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rticle

현재 위치 Home

日本思想 [일본사상]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국일본사상사학회 [Korean Association For Japanese Thought]
  • pISSN
    1229-9235
  • 간기
    연3회
  • 수록기간
    1999 ~ 2025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철학
  • 십진분류
    KDC 153 DDC 181
제32호 (12건)
No
1

‘안민(安民)’과 도쿠가와(德川) 일본 사회

와타나베 히로시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2호 2017.06 pp.5-20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4,900원

‘안민(安民)’이란 극히 당연한 보편적인 개념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에서 민이나 통치자의 존재양태는 크게 다르기 때문에 ‘안민’의 개념과 방법론 역시 차이가 난다. 이 글에서는 도쿠가와 시대의 ‘이에’ 제도에 대해 살펴본다. 왜냐하면 그 시대의 통치자-인민의 관계는 ‘이에’제도를 배경으로 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이에는 중국의 종족이나 한국의 가족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일종의 법인으로 간주할 수 있다. 누구나가 이에에 소속되어 그 이에의 가업을 영위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이에가 모여 세상이 성립한다. 그 사회에서 개인은 이에를 잇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여러 사료에서 다이묘 가에서 가독(家督)을 계승하기 위해 후계자의 이름을 바꿔치기 하거나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신하는 사례를 빈번히 찾아볼 수 있다

It seems that Anmin(安民, proper governance/stable livelihood) is an evidently universal concept. The concept itself and the ways of achieving it are disparate between Korea and Japan, which is attributed to the fact that the living patterns of the ruler and the ruled also widely differ between two political communities.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institutions of ‘Ie(家, famaily)’ in the Tokugawa era since Ie was the very foundation of the ruler-ruled relationship of the time. It is likely that Ie in the Tokugawa period was a law person, a completely different form from Zhongzu(宗族, tribe) of China, or Gajok(家族, family) of Korea. In Japan’s Tokugawa period, everyone belonged to Ie and joined a Ie business(or family business). The Ie constitutes the whole world, in which individuals served as a means to preserve Ie. There are many historical evidence that in order to inherit the position of Katoku(家督, successor) of the Daimyo family, successors have been renamed or have taken other’s names.

「安民」とは、きわめて当然な普遍的概念のように思える。しかし、韓国と日本での民や統治者の存在様態は大きく異なるため、「安民」の概念や方法論も当然異なる。ここでは徳川時代の「家」制度について考察する。なぜなら、その時代の「統治者―人民」の関係は、「家」制度を背景にして存在するからである。当時の家は中国の宗族や韓国の関係とは完全に異なるもので、一種の法人として見なすことができる。誰もが家に所属して、その家の家業を営みながら生きていく。このような家が集まって世の中が成立する。その社会で個人は家を引き継ぐための一つの集団である。多くの史料では大名家が家督を継承するために後継者の名前をすり替えたり、他の人の名前を代わりに使用する事例を頻繁に見ることができる。

2

7,000원

주자학과 양명학은 동아시아 사상을 이해하는 핵심적 두 사유이다. 양명학의 등장 이후, 주자학과 양명학 해석자들은 다각도에서 서로의 주장을 재검토했다. 이들의 공통 목표는 유학적 이상(理想) 실현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동아시아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 가운데 18세기 일본의 주자학계에서 진행한 양명학 비판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문헌이 바로 『왕학변집(王學辯集)』이다. 『왕학변집』은 도요다 노부사다(豐田信貞)가 1712년 편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몬(崎門)학파로 분류되는 그는 이 책에 주자학의 입장에서 양명학을 비판한 기존의 여러 비평문을 모아놓았다. 책 서두에는 조선의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양명학 비판서가 실려 있고, 그 뒤로 일본의 하야시 가호(林鵞峰),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 사토 나오카타(佐藤直方), 아사미 게이사이(淺見絅齋), 미야케 쇼사이(三宅尙齋)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이 책에는 도요다 노부사다 자신과 사토 나오카타의 서문, 야마나까 고쇼(山中剛勝)의 발문이 함께 있다. 이를 통해 『왕학변집』이 18세기 기몬학파에서 양명학에 대한 대응을 목적으로 편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왕학변집』의 구성과 내용을 통해 발견되는 이 책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1. 『왕학변집』은 주자학적 입장에서 양명학 비판을 진행하면서 조선의 학자 퇴계 이황의 글을 중시했다. 『왕학변집』에 수록된 일본주자학자들의 글이 사실상 18세기 기몬학파의 이해에 따른 일본주자학 계보임을 염두에 둔다면, 이를 통해 퇴계에게 학문적 정통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18세기 기몬학파의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2. 『왕학변집』은 주자학과 상산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차원에서 양명학이 등장한 것이라고 보는 시선을 적극 수용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양명학 비판 논거를 상산학에 대한 주자학의 대응에서 찾고자 했다. 이와 함께 이 책은 중국의 주자학 옹호자들의 양명학 비판서가 활용된 글을 수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18세기 기몬학파에서 주자학의 원형적 사유에 주목하면서도 양명학 출현 이후 진행된 중국의 주자학 계승자들의 대응에도 관심을 갖고 수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왕학변집』은 지행(知行) 문제에 주목하여 양명학을 비판하는 입장에 기반을 하고 있다. 이는 18세기 기몬학파의 양명학 비판이 단순한 변척이 아니라 유학적 이상을 실현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을 찾기 위한 시도 가운데 하나였음을 뜻한다.

Zhu-Zi Studies and Yang-Ming Studies are two essential philosophical ideas about understanding East Asian thought. After the advent of Yang-Ming Studies, scholars of Zhu-Zi Studies and Yang-Ming Studies reappraised the assertions of each other from the various aspects. The common aim of them is to find the most efficient way to realize Confucian ideal. The flow like this can be found throughout East Asia. One of them is A collection of articles criticizing the Yang-Ming Studies which shows the criticism towards Yang-Ming Studies by Zhu-Zi Studies in the 18th century Japan. A collection of articles criticizing the Yang-Ming Studies is thought to be compiled by Toyota Nobusada in 1712. Toyota Nobusada who is classified as Kimon School compiled several existing criticisms about Yang-Ming Studies in the view of Zhu-Zi Studies. The criticism of Toegye YiHwang about Yang-Ming Studies is in the beginnig of the book and there are writings of Hayashi Kaho, Yamajaki Ansai, Sato Naokata, Asami Keisai, Miyake Shosai after that. This book also includes the preface of Toyota Nobusada himself and Sato Naokata and the postscript of Yamanaka Koshyo. It explains the purpose of compilation of A collection of articles criticizing the Yang-Ming Studies as an action toward Yang-Ming Studies by the 18th century Kimon school. The significance of the book that can be found through the composition and content of A collection of articles criticizing the Yang-Ming Studies is as below. 1. A collection of articles criticizing the Yang-Ming Studies criticizes Yang-Ming Studies in the view of Zhu-Zi Studies and emphasized the writing of Toegye YiHwang. A collection of articles criticizing the Yang-Ming Studies shows the genealogy of Japanese Zhu-Zi Studies understood by the 18th century Kimon School. It suggests that the 18th century Kimon School tried to establish the academic legitimacy of Toegye. 2. A collection of articles criticizing the Yang-Ming Studies interprets the advent of Yang-Ming studies as being accomplished based upon the understanding of Zhu-Zi Studies and Sang-San Studies. It tried to find the basis of criticism about Yang-Ming studies in the criticism about Sang-San Studies of Zhu-Zi Studies in the context like this. A collection of articles criticizing the Yang-Ming Studies also uses the criticisms about Yang-Ming Studies written by Chinese Zhu-Zi Studies advocates. It means the 18th century Kimon School focused on the original philosophical idea of Zhu-Zi Studies and thought the conflict between Zhu-Zi Studies and Yang-Ming Studies is the major flow of Chinese philosophical history. 3. A collection of articles criticizing the Yang-Ming Studies criticized Yang-Ming Studies pointing out the knowledge and conduct problem. It means the criticism towards Yang-Ming Studies by the 18th century Kimon School was the attempt to find the efficient way to realize their ideal values.

朱子学と陽明学は、東アジア事情を理解する上で中核をなす思惟である。陽明学の登場以降、朱子学と陽明学の解析者たちは多様な角度から互いの主張について見直しを図ってきた。彼らの共通目標は儒学的な理想の実現のために一番効果的な方法を探すことであった。このような流れは東アジアのあちこちで見られた。その中で、18世紀に日本の朱子学界で進められた陽明学批判の状況について詳しく見ることができる文献が、『王學辯集(王学弁集)』である。『王學辯集』は、豊田信貞(とよだのぶさだ)が1712年に編纂したものであると推定される。崎門(きもん)学派として位置づけられる彼は、この文献に朱子学の立場から陽明学を批判する既存の様々な批評文を集め収めた。文献の冒頭に、朝鮮の退渓李滉の陽明学批判書が載せられており、続いて日本の林鵞峰(はやしがほう)、山崎闇斎(やまざきあんさい)、佐藤直方(さとうなおかた)、浅見絅斎(あさみけいさい)、そして三宅尚斎(みやけしょうさい)の文が収録されている。また、この文献には豊田信貞自身と佐藤直方による序文(前書き)、山中剛勝(やまなかごうしょう)の跋文(後書き)が共に掲載されている。このことから『王學辯集』が18世紀の崎門学派において陽明学への対応を目的に編纂されたものであることが分かる。『王學辯集』の構成と内容から明らかになったこの文献の意義は次のとおりである。 1. 『王學辯集』は朱子学的な立場から陽明学批判を行う上で、朝鮮の学者、退渓李滉の文章を重視した。また、『王學辯集』には18世紀の崎門学派が理解している日本の朱子学の系譜が表れている。このことから18世紀の崎門学派が退渓に学問的な正統性を付与しようとしたことが分かる。 2. 『王學辯集』では、陽明学の出現は朱子学と象山学に対する理解を基に成り立ったものだと解析されている。このような脈絡から陽明学への批判の根拠を象山学に対する朱子学の批判から探そうとした。また『王學辯集』は、中国の朱子学擁護者たちが作成した陽明学批判書を活用している。これは18世紀の崎門学派が朱子学本来の思惟に注目することを意味すると同時に、朱子学と陽明学の対立が中国思想史の主たる流れだということを意味する。 3. 『王學辯集』は知行問題に注目し、陽明学を批判した。このことは、18世紀の崎門学派が行った陽明学批判が自分たちの理想的価値実現へ有効な方法を探す試みであったことを意味する。

3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조선을 어떻게 이해하고자 했는가

고지마 야스노리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2호 2017.06 pp.53-78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6,400원

한국에서의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평가는 나뉜다. 야나기를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고, 식민지 이데올로기를 방조한 자로서 규탄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평가하는 것은 평가 시점에서의 역사적 상황에 강하게 규정된다. 즉 1960년까지는 야나기의 조선 예술에 대한 이해에 깊이 공감하고 그를 칭찬하는 논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에 한국 민주화 운동이 고양되고 이에 연동 하여 민중을 기반으로 한 민족 문화와 민족주의의 부흥 운동이 배경이 되어 야나기 비판의 논조가 높아졌다. 일본에서는 1960년, 70년대부터 야나기의 휴머니즘을 높이 평가하는 연구가 추진되고, 80년대 후반이 되면 야나기는 더욱 공예의 역사, 종교학, 사상사, 조선연구 등 다양한 전문 분야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90년대, 2000년대에 야나기 연구는 한층 무게를 더해 갔다. 또한 이 시기에는 민속 붐의 고조를 배경으로 야나기는 ‘민속의 아버지’로 널리 민속 애호가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동시에 이 시기에는 오리엔탈리즘론, 젠더론의 관점에서 야나기의 의식을 문제삼아 야나기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나오기 시작해 이윽고 ‘비판의 대합창’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본고에서는 이와 같이 야나기를 향한 한일의 다양한 논점을 역사적으로 정리 한 후, 야나기가 조선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때, 그 이해의 본연의 자세 -‘애정에 기초한 이해’-를 고찰하고 그것이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구라다 하쿠조(倉田百三), 유아사 하치로(湯浅八郎) 등의 인식론과 통저하는 것임을 밝히고자 한다.

The view towards Yanagi Muneyoshi is often polarized in Korea. While some praise him as “a Japanese who loved Korea,” others disdain him as an advocate of colonial identity. In any case, evaluation is often strongly influenced by contemporary historical context. Namely, Yanagi was widely praised because of his deep understanding of Korean art up until the 1960s, but with the rise of Korean democracy movement from the late 1960s to 1970s, Yanagi came to be criticized with heightened current of racial culture and ethnism in the background. In Japan, through the 1960s and 1970s, Yanagi was highly assessed because of his humanistic attitude, and from the late 1980s, his achievements began to draw wider attention from different fields of study: arts and crafts, religious studies, history of ideas, and Korean studies. Literature concerned with Yanagi kept growing in numbers through the 1990s and 2000s, and with the mingei (folk art) boom, he came to be dubbed as “the father of mingei.” However, simultaneously, he was heavily attacked by numerous studies, especially those concerned with orientalism and gender theories, which shed light on his problematic subconscious. Bearing such Japanese and Korean contexts of evaluation towards Yanagi in mind, this paper aims to discuss the characteristics of the ways in which he tried to understand Korea- a “philanthropic understanding” –and suggest an epistemological commonality between Yanagi and several other figures, such as Nishida Kitarō, Kurata Hyakuzō, and Yuasa Hachirō.

韓国での柳宗悦に対する評価は分かれる。柳を「朝鮮を愛した日本人」として肯定的に評価する人々もいれば、植民地イデオロギーを幇助した者として糾弾する人々もいる。しかし、評価というものは評価する時点での歴史的状況に強く規定されてくる。すなわち、1960年までは柳の朝鮮芸術への理解に深く共感して、柳を称賛する論説が主流をなしていたが、60年代後半から70年代になると韓国民主化運動が高揚し、それに連動した民衆を基盤とした民族文化と民族主義の再興の動きが背景となって、柳批判の論調が高まってくる。日本では、1960年、70年代から柳のヒューマニズムを高く評価する研究が推し進められ、80年代後半になると柳は更に美術工芸史、宗教学、思想史、朝鮮研究等々多様な専門分野で取り上げられるようになり、90年代、2000年代には柳研究は一層の厚みを増していった。またこの時期には、民芸ブームの高まりを背景に柳は「民芸の父」として広く民芸愛好家から支持されていった。と、同時にこの時期にはオリエンタリズム論、ジェンダー論の観点から柳の意識下にある問題性を炙り出した柳批判が像の解体を強く意図した批判的研究が出始め、やがて「批判の大合唱」を呈するにいたる。 本稿ではこのように柳に向けられた日韓の様々の論点を歴史的に整理した上で、柳が朝鮮を理解しようとした際の、その理解の在り方−「情愛に基く理解」−を考察し、それが西田幾多郎、倉田百三、湯浅八郎等の認識論と通底するものであったことを明らかにする。

4

6,700원

일본의 사회주의운동은 기독교 관계자들에 의해 시작되어 확대되었으며, 사회주의자들 역시 기독교를 천황제 절대주의 체제에 정면으로 대결할 수 있는 이론으로서 사회주의와 공통의 지반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을 거치며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지배층의 편에서 그들을 위해 복무하는 종교로서 적대시하였고, 결국 두 사상은 분리 혹은 결별의 과정을 겪게 된다. 본고는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교섭 문제에 대한 사례 연구로서, 일본메소디스트파의 목사 시라이시 기노스케(白石喜之助)라는 한 인물의 사상 속에서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를 검토하는 것을 통해 ‘기독교사회주의’ 문제에 접근해 보려는 시도이다. 시라이시는, 이른바 ‘기독교사회주의자’라고 불렸던 인물들이 궁극적으로 두 사상을 분리시키는 길을 선택했던 것에 비해, 일평생 두 사상을 분리시키지 않고 각각의 고유한 사명과 존재의미를 환기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측면에서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교섭 문제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그의 두 사상에 대한 균형감은 오늘날에도 여러 시사를 제공할 수 있으며, 향후 이 문제를 재조망하고 연구의 방향성을 잡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With Japanese social movement started by Christian leaders expanding further, Japanese socialists recognized Christianity as a theory to combat against Japanese Emperor System and the common ground with Socialism. But, After the Russo-Japanese war, they started to criticize the Christianity by standing for the ruling class, and the so-call Christian-socialists also made a shift of ideologically disconnecting the Christianity with the Socialism. So far, a number of the studies on Modern Japanese Chrisitian socialism have been focused on a few examples of some figures on the premise that as adopting the Capitalism along with social inequalities, the Socialism and the Christianity united and expanded but two ideas eventually began to crack and diverge after until the Russo-Japanese war. This thesis is a case study on the issue over the uniting Christianity and socialism in Japan, and takes a closer look on Shiraishi Kinosuke(白石喜之助), a unknown-Methodist pastor with the review of how he approached to understand connections with the Christianity and the Socialism. By understanding of a balance between two Christianity and Socialism for Shiraishi Kinosuke, this will provide a renewed attention on this matter, provoking new direction of studies.

日本の社会主義運動は、キリスト教関係者たちによって開始、拡大し、社会主義者たちも、キリスト教を天皇制絶対主義体制に対し正面から対決できる理論として社会主義と共通の地盤を認めていた。しかし、日露戦争を契機に、社会主義者たちはキリスト教が支配層の味方になり、彼らのために服務する宗教となったことを批判し、結局、二つの思想は分離あるいは決別の道をたどる。 本稿は、キリスト教と社会主義との交渉問題に関する事例研究として、日本メソジスト派の牧師として、今まであまり知られていない白石喜之助という人物の思想の中で、キリスト教と社会主義とがどうように理解されているかを検討することを通じ、「キリスト教社会主義」問題を調べることを目的とする。白石は、キリスト教や社会主義との交渉問題を検討する時、非常に興味深い人物である。実際に、白石が自ら主張した 「科学的人情主義」という表現は、彼のこの二つの思想に対する理論的模索であったと言える。白石は常にキリスト教と社会主義の各々の使命と存在意味を呼び起こし、生涯を通じて思想と行動の一致のために努力した。彼の二つの思想に対するバランスは今日も多くの示唆を与えることができ、今後この問題を改めて分析し研究の方向性を定めることにも重要な手がかりになるだろう。

5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격화 -닛코동조궁 창건을 중심으로-

양익모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2호 2017.06 pp.107-125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5,400원

에도막부의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망 후 자신의 의지와 2,3대 쇼군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동조대권현’이라는 신으로 신격화 되었다. 이에야스의 신격화의 특징은 도쿠가와 가문의 조상신으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에야스 즉 선조를 신격화하여 쇼군지배를 신적 군주의 지배로 연결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신격화는 닛코동조사가 닛코동조궁으로 되는 과정에서는 천황과 쇼군과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그러나 확실한 점은 이에야스의 신격화가 천황에 의해서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즉 동조사의 동조궁으로의 승격이 이에야스 신격화에는 필수적인 요소로 생각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닛코동조궁의 창건된 배경은 막번체제의 안정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Tokugawa Ieyasu, the first shogun of Tokugawa shogunate, was deificated as Tosho Daigongen after his death by his will along with political intention of the 2nd and 3rd shoguns. Deification of Tokugawa Ieyasu is characterized by the significance as ancient god of the Tokugawa family, first. By deificating ancestor, in other words, Tokugawa Ieyasu, the family wanted to associate the ruling of shogun with the ruling of king, the being that is equal to God. This deification was completed through construction of Nikko Tosho-gu Shrine. Such a deification became clear in the construction process of Nikko Toshogu Shrine. However, in the process of Nikko Toshosha becoming Nikko Toshogu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hogun and the Tennou is involved in a complex way. To be sure, it is that Ieyasu's deification was completed by the Tennou. That is, promotion to Toshogu of Toshosha was essential to the deification of Ieyasu. Moreover, the background that Nikko Toshogu was founded is that it aimed at stabilizing the shogunate system.

江戸幕府の初代将軍である徳川家康は死亡後、自分の意志とともに2、3代将軍の政治的な意図により「東照大権現」という神に神格化された。家康の神格化の特徴としては、徳川家門の神祖としての意味を持つのである。また、家康すなわち神祖を神格化して将軍支配を神的君主の支配と繋ごうとした。このような神格化は日光東照宮の創建過程で明確に現われた。しかし、日光東照社が日光東照宮になる過程では将軍と天皇との関係が複雑に絡んでいる。確であることは、家康の神格化が天皇によって完成されたことである。すなわち、東照社の東照宮への昇格が家康の神格化には欠かせないことであったことである。また、日光東照宮が創建された背景は、幕府体制の安定を目指したことにあることである。

6

6,100원

도쿠가와 말기부터 일본의 지식인들은 서구의 기독교에 주목했다. 기독교가 서구 국가들의 부강을 설명하는 요인이라는 점에서였다. 이 연장선상에서 메이지 유신 이후 본격적으로 기독교를 논의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서양 사회에서의 기독교가 religion이라는 범주 안에서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기독교가 아닌 종교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서양 사회에서 종교란 무엇이며 어떠한 역할과 기능을 담당하는지, 또 그것을 일본에 적용할 경우 어디에 해당하는지 등등에 대해 여러 관점에서 분석을 시도했다. 이들의 관심은 학문적・정치적 논점으로서의 종교에 있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메이로쿠샤 회원들 간에 일어난 흥미로운 논의들 중 하나인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의 「교문론(敎門論)」이 있다. 본 논문은 「교문론」에 나타난 니시의 종교 이해 논리와 그에 대한 기대란 무엇이었으며, 이것이 어떻게 다른 메이로쿠샤 회원들의 논의와 연관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메이지 초기의 religion 이해가 가진 특유의 성격을 해명하기 위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One of the reasons that Japanese intellectuals in the late Tokugawa period paid much attention to Christianity was because they regarded it as the key factor contributing to the wealth and strength of the Western countries. The general understanding of religion held by most of the so-called Western learning intellectuals after the Meiji Revolution was somewhat similar. They believed that it was an essential condition for the realization of Civilization. Nishi Amane’s articles ‘On Religion’ were written in this historical context. This paper aims to elucidate Nishi’s understanding of religion and his thoughts on how Japan should deal with it by analyzing ‘On Religion’. Also, some articles written by other members of the Meirokusha relating to religion would also be examined.

徳川末期以降、西洋のキリスト教への日本の知識人の関心は高まっていった。その要因の一つに、キリスト教が西洋国家の富強の原因であるという見方がある。明治以降、このような観点はさらに進展し、多くの日本の知識人はキリスト教を「文明開化」の基礎条件として理解した上で、本格的にキリスト教及びreligionについて議論することに繋がった。彼らは、西洋社会におけるreligionに注目し、それを学問的・政治的な論点として扱いつつ分析したのである。以上のような文脈上で、明六社の同人の間でもreligionをめぐる活発な議論が起きた。西周(1829-1897)の「教門論」はその代表例である。本稿は、「教門論」における西の宗教理解の論理やそれに対する彼の期待とは何だったのかを明らかにし、それがどのように他の明六社同人の議論と関連するのかについて検討する。それによって、明治初期のreligion理解が有する特質を解明する端緒を提供したい。

7

8,200원

사할린 한인은 식민지배와 남북분단, 그리고 냉전이라는 시대의 비극을 강제동원과 집단억류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체험한 집단이었다. 한국사회에서 이들의 존재는 1990년 한소수교와 영주귀국 문제로 부각되었다. 이 문제는 아직도 전후보상 및 배상문제라든가 영주귀국으로 인한 2차 가족이산이라는 형태의 현재진행형 사안으로 남아있다. 그 동안 국내의 관심은 주로 일본과 구 소련의 책임문제를 중심으로 이들이 왜 해방 후 돌아오지 못했는가 하는 점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정부와 학계 모두 이들이 어떻게 사할린으로 동원되었고, 그곳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원사료를 통해 검증하기보다는 일본이 강제로 동원했고, 소련이 귀국을 막았다는 선험적인 논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본 연구는 사할린주역사기록보존소(GIASO)에 소장된 일제강점기 문서들을 화태청 공문서, 경찰관계문서, 기업관계문서로 나누어 915개 파일, 약 1만 매의 국내 수집자료를 통해 그 내용을 소개하고 한인의 동원 및 거류실태와 관련된 기록을 살펴 화태청의 동원 관련 정책, 경찰조직의 감시와 통제 방식, 개별 기업 및 작업장의 노동조건과 처우를 종합적으로 고찰하고자 했다. 연구 결과 경찰관련 기록은 매우 상세하게 한인들의 신상을 파악하고 있었고, 국책에 따라 시기 별로 감시의 대상과 방법을 바꾸어 가며 한인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또한 화태청의 한인 정책은 해당 지역의 독자성 보다는 일본 중앙정부의 정책을 시행하는 대리인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그리고 기업은 한인을 직접 관리하기보다는 각종 구미(組)라는 하청업자를 통해 간접 관리하고 있었고,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한인의 통제와 관련해 화태청-경찰-기업 간의 공조가 더욱 강화되었음을 확인하였다. 화태청의 정책, 경찰의 감시와 통제, 기업 및 단위 작업장의 노동환경과 처우를 층위별로 입체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보다 면밀한 사료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본 연구를 통해서 일단 경향적으로 이들 3자간의 연계성이 포착된 만큼 향후 사료를 기반으로 한 대단위 후속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사할린 한인의 동원 및 거류실태를 보다 입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상기 문헌기록을 조선총독부자료, 기 수집 구술자료, 1970년대 이래 일본에서 축적된 사할린재판자료와 교차 검증해 나간다면 사할린 한인문제에 관한 새로운 역사상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The Koreans in Sakhalin was the tragic victims of forced labor groups during the Japanese empire era, and those of detained by USSR after the second world war. Korean society came to have interest in these Koreans in Sakhalin just after 1990, the year of korea-russian treaty of amity and successive repatriation of the koreans who was born before August 15th of 1945. But this issue is still current one until now So far the main interest of korean society is the responsibility of Japan and USSR, and Why the Koreans in Sakhalin was not able to return to homeland, korea. On the other hand, it neglected the reason why the koreas came to be mobilized to Sakhalin and how they lives there. And it did not try to verify the process from mobilization to detention in abroad by historical documents or materials. That’s why this paper was made for, and tried to study the historical documents in Sakhalin Archives(GIASO), which is composed of 3 sections(Karahutocho official documents, police supervision documents, and civil companies documents), 915 files with over 10,000 images. In this study records which include korean mobilization and forced labor was abstracted and sorted from 1,260 images of documents, which are about Karahutocho’s policy for koreans, the way how the local police control the koreans, and labor conditions and reward in workplace. After the study it is verified that Karahutocho itself was the loyal agent of central government of japanese empire, local police took more drastic oppression steps about koreans, and civil companies kept the same steps with Karahutocho and local police, the cooperation among them got stronger for the more exploitation of koreans in the negative process of the war situation. Through this study it is identified we can restore the various historical facts by way of those documents produced in Sakhalin during the japanese era. If those historical documents should be linked oral history of the victims or lawsuit documents produced In japan in 1970s, we can find new images of Koreans in Sakhalin issues.

サハリン韓人は、植民支配と南北分斷、そして世界冷戦という時代的な悲劇を强制動員と集團抑留という極端的な形で体験した集団であった。彼らの存在が韓国社会において浮かび上がった切っ掛けは、1990年代の韓国とロシアとの國交樹立と永住帰国問題であった。この問題は、永住帰国で終わるわけなく、未だに戰後補償及び第2次の家族離散、被害者の遺族確認や墓参り等という現在進行形の課題として残されている。今まで、韓国に於ける主な関心は、なぜ彼らが帰還できなかったのか、それと関連して日本政府と旧ソ連の責任は何であったのか等に集中してきた。しかし、韓国の政府であろうが、学界であろうが、彼らが根本的にサハリンへ動員された歴史的な経緯やサハリンでの生活実態を資料を通じて綿密に検証せず、「日本が強制動員し、ソ連が無理やりに抑留した」という単線的な議論に留まる傾向が強かった。そこで、この論文は、2014年に韓国政府傘下の委員会が、ハリン州公文書館(GIASO)から蒐集した915個のファイル、凡そ1万枚の資料を検討し、この資料を1)樺太庁の行政文書, 2) 警察文書、3)企業関係文書に分け、その内容を韓国学界に紹介し、「樺太庁の政策」、 「警察組織の監視と統制」、「企業や個別作業場での労働条件や処遇」等を総合的に考察するために提案したい内容をを整理した。資料を検討した結果、警察は極めて詳細な所まで動員した韓人の身元を把握・管理しており、国策に沿って時期別に監視の対象と方法を変えながら管理体制を強化しつつあった。また、樺太庁の韓人管理政策は地域的な独自性よりは、中央政府の代理機関の性格が強かった。そして、企業資料によると、大企業は、各レベルの組を通して韓人を管理しており、戦況が悪化すると、「樺太庁-警察-企業」の間の協力監視体制も強くなりつつあったの事が確認できた。ただし、この論文は、これから樺太資料を利用し実態研究を韓国の研究者たちが遂行するためには、まず押さえなければならない樺太資料群の内容と特徴、具体的な活用方法論などを呈示することにより、樺太庁の政策、警察の監視と統制、個別作業場の具体的な労働環境と処遇の相互連携性に注目した上で、動員実態を段階別・層位別に立体的かつトータルに究明できる共同研究の必要性と政府や研究機関の新たな資料蒐集事業の方向をアーピルすることに焦点を合わせた。韓国では、今まであんまり活用していなかった樺太資料を利用した大きな共同研究が活性化すると、サハリン韓人の動員及び居留実態の復元がより正確で豊富になされると期待される。それと共に、この樺太資料を既存の朝鮮総督府資料、1990年代から集積された口述資料、そして1970年代から体系的に整理された樺太裁判資料と連携分析すると、サハリン韓人問題の歴史的な性格もより鮮明に究明できると思われる。

8

7,800원

시마네현 지방정부의 독도 교육정책의 두뇌집단(Think-Tank)인 ‘죽도문제연구회의 교육정책 아이디어’는 ‘독도에 관한 일본 중앙정부 교육정책의 청사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점에서 죽도문제연구회가 작성한 학습지도안에 대한 탐구는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독도교육과 관련하여 ‘죽도문제연구회의 1∼3기’ 동향을 검토하면, ‘1기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이 ‘2기에서 본격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고 ‘3기는 2기의 연속선상’에 있다. 죽도문제연구회의 교육목적은 ‘우리 영토가 분명한 독도’를 ‘영토 분쟁 지역화’하여 이를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목적을 이루고자 죽도문제연구회는 산하에 ‘고교에 있어서 죽도학습 방향 검토회’를 조직하여 2기에 5종의 지도안을 제작하고, 3기에 ‘고등학교 지리역사과 일본사A・일본사B 학습지도안’을 제작하였다. 2기에 제작한 지도안은 ‘독도문제가 발생한 경위(원인)에 대하여 이해하고 그 해결책에 대한 자기나름의 의견를 갖는 것’을 중심목표로 삼았다. 특히 모든 학습지도안마다 ‘독도문제가 발생한 경위’를 ‘1952년 평화선 선언으로 인한 한국의 불법점거’로 규정하고 있었다. 더불어 ‘독도문제의 해결책’을 ‘국제사법재판소에 공동 제소’하는 것으로 제안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일본은 ‘독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를 제안하였으나 한국이 거절하고 있기에 독도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으로 왜곡시켜 교육하고자 하였다. 학습지도안의 지도내용을 보면, 전근대적인 역사적 사실보다 ‘시마네현 고시에 의한 독도를 영토로 편입한 1905년 이후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다음으로 죽도문제연구회가 3기의 제작한 ‘고등학교 지리역사과 일본사A일본사B 학습지도안’을 보면, 2기에 제작한 학습지도안들과 마찬가지로 ‘전근대의 역사 연구보다는 근대에 일본 실효지배 근거를 찾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더불어 ‘일본의 독도 실효지배와 영토 편입과 관련하여 국제법에 근거’한 것을 강조하는 것을 볼 때, 현재 독도문제를 국제법에 따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자는 2기 학습지도안들의 맥락과 동일선상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policy of Dokdo education in Takeshima issue research society and its’ teaching guidance plans. Takeshima issue research society is the think-tank of Shimane local government on the policy of Dokdo education. Because Takeshima issue research society’s Dokdo educational idea has feeded into Japanese central government, it is no exaggeration to say that Takeshima issue research society’s Dokdo educational idea is the blueprint of Japanese education board. So, the examine its policy of Dokdo education has many significant meanings. The trend of Takeshima issue research society for 1∼3 stages is as in the following: For 1 stage, The necessity of Dokdo education was brought up to important agenda of Takeshima issue research society. For 2 stage, this society buckled down to the Dokdo education and made many teaching materials including 5 teaching guidance plans. For 3 state, this society produced the Japanese A/B teaching guidance plan and they concluded the making of teaching guidance plans. The educational objectives of 4 teaching guidance plans made in 2 stage are “understanding about circumstance of occurrence on Dokdo issue and having opionion of Dokdo issue solution.” All teaching guidance plans stipulate that the cause of occurrence on Dokdo issue is korea unlawful occupation after the declaration of the Peace Line(Syngman Rhee Line). And, they suggest that the solution of Dokdo issue is Korea and Japan’s joint litigation to 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In Japanese A/B teaching guidance plans made in 3 stage, It focuses attention on international law and modern historical records.

島根県地方政府の独島教育政策の頭脳集団(Think-Tank)である、「竹島問題研究会」の教育政策アイディアは、‘独島に関する日本中央政府の教育政策の青写真’といっても過言ではない。その点で「竹島問題研究会」が作成した「学習指導案」についての探求は、意味ある作業といえる。独島教育との観点から、1~3期「竹島問題研究会」の動向を検討すれば、‘1期で提起された問題意識’を‘2期で本格的に解決’しようとしており、3期では2期の連続線上にある。「竹島問題研究会」の教育目的は、‘私たちの領土であること明らかな竹島(独島)’を‘領土紛争地域化’し、これを‘韓国と日本が共同で国際司法裁判所に提訴すること’であるとする。この目的を達成するため「竹島問題研究会」は、その傘下に「高校における竹島学習方向検討会」を組織し、2期に5種の指導案を製作しており、3期には ‘高等学校地理歴史科、日本史A・日本史B 学習指導案’を製作した。 2期で製作した指導案は、‘独島問題が発生した経緯(原因)について理解し、その解決策に対する自分なりの意見を持つこと’を中心目標にしている。特にすべての学習指導案ごとに ‘独島問題が発生した経緯’を‘1952年の李承晩ライン(=平和線)宣言による韓国の不法占拠’と規定していた。それとともに、‘独島問題の解決策’のため‘国際司法裁判所へ共同提訴’しようと提案した。そのだけでなく、日本は‘独島問題の平和的解決’のために‘国際司法裁判所への提訴を提案したが韓国が断っているから独島問題が解決されないこと’と歪曲させて教育している。学習指導案の指導内容をみれば、前近代的な歴史的事実より「島根県告示40号」による独島の領土編入をした1905年以後の歴史’を重点的に扱っていた。 次に、「3期竹島問題研究会」が製作した高等学校地理歴史科、日本史A・日本史Bの「学習指導案」をみれば、2期に製作した「学習指導案」と同じく前近代の歴史研究よりは、近代日本の実効支配の根拠を探ることに重点を置いている。あわせて、‘日本の独島実効支配と領土編入との係わりで国際法に根拠’していることを強調することをみれば、現在独島問題を国際法によって国際司法裁判所へ提訴しようという 2期学習指導案の脈絡と同一線上にたっているといえる。

9

구가 가쓰난(陸羯南)의 균세(均勢) 담론에서의 반(反)국가이성

최정훈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2호 2017.06 pp.225-258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7,600원

이 글에서는 메이지 시대 사상가 구가 가쓰난(陸羯南, 1857-1907)의 균세(均勢, 세력균형) 사유를 중심으로 국가의 권력 행사를 뒷받침하는 논의에 대하여 검토한다. 그의 균세는 삼국간섭 직후 조선 개혁기에는 의협(義俠)과 인(仁)이 실현된 안정의 상태를 가리켰다. 열강의 중국 분할기에 균세는 한편으로는 대국의 팽창주의를 수식하는 명분으로, 한편으로는 중국의 개혁과 자립에 의해 달성된 안정 및 초보적 평화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의 균세 논의는 일본이 청일전쟁 이후에도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규범적 논변을 동원해야 하는 상대적 소국의 장소성(場所性)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일동맹 체결 이후 가쓰난이 균세에 부여한 규범적 의미는 약화되고, 균세는 일본의 능력에 따라 가변적인 힘의 분포라는 가치중립적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규범과 무관계한 균세 개념의 사용은 러시아에 대적할 만한 일본의 국제적 부상에 조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균세의 규범성의 탈락은 가쓰난 사상에서 권력 행사의 정당화 논리가 반(反)국가이성에서 국가이성으로 전환하였음을 의미한다.

This paper examines the way in which Kuga Katsunan 陸羯南 (1857-1907) used the notion of Kinsei 均勢 (Balance of Power) to legitimize the exertion of state power. During the Korean Reformation in 1895-6 directly after the Triple Intervention, his Kinsei meant stability resulted from the righteous deeds and benevolence. When the partition of China was in progress, Kinsei was used to refer to the pretext that was assumed to disguise expansionism of great powers on the one hand, and the desirable future condition in China that could be realized through political reform and its consequent state of independence on the other. Katsunan's discourses on Kinsei imply that, even after the victory in the First Sino-Japanese War, Japan still held the identity of relatively inferior state, which had to appeal to the normative arguments. However, the normative meaning of Kinsei was weakened after the First Anglo-Japanese Alliance, thereby giving way to its value-free meaning of distribution of power. The new manner in which Katsunan used Kinsei without any normative concerns corresponded to the exalted position of Japan. The decline of the normative aspect of Kinsei meant Katsunan's transition from Counter-reason of State to Reason of State within the writings intended to legitimize the exertion of state power.

本論文は、明治時代の思想家である陸羯南(1857-1907)が均勢(勢力均衡)に就いて展開した議論を手掛りとして、国家の権力行使を裏付けた議論を検討したものである。三国干渉の直後、朝鮮の改革期に、羯南の均勢は、義俠と仁が実現された安定を示す概念であった。列強による中国分割時代、均勢は、大国の膨張主義を修飾する為の名分を意味する一方、中国の改革と自立によって成されている安定及び初歩的平和を意味した。このような均勢の言説は、日本が日清戦争以後にも、ロシアを牽制する為に規範的論弁を以って訴えなければならない程、比較的小国の場所性を持っていたことを示している。しかし、日英同盟の締結以来、羯南が均勢に付与した規範的意味は弱まり、均勢は日本の能力に伴う可変的な力の分布という価値中立的な意味で使われ始めた。均勢が規範とは無関係に用いられたことは、ロシアに匹敵する日本の国際的地位の高揚に照応するものであった。均勢の規範性の脱落は、羯南思想において権力行使を正當化する論弁が、反国家理性から国家理性に転換したことを示している。

10

変貌する厳島神 -古代ㆍ中世文芸を中心に-

韓正美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2호 2017.06 pp.259-279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5,700원

본고는 『루이주코쿠시(類聚国史)』ㆍ『산다이지쓰로쿠(三代実録)』ㆍ『엔기시키(延喜式)』ㆍ『하치만구도쿤(八幡愚童訓)』(甲)ㆍ가쿠이치본(覚一本)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ㆍ나가토본(長門本) 『헤이케모노가타리』ㆍ『겐페이조스이키(源平盛衰記)』 등, 일본의 고대ㆍ중세 문예에 나타나 있는 이쓰쿠시마 신을 규명함으로써 이쓰쿠시마 신이 어떻게 변모해가는가 라고 하는 이쓰쿠시마 신의 변모양상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고찰한 것이다. 고대 문예에 있어서 아키국(安芸国)의 제1신의 신위(神威)를 나타낸 이쓰쿠시마 신은, 중세 문예인 『헤이케 모노가타리』 이외의 문예 텍스트에서는 전쟁의 신ㆍ관음ㆍ대일여래(大日如来)의 본지(本地)로서 그 신위를 드러냈다. 또한 『헤이케모노가타리』제 판본, 즉 『겐페이조스이키』에서는 대일여래의 본지로, 또한 나가토본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서는 여행의 신ㆍ불법흥행(仏法興行)의 주인ㆍ자비 제일의 명신(明神)ㆍ극락왕생ㆍ소원성취를 약속하는 신으로서의 신격(神格)을 나타냈다. 그리고 가쿠이치본 『헤이케 모노가타리』에서는 전쟁의 신ㆍ사갈라 용왕(娑羯羅竜王)의 세 번째 공주ㆍ태장계(胎蔵界)의 수적(垂迹)ㆍ황자 탄생 기원의 신ㆍ헤이시(平氏)의 조상신ㆍ천하안태(天下安泰)ㆍ병 치유의 신ㆍ삼명육통(三明六通)의 영신(霊神)으로서의 신위를 나타내고 있어서 각각의 텍스트 안에서 점차 변모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쓰쿠시마 신은 『헤이케모노가타리』이외의 문예 텍스트ㆍ『헤이케모노가타리』제 판본 텍스트에 있어서 공통으로 전쟁의 신ㆍ대일여래의 본지로서의 신격을 나타내지만, 『헤이케모노가타리』제 판본 텍스트에 있어서는 여행의 신에서 삼명육통의 영신에 이르기까지 그 기능과 변용 양상이 보다 복잡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신들이 신앙 주체측의 의식이나 사회 상황의 변화에 따라 서서히 성격을 바꾸어가는 것이 일본 민속종교사의 상식이라고 일컬어지기는 하나, 이상과 같은 이쓰쿠시마 신의 실로 다양한 변모, 예컨대 태장계의 수적ㆍ불법흥행의 주인ㆍ관음ㆍ대일여래의 본지ㆍ극락왕생ㆍ삼명육통의 영신 등은, 불교ㆍ밀교를 혼합한 형태로 영혼 구제나 현세ㆍ후세의 공덕을 구하면서 이쓰쿠시마에 대한 사람들의 요구나 원망(願望)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aspects of tranforming Itsukushima-god(厳島神)" by focusing on the Literary Arts in AncientㆍMedieval Japan. Itsukushima-god who showed the local deity god of the Aki country(安芸国) first, and it appeared as god of the military ㆍ Honji (their real form in Buddhism) of Kannon(観音)ㆍHonji of Dainichi Nyorai(Mahavairocana) in the Literary Arts except “The Heike Monogatari(平家物語)”in the Middle Ages. Itsukushima-god showed Honji of Dainichi Nyorai(Mahavairocana) in “Genpei Jōsuiki(源平盛衰記)”, and it also appeared as god of tripㆍthe master who spread Buddhismㆍgod of the mercy firstㆍrebirth in paradise(極楽往生)ㆍgod who promises the wish accomplishment in Nagato’s Book(長門本) “The Tale of the Heike”. And it also showed god of the militaryㆍthe third princess of Shyakatsura dragonlord(娑羯羅竜王)ㆍ manifested form of the Womb World(胎蔵界)ㆍgod of the prince birth prayerㆍthe patron saint(氏神) of Heike(平家) clanㆍgod of the world peace and security and the disease recoveryㆍgod of Sanmyo Rokutsu(Deity of six three wisdoms of Buddha) in Kakuichi`s Book(覚一本) “The Tale of the Heike”. It is common sense of the folk hierology that gods as the faith object gradually change the character depending on the consciousness by the faith main constituent and a social turn of events. But there are the really various changes of such Itsukushima-god as for manifested form of the Womb Worldㆍthe master who spread BuddhismㆍHonji (their real form in Buddhism) of KannonㆍDainichi Nyorai (Mahavairocana)ㆍrebirth in paradise god of Sanmyo Rokutsu(Deity of six three wisdoms of Buddha). It vividly show a demand and the desire of people for Itsukushima-god while demanding the relief of the soul or the profit in this world and coming ages as the form that it brought Buddhismㆍ esoteric Buddhism into.

本稿は、『類聚国史』ㆍ『三代実録』ㆍ『延喜式』ㆍ『八幡愚童訓』(甲)ㆍ覚一本『平家物語』ㆍ長門本『平家物語』ㆍ『源平盛衰記』など、古代ㆍ中世文芸に現れている厳島神を究明することにより、厳島神がどのように変貌していくか、という厳島神の変貌様相について考察したものである。 古代文芸において安芸国一宮としての神威を現していた厳島神は、中世文芸『平家物語』以外の文芸テクストでは、軍神ㆍ観音ㆍ大日如来の本地としてその神威を呈している。また、『平家物語』諸本のテクスト、即ち、『源平盛衰記』では大日如来の本地として、また、長門本『平家物語』においては、旅の神ㆍ仏法興行の主ㆍ慈悲第一の明神ㆍ極楽往生ㆍ所願成就を約束する神としての神格を現している。そして、覚一本『平家物語』においては、軍神ㆍ娑羯羅竜王の第三の姫宮ㆍ胎蔵界の垂迹ㆍ皇子誕生祈願の神ㆍ平氏の氏神ㆍ天下安泰ㆍ病気平癒の神ㆍ三明六通の霊神としての神威を現しており、時代とともにそのぞれのテクストの中で次第に変貌していくことが分かる。 厳島神は、『平家物語󰡕以外の文芸テクストㆍ『平家物語』諸本のテクストにおいて、共通に軍神ㆍ大日如来の本地としての神格を現しているが、『平家物語』諸本テクストにおいては旅の神から三明六通の霊神に至るまで、その機能と変容の様相がより複雑化されていることが窺える。 信仰対象としての神々が、信仰主体の側の意識や社会状況の変化に応じて性格を徐々に変えてゆくことは、民俗宗教史の常識であると言われているが、このような厳島神の実に多様な変貌は、例えば、胎蔵界の垂迹ㆍ仏法興行の主ㆍ観音ㆍ大日如来の本地ㆍ極楽往生ㆍ三明六通の霊神など、佛教ㆍ密教を交えた形態として霊魂の救済や現世ㆍ後世の利益などを求めつつ、当時厳島神に対する人々の要求や願望を如実に示していると言えよう。

11

한국전쟁에 대한 일본여성의 반응과 반전・평화운동의 양상

황익구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2호 2017.06 pp.281-307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6,600원

이 논문 한국전쟁에 대한 동시대 일본여성들의 반응을 고찰함으로써 전후일본의 반전・평화운동과 타자인식의 한계를 실증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목적이다. 한국전쟁을 전후(前後)한 여성작가 및 여성 지식인들의 반전・평화운동은 전전 일본의 도덕관으로부터 탈피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들 여성 작가와 지식인들의 반전・평화운동은 자신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최후에 쟁취하고자 하는 투쟁의 목표 또한 생활환경의 개선에 맞추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여성 작가 및 여성 지식인들의 평화운동 혹은 반전운동은 재군비나 국제관계로만 해석할 수 없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각각의 개인들이 보다 나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지 또는 가정 내외의 인간관계를 개선하고 개인이 직면한 구체적인 문제(예를 들면, 경제적 빈곤)를 해결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더 큰 관심과 노력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반전・평화운동의 전개는 한국전쟁에 대한 전후일본의 내셔널리즘의 문제와 타자인식의 한계는 도외시한 채 동시대의 소극적 평화운동에 대한 평가만을 지나치게 양산하는 문제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reaction of contemporary Japanese women to the Korean War and to demonstrate the limitations of postwar Japan 's anti-war and peace movement and others' recognition. The anti-war and peace movements of women writers and intellectuals who were before and after the Korean War attempted to break away from the morality of Japan. The anti-war and peace movements of these women writers and intellectuals were formed in close relationship with their lives, and the aim of the struggle to achieve last was also adapted to the improvement of the living environment. For this reason, the peace movement or the anti-war movement of women writers and intellectuals has problems that can not be interpreted only by remarriage or international relations, and it is necessary for each individual to be able to lead a better life, More attention and effort were focused on whether individuals could address specific issues facing them (eg, economic poverty). However, the development of such an anti - war peace movement resulted in the problem of overproduction of postwar Japanese nationalism and the limitations of other people's recognition of the passive peace movement contrary to the contemporary world.

本論文は朝鮮戦争に対する同時代の日本女性の反応を考察することによって戦後日本の反戦・平和運動と他者認識の限界を実証的に究明することを目指す。 朝鮮戦争を前後にして行われた日本の女性作家および女性知識人の反戦・平和運動は戦前の日本の道徳観から抜け出ることを指向していた。彼女らの反戦・平和運動は自分たちの生活と深くかかわって形成されていた。また最終的には反戦・平和運動の目標も生活環境の改善に向けられていた。そのため彼女らの反戦・平和運動は再軍備の問題や国際問題だけでは説明しきれない問題を孕んでいた。言い換えれば、個々人がより豊かな生活を営むことができるかどうか、また家庭内の女性の地位を改善しながら経済的な困難などの問題を解決できるかどうかにより関心を持って活動していた。しかしこのような反戦・平和運動の展開は、朝鮮戦争に対する戦後日本のナショナリズムの問題と他者認識の限界は度外視したまま、同時代の消極的な平和運動に対する過剰評価を生み出すようになった。

12

한국일본사상사학회 회칙 외

한국일본사상사학회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2호 2017.06 pp.309-332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6,100원

 
페이지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