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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思想 [일본사상]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국일본사상사학회 [Korean Association For Japanese Thought]
  • pISSN
    1229-9235
  • 간기
    연3회
  • 수록기간
    1999 ~ 2026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철학
  • 십진분류
    KDC 153 DDC 181
제30호 (12건)
No
1

5,800원

본고는 기타오지 로산진(北大路魯山人) 미학 속의 ‘용(用)’과 ‘아(雅)’에 대하여, 그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의 민예론을 비판했던 잡지 『호시가오카(星岡)』의 기사와 두 사람의 ‘미(美)’에 관한 문장을 통해서 고찰한 것이다. 로산진은 민예론이 죠테모노(上手物)의 미는 배제하고 있는 점, 각 계층과 계급에 따라서 ‘용’이 달라진다는 것을 모순으로 지적했다. 야나기의 민예론이 ‘오리엔탈리즘의 복잡한 문화정치학 속에서 창조된 혼종적이고 근대적인 산물’이기 때문에 로산진이 지적한 모순은 합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요리의 기모노’로서 도자기를 제작했던 로산진은, 실은 ‘용의 미’라고 하는 민예론의 핵심을 감각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한 창작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로산진과 야나기는 모두 조선의 미에 대한 개안에서 출발하여, 일본이 국수주의화되면서, 야나기는 민예론으로 심화되고, 로산진은 ‘아미(雅美)’의 세계로 ‘일본미’를 전략적으로 ‘창조’해 나갔다. 이렇듯 내셔널리즘은 일반적으로 미학적인 의식 위에 성립하는 것이다. 미학적인 관점을 우위에 두는 것으로 일본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동양의 타자로서 조선의 ‘미’는 ‘발견’되고 ‘해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In this paper, It will be discussed that the "Use" and "Grace" in the art of Rosanjin Kitaoji through the text on "beauty" of the article and both the magazine "Hoshigaoka" that had criticized the Mingei(folkcraft) theory of Muneyoshi Yanagi. Rosanjin pointed out the contradiction that Mingei theory excluded the beauty of good material and "Use" will be different by the hierarchy and class. Since Mingei theory of Yanagi is “a hybrid modern product that was created from the complex cultural politics of Orientalism", contradictions Rosanjin pointed out was justified. However, Rosanjin who was making beautiful pottery as "kimono of cuisine" could be called, in fact, as the creator that understood and practiced "the beauty of use", the heart of the Mingei theory. Rosanjin and Yanagi are starting from eye-opening to both Korean beauty. As Japan went to nationalism, Yanagi got to the deepening of the Mingei theory and Rosanjin began to “create” the "Japanese beauty" as "Grace" strategically. In this way, nationalism is to hold on top of the general aesthetic consciousness. In order to prove the Japanese superiority by placing advantage of the aesthetic point of view, It can be said that the "beauty" of Korea as others of the East was "discovered" and "interpreted"

本稿では、北大路魯山人の芸術の中の「用」と「雅」について、柳宗悦の民芸論を批判していた雑誌『星岡』の記事と両者の「美」に関する文章を通じて考察した。 魯山人は民芸論が上手物の美は排除していること、各階層と階級によって「用」が違ってくるということを矛盾として指摘した。柳の民芸論が「オリエンタリズムの複雑な文化政治学の中から創造されたハイブリッドでありながら近代的な産物」なので、魯山人が指摘した矛盾は尤もなことであった。 しかし、「料理の着物」として美しい陶磁器を作っていた魯山人は、実は「用の美」という民芸論の核心を感覚的に理解して実践した創作者ともいえよう。 魯山人と柳は両方とも朝鮮の美への開眼から出発して、日本が国粋主義化しながら、柳は民芸論への深化へと、魯山人は「雅美」へと「日本美」を戦略的に「創造」していった。このように、ナショナリズムは一般的に美学的な意識の上で成立するものである。美学的な観点を優位に置くことで日本の優越性を証明するため、東洋の他者として朝鮮の「美」は「発見」され「解釈」されたとい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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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0원

2000년 12월 8일부터 12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일본군 ‘위안부’문제와 관련하여 ‘여성국제전범법정’이라는 민간법정이 열렸다. 이 법정에는 합동기소장을 제출한 한국과 북한을 비롯하여, 중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네덜란드 등 각국에서 일본군 성노예제를 고발했고 64명의 피해자가 법정에 나왔다. 피해자들은 오랜 세월 수치감 속에 묻어 두었던 그들의 체험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함으로써 자아존엄을 회복하기도 하고 그들만의 힘을 얻는 과정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 법정은 비록 민간법정이지만, 일본가부장제의 정점의 자리에 있는 천황에게 ‘위안부’문제와 관련하여 유죄판결을 내린 획기적인 사건이다. 또한 이 법정은 일본군 ‘위안부’였던 아시아의 피해여성들과 세계의 페미니스트들의 연대로 이루어 낸 것으로, 일국주의적 성격이 강했던 일본의 전후 여성운동이 초국적 여성운동으로 영역을 넓혀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건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이 법정을 제안하고 개정하기까지 중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일본의 저널리스트이자 여성운동가인 마츠이 야요리이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여성국제전범법정’관련 연구에서 마츠이 야요리의 존재는 거의 조명되지 않았다. 따라서 본 연구는 법정의 최초의 제안자로서, 그리고 법정을 개정하기까지 국제적인 연대를 구축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마츠이 야요리 개인의 모습에 주목했다. 마츠이 야요리는 1970년대 일본남성들의 기생관광문제를 계기로 ‘위안부’문제에 천착했다. 하지만 천황의 존재가 절대적인 일본사회에서 전쟁책임자인 천황을 처벌하는 문제가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써 초국적 연대를 통한 법정을 구상하고 제안했다. 이러한 마츠이 야요리의 법정 제안은 일본의 여성운동이 초국적 운동으로 분위기를 전환하는 새로운 흐름을 조성했으며, 그가 주축이 되어 만든 여성단체들은 그의 동료와 후배 여성운동가들이 초국적 페미니즘을 실천할 수 있는 장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여성국제전범법정을 개정하는데 주요인물 중 한 사람인 마츠이 야요리의 활동분석을 통해 일본의 여성운동이 초국적 운동으로 이행해 가는 과정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Civilian court was held to deal with Japanese military 'Comfort women' issue on December 8-12 in 2000, which was called 'The Women's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on Japan's Military Sexual Slavery'. In the court, 64 victims attended who filed a complaint against Japanese military's sex slave system and they gathered not only from Korea and North Korea who filed a joint complaint but also from China, Taiwan, Philippines, Indonesia, Malaysia, Netherlands and so on. In the court, victims spoke publicly their experiences that had been buried for a long time due to the shame and they recovered self dignity and strength in the process. Though this court was a civilian one, it was an epoch-making event in that the Japanese emperor was found guilty on 'comfort women' issue who is at the peak of Japanese Patriarchy. Japanese Journalist and women's movement activist Matsui Yayori was the first proponent of this court. She played a central role from the beginning to the end. Though, Matsui Yayori's role has not been highlighted so far in studies on 'The Women's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on Japan's Military Sexual Slavery'. Therefore, this study focuses on Matsui Yayori not only as the first proponent of the court but also as an individual woman who contributed to the organization of international solidarity before the court was held. Matsui Yayori's court proposal engendered the creation of a new wave of transnational movement in Japanese women's movement and women organizations that were made by a key contribution of Matsui Yayori became an important place for the praxis of transnational feminism. Thus, this study has a major implication that we can see an aspect of Japanese movement's transformation into transnational feminism through the analysis of Matsui Yayori's activities who played a key role in opening 'The Women's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on Japan's Military Sexual Slavery'

2000年12月8日から12日まで日本の東京で日本軍‘慰安府’問題と関連して民間法廷が開かれた。これは‘女性国際戦犯法廷’‘ということで、合同起訴狀を提出した韓国と北朝鮮をはじめ、中国、台湾、フィリピン、インドネシア、オランダ、マレーシアなど各国で日本軍性奴隷制を告発しながら64人の被害者が法廷に出た。被害者たちは長い間羞恥心として胸の中に抱いていた彼女たちの体験を公開的に語ることで自我尊厳を回復したり彼女たちだけの力を得る過程を経験したりした。この法廷は民間法廷だが、日本の家父長制の頂点にいる天皇に‘慰安府’問題と関連して有罪判決を下した画期的な事件であった。またこの法廷は日本軍’慰安府であったアジアの被害女性たちと世界のフェミニストたちの連帯でなり遂げたことで、一国主義的であった日本の戦後の女性運動が超国的女性運動への領域を広がっていくのに重要な役割を果たした事件として意味がある。 この法廷を最初に提案したのは日本のジャーナリストであり女性運動家である松井やよりである。松井やよりは法廷の提案から法廷の全過程にかけて中心的な役割をしてきた。しかし、今までの'女性国際戦犯法廷'関連研究のなかで松井やよりはほとんど注目されていない。したがって、本研究は法廷の最初の提案者として、そして法廷を開廷するために国際連帯を構築するのに重要な役割を果たした松井やよりの個人の活動に注目した。松井やよりは70年代の日本男性たちの妓生観光をきっかけにして‘慰安府’問題に気付いた。この問題には責任者の処罰の問題が重要な宿題であったが、天皇の存在が絶対的に思われている日本社会では戦争の責任者である天皇を処罰する問題は難しいと判断して超国的連帯を通じての法廷を構想し提案した。この松井やよりの法廷の提案は日本の女性運動が超国的運動へもっと活発に雰囲気を転換する新しい流れを作り出した。そして松井やよりが主軸になって作った女性団体らは彼女の同僚と後輩の女性運動家には超国的フェミニズムが実践できる場にもなった。したがって、本研究は女性国際戦犯法廷を開廷するにおいて主要人物の一人である松井やよりの活動分析を通じて日本の女性運動が超国的運動に移行していく過程の一つの断面が見られることに意味が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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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戸学における名分論に関する一考察

金正坤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0호 2016.06 pp.4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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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0원

본 논문은 일본의 幕末·維新 시기에 지사(志士)들의 정신에 큰 영향을 끼친 미토학(水戶學)을 검토한 것이다. 예를 들어, 대표적 인물이라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등은 미토 번(藩)의 무사였던 아이자와 세이시사이(会澤正志斎)와 후지타 도고(藤田東湖)의 ‘존왕(尊王)' 사상에 감화된 인물이다. 미토학의 ‘존왕' 사상의 기저에는 명분론(名分論)적 군신(君臣) 관계에 대한 이해가 있다고 보고, 미토 학자의 저서를 통해 ‘명분론'이라는 관점에서 논한 글이다. 여기에서는 도쿠가와 미츠쿠니(徳川光圀)의 『大日本史』· 후지타 유코쿠(藤田幽谷)의 『正名論』· 아이자와 세이시사이(会沢正志斎)의 『人臣去就説』을 검토하였다. 나아가 일본 근대의 「명분론」은 기독교와의 만남을 통해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가를 메이지 기독교 신자인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를 통해 확인하였다. 도쿠가와 막번체제 하에서 유교적 입장에 기초한 『大日本史』는 주자학적 역사사상을 바탕으로 일본 역사의 ‘皇統의 正閏’과 ‘人臣의 是非’를 「도덕적 명분론」의 기준에서 밝히고자 하였다. 『正名論』은 유교적 명분론을 일본적 상황으로 바꿔 이해하고 막부는 역성혁명이 없는 만세일계의 황실을 익찬할 것을 주장하였다. 『人臣去就説』에서는 일본적 군신관계의 이해를 다시 유교전통적 해석으로 되돌려 놓았다. 근대에 이르러 유교적 군신관계를 기독교적으로 음미한 우치무라에게는 미토학의 심정과 에토스가 그의 기독교 수용에 있어서 토대의 한 부분을 감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This paper will review the Mitogaku a significant impact on the mind of the Shishi in the Late Tokugawa and Early Meji Period. For example, Shouin Yoshida and Takamori Saigou called the exponent are Seishisai Aizawa who was Mito Samurai and people influenced by "imperialism" thought of Toko Fujita.. The basis of the "imperialism" thought of such Mitogaku has the understanding for Justification theory of lord and vassal relations. I discussed this article through a representative book of Mitogaku from a point of view called Justification theory. I discussed it in this article around Dainihonnshi · Seimeiron · Jinshinkyoshusetsu. In addition, I confirmed it through Kanzou Uchimura who was Christ believer of the Meiji it was modern times, and how Justification theory acted.

本論文は、幕末·維新期における志士たちの精神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水戸学」を検討したものである。例えば、幕末·維新の代表的人物と呼ばれる吉田松陰、西郷隆盛などは、水戸藩士であった会沢正志斎と藤田東湖の「尊王」思想によって感化された人である。このような水戸学の「尊王」思想の基には名分論的君臣関係に対する理解があると見て、その水戸学者の著書をとおして「名分論」という観点から論じた積りである。 ここで取り上げたのは、徳川光圀『大日本史』・藤田幽谷『正名論』・会沢正志斎『人臣去就説』であり、また、近代になって「名分論」はどのように働いたかを明治の基督信徒である内村鑑三を通して確認した。 まず、前者は共に徳川幕藩体制の下に、儒教的立場に基づきながら、『大日本史』は、朱子学的歴史思想に基づいて、日本の歴史において「皇統の正閏」と「人臣の是非」を「道徳的名分論」の基準で明らかにしようとした。幽谷の『正名論』は、儒教的「名分論」を日本的に読み替えて(「名分論」が直ちに「国体の尊厳」に繋がるので、臣下は条件なく絶対服従すべき)理解し、幕府は易姓のない万世一系の皇室を翼賛すべきことを唱えた。『人臣去就説』では、日本的君臣関係の理解を再び儒教伝統的解釈に戻した。要するに、「君君たらざれども臣臣たらざるべからず」・「忠臣は二君に仕えず」から「君臣義合」・「諫不聴去」へ変化であった。近代になって基督信徒であった内村鑑三は、儒教的君臣関係をキリスト教的に読み替え、君に対する忠誠を神に果たしたのであるが、彼の水戸学に打たれた、その心情とエトスは、キリスト教受容において土台として役割を果たしたといえよ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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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0원

이시카와 준 「백묘」가 이른바 모델 소설임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브루노 타우트라는 실존인물과 작중인물인 크라우스 박사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무엇보다 큰 차이는 이세신궁과 천황이라는 존재에 대한 언급의 유무인데 이는 선행연구를 통해 명확히 밝혀진 바 있다. 중요한 것은 그렇다면 이러한 결여 혹은 삭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라는 점일 텐데, 본고에서는 ‘일본적 특수성’을 크라우스 박사의 말에서 지우고 탈색시킴으로써 브루노 타우트 저작의 기저라 할 형식과 보편을 극대화하여 보여주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다시 말해 ‘타우트 신화’를 형성했던 측면들 가운데에 이시카와 준은 ‘일본적인 것’ 논의에 공헌한 내셔널리즘적인 측면이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든 ‘통용’ 가능한 보편적 가치를 중시한 측면에 보다 주목했던 것이다. 소설 「백묘」에서 이러한 주제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리이피나 부인을 통해서이다. 크라우스 박사가 브루노 타우트를 모델로 조형된 인물이었듯이 그녀 역시 바르바라 부브노바라는 실존인물을 떠올리게 한다. 리이피나 부인은 크라우스 박사의 초상화를 그리는 데에 있어 먹을 이용한 ‘선적’이며 ‘동양적’인 ‘백묘’라는 기법을 활용하려 한 바 있다. 하지만 그녀는 또 하나의 크라우스 박사 상을 그리는 데에는 ‘서양’의 ‘포비슴’적인 ‘색채’를 도입할 것을 선언한다. 다시 말해 ‘백묘’라는 일본적 ‘풍토’에 속박되어 있던 자신과의 절연을 결심하고 유럽에 기원하는 ‘야수파’적인 것에 다시금 자신의 예술을 접속해 나간다는 의미로서 이는 ‘일본’ 내에서 다시금 ‘서양’적인 것을 복원하고 중시해야 함을 나타낸다. 이시카와 준이 「백묘」를 발표한 1939년은 중일전쟁과 미일개전의 중간에 위치한다. 그야말로 반군국주의적이고 반전적인 사상과 출판물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던 ‘「마르스의 노래」의 계절’이었고 ‘귀축미영(鬼畜米英)’의 구호가 소리높이 외쳐지던 시대였음은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이렇게 서양과 일본의 대결과 상극이라는 담론 구도가 결정적이던 1930년대 일본이었기에 ‘보편’과 통하는 ‘서구적인 것’의 복원을 외쳤던 소설 「백묘」는 시대의 주류 담론에 맞선 하나의 실험으로서 크나큰 의미를 지닐 수 있었다.

Jun Ishikawa’s Hakubyo is well-known as a model novel. However, it is also true that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a real person named Bruno Taut and the figurative character named Dr. Kraus. The most crucial difference between them is the reference to Ise Shrine and Tenno. What does this lack or elimination mean? In this paper, I claim that the elimination of Japanese uniqueness in Dr. Kraus has brought the effect of emphasizing the type and generality of Bruno Taut’s work. Jun Ishikawa exerted oneself to expose the aspect of universality rather than nationalism qua being Japanese among Bruno Taut’s work. It is through Mrs. Reapina that this theme is most dramatically revealed in the novel Hakubyo. She reminds you of a real person named Варвара Бубнова as Bruno Taut does. Mrs. Reapina tried on oriental painting technique called Hakubyo using Chinese ink featuring line and colourless. But, she get to declare the acceptance of the western painting technique called Fauvism featuring colour. This means re-emphasis and restoration of the West in Japan. Hakubyo was released in 1939, the year which is between Sino-Japanese War and US-Japanese War. It was the time of strengthening censorship on anti-militarism and uplifting the Western and Japanese showdown. Under such conditions, Hakubyo asserted the restoration of the West in japan as a kind of generality. Therefore, Hakubyo could have great significance as a trial against the mainstream discourses of that time.

石川淳「白描」がモデル小説であるのは周知の通りである。だがしかし、ブルーノ・タウトという実在人物と作中人物のクラウス博士とでは大きなズレが存在しているのも事実である。伊勢神宮と天皇の存在に関する言及の有無がまず大きな差異であることは先行研究から既に明らかになっている。 重要なのは、かかる欠如あるいは削除がいったい何を意味するのかということであろう。本稿では、かかる「日本的特殊性」をクラウス博士から脱色させることで、ブルーノ・タウトによる著作の基底にある形式と普遍へより注目させる効果をもたらしたと分析した。ブルーノ・タウトをめぐる二段階の受容のなか、「日本的なもの」議論に貢献するナショナリズム的なものとしてではなく、世界中に通用する普遍的なものの重視という側面により注目した石川淳の姿がここに浮び上がる。 小説「白描」の作中人物のなか、かかる主題を最も劇的に体現するのはリイピナ夫人である。クラウス博士がブルーノ・タウトをモデルに造形されたように、彼女もやはりワルワーラ・ブブノワという実在人物を思い出させる存在である。リイピナ夫人はクラウス博士の肖像を描くに際して「白描」という「線的」で「東洋的」な技法を用いたことがある。しかし、もう一つのクラウス像を描くに際しては、西洋の「フォービスム」的な「色彩」を導入することを宣言することとなる。すなわち「白描」という日本的「風土」に束縛されていた自分から離れ、ヨーロッパに起源する「野獣派」的なものに再び自分を接続させていくということであって、これは「日本」のなかに改めて「西洋」的なものを復元させ、重視していくべきであることを物語る。 石川淳が「白描」を発表した一九三九年は中日戦争と日米開戦の間に位置する。反軍国主義で反戦的な思想と出版物に対する検閲と統制が強まっていた「「マルスの歌」の季節」であり、鬼畜米英のスローガンが声高く叫ばれていた時代であったことは言うまでもない。西洋と日本の相克という言説の構図が決定的であった一九三〇年代日本であったからこそ、普遍的なものとして「西洋」の日本における復元を主張した小説「白描」は、当時の主流の言説に立ち向かった一つの実験として大きな意味を有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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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이타 가쓰미(黒板勝美)의 외교사ㆍ대외관계사에 대하여

데시마 다카히로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0호 2016.06 pp.97-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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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0원

본고는 구로이타 가쓰미(黒板勝美, 1874-1946)를 통하여 외교사・대외관계사라는 연구 분야가 근대 일본 국사학의 일부로 생성된 과정에 대하여 고찰한 것이다. 구로이타는 국사학의 틀을 완성한 주요 인물의 한 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그 틀 안에서 외교사 분야를 정립하고 학문상의 의의를 부여한 인물로, 1913년 (주저인 『국사의 연구』재정판 간행 시점)까지는 '국사'가 '국토의 역사가 아니라 국민의 역사' 라는 생각을 정립시켰다. 즉, 일찍이 일본인이 해외에서 활약한 지역을 '국사의 범주'로 간주하였는데, 이에 관하여 논하는 연구야말로 외교사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연구라고 본 것이다. 또한 그는 1927년에 동남아시아에서 직접 사적(史蹟)・사료 조사를 하는 등 이 분야의 연구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본고에서는 특히 그의 베트남 호이안(Hoi An) 사적 조사에 주목했는데, 그는 이와 같은 현지 조사를 바탕으로 강연 기록・논문 등을 많이 발표하였다. 이를 통하여 단지 16-17세기에 일본인의 해외 활동에 대한 현창(顕彰)이 아니라 그들의 해외 진출이 활발할 수 있었던 조건과 한계점 등을 고찰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 전후 일본의 현실적인 과제(동남아시아에서의 경제적 발전 등)를 염두에 두고 그는 '일본의 대외 전개에는 국가적 후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즉 구로이타는 대외관계사의 국책으로서의 대외 정책에 기여하는 역할을 중시한 것이다.

In this paper, we examine specifically the beginning and establishment of the field of study that deals with the history of Japan's external relations. Katsumi KUROITA(1874-1946), who made the framework of modern Japan's national history, also groped to define the field above under his framework. By 1913 when his major work "Kokushino Kenkyu" was revised, he had thought that national history was not the history of the land but the history of the people. Then he regarded foreign places where Japanese people expanded in the past as a territory of national history. Also he supposed that issues about activities of the Japanese overseas should be included in the field of study that deals with the history of Japan's external relations. In addition he prosecuted the study about Japan's foreign relationship actively. He visited Southeast Asia to explore historical sites and records in 1927 and published some papers about that. Through the study about them, he not only described Japanese merchants' activities in the 16th and 17th centuries but also deliberated on the limitation or weakness of them. As a result he was able to gain the conclusion that Japanese people went overseas successfully only under the support of the state. Based on the above, it could be said that he expected the field of study above to take a role of solving real problems in 1920s like Japan's economic advance in Southeast Asia.

本稿は、外交史(いわゆる対外関係史)という研究分野が、近代日本の国史学の一部として生成する過程について、黒板勝美(1874-1946)という歴史学者を通じて具体的に考察したものである。国史学の体系化を推進した主要人物の一人である黒板は、その枠組みのもとで、同分野をどのように意義づけるのかも模索していた。1913年(彼の主著 『国史の研究』再訂版刊行年)までには、黒板は、「国土の歴史」ではなく「国民の歴史」こそが国史だと考え、過去に国民が海外に出向いて活躍した地域を 「国史の範囲」と見なすに至った。そして、これに関する論点を扱う分野としての対外関係史の進展を望んだのである。さらに黒板は、自ら同分野の研究にも積極的に関わった。1927年には南洋(東南アジア)地域に出向いて実際に史蹟や史料の調査も行い、それを踏まえた講演記録や論文も発表した。本稿では特にベトナム・ホイアンにおける史蹟調査に注目するが、黒板は、それらの調査・研究を通じて、単に朱印船貿易家の海外での活躍を賞賛するのではなく、過去の日本国民の対南方活動が活発化した条件や、その活動の限界面などを考察した。そして、今後の日本の現実的課題(南洋方面への経済的な進出など)を見据えて、「日本の対外的発展には国家的支援が必要」という結論を得た。黒板は、当該研究分野に、国策としての海外展開に寄与する役割を期待したのである。

6

6,100원

이 글의 목적은 ‘일본어’를 ‘국어’로 강제해 간 제국의 언어정책에 마이너리티 언어 사용자·오키나와인들이 어떻게 반응해 갔는지 살펴보는 데에 있다. 이를 위해 크게 두 가지 지점을 문제 삼았다. 하나는, ‘황민화를 추진하는 그룹 vs. 이에 저항하는 야나기·민예 그룹’의 대결구도로 비춰졌던 1940년의 방언논쟁이 단순히 표준어를 강화하기 위한 오키나와어 존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마찬가지로 오키나와 내부의 논리 역시 방언 말살을 내세우며 노골적인 황민화를 표방한 논리로 균질하게 정리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다른 하나는 뿌리 깊은 차별이 내포된 마이너리티 언어의 포위망을 벗어나 에스닉 언어로의 변화를 시도해 간 ‘우치나구치’의 전략성을 야마시로 세이츄의 『구넨보』와 지넨 세이신의 『인류관』을 통해 부각시켜 보고자 하였다. 두 텍스트 공히 오키나와어가 결코 방언으로 밀려난 마이너리티 언어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으며, 오히려 정치적 변동에 따라 오키나와인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언어를 재편해 간 정황, 더 나아가 본토에 대항(저항)하여 오키나와(인) 아이덴티티를 드러내기 위한 전략적 수사로 기능하고 있음을 포착할 수 있었다.

The purpose of this statement is to observe how minority language users·Okinawans reacted to language policy which enforced Japanese as the main language by the Empire. For this, two main points were questioned. First, it was pointed out that the 1940's language conflict viewed as confrontation between group propelling Japanizing vs. Yanagi Muneyoshi folk art group was not the problem of abolishing Okinawan just to strengthen standard language, likewise, the logic inside Okinawa also rendering the annihilation of tongue, and with logic supporting explicitly for Japanizing is not homogeneously organized. Another one is to magnify the Uchinaguchi's strategy that tried endlessly to alter into ethnic language by breaking away from the siege of minority language that contains deeply rooted discrimination through Yamashiro Sheichyu's 『Gu-nen-bo』 and Jihnen Seishin's 『Anthropology』 Two texts show that Okinawan was not ousted as minority language, instead, acquisition could be made on the situation in active reorganization of language by Okinawans themselves keeping up with political change and furthermore, it was functioning as strategic operation to reveal the Okinawan identity by resisting main land.

本稿は、「日本語」を「国語」として強制した日本帝国の言語政策において、マイノリティ言語使用者たちがどのように対応していったかを考察したものである。論点は大きく二つに分けられる。一つは、「皇民化を推進するグループ vs. これに抵抗する柳宗悦·民芸グループ」の対決構図に映し出された1940年の方言論争にみられるように、単純に標準語を強化するための沖縄語の存廃の問題ではないということ、同様に沖縄内部の論理も方言抹殺を掲げ、露骨に皇民化を標榜した論理として均質に纏められないということを指摘した。もう一つは、根深い差別が内包されたマイノリティ言語の包囲網を逃れたエスニック言語への変化、つまり「ウチナーグチ」の戦略性を、山城正忠の『九年母』と知念正真の『人類館』を通して浮彫りにした。両テキストに共通するのは、登場人物が語る沖縄語は、決して強制的に方言化されたマイノリティ言語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むしろ政治的変動によって、沖縄人自らが能動的に言語を再編していった情況、ないしは、本土に拮抗(抵抗)し、沖縄人アイデンティティを表わすための戦略的レトリックとして働いていたことを確認することができ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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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동조궁의 성립과 일광사참의 전개

양익모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0호 2016.06 pp.171-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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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치기현 닛코시에 위치하고 있는 일광동조궁은 에도막부 초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동조대권현으로 모신 신사이다. 이에야스는 사망 후 ‘팔주의 진수(八州之鎭守)’ 즉 관동에 수립된 도쿠가와가의 쇼군 정권과 자손을 후세(末代)까지 보호하는 수호신에 되려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다. 신사의 소재지로 닛코가 선정된 것은 닛코의 지리적, 종교적 상징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광동조사는 천황으로부터 ‘궁(宮)’의 호칭을 부여 받음으로써 단순한 신의 성격을 넘어 ‘일본의 신’으로서 승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창건된 일광동조궁에 쇼군이 참배하는 것을 ‘일광사참’이라고 한다. 일본에서 일광동조궁 및 일광사참에 관한 연구는 여러 분야에서 행해져 왔다. 연구는 이에야스의 신격화 문제, 각지에 분사되어 설립된 동조궁에 대한 민중의 인식, 일광사참시에 행해지는 행렬 및 제례와 관련된 문제 등에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연구는 전무하여 본고는 한국에서의 일광사참과 관련된 연구가 진행되기 위한 기초를 마련하고자 한다. 일광사참 성격은 먼저 ‘신군(神君)’ 이에야스의 기일에 동조궁 참배를 한다는 의미에서는 도쿠가와 쇼군가(將軍家)의 집안 의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다이묘, 하타모토 등의 동행이 명해진다는 의미에서는 동조궁 이데올로기를 통한 막번(幕藩)간의 주종관계 안정을 목적으로 하는 쇼군권력을 과시하는 선전행위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일광사참은 초기(2대 3대)쇼군시기에 집중적으로 행해졌으며 4대 쇼군 시기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으며 이후 8대 쇼군, 10대 쇼군, 12대 쇼군 시기에 한 번씩 실시되었다. 초기의 사참과는 달리 중기, 후기의 사참은 흔들리는 도쿠가와 정권을 재건하기 위한 통합 및 정책 실시 기반 형성의 성격이 강하였다. 즉 초대 쇼군 이에야스의 후광을 통해 쇼군권력의 안정화 및 사회 안정화를 꾀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일광동조궁의 창건과 일광사참의 전개에 대하여 서술하였지만 중요한 것은 일광동조궁에 모셔진 신 이에야스의 의미일 것이다. 향후 이에야스의 신격화와 관련된 연구와 신격화에 대한 민중의 인식 등을 보완하여 일광사참에 대한 연구를 공고히 하고자 한다.

Nikko Tosho-gu Shrine located in Tochigi Prefecture, Japan, is a shrine where Tokugawa Ieyasu, the first shogun of Tokugawa shogunate is enshrined as Tosho-gu temporary manifestation of Buddha. This shrine includes Ieyasu's will to becoming 'protector of 8 states,' a guardian who protects shogun power of Tokugawa family established in Kanto area after his death. The reason that Nikko is the place of the shrine derives from geographical and religious symbolism of Nikko. Nikko Tosho-gu temple was entitled 'shrine' by the emperor and, by doing so, it was raised to 'God of Japan' beyond a simple God. Shogun's paying respect to the Nikko Tosho-gu Shrine which has been established in such way is called attendance on the shogun's visit to Nikko. Research on 'Nikko Tosho-gu Shrine' and 'Attendance on the Shogun's Visit to Nikko' has been conducted in various fields. Research is associated with problem of deification of Ieyasu, people's awareness on Tosho-gu Shrine which was spread to each region and built, and parade and ritual ceremony performed during the attendance on the shogun's visit to Nikko. However, there is no study on the attendance on the shogun's visit to Nikko in Korea. As such, the present study aims to prepare the basis for the conduction of research on the attendance on the shogun's visit to Nikko. In terms of characteristics of the attendance on the shogun's visit to Nikko, it can be considered as the Shogun family's ritual in that paying respect to Tosho-gu Shrine on the anniversary of 'god emperor' Ieyasu's death. In another sense, however, it can be considered act of propaganda boasting shogun power with purpose of stabilization of relation between master and servant in Bakuhan system through ideology of Nikko Tosho-gu Shrine in that the accompany of daimyo and hatamoto, etc. was ordered. Such attendance on the shogun's visit to Nikko was performed intensively in the early period of shogun (2nd and 3rd) and suspended in the 4th shogun. Since then it was performed once in each 8th, 10th and 12th shogun period. Unlike the attendance on the shogun's visit in early time, that in the mid and late period strongly aimed to lay a foundation for integration and execution of policy to reestablish the shaking Tokugawa power. In other words, it made an attempt at stabilization of shogun power and society through the first shogun Ieyasu. As we have seen, the establishment of Nikko Tosho-gu shrine and development of attendance on the shogun's visit to Nikko was described. However, what is important might be the meaning of Ieyasu, the god enshrined in Nikko Tosho-gu shrine. There is a need for solidification of next study on attendance on the shogun's visit to Nikko by complementing the study on the deification of Ieyasu and people's awareness on deification.

日本栃木県日光市に位置する日光東照宮は江戸幕府の初代将軍である徳川家康を東照大権現として祀る神社である。家康は死亡後「八州之鎮守」すなわち、関東に立てられた徳川家の将軍政権と子孫の末代まで守護する守護神になろうとする意思が含まれている。神社の所在地で日光が選ばれたのは日光の地理的、宗教的な象徴性からである。日光東照社は天皇から「宮」の称号を与えられることによって普通の神から「日本の神」に昇格される結果となった。このように創建された日光東照宮に将軍が参拝に行くことを 「日光社参」という。日本で日光東照宮と日光社参に関する研究は様々な分野から行われた。家康の神格化問題、各地に分社されて設立した東照宮に対する民衆の認識問題、日光社参時の行列問題及び祭礼問題などがそれである。しかし、韓国での研究は皆無であり、本稿は韓国で日光社参と関連する研究が行われるための基礎を整えたい。日光社参の性格は「神君」家康の忌日に東照宮に参拝する意味では、徳川将軍家の家門儀礼とも言えるだろう。また、社参の際、大名、旗本などが同行することから東照宮イデオロギーを利用した幕藩間の主従関係の安定を目的とする意味もあった。このような社参は初期(2代、3代)将軍時期に集中的に行われた。そして4代将軍時期を最後に中断された。社参が再開されたのは8代将軍の時期であり、以後10代と12代将軍の時期に一回ずつ行われた。初期の社参とは異なり、中期・後期の社参は揺れる徳川政権を再建するための統合及び改革政策の実施基盤をつくるためであった。以上のように日光東照宮の創建と日光社参の展開について述べたが、重要であることは日光東照宮に祀られた神、家康の意味であろう。今後、家康の神格化と関連する研究と神格化に対する民衆の認識などを補って日光社参に関する研究を進めたいと思う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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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동아시아 라디오방송문예 연구

엄현섭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0호 2016.06 pp.197-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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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근대 라디오방송의 초창기 위안방송론과 연예방송론을 중심으로 방송론의 중요한 사상을 연구하였다. 국내에서 근대 라디오방송 연구는 사회과학적 측면의 문제가 특히 부각되면서 보편적 연구공간을 창출하지 못하고 지엽적인 경향으로 한정되어 왔다. 이처럼 연구 중심축이 식민지 본국과 식민지의 문제에 고착되어 전체 시야를 확보하지 못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라디오라는 신매체의 등장으로 제국일본의 문화권력은 바쁘게 움직였고 이것을 자신들이 자유자재로 사용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인식의 영향으로 식민지 본국과 외지는 지속적으로 방송국이 건설되었고 이에 따라 방송정책, 프로그램의 목표, 방향 등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표준은 제국일본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한 지침이었다. 이에 따라 방송 프로그램 중에서 위안방송과 연예방송은 마이크로폰 예술이라고 칭하면서 기존의 음악, 연극, 연예로 분화되어 위안방송의 표준을 창조하였다. 라디오는 청각을 중심으로 발전한 매체이다. 따라서 이에 맞는 미적 가치들이 창출되었다. 시각적 예술 요소를 제거한 것 즉, 무대극에서 색채, 형태, 동작, 광선 등을 제외한 대사와 음악과 음향만을 조합한 것을 청각에 호소하여 거기에 미를 구성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있기는 있지만 그 미라는 것이 시각적 요소를 더한 본체에 환원되는 것보다는 미적 가치가 보다 높다고는 할 수 없다. 이에 순수하게 청각만을 통하여 미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하는 라디오 드라마라는 신 양식을 만들었다.

In this study, it was to study the important thought of broadcasting theory to center the initial comfort broadcasting Theory and broadcast the Arts theory of modern radio broadcasting. Study of modern radio broadcasting in the country, the social science aspects problem is especially in relief, not to create a space of universal study, has been limited to the foliage trend. In this way, the central axis of the study, had the colonial home with colonial issues that can not be secured fixed and in full field of view to the problem. Empire Japanese cultural power with the advent of radio trough media was moved busy this, wished that their will freely used. Under the influence of such recognition, home and other places of the colony was built continually broadcasting stations, broadcasting policy accordingly, the purpose of the program, such as the direction has been made. These standards, it was the major guidelines that through the whole of the empire of Japan. As a result, while referred to as comfort broadcasting and entertainment broadcast microphone art in the broadcast program, the existing music, theater, be differentiated into entertainment, it created the standard of comfort broadcasting.

本研究では、近代のラジオ放送の初期の慰安放送論と放送藝術論を中心に放送論の重要な思想を研究した。国内において近代ラジオ放送の研究は、社会科学的側面の問題が特に浮き彫りにされ、普遍的研究の空間を創出せず、枝葉的な傾向に限定されてきた。このように、研究の中心軸が、植民地本国と植民地の問題に固着されて全視野を確保できないという問題を抱えていた。 ラジオとメディアの登場で帝国日本の文化權力は忙しく動き、これを自分たちが自由自在に使用することを望んだ。このような認識の影響で、植民地の本国と外地には継続的に放送局が建設され、それに応じて放送政策、プログラムの目的、方向などが作られた。これらの標準は、帝国日本の全体を貫く主要なガイドラインであった。これにより、放送番組の中で慰安放送と芸能放送はマイク芸術と称しながら、既存の音楽、演劇、演芸に分化され、慰安放送の標準を創造した。 ラジオは、聴覚を中心に発展した媒体である。したがって、これに合わせて美的価値が創出された。視覚芸術の要素を除去したもの、すなわち、舞台劇で色彩、形、動作、光線などを除き、臺詞と音楽と音響だけ組み合わせたものを聴覚に訴えて、そこに美を構成させることができるものもなくはないが、それは純粋に視覚的な要素を加えた本体に還元されるものではなく、美的価値がより高いとはいえない。そこで純粋に聴覚だけを通して美意識を呼び起こすことができなければならないラジオドラマという新フォームが作ら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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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화에 있어서의 신성한 돌의 표상

이경화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0호 2016.06 pp.217-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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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은 인류 문명의 시원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화권에서 다양한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다. 일본의 신화 속에도 돌은 태양신 아마테라스오미카미가 칩거했던 아마노이와야토(天石屋戸)를 비롯해 다양한 관념으로 표상되고 있다. 본고는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이러한 돌의 표상을 고찰해본 결과,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돌의 원형적 상징 외에도 다음과 같은 특징을 정리해볼 수 있었다. 첫째, 돌(바위)은 삶과 죽음・광명과 어둠・아름다움과 추함 등 이원적 세계의 경계에 있는 존재이며 신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둘째, 이원적 세계를 아우르는 석신(石神)은 풍요와 재앙이라는 양면을 지닌 뇌신(雷神)과 결부되기도 한다. 농경에 필수적인 강우를 관장하며 물을 다스리는 주력(呪力)을 가진 뇌신은 인간에게 풍요와 번영을 주기도 하지만, 분노하면 무서운 재앙을 초래하는 난폭한 신이기도 하다. 아울러 신공황후전승과 관련하여 돌은 황후의 신라정벌과 왕권의 확립이라는 과업에 조력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만삭의 몸으로 신라정벌에 오른 신공황후가 돌로 자신의 출산 시기를 조절한 신통력은 그녀가 신라왕자 아메노히보코의 후예라는 전승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From the origin of human civilization to this day stones have been the objects of various beliefs in numerous cultural areas. Branching out from Amano-Iwato (天石屋戸), where Amaterasu (the Japanese solar deity) hid, the tales of mystical stones extend to Japanese myth. Based on the study for examining what these stones represent in Japanese mythology, the following characteristics could be found besides the archetypal symbol of stone as eternal life. First, the stone is recognized as a presence lying on the boundaries of dualistic world: life and death, light and darkness, and beauty and unsightliness. Second, the stone is often associated with Raijin(雷神, the god of lightning), who possesses divine abilities (呪力) in governing water. Rajin controls rainfall that is vital to agriculture and may give abundance and prosperity to humans. However, when enraged, Rajin can bring about terrible disasters. Third, with respect to the Empress Jingu Legends, the stone assists the empress in conquering Silla and establishing royal authority. Empress Jingu was in her last month of pregnancy when she rose to the conquest of Silla and she controlled the time of her delivery with the stone. With this power, the myth that Empress Jingu is the descendant of the Silla prince, Amenohiboko, can be connected. In addition, the empress’s conquest would have been impossible without the protection of the god of the sea (海神). This too has deep relations with the magical ability to control water.

石(岩)は人類文明の始原から今日に至るまで諸文化圈において様々な信仰の対象となってきた。日本においても天石屋戸をはじめ、神聖な石は神話の要所に登場し、多様な観念を表している。本稿では日本神話に見られる石の様相を検討し、その表象するところを考察してみた。基本的には 「永遠の命」という原型的で普遍的な石のイメージも確認することできたが、その外、特徴的な点は次のようである。 第一に、石は生と死・光明と闇・美と醜といった二元的世界の境界に位置する存在であり、神として信仰されている。第二に、二つの世界にまたがる石神は荒魂と和魂という両面を持った雷神と結び付けられている。農耕に欠かせない降雨を制し、水を司る呪力を持った雷神は人間に豊穣や恩恵を与える神であるとともに、災いをもたらす荒ぶる神でもある。さらに、神功皇后の伝承においても石は 「新羅征伐」の成功に重要な役割を果たしている。臨月の皇后が渡海の際、腰に石を巻きつけて出産を遅らせたという神通力の持ち主として描かれたのは、彼女が天日矛の裔であるという伝承と無縁ではないと考えら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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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 천황제와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 - 분화와 통합 -

이성환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0호 2016.06 pp.241-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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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민은 패전이라는 ‘자연상태’에서 군주제(천황제)와의 단절을 회피하고, 자율적인 개인에 의한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지 못하고 구질서를 수용했다. 그 결과 상징 천황제와 함께 구질서의 ‘신민(臣民)적 에토스’가 온존하게 되었다. 천황제라는 군주제의 형식이 유지됨으로써 전전(戰前) 천황제의 가치체계를 불식시키지 못하면서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는 한계와 문제점을 내포하게 되었다. 그것은 주로 전전의 절대주의 천황제 하에서 형성된 지배원리가 심층적인 차원에서 전후에도 온존함으로써 야기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군주제를 유지함으로써 군주제와의 대결을 전제로 덕성을 갖춘 시민들의 자치를 지향하는 공화주의적 이념을 결여하게 된 것이다. 이를 본고에서는 일본적 특수성이라 했다. 이러한 공화주의를 결여한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기제를 내포하고, 이질적인 것을 억압・배제하고 동질적인 순응성과 획일성을 야기한다. 사회적 소수파에 대한 배제와 억압이 그것이다. 최근 일본 사회의 보수화와 함께 등장하는 외국인(소수파)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 등은 미성숙한 전후 일본민주주의를 배경으로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개인적 자율성이 결여된 민주주의는 공적 영역에서의 자유를 억압하고, 다수의 이름으로 전전의 파시즘이나 나치즘과 같이 전체주의적인 독제를 등장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 최근 아베 정권이 들어와 가속화된 역사수정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우경화 내지 보수화는 이러한 점에서 매우 우려스러운 현상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면, 전전 구질서의 가치체계를 단절하지 못한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는 전쟁 가해자로서의 주체적인 윤리도 확립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Japan's postwar democracy was founded on the continuity of the prewar absolutistic Emperor system. That because the vast majority of Japanese people supported keeping of the Emperor system under the GHQ. That Japanese people have declined to break with the monarchy(the Emperor system) in the defeat of 'natural state' and have accepted the old order does not create a new order by the autonomous individual. As a result, "ethos of subjects (臣民) ' of the old order was maintained with the Emperor system. Therefore, by continuity for the monarchy style of emperor system could not wiping out the value system of prewar Emperor system, postwar Japan democracy have had limitations and problems. Specially, since the keeping of the Emperor system, it became a lack of Republican ideals of the virtues of the citizens’s autonomy against the monarchy. In this paper, it was called ‘the uniqueness of Japan.’ That democracy lacking of Republican ideals has the mechanism to suppress the autonomy for individual and excludes heterogeneity and also leads to a homogeneous compliance and conformity. In other words, the exclusion and repression of social minorities is that. Conservatives and hate speeches against foreigners in recent Japan society would have to see postwar a immature Japanese postwar democracy in background. Conservatives and hate speeches against foreigners in recent Japan society is from postwar immature Japanese postwar democracy. The democracy lacking individual autonomy oppresses freedom in the public sector and there is a possibility that the emergence of totalitarian dictatorships such as fascism and Nazism of the name of the majority. Japan's conservative swing that based on the accelerated history revisionism in the Abe regime recently is a very worrying phenomenon in this regard. At last, Japan's postwar democracy has not severed the value system of the prewar old order, it was also not able to establish independent ethics as the perpetrator of war.

本稿は、象徴天皇制が導入された過程と、象徴天皇制と戦後日本の民主主義との関連性について検討したものである。具体的には、象徴天皇制下における戦後日本の民主主義が持つ「日本の特殊性」を分析し、また、戦後日本の民主主義の限界や問題点について批判的に検討したものである。 戦後日本の民主主義は、戦前の絶対主義天皇制の連続線上で成立したものであるが、連合国の占領下において日本国民の天皇制の維持に対する支持があって可能なものであった。つまり、日本国民は敗戦という「自然状態」において君主制(天皇制)との断絶は避け、自律的な個人による新たな秩序を創り出せず、戦前の旧秩序を受容したのである。その結果、象徴天皇制と共に旧秩序の「臣民的エトス」が温存されるようになった。 天皇制という一種の君主制が維持されたことで、戦前の天皇制の価値体系を払拭しえない状態で戦後民主主義が成立したため、民主主義としての限界と問題点を内包するようになった。戦前の天皇制の下で形成された支配原理が、深層的な次元で戦後でも温存されることで齎されたものである。君主制を維持することで、君主制との対決を前提に、徳性を備えた市民の共同自治を目指す共和主義の理念が欠如されることとなった。これを本稿では「日本の特殊性」と名付けた。このように、共和主義の欠如された民主主義は、個人の自律性を抑圧するメカニズムを内在し、異質的なものを抑圧・排除し、同質的順応性と画一性を引き起こす。これは社会的少数派に対する排除と抑圧に繋がる。 最近、日本社会の保守化と共に登場する外国人(少数派)に対するヘイトスピーチなどは、未成熟な戦後日本の民主主義を背景にしたものと思われる。個人の自律性が欠如された民主主義は、公的な領域での自由が抑圧され、多数の名の下で戦前のファシズムやナチズムのような全体主義を登場させる可能性がある。近ごろ、安倍政権下で加速化された歴史修正主義を背景にする右傾化ないし保守化は、このような点で憂慮すべき現象である。また、戦前の旧秩序の価値体制と断絶できなかった戦後日本の民主主義は、戦争の加害者としての主体的倫理も確立できなくなったと言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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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0원

본 논문은 오키나와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 사키야마 다미의 소설 『달은, 아니다』를 통해 역사적 트라우마의 문학적 재현과 서사의 정치에 대해 살펴 본 것이다. 전쟁과 패전, 점령 등 아시아태평양 전쟁과 관련한 여러 문제를 문학적, 사상적 과제로 삼아 왔던 전후 일본문학은 위안부 문제를 대단히 제한적으로 취급해 왔다.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과 대만, 필리핀 등 수많은 여성들에게 성 노동을 강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전시 하의 폭력이나 패전 이후에도 이어지는 식민주의, 제국주의에 관해 문제제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위안부 여성이 비중 있게 등장하는 작품에서조차, 이들은 군사적 지배나 식민성 비판, 위계적인 젠더구도와는 동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들 소설에 등장하는 위안부의 목소리는 단일화되어 있고 그들의 모습마저도 기호화, 정형화되어 있는 것이다. 일부 논의 가운데서는 문학 작품을 통한 위안부 기억의 분유와 트라우마의 극복, 애도 등이 비교적 긍정적으로 검토되어 왔지만, 기억의 분유와 애도의 전제가 되는 문학적 표상이 정형화, 대상화의 한계를 가진다면 문학적 서사 내부에 작동하는 ‘동일성’의 표상 정치에 관한 논의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사키야마의 소설은 위안부의 삶을 구체적으로 재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위안부에 대한 기록이나 기억, 서사에 관한 표상의 정치성을 다루고 있으며 위안부 서사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라는 측면에서도 커다란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작품 안에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환시와 환청이 단속적으로 개입하고 있지만 한 가지 주제만큼은 일관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기록이나 기억에 내재하고 있는 동일성의 정치와 폭력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제기다. 본고에서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기록과 목소리, 그리고 그것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인물들의 입장 등을 정리하면서 위안부 재현에 관한 기억의 경합과 억압, 투쟁 등에 대해 고찰해 보고, 역사적 트라우마의 수용과 그 의미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았다.

The present dissertation examines the comfort women narrative and the politics of representation through Okinawan author Sakiyama Tami’s novel Tsukiya, Aran. Postwar Japanese literature took several issues related to the Asia-Pacific War including defeat and occupation as its literary and philosophical task but has dealt with the comfort women issue very restrictively. Despite forcing numerous women in Asia including Korea, China, Taiwan and the Philippines to do sexual labor, the Japanese rarely ever posed the problem of violence during the war or of colonialism and imperialism that even followed after defeat. Even in works where comfort women play a large role, they are placed far away from military domination, colonial criticism, or a hierarchical gender composition. The voice of comfort women in these novels are uniform and even their appearances are signified and stereotyped. Some discussions have a relatively positive assessment of sharing the memories of comfort women, the overcoming of trauma, and mourning, through literary works, but if literary representation, which is assumed for carrying out the sharing of memories and mourning, is restricted in terms of stereotypes and objectification, then the discussion on the politics of representation involving ‘sameness’, which works within the literary narrative, is an area that cannot be neglected. Sakiyama’s novel does not recreate the lives of comfort women in detail, but it deals with the political nature of representation in regards to records, memory, and narrative concerning comfort women, and suggests broad implications in terms of how to accept the comfort women narrative. Within the work, visual and auditory hallucinations, transcending time and space, intermittently intervene, but they are at least consistent as to one theme, which is the continuous problem posing of violence and the politics of sameness that is inherent within the memories and records. The present dissertation examines the political implications and dynamics inherent to the representation of comfort women by organizing the various forms of records and voices that appear in the novel, as well as the positions of the characters who accept and understand them.

本稿は崎山多美の小説 『月や、あらん』(なんよう文庫、2012)を中心に慰安婦をめぐる表象/再現(representation)問題について考察したものである。 戦後日本文学は戦争や敗戦、占領などアジア太平洋戦争と関連した様々な問題を文学的、思想的な課題としてきたが、慰安婦問題に関しては積極的に扱ってこなかった。韓国をはじめ、中国や台湾、フィリピン、インドネシア、オランダなど、多くの女性に戦時性労働を強制したにもかかわらず、彼女たちが戦時下の暴力や敗戦後もつづく植民地主義、帝国主義に関して問題提起することはほとんごなかった。慰安婦女性が主要な登場人物として描かれる作品ですら、彼女たちは植民地支配や軍事システム、差別的なジェンダー構図からかけ離れたところに位置していた。慰安婦女性は単に性的なイメージを想像させる身体として描かれ、また彼女たちの声も単一に統一され記号化される場合が多かった。「過去」はいかに想起され、表象され、また共有されるかという問題から考えると、「過去の記憶」と現在を媒介する文学のなことば、表象のことばは非常に有用な意味をもつ。つまり、表象/再現の内部に働く「同一性」をめぐる政治に関する検討は慰安婦問題を考えるうえで決して看過してはならない課題でもある。 崎山多美の小説『月や、あらん』は、慰安婦女性を具体的に描いた作品ではないが、慰安婦に関する記録や記憶における「語りのポリティクス」を扱っている。時空間を超越する幻視や幻聴が断続的に介入するなかで小説は展開するが、一つのテーマだけは一貫している。それは記録や記憶に内在している「同一性」の政治と暴力、そして表象不可能性を経由した表象の問題である。本稿では小説のなかに登場するさまざまな形の記録と声、そしてそれらの記録や声を読んでいく人物たちの立場を中心に、慰安婦をめぐる表象の政治学、語りのポリティクスなどについて考察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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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본사상사학회 회칙 외

한국일본사상사학회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0호 2016.06 pp.293-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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