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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신이 된 조선의 단군 - 옥산신사의 제신이 단군이라는 인식의 재고 -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26호 2014.06 p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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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시마현 히오키시의 미야마에 있는 옥산신사는 임란 때 끌려간 조선인들에 의해 세워진 일본식 신사이다. 그곳이 우리들에게 유명해진 것은 제신이 단군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학문적 검증 없이 오늘날의 현상만 보고 단군은 신사의 건립 때부터 모셔졌던 것으로 오해했다. 그러나 그와 관련된 문헌 그리고 타 지역의 조선 도공마을에서 모셔지는 신앙과의 비교를 통해 종합적으로 검토해본 결과 최초로 모셔진 신은 단군이 아니라 고려라는 이름을 가진 신이었다. 그 때문에 옥산신사는 고려신사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점은 타 지역의 조선도공마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이 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타 지역과는 달리 신사의 제신이 고려신에서 단군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이 지역의 지식인들이 조선에서 수입된 『동국통감』에 기록된 단군신화에 대한 지식을 수용하게 됨에 따라서 미야마의 조선인들이 모시는 신이 기자라는 견해가 나왔고, 그것이 기반이 되어 옥산신사의 제신은 단군일 것이라는 추정이 나왔다. 옥산신사의 「유래기」에서 보듯이 그것을 다시 조선인 마을사람들이 적극 수용함으로써 단군으로 구체화시켰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단군이 옥산신사의 제신이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단군을 지우고 일본의 신으로 탈바꿈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This article is about a god of Oksan Shrine which is located in Hioki city, Kagoshima Prefecture. This shrine was built by the Joseon people who were captive during the Imjin War. The reason of the fame to the Korean society was the Dangun that enshrined in the Oksan Shrine. Most of people believed that Dagun were enshrined from the built. But it is a misunderstanding of the contemporary phenomenon without scientific analysis. As a result of the comprehensive analysis from the historical documents and other Joseon captive village, the original goddess name of Oksan Shrine was Koryo. It’s why Oksan shrine also called as Koryo shrine. This was similar to the other Joseon pottery village. But there were transition in mid-nineteen century. The goddess were changed to Dangun. The local intellectual embraced the Dangun myth from the Donguktongam(東國通鑑) and Miyama’s Joseon people starts to worshipped the Gija(箕子) goddess. It was also embraced by the Joseon village and become more embodied by the Joseon people. There were a lot of time and process went through that Dangun became a goddess of Oksan Sh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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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년천궁의 신화는 천황은 신성불가침한 현인신이라는 신화 혹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하는 신국 일본이라는 국체신화와 마찬가지로 ‘만들어진 전통’으로서의 현대의 정치신화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현대일본사회에는 이와 같은 이세신궁과 식년천궁에 대해 “이세신궁이야말로 일본 천황교의 본산” 이라는 비판이라든가 혹은 “이제는 이세신궁 식년천궁의 신화적 주박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는 인식과 더불어,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국가에 있어 식년천궁은 원점으로 회귀하여 시대를 쇄신하는 중심적 의례이다. 이는 천황이 국민을 대표하여 행하는 데에 의미가 있다. 국민의 상징인 천황에게 가장 중요한 의례는 국민에게도 중요하다. 때문에 국민적 봉찬이 요청되는 것”이라는 주장도 온존하고 있다. 어쨌거나 오늘날 신년이 되면 수상 등 정치인들의 신궁 참배가 하나의 관례로서 정착되어 있다. 아베 신조 현총리의 경우는 2013년 1월 4일, 2014년 1월 6일에 이세신궁을 참배했다. 근대일본에서 신궁이 야스쿠니신사와 더불어 국가신도의 기축으로 기능했으며 종교학자 시마조노 스스무에 의하면, 2차대전 이후 국가신도는 설령 ‘해체’되었을망정 결코 소멸된 것이 아니다. 전후의 국가신도는 두 가지 명확한 자리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황실제사이며, 또 하나는 신사본청 등 민간단체를 담지자로 하는 천황숭경운동이다. 예컨대 신사본청이 1980년에 제정한 ‘신사본청 헌장’(神社本廳憲章)은 일본 역대 천황의 번영을 기원(제1조)하고 이세신궁을 본종으로 받들고 성심성의껏 봉찬(제2조)하면서 경신존황의 가르침을 진작(제3조)한다는 취지를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신궁과 천황 밑에 전국 신사들을 통합시켜야 한다는 큰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런 천황숭경과 신궁숭경의 양상은 메이지유신 이후에 형성된 국가신도적 신도를 표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사본청의 활동에 참여하는 다양한 정치, 종교, 문화단체가 있으며 국민들 사이에도 광범위하게 천황숭경적 국체론적 사고방식 및 심정이 존재한다. 이런 것들과 함께 국가신도는 전후에도 계속 존속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島薗進, 前揭書, pp.198-199 및 pp.212-213. 이와 관련하여 국내에도 “국가신도는 이세신궁을 정점으로 하는 체계와 야스쿠니 신사를 축으로 하는 체계로 구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인식이 있기는 하지만, 관심은 주로 야스쿠니 신사에만 집중되어 있다. 그 국가신도적 일본의 식민주의와 전쟁에 대한 교통정리가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건대, 이런 관례는 결코 ‘전통’에 대한 존숭만으로 다 수렴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니, 고유한 ‘전통’으로서의 신궁이라 해도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은 에릭 홉스봄의 표현을 빌자면 어디까지나 근대기에 새롭게 ‘만들어진 전통’일 뿐이다. 심상치 않은 열의와 관심하에 제62회 식년천궁이 거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이 시점에서, 야스쿠니 신사의 국영화 추진운동과 더불어 일각에서 지속적으로 신궁의 국영화가 언급되고 있는 현대일본의 탈전후 상황에 대해 주시할 필요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여진다.
Every new year in contemporary Japan, they almost make it a rule for the political leaders to visit Ise Shrine(伊勢神宮), which is worshiping the Sun Goddess Amaterasu(天照大神) as an ancestral deity of the Japanese Imperial Family. However we Koreans don't pay any attention to Ise Shrine, although it was one of the most important axes in State Shinto(國家神道) with Yasukuni Shrine(靖國神社). The 62th Shikinen-Sengu(式年遷宮) of Ise Shrine, a rebuilding ceremony once in every 20 years, was held last year. Then, the purpose of this essay is to examine the political, ideological meaning of Ise Shrine and Shikinen-Sengu, especially from the standpoint of "the new myth making in modern Japan", relating it to the emperor system. In doing so, I will maintain that the intimate linkage between Ise Shrine and emperor made in the Temmu(天武)-Jito(持統) era about the late 7th century has been newly reinvented in modern Japan together with making the new modern myth, and that Shikinen-Sengu was(and yet is) strongly connected with the emperor in the main ceremonies, the notion of "Eternal Now"(中今), and above all the ideology of "reigned since time immemorial"(万世一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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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日淸明’의 뜻은, 바람이 불어서 독도 주변의 해무가 걷힌 맑은 날이라는 조건이 충족되면 언제든지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인다는 뜻이다. 그래서 ‘風日淸明’은 기상학적인 상식을 바탕으로 기록한 言明임을 입증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논의한다면 ‘風日淸明’은 독도 주변에 ‘바람이 불어야’ 하고 동시에 울릉도 및 독도 해역에 ‘날씨가 맑아야’ 한다는 두 조건을 충족시켜야 된다는 말이다. 아무리 울릉도 및 독도 해역이 ‘(날씨가) 맑아도’, ‘해무가 있으면’ 울릉도에서 독도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해무를 걷히게 하기 위해서는 ‘바람이 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風日淸明’은 ‘바람 불어/불며/부는 날’ + ‘맑으면’이라는 두 조건을 충족시키는 기상학적 함의를 가진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분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연구에서는 아쉽게도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이는 조건이 ‘바람 부는 날 맑으면’인지, ‘언제든지’인지, ‘가을 철(9월-11월)에만’인지 진술이 혼재하거나 애매함을 드러내고 있다. 홍성근 외 『독도! 울릉도에서 보인다. 그래서 동북아역사재단이나 외무부, 그리고 교육부 등에서 ‘風日淸明’의 해석을 공식적인 문건에 기재할 경우 보다 세심한 주의할 필요하다고 본다.
This paper mainly analyzed ‘Pung Il Chong Myong(風日淸明)’(Sunny day with winds) written in old Korean history and geographic books such as 『Jiriji of Koryesa 高麗史 地理志』(Geographical Appendix to the History of Korea, 1451: Munjong 1)・『Jiriji of Sejong Sillok 世宗實錄 地理志』(Geographical Appendix to the Annals of of King Sejong, 1454: Danjong 2)・『Sinjeung Dongguk Yeoji Seungnam 新增東國輿地勝覽』 (Revised Geographical Survey of Korea, 1530: Joongjong 25) as weather conditions to view Dokdo from Ulleungdo. So far, almost all of the interpretations of these words were simply “if it's sunny weather”. Following conclusion could be drawn from discussing all the elements of visible conditions of Dokdo from Ulleungdo: ‘風日淸明’ means that Dokdo could be seen anytime from Ulleungdo with two weather conditions satisfied. First, winds must be blowing, consequently clear sea fog appearing year-round off Dokdo. Second, it has to be clear and sunny. Therefore, ‘風日淸明’ is a assertion written on the basis of meteorological knowledge. In a more detailed discussion, ‘風日淸明’ means two weather conditions satisfied at the same time. It also means that Dokdo could not be seen anytime from Ulleungdo with only one condition met. Even though it is clear and sunny, Dokdo could not be seen because of the sea fog around the islets. Thus, ‘風日淸明’ means that Dokdo could be seen anytime from Ulleungdo with two weather conditions satisfied simultaneously. Sunny weather with sweeping sea fog winds would make it possible to view Dokdo from UlleungdoIn spite of these clear meteorological arguments, however, diverse and vague expressions such as ‘windy day with sunny weather’ or ‘always any time’, ‘fall season (September-November) only’ were mixed in many domestic studies on Dokdo. So more careful attention is required when the interpretation of ‘風日淸明’ is written in the official documents by the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and the Ministry of Education,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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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한 뒤에 일방적으로 기록한 사행록보다는 현장에서 쌍방이 마주앉아 기록한 필담이 원래의 기록 그대로를 보여줄 가능성이 많다. 그렇지만 조선측 사행원들이 귀국한 뒤에 필담집이 출판되기 때문에, 조선 문인들은 필담초(筆談草)가 그대로 출판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신묘사행(1711)의 정사 조태억과 에도막부의 시강(侍講)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의 필담은 조선과 일본에서 출판된 유일한 필담인데, 서로 다른 부분이 많다. 다른 필담집들이 통신사 사행 직후에 상업적으로 출판된 것과 달리 80년 뒤에야 정치적으로 출판되었고, 전집으로 다시 출판되었다. 스즈키 기미아츠[鈴木公溫]의 서문이 덧붙어 1789년 교토의 서점 하치몬지야 쇼베에[八文字屋正兵衛]에서 간행된 『坐間筆語 附江關筆談 全』은 역지빙례(易地聘禮)를 추진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느라고 출판한 것이다. 통신사 사행원들과 일본 지식인들 사이의 필담은 민간외교의 한 형태였으므로, 서로 예의를 지키면서 진행되었다. 특히 일본 지식인 쪽에서는 필담을 얻어내기 위해 공손했지만, 출판할 때에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위상을 돋보이기 위해 공격적인 서문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내용을 변개한 것은 아니지만, 이중적인 태도는 분명하다. 조선 사신에 대한 일본 문사의 양면성에 대해서는 일찍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과연 뿌리 깊은 부정적 조선관에 기인한 것인지, 일본 국내 독자들에게 자신들을 내세우기 위한 것인지, 다양한 자료를 통한 분석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본 지식인들만 현장의 기록을 변개한 것은 아니다. 무인 이지항이 북해도에 표류하여 마츠마에에서 공술한 기록과 귀국한 뒤에 동래에서 공술한 기록을 비교해보면, 달라진 부분이 상당히 많다. 다르게 기록된 부분이 이지항이 망각한 것인지, 은휘한 것인지, 하나의 자료만 가지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한일 관계를 연구할 때에 관련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해야 함은 분명하다. 앞으로 200여 종의 통신사 필담창화집을 모두 분석해보면 필담의 내용이 얼마나 변개되었는지, 마주앉아 필담하는 태도와 돌아서서 서문을 지어 출판하는 태도가 얼마나 이중적이었는지 종합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조선측의 표류기에도 이중성이 나타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In the premodern era, Korean and Japanese intellectuals mostly left records when they met, namely in the forms of travel journals, written conversation and Chinese poem exchanges. Travel journals were a one-side account of what happened written by Joseon envoys upon their return to their homeland. Written conversations and Chinese poem exchanges were records exchanged between both parties, and mainly edited and published by the Japanese. Because publishing was time-consuming work which involved editing rough copies of written conversations and Chinese poem exchanges and engravings, Korean intellectuals returned to their country without verifying the printed versions. Therefore, there were possibilities that genuine records of written conversations and Chinese poem exchanges were modified to suit the intentions of the Japanese editors. Records of written conversations between Ji-hang Lee and a Japanese government official when Lee was washed ashore on Hokkaido were partially altered in a testimony presented to Dongnae officials after Lee returned. This could be considered as negligence. Jwagan Pileo by Hakuseki Arai, published with modifications 80 years later, was used to undermine the role of the Korean delegation. The editor of Gyedan Angmyeong, which captured a respectful exchange of written conversations in 1763, published the document with an aggressive preface even before the Korean delegation returned to Joseon. The difference between actual written conversations that took place on-site and their printed versions cannot be easily dismissed as fabrication or distortion. However, there is need to study the distance between the conversation by writing it and its editing and publishing. In addition, when studying historical documents related to Korea-Japan relations, it is necessary to examine their authenticity.
前近代に韓国と日本の知識人が会うときには殆ど記録を残した。この記録は紀行文、筆談、漢詩唱和の形態となっている。紀行文は帰国の後に一方的に記録したものであり、筆談と漢詩唱和は双方が同一の場で行き交わした記録を主に日本側で編集し出版したものである。筆談草や唱和草を編集し板刻を経て出版されるまで時間がかかるため、韓国の知識人たちは筆談や漢詩唱和の出版本を確認できないまま帰国した。従って、筆談と漢詩唱和の生々しい現場の記録が日本側編集者の意図により改変される可能性がある。イ・ジハン(李志恒)が北海道に漂流した際、日本人の官僚と交わした筆談は、彼が戻ってきて東萊の官員に陳述した証言では部分的に改変されていたが、これは不注意によることもあり得る。新井白石の「坐間筆語」は八十年が経った後に修正を経て出版されたが、これは韓国使節団(通信使)の役割を貶すことに利用された。1763年になされた丁重な筆談唱酬の現場が込められている「雞壇嚶鳴」は、通信使が朝鮮に戻る前に攻撃的な序文がついたまま出版された。実際に現場でなされた筆談と出版されたバージョンの差を嘘や歪曲であると容易く断定することは出来ない。しかし、筆談とその編集・出版の間の距離については研究する必要がする。しかも、韓日関係と関連した資料を研究する際には、それらの資料の真実性について綿密に検討すべきである。
미토학(水戶學)을 둘러싼 근대성 담론 - 비토 마사히데의 「미토학의 특질」 -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26호 2014.06 pp.99-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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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모토 마사시(辻本雅史)의 후기미토학의 민중관과 교화의 구상」이라는 제하에 기술된 미토학의 특징은 앞서 언급한 중둥학교 참고서나 키리하라의 개설과 거의 상통한다. 내우외환의 위기를 종교적인 정책으로 타개하려했다는 구상, 하지만 그런 종교정책이 막번체제의 온존과 지배계층인 무사들을 위한 술책으로 활용되었을 뿐이라는 한계지적, 나아가 우민관에 입각해서 민중의 자율성을 부정한 미토학은 민중을 전혀 흡인하지 못한 채 점점 유리되어 갔다는 쓰지모토의 설명은 기리하라의 특징 있는 개설과 멋드러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다. 쓰지모토 논문에서 또 하나의 특징은 미토학을 설명하면서 활용하는 주자학 언급이다. “여기에는 주자학에서 보인 직접적 교화나 계몽적인 주지주의의 입장은 전혀 없다”, “덴메이(天明)ㆍ간세이(寬政)기의 주자학은 틀림없이 그 방향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주자학의 도덕론은 민중이 심정적으로 공감하고 실천을 실행하기에는 너무나 난해하고 그리고 관념적이었다”. “주자학의 언어에 의한 교화의 유효성에 부정적”이었다는 등의 주자학 관련 언급은 미토학을 이해함에 있어서 또 다른 과제가 있음을 자각시켜준다. 미토학과 주자학의 단절, 주자학과 일본민중의 단절, 후기 미토학의 역사적 종언 등이 강조된 쓰지모토의 강력한 주장은 어디서 유래하는 것인가? 그 해답을 얻기 위해 선행연구를 거슬러 오르다 보면 비토 마사히데의 미토학 담론에 부딪친다.
本稿は尾藤正英が1973年に発表した「水戸学の特質」を手掛りとして戦後日本思想史研究の傾向を確認した研究である。水戸学とは御三家の領地であった水戸藩の官営学問である。それは近世日本の幕藩体制という封建社会で形成されて盛行したが、やがて向えた近代日本の天皇制国家までを貫通する精神的な支柱として働く役割まで果たした日本思想でもある。水戸学の特質としては国体論と尊王攘夷論が有名である。国体論は絶対不可易の名分論を活かした政治的な方策であり、尊王攘夷論は国内民心を統合するプロパガンダの意味さえ帯びる政治的な方策であった。それらは支配階級の権力維持のための国家統治技術であるが、そこに民衆や国民は稀薄である。国家権力に操られる民衆や上位権力者に絶対服従する民衆が受動的に存在するだけである。いわゆる名分的な権力構造と蠢愚的な民衆像が顕著な特質であるが、これこそが古学派の荻生徂徠の政治思想を汲み取った特徴である。従って徂徠学の影響を受けたはずの水戸学の特質を明らかにすることは朱子学的な王政復古史観及び国民道徳論を克服する新しい歴史像の展望でもある。また近代日本の天皇制国家を貫通した近代的な国家主義思想を正確に理解することでもある。
회덕당(懷德堂)을 통해 본 <일용(日用)>담론 - 고이 란슈(五井蘭洲)와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의 비교 -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26호 2014.06 pp.137-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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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덕당은 학문의 일상적 실천을 중시하였다고 평가되지만 그 일상이 어떠한 것이었고, 그 속에서 어떠한 실천을 모색했는가에 대한 논증은 충분히 이루어 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본 논문은 회덕당의 고이 란슈가 <일용>을 통해 일상을 어떻게 규정하고 그 속에서 어떠한 실천을 모색하려 했는가를 고찰하였다. 란슈는 회덕당의 학풍을 주자학 중심으로 재정립시킴과 동시에 오규 소라이를 비판하였다. 본 논문은 소라이와 란슈의 『논어』해석을 비교 고찰함으로써, 이제까지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란슈의 <일용>담론을 논증하였다. 란슈가 정치 중심의 소라이를 비판하고, 정치적 가치 보다 우선하는 <일용>의 가치를 주장하고 있음을 논증하였다. 란슈는 정치적 공간의 유한한 것으로 상대화시키고, 그와 대조적으로 무한한 <일용>의 공간을 만들어 내었다. 뿐만 아니라 일상 속의 한 사람 한 사람이 실천을 정치적 실천과 대비시킴으로써 일상의 실천이 곧 정치적 실천으로 이어지는 논리구조를 만들어 내었다. 이와 같은 란슈의 <일용>담론에서 주목해야만 하는 것은, 란슈가 <일용>의 가치를 주장하고, 일상에서의 실천을 강조하기 위해 정치적 공간, 정치적 행위를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란슈는 <일용>을 정치와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논하고 있지만, 이는 <일용>이 정치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일상의 생활은, 정치와 대비시켜 논해야 할 정도로,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란슈는 일상을 영위하는 것이 정치와 무관하지 않음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즉 란슈가 인식하고 있는 일상이란, 필연적으로 정치와 대비시키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정치적 영향 하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란슈는 이러한 일상과 정치의 긴장관계를 <일용>담론을 통해 논리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란슈는 <일용>과 정치를 대립적 관계로 정의하지 않는다. 란슈는 정치를 상대화시킴으로써 일상을 영위하는 것의 중요성・가치를 주장하였다. 일상의 실천은 곧 정치적 실천이기도 하며, 그러기 때문에 무엇보다 일상의 실천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상생활 속에서의 학문적 실천은 곧 사회・국가의 안정을 이룰 수 있는 시발점이 되는 것이다. 이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유학의 기본이념을 답습한 것처럼 보인다. 정치적 주체인 사대부의 수신이 치국평천하로 확장되어 가는 것은 당연한 논리이다. 하지만 일본 근세 사회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란슈는 일상의 실천이 왜 정치적 실천보다 가치가 있고 중요한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란슈는 <일용>담론을 통해 일상의 실천이 곧 정치적 실천으로 이어지며, 그것이 사회・국가의 안정을 이루게 되는 과정을 논리화시켰다. 회덕당은 조닌의 일상생활의 공간속에 자리잡은 교육기관이었다. 고이 란슈는 바로 이 일상생활의 공간을 <일용>담론을 통해 논리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상의 실천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를 논리적으로 설명함으로써 그 실천을 주장한 것이다. 이와 같은 란슈의 <일용>담론은 근세 유학이 사회를 어떻게 인식하고 규정하였으며, 그 속에서 어떠한 실천을 모색하려 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란슈는 일상 속에서의 학문적 실천을 주장하였지만, 동시에 일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의해야 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정치・사회도 변하게 되고, 그에 따라 당연히 일상의 생활도 변하게 된다. 시대적 변화에 직면한 란슈는 변화된 일상을 재정의하고, 그 속에서 학문적 실천을 모색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 모색의 과정이 바로 란슈의 <일용>담론이라고 생각한다. 일상 속에서 점점 커져가는 정치적 영향력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이런 일상 속에서 학문적 실천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의 고민이 <일용>담론에 잘 나타나있다. 겐로쿠(元祿)기에도 <일용>담론은 존재하였다 겐로쿠기의 <일용>담론에 관해서는 졸고 「元禄期における「日用」言説の浮上―浅見絅齋の伊藤仁齋批判」 『日本思想史学』 43, 2011과 「元禄期における「日用」言説の展開―貝原益軒の伊藤仁斎批判」 『京都大学大学院教育学研究科紀要』 58, 2012에서 논증하였다. . 대표적으로는 인륜일용(人倫日用)의 도를 주장한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의 <일용>담론이 있다. 고이 란슈가 이토 진사이의 장남인 이토 도가이에게 사사한 것은 이미 본문에서 언급하였다. 교토와 오사카라는 지리적 근접성, 학문적 관련성이라는 점에서 이토 진사이와 고이 란슈의 비교고찰은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이토 진사이가 정치와 일상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비교고찰함으로써, 근세 중기 고이 란슈의 <일용>담론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에게 정치적 조언을 하고 다수의 경세론을 남기고 있는 나카이 지쿠잔이 일상과 정치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서, 고이 란슈 이후 회덕당의 <일용>담론이 어떻게 변해가는가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고이 란슈의 <일용>의 담론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本論文では、大坂の町人によって設立された教育機関である懐徳堂を通じて、儒学が近世社会の要求にいかに応えようとしたのか、または近世社会が儒学に何を期待したのかを考察した。懐徳堂は、享保9年(1724)に大坂の豪商たちによって設立され、幕末に至るまで町人を対象とする教育機関として維持された。町人が日常を営む空間に存在していた懐徳堂の学問が、日常における実践と実用性を重視していたであろうことは、先行研究でも指摘されてきた。しかし、懐徳堂の学問が重視した日常がいかなるものであり、その日常の中でいかなる実践が模索されていたかは、十分に論証されていない。これに対して本論文では、改めて懐徳堂の学風を朱子学に基づいて定立したと評価される五井蘭洲(1697~1762)の「日用」言説を対象として、懐徳堂の学問が規定していた日常と、その中で模索されていた実践を明らかにした。その際、特に政治空間における儒学の実践を図った荻生徂徠(1666~1728)との比較を通じて、五井蘭洲が朱子学を通じて、日常の営みを論理化していく過程を考察した。具体的には、五井蘭洲が荻生徂徠の『論語徴』を批判したことに着目し、蘭洲と徂徠の『論語』解釈を比較した。このような蘭洲の「日用」言説は、懐徳堂が求めていた日常的学問の内実を示していると考える。それとともに、近世儒学が社会をいかに認識し、そしてその社会の要求にいかに対応してかをみせる一つの例として評価できると考える。
고도대중사회 일본과 보수주의 - 니시베 스스무(西部邁)의 보수이념 -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26호 2014.06 pp.161-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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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냉전은 일본 국내에서는 걸프문제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평화주의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동아시아 지역 차원에서는 냉전체제에서 억눌려 있던 기억의 문제를 일깨웠고, 교과서문제, 영토문제, 야스쿠니문제, 위안부문제가 정치화하면서 역내 대립갈등이 초래되었다. 동아시아에서 탈냉전은 ‘역사의 종언’이 아니라 ‘역사의 시작’이었다. 지역문제로서의 역사는 니시베가 생각한 ‘전통으로서의 역사’일 수는 없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보수지식인과 진보지식인 사이에 벌어진 전쟁책임 논쟁 보수학자 가토 노리히로(加藤典洋)와 진보학자 다카하시 데쓰야(高橋哲哉)의 논쟁을 들 수 있다. 加藤典洋 『敗戦後論』, 講談社, 1997; 高橋哲哉 『戦後責任論』, 講談社, 1999. 에서 드러났듯이, 역사문제가 부상하면서 일본 지식사회는 진정한 보수와 위장된 보수를 구분하는 보보 대결의 언론전이 아니라 진보 대 보수의 언론전으로 흘렀다. 역사문제의 정치화는 문화공동체(국가)를 역사 속의 자연적 형성이 아니라 정치에 의한 작위적 창생으로 재구축하려는 시도를 낳았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은 역사의 작위적 재구축을 시도한 대표적 운동체였다. 니시베는 이 운동체에 간여하면서 새역모가 기획한 『일본의 도덕』(2000년)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대중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역사의 보수적 재구성과 도덕의 보수적 해석을 통해 문화공동체로서의 일본국가를 재건하려는 시도였다. 新しい歴史教科書をつくる会編(西部邁執筆) 『日本の道徳』, 産経新聞ニュースサービス, 2000. 니시베가 새역모를 통해 진보적 역사관(민주주의 역사관)과 투쟁을 벌였을 때, 진보와 대결하는 투쟁성이 고조되었을 때, 니시베가 보수의 심성에 담았던 비판적 회의의 심성, 회의와 신앙 사이의 평형은 경색된 보수의 색깔을 희석시키는 허울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전통은 국가를 매개로 작위된 것이었다.
Japan’s mass society tended to become conservative as it accomplished high economic development, and it strongly revealed conservative thinkings and actions to cope with the economic and political unrest in the context of the post-Cold War and globalization. This study tries to reflect on Japanese conservative intellectuals’ views of Japanese society and state by focusing on Nishibe Susumu’s understanding of Japanese mass society and his views of war and peace. Nishibe maintained that Japanese people began to feel unrest as they entered into a highly developed mass society as the result of industrialism (modernazation) and democratization (Americanization). Nishibe demanded skepticism about Japanese mass democracy criticizing the excess of democracy and the distortion of industrialism that had caused egalitarianism and hedonism in Japanses society on the one hand; he placed emphasis on faith in Japanese communal values to overcome relativism cultured in a highly developed mass society. He thought it would be possible to come over the illusion of progressivism and conservatism only when Japanese intellectuals keep the balance between skepticism and faith. Seeing Japanese dispute over war and peace regarding with the Gulf War, Nishibe blamed Japanese progressive’s opinion for peace as fake pacifism, and he anticipated the War could elevate Japanese people’s affection for “the state as common illusion” which could regulate the freedom of the individual and the order of the society. For Nishibe tradition, despite his respect for it, tended to be regarded as an artifact as “common illusion” or “cultural community” (natio), not the historical sediment. Nishibe’s sense of keeping balance between skepticism and faith could not help collapse when he embarked on total struggle against the progressive views of Japanese society in order to elevate Japanese emotions for their state and tradition in the Post-war context, losing the meaning of Nishibe’s skeptical conservatism.
‘사상 없는 사상’과 마루야마 마사오의 [사상] - 전공투적인 마루야마 비판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 -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26호 2014.06 pp.195-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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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투 및 포스트모더니즘과 요시모토의 공통점은 대상으로서의 ‘전후’・‘근대’라는 사상을 비판한 점이다. 즉 자신들의 눈에 신기루처럼 비쳐진 ‘근대’로 표상되는 전후 일본의 사상・사상가를 비판함으로써, 일본의 ‘전후’에 메스를 들이대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전후’ 비판의 구조는 전전의 ‘근대의 초극론’과 매우 닮아 있다. 즉 전전의 일본에서 근대를 비판한 결과가 일본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옹호로 귀결되었던 것처럼, 전공투와 포스트모더니즘이 해체시킨(?) ‘전후’ 즉 ‘포스트 전후’의 회색빛의 무드는 구체적・감각적・직접적인 동시에 경험이 가능한 그 무엇을 갈구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경향은 시미즈 이쿠타로가 전향한 이후에 도착하게 된 최종적 목적지의 사상과 매우 유사하다. 물론 마루야마 마사오의 사상 또한 매우 유동적이다. 하지만 시미즈가 보수화되어 가는 궤적과 논리의 주변에, 전공투와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양자를 동시에 상징하는 요시모토가 있었던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본고는 1969년 마루야마 마사오를 ‘봉쇄’했던 이들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려는 것이다. 즉 시미즈, 전공투, 요시모토, 포스트모더니즘 등에 의한 마루야마적인 <영구혁명> 노병호 「마루야마 마사오의 <영구혁명>론」과 ‘근대’에 대한 비판과 비판 이후의 이들의 사상을 재비판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재비판이 마루야마를 위한 ‘변명’은 아니라는 점을 동시에 밝혀 두고자 한다.
Zenkyouto, Yoshimoto Takaaki, and Postmodernism are common in the point that they criticize ‘the post-war’ or ‘the modern’. So to speak, they tried to operate ‘the post-war’ by criticizing the thought and the thinkers in the post-war Japan, which they think as a mirage. But the structure and the logic of which they criticize ‘the post-war’ is very similar to ‘Kindai no Choukokuron(近代の超克論)’. In other words, as if the pre-war criticism of the modern resulted in following the political reality, ‘the post post-war’ gave birth to a longing for anything which was concrete, sensuous, and direct because of the dissolution of ‘the post-war’ by Zenkyouto or postmodernism. A tendency like this is similar to Shimizu Ikutaro’s last stop after the conversion. We know that Maruyama Masao's thought also was fluid. But we can not deny that around the trajectory and the logic such as Shimizu Ikutaro’s conservative swing there were Zenkyouto, postmodernism, and Yoshimoto Takaaki representing both, too.
서구의 외부 ‘태동(泰東)’과 ‘아시아’의 내부 ‘일본제국’ 사이에서 - 오카쿠라 덴신과 오카와 슈메이의 ‘아시아론 -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26호 2014.06 pp.23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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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쿠라 덴신이 주장한 ‘아시아는 하나다’라는 논리 속에는, 인도 불교, 중국 유교와 도교를 중심으로 ‘아시아와 일본’의 관계성 속에서 구축한 ‘아시아론’이었다. 아시아의 정수를 수입하고 여러 주변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서구에게 박해를 받지 않으며 근대까지 그러한 아시아적인 것을 보존한 일본은 ‘아시아의 박물관’이며, 그 미술이나 사상은 아시아적 양식의 총합이라고 오카쿠라는 상정했던 것이다. ‘아시아는 하나다’라는 사상 논리를 지탱시킨 것은 결절점으로서의 일본이었다. 그리고 오카쿠라는 서구의 식민지정책아래 허덕이고 있는 조건에 의해 아시아를 하나의 전체로 제시하고, 서구의 문명에 의해 수탈되는 객체로서 아시아를 서구와는 별개로 그러나 포괄적인 원리를 내걸면서 하나의 통일체로 ‘구축’한 것이다.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오카와 슈메이는 아시아의 정수와 일본정신을 연결시켰다. 아시아문화의 집합체로서의 일본을 설정할 수 있는 논리를 오카쿠라를 통해 학습하면서, 그것이 ‘일본정신’으로 재편성되는 논리를 ‘시대적 구분’과 ‘인도와 중국’의 식민지화를 중첩시키는 담론 속에 끼워 넣으면서, 아시아의 가능성을 일본에서 찾는 담론을 발견해 낸 것이다. 특히 서구의 식민지지배에 허덕이는 ‘아시아는 하나’인데, 그러한 아시아의 다문화를 새로운 ‘제국’으로 통합하고 융합하는 테제를 찾아간다. 그것은 바로 다양한 아시아 문화의 정수를 총합한 일본이 그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그 정수는 역시 일본정신 속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일본의 부흥을 위해 필요한 사상성을 ‘일본의 전통’에 투영시키고 아시아의 혁신 에토스를 ‘일본정신’ 속에서 체현해 낸 것이다. 다시말해서 아시아 문화의 ‘정신적 유전자’인 국체(國體)가 일본에서 배양되었는데, 바로 그것이 일본정신의 본질이며, 이러한 일본정신을 부흥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 원천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에서 찾았고, 일본민족=일본문화를 통합해가며 일본정신의 세계성을 해석해냈다. 시대적 상황을 등에 업고 일본정신의 에토스는 성립해 왔던 것이다. 그러한 ‘다문화 제국’의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명목은, 간토대지진이라는 위기상황에서 오카와 슈메이의 ‘인위적인 의도’로 재현된 ‘정신=사상’논리였던 것이다. 오카와 슈메이는, 오카쿠라 덴신이 주장한 ‘아시아’ 개념을 ‘일본정신의 구조’ 속에서 찾았고, 그 아시아적 정수의 존립형태인 ‘국체’를 합성시키면서 일본정신이 곧 아시아정신이라는 논리를 재구성해냈던 것이다. 결국 ‘일본정신=아시아정신’으로 재구성되고, 동양을 상대화하지 못하는 ‘서구정신=개별정신’을 ‘일본정신=아시아정신=세계정신’으로 전복시켜 일본중심주의적 ‘권위’를 제시하는 ‘아시아 정체성’을 만들어 냈다. 특정한 일본정신에 귀착하는 일본적 구조 그 자체가 이러한 논리 속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아시아의 부흥에 아시아전통=일본전통을 강조하는, ‘일본인의 국민화’ 그리고 ‘일본인의 아시아화’로 시그널을 확대하면서, 오카쿠라 덴신과 오카와 슈메이는 아시아 본질론을 부각시킨 ‘다문화 제국주의=아시아 국민’ 논리를 생산했던 것이다.
本論考では、岡倉天心が主張した<亜細亜は一つだ>という理論とそれに基づいて主張された大川周明の亜細亜論を具体的に比較したものである。つまり、岡倉の亜細亜論は、は印度仏教と中国の儒教を体表的なものとして取り上げ、それを日本との関係と結び付ける形で形成したものである。亜細亜文化の「精髄」を受け継ぎ、それを持続的に発展させてきているのが、日本だという「亜細亜」論であろう。亜細亜周辺国の文物を輸入し、それと同時に西欧からは迫害を受けていない「独立」国家としての日本は、亜細亜の文化の博物館であり、日本の美術思想は、亜細亜的な様式の総合であり、西欧的な「物質」論を越えるものとして想定されたことである。どこで、亜細亜は一つであることをつなぐ<結節点>は日本であり、亜細亜統一論であった。このような理論を直接触れ合った大川周明は、亜細亜の精髄と日本精神を結び付けようと試みた。亜細亜文化の集合体としての日本が想定され、印度と中国の歴史を「照らし会わせ」つつ、西欧から植民地支配におかれている現実を目の前し、その西欧帝国から解放される真の<亜細復興>論を打ち立てようとした。そこで‘登場した理論が<多様文化帝国>としての「一つの亜細亜」論であり、そのエトスを「日本精神」から探し求めた。それは、亜細亜の文化の精髄の唯一持っている日本だけが<亜細亜復興>を可能にすることができという論理を「精神的遺伝子」である國體で発見し、それが亜細亜の復興につながるものだと主張した。それは、岡倉の<亜細亜は一つ>という論理を援用し、日本精神を「発見し構築」する実践として現れ、亜細亜という概念の復興にドキングした大川周明の‘人為的’な‘日本精神=亜細亜精神=世界思想’論理であったことが浮かび上がった。
식민지청년의 이동과 근대문학 - 타이완 청년의 일본어잡지 『포르모사』를 중심으로 -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26호 2014.06 pp.260-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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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유학생이 발간한 일본어잡지 『포르모사』는 새로운 타이완문예라는 일종의 ‘민족문학 수립’의 전망을 내세웠다. 하지만 ‘향토문학=타이완문예’라는 범주 안에 자신을 위치시키면서도 문학의 언어는 제국의 언어인 ‘일본어’로 할 것을 주장했다. 민족문학이 문화-주체-언어의 내셔널한 동일성 위에 구축되는 경향에서 볼 때, 이들의 주장은 일탈적인 성격이 있다. 이러한 ‘일탈’의 배경에는 1930년대 타이완에서 아직 근대적인 ‘언어’와 ‘문학’이 확립되지 않은 사정이 놓여 있다. 그들은 일본어가 타자의 언어임을 알면서도, 일본어가 백화문보다 문학의 근대화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고수해야할 고유한 언어와 문학이 부재한 상황에서 일본어는 새로운 ‘타이완문학’을 위해 받아들 수 있는 유력한 선택지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식민지조선과 식민지타이완의 ‘일본어’를 둘러싼 인식과 태도의 차이를 해명하는 데도 참고가 된다. 물론 그들이 일본어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제국의 문화지배에 투항했다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대부분은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았다. 사실 일본어에 대한 저항감이 부재했던 이면에는 이런 국제주의에 대한 심정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우융푸는 문화와 인간의 이동과 침투를 통해 혼종적으로 재구성되는 제국의 공간을 묘사함으로써, 동일화에 입각한 제국의 문화지배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소설을 남겼다. 국제주의적 지향이 혼종적 주체를 발견해 그것을 문화적 저항의 수단으로 전환시킨 예를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어라는 표현수단은 내용의 혼종성과 상치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제국의 언어로 동일화의 지배논리에 저항하는 것의 곤란함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台湾留学生たちは1932年東京で日本語雑誌『フォルモサ』を創刊した。この雑誌の目的は台湾新文学、すなわち「民族文学」の樹立であった。しかし彼らは自らを「郷土文学=台湾新文学」という範疇の中におきながら、文学の言語として帝国の言語である「日本語」を主張した。民族文学が「文化-主体-言語」のナショナルな同一性の上で構築されるものだとしたら、彼らの主張は民族文学としては異質的だといえる。勿論、このような「逸脱」の背後には1930年代台湾において近代的「言語」と「文学」が確立されていなかったという事情がある。『フォルモサ』の同人たちは日本語が他者の言語であることを分かっていたが、日本語が白話文より文学の近代化に役に立つと考えた。言い換えれば、守るべき固有の言語や文学が不在した状況の中で、『フォルモサ』の青年たちは日本語を新たな台湾文学のために選択可能な文学言語として見なしたのである。ところが、彼らのこうした選択が彼らの帝国の文化支配への「屈伏」を意味するのではない。彼らは社会主義を受容しており、また日本のプロレタリア文学とも深い関係を保っていたからである。日本語への抵抗感が薄かった背景として社会主義のもたらした国際主義の影響に注目すべきである。そして巫永福は、文化と人間の移動および浸透によって混合的に再構成される帝国の空間を描き、その上で「同化」を押し進める帝国の文化支配を批判する姿勢を表わした。ここで国際主義の視点によって混合的主体が見いだされ、またそれが文化的な抵抗の手段へと転換する例を確認する。にもかかわらず、日本語という表現手段はこうした内容の混合性と矛盾していると言えざるを得ない。このことは、帝国の言語で「同化」の論理に対して抵抗することが抱える混乱を示している。
‘선문화ㆍ선예술’ 구축에 있어서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 전사(前史)(2) -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을 중심으로 -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26호 2014.06 pp.285-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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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미학에 근거한 덴신의 일본미술사는 작위적이고 구축적인 점이 특징이다. 덴신의 일본미술사는 서양의 기준에 따른 고급예술로서 회화를 중시해 수묵화에 착안했으며 이를 설명하는 데 역시 서양의 근대철학과 통한다고 여겼던 선을 도입했다. 여기에서 이른바 선종화가 탄생되었다. 그 결과 사생에 대한 사의가 강조되어 헤겔미학에 한층 충실한 형태로 수묵화 혹은 일본미술의 우위를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실체가 없는 상상에 가까운 것이다. 선과 예술의 관련에 대해서 나중에 스스로 부정했지만, 관견의 범위에서는 아무도 이에 주목하지 않았다. 무로마치 시대의 제예술을 선과 관련짓는 이해는 미술분야에서는 1900년대 중반경에 비교적 이른 시기에 보급되어 갔으며 예컨대, 오무라 세이가이[大村西崖, 1868-1927]의 『동양미술소사(東洋美術小史)』(審美書院, 1906)를 꼽을 수 있다. 일본사 분야에도 서서히 도입되어 1920년대에 이르면 무로마치 시대의 예술과 문화는 선과 깊이 관련지어진다. 선과 예술, 선과 무로마치 시대에 대한 덴신의 설이 일본사 분야에 도입되어 가는 과정에 관해서는 졸고(앞의 논문, 2014)를 참조해 주시길 바란다. ‘선과 일본문화’에 대한 스즈키 다이세쓰의 출현은 이러한 토대 위에 있었다. 본고는 선예술론의 근간을 이루게 되는 덴신의 선과 예술의 관련에 대해 다루었지만 여기에 덴신의 다도가 충분히 포함되지 못하고 수묵화에 집중되었다. 수묵화에서 다도로 이어지는 추이를 포함해서 덴신이 전개한 선과 예술의 관련이 헤겔미학뿐 아니라 헤겔철학 전반과 어떻게 연동되는지 검토될 필요가 있다.
The seemingly self-evident concept of Zen culture and art is a modern product devised in the social situations faced by modern Japan. The Zen culture and art have developed as cultural nationalism in the magnetic field of modern Japanese Buddhist nationalism rather than a universal concept as the traditional Oriental heritage. In an effort to clearly trace the process of the Zen art theory being established, this study examined the history before Daisetsu about the Japanese history to figure out how the Muromachi culture was understood before Suzuki and others established the concept of Zen culture and art. There was a foundation of understanding being formed in Zen's close relations to art or Japanese culture, despite Zen culture and Zen art was not in use then. It happened mainly in the field of Japanese art and was led by Okakura Tenshin. Relations between Zen and art began in his conception of "history of Japanese art". He had views on ink-and-wash paintings with a focus on paintings as high art according to the Western criteria. He introduced Zen that was considered to be in line with modern Western philosophy to explain them. As a result, he was able to claim for the superiority of ink paintings or Japanese art as a form even more loyal to Hegel's esthetics by emphasizing his views for sketching from nature. However, his claim was close to imagination without substance. He later contradicted himself the relations between Zen and art, but nobody paid attention to his personal view. The understanding of the arts of the Muromachi Era in relation to Zen was spread in the field of art relatively early in the middle 1900s.
本稿は悟りの表現という禅文化・禅芸術の概念を構築して日本文化に適用することによって文化ナショナリズムを展開した鈴木大拙の以前、禅と芸術はいかに理解されていたかを考察したものである。禅文化・禅芸術という用語はまだ使われていなかったが、禅と芸術あるいは禅と日本文化を密接に関連づける理解はすでに形成されていて、それは主に日本美術分野において行われたもので、これを主導したのは岡倉天心である。禅と芸術との関連は天心の「日本美術史」の構想からはじまった。天心の日本美術史は西洋の基準による高級芸術として絵画を重視し水墨画に着眼したうえ、それを説明するにもやはり西洋の近代哲学と通じるとみなされた禅を導入した。その結果、写生に対して写意が強調されてヘーゲル美学に一層充実なかたちで水墨画あるいは日本美術の優位を主張することができた。しかし、こうした理解は実体のない想像に近いものである。自分の打ち立てた禅と芸術の関連について晩年、天心は自ら否定したが、管見の範囲では誰もこのことに注目しなかった。室町時代の諸芸術を禅と関連づける理解は美術分野においては1900年代半ば割りと早い時期に普及し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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