアは彼女らを憧れと好奇心の対象として再現している。また、在朝日本人女性は、植民地朝鮮の女性に対して相対化され社会的地位において優位に立つ。しかし、近代化された公的な空間で労働している女性は家父長的な家族秩序に背くものであると批判される。家庭から離れた女性は、性的な放蕩また、不道德な人間であるという認識から離れることが出来なかったのである。従って、当時の日本語記事は、彼女らに対する否定的な認識や嫌悪感を拡散する結果につながっている。また、在朝日本人女性は、植民地朝鮮の女性に対しては優越意識を保つことに対し、植民地本国の内地女性には差別され「墮落」した人として認識される。在朝日本人女性は、階層、ジェンダ-、民族、地域(内地または外地)によって異る植民地主義の多様な側面が活写されたものであるといえよう。
‘추격하는 여신’ 전승의 계보 - 이자나미・히나가히메・기요히메를 중심으로 -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28호 2015.06 pp.163-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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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화의 대지모신(大地母神) 이자나미는 태초에 일본의 국토와 신들을 낳은 후, 불의 신을 낳고 죽어서 요미노쿠니(黃泉國)로 떠난 여신이다. 죽은 아내를 되찾으려고 남편 이자나기가 요미노쿠니로 찾아가는 대목까지는 그리스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자나기가 금기를 파기하고 여신의 추한 사체를 목격하는 순간 신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자신에게 치욕을 주고 도망치는 남편을 추격하는 여신의 모습은, 남성 중심의 묘사가 두드러지는 텍스트 안에서도 강렬하고 위력적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분노하는 여신의 추격전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유사한 장면이 다른 전승에서 재현되고 있으며, 이 추격하는 여신이나 여성이 모두 뱀과 관련이 깊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죽은 이자나미의 사체에서는 여덟 가지 뇌신(雷神)이 출현하는데, 일본의 신화나 설화 속에서 뇌신은 대부분 뱀으로 인식된다는 점은 이 여신의 사신(蛇神)적 속성을 뒷받침해준다. 또한 스이닌 천황의 황자 호무치와케노미코가 이즈모에 갔을 때 하룻밤 동침했던 히나가히메의 정체 역시 뱀이다. 이즈모 평야를 흐르는 히노카와라는 강의 여신으로 간주되는 히나가히메 역시 자신의 본 모습을 훔쳐보고 도망치는 황자를 추격한다. 그리고 이 추격전은 시대를 좀 더 내려가면, 잘생긴 승려를 연모해 사랑을 갈구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여자가 거대한 독사로 변하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일명 도조지(道成寺) 설화로 저명한 이 불교 설화에서, 뱀으로 표상되는 여성의 정념(情念)은 구제의 대상으로 다루어진다. 그러나 이 설화의 근저에도 약속을 파기한 남자를 뱀으로 변해 추격하는 여신 전승의 잔영은 뚜렷하다. 이처럼 반복되는 추격의 전승에 있어서, 뱀이 상징하는 것은 여신이 지닌 원초적 생명력이라 할 수 있다. 그 가공되지 않은 맹목적이고 거친 힘은 생명의 탄생과 풍요의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자칫 잘못 다루면 죽음과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는 양면성을 지닌다. 이자나기가 추격해오는 이자나미를 바위로 가로막은 것은 부부의 영원한 이별, 곧 삶과 죽음, 질서와 혼돈, 이성과 원초적 본능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세계의 분리를 의미한다. 약속과 금기의 파기로 인한 여신들의 추격은 결국 저지당하지만, 그녀들은 늘 바위 하나 저편의 지척에 있으면서 질긴 생명력으로 모습을 바꾸어 출현하는 것이다.
In Japanese mythology, the goddess Earthmother Izanami, who gave birth to the land and all the gods in the beginning, went to Yominokuni after dying and giving birth to the god of fire. Just like myth of Orpheus and Eurydice, Izanami's husband, Inazaki, journeys to Yominokuni to take his dead wife back.. However, the moment Inazaki breaks the taboo and witnesses Izanami's hideous corpse, the myth diverges completely. The image of a goddess chasing her husband who ran away and humiliated her is powerful and impressionable in a text that revolves around male-dominated descriptions. This kind of chase of rage does not end once, but can be seen in other traditions as well. Further, it is notable that the goddess or woman in pursuit is closely related to snakes. The god of thunder is often recognized as snakes, and the fact that eight gods of thunder arise from Izanami’s corpse supports Izanami’s snake-like attributes. In addition, the true nature of Hinagahime, who slept with Emperor Suin’s son, prince Homuchiwakenomiko, is a snake. Hinagahime, a goddess of Hinokawa River that flows through Izumo plains, also chases after a fleeing prince who stole a look at her. Older tales of pursuit reveal a woman who turns into a giant serpent in grief after failing to win the heart of a handsome monk. In this famous Buddhist fable, also called "the Dosungsa tale", the snake that represents a women's passion is treated as an object of relief. However, goddesses that transform into snakes to chase after men who break their promises is lucidly seen at the base of this story. Thus, we can state that the serpent symbolizes the fundamental life force a goddess has. That raw, blind power can be the source of life’s creation and richness, but if wielded improperly, can spawn death and disaster. When Inazaki impeded Izanami’s hunt with a boulder, it signified the separation of the two incompatible worlds of life and death, order and chaos, and reason and instinct. The chases that stemmed from broken promises and taboos are eventually stopped, but these goddesses will always be near the other side of the rock with strongvitality.
日本列島を生み、森羅万象の神々を生んだイザナミは日本神話の大地母神といえる。火の神産んで亡くなったイザナミを連れ戻すために夫のイザナギが黃泉國へ訪ねて行くというモティーフはギリシャのオルフェウス神話と異ならない。しかし、イザナギが見るなという禁忌を破り女神の醜い死体を目撃する瞬間、神話はまったく別の方向に展開していく。自分に恥をかかせ逃げ出す夫を追いかける女神の姿は、男性を中心としたテキストの中でも強烈で威力的である。 さて、夫を「追いかける女神」という場面は黃泉國神話に限らず他の伝承においても再現されており、その追いかける女性はみんな蛇と深く関わっているということは注目に値する。死んだイザナミの死体からは八雷神ができているが、日本の神話や説話における雷神はほとんど蛇体とされていることはイザナミの蛇神たる属性を裏付ける。また、垂仁天皇の皇子本牟都和気は出雲国に遣わされ肥長比売と婚姻したが、垣間見ると彼女が蛇体であったため、畏れて逃げる。出雲平野を流れる肥河の精霊とされる肥長比売が皇子を必死に追いかける場面は前述のイザナミの姿とよく似ている。この追擊戰は時代をさらに下っていくと、思いを寄せた僧に裏切られた女性が激怒のあまり大蛇に変化し道成寺で鐘ごと僧を焼き殺し、蛇道に落ちた二人は法華經書写の靈驗により救われるという仏教説話に展開される。道成寺説話として著名なこの説話において蛇は女性の情念の表象であり、救済の対象として扱われる。しかし、この説話の根底にも約束を破棄した夫を蛇となって追いかける女神の面影ははっきりと残っている。 このように繰り返される追擊の伝承において、蛇の象徴しているところは女神の原初的な生命力といえる。その加工されていない盲目的で荒々しい力は生命の誕生や豊穣の源泉ともなるが、ともすると死や災いを招くことにもなりかねないという両面性をもっている。イザナキが追いかけてくるイザナミを千引石で防いだのは夫婦の永遠の別れ、すなわちこの世とあの世、秩序と混沌、理性と原初的な本能といった両立できない二つの世界の分離を意味する。約束や禁忌の破棄による女神たちの追擊はとうとう阻まれてしまうが、彼女たちはいつも岩の向こうの一歩さきに構えていて、根強い生命力で甦えてくるのである。
일본근세문학에 나타난 불교사상과 그 주제적 의미 - 사이카쿠의 『호색일대남(好色一代男)』을 중심으로 -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28호 2015.06 pp.189-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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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위층의 거상(巨商)이 아니면 결코 지속될 수 없는 과장된 호색행위는 부세에서는 불가능한 현실이지만 치부와 금전이 생의 궁극적 목표가 될 수밖에 없는 상인들에게는 유일한 탈세속적 비원(悲願)이기도 했다. 호색담의 첫 묘사에서 주인공의 탈세속적 출생의 이력이 해학적으로 묘사되고 동시에 종말적 삶의 양상이 제시되고 있는 바, 이는 현실세계인 부세가 풍요와 향락의 세속공간으로 채워진다고 하더라도 그렇기에 더욱 유한성과 허망성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부세는 풍요와 향락이 동반될수록 세속에의 애착과 비례해 근세인들에게 표리일체적 우세(憂世)로 다가오고 있음이 『호색일대남』의 작품세계에서 표명되고 있다. 근세기 동아시아적 전개양상의 하나로 지적되는 문학의 대중화와 종교 세속화의 흐름은 근세일본문학의 내실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근세기 이전의 불교인식이 투영된 우세적 세계관이 후퇴하고 새롭게 등장한 부세(浮世)적 세계관이 등장해 근세기 이후의 문학의 내실을 변화시켰다는 시각은 도식적이고 일면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천적 삶 안에서 불교적 인식을 직관화하는 근세기 일본인들의 서민불교적 심성이 작가에게 가장 명확한 형태로 내재되어 있음은 『호색일대남』의 작품세계 고찰에서 확인할 수 있다.
Wherever the reality is that the impossible is a big extreme prurient behavior are not rich, but the goal of the life was money for merchants, the only entertainment. Prurient stories described the beginning of the story of the main character is portrayed as a humorous story of a birth at the same time life to the end of the image have been put forward. More ephemeral nature and the area of the sudden death to reality say that they are enjoying fertility and even if it couldn't get away. Fertility and attachment to secular pleasures are full of, the work in this world of human beings at the time was a terrible place to ensure that we, with coming up in the world. East Asia a modern times with afterwords as feature of the secularization has large and ensure internal stability of Japanese religion and popularization of literature has changed. But modern times before Buddhist view of the world are retreating, the optimistic view of the world changed meant that the contents of characters in literature there can be a partial judgment at. Buddhism in the life for a writer a practical awareness about the intuitive simplicity of the Japanese, who have a perception that the One can be found in the works(Koushokuichidaiotoko).
『好色一代男』巻1-1は、主人公世之介の誕生と7歳から始まる主人公の早熟な性意識を主な話題としているが、特に世之介の出生を扱った主な話題の末尾で主人公の好色な人生の終末的描写をしていることは意味深長である。誕生-7歳-60歳の軌跡をこの作品の最初の章で提示し、「心から自然と湧き出る愛に悩み、60歳まで愛をかわした女の数が3742名、男色の相手が725名だったことは、彼の日記を見れば分かる」という言説は、正確な数字表記と写実的な世相描写が本領の西鶴の逆説的反語法だと言えるだろう。実際、世之介の好色行為が始まってから60歳に至る40余年の期間に4500に近い好色行為の相手が存在するということは、現実的・物理的に不可能に近い数値であり、誇張した表現を通して人間の欲望の極大点を諧謔的・反語法的に提示しているのである。最上位層の豪商でなければ決して続けられない誇張された好色行為は、浮世では不可能な現実であるが、蓄財と金銭が人生の究極的目標となるほかない商人には、唯一の脱世俗的な悲願でもあった。好色談の最初の描写で主人公の脱世俗的な出生の履歴が諧謔的に描写され、同時に終末的人生の様相が提示されていること、これは現実世界である浮世が豊饒と享楽の世俗空間に満たされたとしても、むしろそうであることでいっそう有限性と虚妄性の領域から逃れられなくなるのである。浮世は豊饒と享楽が伴うほど、世俗への愛着と比例して近世人に表裏一体の憂世として迫ってくることが表明されているわけである。近世期の東アジア的展開様相の1つとして指摘される文学の大衆化と宗教の世俗化の流れは、近世日本文学の内実を画期的に変化させたことは周知の事実である。しかし、近世時期以前の仏教認識が投影された憂世的世界観が後退し、新たに浮世的世界観が登場して近世時期以後の文学の内容を変化させたという視角は、図式的で一面的な視角だと言える。実践的人生の中で仏教的認識を直観化する近世時期の日本人の庶民仏教的心性が、作家にとって最も明確な形で内在されていることは、以上の『好色一代男』の作品世界の考察で確認でき、そのような様相は西鶴の他の作品でも多様な形で現れているが、それに関する内容は今後の課題としたい。
근대 일본인 해외이주의 궤적과 신도(神道)의 역할 - ‘제국의 확장’과 ‘국가정체성 강화’ 간의 괴리를 중심으로 -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28호 2015.06 pp.219-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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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 일본인이 이주한 해외-조선・대만・관동주・남양군도・만주・중화민국・하와이 등-에는 어김없이 신사(神社)가 건립되었다. “일본인이 가는 곳엔 신사(神社) 있고, 신사(神社) 있는 곳에 일본인이 있다”라는 구절이 있을 만큼 일본인의 해외이주에서 일찍이 종교의 효능을 강조한 의견이 제기되고 수많은 신사가 건립되었는데, 신도(神道)가 일본인의 의식구조를 지배하는 ‘무종교(無宗敎)의 종교(宗敎)’로 일본인의 해외이주에 필연적으로 따라 나간 현실에 비하면 ‘신사’와 ‘신도’가 일본인 이민자 커뮤니티나 해당 이주지역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한 이유를 규명하는 연구는 상대적으로 소략한 듯하다. 본고는 일본인들의 삶에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신도와 신사가 일본인 해외이민의 궤적 상에서 담당한 역할에 주목하고자 한다. 단순히 신사가 건립된 사실만이 아니라, 근대 국민국가수립 과정에서 천황제 하의 국체관념에 기반을 둔 국가정체성을 일본인들에게 주입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던 신도가 해외 이민지에서 어떻게 자리매김 되었는지를 검토하려는 것이다. 일본제국의 확장과 더불어 일본인들의 해외이주도 같은 궤적으로 팽창했다. 이러한 해외이주 일본인들의 정체성 유지와 커뮤니티 내에서의 단결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은 이주하기 전 일본 내지에서부터 그들의 일상 속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신도였다. 신도는 근대 이전의 자연종교로부터 근대국민국가 형성기에 천황제 하의 국가정체성을 정립하는 수단으로서 ‘국가신도화’ 했고, 해외이주 일본인들은 이러한 국가신도 이데올로기를 이주지에서도 유지했다. 따라서 이주자들이 한편으로는 제국의 확장과 함께 국민국가의 경계를 뛰어 넘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국가의 구성원 즉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국가신도 이데올로기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 사이에 괴리가 존재한다. 이는 곧 일본제국이 품고 있었던 파탄의 씨앗 가운데 하나의 사례이자, 해외신도가 이주지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근본적인 원인이라 하겠다.
This Study aims to the role of Shinto and Shinto shrine that followed like a shadow that plays in the trajectory of Japanese emigration. In this paper, I pointed out not just the fact that a Shinto shrine erected, but a Shinto acted as a means of injecting a national identity based on the notion that national polity under the Imperial system to Japanese in the process of establishing the modern nation-state was how to positioned in overseas emigration areas. With the expansion of the Japanese Empire, Japanese’s emigration was also expanded in the same trajectory. In keeping Japanese emigrants’ identity and their uniting in the community, a Shinto followed like a shadow from Japan to settlement played a big role. A Shinto became a ‘National Shinto' as a means of founding a national identity under the Imperial system in the process of establishing the modern nation-state from natural religion of premodern and Japanese emigrants remained faithful to a ‘National Shinto' ideology in overseas emigration areas. Therefore, there was a gap between on the one hand Japanese emigrants beyond the boundaries of the nation-state with the expansion of the empire, but on the other they keep a ‘National Shinto' ideology to reinforce its identity as a nation. This fact was one of the examples that Japanese Empire was seeded in collapse, the root cause of Overseas Shinto’s not transplanting in emigration areas.
19世紀末日本人が移住した海外-朝鮮・台湾・関東州・南洋諸島・満州・中華民国・ハワイなど-には間違いなく神社が建立された。“日本人の行くところ神社あり,神社の在り処日本人いゐ”と文句があるほど、日本人の海外移住で、かつての宗教の効能を強調した意見が提起されて数多くの神社が建立されたが、この分野を扱う様々な領域の研究状況に照らしてみると、本来神道は無視取り上げられたようだ。神道が日本人の意識構造を支配する「無宗教の宗教」に日本人の海外移住に必然的に応じて出て行った現実に比べれば、「神社」と「神道」が日本人移民コミュニティやその移住地域社会でどのような役割をしたかについての研究は、比較的疏略だということだ。 本稿は、日本人の生活にまるで影のように追いかけて通った神道と神社が日本人の海外移民の軌跡上で担当した役割に注目したい。 単に神社が建立されたという事実だけではなく、近代国民国家樹立の過程で、天皇制下の国体観念に基づいて国家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日本人に注入するための手段として作用していた信徒が、海外移民地でどのように位置づけているかを確認するものである。 日本帝国の拡張に加え、日本人の海外移住も同じ軌跡で膨張した。これらの海外移住の日本人としてのアイデンティティとコミュニティ内での団結に大きな役割を果たしていたのは、マイグレーションする前、日本內地から、彼らの日常の中に影のように追いかけて通った信徒であった。 信徒は、近代以前の自然宗教から近代国民国家の形成期に天皇制下の国家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確立するための手段として、「国家神道化」し、海外移住日本人は、これらの国家神道イデオロギーを移行先でも維持した。したがって、移住者たちが、「一方では帝国の拡大に伴い、国民国家の境界を越え超えも」と、「一方では国民国家のメンバー、すなわち国民として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強化する国家神道イデオロギーを維持していた」との間に乖離が存在する。これは日本帝国が抱いていた破綻の種子の一つの事例であり、海外信徒が移住地で根づいていない根本的な原因とい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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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 성장기를 거치면서 국가에 매몰된 국민이 등장하고 국내적 평화와 국민통합이라는 전후 민주주의적 요소가 일본 사회에 강하게 뿌리내렸다. 그리고 과거의 저항운동이 낳은 다양한 성과는 ‘평화와 번영’이란 시민사회(≒국가) 속에 흡수되어버렸다. 그 결과 일본 내에서는 체제내로의 구조적 전향이 시민사회란 틀 속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운동론으로써의 전향론은 물러가고 개인의 사상과 행동의 일치성을 논하는 삶의 방식으로써의 전향론이 대두한다. ‘평화와 번영’이란 시민사회의 흡인력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로써의 운동이 가진 추상성과 엘리트주의를 극복하고 민중들의 삶과 생활에 토대를 둔 사상과 운동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사상의 주체인 개인의 내면과 현상적 삶이 일치하는 곳에서 발생한다. 자신들의 전쟁협력에 대한 자기 성찰적 입장에서 전개된 전향론은 일본이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으킨 여러 행위에 대한 책임문제와 관련된 논의로 이어질 수 있는 논리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향을 논하는 주체가 전후세대로 이동하고 그들의 시선이 일본사회의 내부적인 문제와 연결되면서 전향론에서 전쟁협력에 대한 책임추궁과 식민지 지배책임은 탈색되었다.
Throughout the height growth appeared to the people buried in the country and domestic peace and national unity of the democratic front and rear elements are made strongly rooted in Japanese society. Past performance and various resistance movements are born became absorbed into the Iranian Civil Society (≒ country) 'peace and prosperity'. As a result, Japan's forward-looking within the structural into the system took place in a civil society is wrong. Then turning back to movements theory go forward as a theory of individual thought and way of life to discuss the consistency of action emerged. You need to in order to get around the attraction of 'peace and prosperity' is civil society that has overcome the abstractness and elitist ideology as the movement of ideas and movements and build a foundation based on the life and living of the people. This arises from the scope of the subject of an individual's life that matches the inner surface of the phenomenal place. Conversion theory developed in his reflexive stance on their war cooperation had a logical relationship that could lead to a discussion about the different actions related to liability issues caused in the course of waging war Japan. But the principal to discuss the prospective move to the post-war generation and their eyes were fading colonial rule is accountability and responsibility for the war cooperation in the forward-looking Ron Coupled with the internal problems of the Japanese society.
高度成長期を経て国家に埋葬された国民が登場し、国内的平和と国民統合という戦後民主主義的要素が日本社会に強く根ざしている。 そして過去の抵抗運動が生んださまざまな成果は‘平和と繁栄’という市民社会(≒国家)の中に吸収されてしまった。その結果、日本内では体制内への構造的転向が市民社会という枠組みの中で起きた。すると、運動論としての転向論は退いて個人の思想と行動の一致性について議論する生き方としての転向論が台頭する。 '平和と繁栄'という市民社会の吸引力を勝ち抜くためには、イデオロギーとしての運動が持った抽象性とエリート主義を克服し、民衆の暮らしと生活に基づいた思想と運動を構築する必要がある。これは、思想の主体である個人の内面と生々しい生活が一致する所で発生する 自分たちの戦争協力に対する自己省察的な立場で展開された転向論は、日本が戦争を遂行する過程で起こした様々な行為に対する責任問題と関連した議論につながる論理的関連性を持っていた。しかし、転向を論じる主体が戦後世代に移り、彼らの視線が日本社会の内部的な問題と絡まりつつある中で、転向論から戦争協力に対する責任追及と植民地支配に関する責任は脱色さ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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